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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그릇 앞에서
이규진(편고재 주인)
경주에는 신라만 있고 고려나 조선은 아예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더러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느니 신라의 유적이요 유물들뿐이니 그럴 만도 한 일이다. 하지만 경주라고 해서 어찌 고려와 조선이 없으리요. 다만 신라 천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다 보니 아무래도 고려와 조선의 역사는 그 그늘에 가려 미미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가뭄에 콩 나듯이 보이는 고려나 조선의 유물을 보면 신기해 보이기조차 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분청사기에 경주를 의미하는 유물이 남아 있어 남다른 관심을 끌 경우가 있는데 경주장흥고나 경주인수부 등의 관사명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분청에 관사명은 왜 들어가는 것일까. <태종실록> 17년 4월조에 보면 장흥고나 사옹방에 공납되는 사기들에 대한 폐해가 거론되고 있다. 말하자면 공납용 도자기들 중에는 중간에서 분실되는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에 따라 1417년(태종 17년) 이후부터 분실을 방지하기 위해 상납되는 자기에는 관사명을 새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사명으로는 공안부 경승부 인수부 덕녕부 사선서 장흥고 내섬시 내자시 예빈시 등이 있는데 이런 관사명들은 영남지방에서 많이 사용된 가운데 호남에서는 내섬이 충청 지역에서는 예빈이 주로 보이고 있다. 이에서 보듯이 관사명은 주로 영남지방에서 활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이 지역에서는 또 관사명과 더불어 지방명도 함께 보이고 있는 것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강경숙 교수가 정리한 자료를 보면 지방명은 40여 곳이 보이는데 이중 31곳이 경상도라고 하니 이 지역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관사명과 관련해 경주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는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내태리에 있는 분청사기 도요지다. 내태리는 경주에서 한 20여리 떨어진 곳인데 마을 뒤편의 동산을 가로질러 넘어가는 소로가 보이는데 도요지는 바로 길을 내며 잘려 나간 바로 그 곳에 위치한다. 하지만 아주 오래 전 방문했을 때 보니 이곳에서는 도편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도편을 본 것은 오히려 도요지 아래 동산 기슭과 밭이 면한 사이에 작은 도랑이 있는데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당시 본 것으로는 경주장흥고 등이었다. 그런데 경주장흥고는 박물관이나 시중에서 보이는 온전한 실물이든 손상된 도편이든 이상하게도 글자를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뒤섞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왜 이처럼 순서를 무시하고 뒤섞어 혼란스럽게 해 놓은 것인지는 아무래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내태리 분청사기도요지에서 주목되는 것은 물론 경주장흥고다. 경주라는 지명이 확실하고 장흥고라는 관사명이 뚜렷하니 공납용 도자기를 굽든 도요지를 증명하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태리와 관련해 더 관심을 갖는 것은 경주(慶州)명만 있는 분청경주명대접편이다. 남아 있는 부분을 보면 연판문을 돌린 내저 한 가운데에 우점문과 더불어 큼직하게 백상감으로 경주명이 들어 있다. 글자만 해도 6x5Cm이니 지방 명으로 이만한 크기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굽 안에 비짐돌받침의 흔적이 보이고 외면으로는 우점문의 흔적이 보이는데 깨어져 달아난 부분이 살아 있었더라면 장흥고나 인수부가 들어 있지는 않았을까. 실제 그런 유형의 분청완이나 접시 등이 현존하고 있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경주에는 신라만 있고 고려나 조선은 아예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더러 있다. 내태리에서 분청을 만들던 도공도 그런 느낌이었을까. 따라서 나는 조선의 경주에 살고 있는 도공이다 하는 뜻에서 분청 대접에 경주명을 크게 새겨 넣은 것일까. 물론 그런 일이야 없었겠지만 경주하면 하도 조선의 색채가 엷다보니 조선의 그릇인 분청경주명대접편 앞에서 엉뚱한 생각마저 해보게 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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