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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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영금의 시선] 술 익는 마을고향은 지척에 있어도 오갈 수 없으니 지구의 반대편보다 더 멀리 있는 듯하다. 때로는 미움에 온 몸을 불사르다가도 때로는 술 한 잔에 목메는 날도 있다. 아니 생각하려 해도 기억을 소환하지 않고서는 나도 모르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어 취중에라도 목 놓아 불러보고 싶은 것이 고향이다. 술이라면 제일 먼저 아버지를 떠올린다. 세상살이 어려워 숫 덩이 같은 마음이라도 술 한 잔으로 해독할 수 있다며 이유를 붙여가시면서 드신다. 어떤 술을 마실가. 대부분 누룩을 발효시켜서 만든 증류이다. 알코올을 얻으려면 먼저 누룩이라는 곰팡이 균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화학공장에서 나온다. 시장에 나온 것을 사다가 재료(가루)와 섞어 놓으면 곰팡이 균이 자라고 두 번째로 독에 넣고 보름 정도 지나면 술 익는 소리가 엄청 요란스럽다. 뚜껑을 열어 향긋한 냄새가 나면 잘 익은 것이고 시큼한 냄새가 나면 술도 시어져 버린다.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해 오르는 증기를 냉각시키면 관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것이 술이다. 여기에 세신 뿌리나 오미자를 넣으면 정품보다도 더 맛있는 향기로운 술이 된다. 이 것을 서민들이 먹는 농태기(소주)라고 한다. 식량이 귀한 때일수록 술에 대한 수요가 더욱 높다. 이러한 현상은 밀주 단속으로 이어지면서 숨기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의 숨바꼭질이 이어진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집안에서는 누룩이 발효되어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방 아랫목에 어른의 허리 넘게 큰 독을 갑자기 옮겨놓지 못한다. 처음에는 솔 뚜껑을 뒤집어 술을 만들었는데 방법도 점점 정교해지고 술 기계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파는 사람도 생겼다. 밀주가 성행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술의 재료는 곡류와 산열매로 만든다. 산열매로 만든 도토리 술은 맑고 깨끗하다. 공장에서 정품으로 생산되는 유명한 술도 있다. 대동강 맥주, 개성인삼 술, 들쭉술은 매점에서 볼 수가 있으나 서민들이 마시는 술은 아니다. 술은 식량대체자원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국내의 소비보다는 외화벌이 수단일 가능성이 높다. 화학공장에서 에틸알코올 원액을 가져다가 물에 희석시켜 팔기도 한다. 어떻게 마실까. 혼자도 마시고 여럿이 모여 먹기도 한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기 때문에 도수가 높은 것을 좋아한다. 농태기에 길들여진 사람은 공장에서 제조된 술이 맞지 않고 정품에 익숙한 사람은 그것만 좋아하기에 맛에도 구별 짓기가 있다. 비즈니스로 먹기도 하고 친분을 쌓으려고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위하여’라는 건배사로 술잔을 부딪치기보다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먹는다. 술 익는 마을에 취한 듯 살고 싶었던 사람들과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아버지, 고통스럽고 막막한 생활에서 탈출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게 만들었던 것은 한 잔 술에 녹아있는 알코올의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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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영금의 시선] 폭우가 지나고 나면(1)밤새 천둥을 동반한 굵은 비가 내렸다. 낮에도 앞을 가려볼 수 없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고, 강물이 불어나면서 교통이 통제되었다. 이북지역인 북쪽에도 28일 밤부터 7월 1일까지 개성과 강원도 황해남북도에 많은 비가 내린다는 경보가 있었다. 그리고 평양을 비롯한 일부지역에 위험 수위를 넘는 폭우가 쏟아졌다. 남북이 동시에 집중호우가 내리는 현상은 어쩔 수 없다지만 사전 통지도 없이 황강댐의 방류는 불안한 예감을 넘어 괴씸한 생각마저 든다. 갑작스러운 폭우는 북쪽에서 최악의 재난상황이 된다. 도로와 철길이 파괴되고 농경지가 물에 잠기면서 눈앞에서 다 자란 농작물을 잃게 된다. 2020년에도 곡창지대인 황해도를 비롯한 일부지역이 폭우로 피해를 입었다.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최고지도자가 황해북도 은파군을 방문하면서 식량이 우선 공급되고, 빠른 수해복구를 지시했다. 폭우로 농경지와 도로, 철도만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 빗물로 인한 식수 오염으로 콜레라,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생겨나 주민들을 괴롭힌다. 북쪽의 장마는 6월 말부터 길게는 8월 초까지 이어지는데, 폭우가 내리면 좁은 강이 삽시에 불어나고 심하면 강뚝을 넘는다. 수면이 낮은 곳은 물난리에 집안이 수라장이 되는데, 그나마 집이 통째로 밀려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때로는 돼지며, 닭이며 집안살림살이들이 둥 둥 떠내려 온다. 그걸 걷어내려다 오히려 물살에 밀려가므로 멀거니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 우비도 넉넉하지 않아 비닐을 가져다가 비옷을 만들었다. 해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상량보다 많은 폭우가 내리면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것이다. 거기에 산사태까지 생기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남쪽에는 강하천 정리가 잘되어 있어 폭우가 쏟아져도 그 많은 빗물이 하수구를 통해 순간에 빠진다. 폭우가 지나간 뒤 개천에 나가면 무섭게 아우성치며 흐르던 강물이 둔덕진 곳에 홍수의 잔해만 남겨놓고 홀쭉한 실개천이 된다. 비가 오면 우산을 준비하고 번개가 지나치면 잠시 전원을 꺼놓는다. 이러한 간단한 대비는 어렵지 않아 때로는 커피잔을 들고 비 내리는 소리를 피아노 선율처럼 감상하기도 한다. 실시간 재난상황을 알려주고 있어 편리하고, 이동수단이 좋아 우비만 챙기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북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환경이다. 벼락과 천둥을 동반한 폭우는 다른 성질이 부딪히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중부지역에 몰려든 정체전선은 하필이면 경기 수도권에, 황해도와 강원도, 서해안의 북쪽으로 오르내린다. 남북이 소통도 못하고 있는데 폭우까지 쏟아놓으니, 무책임한 방류에 사람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된다. 위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없고 북쪽에서는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우면 도움도 청하고, 방류할 때는 이웃을 고려했으면 좋겠다. 얌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지척에 고향을 두고도 나눌 수 없는 풍요로움에 반쪽은 가난한 마음이다. 폭우가 지나면 폭염이 시작되니 남북한 모두 별일 없이 정체전선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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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靑瓦臺) 개방에 관한 10문 10답1. 개방 의미와 기념행사 청와대를 국민 모두가 누리는 열린 공간,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국민 품으로 돌려준다는 약속이 실현된다. 청와대는 제왕적 권력의 상징에서 ‘국민 쉼터’로, 불통과 분열의 상징에서 ‘국민 통합 공간’으로 태어나는 것. 역사적인 청와대 개방을 기념하고 새 시대를 여는 희망과 기쁨을 국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소수의 권력자들만 향유했던 다양한 시설과 경치를 국민 모두가 여유롭게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약속을 담다’-74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완전히 돌아오는 역사적인 순간을 축하하는 공연 ‘희망을 나누다’-푸른 잔디가 펼쳐진 녹지원과 춘추관 앞에서 즐거운 문화예술공연 ‘역사를 그리다’-국빈을 맞이하던 영빈관과 왕의 어머니들을 기리는 칠궁 역사공연 ‘자연을 품다’-경복궁에서 청와대를 거쳐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 ‘문화를 펼치다’-청와대 곳곳에서 남녀노소 함께 즐기는 문화체험 축제의 장 ‘전국을 누리다’-전국 청와대 유관장소(세종 대통령기록관, 청주 청남대, 합천 청와대세트장)에 서도 청와대 개방을 기념하는 특별 행사 ‘청와대, 국민품으로’ 운영 시간 2022년 5월 10일(화) - 5월 22일(일) * 5월 10일(화) 낮 12시 ~ 20시 * 5월 11일(수) ~ 21일(토) 07시 ~ 19시 * 5월 22일(일) 추후 공지 기념 행사 장소-청와대, 경복궁, 북악산 일대, 전국 유관장소 2. 역사적 기능은? 답-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으로 사용.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 어영(御營)·연무장(鍊武場)·과거장(科擧場)·친경(親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제7·8·9대 조선총독 관저, 광복 후 조선주둔군 사령관 관저, 1948년 8월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 2022년 5월 초까지. 이 집무실에는 회의실·접견실·주거실·경호실·비서실·영빈관 등 기능을 하였다. 3. 명칭의 베경은? ‘경무대(景武臺)’-1960년 4월까지 초대·2대·3대 이승만 대통령 12년간 집무실 명칭. ‘청와대(靑瓦臺)’-1960년 8월부터 제2공화국 대통령(윤보선)부터 사용. 대리석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데서 연유하였다. 4. 재임 대통령과 기간은? 이승만(1948∼1960) 1963∼1979년(5∼9대) 박정희(朴正熙), 1979∼1980년(10대) 최규하(崔圭夏), 1980∼1988년(11∼12대) 전두환(全斗煥), 1988∼1993년(13대) 노태우(盧泰愚), 1993∼1998년(제14대) 김영삼(金泳三), 1998∼2003년(제15대) 김대중(金大中), 2003∼2008년(제16대) 노무현(盧武鉉), 2008∼2013년(제17대) 이명박(李明博), 2013~2017년(제18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거쳐 갔다. 2017년(제19대)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집무하였다. 5. 본관 청와대는? 대통령 집무와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되는 건물로 외국 국가원수나 외교사절이 방문했을 때 사용하였다. 전통 건축양식을 통해 우리 문화를 보여줄 수 있게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가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八作)지붕을 올리고 청기와를 이었다. 30만 장이나 되는 청기와는 일반 도자기를 굽듯이 한 개 한 개 구워 내어 1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녔다고 한다. 건물 앞 잔디마당은 국빈 환영행사와 육·해·공군 의장대, 전통의장대 사열 등이 행해지는 곳이다. 6. 영빈관(迎賓館)은?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 개최 건물.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건물이다. 특히 전면에 있는 4개의 돌기둥은 2층까지 뻗어 있는 높이 13m, 둘레가 3m이며 내부는 무궁화·월계수·태극무늬가 형상화되어 있다. 7. 상춘재(常春齋)는? 전통적인 한식 가옥으로 외빈접견 등에 사용. 온돌방 1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연건평 116평이다. 8. 녹지원(綠地園)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 1,000여 평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 310년에 이르며 높이는 16m이다. 9. 관저(官邸)는? 전통한식으로 본채는 팔작(八作)지붕의 겹처마에 청기와를 얹은 ‘ㄱ’자형 지붕 형태이며 구성은 본채·별채·대문채·사랑채·회랑으로 되어 있다. 10. 춘추관(春秋館)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춘추관에서 비롯된 것. 1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맞배지붕에 토기와를 올려 전통적인 우아한 멋을 살린 건물이다.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소와 출입기자들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언론사 기자 78명이 상주하는 청와대 프레스센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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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국악공화국과 달리는 기차’ 이야기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狂車/鑛車) 이야기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충돌을 마주하고 달리는 기차”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변경 가능한 선로로 달려오는 기차에 의한 희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담론이다. 전자는 두 진영의 충돌 상황이거나 선의의 공동체 구성원을 희생물로 수장이 무책임한 대치국면을 야기할 때의 비유이다. 후자는 달려오는 기차의 선로 변경 여부를 통해 어떻게 희생을 줄일 것인가의 가설이다. 바로 이 두 기차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곳이 있다. 한 측이 4월 21일 대통령(자신들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지위와 명예를 획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21일대통령’과 ‘23일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함)을 선출하고, 또 한 측이 이틀 후인 23일 대통령을 선출한 ‘국악공화국’이다. # "브레이크가 없는 두 기차가 마주 달려오고 있다. 어떻게 할래?” "뛰어 나간다” "왜?” "충돌하는 거 구경하려구!” 빨리 나가 기차를 멈추게 하여 충돌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국의 불꽃(피 튀기는 싸움)을 구경하러 나간다는 것이다. 방관을 넘어 냉소에다 저주까지 반영한 대답이다. 지난 '국악공화국'의 대통령 선거 무효소송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결코 농(弄)이거나 망언만이 아니라 실제 나왔던 이야기 이다. 그런데 분규로 갈라진 두 진영에서 대통령이 배출되고 나서 또 들려오는 이야기는 더 절망적이다. 지난 2년은 수비만 했는데, 이제는 21일 총회의 무효소송과 "두 건의 금품수수 확인서를 갖고 있다”고 ‘수습위원회’에서 발언한 것을 두고 명예훼손죄로 고발한다는 말이 돌기 때문이다. 2020년 초 당선무효 소송으로 극한 대립을 해오다 금년 3월 패소한 측이 소송전을 불사하겠다고 한 것이다. 홧김에 내뱉은 말이 아니라면 공수가 바뀐 2차 무효소송전이 전개될 것이 뻔하다. 아!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두 기차를 어떻게 하면 승객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을 것인가? #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狂車) ‘트롤리호’가 달려온다. 그런데 이를 모르는 다섯 명이 작업을 하고 있는 선로와 변환기(變換機)를 작동하면 선로가 바뀌는 측선에서 한명이 작업을 하는 상황이다. 그대로 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전환기를 작동시켜 한명이 작업하는 측의 선로로 가게 할 것인가? "그대로 가면 5명이 죽고, 측선으로 가면 한명이 죽지?” "측선으로 돌려서 한 사람을 죽이고, 다섯 사람을 살려!” "전환기를 돌려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행동인가?”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첫 챕터에 나와 유명해진 ‘트롤리 딜레마’(기차 논쟁)을 재구성한 것이다. 정치철학계의 문제적 논제로 사고(思考)실험의 한 케이스인데, 소수 인권 문제와 목숨의 수치 문제를 다룬 것이다. 다양한 조건하에서의 실험인지라 결론도 매우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데, 여기서는 단순화 시켰다. 다만 위의 경우라면 대다수의 응답자들이 5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희생시키는 선로 변경을 선택한다고 답하는 유형의 예를 제시한 것이다. 이를 현실의 ‘국악공화국’에 적용하면 어떨까. 어렵지 않게 결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잠깐, 여기서는 도덕이나 정의(正義)의 문제는 논외하기로 한다. 21일과 23일 선출된 대통령 체제를 위의 두 선로에 처한 상황이라고 가정하기로 하자. 이에 누군가가 변환기를 작동시켜 희생을 줄이는 한 쪽을 택할 수 있다는 조건도 있다고 하자. 당연히 전환기 작동자와 각각의 조건이 주어져야 하는데, 다행히 비상대책위원회(박상진 현 학교법인 국악학원 이사장)가 존재함으로 작동자는 준비가 되어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문제는 선택 또는 희생(犧牲) 값인 양측의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 조건을 더듬거려 채우면 이런 정도일 것이다. 첫째, 두 체제 정통성 여부이다. 그런데 모두 희박하다. 왜냐하면 서로 극열 부정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제 시점에서 법적으로는 ‘21일대통령’ 체제가 약하게나마 우위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객관적 평가를 받을 만한 여지는 거의 없다. 매우 애처롭고 슬픈 현상이다. 제3자적 입장으로 이 나라는 ‘웃기는 짬뽕’ 신세인 것이다. 둘째, 각 집행부 구성원과 회원수도 따질 필요 없이 퉁 쳐야 한다. 임시총회 대의원 수와 참가인원 수로는 23일 대통령 체제가 월등하나 가장 중요한 일반 회원은 공통이기 때문이다. 물론 ‘21일대통령’ 체제의 ‘이핵관’들의 회비 납부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차후 법적으로 문제가 되겠지만, 아직 법적 판단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셋째, ‘국악공화국’ 수장(首長) 자격문제다. 이는 중요한 대목이다. 해서 세분하여 따져 보기로 한다. 다만 전제하는 것은 객관적 자료에 근거하기 보다는 세평에 기댄 것이 문제라는 사실이다. 이는 다른 필자에 의해서 버전을 달리해 객관화 할 필요가 있다. 자격의 기본은 국악분야의 전문성 문제이다. ‘국악공화국’ 역대 수장 중에는 예능 보유자들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명인명창들과 이론가들이 많았다. 이점에서 전문성은 제일의 조건이 된다. ‘21일대통령은 의상실 운영자(문예분과)이자에 ’전통예술진흥회 이사장이긴 하지만 장르적 전문성은 희박해 보인다. 반면 ‘23일대통령’은 농악분야 경기도 지정 보유자(농악분과)로 이미 20대 초반에 ‘전주대사습 농악부문 장원'을 획득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문성에서는 분명하고 확실한 우위에 있다. 둘은 예술인 공동체 수장이란 점에서 얼마나 감수성이 풍부한가도 중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공통으로 부족한 점이 확인된다. 인성(人性)과 포용력인데, ‘21일대통령’은 전자가 부족하고, ‘23일대통령’은 후자가 부족하다. 둘 다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격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셋은 예술가로서의 문해력(리터러시)이다. 이는 당선 취임사의 호소력 내지 표현력 같은 언변이나 저술 등을 통한 주관성 피력 등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후자가 높은 편이다. 이 문제는 대외 협력관계, 관공서 접촉에서 중요한 강점이 된다. 넷은 현대의 지성인 척도라는 경청력(傾聽力)이다. ‘21일대통령’은 주변의 한 측근에 의하면 "5분 이상의 대화가 어려운 분”이라고 하는 평이 있었다. ‘23일대통령’은 필자와 수차의 통화와 SNS소통 경험으로는 맥락적 대화가 가능한, 나름의 자격을 갖췄음이 보인다. 다섯은 약속 이행의 신뢰성 문제이다. ‘21일대통령’은 SNS에 의한 약속에 대해 거의 지키지 않았다. 감성적인 국악인들에게, 팩트를 기다리는 기자와의 약속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되레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기자에게 기사의 신뢰성을 언급하였다. 이에 비해 ‘23일대통령’은 즉각은 아니지만 최소한 담당자나 제3자를 통해 약속을 지키려는 자세를 취했다. 선거 기간에도 짜증이 담기긴 했지만 자료 송부에 대한 약속을 모두 지켰다. 이 신뢰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공연히 문제를 삼기 위해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즉, 지난 소송 '씨즌1'에서의 합의 불발에서 알 수 있듯이 상호불신이 원인이었다. 이번의 '씨즌2'에서도 이 신뢰성은 합의에 있어서 걸림돌이 된것으로 보인다. 여섯은 예의(禮儀)이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회상규상의 기본 예의 정도를 말한다. 이는 인성의 문제와도 직결되는데, 대면이나 통화에서 확인되는 것이기 보다는 sns에서 확인되었다. 예를 들면, ‘21일대통령’은 관련된 기사에 대한 즉시 반응에서 정정 요구나 반박문이 아닌, 냉소적인 비아냥과 막말의 문자로 표현한다. 기자로서는 모멸감을 느낄 정도이다. 이 부분은 다른 기자에게서도 수차례나 들었다. 반면에 ‘23일대통령’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 뿐이지 무례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무성의 하기는 해도 무례함은 아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차렸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이는 소송 사건과 갈등 해소에 대한 진정성 문제이다. 필자는 각각의 총회 선출이 있은 이튼날 SNS를 통해 갈등해소에 대한 나름의 안(案)을 제안했다. 간절한 마음에서 행한 것이다. 그런데 ‘21대통령’은 무반응이다. 반면 ‘23대통령’은 "반목을 해소하는데 노력하겠다”는 취지와 함께 중립적 중재에는 참여하겠다는 반가운 회신을 보내왔다. 2022년 4월 24일 일요일 10시 54분에. 이 회신에서 ‘국악공화국’ 회복 가능성과 치유력을 읽을 수 있었다. 반가워서 가슴이 뛰었다. 이런 자세는 전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필자는 즉시 "예 좋은 자세! 화이팅”이란 문자로 화답했다. 이 태도가 부디 의지로 확장되어 실천력으로 발휘되길 바란다라는 마음에서다. 사실 기껏 3, 4차례 정도로 만나 본 인상기에다가 주변 인물들과의 뒷담화를 통해 축출한 결과이니 부족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필자 만용의 결과인 이런 평가는 그 동안 술자리 안주에 뒷담화로 뒤통수 까기에서 비로소 문자화 한 것이 처음일 듯하다. 지금까지의 소송 전말이나 정관 조항을 들먹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동굴에서 헤어나지 못한 분들은 이것을 작은 기준점으로 삼아 판단하셔도 될 듯하다. 뭐 소설로 가볍게 읽을 꺼리이기는 하지만~ . 그러면 이제 어설픈 결말을 내리기로 한다. 브레이크가 없어 멈출 수 없는 기차 앞에 불행하게도 21일과 ‘23일대통령’ 체제가 놓여있다. 두 체제는 머지않아 다시 소송으로 확대되어 충돌하고, 파국을 맞을 지도 모른다. 그 파국은 우선 문화체육관광부의 인가 취소 같은 문제로논의로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회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한 쪽을 희생시켜서라도 다른 쪽 체제를 통해 회원들에게 봉사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 방법 외에는 없을 듯하다. 파괴된 선로가 더 파괴되기 아예 못 쓰게 되기 전에.... 그래서 이상에서 살핀 조건들을 고려하고, 비교한다면 이제 전환기를 어느 선로로 작동시켜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어쩔 수가 없다. 현실의 문제이다. 희생을 줄이는 선로 선택을 할 수밖에! 가능한 한 빨리! #"21일대통령 체제 선로로 틀까?” 아니면 "23일대통령 체제 선로로 틀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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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에 대한 말’이어령선생 유해는 오늘 오전 8시 30분 발인되었다.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지며, 영결식은 다음 달 2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엄수된다. 선생에 대해서 ‘앉는 그 자리가 곧 강의실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학다식하고, 달변가였다. 20대부터 60년 동안 130여종의 책을 냈다. 교사·교수, 문예지 발행인, 신문사 논설위원 등 10여 개가 넘는 직함을 거칠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선생은 서울대 국문학과 재학 중이던 1956년 문단 원로들의 권위 의식을 질타한 ‘우상의 파괴’를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발표하며 평단에 데뷔했다. 문학의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모든 언론이 선거 기간임에도 대대적으로 추모 기사를 쓰고 있다. 이 추모사들에는 다양한 시각의 평가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선생의 생전을 기억하고자 한다. # "부고와 함께 우리는 이어령의 생애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령의 지성과 에너지가 우리 사회의 얼마나 큰 부분을 채우고 있었던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오늘날 한류 커뮤니티 1억명에 빛나는 한국 문화가 이 위대한 해석자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해왔는가를 실감하게 된다.”(이인화 문학평론가) # "선생은 우리 문화의 본질과 성격이 무엇인가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파헤치고, 그것이 국제적인 언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 분이다. 선생은 문학·음악·미술 등 각계를 꿰뚫어 우리 문화가 나아갈 길을 정리하고 미지(未知)와의 연결고리를 평생 찾아오셨다. 일본이 축소지향이라면 우리의 반도 문화는 좀 더 열리고 중성적인 여러 가변성을 지녔다는 점을 파헤치고 다듬었다. 애국심이 워낙 강하신 분이었다. 글 마다 마지막에서는 ‘한국 사람’ ‘우리 역사’로 귀결됐다. 언젠가 프랑스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이에 대해 투정했더니, 그 말을 책 광고에 넣으셨더라.”(화가 이우환) # "세상에 대한 훌륭한 카피라이터였다. 이어령 선생은 모든 사람이 궁금해 하는 것을 한마디로 딱 찍어서 알려주고 시각을 열어줬던 분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문화인이었다.(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 "장관 임기 마지막 날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처리 안건 순서를 살짝 바꿔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안을 위쪽에 올려 놓으셨다고 한다. 예술 영재들에게 실기 중심의 교육을 하는 문화부 산하의 전문학교를 설립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어령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5분간 한예종 설립에 대해서 역설한 뒤 설치안이 통과하면서 한예종 설립이 본격화됐다. 한예종은 이듬해인 1992년 개교했다. 이어령 장관이 없었으면 오늘날 손열음·김선욱도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다.”(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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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산소(山所) 및 납골장과 수목장국중성(정읍 향토사가) 산소(山所)란 ? 산소라 하면 조상의 묘지를 이르는 말로서 묘지의 본 뜻을 말 한다면, 묘지의 봉분은 흙무덤인데 이는 풍수상 땅속에 흐르는 생기(生氣)는 흙을 몸으로 삼기 때문에 흙무덤을 높여 쌓아야 생기를 많이 받는다는(乘氣生)데에 본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가 가장 강하게 뭉쳐있다는 곳은 산이라 하여 묘를 산에 모셨다는 뜻에서 산소라 하였다는 해석이다. 산소라 하면 조상 대대로 이어오면서 가계 혈통을 이어온 구심점이었으며 효(孝)의 상징이었고 전통문화의 근원이었다 할 것이다. 농토를 기업으로 하여 선영의 산소를 지켜온 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모습이었다. 농사가 생업의 전부였던 그 시절에는 자손들은 부모슬하에서 농사에 전념 하는 것이 평생의 업이었다. 장성하여 가정을 갖게 되면 부모가 나누어 주는 분깃에 따라 분가하여 자립하였다. 이같이 부모는 언제나 없이 자손들을 품안에 두고 보살핌으로 가정의 화목과 평안을 이끌어 온 그 선친과 선영을 모셔온 저 산소가 있는 곳이 우리의 터전이었고 우리의 고향 이었던 것이다. 그러했던 고향은 일찍부터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고 외부에서는 공단시설이 들어와 대내외적으로 섞이고 바뀌다보니 어느덧 옛 고향이라는 정서는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부모를 떠나 고향을 등지다보니 섬겨오던 선영의 산소는 은연중 멀어지게 되고 효행마저 소홀해져가는 세월은 흘러 드디어는 그때 그 세월에 비하여 오늘에 와서는 아직 살아있는 부모도 남에게(시설)맡기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다 보니 돌아가신 뒤의 저 산소는 무슨 의미가 있을가?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받기 위해서 베푼다던가? 그래서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은 혜택을 부모에게 못 갚고, 자식에게 갚는다 했다. 납골장 그동안 장례문화의 개선책으로 종래의 봉토 분묘에서 납골장으로 변화 되면서 가족묘지의 형태들이 많이도 달라져 왔다. 이에서 납골장(葬)과 납골당(堂)은 다른 개념이다. 납골장은 화장한 유골을 석탑이나 석실에 봉안함을 말하고 ,납골당은 화장한 유골을 일정장소에 보관 유치하는 곳을 말한다. 그래서 화장장의 총칭의 개념은 납골(納骨葬)이라 하겠다. 원래 납골장의 시원은 불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인데 이는 불타(佛陀)의 유체(遺體)를 다비(茶毘:화장)를 치르고 나서 그 유골을 석탑을 지어 봉안하였다는 데에서 기원한 장법이었다. 그에 따라 불교의식을 통하여 일반에서도 일부 화장풍습이 있어 왔으나 양속을 해친다하여 매장법이 존속되어 왔던 것이다. 90년대에 들어 납골장이 권장되면서 이제는 일반화 된 것 같다. 어떤 묘지에는 수십 기의 비석만 세워 있는 데가 있고, 석탑을 지어 주위를 공원으로 조성한 데가 있는가하면 땅을 파고 반 지하 형으로 하여 지붕을 흙으로 덮은 유골탑등 다양한데, 기존의 분묘도 석재물로 사각을 둘러 있는 데가 많아졌다. 그런데 한번 설치된 석재는 몇 천년이가도 영구히 남을 것인데 저와 같이 산지마다 석재 구조물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온 산천이 석재는 천지가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자않다. 이같이 일반 종문이나 가족 묘지들은 각기 다른 양상으로 늘어나는데 이는 개인 소유지에 따르면 전국적이고 산발적이다. 그리고 납골당은 아직 납골 묘 또는 수목장으로 가기 전의 대기실 같은 곳이겠는데, 이는 각자의 유골함을 벽면의 칸막이 선반에 번호순대로 층층이 진열되어져 있는데 이는 마치 아파트 층을 상상케도 한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흙집에서 살 때는 무덤도 흙집이더니 아파트 문화에서는 무덤도 아파트를 닮았다는 풍자도 있다. 그러나 종전의 묘지하면 유현(幽玄)하고 음습한 분위기였는데, 그와는 달리 납골묘지는 기념탑 같은 분위기에서 선영을 기리며 추억을 기념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참배할 수 있는 성소의 엄습함이 있다. 수목장 종전의 묘지라는 개념 하에 서는 인생종말의 구역으로 인식이 되어 왔으나 보다는 생전에 선호하는 선경이요 낙원으로 모신다는 의미에서 아름답게 정원을 꾸미거나 그만한 자연 경관으로 모신다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 수목장이겠다. 납골당과 수목장은 다 같은 화장장 이지만 납골장은 집(탑)을 지어 그 안에 유골을 봉안하는 반면 수목장은 나무밑에 유골을 뿌리거나 도자기 유골함을 묻는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수목장은 그 나무에 영혼을 의탁하는 관계이기도 하므로 한편 그 나무의 건강여부에 따라서는 그 영혼에 대한 안부의 표징이라는 의미에서도 자손들로 하여금 자주 돌아보게 되는 성묘의 의미는 납골장보다 우리의 정서에 가깝다고 하겠다. 수목장의 기원은 성경에서도(창35:8)야곱의 모친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을 상수리 나무밑에 장사지내고는 그 나무 이름을 ‘탄식의 나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사회에 수목장이 인식되기는 90년대 초에 전 고려대 교수가 생전에 자기 죽음의 기념수를 남겼다는 계기와 아울러 필자의 졸저(꽃과 나무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에도 수목장을 제안한바 있었다. 이 같이 기념수를 정하여 수목장으로 모신다면 후손들에 대대로 이어지는 성수로서의 대 물림이 될 것이며, 그런 의미에 서는 수목장은 굳이 선산이 아니어도 내집 정원이면 어떠랴. 선영을 성수(聖樹) 밑에 모셔두고 그 옆에 유훈이나 좌우명 하나쯤 세운다면 후대에 실전(失傳)할 염려도 없을 것 이며, 항상 살아있는 저 나무의 생동감은 후손이 전해 받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세상사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순환법칙이라 했거늘, 영혼이야 넋이야 얼인 그것은 항상 내 안에 있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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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민족체험수기 대상,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3부)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제23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의 성인 부문 대상에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박영자 씨(1951년생)를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중국·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조선족·고려인·사할린 한인 등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6개 부문 2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는 박 씨는 일제강점기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중 징용을 당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고 타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족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으로 상을 받았다. 박씨는 "강제징용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인들의 가슴에 쌓인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는 상"이라며,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다가 사할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현지에 묻히신 외할아버지에게 이 상을 바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다음은 수상작을 3부로 나누어서 3부를 연재한다. 일본 땅에 묻히신 외할아버지를 찾다 (3부 편) 언제나 일본 외할아버지 사시던 곳에 가보나라는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제주 진외가집에서 외할아버지는 종전 이후 재혼도 하지도 않고 혼자 아들을 키우시다가 오사카에서 돌아가셨다고 알려 주었다. 1990년 한러수교 이후 한국의 친척들과 연락도 계속해 왔는데 세월이 바쁘다 보니 일본에 묻힌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을 생각만 가슴에 담고 가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2019년 어느날 페이스북에서 낯선 외국 남자가 친구하자는 신청이 들어와서 페친이 되었다. 한국말로 답변을 했더니 그분이 사할린 한인 역사와 나의 가족사에 관심을 보였다. 자신도 일본에서 태어난 제주도 출신 재일동포 2세로 살고 있다고 하며, 나의 제주도 출신 부모님이 사할린에 강제동원 되었다가 이중징용된 가족사에 대해 가슴 아퍼했다. 일본 친구는 30여 년 간직하고 있던 외삼촌의 연락처를 달라 하시고 오사카에 계신 외삼촌 댁에 전화해 보겠다고 하셨다. 기적처럼 외삼촌 댁 전화번호와 주소는 바로 연락이 되었다고 한다. 외삼촌은 12년 전에 별세하셨고, 외숙모는 살아 계시다고 전해 주었다. 이 소식을 받고 나는 이틀 동안 설움이 북받쳐서 울고 또 울었다. 다시 이틀이 지나 오사카에 사시는 얼굴도 모르는 외숙모 집 전화번호를 떨리는 손으로 두드렸다. 제주도가 고향인 재일교포 외숙모는 한국말을 잘 못하셔서 일본말을 섞어가며 오랫동안 가족 얘기를 해주셨다. "언제가 올 너의 소식을 기다렸다. 내일 당장 오라. 보고 싶다"라고 울먹이셨다. "외숙모님! 외삼촌을 못 만난 것이 마음이 아퍼요. 더 일찍 연락을 하는 건데 사는 것이 힘든 시기라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 가는 것이 러시아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내일이라도 가고 싶지만 준비를 해서 연락을 드리고 가겠습니다.”라고 전하고, 석달 후 비행기를 타고 오사카로 찾아갔다. 드디어 낯선 땅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묘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할아버지, 엄마 대신 제가 70년 만에 찾아왔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오늘에서야 엄마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외할머니가 평생 그리워 하시던 아버지를 손녀인 제가 찾았어요. 마지막 유언을 엄마 대신 제가 지켜 드렸어요. 이제 슬퍼하지 마세요. 편히 쉬세요” 먼저 생전에 만나지 못하고 헤어진 부녀간의 영혼을 위로해 드렸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그리워 하던 오라버니(나의 외삼촌)의 묘앞에서 모자간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이 순간부터 나는 눈만 감아도 우리 외가 가족이 얼마나 슬프게 살아오셨는지 이제는 뼈저리게 알 것 같다. 아버지를 그리워 하던 딸(어머니), 아들을 그리워 하던 어머니(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제주도에 남겨두고 온 딸을 만나셨으리라. 외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만나셨으리라. 나는 이제서야 돌아가신 엄마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나) 엄마! 이제 편안히 잠드소서..... 나는 이 글을 남기면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게 되었다. 우리 4대에 걸친 가족사는 사할린에 사는 손자에서 손자로 대대로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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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서 설을 맞이한 영주귀국 사할린 2세새해 아침 인천 남동구 달맞이 마을 사할린에서 신체가 불편한 어머니(주고분, 1936년생)를 모시려고 지난 달 4일 영주귀국한 사할린 2세인 딸(김기자, 1957년생)과 사위(김정호 1958년생)을 만났다. 지난해 1월 사할린동포지원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사할린 영주귀국 대상이 직계비속까지 확대되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안내와 러시아어 통역은 사할린 동포 공노원(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선생이 맡아 주었다. 12년 전 대한민국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1세인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2세가 영주귀국을 선택하고 조국에 들어온 것이다. 두 무릎관절 수술 후 혼자 바퀴가 달린 의료기에 의지하고 거동하시는어머니는 "조국에서 그리운 우리 막내딸을 이렇게 오게 해주어서 감사하다. 매일 기도를 했다. 같이 살게 해달라고...사할린에서 남편을 여의고 한국에 혼자 나와서 살다가 오늘 아침 설날에는 떡국을 같이 먹게 되다니...꿈만 같다. 모든 것이 감사하고 미안하다. 1200명이나 신청했는데. 350명만 오게 되었다. 아직 오지 못한 분들께 미안하다."면서 딸의 손을 잡는다. "그러나 나 때문에 잘 다니던 직장과 정든 집과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들어왔다. 이 근처가 아닌 멀리 시흥에 아파트를 배정 받았다. 인천에 자리가 나면 가까운 데로 오게 해주면 좋겠다. 아직 한국말도 서툴어서 고생을 한다."면서 눈물을 짓는다. 사할린 주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에서 주립 도서관에서 근무를 하다가 이주한 김기자씨는 "가장 시급한 것은 정착 프로그램과 메뉴얼이다. 아직 준비가 안된 것으로 안다. 한국말이 서툴어서 동네 마트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도 힘들다. 시흥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3번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 타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을 받기 힘들다. 아직 한국 사람들과는 전혀 소통이 안된다. 우리가 한국말이 잘 안나오니까. 우선 한국말부터 배우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리고 빠른 정착을 위한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필요하다." 라고 말했다. 사할린에서 오기전 사할린주한인협회(박순옥)가 주관한 설명회에서는 지자체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가 일정 기간 동안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제는1938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을 회유와 강제로 사할린으로 끌고 가서 탄광과 산에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해방 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억류되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식민백성이라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일부는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무국적이란 표식을 받고 어려운 삶 속에서 살아왔다. 1990년 한러수교가 시작되면서 영주귀국 사업으로 사할린 동포들 일부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여 전국 25개 지역에서 지자체의 보살핌을 받고 살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월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시행했다. 이 법에는 지원 대상을 기존 동포 본인과 배우자, 장애자녀에서 직계비속 1인과 그 배우자까지 확대하고 이들에 대한 지원을 국가 책무로 규정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사할린동포와 그 가족 91명은 지난달 27일 이 법에 근거해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동포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존감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정착을 위한 사할린 동포들만을 위한 특별한 기본 매뉴얼이 시급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그들이 가장 시급한 것이 한국어 배우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활동을 어떻게 시작 할 것인지 체계적으로 전개가 되어야 한다. 우선 교육을 받은 자원 봉사자들이 나서서 도와 주어야 한다. 당장 필요한 부분부터 면담을 통해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한다. 정부는 영주귀국을 원하는 사할린동포들을 순차적으로 모두 고국으로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오신 동포들이 편안히 생활할 수 있도록 세심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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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민족체험수기 대상,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2부)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제23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의 성인 부문 대상에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박영자 씨(1951년생)를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중국·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조선족·고려인·사할린 한인 등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6개 부문 2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는 박 씨는 일제강점기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중 징용을 당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고 타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족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으로 상을 받았다. 박씨는 "강제징용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인들의 가슴에 쌓인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는 상"이라며,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다가 사할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현지에 묻히신 외할아버지에게 이 상을 바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다음은 수상작을 3부로 나누어서 2부를 연재한다. 무국적으로 살다가신 아버지와 어머니(2부) 부친 박정환(1919년생)은 전라남도 목포 근처 작은 하의도라는 섬이다. 1944년 부친은 하의도의 한 사람과 함께 강제동원을 당했다. 사할린에서 부친은 산판(벌목장)에서 일했다. 우리 부모는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코르사코브 항구 근처에서 만나서 살림을 차렸다.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은 동포들은 그 당시 코르사코브에 도착하자마자 공동묘지부터 만들었다. 고향에 돌아갈 때 부모님의 유해를 가지고 가기 위해서다. 이후 사할린에 와서 산판과 탄판에서 큰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일본 탄광으로 다시 징용을 받아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을 맞고 죽어간 사람들. 사할린에 돌아왔으나 전쟁의 트라우마로 정신을 잃은 사람들, 이렇게 잃어버린 가족들 사진을 가슴에 품고 몇 년간이나 모여서 살았다. 모여서 살다가 러시아 국적을 받든지 북한 국적을 받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두 분 다 무국적이셨다. 러시아 국적을 받으면 조금은 자유롭고 경제적 혜택도 많아서 동서들이 같이 받자고 했지만 모두 거절을 하셨다. 혹시라도 국적 문제로 고향에 돌아갈 길이 막힐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하셨다. 집에서는 조선말만 사용하게 했다.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이 있으니 우리말을 잊으면 안된다고 야단을 치셨다. 그 덕에 우리 형제는 조선말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나는 1951년 코르사코브에서 맏딸로 태어난지 한 달이 되어 사할린 북부 스미르늬흐구역 오노르마을 근처 동포들만 사는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유는 고향땅에서 함께 끌려 온 부친의 동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산판(벌목장)에서 함께 작업을 했다. 오노르 마을에서 마침내 내 밑으로 남동생이 셋이나 연이어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 밑으로 남동생을 세 명이나 봤다고 나를 추켜 세워 주셨다. 이후 나는 8살이 되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우리 가족은 북적북적한 스미르늬흐 마을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파란 눈을 가진 백인 러시아 사람을 봤는데, 언어도 다르고 외모도 낯설어서 놀라웠다.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 "아버지, 이곳 사람들이 왜 우리랑 달라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조선사람들이 어떻게 사할린에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강제징용을 당했는지,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합병했던 당시 얘기를 그때 처음 설명해 주셨다. 나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우리 가족은 돌아갈 조국이 있고, 밀양 박씨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나는 나의 뿌리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나’라는 존재를 당당하게 했다. 아버지 나이와 비슷한 1세 분들은 만나면 똑같이 고향을 그리워 하셨다. 당시 사할린은 고향이 같으면 서로 서로 의형제를 맺고 기념 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었다. 어른들은 그 사진을 앞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셨다. 나 죽으면 이 사진을 누군가는 고향집에 언젠가는 가져가게 될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죽는날까지 간직하다가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간다. 그리고 누구나 항상 밤에 라디오 수신기를 켜고 한국 방송을 기다리셨다. 혹시나 고향 소식을 들을지도 모른다면서,...우리 아버지도 한국 노래를 들으시면서 자주 우시기도 하셨다. 당시 어린 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이해가 안 갔다. "노래가 즐거운데 왜 우시지?”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안하시고. 먼 하늘만 쳐다보시디가 독한 보드카를 한잔 드시고 주무셨다. 어느덧 나는 결혼을 하게 되어 집을 떠나게 된다. 88서울올림픽 때, 어느날 부모님 댁을 찾았다. 엄마와 아버지 두 분 다 눈이 퉁퉁 부어 계셨다. 밤새도록 우셨다고... 어제 늘 듣고 있던 라디오에서 바로 아버지 ‘박정환’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셨다. 사방팔방으로 연락을 취해 사할린 동포들을 돕고 있는 일본의 변호사 타카기 켄이찌를 통해 편지로 연락을 하게 된다. 다음 해 아버지 친척의 초청을 받아서 나는 난생 처음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을 통해 한국을 찾아갔다. 아버지는 3형제 중 둘째이시고, 아버지의 형과 남동생은 6.25전쟁 때 실종되셨다고 했다. 한 집안 삼형제가 뿔뿔히 헤어지게 된 것이다. 남의 나라들이 일으킨 전쟁이 만든 상처는 너무 컸다. 한국 방송에서 우리 아버지를 찾은 분은 한국에 계시는 작은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다. 소식이 주고 받다가 한국 적십자의 도움으로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리운 조국 땅에 발을 내렸다. 어머니는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외할아버지의 소식부터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고향인 하의도, 친척들이 사는 목포,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도를 다 찾아가서 친척들과 눈물 젖은 상봉을 했다. 물론 서울도 가보았다. 제주도에는 어릴 때 우리 엄마가 업어 주며 키웠다던 조카들을 만나서 가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보자 마자 피를 나눈 형제라는 피붙이들이 나누는 뜨거운 정은 사할린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감동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일본에 홀로 남겨진 어머니의 오라버니 연락처를 받게 되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일본 땅에 묻히신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가겠다고....엄마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약속을 했다. 그 당시에는 일본에 친척이 있는 경우 외국방문 허가가 떨어졌지만 일본에서 친척을 찾고 방문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지면서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으려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시고 1995년에 돌아가셨다. 다음 해 고향을 그리워하시던 아버지는 '이제 엄마도 없으니 고국으로 가고 싶다.'라는 의사를 나타내셔서 우리는 가족 모임에서 '그렇게 해드리자.'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영주귀국을 하셔서 처음에 아버지는 춘천 '사랑의집' 양로원에서 계시다가 나중에는 노환으로 재활기관인 인천 '사할린한인복지회관'으로 옮기셨다. 1년 후 나는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되어 자식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사할린에서 일을 그만 두고 한국으로 들어와서 여러 가지 힘든 일과 통역을 하면서 휴일마다 인천 양로원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찾아서 위로해 드렸다. 그러나 한국에 온지 5년이 지나서 출가를 한 맏딸이 출산을 하게 돼서 손녀를 돌봐주기 위해 완전히 사할린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다. 그리고 나서 2008년에 아버지께서는 조국에서 10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의 유해를 사할린으로 가져와 어머니의 묘 곁에 나란히 안치해 드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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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전’을 마치며/이종선취월당 밝은 창가에서 이종선 시와 노래는 원래 하나이다. 노래가 시이고 시가 노래이다. 우리 시에는 낭만과 사랑이 들어있고, 정한과 흥이 녹아 배어 있다. 필자는 지난해 9월부터 매주 일 년이 넘도록 노래로 불리던 시를 붓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왔다. 우리의 시를 붓으로 노래한 것이다.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을 연재하면서 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붓이 시의 흥취와 운율의 고저장단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흐름은 미세하여 다른 이는 알 수 없을 것이나 나는 내내 이 느낌으로 글씨를 썼다. 평시조는 사설시조를 제외하고는 대개 45자 내외로 글자 수가 한정되어 있다. 제한된 글자를 한 서체로 연작連作한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같은 체제의 중복으로 자칫 지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마다 변화를 주는 일이 절실했고, 나는 매번 고심하였다. 고체, 궁체, 민체의 모든 한글서체를 총동원했고, 필 속의 완급緩急, 먹의 농담濃淡과 획의 윤삽潤澁을 활용하여 시의 내용에 부합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정, 장방형의 구도와 선면 형태 등 다양한 지면에 주제를 돋보이는 장법章法을 구사하였다. 종이도 장지, 한지 중국선지 문양지 등을 고루 써서 변화를 주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한글 서체 조형의 변화에 천착해 왔다. 한 글자가 지니고 있는 수평과 수직구조의 조형을 벗어나고, 정형화된 일정한 자간과 행간의 관계를 자유롭게 운용하는 것이다. 수평과 수직구조를 벗어난 불균형의 자형에서 생성되는 활동성을 이용하여 생동감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부정형적不定形的인 낱글자에 대소의 변화를 주어 글자와 글자를 조응하게 하고, 이때 발생하는 불균형을 다음 글자들의 조응을 통해 안정을 이루어 가면서 행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행의 운용에 있어서도 낱글자의 운용에서처럼 첫 행의 불안한 구조를 다음 행이 보완하면서 안정을 이끌고 행과 행이 조응하여 전체 화면의 균형과 조화를 이끌어 내는 것, 이것이 내 작업의 핵심인 것이다. 크고 작은 돌들을 이리저리 쌓아 이룬 석축이나 돌담에서 느끼는 자연미와 조화미를 내 작품에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마치 개성이 다른 다양한 인간들이 소통하고 융화하면서 건강한 한 사회를 이루어 가는 과정과 같은 것이고, 서로 다른 식물들이 모여 산야를 이루고 각기 다른 물체들이 온천지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과 맞닿은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연 속에서 순리를 따라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 삼라만상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다. 필자의 이 작업은 주로 고체작품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개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서체이기 때문이다. 이 시도는 민체에서도 이어져 얼핏 같아 보이지만 작품마다 글자마다 모습과 표정을 달리하였다. 필자는 문자를 대함에 한자를 중국 글이라 보지 않는다. 오랜 세월 우리 문화에 젖어들어 체화되었고, 한자를 이용하지 않고는 의미소통이 어려운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미 한자는 우리의 문자생활에서 따로 할 수 없어, 한문까지야 능통할 바 없다 하더라도 한자 자체를 모르는 체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한글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상형문자인 한자를 아울러 쓸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문자의 소리와 표정을 두루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한자를 끌어들이지는 않지만 독해를 위해 필요한 경우 작품에 기꺼이 이용한다. 이 연재 작품에 한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노래가 만들어질 당시 친숙하게 사용됐던 문투이기에 현대인들에게는 낯설지만 피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에 그대로 썼다. 특히 시인의 시상을 옮기려 하였고 창자의 흥을 얹으려 하였다. 글자와 행간에 운율을 실었고 붓 끝에 흥을 실어 붓으로 노래를 불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 내 마음 속에서만 울리었고, 춤사위는 손가락 끝을 통해 보이지 않는 대로 붓 터럭의 가닥을 흔들었다. 작품을 쓰는 내내 태백이 되어 달빛 아래 술잔을 기울였고, 가끔은 도연명을 만나려 오류촌을 찾기도 했다. 황진이를 그리워하다가 이름 모를 시인을 만나 코가 삐뚤어지기도 여러 번. 세상에 좋다는 산촌 경개를 거침없이 두루 하였으며, 때론 속절없는 외로움에 가슴을 에다가, 있지도 않는 부귀공명을 버리고 끝내 운림 처사가 되었다. 고래 영웅들이 나누어 누린 복락을 나는 붓으로 노래를 부르며 독차지하였던 것이다. 이 아니 어찌 천복이 아니겠는가. 이번의 전시회는 국악신문에 2020년 9월부터 매주 연재하였던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작품 중 52점이 출품되어 백악미술관에서 12월 9일부터 1주일간 진행하였다. 내가 드러낼 수 있는 한글서예의 모든 것을 선보이는 기회였다. 붓으로 불린 우리 음악사설이 국악을 사랑하는 이들은 물론 서예인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호응을 이끈 것은 성과라 하겠다. 귀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국악신문사에 큰 고마움을 전한다.(202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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