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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1)
백자음각지석편

특집부
기사입력 2021.10.0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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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규가 조인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규진(편고재 주인)


    지석(誌石) 중에는 도자기로 만든 것들도 있다. 이런 지석은 망자 본인을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표지인 만큼 무덤에 묻혔다가 발견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도요지에서 도편으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나는 몇 가지 의심나는 점이 있다. 즉 지석을 굽는 과정에서 불량품이 생기면 어떻게 조치를 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다시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원했던 날짜나 시기에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아예 불량품을 고려해 여분의 것을 함께 만든 경우는 없었을까. 여분의 것까지 온전한 것이 만들어졌다면 이때는 또 어떻게 했을까. 응당 여분의 것은 깨버렸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하지만 이런 내 추론이나 해결 방법은 현재로서는 증명할 만한 확실한 근거나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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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신문] 백자음각지석편(번천리 9호요지) 가로 10 세로 15Cm (편고재 소장)

     

    내게는 백자 지석편이 몇 점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번천리 9호요지에서 나온 것이다. 중부고속도로 경안 나들목을 빠져나와 무갑리로 향하는 길 초입에 위치한 것이 번천리 9호요지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상번천2리에 속하는 이 9호요지는 현재 밭으로 사용 중인데 그 옆으로는 개천이 흐른다. 따라서 개천에 면한 밭둑은 약간의 단애를 이루고 있는데 과거 흙이 무너져 내리면 더러 도편들이 보이고는 했었다. 후일 이대 박물관에서 발굴한 보고서를 보면 이쪽은 아마도 가마의 아궁이 쪽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백자음각지석편은 바로 오래전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지석편은 장방형의 평판인데 그 위의 글씨는 단정한 해서체의 음각이다. 원래는 여러 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다 일부 손상된 부분이 있다 보니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남아 있는 내용 중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보이는데 그중 인규(仁規)라는 이름이 눈길을 끈다. 이 인규가 조인규(趙仁規)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도자기와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조인규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양이며 미미한 가문의 출신이나 몽고어 통역관으로 출세해 충선왕의 장인이 되는 등 권문세가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사신으로 30여 차례나 중국을 드나들며 세조 쿠빌라이의 신임을 받아 원나라의 관직도 받는 등 그야말로 나라 안팎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고려사>에 보이는 화금청자와 관련된 이야기다. 한번은 조인규가 사신으로 원나라를 들어가 세조를 만나 화금청자를 받쳤다. 그러자 세조가 화금은 그릇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냐고 물었다. 단지 채색을 위한 것이라고 대답하자 세조가 금은 다시 쓸 수 있냐고 물었다. 자기는 깨지기 쉬운 것이며 금은 떨어지고 마니 어찌 다시 쓸 수 있겠느냐고 하자 세조는 그러면 이후로는 화금을 하지 말고 가져오지도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백자음각지석편에 보이는 인규는 이름만 보일 뿐 성이 안 보여 조인규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 하지만 조인규는 고려 후기 인물이며 이 지석은 조선 초기 것이니 개연성은 충분하다. 사실 지석은 망자 본인의 이력뿐이 아니라 선조들과 자손의 인적 사항 등도 기재되고는 하는 것이 상례이다. 이런 정황을 고려한다고 하면 이 백자음각지석편은 조인규의 후손인 그 누군가의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인규로 하여 조인규를 떠올리게 하고 화금청자도 생각나게 하는 백자음각지석편을 만난 번천리 9호요지. 이대 박물관에서 발굴 시 이곳에서 출토된 도편으로는 청화백자천마문항아리뚜껑이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백자 요지에서 이와 견줄만한 청화편이 발견된 예는 아직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디 나 뿐이겠는가. 몇 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청화백자들을 모아 전시를 할 때 보니 벽에 진열된 이 도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내 생각이 과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보는 관점은 대개 비슷한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번천리 9호요지 옆으로 흐르는 번천천은 남한산성에서 발원해 한강을 향해 흐르는 경안천의 지류다. 예전에는 물이 깨끗한데다 밤나무 그늘도 있고 인적도 드물어 여름이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가 물놀이를 하기도 했던 곳이다. 그럴 때면 초기 백자의 그 눈부시게 희고 깔끔한 도편들도 더러 만날 수 있어 흥미롭고는 했었는데 이제는 모두 지난 시절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백자음각지석편이 남아 그 시절 그 추억들을 떠올리게 하니 고맙고 감사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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