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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4국악신문 사장 ‘김호규의 김병섭’(3) 국악신문 특집부 국악신문 지면이나 일부 행사 자료에 김호규 사장이 무대에서 탈춤을 추거나 장구를 치는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나서 탈춤과 장구를 친다는 단 한번의 진술에서 이해가 쉽지 않다. 실제 실기인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런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즉, 부친에 대한 반감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평생 가정을 돌보지 않고 예인으로만 살아온 부친과 달리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오기의 반영이란 해석이다. 이에 대해 오랜 교우를 맺어 온 KBS 국악한마당 전 민속악단장 최우칠 선생의 전언이 뒷받침한다. "김사장이 부친 김병섭과 한 무대에 선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무대에서 공연자로 서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유전적인 기질은 있어서 국악계에 들어서 국악신문을 창간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부모에게서 예술적 ‘끼’는 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김사장이 부친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또 지인들도 함께 있을 때는 김선생님 얘기를 하지 않아요. 이건 절연하고 산 탓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낳아 준 어머니와는 같이 살지 못하고 떨어져서 정읍 본가에서 살게 된 것이 한이 되었던 것이겠지요.” ‘절연(絶緣)’이란 어떤 관계였다가 교류를 단절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진의는 부모자식지간의 인연을 끊고 산다는 극단적인 말이다. 절연의 시점이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제자들의 몇몇 기록에서 부자지간에 대해서는 단지 ‘3남 2녀 중 2남’이란 기록 외에는 어떤 부연 설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부친도 제자들에게 아들 김호규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황에서 김호규 사장이 국악신문을 창간한 배경을 추정할 수가 있다. 즉, 기질상 춤과 장구를 치고 싶으나 즐기는 정도에서 더 이상 직업으로 하지는 않았다. 다만 국악계에 발을 들여 관련된 일을 하고자 신문사 창간을 구상했다고 본다. 언론인의 사명감보다는 국악 행사 기획 등 사업성 측면에서 개업을 한 것이다. 부친의 작고 7년 후인 1994년 국악신문이 창간되었다. 8년 후 2002년 <설장구보존회>가 창립되고, 제1회 발표회를 개최했다. 회장을 김호규 사장이 맡았다. 8쪽의 자료에는 ‘선생님을 추모하는 제자 일동’ 명의의 <선생님을 그리며~>가 있다. 문면대로는 김호규 사장도 제자의 일원이 된 것이다. 실제 이 행사에서 사회까지 진행했다. 이렇게 절연에서 제자의 연으로 전환되였다. 그리고 2009년 20주기 추모공연을 국악신문사 명의로 주최했다. 국악협회와 한국농악보존회의 후원 행사였다. 이 행사 기록 자료에는 네 사람의 추모사가 수록되었다. 모두 업적을 기려 예찬했다. "설장구 구정놀이로 이 땅에 농악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고, 우리 농악을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견인차의 소임을 다하셨다.”(국악협회 이사장 이영희) "선생은 장구를 메고 가락을 치실 때면 동산에 떠오르는 환한 아침 햇살처럼 밝고 따스한 미소와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듯한 발 사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설장구의 멋과 흥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한국농악보존회 이사장 전인삼) "선생님의 가락에 대한 학문적 연구자도 많이 늘어나고 선생님의 예술혼이 담긴 가락을 배우고 연구하는 후학들도 미국이나 영국 등 세계적으로 뻗어가고 있습니다. 이토록 큰 감명과 열기를 불어 넣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선생님의 창의적이고 남다른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전수제자 최수경) "1975년 선생이 제게 농악을 가르쳐주며 그랬어요. 젊은 한국인들은 이 음악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당신이 이것을 연구해 세계에 알려 보존해 달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3년 후 사물놀이가 탄생했어요. 한국의 문화적 저력을 실감했어요.”(제자 음악학자 프로바인 교수) 이 행사에는 서양인 제자 유게리씨와 브라이언씨가 참여했다. 2002년의 설장구보존회 결성과 2009년 20주기 추모공연 주최를 통해 외적인 관계는 복원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저승에서는 부모자식 간으로 만났을 것이다. 김호규 사장은 자신이 직접 모신 경기도 고양시 하늘문추모공원 모친(최경자) 곁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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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3국악신문 사장 ‘김호규의 김병섭’(2) 국악신문 특집부 네이버를 비롯한 모든 포탈 싸이트 검색에서 ‘김병섭’을 치면 설장고 명인 김병섭은 검색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병섭 류 설장구’라고 치면 검색이 된다. 이는 김병섭의 존재는 장구잽이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돌려 말하면 ‘가정도, 자식도 내치고 오직 장구에만 미쳐 살았다’가 된다. 한편 이 시대 일부 ‘잽이’들의 삶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평소 김호규의 어떤 발언에서도 부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역시 부인(고 최경자)의 구술자료 어디에서도 남편에 대한 정을 표현한 대목은 없다. 국악신문 유일의 기사인 사진작가 정범태의 연재물 ‘명인(名人)’ 국악신문 제41호(1996년 06월 18일자)에도 가족관계 같은 사생활은 기술되지 않았다. 해적이(연보) 조차 정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회에 제시된 해적이도 본 보가 처음 작성한 것이다. ‘김호규의 김병섭’은 설장구 명인이다. ‘설장구’란 판굿에서 우두머리 장구잽이(명인)가 나와 다채로운 가락과 춤으로 솜씨를 보이며 하는 연행으로, 장구놀이 중 으뜸이란 말이다. 상(上)장구, 수(秀)장구라고도 말하는 이유이다. 호남 지역 설장구 춤 중에서 김병섭 류 설장구는 다스름·휘모리·동살풀이·굿거리·삼채·연풍대로 구성되어 독자적인 유파를 이루었다. 장구가락과 발디딤을 베 짜듯이 잉어걸이․ 엇부침․ 엮음살이 등에 소삼과 대삼의 음양배합으로 엮어 최고의 장구놀음으로 표출했다. 고대 농악에서 비롯된 장구춤이 김병섭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타악음악’으로 다듬어져 예술로 승화되었다. 1984년 한국일보사와 국립극장이 주최한 ‘명무전’에서 최막동·백남윤·유지화 그리고 김병섭이 선보인 장구춤에서 김병섭의 무대는 돋보였다. "섬세하고 화려하고 드라마틱”했다. 시인 이승하의 시집 <박수를 찾아서>에 수록된 ‘김병섭의 설장구’도 이 ‘명무전’의 감동으로부터 기억되고 있다. 이후 작고하는 1987년까지 많은 제자들이 형성되어 ‘김병섭 류’라는 유파를 형성하였다. 현재 유튜브 채널에는 비록 흐릿한 화면이지만 풍부한 김병섭 설장구 품새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02년 제자들이 개최한 제1회 설장구보존회 정기발표회 동영상 ‘김병섭 류 완판’(15분)이 올라 있다. 그 외 윤용준·한승철·박철선 등이 이 류를 계승하고 있다. ‘김병섭의 설장구’ 이승하 지 애비 죽고나서부터 장구를 쳐? 장구 가락 베를 짜듯 발놀림 연속무늬를 놓듯 신바람이 나서 쳤단 말이여? 우도농악 이어 받아 엇붙임 장단으로 좌를 때리고 우를 아우르면 세상은 음양이 어울려 잘 돌아가더라고이? 나라 빼앗겼을 땐 구성지게 구정놀이 나라 되찾을 땐 흥겨웁게 덩덕궁이 장구 하나에서 세상 살아가는 흥이 솟구치고 멋이 우러나서 아니, 그래 늙은 설장구 지 에미 죽은 날도 장구를 처? 치고 싶은데 못치고 않았으면 미쳐? 색동 끝동이 달리 붉은 쾌자를 입고 골수가 울리도록 치면 세 살 먹은 애도 춤이 나온다고이? 김병섭의 설장구에 대해서는 논문 1편과 단행본 한 권이 있다. 김병섭의 설장구 세계는 앞으로 다양한 국면에서 논의가 확장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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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호규 사장님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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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국악신문 사장 ‘김호규의 김병섭’(1) 국악신문 특집부 "저는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아버님(故 김병섭)이 장구로 유명하셨던 분이시구 어머님(故 최경자)은 소리와 춤을 하셨어요. 자연스럽게 국악을 접한 것이지요. 학생 때부터 장고 치고 탈춤을 추었어요. 후에 제가 아는 국악을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하다 1994년 9월에 국악신문을 창간했어요.” 외부 언론과의 유일한 기사인 네이버 블로그 2016년 3월 31일자 ‘김호규 국악로전통문화학교 대표’라는 인터뷰에서 밝힌 신문사 창업 배경이다. 부모의 영향으로 장구 치고 탈춤을 추게 되어 국악계에 들게 되었고, 국악계의 기록을 남기는 일을 하고자 신문을 창간했다는 진술이다. 장구와 춤의 실기인에서 국악계 언론인으로 살게 된 배경과 계기를 밝힌 것이다. 이는 국악신문의 주 논조가 국악계 소식이고, 그 중 국악인 부고(訃告)기사를 가장 크게 보도(1995 만정 김소희 선생)하거나 수상 소식을 특집화 한 사실과 ‘명인명창 사진을 구합니다’(1995~96년)와 같은 사고(社告)를 통해 자료 구축과 기록정리 사업을 추진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수차의 주간, 격주간, 월간으로 형태 변경을 되풀이 하면서도 결코 휴간이나 정간을 하지 않고 견뎌온 사실에서 사명감도 발휘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한 언론인으로서의 분명한 업적인 것이다. 국악신문 사장 김호규는 1959년 김병섭과 최경자 사이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부친이 장고를 시작한 나이와 같은 11세 때 장고를 치고 탈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필연을 있게 한 주인공, 부친 김병섭은 누구인가? "우리의 어려운 마음을 다듬어 주시고 답답한 마음을 밝게 열어주셨던 아버님의 장고소리 새삼 아버님의 빈자리가 너무도 그립습니다.” 2009년 ‘고 김병섭 선생 20주기 추모공연’ 인사말의 일부이다. 자식으로서의 사적 감정보다는 장구 명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더 강조하고 있다. 부친 이기보다는 국악인 선배이며 객석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한 명인(名人)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 자신이 작성한 이력서에서 ‘부친’을 빼고 "김병섭 선생께 설장고 및 우도농악 사사”로 기록하고 있다. 김병섭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자료는 사진작가 정범태의 ‘설장고 명인 김병섭’이 있다. 글 쓴 시기는 1996년이지만 실제 여러 차례 만나 인터뷰하고 사진으로 기록한 인연으로 쓰여진 글이다. 이 글에서 김병섭은 우도농악 고깔 설장고 가락의 대가 김도순, 김학순, 백남길을 잇는 뚜렷한 계보가 자랑이라고 했다. 그리고 설장고 치는 모습을 매우 세밀하게 기술하였다. "흰 바지 저고리 위에 반소매 색동끈 동달린 붉은 쾌자를 입고, 어깨 허리에 청황록 3색 띠를 두르고, 배꽃 달린 고깔을 쓰고 장고를 비껴 맨 차림으로, 우도농악 엇부침 장단으로 춤을 추는 모습에 관객은 어느새 하나가 된다.” 현장의 현란한 몸짓이 그려진다. 바로 이 묘사의 대본인 사진 한장이 남아있다. 아쉽게도 컬러사진이 아닌 흑백사진이지만 고깔 아래 눈빛은 살아있다. 그나마 전문가가 찍은 소위 ‘작품사진’은 유일한 것이다. 작고한지 9년 후 국악신문 제41호, 1996년 6월 18일자 ‘명인’란에 실린 기록이다. 김병섭 명인 해적이 1921년 정읍 북면 출생 1932년 (11세) 농악입문, 명인 김학순 사사 1938~45년 (17~25세) 함경도 명천 아오지탄광 강제징용 1945년 종전후 징용에서 귀향, 형과 함께 마을 농악단에서 활동 1950년 전북에서 담굿, 풍장, 걸궁에 명성을 얻다 1956년 전국농악대회 개인상 수상 1963년 전국민속경연대회 정읍우도농악 국무총리상 수상 1964년 제5회 전국민속경연대회 설장고 개인상 수상 1965년 남원국악원 여성국악단 설장고 지도 1966년 로버트 프로바인(朴巴人/메릴랜드대학 음악학교수) 외 외국인 설장고 지도 1968년 서울로 이주, 미국인 평화봉사단 설장고 강습 담당 1970년 돈암동, 동대문, 종로5가에서 <김병섭농악연습소> 운영. 한양대, 서울예고, 선화예고 학생지도 1971~87년 전라 우도농악 장고잽이 설장고, 쌍장고, 굿거리, 동살풀이, 구정놀이, 덩덕궁이, 다르래기 명인으로 전국적 활동 1987년 (62세) 폐암으로 사망,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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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호규 사장님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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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 故 김호규 사장님 영전에. 속없고 철없는 사람故 김호규 사장님! 국악신문 김호규 사장님, 272일 만에 늦은 추모식을 올립니다. 2019년 12월 13일, 추도문 낭독도, 노제도 없이 보내드렸습니다. 너무나 급작스러워 황망한 탓이었습니다. 오늘 2020년 9월 7일, 사장님의 영혼이 담긴 국악신문의 창간 26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에 하늘문공원에서 사장님의 피속에 흐르던 ‘김병섭류 설장고’ 가락과 혼이 담긴 국악신문 창간호, 제10호, 제100호를 올립니다. 영원히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영전에 삼가 보고 드립니다. 특별한 국면과 새로운 언론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그동안의 지면 신문에서 인터넷신문으로의 전환으로 재창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준비한 인터넷 국악신문 9월 7일자 첫 입력 기사로 사장님의 늦은 추모사와 재창간 축사를 올립니다. 많은 분들의 격려와 관심으로 새 활로를 찾았습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출범하는 ‘인터넷 국악신문’에서는 사장님을 ‘故 김호규 사장님’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명복을 비옵니다. 2020. 09. 07 삼가 양주 하늘문추모공원에서 직원일동 드립니다. 故 김호규(金浩奎/1959~2019) 사장 1970~1987년 김병섭(1921~1987)선생께 설장구 및 우도농악 사사 1978년 서울국악중고등학교 졸업 1994~2019년 25년간 국악신문 대표/발행인 1995년 국악예술단 창단 2000~2016년 어린이국악명인전 개최 2001년 서울실버국악제전 주최 2006년 (주)국악엔터테인먼트사 설립 2006~2012년 (사)한국국악협회 이사 2008년 문화부장관상 수상 2010년 한국구악협회 공로상 수상 2010년 평화기원 전국국악경연대회 주최 2011~2016년 한국춤제전 차세대명무전 개최(5회 개최) 2016~2019년 국악로전통문화학교 설립 운영(교장 안숙선) 2017년 서울특별시장상 2018년 한국국악사 개업 2017~2018년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수상 2019년 문화계 대표단 일원으로 청와대 간담회 참가 2019년 12월 11일 소천 [추도사] 속없고 철없는 사람 박종철(극작가, 연출가) 전문예술단체 한국창극원, 창덕궁소극장 대표, 문인협회(희곡) 연극협회(연출)회원 사람이 명을 달리하여 세상에서 헤어진다면 어떤 사람은 가슴에 묻고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그 사람을 추억하고 기억한다. 그런 삶을 살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 국악신문사를 운영하였고, 국악평론가로, 실연자로 살다 간 김호규 사장을 추억하고자 한다. 나는 그 사람을 사장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냥 철없는 형과 철없는 동생이었다. 필자에게 형이라 부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국악계에서, 국악로와 행사장, 공연장에서 나에게 형- 부르며 나를 챙기고 찾던 정겨운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사람으로서 대화하지 못할 길을 떠났다는 부고를 받게 되었다. 올해 나이 70에도 속없고 철없이 살아가는 나에게 더 철없이 살던 그 사람이 술잔을 건네며 다소 엉뚱한 제안과 또는 나의 작품 활동을 기사로 쓰겠다며 정답게 굴던 그의 생전모습이 문뜩 문뜩 또 보고 싶어진다. 전생과 사후세계가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 것인가! 사람의 인연은 맺고 끊어짐이 계속되고 있기에 살아생전 그 이별을 수 없이 겪고 사는 것을 막을 수 없으련만, 왜 이리도 그 사람의 빈자리가 느껴지는지! 그는 뼈 속 깊이 국악인이었다. 국악예술계를 제일 깊이 알고 이해하며 그 분야의 발전에 책임을 지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철없어 보이겠지만 그가 떠난 국악로는 활기를 잃은 것이고, 어느 날 그가 툭 튀어나와 형 하고 부를 것 같은 그리움으로 남는 사람이다. 그립다 왜 떠나면 더 그리운 것인가! 그동안 그렇게 살다 간 기인으로 김호규 망인의 부인과 자제들의 마음고생 등을 위로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 그의 활력과 추진력, 뿌리 깊은 국악인으로 평생 국악신문을 만들고 기획하고 그 지면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국악발전에 기여하였으니 오랜 동안 그의 생을 기억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행히 자제가 국악신문의 역사를 이어간다니 각별한 관심과 지원, 국악가족으로 국악예술인 이 함께 기뻐할 일이다. 계승은 순수 전통음악의 발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동생 하늘에는 코로나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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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구'의 대가 김병섭 명무김병섭(金炳燮/1921~1987) 명인은 정읍 상유마을 농악단 출신 설장구(장구춤) 명인, 11세 때부터 우도 농악 김학순과 박민섭의 제자(김도삼 문하). 함경남도 명천 탄광에서 징용. 해방후 농악단 조직. 남원국악단 여성단원 지도. 서울 종로에 김병섭 설장국 교습소 개설. 1984년 한국일보 주최 국립극장 <명무전> 출연. 국악신문 김호규 사장의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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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사 김호규 사장이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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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한국국악포럼 창립학술대회국악계와 문화예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진들로 결성된 한국국악포럼이 창립기념으로 12월 20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2 간담 회의장에서 제1회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창립기념 학술대회는 김승국 상임대표가 "국악의 진흥과 창의적 성장을 위한 방안”이라는 제목의 주제를 발표할 예정이다.2017년 7월 11일 창립된 한국 국악 포럼은 국악 정책개발, 국악 청년 일자리 창출, 국악의 국민 행복기여 등을 목표로 하여 만들어진 단체이다. 김승국(노원문화예술회관 관장-상임대표), 김용우(소리꾼), 김호규(국악 신문사 대표), 임웅수(경기무형문화재 광명농악보유자), 이병옥(용인대학교 명예 교수), 양종승(한예종 객원교수), 장선애(예원예술대학교 교수), 최상화(중앙대학교 교수), 하응백(㈔한국 지역 인문자원연구소 소장), 한상일(동국대학교 교수) 등 공동대표들이 참가할 예정이며, 국회 교문위 소속의 김병욱 의원(더불어 민주당)이 주최하고, 한국국악 포럼이 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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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상주민요경창대회 영예의 대상에 홍순득제10회 상주전국민요경창대회가 오는 11월 7일과 8일 이틀간 상주시 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상주문화원의 주관으로 열린 이번 대회는 명창부와 일반부, 신인부, 학생부로 나뉘어 11월 7일 예선을 거쳐 11월 8일 본선 경연을 펼쳤다. 홍순득 씨는 이날 경기소리 중 ‘예선 제비가, 본선 방아타령’을 불러 대상을 수상, 3백만원의 시상금과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수상 소감을 묻자. "어릴 때부터 소망하던 우리 소리공부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행복한 시간들이 모여서 오늘과 같은 큰 결실을 맺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소리를 좋아하시던 부모님 덕분에 어릴때부터 유명하신 명창 선생님들의 LP판을 들으며 우리소리에 대한 꿈을 키워왔습니다. 5~6세무렵부터 LP판을 들으며, 그 소리를 따라했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혼자서 장구를 치며 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동네에 잔치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어른들의 요청으로 소리를 했으며, 그런 저를 동네어른들께서는 무척 아껴주셨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우리소리를 무척 좋아하시긴 하셨지만, 딸이 소리길로 들어서는 것은 극구 만류하셨습니다. 공부나 얌전히 하다가 좋은집안에 시집이나 갈것이지 무슨 소리냐며 딸의 소망을 끝내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의 소리에 대한 꿈을 접을수는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만류로 오랜세월을 마음에만 묻고 지내다가 제가 성인이 되고서야 제 갈길을 갈수 있었습니다. 30대가 되어서야 전문적으로 소리공부를 시작할수 있었고, 김국진 선생님께 15년간 경기민요와 휘모리 잡가를 사사받았으며, 현재는 미추홀국악단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소리와 함께 할수 있었던 30여년의 세월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행운이며 행복이었습니다만 이렇게 큰상을 수상하게 되어 더없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국악인으로써 우리소리를 사랑하며 우리의 국악을 널리 알리고 후학양성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도움을 주시고 힘을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현재 인천국악협회 현재 이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홍순득 씨는 1991년부터 2003년까지 무형문화제 19호 선소리산타령 이수했으며, 김국진 선생님에게 경기민요와 휘모리 잡가를 전반을 사사받았다. 인천국악협회 지회장 이순희 선생에게는 경기 12잡가, 손삼화 한국무용 선생에게 소고춤 등을 사사 받고, 황해 큰소리 예술단 부단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다. 상주문화원의 주관으로 열린 이번 행사는 시민들을 위한 식전 행사로 민요합창단과 강원도정선아리랑 물박장단공연이 펼쳐졌으며, 초청된 국악 명인, 명창 공연과 제2회 문화원민요합창단 정기발표회도 함께 가졌다. (김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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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서도소리경연대회 영예의 대상 / 박준길 씨전국서도소리경연대회 영예의 대상 박준길 씨 서도소리계에서 유일하게 주최하는 2006 전국서도소리경연대회가 지난 7월 14일 국립민속박물관 공연장에서 참가자들의 고른 질적 수준 향상과 안정된 운영이라는 호평 속에 성대한 막을 내렸다. 서도소리 최고의 국악 등용문으로 위상을 굳혀온 전국서도소리경연대회(이사장 김광숙)은 이번 대회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함으로써 서도소리계의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경연대회로 정착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이렇게 열린 본선 무대에서 영예의 대상은 박준길 씨가 수상했다. 박준길 씨는 수상 소감으로 “모든 분들이 다 훌륭하게 소리도 잘하여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이런 큰상을 받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또한 심사위원 선생님과 도와주신 모든분들께 감사하고, 그리고 김광숙 이사장님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소리를 시작하게된 동기는 박준길 씨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아버지가 지금은 고인이 된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오복녀 선생님과 전수조교인 유지숙 선생에게 입문시켰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들보다 유달리 노래(특히 전통가요)를 잘하던 박준길 씨는 이때까지만 해도 국악이란 것은 옛 선조들이나 즐기는 음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박준길 씨의 음악적인 재능은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 할아버지는 충청도 천안에서 꽤 유명한 시조 선생이셨다. 서울에서 시조 대회가 열리면 심사위원으로 초청되는 만큼 어느 정도 활동력도 있는 분이셨다. 옛말에 ‘씨는 못 속인다’라는 말도 있듯이 할아버지가 국악인이다 보니 소리계 입문은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특히나 서도소리를 배우는 박준길 씨는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배운 시조가 많은 도움이 됐다. 서도소리가 단전으로부터 눌러 떨어 나오는 통목의 요성음이듯이 시조도 눌러떨어 내는 기교가 있어 서로 흡사한 면이 많았다. “네 고저 천상 소리 할 팔자야!” “14년 전 처음으로 ‘소리’라는 걸 배우러 갔던 자리에서 평안남도 출생이시며 인간문화재이셨던 오복녀 선생님께서 저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그 때 15살이었던 저는 그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 때 팔순이 넘으신 고령의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가 제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었나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는 박준길 씨 앞으로 계획을 묻자. “저는 소리를 중학교 때 부터했왔지만 대학교에 입학했서 국악을 전공하게 된다 보니 이론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석사 과정을 거쳐 계속적으로 공부하다보니 우리나라 소리 중에서도 특히나 서도소리는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인적자원이나 시김새, 목소리 운용등 이론에 대한 자료나 학술적인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문제에 봉착하고 보니 저의 학문적인 욕심은 점차 커지게 되었고 올해 드디어 한양대학교 박사과정에 합격하는 영광을 입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꾸준히 학문적인 소양을 넓히고 실기적인 부분도 함께 열심히 연마해 나감으로써 나 자신의 발전은 물론, 겨우 그 명맥만 이어가고 있는 서도소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계기를 감히 꿈꿔 봅니다.” 이런 박준길 씨도 지난 몇 년동안 방황을 했다. 오복녀 선생님의 타계로, 또 개인적인 문제들로 잠시 슬럼프를 겪고 서도소리를 못할 위기도 처해 본적이 있다. “ 이런 시련들은 지금의 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제가 방황하고 힘들어할 때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다독여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저는 계속 방황하며 갈 길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예능인으로써의 자리를 다시 찾게 해 주신 이춘목 선생님은 저에겐 자상한 어머니이자 엄격한 스승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는 “끝으로 가르쳐 주신 이춘목 선생님, 유지숙 선생님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고 전했다. -김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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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전국민요경창대회 대통령상에 염창순 명창선소리산타령 소리꾼 염창순 씨가 한국국악협회(이사장 이영희)가 주최한 제10회 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명창부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선소리산타령 이수자인 염창순 씨는 이번 경연에서 선소리의 넓은 음역을 고루 소화해 내며, 치켜 떨어주는 창법과 꿋꿋하게 뻗어내는 창법 등 다양한 선소리 특유의 음악적 특성을 보여주었다. 소리 입문 40년 만에 얻은 쾌거로 자신을 지금 이자리에 서게 해주신 황용주 선생님과 그의 아내에게 이 영광를 돌린다는 염창순 씨는 "큰 상을 받게 되어 어깨가 무겁고 걱정이 앞섭니다. 앞으로도 국악발전에 더욱 노력하며 후학들을 양성하겠습니다”며 교육에 대한 열의를 비쳤다. 경기도 구리시 예총회장으로 오랫동안 구리시 문화예술을 이끌어온 염창순 명창이 우리 음악과의 만남은 까까머리 중학교 2학년 때부터이니 40여년 동안 소리 길을 걸어 왔다. 왕십리에 살던 어린시절 뚝섬 유원지에서 풍물패들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장구치고 소리하는 모습이 좋아 따라 다니던 염 명창에게 끝없는 소리길을 소개해 준 것은 이웃집 아저씨 였다. 당시 종로 5가에 있던 선소리산타령보존회(대한민속예술학교)를 소개해 준 것이 국악과 인연이 맺게 되었다. 그때 당시에 인간문화재 故 김순태 선생과 그에게 영원한 스승인 황용주(선소리산타령 예능보유자) 선생을 만나 소리를 배웠다. 그러나 염 명창의 집안은 조상대대로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내려온 가풍으로 부모의 절대적인 반대가 심했다. 소리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안 되었으나 그는 길을 다녀면서도 춤 추고 노래 하고 깡통을 두들기며 다녔다 한다. 어려서부터 하는 짓이 끼가 있어 보였던지 안따깝게 여기던 외할머니가 부모님 몰래 소리공부를 할 수 있는기회를 마련해 주고 학원비를 주셨다. 이렇게 부모 몰래 배운 소리는 KBS 민요 백일장에도 출연하고, 군악대에도 입대 할 수 있었다. 군악대에서는 소리 하길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던 염 명창에게 배뱅이굿을 비롯한 자신의 모든 끼를 발휘할수 있는 최고의 무대로 기억이 남는다 한다. 이때 같이 근무 했던 친구들이 망부석을 부른 가수 김태곤, 가수 한세일 그리고 사물놀이 김덕수 씨가 있었다. 제대를 하고 난 염 명창은 군악대에서 놀았던 재능에 25세에 겁도 없이 국악 흥행무대에 뛰어 들었다. 흥행 첫 무대로 양평극장을 대관하고 이은관, 이은주, 지연화, 윤평화 선생들과 단원 30여 명의 구성하여 2일간의 공연을 하였다. 적자는 났으나 관객은 많아 보람으로 시작된 공연 등은 사연도 많고 돈도 벌었다고 한다. 영예의 대통상을 황용주 선생님과 아내(이숙자)에게 돌린다는 염 명창은 묵묵히 자신에 길을 걷도록 내조해준 부인이 고맙고 또한 인연을 맺게 해준 스승에게 더욱 감사를 드린다 한다. 또한 이번 상을 계기로 그동안 청년 염창순부터 지금까지 지도와 도움을 아끼지 않은 이은관, 안비취, 이은주, 묵계월, 최창남, 고춘자, 지연화, 윤평화 선생님들과 선·후배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한다. 가족으로는 한국국악협회 구리시지부장으로 활동하는 부인 이숙자 씨와 제2회 복사골 전국국악대전에서 고등부 대상을 수상한 딸 염주희(서울국악예고 3년)가 있다.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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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우도 부포놀음 캠프 2010. 1. 14~17○ 강 사 : 이혜선 명인(전주여성농악단 상쇠) ● 모집분야 : 호남우도 부포놀음 ● 기 간 : 2010년 1월 14일(목)~17일(일) ● 장 소 : 안성향당무전수관(안성시) ● 참가자격 : 풍물전공자, 무용교사, 학원장, 무용전공자, 학생, 일반인 등 ● 접수신청 : 2009년 12월 20일부터 선착순 마감 ● 참가비용 : 25만원(3박 4일 숙식 및 수업료 일체포함) ● 계좌번호 : 제일은행(김호규) 128-20-016969 참가자 이름으로 입금바랍니다. ● 문 의 : 국악신문사 011-271-1411 / (02)745-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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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섭류설장구 캠프 2010. 1. 14~17○ 강 사 : 황해경 명인 ● 모집분야 : 김병섭류설장구 기초반(20명) ● 기 간 : 2010년 1월 14일(목)~17일(일) ● 장 소 : 안성향당무전수관(안성시) ● 참가자격 : 풍물전공자, 무용교사, 학원장, 무용전공자, 학생, 일반인 등 ● 접수신청 : 2009년 12월 20일부터 선착순 마감 ● 참가비용 : 25만원(3박 4일 숙식 및 수업료 일체포함) ● 계좌번호 : 제일은행(김호규) 128-20-016969 참가자 이름으로 입금바랍니다. ● 문 의 : 국악신문사 011-271-1411 / (02)745-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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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國寶(국보)창간안내전통문화를 보존, 계승 발전시키고자 1994년 9월에 창간된 국악신문은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우리문화의 슬기와 멋을 자부심을 갖게 하고자 노력해 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비전 2009 1월, 월간 國寶(국보, 나라의 보배) 월간 國寶(국보)지는 국악을 주테마로 복식, 놀이, 공예, 인물, 답사, 토종, 맛, 건축, 공연 전시, 지방문화, 전설 등의 섹션 형 편집 기획으로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우리문화의 슬기와 멋을 자부심을 갖게 하고자 아름다운 잡지, 뿌리 깊은 정론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 하겠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문화를 듬뿍 담은 전통문화 종합잡지인 월간 國寶(국보)는 우리자손 후대에 가장 뿌리 깊은 소중한 잡지로 읽을거리, 볼거리, 느낄거리와 바른 정보 전달의 보람을 위해 살아가는 잡지가 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한소리, 한소리가 우리 오천년 전통문화 살리기에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부디 많은 관심으로 후세에 영원히 남길 온 겨레를 향한 큰 비전에 동참해 주시길 바라며, 월간 國寶(국보)의 편집위원과 전문대기자를 모십니다. 국보는 월간 만원이며, 1년 정기구독료는 10만원입니다. 국악신문사 김호규 011-271-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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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우리춤 강습회"모집분야 : 진도북춤, 소고춤, 설장고 일 시 : 소 고 춤 2004년 7월 31일 ~ 8월 2일 <2박 3일> 진도북춤 2004년 8월 2일 ~ 8월 4일 <2박 3일> 설 장 고 2004년 8월 4일 ~ 8월 7일 <3박 4일> 장 소 : 상공회의소 북부연수원 참가자격 : 무용교사, 학원장, 무용전공자, 학생, 풍물전공자, 일반인 등 참가비용 : 7월 1일 부터 50명 선착순 마감 참가금 : 25만원(2박 3일 숙식 및 수업료 일체포함> 제일은행 128 -20 -016969 김호규 <참가자 이름으로 입금요망> 강사진 : 소고춤 /김묘선 명무,진도북춤 / 박병천 명무, 설 장 고 / 황혜경 명인 문 의 : 국악신문사 02) 922-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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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최초 국악기 백화점, 양지국악사 조남양 사장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종로 3가 네거리 까지는 예전에 대궐길이라고 불리었던 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관혼상 제용 각종 도구와 북, 장구, 꽹과리 등을 빌려주던 세물전이 있었고 노래하는 가인, 춤추던 명인들이 인근에 많이 살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과 더불어 창덕궁 앞에 새로 새긴 국립국악원, 국악학교을 중심으로 명인 명창들도 주변에 많이 기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 거리는 명실공히 국악 의 거리로 칭하게 됐다. 이후 이 거리는 국악로라고도 불러지는데 거리변에는 10여개의 국악기 상가, 국악학원 그리고 한복집들이 몰려있다. 국내 최초 국악기 백화점을 지향하는 양지국악기도 이 거리에 있다. 10여전 양지국악사을 설립하고 문을 열때도 다른 국악사에 비해서 매장의 크기와 다 양한 상품,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학생들과 국악학원에서 찾았다. 특히 지리적으로도 좋은 가게 위치로 익히 국악계에 알려져 졌다. 그런 양지국악사 가 바로 옆에 있던 미스타리 의상실이 이사 가면서 빈 가게터를 인수하여 확장 오픈했다. 새로 단장하여 오픈된 매장은 국악기 전시장으로 사용된다. 그동안 양지국악사는 내외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했다. 여기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남양 사장의 장인정신과 부지런함, 그리고 저렴한 가격이 지금의 양지국악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조남양 사장은 국악사를 개원하기 전에는 무대소품 일을 했다고 한다. 주로 국립극장에 소품을 납품했고,한국무용, 고전, 역사 드라마. 영화 등 쪽을 전문적으로 일했다. 소품에 중요도는 작품에 가치성을 좌우 할 수 있는 중요한 일로 매일 밤샘을 하기가 예사였다. 특히 역사물이 많은 것은 고증을 들어야 되고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일에 진행이 안되는 날에는 고증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서 낮에 소품에 대해 조언을 듣고 밤에 직접적으로 소품제작을 했다. 그렇게 하나 하나 정성을 들여 납품을 하고 작품이 무대에 올라가서 성공하면 그 기쁨은 그동안 고생하면서 소품을 제작했던 아픔을 잊는다고 한다. 조남양 사장이 악기사를 만들게 된 동기도 단순했다. 소품을 하는 동안 여러 단체 선생들에게 심부름처럼 악기를 조달하게 되고 여러 가지의 소품이나 악기 중에 반품을 받는 것이 나오면 그 물품을 고스란히 집에 보관해야 하는입장이었다. 조남양 사장은 소품작업장만 가지고 제작하면서 당시 문공부 산하에 관납을 병행했기에 물품을 반품받으면 보관이 곤란한 상태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서 쌓인 국악기로 인해 곤란했고, 국악기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소품제작으로 쌓인 기술을 바탕으로 무엇이듯지 만들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종로 3가 국악로에 국악사를 개업 할 수 있었다. 조남양 사장은 개업 후 우리의 옛 악기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그 악기에 대한 옛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우리의 전통 악기들은 대부분이 일상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들로 만들어졌으며, 가능한 인위적 가공을 배제한체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악기는 한국인이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문화매체이자 상징이며, 고유한 심미의식의 결정체로 우리의 악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문화의 특질을 파악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들은 실천에 옮겨고, 고가였던 우리 악기들을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도 가질 수 있고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악기가격을 낮춰서 판매을 하게 됐다. 이러한 가격은 금새 소문이 나 업계에 퍼졌고, 같은 업계에서는 가격 인하 관계로 많은 지탄을 했다. 그러나 악기를 현실적으로 많이 필요로 하는 국악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고객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내 주위에서는 가격 인하로 물건이 하품이다는 악소문이 돌았다. 조남양 사장은 이러수록 악기에 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면 2001년에 하남시에 종합적인 국악기 생산을 위한 공장을 설립하게 됐고, 악기제작에 필요한 연구와 실험을 통하여 오랜 기간 사용하더라도 습기나 온도 등 외부환경에 그 형태가 변형되지 않고 음색이 변색되는 것을 방지하고, 원래의 풍부한 음색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우수한 국악기를 제작하게 됐다. 이렇게 생산된 각종 개량악기와 북 종류의 대형악기들은 이번에 개장된 매장에 전시하여 누구나 보여 줄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조남양 사장에게 그 동안 악기를 생산판매하면서 느끼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질문을 하자. "우선 양지국악사를 사랑해 주시고 늘 관심을 가져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모든 분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수 없어서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인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양지국악사에서 제작한 악기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국악기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한편으로는 양악과 어울릴 수 있는 악기들을 다양하게 연구 개발하고 있습니다. 국악에 대한 자부심으로 악기를 제작하고, 국악의 대중화, 더 나아가서는 국악의 세계화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양지국악사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항상 저렴한 가격, 좋은 품질,차별화된 악기로 고객분들을 찾아 뵙겠습니다.” 한편으로 조남양 사장은 악기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하고 가격만 낮추기를 바라고 있는 점이 아쉽다고한다. 특히 우리국민 모두가 우리 악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사용했으면 하는 바램을 전했다. 성악이든 기악이든 악기가 없으면 존재할수 없다. 악기는 음악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판소리에도 ‘1고수 2명창’이란 말이 있듯 북의 역할이 중요하고, 민요에는 장구가 필요하고, 풍물굿에선 사물악기가 바탕이 되기도 한다. 대담/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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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규 - 우리의 오랜 친구, 개1, 민중의 심리에 잠재된 개의 의미 개는 우리 민족에게 오랜 세월 동안 사랑을 받아왔던 동물이다. 그의 위치는 집을 지키는 수호신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죽어서 인간을 보신시켜 주는 희생양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의 속성을 바탕으로 하여 개의 의미는 여러 가지 상징을 부여받아 왔다. 개가 출현한 꿈의 경우는 법관쪾경찰관쪾경비원쪾신문기자쪾탐정가 등의 사건해결사로, 충복, 머슴 등의 경우는 개의 충성스러움을 뜻하기도 한다. 동시에 전염병이나 방해물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개띠의 사주로는 天藝星(천예성)이라고 하여, 기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많고 마음이 착하고 유순하다. 부지런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재물 운이 좋아 성공이 빠르며, 청렴하고 정직한 편이다. 남자는 색욕이 강한 편이고 호언장담을 잘하여 가정에 소홀 하는 경향이 많다. 구비문학을 통해서 살펴 본 개의 존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개가 전형적인 忠(충)의 실천적인 동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가 개관련담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주로 속담에 나타나는 것으로 비천한 개의 본성을 통해 인간의 그릇된 성질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설화를 중심으로 할 때 개는 미물이기는 하지만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상징적인 존재물로 부각되어 있다. 개가 그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개무덤형 전설>의 유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와 유사한 형태의 이야기까지도 형성하면서 전승을 이루었다. 이러한 이야기의 형성은 개의 속성이 사람을 잘 따른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개는 악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관적인 위치에 놓여진 이야기도 있는데, 이 역시도 개가 후각을 통해 물건을 잘 찾아내는 본성과 관련되어 형성된 것이다. 민요의 경우는 낱말의 유희요와 같이 개의 반복을 통한 개타령도 있으나, 대개는 정요(情謠) 형태의 내용을 취하고 있다. 즉 여자가 임을 기다리는 심정을 바탕으로 개가 이것을 방해한다는 일종의 심리적인 미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의 역할은 임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밤중에 집으로 접근하는 일반인을 경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의 상징은 절대적인 미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리적인 상황을 노출하는 의미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평가된다. 속담에서도 개의 본성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비유는 원초적으로 사악하거나 멍청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나쁘게 말할 때 사용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개의 본성, 예컨대 똥을 먹는다거나 흙구덩이에서 노는 습성들이 속담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개의 존재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이며 인간에게 매우 친근한 동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세계에 오래 전부터 소속되어 왔기 때문에 개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그 만큼 높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현재 인간들의 생활공간이 변화되면서 개의 육체를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작태를 벌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파트의 공간에서 개를 못 키우게 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개의 성대를 잘라 버리는 수술이 유행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2, 우리의 일상생활 중 개와 관련된 말들 중에는 좋은 말보다 나쁜의미로 사용되는 말이 많다. '말도 안되는 무슨 개 같은 말’이냐고, 또 ‘개 같은 짓’을 한다며 비상식적인 일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형편없이 나쁜 상황을 개 같은 일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개떡이란 말도 있다. 심하게는 욕을 할때도 개 같은 ××란 말로 남을 비하하기도 한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자’ 라는 말에서도 개같이 번다는 뜻의 의미는 별로 좋은 뜻은 아니다. 이처럼 개와 관련된 말을 하면서 고상해지는 경우는 없다. 3, 우리의 일상생활 중 개는 사람들을 위해 충복의 역할을 한다. 먹을 것도 사람이 먹다 남은 것을 먹는다.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주인 없는 집을 지키고 노인분들에게는 친구가 되어주는가 하면 맹인이 길을 걸을 때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사냥할 때는 사냥감을 찾아 주기도 한다. 마약탐색도 해 주고 범죄 수사시 많은 활약을 한다. 최근에는 사람들의 취미생활을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즐거움을 주고 있다. 심지어 배가 고프거나 영양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살신성인의 역할로 잡아 먹히기까지 한다. 죽어가는 주인을 위해 수건에 물을 적셔와 회생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개는 인간을 위해 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로 고마운 일을 많이 한다. 사람들이 개를 넣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면 개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개들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개자를 넣는지’하고 억울해할 것이다. 4, 개는 꼭 필요한 일을 위해 짖는다. 생각해 보면 동물이 소리를 낼 때 운다고 하고, 노래한다고 표현한다. 새가 울고 꾀꼬리가 노래하고, 여우도 운다고 하지 짖는다고 하지 않는다. 새도 여우도 닭도 짖는다고 하지 않는다. 개는 노래한다고, 운다고 하지 않는다. 짖는다는 표현은 개에게 붙이는 대표적인 수식어다. 개가 짖는다고 한다. 왜 개는 짖는다고 할까. 사전을 찾아보면 ‘짖는다’는 지껄이다를 농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일상 말하는 것을 농으로 표현하면 짖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용될 때는 그런 의미로 상용되지는 않고 있다. 개는 세가지 경우에 짖는다. 도둑이 들어왔을 때 짖어 겁을 먹게 하고, 도둑이 들어 왔음을 주인에게 알린다. 또 주인이 왔을 때 반가워서 짖는다. 그 어느 경우가 헛소리로 해석될 것인가. 개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할 때 짖는다. 도둑을 물리치거나 마약탐색을 하는 개들의 행위는 매우 의미있고 보람있는 일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인도하는 것은 약자를 위한 숭고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그 같은 일을 어느 누가 개같은 짓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올해는 개의 해다.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지 말자. 개는 다산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태어난 자기 자식도 열심히 키운다. 우리 개의 해에 다같이 개같이 잘 살자. 무엇인가 열심히 자기 몫을 다하는 개처럼 뛰자. 개는 꼭 필요한 일을 위해 짖는다. 우리사회가 지향하는 평등하고 누구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꼭 필요하고 보람된 일을 위해 개처럼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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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살풀이 춤 최 선 명무"혼(魂)이 담겨있고 정신이 스며있는 춤을 춰야한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텅 빈 동작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고. 선생의 한평생 무용철학이기도 한 이 말은 곧 ‘춤의 기본과 본질을 알고 창작과 전통의 구분을 명확히 하면서 인간성과 도덕성이 바탕이 된 바른 춤, 바른 동작을 깊은 내면에서 이끌어 올려야 한다’는 춤의 대한 정신을 말한다. 전북 춤계에서 영원한 뿌리로 평가받는 호남 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최 선 선생 ! 「이제 나는 한 사람의 춤꾼으로서 개인의 영욕에만 사로잡힐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나의 춤은 곧 나의 희망이요. 겨레의 희망이기를 소망하고 기원할 따름입니다.」고 고뇌 하면서 최 선 선생은 춤과 같이 지나쳐 버린 60년이란 긴 세월을 돌이켜 본다. 「최 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춤꾼! 이렇게 부른다. 그것은 무대에서 삶이 잠잔 시간 보다 훨씬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생을 잘 모르더라도 무용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선생의 몸에는 「춤끼」가 자르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는 일제의 식민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5년 11월 7일 전북 임실에서 유교집안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명의 형님들은 일본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였고 부친은 유학에 밝은 시골 선비여서 최 선 선생도 당연히 그런 가풍을 따라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기질은 일반적인 학문을 공부 하는 쪽보다는 예능쪽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러한 자기 기질을 발견했고, 수많은 질타와 역경을 고집 하나로 이겨내며 일생을 춤꾼으로 살아오고 있다. "춤은 무당이나 하는 것이거늘 어찌 남자인 네가 춤군이 되어 집안 망신을 시키려느냐”며 무섭게 질타하는 부친의 노여움, 집안 식구들의 눈치, 동네 사람들의 비아냥이 열 살도 채않된 그에게는 너무 벅찬 부담이 됐을텐데도 그런 모든 아픔을 당차게 이겨낸 것을 보면 아마도 선생은 춤을 위해 태어난 일것이다. 오지추운 겨울 밤에도 어머니의 옷가지를 몰래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 달빛을 조명삼아 혼을 불사르다가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지고 오한에 떨던 꼬마,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예회 때면 인기를 독차지하던 꼬마 최 선이 오늘 한국 무용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이룬 것은 완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월북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미화 선생과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무용 강습을 하고 있던 김미화 선생이 한눈에 춤 꾼으로 뛰어난 재질이 있음을 알아보고 체계적인 무용을 가르치면서부터 선생의 춤은 탄탄한 바탕과 독창적인 예술성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나이 불과 열 두어살 때였다. 이때부터 선생의 춤 인생은 한번도 쉴틈없이 이어진다. 동족 상잔의 비극인 6. 25 사변중에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었고, 하반영 선생 등을 따라 전주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연극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엔 마침 전주에 국악원이 개설되고 주위에서 전주국악원에 계신 추월이라는 할머니 선생이 판소리도 잘하지만 춤을 잘 추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갔다. 그 분은 항상 단아한 모습으로 국악원의 넓은 대청마루에 계셨으며, 방이 여러곳이 있는데도 거기서 판소리도 하고 춤을 추셨다. "그 때 당시에 봤을때 돗자리를 깔고 춤을 추시더라구요. 당시만 해도 수건춤이라 것만 알았지 살풀이 라는 것은 처음 알았지요. 또한 그때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무 장단이나 장구, 북, 꽹과리 등 구음으로만 춤을 했지요. 추월 선생이 직접 장구도 치시고, 돗자리 위에서 수건춤을 가르쳤던것을 기억한다는 선생은 지금 선생이 일궈낸 호남살풀이춤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소위 "수건 춤”을 배우게 되는데, 한량들이 흥에 겨워 기교도 없이 추던 그런 춤, 다시 말하면 춤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왠만한 사람들에겐 그 수건 춤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 망정 선생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춤, 가장 전라도 같은 춤으로 인식됐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에 사로 잡혀 밤낮으로 춤다운 춤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 수건춤이 바로 선생을 오늘의 한국무용계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남자 초립동이 춘다는 의미로 "동초(童草) 수건춤” 또는 "호남살풀이 춤”으로 불리우는 이 춤으로 최 선 선생은 지난 84년 11월 개천 예술제 특장부문에서 「호남살풀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으며, 96년 3월 전라북도 지정무형문화재 15호가 인정됐다. 그래서 이기반 시인은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 막혔던 강물이 흐른다. / 천만년 억겁에 / 쌓인 세월의 갈등도 / 원한에 사무친 시름이랑 / 철 철 철 녹아내린다. 」중략 이렇게 「살풀이춤에서」시로 찬양해 줬다. 어쨌든 최 선이 그 수건 춤에 매달리는 사이 어느 덧 그도 스무살 청년으로 성장했고, 춤 실력도 인정 받는 등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자신감에 전주에서 처음으로 "최 선 무용연구소”를 차려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6. 25 직후 무용가가 거의 없어 애로사항이 많았서요 아마 황무지인 전주에 한국 춤을 개척한것은 저 밖에 없을겁니다”라고 선생은 전한다. 전쟁도 끝나고, 공비 소탕도 대충 마무리돼 사회질서가 잡혀가던 1954년 전주도립극장에서 「논개」「승무」 「장고춤」 등으로 첫 개인발표회를 가져 전북 무용계에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전주도립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앞 에서 자신의 춤을 마음껏 펼치고 난 그날 밤, 그는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밤새껏 울었다. 너무나 거칠었던 세파를 헤쳐온 지난 날들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그의 가슴에 퍼져왔기 때문이었다. 이 첫 무용 발표후 그는 당시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얻고 있던 정인방 선생을 만나 정식으로 사사를 받는 영광을 안는다. 이때 서울 무대 입성과 전통 무용의 맥을 잇는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어진 계기가 바로 정인방 선생과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인정 받면가면서 한국무용 최고로 꼽히는 선생은 개인발표나 후진양성면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승무 살풀이 무당춤 등 한국 전통무용 뿐아니라 창작무용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은 197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가잿골의 전설」로 대상이 없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정신없는 국내외 공연과 발표회 등이 선생의 춤 진수를 과시하기도 했다. 80년엔 한길무용회 특별회원으로 일본 자유중국 미국등지를, 그리고 85년엔 대통령상 수상 혜택으로 미국 동남아공연을 가졌고 그 밖에도 미국 일본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70년대부터 무용협회 전북지부 지부장직을 맡아 오랫동안 일해온 선생은 그동안 전라예술제를 비롯, 각종무용제를 주최, 전북에 무용의 뿌리를 내리고 맥을 잇는 활동을 지금까지 펼쳐왔다.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어야지, 우리 전통춤을 좀 더 멀리 또많이 전수, 보급하는 일이 남은 삶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하는 선생의 춤은 현재 전북대 무용학과의 장인숙 교수, 이해인 교수, 김원(현대무용), 원광대 이길주 교수, 충남대 정은혜 교수, 서울 고선아 선생, 광주 허순선 교수, 그리고 선생의 딸 최지원 씨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끝으로 선생은 제자들과 딸 지원 씨에게 부탁한다. 호남살풀이 춤이 영원히 살아 전승 보존되고, 꽃을 피었으면 한다고. 특히 딸이 아버지의 염원과 꿈, 그리고 다 추지 못하것을 열심히 하여 아버지 보다 나은 춤을 추었으면 한다.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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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 유영건 회장 인터뷰일주일간의 한국방문을 마치고 떠난 故 안익태 선생의 부인 롤리타 안 여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애국가가 바로 한국이고, 애국가를 들을 때 남편과 한국인들의 순수한 감정을 마음속으로부터 느낍니다. 그 애국가를 한국에 돌려드리고 가서 정말 행복합니다.” 뭉클하다. 앞서 16일 문화관광부를 찾아 애국가 저작권을 무상으로 양도했던 그다. 애국가 저작권을 둘러싼 구구한 논란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듯하다. 애국가 저작권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말 가수·연주자에게도 전송권을 부여한 개정 저작권법이 발효되면서부터다. 그런데 저작권법이 강화된 데 불만을 품은 일부 네티즌이 "애국가까지 돈 내고 들어야 하나”라며 새삼 시비를 걸면서 여론이 부정적으로 흘렀다. 차제에 애국가를 바꾸자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왔다. 애국가에 대해서는 다소 오해가 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애국가는 정부가 법령으로 공식 제정한 적은 없다. 1948년 정부수립 때 국가로 채택됐고, 그것이 교과서 등에 실리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로 인정돼왔다. 서울〓수도, 태극기〓국기, 한국어〓국어이듯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국가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운 ‘관습헌법'일 것이다. 한국의 저작권사업과 콘텐츠 산업은 최근 아시아를 강타한 한류 열풍에 힘입어 차세대 한국의 성장 동력을 각광받고 있는 분야다. 시장 규모만도 지난해 생산 기준으로 6조원 대에 이르렀으며, 유통 시장을 포함하면 더 큰 시장을 형성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산업의 최대 걸림돌은 불법복제로, 많은 저작권 및 콘텐츠 산업이 복제로 인해 산업 기반이 뿌리 채 흔들렸고, 최근엔 인터넷은 물론 지적재산권에까지 불법복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이에 국악신문사는 (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 유영건 회장을 만나 지난 2개월여 동안 논란 돼온 `저작권법 개정에 대한 문제와 저작권협회의 의견과 음원을 관리하고 있는 유영건 회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올해 1월부터 저작권 및 콘텐츠 불법복제에 대한 논쟁이 인터넷과 언론지면을 통해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까지 언론과 업계의 이슈가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문제는 새로운 이슈인가요 아니면 누적된 문제로 볼 수 있나요. -새로운 문제로 볼 수는 없지만 저작권과 문화콘텐츠 산업 규모가 커지기 전에는 우리 모두 이 같은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에도 저작권과 콘텐츠 불법복제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음반은 한때 4000억 원에 달하는 시장 규모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1300억 원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최근 들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불법복제가 이뤄지고 있으면서도 사용자 스스로 `도둑'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음반 시장은 고사 위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음반 외에도 게임과 영화가 출시되기도 전에 복제되고 있는게 최근의 현실입니다.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한 언론과 관련 협ㆍ단체들이 이슈를 제기해 왔으며, 이 같은 활동이 최근 저작권법 개정과 맞물리면서 사회 전체의 이슈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저작권법상 저작권에는 저작재산권과 저작인격권이라는 양대 권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작재산권이란 저작권자가 저작물을 배타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로, 저작권법상 인정되고 있는 저작재산권으로는 복제권(제16조), 공연권(제17조), 방송권(제18조), 전송권 (제18조의2), 전시권(제19조), 배포권(제20조), 2차적 저작물등의 작성권(제21조) 및 대여권(제65조의 2)등의 지분권(bundles of right)이 있습니다. 여기서 타인의 음악 저작물을 이용하고자 하는 자가 각 저작권자로부터 허락받아야할 권리는 복제권 및 저작물을 공중에 제공할 권리입니다. 또한 저작재산권에 내포된 복제권, 공연권, 방송권, 전송권 등 개별적인 권리는 각기 별개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별도의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므로, 그 중 어느 하나에 대한 합법적인 이용권자리고 하여 당연히 그와 다른 권리까지 가지게 된다고 볼 수는 없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허락받지 아니한 권리는 이를 이용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제라도 음원과 콘텐츠 불법복제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봅니다.- 처음에 음악을 선택하게 된 동기와 어떤 장르의 음악을 했는지요. -저는 작곡가입니다. 장르는 순수 음악과 대중 음악을 주로 해 왔습니다. 제가 알기로 집안에서 음악을 좋하했습니다. 아버님(유동현)은 시조(정악)를 즐겨 부르시고 시조대회에 나가 수상도 하시고 퉁소도 잘불었다고 합니다. 어머님(정명숙)은 초등학교 교사로 계셨는데 음감이 뛰어나신분 이였지요, 그러나 전문적인 집안은 아니었구요. 아버님이 제 나이 일곱에 돌아 가셨는데 故 김월하 선생님과 인연이 많았다고 합니다. 김월하 선생이 부산에 피난 오셔서 고생하실때 돈독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김월하 선생이 서울에서 활동 하던 중 방송에 아버지를 소개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작곡자의 소질은 부산 금정초등 3학년 때 기악부 활동을 했는데 그때부터인것 같습니다. 4학년부터 작곡에 재능이 보였고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희 집안은 6남 3녀이며, 음악은 모두 좋아하셨고 위로 형님 한분이 고교시절부터 교회성가대 지휘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과 지금까지 음악과 지냈지만, 사실은 늦깍이 입니다. 작곡학위는 마흔세살에 연세대 음악교육원에 들어가 받았습니다. 여기서 올 4.0 만점을 받았고 졸업때 학생대표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협회에 저희 국악 관련 회원은 몇분이고, 협회에서 국악에 대한 배려와 회장님은 국악을 알고 있는지요. -저희는 정회원과 일반회원으로 구분되어지고 있으며 현재 이사로 박해일 선생님, 황용주 선생님이 계시고, 박범훈(중앙대 총장) 등 20여분이 활동하고 계십니다. 준회원은 분야별로 구분되지 않았지만 약 40여명 됩니다. 전통음악부문에 배려는 사실상 별로 없습니다. 저희 협회는 일종의 징수 기관입니다. 음원을 관리하고 그 것을 나눠주는 역활입니다. 다른 파트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음악의 기둥인 국악을 배려하여 창작요건를 고취시키겠습니다. 국악은 가야금을 8년 정도 배웠습니다. 김성연(이화여대 국악전공) 선생에게 성금련 류 가야금 산조를 다 배웠습니다. 그리고 황병기 선생님의 침향무 등도 배웠습니다. 앞으로 정신적 여유와 시간이 있으면 선율 음악인 아쟁도 하고 싶고, 강태홍 류 가야금 산조를 더 배우고 싶습니다. 그 후에 가야금산조와 아쟁과 관련된 전통음악(20-30분)곡을 쓰고 싶습니다. 서양의 소나타처럼 산조를 활용하여 대곡을 쓰고 싶습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제 인생의 목표가 그러합니다.- 협회 회원 자격 조건이 있다면는요. -제가 알기론 대한민국 국악계 등 국악게에서도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것으로 압니다. 굳이 자격이 있다면 고정된 매체를 기준으로 발표된 음원이나 발표회 프로그램, 출판물에 게시된 자료을 협회에 제출하며 준회원으로 가입됩니다. 또한 경력은 상관없습니다.-유영건 회장은 지난 10월 18일 2004 CLSAC 세계총회를 1984년 일본에서 첫 회가 열린 이후 두번째로 개최하는 역량을 보였다. 특히 총회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음악 저작권 네트워크를 만들고 지적재산인 창작과 소유 그리고 경제, 사회 및 문화적 측면에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하겠다고 한다. 대담/김호규 기자(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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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한민족평화기원 전국통일국악대전 일정 연기■ 대회일정 주관사 사정으로 대회일정이 연기되었습니다. ■ 심사제도 o 국악계 권위 있는 분으로 (예능보유자, 국악분야 교수, 대통령상 수상자) o 운영위영회에서 의논 심사위원 위촉 o 대회 3일전 심사위원 연락 본선을 거친 경연자 성적순으로 수상자 결정, 단, 동점일 경우 연장자 우선 결정 ■ 참가신청 o 접수기간 : 2019. 12. 1 ~ 12. 18 o 접수장소 및 연락처 : 국악신문사. 02-745-1411. ※ 참가자 접수확인 : 08:30 - 한국자유총연맹 중극장 로비 ※ 경연순서는 접수 역순으로 결정함 (당일 추첨 없음) 1) 참가신청서 1부(소정양식) 2) 증명사진 1매(3cmx4cm) - 신청서 부착 나. 신청서 제출 1) 신청서 : <별첨> 참조(홈페이지에서 다운 가능) (사)국악신문사 / KUK1411@naver.com(신청서 작성 후 파일첨부) 2) 신청기간 : 2019년 12월 1일 ~ 12월 18일 18:00까지(접수기간 엄수) 3) 신청서 접수처 ◎ E-mail접수: KUK1411@naver.com(신청서 작성 후 파일첨부) * 본인의 신청현황을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참가비, 반주비 입금계좌참가자 입급 확인 바랍니다.문자 부탁드립니다 신한은행 140-009-012707 : (예금주 : 국악신문사 김호규) 다. 신청 문의처 : ☎010-5271-1411 문의는 문자 부탁드립니다 ■ 참 가 비 : 단체부, 일반명인부 5만원, 차세대명무부 5만원 ■ 고 수 비 * 반주자는 본인대동을 원칙으로 하나 집행부에서 지정한 고수 활용가능 50,000원 ※ 지정고수 필요하신 분들은 신청서에 기재할 것 ■ 시상계획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시 상 금 시상인원 계 국악부문 성악 기악 무용 풍물 일반, 명인부 통일국악대상 국회의장상(에정) 3.000.000원 1 종합 최우수상 행자부장관상(에정) 500.000원 1 종합 최우수상 통일부장관상(에정) 500.000원 1 최우수상 (사)한국국악협회장상 상장 및 부상 각 1 우 수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및 부상 각 1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및 부상 각 2 차세대 명무부 대 상 서울특별시장상 500.000원 1 최우수상 민주평통 사무처장상 상장 및 부상 1 우 수 상 (사)한국문화재재단장상 상장 및 부상 1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및 부상 2 중,고등 종합대상 교육부장관상 500.000원 1 대 상 민주평통 사무처장상 상장 및 부상 3 최우수상 (재)국악방송사장상 상장 및 부상 각 1 우 수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및 부상 각 1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및 부상 각 2 초등부 대 상 (재)한국문화재재단장상 상장 및 부상 각 1 최우수상 (사)국악로유산회장상 상장 및 부상 각 1 우 수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및 부상 각 1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및 부상 2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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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한민족평화기원 전국국악대전■ 경연방법 - 경연순서 무용, 기악, 성악, 새터민부 순으로 경연함. 무용- 차세대명무부, 학생부(초등부), 학생부(중,고등부), 일반부 순으로 경연 기악- 학생부(초등부), 학생부(중,고등부), 일반부 순으로 경연 성악- 학생부(초등부), 학생부(중,고등부), 일반부 순으로 경연 새터민부- 통합으로 경연 - 경연시간 * 각 부문별 예선 3분 이내, 결선 5분 이내(단심제 경연부문 3분 이내) (학생부_중,고등부, 일반부만 예선,결선으로 경연) * 차세대명무부, 초등부, 새터민부 단심제■ 대회일정 접수일 : 2018. 10. 10~ 11. 10 / 장소 : 국악신문사 홈페이지 온라인 접수 예 선 : 2018. 11. 11 10:00~ / 장소 : 과천 경기소리 전수관 결 선 : 2018. 11. 11 전 부문 예선 및 단심제 마친 후 진행 / 장소 : 과천 경기소리 전수관 시상일 : 2018. 11. 11 / 장소 : 과천 경기소리 전수관 ■ 심사제도 본 대회 심사제도 규정에 의함. ■ 참가신청 ▪ 신청기간: 2018년 10월 1일 ~ 11월 10일 오후 6시까지 (당일 접수 불가)▪ 신청서류: 참가신청서(본 대회 소정양식, 사진부착) 1매▪ 신청방법: 홈페이지 온라인 접수, kuk1411@naver.com(온라인 접수 선호)▪ 접수처▫ TEL: 02-745-1411▫ FAX: 02-743-1412▫ 메일: kuk1411@naver.com▫ 홈페이지: http://kukak21.com ■ 참 가 비 없음 ■ 고 수 비 5만원신한은행 140-009-012707 <국악신문사 김호규> ■ 수상자 사후관리본 대회 운영방침에 의함.- 2019년 차세대명무전 출전 기회 제공.■ 기타사항 * 차세대명부무 만43세로 제한. * 경연 오전 10:00 부터 시작으로 9:30 대기 해야 함. * 학생부_중,고등부, 일반부 예선, 경연 동일 작품 가능. ** 경연 순서는 접수 역순으로 진행 함. ■ 시상계획 등위부문내 용시상훈격시 상 금시상인원계기악성악무용일반부종합최우수상국회의장상1.000.000원1 대 상문화관광체육위원장상상장2 최우수상(사)한국국악협회장상상장각 1 우 수 상국악신문사장상상장각 1 장 려 상국악신문사장상상장각 2 차세대 명무부대 상서울특별시장상상장1 최우수상민주평통 사무처장상상장1 우 수 상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상상장1 장 려 상국악신문사장상상장2 중,고등부 종합대상교육부장관상상장1 대 상민주평통 사무처장상상장2 최우수상(재)국악방송사장상상장각 1 우 수 상국악신문사장상상장각 1 장 려 상국악신문사장상상장각 2 초등부대 상(재)한국문화재재단장상상장각 1 최우수상(사)한국국악협회장상상장각 1 우 수 상국악신문사장상상장각 1 장 려 상국악신문사장상상장2 재외국악인부 : 무용, 성악, 기악, 타악 등위 부문내 용시상훈격시 상 금시상인원계무용성악기악풍물 새터민부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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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한민족 평화기원 전국국악대전 12월 16일2017년 제6회 한민족 평화기원 전국국악대전 우리나라 한민족 평화기원과 오천년 전통예술문화 국악의 대중화와 우수한 국악인의 배출을 목표로 하며, 전국에서 국악을 공부하고 실연 하는 차세대 우리문화의 지킴이를 발굴 지원한다. : 2017년 12월 16일 오전 9시~ ▪ 예선: 2017년 12월 16일 오전 9시~ (9시 추첨) ▪ 본선: 2017년 12월 16일 오후 3시~ : 중구 구민회관 소강당 : 국악신문사 : 국악신문사 : 대한민국 국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서울특별시, 교육부, (재)국악방송, (사)한국예총, (사)한국무용협회, (사)한국국악협회 ▪ 기악부문 / 학생부, 명인부 ▪ 성악부문 / 학생부, 명인부 ▪ 풍물부문 / 학생부, 명인부 ▪ 무용부문 / 학생부, 차세대명무부, 명인부 ▪ 학생부 : 초, 중. 고등학생 및 청소년 ▪ 차세대명무부 : 19세 이상 35세 이하 전공자 ▪ 명인부 :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만30세 이상 남. 여 전공자 ① 학생부 - 3분이내 단심제② 차세대명무부 - 5분이내(예, 본선) ③ 명인부 - 5분이내(예, 본선) ▪ 신청기간: 2017년 11월 10일(금)~12월15일(금) 18시까지 ▪ 신청서류: 참가신청서(소정양식) 1부 (* 참가신청서는 복사 사용가능) ▪ 신청방법: 우편접수, 이메일접수, 팩스접수 ▪ 접수처: 국악신문사 ▫ 주소: [우:13134] 서울시 종로구 돈화문로 54 국악신문사 ▫ TEL: (02)745-1411, 010-5271-1411 ▫ FAX: 02-743-1412 ▫ mail: hg1411@hanmail.net* 대회진행 준비상 접수마감일을 엄수할 것이니 유의바람 ▪ 차세대명무부, 명인부 5만원 ▪ 고수비 5만원 신한은행 : 140-009-012707(예금주 국악신문사 김호규) ▪ 본 대회 심사 규정에 의함. ▪ 입상자 지원특전 - 국악신문사 주최 심사 및 초청무대 ▪ 초등부 : 무용, 성악, 기악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시 상 금 시상인원 계 무용 기악 성악 풍물 초등부 최우수상 (재)국악방송 사장상 상장 4명 우 수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4명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8명 ▪ 중, 고등부 : 무용, 성악, 기악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시 상 금 시상인원 계 무용 기악 성악 풍물 중,고등부 종합대상 교육부장관상 상장 1명 대 상 민주평통사무처장상 상장 3명 최우수상 (재)국악방송사장상 상장 4명 우 수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4명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8명 ▪ 차세대명무부 : 무용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시 상 금 시상인원 계 무용 차세대 명무부 대 상 서울특별시장상 상장 1명 최우수상 민주평통사무처장상 상장 1명 우 수 상 (사)한국무용협회이사장상 상장 1명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2명 ▪ 명인부 : 무용, 성악, 기악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시 상 금 시상인원 계 무용 기악 성악 풍물 명인부 종합대상 대한민국 국회의장상 1백만원 1명 대 상 국회 교육문화체육위원장상 상장 3명 최우수상 (사)한국국악협회이사장상 상장 4명 우 수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4명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8명 * 본 대회요강 및 시상내역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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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중봉(조헌) 숭모 김포 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 11월 26일2017년 제5회 중봉(조헌) 숭모 김포 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   차세대 전통예술인 육성정책의 일환으로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의 예능기량 향상과 인재 발굴육성, 국악 인프라 형성, 그리고 새로운 문화콘텐츠 개발과 전통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도우며 重峯(조헌)선생의 학문적 사상과 忠,孝.義, 禮의 정신을 기린다.   : 2017년 11월 26일 09:00~ : 김포시민회관 다목적홀 (경기 김포시 사우중로 26) : (사)우리소리보존회 : (사)우리소리보존회 : 김포시, 김포시의회, 경기도교육청, 김포시교육지원청, (사)한국예총 김포지회, (사)한국국악협회 김포지부, 김포신문 ▪ 성악, 기악, 타악 * 판소리, 가야금 병창은 성악 부분에 속함을 알려드립니다. * 타악(개인 및 단체 가능) ▪ 전국 초·중·고등학생 및 청소년으로 개인 및 단체 ▪ 경연은 (초.중)부 와 (고)등부로 나누어 실시 한다. ▪ 경연시간은 기악5분이내 성악5분이내 타악부문은 10분이내로 한다. ▪ 경연 순서는 집행부에서 결정 한다. ▪ 모든 경연은 자유곡으로 연주 한다. ▪ 경연순서는 당일 공개 합니다.(추첨 없음) 경연종목 경 연 부 문 경연시간 경연장소 성 악 판소리, 경서도 민요, 시조, 선소리 산타령, 가야금 병창 5분 이내 평생학습센터 기 악 거문고, 가야금 산조, 아쟁, 해금산조, 피리, 대금, 단소, 태평소 등 5분 이내 평생학습센터 타 악 사물, 농악, 모듬북(창작) 등 (개인 및 단체 가능) 10분 이내 평생학습센터 ▪ 경연요령  - 모든 참가자는 경연(한복)복 착용해야 함.   ▪ 신청기간: 2017년 10월 20일 ~ 11월 24일 18:00까지 * 대회진행 준비상 접수 마감일을 엄수 알 것이니 유의바람. ▪ 신청서류: 참가신청서(소정양식, 컬러사진 부착) 1부 ▪ 신청방법: 이메일접수, 우편접수, 팩스접수 ▪ 접수처: (사)우리소리보존회   ▫ 주소: [우:415-831 ] 김포시 북변 중로 114 ▫ TEL: 대회장 조옥란 010-6357-3674, 집행위원장 백현호 010-9984-5542 ▫ FAX: 02-743-1412 ▫ mail: kuk1411@naver.com(가능한 한 참가신청서를 이메일로 접수 요망 )   ▪ 없음 ▪ 반주자 : 고수 및 장단은 개인동반을 원칙으로 하나 지정고수 및 반주자 신청가능 합니다. (지정고수 유료 1회당 50,000원) * 계좌번호: 신한은행 140-009-012707 김호규(국악신문사) (당일 접수 시 혼잡하오니 계좌이체 요망) ▪ 심사위원 : 국악계 권위자로서 대회장이 위촉하고 행사당일 발표 ▪ 심사제도 : 참가자는 직접스승이나 8촌 이내 친인척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할 때에는 해당 심사위원의 심사회피를 경연 전에 신청하여야 함.       ▪ 초 등 부 / 중 등 부 구 분 훈  격 민요 기악 타악 상 금 대 상 경기도 교육감상 1명 1명 1명 상장 및 부상(장구) 최우수상 김포시 시장상 1명 1명 1명 상장 및 부상(꽹과리) 우 수 상 김포시의회 의장상 1명 1명 1명 상장 및 부상(꽹과리) 준우수상 김포시 교육지원청장상 1명 1명 1명 상장 장 려 상 국악신문사사장상 2명 3명 2명 상장 특 별 상 국악신문사사장상 1명 1명 1명 상장 ▪ 고 등 부 구  분 훈   격 민요 기악 타악 상 금 대 상 경기도 교육감상 1명 1명 1명 상장 및부상(장구) 최우수상 김포시 시장상 1명 1명 1명 상장 및 부상(꽹과리) 우 수 상 김포시의회 의장상 1명 2명 1명 상장 및 부상(꽹과리) 준우수상 김포시 교육지원청장상 1명 2명 1명 상장 장 려 상 국악신문사사장상 2명 3명 2명 상장 특 별 상 국악신문사사장상 1명 1명 1명 상장 * 본 대회요강 및 시상내역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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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대한민국 평화통일 국악경연대회 12월 13일2017년 제4회 대한민국 평화통일 국악경연대회   본 대회는 국민 통일의지 확산을 위하여 예술을 통한 남북통일을 염원하고 전국 국악예술인들의 재능을 조기에 발굴하여 전문국악인을 양성하고 전통문화예술의 등용문으로 한국전통문화예술의 보존 육성과 대중화를 위하고 우리 전통문화예술이 세계적으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계승 발전시켜 정신문화 창달에 기여하고자 하는 취지에 목적을 두고 있다.   : 2017년 12월 13일(수) 오전 9시(예선/본선) : 천안예술의전당 : 사단법인 민족통일불교중앙협의회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천안시협의회, 국악신문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한민국 국회, 통일부, 교육부, 중청남도교육청, 천안시,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사)한국예총 충청남도연합회 중앙일보, 충청일보, 충남일보, 불교TV, 국악방송 ▪ 민요, 한국무용, 기악, 풍물 ▪ 명인부, 일반부, 학생부(초,중,고등부), 재외국악인부 ▪ 명인부: 만 30세 이상으로 대한민국 국민 남/여 ▪ 일반부: 만20세 이상의 남/여(대학생포함) ▪ 학생부: 전국 초, 중, 고등학교 재학생 남/여 ▪ 재외국악인부: 재외 동포, 외국인 남/여 ▪ 민요 - 경기민요, 서도민요, 남도민요, 동부민요, 잡가(5분 이내) ▪ 한국무용 - 살풀이, 승무, 부채춤, 태평무 등 전통춤에 한 함(CD지참, 5분 이내)*학생부는 한국창작춤 가능. ▪ 기악 - 대금, 거문고, 가야금, 아쟁, 해금, 피리(예, 본선5분 이내) ▪ 풍물- 개인 및 단체(예, 본선 7분 이내) ▪ 재외국악인부 - 국악 전 분야(CD지참, 5분 이내) ▪ 학생부(초,중,고등부) - 한국무용, 민요, 기악, 판소리(단심제, 5분 이내) *판소리는 민요부문 학생부에만 참가 할 수 있음. *명인부는 단체참가 할 수 없음. ▪ 경연추첨 - 예선, 본선 당일 참가자 전원 공개 추첨으로 경연 순서 결정. - (추천 불참석 시 본부에서 임의로 순서결정-시간엄수)   ▪ 신청기간: 2017년 10월 20일 ~ 12월 12일 14:00 ▪ 신청서류: 참가신청서(소정양식 반명함판 사진부착) 1부 ▪ 신청방법: 이메일접수, 우편접수, 팩스접수 ▪ 접수처1: 국악신문사 ▫ 주소: [우:03134 ] 서울시 종로구 돈화문로 54 ▫ TEL: 02-745-1411, 집행본부장 010-5271-1411 ▫ FAX: 02-743-1412 ▫ mail: kuk1411@naver.com ▪ 접수처2: (사)민족통일불교중앙협의회 ▫ 주소: [우:31134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쌍용대로 292(금정빌딩 5층) ▫ TEL: 041-578-4747, 대회장 010-5457-0815 ▫ FAX: 041-577-4747 ▫ mail: minbulkim@hanmail.net ▪ 참가비: 명인부 5만원, 일반, 학생부 무료 ▪ 고수비: 예선/본선: 5만원(경연자는 고수를 대동해야 합니다.) * 단, 고수를 준비하지 못한 경연자는 주최 측에 사전에 요청하셔야 합니다. - 고수 사례는 주최 측과 무관합니다. * 신한은행 : 140-009-012707(예금주 국악신문사 김호규) ▪ 본 대회 규정에 따름.       ▪ 초등부 : 무용, 민요, 기악, 풍물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시 상 금 시상인원 계 무용 민요 기악 풍물 초등부 대 상 충남교육감상 상장 4명 금 상 천안교육장상 상장 4명 은 상 (사)한국국악협회 이사장상 상장 4명 동 상 대회장상 상장 4명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8명   ▪ 중, 고등부 : 무용, 민요, 기악,풍물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시 상 금 시상인원 계 무용 민요 기악 풍물 중,고등부 대 상 충남교육감상 상장 4명 금 상 천안교육장상 상장 4명 은 상 (재)국악방송사장상 상장 4명   동 상 대회장상 상장 4명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8명   ▪ 일반부 : 무용, 민요, 기악, 풍물(상금 2,400,000원)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시 상 금 시상인원 계 무용 민요 기악 풍물 일반부 종합대상 대한민국 국회의장상 1백만원 1명 대 상 통일부장관상 2십만원 1명   대 상 천안시장상 2십만원 2명   최우수상 천안시의회 의장상 1십만원 4명   우 수 상 민주평통천안시협의회장상 1십만원 4명   장 려 상 대회장상 상장 8명   ▪ 명인부 : 무용, 민요, 기악, 풍물(상금 7,500,000원)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시 상 금 시상인원 계 무용 민요 기악 풍물 명인부 종합대상 대한민국 대통령상 5백만원 1명 대 상 통일부장관상 3십만원 3명 금 상 민주평통사무처장상 2십만원 4명   은 상 (사)한국국악협회이사장상 1십만원 4명   동 상 대회장상 1십만원 4명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8명   ▪ 재외국악인부 : 무용, 민요, 기악, 풍물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시 상 금 시상인원 계 무용 민요 기악 풍물 북한 국악인부 대 상 통일부장관상 상장 1명 최우수상 민주평통사무처장상 상장 1명   우 수 상 천안시장상 상장 1명 장 려 상 국악신문사장상 상장 2명   * 본 대회요강 및 시상내역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