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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 이후 많은 조선인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1900년대 초 연해주 인구 20%가 조선 출신이었다. 러시아인은 그들을 ‘한국의’ ‘한국적인’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카레이스키’(корéйский)로 불렀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소련이 탄생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카레이스키와 일제의 내통을 의심했다. 1937~39년 연해주의 카레이스키 17여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카레이스키는 새 터전에서도 논농사를 지었고, 조선의 생활문화를 이어갔다.
1989년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동유럽 공산정권이 연쇄 붕괴했다. 불똥이 소련으로 튀었다. 90년 3월 리투아니아, 91년 4월 조지아가 차례로 독립했다. 8월에는 에스토니아(20일), 라트비아(21일), 우크라이나(24일), 벨라루스(25일), 몰도바(27일), 키르기스스탄(31일)이 하루가 멀다고 뒤를 이었다. 같은 해 12월 12일 러시아마저 독립했다. 16일 카자흐스탄 독립을 끝으로 소련은 사라졌다. 독립한 국가마다 민족주의가 창궐했다. 카레이스키가 많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도 그랬다. 카레이스키 입지는 좁아졌다.
재일 소설가 이회성은 1935년 러시아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황해도 출신인 부친이 이주 탄광 노동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정착했다. 그는 72년 한국인 최초로 아쿠타가와(芥川)상을 받았다.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 사할린과 연해주, 중앙아시아를 돌며 카레이스키를 취재했다. 92년 펴낸 장편 소설 『유역』(流域)이 그 얘기다. 남북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현지인도 한국인도 아닌 제3의 정체성. ‘자이니치’(在日) 이회성에게 카레이스키는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이었다.
정부는 1988년부터 카레이스키의 한국 국적 회복이나 영주 귀국을 허용했다. 이른바 ‘150년 만의 귀향’이다. 경기 안산시 땟골마을, 광주광역시 고려인마을이 이들의 집단 거주지다. 많은 카레이스키가 여전히 현지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2010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독거노인이 된 1세대 카레이스키 보호시설 ‘아리랑 요양원’이 개원했다. 시설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자 최근 정부가 긴급 의료 지원에 나섰다. 잘한 일이다. 그게 나라다. 다만, 권력자 말 한마디 대신 국정 시스템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건 더 좋은 나라다.(중앙일보 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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