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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9)
철화백자병편

특집부
기사입력 2021.11.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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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세월 그 시절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추석연휴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고향엘 함께 가야할 집사람과 아들은 학교가 다음 날부터 쉬기 때문에 출발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연휴인지라 밖은 떠들썩한 분위기인데 혼자 있자니 무료하고 해서 집을 나섰다. 강남터미널에서 대전행 고속버스를 탄 것은 오전 9시경. 하지만 연휴는 연휴인지라 차들로 고속도로가 만원이었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버리고 지방도로를 이용하는 등 편법을 동원했으나 교통체증을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대전터미널엘 도착한 것은 오후 1시경. 점심을 먹고 동학사행 버스를 타고 목적지인 학봉리엘 도착하니 벌써 하루해가 많이 기운 오후 3시경이었다.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에 위치한 학봉리 도요지는 철화분청으로 일찍부터 유명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동학사에서 흘러내린 학봉천과 계룡산에서 발원한 용수천 주변에 15기의 가마터가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도 3~12호는 학봉천과 용수천이 만나는 삼각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5호를 중심으로 1927년 조선총독부의 의뢰를 받아 노모리 타다시(野守健)와 소속 직원들에 의해 발굴이 되었으며 1929년 보고서가 발간되기도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이자 일제강점기 시절의 유일한 가마터 발굴조사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자못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은 1992년과 93년 국립중앙박물관과 호암미술관 공동으로 재발굴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따르면 계룡산 가마터에서 철화분청이 만들어진 것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데 분청이 점차 쇠퇴하며 백자 위주로 이행되다 16세기 중반경 가마가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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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신문] 철화백자병편(편고재 소장) 현고x굽지름 5.5x4.5Cm

     

    학봉리엘 도착한 나는 학봉천 우편의 마을부터 찾았다. 이곳은 민가와 산 사이 밭고랑 등에서 흔적을 볼 수 있는데 후일 15호 요지로 명명된 곳이다. 하지만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개발이 되는 등 훼손이 심해 아주 작은 도편밖에 보이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살피다 보니 밭에 면한 산사면에서 마을 어른들이 나무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인들도 어릴 적에 일본인들이 드나들던 이야기 등을 흥미롭게 들려주었다. 그런데 추석연휴도 잊고 가마터나 기웃거리는 내 행색이 안 돼 보였는지 어른 한 분이 교회 돌담 위에 도편을 얹어 놓은 것이 있으니 가보라고 일러주었다. 학봉리를 찾다보면 우측 마을 입구에 아주 예쁘게 생긴 교회가 보이는데 그 돌담 위에 도편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신이 나서 달려가 보았다. 그러나 돌담 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어른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돌담을 지나 밤나무 밑을 살펴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또 다시 달려가 밤나무 밑을 살펴보았지만 도편은 이번에도 보이지 않았다. 웬만하면 포기하고 말았으련만 나는 다시 어른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하던 일손을 멈추고 어른이 앞장을 섰다. 교회 옆에 민가가 있고 이곳에는 별도로 흙벽돌로 쌓아 만든 화장실이 있었는데 도편은 그 화장실 환기창에 놓여 있었다. 어른은 앞장을 서기 전까지만 해도 도편을 내게 주고도 싶고 안 주고도 싶고 마음이 헷갈렸던 모양이었다.


    당시 어른으로부터 얻은 도편은 두 점이었다. 한 점은 철화분청편이고 또 한 점은 철화백자병편이였다. 철화분청편은 조각이어서 형체를 알 수 없으나 매병으로 보이는데 전면을 철화로 장식하고 있다. 추상적인 느낌을 주지만 자세히 보면 풀과 잎과 꽃을 그렸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철화분청이야 학봉리 도요지의 특색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문제는 철화백자병편이다. 모래받침의 굽과 통통한 몸체 그리고 작게 마무리한 입술 등 유병 형태의 작은 병인데 전체를 휘돌아 철화무늬가 활달하게 장식되어 있다. 아쉬운 것은 입술이 손상되고 몸 전체가 정확히 반쪼각이 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반쪼각이 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병처럼 세우면 그대로 세울 수가 있는데 철화무늬와 어울려 앙징스럽고 귀여운 맛이 너무도 정겹기만 하다.


    그렇다고 하면 이 철화백자병편은 언제 만들었던 것일까.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학봉리 도요지 철화분청은 15세기 후반에 시작 16세기 전반까지 만들어 지는데 점차 백자로 이행되다 16세기 중반에 가마가 폐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철화백자병편의 하한선은 적어도 16세기 중반 이후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를 수가 있다. 철화백자 하면 우리는 흔히 17세기를 연상하게 된다. 임진왜란 후 청화가 귀해지자 대용으로 철화가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7세기 이전의 철화백자는 사실상 무척 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계룡산 도요지 출토품 백자 자료들을 찾아보아도 철화백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철화백자병편의 철화는 귀하기도 귀하지만 철화분청은 철화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 등이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추석연휴를 이용해 학봉리를 찾아 마을 어른으로부터 철화분청편과 더불어 철화백자병편을 얻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당시만 해도 고향을 함께 갈 수 있었던 집사람이 멀고도 먼 하늘나라로 가버린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고 초등학생이던 아들 또한 이제는 40대의 중년이 되었으니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흐른 셈이다. 그 많은 세월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 왔던가. 철화백자병편을 보고 있노라면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그 세월 그 시절이 마냥 아쉽고도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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