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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기원설은 ‘백설(百說)’로 표현된다. 많다는 뜻을 넘어 아예 너나 나나의 주장 모두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 주장은 두 가지의 방향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나는 처음부터 완성형인 ‘아리랑’으로 출현했다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점진적으로 아리랑으로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비유한다면 전자는 창조론이고, 후자는 진화론인 셈이다. 1960년대까지는 전자가, 이후 오늘날에는 후자가 다수설이다. 필자 역시 후자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단적으로 ‘완성형 아리랑’이 19세기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치 진화론에서처럼 현생인류와 똑같이 생긴 화석이 밑바닥층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과 같다. 지난 3회에서 살핀 충북 중원 지역 농요 ‘아라성’이나 이승훈(李昇薰, 1756~1801)의 ‘농부사(農夫詞)’에 나오는 ‘아로롱(啞魯聾)’이 그렇다. 본 회에서는 ‘아리랑’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하여 어원설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곡명으로서의 ‘아리랑’을 말하는 것이지, 곡조와 사설인 노래 자체를 말하는 ‘아리랑’이 아니라는 점이다.
1912년 총독부는 식민정책 수립을 위해 조선 내 민정을 조사했다. ‘민요·속담·이야기 등에 대한 조사[俚謠·俚諺及 通俗的 讀物等 調査]’이다. 전통문화 전반에 관한 전국 대상 조사로 각 도 도지사를 통해 각 군수에게, 군수는 다시 관내 초등학교 교장을 동원하여, 간접 조사를 하였다. 당시 식민제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의 선행 사례를 답습한 것으로, 조선 내에서 식민지 경영 정책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 궁극적인 정한론(征韓論)의 실천 방략으로 위장술인 문(文)을 가장하여 무(武)를 준비한다는 문장적 무비론(文裝的 武備論)에 입각한 것이다.
이 조사는 근대 사회과학 이론을 적용한 공식적인 민속조사 첫 사례이다. 이 중 민요 분야의 아리랑 조사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학계에 보고한 것은 1986년 김연갑의 ‘민족의 노래 아리랑’(현대문예사)에 수록함으로써인데, 전국 7개도(경상남도 제외) 조사 56편 아리랑 각편(各篇)이다. 이 조사에 수록된 곡명을 음가(音價) 표기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아리랑歌 ② 阿朗歌 ③ 아리랑打令 ④ 酒色界의 雜歌 ⑤ 어르렁타령 ⑥ 아르렁打令 ⑦ 어르렁타령 ⑧ 啞而聾打詠 ⑨ 아리랑타령 ⑩ 啞聾歌 ⑪ 阿朗歌 ⑫ 아르랑타령 ⑬ 아르릉타령 ⑭ 啞利聾打令 ⑮ 아리랑타령 ⑯ 어르렁打令 ⑰ 愁心歌 ⑱ 아르렁타령 ⑲ 아르랑打令 ⑳ 아르랑歌
이상과 같이 표음(表音) 상의 곡명이 총 20가지이다. ‘아리랑타령’과 ‘阿朗歌’, ‘어르렁타령’은 두 번 나오고, 나머지 14가지는 각기 다르다. 이 같은 현상은 1세대, 즉 30년 전후의 현상으로 보는데, 곡명이 지역마다 다르게 불렸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아리랑’이란 음가로 이행 단계임을 보여 준다. 오늘의 음가 ‘아리랑’을 쓴 경우는 네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이 시기부터 점진적으로 ‘아리랑’이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결과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라리’에 ‘ㅇ’음이 첨가될 필요가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는 농사법 중 이앙법(移秧法)의 일반화이다. 이앙법은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법(直播法)과 달리 모판(못자리)에서 싹을 틔운 모(육묘)를 논에 옮겨 심는 농법으로, 모내기 철 가뭄에 주의하여 많은 품(노동력)을 들여 일시에 심는다. 이런 특성으로 모심는 이들 간의 동작을 통일하고, 허리를 굽혔다 펴는 고됨을 덜기 위해 노래가 필요했다. 이 노래는 멕이고 받는 형식에서 후렴이 필수임으로 조흥(助興) 음소인 ‘ㅇ’음이 첨가되었다. 그 결과 ‘아라리’에서 아로롱·아라성·아르랑·아르렁·아르랑 등으로 음전(音轉),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고종 시대 7년간의 경복궁 중수(1865~1872)라는 역사적 배경이다. 이때 ‘아라리’가 공사장 부역꾼들에게 주고받는 노래로 불리면서 조흥음 ‘ㅇ’이 첨가되어 ‘아리랑’으로 전음되었다고 보는 주장이다.
두 가지 모두 개인적인 삶의 노래 ‘아라리’가 집단적인 노동요로 기능이 확대되면서 후렴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조흥 음소가 첨가되어 ‘아라리+ㅇ’이 되었다. 그리고 최종 완성형 아리랑으로 통일된 것은 1926년 영화 ‘아리랑’의 개봉으로 그 주제가가 전국화되면서 곡명에서나 후렴에서 ‘아리랑’으로 고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함에서 ‘아리랑’ 자체는 의미적 독자성을 갖지 못한다. 다만 ‘아리’나 ‘아라리’의 의미인 소리·노래·말이란 뜻이 있을 뿐이다. 극단적으로는 음소 ‘ㅏ’·‘ㅣ’·‘ㅇ’음의 결합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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