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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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3국악신문 사장 ‘김호규의 김병섭’(2) 국악신문 특집부 네이버를 비롯한 모든 포탈 싸이트 검색에서 ‘김병섭’을 치면 설장고 명인 김병섭은 검색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병섭 류 설장구’라고 치면 검색이 된다. 이는 김병섭의 존재는 장구잽이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돌려 말하면 ‘가정도, 자식도 내치고 오직 장구에만 미쳐 살았다’가 된다. 한편 이 시대 일부 ‘잽이’들의 삶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평소 김호규의 어떤 발언에서도 부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역시 부인(고 최경자)의 구술자료 어디에서도 남편에 대한 정을 표현한 대목은 없다. 국악신문 유일의 기사인 사진작가 정범태의 연재물 ‘명인(名人)’ 국악신문 제41호(1996년 06월 18일자)에도 가족관계 같은 사생활은 기술되지 않았다. 해적이(연보) 조차 정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회에 제시된 해적이도 본 보가 처음 작성한 것이다. ‘김호규의 김병섭’은 설장구 명인이다. ‘설장구’란 판굿에서 우두머리 장구잽이(명인)가 나와 다채로운 가락과 춤으로 솜씨를 보이며 하는 연행으로, 장구놀이 중 으뜸이란 말이다. 상(上)장구, 수(秀)장구라고도 말하는 이유이다. 호남 지역 설장구 춤 중에서 김병섭 류 설장구는 다스름·휘모리·동살풀이·굿거리·삼채·연풍대로 구성되어 독자적인 유파를 이루었다. 장구가락과 발디딤을 베 짜듯이 잉어걸이․ 엇부침․ 엮음살이 등에 소삼과 대삼의 음양배합으로 엮어 최고의 장구놀음으로 표출했다. 고대 농악에서 비롯된 장구춤이 김병섭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타악음악’으로 다듬어져 예술로 승화되었다. 1984년 한국일보사와 국립극장이 주최한 ‘명무전’에서 최막동·백남윤·유지화 그리고 김병섭이 선보인 장구춤에서 김병섭의 무대는 돋보였다. "섬세하고 화려하고 드라마틱”했다. 시인 이승하의 시집 <박수를 찾아서>에 수록된 ‘김병섭의 설장구’도 이 ‘명무전’의 감동으로부터 기억되고 있다. 이후 작고하는 1987년까지 많은 제자들이 형성되어 ‘김병섭 류’라는 유파를 형성하였다. 현재 유튜브 채널에는 비록 흐릿한 화면이지만 풍부한 김병섭 설장구 품새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02년 제자들이 개최한 제1회 설장구보존회 정기발표회 동영상 ‘김병섭 류 완판’(15분)이 올라 있다. 그 외 윤용준·한승철·박철선 등이 이 류를 계승하고 있다. ‘김병섭의 설장구’ 이승하 지 애비 죽고나서부터 장구를 쳐? 장구 가락 베를 짜듯 발놀림 연속무늬를 놓듯 신바람이 나서 쳤단 말이여? 우도농악 이어 받아 엇붙임 장단으로 좌를 때리고 우를 아우르면 세상은 음양이 어울려 잘 돌아가더라고이? 나라 빼앗겼을 땐 구성지게 구정놀이 나라 되찾을 땐 흥겨웁게 덩덕궁이 장구 하나에서 세상 살아가는 흥이 솟구치고 멋이 우러나서 아니, 그래 늙은 설장구 지 에미 죽은 날도 장구를 처? 치고 싶은데 못치고 않았으면 미쳐? 색동 끝동이 달리 붉은 쾌자를 입고 골수가 울리도록 치면 세 살 먹은 애도 춤이 나온다고이? 김병섭의 설장구에 대해서는 논문 1편과 단행본 한 권이 있다. 김병섭의 설장구 세계는 앞으로 다양한 국면에서 논의가 확장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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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br> 아리랑 노가바, 그리고 ' 아리랑코로나’독일 노래 ‘소나무(O tannenbaum)’의 곡조가 북한에서는 대표적 항일혁명가 ‘적기가(赤旗歌)’의 곡조로 불리고 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새롭게 개사가 되어 북한에서 ‘존엄 높게’ 불리게 된 연원을 들춰보고자 한다. 1920년대 초 영국에서 ‘레드 프래그(The red flag)'로 번안되어 저항적 노동가로 불렸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 민중 혁명가 ‘아카하타노 우타(赤旗 歌)’로 불렸다. 원래의 3박자를 4박자로 바꾸고 7.5조로 개사를 하여 대유행을 했다. 이로부터 만주 독립운동 진영에서 이를 ‘적기가’로 번역하고 항일의 노래로 개사하여 불렀다.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이어 부르게 된 것이다. 하나의 곡조가 다섯 나라 독일, 영,국 일본, 조선, 북한에서 개사되어 불렸던 것이다. 이와 함께 살피게 되는 노래가 또 하나 있다. 스코트랜드(애란)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다. 영국을 거쳐 유럽에서 지명도를 얻자 극동지역 한국, 일본으로도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애국가’(윤치호작사 무궁화가/애국가)의 곡조로, 일본에서는 ‘석별의 정’으로 개사되어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초등학교에서 ‘졸업식 노래’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콘트라팍투어(Kontrafaktur)이고, 우리식으로 하면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노가바)이다. 전자는 마르틴 루터 종교혁명 시기 종교적 가사를 민요나 대중음악 곡조에 얹어 빨리 전파시키기 위해서 발현된 것이다. 후자는 우리나라에서 비전문음악인 운동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념과 정서를 쉽게 담아 표현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찾아낸 노래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곡에 대한 정보나 지식 없이 가사 중심으로 불러온 번안가요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모국어로 부르는 노래이니 당연히 ‘우리 노래이지’라고 여긴다. 초기 애국가를 올드 랭 사인 곡으로 부른 것이다. 그런데 1946년까지 대부분 민중들은 원래의 애국가 곡조로 알고 있었다. 사실 노래의 출처를 알려고 하는 의문도 없던 시대적 산물이었다. 근대화에 기인한 서구음악 수용의 유연성 현상에서는 제한적 한계이지만 민중들의 노래 부르려는 강한 의지가 곡조의 형식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가 곧 메시지’이듯이 선택된 노래의 곡조는 가사 못지않은 강력하고 전파력 강한 메시지가 된다. 이를 실증하는 것이 ‘아리랑’이다. 이 때 ‘아리랑’이란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아리랑>의 주제가로 탄생한 오늘의 ‘본조아리랑’이다. ‘민족영화 제1호’로 호명되는 영화의 주제가이다. 역시 대중성에서 압도할만한 노래이다. 한 옥타브 안에서 선율, 리듬, 박자가 조화롭게 꾸며내는 3박자 왈츠풍, 세마치장단이다. 여기에 명료한 2행 후렴에 2행 3음보의 사설을 갖춘 '후렴구+1절 ' 구조의 공식어구 형식을 정형화 시켰다. 아리랑 명성의 강력함과 노래 형식의 용이성이 ‘아리랑 노가바’를 하나의 독립 장르로 구축하게 했다. 이른바 ‘선전가’의 개사곡이다. 아리랑 곡조의 개사곡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시기는 1930년대 중반이다. 근대화의 공시매체 메시지 유통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우선 선전가로서 분명한 기능을 한 것은다음의 세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하나는 1930년 ‘종두선전가’(種痘宣傳歌) 전단지이다. 종두는 천연두 또는 우두를 말한다. 전염병 치료제로 일본을 통해 유입된 주사(注射)에 대한 두려움을 ‘종두보다야 무섭겠냐’라고 선전하는 노래이다. 각 지역 경찰서를 통해 보급되었는데 이 자료는 당시 강원도 이천경찰서가 배포한 전단지에 수록된 자료이다. "호열자 염병에 예방주사/마마 홍역엔 우두넛키// 천하에 일색인 양귀비도/마마 한 번에 곰보된다” 천연두의 무서움이 주사에 비길 수 있느냐며 평생 ‘곰보’로 살지 않으려면 주사를 맞으라는 국가적 강권이다. 후렴은 영화 주제가 아리랑이고 당연히 곡조도 같다는 것을 알수 있다. 둘은 조선일보 1931년 1월 7일자를 통해 등장한 ‘문자보급가’이다. 당시 브로나드운동의 일환으로 신문사 주관으로 시작된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한글운동이다. 이 문자보급가의 곡조가 ‘流行 아리랑曲’이라는 기록에서 이 시기 유행하던 영화주제가 아리랑을 말하는 것이다. 아리랑고개를 ‘문맹’(文盲)으로 표현하여 넘어가야만 한다고 권고한다. "아리랑고개는 별고개라오”라고 해 놓고 더 높은 고개가 있는데, ‘이 세상 문맹’이라고 했다. 이어서 대명천지 전기불이 들어와 밤에도 훤한 세상에 ‘눈뜨고 못봄’이 웬일이냐고 한탄한다. 그리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라고 후렴을 불러 문맹도 고개처럼 넘길 것이라고 격려한다. 어깨 두드리며 함께 넘자는 청유형 문자보급 노래이다. 셋은 1935년 충북 중원군 상모면 온천리 수안보 온천(水安堡 溫泉)의 선전가이다. 위의 두 가지는 계몽적 성격인데 비해 이는 상업광고적 선전가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알려진 충남 온양온천만이 아니라 수안보온천은 3만년의 역사가 깊은 온천이라는 사실을 알리려는 목적인 듯하다. "문경의 새재를 넘어스면/ 충북의 령천인 수안볼세// 정든님 모시고 이 온천하며/ 조령의 엣일을 차저보자”라고 지명과 역사를 내세웠다. 역시 후렴은 주제가 아리랑과 같고, 곡조를 ‘아리랑曲’으로 하여 본조아리랑임을 알 수 있다. 최근 세계를 멈추게 하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서울에서 ‘아리랑코로나’가 출현했다.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1950년대 ‘코로나택시’의 유행을 빗대어 코로나택시는 타봤지만 코로나19는 탈 수 없다는 풍자적 표현이다. 후렴과 곡조를 본조아리랑으로 부르고 있다. 시대적 요청에 의한 필연적 출현이다. ‘밈(Meme)’아리랑의 후렴과 곡조가 1930대에서 지금까지 지속적인 자기복제(自己複製, self-replication)의 결과에서 새로이 창출된 것이다. ‘아리랑 노가바’와 ‘아리랑코로나’의 출현은 아리랑이 특별한 노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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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가벼운 몸살기를 느끼며 느지막이 일어나 창밖을 본다. 연무가 자욱하고 만추의 소슬한 가을비가 실낱같이 내린다. 기류가 흐르는지 마당가 은행나무 잎들이 노란 나비들의 군무같이 흩날린다. 가속도로 늙어가는 나이 탓인지 하나둘씩 내 곁을 떠나는 지인들의 혼백 같다는 생각도 든다. 통유리 창가의 내 익숙한 의자에 화석처럼 앉아 씁쓸 달짝지근한 조락의 우수에 잠기다가, 하루 일과의 관성처럼 조간신문을 집어들었다. ‘양치기 백석(白石/1912~1995)’이라는 칼럼이 대뜸 눈에 띄었다.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날 나는 대학에서 지기처럼 지내던 몇몇 교수들과 환담하며 우연히 백석과 자야(子夜/1916~1999) 얘기로 꽃을 피우지 않았던가. 백석 시인의 애인이었던 자야 여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지난 80년대 말엽쯤의 일이 아닌가 한다. 당시 서울음대 김정자 교수가 자야 여사를 모시고 남양주 덕소의 내 우거(寓居)를 방문했다. 김정자 교수는 가야고 전공이지만 자야 여사에게 우리 전통가곡을 따로 배우고 있었다. 자야 여사, 그러니까 김진향(金眞香/김영한)은 전통가곡의 맥을 잇고 중흥시킨 금하 하규일(琴下 河圭一) 스승을 사사했다. 말하자면 전통가곡의 정맥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자야 여사가 멀리 덕소까지 내방한 뜻은 음악 얘기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녀는 시정의 아낙들과는 달리 확실히 걸출한 안목이 있었던 듯싶다. 전통음악이나 전통문화를 꽃피우려면 당장 목전의 음악적 기량에만 매달리면 안 되고, 멀리 보고 좋은 인재를 키워야 된다며 자기 지론을 폈다. 그리고 돈은 자기가 댈 터이니 내가 인재학교를 세워서 키워 달라는 제의였다. 물각유주(物各有主)라고 했던가. 세상에 인연이 닿지 않으면 복이 굴러와도 눈치마저 채지 못하는 모양이다. 물론 나는 전공이 따로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사양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말의 후회가 없지도 않다. 알량한 지식만으로 무장한 재승박덕형 인사들이 하도 요란을 떠는 저간의 세태를 겪다 보니 참다운 인성 교육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뒤늦게 절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당시 천억대가 넘는다던 성북동의 대원각은 영재교육의 종잣돈이 될 인연을 살짝 비켜서 법정 스님에게 넘겨졌고, 그 후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야 여사는 웬만한 범부들이 부끄러울 만큼 선공후사의 국가관과 역사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아마도 법도 있는 권번 생활을 하면서 당대 숱한 우국지사형 대장부들과의 교유에서 받은 영향이 아닐까 한다. 국립국악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한 번은 대원각 기부 사실을 떠올리며 여사에게 국악원 발전기금을 넌지시 부탁했다. 그분의 소유로 대원각 외에 서초동에 큰 빌딩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사는 왠지 국약계를 위해 쓰자는 말에는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자야 여사의 선행이 또 언론에 보도되었다. 시가 백억여 원이 넘는 서초동 빌딩을 과학영재를 키워 달라며 과기처에 희사했다는 기사였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살아오며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경계를 일찌감치 간파했는지, 여사는 아무런 미련 없이 세상살이 공수래공수거의 삶을 깔끔히 솔선수범했다. 자야 여사는 나를 만날 때마다 힘주어 말한 얘기가 있다. 당신 살아 생전에 스승 하규일 선생을 기리고, 백석을 국문학계에 현창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부끄럽게도 당시 나는 백석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고, 따라서 자야 여사의 그 같은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해, 아마도 90년대 초반이지 싶다. 여사가 여느 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서울시립대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쓴 원고 뭉치를 내게 건넸다. 자신과 백석 시인 사이의 사랑 얘기를 쓴 일종의 자전적 소설인데, 한번 읽어 보고 잘 다듬어 달라는 청이었다. 예상대로 여사의 글은 어법이 서툴고 문투가 시대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장의 구성 또한 진부했다. 조금 손 좀 봐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여사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국문학 전공 박사과정 정도의 학생을 소개해 드릴 테니 아예 처음부터 환골탈태해야 되겠다고…. 그 후 얼마마한 시간이 흘렀는지는 기억이 없다. 자야 여사가 내게 책 한 권을 보내왔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내 사랑 백석’이라는 제호의 책이었다. 속지에는 ‘한명희 선생깨 6월 22일 1995년 김진향’이라고 친필 서명이 돼 있었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지만 원고의 문투처럼 ‘선생께’라야 할 철자를 ‘선생깨’로 표기한 사실도 역시 그녀다운 어법이다 싶어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졌다. 자야 여사를 알고 지낸 기간은 십여 년 남짓. 한강교 옆 외딴 고층 아파트 댁에 초대를 받기도 했고, 어느 때는 덕소 내 집 마당 단풍나무 밑 평상에 앉아 하규일제 전통가곡을 시범 삼아 부르기도 했다. 간혹 외국을 다녀올 때면 내가 약골이라고 건강식품을 챙겨 주기도 했고, 특이한 술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야 여사와 나는 자별한 사이도 아니었고 소원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서로 믿고 지내는 지인 한 분 계시는 정도의 친교 거리였지 싶다. 한 세기가 저물어 가던 1998년도의 일이다. 자야 여사에게서 저녁식사를 하자는 전화가 왔다. 약속한 서초동의 어느 일식집으로 나갔다. 그때의 만남에서 얻은 잔상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여사의 옷차림이었다. 나는 그동안 여사가 그토록 대담하게 튀는 정장을 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래위를 모두 순백의 양장으로 갖춰 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치장돼 있었다. 깔끔하고 정갈한 그분의 성품이 촌치의 착오도 없이 의상으로 표출된 분위기였다. 그날 만남의 요지는 당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가곡 한바탕을 국악원에서 녹음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하규일 전승의 가곡은 국악원 악사들의 반주로 간간이 녹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사의 건강은 점점 쇠약해 갔고, 긴 호흡으로 노래할 기력마저 소진돼 갔다. 결국 이듬해 자야 여사는 이승의 마지막 소망을 미완으로 남긴 채 삶을 영별하고 말았다. 나와의 느슨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인연도 이렇게 과거지사로 뜬구름같이 흩어져 갔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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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3흙의 소리 이 동 희 피리 소리<2> 민하는 호랑이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아랫말 안골에 쌍정문이 있는데 오촌梧村 박응훈朴應勳의 효자문 통덕랑通德郞 박수현朴守玄의 아내 선산김씨의 열녀문을 이른다. 효성이 지극한 오촌과 호랑이의 이야기는 근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버지가 병이 나 약을 지으려고 밤중에 길을 나서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상주와 선산 100여 리 길을 호위하였다. 등에 태워 단숨에 갔다 왔다고도 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묘지를 알려주었고 묘를 쓸 때도 호랑이의 보호를 받았다. 이런 감동적인 일화를 현감과 선비들이 왕에게까지 상달하게 한 것이다. 그는 오래전 충북 영동군 매곡면 수원리 박명근(1908∼1983)옹이 세필로 쓴 「호점산 실기」를 취재하여 학회지에 싣게도 하였지만 답사는 이 글을 쓰는 기회에 하게 되었다. 실기라는 것은 말의 뜻대로라면 실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호랑이를 타고 다니고 호랑이와 친교를 맺은 희한한 이야기이다. 오촌의 묘는 황간면 소계리 성주골 호점산虎點山에 호랑이 무덤 호총虎塚과 함께 있다. 이름도 호점산이라 붙인 것이다. 참 이상하게 연결되는데 그도 호랑이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이던가, 3 4학년 땐가, ‘바른말 하기 듣기’ 시간이 있었다. 지금의 특활 시간 같은 것이었다. 특기나 장기자랑을 하는. 노래를 하기도 하고 묘기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의 차례가 돌아왔고 별 특기가 없는 터라 팥죽 할마이 얘기를 하였다. 한 할머니가 산마을에 혼자 농사를 짓고 살았다.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할머니를 잡아먹겠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팥 농사를 지어서 동지 팥죽을 쑤어 놓을테니 그때 와서 팥죽도 먹고 나도 잡아먹으라고 달래서 돌려보낸다. 동짓날 다시 온 호랑이는 할머니가 맛있게 쑤어 준 팥죽을 다 먹고는 어흥, 할머니를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들을 때는 참으로 재미있었는데 영 잘 안되었다. 어떻든 그는 그날 이후 팥죽 할마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 나중에는 팥죽은 떼고 할마이가 되었다. 사투리 억양을 상상해 보시라. 운명인가, 언제부터인가 이야기를 하는 업을 갖게 되고 줄곧 죽을 쑤고만 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어떻고들 말한다. 오래전 옛날 옛적의 일을 말할 때이다. 동화에서는 지금도 호랑이가 많이 등장한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현실을 뛰어넘는 이야기라야 재미가 있다. 그도 그런 이야기를 실제 이야기처럼 듣고 울고 웃고 하였던 것이다. 팥죽 할머니에 나오는 호랑이는 악역을 하고 있고 거기에 대응하여 멍석이 호랑이를 둘둘 말고 지게가 지고 멀리 가버리는 것으로 인격을 부여하여 처리한다. 박연의 이야기는 그렇게 고랫적 이야기는 아니다. 나이도 스무 살이 넘고 성인이었다. 어머니 내간상內艱喪을 당한 때가 스물한 살이고 거려삼년居廬三年 우거려삼년又居廬三年 시묘를 하였다. 대개의 호랑이 이야기는 효행과 연관이 되어 있고 이 여막에서 박연과 함께 지낸 녀석의 경우도 지극한 효성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러면서 사뭇 다른 데가 있었다.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고 할까. 상주가 괴로워하면 같이 축 처져 괴로워하고 졸면 같이 졸다가 잤다. 무엇보다 노래 곡조에도 심취해 있는 것 같았다. 박연이 피리를 잡고 불 자세를 취하면 자기도 들을 준비를 하는 듯 다소곳이 고쳐 앉아 앞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추임새를 넣듯이 입을 쩍쩍 벌리기도 하고 수염을 쫑긋 세우며 앞발 뒷발짓을 하였다. 피리 소리는 연일 이어졌다. 애절한 소리는 산천을 흔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어인 일인지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밤이 늦도록 발그림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겨.” 궁금하다가 걱정이 되고 또 기다리다가 애가 탔다.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안 온 날이 없었다. 와서 박연의 여막을 같이 지키고 피리 소리를 들어주었다. 참으로 고맙고 가상한 녀석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였다. "정말 웬일이여.” 새벽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이 붙여지지 않았다. "몸살이라도 난 것인가.” 아니면 이제 안 올 셈인가. 어디로 다른 데로 간 것인가. 뭐 섭섭한 것이 있었던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새벽 동이 틀 무렵이었다. 막 잠이 들었는데 녀석이 나타나 죽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상주님! 상주님! 살려 주세요. 함정에 빠졌어요. 여기 당재인데요. 정말 죽게 되었어요. 상주님 제발 살려주세요.” "아니!” 꿈속이었다. 박연은 벌떡 일어났다. 꿈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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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 이야기 3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éenne)』와 마에마 교사쿠의 『고선책보』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지난 회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쿠랑의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éenne)』 서론의 기록들이다. 서지(書誌)란 고문헌이나 희귀본의 체제·내용·가치·보존상태 따위를 조목 조목 밝힌 기록을 말한다. 따라서 서지 연구는 모든 분야의 학문 연구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기초 작업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 고서의 서지 연구에서 가장 훌륭한 책을 둘만 꼽으라면 바로 쿠랑의 『한국서지』와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 1868-1942)의 『고선책보(古鮮冊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쿠랑의 『한국서지(韓國書誌)』는 모두 네 권으로, 1894년부터 1901년까지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겸 외교관으로 1890년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 주재 프랑스 부영사 겸 통역사로 2년간 근무했다. 이 책의 편찬에는 1887년 조선의 첫 번째 프랑스 외교관으로 온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와 프랑스 카톨릭 선교사 뮈텔(Mutel) 주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책은 고려시대의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에서부터 구한말의 『한성순보(漢城旬報)』(*사진 4)에 이르기까지 3,821종의 도서를 교회(敎誨)·언어·유교·문묵(文墨)·의범(儀範)·사서(史書)·기예(技藝)·교문(敎門)·교통의 아홉 부로 분류하고, 각 문헌에는 불어로 해제를 붙였다. 책머리에는 장문의 서론이 있는데, 여기서는 조선 도서의 성격과 특징을 언급한 데 이어 언어와 문자, 유·불·도 사상을 비롯하여 역사·지리·전례(典禮)·정법(政法)·수학·천문학·병법·의술·점성술·예술 등을 문화사적 시각에서 개관했다.『한국서지』는 그 첫째 권이 출간되고 100년이 되어서야 한국어 번역본 『한국서지』(이희재 역, 일조각, 1994.)가 출판되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희재 교수는 이 책의 번역작업에 평생을 매달렸는데 언젠가 나에게 "모리스 쿠랑을 짝사랑하다 시집도 못갔다”고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마에마 교사쿠는 일본의 한국어학자로, 1891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를 졸업한 뒤 유학생으로 내한하여 1894년부터 인천영사관에 근무하다가 1900년 시드니로 전임했으나, 이듬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공사관의 이등 통역관이 되었다. 1910년에는 총독부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1911년 귀국했다.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한국 고서의 수집과 연구에 전념했고, 수천 권의 고서를 수집하여 이를 바탕으로 『고선책보』(*사진 5)를 출간했다. 『고선책보』는 46배판 크기에 2천 쪽이 넘는 분량을 세 권으로 나눈 책이다. 첫번째 권이 1944년, 두번 째 권이 1956년, 그리고 세번째 권이 1957년에 나왔으니, 완간되기까지 12년이 더 걸린 셈이다. 첫번째 권은 일본의 도요분코(東洋文庫)에서 출간했으나 일본이 패망한 뒤 그 후속 권을 출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 일본 문부성의 지원으로 완간을 보게 되었지만 저자는 생전에 자신이 쓴 책의 완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어느 분야의 서지를 정리하는 작업은 서지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자료수집,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이러한 공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에 대한 평가가 매우 인색해 보인다. 서지작업을 업적이라 생각하기보다는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주 고약한 마음이다. 우리나라 고서의 특색으로는, 첫째 오래된 고서가 많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지금도 고서점이나 골동품 가게에 가면 고서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질과는 상관없이 수적으로는 대단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입이 많았던 나라다. 가깝게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이전의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나라가 황폐화했다. 또 개화기부터 6.25를 전후한 시기까지 우리의 전적(典籍)과 고서화가 무차별적으로 약탈당하거나 또는 헐값에 외국으로 팔려 나갔다. 수없이 많은 전쟁의 참화를 겪고도 이만큼 고서가 보존되어 온 것을 보면 우리 출판문화가 매우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960-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주택개량사업으로 인해, 수백 년 동안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온갖 고서들이 막 쏟아져 나왔다. 이런 고서들은 전국의 유명 박물관과 도서관에 소장되거나 수집가들의 손에 들어가고도 아직도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 둘째, 한글은 우리 민족 고유의 문자로 이는 우리나라 출판 인쇄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성이다. 셋째, 한국 특유의 활자본과 필사본이 많다. 물론 활자본이나 필사본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활자 본이 우리나라처럼 발달한 나라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 고서 중에는 필사본이 많다. 인쇄본을 찍어내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가야 하므로 수요가 많지 않은 분야의 책들은 자연 출판이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분야에서 필사본이 만들어졌고, 그것들이 지금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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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3나의 임 향한 뜻은 죽은 후면 어떠할지 상전이 변하여 벽해는 되려니와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작품해설 나의 임을 향한 절개는 죽은 후에는 어떠할까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할지언정 임을 향한 내 일편단심이야 사라질 수 있으랴. 작자 성삼문(成三問)-호 매죽헌(梅竹軒)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임금(단종)을 향한 변치 않는 충절을 노래하였다. 작품감상 국한문 혼서로 민체의 흘림체과 한문 행서체를 사용하여 썼다. 선면(扇面:부채꼴)의 형식에 맞춰 내려가면서 글자가 모여드는 장법을 취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호-한얼, 醉月堂 전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 현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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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3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동초제 판소리’란 전남 고흥에서 출생한 동초 김연수(1907-1974) 명창이 기존의 판소리를 재해석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에서 선율과 사설의 창조성을 부각시킨 한 유파이다. 다른 유파에 비해 사설이 정확하고 너름새가 정교하며 장단 붙임새가 다양하다. 명창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명창이 부른 판소리 5바탕 음반(1967년 동아방송 음원)이 2007년에 신나라에서 출반된 적이 있다, 현재 명창의 소리는 수제자인 오정숙 명창(1935~2008)에게 전수되어 잘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유파이다. 동초제 판소리 감상회는 서울.경기지역에서 동초제 판소리를 학습하고 있는 소리꾼들이 동초제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동초제 판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기로 하고 작년 8월 31일 한국문화 집(KOUS)에서 첫무대로 ‘춘향가’를 공연하였다. 이 음반은 이 감상회를 기념하기 위해 6명의 소리꾼들이 국악방송 녹음실에서 자기가 잘 부르는 ‘춘향가’의 눈대목을 10여분씩 불러 제작한 음반이다. 박경민 소리꾼(한예종 전통예술원 예술전문사 졸업)이 ‘못허지야’ 대목을, 이정민 소리꾼(중앙대학교 대학원 한국음악학과 수료)이 ‘술상차려’, 서정민 소리꾼(대표. 한양대학교 음악학 박사)이 ‘천지삼겨’, 김예진 소리꾼(중앙대학교 음악학 박사)이 ‘쑥대머리’, 김선미 소리꾼(전북대 대학원 박사과정)이 ‘박석고개’, 김영화 소리꾼(한예종 전통예술원 예술사 졸업)이 ‘초경야경’ 대목을 부른다. 고수는 이준형이다. 6명의 소리꾼들이 각자 동초제 판소리를 알리기 위해 참여하고 있으나 서로는 보이지 않은 경쟁자일 수 있다. 한 사람의 소리를 쭉 듣는 것 보다 여러 소리꾼의 소리를 한 장의 음반으로 듣는 것은 감상자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또 판소리 신보가 귀한 이 때에 새로운 형식의 동초제 춘향가 판소리 음반을 한 장 더하니 좋다. 음반의 4, 5번 트랙이 바뀜. 주석 : 판소리 대목의 이름은 보통 부르는 대목의 소리(아니리 제외)가 시작되는 첫 단어나 문장을 사용한다.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JEC-0404&page=1 동초제판소리감상회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channel/UC0JmT03Gk-Fxkqf_-Ubco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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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국악신문 사장 ‘김호규의 김병섭’(1) 국악신문 특집부 "저는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아버님(故 김병섭)이 장구로 유명하셨던 분이시구 어머님(故 최경자)은 소리와 춤을 하셨어요. 자연스럽게 국악을 접한 것이지요. 학생 때부터 장고 치고 탈춤을 추었어요. 후에 제가 아는 국악을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하다 1994년 9월에 국악신문을 창간했어요.” 외부 언론과의 유일한 기사인 네이버 블로그 2016년 3월 31일자 ‘김호규 국악로전통문화학교 대표’라는 인터뷰에서 밝힌 신문사 창업 배경이다. 부모의 영향으로 장구 치고 탈춤을 추게 되어 국악계에 들게 되었고, 국악계의 기록을 남기는 일을 하고자 신문을 창간했다는 진술이다. 장구와 춤의 실기인에서 국악계 언론인으로 살게 된 배경과 계기를 밝힌 것이다. 이는 국악신문의 주 논조가 국악계 소식이고, 그 중 국악인 부고(訃告)기사를 가장 크게 보도(1995 만정 김소희 선생)하거나 수상 소식을 특집화 한 사실과 ‘명인명창 사진을 구합니다’(1995~96년)와 같은 사고(社告)를 통해 자료 구축과 기록정리 사업을 추진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수차의 주간, 격주간, 월간으로 형태 변경을 되풀이 하면서도 결코 휴간이나 정간을 하지 않고 견뎌온 사실에서 사명감도 발휘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한 언론인으로서의 분명한 업적인 것이다. 국악신문 사장 김호규는 1959년 김병섭과 최경자 사이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부친이 장고를 시작한 나이와 같은 11세 때 장고를 치고 탈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필연을 있게 한 주인공, 부친 김병섭은 누구인가? "우리의 어려운 마음을 다듬어 주시고 답답한 마음을 밝게 열어주셨던 아버님의 장고소리 새삼 아버님의 빈자리가 너무도 그립습니다.” 2009년 ‘고 김병섭 선생 20주기 추모공연’ 인사말의 일부이다. 자식으로서의 사적 감정보다는 장구 명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더 강조하고 있다. 부친 이기보다는 국악인 선배이며 객석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한 명인(名人)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 자신이 작성한 이력서에서 ‘부친’을 빼고 "김병섭 선생께 설장고 및 우도농악 사사”로 기록하고 있다. 김병섭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자료는 사진작가 정범태의 ‘설장고 명인 김병섭’이 있다. 글 쓴 시기는 1996년이지만 실제 여러 차례 만나 인터뷰하고 사진으로 기록한 인연으로 쓰여진 글이다. 이 글에서 김병섭은 우도농악 고깔 설장고 가락의 대가 김도순, 김학순, 백남길을 잇는 뚜렷한 계보가 자랑이라고 했다. 그리고 설장고 치는 모습을 매우 세밀하게 기술하였다. "흰 바지 저고리 위에 반소매 색동끈 동달린 붉은 쾌자를 입고, 어깨 허리에 청황록 3색 띠를 두르고, 배꽃 달린 고깔을 쓰고 장고를 비껴 맨 차림으로, 우도농악 엇부침 장단으로 춤을 추는 모습에 관객은 어느새 하나가 된다.” 현장의 현란한 몸짓이 그려진다. 바로 이 묘사의 대본인 사진 한장이 남아있다. 아쉽게도 컬러사진이 아닌 흑백사진이지만 고깔 아래 눈빛은 살아있다. 그나마 전문가가 찍은 소위 ‘작품사진’은 유일한 것이다. 작고한지 9년 후 국악신문 제41호, 1996년 6월 18일자 ‘명인’란에 실린 기록이다. 김병섭 명인 해적이 1921년 정읍 북면 출생 1932년 (11세) 농악입문, 명인 김학순 사사 1938~45년 (17~25세) 함경도 명천 아오지탄광 강제징용 1945년 종전후 징용에서 귀향, 형과 함께 마을 농악단에서 활동 1950년 전북에서 담굿, 풍장, 걸궁에 명성을 얻다 1956년 전국농악대회 개인상 수상 1963년 전국민속경연대회 정읍우도농악 국무총리상 수상 1964년 제5회 전국민속경연대회 설장고 개인상 수상 1965년 남원국악원 여성국악단 설장고 지도 1966년 로버트 프로바인(朴巴人/메릴랜드대학 음악학교수) 외 외국인 설장고 지도 1968년 서울로 이주, 미국인 평화봉사단 설장고 강습 담당 1970년 돈암동, 동대문, 종로5가에서 <김병섭농악연습소> 운영. 한양대, 서울예고, 선화예고 학생지도 1971~87년 전라 우도농악 장고잽이 설장고, 쌍장고, 굿거리, 동살풀이, 구정놀이, 덩덕궁이, 다르래기 명인으로 전국적 활동 1987년 (62세) 폐암으로 사망,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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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r> 아리랑의 진화, 외국 찬송가2000년 들어서 아리랑의 공시적/통시적 확산 현상을 문화유전자(Meme)의 자기복제에 의한 진화 차원으로 재해석 되기 시작했다. 2011년 발간된 『한국의 아리랑문화』(김연갑 외, 박이정)로부터 오늘과 같은 세계적 아리랑의 전승 확산현상을 문화유전자의 자기복제를 통한 진화 결과로 재해석하였다. 문화유전자 밈은 미메시스(Mimesis)와 유전자(Gene)의 합성어로 뇌를 통해 다른 개체의 뇌로 전파되는 모방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하는 용어이다. 생명체는 유전자(DNA)에 의한 수직적 자기복제로 진화하는데, 인간 사유의 총체인 문화는 이 밈의 수평적 복제에 의해서만 진화한다는 것이다. 아리랑의 진화 상황은 괄목할만하다. 해외에서 찬송가로 전승되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벨기에에서 카토릭 찬트로 불리는 ‘lullaby’(자장가)다. 세계적인 카토릭 성가단이 낸 음반 <CANTATE DOMINO>의 9번째 수록이다. 곡조가 본조아리랑이다. 런던 필하모닉 지휘자 출신의 영국인 말콤 와트 사전트(1895-1967) 씨가 채보해서 편곡하였다. 이 곡에 대한 해설이 매우 감동적이다. "신비로운 리듬은 아무리 험한 해일이 밀려와도 엄마품 속에서 잠든 아기처럼 우리를 편하게 잠 재워 준다.”고 들을 때마다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고 찬미했다. 아리랑 리듬에 대한 이 같은 상찬은 근거가 있다. 2010년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 소재 대중음악 연구센타 <뮤직 인텔리젼트 솔루션>에서 아리랑 선율을 분석한 결과에서 유추가 된다. "정말 아름다운 곡이다. 멜로디가 한 옥타브 안에서만 움직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아주 쉽다. 이 결과 한 소절만 듣고도 다음에 어떤 음이 나올지를 예상하게 해 준다. 앞부분에 세 음 ‘아~ 리~ 랑’이 있는데, 이 세음을 높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정말 완벽하다.” 이 연구소는 이미 <마이 웨이>(My Way)나 <브릿지 오버 더 트라블드 워터>(Bridge Over the Trabeled Water) 같은 세계적인 히트 송의 공통점을 분석하여 신곡의 히트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기관이다. 네덜란드가 국가(國歌)를 선정하기 전에 응모작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가 국민 투표 결과와 일치하였다고 한다.이러한 신뢰도에서 아리랑의 평가도 확인된다. 이는 스위스 성가단도 이러한 분석에서 성가로 채택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1990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에서 발간한 찬송가집 『The Presbyterian Hymnal』에 수록된 찬송가 346장 ‘Christ, You Are the Fullness(그리스도, 찬양의 기쁨)’이다. 여기에 ‘Korean melody, Tune Name ARIRANG’으로 되어있다. 가사는 버트 폴만 (Bert Polman, b. 1945)교수가 1986년 시편 찬송가를 위해 작사했다. 편곡자는 데일 그로텐후이스(Dale Grotenhuis, b.1931)로 1986년 완성했다. 이 두 편의 해외 찬송가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의 일종이고 서양 찬송가사에서는 콘트라팍투어(Kontrafaktur) 방식이다. 아리랑이 해외에서 외국인의 손에서, 찬송가로도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본조아리랑이 밈으로 복제에서 복제로 거듭된 결과이다. 이는 아리랑의 진화이기도 하다. 미래에 아리랑의 진화는 더 멀리 계속될 것이다. ‘아~리~랑’의 음감과 선율과 리듬, 그리고 세계 유네스코가 부여한 ‘탁월한 보편 가치’가 밈으로 전파, 그리고 또 다른 공간에서 전파될 것이기 때문이다. ‘lullaby’ Sleep in my arms, the birds homeward fly, sleep in my arms, the cool evening falls round thee. Sleep in my arms, little baby, thy mother is here. Sleep in my arms, thou frail weary one, sleep in my arms, for thy Lord watch o'er thee. Sleep in my arms, the sweet Saviour will keep thee from harm. ‘Christ, You are the fullnes’ Christ, You are the fullness of God, first born of eveything. For by You all things were made, You hold them up. You are head of the church, which is your body. First born from the dead.You in all things are supreme! Since we have been raised with You, Lord, help keep our heart and minds. Pure and set on things that build Your rule over all the earth. All our life is now again we will share Your glory. Help us live in peace as true members of Your body. Let Your word dwell richly in us as we teach and sing. Thanks and praise be to God through You, Lord Jesus. In whatever we do let Your name receive the pr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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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 전통음악을 사랑하는 고마운 기업인, 초해 윤영달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대학 때 전공이 물리학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잠시 의아스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내 선입견이지만,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분들은 왠지 심성이나 인상이 냉철하고 이지적이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을 보는 순간 그 같은 사견은 여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마디로 그분의 인상을 가장 적확的確하게 집어내는 낱말을 하나 고르라면, 나는 서슴없이 인후仁厚라는 두 글자를 고를 것이다. 그만큼 그분의 인상은 누가 봐도 인자하고 후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저 같은 덕성스런 풍모 때문에 큰 기업을 일굴 수 있었구나 하는 자못 관상학적인 단상이 스쳐가기도 했다. 그처럼 만인이 호감을 느끼게 하는 풍격 있는 용모를 타고난 분은 도대체 누구일까? 바로 제과업계의 대표기업인 크라운해태제과 초해超海 윤영달尹永達 회장이다. 윤영달 회장은 한국 사회의 명문대가名門大家인 해남 윤씨의 후손이다. 송강 정철 선생과 함께 조선 중기 시문학의 쌍벽이었던 고산 윤선도 선생의 13세 손이다. 윤선도 선생은 고산孤山이라는 호가 함축하듯 성품이 강직하고 고고했다. 따라서 그의 관직 생활에는 풍파도 많았다. 어찌 보면 유배나 관직 삭탈 등 굴곡이 많았던 용행사장用行舍藏 덕에 오히려 주옥같은 시문들을 후대에 남길 시간적 여유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조선조 문학사에서 송강이 가사문학에 거봉이었다면 고산은 시문학에 태두였다. 교과서를 통해서 널리 회자되는 고산의 ‘오우가五友歌’는 자연주의 문학의 백미처럼 지금도 청초한 시상으로 뭇사람들의 가슴속에 잔잔히 녹아 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식이며 속은 어이 비였는가 저러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오우가 중에서 대나무를 읊은 이 시조는 고산의 대쪽같은 오상고절傲霜孤節이 여실히 응축돼 있다. 각설하고, 달관의 안목으로 아름다운 대자연의 품에 들어 유유자적했던 고산의 후손답게 크라운해태제과 윤 회장 역시 풍류적인 기질이 다분한 기업가다. 그림이나 조각 분야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전통 한국 음악에 대한 그의 애정과 호감은 각별한 데가 있다. 언필칭 국악을 좋아한다는 사람은 드물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좋아서 속속들이 사랑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세태가 그러하기에 사심 없이 한악을 좋아하고 즐기는 윤 회장의 예술애호정신은 그래서 한층 돋보인다. 널리 인지된 사실이지만 윤 회장은 매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을 거창하게 개최한다. 한국인의 정서와 현대사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민족의 노래를 널리 선양하며 역사의식을 환기시키기 위한 그분의 속깊은 애국심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일이지만, 윤 회장은 역시 예술애호가답게 송추의 수십만 평의 산과 계곡에 조각 동산과 연주 장소와 휴식 공간 등을 꾸며서 아트밸리라는 문화예술 명소를 조성하여 만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고 있다. 나도 어느 때 한 번 몇몇 지인들과 초대받아 고즈넉한 산등성이의 정자에서 차를 마시던 기억이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윤영달 회장의 이런저런 운치 있는 예술적 행적을 좇다 보면, 분명 나는 그 끝자락에 멀리 고산 선생의 절창 오우가가 태산처럼 우뚝 서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윤영달 회장이 후원하고 이끄는 여러 문화예술 행사들을 감안해 보면, 윤 회장이야말로 이태리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한악계의 진정한 코시모 메디치Cosimo Medici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정악 계통의 원로 연주가들을 규합하여 양주풍류악회를 결성하고 매달 정기음악회를 이어오고 있으며, 국악 콩쿠르를 통해서 선발한 청소년들을 위주로 영재국악회를 만들어 육성시키고 있기도 하다. 또한 정악계의 원로들로 공연단을 구성하여 해외 순회 공연까지 지속해 오고 있는데, 일본과 베트남과 유럽을 비롯해서 금년에는 몽골 공연을 예정하고 있다. 여러 사례들을 예시할 필요도 없다. 윤 회장의 진정한 한악 사랑의 진면목은 회사 직원들에게도 단가나 시조, 가곡, 일무 같은 정통적인 음악을 익히게 하는 시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사소하고 쉬운 일 같지만 기실 기업 현장에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공리적인 타산에 앞서 예술을 사랑하는 윤 회장의 가치관이 여사한 기업의 정서적 기조基調와 체질로 이어지고 있다는 명백한 징표임에 분명한 것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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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2흙의 소리 이 동 희 피리 소리 <1> 삐리 삐리 삐리 삘리리 삘리리 필닐니리 필닐니리 피리 소리가 들리었다. 산 속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곱고 부드럽고 애절하게 그리고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맑은 가락의 소리였다. 어머니 묘 앞 여막에서 박연朴然이 부는 피리 소리였다. 심천 마곡리 뒷산 한참 숨이 차게 올라간 산골짜기이다. 피리 소리를 따라 뭇 새들이 모여들고 저마다 자기 이름의 울음소리를 내었다. 뻐꾸기 산비둘기가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고 꾀꼬리 까막까치도 기승을 부렸다. 풀벌레들도 앞다투어 자기 소리를 보태었다. 우는 게 아니고 예쁘게 노래하는 것이다. 간절한 피리 소리에 제각각 장단을 맞추고 화답하는 새들 벌레들의 코러스였다. 소리는 더욱 간들어지고 구성지고 신이 들렸다. 혼신을 다하여 피리를 부는 것은 삼시 상을 차려 제주를 올릴 때 권주가이기도 하고 때때로 즐겁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려는 효성이다. 어머니 묘 옆에 여막을 짓고 풍설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애통한 마음으로 엎드려 있었다. 세 살 때 여읜 아버지에게는 더욱 한이 되어 지극정성을 다해 시묘侍墓를 하였다. 뒤의 얘기지만 모친상을 당하고 3년 그리고 다시 3년을 여막에서 살았 고 그 효행으로 나라의 정려旌閭를 받아 마을에 붉은 정문旌門을 세우기도 하였다. 박연은 어려서부터 피리를 잘 불었다. 들판을 지나며 보릿대를 뽑아 불기도 하고 물오른 버들가지를 꺾어서 가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짤막하게 토막을 내어 굵은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풀대궁을 꺾어 불기도 하고 나뭇잎을 말아서 소리를 내기도 하고 손에 잡히면 다 노래가 되고 곡조가 되었다. 모두들 소리가 남다르다고 하였다. 고당리 마을 강촌 사람들도 뭘 잡고 소리를 내든 참 듣기 좋고 신통하다고 하였다. 열두 살 때부터 나가고 있는 영동 향교에서도 서생들이 그의 음악적 재질이라고 할까 피리 부는 재주를 다 인정하였다. 훈장 선생도 그의 예악禮樂에 대하여 여러 번 칭찬을 하고 범상치 않다고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피리를 불면 여기저기서 온갖 새들이 다 모여들어 즐기고 함께 어우러졌다. 들판이나 강가나 산중에서 그의 옥구슬이 구르는 듯 별이 쏟아지는 듯 간들어진 음율은 언제나 유정하고 귀설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신묘한 경지에 도달해서 산에 올라가 악기를 연주하면 산새들이 모여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고 토끼와 너구리가 한 편에서 춤을 추었다고 문헌에 기록이 되어 있다. 참으로 믿기가 어려웠다. 한 다리 건너 두 다리 건너 조금 보태고 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대목은 그대로 믿기 바란다. 매일 밤 여막으로 찾아와 함께 지낸 호랑이 얘기 말이다. 실은 그 호랑이 때문에 다른 노루나 토끼 너구리 들은 얼굴-수면獸面-을 들이밀 수가 없어 먼발치서 즐겼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날도 어김없이 달빛을 받으며 어슬렁 어슬렁 녀석이 모습을 보이고 여막 아래 젊은 주인의 짚신짝을 깔고 앉는 것이었다. "왔는가.” 박연이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하였다. 호랑이는 킁킁 콧소리를 내며 수인사를 하고. 벌써 몇 년째 교분이다. 어머니 3년 시묘를 마치고 다시 3년을 더 하겠다고 주저앉아 있을 때서부터 매일 밤을 함께 한 것이다. 엉엉 같이 울기도 하고 눈비를 맞고 떨며 끌어안기도 하고 자꾸 산 밑으로 떠밀어내는 녀석과 드잡이를 하며 싸우기도 하였다. 불알을 찼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색정이 동하였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고맙고 미안하고 반갑네.” 이날따라 피리 소리는 영혼을 울리는 선율이 되었다. 그리운 어머니 다시 못 뵐 아버지 언제 어디서 우리 다시 만나리까.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간절한 효성이 배인 가락은 산중 달빛 아래 교교하데 울려 퍼졌다. 박연은 뒤에 이름자를 연堧으로 바꾸었다. 빈 터라는 뜻이다. 아호는 난계蘭溪, 강마을에 난초가 많았고 난처럼 연하나 꺾이지 않고 청아한 생을 기록하였다. 묘는 고당리 생가가 있는 마을 뒷산 너머 금강으로 흘러가는 개여울을 내려다보는 곳에 썼다. 내외의 묘가 앞뒤로 있는 묘비 앞에는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산신령과 잘 생긴 호랑이가 자기 무덤-의호총-옆에 늠름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묘소 입구 올라가는 길목에는 난계를 기념하는 재각 경난재景蘭齋가 새로 단장되어 있다. 여러 기록에 박연이 시묘살이를 하던 곳이라고 되어 있는데 위치 거리가 사실과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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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 이야기 2고서는 헌책이 아니다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책은 ‘도서(圖書)’ 또는 ‘서적(書籍)’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도서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준말로, 중국 성대(聖代)에는 "황하(黃河)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씨가 나왔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책이란 한자의 ‘책(冊)’자에서 비롯된 말로, 옛날에 댓가지나 나무에 글을 새겨 그것을 나란히 꿰맨 데서 그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한국서지학사전』(1974)에는 "어떤 사상이나 사항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한 종이를 겹쳐서 꿰맨 물체의 총칭”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사람의 사상이나 감정을 나타낸 것이라 하더라도 내용 면에서 어떤 체계를 이루어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국제적인 규정은 49면 이상의 분량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휴대나 열람에 적당치 못하다면 진정한 의미의 책이라 말할 수 없다. 이처럼, 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보다 구체적이고도 논리적으로 풀어내기는 쉽지 않다. 국어사전에서는 고서를 ‘옛 책, 고서적’ 또는 ‘헌책’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는 모두 옛날 책, 즉 오래된 책을 뜻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헌책’이라 하면 낡은 책 또는 오래되어서 허술한 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굳이 옛 책(고서적)과 헌책을 구분한다면, 비교적 가치가 있으면서 오래된 책을 옛 책 즉 고서라 할 수 있고, 비교적 가치가 덜하면서 오래 되지 않은 책을 헌책이라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한국고서동우회(현 한국고서연구회)에서는 "1959년 이전에 출판된 책을 고서라고 할 수 있다”고 규정한 바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실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때까지 출판된 책을 도서관이나 그 밖의 수집가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상당히 타당성 있는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959년을 기점으로 역사적으로나 출판사적으로 어떤 뚜렷한 사고나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6․25 전쟁이 끝난 1953년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6․25는 우리 근대사의 커다란 사건으로 이 당시 수많은 책이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는 출판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라 이 기간 중에 출판된 책의 수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기준들은 어디까지나 고서를 규정짓기 위한 최소한의 편의일 뿐 어떤 구속력이나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점 이전의 책은 귀하고 그 이후의 책은 귀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고서로서 가치가 덜한 것이 있고,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책이라도 매우 귀한 가치를 지닌 책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래 되었다고 해서 모든 책이 고서로 대접받는 것은 아니다. 양서(良書)라야 고서로서 대접받는 법이다. 그렇다면 양서란 어떤 책일까. 요즘의 출판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답을 얻을 수 있다. 출판된 지 50년, 100년 후에도 고서 수집가가 찾을 만한 책이라면 양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의 베스트셀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과는 좋은 대조다. 한적(漢籍)은 한지에 인쇄 또는 필사를 하여 꿰맨 책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출판 방식으로 만들어진 책을 말한다.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은 우리 옛 책의 인상에 대해, "볼품없는 것들로 크기는 보통 8절판에서 12절판이고 별로 두껍지 않으며, 표지는 견고하지 못한 노란 살굿빛 조잡한 종이에, 무늬를 조각한 목판으로 눌러 새긴 반들거리고 빽빽한 양각(陽刻)의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구한말 서울 광교 부근이나 시골 장터에서 좌판을 벌려 책을 판매하던 모습을 보고 기록한 것이다.(*사진 2) 당시는 이제 막 서양의 신식 인쇄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의 전통 인쇄술과 뒤섞여 일견 조잡한 인쇄물이 많이 출판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쿠랑이 위에서 설명한 책들은 구한말의 저급 상업출판물로서의 한적을 이르는 것이다. 쿠랑은 우리 책의 제본 방식에 대해, "책들은 홍사(紅絲)로 다섯 혹은 여섯 군데를 꿰매 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고서는 네 군데나 여섯 군데를 꿰매는 데 비해 우리나라 고서는 보통 다섯 군데를 꿰매는 ‘오침안정법(五針眼釘法)’으로 제본되어 있음을 이른 것이다.(*사진 3) 또 종이의 질과 인쇄 상태에 대해서는, "종이는 잿빛을 띠고 아주 얇고 부드러운데, 지푸라기나 자그마한 먼지 또는 흙 알갱이가 낀 구멍들이 있어 자연히 이런 곳에는 인쇄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우리 한적에 사용된 종이의 질은 매우 우수한 편이다. 쿠랑이 이르는 것은 구한말의 상업출판물 중에서도 그 됨됨이가 조악한 인쇄물이다. 쿠랑은 이러한 책 외에도 "완전치 못하거나 닳거나 더러워진 것, 뜯어졌거나 좀먹은 것들도 있었다”고 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좌판이나 전방(廛房)에서는 신간 서적뿐만 아니라 고서도 판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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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2작자미상 간밤에 불던 바람 江湖에도 부딪치니 滿江船子들은 어이구려 지내런고 山林에 들은 지 오래니 소식 몰라 하노라 작품해설 지난 밤 불던 바람이 강호에도 몰아치니 강에 가득한 어부들은 어떻게들 지내시나 산속에 들어 와 산지 오래라서 소식조차 모르겠네. * 강호: 정치의 중심지인 서울(한양)을 지칭. * 만강선자: 조정의 많은 신하 현실정치를 떠나 자연과 더불어 살며 옛 동지들의 사정을 궁금해 하면서도 안빈낙도의 즐거움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다. 작품감상 한글서체는 고체(古體)와 궁체(宮體), 민체(民體)로 크게 나누고, 다시 궁체와 민체를 정자체와 흘림체로 각각 세분할 수 있다. 이번 작품은 민체 중 정자체에 속하는 글씨로서, 비교적 작가의 서풍을 자유분방하게 드러낼 수 있는 서체이다. 이 작품에서는 전체적으로 편안하면서 넉넉한 느낌을 주고자 하였다. 작가 이종선(李鍾宣) 호-한얼, 醉月堂 전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 현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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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2‘잡가’(雜歌)는 전통사회에서 전승되어 조선 말기에서 20세기 초에 성행하였던 성악곡의 하나로서 전문예능인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소리꾼이 긴 사설을 기교적 음악어법으로 부르는 노래다. 불렸던 지역에 따라 경기 잡가, 서도잡가, 남도잡가로 나누기도 한다. 잡가는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과정을 거쳐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잡가는 민요보다는 엄격하고 정가보다는 자유롭다.’라고 회자되어 있다. ‘경기12잡가’는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지역에서 불렸던 잡가로 앉아서 부르며, 좌창 또는 긴잡가라고도 한다. 가사 내용은 판소리처럼 서사적 이야기이고, 처음에는 8잡가였으나(유산가·적벽가·제비가·집장가·소춘향가·선유가·형장가·평양가) 후에 달거리·십장가·출인가·방물가가 더하여 ‘경기12잡가’가 되었다. 12라는 수로 엮은 것은 이전의 판소리 12바탕, 12가사 등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송은주 소리꾼의 <12잡가 눈대목>은 ‘경기12잡가’음반으로 소리꾼의 첫 음반이다. 잡가는 보통 장구 반주로 부르며, 전곡은 2시간~2시간 반 정도로 CD음반 2장 내지는 3장에 담고 있다. 이 음반은 눈대목이라는 이름 아래 분량을 반으로 축소하여 1장에 담았다. 반주도 장구가 아닌 기악 반주로 가야금 임정완, 대금 김태현, 피리 김태형, 해금 소윤선, 장구 이지안이 참여하였다. 서양 오페라에서는 ‘Highlights’라는 이름으로, 판소리에서는 ‘눈대목’이라는 이름으로 음반이 많이 출반되어 왔지만 ‘경기12잡가’ 음반에서 눈대목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 음반이 처음이다. 곡 중에서 좋은 대목을 선별하고 이어서, 감상자들이 편하게 5분 정도로 발췌하였다. 송은주 소리꾼은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원 한국음악학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김금숙, 이은주 명창을 사사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이며 현재 전주대사습보존회 이사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사실 판소리 완창이나 경기12잡가 전곡을 듣는 것은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처음으로 12잡가 눈대목이라는 음반을 출반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평가는 감상자의 몫이다.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GGC-20018&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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