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리뷰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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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70주년&정전70주년 기념, '제1회 동두천평화아리랑제' 팡파레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유엔 참전용사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6‧25한국전쟁에서 나누었던 동지애 및 인류애에 대한 기억을 소환했다. 27일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는 국적이 다른 22개 유엔군 참전 용사들이 모였지만, 아리랑으로 하나 되는 모습이 연출됐다. 이날 하이라이트는 역시 참전 용사와 유엔 합창단이 함께 부른 ‘어메이징 아리랑’이었다. 무대 영상에선 각국 참전 용사들이 6‧25전쟁 때 불렀던 아리랑을 추억하며 한 소절씩 부르는 모습이 나왔다. 이날 '상생의 도시' 동두천시에서도 한미동맹70주년 및 정전협정70주년을 맞이하여 아리랑이 메아리쳤다. 27일 동두천시가 주최하고 (사)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가 주관한 '제1회 동두천평화아리랑제'는 한·미우호관계 발전과 나아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아리랑에 담아냈다. 10시 현충탑과 11시 자유수호박물관에서 동두천이담농악보존회(단장:김경수), 동두천아리랑보존회(회장:유은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이혜솔)이 함께하고, (사)아리랑연합회와 (주)국악신문이 후원했다. 김경수 지부장의 사회를 맡고 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의 초혼무 '살풀이춤', 가야금병창 '아리랑', 동두천이담농악보존회의 '지신밟기'와 '비나리', 동두천아리랑보존회의 '이담아라리', '동두천아리랑', '황석산아리랑',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아리랑'이 불려졌다. 오전 10시 동두천 현충탑앞에서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가 동두천평화아리랑제추진단 창립 선언문을 낭독했다. 다음은 선언문 중 한국전쟁 때 남북이 양측에서 각각 불렀던 아리랑이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조각이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 한덩어리 된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잘넘어간다('정선아리랑' 1절)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 '음탄(音彈)아리랑' 1절) 백두산봉우리 깃발 펄펄 날리고 제주도 한라산 유격대깃발 올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빨지산아리랑' 1절, ‘항미원조 전쟁 군가집’ ) 11시 자유수호박물관에서는 식전행사에서 한국전쟁시 세계평화를 위해 참전한 유엔군 및 순국선열의 희생을 추모하는 추념제를 올리고, 지신밟기로 시작하여 '아리랑'을 헌정했다. 주최측은 "한미동맹 70주년과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한미우정을 상징하는 아리랑을 통해 더욱 한미우정을 강화하고,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통해 '상생의 도시' 동두천시의 정화와 치유를 회복하는 정주년이 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김경수 회장은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아리랑으로 이 땅을 정화시키고 '동두천시를 새롭게, '시민을 힘나게', 회복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동두천'의 서사를 주제로 한 지속적인 전통문화 활동을 통해 동두천시의 이미지를 새롭게 전환시키는 효과를 기대한다. 특히 이번 행사를 통해 한국전쟁에 참가한 22개국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호국영령들에게 아리랑을 바친다"라고 밝혔다. 또한 내년 2회에는 경기 북부 지역의 민·관·군과 다문화사회를 대상으로 아리랑으로 하나가 되는 문화예술 향유 기회의 장을 확대·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히겠다고 전했다. 유은서 회장은 "전국적 물난리로 행사가 축소된 이번 동두천평화아리랑제이지만, 우리 전 회원은 한마음을 모아 유엔 참전용사들과 순국선열들을 추념하며, 평화의 노래 '동두천아리랑'이 시민들에게 애창곡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이혜솔 회장은 "동두천에 주둔한 미 7사단가로 불린 아리랑을 부르면서 감회가 새롭다. 미군들이 널리 알린 이 아리랑이 미국 뮤직션들이 편곡하여 여러 버젼의 아리랑이 음반으로 나왔다고 한다."라고 전했다. 정전 70주년이라는 정주년을 통해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담보하는 동두천의 서사는 '상생의 도시 동두천'으로 거듭날 수 있다. 상생의 도시 동두천은 세계 유네스코가 주목한 아리랑의 3대정신(대동 해원 상생)을 구현할 수 있는 중추적 역활을 수행할 수 있는 서사를 담보하고 있다. 동두천 보산리에 주둔한 미군 7사단이 매일 아침마다 불렀던 단가 '아리랑', 1964년 안흥리에 미군 7사단이 지어준 '아리랑다리', 미군 위안부 모임 '아리랑'은 동두천 시의 역사이고 서사이다. 그만큼 전통문화와 외래문화가 충돌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요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산리에 1971년까지 2만6천명이 주둔한 미군들이 단가로 아리랑을 불렀고,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아내들에게 아리랑악보가 담긴 실크 스카프를 고국으로 보냈다. 어제 국가보훈부에서 이 '아리랑스카프'를 복원하여 유엔 참전용사들에게 선물을 한다고 밝혔다. 아리랑은 전장에서뿐 아니라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조인식을 마치고 귀환하던 유엔대표단과 북한 측이 사열할 때도 동시에 각각 연주된 곡이다. 이날 동두천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여 아리랑이 불러진 것은 역사적 의미를 시사한다. 아리랑은 미래의 노래이고 평화를 상징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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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군홍, 80여 년 걸려 우리에게 온 화가그림 한 점이 시선을 붙잡았다. 젊은 어머니가 아들을 품에 안은 모습이었다. 남편은 이 그림이 마지막이 될 줄 모르고 북으로 가버렸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렇게 임군홍(1912~1979) 화백과 첫 대면을 했다. 1950년 작품이다. 화가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그해 화가는 북으로 넘어가면서 가족과 영영 이별했다. 기자는 그림 속 두 살배기 아이에게서 슬픔을 느꼈다. 7월 27일부터 두 달간 열리는 ‘임군홍 전’을 준비 중인 압구정동 예화랑에서 74세의 장년이 된 그를 만났다. 아들은 그림의 전후 사정을 어머니와 7살 위 형에게서 들어 "그랬구나”라고 느낄 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이나 서러움 같은 건 달리 내비치지 않았다. 들은 이야기와 사진, 그림들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줄곧 그려온 까닭이었을 것이다. 백부로부터 아버지의 소년 시절을, 어머니로부터는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백부는 동경 유학까지 갔던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집안의 결혼 강요 탓에 의기를 꺾었던 사연을 안고 있어 더욱 화가 동생의 불행을 가슴 아파했다. 임군홍은 김환기, 이인성, 이중섭, 박수근 등 20세기 초반의 대가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으나 조명을 받지 못했다. 박수근처럼 그도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했다. 주교공립보통학교 시절 미술교사였던 김종태1906~35와 윤희순1902~?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에 눈 떴고, 졸업 후 치과병원에서 기공사로 일하면서 경성양화연구소에서 약간의 수업을 받은 게 미술 공부의 전부였다. 김종태는 야수파 화풍을 보이며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자화상’으로 입선한 후 이듬해 ‘포오즈’로 특선을 차지하여 연이어 여섯 차례에 걸쳐 특선을 차지한 스타 화가였고, 윤희순 역시 평론가로도 활동한 유명 미술인이어서 임군홍의 기초를 탄탄하게 잡아주었다. 특히 몇 번의 붓질로 대상의 아웃 라인을 잡는 건 스승 김종태의 기법과 꼭 닮았다. 일본에서 들여온 미술잡지들을 통해 인상파와 야수파, 표현파들의 그림을 살피는 것도 공부였다. 임군홍은 1931년 선전에 유화 ‘봄 스케치’로 입선한 후 1936년 ‘여인 좌상’으로 다시 입선하고 이듬해에 ‘소녀상’으로 또 입선한다. 이후부터 1941년까지는 풍경화로 해마다 입선을 거듭한다. ‘소녀상’은 사귄 지 1년 된 결혼 전 아내를 모델로 삼아 그렸다. 연이은 입선 후 그는 아내에게 비취반지를 선물한 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아내는 반지를 낀 손을 곧게 펴 자랑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행복한 시기였다. 간호사이던 아내 홍우순(1915~1982)과는 치과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홍우순은 현재 가수이면서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솔비의 이모할머니이다. 1938년까지 3회의 동인전과 한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이즈음 본명인 수룡(水龍)을 버리고 군홍(群鴻)으로 활동한다. 나머지 두 아들도 이름을 득용(得龍), 점용(點龍)으로 지었을 만큼 유가의 집안임을 자부했던 부친의 뜻을 저버린 셈이었다. 자신이 집착한 용을 마다하고 기러기를 택한 아들의 결정을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듯싶다. 혹시 ‘군계일홍(群鷄一鴻)’의 뜻이었다면 수긍해 주셨을까. 임군홍은 1939년 돌연 중국행을 택한다. 결혼을 앞두고 돈을 벌 생각으로 광고디자인 사업을 병행하던 중이었다. 넓고 큰 중국 시장에서 빠른 승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만주와 북경을 거쳐 호북성 무한에 터를 잡았다. 최고 번화가인 화루가(花樓街)에 회사를 차려 사진 인화, 광고, 인테리어 사업을 전개했다. 조선인 서화가들이 중국에 남긴 작품들을 찾아서 파는 일도 했다. 간송 전형필(1906~1962)도 수집 차 여러 번 그의 가게를 찾아오곤 했다. ‘꽃으로 단장한 거리’라는 매력적인 이름의 거리는 미감을 중시하는 화가와 잘 맞았을 것이다. 실제 임군홍은 이 거리의 풍경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루가 골목의 풍경을 담은 그림에 등장하는 간판의 ‘照相放大’가 ‘사진 인화 확대’라는 뜻이라고 일러주자 임 선생의 차남 임덕진(1948~ )씨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덕분에 그 가게가 아버지 회사였음을 알게 됐다”라는 것이다. 임 화백은 그렇게 주변 풍경들에 마음을 주며 하나씩 그려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재래시장의 정육점을 담은 풍경화는 1941년 선전에 입선했다. 1946년 귀국할 때까지 사업과 그림을 병행했다. 이 시기 사업으로 바쁜 와중에서도 그린 그림들 가운데 기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금성 연작이었다. 묘하게도 그는 기자가 북경특파원으로 주재하던 시절 자주 찾았던 장소에서 자금성을 그렸다. 다름 아닌 자금성 뒤 경산(景山)이었다. 궁궐 옆에 북해 호수를 만드느라 퍼올린 흙으로 조성한 인공산으로서 우리 창덕궁 후원처럼 명 황제 일가의 휴식처였다. 명明 말기 대기근과 관리들의 수탈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이 자금성으로 진격해 오자 겁을 집어 먹은 숭정제는 뒷산으로 달아난다. 한참 자금성을 부감으로 내려다보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마침내 나무에 목을 매단다. 황제로서는 처절한 최후였다. 이 경산에서 바라보는 자금성 풍경이 압권이다. 2km에 달하는 궁궐 전각들의 황금색 기와들이 일제히 햇빛을 반사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왜 산 이름에 ‘경치 경景’ 자를 붙였는지 절로 이해가 되는 곳이다. 기자도 수시로 이곳에 올라 고궁을 내려다보면서도 단 한 번도 싫증을 낸 적이 없었다. 임 화백의 고궁 그림을 보면서 그는 왜 이곳을 그렇게 여러 번 올랐을까, 의문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경에 살고 있던 게 아니라 1,250km 떨어진 무한에 살면서 수시로 이곳을 찾기란 보통의 꽂힘이 아니고선 힘들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북경의 아이콘이기도 하지만, 숭정제의 비극이 깃든 역사가 서린 곳인 데다, 자금성의 미감을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포인트라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겠나, 짐작한다. 임 화백은 자금성 네 귀퉁이에 3층 높이로 서 있는 누각들에도 시선을 주었다. 공사 설계자가 디자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누군가의 "여치 조롱에서 힌트를 얻어 그대로 지었다”라는 후일담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건축물이다. 역시 조형미 덕에 세련된 미감이 감지되는 건축물이다. 임 화백은 천자天子의 상징인 천단天壇도 여러 번을 찾아 다양한 이미지를 화폭에 옮겼다. 이 시기 베이징을 자주 찾던 그는 저명한 일본인 화가들인 야자키 치요지(矢崎千代仁, 1872~1947),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 1888~1986)와 교분을 쌓는다. 각각 제국미술회 회원과 동경미술대학 교수를 지낸 이들이다. 그들 역시 자금성과 천단을 그린 점으로 미루어 현장에서 함께 작업하다 서로 사귀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야자키는 파스텔화로, 우메하라와 임군홍은 유화로 대상들을 묘사했다. 야자키는 임군홍의 초상화를 그려주었을 정도로 친했다. 1946년 서울로 돌아온 임 화백은 ‘고려광고사’라는 광고·디자인·인쇄 회사를 차려 사업을 계속했다. 서울의 첫 디자인 회사였다. 사업은 원만했으나 좌우 충돌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1947년 그는 용공분자로 몰린다. 좌익계 남편 안막과 동반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를 운수부(국토교통부)에서 주문받은 신년 달력에 올린 탓이었다. 별생각 없이 최승희의 지명도만을 생각했던 그는 자신에게 찍힌 ‘용공’ 낙인에 좌절한다. 1948년 옥에서 풀려났지만 혼탁한 해방공간에서 더 이상 남한에 있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일단 피신해야겠다는 생각에 택한 북한행이 가족과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는지 임 화백은 갓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 지극한 애정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인 ‘가족’에도 두 살배기 아들은 엄마 팔에 안겨 잠들어 있다. 7살 많은 형은 뛰어노느라 빠졌고, 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긴 두 살 터울의 누나는 한 곁에서 뾰로통한 표정이다. 탁자 위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물품들이 늘려 있다. 임 화백이 좋아했던 독일제 맥주 컵은 꽃을 꽂아 정물화에 여러 번 등장하고, 램프와 도자기, 항아리 등도 애용하던 소품들이었다. 그가 떠난 후 생활고를 겪던 모친이 시장에 내다 팔면서 모두 사라졌다. 둘째의 초상화 앞에서 기자는 먹먹해졌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낡은 액자를 뜯고 그림을 끄집어 내려하자 또 한 장의 그림이 뒤에 붙어 있었는데 고양이 그림이었다는 설명 때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살배기를 두고 가면서 아버지는 아들의 초상화 뒤에 수호신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을 지켜본다”라는 원모심려(遠謀深慮)의 마음을 길 떠나는 아버지는 비장의 그림으로 대신했다. 꽁꽁 묶여 보관돼 오던 임군홍 화백의 그림 120여 점이 그린 지 80여 년만에 우리에게 제대로 공개된다. 전시를 기획한 김방은 예화랑 대표는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그의 천재성이 조명되고, 일반이 접하기 쉽도록 기념관이 건립됐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을 말한다. 73년 전 아버지가 숨겨둔 수호신 덕에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수가 있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임덕진 씨는 "아버지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늘 아버지의 숨결을 느껴왔다”라고 말한다. ‘고양이 수호신’은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지극한 보살핌’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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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락 페스티벌 '장:단(長短)'국립극장 대표 여름 음악 축제 '2023 여우락 페스티벌'이 6월 30일부터 7월 22일까지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하늘극장·문화광장에서 펼쳐진다. '축제하는 인간'을 주제로 12편의공연을 선보이고 있는 이 축제는 전통음악과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경계 없이 어우러지며 과감한 실험과 도전을 선보이고 있다. 7월 8일 토요일, 타악 연주자 황민왕과 즉흥음악 마스터로 불리는 사토시 다케이시가 서로의 장단을 맞대는 공연 '장:단(長短)'을 관람하였다. 황민왕은 전통음악에서부터 현대의 즉흥음악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활동 영역을 보여주고 있는 타악 연주자이며, 사토시 다케이시는 지역적으로는 아시아·남미·중동 등의 여러문화권을, 음악적으로는 민속음악과 재즈 등을 넘나들며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타악 연주자이다. 2015년 7월 여우락을 통해 처음 만난 황민왕과 사토시 다케이시는 공연 이후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내왔다고 한다. 황민왕은 사토시 다케이시의 악기 구성과 즉흥연주의 방식에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으며, 사토시 다케이시 또한 황민왕을 통해서 한국의 장단과 그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번 무대는 8년 만에 뭉친 그들이 오로지 두 사람의 연주로 서로의 길고 짧음을 대보는 시간이었다. 두 연주자는 동양 타악과 서양 타악의 물리적 만남 그 이상의 화학작용을 끌어내며 장단과 리듬, 즉흥과 즉흥이 만나 동서양의 경계를넘어서며 하나의 음악을 완성해 나가는 무대를 만들어 냈다. 타원형의 하늘극장에는 좌, 우로 나뉘어 연주자들이 연주할 각종 타악기가 놓여 있었다. 황민왕이 연주할 좌측 무대에는 장구와 징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우측 무대에는 사토시 다케이시가 연주할 다양한 종류의 북과 타악기들이 놓여있었다. 공연은 황민왕과 사토시 다케이시가 함께 꾸려나가는 무대 말고도 중간중간 각 연주자가 혼자 연주하는 무대도 있어 개개인의 역량을 더욱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공연 내내 계속해서 받은 느낌은 ‘청각의 시각화’였다. 그들이 연주한 타악기는 음의 높낮이를 연주할 수 있는 유율타악기가 아닌 무율 타악기가 대부분이었기에 악기의 고유한 음고와 음색이 뚜렷했는데, ‘음’으로 이루어진 선율이 아닌 리듬이 끌어나가는 무대에 다양한 색채의 타악기들이 번갈아 가며 연주되다 보니 타악기가 선사하는 음악에 온전히 귀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악기들의 사운드에 따라 눈 앞에 어떠한 풍경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징 소리로 시작한 첫 무대는 몽환적인 동화 같았고, 심벌즈와 높은 음고의 악기들이 챙챙거리며 연주되는 부분은 마치 동물들이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사토시 다케이시가 연주한 낮은 음고의 둥둥거리는 북소리는 고전문학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배경이 그려지며 우렁찬 자명고 소리로느껴졌다. 특히 음색에 더해져 쪼개지거나 늘어나는 역동적인 진행을 ‘리듬’을 통해 감상하니 더욱 신선한 공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장:단(長短)' 무대는 곡에 따라 한 연주자가 선도하면 나머지 한 명이 보조하여 따라가다가 합치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황민왕이 우리 전통 장단을 사토시 다케이시에게 제시하면 그가 자신만의 리듬을 더해 서로의 교집합을 축적하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보통 기본 장단을 연주한 후 변형 장단을 연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감상할 수 있지만 장단의 틀 안에서 리듬을 색다르게 변형시키는 연주는 일반적이지 않기에 사토시 다케이시의 연주가 더욱 신선하고 참신하게 느껴졌다. 황민왕은 주제 장단으로 익숙한 자진모리 장단이라든지 굿 장단, 혹은 색다른 장단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사토시 다케이시는 어떤 장단을 제시받든 자유로운 강세와 밀고 당기는 표현을 더 해 새롭게 연결해 나갔다. 한국의 전통 장단과 세계의 다양한 리듬이 두 연주자의 연주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어디에도 없던 리듬의 새로운 형태가 즉흥으로 연주되다 보니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어 더욱 손에 땀을 쥐고 빠져들어 감상할 수 있었다. 이 무대에서 황민왕은 타악기 연주뿐 아니라 태평소를 연주하기도 하고, 구음이나 노래를 얹기도 했다. 중요무형문화재 남해안별신굿을 이수한 그답게한국적이고 민속적인 소리로 무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황민왕이 계면조가두드러지는 태평소 선율을 연주할 때 사토시 다케이시가 그 선율에 맞추어 역동적이고 화려하면서도 뚜렷한 리듬의 색채를 선보인 부분을 통해 전통이 새롭고 다양한 방향으로 섞이고확장됨을 느꼈다. 또 흥미롭던 무대는 황민왕의 ‘구음 장단’과 사토시 다케이시의 ‘즉흥 장단’의 주고받음이었다. 황민왕이 ‘덩- 덩- 더궁-’, ‘덩 더덩 더덩’ 등 장구의 소리를 구음으로 나타내어 입으로 제시하면, 사토시 다케이시는 바로 그 장단을 받아 새로운 형태로 변형시켜 그만의 장단으로 연주해 냈다. 앞에 놓여있는 악기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양손으로 치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하며 새로운 장단 세계를 만들어 나갔는데, 빠르고 속도감 있거나 여유로운 구음을 멋지게 구사하는 황민왕과 그 구음을 자연스럽게 즉흥으로 받아 연주하는 사토시 다케이시의 연주는 안정적이고 온전한 음악을 만들어 냈으며, 서로 즉흥으로 주고받다가 점점 하나 되어 함께 기본 장단으로 돌아와 연주하는 구간은 완벽한 타이밍과 호흡을 보여주어 숨이 멎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무대 바로 앞 좌식 자리에 앉아있던 관객들이 참여한 관객 참여 무대도 인상적이었다. 황민왕은 무작위로 징, 꽹과리 등의 악기를 네 명의 관객에게 나누어주고, 두 연주자의 느린 장단에 맞추어 자유롭게 연주하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정주를 받은 관객은 타이머를 3분 동안 맞춘 후 시간이 되면 정주를 쳐 맑은소리로 음악의 끝을 알렸다. 그 시간만큼은 그 공간에 있던 모두가 조용히 악기들의 소리에 온전히 집중했고, 연주자들은 서로가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여유로운 장단 안에서 본인의 색을 찬찬히 드러냈다. 천천히 귀를 열고 타점을 찍어 나가며 3분 동안 진행된 즉흥 연주는, 불규칙하지만 규칙적인 훌륭한 예술이자 함께 즐기는 축제, 여우락 그 자체였다. 황민왕은 즉흥 연주인 만큼 확실한 사인을 맞추기가 어려웠던 이 무대의 조명감독, 음향감독의 수고로움에 박수를 보냈다. 구름이나 바다 같은 잔잔하고 아름다운 풍경과 삼각형을 활용한 고급스럽고 따스한 느낌의 조명은 이 무대에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정도로 잘 어울렸고, 타악기의 특성상 극단적으로 세거나 여린 소리를 편안하고 적절한 사운드로 감상할 수 있던 음향도 훌륭했다. 여우락 페스티벌 무대가 얼마나 섬세하게 잘 준비되었는지 알 수있는 부분이었다. 무대는 황민왕이 관객들을 축원하는 비나리를 하고 두 연주자가 합을 맞추어 현란한 북춤을추는 듯한 힘찬 연주를 선보이며 끝이 났다. 70분의 공연 시간 내내 두 명의 연주자는 각각의 기량을 뽐내며 서로가 가진 길고 짧음을 선보이는 동시에 ‘리듬’, ‘장단’이라는 틀에 맞추어 함께 호흡하고 화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만들어 냈다. 자유로우면서도 완전하던 그들의 합은 관객 모두의 오감을 깨워주었고, 잊지 못할 시간을 선사해 주었다. 이번 무대를 계기로, 앞으로 더욱 다양한 방면으로 확장될 우리 장단과 리듬의 형태를 더욱 기대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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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전승 실상 快晴, ‘청출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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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유지숙' 전수교육조교 제자 발표회 ‘A+’# 국가무형문화제 서도소리 유지숙 전수교육조교 제자 발표회 청출어람, 사단법인 향두계놀이보존회 추최/주관, 한국문화의집코우스, 7월 9일 월 오후 4시. # 청출어람 초대의 말씀 "제가 유지숙 선생님을 존경하고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소리에 반하여 모신 시간이 어느덧 27년, 세월 바람 같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면서 제 인생의 서도 소리를 싹 틔울 수 있었고 늘 채찍과 또 격려와 사랑으로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음을 생각하니 한없이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제자 대표 오현승/향두계놀이보존회 이사장) # "어련하겠어요. 평소 자태나 소리가 깔끔하니~.이제 국악계 어른 축에 드니 그 위치만큼 실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리라 기대합니다.”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 "잘 하잖아? 좋잖아? 든든해요. 서도소리 장래가~. 그러나 전승 생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기관의 관심이 필요해요.” (서한범/前 단국대 교수) # "최경만 선생과 함께 한다는 것이 서로 행운이지요. 유지숙 선생도 인사에서 밝혔지만 생태적 결합에다 화학적 결합이어서 시너지가 극대화 된 결과입니다. 현장에서도 외조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이런 잔치는 제자들이나 스승이나 지켜보는 우리나 다 보람있고 든든하게 해 주었어요.” (정문교/前 신나라 대표) # "공연 측면에서도 노력과 연출력이 돋보였어요. 제자들의 연조와 목구성을 구분해 그에 맞는 곡을 배치해서 떼창인데도 가사가 전달될 정도였으니까요.” (박상진/前 동국대 교수) # "1935년 7월, 이혜구 교수가 하규일 명인으로부터 가곡을 이수를 하고, 이에 감사드리는 ‘배반’ 행사를 명월관에서 했다는 기록이 떠올랐습니다. 90여년 전의 아름다운 국악계 전통을 재현한 행사였습니다. 스승 유지숙 선생은 몰라도 관객은 ‘올 100’을 주었습니다. 청출어람! 말이 아닌 현실 가능함을 보았습니다.” (기미양/(주)국악신문 대표이사) # "최경만 선생님과 함께 우리 소리의 깊이를 아시고 전승에 기여하시는 모습이 좋습니다. 늘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회갑을 축하드리며 9순 잔치 때는 꼭 참석하겠습니다.” # "20대에 철 없이 서도소리가 좋아 나선 세상에서 운명적으로 오복녀 선생님을 만났고, 행복하게 소리를 배운지 어언 40년~. 제자들은 저의 전 재산입니다. 이제 제자들 덕분에 오늘날까지 많은 일들을 해 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맙고 고마운 제자들을 위해 남은 날들도 사명감을 다하겠습니다. 모든 제자들과 특별히 각 지역 지부장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김광숙 이춘목 이춘희 선생님께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감사함을 드리고, 학문의 길로 이끌어 주신 서한범 교수님과 균형을 보여주시는 경임순 문화재위원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면구함에 위 어르신들께는 연락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따로 안부 올리겠습니다. 변치 않고 성원해 주시는 오늘 오신 관객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민족유산을) 전승하며 가꾸어 가겠습니다.”무대 인사에서 (유지숙/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 전수교육조교). 주최 측이나 관객 모두가 만족스러워 하는 행사는 흔하지 않다. 제자들의 진행도 진정성이 배어있고, 스승의 뜻에 따라 겸손함과 소박함이 묻어 있었다. 참, 실용적인 기념품도 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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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락 페스티벌 개막작 ‘불문율’, 신선!전통 음악과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함께 과감한 실험과 도전을 펼치는 국립극장 대표 여름 음악 축제 ‘여우락 페스티벌’이 2023년 6월 30일부터 시작되었다. ‘축제하는 인간(Homo Festivus)’을 주제로 공연 총 12편을 선보이게 된 이번 여우락의 포문을 여는 개막작, 전통 예술의 매력과 가치를 재발견하는 무대 ‘불문율’을 관람하였다. ‘불문율’은 판소리 명창 윤진철과 동해안별신굿 명인 김동언이 판소리 강산제 ‘심청가’와 동해안별신굿의 ‘심청굿’을 번갈아 주고받으며 우리의 대표 고전 ‘심청’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연이다. 11살에 소리를 시작해 최연소 판소리 무형문화재에 오른 윤진철 명창과 고(故) 김석출의 셋째 딸로 태어나 9살부터 굿판에 선 김동언 명인, 두 대가가 한자리에서 만난 이 공연은 판소리와 굿은 한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불문율을 깼다는 점에서 공연 전부터 많은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전통 예술의 맥을 이어 온 명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이 무대는 일생을 바쳐 각자 다른 길에서 최선을 다해 전통의 길을 닦아 온 두 명인이 한 무대에서 무엇이 같고 다른 ‘심청’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지, 어떤 식으로 화합하며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갈지 큰 기대를 품고 무대를 감상하였다. 둥그런 원형으로 이루어진 아늑한 하늘극장 작은 무대의 왼편엔 굿 반주를 위한 꽹과리와 징, 장구가, 그리고 오른편엔 소리북이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국악 공연을 봐 왔지만, 한 무대에 소리북과 굿 반주용 타악기가 함께 놓여있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다. 왠지 모르게 이질적이고 어색하면서도 새롭고 신선한 그 장면에 가슴이 뛰었고, ‘판소리와 굿은 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새로운 명제를 마주한 벅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판의 기운을 쥐락펴락하는 이 시대 최고의 무녀 김동언이 선사한 ‘심청굿’은 동해안별신굿에서 심청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자손들의 눈병을 예방하고 효자, 효부가 많이 나기를 기원하는 굿거리이다. 굿을 진행하는 김동언 무녀는 관객들에게 말을 걸거나 본인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유쾌하고 흥미롭게 무대를 끌어 나갔다. 특히 무녀가 춤과 소리로 관중을 즐겁게 하면 관중은 금전을 상급으로 주기도 하는 실제 굿판에서처럼, 관객들은 김동언 무녀의 옷에 돈을 꽂아주며 소원을 빌고, 무녀는 그들을 축원해 주는 시간을 가지며 실제 굿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느낌을 주어 더욱 생동감 있는 무대를 만들어 냈다. 두 명인은 번갈아 가며 심청의 이야기를 각자의 분야인 심청굿과, 판소리 심청가의 대목으로 주고받으며 연결해 나갔다. 공연의 상영시간은 쉬는 시간 없이 2시간 30분으로 매우 긴시간 진행되었는데,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심청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특히 판소리 심청가는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고, 다양한 무대를 접해 보았지만, 동해안별신굿의 ‘심청굿’은 무대에서 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심청굿’은 사설 읽듯 이야기를 끌어 나가는 특징을 지녔다. 글을 읽어나가듯 빠르게 심청전의 이야기를 전하는 동시에 중간중간 민요의 느낌을 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동부제의 메나리토리로 구성된 선율이 많았고, 질러내는 소리와 속소리가 적절하게 구사되었다. 왼편에 앉아있던 장구와 꽹과리, 징이 그 위에 굿 장단을 치며 반주했는데, 장구 반주자가 무녀의 노래 끝에 받는소리로 짧은 구음을 노래하는 것이 신선했다. 김동언 무녀의 소리는 곽씨부인이 죽기 전 심봉사에게 청이를 잘 부탁한다며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장면에서 특히 큰 울림을 주었다. 죽음을 앞두고 애절하고 슬픈 마음으로 남겨질 남편과 딸을 걱정하는 애달픈 그 이야기는, 마치 곽씨부인이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더욱 사람들을 울렸다. 김동언 무녀의 무대에 바로 이어 윤진철 명창은 힘 있는 소리로 단번에 좌중을 압도했다. 그가 열정적으로 뽑아내는 소리는 무대를 넋 놓고 보게 만들었고, 심청가의 배경으로 들어가 그 장면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듯했다. 심청굿의 진행이 민요처럼 자연스레 흘러가고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면, 판소리 심청가는 힘 있고 정갈한 고수의 북장단과 위엄 넘치는 판소리의 울림이 강렬한 위압감과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이어 김동언 무녀가 선보인 ‘상여소리’는 그야말로 ‘상여소리’ 그 자체로, 상여꾼들이 상여를 들고 노래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애달픈 한이 절절히 드러나던 심청굿의 ‘상여소리’는 판소리 심청가의 ‘곽씨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과 같은 내용이지만 확연히 다른 구조를 보여주어 더욱 흥미로웠다. 판소리 ‘곽씨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은 진계면의 구성과 중모리장단으로 대놓고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면, 심청굿 ‘상여소리’는 어딘가 담담한 진행으로 음악을 이끌어 간다.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를 흉내 내는 소리는 판소리와 굿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가사인데, 판소리는 느리고 애절한 선율로 노래한다면 굿에서는 정말 종소리를 흔들 듯 빠르게 그 소리를 읊어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곽씨부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굿의 소리로 듣자니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는 남겨지는 이들의 슬픔이 정통으로 느껴졌다. 한국인의 DNA에 새겨진 어떠한 ‘한’의 공감인 걸까? 반복되어 연주되는 굿거리장단 위에 슬픔 가득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얹어지며, 노래하던 무녀는 저고리의 고름으로 눈물을 훔쳐냈고, 관객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김동언 무녀는 중간중간 관객들과 계속해서 소통하고, 윤진철 명창에게도 장난스럽게 말을 거는 등 재치 있게 무대를 장악해 나갔다. 간드러진 기교와 확실한 힘이 있는 노래에 더해 어느 대목에서는 춤을 추기도 했다. 강렬한 굿 장단 위에 어지러운 듯 자유롭고 예술적인 무녀의 몸짓에 눈을 뗄 수 없었고, 이 무대를 서울의 공연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감격스러웠다. 심청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이야기는 절정으로 흘러갔다.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떠나간다며 아버지에게 절하는 부분에서 김동언 무녀는 심청의 역할을 하여 윤진철 명창에게 절하였고, 윤진철 명창은 심봉사가 되어 눈물 어린 부녀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렇게 서로 번갈아 가며 ‘심청전’을 끌어 나가다가, 판소리 ‘범피중류’가 울려 퍼졌다. 심청이가 제수로 팔려 배를 타고 인당수로 가는 대목. 인당수로 가는 배 위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길게 늘어지는 진양조장단 위에 꿋꿋한 우조로 힘차게 노래한 윤진철 명창의 소리는 관객 모두의 마음을 흔들었고, 질러내는 소리와 속소리가 번갈아 가며 등장하는 매력적인 소리에 맞추어 연주된 고수의 북 반주는 완벽한 판소리의 합치를 이루어 냈다. 그리고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왼편의 타악기들이 소리북과 함께 강하게 연주하며 역동적인 전개를 끌어 냈다. 수궁가의 ‘범 내려온다’에서 위엄있는 호랑이를 마주한 것처럼, 거친 파도와 풍랑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강렬함이었다. 굿을 반주하는 타악기와 소리북의 만남, 그리고 그 위를 힘 있게 노래하는 판소리. ‘풍-’하며 부채를 떨어뜨리는 연출과 함께 심청이가 바다에 빠지자, 관객석은 큰 박수와 추임새로 가득 찼다. 무대가 진행될수록 번갈아 가며 소리를 보여주던 두 명인이 다양한 모습으로 무대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범피중류를 시작으로 ‘방아타령’과 ‘자진방아타령’에서도 좌우의 모든 타악기가 함께 연주되었고, 윤진철 명창은 소리를 하며 흥청흥청 춤을 추며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그리고 마지막, ‘심봉사 눈 뜨는 대목’에서 김동언 무녀는 심청이가, 윤진철 명창은 심봉사가 되어 극적 요소가 가미된 완성도 있는 장면을 만들어 냈다. 심청이와 심봉사가 맹인 잔치에서 마주하고, 결국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을 굿과 판소리가 함께 노래한 장면은, 그 어떤 눈뜨는 대목보다도 깊이있고 감동적이었다. 특히 심봉사와 심청이가 손을 마주 잡고 서로의 눈을 바라본 장면은 마치 불문율로 이루어져 왔던 서로 다른 장르 ‘굿’과 ‘판소리’가 합치되어 드디어 서로를 마주하고, 새로운 시각으로써의 전통 예술 형태를 더욱 넓혀 나가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대는 김동언 무녀가 관객들을 축원하고, 윤진철 명인과 함께 노래하며 막을 내렸다. 두 명인은 무대 내내 소리의 소품으로 ‘부채’를 사용했다. 김동언 무녀의 부채는 화려한 색채의굿 부채였고, 윤진철 명창의 부채는 선비의 느낌이 물씬 나는 판소리용 부채였다. 전통 예술이라는 큰 틀로 묶여있지만, 서로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에서 각자의 예술을 연마해 온 두 명인의 부채가 처음으로 한 무대에서 만났다. 일생을 바쳐 생명을 불어넣는 예술을 만들어 온 두 명인이 전한 ‘심청가’는 두 개가 아닌 하나였다. ‘심청’이라는 하나의 주제 된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은 삶의 한과 흥, 눈물과 해학의 정수를 서로 다른 전통의 화합을 통해 만났고, 상처를 치유 받았으며 또한 위로받았다. 이제 시작이다. 우리 전통 예술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렇듯 끊임없이 명맥을 잇고, 발전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 낼 수 있는 가장 멋진 시도는, 선을 긋고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하나 된 마음. 불문율을 담대히 깨고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용기있게, 그리고 과감하게 해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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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정&채수현의 '서울새남굿' 무가와 경기민요 들어보세일제강점기 서울굿은 진짜 신이 내린 원무당과 노래를 담당하는 창부무당이 각각 존재했다. 즉 굿판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역할을 담당하며 함께 굿을 하는 엔터테인먼트 성격의 기예무당이 따로 있었다. 이러한 역할의 나눔은 굿 법식에 맞게 굿을 집전하는 무당도 중요하지만, 굿판의 신명을 올릴 수 있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무당이 굿판에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잘한다는 말을 듣게 되고 굿판의 규모(자본)를 결정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지난 15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무가'와 '민요'가 만나는 특별한 공연이 있었다. 진짜 무당과 진짜 소리꾼이 한 무대에서 굿도 하고 노래도 하는 굿판같은 전통을 재현한 무대라고 할까. 초여름이 막 시작된 6월 중반 원무당과 창부무당이 서초동에 떴다. 서울새남굿의 관록(貫祿)이 넘치는 큰 만신 강민정과 문예(文藝)를 겸비한 으뜸 소리꾼 채수현이다. 이들이 ‘노래’ 무가와 민요를 선사했다. 서울굿 만신들 사이에는 "영검함은 신령이 내리지만 재주는 인간이 배워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족집게 같은 공수와 예능적인 기예는 각각 별개라는 점을 전하고 있다. 장구 장단을 전담했던 기대까지 따로 두면서 소위 전문 분야를 두었던 셈이니 굿판의 신명과 흥은 창부무당 몫이었다. 먼저 강민정이 공연장의 부정한 기운을 물리며 정화하는 '부정청배'와 본향신을 찬양하는 '본향노랫가락'을 부르며 서울새남굿의 무가를 선보였다. 이어서 서울새남굿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중디밧산거리의 무가를 부르며 대체 불가의 서울새남굿 만신임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채수현은 일제강점기 유성기 음반에 담겼던 '구조노랫가락', '금강산타령', '바위타령'을 복원하여 부르며 당대에 활용되었던 노랫가락의 여러 양상을 우선 들려주었다. 다음으로 '현행 노랫가락'을 정갈하고 단정한 소리로 들려주며 현재에도 사랑받는 노래라는 점을 확인시켰다. 이어서 강민정은 상산거리의 거상춤을 추며 공연장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14살에 신내림을 받고 48년의 세월 동안 서울굿판에서 활동한 만신의 아우라가 무대에 가득했다. 이때는 현재 서울굿 대표 악사로 활동하고 있는 피리 한영서, 해금 허무길, 대금 김재용이 합세하여 '반염불', '허튼타령'을 연주하며 진정한 굿판의 삼현육각이 어떠한 것인지 들려주었다. 그러다가 강민정이 상산신의 무복을 벗으면서 "아 대감”하며 만수받이를 부를 때 벙거지에 철릭을 갖추어 입은 채수현이 등장하며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었다. 강대감 채대감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두 대감의 대감타령은 어찌나 흥겹고 너스레를 떠는 재담과 공수는 또 어찌나 손뼉을 치게 하는지, 두 대감의 연행에 관객은 저도 모르게 무감을 서고 있었다. 누가 원무당이고 누가 창부무당이었던가. 채대감의 거침없는 공수에 강대감은 얼쑤나 얼쑤나 하며 추켜세운다. 채수현의 자리는 굿판이어야 했나를 의심하게 했다. 강대감과 채대감이 대감타령을 부르며 놀 때 이 공연의 절정이 왔다고 생각하였으나 진짜가 또 나왔다. 두 대감은 신령님 복색을 모두 벗고 평 한복을 소리꾼의 모습으로 창부타령을 시작했다. "지리하구나 임이별은 생각사로다 목이메여 잠을 이루면 잊을까해도 차마 진정코 못잊겠네 잊으랴고 애를 쓴들 든정이 병이되어 살으나니 간장이라 증경은 쌍쌍 녹담중이요 호월은 단단 영창롱인데 적막한 나유안에 촛불만 돋우켜고 인적적 야심한데 귀뚜람소리가 처량하다 금로에 향진하고 옥루는 단단한데 돋은달이 지새도록 뉘게 잡히어 못오시나 임이야 나를 생각하는지 나는 임생각 뿐이로다” 칼칼한 굿판의 어정소리를 내던 만신 강민정은 "지리하구나 임이별은 생각사로다”하고 새로 배운 패개소리로 창부타령의 앞소리를 낸다. 굿판에서 신령의 소리로만 불렀던 창부타령을 세속의 소리로 내니 만신으로 살아온 서슬 선 삶의 소리보다는 그저 세월을 품어 넉넉해진 여인의 소리가 난다. 그 자리에는 내가 진정 못 잊어 애달아하는 임은 어쩌면 다시 못 오는 청춘이고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이라고 노래하는 소리꾼만 있었다. 강민정을 소리판에 잡아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채수현은 구현력이 좋고 탄탄한 성음의 소리꾼이다. 어정판의 신명에 거침이 없이 뛰어들었지만, 패기소리판으로 끌어낸 만신을 위해서는 그저 덜 것도 없고 보탤 것도 없는 소리를 내며 자신을 낮추었다. 영민하면서도 인간적 내면이 소리에 배어 나왔다. 우리가 민요라고 부르고 있는 익숙한 소리가 실상은 굿판의 소리를 모체로 하고 있다는 것을 진짜 무당과 진짜 소리꾼이 한 무대에서 굿도 하고 노래도 하였다. 공연을 마치고 2주가 훌쩍 지난 지금 만신과 소리꾼은 각자의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공연 말미에 각자의 자리를 잘 지키자고 다짐을 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벌써 한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이 둘을 다시 보며 귀가 호강하는 신명을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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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람을 위한 공동체 음악, 상여소리6월 29일(목)과 30일(금),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정기공연 ‘꽃신 신고 훨훨’이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은 지난 5월 부임한 유지숙 민속악단 예술감독의 첫 작품으로, 민속악단의 정기 공연으로는 최초로 상여소리를 주제로 하여 서도, 경기, 남도 지역의 상여소리 등 죽음을 다룬 노래와 음악으로 구성되었다. 지역별로 다른 상여소리를 통해 음악적으로 다양한 정서를 감상할 수 있던 이 무대에서는 민요, 잡가, 판소리, 무속음악 등이 다양하게 엮여 죽음과 삶에 우리 선조들이 대처했던 마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몽환적인 분위기 속 징의 잔잔한 소리 위에 얹어진 유지숙 예술감독의 담담하지만 애절한 소리로 무대가 열렸다. 첫 무대는 ‘서도 상여소리’로, 북녘의 땅에서 불려 온 애잔한 소리이다. 임의 분묘를 찾아가 한탄하고 삶의 회한을 표현한 첫 곡 ‘제전’은 느려서인지 격하게 떠는 음이 많은 서도제의 특징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제전’에 이어 ‘상구소리’에서는 장구와 대금의 수성가락이 얹히며 인생의 덧없음이 더욱 애잔하게 표현되었고, 이어 ‘산염불’이 불렸다. 산염불은 선율의 길이가 서로 다른 앞소리와 2장단으로 된 후렴으로 구성되었는데, 후렴구에 나오는 ‘에헤야 에헤야~나무아미타불’ 등의 후렴구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등의 가사 위에 서도제의 색채가 짙게 묻어 마치 그 떠는소리가 울음 우는 소리처럼 더욱 애잔하게 느껴졌다. 이후 ‘황해도 배천 상여소리, 평양 상여소리’에서는 총 8명의 소리꾼이 나와 함께 노래했는데, 힘 있고 빠른 속도로 언뜻 경쾌하게 흘러가는 듯 들리기도 했지만, 애달프고 슬픈 가사로 인해 오히려 슬픔을 더욱 자아냈다. 북녘의 땅에서 불려 오던 서도제의 상여소리는 이 땅에서 많이 연주되지 않고 그 자료 또한 많지 않지만, ‘한’과’ ‘슬픔’이 서려 마음을 찢는듯한 그 애절한 선율은 공연장에 있던 모두를 울렸다. 다음으로는 가야금 병창 단가 ‘백발가’가 불렸다. "백발이 섧고 섧다. 백발이 섧고 섧네.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다.” 로 시작하여 세상사 서러움을 노래하는 이 곡은 사실 인생무상만을 노래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백발이 되고 보니 인생은 허무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우니 명승지를 구경하며 즐기자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품고 있다. ‘백발가’를 세 명의 소리꾼이 밝은 평우조 음계로 구성지고 시원하게 불러내니, 꿋꿋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의 의지와 힘이 공연장에 가득 울려 퍼지며 관객들의 집중을 불러일으켰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 들고 죽음에 이르지만, 이를 그저 슬픔으로만 대하기보다는 아름다운 이 삶에 집중하고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였던 선조들의 지혜로운 태도가 가득 묻어난 무대였다. 세 번째로 경기 지방의 민요와 상여소리가 무대에 올랐다. ‘마음을 돌아보는 노래’라는 의미의 ‘회심곡’과 잡가 ‘이별가’, 그리고 고양시에서 불리는 상여소리로 구성된 ‘경기 상여소리’는 경기 지방에서 불리던 소리의 특징과 힘, 그리고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회심곡’은 불법에 귀의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올바르게 살아갈 것을 권하는 내용을, ‘이별가’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는 경기 지역의 민요이다. 살아가며 맺어지는 부모와 연인과의 관계, 그리고 연 가운데 얽히는 수많은 감정의 소리는 삶을 돌아보게 했고, 그 후 바로 이어진 ‘상여소리’는 인생과 관계의 흐름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바라의 챙챙거리는 소리로 인해 더 민속적이고 한국적이던 ‘회다지소리’에서는 많은 소리꾼이 함께 메기고 받으며 노래하고, 악사들이 간드러지며 힘 있는 반주로 함께 음악을 끌어 나가니 망자를 위로할 뿐 아니라 이 세상과 저승의 경계를 다지는 절연의 의지와 역동적인 몸짓이 잘 드러났다. 인생의 연속성을 나타낸 경기 지역 음악 세 곡을 통해 경제의 기교 있고 차분한 표현을 마주할 수 있었고, 인생과 삶, 사람 간의 관계를 다각도로 생각하며 깊게 감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공연의 마지막은 ‘남도 상여소리’가 장식했다. ‘진도 다시래기’를 중심으로 엮어낸 무대. ‘진도 다시래기’는 진도지방에서 초상이 났을 때, 특히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사람의 초상일 경우 동네 상여꾼들이 상제를 위로하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해 전문예능인들을 불러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 노는 민속극적 성격이 짙은 상여놀이이다. 신명나는 풍물패의 소리와 함께 가상제(거짓 상주 역할을 하는 배역이자 다시래기를 이끌어 가는 진행자 역할)와 풍물패가 관객석에서 등장하여 소란스레 무대로 향했다. 가상제는 유쾌하게 다시래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 명씩 호명해서 개인기를 펼치도록 유도했고, ‘거사’와 ‘사당’이 나와 연극형태의 연희를 벌였다. 이 연희에서는 ‘흥’에 초점을 두어 슬픔을 즐거움과 위로로 승화시켰는데, 재미있는 설정과 유희를 통해 떠들썩하게 즐기며 죽음의 상실감을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흥취 가득한 재담과 개사를 통해 유쾌하고 해학적으로 불러낸 소리는 마치 마당놀이의 어느 한 과장을 보는 듯 즐거워 죽음의 슬픔을 어느샌가 밀어내는 힘이 있음을 느꼈다. 특히 마지막 아이를 낳는 장면은 죽음이 있더라도 새로운 삶 또한 함께한다는 인생의 고유 진리, 그리고 상실보다는 연속된 삶이 더욱 중요하다는 가치 있는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한바탕 관객들과 함께 즐거운 무대를 선보인 후 가상제가 물러나고, 민속음악의 꽃, ‘씻김’이 시작되었다. 진도에서 전승되는 망자 천도굿인 ‘진도씻김굿’. 이는 살아생전의 좋지 못했던 기억이나 마음 깊은 곳의 앙금을 깨끗이 씻어냄으로써, 망자가 수월하게 저승으로 가도록 돕는다. 기존 씻김굿은 체계적인 순서에 따라 길게 진행되지만, 이 공연에서는 무대화되어 짧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치 사람이 흐느껴 우는 듯한 진계면으로 이루어진 선율과 소리는 사람의 감정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듯하였고, 무언가 엄숙하면서도 경건하게 만드는 힘 또한 존재했다. 흰 한복을 입고 지전을 든 무용수들이 보여준 망자를 위한 천도 의례 ‘지전춤’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액을 막아주는 춤의 몸짓이 격렬하면서도 진실하여 진도씻김굿의 예술성을 더해주었다. 지전춤에 이어 소리꾼 정회석이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등장하며 심청가 중 ‘상여소리’를 담담히 불러냈다. 정확히는 ‘곽씨 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으로, 중모리장단의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템포 안에서 ‘이제 가면 언제 올거나’ 하며 애절하게 부르는 그의 소리는 마음 한편을 아리게 만들었으며, 그 깊이 있는 성음은 판소리의 진면모를 드러냈다. 그리고 자연스레 마지막 무대 ‘진도 상여소리’로 음악이 이어졌다. 진도의 상장례는 육지처럼 장례식을 엄숙하게 진행하기보다는 사물 악기를 앞세워 흥겨운 축제처럼 이어 나가는 특징을 갖고 있다. 죽음을 그저 슬픔과 아픔으로 여기기보다는 누구에게나 오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떠나간 이를 기억하고 남겨진 자들을 위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공동체의 따뜻함에 마음이 풍성해졌다. 특히 이 무대에서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 27-4호 고양 상여, 회다지소리 보존회의 상여꾼들이 특별출연하여 무대를 꾸렸다. 점점 사라지고 있는 장례문화인 상여소리를 서울, 국립국악원의 무대에서 실제 보존회 회원들과 국악원 민속악단의 연주로 볼 수 있어 굉장히 의미 있고 가치 있었다. ‘삶의 끝에서 마주하는 평안’이라는 부제의 공연 ‘꽃신 신고 훨훨’은 지루할 틈 없는 빠른 전환으로 구성되어 삶과 죽음을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는지 지역별로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었고, 위로와 치유, 넉넉한 마음을 가득 느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 무대는 음악을 넘어 우리의 소중한 장례 문화를 무대화시켜 보여줌으로써 전통 예술의 가치 있는 보존에 큰 역할을 하였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섧고 아픈 죽음이 있기에, 기쁜 새 생명의 시작 또한 존재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옛 선조들의 마음을 깊이 새기며,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마주하고 되돌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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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아리랑제’, 가능성 확인되었다‘제2회 동두천아리랑제’가 지난 25일 오후 5시 시민회관 공연장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동두천아리랑보존회가 호국보훈의 달에 마련한 625전쟁 정전 70주년 기념하는 동두천아리랑제이다. 토속아리랑 '이담어러리타령' 8수, 창작아리랑 '동두천아리랑' 10수.... 2곡이 발표 되었다. 동두천에는 전래되는 어러리(아라리)와 본조아리랑 선율이 불려진 것이다. 이 아리랑을 유은서 회장이 아리랑학회 자문을 받고 현지 답사를 병행하여 발굴하고 복원하여 동두천 시민들에게 지난해 제1회 동두천아리랑제에서 알렸다.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이후 유은서 회장은 아리랑학회에서 동두천에도 아라리가 불려졌다는 학술적 근거를 가지고 경로당을 찾아서 발굴작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유회장은 경기북부 지역에서 30여 년간 국악 활동을 하면서 북한강 수계를 따라서 불려지는 포천어러리, 연천어러리(아라리) 등에 주목했다. 이후 '경기아리랑에 관한 연구'로 국민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동두천 관내 많은 경로당을 찾아가며 귀담아 들었던 아라리를 정리하였고, 8년 전 동두천지역 어르신들로부터 이담이라는 옛 지명이 담긴 이담어러리 30수를 찾았다.이렇게 동두천에도 향토민요인 이담어러리타령과 아리랑이 채록되었다. 현재 동두천아리랑보존회에서 향토민요 ‘이담어러리타령’이 전수되고 있다. 이담어러리타령 (소리:유은서/채록:기미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나를넘겨주게 아리랑 고개는 열두고개 아리랑 고개로 날만 넘겨주게 올라가는 신감사야 내려오는 구감사야 구관이 명관이라고 말 전하거라 내가 넘어가는 고개는 한 고개라 우리 님 고개는 열두 고개 이담면 흐르는 물을 안고 도는데 우리집 저 멍텅구린 날 안고 돌줄 모른다 해는 지는데 갓을 쓰고 어디를 가오 첩의 집에 가거들랑 나 죽는 꼴 보고 가소 앞집의 처녀는 시집을 가는데 뒷집의 총각은 목메러 간다 여보게 총각아 목메러 가지 말고 이내몸 시집간데로 몸살러 오게 아리랑사(史)에서 6.25전쟁과 동두천은 깊은 관계가 있다. 주한 미군 제7사단가 '아리랑', 안흥리 '아리랑다리', 동두천 위안부 모임 '아리랑'이다. 1953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동두천 보산리에 주둔한 주한 미군 (캠프 케이시)제7사단가가 '아리랑'이다. 특히 동두천 양공주로 불린 위안부들의 모임도 '아리랑'이고, 1964년 3월 10일 준공이 된 주한 미군 제7사단 장병들이 지어준 '아리랑다리'이다. 기록에 의하면 아리랑다리는 "64년 3월 10일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안흥리에 주한 미 제7사단 장병들이 손수 지었다. 제7사단장 그레이 소장이 양주 군수에게 '아리랑다리'를 지어서 인계했다. 폭 2m, 길이 120m로 미국과 한국의 굳은 우정을 기억하기 위해 아리랑다리라고 지었다"(대한뉴스 제 460호)라고 한다. 당시 동두천에서는 2만 6천명이나 되는 주한 미군 제7사단의 단가 아리랑이 대유행이었다고 한다. 미군들과 주민들이 만나면 손 붙잡고 아리랑을 자주 불렀다고 한다. 혹자는 출렁거려서 아리랑다리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당시 미제 통조림 깡통이 줄줄이 매달려 있어서 '깡통다리'라고도 불려졌다고 한다. 이렇게 서양속담에도 "사랑받는 아이는 이름도 많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1967년에 '아리랑다리'라는 영화로도 나왔다. 그런데 1972년 노후한 아리랑다리를 헐고 현재는 새로운 다리를 짓고서 안흥교라는 이름을 부쳤다. 지난 6일 동두천아리랑보존회원들과 함께한 동두천아리랑답사에서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에서 관내 역사 유래에 대한 지명이나 시설을 적극 발굴하여 안흥교를 다시 아리랑다리로 복원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당시 아리랑다리를 지어주고 1971년 3월 2만명의 미군들이 철수하면서 제7사단가로 불린 아리랑을 미국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코리아라는 나라는 전쟁 페허 속에서도 남녀노소가 모였다 하면 아리랑을 부르면서 고난을 이겨내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설명하면서.....(주한 미군 제7사단에 3대가 복무한 마이클람부라우 박사(손자) 증언) 당시 동두천은 지나가는 개들도 입에 파란 달러를 물고 다닌다고 했다. 그만큼 급작스럽게 자본 집중과 유입으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1950년 전쟁이후 동두천이야말로 아리랑이 가장 많이 불려진 지역이기도 하다. 군가로 불린 아리랑은 자연스럽게 미군들과 위안부들에 의해 불려져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세계적 뮤직션들이 아리랑 음반을 발매하고, 미국 동포들까지도 아리랑을 애국가처럼 불렀다. 지금도 6월 보훈의 달 뉴스에서 한국을 다시 찾는 미군 참전용사들은 의례적으로 당시를 기억하며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유은서 회장은 "새로 작창한 동두천아리랑에는 동두천 미군 기지촌의 애환이 담겨 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반 강제동원이나 속여서 끌려온 어린 여인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들의 한을 아리랑으로 정화하고 치유하시기를 바라며...."라고 설명하면서 어느새 울컥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도 함께 눈물이 고였다. 작년에서부터 그분들을 무대에 모시려고 수차례 청을 드렸는데 아직까지는 만나주기를 꺼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해자는 세상인데...아직까지 그분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보존회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오늘을 동두천아리랑제 개최일로 정례화 하기로 하였다. 식전행사로 풍물패 밝달이 지신밟기와 풍악을 울려 신명과 흥을 올렸다. 이어 동두천에서 전래되고 있는 향토아리랑 이담어러리타령, 창작아리랑 동두천아리랑이 첫 막을 열었다. 동두천아리랑 (소리:유은서/채록:기미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넘어간다(후렴) 우리낭군 먼동이 트면/모랫말가고요 아낙네들 신천물/빨래터에서 놀고요 저기가는 기차는/검은연기만 나고 이내가슴 타는데도/검은연기가 나네 동산올라 구경하니/길가는행인왜모르나 천하일색 나하나와/놀다가지못하고 고추당추 맵다해도/시집같이나 매울소냐 못살겠네 영죽겠네/이내시집은못살겠네 자재암 풍경소리는/ 바람따라 울리고 소요산 공주봉에는/ 바람소리 좋구요 만경창파방을삼고/연화수다가 옷을입고 이리떠도 둘이나둥둥/저리떠도 둘이쌍쌍 꽃이야 곱다마는/가지 높아서 못꺾었나 꽃은 꺾어/머리에 꽂고/잎은흝어다 입에물고 미군부대 앞마당에는/민들레꽃 고운데 꽃답던 이내청춘/어느새 시들어졌네 아리랑다리는 깡통강통/깡통다리라네 아리랑다리는 출렁출렁/출렁다리라네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과 회원들이 지난해 동안 갈고 닦은 가량을 펼쳤다. 2019년 함양산삼엑스포에서 음반으로 발매된 '황석산아리랑'(작곡:양평수, 소리:유은서)도 함께 선보였다. 한국무용 '살풀이'(이해영예술단), 변검, 동동구루무(송해문화예술진흥회), 한국무용 '강원도아리랑'(늘춤무용단), 인형극 (정승재)이 펼쳐졌다. 이어서 (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과 이병일(특별회원), 회원들이 소극으로 꾸며서 배역을 맡고 들려준 왕십리아리랑과 사할린아리랑을 생생한 감동으로 선사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따뜻한 조선을 놔두고/사할린에는 왜왔나 왜왔나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많은 남화태 징용왔네 안성아리랑보존회 조명숙(안성경서도잡가 보유자)과 회원들이 1911년에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안성아리랑을 선사했다. 조명숙 명인은 안성권번이신 어머니를 따라서 70 평생 노래만 불렀다. 뛰어난 공력으로 무대를 신명나고 신나게 만들어서 초청 단체 중 가장 많은 박수와 관심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관객으로 오신 귀명창들에게 전화가 왔다. '귀한 소리 들었다고" 동두천 시민들에게 서울경기 지역과 사할린에서 향유하고 있는 아리랑들을 선보였다. 안성아리랑, 동두천아리랑, 왕십리아리랑, 사할린아리랑과 함께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선사했다. 총 10개 단체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이날 박형덕 동두천시장, 김승호 시의회 의장을 비롯해 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회 김경수 지회장, 김성보 대한노인회 동두천시지회장, 동두천여성단체협의회 윤한옥 회장, 동두천농업협동조합 목현균 조합장, 동두천시종합자원봉사센터 형남선 센터장, 안성아리랑보존회 조명숙 회장,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 이무성 화백, (주)국악신문 관계자,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 등 300여 명의 관객들이 함께했다. 박형덕 동두천시장은 시민들에게 "동두천아리랑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 주실 것을 당부드린다"고 전했다. 김승호 동두천시의회 의장은 "아리랑은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과 아이덴티티를 대표하는 인자"라고 전했다. 대한노인회동두천지회 김승호 회장은 "이제 두 돐을 넘은 동두천아리랑의 발전을 위해서는 오랫동안 지역 전통문화 창달을 위해 온 김경수 동두천국악협회장의 배려와 지원을 부탁한다"고 전했다. 한편 동두천 전통문화 발전에 힘쓰고 있는 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 김경수 지부장은 "다른 지역에 비해 늦었지만 동두천 지역 아리랑의 발굴과 복원작업을 통해 동두천의 역사성을 '동두천아리랑'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동두천아리랑보존회는 지난 2012년 12월에 세계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리랑과 함께 향토아리랑 동두천아리랑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 아리랑을 통해서 지역문화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데 목적을 둔 비영리 문화단체다. 또한 아리랑 3대 정신(저항, 대동, 상생)을 계승한다. 지난 12월 등재 10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선에 세운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비에 동두천아리랑이 새겨져 있다. 유은서 회장은 "이번 동두전아리랑제를 위해 동두천아리랑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아리랑답사를 회원들과 수행하면서 더욱 아리랑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내년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주제의식을 구축하고, 스토리텔링 작업으로 다듬어서 소극으로 동두천아리랑을 올려보고자 한다."라고 전했다. 제2회 동두천아리랑제는 동두천아리랑보존회가 주관하고 동두천시, 동두천시의회, 전국아리랑공연예술연합회, (주)국악신문, 동두천예총, 대한노인회동두천지회, 동두천농업협동조합이 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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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아리랑제 확장성 확인, 제9회 경산아리랑제2007년부터 이어 온 경산아리랑제, 지난 24일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남매지 공원 특설무대에서 진행되어 시민의 큰 환호를 받았다. 특히 메인 행사인 ‘fail in love 경산 & 아리랑’에 반응이 컸는데, 구성이 다채로운데다, 출연자들의 기량이 높았다. 특히 경산아리랑보존회의 ‘나무하는 소리’와 ‘지게목발 소리’가 작품성이 매우 높았다. 방아타령 "에헤루야 방아야/에헤루야 방아로다 어절사콩콩 찧는 방아/언제나 다 찧고 마실갈꼬 (후렴) 이 방아야 독도구방아야/저 방아야 나무도구방아 나무절구 주걱소리/알각달각 장단치면 시어머니 잔소리방아/며느리는 눈치방아로다" 맷돌질 소리 "맷돌아 돌아라 빨리빨리 돌아라 얼른얼른 해놓고서 얼른얼른 해놓고서 다른일도 해야되지 다른일도 해야되지 고달프고 힘겹지만 고달프고 힘겹지만 어서 두부를 만들자 어서두부를 만들자 돌아돌아 맷돌아 어서빨리 돌아라 빨리돌아 맷―돌아 빨리빨리 돌아라 맷돌아 맷돌아 빨리돌아 이 콩을 돌아서 동생을 줘 맷돌 맷돌 맷돌아 어서빨리 돌아라 맷돌아 맷돌아 빨리돌아 이콩을 돌아서 시누이줘 맷돌 맷돌 맷돌아 빨리빨리 돌아라" 지난해 자인 숲에서 개최된 제8회 경산아리랑제는 경연대회와 본 공연의 장소가 각기 달라 혼선을 빗기도 했는데, 이번에 남매지 공연으로 장소를 옮겨 주제 공연으로 유도하는 집중력이 높았다. 장소를 옮기면서 청중의 눈과 귀를 무대로 향하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제7회 경산아리랑가창대회’는 예선에 통과 된 15팀 중 영상 심사 결과 6팀이 결선에 올라 현장에서 경연을 벌였다. 참가자가 적은 편이었지만 전국의 국악인들에게 경산아리랑을 알리는 효과는 거두었다고 본다. 이어진 '전국학생 겨레노래 아리랑 부르기 대회’도 예선은 영상심사인데 ,3명 이상이 참가하는 팀만이 출전할 수 있다. 예선에서 선정된 최종 6팀(서울, 경기, 대구, 경북 등)이 무대에서 경연을 벌였다. 학생 대상은 첫 시행인데다 3명 이상의 팀제로 참가 자격을 두어 참가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내년에는 홍보에 더 힘써야 할 듯하다. 대상에는 '사할린아리랑'을 부른 사할린 4세 학생들팀이 수상을 했다. 세 번째 행사가 흥미로웠다. ‘경산 &아리랑 박사 이벤트’로 아리랑과 경산아리랑의 이해를 넓히려는 의도로 처음 마련된 행사인데, 전국에서 첫 시행이었다. 문제 범위를 행사장에 비치된 홍보물 내용을 퀴즈화 한 것으로 아리랑의 위상(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지정 등), 경산아리랑의 이해(언제부터 불렸는가, 축제는 몇 회인가?), 경산시의 이해(시화, 시조 등 상징 문제), 경산 지역 축제(경산대추축제, 단오제, 갓바위축제 등) 15항을 제시 채점자 순위로 선정했다. 시민 참여형의 신선한 소재로 타 지역에서도 벤치마킹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외 다양한 이벤트들이 나름의 의미를 갖고 동시 진행 되었다. 앞으로 고정된 장소, 고정된 날로 특정되면 독립 주제 축제로의 입지가 확립될 것으로 확인 되었다. 사라져 가는 영남에서 전래되는 방아타령, 맷돌질소리,나물노래, 나무하러가는소리, 지게목발소리, 댕기노래, 물레소리, 어부사,밭매는소리, 상여소리, 화전노래, 지점소리, 칭칭이소리를 한자리에서 전통의 실생활이 생생하게 재현되는 퍼포먼스와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영남인의 심성이 담긴 영남 전래민요를 배치하고, 경산아리랑을 셔플댄스에 담아 조선팝으로 특화 시킨 기획의도가 제대로 관객들의 가슴에 전달되었다. 인사말에서 배경숙 대표는 "매년 6월 24일 하루는 남매지 공원 ‘경산아리랑의 잔치날’로 확정되어 경산만의 축제를 펼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하였다. 김연갑 이사장은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와 함께 한 축사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에 기여한 경산아리랑은 8회까지는 배경숙 이사장의 열정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이제 남매지 공원에 자리 잡은 내년 10회부터는 경산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지막 휘날레를 경산아리랑을 조선팝(K-Pop) 장르로 확산 시킨 기획 의도는 대성공이라고 본다. 지난해 러시아 동포들에게도 크게 환영을 받은 장르이다. 소리를 기본으로 춤과 연기력까지 더해진 무대는 10분 짜리 뮤직컬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러한 성공적 공연의 첫번째는 보존회 회원들의 기량이 남다르게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20여 년 보존회 결성 이후부터 가족처럼 모두 함께 해온 성과라고 본다. 휘날레가 끝나자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앵콜을 외쳤다. 아리랑 후렴을 따라 부르면서 흥얼거리면서 아쉬워했다. 경산아리랑 가사와 로고가 박힌 부채와 수건을 받아서 펴보면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고 하면서 어깨를 들썩들썩거리면서 돌아갔다..... 경산아리랑 "남매지 얽힌 전설 오누이 눈물인가 남성현 높은 고개 보슬비가 흩날리네 남천강 푸른 물결 말없이 흘러가고 나그네 잠긴 설움 옛 추억도 떠-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가네" 경산아리랑이 내내 입속에 맴돈다. 한편 경산의 명물 '남매지'는 경상북도 경산 시내에 자리한 저수지이다. 남매지라는 이름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조선시대 때 부모를 잃은 가난한 오누이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오빠가 한양으로 떠난 사이 여동생은 심보 고약한 빚쟁이의 첩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여동생이 저수지에 몸을 던졌고, 이 소식을 들은 오빠도 함께 자결하면서 이들 오누이가 목숨을 잃은 저수지 이름이 '남매지'가 되었다고 한다. 비극적인 전설과 달리 지금의 남매지는 경산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자 도심 야경 명소로 사랑받는 데이트 코스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