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리뷰 뉴스목록
-
사할린 한국어 교육자, 박승의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이메일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세 번째 인터뷰는 사할린 한국어 교육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전 사할린국립대학 한국학과 박승의 (1941년 생)교수를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박승의 교수는 한국어교육에 힘쓰고. 사할린 한인 연구에 진작해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가 담긴 3대에 걸친 가족사가 자서전으로 출판되어서 관심을 받고 있다. 며칠을 밤새어서 들어도 끝나지 않는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박승의 교수의 사할린 디아스포라 이야기는 다음 2편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이번 1편에서는 사할린 한국어 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질문을 하고자 한다. 기미양-안녕하세요. 사할린에서 2010년 파주로 영주귀국하신지 올해가 11년이 되시네요.이번에 국외동포 체험수기공모전에 '사할린에 팔려간 이쁜고모'로 첫번째 KBS한민족상 수상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재외동포뉴스와 연합뉴스 및 국악신문 등 사할린 새고려신문에 주요 뉴스로 나갔습니다. 수상소감 부탁드립니다. 박승의-안녕하세요? 심사위원님들께 저의 소박한 글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할린 한인 1세대는 혼자 또는 가족과 사할린에 강제동원, 강제이주하여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목숨을 담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탄광과 산판에서 모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건강의 악화와 자녀의 양육 및 교육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모국귀환의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의 지원 대상자들은 영주귀국을 선택하느냐, 사할린에 잔류하느냐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출생한 사할린 한인은 영주귀국 지원대상에 제외되기 때문에 또다시 형제자매와 자손들과 헤어져 살아야 합니다. 이산의 이산은 세대를 거치면서 반복됩니다. 기존 기록에서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역사적 측면에서 주로 남자들이 강제동원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여성들이 남편을 찾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후토(사할린)로 가서 모진 고통을 이겨낸 사실을 묘사한 글은 전혀 없습니다. 작은 글이나마 여성들의 공적을 공평하게 평가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잊어서는 안되는 뼈아픈 역사를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싶었습니다. 러시아에 살지만 뿌리를 잊지말자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일단 이 수상 소식이 여러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가 주목을 받고 이슈화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KBS방송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Q:박승의 교수님은 사할린2세로서 1945년 이전에 태어나셔서 사할린1세의 자격으로 한국에 영구귀국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서 사할린에 강제동원 되었는지요? 처음에 어느 지역으로 배치되었나요? A; 밀양 박씨 아버지 고향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입니다. 1939년 결혼 후 한달 반만에 강제모집으로 가라후토에 가게 됐습니다. 그 당시 오찌아이 (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습니다. 이후에 어머니는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나셨고 임신 상태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경유해서 가라후토에 오셨습니다. 1945년에 해방되셨으나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끝끝내 타국의 땅에 파묻혔습니다. 한국에 와서 조상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고향에는 2번 방문했습니다. 자세한 가족사는 최근 출판한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에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Q:보내주신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저자: 박승의)는 잘 읽었습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단숨에 읽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메세지는 ’조선인 박승의‘, 다까하라 가쯔요시, 보꾸 다까하라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대한민국 박승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야만 했다는 부분입니다. 구체적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일제강점기 당시 저는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당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일본국적을 지닌 조선인으로 출생을 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이 되었지만 가라후토에 억류된 조선인으로 아버지의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무국적 조선인으로 살다 소련 국적을 받게 되고. 다시 러시아 국적을 받게 되고 러시아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78년을 살면서 6번이나 국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일제시대에 태어나서 3년동안 일본 국민으로, 1945년 해방 후 무국적자로, 1958년에 북한 공민으로, 1970년대 소련 국적자로, 1990년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 국민으로, 그리고 2010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삶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는 일본 아이들과 놀면서 일본말과 더불어 일제 사상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1948년 조선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 받았으며, 2009년부터 대한민국 자본주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제도가 바뀌면서 이름도 변해야 했습니다. 다카하라 가쯔요시에서 박승의로, 박승의에서 박유라로. 의사소통도 세 민족의 언어로 하였습니다. 일본어, 러시아어, 그리고 한국어로. 그래서 나 스스로"나는 누구냐?”란 질문에 답할 때 머리가 터질 지경으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타 지방에서 살면서 우리 민족의식과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 부모들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사할린 영주귀국자들은 대다수 결혼도 같은 동포끼리 했으며 현재 러시아에 남아있는 자녀들도 러시아인과 결혼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강한 학구열을 가지고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이기도 합니다. 평생 러시아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한국 음식을 고집해 먹는가 하면 다른 민족들에게 한국요리 조리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Q: 지난 신문방송에서 ”한글을 알아야 한민족 정신을 지킨다" ‘사할린 한국어 운동가 박승의’ 라는 짧은 다큐를 보았습니다. 사할린에서 한국어 교육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서로 동질감을 느껴 힘을 나누면서 하나로 뭉칩니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조국이 아닌 해외에 살며 한민족 정신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세계화 추세에 맞추어 세계 한민족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합니다.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서로 힘이 되어주고 한민족의 인식을 더욱 강화시켜야 하므로 이 측면에서 한국어 교육 및 민족교육은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많이 발전하며 잘 사는 것이 국외 동포들에게는 무한한 힘이 되고 자부심을 갖게하는것임은두말할나위없습니다.저도 1988서울올림픽 이후 사할린에서 '한국 붐'이 일어 났을 때 한국어 교육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89년에 여러 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으며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협회설립 초기부터 회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1992년에 6개월간 서울 연세대 어학당을 마치고 사할린대학교 한영과에 취직하여 전임 교수로 거의 20년 동안 자라나는 4세대의 교육과 교양에 모든 정성과 힘을 바쳤습니다. Q: 2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할린한국어교사협의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A; 1992년에 사할린주 한국어 교사 협의회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이 협의회(회장으로 이옥자, 공노원, 김순희, 박승의, 코르네예바 이브)에서 한국어 지도에 필요한 교재 구입과 공급 그리고 한국어교사 연수회를 주관하고 일반 학교 학생들의 한국어 경시 대회를 매년 조직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인단체와 연합하여 대한민국 교육부에 건의하여 사할린에 교육원을 설립하도록 힘썼습니다. 한국어 교육 활성화를 교사협회는 사할린한국교육원과도 밀접히 사업하고 있으며, 한국교육원은 한국측에서, 협회는 러시아측에서 사할린에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Q: 사할린 한국어교육을 위해 사할린 동포사회는 어떤 일을 해오고 있나요? A; 사할린 한인 사회의 언어 문제는 역사적 여건에 의해서 이루어진 언어의 간섭과 접촉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특이합니다. 일제때 사용하던 일본어가 한국어와 러시아 어 사이에 끼어들어 있습니다. 한인1세는 모국어인 한국어, 생활어였던 일본어, 그리고 러시아어를 구사합니다. 이들의 한국어 읽기 쓰기 능력은 떨어지며, 러시아어도 정확한 구사는 어려운 듯합니다. 한인 2세 가운데 1935년 이전 출생자는 부모에게서 배우고 들은 한국어를 구사하며, 학창 시절을 일본어로 보냈고, 러시아어를 정식으로 교육받기 시작한 세대입니다. 이들 가운데 대략 1941년 이후 출생자는 공식 언어생활을 러시아어로 한 세대입니다. 가정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쓰기도 하였고 투철한 민족 의식을 갖지 않거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생활하지 않은 사람은 한국어를 잘하지 못합니다. 조선학교가 있었던 1946년부터 1964년 사이에 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국어를 잘합니다. 그러나 1964년부터 25년 간 한국어 공백 기간에 청소년기를 보낸 30, 40대들은 한국어를 잘 구사할 수가 없지만, 능숙해진 사람이 많이 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한인 3세는 공식적인 언어생활을 러시아어로 하여 모든 생활이나 사고 방식이 러시아인과 같습니다. 한국어를 잘 쓰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은 당연히 한국어를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은 외국인(러시아 인)에게 하는 한국어 교육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Q: 사할린에 강제동원으로 끌려온 경북 의성 출신이고, 당시 지식인으로 활동했던 춘계 '류시욱' 선생님이 남기신 한글 일기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셨는데, 어떤 작품인가요? A; 나는 춘계 류시욱의 '산중 반월기 (山中半月記)'를 여러번 읽고 러시아어로 번역했습니다.춘계 류시욱은 1920년 5월 14일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속암동 고실촌 류성룡 선생 집안에서 13대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류시욱은 젊은 시절에 문예 창작과 사상활동을 벌이다가 서대문형무소와 사상범 교화보호소에서 옥중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사상범으로 출옥한 조선인들에게 강요된 징병을 피하기 위해 류시욱은 가라후토(현 사할린)로의 동원을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산업보국대원으로 찍혀 마을 사람 20여명과 함께 사할린으로 끌려가게 되어 가라후토 나이부치 탄광에 도착한 때가 1941년 2월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으나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조선학교의 교사로 류춘계 선생은 돌린스크 구역에서와 돌린스크시에서 교원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조선어 문법” 및 "조선 문학”을 가르치셨습니다. 조선학교 폐교 후 '세월은 흘러가고 과거의 꿈은 사나운 폭풍에 갈가리 찢겨 쓸쓸한 유폐의 암흑' 속에서 류시욱의 시절은 무의미하게 지나갔습니다. 희망도 기대도 없이 그는 인생의 반 이상을 이국 땅의 노동자로 살다가 1962년에 노동 현장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춘계 류시욱이 1957년 9월 1일부터 15일까지 15일간 사할린 "크라스노고르스크 임산 사업소 직속인 임동화(林東樺) 브리가다가 새풀치러 가는 곳에 식모(食母, 밥을 해주는 사람)로 따라가 쓴 일기다”(저자의 자서에서). 저자가 1957년 9월의 보름을 지낸 사할린 크라스노고로스크의 산속은 외부와 100리 고립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단절된 허술한 풍막은 고향과 수천 리 떨어진 사할린 섬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갇힌 삶과 닮아 있었습니다. 목적 없는 삶 속에서 하루살이하는 매일 매일의 끝없는 외로움 때문에 그는 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동료들이 새풀을 치러 나간 후 혼자가 되면 구멍 뚫린 천막 앞으로 나와 소통에 대한 소원을 페이지마다 채워 나갔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토의하며 일제의 강압과 이데올로기의 장벽으로 생이별하게 된 가족과 이른바 내적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던 그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고향의 ‘한오리 신작로’가 뻗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는 정직하게 사할린으로 끌려가 소련 체제에 갇혀버린 평범한 조선인들이 수없이 우물거렸을 속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일기는 개인적 회고를 넘어 자신이 동원되었을 시기를 전후한 시대와 인물들에 대해 날카롭고도 풍부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가치있는 사료가 되었습니다. Q: 춘계 선생 외 사할린의 한인문학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사할린 한인의 문학은 CIS 한인들의 문학과 같이 상당히 오래되고 견고한 전통을 자랑하지는 못합니다. 이는 러시아에서의 거주 기간이 겨우 70년이이고,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도, 그리고 사할린의 초기 한인 이주민들이 일본 당국에 의해 남한의 시골에서 사할린으로 동원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다는 사실로도 설명됩니다. 이것은 특히 전후 첫 시기에 사할린에서의 지식인 집단 형성에서도 나타남을 의미합니다.'사할린의 한인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김증손과 아나톨리 김이 사할린에 거주하며 사할린에 대한 글을 썼던 작가들이지만,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고려인)이었고, 그들의 작품은 CIS의 모든 한인 디아스포라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할린 한인들 중에서 우리는 장윤기와 허로만의 작품을 알고 있으며, 사할린의 문학 전통에 중요한 영향을 주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에서 유명한 일부 다른 저자들(양 세르게이)을 알고 있습니다. Q: 사할린 한인으로서, 교육자로서, 사할린한국문화원과 교육부에 요청을 하고 싶은 것은? A; 사할린의 한국어 교육은 사할린 한인 1세의 영주귀국으로 인한 한인동포수의 감소, 한국어교사 부족 및 고령화 현상 등으로 점차 악화되는 추세입니다. 말을 잊어버리면 다음에는 고유의 문화를 잊게되고 결국에 가서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할린 한국교육원에서는 한인동포 청소년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매년 한국어 교사를 대상으로 교원 연수를 한국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모국연수 기회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에게 한국연수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사관, 교육원, 한인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한민족 전통문화를 동포들과 현지 러시아인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속)
-
춤으로 남북을 잇는 최신아예술단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Pick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두번째 인터뷰어는 함경북도 청진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함경북도예술단에서 활동한 최신아예술단 최신아 (1969년생)단장을 국악신문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기미양-안녕하세요, 먼저 통일부에서 통일교육위원으로 위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최신아 선생님, 북에서 대한민국에 온지 얼마나 되었나요? 최신아-네, 감사합니다. 아마도 북한에서 오신 분들 중 통일교육위원으로 임명을 받은 사람은 제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 온지 10년이 안되었지만 제가 이룬 성과 중 가장 기쁜 일 중 하나입니다. 2012년 봄에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처음에 와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Q.북한에서 한국에 온 이유는? A. 저는 함경북도 예술단 예술 감독을 26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는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탈북을 했습니다. 우연히 중국에 나왔다가 인터넷에서 남한 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한 땅에 평양예술단이 있다고 해 보니 진짜 순수한 북한예술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짦은 순간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첫째 남한에 가서 진짜 최승희 무용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둘째 북한에서 예술가는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저의 이름을 걸고 나만의 고유한 예술세계를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셋째.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귀멀고 눈멀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과 함께 자유민주주의가 있는 남한에서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Q.중국에서 직접 한국에 왔나요? 오면서 힘든 고비를 어떻게 넘겼나요? A. 네, 저는 2009년 북한에서 여권을 떼고 중국에 와서, 태국으로 넘어가서 3개월 후 한국에 가기 위해 죽음의 사선을 넘고 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펼칠 수 없는 순수한 예술을 위해, 저희 예술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났는데, 당시 검열이 너무 심할 때인지라 검열관이 내 앞에 서자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벙어리 역활을 했는데 그게 통하더라고요. 하늘이 도우셨다고 기도를 하면서... 곤명으로 와서 산을 6시간 타고 죽기 살기로 태국으로 건너 갔습니다. 거기서방콕을 거쳐 한국으로 무사히 입국하였습니다. 가파른 산 비탈길을 넘어야 하는데 당시 중국에서 만나서 같이 도망을 나온 어린 친구가 더는 못가겠다고 그냥 여기서 죽겠다고 땅바닥에 주저 앉아서 포기할 때, 같이 죽더라도 한국에 가야 한다고 그 친구를 부추켜서 붙잡고 오느라 땀이 어찌나 비처럼 쏟아지는지....간신히 고개를 넘고 넘어 태국까지 무사히 건너왔습니다. 거기서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드디어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자유의 나라로 왔습니다. Q.나중에 큰 따님 강나라는 북한에서 어떻게 탈출했나요? 남겨진 북한의 딸은? 가슴 아픈 질문을 드리네요. A. 제가 한국에 와서 3년 만에 맏딸을 데려왔는데요. 늘 가슴 한구석에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갈망하던 끝에 브로커를 통해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아직 오지 못한 막내딸 때문에 밤에도 제대로 못자고 있지만 함께 살 그날만 그려봅니다. 맛있는 음식 먹을 때마다 목구멍에 잘 안 넘억갑니다. 멋있는 옷도 사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꿈에서는 가끔 만나서 붙잡고 울고...자식 그리운 것은 말을 다 할 수 있을까요? Q.북한에서 무용가로만 활동하다가, 처음에 남한에 적응하기 얼마나 어려웠나요? A. 한국에 와서 3년 동안은 막막했습니다. 무용을 포기하고 자신을 치유하고자 하루종일 창가에서 십자수를 시작했습니다. 힘들게 한국에 왔지만 하나원을 나오니 직업이 없는 실업자가 되더라구요, 그래도 북한에서는 완벽한 무용가였지만 여기서는 그걸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무용을 포기하고 집에서 십자수를 하며 나 자신을 위로하고 식당에 나가서 알바로 생활비를 벌면서 살았습니다. 첫번째로 답답한 것은 이질화 된 남한의 문화극복이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언어 소통도 힘들고 무엇을 사려고 해도 말(표현)이 너무 달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없었습니다. 북에서 온 사람 중 주유소에서 전화 받는 일을 하다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1달도 못 버티고 식당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분도 많습니다. 돈을 북한에서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빈손으로 왔는데 저희한테 주어진 것은 오직 실업과 빈곤이었습니다. 좌절도 했고 다시 북에 가고 싶은 생각을 하루에도 열 번씩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나서 예술 활동을 하면서 남한에 와서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거든요. 지금은 SNS를 통해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격려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Q.탈북후 다시 무용가로서 기회가 주어진 것은 언제인가요? 대한민국에 와서 꿈은? A. 제가 2015년도에 7월에 한통의 전화가 오면서 그때부터 무용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국악방송국에서 진행하는 '국민대통합 아리랑'공연에서 전국 순회 공연에출연하면서 저라는 사람을 알리게 했고, 그로부터 최신아예술단 창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에는 강남문화재단이 주최하는 759회 목요상설무대에서 ‘아리랑 아라리요 북에 보내는 편지‘를 발표하게 되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지역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한 기획공연을 통하여 많은 관심과 호응을 얻었습니다. Q. ‘최신아예술단’을 창단하시게 되는 계기가 궁금합니다. 소개도 해주세요 A. 최신아예술단은 2015년 11월에 창립됐습니다. 2012년 4월에 하나원 나와서 3년후 국악방송국 모 간부가 방송출연에 나와달라고 해서 북한에서 경력을 밝히고 난후 국민대통합 아리랑에서 장구춤을 선보인 후 격려와 용기를 받고 결심을 했습니다. 저의 이름 세 글자를 걸고 최신아예술단으로 만들어 현재까지 공연하며 오고 있습니다. 전통무용을 전공으로 한 대학 졸업생들로 오디션을 통해 5명의 인원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현재는 무용을 전문으로 배웠던 분들도 계시고 또 대한민국의 살풀이 이수자분들도 계시고 초등부 학생들도 계시고 취미반도 있고 성인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용을 정말 너무나 하고 싶었는데 체격이 안되거나 여러 가지 조건으로서 못했던 분들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 저에게 배우러 오기 때문에 "최신아 무용연구소”라 하면 정말 대한민국에 없는, 한 동작 한 동작 체형에 맞게 연구하면서 배워주는 연구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현재 문하생들은 글로벌하게도 중국 유학생부터 조선족, 일본, 캐나다, 그리고 한국분들. 탈북인들을 대상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방에서도 많이 오고 계십니다. 이제는 최신아무용연구소로 발전시켜서 현재는 예술단과 무용연구소를 겸하고 있습니다. 우선 남한에 오신 북한 출신 예술가들과 소통을 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북한무용이나 최승희무용에 대한 연구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Q.처음 남한에서 섰던 첫 무대는 언제 어떤 무대인가요? 이후 특별한 무대는 A. 영광스럽게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아리랑 명인 이춘희 명창과 남도잡가 신영희 명창과 함께 하는 '2015국민대통합 아리랑 순회공연'을 성료하고, 2016년에는 괌에 초청돼서 북한무용을 보여주는 특별한 공연을 했고, 2018년에는 인도에 가서 ‘남북의 아리랑’ 주제로 투어공연을 하면서 북한무용의 진수를 알려왔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최근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하는 2019년 제3회사할린아리랑제입니다. Q.기사를 검색하니 최근 해외공연으로 사할린에 갔는데? 어떻게 해서 사할린아리랑제에 가게 됐나요? 북한 출신은 안보상 북한과 가까운 사할린을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A. 그해 4월 이미시문화서원(좌장:한명희) 주최로 열린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추념 음악회'에 최신아가 이끄는 최신아예술단이 출연해서, 선보인 최승희의 '장고춤'을 사할린 동포들이 본 것이 이번 초청의 기회가 됐습니다. 그 중 한 가족이 고향이 북한이라고 합니다. 이후 사할린 동포사회에서 꾸준히 아리랑을 알려 온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장)에게 사할린 동포들이 부탁해서, "사할린 동포들이 최신아 씨를 무조건 초대해달라고 했다"고 전해 듣고 가게 되었습니다. 가보니 북한이 고향인 분들이 적지않게 계시더군요.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났지만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시는 고난을 위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Q.2019사할린아리랑제 공연에서 어떤 작품을 선보이었나요? A. 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 기획 측에서 북한의 대표적 무용 '쟁강춤' 선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북한 고유의 민족성이 담긴 쟁강춤은 북한 무용의 꽃입니다. 귀신을 쫓고 복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손에 부채를 들고, 손목에는 방울을 달아 '쟁강쟁강' 소리가 나는 '쟁강춤'은 최승희의 '무희춤'으로부터 이어져 온 대표적인 북한무용입니다. 남한 전통무용에 비해, 러시아 예술만 접해 온 동포들에게 우선 북한무용은 박자나 호흡 속도가 러시아 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 한국 전통무용과 북한무용이 한 무대에서 이루어져서 감동이었습니다. 한국무용가 영덕에서 오신 김옥순 무용가의 전통무용의 정적인 살풀이춤과는 대조적이어서 조화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음에도 또 와 달라고 했습니다. 저 자신도 관객의 호응과 열기가 전해져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Q.70년 동안 우리는 남과 북이 갈라져 있다. 북한 무용가로서 사할린아리랑축제에 다녀왔는데, 예술가로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A. 북한무용가로서 최승희 선생님이 최초로 사할린에 공연 갔는데, 제가 또 두 번째로 최승희 선생님의 뒤를 이어서 사할린에 가서 공연하고 왔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북통일에는 동포사회의 역활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우리 가족은 북과 남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북에 공부하러 간 자식들을 마음대로 오고가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만나는 길은 남북통일 밖에 없다. 우리는 갈라져 있지만 하나의 민족이다"라고 하시면서, 저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리셨습니다. 남북을 잇는 예술가의 길을 가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습니다. 제가 북한무용을 알리는 길도 통일에 기여한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한무용을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꿈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북한에서 무용가 입문경위 Q.언제부터 무용을 시작했나요? 계기는? A. 저는 평양에서 알아주는 예술가의 집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배구를 좋아해서 초등학교에서는 스포츠 소조 활동을 하였습니다. 저희 학급이 2중 영예 붉은기 학급이 되어 배려로 평양학생소녀궁전 가야금 소조에 다니게 되었는데 제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복도에 나왔다가 신명나는 장단소리가 나서 호기심으로 찾아 간 곳이 무용소조였습니다. 그러다 그 다음 해 우리 가족은 청진으로 추방을 당해서 지방으로 내려와 예술대학에 월반으로 입학해 본격적인 무용가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3살입니다. Q.해방후 남과 북은 민속예술도 이질감이 생겨났습니다. 북한 민속무용은 전통적 민족무용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고 시대의 목적에 따라서 재창조 되어 민족적 색채를 지닌 현대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무용은 빠르기나 호흡이 전통무용보다 훨씬 빠릅니다. 재창조 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체제 나라 중 영향을 받았나요. A. 북한은 1950년 이후 가장 영향을 받은 무용은 우쿠라이나 발레입니다. 남한은 현대무용 하는 분들이 따로 있고 발레 하는 분들이 따로 전통 무용하는 분들이 따로 있어요. 남한은 더운 지역이다 보니까 빨리 추면 덥지 않아요. 그러니까 온유하게 천천히 부드럽게 그냥 우아하게 부드럽게 춤을 추지만, 북한은 아주 추운 지역이어서 가만히 있으면 춥기 때문에 항상 뛰어야 되요. 러시아처럼 발 동동 구르며.... 그런 식으로.... 춤이 역동적이고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경쾌한 춤이 나왔기 때문에..... 전래되는 놀이문화를 봐도 남과 북의 차이점이라 하면 남쪽은 따뜻해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춤사위가 살아있고, 북한은 추위가 강하니 강렬함과 역동적인 춤사위가 다른 것 같습니다. 북청사자놀음이나 밀양백중놀이를 비교해 봐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Q.(남한과 비교해서) 북한무용의 특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북한무용은 당의 문예정책에 의해 '민족적 형식과 사회주의 내용'을 주입시킨 시대적 변용에 의해 새로이 창출되었다고 하는데, 예를 든다면? A. 그래서 전 인민에게 노동을 장려하는 천리마 운동을 하는데 신나는 박진감 있는 박자가 어울리지요. 남측이 계승하고 있는 전통무용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요. 북한은 "인민의 민족적인 생활풍습과 정서가 짙게 반영되어 있는 예술형식의 하나”로 무용예술을 정의하기 때문에 민족무용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남한무용이 자신의 의도와 감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면, 북한무용은 당에서 내려온 문예정책 안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예술적 사고의 확장을 위한 다양한 주제나 느낌을 표현하는 활동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로 이루어진 예술무용에 대한 심미안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북한무용이 탄생한지 올해로 70년이 됩니다. 북한학으로 보지 않고, 시대적 문화변용(Acculturation)에 의한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Q.북한무용을 한마디로 한다면? A. 북한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최승희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남북이 갈라지고 나서 북한은 사회주의로 길을 가면서 예술도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러시아 예술을 수용했습니다. 1950년대부터는 우리 전통무용을 근간으로 한 우크라이나 무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빠른 반주에 맞추어서 동작을 크게 하면서 우화함과 세련된 춤동작을 창작하여 왔습니다. 추운 지방의 특성을 살려 경쾌함과 역동적이며 빠른 톤으로 춤동작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북한 무용수들은 발레에서부터 모던댄스는 기본동작으로 배우고, 한국 전통무용을 전공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1960년대는 발레 기본과 최승희 선생이 정리한 '조선무용기본'을 통해 무용수들을 훈련해 왔지만, 1970년대 이후부터는 변화가 일어나서 '민속무용기본'을 만들어 무용수들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춤 연구가 정병호 교수는 북한무용에 대해서 "대체로 움직임이 기계적이고 절도가 있으며 동작이 크고 빠른 동작이 많으며, 목이나 손목 동작은 유난히 각을 많이 만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Q.무용가로서 가장 존경하는 무용가는 누구인가요? A. 제가 가장 존경하는 무용가는 예전에도 현재도 '최승희'선생님이십니다. 일제강점기 조선무용을 전세계에 알린 세계적 예술가이십니다. K-한류 1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동양인으로서 일단 쭉 뻗은 큰 키와 섬세한 맵시, 서구적 마스크와 유연한 품세를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 나와서 더욱 자세하게 알게 된 보살춤 같은 창작작품은 환타지를 넘어 신비주의를 보여줍니다. 북한 무용의 발달 과정은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일제시대부터 이어 온 신무용으로서 조선민족무용과 서양식 무용을 근간으로 당의 목적과 필요성에 의해 재창조 되고 있다. 1960년대 와서는"민족적인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으라”는 당의 문예정책에 부합하는 민속무용으로 개발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혁명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북한무용을 이끌어온 '피바다식 가극무용'이 공연되면서 지금의 북한민속무용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Q.북한에서 무용가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A. 저는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을 모시고 무대를 한 적도 있습니다. 북한 전국무용대회 솔로(독무) 무대에서 15년 동안 1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1등을 해야 하는 성격입니다. 다행히 달리기 수영 등산 등 대회에서 늘 상위권을 할 수 있는 체력을 타고 났습니다. 부모님께 감사하죠. Q.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무용을 사제자로 전수받은 탈북 무용가 최신아라는 타이틀이 붙고, 이병옥교수가 최단장을 최승희 무용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해주셨는데, 무용가로서 자신의 소개 부탁드려요? A. 탈북 무용가 최신아라는 타이틀은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북한무용 자체가 최승희 선생님의 무용정신을 이어 받았기에 거기에 저도 포함되어 있던 것 같습니다.저는 북한에서 예술대학을 졸업하였고, 그후 예술단에서 무용수로 한 26년간 활동하다가 남한에 온 지 11년이 됐어요. 최승희 춤 중 가장 자신있게 출 수 있는 춤은 사당춤, 장구춤, 쟁강춤입니다. Q.북한에서 최승희 무용은 누구에게 배우셨나요. 스승이 ‘최승희 무용’을 가르칠 때 최승희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하셨나요? 북한에서의 최승희 무용가에 대한 평가는? A. 저희 담임 선생님이 최승희 선생님의 제자다 보니까, 최승희 선생의 사당춤을 배워줄 때 한마디 한마디 하실 때마다 최승희 선생님이 이런 표정을 짓고 이렇게 춤을 이런 형식으로 쳤다는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어요. 그래서 북한에선 최승희 선생님에 대해 세 글자만 불러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세 글자 외에는 그 누구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쉽지 않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희 때는 최승희 선생님이 활발하게 활약을 했다는 내용도 잘 몰랐어요. 남한에 와서 많이 알게 되었고 북한에서는 잘 모르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Q.남과 북의 춤을 비교하신다면 어떻게 다른가요? 무대에서 북한과 남한의 관객의 반응은 어떻게 다른가요? A. 남쪽은 무용은 워낙 더운 지방의 특색을 살려 우와하고 부드러운 춤을 추지만 북쪽의 춤은 강한바람과 추위를 이겨내는 고구려 정신으로 경쾌함과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습니다. 북한은 형식적 박수를 치고, 남한은 자연스럼 감성에서 나오는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공연후에 꽃다발도 안겨주고 사인도 해달라고 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남한 춤사위는 화려하고 우와함이 있다면 북한은 화려하고 우와미가 있고, 거기에 다이나믹(역동성)이 하나 더 추가됩니다.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있는 퍼포먼스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남한 무용가의 시선은 무대에서 자기도취형이랄 수 있고, 북한 무용가의 시선은 반드시 시선을 관객과 눈이 맞추어야만 합니다. 관객을 끌고 가는 것이 첫째입니다. 북한 무용은 첫째가 관객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소통이 안되면 완성된 작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북한은 얼굴표현이 아주 중요합니다. 연기력이 있어야 합니다. 관객의 호응을 못 받으면 무대에 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전 선동의 기본이라고 하죠. Q.북한에서 전통무용 살풀이. 태평무를 배웠다는데 북한무용 춤사위 기본동작에 어떻게 반영되나요? A. 북한무용 춤사위 기본동작에는 살풀이 태평무를 위한 동작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앉기동작과 수건춤 동작, 뿌리치기 동작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문예정책에 의하면 북한의 무용은 이러한 민족무용을 근간으로 발전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무용 의상도 전통한복을 기초로 창작됩니다. Q.최신아씨가 북한 대집단체조 공연에서 맡은 역할은? A. 저는 1993년 전승 40돐기념공연 대집단체조 (’대집단체조 아리랑 공연‘ 원조)에서 '기러기떼 날으네' 출연과 동시에 예술감독 역활을 맡았습니다. 작품은 '빈터에서 우리는 자랐다'와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에서 무용수로 참여하였습니다. Q.북한에서 30여년 무용을 하면서 무용가로서 북한 무용가의 자질은 한마디로 무엇인가? A. 무용가라 하면 ‘종합예술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용가라고 하면 첫째 선율에 맞추어서 몸을 움직여야 하기에 음악을 받아들이는 음악적 청음(귀명창)이 발달해야 하고, 기본적 악기를 연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단(박자)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전통무용에서부터 발레, 현대무용을 배워야만이 무대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이론적 단계까지 공부를 해서 무용론, 초리론, 무용표기법까지 완벽하게 마스터해서 소화를 해야만 아래 후배를 이끌 수 있습니다. 육제적으로는 체력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매일 하루도 안 쉬고 혹독한 연습을 해야만이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그 어떤 장르의 예술인들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단련해야만 무대에서 제대로 된 작품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대부분 북한 무용가는 가무악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장구 같은 악기 연주는 필수입니다. Q.주목되는 아리랑 작품이 있는데(아리랑환타지.서울아리랑) 어떤 계기로 만들었나요? A. ‘아리랑환타지’작품은 제이케이앤컴퍼니에서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앙상블과 함께 아리랑환타지 작품을 콜라보로 하자는 제안이 들어와서 보내준 음악을 듣고 결정을 했습니다. 20일 만에 창작하여 여수에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선율에 세계인이 인정하는 신명나는 장구를 메고 장구춤을 형상화 했습니다. 남북의 통일된 모습을 상상하며 기쁨과 상생을 상상하며 화려한 부채와 신명나는 장구춤으로 창작하였습니다. 서울아리랑 작품은 국악방송 15주기기념 ‘기적의 아리랑’ 공연에서 소리아밴드와 함께 콜라보로 창작하여 만든 춤입니다.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이 담긴 긴부채를 꽃처럼 묘사해 행복한 모습을 서울아리랑 음악에 맞추어 춤을 창작하였습니다. Q.'서울아리랑' 작품을 하시면서 직접 부른 가사를 알려주세요 A. ‘그리운 강남’이라고 1930년대 나온 음악으로 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으로 갈 그날을 그리며 창작하였습니다. 가사는 ‘정이월 다가고 사월이라네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입니다. 여기서는 장사익 선생이 잘 부르는 곡이더군요. 이미 널리 알려져서 강남아리랑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래서 서울아리랑 창작무의 주제곡으로 선정했습니다. Q.한국에 나와서 창작하신 무용작품들은 어떻게 만들었나요? A. 무용작품도 시, 소설과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 주제와 내용을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창작을 합니다. 대충이라는 단어는 안 통하는거죠. 그래서 그 어떤 동작을 넣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쓰는 것처럼...시놉시스를 구상하고 시나리오를 짜고, 주인공(배역을 맡은 무용수)들이 내용을 숙지하고 무용으로 옮기는 작업을 통해 하나의 창작작품이 탄생을 하는 거죠. 이 과정에서 며칠동안 잠도 안자고 안무를 구상합니다. 길을 가다가도 구상과 몸짓이 떠오르죠. 한국에 와서는 창작작품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남한의 아름다우면서도 우아한 살풀이, 부드러운 선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역동적이면서 격동적인 무용을 배합하여서 5개의 작품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렸습니다. Q.북한에서 가장 자신있는 당신의 레파토리(대표) 작품은? 지금 제자들과 무대에 오른다면 보여주실 수 있는 총 작품은 얼마나 되는가요. A. 북한에서 가장 자신있는 작품은 장구춤, 쟁강춤, 사당춤, 나의초소, 도라지춤, 물동이춤 등등입니다. 제가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북한에서 배운 장고5인무. 쟁강춤, 사당춤, 장고춤과 제가 남한에서 발표한 창작무 서울아리랑, 아리랑환타지, 그리운강남, 임진강, 삼색부채춤, 매직춤입니다. 어림 잡아 10여 작품입니다. TV조선 '모란봉 클럽'에 출연했던 본인 작품 아리랑환타지가 유튜브에서 인기입니다. 이후 인기있는 작품은 역시 ‘서울아리랑’과 ‘아리랑환타지’ 작품입니다. 무용곡은 남북이 애창하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입니다. Q.현재 인기가 좋은 매직춤(사계절춤) 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어떻게 만든 것인가요? 남한에 와서 처음 안무를 맡은 작품이 있나요? 창작작품에 따라서 의상 디자인도 직접 구상했다는데 자세한 설명 듣고 싶어요. A. 제가 대한민국에 처음 도착하여 국정원에서 이 음악을 듣고 가사도 좋고 곡도 좋아서 제가 한국에서 무용을 한다면 꼭 이 음악 한국의 사계절을 담고 싶었서 창작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남한에 와서 남원한복패션쇼에서 안무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창작작품은 제가 디자인을 하고 의상사에게 맡겨 완성합니다. Q.최근 북한 예술가 중 가장 인기있는 모녀라고 하는데, KBS와 MBC, 전주 얼쑤 우리 가락과 부산 KBS 가요 1번지토크쇼, 남도 국립국악원공연. 최근 강나라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실제 자문위원이었고, 어머니는 함경북도 예술단 예술 감독을 맡은 모녀가 MBN ‘대한민국 팔도명물인증쇼&에 나왔다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방송을 통해 북한문화예술을 어떻게 전달해 주고 싶으신지요? A. 제가 방송을 통해 알려줄 것은 우리의 문화예술의 뿌리는 하나다라는 것과 북한의 전통을 알아야 통일을 대비해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북한무용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무대에서 다이나믹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속도감이 빨라서 한국무용과는 차이가 나죠. 무대에서 정적인 한국무용과는 대비가 되어서 관객들의 호응이 높습니다. 일단 신선하고 새로운 장르이니만큼.......... Q.'이북5도무형문화재'는 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 북한 지역에 있는 5개 지역을 기반으로 한 19개의 종목문화재를 가리키는데, 현재 이북5도무형문화재 제1호 애원성에서부터 만구대탁굿, 돈돌날이, 두만강뗏목놀이소리, 제2호 평양검무 제3호 부채춤, 평안도 다리굿, 제4호 화관무. 제4호 평북 농요평안도 등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신청한 종목은 무엇인가요? A. 제가 3년전에 북한의 전통무용으로 "최승희 류 평양 장구춤” 종목을 신청했습니다. 평양장구춤은 최승희선생님의 장구무용을 북한의 최고 춤꾼인 홍정화 선생님이 승화 발전시켜 오늘날에는 공훈배우, 인민배우 급수시험작품으로 진행되고 있는 난이도가 높은 무용작품입니다. 앞으로 쟁강춤도 북한의 무형문화재로 만들고 싶습니다. 최근 황해도무형문화재 제4호 화관무 2020 정기공연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지난 1월 20일 비대면 동영상 공연으로 진행되었습니다. Q.개인적으로 첫째. 앞으로의 계획은? 둘째, 통일부 통일자문위원으로서 통일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실건지요? A. 아마도 무용가로서 무용은 제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몸이 허락할 때까지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북한에서도 살아봤고, 남한에서도 살아 봤잖아요. 아마 저는 통일되면 남과 북에 예술인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남과 북의 무용을 승화 발전시켜 우리의 문화예술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과 현재 운영하고 있는 최신아무용연구소가 발전되어 특수한 문화적 요건에 의해 탄생한 북한무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글로벌 차원의 북한무용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한반도 민족유산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을 해서 통일후 남북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한걸음 뚜벅 나아갈 것입니다. Q.마지막으로 통일부 통일자문위원 최신아 선생에게 한가지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사할린은 북한지역과 지정학적으로 오고 가기 쉬운 북러관계에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950년 이후 북한 노동자들이 나와서 돌아가지 않고 눌러 앉아 있는 북한 출신 실향민들이 사할린 동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한합동공연을 한다면 가장 1순위가 사할린입니다. 지정학적 특수한 여건에서 남북이 제3지역에서 합동공연을 할 수 있는 1순위 지역입니다. 그런 성격의 남북공연이 60년만에 사할린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18년 광복절 기념 남북한합동공연이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개최되어 다녀왔습니다. 공식 행사명은 '광복 73주년, 남부사할린과 쿠릴열도 해방 73주년 기념 우정의 날'입니다. 사할린 동포 강제동원 80주년을 기리기 위해 사할린주한인협회가 주최하는 남북러합동공연 행사입니다. 남측에서는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북측에서는 삼지연악단과 모란봉악단 단원으로 구성된 통일음악단, 사할린동포의 아리랑무용단, 사할린의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이 출현했습니다. 북한에서 나온 3000명의 노동자 중 많은 북한 사람들도 함께 한 광장은 인산인해로 열기와 박수 소리가 가득 메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김정은 체제 선전가를 부르게 되니, 남측의 경고가 반복되어도 김일성 3부자를 우상화 및 찬양하는 공연이 계속 이어졌다. 결국 북측의 예측불허 공연으로 행사진행이 불발되어 남한 측 공연단은 무대에서 모두 철수하는 급작스런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무대는 북한 선전선동가 일색으로 끝났습니다. 무대 앞에서는 현란한 북한 공연이 이어져서 북한공연팀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고 흥이 오른 관객들은 무대 잎에 나와서 부르스를 추고, 무대 뒤에서는 남과 북 공연 대표팀이 고함을 지르고 큰 싸움까지 붙었습니다. 모든 일을 추진한 사할린한인협회는 북측 공연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고 싸우고 나서는 북한 공연팀을 이동시키는 리무진 버스도 철수시켰습니다.,,,,그날 대한민국 신문방송은 모두 '사할린 남북합동공연 불발'이라고 전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남북공동 행사가 제3국에서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A. 네, 방송과 신문지면을 통해 사할린에서 몇십년만에 모란봉악단이 와서 국립남도국악원과 함께 콜라보 공연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북합동공연이 불발이 되어서 안타까웠습니다. 남북이 함께 하는 공연에서 감자기 북측에서 김정은 체제 선전가를 부르는 무대에서 남측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공연팀이 무대에 같이 설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사전에 국가 체제에 관한 선전가는 안 부르기로 합의를 보았는데, 북측이 그 합의를 준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남측의 민간단체가 함께 했다면 그 공연은 함께 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국립기관과 민간단체가 함께 공연을 했다면 어느 정도 조율이 가능했을 겁니다. 100명 정도 되는 인원이 사할린까지 날아가서 국민혈세를 쓰고서 그냥 오다니 말도 안되는 남북 국제행사입니다. 민간단체 공연팀이 같이 갔다면 예정대로 무대에서 남북이 아리랑을 대합창으로 휘날레는 했을 겁니다. 즉 국민들 앞에서 대의명분은 서는 거지요. 북한에서 나온 노동자들과 사할린 동포들이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우리는 하나인데... 당시 기사를 보니 "사할린다민족협회 아코뺜 싸르키스 조리코비츠 회장은 사전 리허설을 보고 직관적으로 "사할린에서 남과 북이 만나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하나의 민족이다"고 외쳐 기립 박수를 받았다.”라고 했는데. 예를 들어 제가 참가한 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이 정례화 하고 있는 사할린아리랑제와 같은 민간단체가 매년 사할린에서 열리는 아리랑축제와 함께 했다면..남북러가 참가하는 공연 타이틀은 이름값을 했을겁니다. 그리고 후일담으로 국립국악원에서 오프닝 무대의에서 유지숙 명창이 부른 '애원성' 같은 북한지역 서도민요는 현지 관객의 취향에는 맞지 않아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이나 북한 노동자들은 전통민요의 멋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트롯트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북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2호 아리랑은 다 좋아합니다. 영천아리랑은 북한 민요음반에 첫 번째 인기곡목입니다. 밀양아리랑도 좋아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북한과 러시아는 박자 빠르기가 남한과 확연하게 다릅니다. 처음 들어보느 낯설고 느린 전통민요 코드는 맞지 않습니다. 남북합동공연에는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사전조사를 철저히 해야합니다. 차라리 남측에서 처음에 유지숙 명창이 아리랑 메들리를 부르거나, 북한이 좋아하는 영천아리랑이나 북한 최고 유행가 '휘파람'을 불렀다면 중간에 타협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관객은 대한민국이 아닌 러시아 동포들과 북한 노동자입니다. 그들의 취향에 대한 배려가 먼저입니다. 2018년 사할린아리랑추진단이 한국에서 사할린한인협회와 MOU를 맺고(<사할린아리랑제, 北 예술단 참가 추진···현지 한인협회 MOU> 뉴시스, 2018-06-19)두 단체는 "한민족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아리랑의 기능을 활용, 올해 제3회 사할린아리랑제에서 사할린을 거점으로 삼는 아리랑로드를 확장하기로 했다. 급변하는 국제관계에서 북한 동포들과 아리랑공동체를 공유한다는 취지다. 금년 사할린아리랑제는 러시아는 물론, 남북 합동공연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사할린아리랑추진단은 2018년 사할린을 세번 오가며 남과 북이 유네스코에 공동등재 된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주제로 하여 남북합동 공연을 같이 하자고 사할린한인협회에 제안을 했죠.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 결국 성사가 안 되었죠. 공동주최가 안되어도 한꼭지 무대를 주었다면, 국립기관 단체 공연팀이 공연 도중 철수를 해도 민간단체는 탄력성을 가지고 남북합동 공연은 마무리 되었을 겁니다. 적어도 불발이라는 기사는 안나가겠죠.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
KBS한민족방송 ‘전통으로 소리길로’김병준(‘전통으로 소리길로’ 작가) 국내 애청자와 북한과 중국 일본 등 해외동포들을 대상으로 라디오를 통해 찾아가는 KBS한민족방송 ‘전통으로 소리길로’는 우리 고유한 전통문화 돌아보며 국악을 감상하는 프로그램이다. 서기철 국장님이 기획한 우리 것 사랑 뜻이 담긴 이 ‘전통으로 소리길로’는 남상일 명창이 MC로 나서 준 덕분에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AM 972KHz. 1170KHz방송되고 있다. 휴대폰에서 앱을 깔아 들으면 더 간단히 청취할 수 있다. 폰에서 ‘KBS-Kong’ 다운 받아서 ‘한민족방송’만 선택하면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있으니 휴대폰으로 청취하는 걸 추천한다. 김병준 작가가 방송을 한지 40여년이 된다. 1981년 KBS-3TV에서 ‘시조와 창’이란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후, KBS 1라디오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흥겨운 우리가락’을 김성녀 교수 진행으로 12년을 했었고, 국방홍보원 국군방송에서는 라디오 사극을 8년간 2천 4백여 편을 집필했고, 국악방송은 개국 초기부터 15년 동안 ‘우면골 상사디야’ ‘상암골 상사디야’ 일일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름 우리 것과 국악에 대한 사랑을 꾸준히 방송을 통해 알려 본 셈이다. 그 40여년 기간 동안 국립극장 무대에서 창극 ‘백범 김구’, 국악원에서 국내 최초 경서도 소리극 ‘남촌별곡’ 같은 전통 뮤지컬도 올렸고, KBS 1TV를 통해 마당놀이 ‘뺑파전’을 올리고, 공연무대며 이런 저런 전통관련 행사에도 동참해 왔다. 그 여정 속에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이라 하겠다. 그래서 KBS한민족방송에 남북한 동포들이 함께 들으면 좋을 프로그램이 뭘까? 해외 교민과 동포들이 같이 들으면 의미 있고 흥미도 있을 프로그램은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다 남상일 명창이 진행을 맡아 주면서 일사천리로 내달리게 됐다. 늘 자주 말했던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이 우리 것을 방송으로 담고 싶었기에 진행자가 국악예술인이었으면 했고, 막간 사극 코너도 소화해야 하니 연기력도 뛰어나야 했는데, 남상일 명창이 진행을 맡으면서 성우들과 함께 우리 역사 속에 흥미로운 사건들, 잊혀서는 안될 서민들 생활사와 문화예술 이야기가 흥미롭게 풀려나갔다. 리포터를 통해서 우리 문화계 분들을 폭넓게 취재해 미술, 음악, 민속, 유무형 문화재 관련 전문가 분들 이야기를 전해 드릴 수 있었고, 작가는 우리 것 우리소리 사랑하는 이웃사촌들을 찾아 나서서 한분 한분 이야기와 그분들 소리와 연주도 소개해 주는 코너도 계속해 오고 있다. 그리고 방송국 스튜디오로 자리해서 남상일 명창과 13분 대담을 하는 초대석까지 마련하고 보니, 매주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에다가 꽤 많은 살림살이를 차린 셈이다. 진행자 남상일 명창이 연기하며 소리하며 전체를 이끌고 있다, ‘실록 만화경’이란 사극코너로 우리 옛 생활상과 역사를 흥미롭게 돌아보고, 리포터가 취재해 온 ‘문화예술인 한마디’도 소개하고, 우리 국악계 뿐 아니라 문화계 인사들을 스튜디오로 초대해서 대담을 나누고, 작가가 일반 애청자와 국악 동호인들을 만나 국악사랑 이야기며 한 곡조 부른 걸 소개하는 코너며, 우리 전통 속에 소중한 것들을 하나 하나 다시 새겨보는 ‘사랑채 뜨락에’ 같은 인문학적인 코너도 있고. 현재 우리네 지역에서 어떤 일이 화제인가. 지역 생활상을 전해주는 ‘고향 나루터’ 같은 코너며, 우리소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나 둘 풀어 나가는 ‘사설마다 사연이’ 코너 까지 참 욕심도 많게 1시간 짜리 프로에 가득 채운 모습이다. 그걸 매주 2편씩 제작하며 달려오고 있다. 해마다 특집프로그램도 제작해서 지난해 추석 무렵은 코로나씻김 마당놀이 ‘떴다 소리꾼 상사디야’ 2부작을 올렸고, 북한인민배우들이 부른 민요를 특집으로 소개한 ‘대동강수 한강수 민요로 만나다’ 같은 작품도 올려졌으며, 삼일절 무렵에는 ‘열사여 항일의 깃발이여’ 같은 특집으로 겨레의 나라사랑 얼을 되돌아 보기도했다. 우리 프로그램은 그냥 허공에 날리지 않는다. 한편 유튜브 다시보기 영상으로 제작해 올리고 있다. 유튜브에서 ‘남상일 명창 전통으로 소리길로’ 검색해 보면 무수히 많은 영상물이 떠 오를 것이다. 이리 기록하는 뜻은 우리 것 사랑, 국악사랑 마음을 미디어로 올려 나누고 남겨 보자는 마음이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이라면 우리 것 사랑하는 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 남상일 명창 프로그램에 동참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작가의 이메일과 전화번호 공개하니. 나도 국악사랑 한마디 하겠다. 나도 배운 소리가 있고 배운 가락이 있으니 자랑한번 해보고 싶다. 이런 국악 동호인 여러분. 김병준에게 연락만 주시면 여러분 이야기와 노래며 연주를 녹음해서 남상일 명창이 소개해 드리는 이 ‘전통사랑 이웃사촌’ 코너에 적극 동참해 보시라는 말씀 전하니, 아무쪼록 KBS한민족방송 ‘전통으로 소리길로’와 함께 우리 것 사랑 함께 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히 전하며 새해 복 많이 나누시고 건강하시길 빌어 올린다.
-
'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대표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이메일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첫 인터뷰 인물은 이혜솔 국악인이다. 사할린 동포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최나타샤)에게 사할린아리랑을 가르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은상'을 수상하게 한 국악인이면서 아리랑 전승자이다. 이후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들도 이회장의 활발한 전승활동에 주목하게 된다. 코로나로 세계가 멈추었을 때 지난 3월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독도에서 제주까지' 전국 아리랑전승단체를 찾아가서 아리랑코로나를 알리고 현지 답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에서 처음으로 ‘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1952년생) 대표를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Q. 올해 코로나로 인해 많은 단체와 공연자들이 무대에 서지를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잘 마치셨습니다. 처음 만나는 무관중 언택트 공연에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A.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엄수하는 가운데 지난 10월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금년의 국악계는 어느 분야보다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모두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습니다. 공연의 제1조건이 관객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관객 없이 해야 하는 공연을 위해 극히 제한된 출연자와 스탭과 관객으로 치룰 수 밖에 없는 실정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무대에 20명만 올라와야 하는 조건에서 극장밖에 있다가 다른 공연팀과 계속 교체를 해야했습니다. 어려운 시국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원들이 일사분란하게 협조를 해주어서 잘 마치었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끝나서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날을 기원해 봅니다. Q. 매년 정례화 되고 있는 아리랑축제를 올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와 함께 무사히 치루었는데, 올해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행사 주제는 무엇입니까? A. 전 세계가 멈춰어져 있는 이 어려운 "코로나19 고개를 넘어가보자”라는 의미에서 어서어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준비를 했습니다. 코로나라는 힘든 고개를 아리랑 고개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가지고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보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온 국민과 힘을 합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 공연에 담아보았습니다. Q. 이번 행사에서는 전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인류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코로나 19사태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를 정하셨네요. 회원들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난생 처음 실시된 무관중 공연에서 어려운 점이 었었지만, 이런 새로운 형식의 실험적 무대에서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요? A. 우리는 코로나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는 바로 통했습니다. 올해부터 모든 공연은 코로나 전후로 나누어진다고 봅니다. 그동안 모든 공연은 절대적 관객 대상 공연이었지만 이번에는 관객이 아닌 우리 출연자 스스로를 향한 공연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무대에 나섰습니다. 처음으로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Q. 전체 프로그램은 2부로 나누어져서, 제1부는 대동의 노래, 제2부는 상생의 노래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나요? A. 전국 지역에서는 아리랑의 힘으로 대동단결하여 코로나를 막아내고 우리 모두가 다시 안정되어 함께 잘 살아보자는 상생의 노래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지역은 '왕십리에서 제주까지' 불리는 지역 아리랑으로 구성했습니다. 왕십리아리랑을 시작으로 서울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상주아리랑, 밀양아리랑, 제주아리랑 등이 불려졌습니다. 서울에서 활동을 하지만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사람은 아라리를 부르고. 경상도 사람은 밀양아리랑, 제주에서 올라온 이는 제주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제주아리랑은 유재희(서귀포아리랑보존회장) 명창이 불렀습니다. Q. 코로나로 처음으로 개최된 무관중 공연이었지만 제10회를 맞이하는 소감은? A.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우리 경기 아리랑 선율인 왕십리아리랑도 포함된다고 믿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리극 ‘김소월이 사랑한 왕십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는 준비 중에 있습니다. Q. 왕십리아리랑은 이혜솔 회장이 작사하고, 통일앙상블 대표 윤은화가 작곡한 새로운 아리랑인데, 어떤 내용이 담긴 사설인지 궁금합니다. 국내외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 반응은 어떤가요? A. 첫 소절은 처음에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라고 시작합니다. 본조아리랑을 선율로 해서인지 일단 경쾌하고 따라서 부르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는 왕십리아리랑을 작편곡 한 윤은화 작곡가와 통일앙상블 밴드(9명의 연주자)가 함께 가서 연주 반주에 맞추어서 불러서 더욱 좋았습니다. 이미 음반 작업을 하면서 함께 연습을 한 팀들이 그대로 갔기 때문에,,,,..그래서인지 현지 동포들이 후렴을 따라서 부르고 음악가들이 악보를 달라고 해서 부고 왔습니다. 2019년 봄에 왕십리아리랑제에 관객으로 참가한 사할린동포들에게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 아리랑고개를 서로 함께 넘어요 서울의 왕십리 우리 사는 곳 개나리 화창한 꽃동산이래요. 사랑과 희망이 넘쳐 흐르는 서울의 서울은 우리 왕십리래요 우리 서로 벅찬 가슴 마주하면서 손잡아요 어깨동무 함께할래요. 이 아리랑을 만들게 된 연유는 제가 청년기부터 몸담고 살았던 서울 동부의 중심지인 왕십리 시민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알고 부를 수 있는 아리랑 가락에 성동구 지역 역사를 담아 보았습니다. 아리랑의 대동정신으로 지역공동체 결속에 이바지 하려고 합니다. 이 아리랑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반응이 좋은 편입니다. 미국 순회공연. 일본, 사할린 공연에서 동포들에게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본조아리랑의 위상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동포들을 만나면서 아리랑은 결속력을 속성으로 하는 노래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러시아 사할린과 하바롭스크 동포들이 와달라고 했는데 올해 못갔죠. 코로나로......코로나만 종식되면 바로 갈려고, 트렁크 짐은 싸놓은 채 그대로입니다. 작년 2월 초 가려고 비행기표 예약을 했다가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Q. 지난 해 2월초 러시아 사할린과 하바로 바로 가려고 준비를 했다가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각해지자 아리랑코로나를 지어서 코로나를 막아내자고 우리들에게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카다로그 앞에 나와있는 이 가사가 아리랑코로나인가요? 어떤 계기로 해서 만든 아리랑인가요? A. 지난 5월에 새로 만든 ‘아리랑코로나’가 무대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세는 한풀 꺾였지만,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 감염이 이어지면서 신규 확진자가 늘어면서 전국 축제와 예술활동이 거의 중단된 현실에서 이번 무대에서 회원들과 함께 불렀습니다. Q. '아리랑코로나'는 어떤 의미를 담아내려고 했나요? A. 일제강점기 1930년대 종두선전가라는 종두아리랑. 마마아리랑이라는 방역아리랑이 불려졌습니다. 아리랑으로 천연두 전염병을 이겨보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리랑의 힘으로 전세계를 멈추게 하는 이 무서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뭉치면 죽고 헤어지면 산다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입니다. 90년만에 나온 방역아리랑, 특별한 아리랑이지요. 이회장은 주먹을 높이 쳐들면서 이번 코로나19를 막아내자는 방역아리랑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9월부터 독도 울릉도에서부터 제주까지 찾아가는 작은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가장 추운 나라 러시아 동포들에게 녹음을 해서 전해주고 국내 이주하고 있는 동포들과 공유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 고려인 청소년과 하바롭스크 사할린 동포들에게 음원과 동영상을 전해주고 있다. 아리랑코로나 노래가 알려지자 (재)아리랑선풍재단 아리랑체조단도 이 음원을 보내주면 집단체조를 해보이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아리랑코로나 작사.작창:이혜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코로나 택시는 탈만큼 탔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섭어 도망간다 코로나 마마님은 언제 가시려나 구경일랑 그만하고 가시게나 바다 건너 님 보고싶지만 가고 싶어도 갈수없네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원수로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지만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네 Q. 2년동안 아주 특별한 아리랑 전승활동을 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부모님 고향은 어디인이신가요? 부모님 중 누가 소리를 잘하신 분이 계셨나요? 소리를 하시면서 영향을 주신 분이 계시나요? A. 아버님 고향은 청주이시고, 어머니는 경기도 평택이시지만 어릴때 서울로 이사를 하고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공부보다도 소리를 좋아하셔서 판소리 춘향전은 다 외우셔서 사랑방에 손님들 모이면 걸죽하게 뽑아 내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평생 풍류객이라는 소리를 듣고 서울을 오가며 사셨습니다. 우리 형제들 모두 아버지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모두 다 소리를 잘합니다. 저의 목소리는 아버지를 쏙 닮아서 통성입니다. 나의 인생의 반은 어머니 것입니다. 풍류를 찾아서 서울을 오가는 멋쟁이 아버지는 살림을 나 몰라라 하셨습니다. 갈수록 식구들 입은 늘고 살길이 막막해지지만 청주 사람들이면 다 아는 양반집 친정에서 곱게 자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친정에서 곡식을 얻어서 우리 식구들 먹이다가.....나중에는 나어린 막내에게 젖을 물리다가 몇번이나 달리는 트럭에 뛰어 들었다가 모진 목숨 건지게 되자, 장남만큼은 반드시 공부를 시키겠다고 7남매를 끌고 생면부지 서울로 상경을 하셨습니다. 간신히 아버지를 찾아 용두동에 하꼬방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젖먹이를 업고 어머니는 묵을 쑤어서 머리에 이고 행상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큰언니가 촛불을 키고 바느질을 하다가 집에 불이 나서 이불이고 신발이고 몽땅 다 타버렸습니다. 다시 빈털털이가 되어 창신동으로 이사를 가서 임시 천막을 치고 맨 땅에서 추우나 더우나 어렵게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장사를 마치면 이고 나간 함지박에 매일 벽돌을 한 두개씩 사서 이고 들어오셨습니다. 매일 천막안에 사방에 벽돌이 하나씩 하나씩 쌓아서 벽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방을 두를만큼 벽돌이 모아져서 그 자리에 판자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묵장사로 목돈을 모우신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 나가서 비단을 받아서 이고 지고 나가서 비단 보따리 장사로 우리 7남매 자식들을 힘들게 키우셨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땀으로 우리 형제는 하루 하루 커가는데, 판소리와 경기소리에 미친 아버지는 풍류를 즐기면서 사시느라 어머니는 평생 외롭게 독수공방을 하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긴긴 세월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 하시느라 여린 여자의 몸으로 사내 대장부처럼 우리 7남매를 굳건히 키워주셨습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세딸 중 막내딸로 태어난 저는 어머니 품속에서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밑으로 남동생이 3명이나 있었지만,........ 아버지 때문에 흘린 어머니의 눈물을 제가 가장 많이 닦아 드렸습니다. 두 언니들은 바로 사회에 진출을 하고 집에 남아있는 저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기에....어머니는 늘 저에게 "곱게 자라야 시집가서 고운 대접 받는다"고 막내딸만큼은 손에 찬물 안 묻히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가이없는 정성을 자식을 낳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철없는 막내딸이지요. 이렇게 우리 7남매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눈물을 먹고 자랐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희생하신 어머니를 매일 바라보며, 우리 7남매는 "중용을 지키고 불손한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라고 다짐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아야만 했습니다. 평생 5시가 되면 일어나서 달이 뜰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졌습니다. 그 덕에 모두 일찌기 자수성가해서 서울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쁜 작은댁을 데리고 사시던 아버지는 칠순을 넘기시고 중풍에 쓰러져서야 집에 돌아와 안주하시게 되었지만..... 몇해 동안 앓다가 결국 조강지처 품에서 돌아가셨습니다.(이때 우리 형제는 불같이 일어나서 반대를 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받아 들이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수족이 되어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손주들에게 할아버지를 찾아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저의 노래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고생하신 슬픈 어머니의 한을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힘들때나 기쁠때 양평에 있는 어머니 무덤을 찾아가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노래를 불러 드리고 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지인들의 어머니만 뵈도 가슴이 떨립니다. 어머니, 어머니 불러도 대답없는 나의 엄니.....그래서 저의 인생의 반은 어머니 것입니다. 국악 입문경위 Q. 풍류를 즐기시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미워하는 아버지의 목을 빼닮아서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네요. 유년기에서부터 들어온 사랑방에서 장구 장단에 부르는 노래 소리가 서울에 이사와서도 낯설지는 않았겠죠. 유년기에 무대같은 데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나요? A. 어릴 때부터 고향 청주에서는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소풍을 갈때나 학예발표회 무대에서 늘 일등으로 불려나와서 노래를 불러서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소리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스승을 모시고 소리 공부를 하는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서울에 이주하게 되자 저축을 하여 돈이 생겨서 제일 먼저 산 것이 녹음기입니다. 길을 지날 때마다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민요를 들으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음반을 사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민요 가락을 따라 부르는 저를 보고 피는 못속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10대는 소리 공부에 대한 목마름으로 잠 못이루는 밤을 지세웠습니다. Q. 늦은 나이에 국악에 입문을 하게 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A. 언젠가는 반드시 소리를 배워야지 하다가 일찍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정이 안정되고 어린 자식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자, 비로소 마흔살이 훌쩍 넘은 늦은 나이에 꿈에도 그리운 소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수업 중에도 녹음을 해가지고 와서 일하면서 반복해서 혼자 연습을 하면서 열심히 따라 불렀습니다. 당시 단순노동에 불과한 자영업을 하면서 소리는 나에게 많은 위안과 꿈을 주었습니다. 테이프를 틀고 들어보니 이 소리들은 자라면서 아버지가 신명나게 불렀던 노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몸서리치게 그리 좋아하시던 그 노래를 이제는 제가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더욱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미워서 아버지가 늘 부르시던 노래(민요)를 녹음을 안해 놓은 것이 후회가 됩니다. 지금도 비오는 날 눈을 감으면 정가, 민요에서 판소리까지 즐기시던 아버지의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경기민요를 배우게 되고 무대에 서게 되자 집안(남편)에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연습 공간을 따로 얻어서 소리 도반들과 같이 매일 모여서 공부를 하는 바람에 점점 소리에 깊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 안의 나 자신이 얼마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지 심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경기민요 전수자들에게 지도하는 정도의 인정을 받고 내공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스승을 찾아서 경기민요부터 서도민요를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이은관 선생에게서 서도민요 이수를 받았지만 배움의 길은 끝이 없나봅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 샌줄 모른다고..... Q. 늦게 배운 소리에 불구하고 서도민요 이수자까지 했으니 원은 푸셨네요. 경기민요 서도민요는 어떤 스승에게 배우셨나요? 소리 공부를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스승이 계시나요? A.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김순자 선생님, 김경배선생님, 이은관 선생님,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묵계월선생님, 전숙희선생님, 김혜란선생님께 사사했습니다. 그 중 이은관 선생님이 무대에 많이 세워주셨습니다. 전숙희 선생님과 김혜란 선생에게 혹독한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이제는 자산이 되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제자들이 전국경연대회에서 많은 상을 타가지고 옵니다. 늘 스승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Q. 경기민요, 서도소리를 이수하고, 강원도 '아라리'도 배우시고, 최근에는 ‘제주민요’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데 어떤 계기가 되어서 제주의 소리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지요? A. 오랫동안 같이 공부를 했던 제주도 소리 친구 유재희 선생이 제주민요축제에 초청공연으로 자주 가게 되면서 신비로운 서우제소리에 반했습니다. 경기민요와 서도민요를 수십년간 불렀지만, 제주민요는 또 다른 맛이 납니다. 서우제소리를 들으면 배를 타고 신비로운 섬으로 끌려가는 듯한 선율에 넋이 나가더라구요. 이어도 소리는 여자들만이 산다는 섬으로 떠나간다는 내용입니다. 고난의 속세를 떠나서 유토피아로 떠나가는 거지요. 한번 간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전설의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도 하라. 이어도 하라. 이엿말 하면 나 눈물 난다. 이엿말은 말앙은 가라. 강남을 가건 해남을 보라. 이어도가 반이엥 한다." 어느새 둥둥 배를 타고 상상속의 섬으로 떠나가는 환타지가 느껴지면서 온 마음이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거기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주민요를 들으면 어머니가 더욱 생각납니다. 오랜만에 아주 특별한 외식을 하는 기분으로 제주민요도 조금씩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레파토리는 사할린아리랑 이회장은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출범 이후 첫번째 지도자로,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하바롭스크 아리랑지부 회원들이 와서 아리랑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때, 바로 출국 준비를 했다가 코로나로 미루어진 상태이다. Q. 지난 해 3월부터 10월까지 지도를 해주신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러시아 동포들에게 지도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수상 소감은? 어떤 감동이 들으셨습니까? A. 아리랑학교에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를 구하는데 1년동안 책임을 지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기도에서 양주까지 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2번 이상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공주나 문경 같은 지방에서는 1번만 와주겠다는 겁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바뀌면 일정한 곡을 따라 부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리랑학회 위촉을 받고 3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섹스폰 연주하는 친구들과 제자들까지 데리고 와서 수업시간 중 쉬는 시간 10분 동안 선율을 익히게 하기 위해 섹스폰 연주까지 들려주며 지도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10월 14일 전국아리랑경연대회를 위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서 단원들 12명의 의상을 새로 마추고 소품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사할린 동포들은 난생 처음 입어보는 한복 무대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무대에서 심사위원들도 관객들도 모두 함께 구구절절한 서러운 사할린아리랑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왔나 일본놈 무섭어 따라왔지” 강제동원으로 끌려 간 4만명 조선인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억류된 70년의 한을 가슴에 묵혀두고 있다가 터진 것이지요. 심사위원들이 20여 단체의 경연자 중 2등상인 은상까지 주셔서 그분들의 깊은 한이 그날만큼은 치유가 되셨을겁니다. 왕복 7시간이나 되는 왕십리에서 양주를 다니면서 한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힘들었지만, 사할린 동포 어른들이 아리랑을 배우려고 하시는 열망 때문에 더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수상까지 해서 개인적으로는 환갑 이후 저의 생애 가장 기쁜 날입니다.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 갈겁니다. Q. 전국아리랑전승단체가 지역적으로 55단체가 존재합니다. 경기도에만해도 10여 단체가 있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김포, 인천. 가평. 포천, 수원 등등에서 양주끼지 오기는 너무 멀지요. 길이 막혀서 약 왕복 7시간 이상 걸립니다. 드디어 10월 중순 작년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에 이어 올해 사할린 동포들과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두드러진 아리랑 전승활동이라는 평가를 받을만합니다. 올해 계획은? A. "사할린동포분들께 내가 해드릴수 있는 것은 다 해드리고 싶어요” 사할린 동포분들께 아리랑을 가르치며 보람이 있었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고생하시다가 이제는 그리운 조국 한국 나와서 아리랑을 배우시고 싶다는데. 아무리 멀어도 최선을 다해서 해드리고 싶어요. 우선 사할린아리랑과 아리랑코로나 2곡을 가르쳐드릴겁니다. 양주와 인전 지역 사할린 동포들과 다문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코로나가 끝나면 러시아 동포을의 요청을 받아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러 갈겁니다. 지금은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Q. 사할린 동포들에게 직접 아리랑을 가르친 첫번째 사례입니다. 아리랑 소리꾼으로써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A. 제가 사할린 동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3년 KBS특별생방송 '누가 이사람을 아시나요'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형제 찾는 방송을 보고 울지 않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 영주귀국 해서 사신다는 것은 사할린아리랑축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벌써 조국에 오신지가 15년이나 되셨다는데..... 4천명이 오셔서 전국 25지역에서 살고 계신다는데,,,,,,,,,작년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함께 행진을 했던 100여 분의 사할린 동포들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양주에 영주귀국하신 김세르게이 음악가가 살고 계시는 곳에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있고, 인천에 영주 귀국하신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님이 다문화 어린이들에게 한국어와 아리랑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 3월 아리랑학교에서 위촉을 받고 망서림 없이 수락을 하고 사할린아리랑에 이어 올해는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학교 수업을 통해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국외로 강제이주한 동포들이 조국을 그리는 노래로 불리게 되면서부터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리랑 전승자라는 이름을 걸고 동포들을 찾아가면서 가르치고 싶습니다. 제가 남은 시간 동안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Q. 사할린 동포 중 이번에 제자로 삼은 어린이가 있으시다는데 소개를 해주세요. A. 제가 신아리나를 처음 본 것은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축제 ‘디아스포라 아리랑’ 무대에서 무반주로 사할린아리랑‘을 독창으로 부른 당시 5살 먹은 당차고 씩씩한 신아리나(8세)입니다. 이번에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영주 귀국한 사할린 4세로서 할머니를 따라서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직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부모 밑에서 언니(14세)와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면서 영민한 신아리나 어린이를 제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회원들과 함께 장학금도 보내 줄려고 합니다. Q. 전국55단체 아리랑전승단체 중 왕십리아리랑보존회는 후발주자이지만, 작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55개 지역 아리랑워크샾, 경복궁아리랑고,사할린아리랑제 등 국가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느낀점은? A.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각 지역 아리랑보존단체 50여개 지역단체가 깃발을 들고 입장하는 현장에서 국악인으로서 아리랑을 선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수많은 노래가 있지만 각각의 지명을 달고 창출된 **아리랑은 충격이었습니다. 학술적으로도 60여종 아리랑이 전국에서 불려진다는 것.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가 연대한다는 것은 전세계에 없다고 봅니다. 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에 자부심이 앞섭니다. 거기에는 책임같은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 일년 전에 일본 땅에서 개최된 안중근의사추모제에서 가슴이 벅찼어요. 처음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연락을 받고 출발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간거지요. 추모제를 준비하는 주관단체가 일본 사람들이라는 것. 구름같이 모여든 마을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자발적으로 준비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일본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어려웠던 시절 일본 농촌이나 오지로 시집을 간 한국 여성들이 우리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고 도라지타령과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서로 손 잡자마자 바로 눈물이 앞섰습니다. 저는 안중근의사의 의병활동을 추모하는 '아무르아리랑'을 헌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아리랑은 동포사회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민족의 노래‘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아리랑의 세계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 국악인으로 살면서 ’노래의 힘‘을 느끼신 적 있으신가요. A. 아리랑을 통해 노래의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한민족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애국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폭압에 대한 저항의 노래를 불렸고, 강제이주한 사할린 동포들이 부른 디아스포라 아리랑인 사할린아리랑은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고 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 만난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통해 절절히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말을 모르는 러시아 동포 3세 4세들도 아리랑을 부르고 알더군요. Q. 그렇다면 가장 자극을 받은 아리랑축제는? A. 2018년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무대에서 러일남북중 5개국에서 향유하는 아리랑이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부른 양상을 보고, 아리랑의 다양성에 대해 감동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흥얼거리는 민요가 아닌 바로 애국가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만의 아리랑을 만들어야겠다. 나의 소리길를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후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결성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 간 것입니다. Q. 30여 년 국악인생을 살면서 오롯이 담아낸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 음반은 녹음을 마친 걸로 아는데 언제 발매가 됩니까? A. 처음에는 왕십리아리랑(작편곡:윤은화)을 중심으로 4년전 서울경기 지역 아리랑을 녹음을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2019년 사할린을 다녀오고 나서 사할린아리랑을 편곡하여서 넣으려고 합니다, 추가로 아리랑코로나도 넣고 싶고, 그래서 4년이나 끌었습니다. 이제는 아리랑에 욕심이 납니다. 내년에는 나올겁니다. Q. 최근 3박 4일 동안 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회장과 함께 제주도아리랑답사에서 얻은 성과는 무엇인가요? A. 서귀포아리랑보존회 회원들과 서귀포 역사 유적지를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습니다. 제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아리랑 역사에서 사할린과 제주도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본조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 본조아리랑이 대유행을 했습니다. 1940년 전후 제주에서도 사할린이나 일본, 오키나와에 강제동원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본조아리랑을 불렀지요. 문헌에 있는 제주아리랑 선율은 본조아리랑입니다. 어업에 종사하거나 강제동원된 사람들이 가지고 간 아리랑이라고 봅니다. 출가 해녀들이 대마도나 홋가이도로 동원되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부른 아리랑도 본조아리랑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부쳐준 아리랑고개가 존재한다는 것, 이번 답사에서 민족 고난이 있는 곳에 아리랑이 불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은 역사의 노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Q. 앞으로 계획은? A. 내년에는 왕십리아리랑전국경연대회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올해 준비를 했다가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사회적 거리가 강화되는 바람에 부득불 취소를 했습니다. 국내외 이주한 다문화 어린이들과 러시아 동포들에게도 아리랑을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해에도 아리랑학교 아리랑 지도자로 위촉을 받았습니다.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로 알려지게 되면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사회에서 수업 요청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종식되어 러시아 아리랑학교가 성사되어 아리랑배우기 수업이 완수되기를 기원합니다. 연혁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2016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결성 2018년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설립/이혜솔 이사장 취임 안중근의사추모제(주관:일본 미야기현 대림사) 초청명창 위촉 제8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2019년 아리랑학교 지도자 위촉(아리랑학회)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 위촉 (공동주관:아리랑학회) <찾아가는 사할린아리랑> 공연 (양주사할린동포협회, 율정마을) 제9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제7회서울아리랑페스티발 초청공연 및 아리랑퍼레이드 참가 전국아리랑전승단체(55개 지역단체) 워크샾 참가(주관:문화재청) 경복궁 아리랑고유제(45지역 아리랑전승단체) 참가 제3회사할린아리랑제 아리랑명창 초청공연(이혜솔의 아리랑) 2020년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주관(주최:성동구청) 전국아리랑전승단체협의회 가입단체 아리랑코로나 발표회 독도에서 제주까지 ‘아리랑코로나 부르기’성료 (공동주관:아리랑학회) www.arirang129.com 아리랑은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다. 기관과 학계에서는 50여 종의 아리랑 곡명을 누구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함의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제시한 수는 명목상의 수이지 자체의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셀 수가 없다’는 의미다. 사실 최근의 한 연구논문에는 음반에서 정리한 곡명 수를 192종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사 기관과 목적에 따라 그 수가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리랑은 자기 복제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음 세 번째는 이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여지를 표현한 것이란 점이다. 어쩌면 이 세 번째를 함의한 것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그 가치 향유를 목적으로 한 아리랑 전승단체가 더 형성될 것이고, 그 범위가 세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결성과 창작 활동은 이 세 번째의 함의를 실증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래되는 전통민요만 알고 있는 ‘밀양아리랑’은 1926년 9월 창작되었고, 그해 10월엔 영화 나운규의 아리랑에 등장한 ‘본조아리랑’이 탄생되었으며, 1934년엔 ‘진도아리랑’, 1936년에는 대구아리랑, 1972년엔 ‘상주아리랑’이 새롭게 세상에 나왔다. 아리랑은 댓구 형식이라서 기억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2줄의 사설, 2줄의 후렴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서, 외국인들도 한번 들으면 누구나 기억하기 쉬어서 각인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나 지어 부르기도 쉬운 노래다. 이는 아리랑이 가진 창작과 개사의 속성을 지닌 '노가바' 형식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속성에 맞게 ‘왕십리아리랑’도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은하 회장은 아리랑코로나 가사를 받고서 "코로나 시대에 코로나를 이기자는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알리고, 사할린 동포들에게 사할린아리랑을 가르치는 아리랑동지! 다시 한번 우리는 이혜솔 회장의 자발적 전승활동에 박수를 보낸다"라고 반겼다.(기미양:국악신문 객원기자)
-
[김기자의 객석에서] 나를 사로잡은 윤은화의 양금 협연시작부터 블랙홀이 나타나 티끌하나 남김없이 모든 것을 휘어 삼켰다. 객석에 있는 관중이 윤은화의 블랙홀에 빠져들었다. 감동과 전율을 느낄 때면 소름이 돋는다. 나만의 감동은 아닐 것이다. 지난 4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윤은화의 ‘양금 시나위’(초연)를 보았다. 비주류 악기로 취급받는 양금의 협연이었다. 이 작품은 협연자 윤은화 작곡으로 국악관현악과 만나 양금이 주인공이 되는 연주회였다. 나발의 힘찬 소리로 시작되었다. 윤은화의 양금소리는 귀로만 듣기에도 황홀하고 넋이 나가기 충분했지만, 채를 잡은 양손의 움직임과 몸짓 그리고 얼굴 표정까지 더해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했다. 의자 등받이에 맞닿은 상체는 강력한 장력에 이끌려 앞을 향하게 만들었다. 너무나 당차고 열정적이며 유혹적이기까지 했다. 그곳은 마치 양금의 세상이 되어 모두의 혼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적막공산을 단숨에 호중천으로 바꿔 놓았다. 단 한순간도 한 눈 팔수 없고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연주였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아까울 만큼 감탄의 연속이었다. 연주가 끝났을 땐 저 멀리 가 있던 넋이 허우적거리며 돌아오느라 정신을 번뜩 차려야 했다. 놀란 눈과 벌어진 입은 온 몸이 양금소리에 젖어 마를 틈이 필요했다. 그 여운은 돌아오는 내내 가시지 않았다. 만일 황진이가 윤은화의 ‘양금 시나위’를 들었다면 자신의 시에 선율을 입혀 달라고 의뢰를 했으리라는 상상도 했다. 작품 ‘양금 시나위’는 2015년 독주로 연주하였고, 이번에 국악관현악으로 재편, 초연이었다. 한국양금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윤은화의 연주세계는 무한한 듯하다. 청아한 양금의 선율을 머금고 나온 초겨울 저녁은 산뜻하기만 하다.
-
[공연리뷰] 국립충청국악원 공주유치 '대한민국국악제’ 성료【공주=국악신문】 공주시(김정섭 시장)가 주최하고 사)한국국악협회(임웅수 이사장)가 주관하는 ‘제39회 대한민국국악제’가 백제문화의 고도 공주시에서 10월 30일과 31일 이틀간 성료되었다 1981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주관으로 시작하였던 ‘대한민국국악제’는 39년 역사상 처음으로 지방에서 개최되어 많은 기대를 모았다. 공주시는 중고제 판소리의 중심지이자 박동진 국창의 고향으로서 뜻깊은 자리만큼 안숙선 국창이 박동진(1916-2003)국창의 고향에서 판소리 흥보가의 ‘박 타는 대목’을 열창하여 기립 박수를 받았다. 첫날에는 ‘국립 충청국악원의 시대적 요구’라는 주제로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박일훈 전 국립국악원장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한덕택(남산국악당상임 예술위원), 최혜진(목원대학교), 김용호(전북도립국악원 한예연구실장), 주재근(이화여자대학교) 등 국악계 전문가들이 충청권 전통문화예술 자산의 활용방안과 국립 충청국악원의 당위성에 대해 발제했다. 둘째날에는 공주시 아트센터 고마에서 전국에서 모인 21개 전통연희 단체의 다양하고 화려한 공연이 펼쳐졌다. 오후 3시 30분부터 공주지역 농악 한마당을 시작으로, 영남, 경기,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버꾸춤, 우도 담양농악, 서도소리 선소리산타령, 광명농악, 진도북춤, 진도씻김굿이 대한민국 국악을 아우르는 공연으로 연행되었다. 오후 6시 30분에는 대취타와 중고제판소리의 ‘차령고개’로 개막행사가 펼쳐졌고 임웅수 이사장의 개회사, 김정섭 시장의 환영사가 이어졌다. 본공연에는 비나리, 덧배기춤, 흥보가 ‘박 타는 대목’, 메나리조 민요, 안산시립국악관현악단 연주에 이어 심청가 ‘심봉사 황성 올라가는 대목’, 사물놀이 등 신명나는 공연이 펼쳐졌다. 폐회사에서 김정섭 시장은 "국악의 우수성을 알리는 대한민국국악제를 공주에서 개최하게 돼 매우 기쁘다. 내년에도 공주시에서 제40회 대한민국국악제를 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임웅수 이사장은 "제39회 대한민국국악제가 31일 공주시 개최에서 국립충청국악원의 유치라는 의미를 담고 열린 가운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무형문화유산 보존단체와 명인, 명창들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코로나19 여파로 비대면 공연을 하게 돼 아쉽지만 내년에는 더욱 멋진 공연으로 보답하겠다.”고 하면서 "국립충청국악원의 유치를 시작으로 17개 시도에 국악원 분원이 설립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밝혔다. 또한 "코로나19로 국악계가 어려운 가운데, 100만 국악인들을 위한 국악문화산업진흥법 제정이 시급하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공주시는 매년 ‘공주 박동진 판소리 명창·명고대회’를 개최하는 등 중고제 판소리의 복원·전승에 힘을 기울여 오고 있다. "중부권 국악발전과 국악저변 확대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힌 공주시 관계자는 "‘대한민국국악제’의 지방 개최는 국립충청국악원의 공주시 유치 운동과 맞닿아 있다.”며 "이번에 힘써준 한국국악협회와 앞으로도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어나갈” 것으로 전망하였다.
-
[단독] 한국 조지아 문화교류를 통해 우리 음악을 알린다지난 1일(일) 한국 조지아 문화교류를 위한 언택트 공연이 한국과 조지아에서 이루어졌다. 오후 7시 서울 아르떼홀에서 ‘이병욱과 어울림 실내악단 콘서트’가 진행되었다. 이 행사는 조지아의 국제현대예술전시 기관인 ‘아트리스테리움(Atristerium)’에서 주최한 국제현대예술‘ATRISTERUIM 13’의 개막공연으로서 조지아 현지에서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 음악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아르떼홀에서 무관중 공연으로 진행되었으며 ‘아르떼TV’ 유튜브 채널을 통해 조지아 국립박물관에서 생중계되었다. 마리소리음악연구원 이병욱 이사장이 이끄는 ‘이병욱과 어울림’ 실내악단, 황경애(이매방류 살풀이춤 이수자) 예술감독으로 ‘어울사랑’ 전통무용단이 출연하였으며 장일범 음악평론가가 진행을 맡았다. 살풀이춤으로 행사의 문을 열고 유대봉제 백인영류 가야금산조, 장구독주, 태평무 순으로 우리 전통음악과 무용이 펼쳐졌다. 이어서 실내악단 ‘이병욱과 어울림’의 연주가 이어졌다. 강원도 민요를 재즈풍으로 편곡한 ‘신 한오백년(이병욱 작곡)’ 이 땅을 지켜온 조상들의 삶을 노래한 ‘검정고무신(민용태 작사/이병욱 작곡)’, 우리가락의 다양한 장단을 조화롭게 풀어낸 ‘우리가락환상곡(이병욱 작곡)’, 양국의 슬픔과 민족성을 담아낸 ‘조지아와 한국을 위한 아라리(이병욱 작곡)’ 등이 공연되었다. 이병욱 이사장은 "이번 행사에 초연한 ‘조지아와 한국을 위한 아라리’는 조지아의 민요 ‘오로벨라(Orovela)’와 강원도 아리랑을 함께 담아낸 곡으로서 이번 행사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 조지아의 농부들이 포도를 따며 부르는 노랫말인 ‘아라리’로부터 우리의 ‘아리랑’을 떠올리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며 "오늘 공연을 통해 전쟁이라는 역사적 슬픔을 겪은 두 나라가 서로 공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세계를 멈추게 하는 코로나를 극복하는 치유의 노래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공연에 앞서 오후 2시에는 이병욱 이사장이 ‘한국음악의 특성과 이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였다. 한국전통음악의 갈래, 구조적 특성, 꾸밈음의 종류 등 ‘한오백년’, ‘태평가’, ‘진도아리랑’을 통해 설명하였으며, ‘중모리, ’굿거리‘, ’세마치‘, ’엇모리‘ 등 장단의 구성에 대해 소개하였다. 강연 전후로는 ‘어울사랑’ 전통무용단의 ‘사풍정감’과 ‘강강수월래’가 각각 공연되었다. 강연은 녹화된 뒤 본 공연이 끝나고 현지로 송출되었다. 무대미술은 이무성 화백에 의해 진행되었다. 조지아 측에서 한국의 정서가 담긴 서예 휘호 서체와 한지에 그림 풍속화가 한국 전통예술의 무대의상의 색상과 춤사위의 선과 잘 어울어져 환상적 공연을 보여 주었다는 호응을 받았다. 이번 온라인 송출 및 언택트 공연에서 무대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관객들에게 공연 작품의 주제를 다양하게 재해석 하게 하는 모티브를 연결시켜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공연리뷰] '언택트와 콘택트 사이' 국악버스킹IN서울 공연을 마치고【서울=국악신문】 김중현 총감독(전통공연예술연구소 소장) =서울시 주최 (사)전통공연예술연구소 주관, 국악 활성화를 목적으로 한 '국악버스킹IN서울'이 8월부터 10월 25일까지 총 60회의 공연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8월부터 10월까지 매주 35개 팀 400여 명의 출연진과 스텝들이 참여하는 대장정의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코로나 시대에 맞딱드리는 국악의 활성화에 대한 모색을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 발생으로 인해 "언택트와 콘택트 사이”라는 버스킹(길거리 공연) 컨셉으로 기획되어 유튜브 채널(국악버스킹in서울)과 인스타그램(gugakbusking)을 통해 생중계와 영상물로 시청할 수 있도록 진행하였다. 우선적으로 국악인들에게 공연 기회를 제공하고 시민들에게는 즐거움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유명 유튜버들도 공연자와 함께 토크가 있는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국악유튜브 크리에이터인 가야금연주자 '아야금', 가야금신동 '박고은', '박영주', 해금연주자 '은한' 등이 출연하여 국악 활성화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주고 받았다. 중견 국악인과 신진 국악인들과 함께하는 '전영랑과 보울'과 같은 콜라보 작품을 통해 세대를 넘어가며 변화해 가는 국악의 면모를 살필 수 있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거리두기 1단계 완화에 따라 국악버스킹IN서울이 가을날, 연인들의 거리 덕수궁 돌담길에서 공연을 펼쳐져 공연자들도 오랜만에 관중들 앞에서 신명나는 공연을 하였다. 도시 한복판에 울리는 선율은 코로나에 지친 시민들이 길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한 열정의 무대이었다. 관객들은 익어가는 가을 정취 아래 국악과 현대음악이 어우러지는 이색적 무대에 이끌려 잠시 흥취에 흠뻑 젖어 들어갔다. 거리두기 2단계와 2.5단계 시기에는 무관중 온라인 공연으로만 진행되는 중에 지난 12일 거리두기 1단계로 완화되면서 추진한 버스킹 무대이었다.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이 어우러지는 크로스오버 무대를 제시했다. 기악공연에서는 양금과 대금, 기타. 가야금과 섹스폰, 신디와 해금같이 동서양의 음악이 배합된 이색적인 공연이었다. 상모돌리기, 사자춤, 버나놀이, 굿 등 전통예술 프로그램에서 어린들을 위한 어린이 연극과 마술, 행위예술 등 다채로운 공연예술 장르를 준비했다. 전통악기와 서양악기로 이루어진 연희팀 '느닷컴퍼니', '연화' '낭만판소리', '도담도담'은 수준 높은 퓨전국악 연주로 관객들에게 많은 박수와 추임새를 받았다. 이번 무대에서 주목받은 장르는 퓨전형식의 국악버젼이었다. 월드뮤직그룹 '반디'와 '도시', 해금과 실용음악의 하모니를 울려준 '해금살롱', '국악 토리스' 그룹이다. 특히 국내 유일한 국악아카펠라 그룹‘토리스(TORYS)’의 리더 곽동현과 함께 하는.무대는 전통민요를 근간으로 하여 내놓은 퓨젼국악 작품은 젊은층의 큰 호응을 받았다. 지역에서 전해지는 토속소리를 재해석한 편곡 작품은 대중들에게 신선한 장르로 다가왔다. 퓨전국악의 백미를 보여준 한 단계 진화된 예술성 높은 공연을 선사했다. 온라인과 현장에서 퓨젼국악은 국악 장르가 젊은층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모티브가 될 수 있다는 접근성을 제시했다. 이번 행사의 큰 성과였다. 버스킹 공연 현장에서는 추임새를 던져주는 관객들의 얼굴 표정에서 공연자와 관객의 주고 받는 공감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3개월 동안 총 60회로 이어진 무관중 온라인 공연과 버스킹 공연을 통해 장단점과 보완점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에는 무대에서 시민들과 직접 소통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이를 계기로 1회성 거리공연인 국악버스킹 공연을 스튜디오에서 보다 양질의 영상물로 제작하여 생방송으로 공유하고 있는 중이다. 이 영상물은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 한번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국악 활성화의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국악관련 유튜버들과의 대담에서 이러한 개방적 무대는 마스크와 거리두기라는 제한적 공간에서 잠시나마 시민들에게 코로나로 인해 지친 마음에 신선한 힐링타임을 제공했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버스킹 무대를 통해 시민 전 계층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국악 활성화를 위한 가능성을 보여준 실험적 무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 유일의 국악아카펠라그룹‘토리스(TORYS)’ 견두리 소프라노 이신예 알토 곽동현 테너 백현호 바리톤 최홍석 베이스
-
[공연리뷰] ‘국악버스킹IN서울’, 뜨거운 호응 속에 마무리【서울=국악신문】 서울시가 주최하고 사)전통공연예술연구소가 주관하는 ‘국악버스킹IN서울’은 국악활성화 목적으로 이루어진 공연으로 코로나19로 ‘언택트와 콘택트 사이’라는 컨셉으로 기획된 시민들과 함께하는 거리공연이다. 주최측은 "8월 22일부터 주말마다 서울 도심 곳곳에서 총 60회의 공연으로 시민들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전통무용과 대금연주부터 국경을 넘나드는 월드뮤직, 퓨전국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실력 있는 30여 개의 국악 팀이 출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심각해지면서 무관중 온라인 공연으로 진행되다가 지난 12일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되면서 48회부터는 덕수궁 돌담길에서 시민들과 마주하게 되는 거리 무대를 열게 되었다." 고 밝혔다. 가을날 정취가 익어가는 시내 한복판 덕수궁 돌담길 앞에서 오랜만에 관객과 함께 하는 공연은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좌석 없이 진행되는 ‘버스킹’ 공연이었음에도 시민들은 60분 동안 진행되는 내내 즐거워 하고 공연자들에게 추임새도 힘차게 보내주었다. 24일(토) 월드뮤직소리그룹 ‘보울’의 공연을 보던 한 시민은 "기타 들고 하는 버스킹만 보다가 우리나라 전통음악으로 하는 걸 보니 신선하고 좋았다.”며 "코로나로 지치고 우울한 때에 힘이 되어 주는 것 같다.”고 반겼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사)전통공연예술연구소 김중현 총감독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국악인들과 시민이 만나는 기회가 줄어들어 안타까웠다.”며 "국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시민들에게 작게나마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기를 바란다. 거리 공연인만큼 관람객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는데 특히 10~30대가 주를 이뤄 젊은층에게 국악의 맛을 알리는 데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고 전했다. ‘국악버스킹IN서울’의 지난 공연 영상들은 국악버스킹TV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을 통해 온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다.
-
[단독] ‘국악버스킹IN서울’, 코로나로 지친 마음을 치유하다【서울=국악신문】 서울시가 주최하고 사)전통공연예술연구소가 주관하는 국악활성화 사업인 ‘국악버스킹IN서울’ 전통민요와 판소리에서 트로트까지 아우르는 장르를 전통 국악기와 외국악기가 배합된 크로스오버 무대를 선보인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등 여러 장르음악을 통해 세계음악을 맛볼 수 있다. 주말 기간동안 ‘연인의 거리’로 수식되는 덕수궁 돌담길에서 ‘가을의 낭만’을 공유할 수 있는 음악잔치다. ‘국악버스킹IN서울’ 공연이 지난주 토요일(17일)과 일요일(18일)에 덕수궁 돌담길에서 펼쳐졌다. 토요일 공연은 오후 3시부터 세 차례 진행됐는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경계를 뛰어넘는 월드뮤직그룹 ‘반디’, 전통악기 해금으로 재즈 풍의 민요를 연주하는 ‘해금살롱’, 어린이 국악뮤지컬 팀 ‘낭만판소리’ 등이 출연하였다. 일요일에는 국악으로 사람들을 힐링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신진국악팀 ‘음악그룹 하루’, 직접 개량한 GMG가야금으로 독특한 사운드를 구축한 ‘가야금 Lab오드리’, 비파와 가야금의 감미로운 앙상블을 연주하는 ‘국밥’ 등 세 팀이 공연하였다. ‘버스킹(busking)’ 공연을 보기 위해 지나가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 즐겼다. 산책을 나온 연인과 가족, 홀로 지나가던 시민들이 공연을 관람하며 일부 시민들은 휴대폰에 사진과 영상을 담았다. 유모차도 자전거도 자리에 서서 공연을 즐겼으며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시민들도 있었다. 종로에 사는 한 시민은 "오랫동안 코로나로 지친 시민들과 함께 가을날 푸른 하늘 아래 모처럼 좋은 추억이 되었다.”고 반겼다. 지난 8월부터 매주말마다 서울 도심 명소에서 공연하려 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그동안 유튜브 채널을 통한 온라인 무관중 공연으로 진행되다가 지난 12일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되면서 시민들과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사)전통공연예술연구소 김중현 총감독은 "이번 공연으로 코로나(COVID-19)로 지친 서울시민들의 일상에 활력소를 불어 넣을 것이며, 덕수궁 돌담길에서 가을날의 정취를 가족, 연인 친구들과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공연으로 준비를 했다”고 밝혔다. 지난 토요일 공연은 현재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고 14만 구독자가 있으며, 국악계 아이유로 불리는 가야금 유튜버 ‘아야금’의 가야금 연주와 <새소년-난춘> <이선희-여우비> <안예은-달그림자> 등의 노래와 게임음악 이누야사ost 연주를 시민들과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다. ‘국악버스킹IN서울’은 이번주 토요일(24일), 일요일(25일)에 다시 시민들을 찾아갈 예정이며, 지난 공연 영상은 국악버스킹TV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을 통해 온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다.
-
Georgian folk song "Orovela"This is one of Georgia folk songs. Georgian national music is very old and one of the uniques in the world. Georgian folk music possesses what is the oldest tradition of polyphonic music in the world, predating the introduction of Christianity. Tuning Scales used in traditional Georgian music have, like most European scales, octaves divided into seven tones (eight including the octave), but the spacing of the tones is different. As with most traditional systems of tuning, traditional Georgian folk music uses a just perfect fifth. Between the unison and the fifth, however, come three evenly-spaced notes, producing a compressed (compared to most European music) major second, a neutral third, and a stretched perfect fourth. Likewise, between the fifth and the octave come two evenly-spaced notes, producing a compressed major sixth and a stretched minor seventh. This system of tuning renders thirds as the most consonant interval after fifths, which resulted in the third being treated as a stable interval in Georgia long before it acquired that status in Western music.[citation needed] Some consider the Georgian scale a "quintave system" (as opposed to the octave-repeating "octave system"). Due to the neutral tuning within the quintave system, the eighth degree or octave is slightly widened, which often results in a rise in pitch from the beginning of a song to the end. Because of the influence of the Western music and its different system of tuning, present-day performances of Georgian folk music often employ Western tuning, bringing the seconds, fourths, sixths, and sevenths, and sometimes the thirds as well, closer to where they would lie in a Western scale.
-
[공연리뷰] ‘경건한 아리랑’ 공연, 강원의병아리랑 콘서트Ⅲ15일 오전 11시,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문학촌 야외공연장에서는 뜻 깊은 공연이 펼쳐졌다. 일반 공연과 다르게 국민의례가 있고, 진행자가 비장한 어투로 공연을 열었다. "아리랑을 통한 의병정신 선양과 계승, 이를 취지로 설립된 사단법인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 오늘 8월 15일, 해방기념일, 광복절, 건국절을 기념하여 설립 취지에 실천하는 공연의 막을 엽니다. 의암 유인석 의병대장과 그의 며느리 여성 의병장 윤희순님, 그리고 오늘을 위해 몸바친 이름 없이 산화한 의병들과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려 합니다.” "대장부 깊은뜻을 이루지못하면 차라리 자결하여 목숨을구걸말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싸 배띄워라” 기연옥 명창의 도창(導唱)에 의한 춘천의병아리랑으로 막을 열었다. 의병들의 진격 신호였을 징소리를 시작으로 한 메나리조 아리랑이다. 이어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의 혼령을 진혼하는 춤, 살풀이와 바라춤이 이어졌다. 절제된 동작의 독무 살풀이(소숙희), 정중한 범패조 바라춤(위정순 외 10인)이었다. 이 첫 무대는 소양강 사고와 ‘코로나19’의 삼엄함을 헤치고 펼치는 명분과 당위성을 담보해 주었다. 제2부는 강원지역 농사소리 무대였다. 밭일 노래와 논일 노래다. 절기상 이맘때쯤이면 장마를 이긴 벼 포기를 대견스러워하는 논매기소리로 들녘을 수놓았을 터, 남정네들의 구성진 목을 대신해서 하늘거리는 여상창의 공연으로 대신했다. 달라지고 변하여 소리하며 농사를 짓는 ‘농부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딘가. 줄모 띠워 모심고, 논매고, 타작 과정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3부는 태백갈풀소리에 강원도아리랑이 장식했다. 전자는 태백아라레이보존회(회장 김금순) 팀이 갈풀을 작두질하는 실연과 함께 펼쳤다. 옆 동네 정선에서 ‘아라리’라고 하는 것을‘아라레이’로 부르는 태백 지역의 ‘같으면서 다른 소리’이다. 실제 갈풀질을 했음직한 80대 출연자가 있어 실감을 더했다. 강원도아리랑은 김유정(金裕貞/1908~1937)이 많은 작품에서 소재로, 또는 단순 인용으로 작품에 담은 노래다. 단편소설 <총각과 맹꽁이>(1933)·<산골나그내>(1933)·<만무방>(1934)·<안해>(1935)·<솥>(1935) 같은 작품에서다. 김유정을 ‘아리랑작가’로 호명한 이유이고, 무대를 제공 받은 이유일 것이다. 공연 내내 소나비와 부슬비가 오락가락했다. 공연 시간 1시간, 다소 가라앉은 무대였다. 아리랑도 무거웠다. 그래도 아리랑이 의례(儀禮)음악으로 오늘 같은 날의 기념가(記念歌)임을 실증한 의미 있는 무대였다. 오래 기억할 것이다.(춘천에서 三目 記)
-
공주아리랑 전국민요경창대회 대성공, 그러나~기미양/아리랑학회 연구이사 (사)공주아리랑보존회(회장 남은혜) 주최 제6회 ‘공주아리랑전국민요경창대회’ 학생부, 합창부, 일반부, 명창부 총90여 팀이 참가하여 열띤 경연을 펼쳤다. 8월 8일 토요일, 10~18시까지 충남역사박물관 1층 경연무대에서 코로나 사태와 무더위와 장마를 이기고 성공을 거두었다. 의외로 전국에서 많은 경연자가 참여한 것은 ‘코로나19’사태로 인한 다른 지역의 경창대회가 연기 또는 폐지 사태로 몰린 탓도 있지만, 5회까지의 공정 심사운영이란 사실이 정평을 얻은 결과로 보고 있다. 여기에 공주아리랑을 전국에 알리는 일에 열정을 다한 남은혜 회장의 노력이 더해졌다는 심사위원들의 평가다. 두 명의 간명한 진행과 고른 지역 안배의 심사위원 배치, 그리고 각 분야 경연자들의 일정 이상의 수준이 여타 경연대회의 지루함을 극복하게 해주었다. 특히 자리를 지키고 시상에 까지 참여한 이일주(전 공주대학교 대학원장), 최준호(세계유산관리주민협의회 이사장), 김정수(전공주대학교 명예교수) 등의 격려가 큰 힘을 주었다. 그리고 김동일(충청남도 도의원), 최원철(정진석 미래통합당 당협 사무국장), 김형오(공주예총 사무국장) 등의 인사가 관계자들을 찾아 격려하는 성의도 좋았다. 심사는 경연이 끝나자마자 즉시 집계하여 계시하는 형태로 공정성을 높였다. 학생부 수상자는 대상 전가인, 최우수상 신정인, 우수상 이준희, 장려상 공나은과 조아해, 특별상 노현준, 서민호, 김강호이다. 단체부는 대상 정선군(최경남 팀), 금상 공주시 이인면 남성팀(단체부), 은상 공주시 여성팀(단체부), 동상 이정희 팀(단체부), 장려상 이봉순 팀(단체부)이다. 일반부 대상 조희진, 금상 박수기, 은상 양승화, 동상 장문자, 장려상 최문희, 특별상 마이클 람부라우씨이다. 특별상 수상자 마이클박사는 한국어학과를 전공한 미국인 청년으로 한국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고려대학교를 거쳐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여러 매체에 글을 쓰는 북한 전문가이다. 공주아리랑과 홀로아리랑, 본조아리랑을 메들리로 불러 객석의 합창을 이끌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날의 마지막 출연자로 휘날레 무대를 신명으로 마무리해 준셈이다. 명창부는 대상(국회의장상) 김정숙(64/정선군립예술단 단원)이 받았다. 금상(충남도지사상) 정미덕, 은상(국회의원상) 신철호, 동상(공주문화원장상) 윤상이, 장려상(아리랑연합회장상) 정진철이 수상했다. 주목을 끈 명창부 결선은 아리랑(정선아리랑과 긴아리랑) 2명, 경기잡가(적벽가와 유산가) 2명, 재담소리와 서도소리 남창 2명이 진출했다. 이런 결과로 심사위원들과 객석에서는 장르 간, 경기긴아리랑과 정선아리랑 간 경합에 시선이 모아졌다. 기량을 보이는 경연 시간은 각 6분, 6명의 최종 경합 결과는 정선아리랑이 최고 점수를 받아 대상을 차지했다. 전국 주요 아리랑경창대회(정선, 대구, 영천, 공주)에서 아리랑이 아닌 종목이 대상 수상을 한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경기긴아리랑과 정선아리랑이냐. 이 중에서도 경기소리인 ‘김옥심제’냐 토속 ‘아라리’냐로 경합이 있었을 뿐이다. 이번 대상자는 군립예술단에서 활동하는 경력으로 아라리 긴소리와 엮음소리를 고르게 구사하여 좋은 점수를 받았다. 심사위원은 민요 전 분야와 지역을 고려, 안배를 하여 임명했다. 위원장 조성보(전 공주사대 음악교육과 교수), 정은하(경북), 김길자(강원), 배수옥(충남), 유윤서(경기), 이건자(서울), 총 6명이 맡았다. 조성보 심사위원장은 심사평에서 공주지역이 전국 유일하게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유무형을 다 갖춘 지역임으로 아리랑을 주목하고 있고, 국립국악원 중부지역 유치의 당위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한국 문화상징인 아리랑 중에 공주아리랑의 위치가 중요함을 알리는데 경창대회가 유용한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차원에서 지정곡인 ‘공주아리랑’의 비중을 앞으로는 더 높여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남은혜 회장은 이런 차원에서 내년부터는 지정곡 ‘공주아리랑’의 비중을 앞으로는 더 높이겠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오신 부산에서부터 파주까지 전국 지역에서 참가한 90여 단체 경연자들과 관객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공주아리랑경창대회 성공 가능성과 공주에 반드시 국립국악원이 유치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민요 경연이라는 차원에서만 본다면 성공을 거두었음이 분명하다. 일단 경연자들이 각 분야별로 고루 전국에서 참여했고, 대상의 기량도 평가할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연대회는 일종의 축제로서 참가자 가족과 지역민의 참가로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번 행사는 정작 공주 지역 내부의 관심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이다. 참가자나 심시위원 모두가 느낀 의야함이다. 코로나 여파와 복중 장마가 원인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객석의 시민은 거의 전무했다는 점에서는 원인이 따로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시 차원의 대민 홍보가 부족했다는 점을 들 수밖에 없다. 앞으로 분명히 개선해야 하는 과제이다. 다시 내년 제7회 공주아리랑 전국민요경창대회를 기대한다.
-
[음반] 명창 남은혜 공주 ‘은개골아리랑’ 음반 발표기미양/아리랑학회 이사 공주에 살며, 공주아리랑을 부르며 사는 것을 긍지와 자랑으로 삼는 남은혜 명창이 두 번째 앨범이 탄생했다. 음반 ‘은개골아리랑’이다. ‘은개골’은 사적 제12호 공산성과 충남 기념물 제99호 옥녀봉성 사이에 위치한 골짜기로, 백제역사유적지구 관광의 관문의 골자기 이름이다. 이번 음반 타이틀 ‘은개골아리랑’을 통해 명소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주변의 메세지가 이를 예감하게 해 준다. #"은개골아리랑에는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우리시 도시재생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김정섭 공주시장 축사 중에서) #"인류문화유산 ‘아리랑 신청서 서명 3인’에 선정되어 활동하는 남명창의 은개골아리랑은 또 하나의 공주아리랑으로 널리 불러질 것을 기대한다.”(최창석 공주문화원장 축하 글 중에서) #"공주와 관계 깊은 가사를 가지고 부르는 우리 소리, 즉 창작민요입니다. 이는 남은혜 명창의 또 다른 매력이며 남은혜 명칭만이 하고 있는 의미있는 노력이고 성취입니다. 칭찬해 드리고 싶습니다. 은개골아리랑! 파이팅입니다.”(시인 나태주 축하의 글 중에서) 남은혜는 음반의 인사말에서 자신있게 말한다. 자신이 행복하게 사는 이유를~ "자랑스런 공주아리랑 전승자로서, 공주아리랑 음반 취입자로서,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아리랑 등재 신청서 서명자로서, 국가무형문화재 129호아리랑 전승자로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명창의 자부심은 그의 성음만큼 힘차고 단호하다. 이는 이 음반 컨텐츠의 내실이기도 하다. 타이틀곡을 앞세우고 ‘숙세가’, ‘고마의 봄’, ‘정산가’, ‘군밤노래’, ‘치르치크아리랑’이 담겼다. 그리고 장단의 변화(세마치, 동살풀이, 메들리)를 준 은개골아리랑 연주곡을 수록, 총 10개의 트랙으로 구성되었다. ‘은개골아리랑’은 이병욱 작곡이다. 세마치에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났네/아리랑 쓰리쓰리랑 은개골아리랑’이란 정겨운 후렴으로 시작한다. 사설은 3절로 은개골의 백제 사연, 은개나루의 정한, 누구나의 고향 같은 서정을 그렸다. 1절은 ‘공산성 옥녀봉 바라보면서 버드나무 바람따라 춤을 추는 곳/백제숨결 보듬고 일궈온 마을 이름도 아리랑다운 은개골이라네’라고 하여 신비감을 표현했다. ‘숙세가(宿世歌/백제가요)’는 2000년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 목간(木簡) 시를 번역, 곡을 부여한 작품이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자는 백제인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시이다. 조성훈 작사, 오세라 작곡이다. 역사적인 백제가요의 현대화 실증으로 큰 의미가 있다. ‘정산가(定山歌)’, ‘고려사 악지’ 속악 기록을 재현한 작품으로 조훈성 작사, 오세라 작곡이다. 정산은 공주의 한 마을이름으로 느티나무의 풍성함을 들어 인심의 순후함과 군왕의 자애를 표현한 것으로 백제인의 가무전통을 담은 작품이다. 숙세가와 함께 공주의 역사와 정서를 담은 의미있는 작품이다. 이 같은 역사 기록의 현대가요화는 분명한 창조성의 발현이며, 지역 정서의 계속성 작업 성과이다. ‘느티나무 가지를 늘이는 구나/느티나무 복록을 누리는구나’의 여운이 길다. 숙세가와 함께 이 노래는 남은혜의 통성에 힘입어 정가의 맛을 주는 동시에 가객(歌客) 소리라는 풍모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밤 짝에 처녀총각 밤줍기 핑계삼아 밤마실 간다네/ 콩건두러 졌다네 군밤아// 에헤에-군밤아 살 삶은 밤이냐 군밤아’가 흥미와 입맛을 돋운다. 8분의 12박자로 처녀 총각의 핑계를 숨겨주는 맛도 있다. 공주 ‘군밤노래’다. 가사에는 짝밤과 통밤의 모양과 맛을 궁굼하게 하는 대목도 있다. 우리나라 농요를 연구하고 집대성한 이소라 교수의 채보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태환의 편곡으로 현대적인 세련미를 더한 작품이다. 합창곡으로도 적합하다. ‘군밤노래’를 수록한 이 음반은 ‘공주 밤’의 브랜드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창작아리랑 ‘치르치크아리랑’은 남은혜의 국외 전승활동 성과를 통해 중앙아시아 동포사회 존재와 위상을 알리는 역사적 의미를 표상화 한 작품이다. 2012년 이후 많은 해외 동포사회 공연에서 ‘아리랑을 통한 디아스포라 정서’를 일반화한 곡이다. ‘남은혜의 아리랑’에서 ‘아리랑의 남은혜’라는 역사적 영예를 선사한 작품이다. 이번 음반은 공주 사랑과 공주 자랑을 표현한 남은혜 명창의 명성과 영예에 값한 기록이며 자랑스런 공주 시민에게 안기는 노래 선물이다. 남은혜(1958년생/사단법인 공주아리랑보존회 회장) *1911년 민요조사자료 ‘공주아리랑’ 수록 자료 발굴 *아리랑 유네스코 등재신청기념 실크로드세계아리랑페스티발(2011년) 참가 *안중근의사추모제(일본 미야기현) 한국 초청명창 참가(아무르아리랑) *제2회사할린아리랑제 아리랑 명창 초청공연 *음반-공주아리랑(2014)/은개골아리랑(2020) 발매 *우금치아리랑(2017년). 금강아리랑(2018년), 공주의병아리랑(2019년) 발표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신청서 서명자 * 아리랑상 수상(201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공주아리랑제(매년 3월 1일), 공주아리랑전국경창대회 주관 *백제문화제 초청공연 ‘선상의 아리랑’ 주관 현-충청남도 무형문화재 ‘공주아리랑’ 지정 신청서 제출, 심의 중 공주아리랑보존회 www.arirang12.com
-
[Выход фильма] “Певец”. Звуки меняют мир.«Певец» (корейское название «Сориккун»), снятый режиссером Чо Чжон Рэ – новый музыкальный фильм, показывающий жанр пансори под новым углом. Премьера прошла 1 июля 2020 года. Это дебют профессионального исполнителя традиционного корейского музыкального жанра пансори из Намвона Ли Бон Гына. Трагическая красота пансори. Пансори – это речитативный жанр корейского традиционного музыкального искусства, исполняющийся певцом, сориккуном, под аккомпанемент барабанщика. Исполнение пансори требует выразительного пения, владения различными голосовыми техниками, запоминания большого количества стихов и артистического таланта. Пансори охватывает как пласт высшего сословия, так и культуру обычных людей. Исполнитель или исполнительница пансори импровизируют под ритмы барабана, выступая до двух-восьми часов, смешивая поэзию и академические выражения высшего сословия янбан и обыденные мотивы простых людей. ЮНЕСКО внесло пансори в Список нематериального культурного наследия человечества в 2003 году. Таким образом пансори стал первым корейским классическим жанром в этом Списке. Заинтересованным в пансори и корейском фольклоре, мы советуем посмотреть старые корейские фильмы о пансори и сориккунах, получившие многократные международные награды – «Сопёнчже» и «Чунхян». Вышедший в 1993 году «Сопёнчже» стал первым корейским фильмом, собравшим более 10 миллиона просмотров. Чо Чжон Рэ признается, что он написал сценарий к «Певцу» в 1998 году в качестве курсовой работы, вдохновившись «Сопёнчже». Художника вероятно вдохновила слепая исполнительница пансори по имени Сон Хва. В этом фильме показана настоящая боль исполнителя пансори. «Певец». Голос угнетенных. 10 год правления короля Ёнчжо. Певец пансори Хак Кю живет в гармонии со своей женой Ган Нан, швеей, обслуживавшей аристократов, и со своей дочерью Чхон И. В то время местный властитель-коррупционер был замешан в работорговле. Пока мужа не было дома, его жену и ребенка выкрали. Девочке удалось бежать благодаря мачехе, но из-за несчастного случая в лесу Чхон И потеряла зрение. Злоба и печаль, сопровождавшие эту трагедию, выражены через пансори. В путешествии по поиску пропавшей жены Ган Нан, сориккуна Хак Кю сопровождает его единственный помощник, барабанщик-аккомпанист господин До (Ким Кан Хюн), их сосед Тэбон (Пак Чхоль Мин) и «падший аристократ» (Ким Дон Ван). Они создали музыкальную группу, путешествуя по Чосонской провинции Пальдо и выступая перед толпой. В отличие от западной оперы во время выступления сориккуна один голос представляет всех героев. В один миг мы видим его в качестве Сим Чхон, а в следующий – он уже становится Сим Бон Са. Он начинает выступление как Чунхян, потом поет от лица матери Чунхян, борящейся с тиранией чиновников, а потом снова возвращается к плачущей и скорбящей главной героине Чунхян, которая ждет своего Ли До Рёна. Плач и пение. Песни пансори, находившие отзвуки в сердцах людей, собиравшихся на рынках, и заставлявшие их улыбнуться, зажег в них огонь противостояния социальной несправедливости. Жестоко критикуя несправедливость аристократии посредством острой сатиры, пансори стали глазами, ушами и голосом людей мира. Пансори яростно выражали то, что люди хотели сказать. Постепенно трагическая красота получила народную репутацию силы, исцеляющей тех, кто страдал. Понемногу она открыла людям глаза и, наконец, люди увидели мир посредством силы песен. Песни маленькой комедийной музыкальной группы шаг за шагом изменили мир. Баллада «Симчхон-га» утвердила в изможденных людях Чосона веру в то, что добро восторжествует, а зло будет наказано. В ходе своего путешествия Хак Кю создает одну из самых известных из пяти ныне существующих баллад пансори - «Сим Чхон-га». Это история о девочке Сим Чхон, которая принесла себя в жертву подводному королю, чтобы исцелить своего отца от слепоты. К сожалению маленькая дочь Хак Кю ослепла, но оказалось, что у нее был прекрасный голос и она великолепно исполняла пансори. Тема слепоты присутствует в различных балладах пансори, так как считается, что у людей, лишенных зрения, обостряются другие органы чувств и ярче проявляются таланты. В конце фильма Хак Кю спасает жену и исцеляет дочь от слепоты. Это красивый фильм о силе духа человека и силе пансори. Изюминка музыкального фильма – сама музыка. В фильме прекрасная подборка фольклорной музыки, аранжированной красивейшим образом – от традиционного чистого пансори до современной интерпретации корейской народной музыки. Некоторые сцены фильма выглядят как кадры из знаменитых мюзиклов. С целью разнообразить зрительский состав фильма Ли Бон Гын в своих выступлениях постарался применить метод «наложения» или «кроссовер». Разнообразные жанры, включая популярную музыку, были вплетены в поток корейской традиционной музыки. Он также изучал джазовый скат (вокальную импровизацию под джазовую музыку), выпускал различные музыкальные произведения, смесь джаза и корейской традиционной музыки. Этот фильм может стать возможностью рассказать миру о Намвоне, родине пансори, и взглянуть поближе на сам жанр пансори – нематериальное культурное наследие человечества.
-
[영화리뷰] 영화 소리꾼, 소리는 세상을 바꾼다판소리의 비장미 ‘소리꾼’은 조정래 감독이 2020년 7월 1일 개봉한 새로운 시각으로 만든 판소리라는 국악 장르를 주제로 한 음악영화다. 남원출신 국악인 이봉근씨가 주인공으로 첫 데뷔하여 스크린에 도전한 영화이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북치는 사람)가 음악적 이야기를 엮어가며 연행하는 장르이다.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표현력이 풍부한 창(노래)과 일정한 양식을 가진 말, 풍부한 내용의 사설과 몸짓등으로 구연(口演)되는 이 대중적 전통은 지식층의 문화와 서민의 문화를 모두 녹아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소리꾼은 1명의 고수의 장단에 맞춰 서민들의 생활에서 보여주는 지역성과 양반들의 이중적 일상과 일탈을 풍자하기 위해 고사성어 표현을 빌어와서 제나름의 가사를 지어서 연행하는 즉흥 공연이다. 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서사적 스토리라는 보편성과 특별한 양식의 창법으로 노래하는 전통적 특성을 담보하고 있다. 판소리는 2003년 한국 국악 장르 중 첫 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되었다. 판소리와 한국 전통민속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판소리와 소리꾼에 관한 수상 경력에 빛나는 한국 영화 두 편 ("서편제”와 춘향”)을 추천한다. 1993년에 출시된 서편제는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유치한 최초의 한국 영화다. 조정래는 1998년"서편제”에서 영감을 받아 "소리꾼” 대본을 썼다고 한다. 작가는 장님 판소리꾼 송화라는 인물에서 모티브를 받았다고 보여진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실제 판소리 가수는 고통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소리꾼, 피지배집단의 대변인 시대 배경은 영조10년. 천민출신 소리꾼 '학규'와 양반들의 삯바느질을 하며 돈을 버는 아내 '간난이' 어린 딸 '청이’와 단란하게 살고 있다. 당시 지배자들인 탐관오리들이 대리자를 앞세워 무고한 백성들을 잡아다가 인신매매를 하는데, 남편이 없는 틈에 들이닥친 집안에서 아내와 딸이 잡혀가서 간신히 딸이 도망을 하다 사고로 실명을 하게 된다. 억울함과 분노로 슬픔에 빠진 그는 한스러운 자신의 처지를 판소리로 표출한다. 사라진 아내 간난(이유리)을 찾아 나선 소리꾼 학규(이봉근), 그의 유일한 조력자 장단잽이(북 반주자) 도씨(김강현), 이웃집 '대봉'(박철민), '몰락 양반'(김동완)이 만나서 소리광대패(노래부르는 광대 공연단)를 만들고 조선팔도 유랑공연이 시작된다. 서양의 오페라와 다르게 관중은 소리꾼의 사설을 받아주는 추임새를 통해 어느새 하나가 된다. 심청이가 되고 심봉사가 되고. 춘향전이 시작되면 춘향의 어미가 되어 관리들의 폭압에 대해 저항하고, 이도령을 기다리던 춘향이가 되어 울고 시름짓는 주인공이 된다. 같이 소리를 지르고 한숨을 쉰다. 이렇게 장날 무대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웃기는 판소리는 민중의 가슴에 사회모순에 관한 저항의 불씨를 심어준다. 양반들의 자기모순을 통쾌한 풍자를 통해 실랄하게 비판하여 세상 사람들의 눈이 되고 귀가 되어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준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통렬하게 내질러 준다. 특히 비장미를 담보한 판소리는 서서히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치유의 힘이 되어주면서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된다. 조금씩 민중의 눈을 뜨게 해준다. 드디어 민중은 노래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소리패광대들의 노래는 세상을 조금씩 바뀌게 한다. 피폐한 조선 대중에게 권선징악 제시 학규는 그 과정에서 판소리 "심청가”를 만들게 된다. 아버지의 두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수중 왕에게 자신을 희생한 소녀 심청의 이야기이다. 가슴 아프게도 불쌍한 어린 딸은 맹인 소녀가 되지만 아름다운 목소리와 놀라운 판소리 공연을 선사한다. ‘소리꾼의 실명’이라는 주제는 다른 판소리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왜냐하면 시각 감각이 박탈되어 다른 감각이 더 강력해지게 되어 재능이 발달된 소리꾼들은 더욱 깊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된다는 설정이다. 영화의 대단원 장면에서 그는 아내를 구출하고 딸의 실명을 치유하게 된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명성이 가족을 구하게 된다. 한 예술가의 의지와 판소리의 예술성에 관한 아름다운 영화이다. 음악영화의 백미는 역시 음악성 민속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의 배경음악과 주제가는 전통 민속음악 판소리부터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 작품을 선사한다. 일부 장면은 유명한 뮤지컬의 감동과 같은 느낌이다. 이봉근은 그 동안 국악의 관객층 다양화를 위해 ‘크로스오버’작업을 시도해 오고 있다. 전통음악을 근간으로 한 대중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와 결합을 실험하고 있다. 재즈의 스캣(가사 대신 아무 뜻 없는 후렴구를 넣어 부르는 창법)도 공부했다. 국악과 혼종된 재즈화 작업한 변주곡도 내놓고 있다. 영화 출연의 성과가 공연으로 이어진다면 국악의 저변을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작품을 통해 판소리의 고장 남원을 알리는 계기가 되고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의 위상도 다시 한번 재조명되리라고 본다.
-
アリラン関連事項チョンワデに建議アリラン関連事項チョンワデに建議 (国楽新聞)社団法人珍島アリラン保存会朴ビョンフン理事長、 2019年11月珍島アリラン踏査者達に珍島アリランについて説明している。 6月22日朴ビョンフン元珍島文化委員長はチョンワデにアリランの語源、性格などについて建議した。A4用紙3枚分量の大統領に上げる建議書に依ると”国家的な祭りで哀傷な内容の唄が流れるのは止揚すべきだと建議した。 文章にはアリランが恨みや哀しい曲調の”別れの唄”と言う意味で固着されたのは映画<アリラン>の主題歌から始まったと説明上気させてその辞説7編を提示した。続いて語源にも別れを意味する”我難別説”の他に7種の説を提示した。これに関しては輓歌、葬式につぎ唄う挽歌などから形成された結果だと主張した。その実例の一つとして”昔は伝染病の予防の為に呪符にも書かれた”と言っている。 このような理由を挙げて1964年から南北単一チームの単歌にも歌われてカンファムン(光和門)広場で行われて’アリランフェスティバル’でもベッテゥサン(白頭山)で南北頂上が一緒にいる席で合唱されたアリランの哀傷的で恨みの哀しい曲調の唄が歌われるのは相応わしくないと留念して欲しいと請願した。 朴ビョンフン元珍島文化委員長は現在(社)珍島アリラン保存会の会長で2019年第1回’アリランコリア’大賞の授賞者である。
-
Музыкальные представления в Сеуле во время пандемииМузыкальные представления в Сеуле во время пандемии Корея - одна из немногих стран мира, где пандемия не парализовала культурную жизнь. Конечно, существует много ограничений, касающихся проведения культурных мероприятий, организаторы и зрители обязаны соблюдать ряд строгих мер профилактики, но, тем не менее, в Сеуле проходит достаточно большое количество концертов и постановок. Культурный центр Сэчжон, Национальный театр Кореи и Сеульский Арт-центр предлагают своим зрителям широкий выбор музыкальных концертов с участием местных исполнителей. Помимо регулярных концертов корейских музыкантов, Сеульский Арт-центр объявил о гастролях 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кого театра балета, которые запланированы на ноябрь. 11 и 12 ноября театр представит "Баядерку”, а 14 и 15 ноября - "Лебединое озеро” при участии прима-балерины театра Ирины Колесниковой и премьера Большого театра Дмитрия Родькина. Несмотря на большие надежд, что 2020 год станет знаменательным годом, наполненным яркими музыкальными событиями, приуроченными к празднованию 30-летия установления дипломатических отношений между Россией и Кореей, а также 70-летия установления корейско-испанских отношений, все зарубежные концерты в крупнейших концертных залах Кореи были отменены. Что касается корейской традиционной музыки, Национальный центр корейской традиционной музыки запустил он-лайн трансляции своих концертов. Однако концерты, а также Курс по корейской традиционной музыке для иностранцев в этом году отменены из-за пандемии. Единственное иностранное шоу, которое можно посмотреть сейчас в Сеуле, а позже в Тэгу - это оригинальная постановка "Призрака оперы”. Мюзикл вернулся на подмостки корейского театра Blue Square после семилетнего перерыва. Шоу закрывалось на 4 недели из-за того, что у двоих актеров труппы был обнаружен вирус, но снова открылось после карантина и было продлено до 7 августа. Эндрю Ллойд Вебер с гордостью отметил, что на данный момент "Призрак оперы” в Сеуле - это единственное действующее крупное шоу на планете. Проведение всех культурных мероприятий в Корее в настоящий момент стало возможным благодаря передовым методам страны по борьбе с коронавирусом на национальном уровне. Это дало людям возможность наслаждаться театральными и музыкальными выступлениями даже во время пандемии. Источники: Национальный центр традиционной музыки Культурный центр Сэчжон Национальный театр Кореи Сеульский Арт-центр Daily Mail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볼 수있는 뮤지컬 공연. 한국은 아마도 전염병이 문화 생활을 완전히 막지 못한 세계에서 몇 안되는 국가 중 하나 일 것입니다. 확실히, 주최자와 청중 모두가 취해야 할 제한과 조치가 있지만 서울에서 여전히 즐길 수있는 공연이 있다. 국립 중앙 극장 세종 센터와 예술의 전당은 다양한 국내 콘서트와 리사이틀을 제공합니다. 다양한 예술 공연과 함께 예술의 전당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발레 극장의 라바 야 데르와 스완 레이크가 각각 11 월 11 일, 11-12 일, 14-15 일에 공연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국립 국악원 (NGC)은 한국 전통 음악 공연이 진행되는 한 토요일 구국 콘서트와 다담 공연을 취소하고 수요일 한국 전통 무용 공연을 연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GC는 NGC YouTube 및 NaverTV 채널에서 무료로 시청할 수있는 조선 음악과 청어람 청춘에 대한 여정의 온라인 공연을 시작했다. 외국 음악 공연의 경우 전 세계 검역 조치로 인해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하다. 세종 센터의 모든 해외 공연은 추후 공지가있을 때까지 보류되었습니다. 스페인과 한국 외교 관계 70 주년과 한 · 러 외교 관계 30 주년 등 2020 년이 축제의 해가 될 것이라는 희망에도 불구하고, 모든 외국 음악 행사는 COVID-19 발발로 인해 취소되었다. 1950 년 창립 이래 70 주년을 맞이한 국립 극장은 가장 가까운 미래에 모든 해외 공연을 취소했다. 국립 국악원 외국인을위한 2020 한국 전통 음악 수업도 취소되었다. 현재 서울과 그 이후 대구에서 볼 수있는 유일한 외국 쇼는 오페라 뮤지컬의 유령입니다. 7 년의 휴식 끝에 한국으로 돌아 왔으며 현재는 8 월 7 일까지 블루 스퀘어 극장에서 연주되고있다. Andrew Lloyd Webber는 현재 전세계 어디에서나 유일하게 열리는 주요 쇼라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국가 차원의 COVID-19 상황을 다루는 국가의 선진 조치 덕분에 현재 한국의 모든 문화 행사를 개최 할 수있게되었으며, 사람들은 대유행 중에도 사람들이 연극 및 음악 공연을 즐길 수있는 기회를 갖게되었다.
-
Korea to request UNESCO to remove the Japanese Hashima Island form UNESCO’s World Heritage List.2015 UNESCO listed 23 Japanese facilities, ’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 Iron and Steel, Shipbuilding and Coal Mining’ as World Heritage, to commemorate the process of Japan’s rapid industrialization and modernization in the 20th century. Upon listing in 2015, Japan pledged to pay tribute to the forced labor from Korea and other Asian countries. The labor of Korean workers who were brought to Japan against their will was exploited at 7 out of 23 industrial sites, including Battleship (Hashima) Island. 500 forced workers from Korea were held on Hashima Island, 122 out of which died there. On June, 15th 2020 the Meiji Era information center was opened in Tokyo. Japanese side completely omitted to mention the forced labor from Korea, failing to fulfill its pledge. The center appears as a showcase of Japan’s industrialization history without covering its dark side. In this regard, Korean Ministry of Foreign Affairs in close collaboration with the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appealed to the UN cultural agency with the request to reconsider listing Japanese industrial sites as UNESCO’s World Heritage List. On June, 22 an official request to UNESCO Director-General Audrey Azoulay was sent by Korea’s Foreign Minister H.E. Ms Kang Kyung Wha. Commemorating people who fell victims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in 1910-1945 is both of historical and cultural significance to the Koreans. Secretary General of the Arirang Association Ms Ki Mi Yang, mentioned in her interview to Newsis that Nagasaki Prefecture has its own ‘Arirang Path’. It is a path through which Korean labor workers and comfort women were forcefully brought to Mitsubishi Shipyard. Korean traditional song Arirang helped them to overcome sufferings and lift their spirits in their protest against inhumane conditions. It is a fact recognized by Japanese scholars, such as Nagasaki peace activist Hideto Kimura and civic group "Forced Mobilization Research Network" researcher Takeuchi Yasuto. Tragic events that took place on the site were also reflected in Ryoo Seung Wan’s movie ‘Battleship Island’ (2017), which received positive feedback from audience and critics. Hashima was named ‘Battleship Island’ due to its resemblance to the warship. Today it remains an abandoned industrial site and one of unresolved disputes between Korea and Japan, related to Japan’s World War II crimes. Sources: Korea Joongang Daily KBS World Radio The Korea Herald Newsis 한국은 유네스코에 일본 하시마 섬 양식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 목록. 2015 유네스코는 20 세기 일본의 급속한 산업화와 현대화 과정을 기념하기 위해 23 개의 일본 시설 인 '일본 메이지 산업 혁명 현장 : 철과 철강, 조선 및 석탄 채굴'을 세계 유산으로 지정했다. 2015 년 상장 후 일본은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강제 노동에 대한 찬사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전장 (하시 마)을 포함한 23 개 산업 현장 중 7 곳에서 자신의 의지에 반해 일본에 온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착취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500 명의 강제 노동자가 하시 마 섬에서 열렸으며 그중 122 명이 사망했다. 2020 년 6 월 15 일, 메이지 시대 정보 센터가 도쿄에 문을 열었습니다. 일본 측은 한국의 강제 노동에 대해서는 언급을 완전히 생략하고 서약을 이행하지 못했다. 이 센터는 어두운면을 가리지 않고 일본 산업화 역사의 쇼케이스로 나타난다. 6 월 22일 이와 관련하여 한국 외교부 한국 외무 장관 H.E. 강경화는 문화 체육 관광부와 긴밀히 협력하여 일본 문화 유산을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 목록으로 등재할 것을 요청하면서 UN 유네스코 사무 총장 오드리아 줄라이 (Audrey Azoulay)에 호소했다. 1910 년부터 1945 년까지 일본 식민지 통치 중에 희생 된 사람들을 기념하는 것은 한국인에게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양 키미 양 아리랑 협회 사무 총장은 나가사키 현에 '아리랑 길'이 있다고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한국 노동자와 위안부 여성을 미쓰비시 조선소로 강제로 데려 오는 길입니다. 한국 전통 노래 아리랑은 비인간적 인 상황에 대한 항의에서 고통을 극복하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도움을주었습니다. 나가사키 평화 운동가 기무라 히데토 (Hideto Kimura)와 시민 단체 "강제 동원 연구 네트워크"연구원 인 다케우치 야 스토 (Yuuchi Yasuto)와 같은 일본 학자들이 인정한 사실이다. 이 사이트에서 일어난 비극적 인 사건들도 류승완의 영화 '배틀쉽 아일랜드 (Battleship Island)'(2017)에 반영되어 시청자와 비평가로부터 긍정적 인 피드백을 받았다. 하시 마는 전함과 유사하여 '전함 섬'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일본의 제 2 차 세계 대전 범죄와 관련하여 버려진 산업 현장과 한일 간의 미해결 분쟁 중 하나이다.
-
Arirang Association on 13th Mungyeong Saejae Arirang Festival.Arirang Association on 13th Mungyeong Saejae Arirang Festival. After the successful conduction of Mungyeong Saejae Arirang Festival, one of the main organizers of Festival, Ms. Ki Mee Yang, representative of the Arirang Association, gave a brief overview of the Festival goals: First of all, our goal is to contribute to the development of the Arirang culture by helping the transition from local refrain ‘Arari’ to the more general ‘Arirang’. Secondly, we want to reinforce the humanistic and geographic values of Mungyeong Saejae, the provincial park as an actual location of the ‘Arirang Path’ (Arirang gogae), which all Arirang songs sing about. Thirdly, we want Mungyeong Saejae Arirang to unite local citizens, providing them with the sense of community and solidarity. Fourthly, we want to keep the tradition of hosting the Annual Mungyeong Saejae Arirang Festival, taking place since 1998. Fifthly, we wanted to bring the foreign artists from Japan, China and Vietnam to share their folk songs about mountains and hills as parallels of the Arirang song in other cultures. Sixth, we wanted to alleviate the fatigue from the pandemic by performing traditional musical rituals Yeonggo / Dongmaeng aimed at driving away the evils, where people gather together, sing and dance. What we hope to achieve: 1.Arirang can unite people around the world being a ‘song that helps to overcome pain and sufferings’ with one’s will. 2.Spreading the notion that the famous ‘Arirang Path’ is an actual Mungyeong Saejae. 3.Representing other countries and their songs about mountains and hills will contribute to the uniqueness of Mungyeong Saejae. 4.Consistency in hosting Mungyeong Saejae Arirang Festival and building up its reputation. 5.Raise awareness of Mungyeong worldwide as the ‘Arirang City’ and make it a new tourist and cultural spot. The 13th Mungyeong Saejae Arirang Festival took place on June, 13th in Mungyeong City and received high appraisal from the audience and press.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제36회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06/23) (판소리.무용.기악)
- 2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6)<br> 이희문·송가인·이날치밴드 공연, 신명나는 민요 현장
- 3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일노래, 삶의 노래' 오는 23일부터
- 4공연예술로 하나가 되는 '더원아트코리아' 최재학 대표를 만나다
- 5두 줄이 내는 다채로운 숨, 해금 연주자 강은일 교수를 만나다
- 610주년 맞는 ‘문화다양성 주간’ 경계에 꽃이 핀다
- 7(34) <br> 노동은의 ‘잘못된 조건’ 둘, ‘교묘한 조작’
- 8전국 271팀 참가한 대구국악제, 영예의 대통령상에는 김선제 씨
- 9국립남도국악원, 깨끗한 바다를 위한 '토끼가 어떻게 생겼소?
- 10제24회 공주 박동진판소리명창명고대회(07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