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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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숙원법안 '국악진흥법안' 국회통과국악인 숙원 법안 '국악진흥법안'이 국회통과 되었습니다. 본인이 제안하고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국회의원이 2020년 9월 2일에 발의한 ‘국악문화진흥법 제정안’ 노력과 2022년 9월28일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한국음악) 김세종 책임 교수 의견으로 개진한 '국악문화산업진흥법안' 및 '국악진흥법안'이 국회 공청회를 통해 계속 추진되어오다, 2023년 3월29일 오늘 오후 1시 국회 문화체육관광 위에서 '국악진흥법'으로 대안 통과 후, 93일 만에 모두의 염원이 하나 되는 '대한민국 국악진흥법'이 통과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 만들어진 첫 국악 관련 법안이며 이제 국악은 더욱 보존・계승 발전되는 계기로 당당한 세계 속의 한류 콘텐츠로 발전하는 단초를 마련하여 법적 지원 시스템 체계 마련을 통한 대중성 있는 콘텐츠 개발을 확대하고 전통예술 복원 및 재현 노력으로 현대와의 융합 변주를 하면서 더 차별화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게기를 만든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고 그 새로움은 전통의 뿌리에 있으며 그 뿌리에서 정체성과 문화적 차별화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오늘입니다. 磨斧爲針(마부위침),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노력으로 함께한 '국악진흥법' 2004년 제17대 국회 발의 후, 20여년 노력이 헛되지 않게 노력한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님에게 많은 응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2004년 고흥길 국화의원 ‘전통문화진흥법안’을 발의 후, 2007년 강혜숙 국회의원, 2009년 김을동 국회의원, 2013년 강동원 국회의원, 2017년 김두관 의원에 이어 본인의 제안으로 다시 불을 지피면서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국회의원이 이뤄낸 성과는 우리 대한민국 국악 역사에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큰 주춧돌로 대한민국 문화경쟁력을 확대하는 소통의 언어로 발전할 것을 믿습니다. 길고 먼 세월을 함께한 우리 모두의 바람으로 탄생한 '국악진흥법'을 위해 여러 현장에서 목소리를 함께하신 청학동 김봉곤 훈장과 김명곤 전 장관, 전국 한국국악협회 회원, 그리고 여러 목소리를 담아 함께한 국악인 여러분! 오늘의 '국악진흥법' 통과의 큰 성과는 국악의 여러 갈림길을 하나의 길로 모으는 힘으로 새로운 국악의 역사를 만들어 갈 거라 확신하며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K-한류의 마지막은 대한민국 국악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동안 열과 성으로 20여 년간 법안 제정 노력을 해주신 모든 국회의원 여러분의 노고에 국악인 모두의 감사 말씀을 전하며 특히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마지막까지 노력해주신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국회의원께 큰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국악진흥법' 제정을 계기로 국악인 모두 잰걸음과 밭은걸음을 넘어 불걸음으로 여러 산재한 국악인들의 불통을 소통으로, 화합으로, 발전하는 국악의 미래를 보고 싶습니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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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에도 '동두천아리랑'이 있다이병일/전 사할린한국교육원장 나는 교직 생활 중 12년을 왕십리 근처 세군데 학교에서 보냈다. 그리고 장학사로는 성동광진교육지원청에서 또 2년 근무했다. 그러한 인연이었을까.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게 되었다. 지난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개최한 양주에 영주귀국하신 사할린 동포와 함께한 아리랑학교 및 위문공연에 이어 25일 개최된 제2회 동두천아리랑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회장 이혜솔)의 초청으로 구한말 재야학자 매천 황현이 남긴 매천야록의 '아리랑을 사랑한 명성후'라는 부분을 재현하는 상황에서 고종황제 역활을 맡게 되었다. 난생 처음 곤룡포를 입고 임금님이 되어 황후와 함께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게 되었다. (오늘 서울 도성 밖 동쪽 십리에 유람을 나선 임금이 되어 명성황후와 함께 무대에서 백성들과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잠시 가문의 영광을 누렸다.) 이러한 아리랑 인연은 올해 3월까지 사할린한국교육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에서 기증한 공연용 한복들을 받아 사할린아리랑무용단에 전달해 드리면서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아리랑연합회 주관으로 매년 개최되고 있는 사할린아리랑제, 사할린 방문과 관련하여 사할린아리랑추진단 기미양 단장과의 인연도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요청으로 동두천아리랑제 무대에 섰다. 특히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레파토리 '사할린아리랑'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었다. 오늘 발표되는 동두천아리랑은 동두천아리랑보존회가 8년 전부터 발굴하여 복원한 아리랑이다. 북한강 수계를 따라서 전래되고 있는 토속민요 '이담어러리'이다. 동두천아리랑보존회(회장 유은서)가 주관하는 동두천아리랑제는 시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지역 다양한 쟝르의 국악인 단체와 타 지역 아리랑보존회의 공연들이 어우러져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농악대의 길놀이와 지신밟기로 시작한 무대는 동두천아리랑보존회와 함께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안성아리랑보존회 및 여러 단체의 다채로운 공연과 노동요 합창, 창작무용, 변검과 인형극, 가요 등이 잘 어우러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한수이북 경기지역 아리랑을 대표하는 아리랑축제로 발전 및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동두천아리랑제에서 발표한 동두천아리랑 사설에는 지역성과 역사성이 녹아있다. 주제가 확실한 축제였다고 본다. 또한 지역 공동체 간의 협력이 두드러진 '공동체의 노래'로 우뚝 서리라고 본다. 성황리에 축제를 마치고 동두천을 대변하는 대표음식 1호 부대찌개로 저녁식사 뒷풀이를 하면서 지난 1월에 사할린 에트노스 아동예술학교에 전달한 이담농악의 '태극상모' 이야기를 꺼냈다 동두천 공연 관계자 분들이 동두천 이담농악단 김경수 단장과 사할린한국교육원장이던 나와의 인연을 상기하였다. 스쳐간 인연 조차도 시간을 이리 저리 돌다가 언젠가 손을 잡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모험과 도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아리랑축제에 참여하여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알리는 일에 기여했으면 한다. 그리고 이산의 노래! 사할린아리랑의 슬픈 혼백의 역할도 해내고 싶다. 슬픈 틈새의 섬! 눈물의 섬! 사할린에서 3년을 살아온 인연은 결코 가볍지 않다. 코로나 사태로 한국과의 문화교류가 끊겨지자 나는 비전문가로서 사할린에서 동포들에게 탈춤과 아리랑, 소고춤을 배워주고 무대에서 발표까지 수행했다. 작년에는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에서 최고 대상을 받은 사할린한국교육원생 김경순 여사(73세)의 시 '눈물의 섬, 사할린'을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하여 음반까지 만들어서 배포했다. 김여사가 '칠곡산' 선율에 가사를 입혀서 불러 달라는 요청을 받고 한국에서 작업을 해서 사할린에 가서 보내 드렸다. 나의 목소리로 부른 노래가 녹음이 된 것이다. 평소 수업시간에 노래를 부르면서 한국어 교육을 하는 편이라서 부탁을 하신 것이다.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역사를 표현한 사할린아리랑의 보급을 통해 동포애를 나누고 싶다. 퇴직후 나에게 역할이 주어진다면 남은 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평생 국가에서 받은 혜택을 다시 돌려드리고 싶다. 우선 아리랑의 역사와 맞물린 가사들도 이해하고 명료하게 가슴에 담아야겠다. 민중들이 입었던 무명 바지 저고리 한복부터 준비해야겠다. 코로나로 인해 사할린에서 동포애를 충분히 나누고 오지 못한 나의 새로운 임무와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귀한 참여의 기회를 내주신 여러 관계자 분들께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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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한마당이병일/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원장 (현 석관중학교장) 사할린한국교육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지 4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서울의 중학교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는 현지 사할린 동포들과 여전히 아침마다 여러 SNS에서 인사를 나눈다. 시시각각 소식들은 점심시간이나 오후 퇴근길에서 열어 보고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하트를 보낸다. 지난 11일 주말 아침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의 초청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사할린에서 귀국하고 처음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만난다는 설레임을 안고 영주귀국동포들이 사시는 경기도 양주 율정마을에 도착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주관하는 "사할린동포와 함께하는, 찾아가는 아리랑 학교"가 열린 것이다. 서울에서 양주까지 2시간 이상 운전을 하면서, 지난 3년 간 임기를 마친 사할린한국교육원 시간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그 중 많은 추억들 중 '사할린아리랑'은 기미양 대표님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3년 전 7월 중순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과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님을 처음 만났다. 사할린 비자 갱신차 일시 귀국했다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행사를 준비하는 문제로 종로에서 만난 것이다. 현재는 전쟁으로 잠시 중단 된 상태이지만 2016년부터 매년 아리랑연합회는 사할린주한인협회와 공동주최로 사할린에서 크고 작은 행사와 공연을 수 차례 지속적으로 주관해 오고 있는 아리랑공동체이다. 국내외 55개 아리랑전승단체와 연구단체로 구성된 순수 시민운동단체이다. 그후 일시 귀국 때마다 국악신문사에서 보내주는 한복과 태극선 부채, 태극상모(이담농악), 아리랑음반,국악음반 등을 사할린 한민족예술동포단체에 전달했고, 아리랑학회에서 주관하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에 수강하기도 했고, 돌아가서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아리랑 특강과 새해 첫날 우리말방송에서 아리랑의 역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기미양 대표와는 아리랑 관련 자료와 행사 소식을 이메일을 통해 주고 받고, 화상통화로 10월에 내린 사할린 첫눈 소식을 건내 주어서 국악신문 포토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특히 유즈노사할린스크 주에서 지어준 '아리랑누각'과 '아리랑공원' 건립 소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러 국제적 사정으로 매년 사할린아리랑축제 및 아리랑 예술공연 단체가 준비하는 사할린 방문은 무산되었다. 나는 사할린에서 탈춤과 소고춤, 사할린아리랑, 밀양아리랑, 어부놀이 등 민속춤과 아리랑배우기 등을 통해 사할린 동포 및 현지인과 교류를 하였다. 특히 2022년 3월 KBS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행사에 사할린 동포들 50명과 함께 특별초청 되어 동포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2022년 KBS방송 한민족수기공모전 수상자 인터뷰, 한민족방송에 두 차례 출연해서 사할린 동포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특히 KBS한민족수기공모전 참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한글교육에 힘썼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사할린 동포의 존재와 이산의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니 지나가시는 어르신들의 러시아어 대화가 들려서 참으로 신기하고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 말 걸고 싶은 기분이랄까. 문경에서 도착한 대형버스에서 앰프와 악기, 다듬이, 박스 등이 리어카에 실려서 공연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사할린 어른들도 함께 손수 나르시고 계셨다. 떡과 수박 등 다과회까지 준비를 해오셨다. 공연 식전 행사에서 인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서 행사가 있게 되면, 1세대 어르신들께 큰절을 드리던 습관이 있어서 양주 율정마을 동포 1세대분들께 바닥에 엎드려서 큰절을 올렸다. 이어 "아직도 3년간 살다 온 사할린 기억이 생생해서 자다가도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글을 쓰며 추억한다. 그리고 영주귀국 신청 전에 부모가 사망하시면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2세대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잠시 가슴이 울컥해져서 머리 속이 먹먹해졌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닫혀진 대강당 문이 오늘 3년만에 처음 열게 된 것이다. 한쪽 면은 대형 사이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비치는 공간이라서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무덥지는 않았지만,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관계로 관람객이 늘어나고 공연이 이어지면서 다소 습기가 올라가는 느낌이 있었다.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사할린에서 살다오신 어르신들께는 부담이 되는 기온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사할린에서 체질이 형성된 분들이라 한국의 무더운 여름은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늘 이맘때는 사할린에 돌아가서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9월 말 즈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시고 했는데....이제는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3년간이나 한국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계신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회장:이만유)가 준비한 공연 프로그램은 모두 아리랑판이다. 율정마을 어르신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의 '사할린아리랑' 합창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의 '왕십리아리랑', 동두천아리랑보존회의 '동두천아리랑'이 불려졌다. 2부는 문경에서 오신 40여 명의 아도위 회원들이 준비했다. 아도위합창단과 아도위연주단이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홀로아리랑 등 다양한 아리랑을 연곡으로 불러 주시고, 문경새재아리랑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하모니카 연주단이 트롯트를 선사했다. 동포들이 무대에 나와서 우리 전통 춤사위와 러시아 민속 춤사위로 춤을 추기 시작해서 신명을 높여 주었다. 트롯트에서 빠른 비엔나 왈츠, 불루스 등을 망라한 춤판이 이루어졌다. 러시아에서 태어나신 분들은 노래보다 춤을 더 즐긴다. 우리가 노래방을 좋아하는만큼 그들은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휘날레 춤판에는 많은 어른들이 춤을 추시고 기뻐하셨다. 코로나가 때문에 너무나 오랜만에 모여서 추어보는 춤이라고 하시면서....이러한 자연스런 파티 풍경은 사할린에서 근무하는 동안 너무나 낯익은 어울림이어서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운 사할린 추억으로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문경시민들은 동포 분들께 드릴 정성이 담긴 선물도 듬뿍 가져 오셨다. 문경시장이 보낸 아리랑 책자, 문경특산물 오미자 와인, 오미자김 등을 뒷풀이에서 풀어 놓기도 하셨다. 직접 만든 생강조청을 준비하신 문은자 여사님의 정성이 대단하다. 기미양 대표님은 사할린아리랑축제추진단장으로서 '아리랑'을 매개로 현지 사할린 동포와 전국 여러 지역의 사할린 영주귀국동포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계신다.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분들의 성함과 얼굴, 모스크바에서부터 사할린에 사는 친인척 관계에서 겹사돈 관계까지 거의 알고 계신다. 그동안 사할린 원로 교육자 고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안간, 인천 등 에 사시는 많은 사할린 사람들을 만나서 강제동원과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대표님과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2017년 사할린 이산의 역사가 다큐로 방영되고,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KBS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 참가를 널리 알려오고 계신다. 사할린 동포들의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공중파와 출판을 통해 소개되는 성과를 내고 있다. 매년 대상 수상작은 사할린 동포들의 이산의 고통이 담긴 가족사이다. 작년 대상 역시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글학교 수강생 김경순(77세) 어른이 수상했다. 2019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일간 개최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사할린아리랑무용단과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대상과 금상을 받았다. 현재 사할린아리랑앙상블(단장:박영자), 오늘 만난 양주 율정마을 사할린 동포로 이루어진 사할린아리랑보존회 합창단이 수상한 것이다. 당시 하바롭스크아리랑보존회 게나김 단장도 초청되어 무대에서 '카레이스키아리랑'을 부녀가 같이 불러서 주목을 받았다. 우리는 흩어진 한민족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아리랑을 매개로 활발한 개방과 교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코로나 판데믹의 여파과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 교류의 중단으로 인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아리랑을 매개로 문경시민들과 사할린이 연결된 오늘 이 시간은 새로운 시작의 의욕을 신선하게 일으키는 날이다. 순수 시민운동단체로서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의 활동이 놀랍다. 이만유 회장의 특강에서 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처럼 온 국민이 문경새재아리랑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진정성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먼 길을 와 주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동두천아리랑보존회, 한편 이혜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장님은 병원 입원 중에도 양주까지 오셔서 공연이 끝나고 바로 병원으로 재입원하셨다.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사할린아리랑보존회 및 율정마을 어르신들, 오늘 사할린과 문경의 만남을 순조롭게 이어주신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 그리고 자리를 빛내주신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과 부회장님의 동행 등,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런 귀한 다음 만남의 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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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꾼 이동안, 나의 스승 이동안운학 이동안 선생. 한 때 전국을 떠돌며 온갖 기예로 명성을 떨친 재인이다.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예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동안 명인은 재인청의 예맥을 이어 내린 세기의 광대로 김인호의 제자다. 명창 이동백과 근대무용의 아버지 한성준의 증언에 따르면 김인호는 구한말 순종과 함께 대청마루에서 놀았던 광대 중의 광대였던 인물이다. 이동안 선생의 집안은 세습광대의 집안으로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이동안 선생의 집안이었지만, 선생의 아버지인 이재학은 이동안 선생에게 어렸을 때부터 사물(꽹과리, 북, 징, 장고)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잡게 하는 대신 서당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선생은 집에서는 글방 간다고 나와서 글공부는 안하고 이 동네 저 동네 인근 마을에까지 남사당 패거리들의 굿판을 따라다니며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겼다. 급기야 선생은 글방에 간다고 집에서 메고 온 책보를 뒷산 소나무에 걸어놓고 김석철 광대를 따라나섰다. 결국 선생은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땅까지 간다. 14세 소년 이동안은 그렇게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 방랑의 길을 시작했다. 선생이 남사당패에 들어 간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황해 장터에 아버지 이재학이 나타났다. 아버지에게 이끌려 화성 집으로 돌아온 선생은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한다. 그때 선생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신부보다는 소리와 어름타고 땅재주 넘는 모습만이 눈 앞에 어른거려 결혼 4년 만에 집을 다시 뛰쳐 나온다. 선생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방황 끝에 광무대에 취직 이곳에서 재인청의 춤 선생인 . 김인호선생으로부터 팔박기본무.태평무.진쇠춤.엇중몰이신칼대신무등 30여 종 춤을 배웠다. 발탈로 국가무형문화재 기예능 인정을 받은 선생에게는 춤을 배우는 제자들이 그리 몰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춤으로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한 것이 가장 한스런 일이다. 발탈의 맥이 끊기지 않기 위해 받은 것이지만. ”(이동안) 나는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재인청 춤의 정수인 태평무를 전수받았다. 이동안 선생은 정주미에게 ‘태평무 이수증’을 수여하고 재인청 본류의 장단이 담긴 ‘태평무’음악을 연주녹음하여 재인청 '이동안류 태평무’의 본류를 지키도록 전수를 해주셨다. "나는 춤꾼이다. 우리 춤에도 이른바 여러 유파가 있어서 굳이 유파 속에 나를 넣는다면 ‘재인청’이라는 유파의 춤꾼이다. 그런데 재인청은 한국무용사의 입장에서는 결코 유파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재인청은 하나의 유파인데 유파가 아니라는 얘기다."(정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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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장보고국악대전 전국경연대회를 맞이하며저 나이 30대에 국악의 불모지인 내 고향 완도에 국악 꽃이 활짝 필수 있다는 일념으로 2000년 5월 제1회 장보고국악대전 전국경연대회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2000년도는 국악경연대회가 전국에 그리 많지 않아서 많은 국악인들이 참가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국악의 불모지 완도에 국악을 보급하고 완도의 관광명소를 국악인들께 더 알리고자 하는 일념으로 시작했는데 어느덧 2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반도 남쪽 하늘 끝에 있는 내 고향 완도는 경연대회 개최하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열악하지만 그래도 23년이란 오랜 세월을 경연대회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리 국악을 사랑하는 국악인들의 많은 관심이 함께 모아져서 가능했습니다. 이제는 내 나이도 있고 해서 이제 그만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젊은 혈기로 내 고향 완도에 우리 전통예술을 보급 전승하겠다며 어렵게 시작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힘이 들어도 내 자신의 조그만한 사명감에 새 해가 밝아오면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 시군에서 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시는 선생님들 정말 존경합니다. 어느 곳 하나 오염되지 않는 건강의 섬, 내 고향 완도는 신라시대 동아시아 바다를 평정한 자랑스런 해상왕 장보고대사의 고향입니다. 해상왕 장보고대사는 신라시대 바다를 장악하여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일본과의 해상 무역을 주도하였으며 중앙정부의 세력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자 남해안에는 해적이 자주 출몰하였고. 장보고는 완도에 해상 무역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 소탕과 함께 해상무역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가볼만한 관광 명소로는 장보고유적지, 주도섬, 정도리 구계등, 보길도 윤선도유적지, 항일운동 성지 소완도, 청산도 서편제 촬영지, 명사십리해수욕장, 드라마 해신 촬영셋트장, 완도타워 등 눈에 보이는 곳곳이 역사유적지이고 관광명소이며, 건강의 섬 청정해역 완도 바다에서 자란 해산물은 어느 바다 해산물보다 곱빼기로 맛이 있습니다. 올해 경연대회 일정은 여름방학 기간인 8월 12일~13일에 개최합니다. 경연대회 기간에 제자들과 완도에 오셔서 경연대회 참가도 하시고 대회 장소와 가까운 장보고유적지 등 관광명소를 둘러보시면 더 멋진 추억을 남기실 수 있을거라 확신합니다. 2023년 장보고국악대전 참가자 중 수상자는 제가 제작하는 아이넷방송 명무와 풍경 프로그램에 출연시켜 수상자들의 우수한 예술세계를 전 국민께 알리는데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국악예술의 불모지 '건강의 섬, 완도'에서 열리는 제23회 장보고국악대전 전국경연대회에 국악인 여려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완도에서 장보고국악대전 전국경연대회장 박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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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민요, “유파별 보유자 인정해야 합니다!”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전승자 대표단 공동대표/김영임ㆍ김장순(경기민요 전승교육사) 저희는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전승자들입니다. 근 한 세기동안 대한민국의 대를 이어 전승되던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의 맥이 끊길 위기에 놓이게 되어 민요를 사랑하는 많은 전승자들과 국민들의 많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한숨소리가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 문화재 관리국은 1975년 경기민요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소리속이 다르다는 점을 중시해 계보를 인정하였으며, 초대 경기민요 보유자로 묵계월(이경옥), 이은주(이윤란), 안비취(안복식) 세 분이 12잡가 4곡씩을 나누어 각각 보유자로 인정하였습니다.(묵계월: 적벽가 선유가 출인가 방물가), (이은주: 집장가 평양가 형장가 달거리), (안비취: 유산가 제비가 소춘향가 십장가) 문화재청은 2021~2023년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 인정 조사를 실시하여 최종 후보 김혜란(안비취 유파) 이호연(안비취 유파) 김장순(이은주 유파) 김영임(묵계월 유파)의 4명중 김장순(이은주 유파)와 김영임(묵계월 유파)을 제외시키고 2023년 5월 12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로 김혜란(안비취 유파)과 이호연(안비취 유파), 안비취 유파만 인정 예고하였습니다. 인정예고 기간에 아무런 문제나 이의 제기 없이 경과되어 문화재위원회에서 지정심의가 의결된다면 경기민요는 이춘희(안비취 유파), 김혜란(안비취 유파), 이호연(안비취 유파) 3명의 국가문화재 보유자가 안비취 유파로 천하통일 되고 묵계월 유파와 이은주 유파는 국가무형문화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사실상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 사안은 수천여 명의 경기민요 전승자와 수만 여명의 일반 전승자의 운명이 달리기도 한 사안입니다. 경기민요 전승자들은 몇 십년만에 찾아온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가 보유자 탄생을 자축하고 기뻐해야 할 터인데 잘못된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 정책과 무형문화재 위원회의 결정에 아연실색하고 망연자실합니다. 두 후보가 인정 예고 된 안비취 유파 또한 자축은 고사하고 함께 동고동락해 온 경기민요 식구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에 안절부절 하고, 탈락한 묵계월/이은주 유파의 전승교육사들은 돌아가신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지 못한 죄책감으로 침통하고, 전승교육을 받던 이수자, 전수생들은 졸지에 가문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고 대성통곡하는 소리로 초상집이나 다름없습니다. 또한 윤석열 대통령께서 2023년 5월 27일 부처님 오신날 조계사 축사에서 '정부도 전통 문화유산 보존 전승에 최선을 다할 것' 이라고 발언하셨습니다. 이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유, 무형 문화재의 중요성을 깊이 인지하고 있다는 증명입니다. 끝으로, 우리의 귀중한 무형문화재인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중 묵계월류, 이은주류의 두 전형이 보존, 전승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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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으로 세계 문화지도를 그리는 날을 위하여임웅수/경기도 무형문화재 '광명농악' 인간문화재 2007년 몽골 울란바토르에 처음 개설한 한국어와 한국문화 교육기관인 세종학당이 작년 19개국 23곳이 새로 지정되면서 15년 만에 전 세계 84개국 244곳으로 늘었다. 2007년부터 2021년까지 누적 수강생이 58만 4,174명에 이른다고 하니 K-콘텐츠 영향력으로 국가 위상이 높아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 영화, 웹툰, K-POP, 한글 등 한류 문화의 다양한 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지금, 국악은 민족문화의 뿌리로서 중요하게 인식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법적 권리 신장을 위한 「국악진흥법」은 2005년 17대 국회부터 지금까지 9차례 발의와 폐기를 반복하며 홀대받고 있는 게 실정이다. 현재, 전 (사)한국국악협회 임웅수 이사장이 제안하고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이 발의한 ‘국악문화산업진흥법’이 상임위를 통과하고 법 제정이 임박한 지금 국악인 모두의 마음은 초 긴장 상태이다. 한때, 우리 국악도 봄꽃 철쭉처럼 만개하던 시절이 있었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면서 전통음악에 관한 관심과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결정적으로 국악으로 장식한 올림픽 개・폐회식 문화행사가 성공적으로 치러지면서 사회 전반에 ‘문화적 정체성’, ‘전통예술’에 대한 중요성이 각인되어 전통문화의 고유한 가치와 정체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1990년 문화부가 발족되면서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체계적인 행정 업무 시스템의 근간을 마련하였고, 양악 대비 국악의 비율이 기존 10% 미만에서 22%로 눈에 띄게 증대되었던 시절(제5차 교육과정, 1987~1992)을 넘어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부터 ‘탈춤(2022)’까지 총 22종목 중 12개가 국악 분야인 것은, 국악이 식민사관과 왜곡된 역사의식으로 인한 ‘전통’에 대한 터부(taboo)를 극복하고 비로소 국악의 사회적 위상이 재정립되었음을 입증한다. 이제, ‘헌법 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이 에 입각해 전통문화의 제도적 장치와 법 제정은 매우 시급한 문제라 할 수 있다. 헌법 9조의 취지는 우리 근대사에서 외부 세력에 의한 민족문화의 훼손과 왜곡이 많았다는 시대적 배경 하에 법률 체계를 통해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고 현재 일반적인 ‘문화예술진흥법’, ‘공연법’ ,‘문화재보호법’ 등만 존재하는 현실에 전통공연예술 진흥의 한계로 자생력과 산업경쟁력이 떨어지는 현실에 중요한 법적 조치이자 근거이다. 해마다 사회로 배출되는 실력 있는 젊은 국악인들이 창의적 방식의 음악을 생산하여 자생 할 수 있는 창조적 생태계를 제공해야 할 필요성과 일회성, 단기적 실행에 대한 지원 중심을 지양하고 중장기 종합계획에 입각한 정교하고 구체적인 목표와 전략으로 단계적인 실행 프로세스가 각별히 요구된 만큼 이제는 확고한 법적 기반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전통공연예술의 대중화 및 생활화와 산업화 및 세계화 추진의 한계를 극복하는 별도의 진흥법 제정을 통해 대중화를 저해하는 요소 및 환경을 분석하고 다원화된 정책과 법안반영을 통해 K-콘텐츠를 통한 한국의 정체성을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은 전통의 정체성과 특수성으로 문화적 차별을 두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단 사실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 전 (사)한국국악협회 임웅수 이사장이 제안하고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이 발의(2020.9.2.)한 ‘국악문화진흥법 제정안’이, 동국대학교 김세종 교수(문화예술대학)의 ‘국악문화산업진흥법안’ 및 ‘국악진흥법안’ 개진(2022.9.28.)으로 국회 공청회를 통해 추진되어오다가 마침내, 2023년 3월2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에서 ‘국악진흥법’으로 대안 통과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에 만들어진 첫 국악 관련 법안이며 국악이 더욱 보존・계승 발전되는 계기로 삼는 단초가 되었다. ‘磨斧爲針(마부위침):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노력’으로 함께한 ‘국악진흥법’이 2005년 제17대 국회 발의를 시작으로 20여 년 노력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그 날까지 100만 국악인 모두의 힘이 필요한 시기이다. 국악은 갈라진 우리 겨레를 하나 되게 하는 통일의 언어이다. 세계 시장에서도 대한민국이 문화경쟁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K-한류의 핵심 코어는 대한민국 국악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국악이 살아야 한다. 국악이 살아야 대한민국 문화가 살아난다. 국악의 보존과 계승་, 가치 실현은 ‘국악진흥법’ 제정을 통해 더욱 굳건히 발전될 것이고, 대한민국의 건강한 문화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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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본고장 자부심, 중고제 복원 계승해야 한다충남 서천군이 지난 3월 28일 서천군청 상황실에서 명창 이동백·김창룡 자료 종합조사 및 선양사업 기본구상 용역 착수보고회를 개최했다. 중고제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판소리의 한 갈래로, 중고제 소리꾼인 이동백·김창룡 선생이 근대 오명창에 포함된다.이날 보고회는 김기웅 군수를 비롯한 군의원, 자문위원인 목원대 최혜진 교수 등 11명이 참석해 용역계획과 세부내용에 대한 토의를 진행했다. 특히 착수 보고에서는 명창 이동백·김창룡 선생의 중고제에 대한 철저한 기초조사,선양사업 방향의 중요성, 선양사업의 파급력 제고,관광사업과의 연계 등 다양하고 의미 있는 의견들이 오갔다. 이번 용역은 서천군에서 태어난 이동백·김창룡 선생의 역사적 가치 발굴 및 관련 유적조사, 두 명창 생전의 음원, 연구서, 언론 기사, 사진, 유품 등을 종합조사하고 두 명창 및 중고제 선양사업 발굴 및 활용 방안을 연구하게 된다. 군은 이번 용역을 통해 중고제 기초조사에 그치지 않고 서천군의 중고제에 대한 위치 확보와 서천군의 대표 문화 브랜드로 키우기 위한 사업을 발굴도 추진할 계획이다. 김문(金門)소리를 받은 명창 이동백(李東伯, 1866~1950)은 한말~일제강점기에 ‘새타령’의 독보적 존재로서 판소리 절정기, 그리고 쇠퇴기를 모두 경험했던 판소리 중고제의 산 증인이다. 서천에는 조선 고종황제의 사랑을 받은 판소리 명창 이동백(李東伯) 선생과 김창룡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다. 1866년 2월 3일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에 태어나셔서 1949년 6월 6일 83세에 별세하셨다. 조선 말기 고종황제의 사랑을 받은 판소리 5명창 중의 한 사람. 본명은 종기(鍾琦), 아명은 동백(東白)이다. "마지막 내 소원(所願)"판소리”의 근본 정신을 모르고 음탕한 노래로 알고 부르며, 또 그런 것을 듣기 좋아하는 것이 기가 막히고, 또 하나는 소리하는 사람을 아직 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천대하는 것이 일생동안 내 가슴에 사무친 기막힌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암만 생활문제가 급하여도 우리의 권위도 세워서 요리집에는 가지 않고 회관에 와서 듣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서로 연구하고 개량하야 새로운 작(作)도 하고 발표도 하려고합니다." -1937년 3월 이동백이 72세 대 대담한 내용 중에서- 이동백 선생이 남긴 마지막 소원이다.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공부하였고, 13세 때에는 김정근(金正根)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공부하고 다시 김세종(金世宗)에게 5년간 공부하였다. 20세 전후에 도만리 호리산의 용구(龍口)에서 2년간 독공(獨工)하였고, 다시 진주 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하였다. 절에서 나오자 창원부사의 부름을 받고 '새타령'을 불러 이름을 떨쳤다. 36세 이후 경상남도 창원에서 사는 동안 명창으로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46세 때 서울로 올라와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과 함께 원각사(圓覺社)에서 창극을 공연하였고, 원각사가 해산된 뒤 연흥사(延興社)·광무대(光武臺) 등에서 송만갑과 함께 창극과 판소리를 공연하였다. 1933년 송만갑·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판소리교육에 힘쓰는 한편, 창극정립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1939년 부민관에서 은퇴공연을 하자,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두달 동안이나 전국과 만주, 연해주일대까지 순회공연을 계속하였다. 그는 김세종에게 짜임새 있게 판소리를 배웠고, 성량이 풍부하고 풍채가 당당하여 거인적인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종은 그를 특히 사랑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계를 내렸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하였다.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고, 특히 '새타령'을 잘 하였는데, 그의 '새타령'은 이날치(李捺致)·박유전(朴裕全)이후 첫손을 꼽고 있다. 제자는 많지 않으나 강장원(姜章沅)이 그의 소리 일부를 이어받았다. 그의 소리를 담은 음반이 수십종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새타령'과 '흥보가' 중 '제비 후리려 나가는 대목', '심청가' 중 '범피중류(泛彼中流)' 대목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중고제 발굴 복원 연구 충청사람들 관심 속 시작해야 한다. 중고제는 충청도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 등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충청도민의 심성이 녹아있는 민족문화이다. 최근 학계에 의하면 판소리의 본향은 수운 교통·상업 발달한 충청 서해안과 삽교천, 금강유역이 확실하다고 한다. "판소리 역사와 연구사, 역대 명창들의 사제 관계를 최초로 기술한 정노식 '조선창극사' (1940년 1월 15일 조선일보사)에 따르면, 전기 8명창과 근대 5명창에 이르기까지 충청·경기·전라 북부 출신으로, 중고제 판소리 명창이 다수에 이른다. 판소리 대가닥인 중고제, 동·서편제 등은 판소리 대명창들의 사제 관계 속에서 형성됐다. 전기 8명창의 사제 관계 속에서 중고제가 전승됐다면, 후기 8명창의 사제 관계 속에서 동·서편제가 형성됐다고 보는 것이 판소리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통설이다."(2016년 3월 24일 충남문화재단은 ‘중고제 맥 잇기 학술세미나) 한편 서천에서는 매년 '국창 이동백. 김창룡선생 판소리 서천 전국국악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로 11년을 맞이하고 있다. 올해에는 서천군 선양사업에 힘입어 대상에는 천만원의 상금이 수여될 예장이다. 그리고 전국에서 참가하시는 경연자와 가족들에게 모두 점심을 대접할 예정이다. 전국 국악인들의 많은 동참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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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에서 한국전통춤을 펼치는 정수경입니다미국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김묘선 선생님 제자 정수경입니다. 현재 저는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전수자이고, 버지니아주 페어펙스 카운티 소속 선생님으로 센터빌 고등학교와 첸틀리 고등학교에서 한국학과 수업에서 한국무용과 모듬북 사물놀이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1일 웨스트우드 컨트리클럽에서 DAV (Democratic Asian Americans of Virginia) 주최한 아태계 문화예술의 달을 축하하는 행사에서 우리 전통문화를 선보였습니다. 이 행사에는 Fairfax 정치인, Congressman/Woman, 상원, 하원 의원님들이 참석 하셔서 '아시안태평양 문화유산 축제'를 축하하는 행사였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전경숙 회장, 임소정 시의원, 문일용님 등도 참석하서서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중국의 사자춤을 시작으로 첫 막을 열었습니다. 한국팀 대표로 초대를 받은 '디딤새한국전통예술원' 원장의 '김묘선류 화선무곡' 한국전통 춤과 고등학생 단원들의 모듬북 연주로 참석한 이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습니다. 특히 모듬북 연주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한참 동안 기립박수를 치면서 "원더플"을 외쳐주셨습니다. 미국에서도 한류 열풍이 이제는 최고조라고 봅니다. 코로나 이후 더욱 비대면 행사가 영상으로 제작되어 유튜브를 통해 제작되고 알려지게 되면서 아이티 강국 한국의 위상을 실감하게 됩니다. 방탄소년단의 인기는 미국은 물론 유럽을 접수하면서 한국의 문화가 친숙하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공연에 츨연한 디딤새한국전통예술원 청소년 단원들 모두 주최측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습니다 첸틀리하이스쿨 한국어과 교교사 고은영 선생님과 , 사물놀이와 부채춤은 교사로 정수경 디딤새한국전통예술원 대표가 지도하고 있습니다. 수강 학생들이 이번 학기부터 배우기 시작한 '사물놀이', '부채춤',' K-pop댄스' 공연을 하였습니다. 특히 부채춤은 지난 4월 헌든 하이스쿨 인터내셔널 데이에서 공연에서 1등을 한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공연에서 축하무로 이매방류 기원무를 선보였습니다. 디딤새 단원들의 12발 상모 주한결, 버나돌리기 정지훈, 얀드류김, 사자춤 이상혁, 김하은 마지막으로 모둠북을 연주하여 참석하신 많은 분들의 박수 갈채를 받았습니다. 이날 함께 참석하신 ,체틀리하이스쿨 교장선생님. 학교 관계자, 문일용 (전 퍼펙스카우니 교육위원)등 학부모님들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셨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사물놀이와 부채춤을 배우기 시작한 첸틀리 하이스쿨 학생들의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도 더 알차고 재미있게 한국문화예술을 지도하는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직 악기나 의상등의 소품이 부족하지만 하나하나 채워가며 학생들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더불어 주변에서도 많은 관심이 후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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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째 부안 전국농악경연대회를 마치고매었구나~ 매었구나~ 어허허~ 하아~~ 1987년 7월에 있었던 부안농악 두레굿 재연행사에 쓰였던 문구입니다. 신명을 내기 위해 장구를 매고 마음을 매어 무아지경의 놀이판에서 "어허허~ 하아~”하며 탄성을 표출했듯 우리네 농악은 생각만 해도 어깨 들썩이게 하는 강렬한 힘이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의 세계화로 'K-팝'은 물론 우리 전통문화가 새로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왜 이리 신명과 끼가 많으며 춤과 노래를 잘하는가? 바로 민중예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농악'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농악무의 신명성과 즉흥성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한민족 농악과 굿문화를 풍성하게 간직한 부안에서, 부안농악으로 그 찬란한 역사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허균이 꿈꾸던 이상 사회의 터전이며, 실학자 반계 유형원과 변산의 도적을 교화한 박지원 등 사람이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늘 꿈꾸어 왔던 부안에서, 고은 이동원 선생 추모 제 11회 전국농악경연대회를 지난 5월 6일 성황리에 잘 마무리 하였습니다. 함께 해주시고 오늘의 농악이 있기까지 자리를 빛내주시고 있는 전국 농악보존회와 농악인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함을 표합니다. 부안은 호남우도농악의 본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안에는 보안 우동리 김바우, 김대근, 줄포의 박남식, 백산의 김경천, 부안읍의 이동원, 부안농악 상쇠 나금추 등의 명인들이 활동한 근거지입니다. 이 분들은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농악인들과 교류하며 부안 농악의 초석을 다지고 융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87년 12월 31일 전라북도에서 최초로 '부안농악'이 전북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그 우수성을 만천하에 인정 받았습니다. 이후 세계 유네스코는 농악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습니다. 앞으로 선생님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많은 분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동체적 신명으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5월 15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1호 부안농악보존회장 김기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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