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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인명무전’ 110회를 맞았다 (박동국)박동국/동국예술기획 대표 올해 ‘한국의 명인명무전이’ 110회를 맞는다. 17일 18일 2일간 오후 7시 30분에 국립국악원 예약당에서 막을 올린다.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전통예술인의 전통춤과 소리의 계보를 이어왔고, 수많은 관객들과 만났다. 지난 1990년 11월 첫 무대를 연 ‘한국의 명인명무전’이라는 이름으로 국립국악원 무대에서 판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그 흔한 전통예술 공연무대의 하나, 그저 고만고만한 전통무대의 하나로 일반관객은 물론 전통예술인들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 무대가 어느덧 34년 동안 110회에 이르렀다. ‘우리 전통의 원형보존과 전승’이라는 전통가치를 표방하며 우리춤의 뿌리를 지켜오는 가운데 춤과 소리의 절대적 예술성을 추구, 무대 위에 승화시켜 온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이제 하나의 전통예술무대 브랜드로 굳혀져 왔다. 한국 전통무대 현대적 계보의 축, ‘한국의 명인명무전’ ‘한국의 명인명무전’ 110회를 이어오는 동안 조선 시대의 마지막 무동인 명무 故 김천홍 선생을 비롯하여 한 시대의 전통예술을 대표하는 판소리 명창 故 박동진 선생, 명무 故 김계화 선생, 일인창무극 故 공옥진 선생, 명무 故 이매방 선생, 배뱅이굿 故 이은관 선생, 여창가곡 故 김월하 선생, 가야금병창 故 박귀희 선생 등, 우리 전통예술의 전설적인 별들이 바로 이 무대 위에서 명멸해 갔다. 무형문화재 보유자와 제자들이 34년 역사의 깃발을 세우고 민속문화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한때 문화재청 산하기관에서 주관한 '인간문화재 대전', '무형문화재 대전'라는 무대는 지금은 전승주체들의 대(代)가 희박해져 가는 실정에서 세우기가 쉽지 않는 편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명실공히 전통예술의 대통을 이어가는 무대로 널리 알려졌다. 전통무대 신예와 중견, 원로가 함께 명맥을 이어온 무대 150여 개 종목 국내외 공연장 70여 지역 종횡무진 연인원 3,000명 연희자 출연진 대기록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발표 무대가 넉넉하지 않은 전통예술인들의 활동무대를 넓혀왔다. 신예와 중견 그리고 원로 예술인이 한 무대에서 과거와 현재, 내일의 꾸준한 맥을 잇는 전통무대의 모델이 되어왔다. 그동안 3,000여 명의 원로와 중견, 신인들이 이 무대 위에서 예술혼을 불살랐으며 150여 개 종목의 전통춤과 소리가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던져주며 우리 춤사위와 소리의 향연을 펼쳐왔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를 비롯해 해외(일본, 중국, 몽골, 미국, 하와이) 무대에서도 우리 민족문화예술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꾸준하게 알려 오고 있다. 공연의 역사 속에 함께 했던 예술인들만 연인원 3,000여 명에 달하며 공연장만 해도 국내외 70여 개 극장에 이르고 있다. 동국예술기획 창립 34주년, 110회 '영상+춤+뮤직' 콜라보레이션 동국예술기획 창립 34주년 기념하는 제110회 ‘한국의 명인명무전’ 무대는 보다 더 이색적인 콜라보레이션 공연을 선사한다. 이번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동국예술기획 창립 34주년 기념 제110회의 각별한 의미를 더해 이색적인 콜라보 형태의 축시낭송과 영상, 춤이 음악으로 변주되는 입체적인 춤사위로 관객들과 만난다. '이매방류 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정명숙(1935년생)선생, '애기무' 인간문화재 김광숙(1944년생)선생, '강선영류 태평무' 인간문화재 고선아 선생, '호남산조무' 인간문화재 이길주 선생, '정대석제 거문고 산조' 서울대학교 국악과 교수 역임 정대석 선생, '쌍사자무' 남예종 석좌교수 최창주 선생, '박병천류 진도북춤' 김진옥 선생, '이매방류 승무' 전승교육사 김묘선 선생, '살풀이춤' 단국대학교 교수 김지원 선생, '김평호류남도 소고춤' 김평호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 등 원로와 중견 무용가 70여 명이 출연한다. '이매방류 살풀이춤' 무대에서는 명고 김청만(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보유자)선생이 라이브 음악반주를 하여 이 행사의 대미를 장식한다. 한편, 특별한 날의 의미를 담아서 전국시낭송대회 13관왕 수상한 김숙희의 축시 낭송으로 시작된다. 전무후무한 ‘한국의 명인명무전’ 34년 기록 국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동국예술기획은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식 연출기획과 조흥은행 창립 99주년, 일본 오사카 민단 50주년, 광주MBC창사 30주년, KBC광주방송 창사 개국 판소리 다섯마당 기획연출, SBS사극 서동요 음악 연출 등을 기획해 왔다, 특히 1999년 광주에서 한국 최초로 광주전남 '남도전통예술인추모제'로, 국창 송홍록· 박유전· 임방울· 김창조등 국내 명인명무 117명 위패봉안과 더불어 씻김굿과 판소리, 구례향제줄풍류, 창작국악실내악, 사물놀이, 한국무용, 인문학 콘서트 시와 노래가 춤을 만나 향기를 배접하다, 등을 연출기획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악인 개인별로 추모제 행사가 있어 왔지만 국악계 사상 처음으로, 대규모의 합동추모제가 열린 것은 처음이기도 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 국악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남도출신 국악인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해 볼 필요성을 느껴 오랜 시간 행사를 준비했다. 동국예술기획은 '홀로아리랑' 처럼 전통예술의 맥을 찾는 작업을 추구해 온 민간 기획사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자타공인 일등으로 매진해왔다고 자부한다. 1990년 이후 지금까지 정부 기관이나 자치단체의 지원 없이 제110회 ‘한국의 명인명무전’과 제50회 ‘한국의 소리와 몸짓’ 공연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2014년 3월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제2회 대한민국 기록문화대상 리더십 수상과 2015년 9월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대한민국을 빛낸 한국인물대상과 2017년 12월 8일 대통령 표창장을 수상하며, 2018년 5월 1일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전문위원으로도 위촉되어 활동했다. 다가오는 17일 전통문화예술을 전수하시는 명인명무을 모시고 무형문화유산의 정수리를 향해 '민족의 춤'으로 승화한 무대가 신명과 감성을 관객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박동국(예술경영학 명예박사)이 예술총감독을 맡고 해설을 한다. 구성기획을 맡은 정지희의 영상으로 진행된다. 5월 17일(수) 첫째날(명인명무전) 1. 축시나송 / 김숙희 (전국시낭송 대회 13관왕) 2. 호남산조춤 / 조용주 (호남산조춤 이수자) 3. 초립동 / 박야림 (대전 살풀이춤 이수자) 4. 살풀이춤 / 김지원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5. 김계화류교방굿거리춤 / 강혜숙 (호남살풀이춤 이수자) 6. 진쇠춤 / 박소정 (박소정 무용단 예술감독) 7. 김란류쌍수건춤 / 최은정 (목원대학교 교수) 8. 김평호류남도소고춤 / 김평호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외 6명 5월 18일(목) 둘째날 전무후무(前無後舞) 1. 강선영류 태평무 / 고선아 (인간문화재) 2. 예기무 / 김광숙 (인간문화재) 3. 호남산조춤 / 이길주 (인간문화재)외 10명 4. 정대석제 거문고산조 / 정대석 (서울대학교 국악과 교수역임) 장고/김청만 (인간문화재) 5. 최창주류 쌍사자춤 / 최창주 (남예종 석좌교수)외 4명 6. 이매방류 승무 / 김묘선 (승무 전승교육사)외 5명 7. 이매방류살풀이춤 / 정명숙 (인간문화재), 장고/ 김청만(인간문화재) 8. 박병천류진도북춤 / 김진옥 (정민류 교방춤보존회 회장)외 6명 반주 장고/김청만(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보유자) 피리.징 /한세현, 대금/ 원완철, 아재 / 배련, 거문고/이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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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소당(養素堂) 표지판을 보고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장)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안내문을 써서 종가 사랑채 앞에다 표지판을 세웠을까?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그 주체는 경상북도일 것이고 안동시에 있는 문화재이니 안동시도 그 당사자일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인 종손과 동성마을에 사는 일족들도 ‘읽어보지 않아서 몰랐다’는 정도로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갑작스럽게 이런 민망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안동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종가 중의 한 곳인 안동 김씨 대종택인 ‘양소당(養素堂)’의 안내 표지판에 단순한 오자(誤字) 수준이 아닌 몇 가지의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서다. 물론 글을 쓸 때는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잘못이 있을 수는 있다.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안 짖는다’는 속언까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금석문에 버금가는 지정문화재 안내판은 그 경우가 다르다. 권위에 따른 파급효과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담긴 내용은 물론 글자 한 자까지도 신중을 기해야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쳤더라도 잘못이 발견되면 즉시 이를 시정해야 한다. 먼저 현재 종택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영문 생략). 安東金氏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5호) 김씨 종택은 조선 전기 때 문신이었던 양소당(養素堂) 김영수(金永銖, 1446∼1502)의 종갓집이다. 이 집이 위치한 소산리는 김영수의 할아버지인 김삼근(金三近, 1390-1465)이 15세기경에 입향한 이래 안동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김영수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였고, 음서로 벼슬에 나가 의금부 도사, 사헌부 장령,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김영수의 아들은 평양부 서윤을 지낸 김번(金璠, 1479∼1544)이고 고손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이후 김영수의 후손들은 조선 후기 최대의 문벌로 성장하였다. 안동 김씨 종택은 ‘ㅁ’자형의 기와집으로 남서향이다. 대문은 없으며 사랑채와 중문간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각각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왼쪽의 안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는 왼쪽에 방을 두었고, 오른쪽은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사랑채와 대청 사이에는 들문을 달아 필요할 때 공간을 넓힐 수 있게 하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필자 또한 『안동의 문화재』 라는 책을 몇 차례 간행한 터라 안내판의 잘못된 내용을 본 뒤 돌아와 얼른 책을 펼쳐보았다. 1996년 간(刊), 미흡한 내용이었지만 현행 안내판의 오류는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더욱 안도한 것은, 문화재 안내란에 김삼근(金三近)-김계권(金係權)과 그 아랫대인 학조(學祖, 出家), 영전(永銓, 司憲府 監察), 영균(永勻, 進士), 영추(永錘, 水原府使), 영수(永銖, 司憲府 掌令) 오형제, 그리고 영(瑛)과 번(璠), 순(珣) 삼형제까지 간략하나마 계보(系譜)를 표로 만들어 소개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계권의 동생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도 빠뜨리지 않았다. 보백당은 안동 김씨 가문의 최초 문과 급제자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다. 필자 역시 "이 건물은 성종 때의 명신 양소당 김영수 공의 종가댁이다.”라고 소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동 김씨 대종중 사무총장의 자문을 받은 뒤 그저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졌다. 안내판을 포함한 그간의 소개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양소당 김영수’라고 썼기 때문이다. ‘양소당(養素堂)’은 김영수의 12대손으로 삼당 김영과 창균 김기보로 이어지는 소산 안동 김씨 대종가의 종통을 이은 인물인 동야(東埜) 김양진(金養根, 1734-1799)이 특별히 종갓집의 당호(堂號)로 그렇게 지은 것인데 말이다. 가장 큰 잘못 만을 우선 잡아서 안내판의 첫 문장을 다시 쓴다면, "이 집은 안동 김씨 대종택으로, 시조의 11세인 장령공 김영수가 처음으로 지었다. 그의 12세손 동야 김양근에 이르러서 당호(堂號)를 ‘양소당(養素堂)’이라 명명하였다.” 정도가 될 것이다. 시급히 수정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 다소 장황하게 예전에 펴냈던 책 내용까지 들춰낸 것은, 안내판에서 안동 김씨 종가를 소개하면서 김영수의 삼형제 가운데 둘째인 김번(金璠) 만을 들어서 ‘최대의 문벌’로 성장했던 그의 후대를 이 종가가 잇고 있다고 표현해 계보상의 중대한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는 ‘환부역조(換父易祖)’다. 의당 장남인 삼당공(三塘公) 김영(金瑛, 1475∼1528)을 소개한 뒤 특히 현달(顯達)했던 둘째 서윤공(庶尹公) 김번(金璠)과 그 직계 후손들로 이어갔어야 했다. 이쯤에서 정리한다면, 안동 김씨 종가는 삼당공이지 서윤공의 종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청백(淸白)으로 전가(傳家)한’ 안동 김씨 가문에서 서윤공(庶尹公) 김번(金璠)과 그 후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김번은 중종8년(1513)에 35세로 문과에 급제해 전적, 경기도사, 이조정랑, 평양서윤, 시강원 문학 등 직을 지낸 뒤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직에서는 탁월한 경륜(經綸)을, 외직에서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전범(典範)을 보이는 등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 후손들 가운데 문과 급제자 162분, 생원 168분, 진사 236분, 16분의 정승, 55분의 판서, 8분의 대제학, 3분의 왕비를 배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종가는 특별한 경우(養子)가 아니라면 맏집으로 내려오는 것이 상례다. 그렇다면 김영(金瑛)이란 분은 도대체 어떠했기에 이처럼 종가 안내문에서 완전히 빠졌고, 그 후손들 또한 전혀 소개되지 않았을까? 삼당공 김영은 김영수의 장자(長子)로서 학덕은 물론 관료로서의 업적까지 두루 갖춘 분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후손들은 반가(班家)의 전통을 수립해 안동 소산(素山) 본향(本鄕)을 지금까지 잘 지켜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21세에 생원과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한 뒤 병인년 별시(연산군12, 1506) 때 32세로 문과에 급제했다. 4살 적은 서윤공보다 7년 전에 이룬 대과 급제였다. 그 뒤 수찬, 정언, 교리, 김제군수, 장령, 동부승지, 강원도 관찰사를 두루 지냈다. 삼당이 급제한 문과는 연산군 당시에 치러진 마지막 대과였는데, 동방(同榜)으로는 김안로(金安老, 壯元)가 있다. 삼당은 무오사화(戊午史禍)를 당한 분들의 억울한 죄를 회복시켜 줄 것을 상소하는 등 바른 일에 앞장섰던 강직한 선비요 관료로 살다가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삼당공과 그 아우인 서윤공은 모두 문과에 급제해 삼당공은 청풍계(淸楓溪), 서윤공은 장의동(莊義洞)으로 나누어 살다가 후일 삼당공은 직계 자손에게 이 터를 물려준 뒤 이곳을 떠나 안동 본향으로 귀거래(歸去來)했다. 삼당공의 후손 가운데 저명한 이로는, 손자에 창균(蒼筠) 김기보(金基報, 1531∼1588)가 있는데, 그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의 사위로 학문과 행검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선 후기의 인물로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이 있는데 30세에 문과에 급제해 형조참의를 지내는 등 조야(朝野)에 널리 드러났다. 이렇기 때문에 결코 본향을 지킨 맏집이 종가 안내에서 누락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삼당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소산(素山)을 중심으로 한 안동에는 서윤공 직계 후손들이 단 한 집도 세거(世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억울한 형님에다 답답한 후손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지적할 부분은, 앞의 사안에 비하면 다소간은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알만한 이들조차 잘못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까 해서다. 안내판의 내용 중 ‘고손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예조판서 김상헌’ 부분이다. ‘고손’은 ‘고손(高孫)’이라고 쓴 것일 터. 서윤공 김번의 고손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고손’은 ‘현손(玄孫)’이라고 쓰는 것이 바른 표기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조(高祖)와 상대적인 고손(高孫)으로 쓸 수 있으니 잘못이 아니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사랑방에서 들은 것만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상당한 근거가 있다. 예를 들어 보이겠다. 『명재유고』 번역본의 주(註)에 보면, ‘문숙공(文肅公)’을 설명하면서, "시조 윤신달의 고손(高孫)인 윤관(尹瓘)으로, 문숙은 그의 시호이다.”라 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번역본 주석에서도 또한 "서영보(徐榮輔)가 서종태(徐宗泰)의 고손(高孫)이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라 했다. 권위 있는 서책에조차 고손이라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아래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권7 「문자부(文字部)」에 나오는 내용이다. "무릇 고조(高祖)라는 것은 고대(高大, 높고 큼)에서, 현손(玄孫)은 현원(玄遠, 아득하고 멈)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高祖)는 있어도 고손(高孫)은 없고, 현손(玄孫)은 있지만 현조(玄祖)는 없다. 그래서 지금 현조(玄祖)니 고손(高孫)이니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凡稱高祖者는 取其高大之義요 玄孫者는 取其玄遠之義라 故語曰有高祖 而無高孫이요 有玄孫 而無玄祖니 今謂玄祖高孫者는 誤矣라)” 첨언한다면, "김영수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였고, 음서로 벼슬에 나가 의금부 도사, 사헌부 장령,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란 부분에서 음서(蔭敍)를 주석으로 처리해 안내문 하단에 작은 글씨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공을 세웠거나 높은 벼슬을 한 양반의 자손을 과거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라는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오늘날의 별정직 공무원과 같은 것이나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영천군수는 영천군수(榮川郡守)인지 영천군수(永川郡守)인지 분명하지 않다. 장령공 김영수는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 한자로 병기(倂記)했으면 좋았을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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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산 한국의 서원’, 소수서원 박물관 안내문, 소홀하다.필자는 몇 해 전부터 여러 번 ‘괴헌고택(槐軒古宅) 기증유물 전시’를 관람한 바 있다. 올봄에 또 안내를 맡게 되어 다시 찾았다. 소수서원 본 전시실의 주요 전시물이 복제 또는 모조품으로 대체 전시되고 있는 것에 비해 이곳 기증유물 전시관은 그래도 그 대부분이 진품이라서 보기에 좋았다. 필자는 순흥(順興)이 고향임에도 소수박물관에서는 단 한 번도 국보 제111호인 안향 초상이나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초상 진품을 배관(拜觀)한 적이 없다. 나만 그런가 싶어, 1938년생으로 순흥향교 전교(典校)까지 역임한 유림 지도자인 가친에게 여쭈어도 본 적이 없으시단다. 영주문화원장을 지낸 계부(季父) 또한 그러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국보요 보물이란 말인가? 이처럼 소수박물관 전시실에는 조잡한 형태로 복제된 안향과 주세붕의 초상화가 조명을 받은 채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괴헌고택은 조선 정조 때 벼슬을 한 괴헌(槐軒) 김영(金瑩:1765∼1840)이 정조3년(1779)에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집인데, 1985년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5호로 지정된 영주 지역의 대표적 반가(班家)이다. 초입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통영대갓과 고색창연한 당시 관복 그리고 주인공 김영의 문과급제 교지는 여러 번 보아도 물리지 않는 명품들이다. 선비상에 가지런하게 펼쳐진 절첩본(折帖本) 형태의 가승(家乘) 또한 놓칠 수 없는 보완품(寶玩品)다. ‘가승’이란 족보의 한 형태로 혈통적 근원과 그 내력을 직계조상을 중심으로 밝힌 책 또는 문건이다. 펼쳐진 가승은 잔글씨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아주 간략한 정보만 담고 있어서 집안의 내력을 살피기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그 옆으로 연안(延安) 김씨(金氏) 1세(世)부터 현재 26세(世)까지 도식화해 컬러 출력물로 큼직하게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고맙게도 그곳에는 주인공들의 생몰년은 물론 누구의 몇째 아들, 자(字), 호(號), 과거(過擧) 이력, 역임한 주요 관직, 배위(配位)의 관향(貫鄕)까지 망라(網羅)해 두었다. 이 가문의 중심인물인 김경집(金慶集)과 김영(金瑩) 부자로 시선이 옮겨갔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몇째 아들이라고 쓴 부분이 ‘제이자(弟二子)’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제이자(第二子)’가 바른 표기다. 문제는 그 한 곳만 잘못된 것이 아니다. 10여 곳 모두 그렇게 표기되어 있었다. 문제다 싶어서 좀 더 자세히 읽어보았다. 짐작대로 김경집(金慶集)의 자(字)는 ‘형중(亨中)’이 아닌 ‘향중(享仲)’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는 ‘통정대부(痛政大夫)’로 괴헌의 8대조인 10세 김복흥(金復興)의 배위인 ‘함양(咸陽) 박씨(朴氏)’는 ‘성양(成陽) 박씨(朴氏)’로 잘못 표기하고 있었다. 한두 군데라야 어쩌다 있을 수 있는 잘못이라고 이해라도 할 터인데, 이쯤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몇 년 동안 이대로 전시되고 있는 현실 앞에 더 꼼꼼하게 읽는 일은 이제 필자의 소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만두었다. 이곳은 진작 ‘선비의 고장’이란 자긍에 더해 근자에는 소수서원이 유네스코로 측부터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까지 등재되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의 명소로 자리 잡은 곳이다. 더욱이 안향과 주세붕 그리고 퇴계의 얼이 서린 소수서원은 선비촌과 선비수련원 그리고 선비 세상으로 이어지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에 누가 되지 않는 박물관 운영과 전시물과 대한 전문적이고도 정확한 안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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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국악인 김영임 “아리랑, 첫 소절만 불러도~”"대통령 취임식 같은 많은 국민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특별한 ‘아리랑’을 선보이는 게 꿈입니다. 2013년부터 아리랑보존회 이사장도 맡아왔습니다. 아리랑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담고 있거든요. 6·25전쟁을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대한민국 모습을 한 시간짜리 아리랑 편곡에 맞춘 영상으로 선보이는 거예요. 전 애국자도 아니고, 솔직히 나라 정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하얀 치마저고리에 머리 쪽지고, 살림과 노래만 하는 여자죠. 그래도 우리 아리랑이 소중하단 건 아주 잘 압니다. 첫 소절만 불러도 절절한 선율이 가슴을 툭 치고, 대한민국 네 글자가 계속 떠오르는걸요.”(‘소리인생 50년’, 조선일보, 2023.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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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섬, 사할린을 떠나며판데믹 함께 눈물의 섬, 사할린에 들다 판데믹이 고개를 들던 3년 전, 나는 용케 국내 판데믹을 피하듯 한국을 떠나 눈보라를 헤치며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 내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거센 풍설에 비행기가 착륙이나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은 '눈의 나라' 러시아 사할린 조종사들에겐 모욕적일 수 있겠다는 걸 알았다. 도착하자마자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앞뜰의 '일제강제동원희생자추모비'와 '이중징용희생자추모비'에 묵념하고 동포들과의 문화교류를 위한 희망을 품고 교육원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단 열흘만에 판데믹으로 인해 한국어·문화강좌를 원격수업으로 전환했고, 기존의 활발한 국내 교류사업들은 모두 취소되었다. 일제 강제동원과 냉전 역사에 연유한 이산과 슬픔의 섬은 4, 5월까지 산을 하얗게 덮었던 얼음눈이 녹으면서 차가운 물이 도시 전체를 돌아 흘러 차갑고 고립된 눈물섬이 되었다. 새로운 사업이 보다 많이 필요했던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깊이 정들며 사랑에 빠지다 정신 차린 3년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재미와 의미를 충족할 교육원(장) 역할 찾기 교류 단절의 시대 문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했다. 극동 3개 교육원장은 공무비자 90일이 만료될 즈음 국내(대한민국) 출장을 통해 비자를 새로 발급받아 복귀해야 한다. 판데믹 기간과 경제 제재 시기에 국경을 넘는 일은 PCR 음성증명, 2주간 격리, 멀고 먼 항로의 힘겨움과 모험이 늘 함께 했다. 그럼에도 여행가방엔 한국어 및 문화체험·교육에 필요한 물품, 동포예술단체나 한국어채택교 선생님이 부탁한 물품(한복, 문화지도, 한지, 단어카드, 민속놀이도구, 공연도구 등)으로 채워졌다. 이런 것들은 교류가 원만할 때엔 방문하는 당사자나 단체가 사할린에 오면서 가져오거나 외교파우치를 통해 운송하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아내가 준비해준 내 자취 삶의 반찬꾸러미들은 포기하거나 최소화 해야했다. 한국과 사할린 사이 한국어교육․문화 물품을 나르는 메신저의 역할은, 힘들지만 독보적인 보람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 정부의 한 교육공무원이 거의 고립된 사할린 동포들을 망각하지 않았구나 하는 인식을 드리지 않았을까 하는.....자족적으로 나름 생각해 본다. 한국의 한국어와 한글, 그리고 전통문화에 대한 재미와 의미를 결합하는 어떤 새로운 사업들을 찾고 실행했다. 사할린 동포와 러시아 현지인들이 잘 어울려 사는 것, 한국, 한국어·문화에 대한 호감과 친밀감을 유지․증진하는 것은 서로 관련이 깊다. 교육원의 역할은 문화적 스며듬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소 썰렁한 문화센터 로비에 이동식 TV를 배치하고 사할린우리말방송과 KPOP, 세계문화유산, 전통과 현대의 한국문화, 경제적 성취에 대한 영상을 거의 매일 상영했다. 영상을 안보는 것 같아도 센터에 출입하는 어른, 어린 학생들이 자주 시청하는 것을 확인했다. 러시아 유일한 한글신문 새고려신문도 놓아두면 금방 없어졌다. 또 학기초 가끔 학교의 교문맞이처럼 한국어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파티안경을 쓰고 어른, 청소년 수강생들과 하이파이브를 했고 연말이 되면 한국노래 버스킹(대중 앞에서 노래하기)을 했다. 사할린에서 원장의 이런 모습은 낯설 것이다. 어색하지만 서로 웃음이 나오고 잘 통하지 않는 언어의 장벽을 넘는 바디랭귀지라고 할까... 재미있으며 쉽게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원장이 품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조금 망설이긴 했으나, 품위, 권위로 살아 온 삶이 아니었으니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무덤과 같은 홀로 생활을 더 힘들게 할 뿐이라 생각하여 그냥 시도했고 즐겼다. 또한 평생교육 강좌 ‘세계의 민속춤’ 클래스를 열어 2세 동포 어르신과 현지인 함께 센터 강당과 도시 공원, 스키장 리조트 위에서 춤추고 어울리는 기회를 가졌다. 1세 어르신이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사할린 할머니들이 춤추며 즐거워하는 것을 처음 본다. 사할린 할머니들은 너무 힘들게 살아와서 춤추며 밝게 웃는 모습을 도통 보기 어려웠다”고 하셔서 큰 보람을 느꼈다. 평생교육 강좌 ‘글쓰는 사할린’도 인상적이다. 사할린 동포 2세 ‘빅토리아 최’ 작가님을 강사로 모시고 동포 2세분들의 부모와 성장 시절에 대한 기억을 글로 써 역사와 유산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탄생한 강좌였다. 한국어가 서툴다면 러시아어로 써도 좋으니 제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부모들의 아픔과 그 아픔을 보며 자란 기억을 되살려 생명을 주자는 취지였다. 우리말방송과 새고려신문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였고 나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살려 글을 썼고,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새고려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동포 단체들의 행사나 잔치 등에 초대되면 꼭 한국탈과 한삼, 소고, 블루투스 노래방 마이크를 지참했다. 언제라도 민속춤클래스에서 함께한 밀양아리랑을 같이 추고, 소고춤과 탈춤, 사할린동포 애창곡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정체성(идентичность)의 실마리와 함께 카레이츠(корейцы)의 신명나는 문화를 보여드리고자 하는 의미였지만, 실제로는 내 적성에 너무 맞기 때문이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모국)과의 문화교류 단절을 보완하는 업무 찾기 교육원의 본연 업무는 한국어와 한국문화교육이다. 판데믹 전까지 방학에 활발히 오고 가던 사업이 중단되자 한국어 학습의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외국어학습은 익숙한 접촉과 소통이 핵심인데,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교육원장 과제 수행 대회”였다. 한국의 시낭송, 자신의 꿈 말하기, 한식만들기나 KPOP 춤·노래 영상, 한국영화 감상 말하기 영상 등을 제출하면 한국음식 체험권이나 한국 기념품 등을 상품으로 주었다. 주말에는 한지공예와 매듭공예, 김밥만들기 등의 특별수업을 가끔 운영했다. 교육원 공간을 십분 활용해야 하고 말하기 기회를 자꾸 주는 것이 언어학습에 중요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2022년 여름방학에는 처음으로 사할린 초·중등학생을 위한 한국어·문화캠프를 열었다. 한글학교와 한국어채택교 선생님·학생, 아리랑무용단이 리더가 되어 한식만들기, 한글쓰기, 민속춤, 민속놀이 코너를 운영하여 한국어와 문화에 대한 친밀감을 갖도록 했다.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과 채택 가능성이나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지방도시 10개교 학생 900여명이 참여했고 전세버스를 빌려 포로나이스크와 마카로프 도시를 향해 새벽에 출발하기도 했다. 캠프가 끝나고 많은 학생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자고 했고 자신들의 작품을 자랑했다. 한글학교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시작했지만, 단절의 시대에 참 괜찮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이 지면을 빌어 선생님과 학생들, 아리랑 어르신들게 감사드린다. 단절을 보완하는 또 하나의 시도는 하바로브스크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동포의 만남이다. 하바로브스크한국교육원이 개최한 "한국어말하기 큰잔치”에 초대를 받아 사할린 아리랑무용단원을 모시고 참석했다. 무용단은 대회 축하의 의미로 무대에서 ‘도라지’ 춤을, 나는 개량된 ‘봉산탈춤’을 선보였다. 하바로브스크 고려인 아리랑예술단의 환대를 받았고 공연의 반응은 뜨거웠다. 무엇보다도 하바로브스크 아리랑센터에서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뜨거운 포옹, ‘도라지’ 민요와 춤을 화합하여 공연하는 장면, 밀양아리랑 민속춤을 함께 추는 흥겨운 수업 장면은 마치 다큐멘타리의 한 장면 안에 들어간것 같았다. 문득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가르치는 블라디보스톡 24학교 교장 선생님의 제안, 즉 "지금 한국과 교류가 어려우니, 블라디보스톡·사할린·하바로브스크의 한국어 채택교끼리 공동수업이나 대면 교류 같은 것을 해보자.”는 말씀이 생각났다. 연해주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동포의 교류가 우선 현실화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내가 이런 역사적인 자리에서 밀양아리랑을 가르쳐 드리다니, 참 믿을 수 없는 장면이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사실 교사연수에서 배운 봉산탈춤 기억을 살려 처음 체부라슈카 유치원 행사에서 모험적으로 초연한 적이 있다. 이 영상을 본 사할린국립대 엘비라 교수님의 제안으로, 한국 탈 색칠하기 행사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공연하고, 행사 참가자들에게 가르쳐 함께 탈춤을 추게 되었다. 사할린에 처음으로 탈춤을 소개한 격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2022년 11월 30일, 한국의 탈춤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재에 등재 결정되어 남달리 보람이 컸다. 사할린 우리말방송 <한국의 상징> 코너에 ‘한국의 탈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상징> 코너에는 3년간 ‘한글’, ‘추석’, ‘아리랑’, ‘설’, ‘정월대보름’, ‘한식(절기)’, ‘한식(KFOOD)’, ‘온돌’, ‘직지·금속활자·한지’, ‘이순신·난중일기·거북선’, ‘독도’ 등 한국의 상징을 소개했고, ‘한국의 무술’, ‘청자와 백자’의 촬영을 마쳤다. 한국의 공무원으로서 사할린 동포들께 드리는 기억의 노래 선물을 녹음했다. 국내출장 중에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에 나가 사할린 동포 소식을 전하는 자리에서 교육원 수강생 사할린 동포 2세 김경순님의 개사곡 두곡을 무반주로 불렀다. 부모와 어린 큰오빠의 이별과 50년 만의 만남 또 이별과 사별의 한맺힌 사연을 담은 가사였다. KBS한민족방송을 진행하는 박해상 MC가 당신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사할린에 의미있는 노래들을 녹음하여 사할린 동포들께 선물로 드리라는 제안을 하셔서 녹음한 후 음악 CD를 만들어 주셨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분이 지으신 가사가 그 분의 부탁으로 불러준 나의 목소리로 녹음이 되었다. 디아스포라의 가족사 사연을 개사하신 김경순님이 2022년 제24회 KBS세계한민족체험수기대회 성인 부모님과 큰오빠의 한맺힌 사연을 수기로 제출하여 대상을 받은 것이다. 사할린 동포를 대표해서 받았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글쓰기를 통해 이산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십여년만에 교육원 수강생 두분의 사연이 KBS한민족 방송에 사연이 소개되어 녹음하여 보내드리고 드리고 소정의 원고료도 받아 전해드렸다. 자주 글쓰시고 방송에 보내셔서 기록으로 남기시길 간곡히 소망한다. 3년 동안 맞이한 3번째 봄날, 헤아릴 수 없는 신명과 의미의 기억들이 사계절의 천연색으로 바뀌며 지나간다. ① 가을의 김치축제에서는 한국에서 가져 온 24시간 막걸리를 담가 현지인들과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막걸리 더 없냐고 묻는 현지 공무원이 계셔서 한번 더 담가 드렸다. ② 공무출장에서 복귀하며 가져 온 팽이, 제기, 딱지, 국궁, 비석치기 등 민속놀이 도구들을 배치하여 추석맞이 민속놀이체험 코너를 운영했다. 교육원과 문화센타로서 당연히 보여야 할 모습이어서 보람이 컸다. ③ 이 행사를 목격한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의 연구진이 한국교육원 활동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하여 난데없이 영어 인터뷰에 뛰어 들었다. 끝내고 난 보람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던 기억이 있다. ④ 한인회 여성회 초대로 야유회를 가서 6시간 동안 춤을 추었다. 러시아인 한 남성이 몇시간을 지켜보던 모습은, 마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3일 낮과 밤’ 동안 춤추던 동이족을 묘사하던 이웃 민족의 모습이 저러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⑤ 코르사코프 한인회에서 여름날 주최한 ‘한국의 맛’ 행사에서 원없이 노래하고 춤추었고 땀 흘렸다. 여름 한복이 없어 땀으로 고생했지만 그것은 고생이 아니라 사랑이고 신명이었다. 고스란히 인생의 끝까지 가져갈 장면들이 너무 많아 이렇게 이임한 후 떠나, 다시 돌아오기 쉽지 않은 이 시대가 야속하다. 떠나는 이의 소망과 감사 지난 3년은 비록 판데믹과 제재로 인해 고립과 긴 우회로 값비싼 왕래의 비용을 치루었지만, 그 상황을 살아내기 위한 가치있는 역할 찾기와 재미와 신명을 주는 모험적 사업의 시도는 스릴과 보람을 준 시간이었다. 이제 떠나는 즈음에 동포분들께 소망하는 것은, 한국어든 러시아어든 글쓰기를 계속해 주십사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한인사회에서 그런 기록들이 대대로 전달되어야 고통의 역사가 치유되고 생명과 힘을 얻을 것이라 본다. 사할린 동포들이 글을 쓰고 번역하여 다듬어 KBS 한민족 방송에 자주 보내시면 좋겠다. 그러면 다음세대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모국과의 연결을 쉽게 하여 자부심을 갖고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1세대 부모님이 영주귀국을 못하고 돌아가신, 2세대 어르신들은 부모의 고난과 갈망, 자신의 성장기를 더듬어 소중한 감성과 기원, 소망과 원망 등을 글에 마땅이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해자와 모국의 정부는 무한의 책임을 져야 한다. 끝으로 고립과 고독, 환율의 공격과 온갖 제한들 속에서도 잊을 수 없는 보람으로 엮여진 교육·문화 여행과 모험을 보람있게 해주신 사랑하는 부모님, 가족, 형제자매, 첫날부터 끝까지 반갑게 응대해 주신 사할린 동포 어르신들게 마음을 다해 감사드린다. 특히 교육원생 중 작년 KBS한민족방송체험수기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경순 여사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또 사할린의 한인 언론방송·대학 및 교육계·문화예술계 지도자와 구성원 단원 여러분들, 또 다른 민족 이웃들, 늘 정성 가득한 한글학교와 교육원·한국어채택교의 한국어․문화 학습자 여러분·선생님들, 또한 성실한 우리 공관과 재외국민 이웃들, 사할린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한국의 국악신문, 아리랑연합회에도 감사드린다. 3개년 교육원장 임기 시절 사할린에서 맞이한 열두 계절동안 하루하루가 저에겐 빛나는 선물이었다. 어떻게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지 정리하고자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스파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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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악신문 선정 국악계 10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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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악계 10대 뉴스 1차 선정, 29題2022년 국악계의 이슈, 성과, 변화상을 볼 수 있는 국악신문 선정 ‘국악계 10대 뉴스’ 1차 26제가 선정되었다. 2차 선정위와 원로자문단의 최종 심의를 거쳐 ‘10대 뉴스’ 선정, 29일 발표한다. 21일까지 각 기관 단체 홍보팀을 통해 40여제를 응모 받아 22일 1차 선정에서 24제를 아래와 같이 선정했다. 제1차 28제 선정 뉴스(응모 順) 1 조선일보, 조순자 가곡 가사 보유자 방일영국악상 수상 2 국공립 국악단체 수장 임명(선정) 난맥상ㅡ국립극장장(미정), 국립국악원장(낭설), 국악 방송(비전공자 임명 논란), (사)국악협회장(교체 미완) 3 국립국악원, 송년 공연 성공 이룬 ‘임인진연’ 4 안숙선 가야금병창에서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재지정 5 2013년 시작된 아리랑 주제 ‘서울아리랑페스티벌’ 행사 폐기 및 총감독 별세 6 문화계 별 이어령, 김지하 선생 별세 7 정선군과 40개 지역 아리랑 전승단체 참여, 아리랑 등재 10주년 기념,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비 건립 8 문화재청, 국가 종목지정 전승공동체 맞춤형 지원 제도화 발표(아리랑, 제다, 씨름, 해녀, 김치담그기, 제염, 온돌문화, 장 담그기, 전통어로방식-어살, 활쏘기, 인삼재배와 약용문 화, 막걸리 빚기, 떡 만들기, 갯벌어로) 9 국립극장, 해외 초청 공연 호평 받은 ‘트로이의 연인’ 10 유튜브 아리랑 3600곡 탑재 ‘정창관의 아리랑’ 기념공연 11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 12 문화재청, 문화유산 가치보존을 위한 한국 원칙’ 선포 13 전국노래자랑 진행자 송해, 재담꾼 김법국(김뻑국)(1937년생/김진환)선생, ‘선소리산타령’ 최창남 (1935년생), 황용주(1937년생) 예능보유자 별세 14 문화재청, 2022년 대한민국 탈춤-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15 국립무형유산원, ‘명인 오마주-이은주, 김석출, 박봉술 편’ 공연, 16 문화재청, 창덕궁 후원에서 만나는 궁중 음악과 춤, ‘창덕궁 풍류’ 공연 17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문화도시' 지정(서울을 제외한 광역시권(인천, 대전, 부산, 대구, 광주), 경기권, 충청권, 강원권, 경상권, 전라권, 제주권 등 7개권역으로 구분-문화를 통한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 문화를 통한 지역사회 문제 해결, 지역주민 문화 향유 확대, 지역 문화 기반 조성 및 역량 강화 등을 달성 목표) 18 국립무형유산원, 인간문화재 10인‘, 전통예능의 품격’ 공연 19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밀양 분원’ 건립 확정 20 문화재청, 60년 만에 정책방향 대전환, ‘문화재’에서 ‘유산(Heritage)’ 개념 사용 21 문화재청, 600년전 세종대왕 ‘관현맹인(管絃盲人)’제도 재현 공연(관현맹인전통예술단), 경복궁 집경당 22 문화재청, 문화유산 가치보존을 위한 ‘한국원칙’ 선포(국제 사례 호주 ‘버라 헌장(Burra Charter)’, 영국 ‘역사적 환경의 지속가능한 관리를 위한 보존 원칙, 정책과 지침’, 캐나다‘캐나다의 역사적 장소 보존을 위한 표준과 지침’, 중국 ‘중국 문물고적 보호준칙’) 23 공연문화예술 6개 관계기관(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국립국악원, 국립극단, 국립아시 아문화전당, 국립중앙극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공연문화예술자료 수집․보존과 공동서 비스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 체결 24 문화체육관광부, ‘공연전통예술분야 경연대회 장관상장 지원기준 발표’(예비평가 최소 3년 이상 지속한 전국 규모 대회로, 상장심사위원회의 심사를 통해 선정함) 25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60년 ‘한국민속예술제’ 기록의 산물, 민속예술 디지털 아카이브 ‘민속곳간’ 공개 26 국립무형유산원, ‘2022 대한민국 무형유산대전’-자연과 사람을 잇는 무형유산 13개 공연. 27 국립무형유산원, ‘이수자뎐’-무형문화재 이수자 이예랑, 박천경, 백진희, 공민선, 원진주 정수인, 김재민, 방지원, 성슬기 28 국악방송, 송년특집-22년 대통령상 수상자를 만나다 29 문체부, 예산이 2022년도 7조3968억에서 2023년 6조7408억원으로 9% 가까이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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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 수상 소감사할린으로 이주한 한인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가 KBS한민족방송이 주최한 '제 24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성인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번 수상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2020년에 제 22회 KBS라디오 방송 체험수기 공모에서 나의 『가라우토로 팔려간 우리 이쁜 고모』가 '한민족'상을 수령했습니다. 심사위원님들께 나의 소박한 글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KBS 한민족방송은 지난 24년간 북방동포체험수기 공모를 펼쳐 우수작에 대해 수상을 해왔습니다. 2020년부터 ‘북방동포체험수기 공모전‘을 ‘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고려인과 사할린한인 동포들 대상으로는 정체성 제고를 위해 특별히 ‘한민족상’을 선정해 수여했습니다. 제가 첫번째 수상자로서 영예를 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2020년 11월 21일 토요일에 방영된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연출 김경희, 작가 김경순)은 토요초대석(진행 이소연, 박해상) 프로에 출연하여 수기작품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할린 한인 동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2020년 제22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당선 '낮선 이름 앞에서 당당히' 작품집에서 김이정 소설가는 심사평에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동포들은 "중국 동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응모원고가 적지만 서사의 밀도와 인물들의 생동감은 뒤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사할린 한인 1세대는 혼자 또는 가족과 사할린에 강제로 이주하여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목숨을 담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탄광, 산판과 군사기지 건설장에서 모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건강의 악화와 자녀의 양육 및 교육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모국귀환의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의 지원 대상자들은 영주귀국을 선택하느냐, 사할린에 잔류하느냐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출생한 사할린 한인은 영주귀국 지원 대상에 제외되기 때문에 또 다시 형제자매와 자손들과 헤어져 살아야 합니다. 이산의 이산은 세대를 거치면서 반복됩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라면 주로 남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여성들이 남편을 찾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후토로 가서 모진 고통을 이겨낸 사실을 묘사한 글은 전혀 없습니다. 작은 글이나마 그들의 공적을 공평하게 평가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입니다. 사할린에 가족이 이주하게 된 것은 1929년경 고모가 제일 먼저 사할린 땅을 밟게 되면서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1939년 결혼 후 한달 반만에 강제모집으로 가라후토에 가게됐습니다. 그 당시 오찌아이 (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습니다. 어머니는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나셨고 시부모를 모시고 고향에 거주하기를 원했지만 임신 상태에서하여 일본을 경유해서 가라후토에 들어 오셨습니다. 사할린에서 누이가 태어나고 1942년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전 할머니와 큰 아버지 가족들도 사할린으로 이주해 왔다고 합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끝끝내 타국의 땅에 묻혔습니다. 한국에서 일본 교장선생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할머니가 아버지가 있는 사할린으로 오길 희망해 1945년 해방 직전 큰아버지 가족과 함께 사할린으로 이주해 와서 할머니를 비롯해 부모 형제가 모두 사할린으로 이주해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이야기를 쓴 수기를 통해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할린 한인 여성의 삶을 이야기해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할린에서 여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남자들은 탄광에서 노동을 하고, 여자들은 아이 기르면서 텃밭에서 일하며 시장에 내다 팔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모집꾼에 의해 속아서 사할린으로 이주하게 된 20대 젊은 한인들은 대부분 빈농 출신들입니다. 남자들은 탄광에서 석탄 채취 노동을 하거나 산림에서 벌목공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월급이 많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사할린의 혹독한 기후 조건 속에서 맨손으로 땅을 일구어 텃밭을 만들고 거친 농사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고 가족 뒷바라지를 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강했다고 말합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사할린에서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귀국했지만 조선에서 이주해간 한인들을 무국적 상태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무국적이다 보니 사할린섬을 벗어나 대학을 진학하고 싶어도 못했습니다. 후에 일부는 소련 국적을 부여받아 모스크바에서 대학교육을 받거나 일부는 북한 국적을 부여받고 김일성대학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한이 고향인 사할린한인 대부분 무국적자로 있으며 한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했습니다. 나는 1945년 해방 후 북한 교사가 가르치는 조선학교에서 7년간 조선어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할린국립사범대학에 들어가서는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면서 우리말을 많이 잊게 되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사할린땅에 ‘한국 붐’이 일었습니다. 이후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사할린국립대학에서 19년간 한국어, 한국문화, 한국경제를 가르치는 한국학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1990년대에 사할린의 '새고려신문'에서 '무궁화' 문학콩클을 진행했는데 많은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과 독자들의 작품들이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할린 한인 사회에서도 안타깝게도 한국어가 많이 잊혀져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러시아에 정착해 사는 젊은 층에게서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이 40대에 들어서면서 한인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한국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게 됩니다. 나는 여기에 희망을 두고, 사할린 한인의 우리말 언어문화 복원․재생 사업에 매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사할린 한인 1세대가 조국으로 영주귀국함에 따라 사할린 한인 문학 활동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래도 'K-한류' 붐을 타고 한국문화를 체험하고 한국어를 배우는 어린 세대가 늘어난다고 하니 다음 세대에서도 사할린 한인문학이 꽃 피울 수 있도록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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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명인에게 고희연보다 중요한 공적대우지난 17일, 민족음악원 주최로 ‘풍물명인전’이라는 공연이 있었다. 이광수 명인의 고희연(古稀宴)의 형태로 이광수 명인이 65년 외길인생에 대한 독백과 제자들의 헌정형식으로 이루어져 매우 풍성하고 세련되게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은 문굿과 길놀이, 비나리, 삼도설장고, 삼도사물놀이, 사물판굿과 개인놀이, 퉁소와 사자춤 등 앉은반뿐만 아니라 풍물의 다양한 종목과 김묘선 (사)우봉이매방춤보존회 이사장의 승무•이선영, 공윤주, 김도연 경기민요 이수자들의 우정 출연으로 2시간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프로그램 전환 시 이광수 명인이 직접 등장하셔서 들려주는 사물놀이 창시와 관련된 독백은 재담처럼 재미있고 구수했으며, 몰래 카메라처럼 공연 중간에 제자들이 등장해서 이광수 명인의 칠순을 축하하고 큰 절을 올리는 모습은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마무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전 국민이 알다시피 이광수 명인은 사물놀이의 창시자이다. 이광수 명인의 기억으로는 고 심우성 선생께서 ‘사물놀이’라는 명칭을 작명해 주신 후 ‘사물놀이’라는 브랜드명으로 한 첫 공연은 1980년 9월 29일 '공간 사랑'에서 한 공연이 ‘사물놀이’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이광수 명인의 의견대로라면 올해는 사물놀이 탄생 42주년 되는 해이다. 80년대 사물놀이팀은 영국의 비틀즈에 비견될 때가 있었다. 전통음악의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실력 있는 4인의 청년들이 세계를 무대로 낯선 한국전통음악을 세계 곳곳에서 연주했다. 80년대 기획자로 세계로 공연을 다니다 보면 사물놀이팀을 만나는 것이 낯설지 않았고, 함께 다닌 사물놀이팀들도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 사물놀이 지부가 생겼고,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사물놀이를 배우러 우리나라에 속속 입국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BTS급이었던 것 같다. 한류(韓流)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그들은 전통문화로 세계를 제패했고,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오늘날 한국대중문화는 정말로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고, 이는 태초에 한국인의 리듬 DNA를 전 세계에 점진적으로 이식한 사물놀이팀의 공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류의 첨병이자 80년대 사회문화 현상의 중심이었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위정자들은 한국문화확산 정책의 방법론으로서 그들을 이용했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마케팅 구호를 만들어냈으며, 일부는 권력에 부역해서 엘리트 음악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물놀이는 꽹과리•징•장구•북이 한팀이 될 때만 가능한 음악이다. 그러나 팀을 떠나서 개인적 치부나 영달을 욕망하는 순간 팀은 깨지고 사물놀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어쩌면 사물놀이팀을 구성할 때 ‘욕망’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일부는 개인적 욕망을 달성한 동안, 일부는 가치를 지키려 평생 개인적 욕망을 거세한 채 고향에서 민중예술가로 살아가고 있다. 누가 사물놀이의 가치를 지킨 사람인가? 비틀즈처럼 빛나고, 비틀즈처럼 청춘을 불사른 청년들도 이제 칠순이 되었다. 이광수 명인에게는 65년 간 남사당패 후손으로 살아 온 개인적인 자부심과 축하연도, 제자들의 존경과 감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물놀이는 기존 남사당패들이 마당에서 진을 짜고 길놀이를 중시하던 풍물놀이라는 퍼포먼스 중심의 집단놀이를 음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전문 연주자 중심으로 개편했으며, 비전문적인 민간 고사패에서 신라시대부터 궁중연희에 참여했던 전문연희 재인단처럼 남사당패의 음악분야를 전문 연희음악인들로 예술적 지위를 격상시켰다. 더구나 엄혹한 유신과 군사정권 시절 미신타파를 이유로 전통뿐만 아니라 압제와 통제가 일상화된 권위주의문화를 젊은 예인들이 사물을 두드리며 청년들을 깨우고 민족문화의 가치와 우수성을 세계로 다니면서 증명했다. 그들이 지킨 건 ‘정신’이고, 지금까지 잊지 않고 지켜온 이는 이광수 명인이다. 사물놀이 창시자라는 개인적인 수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문화로 세계로 진출해서 우리 시대 글로벌 문화사회적 현상을 만들어 냈고, 사장되어 가던 전통문화의 위기를 재창조를 통해 전통의 보존과 계승•재창작에 대한 불꽃을 살려 생명력을 불어넣은 원사물놀이팀과 이광수 명인에 대해 대우와 평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화사적 공로에 비해 문화예술계의 인정과 평가가 너무 박하다는 것에 실망하고 마음 아프다. 살아있는 거인과 동시대를 산다는 것은 영광이고 감동이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그 축복과 존경을 문화부와 문화재청에서 공적•정책적으로 구현해야 한다. 초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도 아쉽고 허전했다. 국민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하고 공적 삶을 사셨던 우리 시대 거인들이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고 영광과 보람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대우와 공적을 표현해야 문화예술계도 지속발전할 수 있다. 사물놀이팀 창설 45년이 되는 정주년에는 제대로 된 학술대회라도 준비하고, 전국사물놀이축제라도 열어서 명인께 헌정하고 싶다. 혹시 아는가? 전국사물놀이축제에서 한국문화로 세계를 제패한 원사물놀이팀과 BTS 합동공연이라도 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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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聖 난계 박연 소설 ‘흙의 소리’ 特別展 축시‘달리 없어 이러니다’ 시조시인 우명환 山水가 부드럽고 人心厚德 영동에서 蘭溪 朴堧 태어남은 하늘이준 膳物이니 가꾸며 기리이다 樂聖偉業 이으리다 現代의 文章家라 畵家라며 의시대나 어느누가 감히나서 樂聖藝魂 담아내랴 한데도 이 方法外에 달리없어 이러니다 半千年 지난세월 國樂의香 더욱짙어 온누리에 祝祭마당 때맟추어 펼처지니 얼씨구 嶺同人이여 自矜心을 뽐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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