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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37)<br>김영숙의 '춘앵무春鶯舞' 춤사위춘앵무春鶯舞 춘앵무는1828년 순조의 욍후이자 효명세자의 모친인 순원숙왕후의 보령寶齡 40세를 축하하는 잔치인 진작進爵과 1829년 순조대왕의 보령 40세를 축하하는 잔치인 진찬進饌에서 추어진 궁중무 정재呈才이다. 이른 봄날 새롭게 물이 오른 버드나무 가지 위에서 노래하는 꾀꼬리를 무용화한 것이다. 6자길이의 작은 화문석花紋席 위에서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빛의 황초삼 일명 앵삼鶯衫을 입고 화관花冠을 쓰고 손에는 오색한삼五色汗衫을 끼고 초록혜草綠鞋를 신는다. 발디딤으로는 땅을 표현하고 한삼을 뿌려서 우주와 팔방을 표현하며 정중동靜中動의 깊이를 춤춘다. 특히 화전태花前態에서는 궁중무 중에서 살짝 미롱微弄을 하도록 허락되어진 아름다운 부분이다. 리아履雅 김영숙金英淑 국가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일무佾舞 전승교육사 (사)정재연구회 대표 (사)아악일무보존회 대표 전, 인천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전, 중국 항주사범대학교 예술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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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의 아리랑’ 공연에서 확인되는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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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등재 10주년 ‘정창관의 아리랑’ 특별공연2012년 9월 회갑기념 ‘정창관녹음집 출반 15년 기념 및 반락이야기’ 이후 10년만에 기념 공연을 연다. 공연 이름이 길다. ‘아리랑 유네스코 등재 10주년 기념 유튜브 정창관의 아리랑, 채널로 듣는 아리랑 3,600곡 수록 기념 공연’이다. 고희를 기념하는 공연인 셈이다. 공연은 3부로 이뤄진다. 1부에서는 정창관 선생이 직접 유튜브 ‘정창관의 아리랑’을 설명한다. 수집과 음원 제생과 보정 등의 과정은 물론 입수 과정과 음원 제작 국가 분류 등도 전해진다. 제2부는 2곡의 아리랑이 소개 된다. ‘미량아라니량’(밀양아리랑) 복원 연주다. 1926년 김금화의 소리에 박춘재가 장고를 맡은 음원을 복원한다. 전병훈 장구 반주에 노수현의 소리이다. 두 번째는 특별한 아리랑이다. 지난 국악신문(9월 28일자) 보도를 통해 전해진 창작 ‘1896년 정창관아리랑’ 초연이다. 정창관 편사에 전병훈 편곡이다. 최초의 인명을 곡명에 쓴 아리랑이다. 3부는 유튜브 방송을 빛낸 아리랑을 듣는다. ‘가야금 연주 아리랑연곡’은 이지안 반주에 이지영의 가야금 연주로 듣는다. ‘진도아리랑’은 경기음악연구회의 반주와 조영숙의 노래로 듣는다. ‘경기제 정선아리랑’은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가장 높은 아리랑인데, 장본인 최영숙의 소리로 듣는다. 최영숙은 서울시 무형문화제38호 '재담소리' 예능보유자이다. 약 14분 정도의 정선아리랑을 전해 준다.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린 아리랑이라고 한다. 대금 반주는 심성욱이 맡는다. 마지막 아리랑은 (사)경기음악연구회 대표 소리꾼 전병훈이 ‘나운규아리랑’과 ‘본조아리랑’을 비교하여 전해 준다. 전자는 1926년 영화 대사를 음원화 한 ‘영화설명 아리랑’에 수록된 주제가 아리랑이고, 후자는 1950년대 형성된 ‘본조아리랑’이다. 30여년 동안 어떻게 변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특별한 무대이다. 공연을 준비한 정창관 선생은 인영이 깊은 음악인들과 공연을 준비했다면서 "2018년 4월 유튜브를 올리기 시작한 이후 부지런히 음원을 찾고 보정하여 이룩한 3,600곡입니다. 이 중에는 일본인들이, 일본에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제작 발매한 아리랑 50여곡도 수록하여 나름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아리랑의 무한 세계’, ‘이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펼쳐 나가겠습니다.”라고 했다. (사)경기음악연구회, 재경창중20회, 이무성 화백, 기미양 (주)국악신문 대표, 일본 ‘후지아리랑회’, 신나라 정문교 前사장, 재경창녕향우회, 서초포럼 등의 관심과 후원으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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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36)<br> 손미영 '살풀이춤' 춤사위살풀이춤 무악(巫樂)장단에 맞추어 수건을 들고 추는 무속 계열의 민속춤이다. 살풀이춤은 살(煞) 또는 액(厄)을 예방하거나 풀기 위한 무속에서 나온 제의적 성격의 춤에서 유래한다. 즉흥적인 춤을 말하며, ‘도살풀이춤’ 또는 ‘허튼춤’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 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춤꾼은 고운 쪽머리에 비녀를 꽂고 백색의 치마 저고리를 입으며, 멋스러움과 감정을 한껏 나타내기 위해 하얀 수건을 들고 살풀이 곡에 맞추어 춤을 춘다. 지금의 살풀이춤은 경기지방과 호남지방에서 계승된 춤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 나라가 안정되고 서민문화가 활발히 전개되면서부터 광대들의 춤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굿이 금지되자, 무당들 중 일부가 집단을 만들어 춤을 다듬으면서 점차 예술적 형태를 갖추게 되어 오늘날 한국춤의 대표로 정착하였다. 살풀이춤은 살풀이 가락에 맞춰 슬픔을 환희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인간의 감정을 아름다운 춤사위로 표현하는 춤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큰 고전무용이다. 손미영 숭의여대 무용과 졸업 동아무용콩클 입상 국악한마당 협력지원 풍류예술단 지부장 풀뿌리예술회 상임위원 풀뿌리문화예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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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정창관의 아리랑’, 3600곡 수록 기념공연자타가 인정하는 ‘국악애호가’이며 아리랑 전문가인 정창관 선생이 판을 벌인다. 금년이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10년을 기념하고 유튜브 ‘정창관의 아리랑’ 3600곡 수록을 기념하는 행사다. 10월 08일 (토) 오후 5시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다. 공연인가하면 발표회이기도 하고 축하행사이기도 하다. 재경창녕향우회 재경창중 20회동기회 (주)국악신문 (사)경기음악연구회 서초포럼 출판사 무송 탑예술기회, 이렇게 후원을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우선 축하 행사이다. 2년전 이맘때 국악계에 경사가 있었다. 그동안 국악계가 말 하는 ‘공로자’라면 소리꾼 아니면 연주자, 또 아니면 연구자였다. 그런데 실제 국악의 주인인 ‘국악애호가’란 직함으로 대한민국 문화예술공로자로 훈장을 받았다. ‘화관문화훈장’ 수훈이다. 본보(2020. 10. 19)가 보도한 ‘정창관선생, 화관문화훈장’ 수상인데, 당시 코로나로 축하 행사를 갖지 못했다. 그 서운함에서 향우회와 동호인들이 기념행사를 하라고 떠 밀어 준비한 것이다. 지금은 풍속화 화가로 활동하지만 우리나라 LP음반 전성시대 기회/제작자였던 이무성 화백이 강추한 것이란 후문이 있다. 이 화백은 최근 한 모임에서 "정말 축하할 일임에도 코로나 등으로 자리를 못했다. ‘국악인’의 실질적인 주인이 ‘국악애호가’라는 사실과 이 칭호를 정부가 공식화 한 경사인데, 그냥 넘어가는 것은 않된다고 봅니다. 많은 국악애호가들에게나 정부 정책 입안자들에게 이 존재의 가치를 다시 알려야 한다고 보아 이런 행사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라고 한 바가 있다. 여기에 한 자락을 더 한다면 2021년 ‘우리가 몰랐던 국악음반 이야기’ 출판에 대한 기념이다. 역시 코로나 때문에 출판기념회를 갖지 못했다. 늦게나마 이를 축하하는 행사이다. 기념하는 공연이다. 기념할만한 일이 있다. 유튜브 채널 ‘정창관의 아리랑’이 놀랍게도 9월 28일자로 3,600곡을 올렸다. 아리랑의 음원이 이렇게나 많다는 놀라운 사실과 함께, 1,048주 동안 국악음반 연속 업로드이다. 이 역시 놀라운 사실이다. 이 중에는 일본인들이 지어 부른 아리랑이 무려 50여종이나 올려져 있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올린 일본 아리랑이 1959년 도나스판 ‘동경아리랑’이다. 일본인 기자로 한국통 구로다 가쓰히로(黒田勝弘)씨는 사이트를 방문하고 "한국사람들의 아리랑이 많다는 것은 이해할만한데, 1950년대까지 일본에서 일본인들이 부른 아리랑이 50여 종이나 된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놀랍다. 정말 연구 대상이다.”라고 하였다. 이 놀라움은 재한 일본인 여성모임으로 아리랑 전승단체로 결성된 ‘후지산 아리랑회’가 본격적인 번역 작업과 전승활동을 결심하게 하기도 하였다. 3,600종의 아리랑 음원의 존재와 ‘일본 속 아리랑’ 상황을 실증적으로 알린 유튜브 ‘정창관의 아리랑’ 3,600곡 업로드는 분명 기념할만하다. 아리랑 유네스코 등재 10주년의 의미를 더해주기 때문이다.(나운규 영화 ‘아리랑’ 개봉 100주년인 2026년 10월 1일까지 4,000곡을 업로드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창관 아리랑’의 발표가 있다. 그동안 수많은 지명(地名)을 달고 나온 아리랑이 2010년 ‘왕십리아리랑’까지 20여종이나 되지만 인명(人名)을 단 아리랑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정창관아리랑’이 나왔다. 정창관 편사, 전병훈 편곡이다. 이 첫 인명 아리랑을 처음 무대화 한다니 분명 ‘정창관아리랑’ 발표회이다. 그야말로 별조(別調) ‘정창관 아리랑’의 탄생이다. "자 그 옥동자 ‘정창관 =아리랑’을 들어 볼작시면 사설은 이러하겄다” 1. 산도 설고 물도 설네/ 누굴 바라고 여기왔나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께 방망이로 다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창관 얼-슈 아라리야 노다가세 노다가세/ 저달이 지도록 노다가세 2. 산도 설고 물도 설네/ 희망을 찾아서 여기왔나 인천 제물포 살긴 좋아도/ 왜인 등살에 못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창관 얼-슈 아라리야 노다가세 노다가세/ 저 달이 지도록 노다가세 3. 녹음방초 승화시에/ 해는 어이 더디가고 이팔청춘 청년들은/ 산에 올라 들구경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창관 얼-쓔 아라리야 노다가세 노다가세/ 저 달이 지도록 노다가세 4. 명사십리 해당화는/ 가난을 쫓어서 여기있나 한강수에 화련호는/ 이리저리로 왕래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창관 얼-쓔 아라리야 노다가세 노다가세/ 저 달이 지도록 노다가세 이 별조 ‘정창관아리랑’의 곡조와 사설에 대한 사연은 "10월 08일(토) 오후5시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직접 들어 보기로 합시다. 소리는 전병훈이 한다고 합니다. 얼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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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2020추석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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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에도 향토민요 '이담어러리타령'이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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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아리랑'....이무성 화백 그림 앞에 선 작가지난 2일 토요일 동두천시 중앙로 하나로웨딩홀에서 개최한 동두천아리랑발표회에 참석한 이무성 화백이 자신이 그린 그림(현수막 이미지) 앞에 서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59년부터 다양한 주제의 작품 활동을 해 온 원로 이무성 화백은 본지 수요 연재 ‘이무성 화백의 춤새’를 연재하고 있다. 이 화백의 '춤새'를 통해 우리 전통무용의 춤사위와 한복의 전통성과 우아미를 함께 할 수 있다. 이무성 화백은 서라벌고 미술동문전, 한일 빛전(오사카), 항일독립운동가전(도쿄 고려박물관) 등에서 주요 역사인물의 형상화에 주력하였다.또한 한글운동에도 기여하고 있다. 초대전 ‘한글28사건-그 역사를 되살리다’와 ‘한글이 세상을 바꾸다’(YTN비앤갤러리)를 통해 세종의 한글 창제 업적을 친근하게 전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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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의 詩](78): 4월의 꽃 (신달자)4월의 꽃 신달자(愼達子 1943~ ) 홀로 피는 꽃은 그저 꽃이지만 와르르 몰려 숨 넘어가듯 엉겨 피어 쌓는 저 사건 뭉치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벚꽃 철쭉들 저 집합의 무리는 그저 꽃이 아니다 우루루 몰려 몰려 뜻 맞추어 무슨 결의라도 하듯이 그래 좋다 한마음으로 왁자히 필 때까지 피어보는 서럽고 억울한 4월의 혼령들 잠시 이승에 불러 모아 한번은 화끈하게 환생의 잔치를 베풀게 하는 신이 벌이는 4월의 이벤트 추천인:이무성(화가) "아카시아 개나리 벚꽃 산수유 등꽃 진달래.... 이들에게 가면 두런두런 소곤고곤 비밀스러워 나지막하게 내는 소리들이 들린다. 그 어느 해 4월 19일 이 꽃들이 모이면 그 사연들을 끼리끼리 소곤댄다. 이번 일요일, 그들에게 귀를 대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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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8>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1> 왜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가. 세종 임금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으로 물러난 권진權軫을 불러 강녕전康寧殿 경회루慶會樓 경복궁景福宮 수리 등에 관하여 의논하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강녕전은 나만이 가질 것이 아니고 만대에 전할 침전寢殿인데 낮고 좁고 또 어두워 늙어서 이 침전에 거처하면 잔 글씨를 보기 어려워 정무를 처결할 수가 없을 것이니, 내가 고쳐 지어서 후세에 전해 주고자 하는데 어떻겠소.” "좋습니다.” 임금의 뜻에 모두들 좋다고 아뢰었다. "경회루는 영건營建한 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처마를 받친 도리가 벌써 눌리어 부러졌으니 처마 받침을 수리하고자 하는데…” 대신들은 그러면 당연히 수리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일일이 의견을 듣고자 하였던 것이다. 전사政事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집을 수리하고 짓는 일 등 모든 것을 그렇게 하였다. 그것이 세종 임금의 자세였다. 예로부터 제왕은 다 역상曆象을 중하게 여기어서 요堯임금은 희羲씨 화和씨에게 명하여 백공百工을 다스리었고 순舜임금은 선기옥형璿璣玉衡에 의거하여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였다. 그 사실을 말하고 임금은 또 의견을 물었다. "내가 간의簡儀 만드는 것을 명하여 경회루 북쪽 담 안에 대臺를 쌓고 설치하게 하였는데 사복시司僕寺 문 안에 집을 짓고 서운관書雲觀에서 번들어 숙직을 하면서 기상을 관측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역상은 해 달 별 천체가 나타내는 여러 가지 현상이다. 선기옥형은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관측하는 데 쓰던 기구이고 서운관은 조선시대 천문 역일曆日 측후測候 등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대신들은 그냥 좋습니다 옳습니다고만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학구적이고 진취적인 임금의 의지 앞에 고개가 수그러졌다. 허리까지 굽혀졌다. "너댓간 집을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희 등은 그렇게 말하였다. 계속 그렇게 찬의贊意만 표한 것은 아니었다. 장의동藏義洞에 있는 태종太宗 잠저潛邸의 옛터가 이제 더부룩한 풀밭이 되어서 차마 볼 수 없으니 다시 궁전을 지어서 부왕父王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임금이 물었을 때 모두 안 된다고 아뢰었다. 잠저는 태종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인 것 같다. "원묘原廟를 세워서 만대에 이르도록 법전法典을 정하였으니 따로 궁전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소나무나 심도록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계속 말하였다. 묻는 것이었다. "경복궁에 4대문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태조 때에 북문을 두고 목책을 설치한 것을 뒤에 막아버리고 성을 쌓았는데, 내가 다시 북문을 낼까 하는데…” "좋습니다.” "근자에 글을 올리어 지리地理를 배척하는 사람이 더러 있으나 우리 조종께서 지리로써 수도를 여기다 정하였으니 그 자손으로서 쓰지 않을 수 없소. 정인지鄭麟趾는 유학자儒學者인데 역시 지리를 쓰지 않는 것은 매우 근거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고, 나도 생각하기를 지리의 말을 쓰지 않으려면 몰라도 만일 부득이하여 쓰게 된다면 마땅히 지리의 학설을 따라야 할 것인데, 지리하는 자의 말에, 지금 경복궁 명당에 물이 없다고 하니 내가 궁성의 동서쪽과 내사복시內司僕寺의 북쪽 등 몇 곳에 못을 파고 도랑을 내어서 영제교永濟橋의 흐르는 물을 끌고자 하는데…” "좋습니다.” 위에서 물어본 것들 외에도 여러 가지를 묻고 의견을 들었는데 다 좋다고 하였다. 다만 이런 공사들을 한 목에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니 그 선후 완급을 참작하여 순차로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아뢰기도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황희 신상 등이 지리 아는 사람을 데리고 못을 팔 곳과 소나무 심을 곳을 가 보게 하라고 하였다. 위에서도 말한 지리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말하는 것이었다. "권도權蹈가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혹시 호걸이 난다면 나라의 이익이 아니다’ 하고 이 말을 ‘남에게서 들었다’ 하였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도(권도)에게 묻는 것이 어떻겠소.” 임금이 또 그렇게 의논해 묻자 모두가 그렇게 하시라고 아뢰었다. "도가 자기 생각을 가지고 말씀 올린 것이라면 비록 옳지 않더라도 묻지 않는 것이 가하지만 근거 없는 말을 남에게서 전해 듣고서 글을 올렸을 것 같으면 그 말했다는 사람을 묻는 것이 가합니다.” 그래서 권도를 불렀고 권도가 말하였다. 그 사람은 누구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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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35)<br>이유나의 '이매방류 살풀이춤' 춤사위이매방류 살풀이춤 국가무형문화재 제 97호 '살풀이춤'은 고도로 다듬어진 전형적인 기방예술(奇方藝術)로서 한(恨)과 신명(神明)을 동시에 지닌 신비한 느낌을 주는 춤이다. 특히, '이매방류 살풀이춤'은 정적미(靜寂美)의 단아(端雅)한 멋과 함께 정(情)과 한(恨)이 서린 비장미(悲壯美)가 몸에 스며있다. 이유나 일본 오사카예술대학대학원 박사(예술학) 일본 도쿠시마현 시코쿠 대학 강사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김묘선 일본 도쿠시마 전수소 대표 일반 사단법인 도쿠시마 신문사 전통무용강좌 강사 제19회 장보고 국악대전 전국경연대회 명인부 대상 국회의장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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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34)<br>성예진의 '박경랑류 교방소반춤' 춤사위박경랑류 영남 교방 소반춤 예기들의 연희놀음에서 여흥을 돋우는 신명의 춤으로 접시를 머리를 얻어놓고 기예를 부리기도 하고 접시를 빠른 음악에서는 소고를 대신하여 소품으로 사용하여 두들기며 장단을 마추어 춤사위와 함께 어우러진 춤이다. 이 춤은 전승자가 반드시 춤의 연륜이 있어야만 소화해 낼수 있는 내공을 보여 주는 춤이다. 성예진 영남교방청춤 연구.보존.계승학회부회장 국가무형문화재 제40호 '학연화 대설무' 이수자 제20회 창원국악경연대회 종합 대상(국회의장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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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33)<br>백재화의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춤사위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짧은 수건을 들고 추는 교방계열의 춤으로 경쾌한 민요에 마추어 추는 흥겨운 춤으로 버선발의 현란함이 짧은수건 움직임과 조율되어 여성적 관능미가 돋보이는 춤이다. 백재화 프로필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연구.보존. 계승하고 있다. 학회학회장 이학박사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40호 '학연화 대합설무' 이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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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32) <br> 김미자의 '영남넋풀이춤' 춤사위영남넋풀이춤 지전은 종이 돈을 의미하며 망자가 저승 갈때 들고 가는 노자돈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지전을 들고 망자의 가는 길을 편히 갈수 있도록 넋을 달래고 극락왕생 하기를 발원하며 넋을 천도할때 추는춤으로 씻김굿이나 천도재에서 많이 추어지는 춤이다. 지전을 한묶음 양손에 들고 흔들며지전의형태를 여러 모양으롲 형상을 만들어 가며 추는 춤이다. 김미자 프로필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보존회 미국.동부 협회장 국가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사자놀이' 이수자 북청사자놀이보존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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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71>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1> 앞만 보고 달렸다. 그동안 한시도 쉬지 않았다. 생각도 없이 달리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숨을 고를 때가 되었다. 되돌아보면 처음부터 이 일, 음악 업무에 종사한 것은 아니다. 박연이 세종조에 처음 맡아 본 일도 음악과 무관한 것이었다. 약재 관리에 관한 일이었다. 그후 세자 시강원 문학으로 있으면서 음률에 밝음을 인정 받았던 것이고 맹사성 유시눌 같은 예악에 조예가 깊은 고관들의 인정으로 세종의 새 예악정책과 함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 7년 박연의 나이 47세에 악학별좌에 임명되고, 음악에 대한 서적을 편찬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 일 이 때를 기점으로 음악 정리의 길, 악성의 큰 걸음을 걷게 된 것이다. 부모의 시묘살이를 하며 산 속에서 피리를 불어 조수鳥獸들을 불러모으고 지프내 강가에서 퉁소를 불며 강촌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자연 속의 박연朴然은 이때부터 음악의 이론을 바로 세우고 악기를 제작하고 악보를 만들고 예악의 모든 분야 개혁의 선두에 서서 아악雅樂을 완성하는 음악사적 족적으로의 박연朴堧의 생애가 다시 시작되었다. 세종조 초기는 고려의 제도를 새로운 조선 왕조에 맞추기 위한 개혁의 시기였다. 중국 고대로부터 이어진 예악의 원리를 어떻게 조선에 맞게 옮기고 조선의 것으로 정리하느냐 하는 문제로 군신들이 크게 고심하였던 것이고 그것이 새 시대의 과제였다. 그 때 그 문제의 요체를 전적典籍을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풀어 적용을 하였으며 그의 열의와 능력을 인정 받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혼신을 다 바쳤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해주의 거서秬黍와 남양의 경석磬石으로 악기 제작에 가장 기본이 되는 율관律管을 제작하여 편종編鍾 편경編磬을 제작하는 등 음악 실무에 획기적 공헌을 하였다. 박연은 세종 8년부터 2년 동안 편종 528매를 제작하였다. 악기 조율에 절실히 필요했던 편종을 제작함에 따라 이전의 악기 제작보다 더욱 조율된 악기를 제작하게 되었고 제례 회례 조회, 국가의식에 필요한 악기가 정비되었다. 금琴 슬瑟 대쟁大箏 봉소鳳簫 생笙 화和 우竽 훈塤 호箎 쟁箏 등. 박연은 많은 의식음악儀式音樂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많은 상소上疏를 하였다. 고치고 바꾸고 바로잡고, 개혁 정비를 청원하는 것이었다. 끈질기고 줄기차고 거침이 없었다. 그것들을 하나 하나 기록해 본다. 위에서도 부분 부분 이야기 하였다. 먼저 제례음악에 대한 상소이다. 너무 많아 개조식으로 제목만 적어본다. 시간적 순서이다. 종묘와 조회에 울바른 음악을 정하자는 상소 사향祀享의 아악을 바로잡자는 상소 제향祭享의 악을 완성하고 아악을 두어 집례자에게 고하게 하자는 상소 사향의 아악을 바로잡자는 상소 제사 때 입는 악공의 복식을 개정하자는 상소 뇌고雷鼓와 영고靈鼓를 바꾸자는 상소 종묘악에 육구六句 황종을 고쳐 사용하자는 상소 묘악에 사성四成을 사용하자는 상소 뇌고 영고 노고路鼓의 제도를 바로잡자는 상소 세종 8년에서 23년에 이르는 장구한 시간 동안 상언한 것이다. 이것들은 물론 제례음악에 대한 것이고 계속 얘기하려는 예악 전반에 걸친 상소는 실로 방대하였다. 한 선비 생애 절정기의 정열을 다 바친 것이었다. 여기서 왜 종묘악을 정비하여야 하는가, 그 당위성을 말하고 조선 초기 제향악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였다. 박연은 「주례周禮」춘관春官의 수정修訂 사례를 제시함으로 설득력을 가졌다. 모든 주장에 그는 전적典籍에 의거해 주장하였고 그것이 너무도 적확하고 해박하였다. 위에 열거한 제목들의 청원한 내용을 적어본다. 예악의 중요성과 악의 원리를 설명함으로써 종묘악을 제정하자는 내용 종묘악과 사직社稷 석전釋奠 원단圜壇 적전籍田 선잠先蠶 산천山川 풍운風雲 뇌우雷雨 등의 제악을 구분하고 제사 절차에 따른 등가登歌 헌가軒架의 악을 음양합성陰陽合聲으로 사용하자는 내용 제향 때 예절에 맞는 악의 조리調理를 절도 있게 분별하자는 내용 제사 때 입는 악공의 복식을 개정하자는 내용 종묘 강신악降神樂에 사성을 사용하자는 것과 종묘 제향시 전하의 승강 출입시 육구 황종을 사용하자는 내용 제향 때 사용하는 뇌고 영고 노고를 바로잡자는 내용 그렇게 여섯 자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상의 문맥 그리고 이하 몇 대목 기술 등에 『역주譯註 난계선생유고蘭溪先生遺藁』(권오성 김세종 공역, 국립국악원 1993)의 내용을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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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31) <br> 이유나의 이매방류 '승무' 춤사위승무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이매방류 '승무'는 우리나라 민속춤의 정수라고 할 만큼 가장 품위와 격조가 높은 춤으로 유려(流麗)하게 흐르는 춤의 조형적 선(線), 고고(孤高)하고 단아(端雅)한 정중동(靜中動)의 춤사위로 인간의 희열(喜悅)과 인욕(忍辱)의 세계를 그려낸 춤이다. 승무의 춤사위는 하나 하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완전한 예술형식을 갖춤으로 춤으로 표현할 수 있는 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승무 춤사위에서 표출되는 미의 본질은 인간 본연의 희비를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고, 보다 높은 정신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구도적 진리를 갈구하는 춤이다. 승무의 호화로운 장삼놀음, 춤의 경건함을 밟아가듯 매서운 발 디딤새, 그리고 가슴을 울리고 영혼마저 뒤엎어 버릴듯 세차고 풍요하면서 멋들어진 북가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세찬 북가락이 '보이는 소리' 를 만들어내고 '들리는 춤'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유나 일본 오사카예술대학대학원 박사(예술학) 일본 도쿠시마현 시코쿠 대학 강사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김묘선 일본 도쿠시마 전수소 대표 일반 사단법인 도쿠시마 신문사 전통무용강좌 강사 제19회장보고국악대전 전국경연대회 명인부 대상 국회의장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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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흙의 소리 70흙의 소리 이 동 희 흙의 소리 <6> 예조와 상정소에서는 바로 논의하여 다시 올리었다. "모두 아뢴 바에 의할 것이나, 다만 공인이 심히 많은데 세 가지 빛깔의 옷을 갖추자면 경비가 많이 들게 되므로 당송의 제도에 의하여 춤추는 이는 모두 검은 옷을 입고 공인들은 모두 붉은 옷을 입게 하소서. 그리고 악정은 지금의 협률랑協律郎인데 제복祭服을 입고 악사는 지금의 전악典樂인데 비공복緋公服을 입게 하며 운보인은 지금에는 없는 바이므로 공복을 만들지 말게 하옵소서.” 모두 아뢴 바에 의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박연이 상언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 몇 가지 의견을 덧붙인 안을 올린 것이다. 그대로 따랐다. 박연이 더 말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당장은 그런 현실적인 사정을 따르는 것이 좋을지 모르지만 먼 안목으로 볼 때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불만이었다. 그것을 말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상정소의 의견은 좌의정 맹사성이 주도하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너무 원칙만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관리의 금도를 잘 알고 있었다. "난계蘭溪의 얘기가 틀리다는 것은 아니고… 하나 하나 고쳐 나가야지.” 맹사성은 그 뒤 어느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소리 듣자고 한 얘기가 아닌데…”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뭐라?” "약주를 한 잔 대접하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정말 뭐라는 건가?” 모처럼 사담을 나누는 격의 없는 자리여서 한 말인데 고불古佛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가. 박연은 두 손을 모으고 자세를 고쳐 다시 말하였다. "하교를 받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얘기가 거꾸러 돼서 하는 얘기지.” "예? 무슨 말씀인지?” "좌우간 우리 집으로 가세. 다른 얘기도 좀 하고…” 심기가 상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반대인 것 같았다. "제가 약주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박연은 어투를 바꾸어 간청을 하였다.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았다. 물론 하교를 받고 충고를 듣고 싶기도 했다. 그 동안의 많은 배려와 가르침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갚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맹사성 고불 대감은 거기에 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말도 못하게 하였다. 박연의 생각으로는 다래가 있는 술집으로 가서 술도 대접하고 노래 소리가 됐든 가야금 거문고 피리 소리가 됐든 흥겹고 즐거운 시간을 갖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베풀면 몰라도 받지는 않았다. "제가 대감님을 한 번 이기고 싶습니다.” 박연은 그렇게도 이야기하였다. 웃으면서였다. 농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면 쓰나? 젊은 사람이 져야지.” 맹사성은 웃지도 않고 나무라듯이 말하였다. 그리고 박연을 움직여 북촌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박연이 진 것이 아니라 고불이 이긴 것이었다. 그날 박연은 취토록 술을 마시고 취중에 많은 말을 하였다. 무슨 말을 하였는지 실언을 얼마나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상언을 계속하도록 권유를 받았다. 현실에 영합하지 말고 과감하게 개혁의 안을 올리라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패기를 잃지 말고 조금도 흐트림 없이 말이다. 왕을 위하는 일은 나라를 위하는 일이고 그것은 백성을 위하는 일이다. 그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흙을 사랑하는 길이며 땅을 사랑하는 길이며 우주 만물을 사랑하는 길로 통한다. 누가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한 말 같기도 했다. 어떻든 고칠 것이 너무 많았다. 사회 전반에 맞지 않고 잘 못 된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박연은 자신의 분야를 벗어나지 않았다. 예악에 대한 것, 음악 아악의 문제점에 대하여, 바르지 않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에 대하여 계속 상언을 하였다. "전차에 종묘악과 조회악 그리고 전하께서 오르내리시고 출입하실 때의 융안지악隆安之樂에 모두 팔구황종八句黃鍾을 썼는데 지금 조회악에 육구황종六句黃鍾으로고쳐 쓰니 종묘악도 마땅히 육구六句로 고쳐 써야 합니다. 또 종묘의 관창祼鬯 전폐奠幣 초헌初獻 등의 악에 모두 공덕功德을 송頌하고, 등가登歌는 당상에서 하며 문무文舞는 당하에서 하되 홀로 아헌亞獻을 마치면 헌가軒架는 소무무昭武舞만 연주하고 가사歌詞가 없으니 조회악에 의하여 무무武舞의 가사를 짓고 아울러 금슬琴瑟 가공歌工을 설비함이 마땅합니다. 영신악迎神樂도 문무는 있고 가사가 없으니 가사를 짓게 하옵소서.” 박연이 이와 같이 아뢰자 그대로 예조에 내렸다. 세종 15년 1월 7일 올린 상언이었다. 박연의 시도 때도 없는 상언에 대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비판을 하기도 하였으나 거의 다 채택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 하나 하나가 음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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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30)<br> '부채춤' 춤사위부채춤 1954년 김백봉이 서울 시공관 무대에서 처음으로 발표한 창작무용이다. 독무 형태로 추어지다가 군무 형식으로 재구성 되었다. 반주 음악은 창부타령의 굿거리. 자진모리 장단이 사용되며, 복식은 당의풍의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족두리를 얹고, 양손에 부채를 들고 춘다. 부채를 펴고 접고, 감고 펴 올리는 다양한 기교의 춤사위를 구사하며 부채와 신체의 조화로운 움직임으로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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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9흙의 소리 이 동 희 흙의 소리 <5> 상언한 내용을 더 보자. 제악祭樂에 쓰는 관모冠帽의 제도에 대한 것이었다.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의 여러 악공들의 관冠에 대하여 아룁니다. 당송唐宋의 제도에는 조회와 제향에서 모두 개책관介幘冠을 썻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흑포두건黑袍頭巾을 쓰고 있어 모양이 좋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가 없으므로 원컨대 당송의 제도 대로 개책관을 고쳐 쓰게 하옵소서.” 개책관은 중국 전국시대 문관이 쓰는 관의 하나이며 조선 시대 아악을 연주하던 악공이 쓰던 관을 이르던 말이다. 단단한 재질의 머리띠를 정수리에 얹어 쓰는 관으로 위와 같은 박연의 상주로 처음 행해졌던 관모冠帽였던 것이다. 공인工人들이 입는 옷은 당나라에서는 주구의朱褠衣와 주련장朱連掌을 썼지만 그 제도가 자세하지 못하고 송나라에서는 비란삼緋鸞衫을 썼는데 그 제도는 상고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승포의五升布衣를 쓰고 있는데 아주 보기가 안 좋고 적삼〔衫〕의 제도가 아니니 원컨대 송조宋朝 묘악廟樂의 제도에 의거하여 난삼鸞杉으로 고쳐 쓰되 구승九升 명주를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다. 문무文舞에 쓰는 관은 당나라에서는 위모관委貌冠을 쓰고 송나라에서는 평면平冕을 썼는데 평면은 선유先儒들이 잘 못 되었다고 하였고 위모관에 대하여는 「사림광기事林廣記」주해註解에, 주周나라의 위모관은 지금의 진현관進賢冠이 바로 그 유상遺像이라고 하여 진현관의 제도를 상고하여 보니 섭숭의聶崇義의 「삼례도三禮圖」에 나타나 있는대로 촌분寸分을 낮추면 족히 의거할 수 있다. 우리나라 문무의 관은 종이를 붙여서 만들되 두 조각을 만들어 연결하여 쓰므로 이마가 비어 덮이지 아니 하니 춤추는 사람의 머리가 모양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 진현관으로 고쳐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무武舞에 쓰는 관은 당송에서 모두 평면平冕을 썼는데 진양陳暘이 비난하기를 면冕을 쓰고 간干을 쓰는 것은 천자의 예이다. 제후諸侯가 면을 쓰고 대무大武의 춤을 추는 것도 「예경禮經」에는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무랑舞郞이 춤추는 데에 어찌 평면을 쓸 수 있겠느냐고 하며, 작변爵弁으로는 문文을 춤추고 위변韋弁으로는 무武를 춤추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예전에 평면을 썼으니 진씨의 말대로 가죽고깔〔皮弁〕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박연은 이렇게 문무의 춤을 추는 데에 따르는 의관에 대하여 먼저 관에 대하여 잘못 쓰이고 있는 관행과 제도를 지적하고 올바른 모형을 제시하며 아뢰었다. 옛 기록과 선유들의 의견으로 고증한 제도이며 그의 견해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계책관 뿐 아니라 작변 위변 피변이 다 박연의 상언으로 처음 행해졌던 제도로 그 어원語源이 되고 있다. 상언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복색服色에 대한 것이었다. "옛 제도에는 악정樂正 악사樂師 운보인運譜人 등의 복색이 있었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없습니다. 그러니 당송의 제도에 의하여 각각 두 벌을 만들되 악정은 자주색으로 공복公服을 하고 악사는 붉은색 운보인은 녹색으로 공복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인舞人과 공인工人의 복색은 한漢나라 때에는 각각 방색方色(동 서 남 북 중의 청백적흑황의 다섯 가지 색)에 따랐습니다. 생각컨대, 한나라는 고대와 멀리 떨어지지 아니 하여 그 제도를 이어 받은 것인데 당송 때에 이르러서는 천신天神 지기地祈 인귀人鬼 등의 제사에서는 복색은 변하지 아니 하였으나 춤추는 사람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공인들은 모두 붉은 옷을 입었습니다. 당나라 조신언趙愼言이 말하기를, 지금 제기祭器와 인욕裀褥은 모두 오방 오교五郊의 빛깔을 따랐으나 의복만은 그 빛깔이 틀려서 춤추는 자는 항상 검은 옷을 입고 공인은 항상 붉은 색을 입으니 적당치 못한 듯 하고 그 무인과 공인의 복색은 방색에 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는데 진양이 이 말을 인용하여 제사에는 검은 색을 쓰고 땅 제사에는 누른 색을 쓰며 종묘에는 수綉를 쓰면 옛 제도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문무 및 여러 악공들의 복색은 제사에는 매양 붉은 색을 쓰고 무무에는 검은 색을 쓰고 있는데, 진씨와 조씨의 말에 의하여 인귀에게 제사할 때에는 비수緋綉 난삼을 쓰고 회례의 여러 공인들의 복색은 천신을 제사할 때에는 검은 색을 쓰고 지신을 제사할 때에는 누른 색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제악의 무인과 당하의 공인들은 옷은 있으되 띠〔帶〕가 없음을 지적하고 당나라에서는 혁대革帶를 쓰고 송나라에서는 말대秣帶를 썼는데 송나라 제도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고 또 제악에 신는 신〔履〕은 그림에 의하여 만들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박연의 여러 제도의 상언에 대하여 조정은 예조와 의례상정소로 하여금 논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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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29)<br>이명옥의 '박경랑류 허튼 진쇠놀음춤' 춤사위허튼 진쇠놀음춤 영남 특유의 경쾌하고 흥이 넘치는 덧배기 장단과 춤사위가 잘 어우러진 역동적인 춤이다. 주로 농악놀이와 판굿 놀음, 마당이나 들놀음, 농번기에 연희 되었다. 사당패들이 걸립 놀이 때 연희해 오던 상쇠놀이를 박경랑 선생이 풍류놀음으로 무대화 시켜 추어진 꽹과리 춤이다. 이명옥 박경랑류 영남 교방청춤 보존협회 경상남도 협회장 이명옥우리춤 예술원대표 제12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국회의장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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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8흙의 소리 이 동 희 흙의 소리 <4> 그리고 전적典籍을 뒤지고 고래의 예악서禮樂書에 근거하여 철저한 고증과 고제古制 고사古事에 의거하여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무수히 올린 상언上言이 그랬고 쉴새 없이 입안을 하고 실천하는 방법이 그랬다. 향악을 정리하고 구악을 이정하는 일에 몸을 바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와 악 전반에 걸친 쟁점爭點을 제기하고 그에 매달려 생각을 하고 글로 썼다. 맞지 않고 잘 못 된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성정이 그렇기도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내려진 왕명이라고 할 때 잠시도 해찰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대단히 신중히 하였다. 상주上奏 상언上言 말이다. "무일舞佾의 위치가 맞지 않습니다. 옛 현인의 도설圖說을 상고하여 보니 종묘宗廟의 가운데에 있고 악현樂懸의 북쪽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조선에서 악현의 북쪽 섬돌의 남쪽에 벌여놓는 것은 옛 제도에 어긋납니다. 또 땅이 좁고 위치가 좁아서 나아가고 물러서며 변화를 지을 도리가 없으니 진실로 온당하지 못합니다.” 박연의 지적은 너무도 분명하고 단호하였다. 악무樂舞 진퇴의 법을 자세히 상고하여 보면 선유先儒가 말하기를(언제나 전제하는 어투이며 방법이었다) 일무를 추는 데는 사표四表를 세우고 춤추는 사람이 남표南表에서부터 이표二表에 이르는 것을 일성一成이라고 하고 이표에서 삼표三表에 이르면 이성二成이라고 하며 삼표로부터 북표北表에 이르면 삼성三成이라고 하고 다시 남쪽을 전향轉向하여 북표로부터 이표에 이르면 사성四成이라고 하며 이표로부터 삼표에 이르면 오성五成, 삼표로부터 남표에 이르면 육성六成이라고 하였다. 풍악도 또한 여섯 번 변화한다. 그리하여 천신天神이 다 강림降臨하는 것이다. 이것은 천신을 제사하는 환종궁圜鍾宮 육변六變의 춤이다. 또 남표로부터 이표에 이르면 칠성七成이 되고 이표로부터 삼표에 이르면 팔성八成이 되는 것이다. 풍악도 또한 여덟 번 변화한다. 사표는 나라 사방의 바깥이라는 뜻으로 온 세상을 이르는 말이다. 일성은 춤출 때 곁들이는 음악의 단위로 한 장章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12율律의 기본 음인 황종黃鍾에서 시작하여 육율六律과 육려六呂를 거쳐 다시 황종으로 오는 것으로 넉자를 한 박으로 여섯 박 곧 24자가 일성이 된다. 남표 북표는 사전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백과사전 음악사전(세광음악출판사 음악대사전)에도 없었다. 요즘 사전을 대신하는 인터넷도 뒤져보았다. 이표 삼표 이성 삼성 사성 오성 육성 칠성 팔성 그리고 뒤의 구성九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옛 음악, 국악 용어의 뜻을 직역直譯으로라도 설명하지 못하나 고명한 독자들은 여러 경로로 알기를 바라고 필자처럼 짐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춤사위와 율동 가락 울림의 변화무변… 종묘 선농先農 선잠先蠶 우사雩祀 등 제사에 여러 사람이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춤을 추는 일무佾舞…. 그리하여 땅의 귀신이 다 나와 응감應感하는 것이다. 이것은 땅의 신을 제사하는 함종궁函鍾宮 팔변八變의 춤이다. 또 삼표로부터 북표에 이르면 구성이 되고 풍악 또한 아홉 번 변화한다. 그리하여 사람 귀신도 제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사람 귀신을 제향하는 황종궁黃鍾宮 구변九變의 춤이라고 하였다. 상언은 계속되었다. "상고하여 보건대 이 사표 진퇴의 절차는 무무武舞의 법입니다. 문무文舞에는 명백한 설이 없습니다. 선유 가공언賈公彦이 말하기를 무무에 사표가 있으니 문무에도 응당 사표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상도陳常道의 「예서禮書」에 말하기를 가공언의 말이 사리에 맞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에서도 지난 을해년乙亥年(세종 23, 1431) 겨울 대제大祭를 친행親行할 때에 정도전鄭道傳 민제閔霽 권근權近 제조提調 등이 찬수撰修한 의궤儀軌 속에 문 무 두 가지의 춤을 각각 사표로 하고 서로의 거리를 사보四步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일을 악현 북쪽 섬돌 사이에 두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는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옛 제도에 의거하여 무일을 전정殿庭의 가운데에 벌여 육변 팔변 구변의 의식을 다 하게 하십사고 하였습니다.” 박연은 그렇게 전적과 사례를 가지고 논리를 펴며 아뢰었다. 무일의 위치에 대해서 거리에 대해서… 며칠을 다듬은 논리였다. 어쩌면 참으로 하찮은 대단히 미미한 문제였지만 너무도 중요하게 철저하게 지적을 하고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본조本朝에서 의례상정소와 같이 살펴보오니 위에서 말한 묘정廟庭에 헌현軒懸을 설치할 곳은 실로 비좁습니다. 청하옵건대 남쪽 섬돌에서부터 구보九步를 더 넓게 하소서” 종지從之, 박연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 세종 14년 1432년 3월 4일 세종실록 55권에 있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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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28) <br>최은숙의 '박경랑류 영남교방 승화무' 춤사위<2>영남교방 승화무 승무는 교방에서 작은방의 공간적인 여건상 자주 연희 되지 않았으며 의례 행사에서 추었다. 복식은 장삼의 소매길이를 일반 승무보다는 짧게 하였고, 화려하게 변형한 연꽃을 상징하는 북채를 들고 청, 홍 쌍 가사를 어깨에 둘렀다 북을 놓을 공간이 부족할 때는 기생들이 북을 받쳐 들어주고 치기도 하였다. 북 가락은 좀 더 빠른 변형을 주어 교방에 오신 분들의 만복과 건강을 기원하며, 북소리를 통하여 기운을 북돋기 위한 의미를 실어 춤을 추었다 최은숙 경남정보대학교 전통예술원 한국무용지도교수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보존협회 협회장 최은숙 아향예술단 예술감독 교방문화 연구소회원 2005년 제9회 창원 전국 국악경연대회종합대상 2021년 한국예술 평론가 협의회 심사위원선정 특별예술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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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7흙의 소리 이 동 희 흙의 소리 <3> 이날 경연은 세종 임금이 정악을 창조하는 데 적극적으로 힘을 모을 것을 결의하는 것으로 끝났다. "전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을 잘 펴실 수 있도록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영의정 황희가 참석한 대신들의 뜻을 대변하듯 아뢰었다. "고맙소. 정말 그렇게들 해 주길 바라오.” 임금은 영의정과 대신들을 바라보며 진정으로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흡족해 하였다. 그러며 박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특별히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박연도 목례를 하였다. 잘 알겠습니다. 열과 성을 다 하겠습니다. 염려마시옵소서. 간절히 눈으로 아뢰었다. 다음날 바로 세종 임금은 승지를 불러 결심한 뜻을 다시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과 성정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교화시키기 위하여 예악이 바로 서야 하고 무엇보다 악이 바로 서야 하고 정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알았으니 한 시도 주저할 일이 아니며 서두르고 박차를 가해야 하겠다. 이것은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일이며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는 일이며 풍요롭고 신명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이 나라 관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임금 된 자로서 앞장을 서야 또한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임금은 분부를 내리기에 앞서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승지는 대언들과 악에 조예가 있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학자들 관리들의 의견을 모으고 뜻을 모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고 지체 없이 그렇게 추진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승지나 대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 일로서 그야말로 백년대계이며 거국적인 사업인데 왕명을 전달하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거기(예악)에 전담하는 기관이나 부서를 두고 연구하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도 여유 있게 주어 충분히 연구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종 임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였다. "참 좋은 의견이오. 그렇게 해야겠오. 악을 바로 세우는 일 정악을 창제하는 일, 아악을 창제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전통 음악 향악鄕樂을 바로잡고 정리하는 일과 병행해야 하는데 그 또한 일이 많고 어려운 일이며……” 세종 임금은 계속 의견을 내고 과제를 쏟아놓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가사歌詞를 아름다운 곡에 올린다면 이 또한 악을 바로 세우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이를 전담할 관서를 두고 과감하게 추진해야 될 것이고 그것을 승지에게 다 맡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우선 구악舊樂을 정리하는 일을 관장할 부서를 두어야 일의 두서가 맞는다. 그리고 국가 전례典禮 예제禮制 정치 사회제도 등을 연구 하는 부서를 두어야 한다. 바로 단행된 구악이정도감舊樂移定都監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가 그것이다. 정악의 길은 어렵고 중차대하였다. 거기에 모든 중지衆志와 정치력을 쏟아야 했다. 임금은 의례상정소에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총제 정초 신상 권진으로 제조를 삼아 추진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구악이정도감에는 예문관대제학 유사눌 집현전대제학 정인지 관습도감 제조 박연 경시주부 정양을 겸임시켜 구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창제하는 일을 하도록 명하였다. 특명이었다. 집현전 옆에 의례상정소를 설치하고 관습도감 안에 구악이정도감을 두었다. 모든 업무가 다 겸임이지만 악을 바로 세우는 정악, 아악 창제를 모든 일의 선두에 두고 추진하였다. 그것이 임금의 의지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의 뜻이며 의지이자 나라의 뜻이며 시대의 정신이었다. 새 물결이었다. 앞에서도 얘기한 대로 그 소용돌이에 박연이 있었다. 그는 나라 음악, 국악의 새 물길을 흐르게 하는 데 분골쇄신하였다. 악성樂聖에 이르는 대업大業이었다. 세종 임금과의 인연이라고 할까 유사눌이 그를 임금에게 천거하기도 했고 옛날 아버지 어머니 무덤 앞에서 시묘를 하며 피리를 불던 때부터 소리와 가락은 운명지어져 갔던 것이다. 물론 그의 노력도 있었다. 그의 노력이란 잠을 안 자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시를 짓고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새 시대 정신을 구현하는 일이고 예를 세우는 일이고 악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 방안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가 특별히 음감에 뛰어나고 악기제작에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하고 혼신을 다 쏟은 것이었다. 하나 더 말한다면 자연적인 삶의 대처라고 할까 흙과 같이 나무와 바람과 같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무위자연의 삶을 추구하는 성정이었다. 궁은 흙의 소리요 상은 나무의 소리이듯이 오음이 다 자연과 우주조화의 음이라고 하는 데에 심취한 철리哲理 악리樂理의 바탕을 삼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능력과 음감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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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27) <br>최은숙의 '박경랑류 영남교방 승화무' 춤사위<1>소고춤 각 지방마다의 특색을 갖고 전해 내려오는 농악에서 일명 매굿이라 불리는 소고춤은 개인 벅구놀이 형태의 마당에서 노는 춤이었는데, 이를 무대화시켜 김묘선이 1989년 11월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초연하여 민속무용의 하나로 발전시켜 김묘선류의 소고춤으로 불리고 있다. 특히 호남 특유의 이매방류의 대삼소삼 호흡이 분명한 독특한 춤사위로 흥과 신명을 끌어낸다. 정수경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자 디딤새한국전통예술원 대표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김묘선 위싱턴 승무전수소 대표 제일한교 교사 페어팩스고등학교 한국어과 한국무용, 난타, 사물놀이 교사 센터빌고등학교 한국어과 난타교사 중앙한국학교 무용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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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국악신문 대표이사 이취임식주식회사 국악신문 대표이사 이취임식이 9일 정오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주요 필진과 자문위원단과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간략하게 개최된 이날 이취임식에서 주간 지면 신문과 인터넷 신문의 이원화와 주식회사로의 전환에 따라 구조 조정을 하였다. 이에 의해 객원기자로 함께 하던 기미양 기자가 대표이사로, 김지연 전 대표가 상임이사로 자리를 이동하였다. 김지연 전 대표는 이임사에서 "30년 국악신문 역사를 빛나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하고 있는 봉사단체의 중책을 맡게 되어 부득이 자리를 옮기고자 합니다. 저는 측면에서 돕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기미양 대표이사는 취임사에서 "전통문화예술 전문 언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하였고, 기업화를 위해 주식회사로 전환했다”라고 밝혔다. 본지에 ‘춤새’를 연재하는 이무성 화백은 신년 세화歲畵를 연재 필자들에게 선물하였고, ‘흙의 소리’를 집필하는 이동희 작가는 "국악계의 활로를 모색하는 기사들과 전통문화 전반을 다루는 국악신문은 독자성을 갖는 언론으로 확장하리라는 기대를 갖게한다”고 격려했다. 이날 참석자는 연재 필자 이동희, 이무성, 이종선, 정창관, 박상진 교수가, 자문단에는 정문교, 정승만, 신동립 3인, 대기자 이동식, 안상윤, 김연갑과 편집부 김동국, 정현조, 김한나 기자가 함께했다. 한편 이날 막내 김한나 기자의 깔금한 진행이 돋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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