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리뷰 뉴스목록
-
[공연리뷰] 창극으로 만나는 천상의 소리, ‘장문희의 아리아’그녀의 소리에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잠잠해진다. 화려한 고음, 천상의 소리다. 지난 17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열린 창극, ‘최북의 그리움을 그리다’에서 고품격 음색과 기량으로 탄탄하고 깊은 성음을 갖춘 장문희 명창이 관객의 혼을 앗아갔다. 이날 장 명창은 섬세한 연기와 범접할 수 없는 소리로 프리 마돈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번 창극은 실존 인물인 화가 최북과 박필현의 난을 모티브로 가상 인물이 혼재된 이야기다. 풍성한 관현악에 실력파 소리꾼들과 한 폭의 그림으로 수를 놓는 무용수들이 함께했다. 무대는 과거와 현재, 회상과 환상 장면을 한 차원 높은 영상기술을 접목하여 판타지적 무대 미학을 연출했다. 최북은 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자로 그림을 그리기 싫으면 절대 그리지 않았다. 괴팍하고 사나운 성격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는데, 사랑하는 여인 설야를 만나면서 예술적 세계관을 완성해 나가는 스토리다. 음악은 남도민요 흥타령의 슬프고 애절한 계면조를 큰 줄기로 삼았다. 여기에 우조와 평조 등 다양한 선법을 선보여 대중적으로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편곡되었고, 수성가락도 함께 했다. 이 날 수성가락 장면에서는 관객의 추임새로 무대와 객석이 하나 되기도 했다. 흥타령 중에 ‘꿈이로다’는 초장에 설야 역을 맡은 장문희 명창의 아리아로 시작한다. 전체 11장의 구성 중에 1장과 에필로그에서도 만날 수 있고, 갈수록 배가 되는 감동을 선사한다. 흥타령을 포함하여 이날 장 명창이 선보인 아리아는 절창 중의 절창이다. 창극의 큰 흐름을 따라 장 명창이 부른 주옥같은 아리아 중에 ‘흥타령’과 ‘최북과 설야의 이중창’을 소개한다. 먼저 서곡이 연주된다. 서막에 연주되는 이 곡은 창극 전체의 아리아와 밀접한 곡이 되기도 한다. 크게는 3악장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시작은 밝고 신비롭다. 두 번째는 느려지고 잔잔하며 마지막은 더 빨라진 템포다. 밝고 몽환적인 화려한 선율로 단숨에 관객을 끌어당기더니 이내 잔잔하며 느린 장단으로 바뀐다. 밝음은 유지되면서 평온하지만 갈수록 아련하고 슬픔이 묻어난다. 이때는 몇 가지 악기로 구성되어 현악기 위에 소금과 생황 등 반짝이는 윤슬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후반으로 가면서 템포는 빨라지고 타악기의 두드림은 무대의 바늘구멍만 한 틈까지 채워간다. 처음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한데 가슴을 아리게 하는 슬픔과 애절함도 배가 되어 다음에 전개될 무대에 온전히 집중하게 만든다. 무대에는 호생관(노년의 최북)이 등장하고 신비롭고 몽환적인 곡이 연주된다. 물안개가 살포시 피어오르듯 잔잔하게 흐르는 선율이다. 눈 위에서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설야의 흥타령이 들려오자 소리를 붙잡으려는 듯 쫓아간다. 프롤로그 흥타령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꿈이로다 너도나도 꿈 속이요, 이것저것 다 꿈이로다 (간주)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랴는 꿈, 꿈을 꾸어서 무엇하리” 설야는 등장하지 않고 관객이 귀로만 듣는 소리다. 장 명창의 소리. 아득하고 아련하여 진한 여운을 남긴다. 단단한 힘 속에 맑고 고운 음색. 38년 농익은 소리, 오직 소리 인생만 걸어 온 깊고도 짙은 비교 불가 성음이다. 온전한 감동을 주는 것은 듣는 자가 부르는 자의 몸과 표정에서는 나오는 숨은 감정과 표현들까지 발견할 때 감동의 무게는 커진다. 그래서 소리 하는 사람은 최고의 소리와 감동을 전하기 위해 잘 부르는 것 하나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잘 부르는 기술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판소리만이 아니라 대중가요나 어떤 장르의 노래를 하는 사람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심취되고, 몰랐던 곡을 듣게 되므로 음악과 친해지기도 한다. 듣는 것으로 감동도 받지만 소리꾼의 몸짓과 표정까지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날 장 명창은 무대 뒤에서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운명적 만남’을 주제로 1장이 열리고 설야가 등장한다. (1장)흥타령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꿈이로다 너도나도 꿈 속이요, 이것저것 다 꿈이로다 (간주)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라는 꿈, 꿈을 꾸어서 무엇하리 갈가부다 갈가부다 임따라서 갈가부다 초장의 슬픔은 진계면까지 가지 않고, 절제되어 여운을 남긴다. 반면 1장은 슬픔이 한층 더 짙어졌다. 애절하고 절절해 전신의 근육은 소리를 향해 수축되고 가슴에는 애끓는 파장이 흐르게 된다. 간주 후에 ‘꿈에 죽어 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랴는 꿈’에서 초장과 1장은 차이가 있다. 초장에는 ‘깨랴는 꿈’이 음정을 낮게 불러 평온하게 흘러간다. 1장에서는 고음으로 질러 한스러움이 절정에 이르고 관객의 가슴을 후려친다. ‘깨랴는 꿈’의 차이점은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부터 음의 높낮이와 힘의 세기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작은 부분 하나하나 장 명창의 섬세한 기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들었어도 새롭다. 1장은 부모를 잃은 슬픔으로 목숨을 버리려는 설야를 최북이 구하면서 만남이 시작되었다. 2장부터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슬프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감초 역할을 하는 조연들의 코믹하고 재미있는 장면과 함께 지루할 틈이 없이 흘러간다. 설야의 가족은 아버지가 역모에 가담되어 집안끼리 혼인을 약속했던 정혼자 아비의 밀고로 목숨을 잃었다. 최북은 여러 시도 끝에 결국 설야의 마음을 얻게 되고 둘은 추노꾼의 추적을 받으며 도망자 신세로 살아간다. 10장에서는 부안 채석강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으로 시작한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최북과 강을 바라보고 있는 설야의 장면이다. 그리고 이중창이 펼쳐진다. 꿈속의 세상-설야와 최북의 이중창 설야-이렇게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가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분홍 복사꽃 잎 휘날리는 길을 당신과 함께 걷죠 최북-새하얀 미소 지으며 날아오른 원앙 한 쌍 화선지에 그려 넣으며 당신과 함께 길 위에 있네 두 사람-그곳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고 그곳이 그림이면 이대로 영원하리(반복) 따뜻하고 평화로운듯하지만 두 사람의 처한 현실은 안개처럼 사라 질 것 같아 애틋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곡이다. ‘영원히 깨지 말고 이대로 영원하리’는 마치 다가올 미래가 그렇지 못함을 암시하기에 그들의 소망은 애상적으로 느껴진다. 서로 주고받으며 화음으로 이어져 화려하고 풍성하게 전달된다. 이 곡은 판소리 창법을 조금 덜고 부른다. 판소리 창법을 절제하여 대중들이 전통 판소리를 좀 더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작창된 듯하다. 붙잡고 싶은 꿈, 버려야 할 꿈, 함께 하고 싶은 꿈, 그림으로 그려지면 떠난 자를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꿈 등. 꿈은 이번 창극에서 중요한 제재로 작용한다. 꿈이 영원하길 바랐지만 설야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 최북이 그린 그리움이 된다. 창극은 끝났다. 이제 그리움은 관객들의 몫이다. "그곳이 그림이면 이대로 영원하리!” 최북과 설야의 절창, 2021년에 탄생한 아리아로 가슴에 남을 듯하다.
-
[김기자의 객석에서] 7월에 보고 듣는 ‘고흐와 브람스’푹푹 찌는 7월을 월간지 ‘길벗’이 전하는 초록빛 소식으로 시작한다. 옅은 미소를 안겨 줄 싱그러운 그늘 같은 이야기들이다. 먼저 무릉도원으로 이끄는 봉래산의 절경에 감탄하며 한참을 머물렀다. 별을 아는 자가 세계를 다스린다는 별 이야기에서는 솔깃하고, 식도락의 짜장면은 침샘을 자극하며 저녁 메뉴로 낙찰된다. 평화누리길의 논과 하늘은 청명하고 평화로운데, 담겨있는 소식은 안타깝기만 하다. 딱 봐도 사랑하는 사이인 배도라치의 순진무구한 눈과 사랑스러운 포즈에서는 안타깝던 마음과 함께 세상 근심이 녹아내린다. 아리랑으로 읽는 세상은 글을 읽기도 전에 배경색과 무늬가 아리랑이라고 말해주는데, 아리랑은 사물이 아니라 형상을 표현할 수 없지만, 아리랑 페이지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는 묘한 매력도 있다. 작년 여름 명화의 감동을 미디어아트로 본 적이 있다. 사방의 모든 벽면과 바닥에서 그림이 펼쳐지고, 영상에 의해 그림은 살아 움직이며 실제 크기보다 몇 배나 커진 대형 명화를 볼 수 있었다. 빛과 음악이 어우러져 또 다른 감상으로 접했던 거장 고흐의 명화였다. 그림과 함께 흘러나온 음악 중에 브람스의 곡이 있었는데, 이번에 길벗에서 고흐와 브람스가 만났다. 길벗에서 고흐는 두 번 만났지만, 추억을 선물받았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고흐와 브람스를 소개한다. 사람을 그리는 고흐, 사진보다 더 닮은 인물화, 듣는 자가 말하는 자보다 크다. ‘명화 속 사람들’의 초상화 주인공들이 우리 동네에 있다는 주제로 고흐의 초상화와 정물화 속에 숨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고흐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풍경화와 정물화를 습작의 과정으로 삼기도 했다. ‘성경이 있는 정물’은 탁자 위에 성경책과 촛대, 소설책이 있는 그림이다. 목사였던 아버지가 죽은 뒤에 그린 것으로 이사야 53장이 펼쳐진 성경책은 갈등 관계였던 아버지를 상징한다. 노란빛의 에밀졸라의 삶의 기쁨은 독서광이기도 했던 고흐 자신이다. 신성한 빛을 발하며 살겠다는 촛대와 이사야의 고난과 에밀졸라의 기쁨은 애정과 화해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정물화다. 고흐는 사람의 현실과 현실 그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 정물에 사람을 그렸다. 습작과 무명의 시간이 지나고 특별한 사람들을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화방을 운영하던 탕기 영감이다. 당시 고흐는 동생 테오와 일본판화에 심취해 있어서 영감의 가게에서 제법 사 갔고, 돈도 자주 빌렸다. 고흐는 인물화가 사진보다 더 닮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의 그림에는 강조되는 부분이 있었다. ‘탕기 영감의 초상화’에서는 영감의 수고를 나타내는 중수골이 튀어나온 흙색의 손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저녁 먹기 전 일과를 알 수 있는 나무뿌리 같은 손이 강조되었고, 영감의 손과도 닮아있다. 사진과 거울보다 그림이 그 사람을 더 닮았다니. 고흐의 눈은 보이지 않는 삶의 진실을 보는 눈을 가졌나 보다. ‘카페 탕부랭에 앉아 있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그림은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자세다. 맥주잔의 손잡이 위치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맞은편에 앉아 있다. 그 사람이 고흐이고 맥주잔이 고흐를 상징하는 정물이라고 한다. 맥주가 가득한 것은 다독가였고 그림에 관해 세세히 기록했던 고흐의 이야기보따리를 표현한 것이다. 성경 앞에 소설책과 세가토리 앞에 놓인 맥주잔으로 고흐는 자신을 작은 정물로 투여했고, 아버지와 세가토리는 주인공이 되어 큰 사람으로 그렸다. 오늘날 고흐가 살아있다면 초상화의 주인공은 옹이와 나무뿌리 같은 손을 가진 자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일 것이라 한다. 주어진 삶의 하루하루를 충실히 쌓고, 말하기보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면 우리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브람스의 목소리와 헝가리 무곡 1번, 베토벤과 나란히 3B, 브람스 풍의 교향곡 고흐는 갔지만 고흐의 그림은 남아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림이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듯이 음악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연주되는 수많은 곡을 그 당시 작곡자의 연주로 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먼 옛날에도 녹음 기술이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모차르트나 베토벤 등 녹음 기술이 생기기 전에 살았던 작곡자들의 실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오늘날 악보나 여러 자료로 그들이 남긴 곡은 연주되고 즐길 수 있다. 1877년에 녹음기를 발명했으니 19세기 활약한 요하네스 브람스는 녹음을 남길 수 있었다. ‘Music’ 편에서는 브람스가 직접 연주한 헝가리 무곡을 주제로 브람스의 음악을 소개하고 있다. ‘헝가리 무곡’의 탄생 배경, 베토벤 교향곡보다 발전된 음악적 성과를 거둔 교향곡, 자유와 고독으로 녹여낸 베토벤과 비교 불가 교향곡, 세 곡의 이야기다. ‘Music’은 QR 바코드가 있어 읽으면서 청음도 가능하다. 브람스는 녹음 제안으로 헝가리 무곡 1번을 연주했다. 음질은 열악하지만 브람스가 직접 연주한다. 이 곡을 선택한 건 각별히 아꼈음을 말해 준다. 어린 시절 브람스는 가난했다. 19세 때는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노 반주를 맡아서 여행하며 앙코르곡으로 집시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후에 연주한 선율들을 악보 화하여 피아노 편곡의 ‘헝가리 무곡’으로 출판된다.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던 그는 과거의 음악적 유산들을 탐구하며 고전주의 형식을 지향했다. 브람스는 앞 시대를 살다간 베토벤을 무척 존경했는데, 베토벤이라는 거인의 발자국을 의식하며 20년의 산고 끝에 첫 교향곡을 완성하게 된다. ‘교향곡 1번 C단조 4악장 피날레’는 베토벤 9번의 피날레를 연상시켰다. 한스 폰 뷜로는 "드디어 베토벤 교향곡 10번을 얻었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또한 바흐, 베토벤, 브람스를 3B라고 최초로 지칭하여 오늘날 ‘독일의 위대한 음악가 3B’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베토벤과 자주 비교 대상이 되었지만 19세기 음악계는 브람스의 교향곡이 베토벤의 교향곡을 한 걸음 발전시킨 음악적 성과라고 평가했다. 브람스의 교향곡 중에 베토벤과 비교되지 않은 단 하나의 곡이 있다. 4번 E단조다. 바로크풍의 파사칼리아와 변주곡 형식으로 베토벤의 전형인 장조의 환희에서 벗어나 단조의 어두움을 띄고 있다. 자유롭고 고독하게 살다간 브람스는 이 곡으로 브람스만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대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독일 음악의 세계적 유효성을 한 번 더 분명하게 만인 앞에 보여준 마지막 음악가”라고 예찬했다. 혹 클래식이 따분하다면 헝가리 무곡 5번을 들어보라. 브람스와 제목은 몰라도 이 곡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더위와 코로나는 여전하다. 불편하고 어려움은 있지만, 오늘은 고흐의 그림을 보며 브람스의 음악으로 잠시나마 위로받는 건 어떨까.
-
[김기자의 객석에서]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전통의 재발견’[국악신문] 국립국악원_창작악단(사진=국립국악원 제공) 지난 14일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이 기획한 ‘전통의 재발견’이 예악당에서 펼쳐졌다. 이번 공연은 전통원형의 기악과 판소리, 정악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창작하여 협주곡과 국악관현악으로 선보인 작품이다. 전통과 창조가 융합하여 독창적이고 신선하며, 새롭게 창조된 국악이 전통의 가치와 소중함을 더욱 발견 할 수 있게 해준 공연이다. 국악관현악 ‘산곡’ 시작은 타악기가 울리고 난 후에 여민락 가락이 연주된다. 느린 템포로 평온함과 장엄함이 동시에 울려펴진다.서양악기 더블베이스와 첼로는 가장 저음으로 연주되고 국악기와 이질감이 없어 이러한 구성만으로도 첫 곡부터 전통의 재발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산곡’은 여민락 가락에 여러 개의 타악기 장단이 반복적으로 넘나들고, 신명 나는 사물놀이 가락도 더해진다. 느리고 빠른 장단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곡이다. 마지막은 도입부와 같이 여민락 가락으로 마무리된다. 작곡자는 우리나라 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들었을 삶의 정서를 표현하고자 했다. 소금을 연주 할 때는 마치 깊은 산 속에서 산새를 즐기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조용히 연주 하다가 음향이 점점 커지고 짙어지며, 절정에 다다르듯 올라가서는 다시 하강하더니 이전보다 더 고조된 클라이맥스를 선보이기도 한다. 느리고 빨라지며 음향이 잔잔하고 커지기를 반복하는데 산의 굴곡과 4계절의 빛깔을 지닌 아름다운 산을 떠올리게 된다. 여민락은 세종대왕이 만든 곡으로 ‘백성과 더불어즐기자’라는뜻을 지니고 있다. 용비어천가의 일부 사설을 노래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현재는 관현악곡의 형태로 연주되고 있다. 전곡을 연주하는데90분정도나‘산곡’은 전통음악에 현대를 접목하여 장중한 전통미와 국악을 좀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참고로 영화(2005) ‘왕의 남자’에서 여민락이 연주된다. 영화에서는 여민락을 연주하는 악사와 궁중무용을 추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천년만세 삼중 협주곡 ‘인애’(초연) 신비롭고 아름답다. 희망이 가득한 순수하고 맑은 세상으로 인도한다. 그곳에서는 슬픔과 미움, 고통이 없는 기쁨과 화합의 세계이다. 전통음악인 ‘천년만세’는 세 곡을 이어서 연주하는 음악으로 길이가 길지 않고 밝고 경쾌하다. 흐름은 보통빠르기-빠르기-보통빠르기로, 이번에 초연된 ‘인애’는 이 전통 가락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통을 재창조 하였다. 관현악과 어우러지는 가야금, 해금, 거문고의 삼중 협주와 관현악 연주 없이 각각 연주하는 흐름을 볼 수 있다. 후반부도 경쾌하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게 하며, 어두움이 걷힌 희망의 빛이 있는 세상으로 이끌면서 마무리된다. 국악관현악과 이중창 가곡 협주곡(초연) 뛰어난 창의성과 예술성이 돋보이는 곡이다. ‘전통의 재발견’ 답다. 국악을 딱딱하고 고루하게 여기는 사람들조차 이 작품을 만나면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곡은 판소리와 민요보다접할 수 있는 비중이 작다.국악 전공자나 국악 관련자와 관심 있는 자 외에는 국악을 접하기 어려워하거나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전통음악의 중요성의 아쉬움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사라져 가는 옛것을 이중창 가곡 협주곡을 통해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든 작품이라고 여긴다. 처음부터 사로잡는다. 관현악 연주에 두 명의 남창 소리가 울린다. 한 명의 남창이 언락으로 처음부터 내어 지른다. 꿋꿋한 절개와 기개가 넘치는 소리꾼은 힘이 있고 묵직한 소리로 관중들의 몸에 파고든다. 이어 선비 같은남성이 저음의 소리를 내며 이중창이 시작된다. 넋을 빼놓는 신세계로 인도한다. 두 명의 남창은 처음부터 끝까지 배려와 절제로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간다. 다시 듣고 싶은 곡이다. 한국음악에 화성이 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국악관현악에 의한 이중창 가곡협주곡’을 들어보길 추천한다. 대풍류 협주곡 ‘신 대풍류’ 관현악에 피리와 대금, 해금의 협주곡이다. 시작은 힘이 있고 비장함이 흐른다. ‘신 대풍류’는 대풍류 가락에 시나위를 더하여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하며 웅장함이 공존하면서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곡이다. 대풍류는 관악기 중심의 민속음악 합주곡으로 오늘날 좁은 의미로 지영희 선생이 남긴 염불풍류를 의미한다. 참고로 조선시대 단원 김홍도가 그린 ‘무동’에 대풍류 그림이 있다. 삼현육각의 악사와 춤추는 아이를 볼 수 있다. 판소리 협주곡 ‘저 멀리 흰 구름 자욱한 곳’ 심청가의 눈대목 중에서 범피중류를 관현악 연주와 여성 2중창으로 선보이는 곡이다. 가사와 구음으로 2중창의 화려한 조화를 보여준다. 판소리는 소리꾼과 북을 치는 고수 장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번 판소리 협주곡은 전통과 현대가 만났다. 서양의 갈라 오페라보다품위와 절개가 있고, 지루하게 여길 수 있는 판소리를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 곡이다.
-
[별에게 듣다] 판소리의 미래, 전북도 심청가 보유자 장문희(張文姬)에 듣다전라북도는 지난 5월 7일 자로 장문희(45,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 단원)를 송재영(61,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과 함께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로 확정하여 인정서를 교부했다. 그리고 고창군 (사)동리문화사업회는 보유자 인정 기념공연을 7월 3일 개최하고 기념패를 수여 했다. 이번 전북도의 판소리(심청가) 보유자 복수 지정은 2019년 태평무와 승무에서 여러 명이 동시에 지정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도 차원에서 복수로 지정한 것은 처음이므로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장문희는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1995년), 일반부(1998년), 명창부(2004년)에서 모두 장원을 수상한 ‘천재 소리꾼’으로 일찍이 주목받았다. 또한 조선 8대 명창 이날치의 후손이자 동초제 여류 명창 이일주의 조카로서 어렸을 때부터 이모님의 손에 자라며 소리를 배웠다.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절로 떠오르는 듯하다. ‘애기명창’, ‘명문(名門)의 기대주’를 지나고 ‘명창’을 넘어 이제 그 이상을 바라보는 장문희. 보유자 인정서 수령을 앞두고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귀명창이 늘었으면~ 동초제의 맛과 가치를 알리고 싶다 " Q 보유자 지정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두 사람이 동시에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소감이 어떠한가. A 두 사람이 동시에 지정된다는 것이 전북에서는 처음이지만 다른 데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일이라 아주 놀랍지는 않았어요. 제가 지정된 것은 스승이신 이모님께서 제가 올바로 이어받을 수 있도록 잘 가르쳐주신 덕입니다. 함께 지정된 송재영 보유자님도 제 이모님의 제자이신데 이모님께서 그만큼 제자들을 잘 길러내신 것 같아서 기뻐요. 또 제가 보유자로서는 어린 나이이지만, 한평생 한길만 걸어왔다고 자부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높이 사주신 것 같아서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Q 부담도 분명 있을 텐데. A 그렇죠.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전승해야 한다는 무게감, 이모님의 뒤를 올곧게 이어가야 한다는 그런 부담감이 느껴지긴 합니다. 또 우리 동초제를 배우는 후배들이 끝까지 공부할 수 있고 환경적인 요건도 잘 마련해주고 싶다 보니 책임감과 부담감이 적지 않습니다. Q 함께 지정된 송재영 보유자와 비교할 때 자신만의 특징은 뭐라 생각하는가. A 이모님과 가장 흡사한 것, 가장 닮은 것이죠. 이모님의 표목이라는 게 있어요. 이일주 선생님의 수리성과 철성, 또 감정 표현할 때의 호흡조절, 소리의 이면, 수리성으로 소리의 이면을 완성해내는 기술…. 그런 것들이죠. 핏줄이니 얼굴도 닮았고 자세도 그렇고요. (웃음) Q 그렇다면 이모님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A 글쎄요. 어릴 때부터 제가 소리를 하면 영락없이 이모님 같다는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 왔어요. 입 모양, 발림, 표정까지 어찌 그리 이모님과 똑같냐고요. 한 번은 제가 소리를 하니 이모님도 따라 부르셨는데 제가 봐도 숨 쉬는 모습, 배에 힘주는 모습이 똑같은 거예요. 이모님께서도 저보고 "너는 어째 나와 입 모양, 혀 붙임까지도 똑같냐.” 말씀하셨었죠. Q 그래도 차이점을 꼽는다면? A 음, 목소리나 아니리에서의 감정 표현에서 이모님이 더욱 숙성되셨다면 저는 젊은 면이 있다는 게 다른 듯해요. 그가 제30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명창부 장원을 수상했을 때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오랫동안 지켜봐 온 유영대 고려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얘기한다. "장문희 보유자를 이일주 명창과 비교한다면 거친 부분이 없다는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아주 꾹꾹 눌러서 부르기 때문에 감정적인 표현 부분에서 단아하고 차분하며 정성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이모와 가장 닮았지만 자신만의 개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시대 여류 명창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극찬은 덤이었다. 인정서 수령만을 앞둔 시점에서 보유자로서의 다짐과 입장은 어떤지 궁금했다. Q 보유자로서의 각오가 궁금하다. A 예전부터 저는 지속적으로 완창 공연을 하려 노력해왔어요. 제 나이 또래에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 일이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를 완창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완창무대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고 우리 후배들도 같이 완창무대를 많이 설 수 있도록 기회를 많이 주고 싶어요. 우리 판소리 본연의 맛과 가치를 보이고 동초제의 이름을 더 널리 알리겠다는 게 각오입니다. Q 후배 양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 보인다. A저는 문화재로 지정된 게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일을 하라고 이런 자리를 주신 것 같기도 하거든요. 종종 이런 경우도 있어요. 자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거나 무언갈 이뤘다고 생각하면 본인의 멋에 취해서 본연이 아닌 변형된 것으로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Q 맞다. 속된 말로 ‘쿠세’라고 하지 않나. A 네. 안 좋은 버릇 같은 거죠. 저는 그런 것들을 계속 경계하면서 저의 뿌리를 흔들림 없이 지키고 후배들에게도 그대로 물려주고 싶어요. 우리 음악을 좀 더 제대로 올곧게 전승시키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해요. Q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변치 않겠다는 의지인가. A 그렇죠. 저는 제 삶이 판소리라고 생각해요. 6살 때부터 판소리만 해왔거든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소리가 지금도 힘들고 어려워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어떤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보이기 시작해요. Q 힘들고 어렵다 해도 오랜 세월 함께한 만큼 친근하기도 할 텐데. A 맞아요. 음… 말하자면 친구죠. 소리는 친구예요. 제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게 소리인 것 같아요. 제가 살아오면서 여러 인연을 맺어왔지만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건 역시 소리였어요. 순간과 순간, 과정과 과정에서 너무 힘들기도 했지만 제가 노력한 만큼 그 대가… 그 결실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건 소리뿐이었죠. 가장 저를 힘들게 한 게 소리였지만 그 힘든 것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것도 소리였다고 할 수 있어요.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게 사람도 아닌 소리였다는 장문희. 자신을 가장 힘들게 만든 소리였지만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던 것도 소리 덕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소리와의 동고동락이 아닌가. 명문 명맥의 후계자로서 그에게 지워진 부담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문득 그가 어떻게 소리 생활을 시작했는지, 어떤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는지 궁금해졌다. "조카지만 항상 다른 제자들과 동등하게, 어떨 때는 더 엄격하고 혹독했습니다." Q 소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가. A 제가 서울 방배동에서 태어났어요. 3~4살쯤에는 아버지 본적인 강원도에서 지냈는데, 6살 때 어머니께서 어떤 일이 생기셔서 청주로 잠깐 갔어요. 그러다가 그해 겨울 판소리를 배우러 이모님 댁에 혼자 가게 됐지요. 왜 가게 됐냐 하면 당시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렵기도 했고 이모님께서도 당신을 이을 만한 제자를 곁에 두고 직접 키우고 싶어 하셨어요. 또 나중에 중학생이 돼서야 알게 됐는데 어머니께서도 원래 국악을 하셨대요. 그런데 결혼하면서 꿈을 못 이루게 됐으니 딸인 제가 대신 이뤄주시기를 바란 마음도 있었겠지요. Q 어머니께서도 국악을 하셨다니 놀라우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머니께선 무얼 하셨나. A 어머니께서 젊은 시절에 소리도 하시고 무용도 하시고 장구도 치시고 두루 잘하셨대요. 어머니와 이모님을 모두 아시는 분 원로 선생님 중에는 이모님보다 좋았다고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하지만 저를 낳으신 뒤로는 생업으로 바쁘셔서 국악을 놓으셨다고 해요. 그렇다 보니 이모님께 가기 전에는 국악을 접해보지 못했어요. 이모님께서 무얼 하시는지도 몰랐었죠. Q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소리를 배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A 가족과 떨어져 이모님 댁에서 생활하면서 소리를 배웠지요. 저희 이모님께서 엄청 엄하셨어요. 어린 조카이지만 살갑게 대해주신 적이 많지 않았지요. 조카지만 항상 다른 제자들과 동등하게, 어떨 때는 더 엄격하고 혹독하게 하셨어요. Q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A 이모님께서는 항상 엄하셨지만 그러시다가도 한 번쯤, 예를 들어 제가 아플 때면 새벽 일찍 일어나셔서 정성스레 죽을 쒀 주곤 하셨어요. 또 제가 상을 받거나 하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아주 기뻐해 주셨는데, 그럴 때면 이모님의 사랑과 애틋함을 느끼곤 했지요. 이런 것들이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Q 부모님께 돌아가고 싶은 적은 없었나. A 어릴 적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홀로 던져진 채로 배우기 시작했지요. 힘들었지만 어떤 출구도 제겐 없었어요. 이모님 집에서 나갈 수도 없고 다른 걸 할 수도 없고 말이죠. 만약 어머니께서 곁에 계셨다면 소리를 포기했을 것 같아요. 제가 전주에 내려가고 어머니를 다시 뵌 게 중학생 때였거든요. 전주로 이사 오셔서 종종 뵐 수 있게 됐는데, 그전에는 통화할 수도 없고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많이 힘들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나 제가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Q 정말로 포기할 뻔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A맞아요. 변성기 때였지요. 14살쯤에 변성기가 왔는데 ‘내가 내 목소리 하나 마음대로 못하는데 이걸 어떡하지?’ 싶었어요. 벽에 부딪쳤달까요. 그래서 그냥 ‘나 소리 안 해.’하고 한 번 놨던 적이 있어요. Q 어머님과 이모님께선 반응이 어떠셨나. A 엄마도 이모도 그럼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몇 달 정도 이모님 댁에서 생활은 계속하면서도 소리는 쉬고 있었는데 언젠가 갑자기 ‘아, 소리 하고 싶다. 저 무대에 내가 서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됐어요. 신기하죠? 지금 돌아보면 제가 다시 소리할 거란 걸 두 분 다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아무튼 그때를 계기로 소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내가 정말 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네요. Q 타의로 시작한 소리 생활이 자신의 뜻으로 바뀐 것인가? A맞아요. 그렇지만 이모님의 칭찬도 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상을 타면 받는 상장과 상금도 좋았지만, 이모님께서 제 소리를 인정해주시고 "아이고, 내 새끼”라며 엉덩이 한 번 토닥여주시고 어깨를 어루만져주실 때… 저는 다른 거 다 필요 없었어요. 이모님의 칭찬이 저에겐 가장 큰 선물이었고 10년, 20년 지나다 보니 어느새 장문희라는 사람에게 소리는 삶 그 자체가 되었던 것 같아요. Q 처음으로 참가한 경연대회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A 9살인가 10살에 여수진남제(현 여수진남전국국악경연대회)에 나갔어요. 그때 인기상을 받았는데 위아래로 노란 한복을 입고 소리를 했죠. 이모님께서 북을 쳐주셨어요. 무대에 서니 많이 떨렸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니 주변에서 많이 칭찬해주셨고, 이모님께도 좋아하셨어요. 이후로도 대회에 참가해서 좋은 성적이나 반응을 얻으면 이모님께서 흡족해하시다 보니 더 예쁨 받고자 소리를 열심히 하게 됐죠. "춘향가를 부르면 춘향가가 좋고 심청가를 부르면 심청가가 좋아요. 어떤 바탕이 좋기보다는 소리 자체가 좋아요.” Q 심청가로 보유자에 지정됐지만 처음 배운 것은 춘향가라고 알고 있다. A네. 6살 때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게 춘향가였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춘향가를 떼게 됐고, 다음으로 배운 게 심청가였어요. 이후에도 하나씩 배울 때마다 새롭게 반하게 됐어요. 바탕마다 목 쓰임과 감정에 차이가 있고 고유의 매력이 있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Q 가장 좋아하는 바탕을 꼽자면 무엇인가. A 춘향가를 부르면 춘향가가 좋고 심청가를 부르면 심청가가 좋아요. 어느 하나를 고르기가 힘들죠. 어떤 바탕이 좋기보다는 소리 자체가 좋아요. Q 이후에는 어떤 바탕을 배웠나. A 중학교 때 심청가를 뗐고, 고등학생 때 흥보가, 대학생 때 수궁가, 그리고 대학원생 시절에 적벽가를 배웠지요. 앞서 배운 네 바탕은 모두 이모님께 배우고, 적벽가는 안숙선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Q 적벽가만 다른 분께 배운 이유가 있는가. A 제가 대학교 졸업을 앞두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곳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준비도 많이 하고 노력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합격했는데, 학교에 가보니 안숙선 선생님께서 교수님으로 계셨지요. 그런데 당시에 제가 안 배운 바탕은 적벽가뿐이었어요. 다른 바탕을 배우게 되면 ‘바디’와 ‘제’가 겹칠 우려가 있었거든요. Q 이모님께서는 뭐라 하셨나. A 이모님께서도 적벽가를 배워보라고 권유하셨어요. 배우고 나서 이모님께 들려드리니 안숙선 선생님의 적벽가가 제게 잘 어울린다고 말씀해주셨죠. Q 이력을 보니 중학교와 대학교는 전주에서 나왔는데,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졸업한 것이 의아하다. A 일찍이 예술전문 학교에 대한 열망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때였는데, 당시 전주에는 예고가 없다 보니 서울로 진학하고 싶다고 이모님께 말씀드렸지요. 하지만 금전적인 문제, 어린 나이에 독립하는 문제 등으로 결국 전주의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학생부 차상을 받게 됐는데, 당시 서울국악예술학교의 이사장이셨던 박범훈 선생님의 도움을 통해 3학년 때부터 서울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로 가게 됐습니다. Q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왜 다시 전주로 내려갔나. A 박범훈 선생님께서 다른 대학은 시험도 보지 말라면서 중앙대학교에 입학하라고 권유를 해주셨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면서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지요. 실기시험 때 참가자들 중에서 오직 저만 심사위원분들로부터 추임새를 받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합격할 거라 내심 기대를 했는데 아니었던 게지요. Q 충격이 컸을 것 같은데. A 그때 다시 한번 저를 돌아보게 됐어요. 승승장구만 했으니 자칫 기고만장할 수도 있었는데 그때는 뭐 충격이었겠지만 지금 보면 약이 된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다른 대학을 알아보려 하니 서울에 오래 있으면 소리가 정체될 수 있다고 이모님께서 걱정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모님께서 출강하시던 우석대학교로 가게 되었지요. Q 이모님께 배운 것과 학교에서 배운 것은 어떻게 다르던가. A 실기적인 부분에서는 이모님께 배우는 것을 어떤 것도 따라올 수 없어요. 다만 소리의 역사라든지 이론적인 부분들은 학교를 통해 많이 깨우칠 수 있었지요. 또 이모님의 소리 외에 다른 선생님들의 소리를 접하기도 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어요. 2004년 그는 제3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 참가하여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수상하였다. 학생부와 일반부 장원에 이어서 이른바 삼관왕에 오른 것이다. 국악계에 전무후무한 성과였다. 그런데 이보다도 놀라운 것은 장년들이 주로 참여하는 명창부에서 스물여덟이란 나이로 받은 최연소 장원이란 점과 더불어 심사위원 7명 전원으로부터 만점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대회 측에서는 명창부 참가자의 연령을 제한하기로 규정을 바꾸었다. 크나큰 충격이었다. "성인으로서 숙성된 저의 소리와 가능성을 다른 분들께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Q 2004년 전주대사습놀이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이모님께서 참가를 반대하셨다던데. A 그러셨어요. 처음에는 반대하셨지요. 명창부치고는 어린 나이였거든요. 바로 전년도에 이모님의 다른 제자인 송재영 선생님께서 장원을 하기도 하셨고요. 한 스승의 제자가 연달아 수상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나가고 싶다고 이모님께 거듭 말씀드렸어요. Q 고집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A 애기명창들이 오래 못 간다는 말이 있어요. 어릴 때 잘하던 소리꾼도 성장해서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죠. 저는 그런 한계를, 그 고비를 넘어서고 싶었어요. 성인으로서 숙성된 저의 소리와 가능성을 다른 분들께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꾸준히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혹 무대에서 실수하더라도 꼭 도전해보고 싶다고 피력했죠. 결국 허락해주셨어요. Q 어떤 대목을 불렀나. A 예선에서는 ‘천지삼겨’를, 본선에서는 ‘오리정 이별 대목’을 불렀어요. 대회 규정상 추첨으로 (부를 대목을) 뽑는 거라 뭘 부르게 될지 미리 알 수 없었어요. 그런데 춘향가 중 제가 연습 당시 특별히 좋아했던 대목들이 추첨에서 나왔어요. 행운이었죠. 아마도 이모님 덕이었던 것 같아요. Q 이모님 덕이라니? A 이모님께서 종종 ‘운수패’라고 해서 화투패로 점을 치셨거든요. 그날 아침도 이모님께서 제게 화투패를 고르게 하셨는데 돼지와 학을 뽑은 기억이 나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풀이해주셨죠. 사실 그날따라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평소에 좋아했던 대목이라 떨지 않고 초연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결국 최연소, 최고점 장원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A 기쁨은 찰나였어요.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점수가 하나둘씩 공개될 때에는 좋았지요. 그런데 일곱 분 모두에게 99점을 받고 나서는 두려움이 확 밀려왔어요. 더 잘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아주 막중하게 느껴졌어요. 저를 인정해주신 분들께 절대 누를 끼쳐선 안 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Q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했던 건 아닌가. A 아뇨. 전혀 아니에요. 혹시라도 ‘변했다. 연습 안 한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어요. 더 실력을 갈고 닦으면서 전통 본연의 것을 계속 고수해야겠다고 느꼈어요. 그렇다 보니 지금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같아요. 지금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같다는 말에, 그의 어깨에 지워진 중압감과 부담감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천부적인 소리꾼으로서 평탄하게 살아온 줄 알았건만 그에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화려한 집안 내력과 수상 경력 뒤에는 무겁고 짙은 그림자가 있었다. 삶의 대부분을 소리와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경주마처럼 오직 소리에 집중하며 달려온 나날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룰 수 있던 성취임을 알 수 있었다. Q 음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 춘향가로 판소리를 시작하고 명창부 장원을 수상했는데 첫 음반으로는 심청가를 선택했다. A 이모님께서 심청가 보유자이시니까요. 가문을 이어야 하다 보니 심청가를 선택하게 되었죠. 제가 자리매김하려면 이모님의 소리인 심청가로 무대를 많이 해야 했지요. 그래서 여러 공연과 발표회에서 심청가를 부르고 음반도 자비를 들여서 내게 됐습니다. Q 음반제작 작업은 어떻게 했나. A 2017년 M-net의 ‘더 마스터’라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작곡가 김형석 선생님과 친분이 생겼는데, 그분의 스튜디오를 빌려 녹음했어요.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셔서 다음 음반 녹음에도 부탁드릴 생각이에요. Q 다음 음반 녹음이 예정돼있는가. A 네. 춘향가를 녹음할 계획이에요. 올해 예정된 순회공연과 정기공연이 끝나면 아마도 10월부터는 녹음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내년 늦어도 내후년 상반기까지는 녹음을 마칠 계획이고 이후로도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를 차례대로 작업해서 나머지 네 바탕의 음반을 한 번에 출시할 계획입니다. 다만 적벽가는 안숙선 선생님께 배운 박봉술제로 녹음할지 이모님의 동초제로 할지 둘 다 할지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어요. Q 다섯 바탕을 모두 음반으로 낸다는 게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A 맞아요. 그래서인지 특히 여류 소리꾼 중에 다섯 바탕 모두 음반을 내신 분들은 극히 드물죠. 하지만 이모님께서 다섯 바탕 모두 음반을 내셨으니, 저도 다섯 바탕 모두 내는 게 오랜 목표였어요. 이모님의 길을 따라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또 저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자 공부인 셈이기도 하고, 제가 이렇게 도전하고 공부한 결과를 후배들을 위해 자료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어요. Q 출시가 기다려진다. 장문희 보유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전설적인 명창 이날치의 후손이다. 핏줄과 명맥에 대해 실감해본 적 있나. A음, 이날치 할아버님께서는 한 시대를 풍미한, 아주 대단한 분이시죠. 그분이 남기신 예술의 아득한 경지… ‘과연 나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대단하세요. 하지만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이라 떠올리면 사실 막연해요. 이날치 할아버님은 글 속에서나 뵀지. 제가 직접 느끼고 배운 분은 이모님이니까요. Q ‘이날치’ 밴드가 큰 화제이다. 이처럼 퓨전국악이 최근 대중에게 주목받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A 이날치 밴드에게는 감사하죠. 국악이 생소한 대중들에게 퓨전국악이 전통음악을 이해하는 좋은 발판이 되기 때문이죠. 또 이날치 밴드가 좋은 활동을 함으로써 가문이 더 알려진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이날치 밴드는 이날치 밴드고 장문희는 장문희잖아요? Q 그렇다. 장문희는 장문희이다. A 요즘의 퓨전국악들도 중요하지만 저는 전통을 있는 그대로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물론 듣고 싶은 음악을 선택하는 건 대중의 권리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음악의 뿌리는 국악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주었으면, 가끔은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봐 줬으면 좋겠어요. 전통음악의 맛을 알려면 결국 익숙해져야 하거든요.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고 국악을 찾아봤을 때, 전통음악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어렵고 알아듣기도 힘들지만 계속 듣다 보면 판소리만의 깊은 울림이 있다는 것을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리고 싶네요. Q 판소리의 가치와 울림을 알린다는 게 장문희의 꿈인 건가. A 예, 꿈이라기보다는… 꿈으로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옛날에는 ‘귀명창’이라고 해서 소리꾼과 같이 함께 울고 웃고 대중들이, 관객들이 많았어요. 같이 호흡하는 분들이 참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분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Q 코로나19로 공연환경이 위축되니 더욱 그런 듯하다. A 네. 그런 분들이 많이 계셔야 소리하는 입장에서도 더 재미있고 보람도 생기는데 너무 아쉽습니다. 이런 분들이 다시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소리꾼들이 설 수 있는 자리도 더욱 많아져야 하는데 이런 과정에 제가 보탬이 되었으면, 저로 인해서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게 꿈이에요. Q 마지막으로 ‘장문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요즘은 다 ‘빨리빨리’를 선호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소리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깊이 들어가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거든요. 저도 아직 소리가 힘들어요. 힘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힘들 거 같아요. 하지만 양면적인 거거든요. 힘들고 어려울수록 이겨냈을 때 오는 행복, 카타르시스가 큰 것 같아요. 도전해서 극복했을 때 오는 성취감인 거죠. 그러니 후배들도 절대 성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차분하게 이어가기를 당부하고 싶어요. 판소리 명가 출신, 전주대사습놀이 삼관왕, 최연소 심사위원 전원 만점 명창부 장원, 전북도 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 소리꾼으로서 꿈꿀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룬 듯하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강조한 바가 있다.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보인다고. 당장의 목표는 남은 네 바탕의 음반 출시라고 한다. 음반 취입이라는 ‘고비’마저 넘었을 때 과연 그에게 또 어떤 ‘고비’가 나타날까. 그리고 그 ‘고비’를 넘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명창에서 더 큰 길로 나아가려는 이가 길을 찾지 못한 채, 중압감에 넘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다시 ‘고비’를 넘어서면서 안겨줄 놀라움과 벅찬 감동, 우리 판소리의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백년에 한번 나온다는 소리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국악계를 밝히는 별, 장 문 희! 자문: 정문교 국악신문 고문/ 유영대 고려대 교수/최동현 前 군산대 교수 교열:조용상 위원 수상 1994년 12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판소리 부문 차상 1994년 10회 동아 콩쿠르 학생부 판소리 금상 1995년 13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판소리 부문 장원 (교육부장관상) 1998년 24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 장원 (문화체육부장관상) 2001년 제1회 공주전국명창·명고대회 판소리 명창부 대상 (국무총리상) 2004년 3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 부문 장원 (대통령상) 2012년 전주MBC 광대전 시즌 1 준우승 2015년 전주MBC 광대전 시즌 4 왕중왕전 명창대첩 우승 2017년 Mnet 더 마스터 우승 (4회, 5회 그랜드 마스터) 경력 장문희 판소리연구소 소장 난석 이일주 전수관 ‘난석당’ 관장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단장(2002년 5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심청가 보유자(2021년 5월 7일) 학력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졸업 우석대학교 국악과 졸업 한예종 전통예술원 전문사과정 수료 음반 단독 2019년 "장문희 심청가 동초" (완창 앨범) 2019년 "이화우 흩뿌릴 제" (싱글) 참여 2017년 "더 마스터 - 음악의 공존 Part.3" - 이몽룡아 (Duet. 샵건) 2017년 "더 마스터 - 음악의 공존 Part.2" - 하늘이여 2007년 "단심(丹心) 국악방송 새음원 시리즈" - 장문희 단가-적벽부, 사철가, 초한가 2004년 "판소리 EAST TO WEST" 세계 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 걸작선정 음반 공동 취재
-
버스킹(Busking) 공연, 영산제에 오른 연꽃아리랑지난 주말 27일 홍천 영산제 무대에서 ‘연꽃아리랑 버스킹’이 펼쳐졌다.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수자)과 회원들이 27일 홍천 봉찬문화원 산사를 찾아가서 영산제 무대에서 찾아가는 버스킹(Busking)공연 ‘연꽃아리랑’을 펼치고 왔다. 코로나 이후 작년 3월부터 아리랑 전승 지역을 찾아가서 버스킹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번 연꽃아리랑 버스킹 공연을 하게 된 배경은 지난 13일 독도를 찾아가서 버스킹 공연 '독도아리랑' 무대가 러브콜을 받고 이어진 공연이다. 독도에 입도해서 펼친 버스킹 공연에서 관광객들의 추임새와 박수를 받으며 아리랑 후렴을 주고 받는 즉흥 무대가 되었다. 공연을 마치고 관광객으로 온 시민들과 아리랑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주지스님이 다가와서 얼마 남지 않은 영산제 공연에 아리랑을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준비한 공연이다. 이회장은 "바라춤같은 불교음악이 연주되는 영산제 무대라고 해서 저 멀리 기억 속에 있는 연꽃아리랑을 꺼내 보았다. 수 년전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해 만든 아리랑이었다. 불심이 깊으신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해 지어 부른 아리랑이다"라며 두 분을 깊게 감았다. "어머니가 긴 병석에서 늘 즐겨 부르시던 아리랑 중 ”내가 죽어지면 움이되나 싹이 되나 내 새끼들 보고 싶어 어쩌나”라고 하신 구절이 생각이 나서 부쳐서 지어 보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왕생극락을 빌어보자는 마음으로 만든 아리랑을 이번 기회에 알려보자는 뜻을 비추었다. 돌아오는 울릉도 뱃길에서 회원들과 논의를 하고 나서 결정을 했다. 서울로 돌아와서 다음날부터 2주 동안 회원들이 매일 나와서 전통 춤사위를 연습하여 구성한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우리는 일치감치 코로나 백신을 모두 접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새롭게 준비한 핑크빛이 도는 한복에 연꽃을 들고 불심을 담아서 경건한 마음으로 아리랑을 불렀다. 이회장이 작사하고 본조아리랑 선율로 작창한 연꽃아리랑 가사는 다음과 같다. 연꽃아리랑 작사 작창:이혜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흙탕물 진흙속에 묻어놔도 붉은꽃 피어 나는구나 연꽃위에 피어나신 부처님 연꽃타고 왕생극락 하시었네 사바세계 백팔번뇌 던지시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한번가면 움이되나 꽃이되나 연꽃피워 다시한번 오고싶네 울어무이 아버지 연등달고 부처님께 왕생극락 비옵나이다 회원들은 "아리랑은 두 줄 가사에 후렴이 붙은 쉬운 형식이이어서 금방 따라서 부르게 되니 쉽게 외워지는 노래다. 부모님 생각하면서 부르니까 절로 외워지네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 이 연꽃아리랑을 배울때 우리 모두 부모님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습니다.”라며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부모님을 그리는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나누었다. 주지스님과 관객들도 "내년에도 와서 함께 합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불러주세요. 나무아미타불 "라며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열창을 한 회원들의 두 손을 잡아주었다. 이혜솔 회장은 ‘2021아리랑학교’가 주최하고 있는 경기지역 '아리랑고개'를 찾아가는 아리랑답사에 함께 참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아리랑버스킹 공연을 함께 병행하기로 하고 연습을 하고 있다. 한편 왕십리아리랑보존회는 전 세계를 멈추게 한 코로나를 아리랑으로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새로 만든 창작아리랑 ‘아리랑코로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해 독도를 방문했다. '독도에서 제주까지 아리랑코로나'라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6월 2차 독도아리랑버스킹 공연에는 새로 만든 창작아리랑인 '독도아리랑'을 관광객들과 공유했다. 코로나 이후에도 계속 전승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라는 것이다. 시대의 노래 아리랑. 창작아리랑이 새롭게 나오고 있다. 한 개인 전승자에 의해 새롭게 불려진 '아리랑코로나'와 '독도아리랑'에 이어 '연꽃아리랑'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 아리랑에는 각각의 시대가 요청하는 진심어린 사연이 담겨져 있다. 민속학에서 "민속문화는 현재 향유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면 그 존재는 종목만 남아있고 가짜민속이 된다'라고 한다. 그래서 전승단체와 전승자는 가장 중요한 민속문화의 키워드이다.
-
제7회 전국 공주아리랑 민요 경창대회 성료(사)공주아리랑 보존회(회장 남은혜)가 주관하는 제7회 전국 공주아리랑 민요 경창대회가 26일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띤 경연 속에 충남 공주 충남역사박물관에서 성황리에 마무리 됐다. 서울 경기지방에서부터 영남, 호남까지 전국의 민요 향유자들이 참가했다.공주아리랑은 긴, 자진, 엮음아라리로 부르는 토속아리랑의 조건을 모두 갖춘 아리랑이다. 선율은 충청도 공주지방의 지역성을 담보하고 있다. 정적이면서도 높고 낮음이 적은 편이다. 이번 경연은 공주아리랑, 경·서도민요, 지역아리랑 세 부문으로, 명창부, 일반부, 단체부(4인이상), 학생부(초,중,고)로 나누어 실력을 겨뤘다.명창부 대상은 국회의장상, 금상에 충남도지사상, 은상에 국회의원상, 동상에 공주문화원장상 , 장려상에 (사) 한겨레아리랑연합회이사장상, 특별상에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원장상이 주어졌다.이밖에 일반부, 신인부, 단체부, 학생부 등 공주시장상과 공주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등 각 부분에 걸쳐 시상됐다.대회를 주관한 남은혜 (사)공주아리랑 보존회장(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이수자)은 "이번 대회를 통해 문화도시 공주의 이미지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인 공주아리랑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저변도 확대해 나가는데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김기자의 객석에서] 나의 소박한 ‘아리랑論’여전히 아리랑 고요한 새벽 풀잎에 잠시 앉아 해를 불러들이고 이슬은 소리 없이 스며들어 푸른 빛 주고 가네 우리 가슴에 이슬이 물들고 청청한 노래되니 이전에도 지금도 찬연하게 파고든다 사람의 육신은 끝나도 아리랑 넌 여전히 반짝이며 한없이 빛나겠지 "이슬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에 물든대요. 그래서 더 짙고 푸르대요. 그런 이슬처럼 아리랑이 우리 가슴과 이 땅에 물든 것이지요. 잠시 반짝하고 유행하는 노래가 아니라 이전에도, 지금도 계속 불려 지지요. 밝게. 밝다고 해서 슬픔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아리랑은 기뻐서 부를 수 있지만, 당연히한과 슬픔도 담아 부르지요. 그래서겠지요. 빛나는 노래예요. 아리랑은~."(어느 화요일 새벽에)
-
[김기자의 객석에서] 나의 ‘이 한 장의 사진’매달 초면 기다려지는 월간 잡지 ‘길벗’이 도착했다. 6.25 발발 71주년, 6월 호국보훈의 달 특집호이다. 눈을 멈추게 하는 사진들로 한국전쟁의 참상을 보여준다. 미얀마와 중동, 코로나19에 대한 화보로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도 있고, 아름다운 이야기와 동시도 담겨있다. 전쟁 사진에 눈길이 멈춘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종식되지 않은 분단국가의 아픔을 보여 준다. 오늘날 우리는 문명을 누리며 살지만, 사진은 그 날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해 준다. 그동안 한국전쟁을 말하며 ‘가슴 아프다’는 말을 쉽게 한 것이 부끄럽다. 한 장의 한국전쟁 사진, ‘전쟁 중에 하는 야외수업’ 모습이다. 하늘을 지붕 삼아 돌밭 위 벽돌의자에 아이들의 수업모습이다. 우측에는 색깔 없는 건물이 언제 무너질지 몰라 위태롭게 보이고, 집 뒤의 민둥산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칠판 하나와 벽돌의자가 교실 흉내를 내고 있다. 천막조차 없는 야외 학교다. 벽돌의자가 어딘가. 선생님의 수고였을까? 아니면 아이들과의 합작일까? 아마도 벽돌의자는 쓰러진 집이거나 건물의 기둥이었을 것이다. 볼품 없는 야외 교실이지만 친구와 가족을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재잘거리며 이야기도 나누는 곳일 것이다. 뿐이겠는가. 선생님의 재미난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는 곳이기도 하고, 수업에 오지 못한 친구의 슬픈 소식을 듣는 곳일 것이다. 시선은 계속해서 사진에 머문다. 생각도 그 속으로 달린다. 배경은 폐허, 잿빛 옷에 고사리 손의 아이들. 열 명쯤의 까까머리 남자아이들의 수업 모습. 흑판에는 "유엔(UN) 평화~"라고 써있다. 선생님은 하얀색 상하에 모자까지 써서 권위(?)를 보인다. 그런데 앞 줄 세 아이가 팔을 들고 있다. 분명 선생님의 질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산수 문제였을까? 국어 문제였을까? 아니면 피난 중 포화로 가족을 잃었는가를 물은 것은 아닐까? 아니, 이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80대의 이 분들이 지금 내 이웃으로 함께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러 저러한 생각은 급히 오늘의 내게로 달려 온다. 이 한 장의 사진, ‘역사 속의 한국전쟁’을 비로소 ‘나와 함께하는 역사’이게 해 주었다. 나도 ‘이 한 장의 사진’을 갖게 되었다.
-
아리랑 전승활성화 활로 모색, 아리랑학교 수료식지난 6월 6일,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가 주최하고 아리랑학교가 주관하는 제3기 아리랑학교 수료식이 있었다. 중구 을지로 ‘국악신문’ 세미나실에서 개최된 이날 세미나는 4시간에 걸처 주최 측의 인사와 참석 전승 단체의 현황 등을 소개하고 세 가지 주제에 대한 진지한 주제 토론이 이어졌다.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의 <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가치> 발제 후,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상의 전형성>, <아리랑 전승 활성화 활로 모색>에 대해 자유토론이 진행되었다. 기미양 이사의 발제에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과 ‘국가무형문화제 129호 아리랑’이라는 두 가지 위상과 그에 따른 가치가 실현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2012년 등재 심의 과정에서 도출된 아리랑의 가치, 2015년 지정에 따른 해설문의 특징 등에 대해 세세하게 짚었다. 특히 중국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아리랑’의 국가급과 지방급 2중 지정의 의미와 우리의 ‘60여종’, 북한의 ‘41종’이란 표기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더불어 논의 된 내용을 주변에 확산시켜 아리랑의 이해를 높여야 하는 책무가 참석자들에게 주어진다고 강조했다. 기미양 이사는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상의 전형성(典型性)’에 대한 논의에서는 구 법제의 ‘원형성(原型性)’의 대체 이론임으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함을 공유했다. 일반적으로 전형성이란 같은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본보기 정도의 의미로 새로운 법 제2조 1항에서 "전형성이란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하였고, 제2항에서는 "전형성은 무형문화재를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하는데 구현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고유한 가치, 기법 또는 지식을 말한다"라고 설명하였다. 참가자들이 관심을 모은 주제는 <아리랑 전승 활성화 활로 모색>이었다. 국가무형문화제 129호 아리랑 지정 당시 이의 동력을 받아 획기적인 전승활성이 이뤄지리라 기대했지만, 6년이 지난 오늘의 실상은 심각할 정도라고 진단했다. 그 원인의 하나는 제도권의 무관심으로 전승체계가 마련되지 않아 청소년 회원의 이탈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여기에 ‘3대아리랑’이란 말을 쓰며 아리랑을 서열화하는 일부 관요화(官謠化) 한 지자체 기관과 단체의 활동과 이에 동조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유산 아리랑에 대한 몰이해도 원인이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은하 회장은 오랫동안 가지고 오는 소회를 피력하여 공감을 얻었다. "아리랑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2015년 이전에 지정된 종목의 보유자들은 많은 혜택이 있다. 이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전승의지를 꺾는 요인의 하나이다. 여기에 최근에는 ‘3대아리랑’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니 박탈감이 참 크다.” 이에 동의하는 참가자들은 문화체육관광부에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규탄 성명 채택을 결의 하기도 했다. 더불어 지방문화재 지정에 대해 소외되고 있는 실정을 토로하고 이에 대해 소극적인 문화재청에도 대책을 호소하기로 합의했다. 문화재청은 2015년 보유자 없이 ‘129호 아리랑’을 지정하며 이 같은 단서를 표하였다. "다만 지자체에서는 지역의 정체성을 지닌 아리랑을 시·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전승에 힘쓰는 개인이나 단체를 보유자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5년이 지난 현재 어느 시·도에서도 지방문화재 아리랑을 지정하지 않은 실정이라고 성토하였다. 이 날 세미나 토론 참석과 수료식에서 증서를 교부 받은 이들은 다음과 같다. 남은혜(공주아리랑보존회)회장, 전은석(영천아리랑연구보존회)회장, 배경숙(경산아리랑연구보존회)회장, 최승녀(가평아리랑보존회)회장, 강소빈(제주아리랑연구회)회장, 임옥자(성주아리랑보존회)회장. 이혜솔(왕십리아리랑보존회)회장. 김화숙(왕십리아리랑보존회) 부회장, 유재희(서귀포아리랑보존회) 회장, 장경숙(제주아리랑연구회)회장. 주최 측인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은하 회장은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무형문화재 129호로 우리와 세계가 항유하는 문화유산이다. 이를 가치화 하여 보편문화로 세계화하기 위해 아리랑의 가치와 전형성과 전승활로를 모색하는 제3기 아리랑학교의 과정을 마쳤기에 이 증서를 드린다."고 명기된 수료증을 수여했다. 한편 아리랑학교 제1기는 2017년 문경문화원 주최로 2년간 이루어졌고, 제2기는 2018년부터 아리랑학회 주최로 사할린 현지와 국내 영구 귀국한 사할린 동포 대상으로 개최되었고, 이번 제3기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주최로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대구와 울릉도 등지에서 개최하고 이번 수료식을 갖게 된 것이다. 주최 측은 이번 세미나 교재 '아리랑의 가치/ 전형성/ 전승활로 모색'을 필요한 이들에게 제공한다고 밝혔다.
-
[김기자의 객석에서] 삼례에 “책의 꽃이 피었습니다”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만났다. 기대한 탓일까? 그동안 사진으로 봤을 뿐 대면하는 건 처음이다. ‘고서 사랑’, ‘책의 남자 박대헌’. 본보에 연재하고 있는 그 분이다. 매주 보내오는 원고에는 오타 한 자 없다. 올곧게 지켜가는 고서에 대한 신념이 담긴 진지한 글 속에는 가끔 웃음도 있다.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고집쟁이 어른이 아니다. K선배로부터 성품에 대해 들었던 터라 만나고 싶었던 분이다. 삼례역에서 걸어 5분, ‘삼례+책+마을’이다. 역에서 가깝게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삼례책마을 찾는 방문객들은 가는 길만큼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듯하다. ㄷ자형으로 잔디를 품고 있다. 평화롭고 사랑스런 풍경이다.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와 주위에 있는 모든 건물이 책마을 덕에 빛나 보였다. 선생은 ‘고서점 호산방’ 주인이며 ‘삼례책마을조합’ 이사장으로 이곳을 일구고 지키는 분이다. 선생과 악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 쯤 일찍 왔다. 점심을 먹고 나면 맞아떨어질 것 같아서다. 삼례책마을 전경을 얼른 한눈에 넣고는 작은 도로를 건너 이름이 고운 ‘새참누리’ 식당으로 갔다. 혼자 점심을 먹고 있는데, 몇 명의 일행이 들어왔다. 이곳을 잘 모르는 듯 한 일행과 그들에게 자리를 안내하는 한 중년.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중절모를 썼다. 크지 않은 체구에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몰두해 온 듯한 어깨와 나지막한 목소리까지 직감적으로 만나야 할 분임을 알았다. 연재 담당 기자로서 짧게 몇 번 통화한 선생의 목소리도 낯설지 않았다. 그들이 들어올 때 내가 앉은 자리를 지나게 되니 혼밥 하는 이가 있다는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나를 등지고 있었지만 나를 의식한 듯 보였다. 그래선지 얼마 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첬다. 순간 나는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 분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로 맞아주었다. 짧은 순간 사진으로 기억되는 전혀 다른 선생의 모습을 지워 버렸다. 다 먹어가던 참이었지만 식사하는 선생의 뒷모습이 혹시나 혼자인 나를 신경 쓰는 거로 읽혀져 바로 식당을 나왔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식당 밖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인사는 생략되었다. 바로 오전에 올 줄 알았던 일행과 같이 움직여도 되냐고 양해를 구하면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말수가 적고 전문적인 말만 할 줄 알았는데 유머가 배고 세심한 배려에 내가 그린 모습과 달랐고 훨씬 좋았다.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처음 만난 일행과 함께 삼례책마을을 둘러보았다. 책마을은 일제강점기 쌀을 수탈해가려고 지었던 양곡창고를 개조해 박물관과 고서점, 전시관을 갖춘 것이라고 한다. 화려하고 높은 건물의 규모가 아니라 역사의 현장을 허물지 않고 책마을로 탄생시켜 더 귀하고 가치 있어 보였다. 삼례역이 가깝게 있는 것도 일제가 쌀을 빠르게 운송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3가지 테마의 전시를 선생의 설명으로 볼 수 있었다. 먼저 '프랑스와 예술의 혁명' 전시다. 미라보 다리 시로 알려진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와 연인 마리로랑생’에 관한 전시와 ‘나폴레옹과 조선 서해안 항해기’, ‘근대 프랑스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 되어 있다. 그 중에 폴 세잔의 작품도 있다. 나: 아폴리네르가 왜 좋아요? 선생: 나보다 잘 생겼잖아요. 두 번째로 ‘요정과 마법의 숲 그림책 미술관’이다. 1940년대 영국 동화작가 그레이브스와 나오미 헤더 그림책이 출간되지 않은 미간행 원고의 전시다. 마지막으로 ‘문자의 바다 전’이다. 기원전의 자료까지 희귀하고 진기한 작품들이다. 알 수 없는 문자, 그 뜻과 깊이를 알지 못해도 보는 것만으로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자료가 반갑기도 했다. 세 곳의 전시를 안내 받은 뒤 책방 카페에 마주 앉았다. 그 곳을 들어서면 책이 2층까지 쌓여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온 몸이 지식으로 채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백석’을 검색하기도 했다. 여유를 갖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저서를 찾아보고 싶었다. 이 소망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세계의 고서, 그림, 음반 등 많은 양과 희귀한 자료들.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선생의 혜안이 부럽다. 영월책박물관에서 오늘의 완주삼례책마을에 이르기까지 많은 난제도 있었다. 그러나 삼례에는 비로소 선생으로 하여 책문화 도시가 형성되고, 이것은 삼례뿐 아니라 우리나라 지역 문화에 퍼지고 있다. 마당에 서니 선생이 흘린 땀으로 일구어진 ‘책의 꽃’이 삼례에서 피어 나고 있음을 5월의 신선한 바람이 알려 주었다. 전시관을 이동하면서 틈을 타 카메라를 내밀면 선생은 쑥스러워서 소년처럼 미소를 지었다. 사진 속의 또 다른 분이다. 무뚝뚝한 표정을 지을 것만 같은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겉으로는 강한 듯 하지만 속은 여린 중년이다. 삼례역까지 배웅해 주었다. "호랑이가 잡아 가면 어쩌나~”하면서. 오랜만에 듣는 옛날 이야기로 마지막까지 웃음을 주었다. 창밖 점이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 5월말의 삼례 책꽃 향기는 계속 서울로 가는 길까지 따라오고 있다.
-
[KBS 국악한마당] 오월 가정의 달, 가족과 사승 관계 예인들의 애틋한 무대지난 15일(토) 방송된 KBS1 국악한마당에서 오월 가정의 달 특집, 가족과 사승관계로 맺어진 예인들을 초청하여 ‘예인동행(藝人同行)’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예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하나로 뜻을 모은 예인들이 무대에 올라 협연과 조화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첫 순서는 스승과 제자들의 합주였다. 스승인 이종길과 제자들로 구성된 가야금앙상블 ‘춘호가랑’이 ‘웃도드리’와 ‘최옥삼류 가야금산조’을 선보였다. ‘웃도드리’는 아악(雅樂)의 ‘밑도드리’를 한 옥타브 올려 변주한 곡으로 경쾌한 주선율이 반복되는 것이 돋보였다. 다음으로 스승의 장구 반주에 맞춰 ‘최옥삼류 가야금산조’를 연주하였다.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로 구성한 우조 가락 위에 무겁고 절제된 주법이 두드러졌다. 사제의 깊은 정과 어울림이 절로 전해지는 무대였다. 이어 곽수은과 제자들로 구성된 가야금연주단 ‘라온G’의 앙상블이 무대에 올랐다.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 리스트(Liszt, 1811~1886)이 편곡한 ‘Soirees Musicales: La Danza’를 25현 가야금에 맞게 해석하여 기교가 돋보이는 속주와 다채로운 가락이 감탄을 자아냈다. 두 번째 순서는 가족의 정과 끈끈함이 절로 느껴지는 무대들이 준비되었다. 먼저 대금 명인 원장현과 아들 원완철이 등장하여 대금산조를 연주하였다. 전라도 지역의 시나위와 판소리 더늠을 토대로 구성되어 유장함이 돋보이는 산조였다. 무대 오른 편에는 왼손잡이 아버지가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 연주하고, 반대편에서 오른손잡이 아들이 아버지 쪽을 보며 대금을 부는 모습에서 부자지간의 돈독함이 절로 느껴졌다. 이어서 판소리 자매 김란이, 김미소가 무대에 올라 춘향가 중 ‘어사 장모 상봉 대목’을 분창(分唱)하였다. 다채로운 전조와 극적인 감정선이 돋보이는 ‘만정제’의 특징을 살려 불렀는데, 몽룡으로 분장한 언니가 고수와 주고받고 월매를 맡은 동생이 고수와 주고받고, 또 자매가 마주보며 부르는 모습이 익살스럽기가 그지없었다. 다음으로 거문고 연주자 이재하와 전통무용수 임동연 부부의 ‘연락(聯樂)’ 무대가 준비되었다. 거문고 산조를 바탕으로 창작한 춤으로 예술가이자 동반가로서 함께하는 부부의 인연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거문고의 희노애락 선율에 맞추어서 무희가 희희낙낙 주고 받는 모습에서 부부의 연을 뛰어넘어 예인의 길을 동행하자는 깊은 신뢰와 애틋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세 번째 순서는 서로 다르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뭉친 이들이 무대를 장식하였다. 먼저 ‘씽씽밴드’ 출신의 소리꾼 추다혜를 필두로 뭉친 밴드 ‘추다혜차지스’의 차례였다. ‘에헤리쑹거야’는 황해도 뱃굿에서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던 무가인 ‘쑹거타령’을 레게 장르로 재해석한 곡으로 간결하면서도 흥겨운 가창과 함께 베이스의 간결한 약박 연주, 몽환적인 기타 사운드가 조화를 이루었다. 이어 ‘곽동현과 슈퍼밴드’가 민요 ‘쾌지나칭칭나네’를 재창작한 곡을 선보였다. 원곡의 메기고 받는 형식을 소리꾼과 밴드가 주고받는 형태로 해석하여 참신한 것만을 추구한 기계적 융합이 아닌, 전통과 현대 음악의 조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꿈나무 한마당 차례에는 가야초등학교 5학년 남정음 양이 ‘늴리리야’와 ‘는실타령’ 두 곡을 불렀다. 어린이의 밝은 표정과 경쾌한 목소리가 무대의 신선함을 더해 다음 무대를 기대하게 한다. 국악영재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날 휘날레는 천안시립풍물단의 ‘버꾸춤’이 장식하였다. ‘버꾸춤’은 전남 완도군 금당면에서 전승되는 풍물굿의 농악놀이를 무대화한 춤으로 역동적이면서도 정교한 춤사위와 버꾸를 돌리고 치는 화려한 북 장단이 보는 이로 하여금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국악한마당은 매주 토요일 오후 12시 20분 KBS 1TV에서 방영되며 홈페이지에서 다시 볼 수 있다.
-
[김기자의 객석에서] 얼쑤! 우리가락 ‘더 콜라주’‘더 콜라주(The Collage)’는 국악이 서양음악과 만난 콜라보 영상 중에 가장 독창적이고 감동적인 작품이다. 지난 5월8일 전주MBC 얼쑤!우리가락은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전주세계소리축제’와 ‘페테르부르크 콘체르토’의 컬래버레이션 무대가 방영 되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한국전통음악 협연 영상 컨텐츠로 제작된 것이다. #화초장타령 ‘화초장타령’은 판소리 ‘흥보가’의 한 대목으로, 부자가 된 흥부 집에 놀부가 와서 화초장을 얻어 가지고 가는 길에 부르는 대목이다. 중중모리 장단을 서양악기와 만나 아쟁과 바이올린 을 더하여 편곡한 곡이다. 아쟁산조를 기반으로 하여 중반에 화초장 타령 멜로디가 나온다. 중후반은 바이올린 솔로와 아쟁 솔로가 함께 어우러져 마무리 된다. 시작은 오케스트라 연주와 영상이 펼쳐지면서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배경 영상은 러시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와 러시아의 전경, 한국의 단청과 문고리 등 양국의 풍경을 담고 있다. 영상과 함께 동서양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대 중앙에 앉은 아쟁 연주자의 소리가 더해지는 순간 절정에 이른다. 흐트러짐 없고 반듯한 선비의 모습의 명인. 서양악기에 아쟁의 소리는 선명하고 돋보인다. 동서양이 마치 하나인 듯 조화롭다. 곧은 절개와 위엄을 지닌 채 그 어떤 것도 개방하고 수용하여 재창조 되는 융화의 미가 잘 드러나는 연주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연주에 영상미까지 빼어나 여운을 주는 무대였다. '화초장타령’을 몇 번 되돌려 보았다. 공연장에 가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을 주는 연주이다. 수많은 컬래버레이션 영상 중에 ‘더 콜라주’는 단연 압도적이다. 이 영상을 꼭 보길 추천한다. #엇모리볼레로 우리 춤 중에 가장 고풍스럽고 우아한 태평무와 본고장 러시아의 화려한 발레가 만났다. 음악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곡에 엇모리를 기반으로 연주된다. 3박자와 2박자의 반복에 엇모리가 얹어져 동서양의 춤을 볼 수 있는 무대이다. 타악기를 시작으로 저음의 현악기가 더해지고 이어 또 관악기가 합쳐진다. 이때 금박의 붉고 푸른 한복치마가 너울거리며 버선발이 사뿐 거리는데 또 다시 전율이다. 이어 기품 있는 무용수의 모습이 드러난다. 러시아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한국무용수는 우리의 춤사위를 선보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아한 한복의 자태와 입술을 다물고 미소 짓는 얼굴에는 범접 할 수 없는 기개가 느껴진다. 초반부터 넋을 빼놓는다. 서양의 멜로디에 태평무가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묘한 조합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이어 러시아 발레가 등장한다. 버선발이 이렇게 우아하다니. 클로즈업 된 버선발이 보일 때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발레는 현란한 발의 움직임과 태평무에서는 발의 버슴새에 주목했다”고 한다. 공감한다. # A Dream I Never Dreamed 4명의 설장구 명인과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로 우도농악의 꽃 오채질굿 장단을 모티브로 편곡한 무대이다. 비장하고 장엄한 울림의 오케스트레이션이다. 단원들의 영상을 뒤로하고 네명의 설장구 연주자가 앉아 있다. 이어 플루트와 장구가 함께 하는데 너무 잘 어울렸다. 선율이 매우 아름답다. 한 명씩 장구가 들고나다 4명이 함께 연주를 한다. 이들은 의상도 각기 다르지만 조화롭다. 친숙하고 편안한 장구가 우아하고 품격 있게 돋보인 창조적인 무대다. #아리랑 오케스트라 아리랑 연주에 세 명의 여류 명창이 구음 시나위를 더한다. 친근하고, 구성지고, 청아하다. 서양의 화음과는 다른 묘미를 준다. 후반부, 태평소가 절정을 이룬다. 우주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메마른 대지에 생명을 불어 넣은 무대이다. ‘전주세계소리축제’와 ‘페테르부르크 콘체르토’의 ‘더 콜라주’ 공연. 미디어시스템의 장점을 살린 감동적인 무대이다.
-
용인 은이성지 아리랑노래비를 찾아서(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은 아리랑학회가 주최한 경기지역 '아리랑고개'를 찾아가는 '아리랑답사'를 위해 길을 떠났다. 월간 잡지 ’길벗‘에 실린 ’천주교와 아리랑(기찬숙의 아리랑칼럼)‘을 읽고 나서, 필자에게 용인시 남곡리 아리랑고개에 대한 답사 안내 및 강연요청을 하고 회원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회장은 지난 주 가평아리랑답사에서 의병사에서 마지막 격전지 보납산(법업산)을 찾았다. 보납산은 남으로부터 쫓겨온 의병들이 이승에서 넘었던 마지막 고개, 아리랑고개인 것이다. 이번 주는 용인 지역 아리랑고개를 넘어갔다.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는 ‘은이(隱里) 성지’가 있다. 천주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목한 본당이며 순교 후 유체의 이장 경로이기도 하다. ‘은이’라는 지명은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 숨어 살던 신자들의 교우촌이었다. 은지성지 성지순례길은 총 15. 4km, 5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인데, 여기에는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믿음, 소망, 사랑을 뜻하는 ‘삼덕(三德)의 길’이라는 세개의 고갯길이 있다. 세 개의 덕(德)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하나는 신덕(信德)고개인 ‘별미 고개’, 둘은 망덕(望德)고개인 ‘해실이 고개’, 셋은 애덕(愛德)고개인 ‘거문정 고개’길을 말한다. 오늘에도 인적이 드믄 산길이 포함되어 있는데, ‘120 나무계단 길’과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 때 호랑이도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는 ‘기적의 길’도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신덕고개 ‘별미고개’에는 뜻밖에도 ‘아리랑’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천주교 초기에 아리랑이 신앙공동체에서도 불렸음을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 결속과 포교를 위해 민중의 노래에 신앙심을 얹어 불렀다고 본다. 이 비에 새겨진 가사가 당시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만한 유래를 담보했기에 비로 새겨졌다고 보게 된다. 아리랑노래비의 가사는 김진용 작사의 전체 8절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리랑 주님을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후렴구) 천진암 강악회 진리탐구/반만년 어둠속에 동이 트네 청천 하늘에 잔별도많고/천주교 이백년 박해도 많다 심한박해 모진고충 이겨내고/참된신앙 물려주신 순교자여 금자로 발길재는 천사를 보라/격려하며 순교의길 가신님이여 희광이칼 여덟번째 목숨바치고/천당영복 면류관을 쓰신님이여 순교유해 쌓고쌓여 주춧돌되고/순교선혈 흘러흘러 밑거름됐네 한알의 밀알이 이백년썩어/오백만의 열매가 주님찬미해 제1절에서는 상하 계층 없이 사방팔방의 모두가 알고 있는 아리랑의 대표사설을 통해 곡조를 제시했다. 2절은 광주 퇴촌의 천진암(天眞菴)에서의 강학회(1771년 자산 정약전 3형제와 만천 이승훈 등의 천주교리 연구모임) 사실을 말하여 천주교 역사를 제시했다. 3절은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네 차례의 박해를 통해 천주교의 수난사를 나타냈고, 4, 5절은 성스런 순교사를, 6~8절은 신앙 승리의 역사를 찬양했다. 이 가사 천체를 보면 3절과 8절에 ‘이백년’이 있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으로 작사하여 노래비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고, 천주교 신약성서 자체 번역본을 발행하였으니, 이 아리랑 작사도 그만큼 의미를 두어 비로 세운 것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굳은 신념이 뜨겁게 전해온다. 이회장과 회원들은 아리랑학회가 운영하는 아리랑학교에서 배포한 아리랑 가사를 사전에 받고 가창 연습을 해왔다. 1시간을 걸어서 가쁜 호흡으로 아리랑고개에 오르자. 경건하고 신성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르는 땀을 식혀주었다. 우선 목숨을 걸고 이 고개를 넘어갔던 순교자와 신도들을 위해서 술 한잔씩 부어서 올리고. 일동 묵념을 하였다. 전국에 곳곳에 있는 아리랑고개의 역사성과 은이성지 아리랑고개의 유래에 대한 짦은 해설이 끝나자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아리랑노래비에 새겨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하자 3절에서부터 모두 눈물이 쏟아져서 눈물의 아리랑 공간이 되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자들이 받았던 억압과 고난이 뜨겁게 전해진다. 이회장은 "코로나로 인해 5월 서울과 제주 지역 아리랑 행사가 취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참에 경기 서울지역 아리랑고개와 아리랑역사 유적지를 답사하고자 한다. 실제적 아리랑고개 '문경새재'에 이어서.......찾아와보니, 아리랑은 '고개의 노래'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무대에서 이러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해지도록 노력하겠다. 특히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은 역사의 노래이다. 부르는 이도 왜 아리랑을 불렀는지는 알고 불러야 한다라는 취지로 아리랑학회 아리랑고개답사에 동참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회장은 다음주 안성아리랑보존회가 주관하는 안성의 아리랑고개를 찾아가는 답사에도 함께 할 계획이다. 전국의 아리랑고개의 유래를 살피면 천주교와 관련된 곳은 아직까지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 역사와 아리랑은 어떻게 만났을까? 현재 밝혀진 아리랑 자료로는 1823년(道光 3년) 청석거사(靑石居士) 필사본 ‘佛說明堂아리랑’이란 기록물에서 1839년 천주교 기해박해 전후에 불렸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문헌자료는 민간신앙에서 수용한 일종의 무경(巫經)으로 "제석천황 관제멸 대범천황 오액명/아라리 사라리 아리사리 아리랑” 같은 사설에서 알 수 있듯이 수명과 복록을 기원하며 아리랑 후렴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아리랑의 보편성을 이용하여 무경의 보급을 용이하게 할 방편으로 수용한 것이다. 천주교 교인들도 우리의 전통 시가인 가사체(歌辭體)를 수용하여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교리를 전파했듯이, 민요 아리랑의 형식도 수용했을 것은 분명하다. 천주교인들이 불교 사찰인 천진암을 거점으로 한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통문화를 수용하여 교리전파에 활용하는 것은 포교의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초기 교회사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천주교 초기 인물 이승훈이 아리랑을 수용한 사실에서, 이는 초기 천주교 신앙공동체에서도 아리랑이 포교를 위해 향유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200년 기념으로 새로운 아리랑이 창작되어 비로 세워지게 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정조년간에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은 단순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점차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학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드디어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歸依)해 가게 하였다. 이 때 민중의 노래 아리랑도 향유되었다. 어떤 공동체에게도 아리랑은 결속력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획득하게 하는 노래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나 만날 수밖에 없는 노래인 것이다.(www.arirangsong.com)
-
[김기자의 객석에서] 장문희 보유종목 '심청가', 남원의 5월 수놓다# "장문희의 동초제 심청가 5월 8일(토) 오후 3시 국립민속국악원 예음헌, 국립민속국악원 주변에 붙은 광고문은 5월 8일 3시에 바뀐다.” # "2021년 남원의 5월은 44살 5월 장문희이다, 청신한 연록의 장문희는 5시간 20여분 후인 8시 20분 지금, 진록으로 변한다." 서울행 KTX 시간에 쫒기며 남긴 내 취재노트 메모이다. 이제 장문희를 다시 만난다. 고참 기자의 동행 강권으로 남원행을 단행, 광한루를 거쳐 공연장에 도착한다. 만석이라 부득이 발표자를 팔아 좌석을 받아 입장한다. 취재 목적이지만 발표자를 만나지 않는다. 완창 발표의 부담감을 걱정해서다. 공연장은 ‘거리 두기’로 60명이 만석, 나긋한 아니리조 해설이 부동자세를 풀어준다. 유영대 고려대 교수, 2004년 전설의 ‘대사습놀이 역사 상 심사위원 7인 전원 만점’ 그 주인공과 심사위원 한 분의 조합이니 취재기자로서는 분명 행운이다. 발표자 장문희, 여린 화장기에 다소곳한 너름새로 등장한다. ‘장문희에 최적화’ 한 고수 두 분 조용수/조용복과 함께. 객석의 박수에 물려 나직한 아니리로 시작한다. "송나라 원풍 만년에~ ”, 분명 첫마디는 촉촉하다. 눈시울에도 번진다. 그래서 아니리를 지나 자진모리 ‘곽씨부인 어진행실’ 시작까지 만감을 담아낸다. 당연하지 않은가. 오늘이 어느 날인가. 제도적 공식 지위 ‘심청가 보유자’ 지정 받은 이튼 날이요, 그 종목 완창 발표를 하는 날이니. 또 무슨 날인가. 강원도 인제와 전라북도 전주라는 거리만큼의 그리움으로 사셨던 어머니, 연로하여 쇠잔하여 모시지 못한 소리의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이 겹쳐지는 어버이날이니. 여기에 자기세계로의 출발 순간이니 그렇지 않겠는가. 이 뿐인가. 첫 심청가 완창회 때 초등학교 친구들의 눈빛. 제10회 동아콩쿠르 학생부 판소리 금상수상으로부터 제1회 공주전국명창·명고대회 판소리 명창부 대상 수상까지 친지들의 노심초사. 13회, 24회, 30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의 국악계 격찬,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 그랜드 마스터 선정과 ‘명창대첩 광대전’의 우승에 이어진 대중들의 호응. 완창 음반 ‘장문희 심청가 동초’와 싱글 앨범 ‘이화우 흩뿌릴 제’의 발매 성가. 이는 성취요 자긍심인 동시에 부담이니 말이다. 아, 스승의 단호한 당부도 들려온다. "겉목은 쓰지마라. 야무지게 뒤집어 봐” 만감의 순간이다. 자진모리 곽씨 부인 삯바느질 대목이 간결한 고수의 추임새로 시작된다. 발표자의 소리길이 터지는 순간이다. 아니리는 단출하다. 이런 저런 소리꾼들은 아니리를 쉴 참으로 삼는지라 너스레를 더해 맥락을 흐트리지만 발표자는 단 두 번만 자신의 이름을 대고 고수 팔 걱정한다. 발림 절제, 정돈된 아니리, 설음으로 짜간다.‘어린 심청’, ‘효녀심청’, ‘황후 환생 심청’ 서사를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장단 치며 짜간다. 곽씨부인 유언 대목 시작해서 부친과 하직하고 임당수에 투신한다. 또 한 번의 절창 ‘범피중류’로 눈물지으며 용궁으로 간다. 달고 맺고 풀어낸다. 세 시간의 연창, 발표자는 고수 팔 허리 걱정한 듯 윤기 오른 목을 잠시 내려놓는다. 귀 명창 객석은 박수에 추임새로 화답한다. 잠시의 휴식 지나 다시 새 고수 등장한다. 중모리 진양 잔잔히 물결 타고 두 시간여를 내 달린다. 용궁에 당도한다. 승상부인 세 번 등장, 그립고 안타까워 망사대 올라 화상 보며 시를 짓는다. 드디어 절절한 사연 쌓아 모친상봉 하고나서 왕후가 되는 대목을 지난다. 그리고 절절하게 도화동 부친 눈떴을까 헤아리며 "추월은 만정허여~” 기러기에게 간절한 안부를 전차한다. 절절하고 매혹적이다. 5시간 20여분 동안, "도화동 백성들은 세역을 없앴으니 천천만세를 부르더라~”로 여민다. 너름새 정교하고 부침새 다양하다. 사설 명료하게 전달하니 무겁고도 깊어 진지하다. 동초제 심청가 장문희는 감동이다. 동초 김연수(東超 金演洙), 운초 오정숙(雲草 吳貞淑), 난석 이일주(蘭石 李一珠). 동초제(東超制) 문파는 사백 장문희(詞伯 張文姬)가 잇는다. 가계로는 서편제 대가 이날치의 후손으로, 그 아래 손자인 명창 이기중이 있었으니, 그 딸이 명창 이일주다. 그 제자가 장문희니 소리 맥을 갖는다. 장문희는 사승 계보나 가계보로나 분명한 내력을 갖는 전통 판소리 명문 후예이다. 심청가만이 아니다. 이렇게 ‘5월 남원을 심청가로 수놓은 장문희’를 정리하며 두 분에게 전화를 한다. 해설을 맡았던 유영대 교수와 고참 기자에게. -세속적인 질문입니다. 2004년 심사 때 ‘99점’ 만점을 주셨는데, 이 번 발표는 몇 점을 주실 수 있는지요? 유교수-"100점은 신의 영역이니, 99.999 만점이요!” -선배님은 어떻게 봤어요? 선배-"많은 판소리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할 장황후 탄생을 봤지!” 망설임 없는 두 대답, 5월의 화창함보다 더 신선하다.
-
[KBS 국악한마당] 우리 민요의 맛을 알리는 '청춘가객'지난 17일(토) 방송된 KBS1 국악한마당에는 소리와 춤. 그리고 연주로 구성된 무대에서 비상하는 신인들의 열정으로 가득 차올랐다. 김주현, 이민형, 서의철은 경기소리, 서도소리, 남도소리를 대표하는 젊은 소리꾼으로서 ‘청춘가객’이라는 주제로 지역마다 여러 토리로 불리는 민요를 선보였다. 각각 다른 색깔로 불리는 토리는 아름다운 화음의 조화와 신선함을 선사했다. 첫 순서는 민요 연곡 '청춘, 가佳'로 세 명의 소리꾼이 함께 무대에 올라 ‘도화타령’, ‘느리개타령’, ‘봄노래’을 이어서 불렀다. 화창한 봄기운이 전해지는 무대에서 신명성이 더해져 다음 무대를 기대하게 했다. 다음 순서는 소리와 장단을 넘나드는 서도민요의 독무대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를 전수한 이민형이 직접 반주 장구를 치면서 서도소리의 백미라고 일컫는 수심가를 선보였다. 이번 무대에서는 '엮음 수심가'를 멋스럽게 불렀다. 평안도 지방을 대표하는 민요 수심가는 가창자 나름의 기량대로 불규칙한 장단에 사설을 촘촘히 엮어 나가며 불러야 하는 소리만큼 맛을 내기가 쉽지 않은 민요이다. 이어 난봉가를 불렀다. 사랑을 노래 난봉가는 황해도 지방의 민요로서 ‘긴난봉가’, ‘자진난봉가’, ‘타령난봉가’, ‘숙천난봉가’, ‘사설난봉가’ 등 여러 곡명이 전해지는데, 철가야금, 대금, 피리, 장구의 흥겨운 반주 위에서 ‘긴난봉가’, ‘자진난봉가’, ‘변조난봉가’를 노래하였다. 경기민요 무대에는 김옥심제 정선아리랑과 창작국악곡인 '애환'이 불리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를 전수한 김주현이 정선아리랑을 재해석하여 편곡한 새로운 선율의 정선아리랑을 고고한 거문고의 반주에 맞춰 신선한 무대를 선보였다. <애환>은 함경도민요의 선율과 장단을 바탕으로 작곡한 곡으로 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망자의 시점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였는데, 25현 가야금과 첼로의 조화가 돋보였다. 다음 차례에는 국가무형문화제 제5호 판소리를 전수한 남도소리꾼 전의철이 <적벽가>의 ‘조조 군사 조련’ 대목과 신민요 연곡을 준비하였다. 중고제 명맥을 잇는 박동진제 적벽가를 선사했다. 판소리의 속성인 극을 완성해주는 고수와 마주 보며 밀고 당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가야금병창으로 널리 불리는 신민요 ‘야월삼경’과 ‘상사천리몽’, ‘복숭아꽃’, ‘꽃타령’은 철가야금을 비롯하여 대금, 아쟁, 장구 등으로 구성된 반주로 풍성하고 조화로운 선율을 선보였다. 봄날의 감미로움과 평안함을 선사했다. 이어진 순서로는 ‘꿈나무 한마당’으로, 황아연(비룡초 2학년) 학생이 한영숙류 태평무를 조금은 서투르지만 차분하게 선보였다. 어린 국악 꿈나무의 가능성을 열어준 무대가 되기를 바라며 박수를 보낸다. 휘날레는 ‘헤이스트링’그룹이 무대에 올라 마지막 여운을 장식하였다. ‘헤이스트링’은 서울대 국악과 출신 3인의 가야금 연주자로 구성된 팀으로 <Memory distortion>와 <머물다 가는 것>을 연주하면서 25현 가야금이 지닌 음색과 선율의 맛을 선보였다. 구음과 함께 하는 신선한 매력을 발산했다. 자기만의 색깔을 더해가는 젊은 소리꾼들의 편곡작품과 신선한 25현 가야금 연주는 국악의 진화를 위해 도전하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무대였다. 국악한마당은 매주 토요일 오후 12시 20분 KBS 1TV에서 방영되며 홈페이지에서 다시 볼 수 있다.
-
국악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곽동현의 음악세계국악아카펠라 '토리스' 리더를 맡고, 최근 '곽동현과 슈퍼밴드'를 결성한 곽동현 명창을 통해 국악 단체 토리스의 정체성과 국악 전승활동을 살펴본다. 대구에서 태어난 곽동현(1981년생)은 영남민요와 영남아리랑을 지키는 정은하 명인 밑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내년이면 30년이 되어간다. 타고난 재능은 신명까지 갖추어서 이미 어린 나이에 무대를 압도했다. 어느새 영남민요와 경기민요를 공부하다가 서도소리를 이수한 젊은 소리꾼 곽동현이 '밀양아리랑 선율의 변천 연구(한예종 석사)에 이어, 작년에 한양대학교 한국음악학을 전공하고 ”영남지방 유희요의 존재 양상과 특징"이란 주제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매년 대구에서 ‘곽동현 대구영남의 소리’ 무대를 열고 있다. 이후 경기잡가 완창발표회를 가졌다. 2009년 21c한국음악프로젝트 창작국악경연대회에서 창작곡 '아부레이수나'로 대상 수상, 소리경연대회 명창부 대상( 문광부장관상)과 러시아국제민속음악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18년부터는 방송에서 마을을 찾아가는 민요 리포터로 사랑받는 젊은 소리꾼으로, 크고 작은 축제에서 음악감독과 해설을 맡고 있는 곽동현을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국악 꿈나무에서 국악계의 별로 떠오르다 Q. 안녕하세요, 제가 대구 공연장에서 만난지도 25여 년이 훨 넘네요. 제가 알고 있는 국악 스타 곽동현보다 이제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국악인으로서, 자신을 직접 소개한다면, 부탁드려요. A. 국악아카펠라 '토리스' 그룹에서 10년째 리더를 맡고있구요. 경서도 소리꾼 곽동현입니다. 몇년전 '곽동현과 슈퍼밴드'도 결성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영남민요연구회 정은하(현 사단법인 영남아리랑보존회 이사장) 명창 밑에서 공부를 하고, 영남대학교 한국음악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예술전문사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에서 한국음악학을 연구했습니다. 매년 대구에서 ‘대구영남의 소리’를 발표하고 있고, 최근 2019년 2020년 국립국악원에서 경서도잡가발표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매년 창작국악 음반을 내놓고 있습니다. 최근 판소리 흥보가 음반을 내고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서양음악과 트롯트 열풍에 의해 국악을 외면하는 관객들과 소통을 하고 싶어서 편곡 작품을 음반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전통에서 창작, 다시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외유를 했다고 할까요. 지금은 판소리의 매력에 빠지고 있는 중입니다. Q. 매년 발표하는 '아리랑 & 2017 대구'영남의 소리를 찾아서'에서는 어떤 곡이 불렸나요? A.제1집 음반에 수록된 '담바귀타령' '신옹헤야' 2집에 수록된 '쾌지나칭칭나네' 3집에 수록된 '경성아리랑'. 이 밖에 세계적인 지휘자 클로드최가 작곡한 '나의 아리랑'을 연주하고, 마지막으로 예천통명농요 중 '도움소소리' '에이용소리' '캥마쿵쿵노세'를 재현했습니다. Q.영남민요에서 경기민요, 경서도민요,제주민요까지 공부를 했는데, 자신의 음색에 가장 어울리는 곡은 무엇인가요? A. 개인적으로 애창하는 노래는 비장미가 뛰어난 서도소리 '수심가'입니다. 무대에서 맑고 깊은 맛으로 부르고 싶어요. Q.국악아카펠라는 어떤 음악장르인가요? 국내에 다른 국악밴드에도 있나요? A.장르는 아카펠라이구요. ‘국악+아카펠라’라는 배합으로 탄생한 저희 팀이 아마 세계 최초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예종 후배들로 구성된 국악아가펠라 '토리스'는 지역마다 다른 토리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토리스는 민요와 판소리, 아카펠라를 전공한 견두리(소프라노)·이신예(알토)·곽동현(테너)·백현호(바리톤)·최홍석(베이스) 남녀 5명으로 구성됐으며, 우리 가락을 아카펠라 창법에 접목해 활발한 활동을 10년간 함께 하고 있습니다. Q. 퓨전음악과 밴드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다양한 동서양 악기편성이 대세가 되어버린 창작국악계에서 우리악기의 멋과 소리꾼의 진정성을 살린 곽동현의 시도는 신선하면서도 의미가 깊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토리스에서 그동안 출시한 음반은 어떤 것이 있나요? A. 제1집은 민요를 국악기로 편곡한 노래들이구요. 제2집은 제가 작사 작곡한 곡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3집은 새로운 아리랑을 주제로 엮었구요. 4집은 박사논문을 통해 재해석하여 현대화한 ‘월워리청청’이 있습니다. 토리스 그룹에서 2019년 8월 판소리 '흥보가' 음반을 내고 서울과 대구에서 발표했는데, 호응이 좋아서 .... 다음 작업으로 판소리 장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Q. 퓨전국악과 창작국악에 관심이 많으신데요. 출시된 음반은 어떤 것이 있나요? 음반 1집 ‘바람을 그리다’에서 국악을 일상의 음악으로 만들어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2집 ‘젊은 노래꾼 곽동현의 광대소리’에서는 민요에 밴드 요소를 결합해 현대적 감성을 살려낸 신선한 작업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여러 음반 중 가장 공을 들인 음반은? A.경기잡가 4곡 서도잡가 4곡, 2019년 곽동현의 경서도잡가 1탄을 선보였습니다. 연속성이 있도록 매년 선보이는 프로젝트이구요. 제3탄이 끝나면 경서도잡가 24곡을 완창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2탄을 무탈없이 마무리 지었습니다. 여러 음반 중 가장 공을 들인 음반은 ‘새로 그린 아리랑’ 입니다. 서정적이면서 기승전결이 있는 선율을 만들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벅찬 감동까지 느낄 수 있는 힘이 있는 노래입니다. 경성아리랑 첫 수는 황현의 매천야록(1894)에 수록된 현존하는 최고의 아리랑 기록인데. 1930년 문헌에서 찾은 ‘서울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불린 아리랑 중에서 일제강점기 경성의 이미지를 부각할 수 있는 정서를 담아내려고 재구성하였습니다. 아리랑 음반들은 아리랑학회에서 문헌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곽동현의 음악 세계 국악아카펠라 '토리스' 그룹 리더 곽동현은 전국 어디를 가도 들을 수 있는 경로당 노래 1호 경기민요 '노랫가락'을 5.8.8.5.8 장단에서 6/8박으로 변용하고 애틋한 감정을 담아 가사를 새롭게 작사하여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내어 놓았다. 그리고 1926년 경기소리의 대가 박춘재가 불렀던 '낭군가'를 오늘날 현대적 감성을 실어 보사노바로 새롭게 편곡하였으며, 그 밖에 선소리 산타령에 속하는 '개구리타령', 담배를 소재로한 '담바귀타령', 보리타작소리인 경상도 대표소리 '옹헤야'를 재해석하여 새롭게 편곡하였다. 10년전 첫번째 음반(아리랑)이 나왔다고 제일 먼저 필자에게 달려왔던 기억이 새롭다. 이후에도 매년 음반이 발매되었다. 필자가 지켜본지가 22년이나 된다. 영남민요발표회 무대에서 눈여겨 본 어린 국악 꿈나무가 성장하여 국악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실기에서도 국악계 민요부 3트리오(김용우, 이희문, 곽동현)반열에 서도 무리가 없다. 국악 이론까지 겸비한 그는 그만큼 책임감이 무겁다고 한다. Q. '곽동현 경서도잡가발표회' 준비하고 발표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도 국립국악원 공연장에 가서 박수를 치고 온 거 기억하시나요. 그때 비가 많이 왔죠. 비를 흠뻑 맞고 들어가서 들어보는 음악은 묘하게 집중력을 가지고 감상했습니다. 국악에 입문한지 1년만 있으면 30년이 되는데, 그동안 영남민요. 경기민요. 서도민요까지 한국음악의 여러 갈래를 공부했는데 기억에 남는 스승은? 국악계의 힘든 고개를 넘어갈 때 도움을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현재의 자신이 되기까지 영향을 주신 분은? A.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자주 찾아 뵙는 소리 스승은 영남민요와 아리랑을 널리 전수하는 정은하(1956년생)선생님입니다. 처음에 학원 수강을 하러가니 너는 남자이니 민요보다는 악기를 배우면 어떠냐고 권하셨으나 저는 민요를 배우겠다고 며칠동안 고집을 피웠습니다.2003년부터 사단법인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이전에는 영남민요보존회를 이끄시다가 영천아리랑전국경연대회와 대구아리랑전국아리랑경연대회를 주최주관하고 계십니다. 정신적 저의 멘토이자, 소리 인생의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항상 뒤에서 앞에서 응원해 주시고. 언제부터인지 칭찬을 아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도소리를 가르쳐 주신 분은 김광숙 선생님이십니다. Q. 대구 예술인으로만 구성된 '곽동현과 슈퍼밴드’에 대해 소개 해주세요. A. ‘곽동현과 슈퍼밴드’ 는 민요와 밴드의 결합을 시도한 밴드로서, 국악기와 서양악기와의 배합으로 편성하여 모던 감성과 한국민요의 재해석을 통해 다양한 음악적 레파토리로 젊은층 국악 애호가와 만나고 소통하고 세상을 노래하고 있는 국악을 중심으로 만든 밴드이고, 악기는 국악타악, 가야금, 드럼, 신디, 베이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요 레파토리는 영남의 민요, 아리랑과 서도소리입니다. Q.코로나 이전에 최근 가장 큰 무대에서 부른 곡명은? 기억에 남는 무대는? A. 저의 이름을 걸고 나간 무대입니다. 재작년과 작년에 이은 ‘곽동현 경서도잡가발표회’ 제1탄(2019년) ,제2탄(2020년)을 끝낸 것이 저 스스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내용을 정확히 이해를 해야 암기가 되기 때문에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영화(적벽가)부터 보고 책을 찾아서 읽고, 내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보는 상상력을 동원시켜서 전체 기승전결을 스톨리텔링으로 각인시켜가며 연습을 하니 저절로 외워지게 되더군요. 조조를 통해 인생을 새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Q.코로나19 이후 어떻게 국악활동을 하고 있나요? A. 관객을 대면하는 공연에서 비대면으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신명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대면 공연을 통해 관객을 바라보고 선 무대보다도, 저 자신을 바라보고 부른 무대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많은 후배들이 어렵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비대면 공연활동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데. 저에게는 경제적 어려움보다도....리더로서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것이 가장 힘듭니다. 후배들 보기가 미안하지요. 토리스 밴드의 리더로써 많은 생각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교차되는 나날인 것 같아요. 그래도 외부활동의 저하로 시간이 많아셔저 팀원들 모두 소리공부에 열공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국악방송부터, 국악한마당. 국악 관련 방송에 집중하고 있게 되더군요. 무대에서 열창하는 국악인들의 열정과 내공에 많은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저의 창작활동의 근원이 됩니다. 올해 초부터 유뷰 채널 '곽동현'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악 애호가들이 함께 해서 많은 관심과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Q.앞으로 국악 장르 방송사에서 국악프로를 맡긴다면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싶나요? A.민요나 아리랑을 주제로 각 지역 아리랑을 소개하고 따라 부르고 해설을 하는 프로그램을 맡아보고 싶어요. 각 지역별 토리와 사투리는 알고 감상을 하면 더 재미있어요. 지역마다 특성있는 노래도 소개하고, 라듸오도 괜찮고 ,,,,,재미있는 것을 하고 싶어요. 제게는 민요가 제일 재미있는 거지만...지역의 소리와 이론을 공부한 실연자와 연구자로서 그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 민요의 맛을 전해주고 싶어요. Q.전통민요에서 퓨전국악을 향유하다가 몇 년전 ‘대구영남의 소리’같은 향토민요로 돌아가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대구사람이 지역에 있는 소리를 너무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5년 전부터 들었던거 같아요. 그때부터 경상도 지역의 민요와 옛 토속소리를 찾아가 채록하고, 무대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방송에서 마을을 찾아가는 리포터로 활동하게 되면서 더욱 굳어졌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지역 민요컨텐츠를 많이 살려야 되겠다구요. 실기와 이론을 갖춘 민요 연구자 곽동현 박사 Q. 경기민요.서도민요.남도잡가.제주민요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는데, 왜 영남민요는 지정이 안되는 건지 문제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아이러니컬하게 근대 조선의 민요학자들은 거의 영남 출신들입니다. 김사엽선생부터.... 연구자 입장에서 이에 대해 논의를 하고 싶습니다. A. 첫째는 아마도 근대가 시작되는 일제강점기 영남에서 국악 스타가 나오지 않아서 그런것 같습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줄지어 들어와서 계보가 만들어지고 전문예인집단이 형성되어야하는데.......예를 들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판소리를 들 수 있습니다. 한말 판소리가 널리 향유되고 1930년대 근대매체 음반과 방송을 통해. 경성방송국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전국에서 제자가 되겠다고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스타가 먼저 나와야 특수전문 예인집단이 형성되고 나서야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영남민요는 전공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지 못한 영남민요는 예능보유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구 지역을 예를 들면 아마도 전국에서 민요학원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모두 경기민요를 가르치는 학원이죠. 학원을 내려면 경기민요나 서도민요 전수나 이수를 받아야 검증이 되거든요. 저 역시 영남민요를 배우다가 한예종에 입학해서 경기민요, 서도민요를 배우다가 서도민요로 이수를 받았습니다. Q. 그러면 각 지역 경기민요.서도민요.남도잡가.제주민요 선율의 특성은 학술적으로 언제부터 어떻게 갈라지나요? 각 지역 토리를 살피면 우리나라 민요의 토리 중 각 지방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는 토리들은 우리 역사상 존재하였던 국가의 수도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수심가토리이며, 한강이남 옛 백제땅에 존재하는 음악어법이 육자배기토리입니다. 반면에 고려시대,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와 경기도 북서부지역에 존재하던 음악어법이 반경토리이며, 조선시대 수도였던 서울지방의 대표적인 토리가 진경토리입니다. 그리고 그 분포범위가 비교적 넓은 메나리토리는 옛 신라시대 전성기의 강역 안에 널리 퍼져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각 지역의 토리가 서도소리.경기소리.육자배기토리.서우제토리가 국가무형문화재로 등극되었죠. Q. 영남민요 선율의 특성은 학술적으로 어느 토리에 속하나요? 영남민요의 음악적 특성을 살피면, 메나리토리가 가장 많은데,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신라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영남의 민요에 대한 연구 실적은 부족합니다. 특히 가장 많이 부른 유희요에 대해 음악적 관점에서 고찰한 논문도 전무한 실정이며, 영남민요의 리듬, 토리, 가창방식 등 음악적 특성 등에 관해 상세히 연구되어지지 않았습니다. 영남지역 경창대회 심사를 나가보면 경연자들 99퍼센트가 경기민요 일색입니다. 영남민요를 부르는 경연자들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민요학원에서도 경기민요 위주로 수업을 합니다. 다행히 현재 영남민요는 지역 예능보유자와 영남민요보존회(정은하), 영남민요연구회(배경숙), 경상도민요보존회(최윤영). 동부민요보존회(박수관), 경기민요 이수자들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는 매년 대구아리랑축제 축제 무대와 대구아리랑전국경연대회에서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영천과 경산에서도.... Q.영남지역에서만 불려지는 특별한 민요를 고른다면? A. 놋다리밟기노래. 옹헤야, 월월이청청. 쾌치나칭칭. ‘아부레이수나’ 줄다리기노래입니다. ‘칭칭이소리’는 경상도의 대표적인 노래로, 유희요 뿐만 아니라 농요나 어업노동요(어로요)로도 많이 부르는데. 특히 고기잡이 배가 만선으로 돌아올 때 부르는 만선 풍장소리와 논매기를 끝내고 돌아오며 부르는 논매고 오는 소리는 일노래이면서 유희요의 기능을 겸하고 있습니다.가사는 ‘칭칭이소리’ 치나 칭칭 나래/친 친친 나래((후렴) 칭칭 소리는 크고 크네 / 얼시구 절시구 잘 놀아보자 간다 간다 나는 간다 / 떨떨 거리고 나는 간다 언문에 어루하야(관문에 달빛이 어두운데) 수원이 적막한데(근심에 차서 적막한데) 초패왕은 초를 장차 / 집우 중에도 잃다 말가 삼산은 발라 청천이요(삼산반락청천외(三山半落晴天外) 이수중년에 백노주로구나(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州) 신작로 널러서 질 걷기 좋고 / 전기불 밝아서 도망개기 좋네 올베는 피어 고개가 지고 / 열무 배추는 찌들아진다 저 해는 져서 산 넘얼 가고 / 우리 부모 고향 생각 발괭이 나네 (그리워 미칠 듯하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 떨떨 거리고 나는 간다 삼산은 발라 청천이요 / 이수야 중년에 백노주로구나 "우리 배가 만선일세”와 같이 만선풍장소리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주인네 마누라 흥분이 나서 술병을 이고 춤을 추네”, "에야 디야차 도장원 났다” 등은 조기잡이배에서 부르는 만선풍장소리(배치기소리)에도 흔히 나오는 관용구입니다. "노자노자.....” 이후의 노랫말은 다양한 지역 및 갈래에서 공유되는 내용이다. 운율은 대체로 4.4조입니다. 누구나 다 따라 부를 수 있는만큼 신명이 오르는 노래입니다. 가사는 서사민요 성격이 강해서 기승전결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잃어버리지 않는,,, 각인이 되는 노래입니다. 재미있는 만큼 영남 지역마다 가사가 다양합니다. 돌아가며 부르다 보면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치나 칭칭나래~'라는 후렴이 중독성이 있어서....영남에서만 불립니다. Q.영남민요에서 가장 먼저 음반작업을 한 민요는 무엇인가요? 첫수만 불러주세요. 가사와 특성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A. 통영농요보존회가 전승하고 있는 ‘어부레이수나’와 영남아리랑보존회가 전승하는 ‘경상도아리랑’입니다. 운율은 4.4.조이고, 불러보겠습니다. 어부레이수나 어부레이수나(후렴) 저 건네 저 묵밭에 / 소도 들고 말도 든다 아해중아 말 몰어라 / 어른중아 시(소) 몰어라 남갑사 붕어댕기 / 펄렁펄렁 펄럭인다 장부간장 다 녹이네 / 일천간장 다 녹는다 어부레이수나 어부레이수나(후렴) 이 빠진 데 박씨 박고 / 코 빠진 데 동곳 박고 눈 빠진 데 불콩 박고 / 귀 빠진 데 신짝 박고 머리 신데 먹칠하고 / 녹음방초 성화시야 해난 어이 수이가노 / 오동추야 긴긴달에 해는 어이 더디던고 / 건너 비탈 좁은길로 아해 하나 올라가면 / 어예 갈꼬 어예 갈꼬 한양 오백리 어예 갈꼬 / 앞산아 당겨라 뒷산아 밀어라 / 임아 임아 정든 임아 이 내 줄을 잡지 말게 / 줄 떨어지면 정 떨어진다 어부레이수나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첫째는 남녀가 함께 어울린다는 뜻이라고 현지인은 말하고. 둘째는 ‘어부레이수나’ 또는 ‘아부레이수나’는 그네가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Q. 잘 들었습니다. 저도 예천에 가서 통영농요보존회 이상휴(예능보유자)선생집에 가서 보존회 사람들이 모여서 어부레이수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반했지요. 독일의 산타첼로 그룹도 '옹혜야'와 함께 이 곡을 불렀습니다. 다른 버젼의 노래이었습니다. 감동이었습니다. 영남민요는 노래 종류도 많은데, 반려견 1200만 시대에 혹 '개'에 대한 민요가 있나요? A.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서 불리는 "개야 개야"라는 노래가 있는데 노랫말은 개야 개야 껌둥개야 / 내가 너를 밥줄 적에 배가 고파 너를 주나 / 배가 부리라 너를 주나 오밤중에 오신 손님 / 짓지 마라꼬 밥을 준다 이 곡은 밤에 몰래 찾아오는 임을 보고 짖지 말라고 개에게 밥을 주는 노랫말인데, 님을 기다리는 여인의 애절한 심정이 녹아있습니다. Q, 재미있네요. 해학성이 두드러집니다. 박사학위 논문에서 분석한 영남민요 유희요의 노랫말의 특징은 다른 지역과 어떻게 다른가요? A.제가 연구한 결과는...영남 유희요 사설의 주제는 놀이, 사랑, 자연, 계절, 세월 등이 있으며, 유희요의 속성상 ‘놀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운율은 모든 갈래에서 4.4(3.4)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며, 그 외 4.3(5.3), 3.3, 3.5, 4.3, 4.4, 5.5 등이 있습니다. 각운은 언어유희요에서 가장 많이 관찰되었는데, 그것은 언어유희요가 노랫말의 재미를 향유하는 갈래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희요의 특성은 특히 짧고 단순한 구조의 곡일수록 각운의 비중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음악적 요소는 단순화되고 노랫말의 전달력에서 잘 구현된 경우이고. 간혹 노랫말에 다른 유희요나 일노래의 노랫말이 섞인다든지, 통속민요나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섞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가창자 개인의 음악적 경험들이 집약된 결과로 보입니다. 영남의 유희요는 지역마다 다른 언어적 방언 특성, 다양한 문화를 담고 있는데, 특히 영남의 놀이문화가 녹아있습니다.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습니다. Q,국악계에서 실기와 이론을 전공한 국악인은 드문 편입니다. 특히 민요 전공자 중 남성 가창자는 희박합니다. 그래서 스승님들과 학계에서 기대가 큽니다. 앞으로 음악활동 계획은? A. 코로나로 인해 외부활동이 줄어들게 되면서. 음반작업에 주력하여 판소리 눈대목 중심으로 집중하여 녹음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통음악에서부터 창작음악에까지 다양한 버젼의 민요를 선보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산타첼로가 편곡한 옹헤야, 아부레수나이는 반주하는 악기에 따라서 부르는 가창자에 따라서 다른 맛을 냅니다. 편곡의 묘미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앞으로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내년에는 욕심을 내서 경기잡가 완창 음반을 내는 것입니다. 경기잡가 12곡 완창. 서도잡가 12곡 완창....매일 잘때마다 사설집을 숙독하고 배게밑에 비고 잡니다. Q. ‘국악아카펠라 토리스’와 ‘곽동현과 슈퍼밴드’ 리더로서 앞으로 국악발전을 위한 계획은 무엇인가요? 구체적으로 답해주세요. A. 대구에서 활동하는 드럼 김민건, 베이스 한태웅, 건반 이지민, 타악 신재승. 아티스트로 구성된 '곽동현과 슈퍼밴드'는 역시나 대구 영남의 소리중 평소 작업을 해보고 싶었던 토속민요를 중심으로 현대화 하는 작업을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판소리 흥보가, '박타는 대목 시리렁실근'은 제가 편곡한 첫 작품입니다. 그리고 코로나로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 작사작곡하고 있는 ‘으랏차차 아리랑’을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대해주세요. 계획은 많지만 실천하기가 어렵더라구요. 토리스는 꾸준하게 앨범작업과 공연활동을 하고 있구요. 요즘은 유튜브 영상컨텐츠 개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민요나 판소리를 아카펠라로 편곡하는 작업을 꾸준하게 할 생각입니다. Q. 최근에 자극을 준 국악음악이나 소개하고 싶은 곡은? A. 작년에 알려진 이날치의 '범내려온다'는 중격이었습니다. 전세계인에게 우리 판소리를 강하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국악의 무궁무궁한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국악이란 장르를 새롭게 인식시켜주었어요. 신선하고 중독성있는 판소리 버젼으로 코로나를 이기고 있습니다. Q, 저도 자꾸만 보게 되더군요. 우리 민요의 신명성을 높이 평가하고. 옹헤야 같은 민요를 편곡으로 재편성하여 유럽인들에게 널리 불렀던 독일 산타첼로 그룹이 한국에 왔다면 들려주고 싶은 소리는? A. 산타첼로에게 긴아리랑과 구아리랑. 창부타령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향유하는,,, 민요에 담긴 정서를... 맛깔나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곽동현이 국악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통해, 국악이 진화해 가는 모습을 멀리서 년년이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구비전승되는 문화는 사승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승이 끌어주고 도반이 밀어주고 당겨주어야만 높는 언덕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예술의 '예'는 '인간 예'라고 한다. 예술집단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아야 머리에 별이라는 훈장을 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스승이나 제자나 마찬가지이다. 제자들이 떠 받을어주어야 사후에도 기념사업회가 생기고 제자들의 계보가 단단해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매년 없어지는 무형문화유산 도 단위에서 한 두개가 아니다. 전승하는 제자들이 없어서 있는 것도 못 지키게 되는 것이다. 무형문화유산를 전승하는 국악인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그만큼 희생과 고난을 겪어야 하는 험난한 각고의 노력없이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30여 년을 올곧게 예인의 길만 고집한, 이제 떠오르려는 비상의 날개를 단 곽동현 국악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명창의 반열에 오르기를 기대하며....
-
[KBS 국악한마당] 생명력 넘치는 '삶의 노래, 땅의 노래'지난 3일(토) 방송된 KBS1 국악한마당에서 ‘삶의 노래, 땅의 노래’라는 주제로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민요를 재현해 내는 무대가 펼쳐졌다. 첫 무대는 ‘예천통명농요보존회(국가무형문화제 제84-2호)’가 경상도의 향토민요를 선보였다. ‘예천통명농요’는 예천군 통명리의 노동요로서 모내기와 논매기 및 다양한 형태의 8개 소리로 구성돼 있다. 영남민요의 독특한 맛이 담긴 후렴구와 힘찬 선후창으로 구성된 ‘아부레이수나’, ‘도움소 소리’, ‘캥마쿵쿵 노세’을 선보였다. 고된 농사일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 힘을 북돋으려 했던 조상들의 지혜와 멋을 보여주었다. 아부레이수나는 외국 음악가에서부터 많은 음악가들이 편곡을 해서 불려지고 있다. 논매기를 끝낸 후 잔치를 하러 마을로 돌아올 때 부르는 ‘캥마쿵쿵 노세’ 차례에서는 "KBS에 오신 손님”,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만수무강 하십시오.” 같은 즉흥적인 노랫말로 몰입을 더했는데, 무대 중앙에 두고 소 모형을 상머슴을 태운 뒤 흥겨운 농악 반주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음 무대는 전라도 지역의 향토민요 차례였다. 올해로 데뷔 25주년을 맞은 소리꾼 김용우가 스승인 조공례 명창이 불렀던 ‘남도 들노래(국가무형문화재 제51호)’를 복원, 재해석하였다. ‘남도 들노래’는 진도군 인지리의 논농사 노래로서 모찌기, 모심기, 논매기, 장원질의 4가지 노동과정을 담고 있다. 그중에서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질꼬내기’를 차례대로 소리꾼 허정승과 함께 주고받으며 불렀다. 호남 지역의 보편적인 ‘상사소리’와 다른 ‘긴상사소리’와 ‘자진상사소리’의 선율을 잘 드러내면서, 흥겨운 장단과 춤사위로 농사일의 능률을 높이고 고단함을 잊고자 했던 옛 조상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이어서 남도민요의 ‘오곡타령’으로 무대를 몸을 들썩이는 무대를 장식했다. 오곡타령은 조선 후기 유랑예인집단인 ‘초라니패’가 주로 불렀던 타령으로 ‘산타령’, ‘매화타령’, ‘방아타령’, ‘도화타령’, ‘꽃방아타령’ 등 다섯 곡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중에서 ‘방아타령‘, ’도화타령‘, ’꽃방아타령‘을 불렀다. 다음으로 김용우가 25년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채집한 뒤 현대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민요를 열창하였다. 함경도 민요의 ‘신고산타령’과 ‘궁초댕기’, 1920년대 신민요의 일종인 ‘희망가’를 클래식과 재즈 등 다양한 음악장르로 변주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꿈나무한마당’ 코너에서는 양준모 어린이(양도초등학교 6학년)가 출연하여 판소리 ‘흥보가’의 ‘돈타령’을 앳되지 않은 목소리로 불러 몰입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무대는 2020 KBS국악대상 무용상을 수상한 무용가 장인숙의 김경란류 ‘구음검무’와 ‘살풀이춤’이 장식하였다. 구음검무는 진주검무의 전통적인 형태를 바탕으로 구음 반주에 맞춰 독무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섬세한 춤사위가 돋보였다. 이어진 ‘살풀이춤’에서는 빠르게 몰아가는 자진모리장단에서 끊임없이 곡선을 그리는 수건으로 눈길을 사로잡으며 무대를 마무리했다. 남도민요, 영남민요, 함경도 민요를 동시에 감상하면서 각각 다른 멋과 흥에 빠져보는 신명나는 무대였다. 국악한마당은 매주 토요일 오후 12시 20분 KBS 1TV에서 방영되며 홈페이지에서 다시 볼 수 있다.
-
[공연리뷰] ‘얼쑤! 우리가락’ 랜선 국악 나들이 "지금, 여기"지난 27일 전주MBC ‘얼쑤! 우리가락’은 국립민속국악원이 준비한 랜선 국악 나들이 <지금, 여기>라는 주제로 안방에서 즐기는 고품격 힐링 국악을 선보였다. 국립민속국악원 단원이 출연하여 사회자와 토크 형식으로 진행 되었고, 남원의 아름다운 관광 명소에서 촬영한 영상이 방영되었다. 송윤정 ‘진도북춤’ 남원 혼불문학관에서 민중들이 즐겼던 민속예술 진도북춤이 첫 막을 열었다. 경쾌한 가락에는 신명과 흥이 어우러지고 춤사위에는 부드러운 곡선과 보이지 않는 직선이 교차한다. 처음에는 섬세하고 우아한 동작을 선보이다가 중후반에서는 점점 고조 될수록 신명이 배가 되고 흥은 곱절이 넘는다. 마무리에서는 느려지는 템포에 차분하고 부드러우며 우아한 팔의 곡선미를 드러내면서 단아한 자태로 끝을 맺는다. 관객과 하나가 되는 신명이 넘치는 무대로 부족함이 없다. 마지막 호흡을 마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무용수의 눈빛이 온라인 속 관중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진도북춤은 고 박병천 선생이 발전시키고 예술화 한 작품이다. 북을 허리에 고정시키고 양손에 북채를 들고 추는데 두레굿에서 농악으로 농악에서 춤으로 발전된 진도지역의 춤이다. 양손에 북채를 들고 추는 화려한 북장단이 특징이다. 섬세하고 우아하며 남성적이면서도 직선미와 곡선미의 조화가 뚜렷하여 예술성이 돋보이는 민속무용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김세희 정재만류 ‘살풀이춤’ 남원 서어나무숲 봄날, 엄동설한에 봄을 기다리던 나무들이 내품는 봄기운을 받으며 하아얀 버선발을 내딛는 김세희 살풀이는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한다. 당차고 야무진 얼굴에 자신감이 묻어나고 곱고 절제된 춤사위가 고고하다. 한국무용의 기본이 되는 살풀이는 나쁜 기운, 살을 푸는 무속에서 유래한 춤이다. 흰색 긴 명주 수건을 들고 맺거나 푸는 과정을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형상화한다. 애원성이 짙은 살풀이 가락에 맞춘 정중동의 절제된 춤사위가 특징이나 무용수의 다양한 감정표현과 춤선이 나타나기 때문에 예술적 정서에 따라 달라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양근영 궁중무용 ‘춘앵전’ 아담원에서는 궁중에서 선보였던 춘앵전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주로 두 팔의 움직임이 크고, 공간의 이동 범위가 넓지 않다. 사뿐한 발걸음과 크게 표현되는 두 팔의 춤사위가 조화롭고 우아하다. 후반부에서는 조금 빨라지는 장단으로 두 팔을 뒤로 하고 뒷걸음질하는 동작이 연출된다. 다시 장단이 느려지고 양 팔을 크게 벌려 좌측 회전을 여러번 하는 동작을 표현한다. 절제미가 있는 정중동 몸짓은 드넓은 공간을 휘몰아치면서 한폭의 채색화로 물들인다. 양근영의 춘앵전은 잔잔한 물가를 끼고 푸른 산새 속에 있는 듯한 평온함과 안정적이고 고아한 기품을 지녔다. 춘앵전은 1828년 순조때 효명세자 어머니의 40세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창작한 작품이다. 이른 봄날 아침에 버드나무가지에서 노래하는 꾀꼬리의 자태를 표현하는 궁중무용이다. 꽃무늬를 수놓은 작은 화문석 위에서 추는 독무로 무용수가 입은 노란색 의상은 꾀꼬리를 상징하며 앵삼이라고 부른다. 의상과 머리장식이 돋보여 화려하지만 작은 화문석 위에서 추는 춤사위로 절제미와 기품이 있는 춤이다. 임재현 가야금병창 단가 ‘추억’ 마무리는 남원이 자랑하는 금수정 무대이다. 힘이 있고 안정된 소리를 지닌 임재현은 시작부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절절하고 애끓는 감정표현에 흔들림이 없고 가야금 연주와 소리의 조화가 능수능란하다. 과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전달하고 소리가 끝났을 때도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추억’은 국창 임방울의 작창곡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고 무덤가에서 부른 노래이다. 절절한 사랑이야기로 사설과 감정이 전달되는 점이 크고, 1930년대 초반 발표 당시 전국민적으로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진행자와 실연자가 만드는 토크쇼에서 실연자가 직접 작품의 해설과 함께 뒷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서 다시 한번 국악의 예술성을 시청자들과 공유하게 해주었다. 예향의 고장, 남원의 명소와 아름다운 자연을 무대로 한 4군데 공간에서 소리와 춤으로 펼쳐진 공연은 남원의 정취와 풍류를 더해져 국악나들이 공연에 더욱 빠져들게 해주었다. 코로나에 지친 시민들의 정서를 잠시 국악의 신명과 흥으로 아우러 준 플러스국악 공연이었다.
-
[KBS 국악한마당] 소통과 공감을 자아내는 '듀오' 예인들의 국악무대지난 3월 27일(토) KBS 1TV국악한마당에서 ‘국악 듀오’라는 주제로 서로 마음이 맞는 이들이 함께 펼치는 조화로운 무대들이 펼쳐졌다. 1349회의 문을 여는 무대는 관악기 연주자 박지영, 김경식의 생황 연주였다. 빛을 찾아 자기 몸을 불태우는 나방을 우리네 삶에 빗댄 곡으로 24관 생황과 36관 생황이 주고받는 선율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었다. 시청자들에게는 낯설은 악기이지만 궁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통악기로 첫 무대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어서 소리꾼 백현호와 피아니스트 공수진의 ‘어머니 등은 잠밭이다’와 ‘장구춤’ 무대가 진행되었다. 시인 박성진의 작품에서 빌려온 노랫말을 유려한 피아노의 반주 위에 구성진 판소리 창법으로 풀어내었다. 특히 ‘장구춤’은 이미지를 음악적으로 전달하려는 독특한 기법이 쓰인 곡으로 가사에 맞춰 바뀌는 가락이 흥미로웠다. 다음 순서로 ‘U&US Project’가 균형을 이루어 가는 우리의 인생을 춤사위에 담아낸 창작무용 ‘권형’이 무대에 올랐다. 김유연과 정민근 두 무용수가 자아의 탐구와 타인과의 소통이라는 주제를 저울에 빗대어 응축되고 절제된 몸짓으로 표현하였다. 분위기를 바꾸어 몸을 들썩이게 하는 연주가 이어졌다. 월드뮤직 팀 ‘듀오벗’의 창작국악 ‘Fly’는 역동적인 장구 장단과 섬세한 가야금의 선율로 날아갈 듯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우리 옛것의 멋을 온전히 선보인 무대도 벌어졌다. 소리꾼 오단해와 서진실이 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을 펼쳤는데 고수 이우성이 이끄는 북 장단에 두 예인의 주고받는 매끄러운 호흡에서 저절로 얼쑤 소리가 났다. ‘소리꾼 박인혜 & 피아니스트 유찬미’가 열창한 창작집단 ‘희비쌍곡선’의 ‘2020, 어느 쓸쓸한 노래’ 무대가 진행되었다. 세계가 멈추어버린 코로나 상황 속에서 흘러가는 것과 멈춰버린 것에 대하여 담담하게 풀어낸 곡으로 절망 속에서 희망을 전하는 노랫말이 돋보였다. 이 날의 백미는 동서양 현악기의 조화가 인상적인 듀오 '첼로가야금'의 ‘An Unusual Cowboy’ 연주곡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첼로 연주자 김솔다니엘과 가야금 연주자 윤다영의 퓨전국악 무대였다. 서양악기 첼로의 따뜻하고 풍부한 음색과 심금을 울리는 가야금의 농현이 만나 서로 다른 것이 이루는 조화의 오묘함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전달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속무용 무대를 준비한 ‘(사)한국전통춤연구회(권영심&임현종)’의 전통무용 ‘쌍승무’까지 예인들이 조화로운 듀오 무대가 소개되었다. 고깔 속에 얼굴을 감추고 긴 장삼자락을 흩뿌리며 해탈의 경지를 표현했다. 정중동(正中動), 고요한 듯 힘찬 몸짓으로 전통무용의 춤사위로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장삼자락의 선이 어우러지는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비장미까지 공감할 수 있었다. 실제 이모와 조카 관계인 두 출연자의 호흡은 이번 공연의 주제에 도드라져 신비로움을 더하였다. 이번 회차는 각 무대의 주제뿐만 아니라 무대 간의 구성까지도 국악과 서양음악, 전통과 창작의 하모니를 보여준 '듀오'로서 오래 기억될만한 회차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국악한마당은 매주 토요일 오후 12시 20분 KBS 1TV에서 방영되며 KBS 1TV 홈페이지에서 다시 볼 수 있다.
-
‘마이더스의 손’ 세계적 바디페인팅 아티스트 김선미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PICK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네번째 인터뷰는 시각예술가 김선미 교수(서경대)이다. 3월 6일부터 19일까지 인사동 마루 아지트갤러리에서는 ‘신의 손’이라는 김선미 교수의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출판식 기념 및 사진 전시가 진행되었다. 한편 김선미 교수의 연출로 코로나 극복 기원을 하는 이색 이벤트가 인사동 거리에서 열렸다.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주제로 13일 인사동 마루 야외공연장에서 바디페인팅 포퍼먼스가 열려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김선미 아티스트를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기미양: 안녕하세요. "바디페인팅에 美치다” 출판과 전시회를 축하합니다. 이번 행사를 마치고 한마디 소감은? 김선미: 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에 미치든, 누군가에게 미치든 평생 하나에 미쳐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행복한 일입니다. 미쳐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이 좋다면 그건 신이 내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20년 코로나19로 1년 넘게 언텍트시대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지난 작품들을 정리해 이번에 첫 출판을 했습니다. 20여년간 작업한 초창기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Q: 통미분장예술연구소(統美扮裝藝術硏究所)는 어떤 목적을 가진 연구소인가요? A: 현재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이 공감하고 저항하는 목소리를 개념미술로 재해석하여 비주얼로 형상화하는 시각예술 연구소입니다. 연구 목적은 '세상을 美로 아우르다'입니다. Q: 통미라는 의미는? A:통미(統美)라는 네이밍은 우리나라 전위예술가 1세대 무세중 선생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이 세상을 밝히는 아름다움의 큰 줄기는 자연이다. ‘자연의 모든 분야를 아름다운(美) 시각으로 아우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럿을 모아 한 한 판이 되게 하는 아우르다의 사전적 의미를 확장하면 통합(統合)의 개념이 됩니다. 모든 예술장르와 소통하고 美로 아우른다. 그래서 ‘통(統)+미(美)‘라는 뜻에서 ’통미‘라고 명했습니다. Q:선생님이 추구하는 작가정신은 한마디로 무엇인가요? A: 태초에서부터 현생 인류로 연결되는 인간을 생각해 봅니다. 현대문명과는 거리가 먼 비문명인, 순수했던 인간의 영혼이 담긴 바디를 통해서 신을 닮은 ‘완벽한(Perfect) 아름다움’을 형상화 하고 싶습니다. 즉 인간의 속성, 반인반신(半神半人)중 신성성(神聖性)을 뽑아내고 싶었습니다. 영적 아름다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Q:인간의 몸에 어떻게 무엇을 표현한다는 것인지요? A:인간의 바디, '살아 있는 몸'을 화폭으로 삼아 신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우리에게 신은 바로 자연입니다. 우리의 몸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땅속에서부터 하늘까지 모든 곳에 인간과 함께하는 정령이 존재합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비추어 주는 태양, 바람도 물도 바위. 꽃 한송이 모두 정령입니다. 세상에 모든 곳에는 정령이 있습니다. 작은 조약돌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까지........ 자연계의 수많은 정령들은 우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속에서 사는 고기가 죽으면 인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살아 있는 몸에 바위, 나무, 꽃, 나비, 새. 물고기. 사과, 등을 그립니다. 우리는 오래 전 바다물 속에서 태어난 물고기에서 진화를 했습니다. 자연과 우리는 하나의 근원에서 시작된 생명체라는 점에 집중했습니다. Q: 이번 첫 출판은 어떤 내용이 정리되어 있나요? A: 1999년 가을 바디페인팅에 美쳐서 다니던 미술대학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한 달 만에 무작정 파리로 떠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쓰듯 20여 년 동안 추구하고자 한 열정들이 분기별로 담겨져 있습니다. 초기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작품들이 20여년 동안 시대와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변화한 모습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중간에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성균관 대학 박사과정도 수료했습니다. 혼자 바디페인팅을 공부하고 싶거나 수업을 진행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각예술가 입문과정 Q: 국내에서 독보적 존재인 '바디페인팅 아티스트 김선미'가 되는 과정을 소개해 주세요. A: 한 때는 ‘필받다’ ‘미치다’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난 바디페인팅이 좋아서 필 받는 대로 20년을 미쳐 살다 보니, 미용학원에 바디페인팅 수업이 생겨 가르치게 되었고, 민간자격증과 미용대회가 생겨나면서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받는 분야의 전문가로도 살았습니다. 대학원이 생겨나더니 대학이 생기고, ‘교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보다는 바디페인팅 아티스트이고 싶었습니다. 때론 바디페인팅 작업을 혼자 하는 것이 어려워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던 때도 있고, 무대에 설 수 있다면 돈을 떠나서 무조건 고고하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에이터의 길은 노력해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디란 말 그대로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입니다. 당연히 헤어스타일에서부터 발끝(발톱 색깔)까지 모두 디자인해야 합니다. 모델에게 입힐 옷을 직접 구상해서 만들고, 어느 때는 특수분장도 해야 합니다. 저에게는 건축물 이상입니다. 숨쉬고 움직이는 건축물,,,,, 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헤어와 에어브러시를 가르치면서도 난 여전히 자유로운 바디페인팅 아티스트이고 싶습니다. Q: 작가의 길을 가면서 어려운 점은? A: 외국은 크리에이티브 한 인재들을 발굴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적절한 기회도 제공해 주고 확장해갑니다. 세계는 가파르게 변해가는데, 한국은 2016년 '메이크업 국가자격증'이 실시된 이후로 급격히 크리에이티브 한 아트 메이크업과 바디페인팅 자격증 교육, 대회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과 작업하려는 동료 작가를 만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Q: 팬데믹 이전 작품전보다 오늘 작품전에서 달라진 점은? 인사동 거리에서 퍼포먼스 작품은 인상적이었습니다. A: 시대에 맞게 작품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예술은 팬데믹을 전후해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미래에는 자연과 합일해야 살 수 있기에.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각인하기 위해 신화를 소환했습니다. 대리석으로 만든 여인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피그말리온 처럼, 바디페인팅을 통해 자연의 신을 소환했고, 그것이 팬데믹 시대에 문명과 충돌하며 저항하는 모습을 퍼포먼스로 표현했습니다.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전체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Q: 이번 출판 전시회에서 뮤즈로 분한 모델은 누구인가요? 작품을 쳐다보면 이국적 이미지와 아름다운 눈동자는 잠시 신화 속 이야기로 안내되는 것 같습니다. A: 러시아에서 온 금발 미인 소녀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나의 뮤즈로 활동한지 강산이 한번 변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10년 되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한국이 좋아서 정착한 친구입니다. 김선미 작가론 Q: 예술이란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A: 예술이란 예측불허라는 자연 앞에 살아가야 하는 약한 인간이 다음 세대의 계승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 저항하며. 신에게 의탁하기 위해서 신을 찬미하는 몸짓에서 기원했습니다. 저의 예술세계는 그런 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신화에서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Q: 그래서 인간은 신화를 만들고 목적에 의해 신을 소환하기도 합니다. 선생님 작품에서는 누구나 신의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여자는 여신이 되고 남자는 남신이 되고....어떤 사람은 꽃이 되고, 유니콘이 되고 그렇게 우리는 신의 모습을 닮고 싶어 하지요. 선생님 작품은 그대로 빨려 들어가서 어느새 우리는 신화 속에서 걷게 됩니다. 전시장을 나와도 그 감동은 오래 오래 갑니다. 그런 신성한 감동은 상처 받았던 자신을 치유시키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신화에서 모티브를 찾게 된 배경은? A: 저의 작품은 신화에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신를 소환하여 인간의 몸에 숨어있는 신의 모습을 찾아서 형상화 하고자 하는 작업이지요. 문명사회를 이루기 전 공동체 사회에서, 신화는 살아있는 역사이었습니다. 자연을 경외하고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 시대는 모든 만물에는 정령이 있다고 여기면서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신이 있는 시대에서는 마을에서 굶어죽어 나가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노숙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Q: 선생님 작품을 관객의 시각에서 해석한다면. 문명의 이기 속에서 점차 빠르게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성 회복을 찾기 위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해석이 될까요? 큰 범주에서는 인공(Atificial)이 아닌 자연(Natural)을 의미하고, 작은 범주로는 문명에 의해 이기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에 저항하는 작업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문명이 정착하기 전 인류 공동체가 공유했던 '아름다운 원시성'을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느껴집니다. A: 모든 문학이나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성 회복을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누구나 마지막에는 신을 찾습니다. 누구에게는 어머니가 신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작품속에서 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Q: 21세기에 들어서 인간은 더욱 고독하고, 개인과 개인의 이기적인 관계에서 집단과 집단의 이기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욕망이 극대화하면서 자연 파괴의 결과로 코로나라는 비싼 대가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출판과 함께 공연한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퍼포먼스 연출 기획의도는 무엇인가요? A:결국 코로나라는 팬데믹도 문명의 이기라는 무기를 가진 인간의 빗나간 욕망으로 예측된 대참사입니다. 자연 파괴는 야생동물에서 가축들까지도 구제역으로 참살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지속되는 세계를 멈춘 팬데믹 상황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밝고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화려한 색상을 강조하여 "빛깔로 코로나를 보낸다”라는 의식을 표출하고자 했습니다. 이정민 무용수의 퍼포먼스, 서승아 무용가의 지신무로 코로나 극복을 간절히 표현했습니다. Q: 분장예술세계에서 김선미 작가는 국내에서 가장 활동이 두드러진 "앞장서 가는 전위예술(前衛藝術)의 중심에 선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A: 과한 평가입니다. 저는 그림과 바디페인팅 아트의 세계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돈을 벌면 미국 가서 특수분장 배우고, 세계경연대회 나가고,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캐나다, 미국, 싱가폴 중국, 몽골, 러시아 등을 다니며 바디페인팅을 하는 동료 아트스트의 작품을 보고 자극을 받고 새로운 작업을 즐기며 아티스트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Q:가장 영향을 주신 스승은 누구이신가요? A: 전위예술가 무세중 선생이십니다. 소개하면 "1937년 5월 23일 서울에서 출생하신 무세중은 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로서 1950년대부터 대학가의 저항문화였던 탈춤을 처음으로 정리하여 소개했다. 또 1969년 서울 YWCA 강당에서 공연한 ‘민족극회 남사당 제50회기념공연’은 세간에 묻혀있던 ‘남사당’이라는 민중들의 밑바닥 예술을 세상 안으로 끌어들여 선보인 장본인이다. 한국에서의 전위예술 공연은 물론 독일과 미국 체류를 통해 한국 전통예술과 서구 전위예술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등 전위예술 공연만해도 국내외에서 500여 회가 넘는다. 특히 독일에서 발표된 "제3세계 연극論(1977, Munchen 세계 자유 연극제 국제 심포지엄)”은 서구 연극인들에게조차 획기적인 논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세중 선생님은 1982년 독일에서의 귀국 후 첫 공연 작품 "反 그리고 통·막·살 (TongMagSal)”은 남북통일을 주제로 한 대표적 한국 전위예술의 전형으로 꼽힌다. 그의 전위예술의 특징은 그 이론적 틀을 한국의 전통사상과 민중예술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50년 동안의 전위예술작업을 통해 이제 저자는 한국전위예술의 이론과 사상적 배경을 텍스트화 하여 정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시도와 결과들은 그의 생활과 예술행위의 일치성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에서 증명하고 있다. 한국 전위예술의 손꼽히는 춤사위인 ‘무사위’는 선생님의 천지인 사상이 녹아낸 창작물이다." Q:앞으로 작가로서의 행보는? A: 저는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예술은 자위행위요. 다 똥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아티스트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일캠퍼스에서 사람캠퍼스로 바꾸고 '살아있는 예술'(Living Art) 해왔지만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소통하기 위해 이제 밖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메시지가 있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 분야 문화예술과 만나서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을 하고 싶습니다. 국악계를 뒤흔든, 세계적 평가를 받은 이날치 밴드와 함께 하는 바디 페인팅 아트같은....... 시각예술은 어떤 예술 장르와도 배합이 자연스럽습니다. 초대합니다. 코로나가 끝나는 날, 마스크를 벗고, 새로운 옷을 입듯, 특별한 메이크업을 하고 지인들과 함께 페스티벌을 즐기던 행복했던 그날들이 다시 오길 바랍니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여설뎐(女說傳)- 창작하는 타루의 ‘정수정전’
- 2날씨도 영웅시대를 막을순 없다<br> 임영웅 "팬들과 큰꿈 펼칠게요"
- 3토속민요의 힘, ‘일노래, 삶의 노래’
- 4'새 국악진흥법' 시행령·시행규칙 공청회 31일 개최
- 5전란 속에 피어난 춤, 김동민 일가의 춤4代가 이어준 '오래된 인연'
- 6영남의 '강태홍류 산조춤' 전승하는 보존회장 김율희
- 7"과거춤 복원해 다시 추는 기분"…김매자 '한국무용사' 재발간
- 8제10회 전국공주아리랑민요경창대회 대상 서승연 수상
- 9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5)<br> 정선아리랑
- 10日닛산서 9주년 세븐틴, 이틀간 14만명 환호<br>"후회없이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