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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명창 방일영 국악상 수상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안병훈·安秉勳)은 ‘방일영국악상’ 제13회 수상자로 경기민요 명창 이은주(李銀珠·85) 선생을 선정하고 발표했다.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회(위원장 한명희·韓明熙, 위원 박범훈·朴範薰, 윤미용·尹美容, 황병기·黃秉冀, 황준연·黃俊淵, 안숙선·安淑善)는 “이은주 선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경기민요 명창으로 수많은 연주와 녹음 활동을 통해 국악의 아름다움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독보적인 음악 세계를 바탕으로 후진 양성에 힘쓰는 등 우리 소리의 멋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적을 남기셨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1994년 제정된 방일영국악상은 해마다 국악 발전에 공로가 큰 국악인에게 수여되며,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5000만원의 상금이 주어졌다. 경기 민요 이은주 명창이 방일영 국악상을 받은 시상식장에는 제자뿐 아니라‘국악계의 명인 명창들과 지인들까지 모인 이날 시상식과 축하 공연은 흥겨운‘국악잔치’가 됐으며, “축하합니다”라는 소리에 예인(藝人)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제13회 방일영국악상 시상식이 열린 28일 오후 4시 조선일보 7층 TV스튜디오에서 수상자인 경기 명창 이은주(李銀珠·85)선생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아마도 며칠 동안은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겁니다. 건강이 남아 있는 한 소리를 들려드리는 것으로 이 귀한 상에 답례하겠습니다.”는 수상과 축하에 대한 말씀을 전한다. 뒤이은 축하 공연에서 이 명창의 제자뿐 아니라 ‘제자의 제자’까지 모여서 흥겹고 경쾌한 경기민요 가락을 전했다. 공연은 선생의 큰제자인 김금숙 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후보를 비롯해 제자 10여명이 ‘우리도 성주 모시고 태평성대를 누리리다’는 노랫가락의 가사를 ‘우리도 선생님 모시고 태평성대를 누리리다’로 바꿔 부르며 잔치의 흥을 이어갔다. 축사를 맡은 서한범 단국대 국악과 교수는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원각사에 공연을 보러 가면 졸음을 깨워주던 미모의 여류 명창이 있었다. 그의 춤과 노래에 우리는 압도당했고 경기 명창 이은주의 이름은 지금까지 가슴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사회자인 최종민 동국대 겸임교수는 “국악인들은 모두 스스로 스타라고 생각하는데 오늘 이 자리에는 너무 많은 별이 모여들어 번쩍번쩍할 정도”라고 말해 시상식장은 웃음 바다가 됐다. 시상식에는 제9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인 무형문화재 ‘배뱅잇굿’ 보유자 이은관 선생, 11회 수상자인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명예보유자 묵계월 명창, 12회 수상자인 무형문화재 대금산조 보유자 이생강 명인 등 역대 수상자와 함께 심사위원장인 한명희 전 서울시립대 교수, 심사위원인 윤미용 전 국립국악원장과 박범훈 중앙대 총장,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 황준연 서울대 교수, 안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가 참석했다. 또 김철호 국립국악원장, 이춘희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 무형문화재 ‘선소리타령’ 보유자인 황용주 선소리산타령보존회장, 무형문화재 ‘가사’ 보유자인 이양교 국립국악원 원로 사범,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김문순 조선일보 발행인, 안병훈 방일영문화재단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올해 소리 인생 70년을 맞이한 이은주 선생은 1922년 경기도 양주군 장항면 (현재 고양시 장항면)에서 태어났다. 소리에 대한 욕심이 많았으나 부친의 반대로 소리를 배울 계기가 없었으나 어머니의 도움으로 15세 되던 해 경서도명창이던 원경태 선생에게 시조, 가사, 잡가 등을 사사받았으며 1939년 인천 홍명극장 명창대회에서 대동강 물을 먹어야만 그 맛을 제대로 낸다는 평안도 민요 ‘수심가’를 불러 1등을 차지, 일약 대중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같은 해 경성방송국에 방송출연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이은주 명창은 스승으로부터 윤란이라는 이름 대신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를 지녔다’며 ’은주‘라는 이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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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가야금 산조 축제무제 문서 청강으로 흐르는 김창조의 예혼이여! 제6회 가야금 산조축제 불후의 명작인 가야금 산조를 창시, 한국음악사에 금자탑을 세운 악성 김창조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지난 13일 탄생지인 영암군민회관에서 국악계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화려하게 펼쳐졌다. 이날 군민회관에서 오후2시부터 5시까지 열린 `산조축제'는 김일태 군수를 비롯한 각급 기관단체장과 주민등 6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정회천 전북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식전행사로 인간문화재 박병천 선생이 고 김창조 선생님께 바치는 헌무-진도북춤과 인간문화재 강정숙 선생이 가야금병창을 선보였고 정회천 국립창극단장의 사회로 산조축제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준인간문화재 조통달 선생이 이미시문화서원 한명희 좌장이 쓴 `가슴적셔 심금울린 그대의 예혼!'이라는 축시를 축창하고 죽파류 가야금산조의 명인으로 가야금산조 현창사업 추진위원장인 양승희 선생이 김창조 가야금산조를 연주하여 산조의 멋을 한껏 드러내었으며 인간문화재 안숙선 선생이 흥부가중 박타는 대목으로 흥을 돋구었다. 이어 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이매방 선생이 남도 민속문화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살풀이 춤을 선보였고, 대금산조 인간문화재 이생강 선생은 심금을 울리는 대금소리로 관객을 심취케 했으며, 경기민요 인간문화재 이춘희 명창의 정선아리랑, 한오백년, 노랫가락, 창부타령은 특유의 구성진 소리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인간문화재인 양승희 선생의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 성창숙 선생의 심청가, 박종숙, 박동매 선생의 남도민요 등도 진한 감동을 남겼다. 김창조 선생의 업적과 예혼을 기리는 축제는 이렇게 국악계의 큰 별들이 대거 참여하여 성황리에 끝났다. 참석했던 많은 분들이 인간문화재 열두명의 예혼을 느끼고 신명과 흥겨움에 흠뻑 젖였다. 또한 많은 관계자들의 만족해 하는 모습이지만 기자가 바라본 하루만의 축제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사실 하루만의 축제도 아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식전행사와 기념식, 이어 2시간의 축하공연이다. 김창조 선생은 전남 영암군 회문리 세습적 율객의 집안에서 태어나 근세 민간 기악음악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데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분이다. 특히 1890년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틀을 갖춘 가야금 산조를 작곡함으로서 이 땅의 모든 산조음악의 효시가 되었으며 10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악기마다의 기악 독주곡으로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웠으며 악성으로 추앙 받고 있다.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분의 업적과 예혼을 기리는 진정한 행사라면 중앙에서 유명국악인이 몇분 내려와 당일 행사가 아닌 영암군 내부에서도 무엇가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몇푼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자의 짭은 소견을 나열하자면, 첫째 축제에 대한 자세한 보도와 참여하는 군민들에게 김창조가 누구인지!, 산조축제가 무엇인지 자세한 고지가 필요하다. 둘째, 군내 초, 중, 고 몇 개교는 가야금반이 육성되어야 하며, 김창조 선생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특히 가야금산조와 왕인박사의 고장인 영암군은 노인대학이나, 문화학교에서 국악이나 가야금을 가르쳐야 한다. 셋째, 김창조 선생을 기리는 가야금산조가를 작곡하여 병창으로 연주해야 한다. 넷째, 가야금산조의 고장으로 가야금 테마공원, 또는 가야금 모형이나 김창조 선생과 관련된 문화상품을 만들어서 상징성을 높여야 한다. 다섯째, 전국산조경연대회을 만들어서 선생의 뜻과 업적을 기리고 또한 월출산과 지역 특산물을 연계하여 축제기간을 연장하면서 자연스런게 영암군을 찾아오는 진정한 전국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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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문화예술발전 유공자문화관광부는 2006년 문화예술발전 유공자에 대한『문화훈장』서훈자와 『제38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상)』및『제14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장관상)』 수상자를 선정, 발표하였다. 올해 서훈대상자와 수상자는 전국의 문화예술단체, 지방자치단체, 언론사 및 일반국민으로부터 후보자 추천을 받아, 각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심의·선정을 거쳐 정부 공적심사위원회에서 최종 확정하였다. 문화훈장 서훈대상자는 총 28명으로, 동국대 총장이자 문학평론가 홍기삼(洪起三),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임영방(林英芳), 국악인 한명희(韓明熙), 언론인 故 이규태(李圭泰) 등 4명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하고, 시인 정진규((鄭鎭圭), 건축가 윤석우(尹錫祐), 국악인 박정자(朴貞子, 예명 : 박송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 연극원장 김우옥(金雨玉), 무용인 이흥구(李興九), 영화감독 변장호(卞張鎬), 상주문화원 전 원장 故 이만희(李晩熙), 전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리재철(李載喆), 한국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 백도웅(白道雄) 등 9명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서예가 김준섭(金準燮), 연극연출가 김태근(金兌根), 가수 강상수(姜祥秀, 예명 : 현철), 드라마 PD 이병훈(李丙勳), 정읍문화원장 임남곤(林南坤), 포항문화원 사무국장 백락구(白樂九), 도서출판 일진사 대표 이정일(李廷日) 등 7명에게 옥관문화훈장을, 사진가 서진길(徐鎭吉), 공예가 장주원(張周元), 무용인 임규흥(林圭興, 예명 : 임이조), 국극배우 김인수(金仁洙, 예명 : 김진진), 통영문화원장 김세윤(金世允), 조치원문화원장 장영(張英), 부산박물관 관장 이인숙(李仁淑), 신일기획문화(주) 대표이사 이춘화(李春和) 등 8명에게 화관문화훈장을 수여한다. 한편, 올해로 38회째가 되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자로는 문화부문 (주)열린책들 대표 홍지웅(洪池雄), 문학부문 시인 고형렬(高炯烈), 미술부문 서울대 명예교수 윤명로(尹明老), 음악부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대진(金大鎭), 연극·무용부문 극작가 이강백(李康白), 대중예술부문 영화 촬영감독 정광석(鄭光石)등 6명이고, 수상자에게는 대통령 상장과 부상으로 상금 1천만원을 각각 수여한다. 또한, 장래가 촉망되는 20~30대의 젊은 예술가들을 선정하여 ‘93년부터 시상해오고 있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의 수상자는 전통예술부문 해금연주가 강은일(姜垠一), 문학부문 소설가 홍종현(洪鍾賢, 필명:정이현), 미술부문 조각가 최우람(催우람), 음악부문 작곡가 최우정(催宇晸), 연극부문 연출가 고선웅(高宣雄), 무용부문 발레리노 이원철(李元澈), 영화부문 감독 정윤철(鄭胤澈), 대중예술부문 가수 안칠현(安七炫, 예명 : 강타)등 8명이며, 수상자들에게는 문화관광부장관 상패와 부상으로 상금 5백만원을 각각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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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김창조 산조를 연주하는가?나는 왜 김창조 산조를 연주하는가? 김창조는 우리나라 근세 민간 기악 음악을 발전시킨 음악가 중 가장 큰 공적을 남긴 천재적인 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천재적인 음악 활동은 민간 기악 음악을 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발전 시킬 수 있는 넓은 길을 열어 놓았으며, 이에 의해 민간 기악 음악은 당시 시대가 요구하던 가장 능동적이며 유력한 새로운 표현 방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산조(散調)로 불리워지는 하나의 새로운 음악 형식이 김창조에 의해 개척됨으로써 성취되었다. 매년 10월이며 전남 영암군에서는 악성 김창조 선생을 업적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린다. 특히 영암이 가야금 산조의 본향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국악계의 명인 명창들의 초청하여 국악공연과 학술 세미나 등을 개최한다. 특히 올해는 선생의 산조를 이어가는 양승희, 문재숙 명인이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양승희 명인은 그동안 가야금산조현창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영암군과 가야금산조 축제을 이끌어 오고 있다. 지난 3월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인간문화재)로 인정받은 양승희(梁勝姬) 명인은 인고의 세월을 떠 올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특히 양승희 명인은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 평균 8시간 정도 연주를 해 왔다”면서 “화려한 무대 뒤에서 명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지낸 힘든 세월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도 말했다. 죽파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20년간(1970년 ~1989년) 지극하신 사랑으로 가락 가락을 전해 주시고 「유일무이한 나의 제자 승희야 나에게 계승자가 되려면 일심으로 가시발길 산(山)을 넘어 물을 건너 좌절함이 없이 지극한 긍지와 인내로 음악에 광명이 올때까지 분투 노력에 굴함이 없기를 일심으로 빌 뿐이다. 사랑하는 나의 승희 허술하게 생각치 않겠지! 죽파는 승공을 빌면서 일본 공연을 함께 마치고 1986년 9월 29일 竹坡」 이렇게 친필로 유언하시며 이 산조 음악의 가문을 지켜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하시고 1989년 79세로 타계하셨다 는 모습을 회상한다. 또한 “죽파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늘 저에게 가야금 산조를 만드신 김창조(1856~1919) 그 분이 내 친할아버지이시며,나는 할아버자의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할아버지로부터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 뒤 할아버지의 제자이신 한성기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말씀하셨다며, “저는 죽파 선생님 생전에 말씀하시던 산조음악 가문의 뿌리인 김창조 산조는 어떻게 짜여졌으며, 그 원형의 산조를 지키려고 영암군과 지금까지 왔습니다. 이젠 죽파 선생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셨던 유언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려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에는 산조 악(樂)과 학(學)의 대표단체인 가야금산조현창사업추진위원회와 (사)한국산조학회가 공동주관하여 8월 31일을 “산조의 날”로 국내의 산조 명인과 학자 및 황병기 교수, 김철호 영암군수 등 내·외빈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선포식이 열렸습니다. 이어 영암군이 가야금 산조를 만든 김창조 선생의 생가를 중심으로 1만 평 부지에 ‘가야금 테마파크'를 조성하면서 저를 고문으로 위촉했으며, 2008년 완공을 목표로 합니다. 여기에는 가야금 테마파크와 김창조·김죽파 기념관, 국악공연장, 음악박물관, 수련실 등으로 구성됩니다. 앞으로도 제 삶의 중심은 가야금의 맥을 지키는 일과 스승에게 받은 예술혼을 꽃피우는 것 입니다. 이번에 개최하는 산조축제에 많은 분들이 오셨으며, 합니다”는 말을 전했다. 오는 10월 13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영암군 군민회관에서 개최되는 축제에는 이매방, 박병천, 이영희, 성창순, 이생강, 이춘희, 조통달, 안숙선, 강정숙, 정화영, 박종숙, 박동매 국악계의 별들과 한명희, 정회천, 김해숙 교수 등 국학계의 명인들이 대거 참여, 김창조 선생의 업적과 예혼을 기리게 된다. 영암군과 가야금산조 현창사업추진위원회(이사장 양승희)가 주최하는 이날 행사는 문화관광부, 전라남도 이 후원하며 김일태 영암군수, 유선호 국회의원, 신락현 영암군의회 의장 등이 기념사와 환영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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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음악큰잔치 -7월 28~29일 몽골서나라음악큰잔치 7월28~29일 몽골서 지난해 사할린·베트남 공연에 이어 올해 3번째를 맞는 나라음악큰잔치(옛 국악축전) 국외공연이 7월28~29일 몽골 울란바토르 복드산, 국립공원 테를찌, 몽골오페라극장 등에서 ‘초원의 영고 대회’라는 이름으로 펼쳐진다. ‘오 바이칼 흥안령! 부여여, 영고여!’라는 슬로건을 부제로 달고 있는 이번 대회의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명희(6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은 이번 행사가 중국의 팽창적 역사관에 저항하는 의미가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나라음악큰잔치는 해마다 국내 공연과 함께 국외 공연을 하도록 돼 있는데, 국외 공연을 “일회성 공연보다는 통시적 역사의식을 갖는 행사”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부여를 넘어 고구려의 민족 투혼이 살아 숨쉬는 아시아의 중앙, 광활한 몽골 대지에서 초원의 영고대회를 펼친다”는 것이다. 올해는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이 되는 해여서 문화교류의의미도 담고 있다. 100여명에 이르는 방문단의 면면도 화려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인 박병천 대불대 석좌교수,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인 안숙선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사물놀이로 유명한 김덕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전면에 나선다. 이와 함께 박명숙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전수천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가 몽골의 초원을 무용(왼쪽 사진)과 설치미술로 꾸밀 계획이다. 신경림, 김지하, 이근배, 김후란 등 시인과 소나무 연작의 사진작가 배병우씨 등 문화계 인사들도 동행한다. 한 위원장은 “상고시대에 우리는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전통이 섞여 있는, 선이 굵고 강건한 민족이었는데, 요즘엔 너무 미시적이고 왜소해졌다”며 “이런 행사를 통해 예전의 기개를 되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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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군 가야금 산조 축제무제 문서 깊고 푸른 산조의 샘, 김창조의 예혼 영암군 가야금 산조 축제 한명희 교수는 김창조의 산조음악을 이렇게 말했다. “천장(天匠)도 혀를 차는 지악(至樂)일레라 구름도 멈춰듣는 천악(天樂)일레라 그대여! 산조여! 김창조의 예혼이여!”라고 탄복하며 “가슴적셔 심금 울린 그대의 예혼을 드높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가야금의 본향 영암에서 ‘깊고 푸른 산조의 샘, 김창조의 예혼(藝魂)!’을 주제로 가야금 산조 축제가 열린다. 영암군이 주최하고 가야금산조현창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양승희)가 주관한 가운데 오는 30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영암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가야금 산조축제는 박병천, 남해성, 이생강, 신영희, 조통달, 박용호, 신규식, 임이조, 김해숙, 정회천 등 우리나라 국악계의 명인 명창들이 대거 참여하는 대표적인 산조축제로 김창조 선생의 업적과 예혼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이 될것으로 보인다. 영암군은 5년 전부터 영암 출신인 악성 김창조 선생을 기리는 ‘가야금산조축제’를 열어 왔고, 특히 금년의 제5회 가야금산조축제는 ‘산조의 날’이 선포되는 해에 개최되는 축제라 더욱 뜻 깊게 준비에 임하고 있다. 특히 레저관광형 기업도시 시범사업 유치가 확정된 시점에 개최되는 제5회 가야금산조축제를 맞이하는 영암군은 이미 축제분위기가 한창이다. 한편 지난달 24일에는 산조 악(樂)과 학(學)의 대표단체인 가야금산조현창사업추진위원회와 (사)한국산조학회가 공동주관한 제5회 산조학술회의 및 산조의 날 선포식이 국내의 산조 명인과 학자 및 김철호 영암군수 등 내·외빈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렸다. 이날 8월 31일을 “산조의 날”로 선포한 황병기 교수와 양승희 명인, 김철호 영암군수은 “우리 음악에서 산조가 차지하는 비중을 놓고 볼 때 산조의 창시자 김창조 선생의 업적에 대한 평가가 소홀했다는 국악계의 염원이 ‘산조의 날’ 선포로 결실을 맺었고, 제5회 가야금산조축제가 새로운 산조시대의 지평을 여는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산조의 날’을 선포하고 영암군은 가야금산조의 ‘본향’임을 대내외에 선포하기까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함께 해 온 양승희 씨는 “이제 조금이나마 스승 죽파 선생의 유언를 지킬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이젠 명실 공히 영암군이 가야금의 본향임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이번 제5회 가야금산조축제을 통하여 영암군만의 축제가 아닌 세계적인 축제로 승회시키는 계기로 전환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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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명창 김영임의 “경기12잡가 완창 발표회”무제 문서 경기명창 김영임의 “경기12잡가 완창 발표회” (경기12잡가음반발매 및 출간기념) 일시: 2005년 8월 28일(일) 오후 3시 장소: 국립국악원 우면당 문의 : 라이브엔터 02)2233-1755 경기명창 김영임의 “경기12잡가 완창 발표회” (경기12잡가음반발매 및 출간기념) 회심곡과 아리랑으로 잘 알려진 경기명창 김영임이 경기소리의 진수인 경기12잡가 완창 발표회를 8월 28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갖는다. 이번 ‘경기12잡가 완창 발표회'는 경기12잡가음반발매(신나라) 및 출간(민속원)기념으로 김영임명창의 새로운 소리세계와 만나는 것은 물론, 경기민요에 비해 일반인들에게 아직 친숙하지 않은 경기12잡가의 진수를 만날 수 있는 귀한 무대가 될 것이다. 경기12잡가는 앉아서 부른다 하여 12좌창이라 하며 또한 서설이 길다는 의미인 긴 잡가라 고도 한다. 가사내용은 서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총 12곡으로 유선가, 적벽가, 제비가, 소춘향가, 선유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 달거리,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로 되어 있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김영임명창은 경기12잡가의 자세한 해설과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 록 스승인 묵계월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묵계월 제도의 12잡가를 채보하여 ‘경기12잡가 사 설집(민속원)'과 심혈을 기울여 녹음 제작한 경기21잡가 음반(신나라)을 함께 출간하게 되었다. 이번 김영임의경기12잡가발표회는 12곡 전곡을 완창하므로 총 공연소요시간은 3시간이며 막과 막 사이에 사회자인 이미시 문화서원 좌장 한명희 선생님의 해설이 가미되어 경기12잡가를 이해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언제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변신을 위해 노력하는 경기명창김영임이기에 이번 경기 12잡가완창발표회 역시 많은 기대가 된다. 본 공연은 무료이며, 아래 전화번호로 미리 예약을 하면 현장에서 불편함 없이 공연을 관람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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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FM방송 편성 프로그램 개편국악FM방송 본부장에 채치성 씨 한국의 국악정체성과 문화경쟁력을 키우는 전문채널, 국악방송 2005년 봄 정기 개편은 음악방송으로서의 전문성 뿐 만 아니라 문화전문채널의 이미지를 강화했다. 삶의 시공간이 아름다워지는 한국음악 전문채널, 국악방송(서울,경기 FM 99.1MHz, 남원 일원 FM 95.9MHz)이 3월 28일(월)부터 봄 정기 프로그램 조정을 했다. 특히 이번 봄 개편에서는 새로운 방송본부장(채치성) 직제 하에서의 국악방송이 편성되었다는 점에서 새롭다. 그동안 국악방송에서 문제점으로 제기되었던 직제 개편이 획기적으로 단행되었다. 4년 전 한명희 전 원장이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국악방송은 이사장, 기획실장, 관리과장, 편성팀장 등의 직제로 구성되었다. 그중 기획실장과 관리과장을 국악원의 연구실장과 관리과장이 겸직하고 있었던 것이 김철호 이사장이 이번 개국 4주년을 맞아 겸직을 없애고, 채치성(전 편성팀장)씨를 방송본부장으로 임명하여 방송국 전반을 관장케 하였고, 그 아래 편성팀, 기획팀, 사업개발팀 등 을 두어 능동적인 조직으로 바꾼 것이다. 이번 프로그램 봄개편으로 주목받고 있는 첫번째 프로그램으로 풍부한 문화적 통찰력과 학자적 양심으로 우리시대 대표적인 문화지식인으로 꼽히는 김민수 교수(서울대 미대 디자인 학부 교수, 2005년 3월 복직)가 진행하는 “김민수의 문화사랑방”(월-금 오후 6:00-7:30)에 이목이 모아졌다. 김민수의 문화사랑방은 동서양, 근현대 문화를 아우르는 우리시대 다양한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담론하며 사회적 이슈도 담아보는 특별한 문화 프로그램을 만들다고 한다. 김민수 교수는 지난 98년 서울대 미대 역사를 조망하는 논문에서 장발, 장우성 등 친일 의혹이 있는 선배 교수들을 거론한 이유로 해직되어 만 6년 간 복직 투쟁 끝에 지난 3월 서울대 미대에 복직되었다. 해직 중에도 꾸준한 연구활동과 저술활동으로 해외 학계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패널로서 방송출연과 정기적인 기고활동 등을 통해 이미 생활 속의 문화나눔을 실천해 온 김교수가 방송의 메인 MC를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프로그램 진행과 관련, 한국음악과 문화에 대한 특별한 지향성을 가진 국악방송에 대해 평소에도 관심을 가져왔던 터라 오랜 고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통가능성을 문화예술의 우선조건으로 꼽고 있는 김민수 교수에게 “문화사랑방”의 진행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두번째로 친근하고 정감있는 목소리의 아나운서 이금희가 전하는 따뜻한 “이금희의 음악 편지”이다. 이 프로그램은 감동을 주는 에세이와 시인들의 이야기, 편안한 우리음악, 퓨전음악 등이 함께 전해진다. 셋번째는 심도있는 국악의 이해 -“국악특강”으로 풍류음악(송지원:서울대 강사), 민족음악(이용식:용인대 교수), 중국북한음악(이진원: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민속기악(김해숙: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고음반(장휘주:고음반 연구회), 굿음악(박흥주:굿음악연구소) 등 국악의 다양한 장르와 내용을 요일별로 전문가의 심도 있는 해설과 함께하는 국악특강과 우리소리의 깊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소중한 음원을 함께 만날 수 있다. 네번째는 차 한잔이 함께하는 우리시대 작은 규방 “우리마음, 우리음악”으로 ‘새로 읽는 우리고전', ‘누마루가 있는 풍경' 등 전통문화와 문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우리시대 여성을 위한 신 규방(閨房)문화를 만들어 간다. 특히 참살이와 환경, 아름다운 생활을 위한 제안 등 섬세한 실내악 위주의 선곡과 어울린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최영미 아나운서의 따스한 목소리로 함께한다. 다섯번째는 출근길 다정한 음악친구 -“창호에 드린 햇살”로 우리음악이 있는 아침 프로그램이다. 문화뉴스, 생활정보가 새롭게 단장됐다. 구영희(前 KBS 아나운서)의 섬세하고 정감있는 진행으로 밝고 정갈한 아침프로그램이다. 여섯번째는 월드뮤직 전문프로그램 “한밤의 음악누리”로 방송시간을 한 시간 확대하여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2시간 동안 동시대 문화감성과 예술정보를 폭넓게 수용하는 퓨전국악, 세계음악 전문 프로그램으로 거듭난다. 세계음악의 하나로 국악을 바라보며, ‘다름'과 ‘차이'의 수용을 통해 국악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음악을 동등하게 향유하는 고급 음악애호가를 위한 심야프로그램이다. 마지막 일곱번째는 엄마와 아이를 위한 다정한 음악친구 -“국악은 내친구”로 일요일 오후 4시에서 5시까지 박경호(전문 MC)가 진행하며, 전래동요와 창작동요, 교과서 수록 국악, 태교음악과 함께 어린이 교육의 지혜 등을 소개하여 부모들의 참여를 함께 높이는 프로그램으로 재구성하였다. 사진 : 오마이뉴스 김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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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소리 천년의 노래 '정선 아리랑'[일 시] 2005년 03월 16일 오후 7:30 ~ 9:00 [주 최] 국악신문사, 02-922-1411 [장 소] 국립국악원우면당 신나라와 아리랑연합회가 공동기획으로 발매된 바 있는 정선 토박이 김연수 가족 3대의 정선아리랑 초청공연 김순녀 1978. 2. 10. 정선여고 졸업 1979. 김병하 사사 1980. 4. 6 KBS 라디오 민요백일장 최우수상 수상(정선아리랑) 1981. 8. 20 김뻑국 예술단 입단 1981. 8. 20 (사)한국국악협회 회원 1985. 10. 6 제2회 전국민요경창대회 대상 대통령상 수상 1987. 8. 14 독립기념관 준공 전야제 MBC 출연 1988. 5. 12 제4회 세계적십자의 날 기념공연 1988. 10. 3 MBC, KBS 합동방송 88올림픽 메달선수 축하공연 1989. 4. 28 한·미 연합야전군 사령부 축하공연 1991. 8. 14 8·15 광복기념 재일교포를 위한 전국순회공연 1992. 2. 4 요코하마,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재일교포 위문공연 1992. 대한민국 육·해·공군 문선단공연 및 KBS 위문열차 출연 3년 1992. 10. 18 SBS 후원 제1회 할아버지, 할머니 합동 고희잔치 (장충체육관) 출연 1993. 8. 7 93‘ 대전엑스포 대공연장 및 대전관 3개월 공연 1994. 94‘ 국악의해 국립극장 공연 1997. 3. 1 김뻑국 예술단 주최 만담 보존회 창설기념공연 (국립극장) 1998. 세종문화회관 국악공연 2000. 10. 14 중국 심양시 조선족 동포 위문공연 8.1극장 2002. 5. 18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 공연 2002. 6. 25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공연 2003. 7. 18 운현궁 명인 명창의 밤 공연 2004. 4. 25 KBS 국악 한마당 출연 2004. 8. 15 삶의소리 천년의 노래 정선아리랑(신나라 뮤직 CD 8매 )취입 현 재 아카데미 정선아리랑 연구회 운영 1 _ 한오백년 2 _ 긴아라리 3 _ 자진아라리 4 _ 엮음아라리 _우정출연:정명자(춤의소리) 5 _ 강원도아리랑 6 _ 김옥심제정선아리랑 정선아리랑, 아라리와 춤, 경기민요, 팔도아리랑 일반적으로 아리랑을 말 할 때는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서울·경기의 본조아리랑(경 토리), 전라도의 진도아리랑(육자백이 토리), 경상도의 밀양아리랑(경상도메나리 토리)을 일러 우리나라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그리 마뜩한 규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타의 아리랑과 정선아리랑과는 동류의 하나로 병렬시키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 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이유는 소위 인지도(認知度) 또는 통속성을 제외한 어떤 경우에도 정선아리랑이 절대적인 비교 우위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선 형성 시기를 들어 보면, 밀양아리랑이 1920년대 초에, 본조아리랑이 1920년대 중반에, 진도아리랑이 1930년대 초에서나 오늘의 모습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나아가 전승체계의 견고성과 사설(4천여수)의 적층현상과 전승지의 광역성, 특히 아직도 구비문학적 현장성과 전승력이 유지되어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노래로 하여 일체감과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간과 할 수 없는 것은 세 가지 아리랑 모두는 정선아리랑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주종 또는 선후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딱히 음악학적인 결론은 아니지만 문화적으로는 무리가 없는 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정선아리랑은 모든 ‘아리랑의 아리랑’인 셈이다. 다음은 이를 계보화 한 것이다. 뫼‘아리’ ∥ 아라리 ∥ 1.강원(강릉)자진아라리(북한강계) - 강원도(인제)아리랑 2.강원(정선)긴아라리(남한강계) - 중원아라성 - 한오백년 - 강원(정선)엮음아라리 ∥ 3. 경기긴아리랑 4. 경기자진아리랑(H·B. 헐버트·이상준 채보) ∥ 주제가‘아리랑’→본조아리랑(신·서울·경기아리랑) 정선군이 17판을 거듭 펴낸《정선아리랑》과 최근 성균관대학교 김시업교수가 펴낸 조사보고서 《정선의 아라리》에 수록된 사설 3천여수에는 여타 아리랑 사설의 많은 부분이 동일형 또는 변이형으로 나타나고 있어 사설면에서도 정선아리랑은 ‘모천(母川)의 노래’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모든 대상을 수용하는 ‘열린 소리’로 시공의 제한 없이 뻗어가고 올 수 있게 한 것도 여기에 기인 한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때문에 가장 민중적이고 생활적인 소리인 정선아리랑에 수심(愁心)과 산수(山水)편으로 분류 할 만큼 유형화 되었다거나 다른 어떤 서정민요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한문투 사설이 하나의 유형으로 존재한다든가, 고려말의 역성혁명 같은 역사적 사실과 그에 의해 출현한 의 충절혼이 사설화 되어있는 연유도 이에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역사(歷史) 우리는 아리랑을 말 하면서 은연중에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해 오고 있다. 그 하나는 되도록 오랜 유래를 지닌 노래라고 말하려는 성향이고, 또 하나는 비장감을 부각시켜 민족사의 아픔과 함께 하여온 노래임을 말하려는 성향 이 그것이다. 전자는 기원설의 역사주의(歷史主義)라고 말 할 수 있고, 후자는 비장지향성(悲壯指向性) 또는 역사의 원상의식(原傷意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서는 곧 정선민들이 아리랑(아라리)의 연원을 고려유신 에 기대어 오고, 그 어원(語源)을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나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疼痛說)라고 인식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정선군에서 공시(公示)하고 있는 역사는 역시 려말선초의 고려유신들, 특히 정선 서운산(瑞雲山)에 은거했던 이들과의 관련 전설에 근거한다. 즉, “처음 불리어지기 시작된 것은-(중략)- 불사이군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송도에서 은신하다가 정선으로 옮기어 일생동안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님을 사모하고 충절을 맹세하며 입지시절의 회상과 가족과 고향의 그리움에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을 읊은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 때의 선비들은 이러한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 지고 있는 아리랑의 가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일부이기는 하지만 정선인들이 자부심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래서 “눈이 올라나···”와 같은 연관되는 사설을 첫 소리로 앞세워 부르고, 한문투 사설들을 수용하는 특징을 보이게 되었다. 굳이 말 한다면 이는 전설(傳說)이다. 그래서 존중되어야 하지만 이는 시원(始原)을 이루었다기 보다는 이미 있어온 소리에 그들의 회한(悔恨)이 사설로 수용되어 공동체에 연대감을 촉발시켜 전승에 기여했을 수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어원(語源) 강원도 음악 문법의 기층성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메나리’나 ‘아라리’의 존재와 ‘메나리토리’란 말에서 이 대두되었다. 이 설은 산(山)의 우리말 ‘뫼’와 ‘소리’ 또는 ‘노래’의 의미인 ‘아리’가 결합한 것으로 산악인의 원초성을 지닌 신호 또는 언어이면서 또한 음악인 산소리 ‘메+아리’가 ‘아리’만 확대되어 3음절의 ‘아라리’로 되고, 이에서 다시 ‘ㅇ’음이 첨가되어 ‘아리랑’으로 확대·변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정선 지역민들이 외견상으로는 표출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수용하고 있다고 본다. 은 앞에서 살핀 기원설의 하나인 과 상통되는 설이다. 이는 정선 지역에서 유일하게 공시(公示)된 설인데, 1977년 정선읍 비봉산에 세워진 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구체화 되어 있다. 즉 “본래는 아라리라고 일컫던 것이 세월이 흘러감에 어느새 보편적인「아리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아리랑이란 누가 나의 처지와 심정을「알리」에서 연유된 듯 하더라”라고 되어 있고, 교육자료 “원로들은 아리랑이 아니라 아라리라고 강조한다. ‘누가 나의 이 억울한 심정을 알리오, 알아주소서.’라는 뜻”이라는 것에 근거한 것이다. 으로 변해왔음을 말 한 것이다. 이는 여말선초의 변혁기 역성혁명에 항거했던 절의파 구성원을 총칭하는 의 처지를 염두에 둔 주장이기도 하다. 사실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며 비통하게 애소 할 그릅은 우리 역사에서 이들을 제외 하고는 내세우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말 상황이 지역 문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이들이 남긴 시문, 특히 누구보다도 정선에 연고가 깊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시에서 ‘누가 알리오’라는 뜻의 ‘수지’(誰知)를 쓰는 시가 유독 많다는 사실에서 주목할 만한 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다면 이 두 가지 어원설은 어문학적인 논의를 떠나 정서적으로는 매유 공감하는 바이고, 결과적으로는 정선아리랑을 이해하는데 유용하다고 보게 된다. ◎ 10대 특징 ① 창곡 중심이 아니라 사설 중심이다. 창곡은 원초성을 유지, 변화가 거의 없고 사설은 시대마다 확대되어 뚜렷한 적층현상을 보인다. 창에 대한 부담이 적어 자신의 심사를 표출하려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데에 안성마춤이기 때문이다. ② 단일 민요로는 물론, 전 구비문학 자료 중에 사설이 가장 방대하다. ③ 초(超)기능적이다. 기본적으로 내면을 다스리고 표출하려는, 그래서 노래 자체를 즐기려는 ‘놀이적 성격’이 내재해 있음은 물론 지극히 생활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④ 음악적 형태나 사설의 구조상 원초성과 토착성이 유지되어 있다. ⑤ 한문투(漢詩形) 사설이 유형형화 되어 있다. 이는 과 의 한 배경으로 볼 수 있고, 이로서 ‘정선’아라리로 특화 된다. ⑥ 구비문학적 현장성과 전승력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거의 유일한 민속음악이다. 또한 음악 공동체가 아직 존속되어있어 정체성과 통합성이 유지 되고 있다. 그래서 지역민들이 정선아라리로 일체감과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 ⑦ 전체적인 정조는 애잔함과 소박함을 특징으로 한다. 진도아리랑이 흥청거림과 신명성이, 밀양아리랑이 투박함과 남성적임이 특징인 것과 비교 되는 점이다. ⑧ 토속민요로 전승지가 가장 넓다. 강원도 전역과 경상·충청일부 그리고 경기 한강수계가 그 전승지이다. ⑨ 군(郡) 차원에서 전수·전승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군의 상징으로 까지 삼아 보존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대중매체와 인터넷을 통한 대중음악과의 접촉으로 토속민요의 전승체계가 급격히 위축되어 가는 현실에서 바람직한 방안일 수 있다. ⑩ 40여년 간 군 차원의 보존·발굴 상황이 축척된 가집(歌集)을 갖고 있다. 바로 1968년 이후 17판을 거듭해 온《정선아리랑》인데, 공식적으로 증보·축차 되고 있는 것으로는 독보적인 가집이다. ◎ 가창 양식 정선아리랑이 본질적으로는 사설 중심이라는 것은 가창양식에서도 확인이 된다. 다시 말하면 비교적 느리게 부르는 ‘긴소리’, 빠르게 부르는 ‘잦은소리’, 그리고 ‘엮음소리’는 성음의 세련미나 예능의 유무에 의해 변조(變調) 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사설 표출 능력과 그 효율성을 위해 확대된 것이라고 본다. 이는 1960년대 강릉·삼척·정선 등지에서 녹음된 자료를 통해 볼 때 ‘레·도·라·미·솔’의 메나리토리 5음계와 3소박 6박자라는 구성상의 변화는 거의 없고, 사설의 확대 폭이 훨씬 크고, 사설의 적층현상으로 지역적 차이가 변별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이 된다. 딱히 이러한 정선아리랑의 속성 때문만은 아니지만 정선아리랑은 다른 민요처럼 서양 기보(記譜)로 규정화 하기는 쉽지가 않다. ◎ 아라리 긴소리-이는 일반적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창자마다 차이가 있으나 세마치장단으로 악절과 마디와 같은 기본 틀에서는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를 오선보화 하면 9/8박자이다. 잦은소리-긴소리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긴소리’에 비해 빠르고 물박장단이나 젓가락장단에 어울리고, 드물게는 후렴을 절마다 넣어 선후창으로 부르기도 한다. 독립적으로 불려지기 보다는 ‘엮음소리’와 같이 ‘긴소리’에 이어 불려진다. 엮음소리-긴소리가 불려지는 중간에 또는 끝에 한 두 편이 불려진다. 2박·3박·4박의 불규칙한 박자로 역어나가다가 뒷부분을 늘어트려 맺는다. 그러나 “시간적인 질서와 음악적인 질서에 규제를 받지 않고 거의 동일한 음으로 단조롭게 이어”가다 ‘긴소리’로 되돌아오는 형식이다. 이는 사설측면에서는 확장현상이고, 음악측면에서는 변조형태 이다. 창민요에서 ‘복는형’ 또는 ‘사설형’이라고도 하는데. 3·4조 내지 4·4조의 율조에 맞춰 빠르게 부르는데 맞게 되었다. 그래서 엮음형으로의 변화는 해학성과 율조성이 표현기법상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사설의 확장 부분과 악곡의 엮음 부분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연행상황은 주로 호기 있고 개방적인 남자들이 부르는 예가 많다. 이런 점에서 일부 창민요에서 볼 수 있는 ‘잦은’과는 다르게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외지의 전문 소리꾼에 의해 변조된 것으로 주장하나 사설의 확장을 정선아리랑의 속성으로 보는 측면에서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후렴-정선아리랑에서의 후렴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경복궁 중수(1865~1872) 이후에 삽입된 것이라는 주장이나 본래적으로 덧붙임(addition)의 기능일 뿐이라는 논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60년대 녹음된 자료들에서 추정되는 바에 따르면 어떤 시점에선가 하나의 사설(각편)로 쓰이다가 1930년대 쯤 아리랑의 전국적인 두각으로 영향을 받아 후렴으로 정착 되었다고 보게 된다. 그 근거는 현지민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고, 후렴의 악곡이 본사의 악곡과 동일하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 한오백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불복하여 정선·원주·여주·삼척 일대에 은거한 목은 이 색을 위시한 고려유신들이, 고려(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34대)가 5백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망하게 한 이성계를 원망하여 지은 시에 연유했다는 전설이 담긴 소리이다. 이것이 일제시대 때 편곡되어 신민요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40년대에는 유행가로 불리고, 70년대 와서는 가요로 불려지는 소리이다. 전문 소리꾼에 의해 불려지는 것은 장식음이 많고 고음으로 질러내는 기교가 요구되는 소리로 메나리 선법이 짙다. 곡명은 후렴구에서 유래하며 정선 지역 설화에서는 고려유신들이 고려가 5백년을 채우지 못하고 망 한 것을 표현 한 것이라고 한다. 곡 전체의 분위기는 애처롭다. 미·라·도의 주요 음과 솔·레의 경과음으로 구성되며, 미로 시작하여 라로 끝난다. 장단은 느린 중모리, 전체적으로는 낮은 음으로 부르며, 특히 낮은 음역에서 시작하는 후렴구와 한 옥타브 높은 음역에서 시작하는 본 마루의 대비가 이 민요의 매력이다. 다른 아리랑과 같이 후렴을 먼저 부른다. ◎ 강원도아리랑 원래는 언모리와 비슷한 장단에 메나리토리로 된 강원도 자진아리랑에 연원을 두고 있으나 일제시대 음반화 하면서 경토리로 되어 토속성을 상실, 통속민요가 되었다. 1920년대 초부터 발매된 S·P 음반 중에서도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이상준의 1921년《신찬속곡집》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1900년대 초에 잡가로 널리 불렸음을 추정케 한다. 선율은 간결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주고 가사에 나타나는 몇몇 단어는 강렬한 이미지로 듣는 이의 가슴을 울려주기도 한다.(한명희) 다음의 사설은 이옥화가 부른 소리의 사설로 리갈(C198)에 수록된 것이다. 각 마루마다 후렴을 달리하고 있다. 뒤의 사설은 소리꾼들에 의해 전승되는 사설이다. ◎ s김옥심제 정선아리랑 강원도 민요 중 백미로 꼽히며 예술작품으로 까지 평가를 받는 아리랑이다.(이혜구·한만영) 1948년 처음 김옥심에 의해 불려지게 된 것으로 알려져 오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1948년 강원도 순회공여 중 정선지역 공연에서 정선아라리를 듣고, 이창배가 이를 ‘무대소리’ 엮어보자며 구성해서, 그 해 김옥심에게 부르게 했다(한성자 증언)는 설이고, 또 하나는 김옥심이 구성하여 이창배 앞에서 불러보자 “그 소리 괜잖구먼”이라고 하여, 그 뒤로 김옥심이 무대에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이춘희·이호연·김영임도 유사하게 이해하고 있다.) 어쨌든 이 소리는 강원도에서 불려진 것이 서울로 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해방 후 이창배와 김옥심에 의해 불려진 것만은 분명하다. 첫 부분은 엮음으로 사설을 주어 섬기고, 둘째 부분은 느린 한배로 나오는데, 여기부터 세마치 장단을 근간으로 늘였다 줄였다 한다. 셋째 부분은 후렴구로 대개 합창으로 받지 않고 독창으로 받는 특징이 있다. 전승 사설은 담음 세 가지이나 문헌 사설은 상당히 많다. 또한 정선의 아리리 중 엮음의 앞 사설은 모두 이 아리랑의 사설로 전환되어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이 아리랑은 긴아리랑과 함께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경기소리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여 일반화 되지 못해 전승이 단절 위기에 있다. 주목해야 할 상황이다. ‘후렴-사설-소리’로 구성되었고, 한오백년과 함께 주요음과 꾸밈음이 같다. 이 두 가지는 음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특히 설화상으로도 정선아리랑에서 분화되었음이 분명하여 이번에 김순녀를 통해 수록했다. 특히 한오백년은 정선아리랑 사설이지만 한문투여서 잘 불리지 않는 사설들을 가락에 얹었다. ◎ 김순녀의 전승체계 세계가 우리 음악을 주목하는 이유의 하나는 민속음악의 견고한 전승체계와 그것이 현장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세계 유네스코가 을 제정한 것이나 판소리를 으로 선정한 것도 그래서 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아리랑, 특히 정선아리랑의 전승체계는 우리 스스로에게나 세계에서 주묵 할만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음반의 주안점을 바로 이 같은 정선아리랑의 전승체계를 반영하는 것과 문헌 속에만 있는 사설을 되살려 내는데 두게 되었다. 이는 정선아리랑의 중요한 특징이며 속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전수·전승체계를 관찰 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과정에서 정선군 정선읍 덕송2리(송오리)에서 5대째 살아오고 있는 김연수 가계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가계는 동네 소리꾼이셨던 남효자 할머니가 88년 작고하기 전까지 아들(김연수)과 딸(김옥자)과 손녀 넷에게 자연스럽게 소리를 전해주어 정서적 기반을 형성케 했고, 3대(1대 4, 2대 4, 3대, 2명)의 소리 층위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장녀 순녀와 차녀 순덕 자매가 20대에 여러 경창대회에서 수상을 할 만큼 재능을 갖고 있고 언니는 서울에서, 동생은 고향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 적격으로 보게 되었다. 특히 언니는 유일한 강원도 출신 국악인으로 경기소리제로, 동생은 고향에서 전통적인 메나리제로 소리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순녀는 양식적 경계가 희박 해져가는 시대적 상황에서 ‘퓨젼’ 또는 ‘크로스오버’를 대비해야 한다고 볼 때, 정체성을 갖고 경기소리제로 서울에서 정선아리랑을 부르고 있는 사실은 매우 이채로웠다. 해방직후 김옥심이 정선아리랑을 경기소리제로 불러 “민요라기보다는 예술음악”(이혜구)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정선아리랑의 성가를 높였듯이 ‘제2의 김옥심’으로 성장과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보배롭다 하겠다. 그리고 동생 순덕은 사투리를 유지하고 기능에 것 넘지 않는 평균적인 성음의 소유로 교수자로 적합하며, 음량이 탁월하여 장시간의 사설치레가 가능하다는 점이 돋보였다. 이번 음반에서는 가족 내 세대별 전승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3차에 걸쳐 가족 10인을 대상으로 녹음을 했다. 이 중에 두 자매를 제외하고는 현지에서 단 한 차례 자연스럽게 녹음을 하여 즐겨 부르는 사설과 꾸밈음의 차이 그리고 같은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가를 확인 하고자 했다. 그런데 어머니(순녀 중심)와 이모보다 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딸 넷 모두가 나름의 소리를 갖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이 가계의 기질은 모계적임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이 가계를 중심으로 한 전승 체계는 10년 단위로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매를 중심으로 한 김연수 가계(家系)는 매우 이채롭다. 남효자(할머니·1899~1988) ↓ 김연수(71) + 전인식(74) 옥자(75) ↓ 귀봉(64) 순녀 순덕 + 김동수 순이 ↓ 순여 상근 상아 ◎ 김순녀(순영) 깁병하(예능보유자)·김진환(김뻑꾹예술단장)· 안비취(경기명창) 사사 1978년 정선여고 졸업 1980년 KBS 민요백일장 최우수상 수상(정선아리랑) 1981년 서울로 이주, 입단, 국악협회 정회원 1985년 제2회 민요경창대회 대통령상 수상(정선아리랑) 2002년 월드컵 기념 공연 출연 ◎ 사설의 주요 내용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창밖은 삼경인데 보슬비가 오고요/ 우리둘의 먹은마음은 두사람만이 안다 정선아리랑에서 ‘바로 그 것’으로 인식되어 불려지는 대표적인 사설이 공동체의 생활 경험과는 동떨어진 첫 번째 사설이다. 정선아리랑 ‘제 일절’로 지칭 할만한데, 어떤 노래에서든 제 일절로 불려지는 데는 그 나름의 배경이 있다고 본다. 이는 고려말 이성계 중심의 역성혁명이라는 역사적 체험을 일상의 체험보다 중요하게 받아드린 특별한 계기에서 연유 한 것이다. 이 같은 사설은 전체적으로 소수이지만 정선아리랑의 정체성, 역사와 어원을 파악하는 데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사설들이다. 이 의 일부를 김순녀가 부른 에서 소리화 했다. *한치뒷산에 곤드레 딱주기 님에맛만 같다면/ 올같은 흉년에도 봄살아 나지 *니나 내나 한번 여차 죽어지면 겉매끼 일곱매끼 속매끼 일곱매끼 이칠이 십사 열네 매끼 찔끈 짤끈 꽁꽁묶어 초롱불아 불밝혀라/ 상두꾼아 발맞춰라 어하넘차 떠들러매고 북만 산천에가 폭삭 썩을 인생들 남듣기 싫은 소리는 부디 하지 맙시다 정선아리랑을 ‘삶의 소리’라고 말하는 배경이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사를 노래하는 사설이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많고 내용상으로도 비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애와 고부간의 갈등 같은 가족 관계에서부터 산간농가의 의식주와 관련한 소박한 일상사 까지 다양한 화자에 의해 표출된다. 특히 산간민들만의 화전생활상의 궁핍상과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는 곤두래와 딱주기 산나물로 보리고개를 넘겼던 사연 등 산속(山俗)이 그대로 노래되고 있다. 그런데 정선민들은 이러한 곤궁한 생활을 결코 부정하거나 도피하려 하지 않는 긍정적인 심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정선아리랑을 ‘사랑의 노래’라고 하기도 한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 주게/ 싸리골 올동 박이 다떨어 진다 *정선읍내 물래방아는 사시장철 물살을 안고 빙글빙글 도는데/ 우리집에 저 멍텅구리는 날 안고 돌줄모르나 남녀간의 사랑과 질시 그리고 봉건시대의 악폐로 꼽히는 조혼 문제, 이로 인한 성적 갈등도 희화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주로 여성이 화자일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아우라지 처녀 사연의 사설은 산간 처녀 총각의 애뜻한 정한을 담고 있다. 또한 딱따구리의 강한 부리를 대비하여 조로(早老)한 남편의 성적 무능을 나무라는 우의적인 사설도 원망이기 보다는 간절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때 여기에 포함된다. 이점에서 같은 성애를 그렸다 해도 진도아리랑의 대담하고 질박농탕한 성애의 묘사와는 다른 것이다. *이웃집은 다문다문 山은 울울창창/ 山水좋고 人心좋아서 무릉도원일세 *몰운대 방석에는 신선이 놀던 곳이요/ 층대 밑에 맑은 폭포 금상첨화 이루네 생활 주변의 자연경관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사설들인데, 기암절벽·약수·꽃 등을 그린 것으로 극소수이지만 과 중복되기도 한다. 이는 공동체의 체험에서 그려진 것이기 보다는 외부인의 시각에서 그려진 것이라고 본다. 정선지역민들에게 있어서 주변 자연물은 오히려 생활의 장애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선에서 ‘무릉도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만큼 척박한 사정임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참고문헌과 각주 생략) *정선사십리 발구덕십리에 삼산 한치인데/ 의병난리가 났을때도 피난지로다 *사발그릇이 깨어지면은 두 세조각이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은 한덩이로 뭉친다. 내용상으로는 고려말 격변의 상황으로부터 근대사 까지, 특히 일제강점기 저항적 의식이 표출된 사설들을 말 한다. 아마도 단일 민요에서 우리의 전 역사를 노래한 경우는, 그것도 거의 저항적인 의식으로 노래되기는 정선아리랑이 유일하다고 본다. 이 속성 역시 정선아리랑의 정체성의 한 단면인데, 려말선초(麗末鮮初) 격변의 역사상황을 각별하게 받아드린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위의 첫 번째 사설은 구한말 의병전쟁의 한 거점이 정선이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 사설은 남북 분단상을 생활어로 표출한 것이다. 이렇게 정선아리랑은 국가적 상황을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로 표출, 관념이 아닌 체험으로 구체화 하고 있다. 그래서 정선아리랑을 ‘역사의 노래’라고 말하게 된다. 이번 김순녀의 발표를 통해 모든 아리랑의 시원이 정선아리랑에 있고, 한오백년·강원도아리랑·경기제정선아리랑이 정선아리랑의 전 바탕에 함께 있는 것임을 알리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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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영 국악상 유감연말이면 우리 국악계도 많은 상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서도 조선일보 방일영 국악상은 정부에서 문화의날에 기념하여 국악계 발전을 위했던 분들에게 주는 상 다음으로 꼭 받고 싶어하는 상이다. 우리 국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분들께 드리는 방일영 국악상이 지난 11월 19일 오후 5시에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화려하게 펼쳐졌으며 윤주영(尹胄榮) 방일영 문화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상패와 상금 5000만원을 받았다. 이번 영예의 대상은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묵계월 선생이 선정되어 수상했다. 경기민요계에서 처음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만큼 영광스런 상인지만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신 안비취 선생께서 수상하지 못하고 돌아 가셨다. 옛글과 서책을 가락을 짜 구성지게 낭송하는 ‘송서(誦書)’와 12잡가 등 경기민요에서 독보적 일가를 이룬 묵계월 선생은 “16세 때부터 불러온 송서의 맥이 끊길까 걱정해왔는데 유창 씨을 비롯한 제자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든든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묵 명창은 이날 그가 유일하게 맥을 잇는 송서 가운데 ‘삼설기’를 전수조교 유창 씨와 함께 풀어내고 제자들과 창부타령을 흥겹게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묵 명창은 상금의 일부를 국악협회가 주최하는 전국경서도민요 경창대회, 폐강위기에 놓인 미국 UCLA 한국음악강좌의 기금으로 보탤 뜻도 밝혔다.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회(위원장 한명희, 위원 이보형, 윤미용, 정재국, 황준연, 안숙선)는 “묵계월 선생은 경기민요, 십이잡가, 송서 등 우리 소리의 법통과 원형을 보존하고 이를 전승 발전시키는데 평생을 바친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70여년간 수 많은 무대공연과 음반취입 등을 통해 전통음악의 예술성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팔순을 넘긴 고령에도 후진양성을 위해 힘쓰는 등 국악발전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연말이면 우리 국악계도 많은 상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서도 조선일보 방일영 국악상은 정부에서 문화의 날에 기념하여 국악계 발전을 위했던 분들에게 주는 상 다음으로 꼭 받고 싶어하는 상이다. 첫째 상금 규모가 엄청난 오천만원이다. 둘째 수상식이 화려하다. 세째 수상자의 지난 경력이 기록된 보고서 같은 책이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금도 수상식도 아니다. 상금과 수상식은 돈이면 해결된다. 그러나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국악계와 학계에서 여러 명성있는 분들이 수상자와 관련되어 내놓은 평가는 중요하다. 수상자의 평생 국악 인생을 더듬어보고 그분의 생애를 기록하는 이런 상일수록 수상자나 조선일보, 또한 위촉된 심사위원들은 정확한 기록들을 내놓아야 한다. 기자의 방일영국악대상 유감은 이런면에서 아쉬웠다. 특히 영광스런 그 자리에 선생의 제자들이 다 함께 있지 못한점은 누구의 잘못을 떠나 선생께 누가 되는 자리였다. 묵계월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예능보유자로 예인의 길을 평생 걸어오신 70여년동안 우리 민요계의 큰 어른으로 이 땅의 민요의 전승과 보존을 위해 정성을 다 하셨다. 또한 경기민요가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음악이 될 수 있도록 평생을 바쳐 노력하셨다. 특히 강인한 정신력과 탁월한 예술능력은 국악인으로서 같은 길을 걸어가는 후학들에게 삶의 표본이 된다. 이런점에서 선생님을 모시는 제자들은 더욱 각성해야 된다. 묵계월 선생은 제자 복이 많은분이다. 현재 경기무형문화재 제31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로 있는 임정란 명창이 그 첫 제자이고, 지금은 고인이 된 지화자 명창이 조교로 있다가 지난 2002년 돌아 가셨다. 또한 이수자로 한국국악협회 이사로 있는 박순금 명창, 국립국악원 민속반에 있는 조경희 명창, 경기도립국악단에 있는 최근순, 최은호 명창, 김수연, 이명희, 정경숙 명창 등이 있다. 현재 전수조교로는 유창과 김영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