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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어 산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2003년 3월 16일 일요일 밤, 영월책박물관에 도둑이 들었다. 전시실과 서고를 뒤져, 한적과 양장본 등 모두 이백여 권의 책을 훔쳐갔다. 여기에는 『탐라별곡(耽羅別曲)』을 비롯해, 1539년에 출판된 『몽산화상대도보설(蒙山和尙大道普說)』 목판본과,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石潭日記)』 필사본, 『복무정종(卜正宗)』 목판본, 『경주최씨세계』 필사본 등의 한적이 포함되어 있다. 또 『황야에서』와 『아기네 동산』 등 양장본 다수와 개화기 교과서도 도난당했다. 이것들은 대부분이 귀중본으로, 이 중 필사본을 포함한 몇 권은 유일본이기도 하다.
내가 아끼던 책도 여러 권 있었는데, 『탐라별곡』도 그 중 하나다. 이 책은 정언유(鄭彦儒, 1687-1764)가 지은 한글 가사 필사본으로, 표제는 ‘정문침(頂門針)’이라고 되어 있다. 정언유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제주목사를 거쳐 호조참판을 지낸 인물인데, 이 가사는 영조 25년(1749)에 그가 제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제주를 소재로 지은 가사로 그의 친필본이다.
耽羅 掘都邑이 몇千年 基業인고
星主王子 긔난후에 物換星移 오라겨다
城郭이 고쳐시니 文物이들 녜랴
聖朝에 臣屬며 命吏을 리시니
조각 彈丸小島 大海에 잇
三邑을 화안쳐 솟발로 버려시니
山南은 兩縣이오 山北은 州城이라
土地는 긔얼마며 人物은 어 하니
이렇게 시작되는 가사는 모두 백이십 행 이백사십 구로, 제주에 대한 첫인상, 제주도민의 어려운 생활상,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목민관으로서의 다짐, 제주 경승지를 돌아본 감회 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복무정종』은 인조(仁祖)의 수택본으로 ‘송창(松窓)’ ‘보우명지(保祐命之)’ 등 여섯 종의 낙관이 찍혀 있다. 『경주최씨세계』는 1800년대에 한글 궁체로 씌어진,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진 가승보(家乘譜)로 필사본이다. 아버지가 시집가는 딸에게 만들어 준 친정의 족보다.
『황야에서』는 1922년 김영보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집으로, 장정도 저자 자신이 했다. 「나의 세계로」 「시인의 가정」 「정치삼매」 「구리십자가」 「연(戀)의 물결」 등 모두 다섯 편의 작품들이 실려 있는데, 전통인습 타파라는 매우 진보적인 도덕관을 제시한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장정가가 알려진 단행본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다. 따라서 출판미술사적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사진 101)
『아기네 동산』은 1938년 임홍은(林鴻恩)이 자신의 글을 포함한 여러 작가·작곡가의 동화·동요·곡보(曲譜) 등을 편찬한 아동도서로, 그가 직접 표지화와 삽화도 그렸다. 표지 그림은 꽃과 나비, 잠자리 등을 의인화한 것으로,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노랑·연두·분홍·파랑 등의 밝고 경쾌한 색으로 꾸몄다. 면지·목차·서문·본문도, 표지 못지않게 다양한 삽화·문양·타이포그래피로 정성을 들였다. 주로 펜으로 그린 선화(線畵)나 수채물감으로 옅게 채색한 그림들로, 그 내용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삽화가 아흔아홉 컷에 이르는,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진 책이다.(*사진 102)
위와 같은 책들이라면 누구의 손에 들어가든 애장서로 대접받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이 정도의 희귀본이라면 어디에서 누가 소장하든지 언젠가는 공개될 수밖에 없다. 머지않아 그 책을 훔쳐간 자가 누구인지는 세상에 밝혀질 것이다. 나는 그 책들을 언제 어디서 보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자료들을 사진과 글로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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