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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보호문화유산' 공개행사 참관 소회복이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굽이굽이 험난한 고개를 넘어가는 아리고 쓰린 '아리랑고개' 길이 인생길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27일 이번 문경문화원에서 열린 송옥자 회장의 문경시보호문화유산 공개행사에 참석한 소회를 몇 자 적어본다. 지난 2019년 8월12일 '농민문학' 발행인 이동희 교수가 주관하는 농민문학 단체의 문학기행에 참가하여 문경을 방문했다. 아리랑학교 김연갑 교장님((사)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이 주최한 '문경아리랑세미나'에서 아리랑고개의 실지는 문경새재라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이 노래가 경복궁 중수에서 비롯된 노래 문화의 온축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날 송옥자 회장이 '문경새재아리랑'을 불러주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문경아 새재는 왠 고갠가 구비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구슬픈 소리 가락이었다. 한 많은 여인들의 절규가 담긴 애절하게 풀어내는 송옥자 회장의 소리에는 한국인의 정서가 담겨있어서 인상 깊었다. 그후 송옥자 회장이 이끈 문경아리랑보존회는 광화문에서 열린 서울아리랑페스티발조직위가 주최주관하는 '전국아리랑경창대회'에서 수상을 했고, 올해 '문경시보호문화유산'(문경새재아리랑 등 총5곡) 보유자 인증서를 받았다는 소식도 전해왔다. 이번 공개행사는 문경시보호문화유산 송옥자 보유자와 보존회 회원들의 공연이었다. 제1부는 2명씩 짝을 지어 다듬이를 두드리는 연주 장면이었다. 다듬이소리는 장단과 소리의 강약이 마냥 정겹게 느껴지다가도 폭풍우에 파도가 밀려오듯 하기도 하고, 잔잔한 호수에 돌을 퐁당 던지는 것 같기도 하고, 빗방울처럼 토닥토닥 떨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음률이 옛날 시집살이의 애환을 달래주듯 했다. 연주자가 되어 장구를 두드리는 느낌도 들고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적인 악기의 소리로 그 옛날의 향수를 찾아가는 듯도 했다. 제2부에서는 송옥자 보유자가 문경으로 시집 와서 시조모 밑에서 시집살이를 하며 배운 문경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당시 시조모에게서 며느리를 잃고 손자들을 키우면서 흥얼거리는 소리와 산촌 생활의 고난과 형편을 한탄하며 풀어내는 통곡의 소리(민요)를 자연스레 전수받은 것이었다. 총 5곡 문경흥얼소리, 문경보리개떡소리, 문경자즌아라리, 문경엮음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으로 나누어 시집살이를 재현하는 소리는 가난한 시절 여인들의 절규와 한탄을 풀어낸 울음 그 자체였다. 다음 구절은 토속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관능적인 해학에 웃음이 절로 났다. 사람은 늙으면 쓸 곳이 없고 호박은 늙으면 맛이나 좋다. 저 산에 딱따구리는 생 구녕도 잘 뚫는데 우리 집에 저 멍텅구리는 뚫린 구녕도 못 뚫는구나 송회장은 시조모의 또 다른 보리개떡소리를 들으며, 부르며, 세월을 보낸 그 애환이 담긴 소리를 계승 보존하고, 열정을 불태우며 반평생 동안 문경의 소리를 무대에서 재현해 오고 있다. 아리랑학교 김연갑 교장님(한겨례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의 해설이 담긴 공연은 관객들에게 '문경새재아리랑'이 담보한 문화유산의 의미를 더해주어 더욱 의미있는 공개행사 시간이 되었다. 변화하는 세월 속에 사라져 가는 지역의 소리를 전승, 보존, 발전시키는 분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더욱 빛나고 있다. 이 영애 (시인. 화가) * 사) 한국문인협회(전통문학연구위원) * 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회원 * 사) 한국미술협회 회원(동대문지부 감사) * 사) 대한민국공무원미술협의회 부회장(한국화 분과위원장) * 사) 서울약령시협회 홍보대사 * 개인전 20회 국내 외 그룹 전 100여회 * 저서 시집: 「미명을 깨고」, 「곡선이 좋다」 그 외 공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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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아리랑 찬가 / 김연갑아리랑 찬가 김연갑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같으면서 다르고, 옛 것이면서 오늘의 것이며, 나의 노래이면서 너의 노래로, 신명풀이이면서 한풀이로서, 일상에서 불리는 대표적인 민속음악이다. 이에 따라 아리랑은 전승 지역이 넓고, 전승 기층이 튼실하며, 곳곳에 터를 잡은 전승단체가 자발적으로 전승함으로서 이산과 분단을 넘어 향유하는 민족의 노래이다. 더불어 아리랑은 정한과 비애를 수렴하고, 불편과 모순에 대한 저항 의지를 발현시키며, 좌우상하 이념의 극단을 차단시킴은 물론이려니와 대동과 상생정신을 추동하는 역할을 하는 전통의 공동체문화이다. 또한 창의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미덕을 함양하여, 세대에서 세대로 재창조됨으로써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 정체성 형성과 그 결속에 기여함을 보편가치로 하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오늘의 우리는 이 같은 아리랑의 미덕을 선한 영향력으로, 생산적이고, 거시적으로 펼쳐 나가 온 누리에 스미고 번지게 하는 것이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임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를 함께하는 뜻으로 2022년 12월 초 닷세날 세우는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10주년 기념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비 이니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산천에 아리 아라리 피어나리! 추천인:기미양 "특집부에서 올라 온 10대뉴스 1차 선정 27제에서 ‘유네스코 10주년 기념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비 건립’을 보았다. 10년만의 정주년 기념사업이란 점에서 충분히 상정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득 12월 5일 정선 아우라지 현장에서 배포된 자료에서 본 ‘아리랑 찬가’가 떠올랐다. 함께 하지 못한 독자들과 되새겨 보고자 추천한다.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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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평론’ 23집 발간 기념회 개최1983년 창립된 한국음악평론가협회(이사장 전인평/중앙대 명예교수)는 19일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학회지 ‘음악평론’ 제23집 발간을 자축하고, 22년도 결산 모임을 가졌다. 전인평 이사장, 편집위원장 문성모(국민악회 회장/전 장신대 총장), 신입회원(정순영, 서주원, 안정순), 선임된 김승열(편집이사), 김연갑(학술이사) 외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양미지 총무 이사의 진행으로 이뤄졌다. 전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한국음악의 장래를 공시적이고 통시적으로 논의하는 저널이 ’음악평론‘인만큼 역할을 다하자는 다짐을 했다. 이어 제23집의 특집 ’대한민국 애국가를 말한다‘외 18인의 평론을 수록한 학회지 발간 결과와 30개 대학도서관 및 50여개 언론사에 배포 상황 등을 보고했다. 2023년 새해 사업으로 음악개론서 발간 계획을 수립하고 집필에서 발간까지 확대하자는 데 합의했다. 23년은 기초 자료 수집과 목차를 논의하는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한편 새해 첫 모임은 2월 중순 문성모 회장의 ‘나의 국악찬송가 작곡’을 주제로 감상과 논평 모임을 갖기로 하고 폐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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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시] ‘상주아리랑의 김동숙님’ 영전에15년 전 이맘 때 세찬 눈발 속에서 열린 상주아리랑 행사장에서 처음 뵈었지요. 넉넉한 기품으로 맞아주셨던 감회가 선명하게 떠오름니다. 요 며칠전 정선에 아리랑 등재 10주년 기념비 건립식에 오시겠다는 전갈에 반가웠는데, 하루 전날 입원하셨다는 소식에도 얼마 후 상주아리랑경창대회 때 뵙지라고 안심했는데, 이렇게 떠나셨습니다. 그동안 상주아리랑에 주신 열정은 잘 피어갈 것입니다. 든든함 지니시고 가십시오. 저도 함께 하여, 회장님의 ‘상주아리랑’을 크게 피워내겠습니다. ‘상주아리랑의 김동숙님’ 부디 편히 영면하시옵소서! 2022. 12. 08. 후인 김연갑 삼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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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비 정선에 서다, 웅장하게!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5일 오후 4시 정선군.아리랑연합회의 공동주최주관으로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10주년 기념비 건립 제막식이 정선에서 개최되었다. 정선 아우라지 강가에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답게 유네스코 등재 10주년 기념비가 당당한 자태로 섰다. 제막식 행사는 간명했으나 긴 여운을 주었다. 국내외 40개 지역 아리랑전승단체가 함께 제막식 줄을 잡고 한민족이 아리랑으로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대동정신을 가슴에 되새겼다. 동두천시립이담농악단 김경수 단장과 '이담농악' 이수자들의 '비나리' 공연을 선보였다. 김경수(장구). 고나윤(꽹과리). 박은수(징). 최영호(꽹과리.비나리) 황진하(북)으로 천지신명께 고하였다. "천개우주 하날이요 지개조추 땅 생길 때 국태민안 법윤전 시화연풍 돈나들고 이씨한양 윤번세 삼각산 기봉하고 봉황이 생겼구나 봉황눌러 대궐짓고 대궐앞에는 육조로다 (다시 악기만 연주) 오양문 하각산에 각도각읍을 마련할제 왕십리 청룡이요 동구만리 백호로다 종남산 안산되고 과천관악산 화산이비쳐 동작강 수구막아 한강수 둘러싸니 여천지 무궁이라 원아는 금여찬데 차일은 사바세계 남선은 부주로다 해동이면 대한민국 우리 오늘 모인 날이 12월 하고 초닷세라 인류문화유산 아리랑비 우뚝 세워 비나이니 길이 길이 세세 년년 아리랑훈풍 세상에날려 아리랑 계승하리로다 아리랑 계승하리로다 아리 아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아리랑이로세 (합창) 만복이야- 에헤 사실지라도 늘여서 사대만 사십소사 사랑 나하 어허미 어허미로다 보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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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학교 및 지역 아리랑 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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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에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비' 선다‘기념비적 기념비’,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10주년을 기념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비'가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강가에 세워진다. 아리랑의 고향 정선과 맏형 정선아리랑의 포용력과 국내외 40개 지역 아리랑 전승단체의 대동정신이 대통합을 이뤄 세우는 뜻깊은 비이다. 전면 글씨는 한글 서예가 한얼 이종선 선생이 쓰고 후면 취지문은 ‘정선체’로 새기고, 기단에는 40개 지역 단체와 대표자 명이 새겨진다. 비의 규모는 높이가 5m 40cm로 국내에서 가장 큰 비이다. 세워지는 곳은 여량면 여량리 아우라지 강가이다. ‘아우라지’는 송천과 골지천이 합수되어 아우라진다(어우러진다)는 의미라서 정선군과 전승단체가 어우러지는 대통합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최적지이다. 비 전면에는 "유네스코 등재 10주년 기념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이 새겨진다. 후면의 취지문에서는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는 전제로 정선군과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가 공동 발의하고, 국내외 아리랑 전승단체가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에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 전하며 공동으로 창조한 결과물이다 각 지역마다의 정서를 담고 여러 문화 예술장르로 변화하며 다양하게 존재한다. 민족정체성 함양과 공동체 결성에 기여하며 근현대사에서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아리랑을 이천십이년 십이월 오일 인류무형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하여, 아리랑의 인류 보편 가치를 인정하였다. 이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10주년을 맞이하여 정선군과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가 공동 발의하고 국내외 아리랑 전승단체가 창조적 계승에 뜻을 모아 기념비를 세운다.” 기단에는 대통합의 뜻을 모은 40개 지역 전승단체와 대표자 이름이 새겨진다. "등재 10주년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정선군수 아리랑연합회 이사장 김연갑. 건립 동참 국내외 아리랑 전승단체” 아래 다음의 보존회와 대표자 이름이 새겨진다. (가나다순) "경기아리랑보존회 이춘희,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계룡산아리랑보존회 범진, 공주아리랑보존회 남은혜,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 임규익, 구미아리랑보존회 김종남, 인동아리랑보존회 서주달, 군포아리랑보존회 한영숙, 동경아리랑보존회 전월선,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대구아리랑보존회 김상준, 문경아리랑보존회 송옥자, LA아리랑보존회 서연운, 부산아리랑보존회 김희은,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미분, 사할린아리랑앙상블 박영자, 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서도아리랑보존회 유지숙, 서울아리랑보존회 유명옥, 상주아리랑보존회 김동숙, 성주아리랑보존회 임옥자, 성주의병아리랑보존회 최문희, 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아리랑보존회 김영임, 안성아리랑보존회 조명숙, 연변아리랑보존회 전화자, 영남아리랑보존회 정은하, 영천아리랑보존회 전은석, 예천아리랑보존회 최수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울릉도아리랑보존회 황효숙, 인제뗏목아리랑보존회 권원희, 정선아리랑보존회 김길자, 제주아리랑연구회 장경숙, 진도아리랑연구보존회 강송대, 진천아리랑보존회 박소정, 청주아리랑보존회 강옥선,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 기연옥, 하바롭스크아리랑보존회 김석복, 호주아리랑보존회 김채원." 한편 이 비문의 글씨는 한얼 이종선님으로 최근 대형 작품 전시회를 개최하여 화제를 모은 분이다. 약력은 다음과 같다. 한얼 이종선 한국서학회 이사장, 동방대학원대학교 서예과 교수, 성신여대 미술대학 초빙교수, 한국서총 총간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유농서회, 오거서루 등 주재. 대한민국서예대상전 등 50여 대회 심사위원. ‘한글 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전시회’(21) 외 개인전 6회. 한글서예 오늘과 내일 전, 광개토대왕비 특별전 외 초대전 400여회 출품. 불교방송개국 기념비(97), 남산도서관 표지석(02), 고려대학교 개교백주년기념비(06), 지리산 연곡사 사적비(21) 외 30여 곳 제액 및 금석문.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외 국내외 40여 기관 작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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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아도위 창립 1주년 기념, 학술토론회를 뒤돌아보며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도시마다 역사, 문화, 특색, 성향, 위치, 경험, 기억 등에 의해 그 도시만의 색깔과 이미지가 있다. 이러한 공간에서 수백 년, 수천 년의 삶을 영위해 온 사람들이 유무형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지역이나 도시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2012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2015년 12월 경북 문경시가 ‘문경,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아리랑도시 문경’을 선포하였다. 이에 발맞춰 2017년 6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순수 민간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이하 아도위)를 창립하여 아리랑의 연구, 발굴, 보존, 전승, 홍보, 교육, 공연을 통해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며 아리랑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지금까지 활동해 왔다. 아도위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면서 지난 2018년 7월 30일 ‘문경새재아리랑 정체성과 위상 정립’이란 주제로 ‘아도위 창립 1주년 기념, 제1회 학술토론회’를 개최한 바가 있다. 그 이후 4년여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문경새재아리랑 부르기 운동',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기준악보 제정’ 참여, ‘팔도 및 디아스포라 아리랑제’에 주도적 참여, ‘서울아리랑페스티벌’참가 ‘전국 아리랑전승지역답사 탐방’,‘코로나아리랑 창작 및 발표회 개최’ 등 의미 있는성과도 있었지만, 대내외적 요인으로 아직은 미흡하고 할 일도 많다. 그래서 문경새재아리랑이 5천만 모든 국민이 알고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꿈꾸며 4년 전 처음으로 개최하였던 학술토론회 때 가졌던 꿈과 희망이 퇴색되지 않게 분발하고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래 기술하는 2018년 학술발표회 때 필자가 한 인사말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던 대로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헌신적인 42명의 아도위 위원님들과 함께 초심을 유지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문경새재아리랑의 새역사를 쓰겠다는 각오를 다져 본다 . 인사말 이번 아도위 창립 1주년을 맞아 지난 일 년을 뒤돌아보며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찾던 중 ‘아리랑도시 문경’이 올해 ‘세계아리랑제’를 계획하고 있음에 즈음하여 ‘문경새재아리랑 정체성과 위상 정립’이란 주제로 ‘제1회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의미 있는 날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함께 자리해주신 내외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발표하고 토론할 세부 주제는 ‘문경새재아리랑 정체성과 위상의 재발견’과 ‘축제를 통한 문경새재아리랑의 정체성과 위상 정립’입니다. 주제발표자, 지정토론자, 질의응답에 참여하시는 시민들께서는 아리랑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과 적극적인 참여로 토론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번 학술토론회에서 전문가가 발표하고 토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리랑의 주인이신 시민 여러분께서 발언하시는 자유토론을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생활 속에서 보고 느낀 바를 특히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고 아리랑제에 대한 실현 가능한 의견과 조언을 아끼지 마시고 제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저는 이번 기회에 문경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성공한 축제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옛길이 많아 ‘길의 고장 문경’이 될 수도 있고 근대 아리랑의 뿌리로 ‘아리랑도시 문경’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축제는 당연히 축제마다 특성과 목적이 있고 축제의 성공을 위해서는 보편성과 특이성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리랑도시 문경’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문경새재아리랑제’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이라는 보편성과 ‘근대 아리랑의 시원’으로서 문경새재아리랑이 부각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토속민요인 ‘문경새재소리’의 존재와 그 소리가 경복궁 중수 시 한양으로 올라가 경기권에 유행하여 1896년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H.B. Hulbert)박사가 영문 잡지 코리안 레포지토리 (‘Korean Repository’)에 실은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 나간다.’라는 사설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리랑 채보 기록과 아리랑을 서양에 알리게 된 역사적인 사실에 이어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 영화 주제곡인 본조아리랑으로 이어지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65년부터 7년간 경복궁 중수 시 한양 간 토속민요 ‘문경새재소리’가 문경으로 다시 돌아와 향토민요 아리랑으로 분류되는 ‘문경새재소리 아리랑’이 되고, 다시 통속 민요라고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으로 된 변천 과정을 겪는 것과 1930년 대구 출신 국문학자 이재욱이 쓴 ‘영남전래민요집’ 의한 ‘경북아리랑’으로 지칭한 ‘문경아리랑’의 존재와 진도아리랑에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라는 사설이 있는 것 등으로 인해 근대아리랑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이 문경이라는 지역성을 넘어 확장성을 보인 것은 주목해야 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아리랑고개'는 아리랑과 고개의 합성명사이고 위에 기술한 영남전래민요집은 물론이고 1896년 발표된 헐버트아리랑과 1911∼1912년 일제강점기 총독부 조사 자료에 근거해서 아리랑 고개는 바로 문경새재이다. 라는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의 문경새재아리랑의 정체성에 관한 "아리랑고개론"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문경만이 가진 특이성을 가지고 차별화된 프로그램으로 문경아리랑의 정체성과 위상을 확립할 수 있는 축제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문경새재아리랑제는 아리랑의 전승과 보급, 전통문화의 계승과 지역문화로서의 정착, 지역민들의 상생, 대동의 장이 되고 아리랑을 통한 문화적 시민 통합으로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등 다기능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문경새재아리랑제’가 소수 아리랑에 관심 있는 주민이나 관광객의 축제로 머무르지 않도록 하고 지역이라는 경계를 넘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축제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면 팔도 아리랑의 만남과 세계 각국의 교포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이 참여하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 시대에 맞고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하고 단계적 발전과 변화를 통해 모든 것을 수용하고 시행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금년도 추진하려는 ‘세계아리랑제’는 시기상조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의욕만 넘치고 앞서간다는 느낌이 들며 문경시민도 문경새재아리랑을 잘 모르고 대다수 국민도 문경새재아리랑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과 부족한 예산, 추진 주체의 불안정 등의 여건에서 세계아리랑제 개최는 관 주도 전시행정의 표출이라는 비난과 우려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수준까지 전승(무형문화재 지정 등), 보급과 다양한 콘텐츠를 확보 등 나름대로 기반을 조성 후에 추진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면 명실상부한 세계아리랑제는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치고 필요 예산을 확보하여 지금부터 한 3∼5년쯤 후에나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준비할 시간도 짧습니다. 국제 행사를 치를 예산도 부족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시점에서 2018년 제11회 문경새재 아리랑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담긴 제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문경에서 천리나 떨어진 먼 곳 진도, 그 진도 사람들이 부르는 진도아리랑 첫 사설에 왜 문경, 새재, 물박달이란 낱말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요? ‘문경아 새재야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는 이 사설이 전국의 많은 아리랑에서 불리고. 심지어 북한, 해외 아리랑에서까지 불리는 이유는 뭘까요? 이걸 알면 우리 문경새재아리랑의 중요성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아리랑도시'가 아리랑도시답게 되는 그날을 위해 그때그때 유명 인사 몇몇 모셔와 소수 몇 사람들이 여론 수렴 없이 관 주도적이며 비합리적으로 아리랑 정책을 입안 추진함이 아니라 저항·대동·상생이라는 아리랑 3대 정신을 기본으로 아리랑의 주인인 시민들의 목소리를 소중히 생각하고 함께 가는 아리랑도시 문경이 되길 소원하며 오늘 학술토론회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바라본 오늘, ‘아리랑도시 문경’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리랑은 어느 특정인의 것이 아니다. 긴 세월 뿌리를 내린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아리랑을 포함하여 그 지역 정체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더구나 많은 권한을 가진 지방자치단체장이라 하더라도 임기 동안 잠시 그 지역을 대표하고 시정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 뿐, 지역이나 도시의 근본이 되는 문화와 역사의 총체인 정체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수백 년 이 땅의 주인인 민초들이 그들의 삶을 노래한 것이고 그 안에 그들의 혼이 깃들어 있고 문경 지역의 문화로 고체화되어 있다. 그래서 당연히 아리랑은 문경 정체성의 핵심의 한 요소이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문경의 역사이고 문화이고 뿌리라는 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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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대한민국 애국가 논했다”지난 9월 3일 강남제일교회에서 ‘KMCA’, ‘한국국민악회’, ‘안익태기념재단’, ‘국가상징연구회’ 단체가 함께 한 ‘대한민국 애국가를 말한다’를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문성모 국민악회 회장, 전인평 한국음악평론가협회 이사장, 김승열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 김연갑 국가상연구회 위원이 애국가에 대해 각자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김승열 교수와 전인평 교수는 안익태의 친일활동 의혹 제기에 대한 과도한 해석과 기혹한 평가에 대해 지적하고, 의혹이 제기된 1960년대의 상황과 배경을 제시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문성모 박사와 김연갑 이사장은 애국가의 변천 과정과 작사에 관한 문헌적 증거를 들며 작사자가 윤치호임과 통일의 시점까지는 존속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제시했다. ‘에텐라쿠’와 ‘만주국환상곡’ 안익태 내재적 해석 필요 문성모 외장의 진행으로 첫 발표에 나선 ‘김승열 교수’는 안익태 기념재단 연구위원으로 안익태의 친일행적을 적시하는 대표적인 사례인 ‘에텐라쿠’ 논란에 관하여 "이는 통일신라 시대의 ‘강천성곡’이 오히려 통일신라로부터 일본 헤이안시대의 교토로 넘어간 것”이라 전제하고, '에텐라쿠' 음반해설과 일본아악회 자료 어디에도 '에텐라쿠'가 천황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한 노래라는 설명은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안익태의 대표적 친일 논란 작품인 ‘만주환상곡’에 관해서도 안익태의 조카 안경용씨의 기록을 들어 반박했다. "평양에서 나고 자랐던 안익태에게 만주는 오히려 유년 시절 좋은 추억들이 깃든 긍정적인 장소라고 하였으며, 실제로 자주 평양과 만주를 오갔다”를 인용하여 이 작품은 안익태에게 어릴 적 향수를 가져다주는 '환상곡'일 가능성이 크다고 반박하였다. 1960년대 국내 음악가들과의 갈등이 단초 전인평 중앙대 명예교수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의 위대함이 폄훼되는 것에 큰 우려를 표하였다. 안익태에 대한 의혹의 단초는 1960년대초 한국 음악계와 안익태의 갈등 양상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당시 명실상부 아시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안익태가 국내 음악가들과의 갈등이 현재의 안익태의 친일 논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며 "만약 안익태와 국내 음악인들이 서로 협동하였다면 한국 음악계가 20~30년 더욱 빠르게 발전”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문헌적 증거로 윤치호 작사 입증 이번 학술대회를 주관한 문성모 회장은 그간 많은 논란이 되었던 여러 애국가 작사설에 관하여 역사적 자료들을 연주를 통해 구체적으로 비교하며, 현 애국가의 출현까지를 상세하게 논의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작사자로 거론된 5명 중 윤치호에 역점을 두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하였음에 가장 큰 무게를 싣는 이유는 대부분의 작사자로 주장되는 인물들은 단순한 증언에 의존한 것에 비하여 윤치호는 증언만이 아닌 문헌적 중거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3,1운동으로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 온 과정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며 결론 부분에서 김구선생의 환국시 장준하가 기록한 애국가 사연을 전했다. "애국가는 우리들의 심장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조국을 주먹 안에 움켜잡은 듯이 떨게 했다. 애국가를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울음으로 끝을 흐렸다. 울음 섞인 합창, 그것이 그때의 나의 가슴속에 새로 지어진 애국가다. 노 투사는 마치 어린이처럼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달래지도 못했다. 그 어느 누가 이 애국가를 울지 않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발음을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노 혁명가의 감격스러운 모습. 그의 두꺼운 안경알에 뽀얀 김이 서리더니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나는 마치 한 소년처럼 여울지는 가슴을 느끼며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이런 감격의 순간은 언제 또 올 것인가. 통일의 그날이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민족의 감격을 선창자와 지휘자 없이도 합창하게 할 미래의 노래가 애국가다.” 제헌국회 "통일 때까지 현 애국가 유지” 정신 존중 김연갑 위원은 지난 정부 시절의 막무가내식 애국가 폄훼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원적인 논리가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세 가지를 주장했다. 하나는 윤치호와 안익태의 신앙심과 애국심에 의한 작사 작곡을 이후의 문제를 소급, 적용하여 무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둘은 작사 작곡 작품을 ‘애국가’로 선택한 것은 두 사람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민중)들이 필요성에서 선택한 것임으로, 두 분의 성향을 들어 부인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셋은 제헌국회에서 국가상징 제정을 논의 한 결과 최종 회의에서 "적당한 시기에 남북 전 민족의 의사로 제정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논의를 통일 될 때까지 보류하기로 결의 한다”라는 총평은 오늘에서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론에서 매우 문제적인 주장을 끝을 맺었다. "애국가의 곡명과 위상은 작사 작곡자의 의지가 아닌, 우리(민중)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애국가 자체가 친일을 한 적이 없음으로 비제도적이고 한시적인 국가 기능의 애국가 위상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선택이 지혜로운 것이란 사실을 통일을 앞당겨 입증해야 할 뿐이다.” 이번 논의는 전정부에서 다양하게 제기된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대응이란 점에서 주목이 된다. 이날 발표회 객석에는 안창호 작사설 주장자인 안용환 석좌교수와 해위기념사업회 회원 등이 참석하여 관심을 보였다. 한편 주최 측은 학술회의 전 발표를 유튜부로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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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 10년 간의 애국가 폄훼(貶毁), 4 단체 반박 나섰다애국가와 관련을 갖는 4개 단체가 10여년간 가해진 진보계의 애국가 폄훼를 바로잡겠다는 토론 모임을 발족시켰다. 그 첫 모임이 내일 3일 오후 4시, 강남구 수서4거리 강남제일교회 본당에서 ‘대한민국 애국가를 말한다’를 주제로 1차 토론회를 갖는다. 표제가 말해주듯 그동안 10여년 동안 애국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성토하는 자리이다. 4개 단체와 발표자는 다음과 같다. 안익태기념재단 김승렬 연구위원은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의혹에 대한 해명과 변호’를 2006년 이후의 조직적 왜곡에 대한 바로잡기를 발표한다. 한국음악평론가협회 전인평 이사장은 ‘안익태의 한국 활동과 한국음악계와의 갈등’을 주제로 국내음악계의 안익태 질시(嫉視) 상황을 통해 근본적인 재평가의 필요성을 제안한다. 한국국민악회는 ‘애국가의 변천 과정과 작사자 문제’를 문성모 회장이 발표한다. 윤치호 작사 사실과 변천과정의 오해와 오류를 바로잡는다. 마지막은 국가상징연구회 애국가 분과 김연갑 위원이 ‘애국가, 그것은 민중의 선택이었다’를 애국가의 역사성과 작사자 연구 성과를 통해 기존 논란을 비판하고, 새로운 인식 전환을 촉수한다. 이 모임의 의의는 10여년간 국회의원, 사회학자, 역사학자, 음악학자, 민족예술가(?), 법학자, 관련단체, 등이 소란스럽게 휘저어 놓은 다양한 논란과 그 폐해를 바로잡겠다는 데 있다. 이들이 일회적인 애국가 논의자들이라면 이번에 나선 4개 단체와 발제자들은 일종의 전공자들이라 활동이 주목된다고 본다. 학술대회 자료집을 통해 주장의 결론을 요악하면 다음과 같다. 김승열 연구위원은 2006년 베를린 훔볼트대학 음악학과에 유학 중이던 송병욱(1967- )의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의혹’ 제기로부터 이경분, 노동은, 이해영, 김보국의 안익태 연구에서 드러난 왜곡들을 지적했다. 그리고 "시류에의 영합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발언/문장의 이면과 행간을 읽을 줄 아는 깊이 있는 안익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전인평 이사장은 1955년 안익태의 첫 귀국으로부터의 활동상을 개괄하며, 특히 1962년 대전사범학교 밴드부원으로 안익태 지휘 레하르의 '금과 은' 연주 경험을 들어 당시 국내 음악계에 큰 자극과 부흥 계기를 마련한 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상의 갈등이 있었지만 "그래도 안익태가 국내에 정착하여 활동하였더라면, 한국음악계가 최소한 30년 이상 앞서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란 회고로 평가에 소홀함을 지적했다. 원론적이지만 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문성모 회장은 현행 애국가의 가사 변천 과정과 작사자 문제를 살폈다. 독립신문에 발표된 애국가를 비롯하여 1907년 현 애국가의 출현까지 살피고, 그 과정의 ‘윤치호’ 표기를 주목하였다. 그리고 결론에서 1945년 11월 23일,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 선생 일행이 조국으로 돌아오면서 비행기 창밖으로 우리나라가 보이자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던 감동의 상황을 제시하여 ‘애국가의 기능’을 체험하게 하였다. 김연갑 위원은 그동안 10여년의 애국가 폄훼가 지나쳐 가학적일 정도였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통일이 되어 남북 민족이 합의로 새 국가를 선택할 때까지는 현 애국가를 국가 기능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 이유로 작사와 작곡은 순전한 개인적 애국심과 신앙심에서 창작된 것으로 이를 애국가로 택한 것은 작사, 작곡자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민중)가 선택한 것임으로 작사 작곡자의 성향이나 과오를 작품에 소급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불만불평만 하지 말고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여 통일이 되었을 때 선택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 진정한 자세라고 질책을 한다. 행사를 준비해 온 문성모 회장과 전인평 이사장은 이 번 발표회를 통해 그 간의 논란이 정리되어 새로운 연구의 계기를 마련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번 발표회를 계기로 인식을 공유하는 분들의 ‘애국가를 생각하는 모임’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2015년 ‘애국가 작사자의 비밀’을 발간한 신동립씨는 "이번 발표회는 진보계 애국가 비판자들과 본격적인 논쟁의 장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세명대 문과대학장 이창식 교수는 "용기 있는 연구자라면 국가상징을 파괴하는 불평불만 보다는 통일 후를 대비하는 애국가(국가) 연구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문의 강남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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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주 감독, 내내 그리워 할꺼요여보, 주 감독. 이 양반아! 이 황망함을 어찌하라고. 그래, 그 풋풋한 미소를 두고두고 그리워만 하라고 이렇게 먼저 가는 거요? 그래, 그 넉넉한 겸손을 두고두고 아까워만 하라고 이렇게 훌쩍 가는 거요? 그래, 코밑에 놓은 밀양아리랑제, 또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은 어찌하라고, 이리 급히 간 거요? 지난달, 2026년 영화‘아리랑’ 개봉 백주년 기념사업, 그거 같이 하자고 해놓고, 이건 또 어찌할 거요? 아! 그저 이런 푸념으로 보내야 하나요! 주 감독님! 그리워할게요 내내~ 2022. 08. 28. 김연갑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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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개자 주재연 감독 빈소, 많은 예술인들 哀悼문화기획자이며 연출가 주재연 감독의 갑작스러운 비보에 많은 예술인들이 애도에 잠겨 있다.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1호 빈소에는 주 감독을 꼭 빼닮은 중학생 외아들이 상주로 조문객을 맞았다. 형님은 아직 노모에게 이 비보를 알리지 못하고 있다며 황망한 상황을 전했다. 아침부터 조문을 받은 빈소에는 사물놀이 김덕수 명인이 조문객을 맞이했다. 크라운해태제과, 밀양아리랑컨텐츠사업단, 국악신문 등 단체의 조화가 답지했다. 국악인 안숙선 명인, 메타기획 이승훈 대표, 국악작곡가 유은선, 한국축제감독회의 회원(20명), 한국문화재재단 최영창 이사장, 고음반연구회 정창관 부회장,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 등 많은 국악, 예술인들이 다녀갔다. (사)한울림 예술단 김동원 교수는 "발인은 가족장으로 할 예정이며, 장례 100일 전에 추모음악회를 열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문화예술계에 워낙 큰 공헌이 있는 분이라, 그 업적을 기리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음악제 형식이 될 것 같다.”라고 밝혔다. 발인은 30일 화요일 오전 6시 40분, 장지는 분당 메모리얼파크이다.(장례식장 연락처: 02-30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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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악회 학술회의, “애국가 定位시킨다”국민악회 주최의 애국가 관련 학술모임이 결성되어 오는 9월 3일 ‘대한민국 애국가를 말한다’라는 대 주제로 발표회를 개최한다. 국민악회는 1980년 창설, 원로 작곡가 중심의 음악가 단체이다. 주최는 국민악회(회장 문성모)이지만 안익태기념사업회 국가상진연구회 한국음악평론가협회가 함께한다. 이들 단체는 지난 10여년간 애국가가 심한 내외상(內外傷)을 입었다고 진단하고, 이를 정위(定位)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여 행사 주제를 ‘대한민국 애국가를 말 한다’라고 정했다고 밝혔다. 이번 발표회에서는 작곡가와 작품 그리고 작사자와 가사 문제에 대한 파괴적 공격에 대한 반론을 네 전문가가 분담했다. 첫 발표자인 김승열(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숭실사이버대학교 외래교수) 교수는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의혹에 대한 해명과 변호’를, 전인평(한국음악평론가협회 이사장, 중앙대 명예교수)교수는 ‘안익태의 한국 활동과 한국음악계와의 갈등 양상’을 발표한다. 세 번째는 ‘애국가의 변천 과정과 작사자 문제’를 문성모(前 서울장신대 총장, 국민악회 회장)회장이 맡고, 마지막은 김연갑(국가싱징연구회 분과위원장) 위원장이 ‘애국가, 그것은 민중의 선택이었다’를 발표한다. 김승열교수는 2000년대 들어 안익태를 친일/친나치 인사로 매도하는 주장들에는 좌파진영인 노무현, 문재인 정부 시절에 집중되었다고 전제했다. 이의 원인 제공자로 故 노동은 교수(1946-2016)를 꼽았다. 노 교수가 안익태가 연주하지도 않은 1938년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나 1944년 R. 슈트라우스의 ‘일본축전곡’을 연주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을 지적했다. 이런 오류를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이해영교수의 2019년 발간 ‘안익태 케이스’가 그대로 승계했다고 비판한다. 이어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 김보국 연구교수가 안익태의 헝가리 유학 시절을 추적한 논문과 방송의 인터뷰를 지적했다. 안익태가 1939/40학년도 등록서류에 안익태와 부모의 종교를 일본 ‘신도(Shintoi)’로 기재한 것이 명백한 타인 필적임에도 무비판적으로 채택하는 등 오류를 범했다고 밝혔다. 이런 실태는 "3국 동맹 체결 이후 엄중해진 전시(戰時)체제 하의 일제 강압을 보여주는 물증”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두 번째 발표는 전인평(한국음악평론가협회 이사장, 중앙대 명예교수) 교수는 ‘안익태의 한국 활동과 한국음악계와의 갈등 양상’이란 논문을 발표한다. 전교수는 1962년 제1회 국제음악제 주관을 위해 귀국한 안익태가 전국을 순회하던 때 대전사범학교 밴드부원으로 <애국가>를 연주한 경험을 들어 그의 강한 음악가적 열정을 회고했다. 그리고 1962년의 시작 된 국제음악제 준비과정에서 안익태가 국내 음악인가들 면전에서 "이 중에서 스코아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라고 무시하는 등의 발언을 소개하며 국내 음악계 인사들, 특히 임원식(지휘자)과의 갈등상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안익태가 국내에 정착하여 활동하였더라면, "한국음악계가 최소한 30년 이상 앞서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했다. 세 번째 발표 논문은 문성모(前서울장신대 총장, 국민악회 회장) 회장이 ‘애국가의 변천 과정과 작사자 문제’이다. 작사자가 아직도 확정되지 못한 채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음을 전제로 현행 애국가의 가사 변천 과정과 작사자 문제를 논했다. 현 애국가의 ‘무궁화가’와의 관련을 전제로 "찬미가" 14장(1908년), ‘국민가’(1910년), ‘국가’(1014년), ‘애국가’(1931년), 윤치호 자필 4절 가사’(1945년), ‘한국애국가’(1945년)‘에 이르기까지의 가사 변천 과정을 살폈다. 작사자에 대해서는 기존설을 정리하고, "문헌적인 증거로 보아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하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 발표는 김연갑 위원장이 ‘애국가, 그것은 민중의 선택이었다’라는 논문이다.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에는 "이미 확정해야 했다”는 전제로 더 이상 논란의 의미는 없다고 단언한다. 이어 애국가가 걸어온 역정(歷程)을 제시하고 ‘국가’ 아닌 ‘애국가’라는 명칭과 기능은 작사 작곡자나 국가(國家)가 정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민중(우리)이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따라 누구도 현 애국가의 국가 기능 폐지나 새로운 국가 제정 주장은 ‘애국가 공동체’의 총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이는 근대 혁명 국가의 경우와 다르게 제도를 초월한 민중의 공인 가치가 큰, 특이한 경우라고도 주장한다. 결론에서는 제헌국회의 ‘애국가 지속 사용 합의’를 존중하여 "통일이 될 때 까지”는 애국가는 국가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애국가의 곡명과 위상은 작사 작곡자의 의지가 아닌, 우리(민중)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애국가 자체가 친일을 한 적이 없음으로 비제도적이고 한시적인 국가 기능의 애국가 위상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선택이 지혜로운 집단지성이란 사실을 통일을 앞당겨 입증해야 할 뿐이다.”라는 주장으로 글을 맺었다. 이번 발표회가 다시 ‘애국가 논쟁’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이번 발표회를 주도한 문성모 회장은 "이번 발표회를 계기로 다양한 단체나 개인이 참가하는 열림 모임으로 확대, 발전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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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아리랑 도시 문경”에 뿌리 내린 아도위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아도위) 위원장 문경시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아리랑 도시”를 선포한 지방자치단체다. 아리랑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로서 우리 민초들이 희로애락을 느낄 때 부르는 노래이며 제2의 국가(國歌)와도 같은 민족의 노래이다. 우리 문경에도 오랜 세월 동안 불리어 왔던 "문경새재아리랑”이 있다. 이 아리랑이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며 실제적 아리랑고개가 "문경새재라”라고 하면 무슨 소리를 하나? 의아스럽게 생각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이 주장에 대해 근래 학계나 민요학계에서 점차 인정하는 추세이다. 문경새재아리랑은 길 위의 노래, 고개의 소리로서 백두대간을 따라 출현한 메나리토리 ‘아라리’로부터 시작되었고 토속민요 ‘아라리’가 아리랑으로 변환되는 변곡점에 있었으며 아리랑이 조선 팔도로 널리 확산하게 된 그 뿌리를 찾아가면 근대 아리랑의 종주격인 문경새재아리랑이 있다. 아리랑과 불가분의 관계인 1865년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와 문경새재와 물박달나무와 문경새재소리가 얽힌 역사, 그리고 1912년 문경지방 초등학교 교사에 의해 총독부에 보고 기록된 "문경풍년아리랑”은 아라리가 아리랑으로 바뀐 최초의 기록이다. 이런 흐름에 영향받아 1896년 역사 이래 최초로 아리랑 악보로 쓰이고 해외에 알려진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 나간다.”라는 사설이 들어 있는 헐버트 아리랑의 발표와 1926년 큰 인기를 끈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이 기폭제가 되었고 1930년 영남의 30개 시군을 대상으로 조사, 정리한 대구 출신 국학자 이재욱이 쓴 ‘영남전래민요집’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후 문경새재아리랑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통과 역사성 위에 송옥자 회장이 2001년부터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을 창립하여 지금까지 전승 및 보급활동을 하고 있고, 1980년에 설립한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과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의 ‘문경새재아리랑의 역사적, 민요사적 연구’를 거듭한 연구 성과에 의해 그 사실들과 중요성이 점차 입증되어 가고 있다. 아리랑이 2012년 12월 5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2014년 11월 27일 북한도 "아리랑 민요”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고 이어서 2015년 9월 22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하였다. 이에 부응한 문경시는 위와 같은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2015년 12월 1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문경,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품다”라는 주제로 "아리랑도시 문경”을 선포하였다. 이에 발맞춰 "아리랑도시 문경”에 걸맞은 시민 활동이 필요하다는 뜻을 가진 소수 시민이 발의한 후, 다수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어 아리랑의 조사, 연구, 발굴, 보존, 전승, 보급, 교육, 공연, 홍보를 통해 아리랑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으로 2017년 6월 21일 발기인회, 2017년 6월 29일 순수 민간인들로 구성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창립총회 및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아울러 우리 지역 아리랑만이 최고이며 중요하다는 편협된 사고에서 벗어나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같으면서 다르고,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면서 세계의 것’이라는 아리랑 속성을 일반화하기 위해 모든 아리랑을 인정, 존중한다는 의미가 포함된 그때 발표한 선언문은 아래와 같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선언문 아리랑은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가장 잘 상징하는 한민족공동체 문화의 정수임을 다시 한번 더 자각한다./ 이와 같은 아리랑이 우리나라 지역마다 전승되어 왔고, 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왔음을 확인한다. 문경시에는 아리랑고개인 문경새재가 실존하고,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간다.”라는 사설이 여러 지역 아리랑에서 불리는 등 근대 아리랑의 생성과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던 문경새재아리랑이 있어 아리랑 도시로서의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런 바탕 위에 2015년 12월 13일 문경시가 ‘아리랑 도시’를 선포한 것은 매우 바람직하며, 이를 높이 평가한다. 이와 같은 사실과 문경시의 "아리랑 도시” 연장선상에서 문경시민들의 자발적 아리랑 모임인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를 결성하기 위해 9인이 발기인회를 결성하고 추진한 결과 오늘 창립총회를 개최하며 아래와 같이 선언한다. -. 우리나라 모든 아리랑을 존중한다. -. 우리나라 모든 아리랑이 문경에서 역량을 펼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아리랑 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야 한다. -. 아리랑 관련 사업에 문경시민이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 문경새재아리랑 전승자를 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야 한다. -. 문경새재아리랑 전승, 공연, 교육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 아리랑 관련 콘텐츠를 꾸준히 개발하여야 한다. 2017년 6월 29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 일동 아도위는 창립 이후 창의적이고 시대에 부합하고 현실적인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서 추진하였다. 첫번째 사업으로 "아리랑은 문경시민의 기본 교양과목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명실공히 "아리랑 도시 문경”이 되려면 8만 시민이 우리 아리랑을 제대로 알고 불러야 한다. 문경시민들이 아리랑을 잘 부르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아리랑 부르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그 대상을 영향력이 큰 기관단체인 문경시, 문경시의회, 문경교육청, 문경문화원, 문경예총, 각 축제추진위원장, 읍면동장, 각급학교장, 각 사회・문화・예술 단체장에게 공문을 발송하여 각종 축제, 행사, 교육, 회의 때에 "문경새재아리랑” 공연과 학교에서는 특활 계획 시 아리랑이 포함된 프로그램을 필수적으로 편성 시행해 줄 것을 당부, 호소하는 협조 공문을 발송하였다. 이후 아도위의 주요 활동 상황은 아래와 같다. - 2017년 11월 6일 문경새재아리랑제 workshop 진행 * 주제 : 아리랑, 문경에 다 모이다 (위원장: 좌장) - 2017년 2018년 문경문화원 주관 "아리랑학교” 운영 력-아리랑답사 주관 - 2018년 7월 30일 "제1회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학술토론회”개최 * 주제 : 문경새재아리랑 정체성과 위상 정립 - 2017년 9월∼2018년 3월 문경새재아리랑 "기준 악보” 제정에 자문단으로 참여 - 2018년 12월 10일∼11일 "디아스포라 아리랑제” 참여 * 고유제(최초), 가사 짓기 대회(부활), 평가보고회(최초) 주관 - 2018년 아리랑답사 및 교류-정선, 진도, 밀양 - 2019년 전국 최초로 시행한"찾아가는 아리랑학교” 주관/ 14회 402명 - 2019년 유명 관광지 "찾아가는 공연” 주관 - 2019년 위원 자질 함양을 위한 자체 "아리랑 경창대회” 개최 -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벌”참여(36명)/ 문경새재아리랑 홍보 - 2019년 "의병의 혼불, 아리랑” 제12회 문경새재아리랑제 참여 * 고유제, 가사 짓기 대회, 평가보고회 주관 - 2020년 7월 14일 "코로나아리랑” 발표회/ (장소:중앙공원 야외공연장) - 2020년 11월 5일 코로나아리랑, 조선일보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 봉인 (문경새재아리랑 악보집, 아리랑영상물, 아도위 활동사진) - 2020년 11월 7일 ‘코로나아리랑’ 공연/ 에코랄라아리랑페스티발 초청공연 - 2021년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 5회, (참가자 총 560명) - 기타 : 관내 외 아리랑 전승, 보급, 행사 참여 및 지원, 후원 - 수상 : 2019년 10월 2일 문경시장상, 2019년 11월 18일 경북도지사상 문경새재아리랑은 어느 특정인이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문경의 정체성을 지닌 문화이며 역사다. 올해가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아도위는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지며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아리랑 도시 문경시민으로서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자긍심을 가지고 활동할 것이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기본적이고 정례적인 사업들은 내실과 변화를 추구하면서 새롭고 획기적인 사업도 기획 추진하고자 한다. 근래 본 단체는 국악인과 지역 가수들이 다수 합류하여 가단(歌壇)을 형성할 정도로 활기를 띠고 있다. 이에 우리 45명 아도위 위원들은 아리랑 도시 문경에서 ‘아리랑꽃’이 활짝 피어나는 그날까지 매진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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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에 의한 평화운동, 유네스코의 정신지난 2일 부산동래아리랑보존회(회장 김희은)가 ‘평화의 노래 아리랑’ 주제의 제8회 부산동래아리랑제를 개최했다. 개회 인사를 한 김희은 회장은 정중한 어조로 "코로나로 인해 3년간 개최하지 못한 행사를 우크라이나 전쟁과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등재 10주년을 맞아 아리랑을 통한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주제를 삼아 이번 행사를 준비했다”고 하여 행사 취지를 전했다. 이어 안병길 의원의 축사(대독)과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의 축사, 그리고 안중근문화예술협회 김수남 이사장의 축사가 있었다. 모두 '아리랑과 평화'라는 주제 공연을 격려하는 내용이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번 제8회 행사는 주제에 걸맞게 유엔평화기념관에서 객석을 메운 관객과 보존회 회원 30여명이 아리랑과 춤과 가곡으로 주제를 실현했다. 제1부는 1937년 서영신의 ‘동래아리랑’과 2009년 발표된 김희은 작사 ‘신동래아리랑’을 문학박사 정영진 박사가 해설을 곁들어 무대화 했다. 이 무대는 부산동래아리랑보존회의 창립 배경이기도 하고 부산이 아리랑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전달하는 의미있는 순서였다. 윤순덕 외 여러 회원들이 무대를 꾸몄다. 제2부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소주제로 한량무(정순이)로 시작하여 평화아리랑(조갑선/장은빈) 독도아리랑(장덕순 외) 경상도아리랑(김지현 외) 긴아리랑과 영암아리랑이 관객의 박수를 받았다. 아리랑의 다양함을 알린 무대인데, 특희 김희은 회장의 '긴아리랑'은 아리랑 중 예술성이 가장 높지만 고저음폭으로 높게 불러야 하는 곡이라서 목구성이 어려운 소리인데 명창답게 호소력을 발휘하여 관객과 회원들에게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제3부는 ‘광복의 아리랑’이란 소주제로 특별 출연한 테너 최원갑의 가곡 ‘그리운 금강산’으로 문을 열었다. 이어 눈물서린 '사할린아리랑'을 최옥분 외 3명의 회원이,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 사상을 담은 '평화아리랑'은 김희은 회장과 회원들이 합창했다. 특히 독립군아리랑과 광복군아리랑은 소리극으로 구성하여 이번 행사의 주제를 부각 시켰다. 휘날레는 동래아리랑으로 마무리를 했다. 90여 분간 이어진 공연은 아리랑과 국제 평화기구인 유엔 산하 교육과학문화기구와의 관계를 이해시키는 한편, 곡조와 사설의 다양한 멋과 맛을 전한 무대였다. 행사 기획 단계에서 자문을 맡은 기미양 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은 "1926년 개봉된 나운규 감독 영화 '아리랑'이 부산에서 기획 되었다는 역사성에서 부산동래아리랑보존회는 소중한 아리랑 전승공동체입니다. 이번 제8회 행사는 어느 때보다도 의미있는 주제를 구현하는 무대여서 김희은 회장과 보존회의 존재감을 높인 공연으로 생각합니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지난 8월 4일 미 해군군악대 공연에서 일본 관객이 ‘기미가요’ 연주를 요청하자 대신 ‘아리랑’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기미가요’는 평화를 파괴한 노래이기에 연주할 수 없어 대신 평화의 노래인 아리랑을 연주하였다고 하는 외신을 듣고, 이번 부산동래아리랑제의 주제 선정이 탁견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총 3부에서 들은 아리랑들은 시대를 관통한 다양한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아리랑의 여운이 오래 오래 갈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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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울릉도에도 아리랑이 있다”"1985년 8월 15일 오전 11시부터 12반까지 90분간 송출된 특집방송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KBS 방송사상 유일하게 뉴스 없이 진행된 이 방송은 ‘울릉도아리랑’을 송출한 감동으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 '울릉도라 동해섬은 자물통세상/ 한번들어오면 나갈줄을 모르네”, 김제조 할아버지의 이 아리랑에는 울릉중계소의 전파음과 함께 파도소리가 반주로 따라온 매우 매력적인 소리였다. 20년 전의 그 감동으로 이 번 음반에 ‘울릉도아리랑’을 수록한다." 1999년 말에 나온 음반 ‘팔도아리랑’의 김연갑선생 해설 일부이다. 이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 울릉도아리랑의 존재를 알고 있는 분들은 드물었다. ‘신비의 섬’, ‘환상의 섬, ’동해의 외로운 섬‘ 같은 표현으로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고 있던 울릉도에 아리랑이 있다는 것은 의외이고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은 "울릉도의 생활상을 노래한 아리랑으로 1980년대 울릉읍 사동리 김재조와 천부리 진태원이 구연한 것을 김연갑이 채록하였다”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올라있지만 당시로서는 생각을 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이런 인식은 2012년 유네스코의 인류문화유산 아리랑 등재 과정을 통해 전환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나아가 세계인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6개국의 인류문화유산 등재 심사위원들은 한국인이 사는 곳 어디에든 아리랑은 뿌리내리고 불러 오는 노래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결속에 기여하는 노래라고 평가하였음은 물론, 60여 종의 아리랑이 존재함을 ‘다양성의 가치’로 인정하기도 했다. "인간의 창의성, 표현의 자유, 공감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아리랑이 지닌 가장 훌륭한 덕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누구라도 새로운 사설을 지어 낼 수 있고, 그런 활동을 통해 아리랑의 지역적·역사적·장르적 변주는 계속 늘어나고 문화적 다양성은 더욱 풍성해진다. 그와 동시에 각 지역사회와 민간단체 및 개인을 포함하는 일단의 지방 민요인 아리랑 전수자들은 해당 지방 아리랑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강조하면서 대중화와 전승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유산 ‘서정민요 한국 아리랑’) 정확한 실상 파악이면서 애정어린 시선의 평가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울릉도에도 아리랑이 있어야함을 직감하게 된다. 140km나 멀리 떨어진 섬이라하더라도 노래말처럼 지증왕 13년 서기 512년 신라시대에도 우리가 살아온 섬이기 때문이다. 1984년 김연갑선생의 조사 이후 몇 차례의 조사 결과로는 곡조상으로는 두 가지 버전에 가사 형태로는 세 가지 형태의 아리랑이 있음이 확인 되었다. 하나는 강원도 아라리의 메나리조의 것이고 또 하나는 1970년대 형성된 가요형태이다. 그렇다면 왜 이 울릉도의 ‘울릉도아리랑’이 강원도 아라리 곡조의 파생형이 된 것일까? 그것은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가 될 것이다. 즉, 1882년(고종 19) 개척령이 공포되어 조정의 협조로 들어 간 개척민의 분석 결과인데, 이 때 곡식 종자와 가축과 함께 입도한16가구 54명 중에 7가구로 강원도민이 가장 많다는 사실이다. 이 연장선에서 1900년 처음으로 울릉군이 강원도에 편입된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실제 이 시기 아리랑은 강원도에서 생활의 노래로 보편화 된 상황이다. 이런 정황에서 울릉도의 생활민속, 특히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은 당연히 울릉도에도 영향권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100여년 후인 1980년대 중반 울릉도아리랑의 채록은 인구가 1만2천명이 된 상황이니 당연히 버전이 다양해 질 수 있었다. 그것이 당시 60대 중반이던 김제조와 전태원선생의 아리랑 2종과 1편의 가요형 아리랑이다. 이들 3편 모두는 울릉도민의 정서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어 매우 각별하다. 육지와의 격리감을 ‘자물통’으로 표현 한 것이 특히 그렇다. 울릉도아리랑(1) 울릉읍 사동리 거주 김재조 선생의 구술로 채록되어 널리 알려진 아리랑이다. 당연히 조사지 사동리에서는 ‘울릉도아리랑’이 아닌 그냥 ‘아리랑’이란 곡명으로 조사되었다. 곡조는 강원도 정선아라리와 같은 메나리조로 불규칙하게 엮음형을 먼저 부르고 긴소리를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넘겨주소 1 동해바다 한복판에 층암절벽 120십리/구비돌아 솟앗으니 그리움의 울릉도라 2 울릉도라 동해섬은 자물통세상/한번들어오면 나갈줄을 모르네 3 바다에는 그물낚시 섬안에는 호미연장/부창부수 넘나드니 복을 받은 울릉도라 4 우리네 서방님은 오징어잡이 갔는데 /원수년의 돌게바람 왜 이리도 부노 울릉도아리랑(2) 천부리 거주 진태원의 구술로 채록된 것이다. 곡조는 김재조의 것과 같으나 전체가 엮음형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가사상으로는 이것이 더 고형으로 파악되나 같은 강원도 메나리조임으로 음악적으로는 같은 것으로 본다. 3절에서 인구수를 1만 2천으로 표현하여 1960년대 초기 널리 불린 노래임을 짐작케 한다. 자료에 따르면 1960년대 인구는 1만 4천 정도였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나를넘겨주소 1 창파에 배를띄워 순풍에 돛을달아/동해바다 칠백리로 바람결에찾아오니 울릉도라 2 산천은 험준하고 수목은 울창한데/처량한 산새소리에 산란한 이내심정 울게하네 3 바위돌이 솟은 곳에 향나무가 늙었으니/일만이천 백성사는 꿈나라에 울릉도라 4 바다에는 그물낚시 섬안에는 농기연장/부창부수 넘나드니 복을 받는 울릉도라 5 동해창파 넓은 바다 우뚝 솟은 울릉도에/성인봉이 주산이요 수원지가 수도로구나 울릉도아리랑(3) 형태는 전형적인 본조아리랑과 같은 2행 1련에 2행 후렴을 으로 불린다. 곡조는 유행가 조로 경쾌하다. 울릉도의 대표적인 처소를 드러내려 한 것으로 보아 울릉도의 한 문사가 애향심으로 지었다고 본다. 특히 후렴의 고정적인 ‘아리랑고개’가 ‘아리랑 장재’로 바뀐 것이 주목된다. ‘장재’는 저동 2리에서 나리동으로 가는 고개이다. (후렴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장재로 넘어간다 1 동해에 높이솟은 울릉도의/중첩한 명산들을 자랑하노라 2 갈미봉은 단풍으로 몸단장하고/홀벗은 노인봉은 가련도하다 3 남서동(南西洞) 투구봉은 영웅의 기상/간령의 가두봉은 호걸이로다 4 백운동 마당에는 신선이 놀고/학포동 둥허리에 실안개뜨돈다 5 북면의 송곳산은 재주도 좋아/앞바다의 구멍섬을 뚫어 놓았네 6 나리동 분지네는 설원이 좋고/ 향나무재 향기는 간곳이 없네 7 옥경동 맑은 물에 언어가 노니/ 금년에도 울릉도에 풍년이 온다네 이 아리랑 3편의 가사를 통해 1980년대 전후의 울릉도를 이해할 수 있다. 이해는 동경(憧憬)과는 다르다. 이해는 사실과 진실에 접근하는 기본자세다. 멀리 두고 관광의 대상인 울릉도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 아리랑이 있음이 이를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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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2022제주아리랑축제.....'탐라순력아리랑'제주아리랑보존회와 영천아리랑연구보존회 공동주최로 지난 18일 제주시 탑동 탐라공원 공연장에서 2022제주아리랑축제가 개최되었다. 주제는 '탐라순력아리랑'이다. 영천 출신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1653~1733)1653-1733)이 남긴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보물 제652-6호)가 보물로 지정이 되면서 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영천과 제주가 아리랑판에서 만났다. 조선시대 제주의 모습을 그린 기록 화첩 '탐라순력도'는 제주의 자연·역사·풍속·자연·문화·방어실태를 그림으로 그려서 한눈에 볼 수 있다. 다음은 문헌으로 전해지는 제주아리랑으로 불려지는 '꽃타령아리랑' 사설이다. 만화방창(萬花方暢) 방끗 만화방창 방끗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장대(帳臺)에 일등미색(一等美色) 곱다 자랑 마소 담안에 붉은 빛은 편시춘(片時春) 홍도화(紅桃花)라 1936년 김두봉 편찬의 「제주도실기」에 수록된 ‘꽃타령’, 일명 ‘제주아리랑’ 17수 중 한 수이다. 「제주도실기」에는 이 출전이나 작사자나 시기를 밝히지 않아 작품 이름 외에는 미상인 상태다. 20여년 전 이 작품을 발굴, 소개한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선생은 이 작품의 후렴을 주목하여 본 사설의 창작년도는 아리랑 후렴의 형성 시기인 19세기 초 이전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후렴을 제외한 본 사설은 육지에서 들어온 지방관 정도의 유학자일 것이고, 시속(時俗)음악도 즐길 줄 아는 인물일 수 있다. 여기에 추정되는 인물이 「악학편고」(樂學便考)와「악학습령」(樂學拾零)이란 악서를 편찬한 제주목사 이형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시는 ‘꽃타령’과 아리랑의 관계, 그 작가를 제주목사 이형상으로 추정하는 것에 의아해 하였다. 그런데 이번 20여 년이 지나 ‘탐라순력도’에 대한 자료를 살피는 과정에서 이형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년간 화공 김남길(金南吉)을 시켜 ‘탐라순력도’라는 기록화첩을 남겼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두 종의 악서 중 「악학습령」은 시조·가곡을 수집 정리한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분이 경북 영천 출신임도 알게 되었다. 이번 영천아리랑보존회와 제주아리랑보존회 공동행사의 계기성과 20년 전 ‘꽃타령’의 작자를 이형상으로 추정하는 이유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결국 아리랑을 통해 18세기 제주 역사와 제주목사 이상현, 그리고 ‘탐라순력도’를 이해하는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이번의 행사를 통해 영천의 역사 인물과 제주아리랑의 퍼즐 하나가 맞추어진다. 금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 10주년이라서 더욱 의미로운 일이다. 이번 공연의 기획의도는 첫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 10주년을 기념하여 '제주아리랑'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계기를 찾아간다. 둘째, 제주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와 함께 제주아리랑을 재조명 한다. 셋째. 이형상의 고향 영천과의 연계를 소환하기 위해 영천아리랑을 제주에도 알린다. 넷째, 제주아리랑의 컨텐츠화를 시도한다. 강소빈 회장은 "지난해부터 탐라순력도에 나와있는 경로잔치를 재현하기 위해 스토리텔링을 연출하여 이형상을 주인공으로 한 소극을 만들어서 무대화하였다. 그 무대에서 당연히 아름다운 기녀들이 제주아리랑 '꽃타령아리랑'을 불렀다. 영천아리랑보존회 전은석 회장은 "제주에서 영천아리랑을 처음 선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영천에서 제주목사로 간 이형상이 남긴 탐라순력도가 제주시의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제주에 오니 더욱 뜻깊은 행사이었다."라고 전했다. 1부에서는 제주 토속소리 '서우제소리'와 '제주아리랑', 해녀 퍼포먼스가 선보이고. 2부에서는 '영천아리랑'과 '뱃노래, 제주 허벅춤 등 다채로운 장르를 통해 제주의 소리와 제주아리랑환타지(조천아리랑. 우도아리랑, 하르방아리랑)을 알렸다. 초청 공연으로 무대에 선 서울아리랑보존회 유명옥 명창은 '애국가아리랑'과 '아미일영아리랑'이 불렸다. 특히 가파도에서 온 해녀가 해녀복을 입고 허벅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고 해녀의 삶을 읊어대는 1인극 퍼포먼스는 제주 여성의 고난과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휘날레에는 '아리랑 대합장'을 관객과 함께 했다.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써 국제적으로 문화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입증하는 새계적 유산으로 인정받았다. 2014년는 아리랑이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미래 세대에 물려줘야 할 우리나라 총체적 유산의 하나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아리랑은 우리나라 전통민요의 하나”라는 표현에서 독립 종목 또는 독립 장르 ‘아리랑’으로 가시화되기에 이르렀다. 유네스코와 문화재청이 보고서에 언급한 아리랑의 수는 2012년 이전에 불러지는 60여 종이라고 했고, 이 ‘아리랑’은 지역성과 형태를 표제화 하고 창의성, 표현의 자유, 공감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다. 이것이 아리랑이 지닌 덕목의 하나로 누구든 지역적·역사적·장르적 변주로 문화적 다양성을 표현해 온 것이다. 제주도아리랑을 전승하는 회원들이 제주 역사와 ‘제주아리랑’이 상호 이해하고 아리랑문화의 가시화에 기여하길 바란다. 오늘같이 제주에서 ‘영천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이 만나는 장을 마련해 준 두 단체에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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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고모산성에서 첫 수업 성료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가 문경새재아리랑의 저변 확대 및 대중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3년 전부터 연속 추진해 온 '찾아가는 아리랑학교'가 지난 6월 18일 오후 2시 신록이 짙은 6월의 싱그러움 속에 문경을 찾아온 관광객과 시민들이 함께한 가운데 고모산성 주막거리에서 개최되었다. 주최측은 야외무대의 효율성을 살리기 위해 사물놀이 공연 및 퍼포먼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무대와 관객이 따로 없고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모든 참가자들이 함께 어울려 즐기면서 문경새재아리랑의 보급 확산이란 효과를 내려고 노력하였다고 밝혔다. 주막집 마당에서 한두리국악단(단장: 함수로) 한바탕 개막공연을 펼졌다. 이어 특별출연한 천년다례원 문청함 원장의 서예 퍼포먼스가 있었다. 박순자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한 아리랑학교는 이만유 위원장의 인사,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의 아리랑 이론 강의, 한두리국악단 반주로 문경새재아리랑 공연(이춘자, 박춘자, 안복수), 다듬이 공연 및 체험(이성자, 김금옥), 이춘자 강사가 지도한 문경새재아리랑 따라 배우기, 한바탕 어울림 마당 등의 순서로 진행하였다. 영남 전래민요 방귀타령(권인순)과 함께 상주아리랑(김영애)도 곁들여 불러 주었다. 그리고 SNS 홍보용 영상 촬영(오석윤), 안내 및 코로나 방역 활동(류시자, 최순이) 등 진행에는 최상운 사무차장을 비롯한 임원과 위원 가리지 않고 함께 합심하여 주최측과 참가자들이 모두 만족하는 첫수업이 성료되었다. 이만유 회장은 "다음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는 9월 17일과 9월 24일 문경새재에서 10월 8일은 에코랄라에서 오후 2시에 각각 개최된다.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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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를 기록한 통역관이자 서화가, 청운 강진희청운菁雲 강진희姜璡熙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1851년에서 1919년까지 살다 가셨으니 일면식이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와 조우하게 된 것은 2022년 5월 29일 서울 강남의 가로수길에 위치한 예화랑에서였다. ‘연緣, 이어지다’라는 제목으로 사후 백여 년만에 처음 열린 기념전이었다. 예화랑 김방은 대표가 청운 선생의 피를 이어받은 혈연관계이고, 이혜신 큐레이터가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으며,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대표이사가 소장하고 있던 청운의 저서 '악부합영樂府合英'을 전시회에 내놓은 연유로 ‘인연’이 강조됐다. 예화랑 측은 한자로 쓰여진 악부합영을 고전번역원에 맡겨 번역해 소개하고, 관직에 있으면서 서화와 판소리 분야에서도 활동했던 강진희 선생의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그를 조명했다. 청운은 제대로 부각된 적이 없지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어학 실력도 뛰어나 한문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어사전을 펴냈으며,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일어와 영어를 구사해 1886년 일본공사접응관차를 거쳐, 1887년 통역원으로 박정양1841~1904 주미공사의 미국 수행을 맡았다. 주로 일어로 미국측과 소통했고, 그 내용을 우리측에 통역했다. 어떤 생김새였을까? 궁금해하던 기자에게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1888년 4월 26일 조지 워싱턴1732~99의 생가 버지니아 주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박정양 공사, 이종하 무관, 이하영 서기관과 나란히 섰는데, 그들보다 훨씬 큰 체격이다. 머리 하나는 차이가 날 정도로 키 차이를 보인다. 서화에 능했던 통역관은 처음 마주하는 서구의 문명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카메라가 없던 나라의 주재원이었던 까닭이다. 당시 서구의 과학문명은 당시 조선인들에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박정양보다 5년 앞서 미국을 방문했던 조선보빙사가 겪은 일화는 웃음짓게 만든다. 1년 뒤 갑신정변의 주범으로 멸문지화를 당하는 홍영식을 단장으로 민영익, 서광범, 유길준 등 20대의 조선 엘리트들이었다. 서구 문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춘 인물들이었음에도 그들이 받은 문화 충격은 컸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기는 이해불가였고, X-RAY는 "귀신의 소행”이었으며, 엘리베이터는 경악 그 자체였다. 사절단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만나자 넙죽 큰 절을 해 미국 신문에 그 모습이 실리기도 했다. 식탁에 흉기인 포크와 나이프가 오르는 건 "상스럽다”고 느꼈고, Y-shirts에 대해서는 "편리하겠다‘며 호감을 표했다. 청운은 큰 문화 간극 속에서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목격한 풍경을 머릿속에 각인했다가 조선에 돌아와 화선지에 붓으로 옮겨 소개했다. '미사묵연-화초청운잡화합벽'이다. 청운은 1911년부터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 등과 서화미술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청운은 금석학에 밝아 위창 오세창1864~1953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위창은 전서와 예서를 익혀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청운의 인물됨과 생애에 대해서는 남겨진 자료가 많지 않다. 이혜신 큐레이터가 찾은 김영욱의 2017년 논문 '청운 강진희의 생애와 서화 연구'에 서화가로서의 청운이 소개돼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청운의 저서 악부합영은 판소리 애호가로서의 청운의 면모를 보여준다. 두 자료를 근거로 그를 형상화해본다. 강진희는 35세에 관직에 진출해 60세까지 법부와 학부의 요직에서 관원으로 일했다.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와 교육부에 근무한 셈이다. 61세부터는 서화에 전념해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진주 강씨姜氏인 그의 가문은 누대로 의관醫官 집안이었다. 모친 역시 의관 집안이었다. 조모는 역관 집안 출신이었다. 청운은 의관 대신 역관을 선택했다. 조모인 천녕 현씨玄氏 가문의 영향이 컸다. 왜학倭學을 전공해 잡과에 합격해 사역원 종 9품직인 참봉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현재의 일어 통역관이었다. 당시 주미 공사관에는 참찬관 이완용1858~1926, 서기관 이상재1850~1927, 번역관 이채연1861~1900 등 10인이 근무했다. 이 당시 청운은 이미 전서에 조예가 있었던 모양이다. 강민기의 논문 '근대 전환기 한국 화가의 일본화 유입과 수용'에 한 일화가 소개된다. 청운이 미국행 배를 타기 위해 요코하마에 들렀을 때 일본 화가 야스다 베이사이安田米齌1845~88를 만나 '추경산수도' 1점을 선물 받고 자신의 전서 글씨를 선물한 까닭이다. 주제에 대한 접근의식도 집요했던 모양이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배에 19일간 동승했던 훗날의 주한미국대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목격담에 따르면, 청운은 가벼운 옷 차림으로 여객선의 홀에 나가 누구에게나 말을 걸고 다녔다. 알렌은 그런 청운을 "the snoop”으로 표현했다. 꼬치꼬치 캐묻고 다니며 탐색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청운은 그만큼 호기심이 많았으며 알고자하는 열망이 컸던 인물로 이해된다. 청운은 미국 체재 시절 박정양을 수행해 28개 공사관을 방문하며 외교 활동을 벌였고, 이상재, 이채연 등과 볼티모어 등 여러 지역을 유람하며 서양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1889년 귀국해 1910년 한성고등여학교 서기에서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법부와 학부에서 활동했다.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국한회어國韓會語' 편찬을 돕고, 역사와 지리 서적 간행에도 관여했다. 61세이던 해부터 1919년 타계하기까지 9년간은 서화가의 길을 걸었다. 앞서 워싱턴 주재 시절에도 장승업 풍의 '묵매도墨梅圖', '괴석국란도怪石菊蘭圖' 등의 수묵화를 그렸다. 1888년에는 훗날 순종이 되는 동궁 이척1874~1926의 15번째 탄강일을 축원하는 '승일반송도昇日蟠松圖'도 그렸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강진희는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잘 썼고, 그림은 매화를 잘 했다”고 평했다. 강진희의 생애를 연구한 김영욱은 "강진희 30대의 회화는 화면의 구성과 소재에서는 19세기 화단의 경향을 수용하고, 맑은 담묵을 즐겨 사용해 담담한 느낌의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했다. 제작 목적에 맞는 소재를 포착하고 간략한 필치로 묘사하여 그림의 이야기를 잘 전달했다. 또한 전각의 인장을 회화와 연계시켜 시·서·화·인 ‘四全’을 지향한 작화 방식은 서화가 시기까지 지속되었다.”라고 평했다. 귀국한 후 머리 속의 풍경들을 화첩으로 남겼다.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종남귀래도終南歸來圖' 등이다. 이 화첩은 1983년 ‘최초의 미국견문화美國見聞畵’라는 제하로 동아일보에 보도됨으로써 처음 알려졌다. 화차분별도는 워싱턴 공관에서 멀리 두 열차가 오고 가는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이다. 조선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가는 여정 중에 함선과 기차를 경험했으나 두 열차가 교행하는 모습은 겁이 날 정도로 신기했던 모양이다. 제목 옆에 ‘웃음이 나왔다’라는 뜻의 ‘부지일소付之一笑’를 날인했다. 철도와 기차를 중심으로 많은 배경은 생략하고 간략한 필치로 스케치했다. 이국적 풍경의 핵심만 포착하여 묘사함으로써 그림의 주제를 뚜렷하게 전달했다. 청운 강진희는 서화가 외에 판소리 연구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 부분이 의외이다. 당시 선비들이 남종화의 영향을 받아 그림 속에 시를 쓰던 ‘화중유시畵中有詩’의 인문화人文畵에 몰두하는 게 트렌드였던 만큼, 서書와 화畵에 관심과 재능을 보인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지만, 판소리에 관심을 가진 건 매우 이례적인 경우인 까닭이다. 그냥 즐기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전문 서적을 펴냈을 정도였으니 놀랄만 하다. 입으로만 전해져 오던 속요들의 가사를 채록하고 수록한 악부합영樂府合英이 그 업적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대목이다. ‘악부’는 노래가사를 한시 형태로 옮긴 것이다. 고려 때 이제현李齊賢1287~1367 이래로 몇몇 학자들이 이 작업을 해왔다. 한시漢詩의 기본 형식은 한 구句당 5자나 7자로 이루어지지만, 악부 한 편이 몇 구로 구성되는지, 한 구는 몇 자로 이루어지는지 등에 대해 정형定型은 없었다. 노래가사의 길고 짧음에 따라 시가형태도 들쭉날쭉이었다. 청운의 악부합영은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다. 각 부마다 자신의 필명인 일소헌一笑軒의 이름으로 제사題詞를 지었다. 신헌申櫶과 신위申緯가 채집한 곡들을 정리하며 ‘푸른 갈대 수풀을 배로 헤치고 다니며 소악부小樂府를 읊조리다碧蘆吟舫小樂府’라고 표현하고, 자기가 기록한 곡들에는 ‘푸른 갈대서리를 배를 타고 다니며 소악부를 읊고 후기를 짓다題碧蘆吟舫小樂府後’라고 썼다. 벼슬아치로서 판소리를 연구했던 송만재1788~1851가 광대놀이를 보고 지은 시, 관우시觀優詩를 옮기며 감상평을 덧붙이고,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세상에 떠도는 유행가 아홉 수九歌’는 스스로 채록했다. ‘합영合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여러 영걸들의 합작품‘이라는 점을 나타낸 것이라 풀이된다. 청운은 악부합영의 서문에서 "일소헌一笑軒이 소악부小樂府를 모방하다.”라고 스스로 소악부의 형식을 따랐음을 밝히고 있다. 소악부는 한시의 절구체絶句體를 고수하는 악부이다. 즉, 시처럼 절구 형태를 따른 작은 시小詩의 형식이다. 악부합영은 구전으로 전해오던 우리 노래를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당시 소리하던 사람들이 한자를 몰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청운의 작업은 의미가 크다. 선대인 신위, 신헌과 후대로서 천재 소리를 듣던 육당 최남선1890~1957 등도 같은 작업을 한 바 있다. 청운은 그들이 빠트려 국문가사만 전해져오던 곡들의 가사를 한자로 옮겨 기록했다. 그의 한문 실력이 작용했다. 일소헌一笑軒이 기록한 속요 46수에 벽로운방소악부碧蘆韻舫小樂府 40수 그리고 여산노초(礪山老樵, 송만재)의 관우시觀優詩 50수를 묶었다. 청운은 기록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선생이 소요(小謠 : 우리나라 민요)를 채집하여 <벽로운방 소악부>라 명명한 칠언절구 40 수는 가사가 오묘하고 가락이 뛰어났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졌다.”라고 선대의 업적을 칭송하고, 자신이 기록한 속요 46수는"무더위에 비까지 와서 후텁지근한 날, 풍등風燈을 앞에 두고 우연히 남악주인(南岳主人, 최남선, 1890~1957)이 찬정撰証한(골라서 정한) 가곡(歌曲, 원 제목은 歌曲選)을 읽고, 그 가운데서 무명씨無名氏가 지은 것만을 찾아내어 국문(한글)은 버리고 한자로 문장을 짓고 압운(押韻, 시가에 규칙적으로 운을 다는 일)까지 해서 뜻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하였다.” 청운은비록 칠언절구의 형식을 빌려서 쓰기는 했지만, 노래의 원 맛을 제대로 낼 수 있을 것인지, 걱정하고 있다. 다만 ‘변변치 않은布鼓雷門’ 작품이지만, "꽃그늘 아래 술동이를 앞에 두고 혹시라도 지음자知音者가 한번 목청껏 뽑아주기를 기다리노라.”라며 겸손을 보였다. 서언의 말미에는 중국 강소성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가 수계修契한 지 26번째 계축년(1913)에 고송유수관 주인古松流水館 主人이 홍두紅荳 꽃 아래서 글제를 쓰다.”라며 한껏 고양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악부합영의 모두에 밝힌 서언緖言에도 그런 감정이 드러난다. "음악은 울적함을 풀어주고 노래는 마음을 드러내는데, 모두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시詩에 읊고 감흥하는 것에 의한 비유가 있다면음音에는 고음과 저음 및 맑은 소리와 탁한 소리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시대에 따라 기풍氣風이 변하는데, 예로부터 변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성운聲韻이다. 광대가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상말로 대사를 하고 거리에서 노래하는 것은, 자기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입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광대가 소리를 길게 빼서 노래하고 악기를 두드려서 연주하여 권선징악을 표현하는 데서 비분悲憤한 감정을 일으키니, 즐거운 데서 즐거워하고 슬픈 데서 슬퍼하게 된다.그러므로 음악을 듣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니, 어찌 음악을 얕잡아 볼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음악은 국문이 아니면 가락을 만들 수 없어서 곡조를 맞추기 어려우니, 시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번에 국문을 버리고 압운押韻한 것은 비속함에서 벗어나서 우아함을 얻으려는 것이다. 시경詩經의 작자가 민요를 채집했던 이유도 어찌 이와 비슷하지 않았겠는가. 구전되던 노랫말을 한문으로 기록한 것은 "비속함에서 벗어나 우아함을 얻으려는” 취지라고 언급했다. 문자가 권력이던 시절의 인식이다. 이제 청운의 작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자. '임의 자취 사라진 꿈夢無跡'은 어쩐지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라는 가곡을 연상시킨다. 夢爲我請遠方君 꿈이 날 위하여 먼 데 임을 데려왔건만 不勝欣起影無存 기쁨에 겨워 일어나니 그 모습 사라졌네 君或怒而飄然去 임이 혹시 노해서 홀연히 가셨는가 如何覺來不見痕 잠에서 깨니 자취가 보이지 않네. '문밖에 나와서 기다리다出門望'는 친구를 그리며 기다리는 정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夜雨花開酒初熟 밤비에 꽃은 피고 빚은 술도 막 익었네 琴朋留約帶月回 벗이 거문고 가지고 달이 뜰 때 온다 하니 分付兒童仔細看 아희야, 자세히 보아라 茅檐月與故人來 초가집 처마에 달이 뜰 때 벗도 함께 오는지 '당신이 직접 오세요宜身至前'는 당시 여인으로서는 당찬 모습을 담았다. 莫倩他人尺素馳 남에게 편지 전하지 마시고 當身曷若自來宜 당신이 직접 오시면 좋겠어요 縱眞原是憑傳札 아무리 진심을 편지로 전해도 成否從遠未可知 참인지 아닌지 알 수 없거든요 '백마는 울고 아가씨는 옷을 잡고白馬靑娥'는 "백마는 가자 울고 해는 기울어”라는 유행가 가사를 떠올리게 한다. 欲去長嘶郎馬白 낭군의 백마는 가자고 길게 울고 挽衫惜別小娥靑 어여쁜 아가씨는 옷을 잡고 이별을 아쉬워하네 夕陽冉冉銜西嶺 석양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고 去路長亭復短亭 갈 길은 멀고도 머네 '나비야 청산 가자胡蝶靑山去'는 노랫말이 일품이다 白胡蝶汝靑山去 흰 나비야 너도 청산 가자 黑蝶團飛共入山 호랑나비야 떼지어 함께 청산으로 날아가자. 行行日暮花堪宿 가다가 날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花薄情時葉宿還 꽃이 푸대접하면 잎에서라도 자고 가자 황진이의 '벽계수碧溪水'는 청운 덕에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진 가사이다. 마지막 연만 "명월明月이 만건곤滿乾坤하니 쉬어감이 어떠하리”로 바뀌었다. 대중성을 의식한 소이일 것이다. 靑山影裏碧溪水 청산 그림자 속의 벽계수야 容易東去爾莫誇 동쪽으로 쉬이 흘러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難復回 푸른 바다로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데 滿空明月古今是 온산 가득 밝은 달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네 '동짓달 긴긴 밤冬至永夜'은 황진이黃眞伊가 지은 애절한 연시戀詩이다. 국문으로 전해져오던 가사를 청운이 한자로 옮겨 적었다. 截取冬之夜半强 동짓달 기나긴 밤 절반을 애써 잘라서 春風被裏屈蟠藏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말아 두었다가 燈明酒煖郞來夕 등 밝히고 술 데워 놓고 임이 오신 날 저녁에 曲曲鋪成折折長 굽이굽이 길게 펴리라 청운은 채록곡마다 직접 제목을 지어 붙이고 작사가의 이름을 명기했다. 없는 경우에는 ‘무명씨’로 표기했다. 신위 등 선대 기록자들에게는 헌사의 의미로 직접 절구를 지어 올렸다. 청운은 악부합영의 의미를 ‘기록’과 ‘전승’으로 보았다. "문장의 인연”을 살리려는 또 다른 예술의 장르가 아닐 수 없다. "인간 세상의 백년은 천상의 하루에 불과할 뿐인데, 더구나 그 하루 동안의 영고성쇠와 희로애락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민요를 노래로 전할 경우에도 흥망성쇠에 따라 존속되거나 사라지는 안타까움이 있다.시구詩句는 오랜 시일을 세상에 남아 있으니, 사람에게 문장의 인연은 참으로 귀중하지 않겠는가.” 송만재가 광대놀이를 보고 쓴 '관우희오십수觀優戱五十首'는 광대패의 소리와 재담, 재주를 보고 느낀 저자의 감상문 형식이다. 줄여서 '觀優詩'라고 부르는 그 글에는 영산(靈山, 혹은 단가短歌)에 대한 디테일한 평이 들어있어 후대의 판소리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영산은 놀이판에서 목을 풀 때의례적으로 하는 몇몇 재담과 타령打令을 포함하는 여러 곡의 혼칭混稱이다.요령要令은 광대가 재주를 부릴 때 하는 재담과 발림이다. 觀優詩는 광대패의 놀이를 눈 앞에서 직접 보듯 하게끔 묘사했다. "거문고 타고 피리불며 촛불 밝히고 밤새 노는데, 서늘한 정자와 높은 누대에 바람에 꽃이 떨어진다. 정신은 북과 함께 움직이고소리는 몸동작과 함께 표현한다. 방자한 웃음에서 해학이 물결처럼 나오고 입에서 말이 샘솟듯이 흘러나온다.” 청운은 송만재의 '관우시' 뒤에 서둘러 기록으로 남겨야 했던 사정을 밝혔다. "우리나라의 정악正樂은 모두 여항(閭巷, 시중)에서 전습된 것과 장악원梨院의 고악古樂과는 차이가 있다.최근에 창을 부르는 기생이 요모조모 뒤섞어서 두서가 없어지니 억지로 기억하기는 어렵다.” 청운이 언급한 정악들은 조선 시대 중기에 널리 불리던 12가곡으로, <백구사白鷗詞>, <죽지사竹枝詞>, <어부사漁父詞>, <행군악行軍樂>, <황계사黃鷄詞>, <처사가處士歌>, <춘면곡春眠曲>, <상사별곡相思別曲>, <권주가勸酒歌>, <양양가襄陽歌>, <매화타령梅花打令>, <수양산가首陽山歌> 등이다. 고려시대 시조작가 이현보李賢輔의 <어부사漁夫詞>만 빼고는 모두 작자가 미상이다. 12가곡은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가사歌辭보단 길이가 짧지만 풍류적인 서정을 담고 있다. 바뀌고 사라지는 추세여서 회자되는 노래들을 기록해 소개하며 당부했다. "널리 한 번쯤 전해주시라.” 광한루 위로 아른거리는 봄빛, 오작교가의 긴 그넷줄. 염문설(艶說)을 뿌리는 이는 지금 이 어사(李御使)라 아름다운 인연으로 옥중에서 향기를 쌓네. (서춘향(徐春香)과 이몽룡(李夢龍) 누가 알았으랴, 심청이 천상(天上) 선녀의 몸으로 잘못을 저질러 맹인 집안에 떨어질 줄을 해신(海神)의 아내가 되려고 공양미 300석과 몸을 바꾸었는데 궁궐 잔치에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했구나. (심청(沈淸) 낭자) 화(禍)는 악행으로 인해서 쌓이고 복(福)은 인덕(仁德)으로 말미암는다. 부귀는 쓰디쓴 가난에서 나온다. (연흥보(延興甫)) 가소로운 인간이여, 어리석고 한심한 자여, 이제 제비가를 부르며 서로 친하게 지내려무나. (연자가(燕子歌)) 도시락과 표주박, 대지팡이와 짚신으로 천리강산에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네. (유산가(游山歌)) 세상엔 갖가지 즐거운 일이 많으니, 사람들이 이별가를 부르게 하지 마라. (이별가(離別歌)) 시중에 떠돌아 다니던 작자 미상의 노래 아홉 곡을 채록해 한자로 옮겨 적으며 청운이 밝힌 후기에는 노래에 반영된 인간의 어리석음을 적시하고 있다. "하루는 친구의 책상에서 고시古詩를 보고 빌려서 소맷자락 속에 넣고 와서구가九歌만 베끼고 돌려주었다. 그리고 향을 피우고 등불을 켜고 저녁에그 맛을 세밀하게 완미하였다. 아! 인생은 꿈이니 좋은 꿈도 있고 나쁜 꿈도 있다. 하지만 깨어나면 조만간에 또다시 즐거움을 좋아하여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리는데, 사람의 마음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어떤 사람은 악몽을 만나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왜 그러한가.대체로 어진 사람은 꿈을 꾸지 않으니, 꿈조차 사람의 선악을 따르는 것인가.항심恒心이 있는 사람은 망상妄想을 하지 않고항심이 없는 사람은대부분 이치에 어긋나게 행동한다.잠꼬대 역시 정상적인 꿈과 배치되는 것이다.깨어나는 것에도 도가 있으니,배우지 않으면 깨어나기 어렵다. 하물며 꿈은 흔적이 없으므로 먼저 마음에서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푸른 하늘에 항상 뜬구름이 있어서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으니, 그 구름을 쓸어내고 하늘을 본다면 어찌 상쾌하지 않겠는가. 구름이 항상 무심하게 굴에서 나와서 하늘을 가리는 것은 이 시끄러운 세상의 업장業障과 같아서,올 때에는 빠르게 오지만 갈 때는 아주 더디게 간다. 그러므로 한 구절을 베낀 것이다.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상심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어찌 크게 탄식하지 않으리오.아, 부질없는 인생이 꿈인 줄 알지만 깨어나기도 어렵고 또 이해하기도 어렵다. 청운은 게송 '성미가醒迷歌'를 좋아했다. 이런 노랫말을 담고 있다. 그의 삶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라 할 만하다. 미혹을 벗어난 사람은 담백함을 즐기니 초가집에 살며 베옷을 입어도 마음이 편하다 영예를 구하지 않으니 치욕이 가까이 오지 않고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분수대로 살면서 시속을 따르네 사물은 언제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면 만사에 만족하고 수행을 하면 자신의 복록을 만들게 되네 참고문헌: 김영욱,"청운 강진희의 생애와 서화 연구, 미술사 연구," 2017 강진희, '악부합영',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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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경산자인단오제와 함께 경산아리랑제 '아리랑데부'4일 경산자인단오제 본 무대에서 제8회 경산아리랑제 '아리랑데부(아리랑+랑데부)'가 개최되었다. 경산자인단오제 둘째날은 무형문화재 초청 공연이 펼쳐졌다. 국가무형문화재 '봉산탈춤'에 이어 오후 7시에는 인류무형문화유산,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경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제8회 경산아리랑제가 경산아리랑보존회 주관 주최로 개최되었다. 금년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 10년이 되는 해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2년 동안 비대면 공연을 해오면서 무대공간은 유튜브에 실시간 방송이 되면서 메타버스 시대를 넘나들게 된다. 이러한 현실문제를 따라가고자 공연의 장르가 작년과 다르게 'K-POP' 트랜드에 맞추고자 노력했다.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회장은 2007년 경산아리랑 발표회를 하고 15여 년간 경산아리랑을 알려왔다. 한편 2003년 영남민요연구회를 창립하고, 대구, 구미. 경산에서 경산아리랑과 영남민요를 알리기 위해 힘써 왔다. 배경숙 회장은 "올해는 아리랑이 유네스코 등재 10년이 되는 해이다. 아리랑은 예로부터 살면서 괴롭고 슬픈 일 있으면 ‘아리랑’한 가락으로 풀어내고, 즐겁고 흥겨워도 ‘아리랑’으로 흥을 돋우었다. 태백산 자락 경상도 사람들의 가슴에 자리했던 수많은 아리랑 소리는 경상도 부녀자들의 눈물과 한숨, 웃음과 기쁨을 만나게 해준 소중한 소리들이다." 며 "영남인의 심성이 담긴 '영남민요'도 이제는 점차 사라져 아득히 기억 속으로 더듬듯 그 소리 한 자락 헤아리는 실정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POP'으로 편곡하여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하며춤추는 '놀이'와 함께 무대에 올렸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은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하는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경산아리랑을 경산시민들 마음속에 살아 지역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노래가 되기를 바라는 8번째 메아리를 외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경산 지역 민요조사를 하고 '경산아리랑' 사설 12수를 직접 작사 작창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네 (후렴) 원효 설총 일연선사 삼성현 나신 곳/ 호국정신 꽃피우리 길이길이 만만세라 오월단오 계정숲에 흰구름 나르고/ 한장군의 넋이런가 노랑나비 춤을 추네 성암산 허리에 내린 밤안개/ 아리랑 장단에 달빛도 정다워라 남천강 푸른 물결 말없이 흘러가고/나그네 잠긴 설움 옛 추억도 떠가네 남매지 전설 오누이 눈물인가/ 남성현 높은 고개 보슬비가 흩날리네 이번 무대 하일라이트는 '조선-POP'으로 연출한 '경산아리랑+영남민요' 메들리이었다. 남녀노소가 출연한 이 작품은 마을사람들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아낙네들이 물레도 돌리면서 시집살이의 절절한 아픔을 민요를 부르면서 고난을 치유하는 삶을 노래했다. "가요 가요 나는 가요/우리 어매 보고지고"라고 시작하는 '밭매는 소리'를 시작으로 민중의 희노애락과 생로병사를 담아낸 스토리텔링에서 영남인의 심성을 녹여냈다. 선율은 동시대인이 공감하는 '조선-POP'으로 편곡하여 역동적인 신명성을 연출하였다. 경산지역에서 불리는 '상여소리'와 꽃상여까지 메고 나와서 눈물짓게 하고, 울긋불긋 색동옷을 입은 어린이들의 생동감 있는 율동과 청아한 목소리는 관객의 눈과 마음을 단숨에 훔쳐버렸다.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 특히 휘날레에서 세마치 장단으로 부른 '경산아리랑'에 이어 셔플댄스 율동과 함께 부른 셔플 리듬으로 편곡한 '경산아리랑'은 남녀노소가 하나가 되어 무한한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고자 하는 '미래의 노래'로 형상화 하였다. 신명이 난 관객들도 함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후렴을 따라 불러주었다. 경산아리랑제 무대는 '경산아리랑'을 대주제로 하고 영남민요를 함께 전통(놀이, 노동)을 재현하는 무대이다. 실잣는 물레와 여러 농기구, 떡 찧는 절구, 대나무 바구니와 푸성귀, 꽃상여까지 등장하여 토속 민요의 신명성를 더해 주었다. 관객과 무대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휘날레 끝났지만 앵콜을 2번이나 받았다. 배경숙 예술감독은 영남민요를 지키고 있는 정은하 명창에게 영남민요와 영남 지역 아리랑을 사사했다. '영남민요'를 주제로 영남대학교 한국음악학과에서 석사를 받고, '영남전래민요 연구'로 국문학 박사를 받은 민요 연구 전공자이며 실기인이다. 또한 일찌기 20대부터 전수를 받은 한국전통무용 춤사위를 근간으로 작품 구상을 하고. 연희자들에게 안무까지 가르쳐서 무대에 세우고 있다. 이론과 실기를 기반으로 시대의 트랜드에 따라서 연출까지 해내고 있다. 내년 경산아리랑제가 더욱 기대가 된다. 배예술감독은 "영남민요의 토속적 소리를 현장에 나가서 채록하여 편곡하여, 대중화 하기 위해 현대화하여, 'K-POP'과 같이 '조선-POP'으로 명명하고, 전통을 재현하기 위해 스토리텔링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다음 해에는 '경산아리랑'을 '조선-POP'으로 연출하려고 한다. 경산시민들이 경산아리랑을 애창곡으로 불러주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경산아리랑보존회는 2020년부터 해외 동포들과 함께 하는 사할린아리랑제 무대에 참가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전통을 재현한 꽃상여까지 들고 가기 위해 조립식으로 만들었다고 보여주었다. 전 회원들이 매주 함께 모여서 10월 1일에 개최되는 2022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 출전 준비를 하고 있다. 경산아리랑은 2007년 첫 발표(영남대학교 인문관)한 아리랑으로 열다섯 살을 맞았다. 그동안 축제 등을 통해 경산시민들에게 아리랑의 멋과 맛을 전하기 위해 노력을 해 왔다. 올해 경산아리랑전국경창대회도 6회를 맞이했다. 영남민요연구회는 경산아리랑, 구미아리랑, 구미의병아리랑, 팔공산아리랑을 비롯한 영남 지역 아리랑의 전승에 힘쓰고 있는 공동체로써, 아리랑의 가치와 전승 방식을 이해하고 있는 아리랑전승단체이다. 경산아리랑의 형성과 전승활동은 더욱 주목할만하다. 이 과정에서 문경시가 발행한 전국아리랑 사설 기록화 결과인 1만수 '아리랑 대장경'에 수록되어 전국과 나아가 세계인들에게 확산될 계기를 맞이했다고 본다. 5년 전 발매한 경산아리랑이 담긴 '배경숙의 아리랑' 음반도 국외동포 음악인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국적이 다른 여러 버젼의 경산아리랑도 기대해 본다. 아리랑은 역사적으로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민중들이 공동 노력으로 창조한 결과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결속을 다지는데 기여해 오고 있다. 경산아리랑도 이에 제 값을 해야 할 것이다.(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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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36)클래식의 명가 바흐(Bahc) 혹은 시선(詩仙) 이백에 견주어 "노래한 사람은 나이 칠십여세다. 그의 노래에 우아함과 속됨이 깃들어 있고 맑음과 탁함이 교류하며, 느림과 빠름이 교통한다. 슬픔과 기쁨이 또한 능숙하게 노래들 사이를 유영한다. 춤에도 능하여 그 몸짓에 정중동이 있고 가야금과 퉁소를 연주하는 데도 절도가 깊다. 놀라운 것은 그가 노래하기를 그만 둔지 20여년이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를 위해 향연을 베풀어주었으니 어찌 시를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긴 시를 지어 감상을 남긴다." 무정 정만조가 박덕인에게 바친 시 "노래하는 사람, 박덕인에게 바침(贈歌者 朴德寅)"을 내가 맥락에 맞게 해석해봤다. ‘은파유필’에 남긴 원문은 "歌者七十余歌曲雅俗淸濁緩促哀愉無不極善廢止二十余年爲余如發云又能舞尤工於伽倻琴及吹簫笛"다. 박덕인은 누구인가? 박병천의 작은 할아버지 박종기의 부친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래와 춤과 악기 연주 등은 무속음악의 또 다른 호명이다. 김명호가 박병천에게 바친 헌시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집안 대대로 정중동(靜中動) 혹은 동중정(動中靜)의 음악을 구사해 온 명가(名家)였다는 뜻이다. 박병천의 가계에 대해서는 이미 연구자들에 의해서 소상하게 밝혀졌다. 박주언이 집필한 「진도의 무속」(예향진도)이나 박미경이 집필한 「진도 세습무 박씨 계보와 인물 연구」(한국음악연구 41집)등이 그것이다. 연구에서도 밝혔듯 가계를 온전하게 추적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정만조가 ‘은파유필’에서 언급한 박덕인으로부터 젓대의 명인 박종기를 거쳐 박병천으로 이어지는 가계도가 중심을 이룬다. 박미경은 8대를 거쳐(박병천은 9대조부터 무업을 했다고 말한바 있다) 지속된 음악가 혈통, 독일의 바흐(Bahc)가문에 버금가는 명가라고 정리하고 있다. 박병천의 아버지 박범준이 당시 신청(神廳,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던 무당과 악공의 연합단체)의 대장이었다. 어머니 김소심은 진도에서 굿을 제일 잘한다고 소문나 있었다. 진도의 김, 이, 박, 한, 강, 함, 전, 채, 노, 안 씨 등의 당골 중에 가장 으뜸이었다고도 전한다. 어디 그뿐일까. 광주MBC 얼씨구당 진행을 맡고 있는 백금열은 박병천을 시선(詩仙) 이백에 견주기도 한다. 주지하듯이 이백은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다. 박병천의 구음 시나위 혹은 북춤을 바흐나 이백에 비유하는 이유는, "한(限)도 연(緣)도 혜량할 수 없는데, 사자의 귀성인가 절절함 끝이 없는" 그의 예술에 대한 찬탄이기도 하지만,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음악을 융숭한 격조로 끌어올린 그의 가문에 대한 내 헌사(獻辭)이기도 하다. 가장 천한 이름 당골의 신분으로 어쩌면 가장 격조 높은 음악을 연행했던 이들에게, 나아가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간 민중들이 연행하고 향유했던 음악에 대한 나의 마땅한 태도와 믿음이다. ‘은파유필’은 무정 정만조의 유배시에 난긴 기록으로 박병훈(전 지도문화원장) 발굴본(이미 번역됨)이 있고, 최근 김연갑에 의해 발굴된 이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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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 이강년 의병대장 학술대회 자료집 발간운강이강년의병대장기념사업회(회장 이영범)가 ‘운강학술대회발표논문자료집’을 발간했다. 지난해 10월 15일과 16일 문경문화원 다목적실, 문경새재라마다호텔에서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문경시-문경시의회-경북북부보훈지청-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성균관문경청년유도회가 후원해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엮은 것이다. 책에는 김희곤 안동대학교 명예교수의 ‘문경의 독립운동과 의병’을 시작으로 신진희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사의 ‘이강년 의진을 통해본 동학농민군과 의병의 상관관계’, 이에 대한 신영우 충북대학교 명예교수의 토론문, 강민구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의 ‘의병장 이강년 격문류(檄文類)의 가치와 의미’, 이에 대한 우지영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의 토론문, 김항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의 ‘이강년의진 참여자의 판결양상과 내용’, 이에 대한 최보영 용인대학교 교수의 토론문, 김성진 의암류인석기념관 학예연구사의 ‘독립운동사적지(기념관) 기억과 기념 어떻게 할 것인가-의암류인석유적지(기념관) 운영사례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엄원식 문경시청 문화예술과장의 토론문이 1부 자료로 실렸다. 이어서 이성우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장의 ‘이강년의진에서 활약한 인물의 1910년대 이후 항일투쟁’, 이에 대한 강윤정 안동대학교 교수의 토론문, 심철기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의 ‘운강 이강년의병장 자료현황과 과제’, 이에 대한 원재영 연세대 강사의 토론문, 이광현 성주고등학교 교사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항일 의병운동 서술 현황과 과제-주요 의병장에 대한 서술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조철호 경상북도교육청 중등교육과 장학사의 토론문, 김연갑 아리랑학교장과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의 ‘문경 의병과 아리랑’, 이에 대한 권갑하 시인의 토론문이 실렸다. 부록으로는 ‘격고각도열읍(檄告各道列邑)’, ‘이승재(운강의 큰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통고문’, ‘취정록’, ‘송상도의 기려수필에 기록된 운강 이강년’, ‘유방집’을 실었다. 운강이강년기념관 자료총서 2집으로 펴낸 이 책은 가로 19.8cm, 세로 27.2cm의 크기에 320쪽을 두꺼운 표지로 둘러싸 엮었다. 이영범 회장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밝히는 지표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던 운강 선생이 남기신 의로운 삶의 정신”이라며, "이 민족, 이 나라의 올바른 길을 열어주는 선생의 정신을 문경에서부터 열어 전국으로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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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김뻑국(김진환) 명인 별세김뻑국(김진환, 김뻑국예술단 단장) 명인이 18일 영면하였다. 그동안 노환으로 고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요양병원으로 옮겨 가는 중 코로나19로 운명을 달리하였다. 최근까지 종로 3가 국악로에 김뻑국예술단과 정선아리랑전수소를 운영하며, 원로 국악인 중 한 분으로 좌장역을 맡아왔다. 김 단장은 1937년생으로 향년 87세, 1950년대 중반부터 이창배, 이정업, 김천흥, 박해일 선생으로부터 경기민요, 장구, 춤, 재담을 사사. 1975년 ‘김뻑국예술단’을 창단, 이끌어 왔다. 제자 김순녀(정선아리랑 전승자) 명창은 코로나가 선생님에게도 닥칠 줄 몰랐다며 슬픔을 감추지 못하며, "언제까지나 국악로를 지키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시니 너무 허무합니다”라고 토로하였다. 이혜솔(왕십리아리랑보존회 대표) 명창도 "국악로에 갈 일이 없게 됐네요. 가면 늘 인자하게 맞아주셨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연갑(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은 "늘 선생님의 인물 전기를 써야 한다고 마음만 먹다 기회를 놓졌다”며 "우리나라 해방 후 대중연예사 도서관 하나를 잃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가족들은 21일 저녁 현재, 코로나로 함께하지도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으로 조문객도 맞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화장 처리 순서를 기다리며 어디에 모실지 논의 중이라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향희 여사와 딸 김금순, 사위 김창환, 외손주 둘이 있다. "김뻑국 단장님, 그동안 주신 웃음 오래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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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아리랑 전승 활성화 방안 토론회, 성료10일 오후 2시 공주문화원에서 공주아리랑 전승활성화에 대한 의미있는 토론회가 있었다. 코로나로 3월 1일 개최하던 ‘공주아리랑제’ 대체와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10주년을 기념하여 공주아리랑보존회가 주관한 토론회다. 김정섭 시장, 이종운 의회 의장, 박기영 부의장, 이창선, 오희숙 시의원, 최창석, 이일주 전현직 문화원장, 김두영 예총회장, 문옥배 공주문화재단 대표, 김은수 공주시 팀장, 이건용 금강일보 대표 등이 참석하였다. 김정섭 시장은 축사에서 "공주아리랑은 충남지역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당당히 이름이 올라있다”며 활성화 논의는 시의적절한 논제라고 격려했다. 최석원 전 공주대 총장은 "공주아리랑은 공주의 상장이다. 무열왕릉과 공산성과 같은 걸출한 문화재와 비교할 때 무형문화재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접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라며 행정당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이종운 의장은 "백제문화권 금강수계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공주아리랑은 전통민요의 한 유형으로 나무꾼 소리에 아리랑 가락이 겹쳐져 담백하고 친근한 맛을 자아내는 우리지역 특유의 정겨운 가락”이라고 전승 가치를 제시했다. 발제는 먼저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공주아리랑 가치’, 두 번째는 ‘문경시의 보유자 지정 사례를 통한 활성화 방안’이 발표되었다. 전자는 이주영 교수가 34개 지역 150여종 아리랑의 실상을 검토하고, 공주지역 조사현황을 대비하여 고유 가치와 무형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했다. "공주아리랑이 지닌 지역성을 활용해 지역 지원과의 결합도를 상승시켜야 한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특히 ‘메나리토리 아라리 전통과 육자백이 토리 융합에 의한 전승체’는 다른 지역 아리랑과 차별되는 독특한 아리랑으로서 가치가 크다고 주장했다.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은 단도직입적으로 "공주아리랑의 활성화의 유일한 방안은 ‘보유자-전수자-이수자-장학생-회원’이라는 전승 조직을 시가 마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경북 문경시의 ‘문경시보호문화유산 등 지정 및 지원 조례(제1461호)’ 제정 사례와 이를 통한 송옥자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회장을 보유자로 지정하는 사례를 제시했다. 이는 10대에서 40대까지의 ‘전승 단절’을 우려한 방안으로 공주아리랑 보존의 현실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하였다. 한편, 종합토론에 참여한 이일주, 김은수, 최창석, 이건용의 토론과 객석에서 임덕수 전 전통문화대학 전 교수, 오희숙 등의 의견이 제시되었다. 참석자들은 대체적으로 공주시의 적극적인 지원책으로, 충청남도 지정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공주시 조례를 통한 지정은 현실적 방안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토론회를 주최한 공주아리랑보존회는 "실질적인 활성화 방안이 제시되고, 시 오피니언 리더들이 토론에 함께하여 기대가 크다”고 성과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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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에 대한 말’이어령선생 유해는 오늘 오전 8시 30분 발인되었다.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지며, 영결식은 다음 달 2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엄수된다. 선생에 대해서 ‘앉는 그 자리가 곧 강의실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학다식하고, 달변가였다. 20대부터 60년 동안 130여종의 책을 냈다. 교사·교수, 문예지 발행인, 신문사 논설위원 등 10여 개가 넘는 직함을 거칠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선생은 서울대 국문학과 재학 중이던 1956년 문단 원로들의 권위 의식을 질타한 ‘우상의 파괴’를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발표하며 평단에 데뷔했다. 문학의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모든 언론이 선거 기간임에도 대대적으로 추모 기사를 쓰고 있다. 이 추모사들에는 다양한 시각의 평가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선생의 생전을 기억하고자 한다. # "부고와 함께 우리는 이어령의 생애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령의 지성과 에너지가 우리 사회의 얼마나 큰 부분을 채우고 있었던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오늘날 한류 커뮤니티 1억명에 빛나는 한국 문화가 이 위대한 해석자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해왔는가를 실감하게 된다.”(이인화 문학평론가) # "선생은 우리 문화의 본질과 성격이 무엇인가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파헤치고, 그것이 국제적인 언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 분이다. 선생은 문학·음악·미술 등 각계를 꿰뚫어 우리 문화가 나아갈 길을 정리하고 미지(未知)와의 연결고리를 평생 찾아오셨다. 일본이 축소지향이라면 우리의 반도 문화는 좀 더 열리고 중성적인 여러 가변성을 지녔다는 점을 파헤치고 다듬었다. 애국심이 워낙 강하신 분이었다. 글 마다 마지막에서는 ‘한국 사람’ ‘우리 역사’로 귀결됐다. 언젠가 프랑스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이에 대해 투정했더니, 그 말을 책 광고에 넣으셨더라.”(화가 이우환) # "세상에 대한 훌륭한 카피라이터였다. 이어령 선생은 모든 사람이 궁금해 하는 것을 한마디로 딱 찍어서 알려주고 시각을 열어줬던 분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문화인이었다.(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 "장관 임기 마지막 날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처리 안건 순서를 살짝 바꿔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안을 위쪽에 올려 놓으셨다고 한다. 예술 영재들에게 실기 중심의 교육을 하는 문화부 산하의 전문학교를 설립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어령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5분간 한예종 설립에 대해서 역설한 뒤 설치안이 통과하면서 한예종 설립이 본격화됐다. 한예종은 이듬해인 1992년 개교했다. 이어령 장관이 없었으면 오늘날 손열음·김선욱도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다.”(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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