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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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5) <br>분청사기제기편당당한 기형에 힘찬 문양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내가 다닌 직장이 격주토요휴무제를 실시하던 곳이었다. 주5일근무제가 정착된 지금에 와서 보면 별 것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격주토요휴무제를 실시하는 곳은 국내에서 손으로 꼽을 정도여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는 했었다. 그런데 근래 바둑을 주제로 한 소설을 읽다가 주7일휴무제라는 것을 보았다. 직장에서 일주일에 7일씩이나 논다니 순간적으로 참 많이도 노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돌이켜 보니 그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 내내 논다니 그 것은 노는 것이 아니라 실업자라는 이야기였다. 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긴 백수나 실업자라고 하면 좀 풀이 죽은 이야기인데 돌려서 주7일휴무제라고 하니 유머스러한 것이 나름대로 괜찮은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내가 젊은 시절 도요지 답사에 그나마 열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다니던 직장이 격주토요휴무제를 실시한데다 업무상 지방 출장을 많이 다닌 탓도 있었다. 출장을 가서 일을 마치면 주변에 가마터가 없는가 살펴보게 되고 또 격주토요휴무일에는 가방을 메고 혼자 산천을 누비고 다닐 수가 있었으니 그 덕을 많이 본 것이다. 하긴 격주라고는 하지만 토요휴무제를 실시하는 곳이 별로 없다보니 그야말로 그 날은 나만의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집사람은 일터로 아들은 학교로 가고 지인들이래야 다 근무를 하고 있으니 마땅히 갈 곳도 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격주토요휴무일이면 가방을 둘러메고 산천 구경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대부분 그 곳에는 가마터가 있었던 것이다.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를 찾아 본 것도 출장 때가 아니라 격주토요휴무일에 가방을 메고 일부러 찾아 갔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고속버스로 나주를 간 후 택시를 대절해 찾아 갔었는데 좌측으로 작은 저수지를 끼고 올라가자 나타난 작은 시골 마을이 운봉리 백운마을이었다. 마을 건너편 감나무 밭이 가마터였는데 밭을 일구며 가마는 파손되어 흔적이 별로 없는 가운데 밭 위쪽으로 갑발과 수풀이 뒤엉겨 있는 곳에서 더러 도편이 보였다. 하지만 인화분청의 사발과 접시가 보이는 등 특색은 별로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다만 조선청자에 음각의 화염문과 구름문이 보여 박물관이나 도록에서 보이는 유물들과의 연과성이 주목되는 곳이기는 하였다. 운봉리 분청사기 도요지를 생각하면 별다른 추억이 없는 가운데 그나마 내게는 이곳에서 만난 인상 깊은 도편이 한 점 있다. 굽과 굽에 연결된 몸체가 일부 남아 있는 작은 도편이어서 정확한 기형은 알 수 없지만 굽이 높은데다 기벽이 유난히 두꺼운 것으로 보아 제기의 일종이 아닌가 생각된다. 굽 안과 몸체의 안쪽은 무문인데 굽과 몸체 외면의 문양이 특이하다. 예외적으로 높은 굽 아래에는 뇌문을 돌리고 굽과 몸체에는 백상감의 문양을 새기고 있는데 흡사 한자의 회(回)자 같은 문양이 연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회청색의 고운 유약에 시원스러운 백상감의 문양은 상품의 분청사기 제기였음을 암시하고 있다고나 할까. 여하튼 결손이 심해 전제적인 모습은 그려 볼 수가 없지만 당당한 기형에 힘찬 문양이 들어간 고급스러운 도자기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출장 때문에 또는 격주토요휴무제를 이용해 가방을 둘러메고 산천을 누비고 다니던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아득한 날들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 운봉리 분청사기 가마터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 눈을 시원케 하고 내 마음을 즐겁게 하던 그 산과 들에 근래 유례가 없는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범람하고 산사태가 생기고 인명의 손실이 있는 등 피해가 막심하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서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며 수해로 인해 심적으로 물질적으로 고통을 받는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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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4) <br>백자청화편들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편에 관심이 많은데다 수집도 하다 보니 도자기 조각도 쓰인 데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더러 있다. 따라서 자료를 찾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쓰인 데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쓰임이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죄인을 다루는 조선의 형벌 중에 압슬형(壓膝刑)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것이 바로 깨진 사기그릇 조각이었다. 깨진 사기그릇 조각 위에 죄인을 꿇어앉히고 무릎 위에는 무거운 돌을 올려놓아 고통을 주는 형벌이 바로 압슬형이었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무릎을 칼로 저미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현대미술 중에도 도편들을 모아 붙여 모자이크를 만드는 표현 양식이 있다. 이 때의 도편들은 물론 옛것은 아니고 근래의 도자기 가마터나 공방 같은 곳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전통 도자기 도편들을 실제 사용한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언젠가 충청북도 연기군 금사리 분청사기 도요지를 답사했을 때의 일이다. 주민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염전 바닥에 깔기 위해 이 곳의 도편들을 수거해 가져간 적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 황당한 경우도 있다. 경기도 광주에는 모 대학 연습림 사무소가 있는데 정문 양 옆에 세워진 기둥을 보면 분청사기 도편들이 박혀 있다. 인근의 가마터에서 나온 도편들을 어처구니없게도 장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를 무지의 소행으로 보아야 할지 애교로 보아 주어야 할지 여간 헷갈리는 일이 아니다. 도편 이야기가 나온 김에 찾아 본 다섯 점의 백자청화편들은 모두 19세기 분원리산이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합뚜껑의 초화문, 항아리의 초화문, 사발 창 안의 초화문, 합뚜껑의 산수문, 그리고 중앙의 화장용기 뚜껑의 꽃무늬 도편들이다. 태토는 정선되고 유약은 약간의 청색이 가미된 청백색이다. 그 위에 고운 빛깔의 청화가 들어 있는 조선 후기 상품의 백자청화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 일대는 조선조에 관요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화목의 조달을 위해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광주군 일대를 옮겨 다니던 관요는 금사리 시기의 시험기를 거쳐 영조 28년(1752) 분원리로 옮기면서 그 동안의 방황을 끝내고 정착한다. 그리고는 1884년 민영화가 될 때까지 130여 년간 왕실 백자를 생산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친 것은 아니고 민영화가 된 후에도 20세기 초까지 요업이 이루어졌던 곳이니 아주 중요한 가마터라고 할 수 있다. 다섯 점의 백자청화편들은 모두 민영화 이전 관요 시절의 분원리에서 만들어진 상품의 백자들이다. 하지만 한 점 한 점이 인연을 맺은 시기와 장소 그리고 추억들이 있으련만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인지 아무런 기억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더구나 과거 분원리를 찾을 때면 가마터만 돌아본 것이 아니라 마을 곳곳의 밭이며 집터며 골목 등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었으니 더 더욱 기억이 희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인지도 모를 일이다. 분원리 도편들은 좀 갖고 있는 편이지만 그나마 작고 앙징스러우면서도 태토며 유약이며 청화의 빛깔들이 비슷한 것들을 찾다 보니 이처럼 다섯 점이 모아졌다.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나로서는 따로따로 있을 때보다 또 다른 나름의 맛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글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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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3) <br>백자철화초문호때 이른 더위라도 먹은 탓일까 이규진(편고재 주인) 중국 도자기 중에는 박태(薄胎)자기라는 것이 있다. 일명 단벽(蛋壁)자기나 탈태(脫胎)자기라고도 하는 것이다. 반 건조 된 기물을 물레 위에 거꾸로 얹어 놓고 돌려가며 표면을 윤기가 날 때까지 칼 같은 것으로 두께가 균일하게 다듬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를 이배(利坯)라고 한다. 이처럼 만들어지는 얇은 자기에 암화(暗話)라는 것이 있는데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환한 곳이거나 불빛이 있으면 빛이 투과되어 문양이 나타난다. 박태자기는 두께가 0.15mm 밖에 안 되는 것이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손으로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질 정도로 약하다. 실용성 보다는 도공이 자신의 기술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 도자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도자기에 일찍이 박태자기 같은 것은 없었다. 도공이 자신의 기술을 뽐내기 위해 극한까지 밀어 붙였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완벽에 대한 조바심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조금은 엉성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 우리 도자기의 특징이다. 분청이 그렇고 달항아리가 그렇고 고려다완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렇다. 깔끔하고 정교한 맛은 없어도 손맛이라고나 할까 푸근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이 든다. 빤질빤질해 밉상스러운 인간이 아니라 어리숙해 보이지만 정감이 가고 무언가 소통이 될 것 같은 사람 냄새가 풍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도자기에 박태자기가 없다고 해서 아쉬워 할 필요도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런 우리 도자기의 특징을 두고 여러 사람의 언급이 있지만 핵심을 짚은 글 중의 하나가 이태준의 <고완(古翫>이라는 수필에 나오는 한 구절이 아닐까 생각된다. "옛 물건의 옛 물건다운 것은 그 옛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 자취를 지녔음에 그 덕윤(德潤이 있는 것이다. 외국의 공예품들은 너무 지교(至巧)해서 손톱 자리나 가는 금 하나만 나더라도 벌써 병신이 된다. 비단옷을 입고 수족이 험한 사람처럼 생활의 자취가 남을수록 보기 싫어진다. 그러나 우리 조선시대의 공예품들은 워낙이 순박하고 타고나서 손때나 음식물에 절수록 아름다워진다” 조선 도자기가 왜 순박하고 왜 그 순박함이 오히려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이처럼 간명하게 정리한 글이 또 있을까. 백자철화초문호편은 17세기 지방산이다. 굽은 모래받침에 평굽이며 주구는 이른 시기의 달항아리에서 보이는 것처럼 주판알처럼 밖으로 말아 붙인 형태다. 유색은 회색이 많이 가미된 회백색이며 크기는 작은 주먹만 한 것인데 몸체 양쪽에 철화로 초문을 넣고 있다. 그런데 그 무심한 듯 그려진 철화 초문을 보면서 나는 묘하게도 피카소가 떠오른다. 백자철화호편과 저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데이빗 더글러스 던컨의 사진전 도록 <피카소의 비밀, 피카소의 사랑>에는 피카소가 식사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한 장 보인다. 식사가 끝나 갈 때의 사진인지 칼과 포크가 놓인 접시는 부스러기만 조금 남아 있을 뿐 비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손으로 양 끝을 잡고 피카소가 입으로 뜯고 있는 생선이다. 살은 이미 입맛을 돋우며 입안으로 사라져 버렸는지 생선은 앙상한 뼈만 남아 있다. 새하얀 등뼈를 중심으로 빗살처럼 양옆으로 퍼져 있는 뼈들이 흡사 조각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내가 백자철화초문호편의 철화무늬를 보면서 피카소를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철화무늬에서 보이는 초문의 중심선과 좌우의 곁가지들이 흡사 피카소가 입에 물고 있는 생선뼈와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뽐낼 것 하나 없는 백자철화초문호편을 보면서 중국의 백태자기를 생각하고 피카소까지 떠올려 보다니 때 이른 더위라도 먹은 탓일까. 더 어지러워지기 전에 어디 시원한 수박 화채라도 한 사발 마시면서 머리라도 식혀 보아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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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2) <br>분청상감합뚜껑편추억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이규진(편고재 주인) "콩밭 매는 아낙네야 /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 무슨 설움 그리 많아 /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 칠갑산 산마루에 /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흙냄새 물씬 풍기는 고향집 어머니를 생각나게 만드는 정겨운 가사가 아닐 수 없다. 전 국민의 마음을 애잔케 하며 주병진이라는 가수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던 <칠갑산>이라는 바로 그 노래다. 이 노래로 인해 칠갑산 또한 유명세를 타며 전 국민의 산으로 떠오른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칠갑산은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과 정산면 장평면에 걸쳐 있는 높이 559.8m의 산이다. 19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이 되었다. 대치천 장곡천 지천 잉화달천 중추천 등이 산을 빠져나와 금강으로 흘러간다. 특히 깊고 급하게 흐르는 지천과 잉하달천이 계곡을 싸고돌며 일곱 곳에 명당을 만들었다고 해 칠갑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칠갑산 등산은 대개 산허리에 있는 휴게소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우측의 저수지인 천장호를 끼고 산을 내려가면 계곡이 전개되는데 우측으로 이어지는 마을 끝집에 면한 밭 일대가 천장리분청가마터로 알려진 곳이다. 물론 칠갑산에는 천장리분청가마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휴게소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끝자락에 이르면 숲에 가려 미미하지만 흔적이 보이는데 신덕리분청가마터다. 분청사기합뚜껑편은 아주 오래 전 이곳에서 인연을 맺은 것이다. 분청사기합뚜껑편의 상감은 아주 복잡한 문양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우선 도자기 뚜껑의 경우 안쪽에는 대개 문양이 없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안쪽에도 중앙의 국화문과 원문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작은 국화문 등이 보인다. 그래도 안쪽은 바깥쪽 외면에 비하면 문양이 단순한 편이다. 뚜껑의 바깥쪽 즉 윗면은 흑백상감으로 복잡하기가 짝이 없다. 중앙에 국화문과 연판문을, 이를 둘러싼 원과 원 사이에 연주문을, 그리고 그 밖으로는 우점문 안에 국화문을 배치한 복잡한 구도다. 따라서 자유분방한 분청을 보는 느낌보다는 정제된 청자의 여운이 짙게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복잡한 문양의 뚜껑을 가진 합은 또 얼마나 다양한 문양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일찍이 칠갑산을 차로 넘으며 휴게소에 머문 적은 있어도 등산을 한다든가 해서 산을 올라 보지는 못했다. 따라서 칠갑산의 속내나 아름다움의 진수를 맛보았다고는 할 수가 없는 처지다. 하지만 칠갑산 노래라던가 그 품에 안겨 있는 천장리분청가마터나 신덕리분청가마터를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친근한 느낌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칠갑산을 찾아 본 것도 가마터를 답사해 본 것도 오래 전 일이고 보면 추억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더 더욱 그리움으로 애틋한 정이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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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1) <br> 청자귀면수막새편고려인들은 청자기와로 지붕을 덮어 이규진(편고재 주인) 1963년 5월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당시 미술과장)과 당시 직원이었던 정양모(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관장은 청자가마 조사를 위해 강진 사당리를 찾는다. 그리고는 소쿠리 등에 청자 도편을 담아 갖고 나온 동네 아주머니들을 만난다. 당시만 해도 청자기와편은 세상에 알려져 있던 것이 서너 조각에 불과할 때였다. 따라서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의종(毅宗) 11년(1157) 기사에 "왕이 이궁(離宮)을 지었는데 태평정(太平亭)이라 하였다. --- 또 북쪽에 양이정(養怡亭)을 지었는데 그 지붕은 청자로 덮었다”는 기록이 과연 신빙성이 있느냐 하는 의구심이 있을 때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아주머니의 소쿠리 속에 청자막새기와편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놀란 정양모 관장 일행이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묻자 자기 집으로 안내를 했다. 그 곳이 가마터였고 64~65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한 결과 명품 청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모란꽃을 장식한 수막새와 당초무늬가 있는 암막새 등 다양한 종류의 청자기와들이 쏟아져 나왔다. 양이정 지붕을 청자로 덮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청자기와는 양이정 지붕에만 덮었었을까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당리 당전부락에서 출토된 청자기와는 한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당리에서 출토된 청자수막새의 모란문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가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양이정 외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청자기와는 사당리에서만 출토된 것도 아니다. 초기 청자 가마인 원흥리에서도 보이고 강진과 쌍벽을 이루는 부안 유천리에서도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자료는 전북 고창군에 위치한 선운사 동불암에서 출토된 수키와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청자기와는 왕실에서 뿐만 아니라 절에서도 사용되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고려시대에 청자기와는 더 널리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1990년대 초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후 북한의 고미술품들이 중국을 경유해 남한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당시만 해도 좋은 물건들이 흔했고 모조품에 대한 우려도 별로 없을 때였다. 이 무렵 인사동에서 구입을 한 것이 청자귀면수막새편이다. 사당리 당전에서도, 원흥리에서도, 부안 유천리에서도 이런 종류의 청자귀면수막새가 일찍이 출토된 적은 없었다. 청자수막새라고 하면 으레 모란문밖에 알려진 것이 없었던 시절에 듣도 보도 못하던 청자귀면수막새편이 보였으니 당시로서는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입수를 했고 지금까지 오래도록 잘 보관해 오고 있는 중이다. 청자귀면수막새편은 귀면쪽 문양은 전체가 살아 있지만 뒤로 길게 이어지는 부분은 손상을 입어 잘려 나가고 없다. 잘린 부분을 보면 정선된 태토가 회색빛을 들어내고 있으며 안쪽은 유약이 없는데 토진과 어울려 더러 누르스름한 황토색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인 외면에는 푸른 비색의 유약이 빙렬 없이 곱게 입혀져 있으며 귀면은 도범으로 찍어낸 모습이다. 귀면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와당 같은 것에서 보이는 것과는 달라 도깨비라고 해야 옳을 것 같은 느낌이다. 도깨비는 두 줄의 양각 선 안에 배치를 하고 있는데 눈 코 입과 귀가 있으며 세 개의 뿔이 달려 있다. 청자에 이런 귀면을 새겨 기와로 사용한 것은 아마도 벽사의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태토며 유약 그리고 조형감각 등 청자귀면수막새편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전성기 고려 시대 청자를 대표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기존에 알려진 것 중 이런 형태의 청자기와가 없다보니 의구심을 갖는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지인 가게에 내가 일찍부터 소장해온 것과 똑 같은 청자귀면수막새편이 한 점 있었는데 사람들로부터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다. 같은 도범으로 찍어낸 것이 분명한 것이어서 생각다 못해 이 것도 내가 인수를 해 지금은 같은 모양의 청자귀면수막새편을 쌍으로 소장하고 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나로서는 잘한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실 청자기와는 도자기 선진국인 중국에도 없고 우리보다 후진국인 일본에는 당연히 없는 기종이다. 말하자면 전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우리만의 자랑스러운 도자기 유물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비취빛 기와로 지붕을 장식한 집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해 보였을까. 상상만으로도 눈부시지 않은가. 그런데 상상을 좀 더 구체화 시켜 볼 수 있는 곳이 한 곳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정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보면 거울못이라는 연못이 있고 이곳에 정자가 한 동 서 있는데 청자정(靑瓷亭)이라는 이름 그대로 지붕이 청자기와다. 물론 옛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려시대 청자기와 지붕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다 보니 아쉬운 대로 감상은 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을 기회가 있다면 잠시라도 시간을 내 연못가를 거닐며 정자 지붕에 나타난 고려인들의 마음과 그 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나름의 멋과 운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더러 해보게 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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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0) <br>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웅진과 곰나루의 역사처럼 이규진(편고재 주인) 공주(公州)가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떠오른 것은 475년 백제의 수도가 한성에서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지명은 웅진(熊津)이었다. 538년 도읍이 부여로 옮겨가기까지 이곳에서 64년간 5명의 왕이 즉위하였는데 왕릉 발굴로 널리 알려진 제25대 무령왕이 가장 유명하다. 공주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 23년(940)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공주읍이 공주시로 승격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곰나루라고도 불리는 웅진, 즉 공주의 역사에 대해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근래 지인으로부터 양도를 받은 한 점의 분청사기 명문 도편 때문이다.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은 죽절굽에 태토비짐돌받침을 하고 있다. 태토비짐돌받침은 대개 세 개나 네 개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는 유약을 안 칠한 굽에 큼직한 두 개의 받침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외면에는 우점문이 시문되고 있으며 포개 구었던 흔적으로 다른 도편 조각도 일부 붙어 있다. 안쪽을 보면 우점문과 연판문 안에 둥글게 네 줄의 원을 돌리고 그 중앙에 큼직하게 글자를 새겨 넣고 있는데 주(州)는 분명하고 확실하지만 공(公)자는 획이 확실치가 않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공(公)자로 보아 공주로 읽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분청사기에서 보이는 명문은 관사명이 대부분이다. 지방명도 흔치는 않지만 경기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알려진 40여 곳 중 31곳이 경상도 지역이어서 편중 현상이 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까지 분청사기에서 공주명은 발견된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면 공주명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은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귀한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은 공주 지역 어디에서 만든 것일까. 공주시에 있는 분청사기 가마터로는 철화로 유명한 저 학봉리를 비롯해 온천리 도신리 가산리 중흥리 안양리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가마터에서 공주명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은 아직 들은 바 없다. 도대체 이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은 어디서 만든 것일까. 유약은 살아 있어 번들거리고 백상감 일색에다 명문 자료로는 글자의 크기가 다른 지역의 지명들에 비해 유달리 커 보인다. 하지만 이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은 출토지를 알 수 없다보니 즐거움뿐이 아니라 내게 호기심과 더불어 진한 궁금증과 의문을 던져 주고 있다. 공주 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내려 강 건너를 보면 곰나루가 보인다. 수운을 중심으로 한 교통의 요지로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곳이건만 근대적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그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다. 더구나 1933년 금강교가 개통되며 서해안 지구로 통하던 도강(渡江) 기능마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넓은 백사장과 울창한 노송이 어우러진 자연 경관은 아직도 옛 정취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향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제는 희미해진 웅진과 곰나루의 역사처럼 분청사기상감명문발편 또한 그냥 지워지고 잊혀져야 할 도편은 분명 아닌 듯싶다. 하지만 그 고향은 물론이거니와 유전해온 내력조차 알 수가 없다보니 궁금하다 못해 안타까워 지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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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9) <br>분청상감국화문발편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며 이규진(편고재 주인) 충청북도 연기군과 인접해 있는 공주시 의당면에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두 곳 있다. 중흥리와 가산리가 그 것이다. 두 곳 모두 특이하게도 주민들에 의해 거래를 목적으로 도편이 수거되었다가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가마터와는 무관한 곳에 버려지는 등 교란이 심한 곳이다. 두 곳 중 가산리 보다는 중흥리가 더 관심이 배가되고 있는 듯싶은 데 그 것은 아마도 일찍이 강경숙 교수의 <분청사기>에 명문 자료가 소개된 데다 특색이 있는 물고기 문양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산리 가마터는 서너 곳이 알려져 있지만 흔적은 미미하며 마을에서 뒷동산을 넘는 소로 주변이 주민들이 도편을 수거했다 버린 곳이어서 전에는 무더기를 이루고 있던 곳이다. 하지만 중흥리와는 달리 명문 자료도 보이지 않으며 물고기 문양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인화문이 촘촘히 박힌 사발이나 접시 등이 보이는 등 특색이 별로 없는 가마터라고 할 수 있다. 이 곳을 찾아 본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인데 한 번은 KBS 모(某) 국장과 함께 답사를 갔다가 차바퀴가 농로 옆으로 빠지는 바람에 애를 먹다 결국은 레카 차를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 분청상감국화문발편은 가산리 그 것도 주민들에 의해 도편들이 교란된 장소에서 만난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가산리에서 보이는 도편들은 인화문이 주를 이룬 가운데 별다른 특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분청상감국화문발편은 이 가마터에서도 상당히 예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굽은 내화토 받침에 주변으로 돌아가며 뇌문을 돌리고 있다. 굽에서 시작되는 외면에는 세 줄의 선문과 연판문이 보이고 있다. 여기까지라면 별다른 특색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문양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목되는 것은 이 분청상감국화문발편에서는 가산리 가마터의 특징인 인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잘라져 나간 외면에는 인화가 장식되어 있었을지는 몰라도 남은 도편만을 놓고 보면 상감만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분청상감국화문발편은 이 가마터에서는 극히 예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면을 장식하고 있는 백상감의 국화문을 보면 그야말로 이런 종류로는 유례가 없이 빽빽하게 열 송이가 가득 들어차 있다 보니 답답해 보이기도 하련만 전혀 그렇지를 않고 아름답다. 국화문이야 고려청자에서부터 사랑을 받아온 문양이기는 하지만 분청상감국화문발편에 와서 재탄생한 느낌이 들 정도로 문양의 배치가 새로우면서도 신선한 맛이 느껴진다. 가산리 가마터는 차가 있을 때는 천안에서 연기군을 거쳐 찾았었고 차가 없을 때는 공주에서 택시를 이용해 찾아갔던 곳이다. 물론 앞 동네 지근거리에 있는 중흥리와 한 코스로 답사 일정을 잡고는 했었던 곳이다. 인화무늬만 잔뜩 보이는 가산리 가마터에서 분청상감국화문발편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한 즐거움으로 남아 있다. 사실 이러한 무늬는 가산리 가마터는 물론이거니와 분청을 통 털어서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니 예나 지금이나 신기하면서도 반갑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청자는 물론이거니와 분청과 백자에서도 보이는 국화문은 꽃 중에서는 우리 도자기에서 가장 많이 장식된 문양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국에서도 월요 청자에서 이미 음각의 국화문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려청자와 분청의 경우 음각보다는 흑백상감에서 더 특색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국화가 공예품이나 도자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 것은 옛사람들이 화중은사(花中隱士)라 해서 가을 서리에 온갖 초목이 모두 시들 때, 꿋꿋이 피어나는 그 고상한 품격을 군자나 은자로 비견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며, 편안히 남산을 바라본다"라는 도연명의 저 유명한 시 한 구절도 바로 이런 국화와 은자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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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8) <br> 백자각병편무려 18각을 이루고 있으니 이규진(편고재 주인)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엘 가면 전통찻집 '석다원(石茶園)'이 있다. 일반인들은 어떨지 몰라도 수석인들에게는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곳. 이곳에는 아파트 한 채 값과 맛 바꾸었다는 저 유명한 3단석 '선단(仙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새로운 주인을 찾아 가 보금자리를 틀었지만 그 돌이 아니더라도 석다원에는 명품 수석들이 아직도 많아 안복을 누리기에는 조금도 손색이 없다. 잔잔히 흐르는 음악과 향기로운 차 향기. 그리고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수석들은 멋과 풍류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멋과 풍류가 어찌 수석인들 만의 몫이겠는가. 이곳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고은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내가 석다원의 박은종(朴恩鍾)님과 여주인인 그 부인을 처음 접한 것은 '무석재(撫石齋)의 수석(壽石)'이라는 석보를 통해서였다. 돌을 어루만지는 서재의 수석이라니 이 얼마나 범상치 않은 제목인가. 그런데 책장을 넘겨보니 제목 못지않게 한 점 한 점이 수준 이상의 돌들이었다. 3단석 <선단>을 처음 본 것도 이 석보에서였다. '선단' 이외의 돌들도 수석의 맛과 멋과 깊이를 알지 못하고서는 수집과 배열 방식이 불가능한 것들이어서 나로서는 감탄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박은종님을 처음 본 것은 고 송성문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한강의 혼'을 기증하고 나서 수석인들이 어울려 구경을 갔을 때였다. 그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흐른 작년에서야 늘 궁금해 하던 석다원을 처음으로 찾아 볼 수 있었으니 뒤 늦은 행운이었다고나 할까. 석다원을 처음 찾았던 그날 나는 여주인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에서도 인상 깊었더 것은 3단석 선단과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시절 선단에 매료되어 엄청난 금액을 무리해 구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 등은 수석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듯 싶어서 감동으로 가슴마저 뭉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는 다시 두 번째로 석다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흐른 것은 아니었건만 그동안 작은 변화가 있어 보였다. 창가에는 못 보던 도자기도 두 점이 놓여 있었다. 조선 후기 지방 가마 것으로 주구는 손상이 있는 등 크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재미가 있다는 느낌은 드는 것이었는데 동행을 했던 후배가 그동안 안목이 늘었는지 잽싸게 챙기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석다원에 대해 글이라도 한 편 써 보려면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아 후배로부터 다시 양도를 받은 것이 바로 이 백자각병편이다. 백자각병편은 앞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지방가마에서 만든 것으로 유색으로 보아 18세기 후반 쯤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구는 손상되어 목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지만 이 백자각병편의 특징은 아무래도 돌아가며 몸체에 각을 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전반인 금사리 시기에 이르면 우리 도자기에도 그 동안 못 보던 각을 친 기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병 같은 것에 보이는 것은 대개 8각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백자각병편은 무려 18각을 이루고 있으니 각병 치고는 꽤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찻집 석다원. 수석과 차와 음악이 어울려 멋과 운치와 풍류가 넘치는 곳. 그리고 주인들의 인품이 잔잔한 울림을 주는 곳. 가까운 곳에 있으면 매일이라도 찾아 흠뻑 그 향기에 취하고 싶건만 오호 통재라 강을 건너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어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석다원이 생각나는 날이면 할 일 없이 석보 '무석재의 수석'이나 뒤적여 보며 아쉬움을 달래 보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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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7) <br> 백자청화북두칠성문완편정한수 한 사발 떠놓고 이규진(편고재 주인) 어린 날 고향집에서 바라보던 하늘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여름 저녁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에 누워 찐 옥수수를 먹으며 바라보던 하늘에는 왜 그리도 별들이 많았던 것일까. 보석처럼 별들이 반짝이던 밤하늘을 가로질러서는 별똥별이 떨어져 내리고는 했었다. 그 많고 많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서울 하늘을 바라보아도 이제 별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탁해진 공기에 의해, 아니면 인간이 밝힌 불빛에 가려져 별들은 얼굴을 숨긴 채 자신의 모습을 침묵 속에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졸연히 별을 볼 수 없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래도 운 좋게 저녁마다 달과 별을 보며 살고 있다. 내가 침실로 쓰고 있는 아파트의 제일 큰 방을 먼저 주인은 아이들 방으로 썼던 모양이다. 그 증거로는 천장에 붙여놓은 달과 별들이다. 형광 물질로 만든 이 것들은 잠자리에 누워 소등을 하고 나면 어둠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잠들기 전에 나는 싫든 좋든 달과 별을 마주 보면서 살 수 밖에 없으니 행복한 일이라고나 할까. 탁해진 공기에 의해, 인간들이 밝히 불빛에 의해 서울 하늘의 별들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실 인간의 역사에서 볼 때 밤하늘의 별이 보기 어려워 진 것은 그리 오래 된 세월은 아니다. 별은 밤하늘에서 늘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고 사람들은 경외심과 더불어 그 것을 바라보며 인간의 길융화복과 연결시켜 온 것이다. 그 중심에 있었던 별이 바로 북두칠성(北斗七星)이다. 북두칠성이야말로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별자리로서 우리의 삶은 여기에서 시작해 여기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진 북두칠성은 자루 부분을 표(杓)라고 하고 머리 부분을 괴(魁)라고 한다. 괴의 첫머리부터 시작해 천추성(天樞星) 천선성(天璇星) 천기성(天機星) 천권성(天權星) 옥형성(玉衡星) 개양성(開陽星) 요광성(搖光星)으로 불리며 각각의 별들은 그 이름에 걸맞는 점성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12자리에 배속되어 사람의 생사와 운명을 주관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백자청화북두칠성문완편은 19세기 분원산이다. 넓직한 굽에 직립한 입술 등 전형적인 조선 후기 완의 모습이다. 굽은 모래받침에 두 줄의 청화선을, 입술 바로 아래에는 뇌문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태극문과 북두칠성을 그려 넣고 있다. 현재는 두 개의 태극문 사이에 한 개의 북두칠성만 보이고 있지만 원래는 돌아가며 네 개의 태극문과 네 개의 북두칠성이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내저 중앙에는 도안화 된 복자도 들어 있다. 나로서는 청화로 이런 구도의 북두칠성이 들어간 도자기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하면 도대체 이 백자청화북두칠성문완편은 어디에 사용되었던 그릇일까. 북두칠성이 인간의 생사와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라고는 하지만 이 백자청화북두칠성문완편이 죽음과 관련된 유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리 보아도 부장되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면 출생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정한수 한 사발 떠놓고 하늘을 향해 자식 점지를 기원하던 그 애틋한 사연의 그릇일까. 아무래도 인간의 죽음보다는 탄생과 관련된 쪽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는 이 백자청화북두칠성문완편을 보면서 우리의 하늘에서 사라진 별들과 더불어 그 많고 많은 전설과 신화들마저도 지워져 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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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96) <br>분청철화연당초문병편직접 습득을 한 것은 아니고 이규진(편고재 주인) 여기 사진 한 장이 있다. 좌측 인물이 아사카와 노리타카, 중앙이 야나기 무네요시, 우측이 한복을 입은 여인이다. 이들 앞에는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세 점의 도자기가 보이는데 중앙의 것이 저 유명한 백자청화진사연화문호다. 지금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이지만 당시만 해도 사진에 보이는 인물인 노리타카의 것이었다. 이 사진이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자기 전시회가 열린 장소에서 이를 주최한 인물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아사카와 노리타카 및 다쿠미 형제와 함께 경복궁 집경당에서 조선민족미술관을 개설한 것이 1924년. 그에 앞서 22년 경성의 조선귀족회관에서 '이조 도자기 전람회'를 개최하는데 사진은 바로 이 때의 것이니 중요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도록에서 볼 수 있는 이 사진은 '이조 도자기 전람회' 관련 자료로서는 흔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근래 지인의 소개로 이와 관련된 재미난 자료 한 점을 입수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원래의 소장자는 이미 작고를 했지만 이 자료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듯 봉투에는 귀중문서라는 글씨가 명시되어 있다. 이 글씨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도자기 전시회인 '이조 도자기 전람회' 안내문은 귀하고도 귀한 자료가 아날 수 없다. 자료는 가로 33 세로 25Cm 크기의 종이인데 여기에 등사판 글씨가 들어 있다. 이 것을 세 번 접으면 담배 갑보다 약간 커 보인다. 앞은 영문과 한자로 이조 도자기 전람회가 표기된 가운데 중앙에는 분청호가 그려져 있는데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솜씨가 아닐까 생각된다. 뒤에는 작은 도자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것을 모두 펼치면 네 면이 되는데 표지와 뒤가 한 면이 되고 한 면은 전람회장 평면도가 그려져 있고 두 면에는 한자와 일본어를 병용한 "이조도자기전람회에 대하여”라는 안내문이 실려 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조선민족미술관 개관에 앞서 1922년 10월 1일 경성 조선귀족회관에서 이조 도자기 전람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구체적인 안내문이니 이 얼마나 흔치 않은 귀중한 자료랴. 근래 구입한 도자기 자료 중 이보다 더 나를 흥분시키며 즐겁게 한 것은 아마도 없었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의 민예품과 도자기에 대해 야나기 무네요시는 많은 물건을 수집도 하고 글도 썼지만 사실 도자기 전문가는 그가 아니라 아사카와 노리타카다. <조선도자명고>를 펴낸 동생 다쿠미보다도 실은 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가마터 답사를 체계적으로 한 것도 노리타카요 분청이 고려 것이 아닌 조선조 것이라는 것을 최초로 밝힌 것도 그였다. 자료를 뒤적이다 보면 이들이 1928년 계룡산 가마터 앞에서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볼 수 있다. 우측이 아사카와 노리타카 중앙이 야나기 무네요시 좌측이 아사카와 다쿠미다.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으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서 있는 발치에는 가마터이다 보니 도편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그런 것들 까지도 부러워지는 것인지. 그래서 오늘은 계룡산 가마터에서 나온 도편을 한 점 찾아보았다. 도편은 굽도 주구도 없어 정확한 기형은 알 수 없지만 내면에는 유약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병의 일부가 아닐까 추측된다. 남은 조각도 크기가 작은 편이기는 하지만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연당초 철화 문양만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흡사 덤벙을 연상시키는 흰색의 귀얄문 바탕에 철화로 그려 넣은 연당초문은 실물은 물론이거니와 도록 같은 곳에서도 만날 수 없는 것이어서 흥미로우면서도 신기할 뿐이다. 이 분청철화연당초문병편은 계룡산 가마터에서 인연을 맺은 것이다. 직접 습득을 한 것은 아니고 동네 어른께 얻은 것이다. 오래 전 일인데 추석 연휴를 맞아 계룡산 가마터를 찾은 적이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키 큰 사내가 산기슭이랑 밭고랑 등을 기웃거리며 살피는 것이 안 되어 보였는지 교회 옆 민가에 사시는 어른께서 가지고 계시던 것을 건네 준 것이다. 따라서 이 도편을 보고 있노라면 그 날의 내 행색이랄까 남루함이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행색이 초라하고 남 보기에 안쓰러워 보인들 어떠랴. 지나간 세월과 더불어 그 때 그 시절의 열정이 없어진 듯싶어 그 것이 오히려 내게는 그립고 안타깝고 아쉽기만 할 뿐이니 이를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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