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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2흙의 소리 이 동 희 꿈 <1> 나이를 얘기하였는데 그동안 참 정신없이 살았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안 해본 것이 없고 안 가본 길이 없다. 어디 다닌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많은 곳을 다니지도 못하였다. 잠시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린 것이다. 관직에 몸을 두기 시작하면서 그 훨씬 이전부터 가정은 그의 생각 밖에 있었다. 집은 잠을 자는 곳이고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는 존재에 불과했다. 무엇은 대단하고 또 무엇은 대단치 않아서가 아니었다. 다 중요하고 대단하지만 하늘이 시키는 일 나라의 일이 먼저이며 아버지 어머니의 일 조상 선대의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였다.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글쎄 그런 말이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한다면 아내를 위하고 자식을 위하는 것은 후순위라는 것이 아니고 우선순위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천지신명 대의 정도가 가르치는 방향으로 매진하였을 뿐이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그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 바치고 갖은 치성을 다 드리는 아내는 부모님 다음으로 소중하고 운명적으로 얽혀진 일심동체임은 스스로 자인하고 높이든 낮추든 절대적인 처지이지만 그 표시를 내지 않고 살 뿐이었다. 덤덤하고 아니 초연하였다. 그는 그저 아이를 낳도록 해주는 사람일 뿐이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가끔 큰기침을 하는 것으로 권위를 지키고 그것을 무너뜨리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기의 일에 충실하고 주어진 임무에 전력을 다 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것이 물론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아들 셋 딸 하나 다 아버지의 마음에 들게 자라지를 못하였다. 딸은 그런대로 아버지를 하늘같이 여기고 어려워하고 한 마디 하면 그것을 금과옥조처럼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아들 셋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의 너무도 늘푼수 없고 예에 치중하고 악에 심취하고 소리와 가락에나 매달려 모든 정력을 쏟아붓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였다. "참 답답해요. 천상 선비지요.” 둘째 중우仲愚가 그렇게 말하였다. 아버지를 비하하는 것인지, 칭찬은 아니었다. "뭘 잘 한다는 것이냐” 못 알아 들어서가 아니었다. 섭섭한 것도 아니었다. 그로서는 그저 선비면 되었던 것이다. "역적이 되지 않고 도적질 하지 않고 살면 되는 거여.” "그게 아버지의 목표인가요?” 막내 계우季愚가 묻는다. 토를 다는 것이다. "왜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냐?” "그러네요.” "목표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더 욕심은 없다. 내가 하던 일을 잘 마무리 하고 싶다. 대가 없이.” 그러자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은 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맏이는 좀 나았다. 맹우孟愚는 대놓고 그렇게 대받지는 않았다. 생각이 같지는 않았지만. 박연은 자신의 일, 그것은 물론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가정의 일도 아니었지만, 피리가 되었든 편경이 되었든 경서가 되었든 한번 집착하면 끝을 보아야 했다. 예도 그런 것이요 악도 그런 것이었다. 악기도 그런 것이었다. 못마땅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털끝만큼도 옳지 않은 것은 참지 못하고 바르지 않은 것은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였다. 그것이 성품이면서 의지였다. 여러차 상소를 올리고 올리는 것마다 예조로 내려 보내어 실행이 되었다. 그의 의견은 곧 정책으로 실현이 되었다. 의견을 올리는 것마다 즉각 채택이 되었던 것이었다. 백발백중이었던 것이다. 무슨 별난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위로 줄이 닿았던 것도 아니었다. 왕(세종)과는 특별한 관계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문학이라는 임무에 충실을 기했을 뿐이고 단 한 번도 사사로운 일과 연관지어진 것은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문제점을 포착하면 거기에 온 정열을 쏟아 파헤치고 해결하려 하였다. 밤을 새워 전적을 뒤지고 식음을 폐하고 생각을 비틀어 짜내고 탐문하고 그리고 상주하였다. 낱낱이 지적을 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왕과의 대화였다. 예악 분야에서는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어폐가 있다면 음악 분야에 있어서는 단연 일인자였다. 오십을 넘었으니 소장학자도 아니고 대가라고 해야 할지. 악의 정비에 나선 세종이 대제학 맹사성孟思誠을 제조提調로 두고 박연을 별좌로 임명하여 악학 실무를 맡긴 이래 그 책임을 다하여 우리 예악 음악을 빛내고 불후의 공적을 쌓아 종내는 악성樂聖의 일컬음을 받게 되는데… 쉰 전후가 그의 음악적 발자취의 정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몰라도 도적질 하지 않고 역적이 되지 않고 살아온 목표이며 가꾸어 온 꿈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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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1흙의 소리 이 동 희 진출 <6> 황종은 한국의 전통음악 율명으로 첫 번째 음률이다. 낮은 음으로부터 시작하여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 12율이며 이는 일년 열두 달에 배속시켜 양陽의 기운이 처음 생기는 동짓달부터 시작하여 황종은 11월 달에 해당된다. 양의 기운이 땅 속에서 움직여 만물을 소생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방위는 자子, 처음 시작의 뜻이 담겨 있는 음율이다. 율관의 길이를 재던 자를 황종척黃鍾尺이라고 하였다. 황종율관은 우주의 중심이 라 할 수 있는 황종음률의 높이를 표출해 내는 죽관의 길이는 일상적인 길이가 되고 잣대가 되고 기준이 되었다. 황종율관의 내경 속에 채워지는 기장의 양은 생활의 부피의 단위가 되고 기장의 무게는 무게의 단위가 되고 기장의 길이는 또 길이의 단위가 되었다. 그래서 황종율관은 도량형의 기준이 되었다. 황종의 높이-황종율관의 길이-를 얼마로 정하는냐의 문제는 그대로 생활의 기준이 되고 삶의 척도가 되었다. 박연의 악기 제작은 단순히 악기의 제작에 그친 것이 아니고 삶과 직결된 것이고 일상의 삶과 시간과 우주 땅의 기운이 융합된 철학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오성을 고르고 저울로 헤아려 보고 살펴보고 한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박연의 음악적 업적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 율관 제작의 시도이다. 국악인 한명희는 먼저 인용한 「난계의 업적」에서 말하고 있다. 얼핏 율관 제작이라면 한갓 악기의 제작쯤으로 치부하기 일수이겠지만 기실 황종율관의 제작이란 나라의 기틀을 좌지우지하는 근원적이고도 중차대한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박연의 음악적 공헌으로 연결되는 동양적 음악관에 대하여 말하였다. 나라가 바뀌면 음악도 바뀌는 것이다. 치세지음治世之音이니 망국지음亡國之音이니 하는 일상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곧 음악제도의 붕괴를 뜻하기도 했다. 난세지음亂世之音이 횡행하면 백성들의 심성이 사악해지고 사회기강이 문란해서 결국은 나라가 망한다는 논리였다. 시대적 관점이 이러했기 때문에 왕조가 바뀌면 음악 제도를 바꾸는 것이 상례였다. 망국의 음악을 새로운 왕조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서히 사회분위기가 안정되자 악정樂政에 관심을 기울인 세종의 치적도 이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고 박연의 음악적 공헌도 같은 관점에서 보다 큰 역사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박연은 음악의 원초이자 생활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한 틀에 12개 달린 석경, 황종율관을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서 몇 차례 치밀한 시도를 하였고 그러고도 흡족한 자위를 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박연의 음악에 대한 치열한 집념이자 누구나 할 수 없는 율관 제작의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황종율관의 제작이 세종의 중요한 음악적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유이다. 영동 난계국악당에 있는 편경編磬을 둘러보았다. 종묘제례악의 등가登歌에 편성된 아악 악기였다. 두 층의 걸이가 있는 틀에 경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세종 때 남양에서 소리가 아름다운 경돌을 발견하게 되어 새로 만든 경은 중국의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음색을 가졌고 또 그 음율도 정확하였다고 설명을 붙여놓았다. 경돌은 ㄱ자 모양으로 깎아서 만들며 두께에 따라서 음율의 높낮이가 다르다고 하였다. 이 악기를 간직하는 고직庫直이가 혹 실수하여 한 개라도 파손하였을 때에는 곤장 100대에 3년 유배라는 엄벌에 처한다는 경국대전의 얘기도 있다. 박연의 숨결이 이곳저곳에 서려있는 것이 느껴졌다. 괴나리 봇짐을 지고 여기를 떠나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교리를 거쳐 지평 문학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의 일을 맡아보기 시작하였다. 당시 질서가 없는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 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새로 편경 12장을 만들었다. 이 획기적인 음악사적인 사건을 정리하여 다시 말하지만 처음에 중국에서 보내온 황종을 삼분으로 조정해서 12율관을 만들었고 옹진의 기장과 남양의 석경으로 조화를 이루어 드디어 종묘조회의 악기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 가을 종묘의 영녕전永寧殿의 여러 제사 때 편경을 통용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 해 5월 편경과 특경特磬을 완성했다. 또 그 다음 해 여름 자작한 12율관에 의거하여 음율의 정확을 기하였다. 말 그대로의 정확을 이루는 대장정이었다. 이러구러 난계 박연은 51세 지명知命의 나이가 되었다. 하늘하늘 약하지만 부러지지 않고 강가 빈 터에 씨를 뿌리고 가꾸듯이 소걸음으로 느릿느릿 그러나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그 이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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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0흙의 소리 이 동 희 진출 <5> 훈민정음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를 갖도록 하겠고, 박연은 계속해서 상소를 올렸다. 말로만 이론으로만 한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실물로 대령을 해 보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시도이고 역사적인 기록이 되었다. 음악사적인 사건이었다. 악학별좌 봉상판관 박연이 한 틀에 12개 달린 석경石磬을 만든 것이다. 이론으로 청원하고 주장하던 것을 실제로 만들어 올린 것이다. 세종 9년 5월의 일이었다. 처음에 중국 황종의 경쇠로써 위주하였는데 삼분三分으로 덜고 더하여 십이율관十二律管을 만들었다. 그리고 겸하여 옹진甕津에서 생산되는 검은 기장으로 교정校正하고 남양南陽에서 나는 돌을 가지고 만들어보니 소리와 가락이 잘 조화되는 것이어서 그것으로 종묘 조회 때의 음악을 삼은 것이다. 그에 대한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사사건건 뭘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정신없이 요청을 하고 허락을 받고 수용이 되고 하였던 것이다. 성악聲樂을 고르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운 일이다. 옛 사람이 성음聲音을 말할 때는 반드시 경쇠를 친 것으로 으뜸을 삼았고 율관律管을 말할 때는 반드시 기장을 율관에 넣은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그렇게 전제하고 시흥을 돋구며 호소하였다. "하늘은 기장을 내리시어 지화至和의 답을 보이셨고 땅은 경석을 생산하여 예부터 소리를 고르는 조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마땅히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은 율관입니다.” 옛날 일을 자세히 고찰하여보면 주나라는 소邵 지역에서 나는 기장을 얻어 소리를 고르고 한漢라는 임성任城 지역에서 나는 기장를 얻어 소리를 골랐다. 그 뒤 수隨나라는 양두산羊頭山의 기장을 얻었으나 소리가 고르지 않았고 송宋나라는 경성京城의 기장을 얻었으나 역시 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이것들을 미루어보면 율관에 기장을 넣는 방법이 비록 방책方冊에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진품의 기장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기장, 거서巨黍에 대하여 너무도 소상하고 세밀하게 보고하였다. 철저하고 빈틈이 없었다. 그가 하는 일이 매사 그랬다. 그러기까지 밤을 새우며 문헌을 뒤지고 자료를 찾았다. 식음을 폐하고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오로지 그 일에만 외곬으로 파고 들어 끝장을 내었다. 시골 강촌 태생으로 무엇 하나 특출한 것이 없었지만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 "신이 지금 동쪽 밭에서 길렀는데 기장으로 황종관黃鍾管을 만들어 불어보니 그 소리가 중국 황종율보다 소리가 높은 것은 땅이 메마른데다가 가뭄에서 자랐기 때문에 고르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이어 생각해 보니 꼭 같은 품종의 벼인데도 남방에서 생산한 쌀은 빛이 나고 윤기가 있으며 쌀톨이 굵었으나 경기미는 메마르고 쌀톨이 작은 것이 동북東北 사이도 마찬가지였는데 기장의 크고 작은 것도 응당 그와 같으리라 믿었습니다.” 너무 솔직하고 단순하였다. 우직하다면 우직하였다. "신은 원하건데 남방 여러 고을에서 생산된 기장을 삼등三等으로 가려서 율관에 넣어보고 그 중에 중국의 성음과 맞는 것이 있으면 손익삼분損益三分하여 십이율관을 만들어 오성五聲을 고르고 헤아려 들어 오성을 고르고 저울로 헤아려 보고 이어 또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역대 제율制律이 기장이 일정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음의 높고 낮은 것이 대대로 차이가 난다면 어찌 중국의 율관이 진품眞品이니 아니니 하여 우리나라의 기장이 그 진품을 얻었는가를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논리라고 할까 흐름을 따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사대주의적 사고가 박혀 있는 사실도 지적된다 하겠다. "그러나 율을 같게 할 도량형度量衡은 천자天子가 하는 일이요 제후諸侯의 나라에서 마음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의 기장이 중국의 황종과 맞춘 연후에 손익법에 의하여 성율을 바로잡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율관을 만들지 않으면 오음이 바른 것을 잊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본 영화가 떠오른다. 「천문」이던가. 신하들은 세종 임금 앞에서 조선의 언어와 시간을 갖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말대로 해야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며. 조선의 농사 절기에 맞게 만든 천문관측기 혼천의渾天儀를 명나라 사신 앞에서 불태우고 있었다. 영의정은 조선의 글을 갖는 것을 안 될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 것과는 다른 시각인지 모르겠다. 좌우간 그건 그렇고 박연의 예악계 또는 음악계 진출의 획기적인 사건인 이 율관 제작 속에 담긴 또 하나의 의도, 그것은 황종 율관과 도량형의 관계였다. 그것이 의도하는 바가 참으로 심상하였다. 요상하였다. 박연은 청원의 글을 맺었다. 사광의 총명도 육율을 하지 않으면 오음을 바로잡지 못한다(孟子曰 師曠之聰不以六律不能正五音)고 한 맹자의 말을 인용하며, 참으로 만대에 바꾸지 못할 말씀이라고 하였다. 대단한 설득력이다. 그런데 오성을 고르고도 저울로 헤아려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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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9흙의 소리 이 동 희 진출 <4> 그건 그렇고 여악을 금하는 상소에 앞서 삼강행실 훈민오음정성訓民五音正聲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린 것에 대하여 말하였었는데 이에 대한 해명을 조금 하여야겠다. 훈민오음정성을 줄이면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되고 훈민정음을 박연이 창제했다는 주장이 있다. 박희민의 「박연과 훈민정음」은 역사적 실화를 소설 형식으로 쓰며 세계적인 문화유산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세종 5년(1443) 3월 23일 문헌연구를 시작해서 9년 6월 23일 훈민정음을 창제하자는 상소를 올리고 21년 4월 24일 훈민정음 창제를 완료했으며 25년(1443) 12월 30일 훈민정음을 창제를 공표했다는 일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뒷받침으로 여러 가지 사실을 근거로 들고 있다. 율려신서律呂新書와 홍무정운洪武正韻 등 운서韻書에 능통하고 사성칠음四聲七音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난계유고蘭溪遺稿의 1번 소疏에서, 널리 가례와 소학 삼강 행실을 가르치고 훈민오음정성으로 민풍을 바로잡자고 한 것 등. 다 맞는 말이다. 다만 훈민오음정성이 훈민정음인가 하는 대목은 그냥 지나가지지 않는다. 묘한 이름 조합이다. 여기서 말한 난계유고 1번 소의 내용을 앞서 소개한 바 있는데 난계유고는 1822년 박연의 사후 그의 글을 모아서 엮은 시문집이다. 이 얘기를 조금 더 하기 위해서 난계유고의 앞부분에 실은 시 가운데 한 편을 소개한다. 바다 물결 가 없이 넘실거리고 푸른 봉우리 구름 위에 빼었네 온 고을에 뽕나무 무성하니 푸른 비단 짜 인군께 바쳤으면 (滄海餘波接懸門 華峯蒼翠暎紅雲 一村桑拓人無事 欲上靑緞獻我 君) 과교하過交河, 교하를 지나며이다. 자연 서정이 흘러 넘친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받들어 모시고 있는 임금에 대한 생각이었다. 진정에서 울어나는 성심, 국가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이며 충성이며 신념이었다. 숨을 좀 돌리고 얘기를 다시 이어 간다. 훈민정음의 정음正音은 아설순치후牙舌脣齒候 반설半舌 반치半齒의 칠음七音 일곱 가지 음운 용어인데 반해 오음정성의 오음五音은 궁상각치우宮商角徵致羽 다섯가지 음가이며 음악용어이다. 그 ‘1번 소’에서 언급한, 나라의 전례도 바르지 못하고 회례의 음악에서도 바른 거동을 보지 못하겠고 창우 여악의 진퇴나 연회에서도 삼강의 행실을 볼 수 없고,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고 음악도 바르지 못하고 미풍양속이 그릇되게 뒤섞여 있다는 것 등은 음악에 대한 사항이라고 지적하며 훈민정음의 박연 창제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다른 설도 있다. 조선 초기의 승려 신미대사信眉大師가 실제 창제했다는 주장이다. 신미대사, 속명 김수성金守省은 김수온金守溫(1410~1480)의 형이다. 永山김씨 대동보에 "집현전에는 불교를 배척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오랫동안 지키고 스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미대사가 실제 창제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산은 영동의 다른 이름이다. 그도 난계 박연과 같이 영동 사람이다. 영동향토사연구회 김윤호 전회장이 펴낸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의 표지 제목 위에 훈민정음 창제의 보필輔弼 주역이라고 쓰고 있다. 박희민이 밀양박씨 난계파 후손이라면 김윤호는 영산김씨 대종회 회장을 지낸 신미대사 후손이다. 그러나 후손이냐 아니냐만 가지고 따질 수는 없고 팩트가 말하는 것이다. 정찬주는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에서 신미는 범어梵語에 능통해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을 담당했다고 쓰기도 했다. 필자는 여기에 대하여 그렇고 아니고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또는 갑작스럽게 부닥친 발문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나름대로의 준비와 시간이 필요하고 고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민하는 국어학개론 시간에 제출했던 리포트의 기억을 하고 있었다. 훈민정음을 필사하고 꼭 같은 모양으로 제책을 하여 내라는 것이었다. 전국방언조사를 했다는 이유로 100점을 준 교수에게 너무도 부실하게 대충 만들어 내었던 리포트. 오랜 옛날, 참으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저쪽의, 기억 속에 교수의 의도가 떠올랐다.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쓰며 훈민정음 한글 창제의 뜻을 새기라는 것이었다. 처음 접한 국어학의 역사 연구사 학설 이론이 아니고 막 천자문을 뗀 아이들로 할 수 있는 대학의 첫 과제물이 이토록 오랜 시간 뒤에 뒤통수를 치고 있었다. 김용경金容卿 선생은 민하가 교직으로 갈 때 추천을 해주기도 했다. 뒤에 안 일이었다. 그 때 흥사단인가에 나가며 <기러기>라는 잡지를 보내주기도 했었다. 어디선가 내려다 보고 있을 처음 만난 국어학자의 음우陰佑 계시가 있기를 빌며 발문을 다시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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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8흙의 소리 이동희 진출 <3> 그러면 다래는 누구인가. 이름난 기생이었다. 가무를 잘 하여 궁내 잔치에 들어가는 사기四妓였다. 그녀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뭇 남자들을 그녀의 치마 앞에 무릎 꿇린 재예才藝를 갖추었다. 왕자 형제들을 다 홀리고 고관대작의 자식들 지방관료 등 장안의 한량들의 넋을 빼앗은 여인이었다. 뒷날 세종 임금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 이임李琳이 사랑하며 초요갱楚腰䡖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초나라 미인은 허리가 가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미녀였다. 여섯 번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 배가 다르긴 하였지만 나이가 한 살 많은 형 화의군和義君, 왕자 셋이 그녀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고 그 일로 해서 금성대군 이유李瑜는 옥고를 치르며 귀양 갔다가 죽었다. 화의군 이영李瓔은 외방으로 유배를 갔고 이임과 초요갱은… 뭐 그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러고 저러고 한 얘기들은 그 뒤의 일이기도 하고 게재가 되면 또 하겠지만, 좌우간 그녀는 박연의 애제자였고 그를 스승으로 지극히 존경하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소를 올렸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미리 알려 줄 수도 있었다. 귀띔을 할 수도 있고. 박연은 그러나 한 마디 반 마디 운도 떼지 않았다. 만나기만 하였다. 상소문을 다 다듬고 나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주막 한적한 뒷방에 술자리가 마련됐다. 좋은 안주와 좋은 술을 시키고 여러 잔 그녀에게 따라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물리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도 그만 하라고 하고 술만 마시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여. 일은 무슨 일.” 박연은 고개를 저으며 활짝 웃어보였다. "어디 심기가 불편하신 것 같지는 않고, 어부인과 다투신 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여? 그리고…” "그리고 뭐요? 아무래 어부인하고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애요.” 그러면서 다래는 그의 아래 위를 주물러 주며 말하였다. "오늘 제가 위로를 해 드릴게요.” 박연은 정색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래는 얼른 잘못했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리며 깍듯이 술을 따랐다. "인제 마누라하고보다 아이들하고 다투고 있어.” 그도 자꾸 그녀에게 술을 따랐다. 얼마간 그렇게 술을 마시며 얘기를 하였다. 그리고 소리에 대하여 노래에 대하여 춤에 대하여 평소 가지고 있던 의견을 펼쳐나갔다. 강의를 하듯이 질문을 하듯이 진지하게 이어나갔다. 개론이 아니라 각론이었다. 음이란 무엇이며 악이란 무엇이고 예란 무엇이냐. 시란 무엇이고 부란 무엇이고 흥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가끔 기회 있을 때마다 들려주던 것을 정리를 하듯이 되풀었다. 아는 것을 있는 대로 다 빼어주는 것이었다. 그가 이론적으로 말하면 다래는 실기로 보여주었었다. 그녀가 예쁘고 귀여운 것은 한 마디 한 마디 솔깃하고 진지하게 듣는 것이었다. 꿇어앉거나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가르침을 얼마나 전수 받고 이해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랬지만 예, 알았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하고 고맙습니다 하고 반응을 보이었다. 술도 취하지 않았다. 밤이 깊었는데 졸리지도 않았다. 연방 다래를 찾는 손님이 불러내었지만 안 된다고 하였고 그것이 사부와의 자리라고 하여 다 그냥 넘어갔다. "늘 조신해야. 무서운 세상이여.” "남자들 세상이예요.” "그래. 잘 아네.” "제가 잘 알지요.” "그러면 됐어.” 그것이 다였다. 다음날 상소문을 올리었다. 그리고 예조에서 바로 궁중에 여악을 금하도록 하였다. 사부인 박연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면 다래는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도대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자신을 그렇게 내칠 수가 있느냐고 얼마나 원망을 하고 퍼부어댔을지 모른다. 어쩌면 대의명분에 입각하여 국가 대계를 위하는 마음으로 결단을 내린 야심을 이해하였을지도 모른다. 미천한 자신이 눈에 밟혀서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생각하며 그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었던 것을 떠올리며. 좌우간 무대란 궁중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어디서나 여자의 기예를 펼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 때 조선시대의 시간 속에서 결단된 삶의 순간이었다. 다래는 이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사부의 부음을 뒤늦게 듣고 멀리 남녘(영동)을 향해 눈물의 시를 읊었다. 박연은 줄기차게 예악의 개혁을 밀어붙이었다. 그의 의견은 정책이 되었고 그것은 힘찬 새 물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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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27흙의 소리 이 동 희 진출 <2> 민요를 부르며 춤을 잘 추는 다래에게 박연은 하늘 같은 존재였다. 그가 가르치고 그녀가 배웠다고 말하지만 다래는 하나를 얘기하면 열을 알았고 알았다고 하기 전에 먼저 행하였다. 행하였다고 할까 저질렀다. 소리면 소리 춤이면 춤을 실연實演으로 보여주었다. 성미가 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재주가 있고 능력이 있었다. 자신이 있고 매사를 어렵지 않게 쉽게 쉽게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박연이 가르친 게 있다면 그런 부분을 꼬집어 준 것이었다. 신중히 하라고 하고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한 박자 늦추게 하였다. "뜸을 들여야지. 삼시세끼 밥을 하듯이. 여유를 가지고 말이여. 뭐가 그리 급한가.” "잘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으음.” "그런데 제 소리가 마음에 안 들던가요, 심히?” "소리보다도 춤이…” "좀 요상했지요?” "으음. 으음.” 사실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래는 소리, 노래보다도 춤에 능한데 소리에 곁들여 춘 춤이 너무 요염한 자태를 보인 것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인데, 그것을 뭐라고 꼬집어 탓할 수는 없었다. 남자들의 혼을 쑥 빼 놓은 표정 몸짓 파격적인 춤사위가 어떻다고 할 수도 없고, 온전히 자리를 압도하는 기량이라고 할까 재주를 문제 삼을 수도 없었다. 너무 마음에 들고 감동을 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가 보기엔 그랬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주마가편이라고 다른 얘기를 하며 자중토록 하였다. "춤이란 무엇이냐.” "춤이란 몸으로 시를 쓰는 것이니라.” "시란 무엇인고.” "운으로 말하는 글이고 율로 읊는 말이며…” "총명하긴 한데…” "예쁘고…” "다 좋은데…” "솔직히 그건 인정하시지요?” "예쁘긴 한데…” "진 선 미를 갖추어야지요.” 도무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다 알고 앞질렀다. "사부님 눈이 너무 높으십니다.” "세상은 냉정한 거여. 나는 뭇 사람들의 눈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여.” "뭇 사람과 놀아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헛 참.” 그것도 사실이었다. 한다는 명사들 한량들과 술자리에 끼어 어울렸고 시샘하는 말들이 많았다. 세상이 다 아는데 그가 모를리가 없었다. "조신해야지.” 박연은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다 말하려 하였다. 다래가 언제 등장하였는지 정확히는 기억되지 않지만 앳되고 시골 촌티를 벗지 못할 때부터 눈 여겨 보아왔다. 장악원에서 소리를 듣고 괜찮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때 그가 고개를 끄덕인 것이 인연이 되어 줄곧 관심을 갖게 되고 선생님 사부님 하며 따랐다. 소리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여야 하고 춤은 왜 추며 신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고 참된 것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사는가. 궁극적인 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조곤 조곤 기회가 될 때마다 이야기하였다. 술잔을 앞에 놓고 거문고를 타면서일 때가 많았지만 정원을 산책하며 또 달과 별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시에 대하여 얘기하면 눈이 빛나고 생기가 돌았다. 밤새도록 썼다 지웠다 한 시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춤을 추듯이 소리를 하듯이 그렇게 안 된다고도 하였다. 시가 쓰기가 어려운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고 그렇게 쓰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였다. 삶이 시가 되면 된다고도 하였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런지요?” "열심히 혼신을 다해 살면 되는 거여.” "혼신을 다 해서 사부님은 그렇게 살고 계시지요?” "토를 달지 말고.” "히히히히…” 그럴 때는 그의 품에 안기며 교태를 부리었다. 어떻든 그는 있는 것을 다 빼어 주고 싶었다. 그가 가르친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이었다. 물론 소리의 째나 악율 춤사위 너름새 법무法舞 정재呈才의 가락에 대하여 방법과 수행에 대하여 얘기한다고 하였지만 앞에서도 말한 대로 하나를 얘기하면 열을 알았고 그것을 행하였다. 그런데 그런 사랑스런 제자라고 할까, 다래를 포함하여 모든 여악들을 금하자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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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6흙의 소리 이 동 희 진출進出 <1> 상소를 하고 청원을 하는 것마다 다 받아들여졌다. 대단히 당돌하고 방자한 의견이었다. 기존의 제도와 운용 방법을 과감하게 혁신하고자 하였다. 박연은 그 개혁의 중심에 서서 줄기차게 밀어붙이었다. 작은 소리의 값(음가)에서부터 악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며 그 사용과 배치 조리에 대하여, 방법과 근본 이치를 말하였다. 중국 고대와 현대를 꿰뚫고 고려와 개국 초기의 문제와 당시 조선의 현실을 아우르는 비판과 건의였다. 거기에 모든 열정을 바치었고 용감하게 앞장을 섰다. 그런데 예악의 새 정책과 혁신적인 방안을 내놓고 올리는 족족 다 예조로 내려보내 실행을 하게 되었다. 예악은 시대의 정신이었고 새 시대의 기틀을 동반하고 있었다. "엎드려 아뢰옵건대 어지신 임금께서 새로운 법을 만들어 예악의 깨끗한 치정治政을 일으켜 사회의 모든 제도를 갱신한 초기의 습속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폐조의 여풍이라 심히 한탄합니다.” 박연은 현하 실정을 신랄하게 지적하며 주장하였다. 지금 좌교左敎가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켜 인심이 도탄에 빠졌다. 민가의 상제喪祭에 있어서 장사나 제사 지낼 겨를이 없어 오로지 불교를 위하는 데만 후하여 미풍을 없애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여 나라의 법이 닿지 못하고 군신이 모여 임금께 상주上奏하는 예의에 있어서도 품위 있고 바른 예의를 보지 못하였으며 광대나 창녀娼女들의 음악이 나와 희롱하였으므로 삼강이 분명하지 못하고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 방음方音이 바르지 못하여 민풍民風이 그릇 되었다. 가례삼강행실家禮三綱行實을 널리 펴서 행하기 위하여 청원하는 상소였다. 박연의 시문집詩文集 난계유고蘭溪遺稿에 실린 글이다. 앞에 시를 몇 편 싣고 제일 먼저 올려놓은 청반행가례請頒行家禮…의 소疏이다. 박연의 상소는 모두 39편인데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 3개이고 그 중 하나이다. 이를 ‘1번 소’라기도 한다. 모든 폐습은 다 先王의 교화를 어지럽힌 것이니 성세聖世의 풍화가 아니라고 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소신 있는 언사였다. 좌교는 그릇된 종교를 이르는 말로 유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그렇게 말했다. 불교를 부정하고 비판한 유교시대의 논리이다. "원하건대 좌교가 미풍을 없애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을 금하게 하고 관혼상제에 관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세상에 널리 배포하여 나라의 예의를 바로 잡고 모든 학당學堂과 시골의 글방에서 소학小學의 이륜彛倫을 강講하게 하여 선비들이 폐습을 바로잡으며 국민에게는 삼강행실을 펴서 실행하게 하여 숭상하는 풍습을 두텁게 하고 국민에게 오음정성五音正聲을 가르쳐 민풍을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소신도 소신이지만 용기가 있고 과감하였다. 시대적인 예와 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연은 거침이 없었다. 조하朝賀의 예를 개수하고 여악女樂을 금하도록 하라는 상소도 하였다. 참으로 하기 어려운 청원이었다. 동지冬至 정조正朝 즉위 탄신일 등의 경축일에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던 의식이 조하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창녀들의 음악과 함께 여악, 여자 악인을 없애자는 건의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복의伏以…” 엎드려 생각하건대… 언제나 허리를 굽히고 몸과 마음을 낮추어 주청하였다. "성인의 학문이야말로 예악으로 정사를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원하옵건대 궁중 학문을 한결같이 대학의 격물치지 성의 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도리로 바탕을 세우고 경연학사들로 하여금 성경현전聖經賢傳과 성학왕정聖學王政을 힘써 배우도록 하는 것이 옳을까 하옵니다.” 양기가 피어나는 동지와 한 해가 시작되는 정초는 모두 인군이 원기를 가다듬어 복을 받는 날이고 계획을 다짐하는 시초가 될 것이니 부디 왕세자와 여러 신하들이 좋아하는 예의를 새롭게 하여 그 절차를 성대聖代에 맞도록 해야 할 줄로 안다고 하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국가의 연회 때 여악을 쓰는 것이 예가 아닌 줄 압니다. 전날 태종 임금 때 중국 사신 단목례端木禮가 왔다가 여악을 보고, 예악의 나라에서 어찌 이런 욕된 짓을 하느냐고 언짢아 하였고 태종 임금은 크게 부끄러워 해서 연회 때 여악을 일체 금하였나이다. 부디 임금님이 베푸시는 연회나 빈객을 맞이하는 연회라도 여악을 금하고 남악을 써서 국가의 풍속을 바꿀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시기 비옵니다.” 참으로 직설적이고 분명한 요구였다. 너무나 명분이 뚜렷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세종 초기 조선시대 예의 윤리 도덕의 잣대로 말한 것이다. 거기에 어느 누구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여자를 금하고 반대하는 남자의 줏대와 결기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아니 국가와 민족을 향한 신념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다음에 박연과 한 여인과의 관계를 가지고 그것을 얘기하려 한다. 오음정성에 대해서도 해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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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5흙의 소리 이동희 소명<5> 그리고 여러 제사에 대하여 계속 말하였다. 원단圓壇 적전耤田 선잠先蠶 등의 제사는 지금 조정에서는 모두 태주를 사용하는 음악으로 되어 있다. 태주는 지신에 제사 지내는 음악이므로 사직에 이를 쓰는데 원단은 하늘에 빌며 고하는 제사이니 같은 것을 쓰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선농先農과 선잠도 선대의 인귀人鬼이니 사직에 제사 지내는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 또 삼제三祭 안에서 당상과 당하에 순전히 태주의 양성만 사용하게 되니 어찌 그것이 마땅한가. 삼제의 음악도 정세하고 당연함을 보지 못하겠다. 산천단山川壇의 음악은 주나라 제도의 유빈을 연주하고 함종을 노래하는 것이 바른 것이다. 지금은 전폐로부터 변두를 철거하기까지 당상과 당하에 모두 대려를 사용하고 있지만 대려는 황종에 합하는 것이요 본래는 천신을 제사하는 데에 사용하였으므로 풍운뇌우의 신에게는 마땅하겠지만 산천에는 전혀 그렇지 못한데 하물며 한 가지 율만 사용하게 되니 심히 못마땅하다. 또 풍운뇌우는 예전 제도에도 천신을 제사하되 산천과 위位를 같이 하여 제사지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 단에서 제사를 지내니 그 적당함을 보지 못하겠다. 이것은 산천단의 음악이 합치지 못하는 까닭이다. 신을 맞이하는 음악은 신을 섬기는 가장 큰 절목節目이다. 석전과 영신迎神은 「대성악보」를 근거하였지만 그 밖의 제향은 모두 근거함이 없다. 「봉상악장」에도 영신의 절목이 기재되지 않았으며 종묘에는 「의범염중儀範簾中」에 영신의 절차가 있는데 ‘황종은 구성九聲뿐이다’라고 말하였으되 그 구변九變의 법은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옳지 못하다. 이와 같이 본다면 아악의 사용이 소략하여 자세하지 못한 편이다. 또 대소 사향祀享에 모두 양율만 사용하니 중성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노래와 주악이 적당함을 잃었다. 성음에 감통하는 이치가 있다면 사시의 제사에 순전히 양율만 쓰고서도 어찌 감소感召하는 생각이 없다 하겠는가. 구변은 아홉 곡이 끝남을 이르기도 하고, 종묘 제례의 강신악降神樂에는 희문熙文을 아홉 번 되풀이 연주하고 문묘 제례의 영신악迎神樂에는 황종궁을 세 번 남려궁 두 번 이칙궁 두 번 모두 네 곡을 아홉 번 연주하는데 그런 규칙을 말한다. 감소는 인간의 생각이 하늘을 감응시켜 불러오는 결과를 뜻하는 것 같고 희문은 영신 전폐 초헌의 인입장引入章에 연주되는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의 첫 곡이다. 설명을 하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어떻든 인입장은 춤을 추는 사람들이 무대로 들어올 때 연주하는 음악이다. 일무佾舞의 무원舞員이 음악에 맞추어 족도足蹈를 추며 입장하고 영신에서는 헌가軒架, 전폐와 초헌에서는 등가登歌에서 음악을 아뢴다. 세종 때 창제된 이 회례악會禮樂의 노랫말이다. 원문은 생략. 조상님 덕이 우리 후손을 열어 주시리/아아 그 모습과 베푸심을 생각하오면 빛이 나나이다/삼가 깨끗한 제사를 올리오니/우리를 편하게 하시옵고 소원 이루게 하소서(영신) 변변치 않은 물건이오나 가히 정을 통하옵기 바라오며/광주리 받들어 이 폐백을 올리나이다/선조께옵서 이를 즐거이 받아들이시면/공경히 예를 드리는 이 마음 편안하겠나이다(전폐) 여러 성군께옵서 빛나는 국운을 여셨으니/찬란한 문화 정치가 창성하도다/언제나 우리는 성한 아름다움을 찬송하오며/이를 노래에 베풀어 부르나이다(초헌 인입장) 제례 아악에 대한 청원을 마저 보자. 옛날에 사문師文이 거문고를 탈 적에, 봄을 당하여 상현商絃을 타면 서늘한 바람이 뒤따라 이르고 여름을 당하여 우현羽絃을 타면 눈과 서리가 번갈아 내리고 가을을 당하여 각현角絃을 치면 따뜻한 바람이 천천히 돌고 겨울을 당하여 치현徵絃을 타면 햇빛이 뜨거웠으며 궁宮을 주로 하여 사성四聲을 총합하면 상서로운 바람과 구름이 잠시 동안 모였다 하였으니 오성五聲의 감소로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의 공인工人은 사문과 같은 묘수가 있지 않으니 감응하는 효과를 비길 수가 없다. 이제 사람마다 모두 그렇게 하여 날이 오래도록 쌓이면 기운이 어긋나서 화기를 상하게 할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임금의 마음에 신을 공경하는 예에도 흠점이 있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더욱 염려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박연은 더욱 솔직하게 말하였다. 가난한 서생이 입 속으로 항상 머뭇머뭇하며 주저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지금 성상의 은혜를 입고서 봉상 판관으로 관등을 뛰어 임명되어 악학을 찬집하는 임무를 겸임하였으니 천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알아낸 어리석은 소견으로 어찌 감히 끝내 말이 없이 잠잠히 있겠는가. 또 지금 편집하는 악서는 아雅가 제일 먼저 있으나 조리가 완전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만약 다시 새로이 편집하지 않고 구례를 그대로 둔다면, 기록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을 기다리는 것만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주청하였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망령되이 말씀드리건대… 박연은 그렇게 전제하였지만 더욱 강도 있게 의지를 말하였다. 주관周官의 제도가 서책에 기재되어 있으니 근본을 상고하여 조목 조목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만일 그렇게 못한다면 중국에 청하여 묻고 이를 시행할 것이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결재하시어 영전令典을 새롭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 청원은 바로 예조에 내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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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4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 <4> "본시에 벼슬한 사람은 그 책임을 사피辭避할 수 없사오나 당시의 아악이 바르게 고쳐지지 않아 저서가 있지 않은 것도 당연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신악新樂을 가르쳐 익히고 공인들의 재주를 취하는 데에 모두 이 책을 상고하면 그 공이 적지 않을 것이나 제사지내는 데에 겸하여 쓴다는 것은 전의 규정을 받고서도 완전히 이에 의거하지 않았으니 지금 이 책을 가지고 본조의 아악에 소용되는 법을 상고한다면 모두가 심히 정밀하고 적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선국악장에 대해서 문제점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었다. 그 대목에서 박연은 다시한번 자신을 낮추었다 "신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외람된 생각이오나 개국한 초기에는 경륜이 초매草昧하여 먼저 마음을 쓴 바가 문물의 상경常經 뿐이었고 아악에 이르러서는 단서만 열고 뜻을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상경은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떳떳한 도리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읽힌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한 책을 저술하여 아부雅部로 삼아 영구히 전하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일 저술한 악서가 있었다면 지난 날 봉상시에서 부지런히 공인들이 초록해 쓴 나머지를 철습掇拾하여 미완성된 악서를 만들었겠습니까. 지금 이 책에 의거하여 조목별로 좁은 소견을 다음과 같이 말하겠습니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의 제향 때의 음악은 모두 주나라 제도를 근거한 것인데 다만 자세히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고 말대로 아악 전반에 대하여 하나 하나 조목 조목 따지고 건의하였다. 맞지 않고 부당하고 바르지 않은 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그가 생각하고 있는 안을 내놓은 것이다. 먼저 종묘의 음악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는 본래 주나라 제도의 무역을 연주하고 협종을 노래하여 선조에 제향한다는 글에 의거하였는데, 지금 종묘의 제사에는 당하에서 무역을 연주하는 것은 바르다. 그러나 관창祼鬯 전폐奠幣 초헌初獻 등의 음악은 모두 당상에 속해 있으니 마땅히 협종을 노래해야 될 것인데도 도리어 무역을 연주하게 되어 무역만이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음악인 줄만 알고 협종이 무역과 합하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여 당상과 당하에 모두 무역을 사용하여 다 양성을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종묘의 음악이 심히 정세精細하고 마땅치 못하다. 그리고 사직의 음악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본래 주나라 제도의 태주를 연주하고 응종을 노래하여 지신에 제사지낸다는 글에 의거한 것이다. 먼저 대체적으로 말한 것을 다시 정리하여 지적하고 있었다. 지금 사직의 제사에 당에서 태주를 연주하는 것은 바른 것이지만 전폐 헌작獻爵 변두籩豆를 철거하는 따위의 음악은 모두 당상에 속해 있으니 마땅히 응종을 노래해야 될 것인데도 도리어 태주를 연주하게 되어 태주만이 사직에 제사지내는 줄만 알고 응종이 태주와 합하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여 한 제사에 순전히 태주만 사용하고 양률만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사직의 음악이 심히 정세하고 당연하지 못한 것이다. 관창은 제사 때 울금향을 넣어 빚은 울장주를 땅에 부어 신을 내리게 하던 일이며 전폐는 나라의 대제에 폐백을 올리는 일이고 헌작은 신령에 술을 올리는 것이다. 제일 먼저 잔을 올리는 제관을 초헌이라 하고 두 번째는 아헌, 마지막은 종헌이다. 변두는 향연에 쓰는 제기로 변은 죽기竹器 두는 목기木器이다. 과일을 담는 변은 신위를 기준으로 왼쪽에 국물이 있는 음식을 담는 두는 오른쪽에 두었다. 다시 석전釋奠에 대하여 말하였다. 석전은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에서 옛 성현 전대前代의 현인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석전의 음악은 주나라 때 양로養老를 주로 하여 대체로 육대六代의 음악에 합한 것인데 북제北齊 때 이르러서 대뢰大牢(나라에서 제사지낼 때에 소를 통째로 바치는 일)로 석전할 적에 헌가軒架의 음악과 육일무六佾舞를 베풀었고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에는 문선왕文宣王에게 석전할 적에 궁가宮架에는 왕의 예禮를 사용하였으며 율은 악궁樂宮을 사용하였으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지금 중국의 대성악보大晟樂譜 와 지정조격至正條格을 보건대 모두 아래서는 고선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남려를 노래하고 악은 음악의 차례대로 사용하면서 신을 맞이했다. 황종이 구변九變한 뒤 관세盥洗(제례 때 손발을 씻음)할 적에는 고선을 사용하고 전에 올라갈 적에는 남려를 사용하고 조두俎豆(나무로 만든 제기)를 받들 적에는 고선을 사용하고 초헌할 적에는 남려를 사용하고 아헌과 종헌할 적에는 고선을 사용하고 변두를 철거할 적에는 남려를 사용하여 음양이 합성하여 서로 번갈아 사용되니 주례周禮의 합성하는 제도에 들어맞는다. 그런데, 지금 아헌에서는 아래에서 남려를 연주하고 종헌에서는 전에 올라가 남려를 노래하니 노래와 주악은 순전히 남려만 사용하고 그 합하는 것은 사용하지 않았다. 절차도 갖추지 못하고 상하가 차례를 잃었다. 심히 미안한 일이다. 일찍이 공성孔聖의 사당에 이러한 근거 없는 음악을 설치했겠는가. 이것은 석전의 음악이 정세하고 당연한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외람된 생각으로는… 박연은 계속 자신을 낮추면서 그러나 신랄하게 현재의 음악 체계를 비판하였다. 개선을 요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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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3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 <3> "주례周禮에 보면 예법 제사의 일을 맡아 하던 춘관春官의 태사太師가 육률六律과 육동六同을 관장하여 음양의 소리를 합하였는데…” 육률은 십이율十二律 가운데 양성에 속하는 여섯 가지 음 황종黃鍾 태주太蔟 고선姑洗 유빈蕤賓 이칙夷則 무역無射이며 육동은 음성에 속하는 여섯 가지 음 협종夾鍾 중려仲呂 임종林鍾 남려南呂 응종應鍾 대려大呂이다. 박연은 소리의 종류를 설명하고 상주를 계속하였다. 물론 글로 써서 올리는 것이고 한자 한자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대개 두병斗柄(국자모양의 북두칠성 자루가 되는 세 별)이 십이신十二辰을 운행하되 왼쪽으로 돌게 되는데 성인이 이를 본떠서 육률을 만들고 일월은 십이차十二次로 모이되 오른쪽으로 돌게 되는데 성인이 이를 본떠서 육동을 만든 것입니다. 육률은 양이니 왼쪽에서 돌아서 음에 합치고 육동은 음이니 오른쪽으로 돌아서 양에 합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사악大司樂이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황종을 연주하고 대려로써 노래하여 합치고 지지地祗(지신)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태주를 연주하고 응종으로써 노래하여 합치고 사망四望(해 달 별 바다)에 제사지낼 때에는 고선을 연주하고 남려로써 노래하여 합치고 산천에 제사지낼 때에는 유빈을 연주하고 함종으로써 노래하여 합치고 선비先妃에게 제향祭享할 때에는 이칙을 연주하고 소려로써 노래하여 합치고 선조에게 제향할 때에는 무역을 연주하고 협종으로써 노래하여 합치게 하였으니 양률陽律은 당하堂下에서 연주하고 음려陰呂는 당상堂上에서 노래하여 음양이 배합되어 서로 부르고 화답한 뒤에야 중성中聲이 갖추어지고 화기가 응하는 것입니다. 한漢나라는 고대의 제도에 가까워 악을 사용할 때에는 모두 합성合聲을 사용했고 당唐나라에 이르러서도 악의 제도가 지극히 상실詳悉하여 오직 제사 때에만 아래에서 태주를 연주하고 위에서 황종을 노래하였는데 그 때 조신언趙愼言이 황종을 고치어 응종으로 하기를 청한 것은 합성을 사용하자는 말이었습니다. 대개 태주는 양이니 인방寅方에 위치하고 응종은 음이니 해방亥方에 위치하는데 인寅과 해亥가 합치게 되는 것은 두병이 해의 달에는 일월이 인에서 모이고 인의 달에는 일월이 해에서 모여 좌우로 빙빙 돌고 교대로 서로 배합하여 서로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달에도 그러하여 각기 그 합함이 있는데 이로써 성인의 제도에 음과 양을 취합하여 당상과 당하에서 반드시 합성을 사용하였으니 중성을 갖추고 음양을 고르게 하여 신과 사람을 화합하게 한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 하나의 미세한 음계와 음가 그리고 고대로부터 시대를 꿰뚫고 있는 음악의 해박한 이론과 우주 일월성신 신과 인간을 아우르는 철학적 이치를 낱낱이 늘어놓고 있었다. 모르면 몰라도 그보다 더 명석하고 조리있게 얘기할 사람이 또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 신臣이 삼가 생각하건대… 하고 겸손하게 자락을 깔고 고하였다. 혹여 너무 아는척을 한다고 본 뜻을 감하는 염려도 하였으리라. 조신언은 당나라 때 인물이다. 뒤의 제악祭樂 무인舞人 악공樂工 등에 관한 얘기에서도 등장한다. 같은 시대 사람 조신언은 숙부 방간의 사위로, 왕의 전지傳旨가 있다고 사모詐謀하여 여흥으로 귀양을 가는데 동명이인이다. 일부러 그렇게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생소한 어투가 많다. 일상적인 말과 전문적인 표현과는 달라야 하는 것도 맞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의 한문 문장을 의역도 해보지만 딱딱하고 유연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전혀 다른 줄기의 이야기이지만 조선 사람이 중국말인 한문을 쓰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어려운 것인가. 이해하는 것도 그렇지만 쓰기도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공부의 태반은 그런 언로에 쏟아부었던 것은 아닌가. 아악 창제의 일등공신 박연이 뒷날 세종의 한글 창제 용비어천가 제작에도 헌신하게 된다. 백성을 향한 왕과의 동행이었다. 상소 글 내용으로 돌아와서, 상실은 내용을 자세히 안다는 것인데 그렇게 연결이 잘 안 되어 그대로 쓴다. 괄호 안에 설명을 넣기도 했다. 자꾸 가지가 벋는다. "그런데 당나라에서 사社에 제사지낼 때에는 노래와 주악이 모두 양성이어서 성인이 악을 나눈 뜻에 어긋남으로 선유先儒들이 이를 그르다고 한 것은 옳습니다. 우리 조선의 제향하는 음악은 모두 아가雅歌를 사용한 것은 바르고 악을 사용하는 법에서는 의논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악장樂章 38수首와 십이율 성통례聲通例를 주자로 인쇄하여 10본本으로 만들어 본시本寺(봉상시)에 비장하여 이름을 조선국악장朝鮮國樂章이라 하고 발문에 본조本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악이라고 하였으나 그 성음의 높고 낮음과 가시歌詩의 차례와 순서가 모두 공인工人들이 초록해서 쓴 그릇된 것으로서 오랜 것일수록 더욱 본래의 취지를 잃었으니 신명의 지성에 교접하는 것이 못됩니다.” 조선국악장에 대해서 문제점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었다. 상소는 끝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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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22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 <2> 시대의 부름이었다. 새 시대가 되었다. 왕이 새로 바뀌고 시대가 새로 바뀐 것이 아니라 새 왕이 들어서면서 새 시대를 연 것이다. 예는 나라의 근본이었고 땅에 떨어진 예를 바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세종 즉위 4년에 군권 등 왕권을 다 내려놓지 않고 있던 상왕 태종이 명을 다하여 새 정책의 수립은 가속이 되었고 폭이 넓어졌다. 예는 시대정신이었고 이를 실천하는 활력이 악이었다. 기라성 같은 선비 학자 거유들이 요로에 포진하여 번득이는 새정책 문화의 기틀을 좌우하고 있는 가운데 하급 관리인 시골 출신 박연의 존재는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보잘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새 시대 화두의 중심에서 그의 역할은 빛이 났다. 빛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그의 이념이 메아리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온 왕의 뜻, 이상 실현의 때가 온 것이다. 천기天機, 신의 뜻이며 하늘이 준 기회였다. 아버지 어머니의 묘 앞에서 불던 피리소리를 산새들이 화답하고 토끼와 너구리 들이 춤을 추며 호랑이도 함께 하였고 향교에서도 감동을 주던 연주의 힘이라고 할까 천부의 능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런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장악원의 인연으로 피리 퉁소 대검 등의 조예 관심 연마 등도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기예의 범위를 넘어 예서 악서의 심도 있고 광범위한 탐구와 악기 전반에 걸쳐 전문적으로 파고들어 연구하고 조사 관찰 탐색하여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저 시골 강촌에서 피리를 잘 불던 소년의 후신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탈바꿈을 한 것이었다. 그는 계속 왕에게 글을 올려 예악 정책을 건의하였고 음률의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밝히고 고치고 바로 잡으려 하였다. 그의 상주는 올리는 대로 받아들여졌고 바로 현장에 반영되었다. 왕이 그에게 바로 뜻을 전하기도 하였다. "조회아악朝會雅樂을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대의 생각을 묻는 것이오.” 세종실록에는 박연에게 하명하는 글귀가 보인다. 고래로 어떤 제도를 창제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임금이 하고자 하면 신하가 반대를 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면 임금이 듣지를 않고, 설혹 상하 모두가 하고자 해도 시운이 불리할 때가 있다.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나는 먼저 확고히 뜻을 정했고 나라에는 일이 없으니 마땅히 진력해서 이루도록 하오.” "바로 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종은 유사눌 정인지 박연 전양에게 구악舊樂을 바로잡도록 명하여 아악 정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새로 정비된 조회아악은 세종 13년 정월 하정례賀正禮 때 처음 연주된다. 1년 만에 왕명은 실현되었던 것이다. 왕의 뜻과 신하의 뜻이 일치하였고 박연은 지체 없이 모든 일을 거기에 맞추고 전력투구를 하였다. 예서 악서 무수한 전적을 탐독하고 미세한 소리값 음가音價까지 분석하는 작업을 하며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간과 정력을 다 바쳤다. 빛나는 혈투였다. 빛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그의 신념은 메아리처럼 왕명이 되어 되돌아왔다. 시대의 부름이고 시대의 정신이었다. 국악인 한명희는 난계기념사업회에서 낸 『악성 난계 박연』1집 「난계의 업적」에서 실록에 있는 세종 이야기는 박연의 음악적 업적을 시대사적인 시각에서 한층 객관적이고도 타당성 있게 조명해 볼 수 있는 좋은 단서이자 시사示唆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종의 진단처럼 새로운 일을 도모하거나 기존의 제도를 혁파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서로의 뜻이 투합되고 시운이 뒤따라 주는 등 여러가지 여건이 부합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박연의 음악적 공헌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박연이 조선 초기의 음악 제도를 정비하여 나라음악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것도 일차적으로는 박연의 뛰어난 음악적 자질과 해박한 지식에 말미암은 바가 컸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세종의 공감이나 시대적 여건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으리라는 점 또한 엄연한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러기까지 박연은 요로에 많은 의견을 제출하고 끊임없이 청원과 상주를 하였다. 그것은 그의 신념이었고 시대의 요청이었다. 박연은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조정에서 제향祭享할 때 음악에 대한 상소를 하기도 하였다. 세종 8년 4월 25일 봉상판관 박연은 만지장서를 올리었다. "신이 생각하건대…” 고래로부터의 악서를 다 섭렵한 것을 들추고 음의 고저 강약 미묘하고 섬세한 차이를 들어 낱낱이 고증을 하며 개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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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1흙의 소리 이 동 희 소명召命 <1> 때가 이른 것이다. 새로운 예악 정책이 시작되었고 박연의 상소가 계기가 되었다. 같은 무렵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세종조 초기부터 예악 특히 악의 정립에 나섰다. 태종 6년(1406)에 설치하였던 악학樂學을 재가동시킨 것이다. 고려 말 유학 무학武學 음양학 의학 등 십학十學의 하나로 설치된 기관으로 음악에 관한 옛 문서들을 고찰하여 음악 이론과 역사 등 악서樂書를 편찬하고 악공들의 의례, 악기 제작, 악공 선발 등의 일을 하는 기관이었다. 예문관 대제학 맹사성孟思誠 유사눌柳思訥 등을 제조提調로 삼고 박연을 악학 별좌別坐에 임명 실무 책임을 맡겼다. 제조는 겸직이었고 별좌는 정5품 종5품의 별 보잘 것이 없는 자리였지만 박연은 어떤 직에 있을 때나 변함이 없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특히 무엇보다 예악 분야의 직을 맡고부터는 그것을 천직으로 알고 불철주야 용맹 정진하였다. 저녁에도 밤늦도록 직무에 관련된 책을 읽고 공부를 하였다. 집현전 서고에서 밤을 새기도 하였다. 서생 때와는 달리 무슨 책이든 어떤 시간에든 전적을 볼 수 있었다. 식음을 폐할 때도 많았다. 언젠가부터 서울 살림을 하였고 아이도 너 댓명 되었지만 박연은 늘 서생이었다. "어떻게 갈수록 더 힘드신 것 같애요.” 며칠 집에도 안 들어가자 아내 송씨가 걱정스레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하오.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소.” 박연은 허리까지 굽히며 참으로 송구한 낯빛을 하였다. 그러자 셋째 아들 계우季愚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도 그러냐고 묻는다. "그럼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고 어려운 것이 너무 많구나.” 박연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뒷날 그에게 많은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고 단종의 편에 썼다가 처형되며 엄청난 고초를 겪게도 하였다. 너무 잘 하려고 하다가 그런 게 아니냐고 아내가 다시 말하자 이번에는 으음하고 큰기침을 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제압하였다. 일은 갈수록 많아졌고 힘들어졌다. 아내의 말대로 정말 너무 잘 하려고 하고 자청하여 일을 만들어서였다. 그가 강설講說한 것이었고 그의 분야였다. 평소 그가 탐구하고 연마한 영역이었다. 아니 그가 해야만 되는 일이었고 이루어야 하는 일이었다. 예 그리고 악은 하늘의 명령이고 땅의 명령인 것 같았다. 그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고 힘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 것이었다. 박연은 다시 왕에게 청하였다. 더욱 과감하였다. 세종실록 27권 세종 7년 2월 24일 갑자에, 예조禮曹에서 악학별좌 박연의 수본手本에 의거하여 계啓하기를… 의 기사를 보자. 음악의 격조가 경전 사기 등에 산재하여 있어서 자세히 고찰하여 보기가 어렵고 또 문헌통고文獻通考 진씨악서陳氏樂書 두씨통전杜氏通典 주례악서周禮樂書 등을 사장私藏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비록 뜻을 든 선비가 있더라도 얻어보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악율樂律이 이내 폐절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문신 1인을 본 악학에 더 설정하여 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또 향악鄕樂 당악唐樂 아악雅樂의 율조를 상고하여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어 한 질秩은 대내大內로 들여가고 본조本曹와 봉상시奉常寺와 악학관습도감樂學慣習都監과 아악서雅樂署에도 각기 1질씩 수장하도록 하소서 계는 진계陳啓의 뜻으로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것이다. 대내는 대전大殿을 말하고 본조는 예조, 봉상시는 국가의 제사 시호諡號를 의론하여 정하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박연의 청은 즉각 받아들여졌고 그대로 따랐다. 그는 다시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악기의 세밀한 음율 체계에 대한 청원을 하였다. 이제 봉상시에 있는 중국에서 보낸 악기 가운데, 소관簫管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곧 악기도설樂器圖說에서 소관이라 이르는 제도이니, 황종黃鍾의 한 음성을 고르게 한 것에 족한 것인데, 이를 팔척관八尺管이라고도 하며 혹은 수적垂篴이라고도 하고 중관中管이라고도 하며 궁현宮懸에서 사용합니다. 민간에서는 소관小管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음율의 소리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봉상시에서는 과거부터 헌가軒架에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관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헌가에 사용한 적은 봉상시 서례도序例圖에 주례도周禮圖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적은 옛적에는 구명이 넷이었으나 경방京房이 한 구멍을 더 내어 오음五音을 갖추었는데 오늘에 사용하는 저笛가 곧 이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양과 제도가 비록 수적竪笛과 비슷하나 음율에 있어서 응종應鍾과 무역無射의 소리가 부족하오니 헌가에 사용하기는 부족합니다. 바라옵건대 헌가에 종래에 쓰던 저를 버리고 중국에서 보내온 소관을 사용하여 음악의 소리를 조화 시키소서 이것은 세종실록 31권 8년 1월 10일 을사의 기록이다. 이 역시 그대로 시행되었다. 소관은 대금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황종은 동양 음악에서 십이율의 첫째 음이고 응종은 열두 번째 음, 무역은 열한 번째 음이다. 헌가는 대례나 대제 때에 연주하는 아악 편성으로 종고鍾鼓를 틀에 걸어놓고 관악기와 현악기에 맞추어서 치는 것이다. 저와 적은 피리이고. 너무도 전문적이며 해박하고 치밀한 음율에 대한 견해여서 어느 누가 거기에 토를 달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왕의 믿음이 두터웠다. 절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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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20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6> 왜 그런가. 예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인가. 몇 번 얘기한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이것으로 새 나라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었으며 그 중심에 박연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표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어찌해서 그렇게 되었던가. 그가 말하고 얘기했다기보다 가르쳤던 것이 그에게 되돌려졌고 그 이론을 실천하도록 명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의 핵심 알맹이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을 말해보고자 한다. 예기禮記는 유교의 경전이다.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함께 삼례라 하고 많은 경서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오경五經의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동방의 여러 나라 문물 관습 제도 등을 실천과 경험을 통하여 만든 책들이다. 진시황의 분시서焚詩書 갱유생坑儒生 이후 한무제가 유학을 관학으로 삼으면서 나오게 되었는데 삼황오제 시대의 고례경古禮經과 학기學記 악기樂記 월령月令 제법祭法 등 200여 편이나 되는 학설을 집록한 것이다. 공자와 그 후학들의 술이부작述而不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거치면서 편찬 저술된 것이다. 유구한 역사적 시간을 통하여 지적 삶의 지표가 된 기록으로 사서四書 중의 대학大學 중용中庸도 이 가운데 한 편이다. 예의 이론과 실제를 논하고 있는 경전이다. 경이란 길이란 뜻이다. 시대의 길 역사의 길을 밝히는 책이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며 이치이다. 마당에 작대기가 넘어져 있으면 바로 세워놓아야 하며 길바닥에 돌멩이가 굴러다니면 치워 없애야 하는 것이다. 임금 자리를 뺏기 위해 형제간에 칼부림을 하는 것은 어떤가. 성경이다 법경이다 코란이다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는 지혜를 밝혀주는 책이다. 부모를 공경하라,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천국에 올라가고 피안으로 들어가고 영원히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것은 이상이거나 욕심이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요 천국은 기대하기 어렵고(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도연명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살며 읊었다. 무릎 하나 들일 방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審容膝之易安)……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다. 평야같이 넓은 땅을 가지고도 성이 안 차 걸떡거리는 사람이 있고 한 뙈기의 밭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있다. 몸뚱이 하나 가릴 집이 있고 어지가 있는 것만도 대견한 선비가 있다. 자꾸 가지가 벋고 있는데 예기는 예를 깨닫고 인간다운 도덕성을 확립하는 경서이고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에도 그런 고래로의 예도정치를 시행하고자 하였지만 세종 초기에 그러한 요구가 팽만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도 예이지만 그 중심에 악이 있었다. 악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해서도 다시 더 말해보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 이유에로이다. 예기의 악기편樂記篇에 구체적으로 악의 의미를 늘어 놓았다. 군자왈君子曰 예와 악은 잠시도 몸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악을 이루어서 마음을 다스리려면 온화하고 정직하며 자애롭고 믿는 마음이 새로운 모습으로 생겨난다. 그러면 즐겁게 되고 마음이 즐거우면 편안해지고 편안하면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천성에 맞게 되고 또 그러면 신神과 통하게 된다. 악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예는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고. 음악은 화和를 극진히 하고 예는 순順을 극진히 한다. 마음속이 화평하고 겉모양이 유순하면 백성들이 그 얼굴을 우러러 보고서 서로 다투지 않으며 덕의 빛이 마음속에서 움직이면 백성들은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다. 바른 도리가 밖으로 들어나면 백성들은 받들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고왈故曰 예악의 도를 이루고 그것을 들어서 천하를 다스리는 데 둔다면 무난의無難矣라. 악으로 천하를 다스리면 어렵지 않다고 하였다. 예기의 요절들이다. 악기에는 그밖에 금과옥조 같은 삶의 이치 정치적 논리가 밝혀져 있었다. 악은 즐거운 것이다. 사람의 성정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음악은 성음聲音으로 나타나고 움직임과 고요함에서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사람의 도리이다. 음악에는 형태가 있을 수 없고 그 소리로 하여금 즐겁지만 방탕하지 않고 악장은 조리가 있지만 틀에 박히지 않는다. 그러하니 굽고 곧고 번잡하고 순수하고 맑고 탁하고 그 곡절과 변화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방탕한 마음과 사악한 기운이 범접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종묘宗廟 안에 있어 군신 상하가 함께 들으면 화합하고 공경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악은 하늘과 땅의 명命이라고 하였다. 고을이나 마을에서 어른과 아이가 함께 들으면 화합하고 한 가정에서 부자와 형제가 함께 들으면 화목하고 그러므로 악은 조화로움을 얻고 사물에 따라 음절을 만들고 여러 가지 악보를 이루어 부자와 군신을 화합하게 하고 만민을 친하게 하여 따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雅와 송頌의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넓어지고 무무武舞를 익히면 용모가 장엄해진다. 그 소리와 곡조 리듬의 변화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가지런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악은 천지지명天地之命이다. 하늘과 땅의 지상명령이며 하늘의 소리 땅과 흙의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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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9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5> 박연은 관로官路라고 할까 벼슬 길에 나간 후 주로 청직淸職에 있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집현전 교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세자 시강원 문학 등 간원諫院 헌부憲府 춘방春坊의 요직을 두루 거치었다. 문장과 학문에 단연 두터운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예악의 중심에 서서 조선조 국악의 중추적 역할을 하기까지 다른 관직들을 맡기도 하였다. 전지하기를, 제생원 의녀 중 나이 젊고 총명한 3 4인을 골라 교훈을 시키어 문리를 통하게 하라고 하였다. 인하여 의영고義盈庫 부사副使 박연을 훈도관으로 삼아 전적으로 교훈을 맡게 하라고 명하였다. 전교수관前敎授官 박연 등이 조정에 들어와서 질의하기를, 본국에서 생산되는 약재 62종 안에 중국에서 생산되는 것과 같지 않은 단삼(丹蔘) 누로(漏蘆) 시호(柴胡) 방기(防己) 목통(木通) 자완(紫莞) 위령선(葳靈仙) 백렴(白歛) 후박(厚朴) 궁궁(芎藭) 통초(通草) 고본(藁本) 독활(獨活) 경삼릉(京三陵) 등 14종을 중국 약과 비교하여 새로 진짜 종자를 얻은 것이 6종이나 된다고 하여, 중국에서 생산되는 것과 같지 않은 향약(鄕藥)인 단삼 방기 후박 자완 궁궁 통초 독활 경삼릉은 지금부터 쓰지 못하게 명하였다. 세종실록 19권 5년 3월 17일 무술과 3월 22일 계묘에 실려 있는 대목이다. 그 후 시기를 보아 박연은 심혈을 기울여 문맥을 다듬고 정성스런 글씨로 왕에게 상소를 한다. 성조聖朝가 새로이 일어남에 바야흐로 예악의 순수한 다스림을 일으키려는데 개혁의 초기인지라 습속에 폐조廢朝의 잔재가 남아 있으니 심히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대락 그런 내용이었다. 참으로 용기 있고 혁신적인 청원이었다. 성조는 조선, 폐조는 고려를 뜻하였다. 이 상소는 즉각 받아들여졌고 박연은 그 일을 하게 되었다. 세종이 등극해 나라 만들기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박연은 예악을 맡아 활약하게 된다. 자신이 강설講說한 내용이 되돌아온 것이었다. 책상물림으로, 이론이며 지식일 뿐 실제로 행해 보지 못한 고대 중국의 고사 옛 성현의 덕목을 시정施政 현장에서 실현할 안을 내놓아야 하였던 것이었다. 개국 초기의 어수선한 정국과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어지러운 풍파를 딛고 조선 건국 27년만에 즉위한 세종의 입지는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흙이 되고 먼지가 되어 넋이 한 내끼도 없이 산화되더라도 변함없이 나라와 왕을 지키겠다는, 그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를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이자 성리학의 조종이며 만인의 추앙을 받는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고 새 나라 조선을 세운 할아버지(태조 이성계)와 새 나라를 꿈꾸며 정몽주에게 철퇴를 가하는 아버지(태종 이방원)는 할아버지를 도와 개국을 설계한 정도전鄭道傳의 등에 다시 칼을 꽂는다.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지금도 개성의 선죽교에는 정몽주의 핏자국이 보인다고 한다.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조선 건국을 하였지만 민심을 장악하지 못하고 지식인들의 이반離反을 막지 못하였다. 가령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吉再 같은 대선비들과 함께 하였더라면 나라가 어찌 되었을까. 그리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원천석元天錫 같은 선비도 있었다. 역사에 그런 가정법이 무슨 소용인가.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 1398년(태조 7) 8월과 1400년(정종 2) 1월, 두 번 왕자들의 혈난血亂이 벌어진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방우 방과 방원 등 여섯 형제와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낳은 방번 방석 형제 중에 여덟 번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사병私兵을 동원하여 건국공신인 정도전 남은南誾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무참히 살해한다. 그리고 다시 같은 어머니 배에서 태어난 왕자 형제끼리 칼부림을 한다. 하륜河崙 이거이李居易 등 방원의 심복들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여 둘째인 방과가 세자가 되고 1339년 왕위에 오른다. 정종이다. 그런데 이후 정종과 정비 정안왕후 사이에 소생이 없자 또 다시 세자의 지위를 놓고 방원과 방간은 갈등을 겪는데 공신功臣 책정 문제로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朴苞가 방간을 충동하여 방원과 무력 충돌을 하게 되고 싸움에 이긴 방원은 왕이 된다. 태종이다. 정종 2년 11월이다. 2차 왕자의 난을 지켜 보며 자란 두 형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왕권에 신물이 나서 십리 백리 떠나갈 법하지 않은가. 어떻든 그것은 지나간 일들이고 세종은 왕위에 오른 후 타고난 영명英明으로 새 나라 새 문물제도의 정립에 정열을 쏟았고 거기에 필수적으로 대두한 것이 예악이었다. 예와 악은 국가 문물제도의 핵심이었다. 내용이며 형식이고 얼굴이요 몸체였다. 예가 인이라 한다면 악은 어지러운 시대를 뚫고 나가는 인정仁政의 열쇠 구멍이었다. 열쇠 꾸러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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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8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4> 광풍과 고뇌 그리고 그에 따른 혼란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양녕대군의 폐세자위 충녕대군의 세자책봉은 동시에 행해졌으며 두 달 뒤 왕은 세자에게 선위禪位를 하였기 때문이다. 6월과 8월의 일이었다. 8월 10일 왕세자 충녕대군은 왕으로 즉위를 하였다. 훗날 유일하게 대왕으로 호칭하게 된 제4대 세종대왕이다. 태종은 상왕으로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에 이종무李從茂 임명, 대마도 정벌, 각도 거주 왜인倭人을 노비로 하는 등 군권을 놓지 않고 행사하였다. 22세의 나이로 아직은 나라를 이끌고 다스릴 재목으로서 또는 역량이 부족하다거나 미흡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전날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고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도전鄭道傳을 살해한 후 왕위에 올라 의정부議政府 의금부義禁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 등을 설치하는 등 18년 동안 강한 왕권통치를 하던 태종으로서 총명하고 충직하기만 한 신왕 세종을 도와준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어떻든 그로 인해 세종은 편안한 마음으로 문화정책을 펼치는 결과가 되었다. 달리 말하면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 기반을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청책을 펼쳤던 것이다. 태종은 상왕으로 4년간 생존해 있었다.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변계량卞季良 윤회尹淮 등에게 고려사 개수改修 지지地志 편술을 하도록 하였으며 주자소鑄字所를 두어 새 활자를 만들고 인쇄법을 개량하여 인쇄 능율을 올리었다. 집현전集賢殿 개설은 무엇보다 빛나는 업적이었다. 학문을 연구하고 예술을 꽃피우는 문화 용광로에 불을 당긴 것이다. 궁중의 학문연구 기관으로 조선 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도습蹈襲한 보문각寶文閣 수문전修文殿과 집현전이 있었는데 세종이 즉위하면서 유명무실한 집현전을 확충하여 명망 있는 학사學士들을 편전便殿에 집합시키었다. 집현전 직제로 정1품(領殿事) 2명 정2품(大提學) 2명 종2품(提學) 2명과 정3품(副提學) 종3품(直提學) 정4품(直殿) 종4품(應敎) 정5품(校理) 정5품(副校理) 정6품(修撰) 종6품(副修撰) 정7품(博士) 정8품(著作) 정9품(正字) 각 1명을 두었는데 제학 이상은 겸직이었고 부제학 이하가 전임관 전임 학사였다. 인원은 몇 차례 늘렸고 1436년(세종 18)에는 20명으로 운영되었다.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되었고 불철주야 학자 양성과 학문연구에 온 힘을 쏟아 세종대왕은 찬란한 문화의 시대를 열고 세계 제일의 글자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결과를 잉태하였던 것이다. 집현전의 가장 획기적인 운영은 경연經筵이었다. 왕과 유신儒臣이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였다. 국왕이 유교적 교양을 쌓도록 하여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왕은 밤 늦도록 경연을 떠나지 않았다. 서연書筵은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것이었다. 겸관兼官인 집현전 학사들은 외교문서 작성도 하고 과거의 시험관으로도 참여하였다. 사관史官의 일을 맡기도 하고 중국 고제古制를 연구하고 편찬사업도 하였다. 세종은 전적典籍을 구입하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시키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는 특전도 베풀었다. 그렇게 하여 집현전은 조선의 학문적 기초를 닦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많은 학자적 관료를 배출하여 이후의 정치 문화 예술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편찬사업으로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의방유취醫方類聚 그리고 훈민정음의 창제와 관련하여서는 운회언역韻會諺譯 용비어천가주해註解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동국정운東國正韻 사서언해四書諺解 그 밖의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다. 한국문화사상 황금기를 이루는 내용들이었다. 이 시기는 한국음악에 있어서 또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때였다. 세종은 박연으로 하여금 음악의 정리를 하게 하였던 것이고, 유교정치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의례이며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오례五禮(吉禮 嘉禮 賓禮 軍禮 凶禮)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라야 했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을 아악의 부흥, 악기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박연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간보는 동양 최초의 악보로 1행 32간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 놓고 한 칸을 1박으로 쳐서 음가音價를 표시한 세계적 발명이다. 이는 서양의 오선보五線譜와 함께 유량악보有量樂譜이다. 우리 아악의 연총淵叢인 세종악보世宗樂譜의 압권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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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7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3> 세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승의 말이고 또 성인의 가르침이며 현군의 실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말을 찾아 일러 준 스승이 참으로 고마웠다. 자신을 이롭게 해 주려는 얘기만은 아니었다. 현실이 그러하였다. 이제 와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다 들어내면 혼란만 일으킬 뿐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고 여러 사람 힘들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고 깨닫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런 사실을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시간이 걸렸다기보다 어렵고 여러 고비가 있었다. 그렇게 해야 되었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마구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정녕 그것이 옳으냐. 다른 사람들의 벽에 갇혀 솔직한 자신의 생각은 무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자꾸만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큰 길을 가는데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의에도 대의가 있고 소의가 있습니다.” 앞서는 인과 지에 대하여 얘기했었다. "의는 무엇이고 소의는 또 무엇인가요?” "의란 불의에 맞서는 정신이며 자기를 내세우는 주체성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세자가 겪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주변 사람들과 관계라든지 가령 권력에 맞서 싸우는 것 같은. 그런 것은 소의입니다.” "내가 지금 싸워서 뭘 얻으려는 것이 아니지 않아요?” "그 반대지요.” "그런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것이 대의입니다. 형들은 대의를 위하여 소의를 버린 것입니다.” 세자는 얼른 그것을 수긍하지 못하였다. 그 크나큰 대와 소의 차이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스승 앞에서 승복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도 물론 아니었다. 그것을 알면 알수록 더 고통스럽고 견디기가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가 없어서 더 괴로웠다. "그러나 의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예가 있어야 합니다.” "예?” "인자인야仁者人也라 하였어요.” 맹자의 말이었다. 해석을 해 보면, 仁이라는 글자는 人과 二로 되어 있다. 두 사람이 마주 서 있는 것이 인간이요 인간성이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공경하는 것이다. "질서의 원리는 남을 공경하는 데 있고 그것이 예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의 질서와 원활한 궤도 진행을 위해서 지켜야 하는 규범이고,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분별이지요.” "예에……” 세자가 깊은 생각에 잠기는 동안 박연은 이번에는 퉁소를 허리춤에서 꺼내어 구성지게 불기 시작하였다. 말로 안 되면 음률로 감화를 시키려는 생각이었다. 축 늘어진 솔가지를 잡고 언덕을 내려다보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가락에 젖어 있던 세자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박연은 먼 산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치 세상사에 통달한 도사처럼 큰 기침을 하였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언제 그런 학문이라고 할까 이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논리를 터득하였는지 대견하였다.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도 사실은 잘 몰랐지만 세자를 설득하기에는 충분하였다. 다른 사람이 다른 논리로 얘기한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자에게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예악禮樂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 보지요.” 박연은 공부했던 사서오경을 다 동원하여 세자를 가르치려 하였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동안 가르쳤다고 한다면 이제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 백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 배운 대로 얘기해 보는 것이다. 아직 가르칠 때가 안 되고 자질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계제가 그렇게 되었다. "예와 악으로 사람들을 교화하여 인을 실현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자의 얘기로 바뀌었다. 의례와 음악, 예악은 유가儒家사상의 알맹이다. 개인의 도덕적 완성과 사회의 도덕적 교화를 위한 수단이요 방법이었다. 「논어」의 태백편泰佰篇에 시에서 일고 예에서 서고 악에서 이룬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하였다. 시와 예가 합하여 악을 성취한다는 뜻인가, 인의 최상의 단계 경지가 악이다. 사랑 박애博愛 benevolence, 공자 또는 유교사상의 근본이념인 인을 실천하기 위한 요체가 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참 예와 악에 대하여 침을 튀기며 설명하고 있는데 세자가 혼잣말처럼 말한다. "음악이 그런 것인가?” "춘추전국시대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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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6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2>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냥 이대로 있기만 하면 되는 건지, 날이 갈수록 어렵고 힘들어요.” "예? 그게 무슨?” "올바른 행실을 하고 무엇을 가려서 하고 자나 깨나 성현의 말씀을 읽고 실천하고 그런 것은 쉬워요. 하는 데까지 하면 되지요. 그런데…” "아아, 그래요?” "예.” "그것도 극복해야지요.” 세자는 스승을 정색하고 바라보았다. 박연은 그제서야 세자가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알았다. 자신을 위해 두 형이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백형 양녕은 온 천지를 유랑하며 광풍을 일으키고 있었고 중형 효녕은 느닷없이 입산을 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출가를 하여 머리를 깎은 것이다. 세자 충녕은 그런 것이 다 자신에게 돌아온 기회라 생각하고 다행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영민하고 충직하다는 구실로 ‘큰일’을 맡을 사람이라고 내다보고, 양녕의 판단이지만, 효녕의 의사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백성을 이끌고 모든 일에 모범이 되고 언제나 굳건히 보좌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충녕이 적격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부왕은 여러 차 떠 봤지만 양녕은 번번이 실망을 시킨 것이다. 밤마다 밖으로 나가 주색잡기로 문란한 행동을 하였을 뿐 아니라 실성한 행동을 하였고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충녕이라고 책상에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경서를 읽고 있어도 거기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생각이 있었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봐야 올바로 대답을 해주지 않았고 혼자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물어본 것이다. 너무도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는 스승에게. "운명이라는 것이 있지요.” 사실 자신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연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럼 운명적으로 내가…” "그래요. 이미 결정된 것, 다시 흔들리면 안 되지요.” 세자의 생각은 옳은 것이다. 자신에게 양위를 하기 위해 이상한 행동을 하며 떠나가는 형들에게, 잘 알겠다 하고 고맙다고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고 거부의 몸짓을 할 것인가, 그러나 이미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세자로 책봉이 된 것이고 만천하에 다 알려진 것이다. 이제 와서 새 불을 사를 필요가 있는가. 박연도 마음이 모질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합해야 하였다. "그럴까요?” "그럼요.” "백씨 중씨의 처지에 대해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고 요로를 힘들게 할 뿐입니다. 오늘부로 그런 무용의 생각은 가슴에만 새기고 큰 걸음을 떼어놓아요.” "정말 너무 괴로워요. 이렇게 몰염치하고 뻔뻔해 가지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것입니다. 성현 군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자는 스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연은 얼른 적절한 말을 내놓지 못하였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고 했다가 과단성을 갖고 결단력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여전히 동의를 못 하고 있었다. 납득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연은 이번에는 맹자의 논리를 가지고 왔다. "인성人性을 말할 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는데 가령 형들을 생각을 하는 것을 인仁이라고 한다면 그것만 가지고서는 안 돼요. 의가 있어야 하고 예와 지가 있어야 하는데 지란 무엇인가. 그때그때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직관적으로 결정하는 것이지요.” "직관적이라면…” 세자는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 어투였다. "물도 길이 있어요. 물길. 옛날 우禹임금이 홍수를 물리칠 때에, 물이 흐르는 대로 방향을 정해서 물길을 터주니 물이 잘 흘러가더라는 말이 맹자 때 전해졌어요. 맹자는 그 전설을 비유로 해서 사람의 행동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에 당면하였을 때는 그때의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행하면 된다고 하였어요.” 박연은 행수行水, 물 흐르는 대로의 양지良知를 다시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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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5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1> 곧고 바르게 넓은 길을 가는 것이다. 한시도 쉼 없이 주저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그것이 누구라 하더라도, 앞만 향하는 것이다. 늘 인의의 길을 잊어본 적이 없지만 대장부가 됐든 졸장부가 댔든 앞만 보고 대도를 걷는 것이다. 왜 무엇을 위하여 그러느냐고 누가 있어 묻는다면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고 무슨 논리는 없다. 선인들 현인 성인들의 가르침대로 실행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 어긋남이 없이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없이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행하는 것이다. 벼슬길에 오르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이다. 아직 미관 말직이지만 모든 직무에 황공한 마음으로 임하고 성실하게 모든 힘을 다하였다. 문학의 청이라고 할까 명을 받고도 천직으로 생각하여 받들었다. 그에게 내려진 운명이었고 사명이었다. 당한 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지만 그만큼 큰 각오를 가지고 대처하는 것이다. 그가 배운 대로 보고 겪은 대로 아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가르침이란 아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고 줄 수 있는 것을 다 쏟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배우는 것이다. 그것 가지고 안되고 그의 능력이 부족하면 솔직하게 자인하면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방법을 찾으면 될 것이고 그건 그때 가서 할 일이다. 당장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런 과감함이랄까 뻔뻔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그 전후의 이야기이지만 강가의 작은 빈터를 생각한 이후 그의 목표는 벼슬이 아니고 영화가 아니었다. 고관대작이 되어 권력을 누리며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것이 아니고 괴나리봇짐을 지고 낙향落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초라한 행색이 아니었으면 하였다. 가족을 위하여서였다. 가서 피리도 불고 퉁소도 불면서 시도 쓰고 막걸리도 한 잔씩 하고… 그런 것이 바램이었다. 자나 깨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문득 문득 언덕에 오를 때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 떠올리는 것이고 그럴 때마다 마음이 평화로웠다. 능력이나 실력의 한계에 부딪힐 때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에서였다. 아련한 꿈이었다. 언젠가 세자와 궁을 나가 숲을 거닐며 그의 꿈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도 그렇게 얘기하였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요?” "스승이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요.” "그래도 그렇지.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을 바라는군요.” "그래 보여요? 그럼 됐네요.”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느닷없이 피리를 꺼내어 불기 시작하였다. 은은하고 향수 어린 가락이었다. 그동안 정신없이 바빴고 절박한 시간을 보내며 피리를 만질 겨를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지만 늘 허리춤에 피리를 끼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해도 소리가 의외로 괜찮은 것 같았다. 이상하였다. 그리고 세자는 황홀한 표정으로 찬사를 보내고 감탄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재주가 있었어요?” "듣기가 좋았다니 다행이네요.” 박연은 간간이 피리와 퉁소를 불었고 그러기에 앞서 세자가 청하였다. 그렇게 되면서 그동안 갖고 있던 재주랄까 기량으로서가 아니고 더욱 연마한 소리로 다듬었고 그러기까지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새 차비로 경서와 사서를 밤늦게까지 탐구하였고 글을 썼고 글씨를 썼고 그에 못지않게 소리에 대하여 음률 음악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배웠다. 장악원도 자주 드나들었고 명인들도 만났다. 세자에게 시와 음악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먼저 일상생활에 대한 것으로, 가령 북송北宋의 유학자 장사숙張思叔 좌우명 남송南宋의 유학자 범익겸范益謙 좌우명을 외고 실천하게 하고서였다. 말을 반드시 충실하고 신의 있게 하라. 행동은 돈독하고 공경스럽게 하라. 음식은 절도 있게 먹어라. 글씨는 반듯하게 써라. 용모는 단정하게 하라. 옷매무새는 깨끗하게 하라. 걸음걸이는 편안하게 하라. 거처는 조용하게 하라. 일은 계획을 세워서 시작하라. 말을 하였으면 반드시 실천하라. 늘 덕성을 견지하라. 허락은 신중히 하라. 착함을 보면 기뻐하라. 나쁨을 보면 내 병처럼 미워하라. 장사숙은 이 열네 가지 덕목을 자리 귀퉁이에 써 붙여놓고 아침저녁으로 보고 경계하노라고 하였다. 세자는 유학자의 좌우명을 이내 딸딸 외었다. 凡語必忠信 凡行必篤敬… 물론 한자로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이런 것들은 실천하기 힘들지만 어렵지는 않아요.” "그래요?”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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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14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8> 그러니까 박연의 나이 34세 태종 11년(1411)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옥당玉堂에 선입되어 포상을 받았다. 태종 5년에 생원과에 급제(문과 초시初試)하고 6년 뒤 식년시式年試 대과大科(문과)에 급제하여 2단계시험(복시覆試)을 다 거친 것이다. 그후 42세 세종 원년(1420)에 집현전 교리校理에 배수되고 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중임되어 직무를 수행하던 중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으로 발탁된다. 문학은 조선시대 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세자시강원에 속하여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던 정오품 벼슬이었다. 세자는 충녕대군이었다. 후일 가장 다양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성군聖君 세종대왕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휘諱(이름)는 도祹이다. 하루는 태종이 불러서 궁에 들어가 알현을 하였다. 몇 번이나 편히 앉으라고 하는 데도 박연은 도무지 전신이 떨리고 불안하여 좌정할 수가 없었다. 시골 서생 출신이어서인가,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큰절을 올리고 엎드린 채 고개를 들지도 못하였다. 용상의 임금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편히 앉게. 다름이 아니고…” 임금은 무언가 어려운 청을 하려는 듯이 가까이 다가와서 간곡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명령이 아니었다. "세자를 잘 가르쳐 주시오. 부탁이오.” 세자시강원 문학의 자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박연은 정말 몸 둘 바를 몰랐다. 더욱 떨리고 불안하고 말문이 열리지도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임금은 이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주리라 믿어도 되겠소?” 이제 더 떨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황공합니다. 제가 감당할 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뛰어나고 훌륭한 인재가 많이 있습니다.” 간신히 말하였다. 사양인지 겸양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리고 덧붙이었다. "저는 시골 강촌에서 자라 식견이 없고 도량이 좁아 왕도를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재차 부탁하였다. "아니오. 여러 사람에게 추천을 받았고 그만하면 충분하오. 잘 부탁하오.”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 사양하거나 거절하면 불충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당한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신명을 다 바쳐 소임에 충실하겠습니다. 그러면 충녕대군의 학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럼. 물론.” 임금은 간단히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던지는 것이었다. 조선 3대왕 태종에게는 양녕대군 효녕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 네 아들이 있었다. 성녕대군은 일찍 병사했고 양녕대군은 장자이다. 대개 장자가 세자가 되고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부왕 태종이 왕위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있었던 두 차례 왕자의 난을 보면서 왕의 자리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인품이 훌륭한 충녕대군에게 세자의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다녔다. 그리고 어느 날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효녕대군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고 효녕대군도 형의 넓은 뜻과 동생의 덕을 인정하고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 면벽 합장을 하고 불제자가 되기를 결심한다.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기까지 그런 두 형의 사랑과 양보가 있었던 것이다. 분수를 알고 욕심 내지 않고 성군의 자질을 인증해 주었던 것이다. 그만큼 회한이 따른 일이기도 하였다. 양녕대군의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며 한스런 생애를 보낸 얘기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박연은 지체 없이 세자 충녕대군의 시강원 문학의 자리에 임하였고 경서와 사적을 강의하며 도의를 가르쳤다. 두 번의 과거에 급제하고 몇 가지 직을 맡아 벼슬길에 오르면서 그리고 시를 배우고 제술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의문이 생기었다. 삶이란 무엇인가. 벼슬이란 무엇인가. 결국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옥계폭포 아래서 지프내 강을 바라보며 되물었던 물음의 연결이었다.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그러다 하나의 공간을 발견하였다. 고향집 앞 뜰과 같은 강가의 땅이었다. 봄이면 난초가 삐죽삐죽 돋아나고 사철 맥문동이 깔려 있고 그 옆에 푸성귀도 심을 수 있는 빈 터였다. 거기 답이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 돌아가 부모님 조부모님 모시고 아내와 아이들과 욕심 없이 살 때까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치며 곧고 바르게 휘지 않고 혼신을 다하는 것이다. 자문자답이었다. 그날부터 그의 이름도 바꾸었다. 연堧은 고향 강가의 작은 빈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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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13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7> 졸지에 박연은 큰 짐을 지게 되었다. 작정을 한 것도 아니고 느껴지는 대로 아악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였는데, 그 분야에 특별한 지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피리를 불고 퉁소를 불던 기량과 관계없이 궁중음악 의식가 제례악 등에 매력이 있었던 것이고 관심이 갔던 것이다. 그것은 생원시 급제 발표를 하고 국왕과 문무백관 앞에서 연주하던 전정고취에 대한 감격과 짐승들이 화답하던 부모님 시묘 때 자신의 피리소리와 연결이 되는 것이었다. 꿈이고 착각일지 몰랐지만 그런 생각에서 주제넘게 소견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학관은 또 무슨 생각에서 그런 주문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좌우간 그것이 박연의 운명을 좌우하는 아니 결정하는 사건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재로 돌아가지 않고 장서각으로 가서 시와 관련된 서적을 한아름 빼어 들고 선 채로 읽어 대었다. 서고에도 규정이 있고 시간이 있었지만 워낙 걸신들린 것처럼 정신없이 복도에서 탐독하고 있는데다가 뭐라고 하면 큰절을 하고 다시 뭐라고 하면 큰절을 더 여러번 하는 것이었고 갈망하는 눈빛 영롱하고 너무 간절하고 애절한 욕구가 얼굴에 씌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고비를 넘기고 혼자 남아 밤을 새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뭘 먹지도 못하고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볼일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잠도 오지 않았다. 날이 새는지도 모르고 다시 서고의 관원이 돌아오는 줄도 몰랐다. 「시경」의 시 3백 편을 다 읽고 「시전」에 풀이한 글 그리고 「시경집주集註」의 주석을 훑었고 닥치는 대로 이 책 저 책을 읽어재끼었다. 물론 읽는 대로 다 알지도 못하였고 머리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뭐가 뭔지 모르는 말이 많았고 뜻이 통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더 많았다. 한문 고문인데다가 중국 상고시대의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기술한 것도 아니고 비유적이고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함축적이고 유연하게 노래로 읊고 있어 어렵고 해석이 힘들었다. 상고인上古人의 유유한 생활을 구가하는 시, 당시 정치를 풍자하고 학정을 원망하는 시들이 많았다. 농경문화가 발전하고 봉건제가 정착되고 사상과 예술이 꽃피던 주왕조에서 춘추전국시대까지 황하강 유역의 여러 나라 왕궁에서 부른 시가時歌였다. 「시경집주」는 주희朱熹가 저술한 책으로 「시전」을 편집하고 주를 달아놓은 것이다. 그 서序에 시에 대하여 말하였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시를 어찌 해서 짓느냐고/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 사람이 나서 고요함은 하늘의 성품이요/물건에 느끼어 움직임은 성품의 욕심이다. 태극이 정하고 동하듯이 전자는 몸(體)이 되고 후자는 얼굴(容)이 된다. 이렇게 전제하고 시가 무엇이며 왜 시를 읽는가에 대하여 써내려갔다. 무릇 이미 욕심이 있을진댄/곧 능히 생각이 없지 않고/이미 생각이 있을진댄/곧 능히 말이 없지 아니하고/이미 말이 있을진댄/곧 말이 능히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자차咨嗟하고 영탄하는 나머지 발하는 자가/자연히 음향절주音響節族가 있어서/능히 그만 두지 못하니/이것이 시를 짓는 바이니라 물건에 감동이 된다는 것은 성품의 욕심으로 곧 무엇인가 하고 싶어 발동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욕심은 생각이 있는 것이고 말로 표현되어 나오지만 「주역周易」에서 공자가 말하였듯이 書不盡言 言不盡意, 글로서는 말을 다 하지 못하며 말로는 뜻을 다하지 못한다. 그것을 흥이다 부다 비다 하는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 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와 송은 주나라가 성한 시대 조정과 교묘郊廟에서 쓰던 노래의 말(樂歌之詞)이라고 하였고. 악시이다. 주희는 서의 끝부분에서 시에 함유涵濡하고 체득하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를 거기서 얻으리라고 하였다. 박연은 밤을 꼬박 새웠지만 시만 읽고 악은 터득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아악 정책에 대해서 개선 방향에 대해서 답을 찾지 못하였다. 어김없이 시간은 다가와 난감한 심정으로 수업에 임하였다. 학관은 고지식하게 밤새 시만 읽은 순진하고 질직質直한 박연에게 더 큰 과제를 안겨 주는 것이었다. 소견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체계를 세워서 글로 작성해 오라는 것이었다. 논문으로 써서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그 과제와 시의 공부는 물론 그 뒤에도 더 깊이 음악 예술에 대한 탐구를 더하였지만 뒷날 박연이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에 배수되고 송나라의 음률이 우리 체제에 맞지 않아 악기와 악식樂式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현실을 정책적으로 제안하여 복원하고 개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종내에는 우리나라의 악성이 되었던 것이다.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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