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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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93)<br> 서영님 명무의 9고무 춤사위구고무 서영님 명무의 '이숙향 류 구고무'는 '3고무'에 그 기원을 두면서 3개, 5개, 7개, 9개 등 북의 수를 응용하여 다양한 변화와 균형미를 느끼게 하는 춤이다. 특히 전승체계가 원활치 않아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현재의 '9고무'는 이숙향 선생으로부터 전승받아 2005년 서영님에 의해 초연된 바 있다. 오늘의 9고무는 독특한 북의 리듬과 함께 9개 북 사이를 들고나며 힘차게 도약하는 서영님 특유의 장쾌한 매력이 더해져 우리 춤의 신명나는 또 다른 멋을 선보인 춤사위이다. 서영님 사단법인 님 무용예술원 대표은방초춤보존회 이사장Logos 문화예술교육원장관성묘유지재단 이사장국가무형유산 제97호 살풀이춤(이매방류) 이수자 시립가무단지도위원 역임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부장 역임서울예술고등학교 교장 역임(사)우리춤협회 부이사장 역임(사)한국전통춤협회 부이사장 역임우봉 이매방 전통춤 보존회 이사 역임박병천 진도북춤보존회 이사 역임 수상내역- 2003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상- 2008 이화여자대학교 '올해의 이화인상' 수상- 2010 제12회 무용연구 교사상 (한국무용교육학회)- 2017 제7회 PAF 전통무용상 (공연과리뷰)- 2018 예술대상 (한국무용협회 한국전통무용)논문 및 저서- 2005 ‘영혼을 판 춤꾼 은방초’/서영님 저/출판사 삼신각 (문화관광부 우수 학술도서 선정)- 1997 제6차 고등학교 인정 "무용이론” 교과서 공동 편저- 2003 제7차 고등학교 인정 "무용이론” 교과서 공동 편저- 2011 제7차 개정고등학교 인정 "무용의 이해” 교과서 공동 편저- 2013 세종대학교 무용학 박사논문「사회적 인식변화를 통해 본 신무용가 은방초 춤의 미적가치와 현대적 수용에 관한 연구」- 2021 조용자류 장구춤-근대의 춤유산 장구춤의 재발견 (2021 전통예술복원 및 재현사업-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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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5)<br> 정선아리랑담뱃불로 벗을 삼고 등잔불로 님을 삼아 님아 님아 정든 님아 나를 두고 어디 가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감상 님 떠나면 옆구리부터 시려오고 말동무도 없는 밤은 길기만하다. 가물거리는 등잔불 바라보며 피워 올리는 담배연기는 허공에서 공허하다. 그 옛날 우리 아낙네들 중 담배를 피우는 이가 더러 있었다. 횟배를 가라앉히려 피운다고도 했으나, 외로움을 달래는 방편이었던 듯하다. 내 어머니도 궐련을 피우셨다. ‘백조’는 휠터가 없고 ‘아리랑’엔 휠터가 있었는데 주로 값이 헐한 ‘백조’를 태우셨다. 청상(靑孀)의 외로움을 그렇게 달래셨음을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여러 면에서 그 때의 여인들이 훨씬 외로웠을 것만 같다는 지금 생각이다. 퇴계 선생의 시를 얹어 대책 없는 외로움을 위로한다. 연하(煙霞)로 집을 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 가네.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도산십이곡 중>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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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강태홍류 산조춤' 전승하는 보존회장 김율희김율희 이사장은 부산에서 태어나 전통춤 4대 가업을 잇는 무용가다. 조부 김동민과 고모 김온경, 사촌 윤여숙에게 춤을 사사받았으며 이화여대 무용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부산의 동래학춤과 동래고무를 꾸준히 수련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일무를 이수해 다양한 춤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서울예대 무용과 외래교수로 출강하며 후학양성에도 힘쓰고 있다.전남 가야금 명인 ‘강태홍’의 산조춤은 1949년 처음 만들어진 강태홍류 산조춤은 약 8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춤으로 음악 작곡자와 춤 안무자가 같은 전통춤이다. '강태홍류 산조춤'은 강태홍류 가야금산조에 맞춰 추는 춤으로, 1949년 강태홍에 의해 안무되어 1950년 김온경이 초연한 실내홀춤 양식의 전통춤이다. 이 춤의 전승과정의 변화양상을 살피면, 약 75년간 지속된 이 산조춤이 강태홍, 김동민, 김온경의 역사적 관계에 의해 형성‧성장하고, 유실되어 다시 복원이 이르는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강태홍류 산조춤의 특징은 첫째, 작곡자와 안무자가 일치하는 유일한 전통춤이기 때문에‘음악의 시각화’가 강하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둘째, 이 춤은 여타 권번 전통춤과는 달리 작품의 의뢰자와 안무자, 전승자가 김동민, 강태홍, 김온경이라는 명확한 안무배경을 지닌‘발생의 명확성’이 있다. 셋째, 여성들의 일상생활 묘사와 자연물의 행위모방 묘사가 표현되는‘동작의 묘사성’이 뛰어나다. 대표적으로 소매걷움사위, 실패감는사위, 나비사위, 학사위 등이 있다. 넷째, 강태홍의 음악세계와 일맥상통하는 담백한‘표현의 절제미’가 있다. 다섯째, 무용수와 가야금, 장구 연주자와의 교감과 감응이 매우 중시되는‘연희의 감응성’이 있다. 강태홍류 산조춤은 강태홍이 작곡하고 안무한, 전통춤 계열의 산조춤으로 최초의 작품이다. 이 춤은 1949년 김동민의 의뢰로, 강태홍이 본인의 산조를 짧게 다듬어 김온경에게 유일하게 전수한 춤이다.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이 춤의 초연은 1951년 부산극장이었으나, 이번 연구에서 1950년 봄 토성초등학교 학예회로 밝혀졌다. 이 춤의 작곡자 겸 안무자인 강태홍은 가야금산조와 병창, 창극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국악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강태홍은 부산지역 일반인에게 최초로 춤을 가르친 무용교육자이자 안무자이다. 국악활동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강태홍의 무용활동은 후원자 김동민과의 인연으로 인한 것이며, 예술적 후원 관계를 넘어 강태홍의 예술세계의 총체인 산조춤을 남기게 된다. 전승과정은 시대상황과 강태홍, 김동민, 김온경의 관계에 의해 굴곡의 역사를 지닌다. 이 작품은 1949년 안무되어 1950년 초연되는 형성과정을 거치며 발전하다, 1957년 강태홍 사망과 함께 춤의 유실기를 겪고, 1989년 신명숙과 함께 산조춤 음악의 복원 및 산조춤 복원이 이루어져, 현재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종합하면 강태홍류 산조춤의 특징은 음악의 시각화, 발생의 명확성, 동작의 묘사성, 표현의 절제미, 연희의 감응성이 있다. 참고: 김율희의 "강태홍류 산조춤의 전승과정 및 작품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23. 김율희 강태홍류산조춤보존회 회장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수석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무용학과 박사학위 취득 서울예술대학교 무용과 강사 (사)아악일무보존회 상임이사 (사)한국춤협회 이사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 일무 이수자 부산시무형유산 '동래고무' 이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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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7)<br>500년 세월 가로질러 夢心의 의미명가의 조건, 남원 몽심재(夢心齋) 우리는 무엇을 명가(名家)라 하며 명문(名門)이라 이르는가 지리산 골골이 짙은 숲들을 지나 남원 견두산 자락 단아한 고택서 죽산박씨 종가의 격조는 물론 명가의 조건을 새삼 되돌아 본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신파극단 취성좌(聚星座)가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할 때다. 여배우 이애리수(1910~2009)가 막간 무대로 나와 이 노래를 불렀다. 갑자기 객석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삽시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훗날 남인수가 불러 국민가요가 되었던 <황성옛터>, 본래의 노래 제목은 <황성(荒城)의 적(跡)>이다. 전수린이 작곡하고 왕평이 작사하였다. '황폐한 도성의 흔적', 개성 만월대를 보고 지은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을 망해버린 왕조 고려에 투사했으리라. 허물어진 성터가 주는 영감은 벼랑에 폭포수 쏟아지듯 망국의 조선사람들에게 번졌으니, 일제가 서둘러 금지곡으로 지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잡초 우거진 도성 터, 이것이 어디 개성의 만월대에 그치겠는가. 흥망성쇠의 왕조에 그치겠는가. 몽심(夢心)에서 원불교의 공심(公心)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리산 골골이 어둡고 짙은 숲들을 지나 남원의 견두산 자락에 이르면 고즈넉한 마당 단아한 고택이 나온다. 남원 몽심재, 내 여기 이르러 떠올린 것이 '황성옛터'다. 황장목 붉은 기운 틈틈이 땡볕 피해 건너편 대나무들은 고개를 숙이는데 영웅호걸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경사를 따라 지은 고옥의 자태가 여전히 곱지만, 방초의 격조함은 어찌할 수 없다. 말끔하게 정리해둔 고택의 모퉁이, 한 시기 번영했던 영화의 흔적들만 수북하다. 길 건너 풀벌레 소리 요란하니 잠시 마루에 앉아 머리를 기댄다. 감은 눈 깊은 곳으로 누구실까. 초연한 선비 한 분이 몽심재의 마당을 가로질러 온다. 흰 도포자락 휘날리는 걸음걸이가 성큼성큼하다. 이윽고 노래 한편을 읊는다. "격동류면원량몽(隔洞柳眠元亮夢), 등산미토백이심(登山薇吐伯夷心)".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을 꿈꾸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 고려말 유신 송암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보낸 싯구다. 박문수가 누구인가? 고려가 망하자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은거한 이들 중 두문동 72현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 이름이 다 전하지는 않지만, 그 중심에 박문수가 있다. 조선 건국 후 이들이 두문동에 들어 빗장을 걸고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골자다. 전 왕조에 대한 충절이랄까.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의 옛 이름이기도 하고 개성 부근 보봉산 북쪽 골짜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72현이니 48인이니 따위의 호명이 분분한 것은 이 고사의 전거가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두문(杜門)은 팔문(八門) 중의 하나다. 문을 닫아걸다라는 뜻으로 차용한 것이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죽산 박씨, 박문수의 후예가 남원으로 내려와 정착한 것은 손자 박자량 때이다. 조용헌의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숙부 박포(朴苞)가 이방원의 제2차 왕자의 난에 대항하다 패배하여 참수당하였다. 이 때문에 박자량도 좌천되어 전라관찰사로 내려왔다가 처가인 남원 수지면 초리에 눌러앉게 되었다. 몽심재라는 당호는 연당(蓮堂) 박동식(朴東式, 1753∼1830)이 호곡(虎音室)마을에 고택을 마련하여 붙인 이름이다.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절의를 다지면서 시를 보낸 후 16대나 지난 시점이다. 시의 끝 글자를 따 붙인 것이 '몽심재(夢心齋)'다. 박문수의 의도대로라면 몽(夢)은 도연명의 꿈이고 심(心)은 백이숙제의 꿈이다.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연명은 지금으로 말하면 귀촌 귀향의 대명사요,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백이숙제는 충절과 절의의 대명사다. 귀촌하여 절의를 지킨다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을까? 고려의 흥망성쇠와 할아버지의 일편단심을 상고하였던 것일까? 장차 이를 망국의 기운을 감지하였던 것일까? 어쨌거나 호음실 죽산박씨의 의도와는 별개로 승승장구 벼슬길에 오르는 이, 재화를 얻는 이, 사회적 명성을 얻는 이들이 줄을 이어 나온다. 두문불출의 역설이라고나 할까. 문과, 소과를 포함하여 벼슬길에 오른 이가 82명이나 되고 만석군 거부까지 출현하였다. 세사에 초연하였으므로 얻은 명성이었는지 명성을 얻었기에 세사에 초연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몽심재를 중심으로 실천되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만큼은 두고두고 환기할 필요가 있다. 방이 8개나 되는 사랑채는 한양과 지방을 오가는 선비들의 살롱이었다. 전라도 일대의 선비들 사이에서 과객 대접이 후하기로 가장 이름난 곳이었다니 말이다. 조용헌의 분석에 의하면 몽심재에서 1년 동안 네트워크용으로 사용된 쌀이 3천 가마다. 600가구 3천 600명이 1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양이란다. 한양으로 오르는 이, 고향으로 내려오는 이들이 이곳에서 만나 교환한 정보의 양을 셈하기 어렵다. 헛간에 테두리가 올라있는 큰 멍석을 펴두고 쌀을 나누었다는 후문도 몽심재를 다시 보게 해준다. 하인들을 배려하여 문간채에 정자를 마련해주거나 부엌간의 지붕을 길게 늘어뜨려 휴게의 공간을 배려한 것 등, 한옥 자체의 기능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이 있다. 후손 중에는 도쿄에서 일어난 학생독립선언에 참여하기도 하고, 1923년에는 사재를 털어 건너편 안산 자락에 수지보통학교(현 수지초등학교)를 건립하고 수지중학교를 건립하여 국가에 헌납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불교와의 관련이지 않을까 싶다. 원불교의 대각여래위(大覺如來位) 중 한 분인 상산 박장식 종사(1911~2011)를 비롯해 수십 명의 성직자를 배출하였다. 그 중의 상당수가 여성이었다. 몽심재는 1984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2004년에 원불교 교단에 희사했다.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 받들어 모시는 마음(供心), 대중과 함께 하는 마음(公心)이 혹여 몽심(夢心)의 꿈에서 연유된 것은 아닐까? 풀벌레 우는 소리에 눈을 지긋이 뜨니 구름인 듯 안개인 듯 흰 두루마기자락 휘날리며 누군가 걸어가신다. 500년 세월 가로질러 몽심의 의미를 일깨우러 오신 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무엇을 명가(名家)라 하며 명문(名門)이라 이르는가. 죽산박씨 종가의 격조는 물론이려니와 명가의 조건을 새삼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몽심재 바위에 새긴 낙관(落款), 미나리꽝과 남원추어탕 마당의 바위에 새긴 각자(刻字)가 특별하다. 후세에게 남긴 격언이자 유언이라고나 할까. 主壹岩(주일암)은 사심과 잡념 없이 흔들리지 않는 오롯한 마음 자세를 말한다. 存心臺(존심대)는 자신의 본성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아마 이런 정신이 원불교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千蒼崖(천창애)는 천길 절벽이라는 뜻으로 나라의 기운과 백성의 기운을 생각하며 새겼다 한다. 후손 박주현(1844~1910)이 상해에 독립자금을 보낸 것도 이런 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靡他基適(미타기적)은 스스로 있는 곳에서 충실하라는 뜻이다. 경사를 따라 설계된 물의 흐름도 특별하다. 장독대에서 부엌간으로 앞마당을 거쳐 요요정(하인들의 정자) 아래 천운담(天雲潭)으로 흐른다. 담장 밑을 지난 물은 다시 마을 입구의 미나리꽝으로 흐른다. 몽심재 전성기 여기서 미꾸라지를 길러 빈객들을 대접했다고 하니, 어쩌면 이 미나리꽝이 남원 추어탕의 원조 아닐까? 남원 하면 떠오르는 추어탕의 스토리텔링 측면에서라도 몽심재를 주목해보기 바란다. 지금은 고택의 앞쪽으로 흐르던 개울도, 천운담의 물을 받아 운영하던 미나리꽝도 모두 매립되었다. 왕평이 개성 만월대에 들러 황성옛터를 상고하였듯이 나는 지리산 오래된 풍경에 스며들어 몽심재의 꿈과 바위에 새긴 낙관을 상고한다. 남원의 청년들이 들고일어나 몽심의 꿈을 다시 꾸며 실천하는 때, 그것이 어즈버 태평연월 아니겠는가.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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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46)<br> 분청귀얄문잔편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규진(편고재 주인) 분청덤벙이라고 하면 이제 고흥 운대리는 보성 도촌리를 뛰어넘어 확실하게 지평을 넓힌 듯한 느낌이다. 일제감점기 시절부터 일본인들이 보성고비끼라고 해 명성을 유지해 오던 그 동안의 유명세를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긴 분청사기 가마터가 두 곳 밖에 알려져 있지 않은 보성 도촌리에 비해 고흥 운대리는 20여 곳이 넘는데다 해무리굽이 보이는 초기 청자 요지마저 서너 곳이 있다 보니 규모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고흥 운대리는 이처럼 가마터가 대량으로 운집해 있다 보니 출토되는 종류도 상감 인화 박지 조화 덤벙 귀얄 등 모두를 망라하고 있어 분청의 전시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따라서 분청덤벙도 귀하고 더구나 덤벙에 철화가 들어간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보기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흥 운대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이야기 할 때 이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분청귀얄문잔편은 고흥 운대리 산으로 근래 구입한 것이다, 운대리산 도편들을 더러 갖고 있지만 이것을 새로 구입한 것은 크기가 작은 잔인데다 깔끔한 편이어서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작은 굽에는 다섯 곳에 내화토 받침이 있으며 분은 입술 바로 아래 까지만 칠해져 있고 나머지 부분은 물레자국이 선명한 가운데 청자를 보는 듯이 녹청색을 띠고 있다. 안쪽 전체에는 귀얄을 시문하고 있는데 두껍게 칠을 하다 보니 얼뜻 보면 마치 덤벙을 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저 중앙에는 내화토 받침 흔적이 굽과 마찬 가지로 다섯 곳에서 보이고 있으며 입술 주변으로는 분 탈락 흔적도 보인다. 이 분청귀얄문잔편은 안과 밖을 함께 살펴보아야 제 맛이 나는데 따로따로 감상을 할 경우 이와는 적잖게 느낌이 감소되고 있는 듯싶어 아쉬움이 남는다. 고흥 운대리는 80년대에 당일치기로 서너 번을 찾아보았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아도 아득하다. 강남 터미널에서 첫 번째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에서 버스로 갈아 탄 후 고흥에서 택시를 대절해 들어갔다가 되짚어 서울 집으로 돌아오면 자정 가까운 시간, 가마터를 돌아볼 시간이라고는 고작 두 서너 시간 남짓이었다. 무엇에 미쳐서 무엇에 홀려서 그처럼 그 멀고 먼 길을 뛰어다녔던 것일까. 젊음이 차고 넘치던 열정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득한 세월을 건너 뛰어 저수지 인근의 오솔길들이 눈에 선하다. 가을이면 마른 풀을 흔들고 가던 바람소리도 귓가에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듯이 고요하고 적막하고 그래서 더욱 정겹기만 하던 고흥 운대리이건만 풍문에는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마터 발굴과 박물관 건립은 쌍수를 들어 환영해야 할 마땅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니 이를 어쩌면 좋으랴. TV 뉴스를 통해 본 것이어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야기는 이렇다. 운대리 분청사기박물관에서는 전시를 위해 수십억 원을 들여 중국도자기 수백 점을 사들였는지 임대를 했는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것이 모두 가짜로 판명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물관에서는 무슨 허점이 있는지 반납도 쉽지 않아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보고 느끼는 것은 그 무모함과 황당함이다. 앞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고흥 운대리에는 가마터도 많고 따라서 이곳에서 출토되는 도편들만 해도 박물관 전시실을 채우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분청사기들을 사들이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분청사기박물관에서 엉뚱하게도 중국 도자기가 필요한 것이었을까. 나로서는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분청사기 박물관과 중국도자라니. 이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립고 아득하기만 한 고흥 운대리가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가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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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4)<br>북해도아리랑팔월이라 열사흘 밤달도 밝구나 우리 낭군 안계셔서 방아를 찧네 아리아리랑 아라리요 햇살은 찧어서 무엇 하나 감상 *햇살: 햅쌀 북해도(北海島)는 일본 최북단에 있는 일본 열도에서 2번째로 큰 섬이다. 일본명은 홋카이도로서 삿포로가 주도이고 옛 이름은 에조지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 개발되어 1869년부터 홋카이도라 불렀다. 우리 동포들은 생계를 잇기 위해 홋카이도 탄광까지 갔다. 타향살이는 어디서든 고단하고 언제나 외롭다. 석탄을 캐며 고향을 그리던 그 당시 삶도 다르지 않았을 터. 북해도로 돈 벌러 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은 스산하다. 달이 밝을수록 잠은 아니 오고, 일어나 부질없는 햅쌀방아를 찧는다. 이렇게라도 달래야 했던 그 허전함이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훑는다. 고체로 눌러 썼다. * 이 노래는 ‘방아 찧는 색시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홍난파가 곡을 붙여 최명수·이경숙·서금영이 불렀다. 1931년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발매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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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92)<br>황경애 명무의 이매방류 살풀이춤 춤사위이매방류 살풀이춤 국가무형유산 '살풀이춤'은 맺고 풀어냄이 기본이 되면서 춤사위 하나하나 손끝에서 발끝까지 에너지가 표출된다. 동작의 연결은 전혀 무리가 없는 자연스러운 음직임과 대삼소삼의 구분이 분명하다. 또한 살풀이춤은 고고한 개성의 청아한 멋과 정중동의 유려함이 살아 숨쉬는 춤이다. 황경애 국가유산 '살풀이춤' 이수자 (사)우봉춤보존회 이사 (사)마리소리음악연구원 사무국장 어울사랑예술단 예술감독 황경애의 전통춤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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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br> 노동은의 ‘잘못된 조건’ 둘, ‘교묘한 조작’윤치호 작사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한 원천이 좌파 학자의 ‘공동창작설’이다. 이의 주인공이 근대음악학자 노동은 교수이다. 소위 친일음악 연구 전공자로서 나름의 실적을 쌓은 교수이다. 30년간의 윤치호 작사 사실을 발목 잡은 노동은 교수의 ‘공동작사설’을 살펴보기로 한다. 학자적 권위나 진영의 논리로 ‘추정’을 단정적인 ‘사실’로 내세우는 것은 학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학술 분야에서 존재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애국가 분야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니 말이다. 논쟁적일 수 없는 작사자 문제를 마치 자신만이 해결한 것처럼 과신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권위의식과 진영논리로 매몰된 결과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역사학자(?) 신용하와 음악학자 노동은의 애국가 작사자 관련 글이다. 노동은 교수의 경우도 친일음악론 분야의 권위의식과 소위 좌파 지식인으로서의 진영논리에서 윤치호 작사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글이다. 이 때문에 안창호를 작사자로 내세우지도 못하면서 어정쩡하게 ‘한민족 구성원의 공동합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소위 ‘공동합작설’을 주장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사료를 조작하기까지 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노동은의 글은 좌파계열 애국가 폐지론자들과 친일 거두로 수식하는 반(反)윤치호론자들이 필수적으로 인용하는 글이다. 계간 <역사비평> 1994년 25호에 발표한 ‘애국가 가사는 언제, 누가 지었나’이다. 금년으로 30년간 인용되어 온 이 글에서 조작 부분은 단 한 단어 ‘지어’라는 동사를 끼워 넣은 것이고, 현 애국가의 출현 시기를 근거도 없이 1905년으로 단정한 사실이다. 전자는 ‘무궁화노래’ 정보의 첫 보도인 독립신문 1897년 8월 17일 자 조선개국 505주년 기념행사나, 두 번째 보도인 1899년 6월 29일자 배재학당 방학례식 행사 기사에 없는 말을 지어 넣은 것이다. 즉, 노 교수는 "배재학당 학도들이 ‘무궁화노래’를 불렀다”를 "배재학당 학도들이 ”지어 부른 무궁화노래"라고 하여 ‘지어’를 조작한 것이다. 후자는 현 애국가를 수록한 <찬미가>의 초판 발행 연도를 1905년으로 단정하였다. 이는 어떤 기록에도 없는 년도이다. 이렇게 ‘잘못된 조건’의 가설(假設)인 ‘교묘한 조작’은 이후 관련 기록의 전후 맥락을 왜곡시키는 것은 물론, 작사자를 밝혀 특정하는 것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데 기여했다. 이제 노동은 교수가 전개한 논지를 순차적으로 인용하여 조작과 그 실익을 확인하기로 한다. 첫 번째 대목은 독립신문(제4권 146호) 6월 29일 자에서 인용했다며 제시한 다음의 내용이다. #1 "배재학당 학도들은 이를 반증이나 하듯이 ‘무궁화노래’를 지어 그때까지의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종합하여 점차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9년에 ‘지어 부른 무궁화노래’가 그것이다." 一 성장신손 오백년은 우리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난 우리 본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후렴) 二 충군하는 일편단심 북악같이 높고 애국하는 열심의기 동해같이 깊어 三 천만인 오직 한마음 나라 사랑하여 사농공상 귀천없이 직분만 다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 분명히 배재학당 학도들이 "무궁화노래를 지어~”라고 하고 그 4절 가사를 제시했다. 결국 이 4절의 무궁화노래는 배재학당 학도들이 작사했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정작 독립신문 해당 기사에는 "모든 학원이 무궁화 노래하고”라고 기록했을 뿐 ‘지어’라는 말은 없다. 이는 노동은 교수가 이 말을 지어 넣음으로써 4절의 무궁화노래를 배재학당 학도들이 작사자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궁화노래의 작사자는 규명된 것이 된다. 이는 명백한 조작이다. 이 결과는 1899년 6월 29일 이전과 이후의 ‘무궁화노래’ 작사자를 배재학당 학도로 알게 하고, 그 원작이 위의 4절 가사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다음과 같이 전개 시켰다. #2 "1897년 8월 17일 자 독립신문의 ‘대죠선 개국 오백 오회 긔원절’ 기사에 나타난 ‘무궁화노래’와 서로 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다. 즉, -우리나라 우리 임금 황텬이 도우사/임군과 백성이 한가지로/만만세를 길거하야 태평독립하세-처럼 1897년의 ‘무궁화노래’가 1899년의 그것과 가사는 다를지언정 ‘무궁화노래 식 애국가’와 같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그 시대인들이 암묵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어지고 있었으니, 일종의 ‘공동창작 가사’인 셈이다.” 대단한 모순이다. 1899년 배재학당 방학 예식에서 부른 무궁화노래 4절이 배재학당 학우들의 작이라 해놓고서는, 2년 앞선 조선 개국 505주년 김념식에서 부른 노래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 가사 일부는 "우리나라 우리임금 황텬이 도우사/임군과 백성이 한가지로 만만세를 길거하야 태평독립하세”이다. 이는 배재학당 방학식에서 부른 ‘무궁화노래’ 四절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천이 도으사/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이다.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두 자료가 각기 다른 가사라고 전제했을 때만 가능한 표현이다. 그런데 의미가 상통하고 ‘길거하야(즐거워하야)’라는 동사 하나가 더 들어갔을 정도인데, 이를 다른 노래로 봐야 하는가? 억지일 뿐이다. 신문 기사에서 가사 일부를 인용할 때 노래 자체를 기사화 할 때와 단순한 인용일 때는 다르게 취급할 수 있다. 조선 개국 505회 기원절 행사를 소개는 과정에서 노래 일부 가사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미 중심으로 인용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동사 하나의 출입이 있다고 해서 다른 노래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못한 편협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이런 모순을 저지른 것은 두 노래의 작사자를 구분하기 어려워 ‘공동창작 가사’라고 하기 위한 것이다. #1에서 명시적으로 ‘배재학당 학도들이 지어 부른 노래’라고 해놓고도, 영향을 받았으니 ‘공동창작’이란 주장은 자기모순이다. 이언 모순적 결론을 내린 이유는 곧 현 애국가의 작사자 문제까지 적용하기 위해서이다. 즉, 노교수는 현 애국가가 수록된 <찬미가>의 출판연도를 조작하고, 역술(譯述)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작사자를 특정할 수 없게 한 것인데, 그래야만 현 애국가는 ‘공동창작’이라는 최종 목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3 "1905년 ‘찬미가’에 나오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등이 윤치호의 작사설로 지금까지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역술(譯述)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황상 폐하’ ‘승자신손 천만년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세 작품의 가사는 윤치호가 ‘감수하여 옮겼다’라는 뜻을 가진 역술일 것이다. 이것은 이미 앞서 살펴보았듯이 배재학당 학도들이 1899년에 지은 ‘무궁화노래’가 다름 아닌 윤치호 역술의 ‘승자신손 천만년은’이 되었기 때문이다.” <찬미가>에 수록된 총 15편 중에는 3편의 애국적 찬미가가 있다. 각 장을 달리하여 기능과 작사 순서대로 배치하고, 곡명, 곡조를 지정하고 가사 4절을 수록했다. ‘공동창작 가사’라고 규정한 ‘무궁화노래’는 물론 현 애국가가 수록된 출판물이다. #3에서 언급한 제10장과 14장, 그리고 현 애국가는 다음과 같이 표기되었다. 제1장은 ‘KOREA TUNE: AMERICA 664, 646 뎨一’(우리황상 폐하 천지일월 같이) 제10장은 Patriotic Hymn NO 1, TUNE: AULD LANG SIGN, 뎨十(성장신손 천만년은) 제14장은 Patriotic Hymn, TUNE: AULD LANG SIGN, 뎨十四(동해물과 백두산이) 제1장 ‘KOREA’는 당시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의 국가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관례대로 ‘대한제국 국가’이고, 제10장 ‘Patriotic Hymn NO 1’은 애국적 찬미가로 같은 곡명, 같은 곡조로 쓰지만 첫 번째 작품임을 표기한 것이고, 제14장 ‘Patriotic Hymn’은 제10장과 같은 곡명, 같은 곡조를 쓰는 두 번째 작품임을 표기한 것이다. 이렇게 국가(國歌) 기능의 ‘KOREA’는 미국 국가의 곡조를 쓴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10장이 14장보다 앞서 작사한 작품이라고 표기하고 그 곡조는 같은 ‘올드랭 사인’이라고 한 것이다. 이를 수록한 <찬미가> 판권에는 1908년 재판이며, 광학서포에서 발행했고, 윤치호가 역술 했다고 밝혔다. 주목되는 제10장 즉, ‘무궁화노래’와 후렴이 같은 현 애국가가 이 <찬미가>에서 처음 출현한다는 점이다. 바로 노동은 교수는 동일 후렴을 쓰는 노래라는 단서를 강조하여 현 애국가에도 앞에서 주장한 ‘공동작사설’을 적용하였다. 그래서 <찬미가>의 발행 연도를 1905년이라고 규정하여 현 애국가의 작사 시점을 최소한 1905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찬미가>의 발행 연도를 1905년으로 기록한 자료는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장하는 노교수의 노림수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윤치호가 1907년 작사했음을 밝힌 자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무력화시키려는 데 있었다. 부연하면, 현 애국가가 1905년에 이미 인쇄되어 나왔음으로 2년 후인 1907년에 자신이 지었다고 밝힌 <가사지>는 위작(僞作)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한 복선(伏線)인 것이다. ‘윤치호 역술’을 ‘윤치호가 감수하여 옮겼다’라고 규정한 것도 의도적인 해석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애국적 찬미가 3편을 수록한 <찬미가> 재판 판권에는 ‘1908년’이라고 되어있다. 초판의 실물이 발굴되지 않아 그 발행 연도와 현 애국가의 수록 여부는 단정할 수 없는 처지이다. 초판의 실물이 발굴되지 않는 것은 일제의 탄압으로 압수되었고, 여기에 소장자 스스로가 검속을 피하고자 멸실시켜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본다. 이러한 처지에서 필자는 초판 <찬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왔다. 첫째 출판연도는 1906년 말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윤치호가 기존 2편의 작품에서 새로운 작품 하나를 더 발표하게 되는 계기가 1906년 10월의 한영서원(韓英書院) 개교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14명의 첫 입학생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정식 인쇄본이기보다는 소량의 인쇄본으로 발행하였다고 본다. 둘째 초판에는 현 애국가(재판 제14장)가 수록되지 않았고 본다. 이유는 1945년 작고 직전 윤치호가 남긴 자필 <가사지>에 "一九0七 尹致昊 作”이라고 한 사실에서 아직 작사 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셋째는 역술(譯述)에 대한 해석이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일부 번역과 일부 지음이라는 합성어”이다. 근대 출판에서 역술은 특정 대상 문헌에 대한 번역과는 달리 여러 문헌을 모아 편역하거나 역술자의 견해가 포함된 저술 활동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찬미가 12편은 번역하고, 3편 애국적 찬미가는 창작한 것이니 이를 아우르는 용어로는 역술이 적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찬미가>의 형태상 오늘의 상황에서도 유용한 용어이다. 그런데 노교수는 역술을 "세 작품의 가사는 윤치호가 ‘감수하여 옮겼다’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달리 말하면 윤치호는 누가 지은 지 모르는 애국가류 3편을 감수하여 <찬미가>에 옮겨 출판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근거, 누구의 어떤 것을 감수했고, 어디에 있는 것을 옮겼다는 것인지를 밝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그래서 억지 주장인 것이다. 윤치호의 신앙심이나 번역 능력이나 창작 능력을 무시한 태도이다. 결국 번역의 ‘譯’과 ‘지은’이란 ‘述’의 합성임을 무시한 태도는 저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역술 한 <찬미가>에 수록된 작품들을 단지 감수하고 옮겨 수록했을 뿐이라고 해 놓음으로써 현 애국가의 ‘공동창작설’에 부합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이런 사실에서 <찬미가> 초판 발행연도를 1905년으로 단정하고, 역술의 편협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결과는 윤치호 작사 사실을 밝힌 자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다. 부연하면, 1905년에 이미 인쇄되어 나왔으니 2년 후인 1907년에 자신이 지었다고 밝힌 <가사지>는 위작(僞作)이라는 복선(伏線)을 깐 것이다. #4 "배재학당 학도들이 지은 ‘무궁화노래’가 1905년 제목 없이 ‘승자신손 천만년은’이라는 찬송가로서 전환하였을지라도 그 가사들은 윤치호작이 아님을 분명하게 한다. 이 사실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역시 그 시대인들이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과제 앞에서 ‘기독교적 신앙고백’으로 합동작품화한 찬미가이자 애국가류 노래임을 말한다.” 이 대목에서는 윤치호를 직접 호출하였다. "그 가사들은 윤치호작이 아님을 분명하게 한다”는 1899년 배재학당 학도들이 지어 부른 것이란 조작에 의한 주장이고, 현 애국가는 감수하여 옮긴 <찬미가>에 수록된 것이니 윤치호와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를 단호히 ‘분명하게’ 주장했다. 단연히 작사자는 특정할 수 없고 동시대 기독교적 신앙고백에 의한 합동작품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다음의 마지막 대목에서도 ‘무궁화노래’와 현 애국가는 특정 작사자가 없는 합동작품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전개하고 있다. #5 "애국가의 작사자가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현행 ‘애국가’가 1890년 자주적인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과제를 두고 ‘애국가 부르기 운동과 애국가 제정운동’을 전개하면서 한반도 민족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여 공동창작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창작 과정에서 윤치호나 안창호 그 밖의 인사들이 자기 이름으로 ‘차용·편찬·발행’ 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현행 ‘애국가’ 작사자는 한민족 구성원의 공동합의 작품이라 봐야 한다.” 이 대목에서는 안창호까지 소환했다. 윤치호는 <찬미가>와 관계가 있지만 안창호는 아마도 <안창호본 독립운동노래집>의 소장자임으로 호명한 듯하다. 만일 두 사람을 같은 기준에서 ‘무궁화노래’나 ‘국가-나라를 위하는 노래’를 차용하고, 편찬하고, 발행한 인물이라고 인식했다면 이것도 큰 오류이다. 안창호는 1908년 첫 노래 ‘어야지야 어서가자’를 부르기 이전에는 시가를 지은 기록이 없다. 때문에 1908년 이전 시기의 애국가류 작사자로는 언급될 여지가 없다는 사실에서다. 이상에서 노동은 교수가 쓴 ‘애국가 가사는 언제, 누가 지었나’에서 작사와 작사자를 언급한 대목만을 짚어 보았다. 결정적으로 노동은 교수는 1899년 6월 29일 자 배재학당 방학 예식에서 부른 ‘무궁화노래’ 가사 4절을 베재학당 학우들이 ‘지어 부른 무궁화노래’라고 했다. 여기서 ‘지어’라는 동사는 이 자료의 원전(原典)인 독립신문 기사에도 없는 조작의 결과이다. 그 결과는 첫째, ‘무궁화노래’의 작사자는 배재학당 학우이다. 둘째, 1905년 초판과 1908년 재판 <찬미가>에 수록한 것은 역술자 윤치호가 감수하여 옮긴 결과다. 셋째, ‘무궁화노래’와 같은 후렴을 쓰고(차용), <찬미가> 14장으로 수록한 현 애국가도 작사자를 특정할 수 없게 했다. 대단한 해악이다. 결론은 윤치호는 작사자가 아니고 다만 차용하고, 편찬하고, 발행한 한 사람으로 안창호와 함께 공동창작자이다. 이는 좌파 국회의원 안민석 의원에게 ‘윤치호와 안창호 합작’으로 주장하게 하기도 했고, 윤치호는 단독 작사자기 아니라는 주장의 배경이 되었다.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윤치호 작사 사실을 부정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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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82 <br>‘국악의 날’ 지정을 위한 제언(9) - “악학궤범은 새로운 가치 창출”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한류문화 칼럼니스트) 그동안 "시용향악보”의 ‘오음약보’와 ‘정간보’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 계속해서 고려가요의 음악적 특징으로 나타난 ‘하강종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겠다. ‘하강종지’에서 ‘하강(下降)’이라는 의미는 높은 음에서 2~3개의 음을 아래쪽으로 연결하는 형태를 말하며, ‘종지(終止)’는 악곡을 끝마치게 하는 형태를 말한다. 따라서 ‘하강종지’는 높은음이나 중간음에서 2~3개의 음을 아래로 연결하여 악곡을 끝맺음한다. 이런 식으로 음악이 끝맺음하는 형태를 종지형(終止形, cadence)라고 부른다. cadence(케이던스)의 사전적 의미는 억양, 리듬, 운율이라고 하는데 음악적 용어로는 종지형을 ‘cadence’라고 표현한다. 국악의 종지형에는, (1) 계단식 하강 종지형 (2) 4도(5도)하강 종지형 (3) 상행 종지형 (4) 주음으로 시작해서 주음으로 끝나는 종지 등이 있다. 위의 4가지 종지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다. (1) 계단식 하강 종지형은 위에서 설명한대로 높은음에서 2~3개의 음을 아래 쪽으로 연결하여 악곡을 끝마치는 종지를 말한다. (2) 4도(5도)하강 종지형은 위의 ‘솔’음이나 ‘파’음에서 다른 음을 거치지 않고 바로 주음인 ‘도’음으로 떨어져서 끝마치는 종지를 말한다. (3) 상행 종지형은 아래의 ‘솔’음이나 ‘라’음, 즉 3도, 혹은 4도 아래 음에서 위의 주음인 ‘도’로 껑충 뛰어서 끝마치는 종지를 말한다. (4) 주음으로 시작해서 주음으로 끝나는 종지형은 의식음악이나 제례음악 등 주로 잔잔한 음악의 종지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종지법이다. 대표적으로, (1) 계단식 하강 종지형에 해당하는 곡들을 살펴보면, 앞에서 언급한대로, 고려가요 중 "시용향악보”에 수록된 ‘귀호곡’ ‘유구곡’ ‘사모곡’ ‘서경별곡’ ‘청산별곡’ 등이 있다. 그리고, (2) 4도(5도)하강 종지형과 관련한 곡들은 주로 ‘시조’가 이에 해당된다. 지금까지 ‘하강종지’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굳이 ‘하강종지’에 대해서 설명한 이유는 삼국시대의 신라향가와 백제가요가 고려가요의 이름으로 최초의 정간보인 "시용향악보”에 수록되었는데, 그 음악적 특징 중의 하나가 ‘하강종지’이기 때문이다. 이 ‘하강종지’는 ‘어사용 토리’에서 ‘메나리 토리’로 진화하여 노래 불려지는 오늘날의 경기민요와 서도민요 중에서 그 특징적 요소가 나타난다. 경기민요와 서도민요 중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요소는 위에서 설명한 (1)번의 ‘계단식 하강종지형’이다. 그 종지형태의 계명은 ‘라솔미’, ‘미래도’, ‘도라솔’이다. 그렇다면, 지난 회에서 "시용향악보”에 수록된 ‘귀호곡(가시리)’의 정간보에 대해 설명을 했는데, 그 ‘귀호곡(가시리)’을 알아보기 쉽게 오선보로 고쳐서 ’하강종지‘를 확인해 보겠다. 위의 악보에서 마지막 마디는 계명으로 ‘도 라 솔’로 표기되어 있다. ‘하강종지’로서 ‘계단식 하강종지형’인 것이다. 삼국시대를 거쳐서 고려가요의 음악적 특징으로 정착된 ‘어사용 토리(調)’는 현재의 ‘메나리 토리(調)’로 진화하여 경기민요와 서도민요 중의 특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서 ‘하강종지’에 대한 설명을 마치겠다. 지금까지 ‘국악의 날 지정을 위한 제언’을 9회에 걸쳐서 장황하게 제안하였다. 그 제안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글날’을 훈민정음이 반포된 날로 정했듯이, ‘국악의 날’을 악학궤범이 반포된 날로 정하자는 것이다. ‘악학궤범’은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구전하여 오던 민속음악 중 명곡들을 수록하였다. 그야말로 ‘악학궤범’은 새로운 가치 창출을 한 것이다. 악학궤범 서문에 "성현이 1493년 8월 상한에 서문을 작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1493년 상한의 마지막 날인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양력으로 9월 29일이 된다. 9월 29일을 ‘국악의 날’로 정하자는 것이다. ‘한글날’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정했다. 이것이 ‘국악의 날’의 날짜를 정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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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6)<br> 이희문·송가인·이날치밴드 공연, 신명나는 민요 현장민요의 현장 논밭에서 일하면서 부르던 노동요 그 현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희문, 또 여타 실험들에서 민요가 면면히 살아 있을을 확인한다 굿판·노동판·유희판 배경이 달라지고 노래의 양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경기소리는 이희문에게 보존해야 할, 혹은 발전시켜야 할 그 무엇으로서 가창자에게 의무와 당위를 부과하는 억압 기제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 성악의 음악적 텍스트는 '만들어진 전통'이 빚어낸 페르소나(persona)를 벗고, 원형으로서의 경기소리와 그 텍스트가 꽃핀 문화와 물적 토대, 환경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를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이행대상(transitional object)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지난 6월 24일 한국민요학회 제75차 정기학술대회, 이소영 교수(명지병원예술치유센터)가 발표한 '민요의 공연예술화에 대한 비평적 고찰-이희문의 경기소리를 중심으로'의 한 대목이다. 이소영은 이 발표에서 이희문의 획기적이고 도발적인 실험들이 역설적으로 경기소리라는 민요의 원형적 양식을 재구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내가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을 진행하였기에, 뒷풀이라고나 할까, 의미심장한 몇 풍경을 소환하여 공부자료로 삼는다. BTS보다 더 먼저 해외 진출에 성공했던 사례가 '이희문과 씽씽'이다. 나도 오래전 이 영상을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전통적인 음악 양식을 유지하면서도 복식이나 배경음악 등 파격적인 연출을 통해 전혀 다른 양상의 장르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같은 도발적 실험들은 이날치밴드, 잠비아니, 악단광칠 등을 필두로 주로 판소리계열 전공자들에 의해 실행 중이다. 민요를 포함한 판소리 전공자들이 트로트나 일련의 실험적인 장르 개척에 나서는 현상은 이제 낯설지 않다. '국악의 르네상스'다. 나도 일찍이 수차례 송가인 신드롬을 분석했다. 베이비부머세대의 은퇴로 대변되는 사회문화사적 현상, 특히 국악이니 민요니 우리 것이니 따위의 복고적 환기 현상에 주목했다. 전통이라고 해서 과거를 다루는 것이 아니요 복고라 해서 퇴행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민요의 현장은 어디인가? 이런저런 현상을 통칭하는 용어로 흔히 컨템퍼러리(contemporary)를 든다. 전통이나 기왕의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대의 감각이나 의미로 포착해내는 일련의 행위라는 함의를 지닌 용어다. 어디 음악뿐이겠는가. 한자말은 다르지만 전해서(傳) 통하는(通) 것이 전통(傳統)이라는 저간의 내 주장을 복기해둔다. 전해서 통하지 않는 것은 인습(因習)이고 장차 폐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무당굿으로 알려진 장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동시대는 물론 관련 공동체와 교섭하면서 재구성되어 온 시대적 산물일 뿐이다. 문화 자체가 늘 현대적 변용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이희문의 사례뿐 아니라 몇 가지의 논의들이 중첩되었다. 관련 언급은 차후 기회를 엿보기로 한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전체주제였던 '민요의 현장'이 과연 어디일 것인가였다. 예컨대 논밭에서 일하면서 부르던 노동요의 현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희문의 사례에서 또 여타의 실험들에서 민요가 면면히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굿판과 노동판과 유희판의 배경이 달라지고 노래의 양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심지어 나는 송가인의 트로트를 '남도트로트'로 명명하고 전통이라는 틀 속에서 분석하고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민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지난 내 칼럼에서 여러 차례 다루었기 때문에, 두루두루 참고 가능할 것이다. 노동요의 현장과 이희문의 무대 현장, 여전히 문제는 장르나 양식에 대한 고정관념 혹은 분과학문이라는 틀거리에 대한 편협한 진단에 있다. '무대민요'와 '극장민요'를 넘어 민요의 현장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기억된 현장과 사람들에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 시기 포착했던 기억된 과거만이 민요의 정체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토론을 통해 내가 제안했던 몇 가지를 민요연구의 공론장에 제물로 내놓는다.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품한 민요라거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민요 등은 일종의 무대민요 혹은 박물관민요다. 논밭에 나가 일하는 형식을 취한다더라도 야외무대라는 맥락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기획, 연출, 안무, 소품들이 마련될 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배치, 역할, 무대장치, 조명, 복식 등이 면밀하게 구성된다는 점에서 극장민요다. 미장센을 치밀하게 구성한다는 점, 전통 혹은 원형 따위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연극이라는 점에서 이런 호명을 붙일 수 있다. '극장민요'라는 언설은 기어츠가 창안한 극장국가라는 개념에서 내가 따온 말이다. 19세기 인도네시아 제의정치와 권력구조를 정의한 것인데, 근자에는 북한을 수식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민요는 본래적 배경(context)이 거세되었다. 총체적이지 않다. 문화재 지정이나 전통 발굴을 목적 삼았던 기왕의 민속예술제 따위의 민요는 그것이 갖는 전통적인 양식 예컨대 선율이나 장단 따위의 음악, 노랫말이나 문학적 형식 따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다. 박물관이나 극장에 전시된 혹은 실행되는 민요의 의미가 제한적이다. 그렇다고 기획되고 연출된 장르를 폄하하며 이른바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언설로 그 가치를 훼손시킬 필요는 없다. 단지 이것을 총체적 의미를 지닌 것처럼 여기거나, 컨텍스트적 맥락을 요구하는 것을 비판할 뿐이다. 오히려 변화된 현장을 주목하고 재구성된 장르 속에서 원형적인 것을 추적하는 일이 긴요하다. 문화재라는 용어를 문화유산이라는 용어로 바꾸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책의 절반 이상을 민요(風謠)로 수록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살폈던 <시경>을 여전히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희문과 송가인, 이날치밴드나 악단광칠이 노래하는 곳이 현장이다. 민요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근대의 남상기를 기점 삼는 민중성에 대한 주목, 예컨대 민족, 민속, 민예, 민화, 민요 따위의 개념에 충실했던 일정한 시기를 이미 지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시선은 분출했던 시대적 수요에 대한 향수, 그때 누군가 정해두었던 그 지점에 머무르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근래 교과서에서 국악을 없앤다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다행히 무마된 것같다. 하지만 극장민요와 현장을 혼동하는 착종된 시각이라면, 여전히 잠자는 파도일 뿐이다. 이렇게 질문해본다. 동요를 잃어버린 어린이들의 문제를 의제화하고 우리 사회에 피드백시켰는가? 도대체 그 많던 '어린이'들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패미니즘 등으로 고군분투해온 여성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다루고 그들의 행로에 동행했는가? 혹은 비판했는가? 민요 장르는 사실 남성보다는 여성의 지분이 압도적이고 주도적임을 주목하라. 북한민요가 이미 상당하게 입수되어 있는데, 이를 소재 삼아 남북갈등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그것이 우리 사회를 재건하거나 치유하는 데 피드백되었는가? 민요를 대체하는 실천적 현장에 대해 주목하거나 의제 삼았는가 따위의 질문 말이다. 교과서에서 국악을 뺀다니 화들짝 놀라는 안이함을 나부터 반성한다. 우리 민요 혹은 국악이 지금, 여기, 우리, 특히 다음 세대에 어떻게 기능하고 피드백되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전통을 연구하거나 가르치는 자들의 책무를 아는가.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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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45)<br> 분청철화어문병편쏘가리 문양은 문양인데 이규진(편고재 주인) 생선회 중에서 비싸기로 말하자면 쏘가리회를 배놓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런 탓인지 나이가 들도록 그동안 한 번도 시식을 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여름 지인의 지인되는 분의 안내로 난생 처음 바로 그 유명한 쏘가리회를 먹어 볼 기회가 있었다. 충주에서 단양 쪽으로 가다 남한강 강변에 위치한 어느 민가였는데 간판도 없는 곳이었지만 쏘가리 전문점으로는 너무도 유명한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 곳에서 맛본 쏘가리회와 매운탕의 맛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특히 회는 비린내도 나지 않고 꼬들꼬들해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쏘가리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계룡산 분청철화중에는 물고기 문양이 더러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단연코 쏘가리 문양이라고 할 수 있다. 몇 줄의 날카로운 선으로 그려내는 쏘가리 문양은 그야말로 극대화 된 추상무늬의 대표를 보는 듯한 느낌인 것이다. 쏘가리는 한자로 궐어(鱖魚)라고 하는데 궐(鱖)자가 대궐의 궐(闕)자와 음이 같아 잉어와 마찬 가지로 출세 또는 고귀한 신분에 대한 꿈과 바람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상징적 문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신동국여지승람>에는 공주목 특산으로 쏘가리를 기록하고 있어 계룡산 분청철화에 쏘가리 문양이 보이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늘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나는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 도편을 꽤 여러 점 갖고 있다. 청자도 있고 분청도 있고 백자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계룡산 분청철화 중에서도 쏘가리 문양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무언가 화룡점정 중에서도 눈알이 빠진 듯한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근래 계룡산 분청철화에 쏘가리 문양아 들어간 도편을 한 점 구했다. 와, 그렇다고 하면 평소의 한과 원을 푼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쏘가리 문양은 문양인데 온전치가 않은 것이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제대로 살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머리와 몸체는 없고 뒷지느러미와 꼬리 부분만 살아 있어 쏘가리 문양 자체로도 불완전품인 것이다. 하지만 두텁게 바른 백토 분장이며 먹빛에 가까운 쏘가리 문양이며 조각이 난 병편이라고는 하지만 온전했을 당시의 정취랄까 여운을 느끼기에는 충분해 아쉬운 대로 감사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을 듯싶기도 하다. 계룡산 분청철화 쏘가리 문양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무더운 여름날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민가에 앉아 쏘가리회와 매운탕으로 입맛을 다시던 일이 어제 일 같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당시 그런 호사를 누리게 해주었던 지인의 지인이 되는 분을 그 후 한번도 뵙지를 못해 지금까지도 여간 미안한 것이 아니다. 서울의 어느 맛집에 앉아 회포라도 풀며 지난번에 있었던 배려와 고마움을 되갚을 기회가 있어야 할텐데 그런 기회가 졸연히 없을 것 같아 이 또한 숙제 중의 숙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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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91)<br> 춤꾼 한지윤의 '전통굿거리춤' 춤사위전통굿거리춤 진주교방춤의 춤맥을 이어온 예인 김수악의 예술혼을 담고자 시작된 전통굿거리춤은 굿거리장단에 맨손춤과 자진굿거리장단의 수건춤으로 구성된다. 김수악의 구음 원본을 그대로 사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후 송화영에 의해 김수악 교방춤 양식체계를 갖춘 춤사위와 움직임을 기반으로 무대화되고, 김은희에 의해 체계화 되는 과정에서, 재해석되어 예술적 체계를 확립하여 전통춤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완성하였다. . 김수악의 굿거리춤의 즉흥무를 송화영이 어깨 넘어 학습하였고, 이에 송화영이 김수악의 굿거리춤을 재구성하여 '기방굿거리춤' 또는 화문석 5장 입춤을 구성하였다. 송화영의 굿거리춤을 추었던 김은희가 송화영의 굿거리춤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여 현재의 전통굿거리춤으로 전승되고 있는 전통춤이다. 전통굿거리춤을 재구성한 김은희는 춤 구성에서 구음과 춤사위의 조화로움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1986년 송화영이 재구성하여 송화영의 공연에 김은희의 찬조출연으로 '진주굿거리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고 이후 김수악이 직접 '전통굿거리춤'이라고 제목을 지어주었다. 현재 김은희 재구성으로 작품이 전수, 보존되고 있다. 전통굿거리춤의 반주 음악인 김수악 소리의 선경춘풍 음악과 춤사위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춤의 내면과 외면의 구성은 김수악이 표현하는 구음의 고저와 울림의 운영체계와 춤사위를 함께 하여 전통굿거리춤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전통굿거리춤의 춤사위는 정(靜)·중(重)·동(動), 동(動)·중(重)·정(靜)의 전통춤의 움직임 양상을 가지며 단전의 호흡을 시작으로 하체 움직임으로 끌어올린 호흡은 상체 움직임으로 확장되어 연계되어 움직이는 순환적 구조를 갖는다. 참고:한지윤의 "전통굿거리춤의 춤사위 분석 연구"한양대석사논문(2023년) 한지윤 단국대학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 국가무형문화재 태평무 전수자 전남무형문화재 진도북놀이 전수자 (사)대한문화예술진흥협회 사무국장 및 상임이사 (사)한국전통춤협회 이사 2023년 제9회 불교무용제전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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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3)<br>강원도아리랑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얼씨구 노다노다 가세. 십오야 뜬 달이 왜 이리 밝아 산란한 이 마음 달랠 길 없네. 풀벌레 구슬피 우는 밤에 다다미 소리도 처량쿠나. 아주까리 정자는 구경자리 살구나무 정자로 만나보세. 감상 아리랑에 대하여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아라리…’ 및 이들의 변이를 여음(후렴 또는 앞소리)으로 지니고 있는 일군(一群)의 민요로, 아리랑이라는 명칭은 이들 여음에서 비롯하고 있다. 아리랑은 남과 북에 고루 분포되어 있고, 국외 180여 개 동포사회에도 널리 향유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부른 '독립군아리랑'을 비롯하여 '연변아리랑' 등이 전승되어 오고, 멀리 소련시대 우즈베케스탄, 카자흐스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들의 '고려아리랑', 러시아 사할린 한인들의 '사할린아리랑'도 전해지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랫말에서 ‘십오야 밝은 달’과 ‘풀벌레 우는 밤’을 강조어로 뽑아 고체로 도드라지게 하고 후렴과 더불어 세 구절을 민체로 흘려 잇달아 썼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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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12) <BR> 극단 민족 제2회 공연 '목소리' (1971년)민족운동의 일환 극단 '민족은 발기취지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민족극 수립을 목표로 창단한 이래 단원 모두 민족극 이념을 체득하는데 경주해 왔다. 우리들은 우리의 좋은 연극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타개해 나가야 할 것인가? 먼저 그 어휘상의 개념을 정의한다든가, 희곡적 현실로부터 연극적 현실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연구되야 하고 나아가 연극 내용의 수용과 그 예술형식 창조의 상화(相和)에서 이루어져야 할 우리 나름대로의 연극예술의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향 모색의 행위는 하나의 사회문화운동이요, 민족운 동의 일환에서 부터 근본적으로 출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연극은 하나의 철저한 메디아(media) 예술로서 민중을 통한 생산의식에 그 목적과 의의가 있다고 보아진다. 민중과 함께, 민중으로 부터, 민중에 의한 민주적이며, 자율적인 풍요사상(豊饒思想)과 그 밑바탕을 일깨우고 그들의 염원을 승화하고 의지를 행동하고 있는, 이른바 민속극의 극예술 형식을 볼때 더욱 오늘의 '마당극'의 타당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마당극이라 함은 우리의 제반 전통극 속에 나타나는 극형식 (Theatricalism 사회이념 통념)을 생현(生現)하여 그 그릇 속에 오늘을 담고 마당, 거리, 학교 그 어느곳이던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유동성 있게 움직여 나가 관객과 같이 호흡하고 비판하면서 함께 즐기는 극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연히 상화(Ensemble)로 통하는 서사적 극법(敍事的 劇法=Epic drama)과 시사성(時事性)이 있는 내용과 유형화(類型化)된 사회계층적 인물들의 희화화(戱畵化)를 통한 풍자놀이 내지 투쟁 놀이의 성격을 띄게 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바깥 세계의 추세는 점차 프로쎄니움극장(Proscenium arch)으로부터 소극장으로, 언더그라운 드(Under ground) 연극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주입적이며 인도주의적 내용과 기승전결(起承轉)의 감상적 인 극법(Aristotle적)으로부터 지양하여 구체적 생활의 단면에 이르는 서사적이고 극히 비판적이며 참여적 극예술(Anti-Aristotle적)의 진보를 고무해가고 있다. 이러한 시민사회를 바탕으로 발전을 본 서구 극예술의 결실(추이)이 오늘날 이미 민주사회의 바탕과 함께 자연 타당성의 연극으로 생선된 우리의 마당극과 모든 면에서 그대로 조인트(Joint)되고 있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 속에 응혈져 있는 연극정신의 평등사상(平等思想)과 극예술 형식을 찾지 못하고 서구형식의 예술과 그 현대성만을 모방하는 안일하고 취향적인 우리 연극 현실에 마당극을 내놓으면서 극단 민족의 마당극에로의 발돋움이 사회진보를 위한 민중의 총회적 의지와 투쟁의 역사를 증언하고, 나아가 민족 광장에로의 점진적 기점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마당극 '목소리' 풀이 (1) 마당굿의 의의-이번 공연의 서두를 장식하는 남사당의 풍물놀이(농악)로 한바탕 마당굿을 하고 그 다음은 단원 모두가 나와 등거리 잠뱅이 바람으로 그간에 익힌 탈춤의 몇가지 사위로서 굿마당을 흥겹게 놀아 본 다음, 열기 어린 무대 위에 우리 목소리의 진상을 심각하게 풀어놓고 다함께 마당재판을 가져보자는 마당놀이, 우리 연극과 전혀 유리되어 있는 우리의 가락과 사위를 원래의 '굿놀이 속으로 불러드리는 마당극에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2) 어려운 점-극단 민족이 주체적으로 버리는 민족운동의 일환인 마당극 운동은 도시같은 조건하에서는 소극장 운동이라고 볼 수 있기에 보다 많은 뒷일이 요구된다. 때문에 마당극 씨리즈의 두번째가 되는 윤대성작 목소리는 조명과 효과등의 무대 위에서 극복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어디가든 가서 짐을 푸는 곳이 곧 무대가 되어야 할 자세와 훈련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3) 뜻 -첫번째 공연인 연암선생의 호질은 사회계층의 유형화된 인물(Typical personality) 과의 갈등이 빚어내는 민중의 꾸짖는 '소리'라고 보면 '목소리'는 한계상황까지 몰아 세우고 조여드는 소리들을 고발하며 절규하는 소리로 볼 수 있다. (4) 내용-'목소리'의 내용은 민속극에서처럼 세마당으로 나누어져 각 마당은 마당마다 서로 달리 현 사회의 단상을 그리고 있되 옴니버스(Omni-bus) 형식으로 되어 앙상블(Ensemble)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의 진정한 목소리가 한마당 한마당 지날 때마다 점점 그 맥을 잃어가고 있거나 빼앗겨가고 있는 혹독한 사회현실을 고발극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5) 줄거리-부모님의 강경한 고집과 현실주의적 아짐에 의해 성악(聲樂)을 포기하고 아나운서 인생을 선택한 김형서는 진정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빼앗기고 살벌한 황금주의와 기계와 같은 이기주의 물결에 휩쓸려버린 민중들과 그리고 마침내는 고도로 발달된 인간분석의 횡포적 도마 위에까지 끌려가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를 고발하고 스스로 끌려가 미쳐버리는 현실적 비극을 그리고 있다. (6) 연출-연출형식은 이러한 내용을 민속극에서 나타나는 고발음(첫 맹세 지꺼리)을 캐내고 일인이역 이상의 배역 (유형적 전달자)을 과감하게 처리하고 장치를 없애고 등 퇴장을 자유롭게하여 객석과 직결한 다음 효과의 공포성을 삽입시켰다. 더욱이 풀이 ①에서처럼 마당굿을 앞뒤에 넣어 강렬한 배합을 꾀하였다. ■「목소리」 공연은 검열관계로 공연되지 못했음. 출연자: 박순종, 백인철, 유경아, 최주봉, 오길주, 최명환, 이인영, 우윤자, 조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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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조선민요합창곡집 제1집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과가 1931년에 발행한 ‘朝鮮民謠合唱曲集 第一集은 ‘전통의 현재화’라는 문제의식을 최초로 실현한 악보집이다. 재래의 민요를 피아노 반주가 붙은 소프라노 독창과 여성3부 합창용으로 편곡한 일곱 곡을 수록하고 있다. 편곡은 당시 음악학과장이었던 메리 영 선교사(Mary Young, 美理英, 1880-1967)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기독교 지식인’ 안기영(Keui Young Ahn, 安基永, 1900-1980)이 담당했다. 이화여전의 민요 합창 프로젝트는 편곡, 공개 연주회 출연, 음반 발매, 악보집 출판 등으로 이어지며 식민지 양악계의 시선을 모았다. 이 연구에서는 메리 영과 안기영이 주도한 이 프로젝트를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다. 첫째, 프로젝트의 경과를 구체적으로 추적하며, 둘째, 합창곡의 가사를 이상준의 ‘속곡집’에 수록된 가사와 비교하고, 셋째, 편곡에 동원된 서양음악 기법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필자는 이화의 민요 합창곡이 계몽적 가치를 담은 가사를 채택하였고, 재래의 선율을 서양음악의 다양한 기법을 동원하여 편곡하였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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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5)<br>한국 최초 '도깨비 학회', 아·태 도깨비 초대하다아시아태평양 도깨비 몇 마리 도깨비학회 슬로건 '이론과 실천'| 실천 앞세우지 않는 이론은 한여름 밤의 꿈일 뿐이요 이론 전제하지 않는 실천은 망나니의 칼춤일 뿐이다 어둠 속에 도깨비불이 있듯 칼잡이들과 붓잡이들이 상호 넘나들며 연대를 희망한다 6월 초 한국 최초로 '도깨비학회'를 결성하고 소소한 국제학술포럼을 열었다. 도깨비가 한국 고유의 호명법이라 세계 최초의 학회라 해도 무리는 없겠다.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어 당분간 학회를 이끌 처지가 되었다. 학회원들에게 보낸 감사의 인사말 중 해외 발표문에 대한 논평 일부를 옮겨두고 그 의미를 새겨둘까 한다. 참고로 조자룡의 왕도깨비 유산에 대한 김영균(도깨비학회 고문)박사의 기조발표 및 세계의 가면에 대한 김정환(도깨비학회 고문)소장의 기조발표 등 흥미진진한 국내의 발표가 있었다. 지면 활용상 이 발표들은 따로 기회를 만들어 소개해 드리기로 하겠다. 뜻하지 않게 일본 및 해외 연구자들도 다수 가입신청을 해주어 고무적이었다. 미약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창대한 미래를 예비하는 듯하다. 윤열수 명예회장, 나승만 명예회장, 박전열 명예회장, CEO 곡성 도깨비마을 김성범 촌장의 축하 논고 및 메시지를 비롯해 내가 줄곧 주문하고 강조해온 것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유언 같은 언설을 동원한 이유가 있다. 그동안우리 학계가 잃어버린 것이라고나 할까. 현장에서 수십 년 수백 년 헌신해 온 사람들의 에너지를 우리 사회에 올곧게 피드백시키는 실천을 게을리 했다는 반성이라고나 할까. 도깨비학회가 내건 슬로건 '이론과 실천'을 재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실천을 앞세우지 않는 이론은 한여름 밤의 꿈일 뿐이요, 이론을 전제하지 않는 실천은 망나니의 칼춤일 뿐이다. 베트남의 도깨비와 중국동북지역의 출마선(出馬仙) FPT대학교 레티응옥깜 교수가 발표해준 베트남의 도깨비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베트남 동화에 나오는 도깨비들은 대부분 사악하지만 바보같은 성격의 도깨비들도 있다. 14세기 전설집인 <린남찍과이(Linh Nam chich quai)>, <비엣디엔우린떱(Viet dien u linh tap)> 등 여러 문헌에 나오는 정령의 특징을 소개해주었다. 아주 거대한 존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화하는 존재, 사람을 속이면서도 경쟁에서는 필경 사람에게 지는 존재 등이 그것이다. 길림시 조선족민속문화연구회 소속 전경업 선생이 발표한 출마선(出馬仙) 또한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중국의 자연신앙은 신(神), 선(仙), 요(妖), 마(魔), 귀(鬼), 괴(怪)에서 정령(精靈)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순차적으로 보면 요(妖)부터 우리 도깨비의 범주로 포섭할 수 있겠으나 칼로 두부 자르듯 구획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지하듯이 일본의 오니(鬼)가 여기서의 귀(鬼)에 해당한다. 재작년 도깨비포럼에서 탄지아 교수가 "중국의 도깨비는 신령한 신(神)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캐릭터"라는 뉘앙스로 발표했을 때 가졌던 의문을 이 발표를 통해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도깨비를 산해경 정도의 범주로 포착하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발표였다고 생각된다. 발리의 오고-오고(Ogoh-ogoh)와 교토의 요괴 족자카르타 소재 만달라 국제문화연구센터장 정지태 선생이 오고오고에 대해 발표해 주었다. 인도네시아 사카력으로 새해 첫날은 발리의 침묵의 날이라고 하는 '녀삐(nyepi)'이다. 오전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집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며 침묵의 날을 보낸다. 그 전날 이브에는 다양한 도깨비를 만들어 가믈란을 연주하며 시가행진을 한다. 1912년경 흑백사진, 발리 여인들 앞쪽에 짚으로 만든 오고오고가 보이는 것을 보면 역사가 오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고오고는 매우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사진 속의 트로피는 마을간 지역간 경연대회의 존재를 말해준다. 말레이시아 인기 만화 우핀&이핀도 오고오고의 하나로 해석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형상의 오고오고도 제작한다. 오고오고를 우리의 도깨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해 보이지만, 이 축제와 오고오고 제작의 배경에 트리 히타 카라나(Tri Hita Karana)가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은 발리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철학이기도 한데, 세 가지 관계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신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인간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그것이다. 헤이안죠가쿠인대학 박미경 강사가 발표해준 교토의 요괴 이야기도 매우 흥미로웠다. 일본은 요괴학회, 오니학회 등 정령 관련 연구결과가 축적되어 있는 곳이다. 지금도 더욱 깊게 추적하는 이들이 많으며, 이를 기반 삼은 각양의 축제들이 열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도깨비 나마하게가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점은 여러 지면을 통해 내가 주목한 부분이기도 하다. 발표자는 교토 이치죠거리의 요괴 관련 장소와 축제 등의 사례를 풍부한 사례를 통해 소개해주었다. 필리핀 드웬데를 통해서 보는 서생과 상인의 감각 세인트루이스대 베카림 눌루드 교수 발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두웬데의 서식처가 숲이나 나무 많은 집이나 언덕이라는 점, 이들을 밭의 정령, 언덕의 정령, 땅의 사람들 등으로 부른다는 점, 눈이 한 개라거나 큰 코를 가졌다거나 귀중한 보석의 소유자, 구애하는 처녀의 공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된다는 등 우리 도깨비와 친연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키반이라고 부르는 등 지역적으로 이름이 달리 나타나기는 하지만 풍요다산을 인간에게 제공해준다는 점은 공통적인 듯하다. 우리가 도깨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라고나 할까. 맞고 틀리고의 문제보다는 도깨비가 서식하는 현장에서 나름대로 평생을 바쳐 고구해 온 이들의 기운을 우리 사회의 어딘가에 피드백시키는 일이 더욱 긴요하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어디 도깨비뿐이겠는가. 전통이라는 무엇인가를 붙들고 분투해온 이들, 예술이라는 무엇인가를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오신 분들, 혹은 문화예술이라는 범주로 포섭할 수 있는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 길 잃거나 찾지 못해 헤매는 수많은 고학력 연구자들, 우리는 이들의 에너지를 어떤 방식으로 어떤 크기로 우리 사회에 나눌 수 있었나? 혹은 그리할 수 있도록 구성하거나 배려하였나? 나도 이론을 재구성하고 분석하는 학자 그룹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이론과 학문을 넘어 사회현상이며 정치며 군사며 혹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라의 모든 일이 이와 다르지 않다. 도깨비학회가 모토로 내걸고 있는 '서생의 문제의식' 속에서 '이론'을 재구성해내고 '상인의 현실감각'으로 '실천'을 창조해내는 그런 기운생동이 흘러넘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미약한 첫걸음이 예비하는 창대한 미래가, 싸목싸목 무논의 소걸음처럼 굿거리장단으로, 그렇지만 탄탄하게 올 것이라고 믿는다. 칼보다 붓(펜)의 힘이 크다고들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네 전통적인 생각에 비춰보면 틀린 말이다. 칼과 붓이 역(易)의 대대성(對待性)을 가질 때 그 본연의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둠 속에 도깨비불이 있듯, 궁창의 어둠 속에서 빛을 끌어내듯, 칼잡이들과 붓잡이들이 상호 넘나들며 연대하기를 희망한다. 필리핀 베카림 눌르드 교수가 정령 드웬데의 특징을 요약하며 말한 바가 오랫동안 내 귓전에 남아 있다. "우리가 무엇을 믿든, 우리는 항상 지구의 공유 공간에서 존중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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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44) <br>분청사기마상배편이 작은 감동과 즐거움만이라도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 중에는 마상배(馬上杯)라는 것이 있다. 별도의 굽 없이 곧게 선 긴 다리가 몸체로 연결되는 팽이 모양의 잔으로 일명 고족배(高足杯)라고도 한다. 마상배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단독 기물이 아니라 잔받침과 함께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추정은 조선 후기 백자에 유독 다리가 긴 잔이 있어 잔받침과 함께 세트를 이루는 잔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잔에 달린 다리가 긴 것으로는 삼국시대 고배(굽다리접시)에서도 볼 수가 있어 그 유사성이 주목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면 마상배란 무슨 뜻인가. 아사카와 다쿠미의 '조선도자명고'를 보면 굽이 상상외로 높다보니 불안정한 면이 있어 손으로 잡고 사용하기 때문에 마상배라는 속칭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굽이 높다보니 말 위에서 손으로 잡고 사용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속설도 있다. 하지만 논리적 근거나 어원을 찾기 어려워 마상배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보다는 굽 높은 잔의 일종으로 여기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까지는 마땅한 대안이 없어 마상배로 통용될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청사기마상배편은 기존에 알려진 마상배의 기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높은 굽에 잔이 올려진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밖으로 벌어진 접지면에는 모래받침을 하고 있으며 음각선이 보이는 높은 굽은 잔으로 연결되고 있다. 잔의 외면은 아래 위 로 선을 돌려 단을 구분한 후 그 안에 세로로 흑백상감을 교차해 문양을 넣고 있어 심플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외면은 아래위로 다소의 여백이 있는 반면 내면은 문양이 빈틈없이 꽉 차 있다. 우선 중앙에는 원 안에 세 점의 국화를 배치하고 있으며 이를 여의두문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는 입술 부분에 이르기까지 빽빽하게 우점문을 삽입하고 있는데, 그 사이사이 세 곳에는 간략화 된 흑백상감의 학 문양을 넣고 있다. 입술 부분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남은 형태만으로도 고급의 깔끔한 분청사기 마상배였음을 알아 보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 형태며 문양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마상배편을 언제 어디서 구한 것인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가마터에서 인연을 맺지 않고 시중에서 구입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아쉽지만 현재로서는 산지 추정은 불가능한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인데 근래 짐을 정리하다 우연히 찾은 것이다보니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것처럼 새롭고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늘 새롭고 신선하게, 매일을 그렇게만 살 수 있고 그렇게만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에서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이 어찌 쉬운 일이랴. 분청사기마상배편이 보여 준 이 작은 감동과 즐거움만이라도 감사하고 또 소중히 여겨야 하는 습관을 늘 길러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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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90)<br> 춤꾼 송영은의 '강선영류 태평무' 춤사위태평무 국가무형유산 '태평무'는 강선영(1925-2016)선생에 의해 전해지면서 격조있는 무대예술로 발전 되었다. 태평무는 나라의 풍년과 태평성대를 축원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의젓하면서도 경쾌하고 가볍고도 절도 있게 몰아치는 발 디딤새가 신명, 기량의 과시가 돋보이는 춤으로, 정 중 동의 미적형식을 가진 완벽한 춤이라 할 수 있다. 음악에 있어서는 경기도당굿에서 행하여진 무속 장단에 바탕을 둔 낙궁, 터벌림,올림채, 도살풀이, 자진도살풀이 가락으로 연주되고 있다. 송영은 예원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무용학 박사 중앙대학교 공연영상창작학부 무용전공 겸임교수 국가무형문화재 태평무 이수자 서울시무형문화재 한량무 이수자 제33회 동아무용콩쿠르 일반부 전통부문 금상 전국전통무용경연대회 문화부장관상 춤아리무용단장 前 사)국수호 디딤용원단 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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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2)<br>강원도아리랑봄바람 불어서 꽃 피건마는 고닯은 이 신세 봄 오나마나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얼씨구 노다노다 가세. 감상 허난설헌 시 <가난한 여인>이다. 手把金剪刀 夜寒十指直 爲人作嫁衣 年年還獨宿 (추운 밤 가위 잡은 손가락이 뻣뻣하네. 남의 혼수 옷을 짓고 있는 나는 되레 올해도 독수공방) 언 손을 호호 불며 새색시가 입을 고운 옷을 마르는 여인. 정작 본인은 혼처가 나서질 않아 빈방을 홀로 지킨다. 새 봄이 와 온천지가 꽃동산이건만 밭갈이로 고개 처들 겨를조차 없는 처지나 다를 게 없다. 가난한 이들한테는 모두가 그림의 떡! 아리랑이나 목 놓아 불러보자.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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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11) <BR>민족 극단, 출발(出發)과 시안(試案)연극을 조금씩 알면서부터 내가 내한 연극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히는 것 이 큰 문제거리었다. 취향과 맛, 흥분과 아집, 방황과 안일 그리고 구제 될 길 없는 부분별 등 횡설수설하여 적당히 넘어가는 잊었음에 시간들은 무섭게 그만큼 요구되는 입장을 피하는데 급급했다. 결국 나는 몇가지 시안(試 내놓을 수 밖에 없고 나가신 가상 무대위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느니. 한국 연극사를 이들어 보면 연극이 사회현실로 부터 줄곧 외면해 왔을뿐 아니라 단지 탈출구만을 찾아 억지 당위성을 내세우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애초에 자유분방한 무대를 정리, 백열등의 조명 아래로 들어서면서부터 개인적 인간의 내용을 추구하는데 온갖 푸념을 주입하며 또는 어느 작은 분야의 지식층으로 몰려 타협과 안일성에 습관을 들어버린 것 같은 풍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나마도 얼마나 많은 연극인들이 갔고 또 지나가고 있는가? 역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선각자는 반드시 있어야 하거늘. 요는 지금의 문제다.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느냐 하는 문제다. 과정없는 성숙은 없다. 그러나 그 과정을 밟는 목표는 있어야 하겠다. 민족극 수립의 길이다. 그것은 큰 의미의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연극의 본 바탕을 찾고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창조하자는 말이다. '극단 민족'의 취지는 바로 그런 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동안 극단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은 황활원 형께 감사드리며, 연암 박지원 선생의 호질은 정말로 훌륭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역사의 내용이어 민중들의 하염없는 소리들도 가득 차 있다. 연암의 호랑이는 민중의 법원과 의지를 담은 산신각의 호랑이요 민중을 지키며 민중의 편에서 민중과 함께 민중의 눈과 입이 되는 인간적인 호랑이다. 그러나 곧 호랑이는 잠자고 몸부림치고 갈증을 느끼며 깨어가고 스스로 과오에 대한 책임까지 자각하는 선량한 민중을 뜻한다. 물론, 이런 내용 은 전통 민속극의 내용과 흡사할뿐 아니라 사회계층을 유형화한 예술방식까지 같으며 오늘날의 사회상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나의 연출은 '소리'와 '유형'에 치중하여 오늘날의 것으로 끌어와 심는다. 시안(試案)이다. 출발(發)이다. 함수 1마당(잠자는 호랑이) 2마당(술수에 말려드는 호랑이) 3마당(잘못건드린 호랑이) 4마당(깨어나 분노하는 호랑이) 5마당(심판받는 호랑이) 출연자 : 공경구, 박순종, 백인철, 임석구, 이인영, 유경아, 용현, 이규복, 최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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