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리뷰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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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김준수 "10년 이어온 빨간색 머리는 이번이 마지막"뮤지컬 '드라큘라' 김준수 (서울=연합뉴스) 최주성 기자 = "처음에는 빨간색 머리로 한두 번 공연해보고 반응이 별로면 바꾸려 했는데, 그렇게 10년을 공연했네요. 빨간색 머리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국내 뮤지컬 팬들에게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은 피를 연상시키는 빨간색 머리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가수 겸 배우 김준수(37)가 2014년 뮤지컬 '드라큘라' 초연부터 10년째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드라큘라로 무대를 누비기 때문이다. 정작 김준수는 머리색을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 매 시즌 변화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12일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개막하는 10주년 공연을 마지막으로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머리와 작별한다.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인터뷰한 그는 "5일마다 머리를 새로 염색해야 해서 머리색을 유지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며 "베갯잇도 다 바꾸고 수건도 한 번 쓰고 나면 물들어서 버려야 할 정도"라고 남모를 고충을 털어놨다. 그는 "처음에는 강렬한 인상을 주고 싶어 머리 염색을 택했지만 이제는 변화를 주려 한다"며 "그동안의 역사를 총정리하는 10주년 공연을 마치고 변화를 주면 팬들도 갑작스럽게 느끼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작품이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로는 압도적인 무대를 꼽았다. 드라큘라의 성을 구현한 세트와 4단 회전무대를 활용한 연출은 관객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요소로 꼽힌다. 김준수는 "'드라큘라' 세트는 10년 전에 만들었지만 지금 봐도 최상급"이라며 "그때부터 관객에게 센세이셔널하게 다가갔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랑받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준수는 '드라큘라'가 자신을 '시키는 것만 하던 배우'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배우'로 만들어줬다고 돌아봤다. 자신이 낸 의견이 작품 곳곳에 반영되면서 작품에 출연하는 남다른 의미도 갖게 됐다. 드라큘라가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는 넘버 '그녀'(She)가 대표적인 예다. 김준수는 곡과 별도로 존재하던 드라큘라의 긴 대사를 곡의 일부로 삽입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 지금의 넘버를 완성했다. 그는 이 넘버에 대해 "드라큘라가 지루하게 과거를 설명하는 대신 노래로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졌다"며 "제가 작품을 연출한 것은 아니지만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 덩달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2003년 그룹 동방신기로 출발해 그룹 JYJ와 솔로 활동을 두루 경험한 김준수는 어느덧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2010년 '모차르트!'로 뮤지컬 무대에 진출한 뒤 '엘리자벳', '데스노트' 등의 대표작을 남기며 정상급 배우로 활약하고 있다. 매년 뮤지컬과 콘서트 등으로 쉴 새 없이 팬들을 만나는 그는 자신의 활동이 늘 기적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지난 9월에는 소속사 뮤지컬 배우들과 갈라 콘서트를 열고 싶다는 소원도 이뤘다. "그룹 활동 이후로도 매년 콘서트를 열고 있으니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대중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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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유지숙, “서도소리는 나의 운명”알록달록한 색으로 갈아입고 있는 가을의 한복판,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유지숙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의 민속악단을 향한 마음, 소리 인생, 작업 방향과 염원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나누어 보았다. 물들어 가는 가을의 풍경과 잘 어울리던 따뜻하고 유쾌한 그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자. 정-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다시 한번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A. 감독으로 취임하자마자 바로 민속악단 정기연주회가 있었어요. "꽃신신고 훨훨”이라는 제목으로 삶과 끝에서 마주하는 평안이라는 주제의 공연을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또 그 후 지방공연, 기획공연, 상설공연 등의 모든 공연과 단의 살림을 살피느라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냈어요. 정-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취임으로 인해 예술적으로든, 삶적으로든 변화된 부분이 있으신가요? A. 우선 감독직을 수행하다 보니 민속악단을 살펴야 할 일이 많아 외부 활동을 자제하게 되며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어요. 제자를 양성하는 일, 외부 개인 공연, 심사, 강의 등 여러 스케줄이 엉켜 처음엔 혼란스러웠어요. 하지만 이런 저런 일들을 정리하며, 오히려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모든 것을 다 떠안고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려놓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죠. 그리고 그런 일들은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 이전 생활의 패턴과 달라진 것이 아쉽지는 않으세요? A. 아뇨. 생각을 해보니, 전 음악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끝도 없이 달려온 것 같아요. 소리를 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 내거나, 공연하는 등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해내는 것이 늘 즐거웠어요. 그렇게 하는 일들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일은 점점 늘어났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체력적인 한계가 느껴지더군요. 그게 처음엔 속상하기도 하고 아쉬웠지만, 어느 순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지금 이 시기에 내가 해야 할 일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죠. 저는 늘 제게 있어 삶과 행복은 소리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서 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제가 겪은 모든 삶과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나누어 주고, 소리의 길을 제시하며 안내, 독려해 주는 스승의 역할을 더욱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정- 개인적으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을 어떤 방향으로 운영해 나갈 예정이신가요? 선생님께서 만들어 나가고 싶은, 그려내고 싶은 민속악단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A. 우리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은 각자의 기량이 굉장히 뛰어난 분들로 이루어진 단체입니다. 이분들이, 최고의 악단에서 개인의 기량을 최고로 뽐낼 수 있도록, 자부심을 갖고 음악을 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 주고 싶어요. 저도 민속악단에서 30여 년을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해준다기보다는, 같이 고민하고, 같이 나누고, 같이 살피며 함께 동행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힘든 일이 오더라도 늘 편안할 수 있는 단체, 그리고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정- 사실 전 이 질문을 드리며 민속악단이 대중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면 좋을지 이야기해 주실 거로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단원들을 가장 먼저 마음 깊이 생각하시는 모습에 보이는 것만 생각했던 제가 조금 부끄러워집니다. 선생님의 민속악단을 향한 애정이 느껴지네요. 다음으로는 선생님께서 오랜 시간 해 오신 서도소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어요. 사실 ‘서도소리’ 하면 우리 갈 수 없는 지방의 민요이기에, 무언가 아득하고 애절한 느낌이 들다가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정겨움이 듭니다. ‘서도소리’하면 어떤 감정, 느낌이 드시나요? A. 그냥, 제 운명 같아요. 이런 표현이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너무 좋다. 눈물이 나도록 좋다는 표현밖에는 할 수가 없네요. 서도소리는 제 삶 그 자체에요. 정- 학부 시절, 서도풍류를 듣고 너무 좋아 연주하고 싶어 몇 없는 음원을 모으고, 악보를 직접 채보해 가며 공부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서도 음악은 남도나 경기제처럼 익숙하지 않고 공부하기 더 어려운 환경인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데요. 서도 소리의 길을 오래 걸어오신 선생님도 이런 부분에서 외로우셨으리라 감히 생각해 봅니다. 돌이켜 보았을 때 서도 소리를 하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A. 기악의 경우 자료가 많지 않고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아 어려운 점이 아무래도 더 많았을 것 같네요. 서도소리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노래인데, 여긴 그 지역이 아니고, 우리는 배운 대로, 익힌 대로 노래하고 전승해야 하므로 진짜 그 원형을 찾기 위해 더욱 고민해야 합니다. 소리의 경우 어려운 점은, 서도소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소리가 일반적이지 않으며, 어렵다는 거예요. 특히 가장 어려운 게 ‘요성’입니다. 모든 국악의 기본 바탕은 ‘요성’인데, 서도소리의 요성은 잘게 떨면서도 깊어야 해요. 잘못 떨면 발발성 요성이 되고, 너무 깊이 들어가면 소리의 맛이 이상해지죠. 또 음을 곡선처럼 흘러내리는 특징이 있는데, 배우는 사람 입장에선 그게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걸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특히 고민이 많이 되어요. 그런데 전 이렇게 생각해요. 구전심수라고 하죠. 배우는 사람이 선생님의 소리와 혼과 마음까지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그 방법으로 소리가 전승되고 있잖아요. 가장 원시적이지만 가장 정확한, 올곧은 교육, 그리고 마음이 있기에 이 소리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제자 양성에도 꾸준히 힘을 쏟고 계시죠. 교육자로서 학생들이 어떤 소리꾼이 되었으면 하시나요? 또 무얼 가장 강조하시나요? A. 예전에는, 제자들이 많은 게 참 좋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서도소리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만큼 소리의 본연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길인만큼, 진정한 소리꾼이 되기 위해 온 마음으로 노력하는 학생이 있다면, 내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아요. 가르칠 때 기술적으로는, 서도소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특징적인 떠는 요성, 흘러내리는 곡선의 맛, 시김새 등을 기본적으로 많이 가르치죠. 그리고 그 외에 제가 강조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음악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안 돼요. 우리는 대중 앞에 서서 노래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인데, 거짓이 몸에 배어있다면, 그 음악이 과연 진실할 수 있을까요? 항상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음악을 대하고 삶을 대하길 바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맥이 끊어졌던 토속민요를 발굴하여 다듬고, 전승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작업을 계속하고 계시는지, 또한 앞으로도 하실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A. 그럼요. 토속민요는 보물이에요. 토속민요 작업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기존에 모르던 소리를 들으면 참 신기하고, 좋고, 모르던 맛을 배우게 되어 너무나도 행복하죠. 토속민요는 같은 노래인데도 여러 형태로 나뉘어져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중 가장 잘 부르신 분의 음악을 기준으로 하여 소리를 다듬고, 만들어 나가는 작업을 하죠.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이 정형화되어 사람들에게 불리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소리를 오래 하다 보니, 악보만 보아도 꺾거나 흘리는 구간이 어느 순간 바로 알아차려질 때가 있어요. 그걸 바탕으로 토속민요 작업을 했을 때 서도소리가 딱 만들어지면, 마치 죽어있는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어 꽃을 피운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정-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토속민요 작업은 어렵지만, 그만큼 참 가치 있고 귀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연주와 작곡을 통해 토속민요 작업을 늘 해 보고 싶었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의 길을 잘 알지 못해 어려웠던 경험이 있는데요, 이렇게 소리꾼들이 소리의 길과 결을 찾아내고, 음악가들이 힘을 모아 토속민요 발전을 도모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으로, 계획 중이신 개인 발표나 음반 계획이 따로 있으신가요? A. 네, 음반의 경우 이달 말에 발매될 예정입니다. 또 앞서 이야기했지만, 기존에 불리던 소리뿐 아닌 안 불리던 소리, 토속민요 작업을 계속 해 나갈 생각이에요. 이젠 제자들도 많이 이어받아서 해 주고 있어 참 기쁩니다. 그리고 무대에서 제 소리만 하기보다는, 자라나는 소리꾼들이 장을 펼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내년에는 ‘서도예인전’이라 하여 소리꾼들을 선발하고,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나갈 예정입니다. 정- 곧 있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연주회에 관해 이야기 해주세요. A. 이번에 있을 공연은 ‘생생풍류’라는 이름의 기획공연이에요. 100년이 지나도 한결같이 어렵고, 근본이 되는 민속악 ‘대풍류’, ‘시나위’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깊게 감상해 볼 수 있도록 무대를 기획해 보았습니다. 추가로 경기소리풍류, 서도소리풍류도 함께 연주하기에 다양한 우리의 민속음악을 들어볼 좋은 기회가 될 거로 생각합니다. 단원들이 아주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정- 선생님은 어떤 소리꾼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A. 늘 마음으로 염원해요. 소리를 참 잘하는 소리꾼이 되고 싶다고요. 사람들이 평가하는 제가 아닌, 저 자신이 평가하는 제가요. 내가 내 소리에 취하고, 자유자재로 소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사실 그 생각도 해요. 내가 정말 소리를 잘하게 될 땐, 목이 안 나오겠구나. 그래도, 소리가 잘 안 나오더라도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소리꾼. 그런 소리꾼이 되고 싶어요. 서도소리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냐고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대답하셨던 ‘운명’이라는 단어가 인터뷰 내내 마음을 휘감고 떠다녔다. 어쩜 이렇게 소리를 사랑하실 수 있을까. 계절을 맘껏 즐기고, 행복한 삶을 살며 가장 사랑하는 소리를 꾸준히 해 나가고 싶다는, 모든 일에 평안히 마음을 쏟고 싶다는 유지숙 선생님. 따뜻하게 채워진 그 마음과 열정은 앞으로도 우리 곁에 오래도록 아름다운 소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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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 다시 피리를 마주하다: 박범훈 명인갑작스러운 찬 바람으로 계절이 바뀜을 실감하게 되던 11월의 어느 날, 곧 있을 ‘박범훈류 피리산조 연주회: 회향(回向)’ 연주회 준비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계신, 국악계의 원로 박범훈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를 만났다. 120명의 연주자와 함께 할 이번 공연부터, 피리산조, 배움과 가르침, 전통과 창작에 대한 가감 없는 이야기를 다양하게 들어보았다. Q.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 뵙고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A. 국악계에 남은 생을 기여하고자 노력하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작품도 열심히 쓰고, 지휘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요즘은 40여 년 전에 스승(지영희)의 가락을 바탕으로 만들었던 피리산조를 제자들과 함께 연주하며 전승, 보존하는 데에 힘쓰고 기여하고자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마 나에게 허락되는 데까지, 이렇게 계속 국악계에 보탬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일하며 지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선생님께선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석좌교수를 맡고 계시죠. 동국대 한국음악과는 2023년 서울캠퍼스에 개설되었고, 이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신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학과 운영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A. 예. 입학 정원은 15명이었지만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제가 뭘 했다기보다는, 서울의 메이저 대학 안에 국악과를 설립해 주었다는 점에서 동국대 측에 참 고맙죠. 아직 설립한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학부 과정 외에도 대학원 석사, 박사, 석박 통합과정까지 모두 만들어져 있어 한국음악과의 앞날이 더욱 기대됩니다. 특히 문화재급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직접 학생들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Q. 동국대 한국음악과는 불교음악과 맥을 같이 하며 포교를 위하여 설립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타 국악과와 비교했을 때 수업 과정 등에 차이가 있나요? A. 큰 차이라기보다는,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에서는 맞춤형 교육을 한다는 데에 분별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공수업에서 학년별로 배워야 할 커리큘럼만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닌, 개개인 학생의 역량에 맞추어 가르칠 것을 정한다는 거죠.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 상의하고, 흥미나 보완점 등을 찾아 그에 맞춘 전공 수업을 하는 겁니다. 또 가무악을 함께 가르치며 지휘, 무용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끔 합니다. 그러한 맞춤 수업이 이 시대의 전통음악을 하는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 그로 인해 국악계가 더욱 발전하는 큰 초석이 될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Q. 맞춤형 수업이라니, 개개인의 역량이 더욱 늘 수밖에 없는 좋은 수업이네요. 학생들의 미래가 함께 기대됩니다. 요즈음 준비 중이신 11월 25일 공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120명이 연주하는 피리의 향연이라는 부제목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이번 공연은 어떤 공연인가요? A.이번 공연은 박범훈류 피리산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과 함께 무대에서 연주하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대학교수부터 연주자, 학생, 취미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주자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제게도 참 뜻깊은 공연이 될 것 같네요. 박범훈류 피리산조를 연주하는 문중들이 한데 마음을 모아 한 자리에서 연주하는 기회를 가졌다고 할 수 있겠죠. 떼 피리로 연주하는 겁니다. 프로그램 순서에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무대의 첫 막은 이 피리산조를 잉태한, 모태가 되는 경기시나위를 연주합니다. 특히 지영희 선생님의 첫 제자인 최경만 선생이 연주함으로 더욱 의미가 있죠. 그 외에도 제가 산조를 만들 때 많이 참고했던 지영희 선생님의 해금산조 연주도 있고, 박범훈류 피리산조에 관해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 중 토크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Q. 공연 기획부터 함께함의 목적에 이르기까지 참 뜻깊은 무대가 아닐 수 없네요.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선생님께서 창시하신 박범훈류 피리산조는 지영희 경기시나위를 모체로 조와 다양한 전조 등을 활용하여 창시한 산조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영희 선생님의 경기시나위와는 차별을 둔 부분, 즉 작곡가, 창시자로서 선생님만의 특수한 주안점을 두고 만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A. 산조를 만든다는 건 산조의 틀, 짜는 기법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거죠. 또 악기의 특징이 잘 드러나야 한다는 겁니다. 피리산조의 경우 피리로 불었을 때 특징이 드러나는 산조여야 합니다. 그 가락을 대금이 불어서 더 좋으면 과연 피리산조로써의 매력이 있을까요? 산조는 악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연주자가 만들어야만 값어치가 있습니다. 전 산조를 만들며 피리의 특수 주법이나 특징, 그리고 독창성을 다르게 하기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Q. 박범훈류 피리산조에는 경토리가 굉장히 많이 녹아있는 것이 특징이잖아요. 경토리를 산조에 녹여낼 때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하셨나요? A. 보통 산조에는 전라도의 남도제가 많이 들어가긴 합니다만, 지영희류 해금산조, 지영희제 경기시나위에는 경기제. 즉 경토리의 특징이 특히 강합니다. 경기 시나위에는 경토리와 계면조의 특징이 모두 녹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꺾는 음도 남도제와는 조금 다르고, 계면조라고 해도 너무 심각하거나 애절하지만도 않죠. 또 경토리와 계면조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피리의 특징으로 이야기하자면, 무속음악과의 관계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무속음악에서 피리는 반주에 많이 쓰였습니다. 무녀가 노래할 때 조(key)가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조에 맞추어 반주해야 하기에 관의 변화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기제에서 주법이 굉장히 많이 발전했어요. 목튀김, 혀치기 등 특수주법이 아주 다양해졌죠. 피리만의 특징이 생긴 겁니다. 저는 그런 경기제의 특징, 피리의 주법을 제 산조에 다양하게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박범훈류 피리산조를 들어보면 조성의 변화가 많고, 관을 올려잡고 내려 잡으며 주법이 많이 변화하는, 경토리가 도드라지죠. Q. 요즈음 많은 젊은 연주자들이 각자의 유파를 만들고 산조를 기본으로 삼아 음악 활동을 해 나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조를 어떻게 보시나요? 또 그들에게 해 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A. 젊은 연주자들이 산조에 관심을 두고 만들어 나가는 현상이 참 좋네요. 유파를 짜서 남기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산조의 특징을 확실하게 담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악기를 오랫동안 연주하고, 악기의 특징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게 중요하죠. 그 악기의 도사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산조의 틀. 즉, 장단, 조성, 시김새 등의 조건을 확실하게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저 즉흥으로 짜서 연주하고 남기기엔 생명력이 없어요. 그렇게 꾸준히 연구하고, 연주하고, 기본적인 특징을 확실히 살린 후에 본인의 독창성이 입혀지면, 오래도록 남는, 인정받는 산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Q. 특히 선생님께선 수많은 창작곡을 오랜 세월 만들어 오신 작곡계의 원로시기에 더더욱 여쭙고 싶던 질문입니다. 전통이든 창작 음악이든, 창작하는 데 있어 어떤 것을 기본적으로 꼭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A. 창작이라는 것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게 아니에요. 유(有)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거지. 음악에 들어있는 게 하나도 없으면 뭐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건 소리로써 사람을 괴롭히는 거예요. 항상 작곡하는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어요. ‘소리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라.’ 그러려면 인풋(input)이 정말 중요합니다. 공부도 하지 않고 좋은 곡이 나오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죠. 다양한 음악적 소양과 경험, 고민, 습득이 필요해요. 그렇게 내게 다양한 것들이 축적되면, 음악은 그때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예요. 내가 만들고자 하는 방향을 확실하게 잡고 음악을 만들고 나면, 결국 생명력을 가진 곡이 되어 오래도록 연주될 겁니다. Q. 마지막으로 질문드릴게요. 저도 그렇지만, 다양한 음악이 유입되고 수많은 장르가 뒤섞이며 어디서든 자유롭게 음악을 듣고 배울 수 있는 시대기에 더욱 이 시대의 전통을 하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과 생각이 듭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국악인들이 절대 놓치지 않아야 할 마음가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전통이든, 현대음악이든 간에, 예술을 전공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에요. 미(美)를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저는 어느 자리에 있든 내 전공을, 음악을 놓쳐본 적이 없어요. 왜? 좋으니까요. 억지로 하는 사람들은 도중에 그만두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음악을 하며 어려운 일도, 힘든 일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사람은 그 고비를 끝까지 넘습니다. 내가 좋아서 한다는 그 마음가짐, 예술에 대한 자긍심을 놓지 않고 전통을 해 나가길 바랍니다. 이 시대의 존경받을 원로로 통하는 박범훈 석좌교수가 전통 예술계에 오랜 시간 이바지하며 높은 평판을 이루어 온 데에는, 음악을, 창작을 전심으로 사랑해 온 꾸준한 세월이 있었다. 11월 25일 펼쳐질 그의 공연 제목은 ‘회향’. 긴 세월 쌓아온 음악을 돌아보며, 그 음악의 뿌리, 근원으로 돌아가 피리를 오롯이 마주한다는 의미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이어온, 그리고 미래를 이을 박범훈류 피리 산조가 들려 줄 우리 음악에 대한 강인함, 사랑, 그리고 굳건함이 벌써 귀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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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 소리꾼 김준수 "연습 때도 치마 입고 사뿐사뿐 걷죠"얼굴에 새하얀 분칠을 하고, 몸 선을 드러내는 새빨간 의상을 입은 우희는 경극 '패왕별희'에서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 캐릭터다. 동명 영화에서 장궈룽(장국영)이 극 중 경극 배우로 여장했던 캐릭터로도 유명하다. 이 역을 창극 무대에서 소리꾼 김준수(32)가 맡는다. 다음 달 11일부터 1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창극 '패왕별희'는 국립창극단의 가장 파격적인 레퍼토리다. 2019년 초연과 재연 이후 4년 만에 중극장에서 대극장으로 규모를 키워 올리는 공연이다. 김준수는 초연과 재연 때도 우희 역을 맡아 중국 경극의 전설적 배우 메이란팡을 보는 것 같다는 호평을 받았다. 지난 25일 국립극장에서 만난 김준수는 "작품을 할 때마다 캐릭터에 몰입하려고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더더더더' 노력했다"고 힘줘 말했다. 배역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창극 무대에 서는 소리꾼의 자질이지만, 남자인 그가 여자 캐릭터 우희를 연기하는 데는 '더'가 4번은 들어가야 할 만큼 노력이 필요했다. 캐릭터의 성별뿐만 아니라 손끝으로 세상을 표현한다는 경극의 몸짓을 익히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김준수는 "여성이 가진 섬세함과 유연함이 필요한 역이라 연습실에서도 계속 치마를 입고 있다"며 "손동작이나 몸동작을 여성적인 선을 살리면서 작게 해야 하고, 보폭을 아주 짧게 해서 걸어야 한다. 그렇다고 요란하면 안 되고, 우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성격이 급한 편이어서 평소 걸음걸이가 빠르다. 사뿐사뿐 걷는다고 걷는데도 남성적인 면이 툭툭 튀어나온다"고 머쓱해했다. 김준수가 여성 캐릭터를 맡은 건 '패왕별희'가 처음은 아니다. 2016년 초연한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헬레네 역을 맡았다. 다만 헬레네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존재로 중성적인 느낌이 강한 캐릭터였다. 머리 스타일도 가발 없이 짧은 상태 그대로 무대에 올랐다. 반면 우희는 항우와 슬프고 애절한 사랑을 나누는 여성이다. 머리카락도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길게 내려오고, 진한 화장은 물론 긴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도 칠한다. 의상에서도 호리호리한 몸 선을 한껏 드러낸다. 김준수는 "사실 초연 때는 빨간 매니큐어나 긴 머리, 치마 모든 게 다 어색했다.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했던 것 같다"며 "그런데 지금은 예뻐 보이고 싶은 욕심에 얼굴에 뭐라도 하나 더 바를 수 있을지, 네일아트도 뭘 더 해야 할지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러 살도 2㎏ 정도 뺐어요. 의상이 타이트하거든요. 재연 때는 의상을 좀 더 넉넉하게 만들어주셨는데, 핏(모양새)이 타이트할 때보다 안 예쁘니까 도저히 못 입겠는 거예요. 옷 자체에 우희의 예쁜 선이 들어가 있는데, 그 디자인을 포기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이번에는 핏도 살리면서 팔을 들거나 움직일 때 안 불편할 정도로 옷을 고쳤어요." 우희는 '패왕별희'의 명장면인 '쌍검무'도 소화해야 한다. 양손에 긴 칼을 들고 추는 고난도 검무다. 이 춤의 백미는 허리를 뒤로 90도 가까이 젖히는 장면이다. 김준수는 '쌍검무'를 어떻게 준비하냐고 묻자 "너무 혹독해요"라며 웃었다. 그는 "허리 꺾는 신이 딱 절정이다. 우희가 항우의 이별을 암시하는 이별의 춤이라 잘 마무리돼야 관객들도 함께 슬픈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다"며 "그러다 보니 허리를 꺾을 때 검이 땅에 닿는 순간까지 꺾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도 초연 때는 춤추다 보면 숨이 턱까지 차서 노래를 부르는 게 힘들었다"며 "지금도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그때의 호흡을 알고 있어서, 호흡을 분배할 줄 알게 되니 여유가 좀 생겼다"고 덧붙였다. 창극에는 없는 경극 특유의 손동작을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판소리에도 소리의 가락이나 사설의 극적인 내용에 따라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인 '발림'이 있지만, 경극의 손동작은 마임처럼 극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어서 차이가 있다. 김준수는 "소리꾼의 발림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만, 경극의 손동작은 정형화돼 있다"며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손동작으로 표현한다. '대왕님, 근심을 달래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이 대사도 '근심', '달래다', '어떤가' 하나하나 표현해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창극 '패왕별희'가 경극의 양식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시각적인 부분은 경극의 요소를 살리되, 대사나 음악 등 청각적인 측면은 창극의 매력을 부각했다. 김준수는 "경극의 창법이나 발성은 쓰지 않고, 소리꾼에게 편한 목소리로 노래한다"며 "대신 우희는 여성 캐릭터이기 때문에 제 목소리에서 부드러움을 찾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보통 소리꾼은 단전에서 뽑아 올리는 힘찬 소리를 내잖아요. 슬프면 '아이고∼'라고 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우희는 전쟁을 겪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상황이니, 그 절절한 마음을 누르면서 노래하려고 해요. 절제된 소리를 경극 특유의 동작들과 함께 보시면 새로운 맛이 있으실 거예요." 김준수는 창극뿐 아니라 TV 예능, 뮤지컬 등에서도 활약하며 '국악계 아이돌'로 불리지만, 자신의 뿌리는 '소리'에 있다고 강조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김준수는 방학 때면 스승 박금희 명창을 따라 '산공부'를 다녔다고 했다. 박 명창의 또 다른 문하생 송가인도 함께 산공부를 다니던 멤버였다. 고등학생 때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돈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소리를 안 하겠다며 방황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가야 할 길은 소리'라는 생각에 몇개월 만에 돌아왔다고 했다. 이후 2013년 국립창극단에 최연소 단원으로 입단했고, 2018년에는 3시간이 넘는 '수궁가' 완창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후에도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틈틈이 소리 공부를 해왔다. "몇 달 전에 10년 만에 춘향가 공부를 끝냈어요. 국립국악원 유미리 선생님께 배운 6시간 분량이에요. 공부를 게을리해서 이제야 끝냈다고 혼날 줄 알았는데, 선생님께서 '끝까지 소리를 놓지 않아서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소리는 제 근본이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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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나의 역사전쟁'동국대학교 교수를 퇴임한 윤명철 교수는 행동하는 역사가이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 직접 몸으로 답사해서 그곳에서 역사의 의미를 새롭게 발굴하는 방식이다. 윤명철 교수가 지난 해부터는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맡으며 중앙아시아 역사에 한국사를 접목하는 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마침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한 윤명철 교수를 (주)국악신문 이동식 대기자가 만나보았다. Q. 오랫만입니다. 최근 근황이 궁금합니다. A. 지난해 7월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 있는 국립대학교 고고학과 초청 정식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과목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여러나라의 문화연관성이고요 가을 학기부터는 중앙아시아의 고대 종교, 신화 등을 강의할 예정입니다. Q. 벌써 30년 전인가요, 윤 교수님은 젊을 때 똇목을 타고 동아시아 바다를 직접 건너간 것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의 중요 지역을 답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동안 어느 지역을 다니셨습니까? A. 아이구! 뗏목 탐험은 정말 젊을 때 일이고요, 몇년 전에는 경주에서부터 중국을 거쳐 투르키에의 이스탄불까지 육로로 자동차 탐험을 한 적이 있고요, 배를 타고 유럽 쪽 북해를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했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를 잇는 트핸스 시베리아 열차 탐사를 24일 동안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Q. 왜 그렇게 많이 다니시는 것입니까? A.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지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 유라시아 대륙인 만큼 거기에 사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 역사의 풍부한 원형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아득한 시원의 시간동안 민족의 형성과 이동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의 생존 조건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역사와 문화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파악해서 우리 역사를 재구성해내기 위함입니다. 먼저 현장을 가야 공간의 범주를 알 수 있고, 생태환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요. 특히 만주 일대는 현장에 가지 않으면 모릅니다. 저는 고조선을 원조선이라고 부르는데, 원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알려면 만주지역을 알고 생태환경을 알아야 합니다. 생태환경이 다르면 생산양식이 달라지고, 생산도구가 달라져요. 생산도구가 달라지면 그에 따라 생활양식이 달라지고, 또 민속, 신앙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철학이 달라지고,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시스템, 정치가 달라지는 것이죠. 그러면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먹고 살았고 어떻게 적과 싸웠으며 그들의 신앙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고, 역사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게 되죠.. Q. 중앙 아시아에서 강의를 하시려면 언어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설마 현지어를 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고? A. 아, 물론 제가 현지어를 능숙하게 하는 것은 아니고요, 다행히 한국에서 오랫 머물었던 유능한 현지인이 통역을 해주셔서 가능합니다. Q. 여전히 궁금한 것은, 아직 긴 기간은 아니지만 타국에 가 계시면 힘들텐데요? 윤: 네 그렇지요. 다행히 집사람이 같이 가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우리 70년대처럼 정말 친절하고 정이 많아서 집사람이 아주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기회가 돠면 와서 살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그 나라에서 우리 한국에 대한 관심은 어떻습니까? 윤: 관심이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습니다. 한국은 자유시장 경제로 성공한 사례인데, 그 나라는 소련이 무너진 뒤에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인 만큼 한국의 경험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또 의외로 한국을 다녀온 노동자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수도 같은 데서는 스무 명 중 한 명 꼴로 한국에 가서 일을 하고 돌아오신 분들이 있는 곳도 있어요. 이곳 분들이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한국에서도 좋아했고요, 돌아와서도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저희를 환영하고 뭐라도 도와주시려고 해서 고맙습니다. Q. 사마르칸드라고 하면 아프라시압의 벽화무덤 속에 있는 한반도의 무사 그림이 유명한데,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인인가, 신라인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A. 아프라시압은 6~7세기 그 일대의 수도로서 번성하다가 사마르칸드로 중심무대가 옮겨진 곳인데, 당시 상황으로 보면 고구려인이라고 봐야지요.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이후라고 본다면 5~7세기인데 당시 중앙아시아의 주인공은 소그드인들이고 이들이 초원지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유럽과 동아시아, 중국 당나라를 잇는 핵심 교량 역할을 했습니다. 고구려와도 그때부터 교류가 있었고요. Q. 그렇다면 단순히 돈이나 물자만 오고갔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A. 그렇습니다. 당나라 역사에 소그드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유명한 이태백의 시에도 이들이 추는 춤인 호선무(胡旋舞)가 등장할 정도인데, 그들을 통해서 음악, 악기, 춤, 서커스, 그리고 음식재료와 조리방법 등 삶의 곳곳에서 교류가 이뤄졌다고 보여집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고구려도 이런 문화의 유입이 많았고요, 고구려 벽화 고분을 보면 그런 장면들이 많이 있지요. 저는 그런 교류의 역사도 현지에서 더 새롭게 발견하고 규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Q. 우리는 실크로드를 통해서 서쪽 문화가 들어오고 중국에서는 비단이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는 더 북쪽 아닌가요? A. 근세 유럽인들이 실크로드를 답사하면서 사막 남로와 북로를 개념화했습니다만 저는 그 문물의 이동과 교류의 핵심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길을 통해 이뤄졌다고 보고 '오아시스로드'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자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막이건 초원이건 오아시스가 없으면 길이 열리지 않으니까 이제는 넓은 시각의 오아시스 로드라는 측면에서 이 지역 역사를 다시 들여다 보고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업을 제가 하고 있고요. Q. 우즈베키스탄에서 TV출연 등을 많이 하신다고 하던데 A. 네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문명의 길목의 주인공이었던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점을 나서서 알려드리고 있고요. 이들을 통해 우리와도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말하지요. 나아가서는 그 옆에 투르키예인들의 나라와 역사가 있었고 이들 역시 고구려와 역사적으로 많이 연결돼 있어서, 그들의 후예인 투르키에 인들이 우리를 형제나라라고 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입니다. 그런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한 역사와 문화의 교류를 새롭게 찾아내고 의미를 알리는 일입니다. Q. 하실 일이 엄청 많은 것 같습니다. 올해 초에는 미국 예일대에서 강의를 하신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A. 네 지난 2월 예일대 특강 때에 역사에 대한 저의 지론인 ‘ 행동학’을 강조해서, 참석자분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역사를 잘 모릅니다. 그들에게 "우리 민족은 역동적인 노마드 문화와 농경 정착문화가 복합된 모스테빌리티(Mostability)형 문화”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또 만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고구려 시기 중만주까지는 직접 통치하고, 그 너머의 지역은 해당 지역 사람을 통해 영향을 행사하는, 그러니까 여진족, 말갈족들이 용병으로 동원되었죠. 하지만 그 북쪽인 서북 만주 같은 경우는 간접 영향권일 뿐이에요. 이들 북방민족이 중국으로 건너가 요, 금, 원, 청과 같은 정복국가를 세웠지만 우리는 요동과 한반도를 고수했어요. 우리가 힘이 있지만 그 쪽을 굳이 편입시키지 않은 것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홍익인간’의 개념이 깔려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21세기 인류가 지향하는 문명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이 고대부터 만주와 한반도뿐 아니라 바다를 통해 진출한 해륙국가라는 ‘동아시아 지중해 모델’에 대해 설명을 했고 거기에 참석자들의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은 ‘아시아의 바이킹’으로 불렸던 발해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해양문화의 특성은 보존되지 않는 것인데, 발해의 조선술에 관해서도 그 점을 지적하면서 발해의 배는 바이킹의 배와 비슷했을 것이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Q. 밖에 나가계시면서 국내활동도 하신 것 같던데, 김지하 선생을 추모하신다고요? A. 추모를 넘어서서 그를 사상가로서 재조명하는 작업입니다. 지난 5월 초 1주기를 맞아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대한 학술포럼을 연 바 있습니다. 김지하 씨는 민주화운동가, 혁명가, 시인, 사상가 등 다양한 명칭으로 한국 현대사에 큰 위상을 남겼고 평생을 인권, 자유, 양심, 민족, 문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했으며, ‘생명사상’이라는 자기의 논리와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김지하씨는 이제 사상가로서 다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그의 특정 발언이나 행위, 선택에 대해 굴레를 씌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지하 씨는 소년 시절부터 말년 혹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관된 삶을 살았다. 진실을 찾으려 했고,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한 소명감이 강했습니다. 지금 한국인에게는 끝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실현시키는 실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김지하의 사상과 문학, 사회적 삶은 미래 세대의 모델로서 필요하고요, 지금 우리 한국 상황은 비정상적이고 사회적 위기를 맞고 있는데 이를 극복할 ‘사상’과 이를 이끌어 갈 사상가로서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Q.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면 강의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여러 행사를 진행하신다고요 A. 네 한국에서 근무했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을 초청해서 친목을 다지자는 목적으로 '코리안 데이’를 준비해서 10월19일에 사마르칸트시에서 엽니다. 사람과 음식, 음악, 풍습 등을 교류하는 자라입니다. 또 한국에서 발칸반도 99일간 99개국을 찾아가는 '유라시아 플로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플로우(flow)는 흘러가다라는 뜻이 있죠. 바로 우리 민족의 풍류 사상을 유라시아 플로우라고 바꾼 겁니다. 그래야 서양인에게 설명이 가능하니까요. 신라 대학자 최치원이 "우리 민족에게 유‧불‧도(儒佛道)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다”라고 했던 바로 그 풍류입니다. 당연히 풍류는 홍익인간 사상이죠.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름이잖아요. 물류죠. 그리고 플로우는 종횡무진을 뜻합니다. 그동안 실크로드, 초원의 길이라고 하나의 길, 횡단 길이라고 보았지만 아닙니다. 문명은 종단로도 있었어요. 그런 네트워크를 찾아가는 작업니다. Q. 윤 교수님은 천산 알타이 등 중앙아시아 지역 탐사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A. 제가 중앙아시아를 중요시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는 중앙아시아가 우리의 21세기 생존전략의 주무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원의 보고이고요 무한한 시장이 열릴 곳이기도 하고요. 그것보다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의 원형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문명 이전 인류문명의 모델로서 천산과 파미르 고원일대의 삶의 조건과 거기서 펼쳐지고 지켜지는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 살려보는 것입니다. 제가 추진하는 '유라시아 플로우'도 그 일환입니다. 단순히 탐방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사람들과 만나고 하나가 되는 페스티벌도 열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역사의 시발인 원조선을 다시 보고 중앙아시아의 흥먕성쇠가 우리 역사와 어덯게 연결되고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고 이들과 우리의 인연을 현재로 이어주는 것입니다. Q. 아, 말씀이 끝이 없습니다. 나중에 또 듣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우리민족에 대해 어떻게 보시고 우리의 앞날을 어떻게 열어가면 좋은지 듣고 싶습니다. A. 옆 동네인 키르키즈스탄에서는 K-팝 경연대회를 일 년 마다 열고 있는데 참가팀이 100팀이 넘고 수준도 놀랄 정도입니다. 이렇듯 우리 문화의 힘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힘은 역동성과 다양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고구려문화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 문화는 단순히 연결 시켜주는 브릿지, 혹은 교량이 아니라 다시 가공하고 키워내는 교차로 입니다. 최근의 우리 한류가 그걸 말해주고 있지요. 우리 문화는 이제 중앙아시아를 바로 가로 질러 유럽까지 이어지는 문화오아시스로드의 동쪽 기점이자 샘입니다. 이제야말로 문명사적으로 말하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행하는 것이지요. 이제 이러한 지정학적인 문제,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폐쇄적이지 않은, 개방적인 생각으로 전 세계를 담아 새로운 문화로 다시 키워내야하는 시대입니다. 좁은 국내, 정치의 잘못된 연못에서 나와서 세계에 맑은 물을 집어넣어주는 문화창조의 중심지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려면 마음을 넓히고 눈을 멀리 두어야할 것입니다. Q. 역사학자로서 밖에 나가서 느끼는 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A. 역사학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역사학자들이 학문적 사대주의와 연구방법론에 대한 교조적인 자세에서 탈피하고, 개방적이고 자신있는 태도로 현실과 역사에 책임감을 지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일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역사학과 역사학의 본령(本領), 또 우리가 지향하는 역사학이 다른데 우리는 일본이 가르쳐준 것이 역사학의 본령이라고 오해했던 측면이 많습니다. 주체적인 동아시아 역사상을 확립해야하고, 지구문명사에 대한 동아시아적인, 한국적인 견해와 해석도 자신있게 펼칠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즉 ‘동아시아 담론’ ‘지구담론’을 펼쳐야 하며, 특히 고대사연구를 통해서 민족문화의 원형과 인류의 발전모델로 찾아내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필요합니다. Q. 좋은 말씀 많이 잘 들었습니다. 긴 시간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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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관재국악상 수상자 김일륜 교수올해 ‘제8회 관재국악상 시상식’에서 김일륜 교수가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가야금 연주자이자 교육자로 외길을 걸어온 김일륜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봤다. 국악의 가치를 높여 국민과 전 세계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 온 김인륜 교수의 인생을 들어본다. Q. 올해 열린 ‘제8회 관재국악상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셨습니다. 수상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A.올해는 관재(寬齋) 성경린(成慶麟) 선생님의 서거 1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민족음악의 보존․전승․보급 및 발전을 위해 공적을 쌓은 자를 격려하여 국악의 무궁한 발전을 염원한 성경린 선생님의 큰 뜻이 담긴 상을 받아 매우 영광스럽고 기쁩니다. 이 상이 권위 있게 이어나갈 수 있도록 애써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겸허한 자세로 국악 진흥과 발전에 앞장서 나가야 한다는 뜻을 받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Q. 살아 생전에 관재 성경린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A.저에게는 마치 국악의 부모님과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행동으로 자식을 가르치는 부모처럼, 관재 성경린 선생님은 국악인으로 바른 몸가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반듯하고 정갈하고 옳은 생각과 옳은 인성을 가지고 국악을 대하고 오로지 정진하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검소하고 꼿꼿하며 강직한 관재 성경린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고 되새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Q. 가야금을 배운 계기는 무엇인가요? A.아버지는 그림, 단소 등 예술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전주에 있는 본가 3층이 국악원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국악을 가까이했습니다. 춤과 소리를 먼저 시작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예쁜 소리를 내는 가야금이 좋아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국악원은 어린 저에게 유치원이었고 학창시절인 저에게 놀이터였습니다. 저는 국악원에서 많은 국악을 배웠고 서울대학교 국악과에 진학하면서 평생 국악을 하고 있습니다. Q. 가야금 연주가로서 우리나라 국악 역사에 길이 남을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A. 가야금의 전통을 전승하기 위해 ‘가야금산조 여섯바탕 독주회’(최옥삼, 정남희제 황병기, 성금연, 김병호, 김죽파, 신관용류)를 했습니다. 민요, 병창의 레퍼토리 뿐만 아니라 판소리 '춘향가'를 입체창으로 구성해 아쟁과 장구반주를 곁들여 새롭게 선보였습니다. 가야금 연주의 전통성, 원형성을 깊이 있게 탐구했습니다. Q. 가야금 연주 창작에 앞서며 펼친 활동을 소개해 주세요. A. 1980년대 중반부터 독주 중심이었던 가야금의 중주곡 장르를 개척해 가야금 연주 양식 개발에 힘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22현 가야금 솔리스트며 1995년 25현 가야금 제작과 탄생을 주도해, 오늘날 전국에 모든 가야금 연주자가 개량한 25현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Q. 가야금 연주가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자로서 노력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A. 25현 가야금의 저변 확대를 이루면서, 저는 학생들이 가야금 연주가로서 활동기반을 넓게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1999년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특수대학원에 교수로 임용되면서 ‘33명의 가야금 연주자로 구성된 가야금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보자’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고, 동종 악기 앙상블의 활성화를 위해 앞장섰습니다. 학생들과 곡을 만들고 작곡자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작곡과 편곡을 부탁하며 보석 같은 곡을 받았고, ‘숙명가야금연주단’으로 함께 활동하며 연주했습니다. 이후 2005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전통예술학부 교수로 자리를 옮겨 ‘중앙가야스트라’를 창단해 차세대 가야금 연주가들의 꿈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앙가야금합주단 대표 및 중앙가야스트라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40년 가까이 제가 학습한 산조의 여러 유파 및 창작 레퍼토리, 앙상블 실습 등을 지도하며, 전통음악에 내재된 예술성과 정신성을 전수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국악 분야의 인재들이 재능 뿐 아니라 바른 인간으로 행복한 삶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Q. 아시아의 전통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갖고 가야금과 접목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아시아금교류협회 2대 회장에 이어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94년 창단된 아시아금교류회는 중국, 일본, 베트남, 몽고의 금 악기 연주자들과 교류하며 연주회 개최 등의 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신종 코로나19로 잠시 주춤했지만 곧 왕성한 활동을 기대합니다. 아시아금교류회 활동을 통해 저는 우리나라 가야금, 거문고, 아쟁의 최고 연주가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야금연주가협회의 이사로 활동하며 1년에 1회 열리는 큰 연주회 준비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황병기 작품보존회 부회장, 창작음악연구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Q. 가야금 연주가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A.지난해 그동안의 음악활동으로 12장의 기획음반으로 제작한 ‘김일륜 가야금전집 -길’을 출반했습니다. ‘가야금음악의 전 장르를 집대성한 최초의 12장 음반’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음반에 첨부한 소책자에 산조 및 병창, 창작곡에 대한 상세 해설을 집필해 자야금 작품에 대한 연주해석을 제시했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 뿌듯합니다. Q. 마지막으로 가야금 연주와 교육의 현주소는 어떠하며 앞으로 발전해야 할 방향성은 무엇일까요? A. 전통을 기반으로 삼아야 미래가 밝습니다. 올해 동국대학교에 한국음악과가 새롭게 신설됐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종교음악을 떠나서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독창적으로 소개할 수 있는 음악이 국악입니다. 우리의 국악이 왜 소중한지 머리와 가슴으로 이해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전통을 완벽하게 꿰뚫을 때 타 장르와의 협업에서 최고의 효과가 발휘될 것입니다. 국민 모두가 국악을 사랑할 수 있도록 1인 1국악기를 다룰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악 능력검정시험’을 신설한다면 보다 효과적으로 국악인재를 육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소리는 우리가 제일 잘합니다. 온국민이 국악으로 자부심을 가지는 그날이 오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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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창작국악동요 공모전’ 대상, 민유리 작곡가올해 국립국악원이 개최한 ‘제37회 창작국악동요 작품 공모전’에서 영예의 대상 ‘소금을 만드는 맷돌’을 작곡한 민유리 씨가 수상했다. 서양음악을 전공한 작곡가로서 창작국악 동요에 대한 열정이 담긴 민유리 작곡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 동요와 학교 교육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Q. 안녕하세요. ‘소금을 만드는 맷돌’로 대상을 수상하셔서 정말 축하드립니다. A. 지난 2018년에는 ‘그랬으면 좋겠네’로 본선 우수상을 받고 올해 대상을 받았습니다.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자는 마음이었는데 뜻밖의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한테 ‘창작국악동요 작품 공모전’은 참 감사한 공모전입니다. 대상 수상이 더욱 창작국악동요를 열심히 쓰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Q. 창작국악동요 작곡 활동을 다양하게 해 왔다고 들었습니다. 창작국악동요 작곡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오셨나요? A.작곡가로서 오케스트레이션 편곡을 하면서 국악기를 접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국악기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연구하면서 국악에 관심이 생겼고, 국립국악원 홈페이지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곤 했습니다. 작곡가들과 팀을 이뤄 국악대학원을 나오신 선생님께 스터디 수업을 듣기도 했습니다. 작곡가로서 국악을 공부할수록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마음가짐, 국악적인 것을 많이 넣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습니다. 최대한 국악의 기본을 동요에 접목하고 활용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Q. 이번에 대상을 받은 ‘소금을 만드는 맷돌’을 작곡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점이 있나요? A. 한은선 작사가 선생님의 가사를 처음 받았을 때 유명한 전래동화가 떠올랐습니다. 가사 속에 있는 의성어, ‘돌돌돌 돌아라’ ‘빙빙빙 돌아라’를 리듬감 있게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맷돌이 도는 모습을 유쾌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흥이 나는 자진모리장단을 활용했습니다. Q. ‘소금을 만드는 맷돌’ 가사가 재미있습니다. 작사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나요? A. 한은선 작사가 선생님께서 어렸을 때 읽었던 전래동화를 떠올리며 노랫말을 쓰셨다고 하셨어요. 그동안 한은선 작사가 선생님께서 전래동화 소재의 국악동요로 ‘요술 부채’와 ‘삼년 고개’를 발표하셨고 이후에 ‘소금을 만드는 맷돌’ 노랫말을 쓰셨습니다. 전래동화와 국악동요가 잘 접목된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작사를 하셨고,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노랫말로 완성하셨습니다. Q. 서양음악(클래식)을 전공한 작곡가로서, 국악창작동요를 작곡하면서 힘든 점은 없나요? A. 국악을 전공하지 않은 작곡가이기 때문에 일반 동요보다 더 어렵게 느낄 때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장단을 사용할 때 제한적인 부분이 있지만, 그 속에서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또한 작곡가의 역량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국악창작동요를 작곡할 때 여러 장단을 활용하려고 노력해요. 국악창작동요에 어울리는 장단은 따로 있다고 국한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좀 더 쉽게 국악의 여러 장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요. Q. 국악창작동요 작곡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국악창작동요를 통해 세상에 전하고 싶은 뜻이 있나요? A. 저는 어렸을 때 동요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창작국악동요를 부른 기억이 거의 없어요. 교과서에 나오는 민요 정도만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특히 요즘 아이들은 국악에 대해 더 모르는 세대가 됐고, 어른들이 우리 것을 지켜 전수해야 되는 시대가 됐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친근하고 쉽게 국악을 전달하는 방법이 ‘국악창작동요 보급’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악이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느끼는 매력이 있습니다. 국악의 매력을 어렸을 때부터 듣고 몸으로 익숙해지면 커서도 국악을 가깝게 느낄 것입니다. 아이들이 국악창작동요에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음악가로서 우리나라 국악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국악을 책으로만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국악 자체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국악기 체험, 사물놀이 등 국악 체험 활동이 늘어나야 된다고 생각해요. 또한 많은 작곡가들도 국악을 넣은 동요,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만든 음악들이 많은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국악에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창작국악동요 작곡가로서 바라는 점과 꿈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A.세상에 빛을 본 창작국악동요가 잘 보급돼 아이들이 즐겁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창작국악동요를 찾아서 듣고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더 많아지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창작국악동요의 지평을 넓혀보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 아이들이 부르는 판소리 동요 작곡에도 도전할 계획입니다. 창작국악동요에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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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기원 '세종 전국 국악경연대'를 개최하는 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는 세종시(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생천길 76-7)에 10년 전 자리를 잡고 세종시 시민들에게 국악을 통해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의 공로를 기리며 다양한 문화 행사를 통하여 보훈의미를 널리 알리고 있다. 통일기원 ‘세종 전국 국악경연대회’를 올해 9회째 개최하고 있다. 다가오는 6월 보혼의 달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신영숙 회장에게 12일 단체 소개와 경연대회 성과에 대해 전화 인터뷰를 하였다. Q. 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보훈선양'이라는 협회 설립 목적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A. 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는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의 공로를 기리며, 다양한 전통문화예술 행사를 통해 국민들에게 보훈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국가에 공로를 쌓고 희생하신 분들을 우리는 기억해 나가야 할 것이고 그것을 예술활동을 통해 알리고 기억시키고자 합니다. 또 본 협회가 문화예술활동에서 노력하는 부분은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의 일환으로 통일기원 세종전국국악경연대회를 올해 9회째 개최하였으며 전통문화예술인들의 명맥을 잇고 젊은 예술인을 육성하는 것이 우리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라 생각하고 K-컨텐츠의 밑거름이 되는데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Q. 올해 4월 개최된 '세종 전국 국악경연대회'는 개최 목적은 A. 통일기원 경연대회 목적은 국악발전과 보훈정신 발현입니다. · 한국전통문화예술 진흥 및 저변 확대 · 통일시대를 대비한 우수한 문화예술인 발굴과 육성 · 국가유공자 참여를 유도하여 국가관의 인식을 드높이기 위한 올바른 국가관 확립 Q. 경연대회 참가 자격은 A. 일반인과 전국 초·중·고교·대학교 재학생들은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 대회는 판소리와 민요, 한국무용, 기악 등 개인전 부문과 민요·한국무용 등 단체전 부문, 민요·한국무용·기악 등 부문으로 진행됩니다. Q.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많은 참가자가 경연을 벌렸다고 하는데, 경연자 모집을 어떤 방식으로 하셨는지요 A. 이번 대회는 예선에서 코로나19로 비대면 영상심사 단심제로 진행했으며 명인·명창부, 일반부, 고ㆍ중등부, 초등부, 단체부로 나눠 열띤 경연을 펼쳤습니다. Q. 코로나 전후 경연대회 달라진 점은? A.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심사를 3년동안 진행하였는데 이리도 길게 상황이 이어질지 아무도 생각지 못했고 비대면으로 인해 현장성을 반영하기 못하는 부분에 많은 아쉬움을 느낍니다. 무대 예술은 그 공간과 시간동안 많은 변수와 현장성을 발휘하여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영상에서의 제한적인 부분으로 진행하다 보니 아쉬움이 있지만 한편 장점으로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 먼 지역에서의 참가가 용이해지고 대회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이 덜해져 참가하는 예술인들에게는 보다 많은 기회제공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Q. 대상을 받은 수상자는 A. 대상을 받은 서울예대 한국음악전공 한국음악단은 최무근, 박소연, 강진원, 김영윤, 여민서, 홍준서, 신승훈, 정연승, 이수빈, 장서진 학생으로 구성됐으며 이번 타악 팀을 지도한 김한복 교수는 우수지도자상을 받았습다.. Q. 역대 수상자 중 소개해주실 분은 A. 역대 수상자 모두가 소중하고 귀한 분들이라 누구하나 꼽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대회에서 추구하는 바처럼 어린 새싹같은 국악인들이 해다마 늘어나고 초등부에서 중등, 중등에서 고등학교 진학까지 국악을 전공하여 다회 출연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국악을 전공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역량에 성취를 얻고 더욱 정진하게하는 촉매제를 주며 많은 국악인들을 육성하는데 이바지하는 기쁨으로 매년 대회를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Q. 올해 경연대회 수상자 중 소개해주실 분은 A. 올해 수상자 중 중고등부 종합대상으로 교육부 장관상을 받은 김세빈 학생입니다. 일반부, 명인명창부의 훌륭한 참가자와 수상자 분들이 계시지만 모두 직업으로 국악을 하고 국악계에 많은 역량을 펼치고 계시고 학생부는 아직 그 역량을 국악계에 펼치기 전이라 이번 수상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처음 보여주었다 생각합니다. 김세빈 학생도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느껴져 감사하고 이 수상을 자신감의 기반으로 삼아 앞으로 더 정진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가졌습니다. 저희 또한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 발전하는 예술인이 되기를 바라며 꼽았습니다. Q. 한국보훈선양 예술협회에서 보훈의 날이나 국경일에 기념 행사를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요. 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 가장 기억나는 3·1절 기념음악회는 A. 2017년 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세종국악원이 후원하는 3·1절 만세운동 기념음악회가 오는 3월1일 세종시 전동면 아람달 농촌 체험관에서 개최했습니다. 이날 음악회에는 대구 달구벌국악관현악단 등이 출연, 비틀즈 모음곡, 민요, 국악가요, 대중가요 등을 선보였습니다. 한국보훈선양예술협회는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의 공로를 기리며, 다양한 국악 행사와 '통일기원 세종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보훈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내년이면 경연대회가 10년이 된다. 앞으로 '통일기원'이라는 목적을 구현하는 이 단체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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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 '아리랑'을 심은 두 주역을 만나다지난 4월 22일, ‘아리랑’을 주제로 부다페스트의 복합문화공간(Magvető Café)에서 강연이 진행되었다. 이 강연은 해외문화홍보원(KOCIS, 원장 김장호)과 주헝가리 한국문화원(원장 인숙진, 이하 문화원)은 '코리아 살롱 1.5' 라는 제목으로 총 4회에 걸쳐 진행되는 인문 예술 강좌 중 첫 번째 회차이다. 강연에는 45년의 역사를 지닌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이자 ‘아리랑의 연구자’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김연갑 선생이 강연자로 나서, ‘아리랑은 한국의 창窓’이라는 주제로, 아리랑의 역사와 세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위상, 해외 전파와 디아스포라 아리랑, 민요에서 모든 장르로 확산된 문화로서의 아리랑, 그리고 한류의 원류로서의 아리랑의 의미 등을 정치, 외교, 문화예술 영역의 역사적 사건과 함께 풀어갔다. 강연 후에는 민요를 기반으로 대중적인 음악 활동을 해 나가고 있는 음악집단 ‘민요밴드 bob(비오비)’의 공연으로 현지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헝가리에서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5월의 초입, 강연자 김연갑 이사장님과 민요밴드 bob를 함께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안녕하세요! 얼마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국악을 널리 알리고 오신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저 헝가리에서 아리랑에 관해 강연을 맡아주신 김연갑 이사장님께 질문드릴게요. 이사장님께선 옛날부터 아리랑의 보편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 오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해외, 외국인 대상의 강연은 이번이 몇 번째였나요? A. 한러수교 직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구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주최의 아리랑 행사로부터, 일본, 중국, 사할린, 그리고 이번 헝가리까지, 이렇게 다섯곳에서 강연과 간담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중국, 사할린은 청중이 대부분 교민이어서 통역 없이 했는데, 레닌그라드와 헝가리는 통역을 통해 했습니다. 이 두 곳은 부담이 컸습니다. 아리랑은 우리 현대사와 식민지 상황, 그리고 남북 분단 체재 등을 이해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 통역을 통한 강연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번 헝가리 행사로 이를 더욱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이에 대해 책임감과 함께 대책을 고심하고 있습니다. Q. 이번에는 민요에서 모티브로 음악을 만들어 내는 민요밴드 bob그룹 여러분께 질문드릴게요. 대중적이면서도 한국적인 bob그룹의 헝가리 공연 반응이 참 뜨거웠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공연을 마치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A. 헝가리의 원어가 아닌 우리 오리지널 민요를 보여드렸기에, 헝가리 대중분들에게 이 음악이 잘 와닿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었어요. 하지만 역시 음악은 만국 공통어라는 걸 다시금 느끼고 온 공연이었습니다. 관객분들 모두 음악에 집중하여 귀 기울여 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놀랐고, 큰 에너지를 받고 왔습니다. 관객분들이 음악에 임하는 자세가 매우 진지했어요. 매너가 참 좋으셔서 오히려 연주자로서 감동하였던 시간이었습니다. 타국의 민요와 전통음악이 외국인분들이 받아들이고 해석하기에 어려울 수도 있었을 텐데, 음악. 우리의 전통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 주셔서 참 감사했어요. Q. 김연갑 이사장님께서 진행하신 아리랑 강연의 반응도 참 좋았다고 들었는데요, 옛날과 비교했을 때 해외에서의 우리 국악과 아리랑에 대한 입지 변화가 있나요? A. 당연히 차이가 있지요. 2000년 이전만 해도 외국에서의 반응은 6.25 전쟁과 관련한 아픈 사연을 연관 지어 말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필리핀 같은 나라에서는 아리랑이 나오는 록허드슨 주연의 ‘Battle Hymn’(전송가)같은 영화를 본 세대들이 많았으니까요. 이 반대 현상은 베트남의 경우지요. 파월 장병들의 위문공연 등을 통해 아리랑이 월남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는 88올림픽 경기와 월드컵 대회 같은 국제적인 행사를 통해서 한국의 위상을 아리랑이 대신하게 되었어요. 특히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등재 이후 유럽에서는 아리랑을 ‘탁월한 보편성’을 지닌 노래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아 분명하게 차이를 느끼고 있습니다. Q. 이사장님께서 아리랑을 널리 알리고자 하시는 이유와 가치관이 궁금합니다. A. 아리랑은 한국인의 창조 정신을 입증하는 노래입니다. 90여 종에 1만 3천여 수의 노랫말을 가진 민족공동체 작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근대사 속에서의 기능 또한 특별합니다. 민중적 비애와 한(恨)에 의한 비극적 정조(情調)의 수렴제로, 권력에 대한 개인과 집단의 저항적 민중 의지의 발현체로, 고통과 모순을 극복한 미래 의식의 추동체로, 상상되고 가치화 되어 불리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리랑은 식민지를 거친 나라나 남북 분단과 같은 분열 상태에 있는 민족공동체에는 보편적 가치로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본조아리랑 같은 경우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모든 장르를 넘나드는 변용이 가능하여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치와 특성을 세계인들과 함께하고자 해서입니다. Q. 이사장님의 끊임없는 노력만큼 아리랑이 앞으로도 더욱 위상을 떨쳐 세계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bob그룹이 이번 헝가리 공연을 위해 준비하셨던 레퍼토리는 어떤 것이었나요? A. 이번 헝가리 공연에서는 전통민요 아리랑을 비롯하여 전통/창작을 구분 지어 소개해 드렸어요. 원래 저희 팀은 창작음악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번 공연을 계기로 전통민요를 근간으로 만든 작품활동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평창아리랑과 본조아리랑을 공연했고, 음성군에서 전해지는 토속민요를 가지고 편곡한 ‘깨끼저고리’를 연주했습니다. 또 밴드식으로 편곡한 ‘경복궁타령’, ‘한오백년’을 모티브로 재즈 편곡한 기악곡 ‘섬머타임(Summer time)’을 선보였어요. 그리고 K-POP 가수 태연의 ‘아이’를 편곡한 곡과 민요 ‘권주가’를 모티브로 한 ‘주술’이라는 곡을 연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닐리리야’까지 연주함으로 헝가리 대중분들과 음악으로 즐겁게 소통했습니다. Q. 외국인을 대상으로 토속민요를 활용한 음악도 하신 게 신기합니다. 토속민요는 통속민요와 달리 잘 기록되고 전해지고 있지 않아 편곡에 어려움을 느끼셨을 법한데, 어떤 식으로 작업하셨나요? A. 토속민요 ‘깨끼저고리’의 경우에 음성군에서 구전으로 전래되는 민요를 복원해서, 민요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후렴구'를 가지고 작업했어요. 정확한 선율이나 리듬이 전해지지는 않지만, 시집살이 애환을 담고 있는 가사가 남아있어서, 시집살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창작하게 되었습니다. 토속민요로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게 확실히 어려운 작업이긴 하지만, 대중분들께 친숙하게 우리 토속민요를 들려드리기 위해 계속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답니다. Q. 민요를 중심으로 두고 작업할 때 가장 염두에 두고 작업하시는 건 어떤 부분인가요? A. 기존에는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민요가 갖고 있는 특유의 느낌을 전해주려고 노력했었어요. 그리고 요즈음은 민요에서 모티브만 따 와서 새로운 가사를 창작하고, 다양한 변화를 통해 현대인들이 조금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방향으로 작업을 해 나가고 있어요. 음악적인 코드나 선율 등의 경우도 모두 함께 회의하며 발전시키고,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Q. 전통음악을 중심에 두고 서양악기로 음악을 만들어 나가며 특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A. (드럼) 장단이나 리듬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녹여낼 수 있을지 늘 고민하고 있어요. 드럼세트에 꽹과리를 얹는다든지, 다른 창작국악팀은 어떻게 장단을 사용하는지 항상 살펴보며 공부하고, 음악에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기본 장단 외 변형 장단까지도 살펴보며 장단을 활용하기도 하고요. 제가 국악 전공이 아니다 보니 조금 더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드는 생각은, 무엇보다 민요. 소리에 리듬을 자연스레 맞추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음악을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해금) 저희가 처음 모였을 때는 실용음악의 칼박에 맞추는 리듬과 국악에서 맞추어 나가는 호흡이 조금 안 맞아 합주에 어려움이 있기도 했어요. 하지만 계속 함께 음악을 하다 보니 서로 듣고 호흡하며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모두가 서로의 소리를 알고 이해하다 보니 우리만의 호흡이 생겼달까요? (건반) 코드 진행 같은 경우 무엇보다 민요에 너무 많은 코드의 변화를 넣을 때 원곡을 헤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대중적이면서도 깔끔한 코드 진행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특징적인 섹션이나 실용음악적인 색을 자연스레 녹여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하지 않은 선에서 전통을 살리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Q. 이번 공연에서 헝가리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bob그룹의 음악적 고민이 궁금합니다. 우리 아리랑을 어떻게 알리고 싶으셨나요? A. 사실 처음에는, 한국의 아리랑을 조금이라도 알리고 오자는 취지가 가장 컸어요. 우리 민요와 전통에 그들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런데 공연을 가서 함께 아리랑 강연을 듣고 공연하다 보니, 그저 아리랑과 우리 전통음악을 기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들이 ‘공감’할 수 있게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한국의 전통음악을 매개로 그들의 마음 안에 어떠한 위로와 정서를 남기고 싶었어요. 우리나라 음악만이 가진 애환이나 흥과 신명 등의 특징적인 정서를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참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Q. 젊은 창작 국악팀으로서, 어떤 가치를 두고 음악을 만들어 나가시는지 궁금합니다. bob그룹은 어떤 음악을 하는 팀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A. 저희는 민요를 중심으로 두고 음악을 하는 팀이기에, 아무래도 ‘민요’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민요는 옛날 대중들의 음악이잖아요. 그 당시의 대중음악을 지금도 대중들에게 편하게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요. 어디서든 흘러나오는 K-POP이나 클래식처럼 저희의 음악도 어디서나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었으면 좋겠어요.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니까요. 전통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언젠간 대중분들도 참 편하게 좋아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들었을 때 좋은 음악. 무엇보다 이걸 가장 많이 추구하는 것 같아요. 사실 대중음악 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게 저희의 꿈이자 목표에요. 저희의 음악이 국악이라는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그냥 하나의 ‘음악’으로 인식되어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편하게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저희가 연주하면서도 신나고, 편하고 즐거운 게 먼저겠죠? 늘 저희가 즐겁고 좋은 음악을 하려고 해요. 그렇게 하다 보면 모두가 좋아하는 음악을 오래오래 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Q. bob그룹의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A. 이번 헝가리 공연을 계기로 해외 공연을 조금 더 가려고 많이 알아보고 있습니다. 외국의 대중들에게 우리 전통음악을 대중적으로 더 많이 알리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또 늘 저희가 음악 작업을 하며 깰 수 없었던 틀이 있어요. 저희가 생각하는 ‘대중적인 음악’만 고려하지 않고, 진짜 대중들이 무얼 좋아하는지 더 많이 듣고 공부하며 bob만의 음악 색깔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싶어요. 새로운 작·편곡 방향을 시도하며 앨범 발매도 할 예정이니,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Q. 이사장님의 앞으로 계획과 준비하시는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A. ‘사할린아리랑제’를 3년간 하다 코로나로 인해 중단된 것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이제 코로나가 끝나가 다시 할 수 있으려나 했지만, 또다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대중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어 올해에도 못 갈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크네요. 또 2012년 중국과의 아리랑 갈등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어 가장 긴밀했던 연변 교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를 복원하는 일이 급합니다. 마지막은 코로나 이전 9회까지 해 온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이 중단되어 크라운 해태와 논의를 통해 재개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은 너무나 바쁜데 지난 10월에 코로나를 앓은 후 몸이 너무 무거워져서 걱정입니다. 그래도 차근차근 다시 준비하며 진행해 나갈 예정입니다. 김연갑 이사장님의 오랜 세월 아리랑을 향한 사랑이 보여주는 뜨거운 열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단단해져감을 공감했고, 그러한 단심이 이번 헝가리 행사에서도 빛을 발했다고 본다. bob그룹과 인터뷰하는 내내 느낀 것은, 무엇보다 이들의 팀 분위기가 매우 좋다는 것이다. 서로를 허물없이 편하게 대하며 음악적인 것들을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공유했다는 것이 모두의 대화에서 드러났고, 함께 더 즐겁고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내겠다는 열정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명맥을 더 널리 이어 나갈 김연갑 이사장님, 국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국악의 장르에 국한되지 않은 ‘좋은 음악’ 그 자체를 대중들에게 더 많이 들려주고 싶다는 bob그룹, 앞으로 보여줄 그들의 멋진 행보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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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희국악예술단, '2023하동세계차엑스 대한민국 명창대전' 개최한다지난 4일 1,200년 역사를 이어온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 하동에서 '세계 차 엑스포'가 개막했다. 하동야생차박물관 및 하동스포츠파크 일원에서 오는 5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한달동안 개최된다. 하동군과 '손양희국악예술단'은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한다. 명칭은 '하동세계차엑스 대한민국 명창대전'(05.11-12.)과 '하동세계차엑스 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05.27.)을 개최한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은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를 맡고 창원 지역을 비롯해 경상남도와 타 시도의 축제, 기념비적인 행사 등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축제와 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2009년부터 창원어린이국악단,'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단장과 지회장을 손양희 단장이 맡고 있다. 특히 25년째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25년 구독자인 손양희국악예술단의 활동과 전국국악경연대회 진행에 대해서 국악신문 기미양 객원기자가 손양희국악예술단 손양희단장을 한달동안 전화와 방문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편집자 주) 손양희 국악예술단 설립목적과 전승활동 Q. 손양희 국악 예술단 설립 목적은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민족예술의 정수 국악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몸으로 느끼고 배우며, 나아가 우리 음악을 이끌어갈 전문 국악인의 밑거름인 차세대 명창과 명인들을 육성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Q.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언제 조직되었나요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창원에서 1996년 제1회 창원 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를 주관하면서부터 조직되었다. Q. 손양희국악예술단 소개해주세요.. 설립 목적, 전승활동, 회원수.전승활동 A. 손양희국악예술단은 1995년 손양희국악교습소로 시작하여, 2007년 손양희국악예술단으로 거듭났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은, 자체 기획공연과 시, 도, 국가 공모사업을 기본으로 실행하면서, 각 시군의 축제나 국가 공식 기념일 행사에 초청을 받고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을 비롯 미국, 유럽 등 20여개국 해외 순회공연을 하며 폭넓게 공연 활동을 하는 전문 국악공연단체이다. 또한 후진양성과 계승발전을 위해 규칙적인 전승교육 활동에도 30여 년간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올해로 26회차가 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인재 양성발굴에 핵심 사업 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전문예술단체이다. 회원은 100여 명과 예술단원은 25여 명이 활동한다 Q. 초대회장, 역대회장은? A. 초대 대회회장은 1996년 당시 창원국악협회장이셨던 故 박미숙선생을 필두로 노키아티엠씨 이재욱 회장, 공민배 전창원시장, 현, ㈜부경 김찬모회장으로 연결되어 국악발전에 도움을 주고 계신다. 26년이 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Q. 1996년 제1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가 올해는 26회가 되는데, 언제부터 손양희 회장이 이어오고 계시나요 A. 1996년 제1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창원 국악협회장의 별세로 존립의 기로에 선 국악경연대회를, 2년 지난 1998년 제2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25살밖에 안된 제가 맡아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작년 11월까지 제25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초반기 국악 불모지 창원에서 이 국악경연대회를 알리기 시작할 때, 국악신문 김호규 사장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Q.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가 올해 26년 돐을 맞이하는데, 자랑 좀 해주세요. A.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는 창원이 공업도시라, 예술 장르 특히 국악 분야는 아직도 열악한 편이다. 하여 고른 발전을 꾀하며 종합대회를 유치했다. 종합대상은 국회의장상이며,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교육부장관상, 도지사상, 창원시장상, 도교육감상, 시교육장상 등 판소리, 기악, 민요.가야금병창, 무용, 풍물... 5개부문을 각파트에 5분의 권위있는 심사위원을 모시며 투명한 대회를 만들어 왔다. 그 결과 문화관광부에서 3년마다 실시하는 평가에서 작년(2022년)은 B+ 등급과 그 3년 전에는 A등급을 받아 공명정대하고 내실있는 우수대회로 평가받았다. Q.최근 서울에서 하동차엑스포 알리기 행사를 했는데..오셨나요? 특별한 행사가 있었나요 A. 그날 행사가 이미 잡혀 있어서 참석못했다. 특히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김 회장으로 유명한 국민배우 ‘국민 아버지’ 최불암 씨를 행사 중 2023하동세계차엑스포 명예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뜻깊은 위촉식도 가졌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들었다. '2023하동차엑스포'와 '2023하동차엑스포 대한민국 명창대전' Q. '2023하동차엑스포' 소개해주세요. A.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 좋은 하동... 1,200년 역사를 이어온 국내 최대 야생차 생산지 하동이지요. 하동야생차박물관 및 하동스포츠파크 일원에서 오는 5월 4일부터 6월 3일까지 2023하동세계차엑스포가 개최된다. Q. 전국에서 산수가 아름답가로 유명한 하동의 유래에 대해 자랑 좀 해주세요. A. 통일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은 하동의 아름다움을 ‘호중별천(壺中別天)’으로 표현하며 ‘동쪽 나라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라 신선이 옥베개를 밀치니 순식간에 천년이 되었네’라고 극찬했다. 천년이 지난 오늘날 바로 세계적 차(茶)의 주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Q. 이번 손양희국악예술단에서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개최하는 국악경창대회 취지는 A. 2023 하동세계차엑스포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23 대한민국 명창대전'과 '2023 전국청소 년국악경연대회'을 개최한다. 이는 세계가 주목하는 엑스포장에는 신명나고도 우수한 우리 전통음악인 풍악이 빠질 수 없으므로, 단순한 경연대회가 아닌, 축하공연 같은 경연대회를 통해 우리음악의 신명, 전통성을 하동을 찾은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함으로 엑스포장을 더욱더 활기차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꾀한다. 손양희 명창 국악계 입문과 국악활동 Q.국악계 입문은 어떤 계기로 언제 들어오셨는지요. 스승은? A. 부산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3년에 한국무용에 입문하였고, 초등학생때부터 노래를 잘 부른다고 인정 받아, 합창부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한국무용에도 두각을 나타내며 열심히 하였으나, 고2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유한 가세가 기울자, 9년 동안 받아온 무용교습은 포기해야 해서 절망적이였다. 그런데 그즈음 한국국악협회 창원지부에서 판소리 무료 강습회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찾아가서 판소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판소리가 나를 다시 소생시켰다. 故 선동옥 선생님(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입문하여 지금껏 소릿꾼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 故 선동옥(수궁가), 故 이명희(흥보가,춘향가), 故 한갑주(적벽가), 성준숙(심청가)선생님들께 이수를 받았다. 2008년 12월에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제 9호 판소리 '수궁가' 전수조교로 지정되었다. Q.손양희 선생님 전국경연대회에서 상을 많이 타셨는데, 가장 큰 상을 받은 때는 언제인가요 A. 2017년 판소리 입문 32년만에 제28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2005년 제16회 대구 국악제에서 판소리 부문에 참가하여 종합대상 국무총리상을 받은후 12년만에 받은 상이다. 이때 가장 공력을 많이 들였을 때, 받은 상이다. Q. 창원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악단체로 손꼽히는 손양희국악예술단 자랑 좀 해주세요. A. 국악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의 학부 출신 또는 재학생을 회원이 많다. 그만큼 젊고 활력 넘치는 전문 국악단체이다.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상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김선희, 타악과 풍물로 전국 국악 경연 대회에서 종합 대상인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한 송기혁, 가야금 전공의 김수아 등이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부터 겨울방학 여름방학 기간 ‘2008 국악학교’를 개설하여 창원과 주변 국악인을 대상으로 현재까지 지속해오고 있다. 그래서 창원은 물론 경남에서는 널리 알려진 국악단체이다. Q. 가장 뜻깊고 추억에 남는 공연은 A. 2003년 10월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기이자 여류 문인으로 꼽히는 황진이를 소재로 한 창극 '황진이'를 창원 성산아트홀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국립 창극단 수석 단원 등 주요 출연진과 연출, 시나리오, 음악 등 주요 제작진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주인공은 창원 지역의 소리꾼을 대표하여 제가 황진이 역을 맡았죠. 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상남도 지회가 제작한 최초의 경상남도 지역 창극이었다. 2006년에는 창원 성산 아트홀 소극장에서 '제2회 손양희 판소리 '수궁가' 완창 발표회'를 가졌다. 2009년 창극 '토끼야 수궁가자' 에서 창원에서 연출자를 구하지 못해서 연출과 주인공을 맡았다. '황진이' 역과 '별주부'역을 맡은 때가 저희 소리에 대한 정열을 태웠던 시절인가 보다. 수궁가 완창발표회가 큰 동력이 되었다. 이후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Q. 기억에 남는 해외공연은 A. 2011년 캄보디아에서 ‘앙코르왓에서 한국의 아리랑 콘서트’를 공연하였다. 우리가 갔던 곳은 캄보디아의 우리나라의 불교인 조계종이 세운 고아원 겸 보육시설 '아름다운나라'이다. 그해 여름 창원어린이국악단 14명의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맞아 지리산 산공부(합숙) 대신, 봉사 차원으로 15일 일정으로 갔다. 원장님은 조계종의 스님이셨고, 직원들도 한국분들이 고생하고 계시며,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우리는 캄보디아 학생들과 교류 및 캄보디아 학생들에게 풍물과 민요를 가르키며 함께 공부하고 신나게 뛰어 놀았다. 우리 창원어린이국악단 학생들이 신명나는 공연도 선보여주는 등 우리 전통음악의 우수성과 신명을 잘 전달하고 왔다. 이는 학생들에게 봉사하는 마음과 우리 국악의 뿌듯한 자긍심을 가지게 했던 큰 계기로 기억된다. 양명창은 어려운 청년기, 국악에 입문하면서 판소리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일찌기 20대 중반에 제2회 창원전국악경창대회를 맡으면서 국악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대구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명실공히 판소리 명창 반열에 올랐다. 가무악에 타고난 재능으로 판소리·풍물·전통무용 등을 섭렵하고 공연 연출까지 해오고 있다. 그 배경에는 초창기 2003년 뮤직컬 형식 창극 작품을 맡았지만 창원에서 국악 분야 연출자를 찾지 못해서 시작했다고 한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의 전승활동 Q. 하동 출신으로 유명한 국악인 누구신가요 A. 여러분이 계셨지만, 손꼽히는 두분을 소개합니다. 하동 악양에 '명창 유성준,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이 있는데, 유성준(1873~1949)명창은 판소리 근대 5대명창중의 ‘동편제의 제왕’으로 불리어졌으며, 하동 악양면 신대마을에서 활동하시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선유(1873~1949) 명창은 송우룡 명창과 김세종 명창에게 사사했고, 최초로 판소리 다섯마당 창본 '오가전집'을 펴냈으며 진주권번의 소리사범으로 활동하셨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두 분의 명창이 하동을 기점으로 폭넓게 활동을 하셨고, 이 두 분을 기리는 판소리 기념관이 하동 악약면 있으며, 판소리 전승발전을 위해 중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Q.그동안 창원에서 국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A. 첫째로는 판소리를 30여년간 후학을 가르키며 차세대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자체 기획공연 및 타 지역 축제 기념비적인 행사이 공연과 시, 도, 국가의 다양한 공모사 업 지원 및 선정으로 경남을 비롯하여 국내외 등 수 많은 순회공연을 하였고, 26년째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며 인재 발굴과 대중화에 힘쓰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Q. 가장 좋아하시는 민요는 A. 우리의 민요는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 '육자백이', '흥타령'을 특히 좋아한다. 구성지면서 질펀한 우리네 삶이 녹아있어 절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다. Q.한국국악협회 창원시지부, 하동지부와 같이 국악활동을 하시나요 A. 초창기 한국국악협회 창원지부 창단 맴버였으나, 현재는 협회 활동은 하지 않고, 개인적이지만 공적인 일을 하며 활동하고 있다. 한국국악협회 하동지부는 풍물놀이, 판소리, 한국무용 등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국악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저변을 확대하며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Q. 하동에는 어떤 축제가 있나요. 그 축제에서 판소리를 많이 알리고 계시죠 A. 하동 송림 백사장과 섬진교에서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 및 다리밟기 행사,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먹점마을에서 산골 매실 매화 축제, 제17회 화개장터 벚꽃 축제, 하동군민의 날 기념식, 새해맞이 공연, 하동 야생차 문화 축제 등에 초청 받아서 판소리를 알리고 있다. Q.코로나 3년간 경창대회 치루시면서 힘드신 부분은 A. 비대면이라는 새로운 방법에 처음에는 우왕좌왕 했지만, 곧 적응이 되었고 큰 어려움 없이 대회를 치뤘다. 예상보다 많은 지원자가 참가해주었다. Q. 20대 중반부터 쉬지않고 30여 년이 넘게 공적 국악활동 단체를 이끄시면서 힘드셨던 점, 보람이 되신 점은 A. 국악단체를 이끌어 간다는게 다른 단체도 그렇겠지만, 경제적으로 녹녹치 않아 어려움도 있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단원들과 더불어 함께 하면서 지혜를 모으고 마음을 모아서 슬기롭게 해결하며 걸어 온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지역에서 후원자들도 차츰 생겨나면서 공고히 자리를 잡아가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Q. 국악발전을 위해 한 말씀하신다면. A. 우리 경남에는 대학에 국악과도 없고, 시립.도립 국악예술단체도 없다 보니, 국악발전에 악순환이 되고 있다. 특히 영남민요는 동부민요로 몰아가서 딱히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서울까지 가서 경기민요를 배워서 이수증을 받고 학원간판을 내걸고 있다. 이렇게 국악발전이 타 시.도에 비해 열악한 현실을 못 벗어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회원들과 창원시립 또는 도립국악단 창단을 희망하며 오늘도 묵묵히 걸어 간다...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의 전승활동을 통해 경상남도 창원 지역 국악 발전의 현황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올해 26회를 맞이하는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통해 국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뒤에는 손양희국악예술단의 노력이 숨어있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 받아서 이번 하동군과 함께 하동차엑스포 대한민국 국악명창대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가 된다. 손양희 2012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후보. 2003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한승호 '적벽가' 사사. 2005 대구무형문화재 제8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 이명희 '흥보가' 사사 2020 전북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성준숙 '심청가' 사사 경상남도판소리보존회장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총집행위원장(26회) 경상남도무형문화재 판소리전수관 외 다수 출강 도지정전문예술단체 ‘손양희국악예술단’ 대표 (2016~2022) 동국대학교(한국음악과-판소리) 외래교수 (2005~2008) 마산창신대학교(음악과-판소리) 외래교수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판소리 학사 및 석사 졸업 2017 제28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2016 제24회 전국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2016 제25회 땅끝해남 전국국악경연대회 명인부 대상한국문화예술위원장상 2016 제19회 서편제 보성소리축제 명창부 우수상 '전남도지사상' 2015 제3회 미주 한국국악경연대회 '지도자상' 2006 제16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 종합대상 국무총리상' 2005 제2회 DELPHIC GAMES(문화올림픽) 한국대표(판소리) '단체우수상' 수상(말레이시아 쿠첸) 2003 제21회 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명창부 최우수상 '전남도지사상' 2000 제2회 여수 전남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명창부 '우수상' 2000 제18회 광주특장부문 판소리전국대회 특장부 '우수상' 1995 제6회 대구 전국국악제 '금상' 1989 제8회 창원 고향의 봄 축제 전국민요경창대회 '장원' 1985 제30회 부산 영남무용제 '최우수상' 1979 제1회 영남지구 무용콩쿨 '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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