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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음악협회, 6일 창작 오페라 '직지' 갈라콘서트충북음악협회는 지역 대표 문화콘텐츠이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의 역사 이야기를 다룬 창작 오페라 '직지'를 갈라 콘서트 형식으로 무대에 올린다고 1일 밝혔다.6일 오후 7시30분 청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은 '직지'의 유명곡을 엄선했다. 서곡과 간주곡을 작곡가 강효욱이 새롭게 선보인다.2000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초연 당시 '최초의 한국오페라'란 부제에 걸맞은 국악기 위주의 오케스트라 편성과 승무를 비롯한 다양한 한국전통무용, 상여소리, 삭발식 등 다양한 문화적 볼거리로 화제를 모았다.오페라 직지는 한국음악의 거장 박범훈 작곡과 김승환·김민형 대본이 만났다.공연은 모두 4막으로 구성됐다.1막은 '불모의 땅', '불모의 세월', '사랑의 아픔', 2막은 '가시리', 3막은 '마음의 등불' 등의 명곡이 흐른다. 4막은 '청주의 하늘은 맑은데', '직지의 노래' 등으로 감동을 선사한다.이번 공연은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의 '2021 기록문화 예술창작발표 지원사업' 선정으로 제작 지원을 받았다.이영석(청주시청소년오케스트라 지휘자) 지휘로 소프라노 김계현(묘덕 역), 메조소프라노 김하늘(수춘옹주 역), 테너 배하순(허숙 역), 바리톤 최신민(정안군 역), 베이스 박광우(백운화상 역)가 블루윈드앙상블과 청주오페라앙상블합창단 등 지역예술인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강진모 충북음악협회장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직지를 주제로 한 이번 오페라로 지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새기고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공연 관람은 무료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공연장 방역수칙에 맞춰 당일 선착순(200명)으로 지정좌석권을 무료 배부한다. 초등학생 이상 입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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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이 낳은 국악관현악 지휘자의 향연 ‘기산전’2021년 11월 7일 오후 3시 경남 산청군 남사예담촌 기산국악당에서는 경상남도를 빛낸 인물프로젝트 국악관현악 지휘자의 향연 ‘기산전’이 펼쳐진다. 기산국악제전위원회(위원장:최종실)가 주최/주관하며 경상남도와 산청군 그리고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총동문회가 후원한다. 예부터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경상남도! 경상남도의 유구한 인물들을 빛내기 위한 프로젝트. 국악운동의 선구자이자 국악 교육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故기산 박헌봉 선생의 유업을 기리는 행사이다. 박헌봉 선생은 현재의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세우고 전국의 무형문화재를 기록, 조사, 발굴하였다. 이 같은국악선양 정신을계승받은, 기산이 배출한 국가무형문화재 명인들과 지휘자들의 향연을 보여준다. 공연은 오프닝 <태평고를 울려라>를 시작으로 <기산찬가>, <대바람소리>, 가야금병창을 위한 협주곡 ‘사랑가’, 배띄워라, 약손,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 및 병창, 사물놀이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신모듬’, <반갑습니다>, <미리뽕>, <우연히>, <길>, <사랑의 바보>, <예사> 등이 펼쳐진다. 참여하는 지휘자는 8명이다. 김광복(11기), 박상진(11기), 최상화(12기), 한상일(12기), 김재영(15기), 이용탁(23기), 임상규(28기), 진성수(29기)이다. 협연에는 김영재(5기), 정회천(15기), 이영신(22기), 우연이(25기), 전영랑(40기), 이미리(43기), 김보성(45기)이 참여한다. ‘기산전’은 기산 박헌봉 선생의 제자들을 비롯한 무형문화재 보유자, 국악인과 관현악단 등 예술인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품격 있는 공연이다. 진행은 국악공연 전문기획사인 정아트앤컴퍼니가 맡았다. 제12기 한상일 지휘자(현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단장)는 "이번 공연은 박헌봉 선생님의 제자들인 박범훈(전 이사장) 선배님 이하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출신들만으로 꾸미는 판이다. 이 판의 소속감과 결속력은 우리의 자부심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또한 본 국악신문에 ‘한류이야기’를 연재하는 제11기 박상진(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지휘자 역시 강한 자긍심을 보였다. "기산 선생의 그늘이 현재 우리 국악의 본류이다. 이번 공연은 우리 스스로가 이를 확인하고, 동시에 이 시대 국악계의 소임을 다지는 기회이다.”라고 했다. 공연이 개최되는 경남 산청군 남사예담촌 기산국악당은 박헌봉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명소이다. 주인공인 박헌봉 선생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나 1934년 진주 음률연구회를 조직하고, 그 후 정악견습소, 조선성악연구회, 조선가무연구회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1960년 민속악 교육을 위한 최초의 사립국악교육기관인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이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문화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면서 ‘창악대강’을 후세에 남겼다. 오늘의 민속음악인 주류를 형성시킨 인물이다. 본 행사의 총괄은 2013년 기산국악당 건립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제10기 최종실 기산국악제전위원장이다. 기산국악당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로 지정된 남사예담촌과 함께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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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거장 박범훈·김덕수 선생의 국악 세계화 정신김중현(음악인류학 박사/중대 예술대학 겸임교수) 젊은 음악인, 거장의 업적을 통해 K-뮤직 세계화의 정신 전수 지난 10월 30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는 새로운 음악의 길을 열어가고자 하는 젊은 음악인들로 구성된 3기 '한음아카데미오케스트라'의 무대 '2021 국악관현악 축제'공연이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연주자들과 한국음악 거장 박범훈 지휘자를 비롯해서 KBS 국악관현악단의 원영석 지휘자, 불교음악원 박천지 지휘자와 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 명인, 전영랑 명창 등이 한 무대에서 국악관현악 공연을 펼쳤다. 젊은 음악인은 국악 연주 기량을 높이고, 거장의 업적을 통해 K-뮤직 세계화의 정신을 이어받을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음악 세계화의 거장과 함께 연주를 경험한 단원들은 앞으로 각자의 재능과 악기를 가지고 국악을 넘어 K-뮤직으로 세계 무대를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국악관현악(박범훈)과 사물놀이(김덕수)로 한국음악 세계화의 초석 20세기 단연 돋보이는 한국음악 장르는 국악관현악(박범훈)과 사물놀이(김덕수)이다. 국악관현악과 사물놀이는 우리의 우수한 전통예술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도록 편성하여 세계로 나갔다. 국악관현악 작곡가이자 지휘자 박범훈 선생은 8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한 제자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최초로 민간 국악관현악단인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였다. 중앙국악관현악단은 국악을 넘어 한국음악으로서의 대중화를 꿈꾸며 우리 귀에 익숙한 민요, 판소리, 대중가요를 국악관현악으로 재미있게 만들어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중앙국악관현악단>은 대중화를 위한 노력과 함께 90년대 초에는 일본, 중국 등 전통악기로 구성한 민족 오케스트라들과 교류를 통해 세계화를 위한 공연을 추진하였다. 그 성과에 힘입어 박범훈 선생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을 탄생시켰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악기 개량과 음정의 표준화 등을 시도하며, 중국·일본 음악인과 전통악기 합주를 통해 한국음악의 국제 교류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를 기반으로 박범훈 선생은 한국음악의 세계화 노력과 열정으로 한·중·일 오케스트라 아시아를 창단하였으며,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이 만나서 다양한 공연을 펼쳤다. 2000년대에는 동남아시아 10개국과 함께 '한·아세안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국악관현악의 세계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사물놀이는 창시자 김덕수 명인의 노력으로 국제 이벤트 공연, 다양한 장르와 크로스오버를 하고 세계 각국의 연주자들과 콜라보를 하였다. 적극적으로 해외 워크숍, 교육, 경연대회, 음반 발매, 사물놀이 의상, 악기 제작의 표준화, 미디어를 활용해 한국음악의 세계화를 추진해왔다. 기업의 예술 후원과 상생을 위한 사회공헌 프로젝트 지속 '한음아카데미오케스트라' 2021 국악관현악 축제 프로젝트는 '(주)크라운 해태'(윤영달 회장)의 관심과 애정으로 성장 중이다. 크라운 해태는 우리나라 전통음악과 한국음악 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크라운 해태는 과자 제조할 때 우리 음악을 틀어 발효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취지의 ‘국악발효공법’을 마케팅으로 고안할 만큼 기업의 예술 사랑은 한국음악 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2년간 멈추었던 예술 교류는 다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의 한류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 가고 있다. 한국어와 태권도가 각국의 공교육과 수련 시설을 통해 지속해서 보급이 확대되고 있다. 한국음악이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하는 학교(43개국 1,800개교)와 세계 각국에 있는 태권도 수련 시설과 연계 프로그램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리고 세계 난민촌 지원사업 연계(130개국 507개소 2,040만)에 한국음악으로 난민 청소년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정부와 기업이 진정한 한류의 세계화를 위해 국악관현악과 사물놀이를 활용한다면 새로운 K-뮤직 한류 붐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외교부, 교과부, 문체부, 후원 기업과 연계한 한국음악 세계화 추진 한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전통음악이 한류의 붐을 타고 소중한 예술 창작의 소재로 그 가치와 진가를 발휘할 때가 왔다. 내년은 한·중 수교 30주년, 한·베트남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국악관현악은 수교를 기점으로 국가 간에 상호 교류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동안 수많은 연주자와 예술인들이 상호 교류를 이어왔다. 국악관현악과 사물놀이는 다양한 교류의 역사와 성과가 있기에 정부와 기업의 교류 행사에도 중요한 역할과 소재가 될 것이다. 외교통상부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교과부의 한국교육원, 문체부의 한국문화원 등과 연계한다면 다양한 아이디어로 한국음악을 세계화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한국음악은 각국의 예술문화와 어우러져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기여하고, 대한민국이 K-뮤직으로 인류 문화의 지속 가능한 성장,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의 공연리뷰는 비정기적으로 집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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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훈, 한음 아카데미 오케스트라 지휘오는 30일 오후 5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2021 국악관현악축제가 개최된다. 이 때 박범훈 조계종 불교음악원 원장이 한음 아카데미 오케스트라 3기 연주회 지휘를 한다. 이 관현악축제에는 원영석과 박천지가 함께 지휘한다. ‘2021 국악관현악축제’는 공연계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을 제시하기 위해 기획됐다. 국악 신인 연주자들로 ‘한음 아카데미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공연을 올리는 실험적인 기획 공연이다. 또한 김덕수패 사물놀이, 소리(전영랑, 김민정, 김주연), 원초적 음악집단 이드의 협연으로 다양하고 신명 나는 무대를 꾸밀 예정이다. ‘석인II’, ‘격동’, ‘신맞이’ 등 신선한 국악 작품들로 찾아가는 ‘2021 국악관현악축제’는 국악으로 가을의 정취를 안겨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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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리를 다듬고 가꾼 40년, 악기장 박성기국악신문 혁신 재창간 1주년 기념으로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우리나라 국악기 제작사 중 고품질에 가격 대중화를 이룬 궁중국악기 창업자 박성기 명인과 국악에 관한 저서를 갖고 있는 전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대기자와의 대담이다. ‘언제나 떳떳하게 언제든 당당하게 양심을 최우선으로 하는 악기사’를 표방하는 박성기 명인은 2003년 세계문화예술대상, 장영실과학문화상 국악기술대상을 수상한 대명장이다. 전분야 국악기 개량의 최고 권위자로 트랜드를 형성해왔다. 하남시 궁중국악기사에서 국악기 90%를 개량하게 된 배경과 성공담, 그리고 우리 국악기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대담을 나눴다. 이 자리에는 정문교 전(前)신나라 사장도 함께 하였다. 대담 이동식(국악신문 대기자, 전(前)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대기자=우리나라의 거문고나 가야금 등 현악기들은 일찍이 담헌 홍대용이 말한 것처럼 먼지와 티끌로 가득 찬 이 세상의 어두운 생각과 우울한 기분을 풀어버리는데 그 효과가 시(詩)나 술보다도 나은 점이 있다고 하겠다. 흔히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고 말하는 거문고, 그와 같이 비유되는 가야금의 소리는 중국과 다르고 일본과는 사뭇 차이가 큰데, 이러한 우리 악기의 소리는 누가 내는 것이고 그 소리는 누가 만드는 것인가? 여기에 소리를 잘 내는 악기의 중요성의 핵심이 있다고 한다면 현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현금 악기들을 만드는 악기장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우리 국악기 중 현악기들을 만드는 곳이 전국에 수십 군데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을 받는 곳이 ‘궁중국악기사’라는 곳이다. 이 악기사의 대표는 40년 동안 우리나라 현대 국악기를 가장 많이 만들어, 오늘날 우리 국악이 이처럼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사랑을 받는 비밀이 아름다운 소리에 있다면,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경기도 하남시 천현산 자락에 있는 궁중국악기사의 박성기 대표를 찾아갔다. 박성기 명인=."현악기의 소리의 비밀은 당연히 나무에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나무를 쓰느냐에 달려 있고요. 좋은 나무를 어떻게 잘 말려서 좋은 소리가 나게 하느냐에 있지요. 저 같은 경우 고향인 전라북도 장수와 근처 남원 임실 일원에 오동나무가 많았어요. 그것은 60년대에 나라에서 농가 소득증대를 위해 오동나무를 심으라고 권장한 데 따라 고향 일대에 밭이나 야산에 많은 오동나무들이 잘 자랐는데, 30년 이상 잘 자란 그 오동나무들을 일찍 악기용으로 확보를 해서 충분히 말린 것이 좋은 악기를 만드는 밑거름이 된 것이지요. 저희 고향에는 지금도 20~30년 잘 건조된 오동나무 편만 수천 장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Q.예순을 넘긴 나이지만 정력적이랄까 활력에 여전히 가득 차 있는 박 대표, 그런데 나무만 있다고 좋은 악기나 나오는 것일까? A."그렇지 않고요. 일단 나무가 있더라도 거기에 줄을 매야 하고, 울림통을 받칠 몇 가지 덧붙임이 있어야 하고, 줄도 좋아야지요. 그런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야 좋은 악기가 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가야금의 경우에도 예전부터 전해오는 제작법에 따르면 악기의 줄을 맨 후에 자꾸 줄이 늘어나는 현상이 생겨 이 음들의 높이를 유지하고 조율하는 일이 무척 번거로운 일이기에 제가 줄 매는 쪽 뒤편에 조리개를 고안해서 이것으로 쉽게 줄을 맞출 수 있게 한 것이 많은 분들에게 저의 악기가 사랑을 받게 된 것 같아요.” Q.그런 말씀은 말하자면 전통악기를 개량한 것이라 하겠는데 12줄인 가야금을 22현으로, 25현으로 개량한 것이 박 대표라는 말이 있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 A."제가 정식으로 이 악기 만드는 일에 뛰어든 것이 1986년입니다. 사실 악기 만드는 것은 전수가 쉽지가 않습니다. 악기를 만들 때에 제대로 못하면 아까운 나무도 버리고 악기가 못 쓰게 되지요. 그래서 악기장들이 제자에게 전해주시지를 않아요. 이 때문에 악기 만드는 것을 배우고 터득하기 위해 사실 무척 노력을 많이 했고 숱한 시행착오도 겪었지요. 지금이니까 좋은 추억으로 회상하지만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실패를 하면 왜 실패를 했는지를 찾아내는 과정이 엄청 길고 힘들더라고요” Q.의욕이 강했기에 밤잠을 안 자고 연구를 하던 청년 박성기는 국악기의 주재료인 오동나무를 건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끝에 어떤 화학약품을 쓰면 쉽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먼저 적은 양으로 실험을 했었어야 했는데 금방 만들고 싶어서 고향집 마당에 많은 양을 쌓아놓고 한꺼번에 작업했는데, 이때 마을은 온통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찼고 그 작업도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나무를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말려서 악기를 만들었던 조상의 슬기를 몰랐던 것이다. 그와 같은 실패가 있었기에 더욱 노력을 해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말이다. A."그렇게 해서 악기를 만들다 보니까 우선 줄이 문제인 것입니다. 당시까지 줄은 명주실로 촘촘히 꽈서 만드는 것인데 이게 자주 끊어지고 늘어나고 했습니다. 그래서 90년대 초에 줄을 새로운 소재인 나일론을 줄로 매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소리가 훨씬 탄력도 늘어 좋고, 또 질겨서 일정한 소리를 낼 수 있어요. 맨 처음에 어른들이 안 된다고 반대를 하셨지만, 가곡 하는 조순자 님과 가야금 하는 황병기님이 좋다고 추천을 해주셨기에 점차 사람들도 쓰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줄을 개량한 것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게 되자 가야금 12줄을 17줄로 늘이는 악기를 개발했고 다시 박범훈 선생님이 기왕이면 음색과 표현력을 넓히기 위해 22현으로 해보자고 말씀하셔서 1996년에 22현 가야금을 만들어냈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고 많이 써 주셨습니다. 그 해에 북도 모듬북으로 만들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았고요, 그 가야금이 나중에 김일륜 선생님의 제안으로 25현으로 확대되었고요” Q. 박 대표에 따르면 이러한 실용신안 혹은 특허는 수도 없이 많다. 1998년에 대금 제조 방법에 특허, 2000년에는 해금과 가야금의 음량을 조절하는 방법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았고, 2002년 현악기 제조 방법, 2003년 양금 등이 실용신안이 되었다. 실용신안이 15개나 된다. 드디어는 이러한 작업 중에 전기가야금도 태어났다. A."양악기 가운데에는 기타가 음량이 작아 결국엔 마이크의 도움을 받다가 아예 전기 기타가 나와 서양 대중음악을 휘어잡았는데, 국악기의 경우에도 전기를 쓰는 것이 대세는 아니지만 새로운 영역으로 뚫고 나가야 할 것이기에 전기나 전자의 힘을 어떻게 쓰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전자가야금은 처음에는 가야금의 울림통 안에 마이크로폰을 달아서 연결하는 방법이었는데, 이게 각 줄의 음량 차이가 생기고 음이 제대로 잡히지 않지요. 그래서 각 줄마다 센서를 달아서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음이 울리는 문제도 해결되었고요.” Q. 국악이든 양악이든 예전처럼 방안에서 몇 사람만을 대상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가 있고 많은 청중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면서 악기의 성량이 큰 문제가 되었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가장 처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악기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었단다. 박 대표는 아쟁을 기존보다 20% 정도 키워 대아쟁을 만들어 보았는데 이렇게 되니 너무 커서 운반이 문제가 되더란다. 그래서 아쟁에 현침(絃枕), 곧 줄을 묶는 베개를 개발해서 응용을 했고 모든 줄에 조리개를 붙여 음을 맞추는 문제를 해결했다. 또 장식용으로만 있는 부분을 과감히 잘라내어 악기 무게를 줄였다. 이런 식으로 박 대표는 우리 국악기의 90% 이상을 현대적으로 개량해내었다. 그것으로 해서 우리 국악의 음의 표현력이 엄청나게 넓어졌고 대형 무대에서 많은 청중들을 상대로 하는 현대의 연주회의 특성에 따라 음량도 커져서 많은 애호가들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각 악기의 대가들이 자문해주셔서 가능했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국악의 저변이 확대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악기를 만들고 그것을 개량하는 일에 뛰어들었을까? 원래부터 악기를 만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인가요? A."그렇지 않습니다 전북 장수의 평범한 농촌 가정이었습니다. 다만 고향의 아는 형님이 민속 국악기 제작사를 하고 있어서 거기 들렀다가 가야금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다녀왔는데 제가 원래 손재주가 있는 편이어서 가야금 만드는 데서 2년이 안 되게 있으면서 눈으로 보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제 방식대로 직접 제작해보고 싶어서 제 몫으로 집에 있는 논을 팔아서 가건물을 하나 마련해 거기서 죽으라고 연구를 했지요. 세월 가는 것도 몰랐고요. 수많은 악기를 만들었다가 실패해서 깨어버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러다 보니 악기에 대해 원리를 터득하게 된 것이고요.” Q.이처럼 악기에 대한 물리가 터져서 여러 악기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그것들을 현대에 맞게 개량해내자 점차 국악계에서 그의 악기를 선택하는 연주가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의 악기에 대한 평가는 곧 세계문화예술대상, 장영실과학문화상 국악기술대상 수상(2003년) 등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사랑을 받으면서 회사는 가야금과 거문고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국악기를 만들어내었고 그 악기들은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아 많이 쓰이게 되었다. 사업이 늘어가면서 돈도 벌게 되었지만 그만큼 많은 국악 행사에 지원을 해왔다. 중요 공연만이 아니라 국악을 배우고 알리는 많은 기획이나 행사도 궁중 국악기사의 후원을 받았다. 궁금했다. 사람들은 상을 많이 받는다고 악기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역시 소리에 있는 게 아닐까요? A."악기에 쓰는 나무들은 결국엔 잘 말라야 하는 거지요. 잘 마르면 무게가 가벼워져서 아주 맑고 상쾌한 소리가 납니다. 반면에 덜 마르거나 재질이 좋지 않으면 둔하고 탁한 쪽의 소리가 나는 등 소리가 죽습니다. 가야금의 몸체를 한 번 들어보세요. 요즈음엔 이렇게 가볍습니다. 그만큼 잘 말랐다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그렇게 잘 마르지 못한 악기들이 많아서 소리가 일정하지 않았기에, 차라리 요즈음 악기들이 소리가 더 좋습니다. 다만 우리 악기들은 재질이 단단한 나무가 아니어서 서양의 현악기들처럼 수백 년을 가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그런 명품 악기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소나무 등 다른 목재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소리가 못 따라 오더라고요. 우리 음악의 전통과 특성을 따라서 악기도 나오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요” Q.최근 우리 음악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고 국악을 좋아하고 배우려는 젊은이들도 많지만 국악기들이 생각보다는 값이 만만치 않아서 국악 확산에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가요? A."네, 국악을 배우려는 분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고 또 국악도 점점 다양해지고 전문화되어서 악기도 종류가 많아지고 있어요. 아시겠지만 가야금만 해도 정악가야금과 산조 가야금, 18현, 25현 가야금 등 종류가 많고 저음에서부터 중음, 고음 등 영역이 세분화되다 보니 전공하시는 분들의 경제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유통되는 것도 있고요. 그래서 이 가격 부분에서 부담을 덜 수 있는 방법으로 국악기를 만들고 유통하시는 분들로부터 큰 전환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최근 국악 보급이 늘어나면서 악기 수요도 많아졌는데, 저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이용자와 수용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제작 판매량이 적은 분들은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에 획일적으로 이래라저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로서는 방법을 강구하고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보다 많은 분들이 악기를 옆에 두고 늘 그 소리를 듣고 자라야 이 국악이 이 시대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 Q. 악기를 보급하는 입장에서는 더 많은 국악인들이 나오고 그래서 국악의 저변이 확산되는 것을 바랄 텐데, 그런 점에서 북한 국악의 현주소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 남북 간의 협력이 이뤄지면 국악 발전이 더 가속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말입니다. A."물론 남북 간 협력이 이뤄지면 더욱 좋겠지요. 그래서 예전에 통일음악회 등으로 남북 간의 교류 행사도 있었고요. 북한의 경우 국악기의 현대화가 많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에는 남북이 음악 부문에서도 교류가 있어서 서로 악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했는데, 북한의 악기 개량은 무대 위에서 신곡 연주를 위해 성량을 키우고 미세한 음까지 필요로 하다 보니 줄에 철사 등을 사용하고 있더라고요. 북한을 다녀온 박범훈 전 총장의 말로는 북쪽이 현대화에 관한 한 한 20년은 앞서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줄을 보면 우선 철사를 넣고 명주실로 둘러싸는 식으로 만들곤 하는데, 그게 음색이 많이 우리와 달라서 우리 쪽에서는 그리 반응이 좋지 않았고요. 나무도 우리만큼 좋은 것은 쓰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형식은 앞서 가지만 내용이나 품질 면에서는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더라고요. 지금은 남북교류가 끊어졌으니 많이 아쉽지만, 어쨌든 교류를 하고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진정으로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국악으로 같이 발전하는 방안을 찾아야 되겠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으로 살아남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현대인들과 함께 호흡하고 숨 쉬고 함께 위안을 받는 음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국악도 진정한 우리의 음악이라는 영역으로 더 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아무래도 악기를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앞에서도 말이 나왔지만 그 기술이 전해지지 않는 풍토가 있다고 했는데, 앞으로 이 문제가 걱정이 됩니다만? A."다행히 제가 평생을 바쳐 걸어온 이 악기의 세계를 따라오는 아들이 있어 저로서는 덜 걱정입니다. 아들은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대금을 전공했는데 악기 연주를 넘어서서 저처럼 악기를 만들어 보겠다고 과거 저의 젊을 때처럼 10년 이상 밤잠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 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은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예전 제가 하던 것에 비하면 많이 미흡하지요. 이 일은 죽을힘을 다해 도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소리를 담아 놓은 악기를 저렴하게 많이 보급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매번 악기를 개량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서양의 클래식이건 대중음악이건 강력한 소리와 요란한 박자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데 우리는 물론 우리 음악의 특색과 장점을 잘 지켜야 하지만 그런 외부적인 도전에 응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악기 분야에서 더 개량하고 개선할 점이 있는지를 찾아서 본인이 터득해야 합니다.” Q.가을은 음악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박 대표가 만든 악기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책임이 더 막중하게 느껴지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국악 발전을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A."아, 물론 더 공부하고 연구하고 새로 개량하고 개발할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국악을 정말로 부담 없이 사랑하는 날까지, 집집마다 가야금과 거문고 등 국악기 하나씩은 다 갖고 사랑할 때까지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누구나 믿고 사랑해주는 악기를 위해 남은 시간도 소중히 하겠습니다. 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종식되어 많은 공연장에서 우리 국민들이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을, 우리 악기를 통해서 접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후에는 국악의 역사를 알리고 국악기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박물관이랄까 누구나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공연도 볼 수 있고, 할 수 있고, 같이 배우고 즐기고 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설을 갖추고 그것이 자생적으로 운영되도록 준비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그동안 성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긴 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궁중국악기사 주요 연혁 2010's 2017년 해금특허 출원 제10-2017-0120407 2017년 12현 저음대아쟁 개발 2015년 모든 악기 품질개발 악기 가격 현실화 2013년 한국문화재단 명인인증 2012년 12현 대아쟁 개발 2000's 2009년 음픽업장치를 구비한 전자 현악기 특허 제10-1003336호 200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42호 이수 2003년 개량북 개발 2003년 한국예술문화대상 2003년 가야금 실용신안 0326244호 2003년 양금 실용신안 0326243호 2003년 장영실과학 문화상 국악기술 대상 2002년 세계문화예술상 2002년 해금 주화 특허 0038137호 2002년 장식용현악기 제조방법 실용신안 0015989호 2000년 음량조절 해금 실용신안 027763호 2000년 음량조절 가야금 실용신안 0207762호 1980's ~ 1990's 1998년 대금제조방법 특허 0298678호 1997년 10현 중아쟁 개발 1996년 모듬북 실용신안 24649호(조율기 부착) 1996년 거문고9현 -이형환(당시 동국대교수), 9현대아쟁(정계종 국립국악원) 1996년 중앙대 김일륜교수(국립극장 단장)님과 22현 개발 1995년 소금, 중금, 대금, 피리 - 신용춘선생 1995년 고음해금, 저음, 고음가야금 1993년 17현 실용신안 077038호(고 황병주선생 공동) 1993년 가야금줄 실용신안 077038호 1993년 대아쟁 2중 현침 및 조율기 개발 1992년 대금 옷칠 및 자개 장구통, 해금 통 최초 1992년 로구로 기계 도입 해금 통 최초 1991년 개량줄, 키타조율기 17현가야금(황병주) 1989년 저음해금 국립국악원 개량악기 윤찬구씨(저음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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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게 듣다] 판소리의 미래, 전북도 심청가 보유자 장문희(張文姬)에 듣다전라북도는 지난 5월 7일 자로 장문희(45,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 단원)를 송재영(61,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과 함께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로 확정하여 인정서를 교부했다. 그리고 고창군 (사)동리문화사업회는 보유자 인정 기념공연을 7월 3일 개최하고 기념패를 수여 했다. 이번 전북도의 판소리(심청가) 보유자 복수 지정은 2019년 태평무와 승무에서 여러 명이 동시에 지정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도 차원에서 복수로 지정한 것은 처음이므로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장문희는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1995년), 일반부(1998년), 명창부(2004년)에서 모두 장원을 수상한 ‘천재 소리꾼’으로 일찍이 주목받았다. 또한 조선 8대 명창 이날치의 후손이자 동초제 여류 명창 이일주의 조카로서 어렸을 때부터 이모님의 손에 자라며 소리를 배웠다.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절로 떠오르는 듯하다. ‘애기명창’, ‘명문(名門)의 기대주’를 지나고 ‘명창’을 넘어 이제 그 이상을 바라보는 장문희. 보유자 인정서 수령을 앞두고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귀명창이 늘었으면~ 동초제의 맛과 가치를 알리고 싶다 " Q 보유자 지정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두 사람이 동시에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소감이 어떠한가. A 두 사람이 동시에 지정된다는 것이 전북에서는 처음이지만 다른 데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일이라 아주 놀랍지는 않았어요. 제가 지정된 것은 스승이신 이모님께서 제가 올바로 이어받을 수 있도록 잘 가르쳐주신 덕입니다. 함께 지정된 송재영 보유자님도 제 이모님의 제자이신데 이모님께서 그만큼 제자들을 잘 길러내신 것 같아서 기뻐요. 또 제가 보유자로서는 어린 나이이지만, 한평생 한길만 걸어왔다고 자부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높이 사주신 것 같아서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Q 부담도 분명 있을 텐데. A 그렇죠.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전승해야 한다는 무게감, 이모님의 뒤를 올곧게 이어가야 한다는 그런 부담감이 느껴지긴 합니다. 또 우리 동초제를 배우는 후배들이 끝까지 공부할 수 있고 환경적인 요건도 잘 마련해주고 싶다 보니 책임감과 부담감이 적지 않습니다. Q 함께 지정된 송재영 보유자와 비교할 때 자신만의 특징은 뭐라 생각하는가. A 이모님과 가장 흡사한 것, 가장 닮은 것이죠. 이모님의 표목이라는 게 있어요. 이일주 선생님의 수리성과 철성, 또 감정 표현할 때의 호흡조절, 소리의 이면, 수리성으로 소리의 이면을 완성해내는 기술…. 그런 것들이죠. 핏줄이니 얼굴도 닮았고 자세도 그렇고요. (웃음) Q 그렇다면 이모님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A 글쎄요. 어릴 때부터 제가 소리를 하면 영락없이 이모님 같다는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 왔어요. 입 모양, 발림, 표정까지 어찌 그리 이모님과 똑같냐고요. 한 번은 제가 소리를 하니 이모님도 따라 부르셨는데 제가 봐도 숨 쉬는 모습, 배에 힘주는 모습이 똑같은 거예요. 이모님께서도 저보고 "너는 어째 나와 입 모양, 혀 붙임까지도 똑같냐.” 말씀하셨었죠. Q 그래도 차이점을 꼽는다면? A 음, 목소리나 아니리에서의 감정 표현에서 이모님이 더욱 숙성되셨다면 저는 젊은 면이 있다는 게 다른 듯해요. 그가 제30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명창부 장원을 수상했을 때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오랫동안 지켜봐 온 유영대 고려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얘기한다. "장문희 보유자를 이일주 명창과 비교한다면 거친 부분이 없다는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아주 꾹꾹 눌러서 부르기 때문에 감정적인 표현 부분에서 단아하고 차분하며 정성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이모와 가장 닮았지만 자신만의 개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시대 여류 명창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극찬은 덤이었다. 인정서 수령만을 앞둔 시점에서 보유자로서의 다짐과 입장은 어떤지 궁금했다. Q 보유자로서의 각오가 궁금하다. A 예전부터 저는 지속적으로 완창 공연을 하려 노력해왔어요. 제 나이 또래에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 일이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를 완창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완창무대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고 우리 후배들도 같이 완창무대를 많이 설 수 있도록 기회를 많이 주고 싶어요. 우리 판소리 본연의 맛과 가치를 보이고 동초제의 이름을 더 널리 알리겠다는 게 각오입니다. Q 후배 양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 보인다. A저는 문화재로 지정된 게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일을 하라고 이런 자리를 주신 것 같기도 하거든요. 종종 이런 경우도 있어요. 자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거나 무언갈 이뤘다고 생각하면 본인의 멋에 취해서 본연이 아닌 변형된 것으로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Q 맞다. 속된 말로 ‘쿠세’라고 하지 않나. A 네. 안 좋은 버릇 같은 거죠. 저는 그런 것들을 계속 경계하면서 저의 뿌리를 흔들림 없이 지키고 후배들에게도 그대로 물려주고 싶어요. 우리 음악을 좀 더 제대로 올곧게 전승시키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해요. Q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변치 않겠다는 의지인가. A 그렇죠. 저는 제 삶이 판소리라고 생각해요. 6살 때부터 판소리만 해왔거든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소리가 지금도 힘들고 어려워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어떤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보이기 시작해요. Q 힘들고 어렵다 해도 오랜 세월 함께한 만큼 친근하기도 할 텐데. A 맞아요. 음… 말하자면 친구죠. 소리는 친구예요. 제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게 소리인 것 같아요. 제가 살아오면서 여러 인연을 맺어왔지만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건 역시 소리였어요. 순간과 순간, 과정과 과정에서 너무 힘들기도 했지만 제가 노력한 만큼 그 대가… 그 결실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건 소리뿐이었죠. 가장 저를 힘들게 한 게 소리였지만 그 힘든 것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것도 소리였다고 할 수 있어요.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게 사람도 아닌 소리였다는 장문희. 자신을 가장 힘들게 만든 소리였지만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던 것도 소리 덕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소리와의 동고동락이 아닌가. 명문 명맥의 후계자로서 그에게 지워진 부담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문득 그가 어떻게 소리 생활을 시작했는지, 어떤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는지 궁금해졌다. "조카지만 항상 다른 제자들과 동등하게, 어떨 때는 더 엄격하고 혹독했습니다." Q 소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가. A 제가 서울 방배동에서 태어났어요. 3~4살쯤에는 아버지 본적인 강원도에서 지냈는데, 6살 때 어머니께서 어떤 일이 생기셔서 청주로 잠깐 갔어요. 그러다가 그해 겨울 판소리를 배우러 이모님 댁에 혼자 가게 됐지요. 왜 가게 됐냐 하면 당시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렵기도 했고 이모님께서도 당신을 이을 만한 제자를 곁에 두고 직접 키우고 싶어 하셨어요. 또 나중에 중학생이 돼서야 알게 됐는데 어머니께서도 원래 국악을 하셨대요. 그런데 결혼하면서 꿈을 못 이루게 됐으니 딸인 제가 대신 이뤄주시기를 바란 마음도 있었겠지요. Q 어머니께서도 국악을 하셨다니 놀라우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머니께선 무얼 하셨나. A 어머니께서 젊은 시절에 소리도 하시고 무용도 하시고 장구도 치시고 두루 잘하셨대요. 어머니와 이모님을 모두 아시는 분 원로 선생님 중에는 이모님보다 좋았다고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하지만 저를 낳으신 뒤로는 생업으로 바쁘셔서 국악을 놓으셨다고 해요. 그렇다 보니 이모님께 가기 전에는 국악을 접해보지 못했어요. 이모님께서 무얼 하시는지도 몰랐었죠. Q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소리를 배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A 가족과 떨어져 이모님 댁에서 생활하면서 소리를 배웠지요. 저희 이모님께서 엄청 엄하셨어요. 어린 조카이지만 살갑게 대해주신 적이 많지 않았지요. 조카지만 항상 다른 제자들과 동등하게, 어떨 때는 더 엄격하고 혹독하게 하셨어요. Q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A 이모님께서는 항상 엄하셨지만 그러시다가도 한 번쯤, 예를 들어 제가 아플 때면 새벽 일찍 일어나셔서 정성스레 죽을 쒀 주곤 하셨어요. 또 제가 상을 받거나 하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아주 기뻐해 주셨는데, 그럴 때면 이모님의 사랑과 애틋함을 느끼곤 했지요. 이런 것들이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Q 부모님께 돌아가고 싶은 적은 없었나. A 어릴 적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홀로 던져진 채로 배우기 시작했지요. 힘들었지만 어떤 출구도 제겐 없었어요. 이모님 집에서 나갈 수도 없고 다른 걸 할 수도 없고 말이죠. 만약 어머니께서 곁에 계셨다면 소리를 포기했을 것 같아요. 제가 전주에 내려가고 어머니를 다시 뵌 게 중학생 때였거든요. 전주로 이사 오셔서 종종 뵐 수 있게 됐는데, 그전에는 통화할 수도 없고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많이 힘들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나 제가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Q 정말로 포기할 뻔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A맞아요. 변성기 때였지요. 14살쯤에 변성기가 왔는데 ‘내가 내 목소리 하나 마음대로 못하는데 이걸 어떡하지?’ 싶었어요. 벽에 부딪쳤달까요. 그래서 그냥 ‘나 소리 안 해.’하고 한 번 놨던 적이 있어요. Q 어머님과 이모님께선 반응이 어떠셨나. A 엄마도 이모도 그럼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몇 달 정도 이모님 댁에서 생활은 계속하면서도 소리는 쉬고 있었는데 언젠가 갑자기 ‘아, 소리 하고 싶다. 저 무대에 내가 서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됐어요. 신기하죠? 지금 돌아보면 제가 다시 소리할 거란 걸 두 분 다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아무튼 그때를 계기로 소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내가 정말 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네요. Q 타의로 시작한 소리 생활이 자신의 뜻으로 바뀐 것인가? A맞아요. 그렇지만 이모님의 칭찬도 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상을 타면 받는 상장과 상금도 좋았지만, 이모님께서 제 소리를 인정해주시고 "아이고, 내 새끼”라며 엉덩이 한 번 토닥여주시고 어깨를 어루만져주실 때… 저는 다른 거 다 필요 없었어요. 이모님의 칭찬이 저에겐 가장 큰 선물이었고 10년, 20년 지나다 보니 어느새 장문희라는 사람에게 소리는 삶 그 자체가 되었던 것 같아요. Q 처음으로 참가한 경연대회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A 9살인가 10살에 여수진남제(현 여수진남전국국악경연대회)에 나갔어요. 그때 인기상을 받았는데 위아래로 노란 한복을 입고 소리를 했죠. 이모님께서 북을 쳐주셨어요. 무대에 서니 많이 떨렸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니 주변에서 많이 칭찬해주셨고, 이모님께도 좋아하셨어요. 이후로도 대회에 참가해서 좋은 성적이나 반응을 얻으면 이모님께서 흡족해하시다 보니 더 예쁨 받고자 소리를 열심히 하게 됐죠. "춘향가를 부르면 춘향가가 좋고 심청가를 부르면 심청가가 좋아요. 어떤 바탕이 좋기보다는 소리 자체가 좋아요.” Q 심청가로 보유자에 지정됐지만 처음 배운 것은 춘향가라고 알고 있다. A네. 6살 때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게 춘향가였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춘향가를 떼게 됐고, 다음으로 배운 게 심청가였어요. 이후에도 하나씩 배울 때마다 새롭게 반하게 됐어요. 바탕마다 목 쓰임과 감정에 차이가 있고 고유의 매력이 있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Q 가장 좋아하는 바탕을 꼽자면 무엇인가. A 춘향가를 부르면 춘향가가 좋고 심청가를 부르면 심청가가 좋아요. 어느 하나를 고르기가 힘들죠. 어떤 바탕이 좋기보다는 소리 자체가 좋아요. Q 이후에는 어떤 바탕을 배웠나. A 중학교 때 심청가를 뗐고, 고등학생 때 흥보가, 대학생 때 수궁가, 그리고 대학원생 시절에 적벽가를 배웠지요. 앞서 배운 네 바탕은 모두 이모님께 배우고, 적벽가는 안숙선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Q 적벽가만 다른 분께 배운 이유가 있는가. A 제가 대학교 졸업을 앞두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곳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준비도 많이 하고 노력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합격했는데, 학교에 가보니 안숙선 선생님께서 교수님으로 계셨지요. 그런데 당시에 제가 안 배운 바탕은 적벽가뿐이었어요. 다른 바탕을 배우게 되면 ‘바디’와 ‘제’가 겹칠 우려가 있었거든요. Q 이모님께서는 뭐라 하셨나. A 이모님께서도 적벽가를 배워보라고 권유하셨어요. 배우고 나서 이모님께 들려드리니 안숙선 선생님의 적벽가가 제게 잘 어울린다고 말씀해주셨죠. Q 이력을 보니 중학교와 대학교는 전주에서 나왔는데,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졸업한 것이 의아하다. A 일찍이 예술전문 학교에 대한 열망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때였는데, 당시 전주에는 예고가 없다 보니 서울로 진학하고 싶다고 이모님께 말씀드렸지요. 하지만 금전적인 문제, 어린 나이에 독립하는 문제 등으로 결국 전주의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학생부 차상을 받게 됐는데, 당시 서울국악예술학교의 이사장이셨던 박범훈 선생님의 도움을 통해 3학년 때부터 서울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로 가게 됐습니다. Q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왜 다시 전주로 내려갔나. A 박범훈 선생님께서 다른 대학은 시험도 보지 말라면서 중앙대학교에 입학하라고 권유를 해주셨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면서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지요. 실기시험 때 참가자들 중에서 오직 저만 심사위원분들로부터 추임새를 받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합격할 거라 내심 기대를 했는데 아니었던 게지요. Q 충격이 컸을 것 같은데. A 그때 다시 한번 저를 돌아보게 됐어요. 승승장구만 했으니 자칫 기고만장할 수도 있었는데 그때는 뭐 충격이었겠지만 지금 보면 약이 된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다른 대학을 알아보려 하니 서울에 오래 있으면 소리가 정체될 수 있다고 이모님께서 걱정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모님께서 출강하시던 우석대학교로 가게 되었지요. Q 이모님께 배운 것과 학교에서 배운 것은 어떻게 다르던가. A 실기적인 부분에서는 이모님께 배우는 것을 어떤 것도 따라올 수 없어요. 다만 소리의 역사라든지 이론적인 부분들은 학교를 통해 많이 깨우칠 수 있었지요. 또 이모님의 소리 외에 다른 선생님들의 소리를 접하기도 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어요. 2004년 그는 제3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 참가하여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수상하였다. 학생부와 일반부 장원에 이어서 이른바 삼관왕에 오른 것이다. 국악계에 전무후무한 성과였다. 그런데 이보다도 놀라운 것은 장년들이 주로 참여하는 명창부에서 스물여덟이란 나이로 받은 최연소 장원이란 점과 더불어 심사위원 7명 전원으로부터 만점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대회 측에서는 명창부 참가자의 연령을 제한하기로 규정을 바꾸었다. 크나큰 충격이었다. "성인으로서 숙성된 저의 소리와 가능성을 다른 분들께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Q 2004년 전주대사습놀이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이모님께서 참가를 반대하셨다던데. A 그러셨어요. 처음에는 반대하셨지요. 명창부치고는 어린 나이였거든요. 바로 전년도에 이모님의 다른 제자인 송재영 선생님께서 장원을 하기도 하셨고요. 한 스승의 제자가 연달아 수상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나가고 싶다고 이모님께 거듭 말씀드렸어요. Q 고집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A 애기명창들이 오래 못 간다는 말이 있어요. 어릴 때 잘하던 소리꾼도 성장해서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죠. 저는 그런 한계를, 그 고비를 넘어서고 싶었어요. 성인으로서 숙성된 저의 소리와 가능성을 다른 분들께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꾸준히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혹 무대에서 실수하더라도 꼭 도전해보고 싶다고 피력했죠. 결국 허락해주셨어요. Q 어떤 대목을 불렀나. A 예선에서는 ‘천지삼겨’를, 본선에서는 ‘오리정 이별 대목’을 불렀어요. 대회 규정상 추첨으로 (부를 대목을) 뽑는 거라 뭘 부르게 될지 미리 알 수 없었어요. 그런데 춘향가 중 제가 연습 당시 특별히 좋아했던 대목들이 추첨에서 나왔어요. 행운이었죠. 아마도 이모님 덕이었던 것 같아요. Q 이모님 덕이라니? A 이모님께서 종종 ‘운수패’라고 해서 화투패로 점을 치셨거든요. 그날 아침도 이모님께서 제게 화투패를 고르게 하셨는데 돼지와 학을 뽑은 기억이 나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풀이해주셨죠. 사실 그날따라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평소에 좋아했던 대목이라 떨지 않고 초연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결국 최연소, 최고점 장원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A 기쁨은 찰나였어요.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점수가 하나둘씩 공개될 때에는 좋았지요. 그런데 일곱 분 모두에게 99점을 받고 나서는 두려움이 확 밀려왔어요. 더 잘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아주 막중하게 느껴졌어요. 저를 인정해주신 분들께 절대 누를 끼쳐선 안 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Q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했던 건 아닌가. A 아뇨. 전혀 아니에요. 혹시라도 ‘변했다. 연습 안 한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어요. 더 실력을 갈고 닦으면서 전통 본연의 것을 계속 고수해야겠다고 느꼈어요. 그렇다 보니 지금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같아요. 지금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같다는 말에, 그의 어깨에 지워진 중압감과 부담감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천부적인 소리꾼으로서 평탄하게 살아온 줄 알았건만 그에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화려한 집안 내력과 수상 경력 뒤에는 무겁고 짙은 그림자가 있었다. 삶의 대부분을 소리와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경주마처럼 오직 소리에 집중하며 달려온 나날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룰 수 있던 성취임을 알 수 있었다. Q 음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 춘향가로 판소리를 시작하고 명창부 장원을 수상했는데 첫 음반으로는 심청가를 선택했다. A 이모님께서 심청가 보유자이시니까요. 가문을 이어야 하다 보니 심청가를 선택하게 되었죠. 제가 자리매김하려면 이모님의 소리인 심청가로 무대를 많이 해야 했지요. 그래서 여러 공연과 발표회에서 심청가를 부르고 음반도 자비를 들여서 내게 됐습니다. Q 음반제작 작업은 어떻게 했나. A 2017년 M-net의 ‘더 마스터’라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작곡가 김형석 선생님과 친분이 생겼는데, 그분의 스튜디오를 빌려 녹음했어요.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셔서 다음 음반 녹음에도 부탁드릴 생각이에요. Q 다음 음반 녹음이 예정돼있는가. A 네. 춘향가를 녹음할 계획이에요. 올해 예정된 순회공연과 정기공연이 끝나면 아마도 10월부터는 녹음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내년 늦어도 내후년 상반기까지는 녹음을 마칠 계획이고 이후로도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를 차례대로 작업해서 나머지 네 바탕의 음반을 한 번에 출시할 계획입니다. 다만 적벽가는 안숙선 선생님께 배운 박봉술제로 녹음할지 이모님의 동초제로 할지 둘 다 할지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어요. Q 다섯 바탕을 모두 음반으로 낸다는 게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A 맞아요. 그래서인지 특히 여류 소리꾼 중에 다섯 바탕 모두 음반을 내신 분들은 극히 드물죠. 하지만 이모님께서 다섯 바탕 모두 음반을 내셨으니, 저도 다섯 바탕 모두 내는 게 오랜 목표였어요. 이모님의 길을 따라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또 저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자 공부인 셈이기도 하고, 제가 이렇게 도전하고 공부한 결과를 후배들을 위해 자료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어요. Q 출시가 기다려진다. 장문희 보유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전설적인 명창 이날치의 후손이다. 핏줄과 명맥에 대해 실감해본 적 있나. A음, 이날치 할아버님께서는 한 시대를 풍미한, 아주 대단한 분이시죠. 그분이 남기신 예술의 아득한 경지… ‘과연 나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대단하세요. 하지만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이라 떠올리면 사실 막연해요. 이날치 할아버님은 글 속에서나 뵀지. 제가 직접 느끼고 배운 분은 이모님이니까요. Q ‘이날치’ 밴드가 큰 화제이다. 이처럼 퓨전국악이 최근 대중에게 주목받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A 이날치 밴드에게는 감사하죠. 국악이 생소한 대중들에게 퓨전국악이 전통음악을 이해하는 좋은 발판이 되기 때문이죠. 또 이날치 밴드가 좋은 활동을 함으로써 가문이 더 알려진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이날치 밴드는 이날치 밴드고 장문희는 장문희잖아요? Q 그렇다. 장문희는 장문희이다. A 요즘의 퓨전국악들도 중요하지만 저는 전통을 있는 그대로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물론 듣고 싶은 음악을 선택하는 건 대중의 권리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음악의 뿌리는 국악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주었으면, 가끔은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봐 줬으면 좋겠어요. 전통음악의 맛을 알려면 결국 익숙해져야 하거든요.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고 국악을 찾아봤을 때, 전통음악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어렵고 알아듣기도 힘들지만 계속 듣다 보면 판소리만의 깊은 울림이 있다는 것을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리고 싶네요. Q 판소리의 가치와 울림을 알린다는 게 장문희의 꿈인 건가. A 예, 꿈이라기보다는… 꿈으로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옛날에는 ‘귀명창’이라고 해서 소리꾼과 같이 함께 울고 웃고 대중들이, 관객들이 많았어요. 같이 호흡하는 분들이 참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분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Q 코로나19로 공연환경이 위축되니 더욱 그런 듯하다. A 네. 그런 분들이 많이 계셔야 소리하는 입장에서도 더 재미있고 보람도 생기는데 너무 아쉽습니다. 이런 분들이 다시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소리꾼들이 설 수 있는 자리도 더욱 많아져야 하는데 이런 과정에 제가 보탬이 되었으면, 저로 인해서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게 꿈이에요. Q 마지막으로 ‘장문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요즘은 다 ‘빨리빨리’를 선호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소리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깊이 들어가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거든요. 저도 아직 소리가 힘들어요. 힘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힘들 거 같아요. 하지만 양면적인 거거든요. 힘들고 어려울수록 이겨냈을 때 오는 행복, 카타르시스가 큰 것 같아요. 도전해서 극복했을 때 오는 성취감인 거죠. 그러니 후배들도 절대 성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차분하게 이어가기를 당부하고 싶어요. 판소리 명가 출신, 전주대사습놀이 삼관왕, 최연소 심사위원 전원 만점 명창부 장원, 전북도 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 소리꾼으로서 꿈꿀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룬 듯하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강조한 바가 있다.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보인다고. 당장의 목표는 남은 네 바탕의 음반 출시라고 한다. 음반 취입이라는 ‘고비’마저 넘었을 때 과연 그에게 또 어떤 ‘고비’가 나타날까. 그리고 그 ‘고비’를 넘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명창에서 더 큰 길로 나아가려는 이가 길을 찾지 못한 채, 중압감에 넘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다시 ‘고비’를 넘어서면서 안겨줄 놀라움과 벅찬 감동, 우리 판소리의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백년에 한번 나온다는 소리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국악계를 밝히는 별, 장 문 희! 자문: 정문교 국악신문 고문/ 유영대 고려대 교수/최동현 前 군산대 교수 교열:조용상 위원 수상 1994년 12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판소리 부문 차상 1994년 10회 동아 콩쿠르 학생부 판소리 금상 1995년 13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판소리 부문 장원 (교육부장관상) 1998년 24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 장원 (문화체육부장관상) 2001년 제1회 공주전국명창·명고대회 판소리 명창부 대상 (국무총리상) 2004년 3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 부문 장원 (대통령상) 2012년 전주MBC 광대전 시즌 1 준우승 2015년 전주MBC 광대전 시즌 4 왕중왕전 명창대첩 우승 2017년 Mnet 더 마스터 우승 (4회, 5회 그랜드 마스터) 경력 장문희 판소리연구소 소장 난석 이일주 전수관 ‘난석당’ 관장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단장(2002년 5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심청가 보유자(2021년 5월 7일) 학력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졸업 우석대학교 국악과 졸업 한예종 전통예술원 전문사과정 수료 음반 단독 2019년 "장문희 심청가 동초" (완창 앨범) 2019년 "이화우 흩뿌릴 제" (싱글) 참여 2017년 "더 마스터 - 음악의 공존 Part.3" - 이몽룡아 (Duet. 샵건) 2017년 "더 마스터 - 음악의 공존 Part.2" - 하늘이여 2007년 "단심(丹心) 국악방송 새음원 시리즈" - 장문희 단가-적벽부, 사철가, 초한가 2004년 "판소리 EAST TO WEST" 세계 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 걸작선정 음반 공동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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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성 인물사] 국악발전의 어머니 박귀희국악발전에 모든 것 희사 2011년 11월 3일 인구 11만의 경북 칠곡에 우리나라 국악인들이 총출동하다시피 다 모여들었다. 2011 향사香史 박귀희朴貴姬(1921.2.6~1993.7.14) 명창 기념공연 「국모」에 출연하기 위해 선생의 후배, 제자, 국립전통예술학교 재학생, 동국대 관현악단 등이 천리길을 마다 하지않고 내려온 것이다. 20세기 국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국악의 어머니를 기리는데 두 마음은 없었다. 국악계의 은인을 위해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한 창설자를 위해서, 바쁜 시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두들 기꺼이 내려온 것이다. 향사 박귀희는 어떠한 남자들도 해내지 못했던 문화예술계의 크고 다양한 일들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양악에 밀리는 국악의 발전을 위하여 또 소외된 여성국악의 활성화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부한 여장부다. 가히 국악 발전의 어머니 역할을 다한 국모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적통이 아닌 서얼 출신에 무당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국악학교 설립이라는 소망을 세웠고, 그 원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희사한 참인간이다. 박귀희는 한국의 혼이 담긴 국악을 사랑하고 키운 우리나라 국악사의 빛나는 스승이다. 여성이지만 국악인으로서의 민족음악의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한 전무후무한 경북여성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공간과 6·25를 지나오면서도 민족정신을 되살릴 새로운 시작은 국악뿐이라는 것을 박귀희 명창은 이미 알았던 것일까? 박귀희 명창은 이화중선의 소리를 들으면서 넋을 잃었고, 그 가락을 잡으려고 소리판에 들어섰다.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는 선택이었고, 한 사람의 뛰어난 선택이 우리 국악계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라났다.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안달이 났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해방이 되어도 국악인들에 대한 냉대와 멸시는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 신탁통치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양악은 선풍적으로 확산되었고 국악은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양악이 우리 민족과 함께 반만년을 흘러 온 국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낼 듯 확산되어도 국악인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저 속만 태울 뿐이었다. 당시 국악인들은 해방 나흘만인 1945년 8월 19 일에 대동단결하여, 민속음악을 올바른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국악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해방을 맞이하여 국악인들은 희망에 부풀어 국악중흥운동을 펼쳤으나 냉대받고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한 창랑 장택상은 달랐다. 장택상은 박귀희의 친아버지 장병관과 한 집안으로 국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국악인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것으로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 교장 기산 박헌봉은 『국악운동 반생기國樂運動 半生記』에 적고 있다. 여러 해 외국생활을 했던 장택상은 구수한 된장찌개나 깍두기만큼 맛있는 음식은 먹어보지 못했고, 우리 국악같이 흥겨운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국악을 사랑했다. 창랑의 도움으로 박귀희는 국악 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감상회를 열었다. 이때 박귀희, 김소희 명창의 판소리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하루 저녁 감 상회를 계기로 국악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되었고, 본격적인 학교설립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대 내각도 외면하고, 6·25도 터지면서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러갔다 국립전통예술학교를 세우다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이사장 박귀희는 1955년 김소희와 함께 서울 돈암동 적산 가옥 7백평을 불하받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다. 무용과 기악, 창 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한국민속예술학원이 사립 국악예술학교의 전신이다. 3 년동안 약 380명의 학생이 모여들자 국악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를 세워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전남방직 김용주 회장, 삼양 사 김연수, 경성방직 김용완 사장,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윤병호 서울은행장,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 등 각계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건평 5백평 규모의 신축 관훈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60년 3월 5일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개교한 사립 국악예술학교는 5천 년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악예술학교로 그 중요성을 지닌다. 1964년 4월 15일 윤태일 당시 서울시장의 호의로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는 남산으로 이전하였 다.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사무실로 쓰던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치나 규모가 한결 나았고, 주변 민원의 소지도 줄었다. 그해 7월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 악관현악단을 창설하였다. 1968년에는 돈화문 앞으로 옮겼다가 1970년 9월 30일 서울 석관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84년 12월 17일에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2년 10월 29일에는 석관동에서 서울시 금천구 시흥3동 산 24-17번 지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2002년 3월 2일에는 서울특별시교육청지정 자율 학교가 되었다. 전통예술학교는 박범훈, 김성녀, 김영임, 오정해 등 걸출한 졸 업생들을 배출한데다 국악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08년 3 월 1일 사립에서 국립으로 전환되었다. 국악예술학교가 1970년에 서울 석관동으로 이사한 후 박귀희는 운동장이 없 는게 마음에 걸려 1989년 서울 운니동에 있던 자신 소유의 운당여관을 국악예 술고등학교 이전 비용으로 내놓았다. 석관동 교사 판매 대금 20억원에다 박귀 희 명창이 살던 사저 운당여관 그리고 명창의 대전 과수원까지 판 전 재산 38 억원으로 전통국악예술학교는 1992년 금천구 시흥2동의 넓은 땅으로 이주하 게 된 것이다. 전통예술학교가 넓은 교사로 옮긴 것은 더없이 축하할 일이나 서울의 전통 숙박시설 명소로 사랑받던 운당여관이 헐린 것은 너무 아쉬운 일 이다. 박귀희 명창의 고택이 된 운당은 척박하던 195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보금자리이자 국수전이 열리던 바둑 대국장이었다. 운 당이 박귀희 명창의 소유가 된 것은 1951년이다. 원래는 조선 순조 때 궁중 내 관이 왕으로부터 목재를 하사받아 지은 양반 가옥이었다. 여기에 구한말 세 도가였던 한상억이 한옥을 사들여 1958년부터 구름집을 뜻하는 운당雲堂으 로 이름지었다. 서울 경기지방 정통 사대부 가옥을 보여주는 운당은 종로의 명소로 알려져있고, 박귀희는 이 집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운당여 관은 문화예술인들의 놀이터이자, 한국가옥의 곡선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 다. 1989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국악예술학교에 기증된 후 헐렸던 운당여관은 1994년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서울종합촬영소 내에 복원되었다. 국모 박귀희 명창이 기산 박헌봉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보듬고 민족음악을 보존하기 위해 뿌린 씨앗은 이제 개교 반세기를 넘어 반만년 민족정서를 싣고 있는 우리 음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첫 국악교육기관으로서 뚜렷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국립전통예술고에서는 향사 박귀희의 예술관이 실천되고 있다. 박귀희는 예 술을 공부하려면 먼저 인성을 닦고 예능을 공부해야하며, 예술인은 기예 뿐 아니라 학식도 겸비해야한다고 강조하였고 몸소 실천하였다. 박귀희 명창의 국악살리기는 완전히 자유의지로 시작되었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국악에 는 없던 가야금 병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낸 자유의지의 발로이자 전 인미답의 신개척지를 찾아나선 것이다. 소리로 풀어내야 할 출생스토리 박귀희 명창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하판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영심으로 친아버지는 장병관, 인동 장씨 집안이다. 장병관은 기골이 장대하고 말도 잘하며 돈도 많았다고 한다. 알아주던 대농이었던 칠곡 갑부 장병관이 경영하던 술 도가는 6·25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다. 장병관은 아들을 얻지 못하자 아랫 마을 속칭 탑고개에 살던 큰 무당 박금영(박귀희의 친어머니)과 동거했다. 장병관은 박금영이 딸을 낳자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딸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당으로 사는 삶의 지난함을 알고 있는 박금영은 처음에는 어린 박귀희 즉 장영심을 자신의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장병관은 혼인 외 딸이라고 해서 외면하는 바람에 박귀희는 인동 장씨 호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후 친모 박금영이 오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하자 오씨 호적에 오계화라고 올렸으나 박귀희는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오씨 성을 따를 수 없다면서 어머니 성을 따랐다. 상당히 앞서서 주체적인 생각을 보인 셈이다. 이후 장영심 즉 오계화는 국악에 입문하면서 지은 귀희라는 예명에 어머니 박씨 성을 붙여서 박귀희가 되었다. 한국 국악계의 대들보 역할을 한 명창 박귀희의 이름 세 글자에 출생에 서린 애환과 신분 차별의 굴레 그리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인간승리의 의지가 서려있다.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는 가야금과 무관하지 않은 배경을 안고 태어났다. 박귀희는 능력있는 아버지를 두었으나, 축복받는 출생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혼외 자식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태어난 박귀희의 인생 고민과 고뇌는 일찍 싹텄을 것이며, 그것이 깊은 예술적인 공명으로 승화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어찌보면 박귀희와 국악과의 인연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닐곱살쯤 철이 들만하자 어머니는 박귀희를 대구 봉산동 외가로 보냈다. 대구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무성영화를 처음 접하였다. 이때부터 예술세계에 대한 동경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향토음악사를 정리한 손태룡은 박귀희가 대구에서 달성권번과 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1931년 11세때 대구극장에서 열렸던 조선성악연구회 공연을 보면서 예술적 자질이 움트기 시작했다. 박귀희는 권번 담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은 것을 따라하다가 손재광 앞에서 단가를 부르게 되었다. 손재광은 그래 쓰겄다. 너 소리 배워라고 한마디를 던졌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 셈이다. 손재광이 어린 박귀희에게서 소질을 캐냈다면, 첫 스승은 박지홍이다. 박지홍으로부터 판소리와 「화초사거리」 등을 사사받았다. 박지홍은 나주 출신으로 명창 박기홍과 종형제간이었다. 이화중선의 소리에 홀린 듯 빠져들다 박귀희가 데뷔를 한 것은 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14세 때 달성권번 손광 재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이화중선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화중선 (1898~1943)은 김초향과 더불어 그 시절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열일곱살 때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홈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였으나 협률사 공연을 보 고 홀리듯 집을 나가 장득주에게 판소리를 배운 이화중선은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을 지닌 여류명창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화중선은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지방 순회공연에 이어서 일본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1943년 재일동포 위문 공연 도중 별세하였다.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이 대구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손광재가 박 귀희를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다. 박귀희의 소리를 들어본 이화중선은 바로 입단을 허락하였다. 박귀희가 대동가극단에 입단한 것은 1934년이었다. 대구극장에서 「소상팔경가」로 공식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대동가극단과 일년여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은 쌓았지만 오태석의 가야금 병창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생겼다. 토막 판소리에 만족하지 말고 명창이 되려면 제대로 소리를 배워야한다고 결심하고 대구로 내려온 박 귀희는 한국 소리계의 대부들을 찾아서 가르침을 받았다. 박지홍에게 「춘향 가」와「화초사거리」,「보렴」,「편락」을 배웠다. 15세이던 1935년에는 강태홍에게 가야금과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고, 승무, 박전무, 검무, 살풀이 등을 김남수에게 일년간 배웠다. 16세 되던 1936년 여름에는 대구 화원 용연사에서 박기홍의 의발衣鉢을 받은 조학진에게 백일 공부를 하면서 「춘향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백일공부는 불가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듯이 암자나 절에 스승을 모시고 들어가 성음의 경지를 터득하는 것을 말한다. 국악인들은 이렇게 절에 들어가서 소리공부 하는 것을 흔히 도야陶冶라고 하고 소리공부는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과 똑 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세 차례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 11시에 잠드는 시간까지 마치 좌선하듯이 소리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박귀희 명인의 가장 큰 특징은 국악에는 없던 가야금 병창의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는 사실이다. 한때 불이익 가야금 병창 광범위한 사랑받아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야금 병창대회에 나가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가야금을 뜯으면서 노래를 하는 새로운 연주 방식인 가야금 병창에 대해서 기존 국악계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최 근에는 이런 일들이 사라져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지만, 한 동안은 가야금 병창은 금지된 예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야금 병창은 대중의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창을 하며 가야금을 뜯는 병창은 마치 서양 아티스트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처럼 대중속으로 스며들었다. 박귀희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제 가야금 병창은 국악계의 대표적인 장르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18세에는 전남 담양에서 박동실 선생을 모시고 두 번째 백일공부에 들어가 「흥보가」,「심청가」를 배웠다. 박동실과 공부를 마친 다음해인 1939년 19 세 때는 유성준을 모시고 경북 하동군 쌍계사에서 세 번째 백일공부를 하면서 「수궁가」한바탕을 배웠다.3) 공부를 마친 박귀희는 대동가극단으로 다시 들 어가려 했으나 대동가극단이 일본 공연을 떠난 터라 종합예술단체인 한양창 극단에 입단하였다. 이때가 17세인 1937년이었다. 스승인 오태석과의 만남은 한양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시작되었고, 공부 장소는 봉익동 대각사 근처 익선 동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년을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다. 오태석은 목청이 좋고, 판소리 한바탕을 가야금 병창으로 노래할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후 박귀희는 한양창극단을 거쳐 임방울, 박초월 등과 함께 1943년 동일창 극단을 재창단하여 동일창극단 단장을 맡았다. 동일창극단은 창작창극 「일목장군」 등을 공연하였다. 창작창극은 신파조에 창을 혼합한 형식으로 아직 창극다운 창극을 접해보지 못했던 시민들은 새로운 형식의 창극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동일창극단의 성공작인 「일목장군」에서 박귀희는 남자주인공을, 박초월은 여자주인공을 맡았다. 미모에 연기력까지 뛰어났던 박귀희가 남자 역으로 분장한 선화공주는 대히트를 쳤다. 창극에서 여자가 남자역으로 출연한 것은 박귀희가 시초이다. 동일창극단은 서울 공연이 끝나면 계속 지방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였으나 광복되던 1945년 부산에서 해산되었다. 박귀희는 가야금 병창 무형문화재였지만 여창남역 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0대에 국악학교 설립의 뜻을 품다 1945년에는 여성국극단의 효시인 여성국악동호회를 창설하고 상무이사로 피임되어 활동하였다. 창립공연으로 「옥중화」 이후 1949년 2월에 공연된 햇님과 달님의 성공으로 여성국극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단 하나의 작품으로 단 1년만에 전국을 뒤흔들어놓고 뚜렷한 대중예술장르로 자리를 굳힌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드물다. 적어도 1950년대는 여성 국극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국극의 대유행으로 종래의 창극단들은 거의 사라졌다. 여성국극단이 초기의 음악극으로서 공연적인 성취보다 남녀간의 사랑 등을 확대하며 인기를 좇아 변질되자 박귀희는 여성국극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다. 여성국극단은 1960년을 전후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5·16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기존 국립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무용단 외에 국립국극단을 더 두게 되었다. 박귀희는 국립국극단 창 단을 앞두고 자격있는 국극인을 양성하는 국극요원양성소 개설을 거론할 정도로 국극단 창단에 음양으로 기여를 하였다. 국립국극단은 1973년부터 국립 창극단으로 바뀌는데, 이때 박귀희는 단장(1980~1982)을 맡았다. 1960년대 들어 문화의 소용돌이가 거세지자 박귀희는 일본 교포 위문공연 으로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일본에서 고생하며 살던 교포들에게 우리 음악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풀어내기에 안성마춤이었고 이런 심리적인 현 상을 박귀희는 잘 알아차렸다. 1961년 일본 거류민단장 박수정의 제의에 따라 동경에 무악원을 세웠다. 강사는 박귀희를 비롯하여 민요에 안비취, 가야금에 문경옥, 장고춤에 강문자, 민속무용에 이춘자 등 5명이었고 박귀희는 운영 대 표 겸 판소리를 가르쳤다. 동경 무악원은 무려 17년간이나 운영된 뒤 1979년에 문을 닫았다. 공연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서독, 베네수엘라 등 세계 각 국으로 확대시켰다. 국내에서도 가야금 병창활동을 62회나 펼쳤다. 전통예술에 대한 국가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박귀희는 제23호 가야금 병창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1968년의 일이다. 어릴때부터 명민하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박귀희는 시대 변화에 대 한 이해도 빨라 민족음악의 새 장을 여는 흐름에 항상 같이하고 있다. 1972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효녀 심청」에 박귀희는 영화음악으로 참여하 여 「심청가」일부 대목을 불렀다. 향년 72세를 일기로 타계 할 때까지, 호남세가 주류인 국악계에서 드물게 영남맥을 이어내었다. 평생 소리를 하면서 번 돈을 국악계의 앞날을 위해 선뜻 내놓았던 박귀희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교육과 민요수집 작곡 악보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는 도이다 박귀희의 소리는 1950년대에 취입한 유성기 음반부터 1993년 작고 직전에 녹음한 콤팩트 디스크까지 다양하게 남아있다. 박귀희의 자서전 『순풍에 돛 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에 따르면 60년대말부터 민요 채집을 구상했고, 이를 국악예술학교 교장이던 박헌봉에게 알렸다. 두 사람이 먼저 뜻을 맞추고, 아시아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모은 전승민요를 문화재관리 국에 기증하였고, 박귀희는 1979년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을 출판하게 되 었다. 50여곡이 실린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은 지금까지도 가야금 병창을 배우는 이들에게 유용한 교본이다. 종전까지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구전심수口傳心授 방식에서 벗어나서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혼자서도 마음만 먹으면 따라할 수 있는 교본으로 만든 것이다. 흔히 민요가 수들이 부르는 「꽃타령」,「뽕따러 가세」,「옹헤야」 등은 박귀희에 의해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예藝에 산다는것은 험난하다. 예를 도道로 닦기에는 더 힘이 든다. 그런 예 도의 길을 박귀희는 걸어왔고 역사 속에 살아남았다. 소리꾼으로서는 동편제 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성준의 제자로서 동편제에 속한다 할 수 있으며, 가야 금 병창으로는 고종 때 가야금 명인인 박팔괘의 정통 가야금 병창의 맥을 이 어온 오태석의 제자로서 법통을 이어받았다. 또한 판소리와 창극 그리고 여성국극 발전에도 큰 자취를 남긴 박귀희 명창은 평생을 국악살리기에 투신했 다.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향사 박귀희 추모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김덕수는 사람이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다수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걸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통해 확인했다. 나는 박귀희 선생님을 통해 전통을 어떻게 후대에 전승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과 가능성을 보고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박귀희 명인의 고향인 경북 칠곡군은 2021년 향사 박귀희 명창 뮤지컬(연희 창극)을 제작·발표하고, 전국가야금병창대회도 열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칠곡군에서 호국평화공원과 연계하여 향사 박귀희 명창 기념관을 건립하여 국립전통예술고 유품전시관으로부터 유품을 확보하여 전시할 계획이다. 평생을 국악발전에만 쏟은 국모 박귀희가 있었기에 우리 국악은 체계를 잡고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국악을 통해 우리 문화의 초석을 다진 향사 박귀희의 숭고한 예술정신은 날이 갈수록 그 향기가 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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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6: 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황병기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국 전통음악계에 문화사적인 자긍심을 심어 온 방일영국악상이 올해로 열 돌을 맞았다. 유구한 민족음악사의 맥락에서 볼 때 10년의 시간이란 하나의 작은 눈금에 불과하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한국 음악계의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그 작은 시상 경력 10년의 눈금은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우리는 이내 간파할 수 있다. 그것은 외래문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묵시적으로 일깨워 온 하나의 시대적 계도啓導였고, 국제화의 조류 속에서 민족예술이 지향해야 할 원대한 좌표와 체질을 확고하게 제시하는 역사적 선언의 뜻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언간 20세기 문화적 격랑의 시대도 갔다. 주객전도의 부끄러운 문화 구도도 눈에 띄게 바로잡혀 가고, 법고法古 없이는 창신創新도 어렵다는 자각에서 주체적 문화의식도 점점 높아가고 있다. 명실상부한 문화적 과도기를 넘어서고 있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한국 문화사의 한 굵은 마디竹節를 형성해 가는 시점이라고 하겠다. 이 같은 시대적 변이의 마디에 상응하여 방일영국악상 10년의 마디에서도 작은 변화를 꾀해 보았다. 일부 심사위원들을 교체하여 새로운 감각과 가치관을 보안했고, 수상 대상도 연령층을 낮추고 현재 활동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신을 모색해 본 게 그것이다. 이러한 일신된 체제로 제10회 방일영국악상 심사회의가 열렸다. 이보형, 정재국, 황준연, 안숙선, 박범훈, 한명희 6명의 심사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는 먼저 방일영국악상의 발전적 운영을 위한 자유 토론이 있었고, 이어서 제10회 수상자로 황병기 교수를 선정했다. 황병기 교수가 만장일치로 선정된 이유는 그분의 공적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가야고 연주가로 국내에서는 국악의 위상을, 해외에서는 한국의 국위를 선양했고, 불모의 창작계에 현대적 감각을 접목한 주옥같은 신작을 만들어 냄으로써 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공로 등은 비단 국악계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인정하는 황 교수의 공적이 아닐 수 없다. 황 교수는 본디 법학도였다. 한때 엘리트 코스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던 경기고에 서울법대를 나왔다. 하지만 그는 학창 시절부터 국립국악원에 드나들며 가야고를 배웠다. 그 덕에 당시 60년대 초부터 서울음대 국악과 강사로 출강했다. 이처럼 취미로 시작한 가야고가 대학 교단으로 연계가 되었고, 끝내는 법조인이 아닌 음악인으로 업을 삼으며 평생을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연주자로 출발한 황 교수는 또 한 번의 변신을 한다. 이번에는 작곡가로의 새로운 지평에 들어선다. 물론 그가 작곡 활동을 시작한 60년대 초반 이전에도 국악 작곡 활동은 있었다. 특히 40, 50년대에는 당시 국립국악원에 봉직하고 있던 김기수 선생이 거의 독보적인 활동으로 종래 정악풍의 신작을 발표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음대에 국악과가 창설되면서 전통음악 작곡계도 환골탈태되기 시작하는데, 다름 아닌 서양 음악의 작곡어법을 매체로 한 창작곡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황 교수의 작곡 활동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는데, 특히 그는 당시 서양 현대 음악기법으로 작곡 활동을 활발히 하던 서양 음악 전공의 강석희, 백병동 등과 교유하며 서구적인 작곡기법으로 가야고 음악의 신곡들을 창작해 내기 시작했다. 이런 경위로 시작한 황 교수의 작곡 활동은 ‘비단길’, ‘미궁’, ‘가라도’ 같은 자기류의 신곡을 만들어 내며 가야고 음악의 레퍼토리를 획기적으로 확충해 갔다. 결국 황병기 교수의 일생은 법학도로 출발하여 가야고 연주가로, 가야고 작곡가로 변모해 가며 다채로운 삶을 살아간 셈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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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3: 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최경만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몇 해 전 프랑스 아비뇽 축제 총감독인 다르시에가 방한했었다. 축제 기간에 한국의 전통예술가를 초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비디오나 실연實演을 통해 정악합주며 무용이며 무속이며 여러 장르를 살펴봤다. 그때 그는 이매방의 승무를 보고, 저것이 어떻게 전통이냐고 했다. 미국의 전위무용가 머스 커닝햄을 능가하는 ‘현대’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진부하리만큼 늘 보는 승무가 아방 가르드적 현대성을 갖췄다니 놀랍기 그지 없었다. 문화가 다르면 미적 안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다는 사실을 그때처럼 깊이 실감한 적이 없었다. 제 나라에서 홀대받는 국악이 나라 밖에만 나가면 생각외로 상찬賞讚을 받는 이유도 퍼뜩 알만 했다. 그때 일을 계기로 나는 학생이나 후학들에게 소신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나라 밖의 광활한 세계를 활동무대로 설정하라는 당부가 그것이다. 답답한 동굴 속에만 갇혀서 자기를 알아 달라고 칭얼거릴 일이 아니다. 밖을 보면 쌍수로 환영할 드넓은 무대가 있다. 마침 시대의 조류도 다채로운 개성을 존중하며 다원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세상으로 진입했다. 한국 음악 특성이 세계 속의 개성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 지평과 개연성이 그만큼 확대된 것이다. 야망을 품고 정진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신나는 문화 환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내내 인도 음악가들이 동양 음악의 대명사인 양 지구촌을 누비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익힌 공용어인 영어로 자신들의 음악을, 서서히 동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서구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좋은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다기화 되어 가는 국제 상황과 국악의 함수관계가 새삼 머리에 맴돈 것은, 마침 범상치 않은 공연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튼실하게 내실을 다진 인재들의 모임인 ‘한국전통음악연구회’가 세밑에 선보일 창단 음악회가 그것이다. 우선 많은 분야의 단체들이 모여서 하나의 모임체를 구성했다는 점이 각별해 보인다. 중견 연주가들이 무언가 시대적 조류를 실감한 나머지 의기투합된 것만 같아 더욱 기대가 앞선다. 이들의 젊은 패기와 음악적 열정이 하나로 응집되면 국악계에 괄목할 만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이들의 예술적 의지가 세계로 분출되면 명실공히 한국 음악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이다. 분명 이 단체는 그렇게 될 소지가 크다고 나는 믿는다. 연합체를 구성한 단체들의 면면을 보아도 그렇고, 또한 그들이 지닌 음악적 기량이나 예술적 의지 또한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조직의 성패는 지도자의 역량이 관건인데, 이 연합체를 이끌 최경만 회장의 인생 경륜이나 음악적 성취는 세상이 다 인정하는 바이니 더욱 그러하다. 최경만 명인은 민속음악의 산실이라고 할 국악예술학교 출신이다. 한두 살 선후배 관계이긴 하지만 훗날 국악계 중진들로 활동하고 있는 박범훈 전 중앙대 총장과 최태현 교수, 김영재 전 한예종 전통예술원 교수 등이 모두 비슷한 세대의 재사들이다. 최 명인의 전공은 피리이고 경기토리의 대가였던 고 지영희 선생의 수제자인데, 민속악 계통의 피리 연주에는 군계일학으로 뛰어난 명불허전의 고수다. 내가 국립국악원장으로 재직 당시 중평衆評에 의해 특채를 한 단원은 마당놀이의 지운하와 피리의 최경만, 딱 두 사람 명인뿐이다. 한편 최경만 명인의 배필 역시 같은 국악원 연주단원인 서도소리의 대가 유지숙 명창이다. 그러고 보니 최 명인 부부는 경서도 소리의 합작품인 셈이다. 통일의 물꼬도 이곳에서 발원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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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한악계의 별들" (양장)이 책은 가곡 [비목]의 작시자로 널리 알려진 한명희 선생이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보석 같은 인연들의 이야기를 역사라는 시간의 대리석에 새겨놓은 것이다.작가가 유려한 문체로 새겨놓은 주인공들은 우리 한악(국악)계의 터를 다듬고 보듬어 온 명인 명창들과 한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이다.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된 아리랑과 한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흥, 멋, 운치)에 대한 해박한 고찰은 한국의 전통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나와 TBC(동양방송) PD 시절부터 국악에 남다른 애정과 사명감을 갖고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우리 국악계를 이끌어 온 분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어 온 저자 또한 우리 음악을 계승 발전시켜 온 산증인이다.대학교수와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내면서 『하늘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리가락 우리문화』 『한국음악, 한국인의 마음』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학 떠난 빈터에는』 등의 저서는 우리 음악계의 소중한 문헌들이다.004서문인연 한 자락1부010가야고 병창으로 그린 비천상 _ 강정숙 명창012사물놀이로 세계를 제패한 선구자 _ 김덕수 명인016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_ 김소희 명창022회심곡의 프리마돈나 _ 김영임 명창026월하의 음악 세계가 그립다 _ 김월하 가객028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_ 김천흥 선생034둥둥 북을 울리면 신명이 솟는다 _ 김청만 명인036경기민요의 외연을 넓혀 가는 열정 _ 김혜란 명창038경기민요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인공 _ 묵계월 명창041국악교육에 헌신한 선견지명 _ 박귀희 명창044끈기와 집념의 화신 _ 박동진 명창048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_ 박범훈 교수053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_ 박병천 명인, 김영태 시인059청초한 유덕遺德은 한악계의 등불 _ 성경린 선생061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_ 송방송 교수063소리꾼의 판소리 사설 정립 _ 송순섭 명창065장인 정신의 사표가 될 판소리 여왕 _ 안숙선 명창076서도지방의 맛과 멋을 이어 준 고마운 은인 _ 오복녀 명창078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_ 오정숙 명창081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_ 원장현 명인085실사구시의 학문을 궁행한 성실한 학자 _ 이보형 선생088고소한 해학이 일품인 경중예인鏡中藝人 _ 이상규 교수090대금산조의 달인 _ 이생강 달인093노래로 그려 낸 한 시대의 풍속사 _ 이은주 명창096가야고 음악의 경중미인 _ 이재숙 교수099소중한 문화지킴이 한국정가단 _ 이준아 가객101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_ 이춘희 명창103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음악학의 태두 _ 이혜구 박사107심금을 퉁겨서 노래하는 국민가객 _ 장사익 가걸歌傑110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 _ 정광수 명창113피리로 세상을 보듬어 온 외곬 인생 _ 정재국 명인116영년퇴은이 유발하는 무정세월 _ 조운조 교수119놀이마당문화의 파수꾼 _ 지운하 명인122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_ 최경만 명인125정악 가야고의 법통을 잇는 금객琴客 _ 최충웅 명인130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_ 황병기 교수133내 삶의 인드라망을 수놓은 한악계 별들 _ 김연수, 이창배 외2부144전통음악을 사랑하는 고마운 기업인 _ 초해 윤영달 선생148초야에 묻힌 국악계의 보옥 _ 서암 권승관 선생153어느 인연이 그린 삶의 무늬 _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158기인처럼 살다 간 풍류객 _ 연정 임윤수 선생161정녕 가시나이까 _ 화정 김병관 선생165유어예의 귀명창 _ 호암 이병철 선생175한악계의 은인 _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179문화가 된 노래 아리랑185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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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9국악신문 특집부 「국악신문」의 박헌봉 선생 회고록 ‘國樂運動 半生記’는 제98호부터 6회에 걸쳐 수록했다. 원래는 「신동아(新東亞)」 1966년 7월호부터 9회에 걸쳐 발표한 글이다. 결국 작고하기 11년 전에 쓴 것이니 이후 10여년의 생애는 진술하지 못한 것이 된다. 본 회에서는 10여년의 생애 중 중요한 업적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박헌봉 선생의 민속악 발전에 기여한 실상이 제시 될 것이다. #해방 직후 혼란기 국악을 재건한 업적은 무엇보다 앞서 평가되어야 한다. 다음은 전 한국불교민속학회 황윤식(1934~2020)회장의 이에 대한 평가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민속음악계는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신분사상에 의하여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민족혼이 강하게 배어있다고 하여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우리 민족은 해방의 환희를 민속음악을 통하여 한껏 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민속음악은 천시의 대상도 아니고 탄압의 대상도 아닌,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기산 박헌봉 선생을 중심으로 국악건설운동본부, 국악학교 기성회 등이 조직되었고, 이를 통해 국악의 새로운 발전을 추구하려는 문화운동이 전개되어 갔다.” #1960년 3월 5일 국악예술학교가 개교했다. 이는 첫 손에 꼽히는 업적이다. 민속음악 교육뿐만 아니라 민속악 위상 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이후 학교는 세 번에 걸쳐 개명을 하게 되는데,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로 바뀌며 발전해왔다. 지금은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이후 규모를 갖춘 학교로 발전시킨 박귀희 선생만을 기억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초창기부터 국악을 정상의 궤도에 올려놓고, 학교의 체계를 정립한 박헌봉 선생의 업적 역시 중요한 것이다. 물론 혼자만으로 이룬 것은 아니다. 향사 박귀희 선생, 만정 김소희 선생이 학교 설립에 많은 힘을 보탰고, 지영희, 성금연, 한영숙선생 등 많은 국악인들이 뜻을 모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국악의 명인들을 제도적인 교육기관에서 수용하면서 효과적인 교육이 가능하였다. 또한 전국에 흩어져 있던 민족예술인을 정규 교육기관에 수용하게 되면서 이들에게 민족예술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했다. 이와 같은 과정은 국악교육의 정상화를 기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국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시킴으로써 국악발전의 한 이정표를 마련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이들을 규합하여 함께한 지도력은 당시 선생의 열과 성에 동의한 결과이다. 국악계의 회고 중에는 "국악예술학교를 중심으로 국악인들을 규합하지 못했더라면 민속악은 아악계에 눌려 제대로 된 평가와 대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문화재 지정은 고사하고 존재마저 유야무야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라는 발언이 있게 된 배경이다. 또한 이에 더하여 사단법인(社團法人)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설립하여 후에 현 한국국악협회(韓國國樂協會)로의 발전을 견인했음으로 기성국악인(旣成國樂人)의 단합과 국악계 혁신(革新)에 디딤돌을 놓은 일은 주목되는 업적이다. 생님이 품었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소중히 전승되어야 한다. #선생의 두 번째 업적은 민속악계 국악인들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제도화 한 사실이다. 즉, 당시 문화재관리국의 기예능보유자 지정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사실 60년대 이전의 민속악계 국악인들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이 있다 해도 교육수준이 극히 낮다는 이유로 예능에 대해 이론적 투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무했다. 그러니 오늘날 소위 인간문화재(국가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의 지위를 누리고 예술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과, 오늘날과 같은 국악의 진흥을 가져오게 된 것은 선생의 공로이다. 1964년 6월에 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을 조사했고, 이를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꼭두각시놀음’으로 지정하였다. 1964년에는 판소리 ‘춘향가’를 조사하고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로 지정하였다. 1965년에는 ‘진주농악’을 조사하고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하였다. 1966년에는 ‘진주검무’를 조사하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하였다. 1965년에는 진주 농악을 조사하고 이듬해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하였다. 1966년에는 ‘거문고산조’를 조사하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로 지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초기 민속음악의 제도적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 낸 것은 선생 자신이 문화재위원으로 위촉 받은 상황이어서 가능했고, 반대파나 다른 분과 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국악에 대한 이론과 설득력 때문이다. #세 번째는 1966년 이론서 ‘창악대강(唱樂大綱)’의 대작 저술 실적이다. 이는 이선유(李善有, 1873~1949)와 유성준(劉成俊, 1873~1944) 같은 경남 지역의 판소리 명창들과의 교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선유 판소리 동편제 명창으로 1933년에 ‘오가전집(五歌全集)’을 펴낸 판소리 이론가인데 창악뿐 아니라 국악 관련 이론을 배웠다. 유성준은 경남 하동에서 박귀희 등에게 판소리를 지도하기도 한 명창이다. 역시 이분으로부터도 창악을 배웠다. 1934년에 사재를 털어 ‘진주음률연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역임한 전후의 일이다. ‘창악대강’은 판소리와 단가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서술하였고, 정확하면서도 방대한 주석을 단 것이 특징이다. 첫 째는 ‘창악의 개념’을 제시했다. "唱樂은 우리 겨레의 民俗音樂”이라고 선언하면서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이 본디 창악의 참모습"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창악의 범주로 단가, 판소리, 창극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다음은 ‘창악의 기원과 유래’를 제시했다. 판소리 광대의 기원과 유래, 전승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증하였다. 광대의 유래에 대해서는 무속과 연관시켜 고찰하였고, 창악의 초기 모습을 굿판과 잡희에서 찾아내어 이를 민족음악의 출발로 보았다. 이 책을 통해 선생의 국악관과 연구자의 자세를 확인할 수가 있다. #네 번째는 경남의 대표 지역축제 ‘개천예술제’의 창안이다. 이 축제는 1949년 정부 수립 1주년을 기리고 예술문화의 발전을 위해 시작되었다. 당시 행사는 10월 3일 개천절부터 6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대통령이 참석하는 예술제로 규모가 커졌는데, 1974년부터는 예술의 대중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행사의 변화를 꾀하였다. 1981년 제31회 대회 때에는 개천예술재단이 설립되었으며, 1983년에는 경상남도 종합예술제로 지정되었다. 2000년에는 진주문화예술재단이 설립되면서, 이후 개천예술제는 전통문화예술과 지역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로 이 행사를 선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 1949년 전후는 대한국악원의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때였다. 문교부 예술위원회의 음악위원으로 국악뿐 아니라 전통예술 문화 조사를 준비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에서 고향에 축제를 제안한 것으로 해방후 출현한 최초의 축제를 선생이 창안한 것이다. 선생은 「국악대관」(國樂大觀)의 저술에 힘쓰시다가 1977년 5월 8일 세상을 떴다. 선생의 빛나는 공적은 국민훈장 동백장(冬栢章)과 금관문화훈장(金冠文化勳章)으로 국가가 인정하였다. 이상에서 간추린 선생의 업적은 더 많은 연구로 더해 질 것이다. 「국악신문」 기사를 통해 보면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2013년에는 산청군에 ‘기산국악당’이 건립되었다. ‘사단법인 기산국악제전위원회’가 본격적으로 현창 사업을 맡게 되면서, ‘기산국악제전 및 전국국악경연대회’ 등 선생을 추모하고 정신을 잇는 여러 행사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뜻 깊은 창악이 탄생하였다. ‘산청아리랑’이다. 박범훈 작곡에 홍윤식 작사로 산청군이 낳은 명사들과 명소, 지리산의 아름다움과 지역의 특색들을 세마치장단의 경쾌함으로 묘사했다. ‘산청아리랑’은 선생이 다시 산청으로 돌아와 다시금 고향을 품은 듯한 푸근한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 현재 산청군에서 개최하고 있는 각종 행사에서 이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노래로 불리고 있다. 이상에서 4회에 걸쳐 박헌봉 선생의 회고록 '國樂運動 半生記'를 살폈다. 이를 통해 박헌봉 선생이 국악의 가치를 정립하고 그 바탕에 민속음악이 있다는 소중한 논지를 정립하는데 기여한 거의 유일한 인물임을 확인했다. 이에 대해 국악신문이 일반 독자들에게 확산 시키는데 기여하기 위해 선생의 회고기를 재수록 한 것이다. 이는 곧 「국악신문」의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집필하고 출간을 보지 못한 ‘국악대관’과 ‘국악사’는 선생이 말년에 혼신을 기울인 것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원고가 발굴되기를 고대한다. 이에 국악신문은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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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소개역대단체장 박범훈 (재임기간 : 1995.01.01 ~ 1999.12.31)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음악과 졸업 일본 동경 무사시노 음악대학 작곡과 졸업 일본 동경 무사시노 음악대학원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예술철학 박사 산동대학교 교육학 명예박사중앙국악관현악단 초대단장 겸 상임지휘자오케스트라 아시아 상임 지휘자 겸 한국대표국립국악관현악단 초대단장중앙대학교 음악대학 한국음악과 교수중앙대학교 부총장, 총장 한국음악협회 이사86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위원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2002 한일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교육분야 위원장한아세안 전통음악위원회 위원장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현)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음악원장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상훈 국민훈장 석류장대한민국 무용제 작곡상대한민국 작곡상 최우수상KBS 국악대상 작곡상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음악부문서울특별시 문화상 국악부문박헌봉 국악상 주요작품 및 예술활동 [작품]신모듬, 신내림, 백두산 신곡, 붓다, 춘무 등[저서] <피리산조연구> <작곡.편곡을 위한 국악기 이해> <박범훈의 추임새><소리 연><한국불교음악사연구> 한상일 (재임기간 : 2000.01.01 ~ 2003.12.31)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 졸업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예악학 박사국립국악원 민속반 입단 국립창극단 지휘자 국립국악관현악단 2대 단장초대 성남시립국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교수사단법인 전통예술학회 이사신라고취대 예술감독 현)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아시아전통예술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사단법인 아시아민족음악교류협회 이사장 상훈 국무총리 공로표창대통령 공로표창 주요작품 및 예술활동 [작품]울산아가씨 주제에 의한 관현악, 창극(박씨전, 광대가 등), 무용(강강술래 등)[저서] 피리산조 선율의 리듬형에 관한 연구 최상화 (재임기간 : 2004.01.01 ~ 2005.12.31)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음악과 졸업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악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전북도립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국립국악관현악단 3대 예술감독경기도립국악단 예술단장아시아전통예술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중앙대, 전남대, 백제예대 강사 미국 UCLA 교환 교수 전북대학교 국악과 교수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원 교수, 부원장, 원장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학장 민속악회 시나위 회장중앙대학교 국악연구소 소장한국국악음향연구소 대표한국디지털국악연구회 회장 전북문화재 위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단 한국위원, TF 위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문화체육관광부 정책자문위원현)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주요작품 및 예술활동 [작품]<작곡> 국립무용단 '부운', 88올림픽축전 '청산녹수', 현대무용 프랑스 '바뇰레' 참가곡 등 <창극> '정읍사', '춘향전', 칸타타 '천리' 등 7편 <관현악곡> 국악가요 '사랑굿', 풍물협연곡 '상쇠' 등 100여곡 [저서]<경기 도당굿>, <서용석 대금산조보>, <전라 좌우도 풍물굿> 등 5편 황병기 (재임기간 : 2006.01.01 ~ 2011.12.31)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단국대학교 명예음악박사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 참가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단장국립국악관현악단 4대 예술감독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미국 워싱턴주립대 강사이화여자대학교 강사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연세대학교 특별초빙교수문화재전문위원서울 90송년통일음악회 집행위원장국악의해 조직위원회 위원장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국악축전 조직위원회 위원장광복60주년기념문화사업 추진위원장사단법인 한국작곡가협회 부회장이화여대 음악대학 명예교수유니세프 문화예술인 클럽 음악부문 특별대표대한민국예술원 회원(부회장 역임)ARKO한국창작음악제 추진위원장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 상훈 KBS 전국국악콩쿨 최우수상공보부제정 국악상한국영화음악상공연예술평론가협의회 올해의 예술인상중앙문화대상백상예술상 음악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음악상방일영 국악상은관문화훈장호암상대한민국예술원상일맥문화대상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만해문예대상 주요작품 및 예술활동 [작품]숲, 침향무, 비단길, 미궁, 밤의 소리 등[저서]<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오동 천년, 탄금 60년><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논어 백가락> 원일 (재임기간 : 2012.03.12 ~ 2015.03.10)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 졸업중앙대학교 음악대학원 작곡과 졸업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국립무용단 음악감독국립국악관현악단 5대 예술감독2017-2018 여우락 페스티벌 예술감독화엄음악제 총감독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음악감독2019 전국체육대회 개·폐막식 총감독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작곡과 교수21세기 한국음악프로젝트 음악감독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통예술위원회 위원예술의전당 자문위원국가무형문화재 제46호 대취타 및 피리 정악 이수자월드뮤직그룹 ‘푸리(PURI)’, 아방가르드 그룹 ‘어어부 프로젝트’, 한국음악앙상블 ‘바람곶’ 현) 경기도립국악단 예술감독 상훈 국립국악원 전국국악경연대회 대상한국무용협회 서울무용제 음악상한국문예진흥원 신세대 최우수 작곡가 선정대종상 영화음악상 4회 수상(‘꽃잎’,‘아름다운 시절’,‘이재수의 난’,‘황진이’)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음악상춘사 영화음악상문화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인상 작곡 부문KBS국악대상 작곡상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 음악 부문 선정시사저널 선정 ‘대한민국 차세대리더 음악부문 1위(2011~2012) 주요작품 및 예술활동 [작품]대취타 易, 바르도 K, 신뱃놀이, 춤 바람 난장 등[저서]음악적 발상의 원천으로서의 굿동해안 진오귀굿 중 장수굿의 짜임새와 장단구조 : 청보장단을 중심으로 임재원 (재임기간 : 2015.10.01 ~ 2018.03.28)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졸업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학 박사 졸업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대금정악 이수자 국립국악원 단원(대금)KBS국악관현악단 수석단원(대금)목원대학교 한국음악과 교수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부학장대전시립연정국악원 제4대, 제6대, 제8대 지휘자 국립국악관현악단 6대 예술감독KBS국악관현악단 운영위원장국립국악원 자문위원한국국악학회 이사현) 국립국악원 원장 서울대학교 국악과 교수 대금연구회 이사장 정농악회 회원 국립국악관현악단 1995년 창단된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국립극장 전속단체입니다. 유구한 역사 속 개발되고 전승되어온 한국 고유의 국악기로 편성된 국립국악관현악단은 50여명의 전속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내외 저명한 작곡가 및 지휘자들을 영입해 다양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전통 음악을 뿌리에 둔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인 음악 활동과 한국의 정신과 정체성을 담은 사운드를 통해 전 세계 관객과 공감하는 음악회, 감동을 전하는 연주단체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초대 단장 박범훈, 2대 단장 한상일과 3대 예술감독 최상화, 4대 예술감독 황병기, 5대 예술감독 원일, 6대 예술감독 임재원을 거치면서 거둔 성과를 기반으로 현재 김성진 예술감독(2019.4.1~현재)을 주축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국악관현악단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있습니다. Prev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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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기악, 소리, 춤, 무속, 공연놀이, 의례 등 우리 전통 예인 110인을 5개 분야로 나눠 소개한 책이다. 거문고 산 조의 강동일, 단소 김무규, 배뱅이 굿 이은관, 태평무강선영, 부채춤의 김백봉, 양주별산대놀이 김상용 등 명인들을 컬러사진으로 소개했다. [지은이] 이규원 194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주간 종교신문 취재부장으로 근무하면서 동서양 종교를 두루 섭렵했고 월간 『광장』 편집장을 역임했다. 1988년 세계일보에 입사하여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재냈다. 현재(사)한국언론인연합회 이사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전수자이고 온 세종교신문 발행인 겸 편집국장이다. 1995년 『문예사조』지 시 부문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고 제6회 부원문학상을 받았으며 한국자유시인협회 이사로 시작활동 중이다. 이 책으로 제 27회 한국기자상 본상과 제36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고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차세애』(공저, 대원미디어), 『한국의 사찰 탐방』(공저, 불교사상사) 등이 있다 기악 1. 강동일 - 거문고 산조 2. 김무규 - 단소 3. 김영채 - 해금 4. 김오채 - 설장구 5. 김천흥 - 해금 6. 박귀희 - 가야금 병창7. 박동신 - 잽이 피리 8. 박범훈 - 피리9. 박종선 - 민속악10. 서용석 - 대금11. 윤윤석 - 아쟁12. 이생강 - 대금13. 이승렬 - 집박14. 전경환 - 농악 상회15. 전사섭 - 설장구16. 정달영 - 가야금 병창17. 정철호 - 아쟁 산조18. 지성자 - 가야금 산조19. 천대룡 - 고수20. 함동정월 - 가야금 산조21. 황병기 - 가야금 소리1. 강도근 - 동편제2. 강준섭 - 진도다시래기3. 김경복 - 서도 명창4. 김길임 - 강강술래5. 김덕순 - 여창 시조6. 김소희 - 동편제7. 김애정 - 국악인8. 남해성 - 여류 명창9. 묵계월 - 경기 12잡가10. 박동진 - 명창11. 박상화 - 영가무도12. 박송희 - 명창13. 박홍남 - 산유화가14. 선우향 - 여류 명창15. 성창순 - 강산제 명창16. 소동규 - 내포제 시조17. 신유경 - 육자배기18. 안비취 - 경기민요19. 안숙선 - 명창20. 안승삼 - 배치기 노래21. 오복녀 - 서도소리22. 오정숙 - 명창23. 이동규 - 남창가곡24. 이용배 - 임방울제 명창25. 이은관 - 배뱅이굿26. 이은주 - 경기잡가27. 장월중선 - 흥부가28. 정광수 - 명창29. 정회천 - 보성소리30. 조공례 - 남도 들노래31. 조상현 - 명창32. 조을선 - 제주 민요33. 조통달 - 명창34. 최광순 - 홍성 결성농요35. 최봉출 - 정선 아리랑36. 한농선 - 명창37. 한동희 - 회심곡38. 한승호 - 적벽가39. 황용주 - 선소리 타령 춤1. 강선영 - 태평무2. 김계화 - 교방굿거리춤3. 김덕명 - 양산 사찰 학춤4. 김백봉 - 부채춤5. 김수악 - 굿거리춤6. 김숙자 - 도살풀이7. 김진홍 - 한량춤8. 박정수 - 일무9. 박홍도 - 문둥북춤10. 안채봉 - 소고춤11. 양소운 - 해주검무12. 이동안 - 마지막 도대방13. 이매방 - 승무14. 이애주 - 승무15. 장금도 - 동살풀이춤16. 장홍심 - 바라승무17. 정경파 - 살풀이춤18. 하보경 - 밀양북춤19. 한진옥 - 춤꾼 무속1. 김금화 - 황해 강신무2. 김대례 - 진도씻김굿3. 김석출 - 세습 무가4. 김윤수 - 제주칠머리당굿5. 김점식 - 서울 무악6. 김찬섭 - 무악 피리7. 박병천 - 무악8. 박어진 - 서울굿9. 송동숙 - 오구굿10. 신석남 - 동해 세습무11. 오수복 - 강신무12. 오옥주 - 강신무13. 이선비 - 강신무14. 장보배 - 황해도 강신무15. 조한춘 - 경기 무악 공연 / 놀이 / 의례1. 공옥진 - 창무극2. 김덕수 - 남사당해3. 김복섭 - 독경4. 김상용 - 양주별산대놀이5. 김재원 - 남사당패6. 문장원 - 동래야유7. 박계순 - 남사당8. 박세민 - 염불9. 박송암 - 범패10. 박점실 - 동래야유11. 박후성 - 창극12. 여재강 - 북청사자놀음13. 이강덕 - 종묘제례악14. 이상호 - 하회별신굿탈놀이15. 이일웅 - 범패작법16. 조승자 - 어름광대 "이화 도화 행화 방초들아 일년 춘광 한틀 마라너희는 그리하여도 여천지 무궁이라우리는 단 백세뿐이니 그를 설워하노라"모시 적삼에 잠방이를 정갈히 다려 입고 통부채로 더위를 쫓으며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세월을 희롱한다. 오가는 길손 있으면 어느덧 벗이 되어 비장해 두었던 한 수를 읊어 댄다. 거기에 동자 있어 밥 나르고 술 따르니 이 아니 신선일시고. 시조에는 군살이 없다. 초장 중장 종장의 3행으로 인간사 막힌 숨통을 터 주고 촌철살인하는 옛선비들의 기지가 넉넉하다.국내 유일의 여창 가곡 분야 기능 보유자(제30호, 1973년 지정) 월하(月荷) 김덕순(金德順.74) 씨. 김월하라고 해야 선뜻 알아듣는 '덕순 할머니'. 월하는 부산 구덕수원지 뒷산에서 시조 배울 적 '어느 후덕하신 어른'이 지어주신 아호일 뿐 이름이 아니라며 뒤늦게나마 덕순이라 불려 보고 싶다고 자청한다. - 본문 187쪽에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누구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얘깃거리가 있다. 막상 털어놓고 나면 별것이 아닌데도 혼자 보듬고 지척이며 가슴앓이를 해야 하는 비밀 같은 것 말이다. 바로 우리의 전통 예인들이 그러했다.민초들의 우상으로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이들은 오히려 민초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해 왔다. 민초들은 전통 예인들의 행위 예술에 도취되면서도 "내가 저 짓을 않길 다행이다." 하는 안도감으로 예기(藝技)를 즐겨 왔던 것이다.이토록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소위 양반 부류나 가진 자들이 예인들을 대해 왔던 정서는 어떠했겠는가. 멸시, 천대, 경멸... 그래서 민중들의 예인들은 입을 다물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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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19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산조는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 기악 독주곡이다. 가야금에서 시작한 산조는 대금, 거문고, 아쟁, 피리, 해금, 퉁소, 태평소 등 많은 국악기의 연주에 수용되어 현재 매우 중요한 레퍼토리로 자리 잡고 있다. 음역이 좁은 피리는 1960년대 지영희와 이충선 명인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무대 독주곡으로서 맨 처음 선 보인 것은 1970년대 정재국 명인에 의해 연주된 산조이다. 본 음반에는 지영희류, 이충선류, 정재국류 피리산조(긴산조와 짧은산조)가 수록되어 있다. 1960년대 1970년대의 초기 피리산조를 짚어 보고 21세기 피리산조의 나아갈 방향에 관하여 고찰해 보고자 출반하였다고 한다.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지영희류 피리산조는 명인이 남긴 산조 악보를 정리한 박승률의 악보를 분석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진양-중모리-도살풀이-자진모리의 이충선류 피리산조는 국악사 양성소에서 발행한 등사본 악보, 김기수가 채보한 악보, 서한범에 의해 재구성된 악보 3종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 선율이 조금 차이가 있다. 3종의 악보를 분석한 후 재구성하여 연주한 것이다.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정재국류 피리산조는 명인이 고등학교 때 배운 스승인 이충선의 가락과 전라도에서 피리 잘하기로 유명한 오진석의 가락을 바탕으로 완성되어 1972년 최초의 피리독주회에서 발표되었다. 긴산조와 짧은산조가 수록되어 있으며 정악의 영향을 받아 꿋꿋한 힘과 웅장함을 지니고 있다. 장고는 국립국악원 단원인 양재춘 고수가 잡았다. 진윤경 연주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음악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을 거쳐 현재는 부산대학교 한국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음반은 2010년 J_ONE <Memento Mori>에서 이어지는 연주자의 5번째 음반이다. 연주와 이론에 열정적인 연주자로 연주력만으로 이런 음반이 나올 수가 없다. 무척 크고 고운 피리소리를 만끽할 수 있다. 박범훈류 피리산조도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GGC-20030&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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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한악계의 별들 (저자:한명희)이 책은 가곡 '비목'의 작시자로 널리 알려진 한명희 선생이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보석 같은 인연들의 이야기를 역사라는 시간의 대리석에 새겨놓은 것이다. 작가가 유려한 문체로 새겨놓은 주인공들은 우리 한악(국악)계의 터를 다듬고 보듬어 온 명인 명창들과 한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된 아리랑과 한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흥, 멋, 운치)에 대한 해박한 고찰은 한국의 전통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나와 TBC(동양방송) PD 시절부터 국악에 남다른 애정과 사명감을 갖고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우리 국악계를 이끌어 온 분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어 온 저자 또한 우리 음악을 계승 발전시켜 온 산증인이다. 대학교수와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내면서 《하늘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리가락 우리문화》 《한국음악, 한국인의 마음》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학 떠난 빈터에는》 등의 저서는 우리 음악계의 소중한 문헌들이다. 차례 004서문 인연 한 자락 1부010가야고 병창으로 그린 비천상 _ 강정숙 명창012사물놀이로 세계를 제패한 선구자 _ 김덕수 명인016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_ 김소희 명창022회심곡의 프리마돈나 _ 김영임 명창026월하의 음악 세계가 그립다 _ 김월하 가객028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_ 김천흥 선생034둥둥 북을 울리면 신명이 솟는다 _ 김청만 명인036경기민요의 외연을 넓혀 가는 열정 _ 김혜란 명창038경기민요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인공 _ 묵계월 명창041국악교육에 헌신한 선견지명 _ 박귀희 명창044끈기와 집념의 화신 _ 박동진 명창048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_ 박범훈 교수053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_ 박병천 명인, 김영태 시인059청초한 유덕遺德은 한악계의 등불 _ 성경린 선생061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_ 송방송 교수063소리꾼의 판소리 사설 정립 _ 송순섭 명창065장인 정신의 사표가 될 판소리 여왕 _ 안숙선 명창076서도지방의 맛과 멋을 이어 준 고마운 은인 _ 오복녀 명창078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_ 오정숙 명창081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_ 원장현 명인085실사구시의 학문을 궁행한 성실한 학자 _ 이보형 선생088고소한 해학이 일품인 경중예인鏡中藝人 _ 이상규 교수090대금산조의 달인 _ 이생강 달인093노래로 그려 낸 한 시대의 풍속사 _ 이은주 명창096가야고 음악의 경중미인 _ 이재숙 교수099소중한 문화지킴이 한국정가단 _ 이준아 가객101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_ 이춘희 명창103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음악학의 태두 _ 이혜구 박사107심금을 퉁겨서 노래하는 국민가객 _ 장사익 가걸歌傑110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 _ 정광수 명창113피리로 세상을 보듬어 온 외곬 인생 _ 정재국 명인 116영년퇴은이 유발하는 무정세월 _ 조운조 교수119놀이마당문화의 파수꾼 _ 지운하 명인122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_ 최경만 명인125정악 가야고의 법통을 잇는 금객琴客 _ 최충웅 명인130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_ 황병기 교수133내 삶의 인드라망을 수놓은 한악계 별들 _ 김연수, 이창배 외 2부144전통음악을 사랑하는 고마운 기업인 _ 초해 윤영달 선생148초야에 묻힌 국악계의 보옥 _ 서암 권승관 선생153어느 인연이 그린 삶의 무늬 _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158기인처럼 살다 간 풍류객 _ 연정 임윤수 선생161정녕 가시나이까 _ 화정 김병관 선생165유어예의 귀명창 _ 호암 이병철 선생175한악계의 은인 _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179문화가 된 노래 아리랑185한국 전통예술을 이해하는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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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관현악의 멋, 박범훈의 관현악 축제 성료국악계의 거장 최고 지휘자 박범훈과 명인, 그리고 신인연주자들로 구성된 환상의 관현악 연주가 18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렸다. 박범훈 작곡가의 범접할 수 없는 독창성과 뛰어난 작곡 능력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관현악 작품들이었다. 2020 국악 관현악 축제는 코로나19로 지친 우리들에게 답답한 가슴을 속 시원히 풀어준 폭포수였다. #국악관현악 「오케스트라 아시아를 위한 뱃노래」 나각의 큰 울림을 시작으로 첫 무대부터 관중을 사로잡아 압도하였다. 바다 위의 배가 땅의 모든 이들에게 힘차게 출항을 알리는 소리요, 하늘에 고하는 연주였다. 한중일 "오케스트라아시아” 창단 연주 위촉 작품으로 민요 뱃노래를 주제로 작곡한 작품이다. #국악관현악 「춘무春舞」 대금합주로 시작해 가야금 합주를 주고받으며 점점 풍성해지는 관현악의 형태로 춤이 더해진 연주이다. 싱그러운 봄날 종달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금 연주에 피리 선율이 더해져 봄날을 만끽함과 동시에 봄을 보내는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춘흥에 겨웠던 춤사위를 접어야하는 아쉬움을 관현악 선율로 표현한 곡이다. #지영희류 해금산조를 위한 협주곡(초연) 독주곡으로만 연주 되던 해금 산조가 산조 보유자 김영재 명인의 해금과 국악 관현악과 만남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이날 처음 선보인 협주곡이다. 지영희 선생이 작고한지 40주년 되는 해로 첫 제자 김영재 선생이 작곡한 헌정곡이기도 하다. 김영재 선생의 연주는 섬세하고 고운 선비 같은 소리였다. 선생의 독주 부분에서 박범훈 작곡가는 지휘 없이 몸으로 리듬을 탔고, 단원들도 어깨를 들썩거리며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춤을 위한 「나나니」 경쾌하고 흥겨우면서도 구슬픔이 전해지는 곡이다. 황해도 해안지방에 살고 있는 어부들의 미망인들이 바다에 희생당한 부군들의 한을 주제로 작곡한 곡이다. 독특한 장단과 선율이 특징적이며 한과 흥, 그리움이 합쳐진 춤사위는 백미라 할 수 있다. 홍승희의 소리와 채향순무용단이 함께 했다. #김일구류 아쟁산조를 위한 협주곡 힘차고 위풍당당한 모습의 김일구 선생이 활을 켜며 아쟁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내내 장엄하고 위엄 있는 노련미와 여유였다. 관중과 반주자를 보며 연주자들을 끌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댄스스포츠를 위한 관현악 마지막 작품이다. 모던 왈츠, 모던 탱고, 자이브 3팀의 ‘댄스 스포츠’가 국악관현악과 어우러진 반전의 순간이었다. 점점 흥이 고조 되어 자이브 춤사위에서는 익숙한 선율로 객석의 환호와 함께했다. 한편 참석한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은 이번 행사가 "국악관현악 재도약의 신호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행사는 국립국악원과 (사)한국음악협회 공동 주최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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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7: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박범훈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무릇 예술 활동에 정답은 없다. 얼핏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대마다 지향하려는 좌표는 있었다. 그것을 시대적 풍조래도 경향이래도 추세래도 공감대래도 좋다. 아무튼 대다수가 승복하는 목표는 있었다. 그런데 여기 목표가 오리무중인 현안이 하나 있다. 나의 개인적 문제의식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이거다라고 하는 정답을 내놓을 수 없는 분야가 있다. 국악관현악의 문제가 곧 그것이다. 소위 ‘전국국악관현악 축제’라는 행사를 10여 년 끌고 오면서 늘 부닥치던 문제의식이 한둘이 아니지만 아직도 선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중지를 모아 진지한 자기 점검을 해 볼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뿐이다. 국악관현악단에 대한 긍정 반 회의 반의 저울추가 긍정 쪽으로 약간 이동한 계기는 곰곰 생각해 보니 국립국악관현악단의 탄생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활동을 통해 무언가 국악관현악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관현악의 음량 문제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익히 알듯이 전통음악의 앙상블은 방중악房中樂의 규모와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었다. 체질적으로 실내악적 원형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전통에 코페르니쿠스적 격변이 닥쳤다. 서구 오케스트라적 환경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곧 그것이었다. 전래의 앙상블은 이제 보료방석의 사랑방이 아닌 넓은 스테이지와 수백 수천 석의 관중 앞에서 연주를 해야 할 팔자가 되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딜레마였다. 자연히 치기와 부조화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가 음향이었다. 수수백년을 아담한 공간에서 자라온 음악을 갑자기 황야의 들판에 내세운 격이었으니, 그 넓은 공간을 충만시킬 음량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무대에 서는 연주가 수를 확충하는 초보적 방법이 대안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악단이 그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 같은 대안에는 한계가 있었다. 재정적 측면만이 아니라 음향학적으로도 임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유수한 악단들이 나름대로의 적정 규모로 인원 확충을 꾀하기도 했다. 하지만 흡족한 결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런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원천적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악기에 대한 반성으로 눈을 돌렸다. 소위 악기 개량 작업이 그것이었다. 물론 유사한 시도들이 간헐적으로 있어 왔지만, 오케스트라 사활의 문제로 인식하며 확고한 목적의식을 전제로 추진한 것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선택이 효시가 아닐 수 없다. 이때 관현악적 문제 극복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 박범훈 초대 지휘자다. 그는 비단 국립국악관현악단 제1대 지휘자만이 아니다. 아예 악단 창단을 위해 심혈을 쏟은 산파역이기도 했다. 창단의 주역이자 초대 지휘자였으니, 자신의 이상대로 악단의 개성과 색깔을 빚어 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미 중앙국악관현악단의 창단과 운영에서 터득한 경험과 안목으로 신생 국립악단의 이미지를 참신하게 윤색해 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같은 조건의 악단을 활용하더라도 박범훈의 작품 속에서는 괄목할 만한 음향 효과가 우러난다. 관현악 구성 악기들 하나하나의 구조와 기능과 장단점을 속속들이 꿰고 있기 때문이다. 실내악적 구조의 악기들을 보듬어 가면서 그만한 음향을 이끌어 내고 요리해 간다는 것은 가히 음향의 달인이 아닐 수 없다. 박범훈 특유의 음향 감각은 후발 관현악단의 위상을 단번에 굳건한 반석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더욱이 악기 개량을 통한 꾸준한 음량 확충 작업은 국립악단의 체질을 한층 튼실하게 가꿔 갈 수 있었으며, 그 같은 일련의 결실들이야말로 초대 지휘자 박범훈의 남다른 공로요 음악적 가치관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박범훈 교수는 참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다방면에 걸쳐서 능력과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탁월한 지휘자에 작곡가임은 물론 행정이나 경영에도 뛰어나다. 일개 국악인이 굴지의 대학인 중앙대학교 총장이 되는가 하면, 권부에도 발탁되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되기도 했다. 남들이 뭐라고 입방아를 찧건 그를 아는 나는 모두가 그의 능력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믿는다. 대개 재주가 좀 있는 사람은 노력은 하지 않고 꾀부리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보편적인 세태요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범훈 교수는 이와는 딴판이다. 지독한 노력형인 데다가 바지런하기 짝이 없다. 지난 시절에는 거개가 그러했듯이, 박 교수 역시 가난한 역경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요즘 말로 치면 흙수저 출신이다.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비관하거나 자포자기한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오기를 키우며 분발했다. 그 같은 오기와 분발이 곧 훗날 그의 대성의 동력이 되고 자양분이 되었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작곡가 박범훈과 나는 이런 인연이 있다. 70년대 초의 일이다. 내가 중앙대에 출강하며 음악미학, 한국음악개론 같은 음악이론을 강의할 때다. 서양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한국 전통음악에는 관심들이 없었고, 시험을 쳐도 60점 내외를 맴돌기 일쑤였다. 그런데 시험 때마다 돌연변이처럼 늘 80점대 이상을 받는 학생이 있었다. 하도 궁금해서 한 번은 그 학생을 따로 불러 정체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는 국악예술고등학교 출신이라 국악 관련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었다고 답변했다. 그때의 그가 바로 훗날 그 대학의 총장이 되는 박범훈 학생이었다. 하찮은 일이지만 박 교수를 떠올리면 가끔 연상되는 엉뚱한 사연도 하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여럿이 모여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개중에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자신이 승복하는 사람에게 신임을 받으려고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교언영색 선인의巧言令色 鮮仁矣’라는 옛 글귀도 있듯이 그런 인물치고 미덥거나 진솔한 사람이 드물다. 아무튼 당시 중앙대 국악과 교수진의 내부 구도가 어땠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곳 교수 중의 노아무개라는 양반이 한양대 권오성 교수와 내가 박범훈 교수를 흉보고 다닌다며 근거 없는 모함을 퍼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 딴에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오히려 평생 박 교수를 감싸고 믿어오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민속악 계보에 뿌리를 둔 박 교수의 음악 활동을 정악 계통의 인사들이 사시로 볼 때마다 극구 옹호해 왔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 한국일보에서 국악계의 유망주를 소개해 달라고 할 때도 수백 명 신진들 중에서 박범훈을 천거하여 문화면 전면 기사로 소개시킨 추천자도 누구인데, 얼토당토 않게 그를 비방하고 다닌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시정의 장삼이사도 아닌 대학 강단의 교육자가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어느 해 연초 KBS 국악관현악단 신년음악회 때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그를 조용히 불러 분명한 사리로 나무라고 훈계한 적이 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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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5: 국악교육에 헌신한 선견지명, 박귀희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향사 박귀희 선생은 가야고 병창의 명인이요 명창으로 일세를 풍미한 분이다. 오태석을 중심으로 싹이 돋던 가야고 병창을 더욱 가꾸고 보듬어서 어엿한 전통음악의 한 장르로 반석 위에 올린 분이 곧 박귀희 선생이다. 헌신적으로 가꿔 온 병창 음악이 튼실하게 자리를 잡아가자 향사 선생은 촌각을 아껴야 할만큼 분주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출연, 혹은 일반 무대공연으로 동분서주하며 독보적인 명창 생활로 쉴 틈이 없었다. 이 같은 치열한 연주 생활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일반인들에게 비친 향사의 이미지는 아름다운 한복의 섬섬옥수로 가야고 병창을 하는 순수한 예인의 상으로만 각인되어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향사의 시대적 진면목은 무대예술적인 인기나 인상에만 있지 않다. 어쩌면 그분의 국악사적 공적이라면 대중적 외형에 있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 본 내면적 역사관에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악교육의 문제에 심혈을 기울인 향사의 개척자적인 선견지명이 곧 그것이다. 광복 이후에 민족의 앞날과 국가 장래를 생각했던 우국지사나 선지자들이 교육문제에 집착했듯이, 향사 선생은 일찍이 국악교육 문제에 깊은 뜻을 두었다. 서구 문명의 밀물 속에서 국악을 살려내고 민족 고래의 정서를 지켜내는 일은 교육밖에 없다는 투철한 철학을 신조로 삼고 몸소 궁행한 분이 다름 아닌 향사 선생이다. 1950년대 말엽부터 선생은 국악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하는 중심부에 섰다. 내부적으로는 당시 민속악계의 어른이었던 박헌봉 선생, 또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지기였던 김소희 명창으로 팀을 이루고, 외부적으로는 김은호 화백을 비롯한 이병각, 문용희 등 각계 명사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 내며 국악학교 설립에 매진했다. 향사 특유의 추진력과 친화력과 결단성은 급기야 국악예술학교의 개창을 이뤄 내는 중심 역할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남산 위 허름한 건물에서 출발한 국악예술학교는 실개천이 흘러서 장강을 이루듯, 이제는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더불어 한국 국악교육계의 큰 갈래를 담당해 가는 양대 산맥의 하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박범훈 교수가 이사장으로 있고, 홍윤식 박사가 교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오늘의 국악예술중고등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향사 박귀희 선생의 역사적 평가는 이 같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여느 예술가들은 무대 활동과 대중적 인기에 매몰되고 자족한 반면, 향사 선생은 예술 활동과 더불어 교육의 중요성을 선각하고 그 씨앗을 몸소 뿌리고 가꿔 냈다. 향사의 남다른 위대성은 바로 이같이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보다 앞서 시대를 읽고 자신의 비전과 신념을 단호하게 실천해 온 점이라고 하겠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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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코로나19 극복 기원 ‘덕분에 음악회’ 개최국립극장(극장장 김철호) 전속단체 국립국악관현악단(예술감독 김성진)은 코로나19 극복을 기원하는 특별 기획공연 ‘덕분에 음악회’를 7월 14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에서 개최한다.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코로나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민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음악으로 위로하고자 마련한 특별 기획공연이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전석 초대로 진행된다. 공연장에서는 ‘객석 띄어 앉기’ 등 생활 속 거리두기 지침이 적용된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김성진이 지휘자로 나서며, 국립창극단 김준수, 국립무용단 이요음·이재화, 가수 인순이가 함께한다. 공연은 박범훈 작곡 ‘춘무(春舞)’로 막을 연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생명이 탄생하는 역동적인 순간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국립무용단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무용수 이요음·이재화의 춤사위가 더해진다. 코로나19로 인해 봄을 상실한 아픔을 딛고 다함께 희망의 봄을 되찾자는 의미를 담았다. 두 번째 무대는 국립창극단 간판스타 김준수가 함께한다. 판소리 ‘춘향가’ 중 ‘적성가’, ‘어사출두’를 국악관현악에 맞춰 부른다. 광한루의 봄 풍경을 노래한 ‘적성가’로 잃어버린 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암행어사가 된 몽룡이 위기에 처한 춘향을 구하는 ‘어사출두’로 공연의 활기를 더한다. 이어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삽입곡 중 ‘에필로그’를 국악관현악으로 편곡해 선보인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전쟁 당시 남북으로 엇갈린 형제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영화다. 참혹한 전쟁의 아픔을 딛고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지금,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도록 희생하며 헌신한 모든 영웅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이다. 가수 인순이와 국립국악관현악단이 함께하는 무대도 만나볼 수 있다. 데뷔 후 40여년간 꾸준히 활동하며 사랑받아온 인순이는 팝·발라드·댄스·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를 완벽히 소화하는 탁월한 가창력의 소유자다.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한 ‘거위의 꿈’, 가족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담은 ‘아버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행복을 찾길 바라는 ‘행복’, 세 곡을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 선보인다. 인순이는 4월 ‘코로나19 극복 캠페인 송’을 발표한 바 있다.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할 김대성 작곡 ‘금잔디’는 김소월 시에 북한 작곡가 리건우가 곡을 붙인 동명 가곡을 주제로 창작한 작품이다. 작곡가 김대성은 고구려 산성을 답사하던 중, 한 송이 꽃을 발견하고 험난한 역사를 견뎌온 고구려인과 현대의 민중을 떠올리며 이 곡을 작곡했다. 시련 속에서도 피어나는 꽃처럼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자는 의지를 담았다. 김성진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은 "몸과 몸을 멀리해야 하는 비대면 시대에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준비한 ‘덕분에 음악회’를 통해 마음과 마음을 연결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초대권은 6월 18일 오후 2시부터 국립극장 홈페이지와 전화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문의는 국립극장 홈페이지 또는 전화로 할 수 있다. 국립극장 개요 1950년 창설한 국립극장은 우리 공연예술계 현대사의 주 무대였다. 창설 70년을 앞둔 오늘, 국립극장은 우리 시대의 예술가 그리고 관객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언론연락처: 국립극장 홍보팀 우다슬 02-2280-5830 문의 02-228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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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회 경기국악제 전국경연대회 수상자명단무제 문서 (1) 민요부문 가. 명창부 부 문 품 격 상 금 수 장 자 곡 목 대 통 령 상 15,000,000 조옥란 제비가,소춘향가,집장가 대 상 경기도지사상 3,000,000 박윤정 선유가,출인가,방물가 금 상 경기도의회의장상 2,000,000 홍석분 제비가,출인가,달거리 은 상 국악협회 이사장상 1,000,000 곽동현 제비가,선유가,출인가 동 상 예총도연합회장상 800,000 오현숙 소춘향가,제비가,출인가 장 려 상 국악협회 도지회장상 500,000 조효녀 놀량,앞산,뒷산타령 나. 일반부 부 문 품 격 상 금 수 장 자 곡 목 대 상 경기도지사상 2,000,000 윤현숙 노랫가락,양산도 금 상 경기도의회의장상 1,000,000 김영숙 금강산타령 은 상 국악협회 이사장상 800,000 정은선 노랫가락,청춘가 동 상 예총도연합회장상 500,000 권인경 금강산타령 장 려 상 국악협회 도지회장상 300,000 이미리 난봉가 다. 학생부 부 문 품 격 상 금 수 장 자 곡 목 대 상 경기도교육감상 500,000 장보민 유산가 금 상 수원시장상 400,000 이연수 제비가 은 상 국악협회 이사장상 300,000 김소희 제비가 동 상 예총도연합회장상 200,000 이승희 유산가 장 려 상 국악협회 도지회장상 100,000 김선미 적벽가 (2) 전통무용부문 가. 일반부 부 문 품 격 상 금 수 장 자 곡 목 대 상 문화관광부장관상 3,000,000 허은영 살풀이 금 상 경기도지사상 2,000,000 안영화 살풀이 은 상 경기도의회의장상 1,500,000 박성민 태평무 동 상 예총도연합회장상 800,000 안나영 태평무 장 려 상 국악협회 도지회장상 500,000 민영민 승 무 나. 학생부 부 문 품 격 상 금 수 장 자 곡 목 대 상 경기도교육감상 500,000 박현정 살풀이 금 상 수원시장상 400,000 진혜리 살풀이 은 상 국악협회 이사장상 300,000 김혜령 살풀이 동 상 예총도연합회장상 200,000 유가혜 태평무 장 려 상 국악협회 도지회장상 100,000 서지영 살풀이 (3) 기악부문 가. 일반부 부 문 품 격 상 금 수 장 자 곡 목 대 상 문화관광부장관상 3,000,000 윤선숙 거문고산조 금 상 경기도지사상 2,000,000 정고운 짧은산조 은 상 경기도의회의장상 1,500,000 이민영 가야금산조 동 상 예총도연합회장상 800,000 채수경 해금산조 장 려 상 국악협회 도지회장상 500,000 봉용섭 대금산조 나. 학생부 부 문 품 격 상 금 수 장 자 곡 목 대 상 경기도교육감상 500,000 정겨운 지영희류 짧은산조 금 상 수원시장상 400,000 고소연 신쾌동류 짧은산조 은 상 국악협회 이사장상 300,000 장수호 박범훈류 짧은산조 동 상 예총도연합회장상 200,000 송현지 짧은산조 장 려 상 국악협회 도지회장상 100,000 장도경 성금련류 (4) 시조부문 가. 일반부 부 문 품 격 상 금 수 장 자 곡 목 대 상 경기도지사상 2,000,000 김정선 여창지름시조 금 상 경기도의회의장상 1,000,000 강재돈 사설질음,엮음질음 은 상 국악협회 이사장상 800,000 정태순 우조질음 동 상 예총도연합회장상 500,000 하태복 엮음질음 장 려 상 국악협회 도지회장상 300,000 현종영 석인이승,엮음질음 나. 학생부 부 문 품 격 상 금 수 장 자 곡 목 대 상 경기도교육감상 500,000 나경은 여창지름시조 금 상 수원시장상 400,000 박소현 지름시조 은 상 국악협회 이사장상 300,000 이가희 기러기 동 상 예총도연합회장상 200,000 김민지 기러기 장 려 상 국악협회 도지회장상 100,000 심종유 바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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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진해국악대전(사)대한전통예술보존회, 경남도지회진해지부, 경남민속예술단 김선숙 무용예술원 주최 제2회 진해국악대전 차세대 국악인의 등용문인 제2회 진해국악대전이 9월 7일 예선, 8일 본선으로 진해시민회관 대공연장, 소공연장에서(기악, 민요, 판소리, 무용, 풍물)부분으로 나뉘어 초 · 중 · 고 · 일반으로 나뉘어 110개팀, 270명이 동참하여 열띤 경연을 가졌다. 일반부 기악 부문에 출전한 김현호(경북도립국악단)씨가 박범훈류 피리산조를 연주하여 종합 대상(문화관광부장관상)을, 학생부 대상(행정자치부장관상)으로는 판소리부문에 출전하여 심청가 中 역군들을 열창한 김은지(남원국악정보고 2년)이 받았다. 김현호씨는 수상소감을 통해서 국악과 인연을 맺은지 짧은 연륜에 큰상을 받게 되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이 영광은 참된 국악인으로 자립하도록 지도해주신 은사이신 곽태천 교수님과 저희 가족과 함께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 진해국악대전을 준비하신 주최 측과 심사위원 선생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이번 상을 교훈삼아 더욱 국악을 연마하여 참된 국악 지도자 사명감을 갖고 후진양성에 열중하겠다고 전한다. 각 부문별 금상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 일반부 풍물부문 최의철 외 9명(이바디 풍물패) ▶ 고등부 풍물부문 신상규 외 3명(금정전자공고, 부산남고) ▶ 중등부 풍물부문 이상원 외 11명(신한중) ▶ 초등부 풍물부문 강형옥 외 5명(용정초) ▶ 일반부 무용부문 노현자(광주) ▶ 고등부 무용부문 김지영(광주예술고) ▶ 중등부 무용부문 박옥선(진명중) ▶ 무용부문 허은지(서주은 무용학원) ▶ 일반부 기악부문 장원(경북도립 예술단) ▶ 고등부 기악부문 최세정(서울국악예술고) ▶ 중등부 기악부문 손봄누리(대치중) ▶ 초등부 기악부문 류희진(창포초) ▶ 일반부 판소리 민요부문 정다운(목포대학교) ▶ 고등부 판소리 민요부문 오민정(안동여자정보고) ▶ 중등부 판소리 민요부문 김혜리(김호중) ▶ 초등부 판소리 민요부문 곽민주(원종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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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학년도 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원 석사과정 신입생 모집2010학년도 국악교육대학원 석사과정 신입생 모집 □ 모집전공 : 국악유아교육전공, 국악초등교육전공, 국악중등교육전공, 국악전문교육전공 □ 전형방법 : 서류전형 및 심층면접 □ 모집인원 : 40명 □ 지원자격 1. 학사학위 취득(예정)자 또는 법령에 의하여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 2. 학사과정의 출신학과, 전공에 관계없이 지원 가능함 3. 외국의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자 4. 국악전문교육전공지원자는 교사자격증 소지자에 한함. □ 전형일정 1. 원서접수 : 2009년 12월 14일(월) - 12월 18일(금) 인터넷접수만 가능. 2. 전형(면접)일 : 2010년 1월 16일(토) 10:00 3. 합격자 발표 : 2010년 1월 22일(금) 10:00예정 * 본교 홈페이지(http://www.cau.ac.kr) 및 국악교육대학원 홈페이지 (http://caugugak.com) 에 게재 5. 전형료 : 85,000원 □ 수업연한 : 2년제(4학기제)로서 하계, 동계 방학을 이용한 12일간(총48일)의 계절제 수업 □ 기 타 1. 본원을 졸업한자는“교육학석사”와 더불어 “국악교육자격인정증”수여 및 본교 일반대학원 박사학위과정 지원자격을 부여함 2. 4차 학기만으로 졸업(논문학기 포함), 한 학기 등록금 절감효과(타 특수대학원은 5차 학기임) 3. 재학생 전원에게 소정의 장학금 지급 4. 방학을 이용한 12일간의 계절제 수업 5. 국내최고 교수진 (박범훈, 최태현, 김성녀, 최상화. 이형환, 전인평, 노동은, 최종실, 김재영, 사진실, 김일륜, 정호붕, 김성국, 이춘희, 등 그 외 다수) 6. 교수와 원생(현직교사)들이 함께 연구, 운영하는 국악교육 연구소 연구원 자격부여. □ 접수처 인터넷접수((http://www.uway.com/중앙대학교) □ 문의사항 : 국악교육대학원 홈페이지(http://caugugak.com), 행정실(031-670-4813, E-mail : yskim@cau.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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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훈 총장 ‘추임새’ 출간집박범훈 중앙대 총장이 ‘추임새’ 하며 살자고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그동안 박범훈 총장이 작곡했던 악보집도 실려 있다. 출판기념회는 23일 오후 4시에 중앙대학교(흑석동) 제1 켐퍼스 체육관에서 갖는다. 화환 및 축의금은 정중히 사절한다. 문 의 : 02) 820-6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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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훈 중앙대 총장 7억원 상당의 토지 기증“국악 발전·후진 양성 위해 써 달라” 박범훈(60) 중앙대 총장이 최근 국악 발전과 후진 양성을 위해 고향인 경기 양평군 소재 시가 7억원 상당의 토지 4700㎡(1400평)를 사단법인 중앙국악관현악단에 기증했다고 중앙대가 지난 12일 밝혔다. 중앙국악관현악단은 국악계 인재 발굴과 역량 강화 등을 위해 기증된 토지에 국악연수원을 세우기로 하고, 지난 7일 착공식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총장은 지난 1987년 국내 최초로 민간 국악관현악단인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창단, 초대 지휘자를 맡는 등 국악 발전에 기여해왔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2002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개막식의 음악 총감독을 맡았던 박 총장은 또 동북아 3국의 새로운 문화교류를 위한 ‘한·중·일 아시아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현재도 예술 감독을 맡고 있다. 박 총장은 지난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당시에는 취임식 준비위원장을 맡아, ‘시화연풍(時和年豊·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듦)’이라는 주제의 공연을 총지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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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산조학회 및 학술대회 8 월 30 일일 시 : 2008 년 8 월 30 일 (토) 오후 2시 장 소 : 한국예술종합학교 신축교사 소극장 문 의 : 02-746-9753 제 1부 학술대회 - 악기구조로 살펴보는 산조의 음구조 사회: 류형선(작곡가) 1. 가 야 금 발표: 김해숙(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장) 2. 거 문 고 발표: 이보현(추계예술대학교 교수) 3. 대 금 발표: 안성우(영남대학교 교수) 4. 종합토론 질의: 이소영(음악평론가), 임미선(전북대학교 교수) 제 2부 한국의 명인 시리즈 Ⅳ 나의 음악인생_ 백대웅(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제 3부 산조축제 - 靑出於藍 사회:윤중강(음악평론가) 1. 김병호류 가야금산조 가야금 임은정(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장 구 서수복(국립국악원 창작악단) 2. 한갑득류 거문고산조 거문고 김준영(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장 구 서수복(국립국악원 창작악단) 3. 원장현류 대금산조 대 금 원완철(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장 구 정준호(국립국악원 민속악단) 4. 박범훈류 피리산조 피 리 김경아(KBS국악관현악단) 장 구 윤호세(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5. 김영재류 해금산조 해 금 한서영(이화여자대학교 한국음악과 박사과정) 장 구 방승환(KBS국악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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