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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남도국악원, 기획공연 명인전 Ⅱ '흥과 신명' 내달 1일국립남도국악원은 오는 6월 1일 토요일 오후 3시, 대극장 진악당(전남 진도)에서 기획공연 명인전 Ⅱ '흥과 신명' 공연을 펼친다. 이번 명인전은 한국 전통예술의 미학의 정점에 선 명인과 명무를 초청하여 최고의 무대를 선보인다. 이번 공연은 김무길 명인의 '한갑득류 거문고산조', 박양덕 명창의 심청가 중 '주과포혜 대목',유순자 명인의 '부포놀이', 박은하 명인의 '쇠춤', 마지막으로 임수정 명무의 '살풀이'로 특별 구성하였다. 먼저, 깃털로 만든 부포를 장단에 맞춰 다양한 모양을 만들며 노는 '부포놀이'로 무대를 연다. '부포놀이'를 선보이는 유순자 명인은 전라남도무형유산 호남여성농악-포장걸립 상쇠보유자로 현재 사단법인 호남여성농악보존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다음으로, 김무길 명인의 '한갑득류 거문고산조'이다. '한갑득류 거문고산조'는 단아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힘이 느껴지는 산조이다. 김무길 명인은 국가무형유산 거문고산조 전승교육사로 국립민속국악원 원로사범이며, 현재 운상원 소리터(소극장) 대표를 맡고 있다. 이어지는 무대로는, 인당수에 빠졌던 심청이가 환생하여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용과 맹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황성을 향하는 심봉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심청가 중 '주과포혜'를 박양덕 명창의 소리로 만나볼 수 있다. 박양덕 명창은 전라북도무형유산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이며, 남원시립국악단 예술총감독과 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단아한 멋과 비장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살풀이춤'을 임수정 명무가 선보인다. 임수정 명무는 국가무형유산 살풀이춤 및 승무 이수자이며, 경상국립대학교 민속예술무용학과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박은하 명인이 '쇠춤을 선보이는데, '쇠춤'은 "박은하의 춤과 소리(문예회관 소극장, 1992)”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풍물 중 개인놀이에 해당하는 ‘쇠놀이’를 재해석하여 무대화한 작품이다. 박은하 명인은 국가무형유산 남사당놀이 이수자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악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박은하류 설장구보존회 대표를 맡고 있다. 공연은 무료이며, 공연 전후 진도읍사무소와 국악원, 오산초등학교(고군면)를 거쳐 회동(신비의 바닷길) 등 국악원을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제공한다. 또한,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을 위해 11월까지 공연 스탬프 쿠폰 이벤트를 진행하여 참여한 관람객들에게 소정의 기념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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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6)<br> 이희문·송가인·이날치밴드 공연, 신명나는 민요 현장민요의 현장 논밭에서 일하면서 부르던 노동요 그 현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희문, 또 여타 실험들에서 민요가 면면히 살아 있을을 확인한다 굿판·노동판·유희판 배경이 달라지고 노래의 양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경기소리는 이희문에게 보존해야 할, 혹은 발전시켜야 할 그 무엇으로서 가창자에게 의무와 당위를 부과하는 억압 기제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 성악의 음악적 텍스트는 '만들어진 전통'이 빚어낸 페르소나(persona)를 벗고, 원형으로서의 경기소리와 그 텍스트가 꽃핀 문화와 물적 토대, 환경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를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이행대상(transitional object)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지난 6월 24일 한국민요학회 제75차 정기학술대회, 이소영 교수(명지병원예술치유센터)가 발표한 '민요의 공연예술화에 대한 비평적 고찰-이희문의 경기소리를 중심으로'의 한 대목이다. 이소영은 이 발표에서 이희문의 획기적이고 도발적인 실험들이 역설적으로 경기소리라는 민요의 원형적 양식을 재구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내가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을 진행하였기에, 뒷풀이라고나 할까, 의미심장한 몇 풍경을 소환하여 공부자료로 삼는다. BTS보다 더 먼저 해외 진출에 성공했던 사례가 '이희문과 씽씽'이다. 나도 오래전 이 영상을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전통적인 음악 양식을 유지하면서도 복식이나 배경음악 등 파격적인 연출을 통해 전혀 다른 양상의 장르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같은 도발적 실험들은 이날치밴드, 잠비아니, 악단광칠 등을 필두로 주로 판소리계열 전공자들에 의해 실행 중이다. 민요를 포함한 판소리 전공자들이 트로트나 일련의 실험적인 장르 개척에 나서는 현상은 이제 낯설지 않다. '국악의 르네상스'다. 나도 일찍이 수차례 송가인 신드롬을 분석했다. 베이비부머세대의 은퇴로 대변되는 사회문화사적 현상, 특히 국악이니 민요니 우리 것이니 따위의 복고적 환기 현상에 주목했다. 전통이라고 해서 과거를 다루는 것이 아니요 복고라 해서 퇴행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민요의 현장은 어디인가? 이런저런 현상을 통칭하는 용어로 흔히 컨템퍼러리(contemporary)를 든다. 전통이나 기왕의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대의 감각이나 의미로 포착해내는 일련의 행위라는 함의를 지닌 용어다. 어디 음악뿐이겠는가. 한자말은 다르지만 전해서(傳) 통하는(通) 것이 전통(傳統)이라는 저간의 내 주장을 복기해둔다. 전해서 통하지 않는 것은 인습(因習)이고 장차 폐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무당굿으로 알려진 장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동시대는 물론 관련 공동체와 교섭하면서 재구성되어 온 시대적 산물일 뿐이다. 문화 자체가 늘 현대적 변용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이희문의 사례뿐 아니라 몇 가지의 논의들이 중첩되었다. 관련 언급은 차후 기회를 엿보기로 한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전체주제였던 '민요의 현장'이 과연 어디일 것인가였다. 예컨대 논밭에서 일하면서 부르던 노동요의 현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희문의 사례에서 또 여타의 실험들에서 민요가 면면히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굿판과 노동판과 유희판의 배경이 달라지고 노래의 양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심지어 나는 송가인의 트로트를 '남도트로트'로 명명하고 전통이라는 틀 속에서 분석하고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민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지난 내 칼럼에서 여러 차례 다루었기 때문에, 두루두루 참고 가능할 것이다. 노동요의 현장과 이희문의 무대 현장, 여전히 문제는 장르나 양식에 대한 고정관념 혹은 분과학문이라는 틀거리에 대한 편협한 진단에 있다. '무대민요'와 '극장민요'를 넘어 민요의 현장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기억된 현장과 사람들에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 시기 포착했던 기억된 과거만이 민요의 정체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토론을 통해 내가 제안했던 몇 가지를 민요연구의 공론장에 제물로 내놓는다.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품한 민요라거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민요 등은 일종의 무대민요 혹은 박물관민요다. 논밭에 나가 일하는 형식을 취한다더라도 야외무대라는 맥락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기획, 연출, 안무, 소품들이 마련될 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배치, 역할, 무대장치, 조명, 복식 등이 면밀하게 구성된다는 점에서 극장민요다. 미장센을 치밀하게 구성한다는 점, 전통 혹은 원형 따위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연극이라는 점에서 이런 호명을 붙일 수 있다. '극장민요'라는 언설은 기어츠가 창안한 극장국가라는 개념에서 내가 따온 말이다. 19세기 인도네시아 제의정치와 권력구조를 정의한 것인데, 근자에는 북한을 수식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민요는 본래적 배경(context)이 거세되었다. 총체적이지 않다. 문화재 지정이나 전통 발굴을 목적 삼았던 기왕의 민속예술제 따위의 민요는 그것이 갖는 전통적인 양식 예컨대 선율이나 장단 따위의 음악, 노랫말이나 문학적 형식 따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다. 박물관이나 극장에 전시된 혹은 실행되는 민요의 의미가 제한적이다. 그렇다고 기획되고 연출된 장르를 폄하하며 이른바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언설로 그 가치를 훼손시킬 필요는 없다. 단지 이것을 총체적 의미를 지닌 것처럼 여기거나, 컨텍스트적 맥락을 요구하는 것을 비판할 뿐이다. 오히려 변화된 현장을 주목하고 재구성된 장르 속에서 원형적인 것을 추적하는 일이 긴요하다. 문화재라는 용어를 문화유산이라는 용어로 바꾸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책의 절반 이상을 민요(風謠)로 수록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살폈던 <시경>을 여전히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희문과 송가인, 이날치밴드나 악단광칠이 노래하는 곳이 현장이다. 민요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근대의 남상기를 기점 삼는 민중성에 대한 주목, 예컨대 민족, 민속, 민예, 민화, 민요 따위의 개념에 충실했던 일정한 시기를 이미 지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시선은 분출했던 시대적 수요에 대한 향수, 그때 누군가 정해두었던 그 지점에 머무르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근래 교과서에서 국악을 없앤다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다행히 무마된 것같다. 하지만 극장민요와 현장을 혼동하는 착종된 시각이라면, 여전히 잠자는 파도일 뿐이다. 이렇게 질문해본다. 동요를 잃어버린 어린이들의 문제를 의제화하고 우리 사회에 피드백시켰는가? 도대체 그 많던 '어린이'들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패미니즘 등으로 고군분투해온 여성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다루고 그들의 행로에 동행했는가? 혹은 비판했는가? 민요 장르는 사실 남성보다는 여성의 지분이 압도적이고 주도적임을 주목하라. 북한민요가 이미 상당하게 입수되어 있는데, 이를 소재 삼아 남북갈등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그것이 우리 사회를 재건하거나 치유하는 데 피드백되었는가? 민요를 대체하는 실천적 현장에 대해 주목하거나 의제 삼았는가 따위의 질문 말이다. 교과서에서 국악을 뺀다니 화들짝 놀라는 안이함을 나부터 반성한다. 우리 민요 혹은 국악이 지금, 여기, 우리, 특히 다음 세대에 어떻게 기능하고 피드백되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전통을 연구하거나 가르치는 자들의 책무를 아는가.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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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나요당농요상 수상, (사)국가무형문화재 통명농요보존회 안성배 전승교육사지난 12일에 나요당 농요상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제1회나요당농요상'은 경북 예천 (사)국가무형문화재 통명농요보존회 안성배(安成培) 전승교육사가 수상했다. 안성배(1973년 통명 출생)씨는 2020년부터 통명농요보존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농요의 현장과 이론을 겸비하고 있다. 2016년 중앙대학교대학원 국악교육학 석사과정 졸업, 2019년 안동대 민속학과 박사과정(지도교수 한양명)을 수료했다. 안성배 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선배님 어른들 제치고 이런 큰상을 주셔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아마도 큰 책임을 맡기신 것 같다. 농요의 현장과 기록을 남기기 위해 매진해왔다. 더욱 통명농요를 보존 및 계승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이어 "준비하고 있는 안동대 박사학위 주제도 무형유산 '통명농요' 전승활성화에 관한 것이라고 전했다. "10여년 동안 통명농요 전승계보 및 회원 등 보존회 전승활동 아카이브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다행히 150여 분 회원들의 자취를 발굴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잠시 단절된 민속예술이 명백을 이어오다가, 마을제에서 활발하게 계승되었던 민속예술이나 민속연희가 이제는 마을 인구가 줄어들면서 걱정이 앞선다. 광산이 산재해 있는 있는 주변 지역과 다르게 예천은 농업이 주를 이루면서 하늘을 섬기며 마을과 전통을 지켜왔다. 그래서 통명농요 '아부레이수나' 같이 아름다운 노래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고 덧부쳤다. 예천 순흥 안씨 집성촌에서 자라난 안성배씨는 자연스럽게 통명농요를 들으면서 자라났다. 아버지, 작은아버지, 당숙어른, 사장어른 등이 모두 통명농요보존회 단원이다. 1991년부터 대학 동아리에서 풍물활동을 하다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통명농요와 통명농악를 접하고, 아버지가 작고후 보존회에 들어와서 자리를 메꾸웠다. 통명농악 상쇠어른(윤석원, 1937-2008)이 작고 후, 2009년 제50회 한국민속예술축제 경북대표(상쇠)로 출전, 현재 통명농악 상쇠를 맡고 있다. 마을 동아리 단원들을 지도하고 있다. 농요란 농민들이 힘들고 바쁜 일손으로부터 피로를 잊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는 노래로, 들노래 또는 농사짓기소리라고도 한다. 예천 통명농요는 경북 예천군 예천읍 통명리의 농민들이 매년 모심기를 할 때 힘겨운 노동으로 인한 고달픔을 해소하기 위하여 부르는 농요로 조선 중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심기할 때 부르는 '아부레이수나'와 모를 다 심고 논에서 나오면서 부르는 '도움소소리', 논을 맬 때 부르는 '애벌매기소리'와 '상사디야', 논을 다 매고 나오면서 부르는 '방애소리'·'에이용소리',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르는 '캥마쿵쿵노세, 마당논매기, 타작소리인 '봉헤야'가 있다. 모심기소리나 논매기소리가 모두 느리고, 길게 빼는 음을 많이 쓰고, 노래를 메기고 받을 때에 앞소리의 끝과 뒷소리의 앞을 부분적으로 겹치게 불러 이중창적인 효과를 내는 점은 예천 통명농요의 특징이다. 한편 재단법인 나요당 농요상기념사업회는 40여 년을 농요 보존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나요당 이소라 이사장의 단독 출연재산으로 운영되는 재단이다. 농요연구 권위자 나요당 이소라 이사장은 "이 상은 당분간은 농요의 전승,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참된 일꾼을 그동안 보아온 자들 중에서 수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최측은 "정관에는 3년마다 1회 수여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농요기념비가 2026년도에 세워진다면, 함께 제2회나요당농요상 시상도 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이어 "농요기념비를 금년에 세울려고 오석을 보령에서 주문해 놓고 새겨질 글씨도 서예가로부터 받아놓았지만, 보존회 건물이 새로 증축되어서 1회 농요상만 시상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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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제6회 2024 판놀음 별별창극'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제6회 2024 판놀음 별별창극'을 25일, 29일, 6월 1일(토), 6월 8일(토)에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개최한다. 이번 공연은 국립민속국악원의 창극 특성화 전략의 일환으로, 다양한 창극 작품을 통해 전통 판 문화를 부활시키고 문화적 다양성을 확대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 공연은 네 차례에 걸쳐 다양한 창극 작품을 선보인다. 5월 25일에는 소리뮤지컬 '이도'(연출 박선옥)를, 5월 29일에는 가족연희극 '용을 쫓는 사냥꾼'(연출 박헌용)을 만날 수 있다. 이어서 6월 1일에는 판소리음악극 '정조가-어떤 왕 이야기'(연출 박정봉), 6월 8일에는 판소리음악극 'SHE: 그녀들의 이야기'(연출 승은)가 공연될 예정이다. 5. 25.(토) 오후 3시 선보이는 소리 뮤지컬<이도> 세종의 위대한 업적 뒤에 가려져 미쳐 보이지 않았던 인간 이도의 고뇌. 이도는 밤마다 아버지 이방원이 나오는 악몽을 꾼다. 아버지가 칼로 일군 조선에서 어떠한 왕이 될 것인가를 고민한다.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겪는 백성의 사연을 듣게 된 이도. 그 길로 저잣거리에 나가 자신이 찾아 헤매던 팔딱팔딱 살아있는 말을 듣게 되지만 글이 없어 고통받는 백성의 모습을 목격하고 절망하게 된다. 이도는 백성들을 위한 한글 차제를 서두르는데 또다시 꿈에 나온 아버지가 이도를 꾸짖는다. 아버지는 글을 알게 된 백성이 왕권에 도전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도는 이에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어느새 왕의 아들이 아닌 온전한 왕이 된 자신의 두려움과 마주한다.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백성을 힘으로 누를 것이냐, 백성과 힘을 나눌 것이냐. 새로운 조선은 이도의 손끝에서 만들어질 것인가. 백성들은 칼 대신 마음을 내미는 이전과 다른 왕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도> 이야기를 통해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사회에 숨어있는 신분에서의 평등한 관계, 가족 간의 사랑과 화목 등 시대를 초월한 공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5. 29.(수) 오후 1시 30분 가족 연희극<용을 쫓는 사냥꾼> 용을 잡아 큰 부자가 되려는 사냥꾼들과 능청스러운 용의 속고 속이는 황당 모험기. 옛날 어느 평온한 마을에 사냥꾼들이 들이닥친다. 스무 명이 넘는 자식을 키우고자, 장가갈 밑천을 마련하고자, 노부모와 늦둥이 동생을 부양항고자, 서당을 나와도 일할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각자의 사연을 지닌 주인공들이 아무도 잡지 못한 용을 잡아 부자가 되어 팔자를 고쳐보겠다며 용을 찾으러 떠난다. 용이 산다는 마을에 도착한 사냥꾼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며 용을 찾는다. 그러던 중 한 친절한 한량이 나타나 사냥꾼들을 이끌며 함께 용을 잡자고 제안한다. 사냥꾼들은 사투 끝에 용을 잡아 시장에 팔려고 하지만 용은 마을에 비를 내려주고 전염병을 막아주는 고마운 존재이기 때문에 용을 도살하면 마을의 농사와 주민들이 곤란에 빠질 위기에 처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민한다. 마을 사람들은 사냥꾼들에게 용을 풀어주도록 요청을 하고 용은 고민하는 사냥꾼들에게 함께 용을 잡으러 여행을 떠나자며 솔깃한 제안을 한다. 과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가족 연희극 '용을 쫓는 사냥꾼'은 한국의 서사와 전통 요소들을 바탕으로 모험, 공동체, 인간과 용의 공존이라는 한국적 판타지 세계를 공연에 담아보고자 창작하였다. 전통연희, 판소리, 구전노동요, 연극적 요소 등 다양한 볼거리를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전하고자 한다. 6. 1.(토) 오후 3시 판소리 음악극<정조가-어떤 왕 이야기> 개혁군주 정조 이산이 그리던 세상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조선 제22대 임금이자 화성행궁을 축성한 개혁군주 정조가 그리던 세상과 사랑했던 여인 성덕임에 대한 이야기로 판소리의 연극적, 음악적 특성에 현대음악을 더해 창작한 판소리 음악극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부터 임금으로 즉위하는 순간까지 존재 자체의 위협을 받았으나 즉위 이후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해 왕권을 강화하고 탕평정책을 추진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그 밖에도 지방인재 및 시얼의 등용 등을 추진하였고 화성행궁 축성, 현륜원 행차로 개혁의 방점을 찍으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개혁은 역사 속으로 퇴장하게 되었다. 작품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의 즉위를 굿 형식으로 담아낸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대목과 더불어 의빈 성씨 성덕임과의 사랑과 이별을 그려낸 '외로운 정조', '무정하게 흐르는 마음 유정할 곳 하나없네', '허망하게 떠나가네' 대목을 비롯해 정조의 정치적 소신과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정유역변', '왕 노릇', '탕평' 등 총 열한 개 대목으로 구성됐으며 앞서 열거한 정조의 위대한 업적 이면의 조금 더 인간적인 이산을 만나볼 수 있다. 6. 1.(토) 오후 3시 판소리 음악극<SHE: 그녀들의 이야기> 시대의 상징이 된 역사 속 여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전주판소리합창단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판소리에 합창을 접목시키는 콘셉트로 다양한 무대를 통해 대중들에게 우리 소리를 보다 친근하게 선보이는 단체이다. 오랜 시간 전주판소리합창단이 관객들을 만나왔던 판소리의 주요 요소인 창, 아니리(말:대사), 너름새(몸짓:움직임과 무용) 등의 무대 언어를 보다 적극적으로 더하여 만들어 낸 작품이 <SHE: 그녀들의 이야기>판소리 음악극이다. 춘향, 논개, 진채선, 정읍사의 무명의 여인, 그리고 매창이 저승에서 자신들의 환생을 거부하고 소멸을 택하게 되는 전개로 이어지는 이 작품은 이승과 저승의 각각 다른 차원의 시공간을 다른 언어로 구현한다. 같은 뜻을 가진 언어일지라도 각각의 다른 지역과 문화권에서 문자, 발음 등을 갖게 되고, 이것은 그 지역 사람들의 사유나 인식 체계, 나아가 그 지역의 문화와 관습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작품 속에서 우리는 '소리'를 주요 인물들의 무대 언어로 표현한다면, 저승의 언어는 현대무용을 활용하여 표현한다. 각 공연은 60분에서 100분가량의 다채로운 무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토요일 공연은 오후 3시에, 수요일 공연은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한다. 다양한 창극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창극의 매력과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석 무료, 국립민속국악원 누리집, 전화(063-620-2329)예매 가능. 국립민속국악원 이종혁 공연담당자는 "이번 공연을 통해 전통문화의 가치와 창극의 매력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민속예술의 활성화와 대중의 문화적 향유를 도모하고자 한다”며 또한, "지역사회의 문화 활성화와 전통 공연 예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 관객들에게 잊지 못할 문화 경험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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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문화연구회, '고향의 봄' 국악한마당 개최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 주최, 한국전통문화연구회(이사장 황승옥) 주관으로 오는 24일 6시 광주전통문화관 너덜마당에서 '고향의 봄' 주제로 국악한마당을 무대에 올린다. 첫 순서로 민요 김매기노래.꽃타령.봄노래.본조아리랑으로 첫막을 연다. 김매기노래는 논이나 밭의 김을 매며 부르는 노동요이다. 김매기노래에 이어 화창한 봄날에 어울리는 꽃타령과 봄노래, 본조아리랑까지 이어서 노래한다. 이경진, 김유빈, 고혜수, 최현희, 이다은, 이하랑, 반가연, 김하영, 박라우, 주아린이 무대에 오른다. 장단 김태영 두번째는 정선옥의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선사한다.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는 죽파 김난초에서 한성기 등으로 전승된 가락을 담고 있다. 장단은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세산조시로 구성되었다. 세번째는 고혜수의 판소리 춘향전의 눈대목 '쑥대머리'를 선사한다. 퓨전국악 쑥대머리는 뮤지컬 'Kiss The 춘향'의 OST로 국창 임임방이 즐겨부르던 사랑가 중 쑥대머리 대목을 재탄생시켰다. 파이노 선율과 애절한 노래가 심금을 울린다. 네번째는 '시나위합주'를 선사한다. 시나위는 무속음악으로부터 유래된 우리나라 전통기악곡으로 남도민요 선율을 기본으로 각종 악기가 허튼가락을 연주하는 곡이다. 악기구성은 피리,젓대,해금,장구,징이 기본이나 다른 악기도 함께 참여하기도 한다. 이번 무대에서는 해금,아쟁,대금,피리,거문고,가야금등 다양한 악기가 참여하여 더욱 풍성하고 신명나는 무대를 선보인다. 해금 임관하, 아쟁 황승주 ,대금 손한별,피리 위재영, 거문고 위은영, 가야금 정선옥, 장단 김태영. 다섯번째는 한명선의 '진도북춤'을 선사한다. 진도북춤은 전라남도 진도지역에서 발생된 춤으로 진도북을 매고 양손에 북채를 쥐고 연주하며 춤춘다. 풍물의 흥겨움과 신명과 더불어 아름다운 춤사위은 진도북춤의 큰 특징이다. 여섯번째는 조통달 명창이 판소리 '수궁가' 중 '좌우나졸'을 선보인다. 고수 김태영 조통달 명창은 세습예인 출신으로서 평생을 국악과 판소리에 대한 남다른 에술적열정과 애정으로 국악발전에 크게 이바지 해 온 인물이다. 시원스런 발성과 우렁찬 성음 관객을 사로잡는 걸출한 재담으로 수궁가 중 좌우나졸 대목을 선보인다. 휘날레에는 남도민요의 꽃 '육자배기'가 선사된다. 육자배기는 전라도지방을 중심으로 한 남도민요이다. 남도민요 특유의 꺾는 목, 떠는 목을 다양하게 구사하여 한스럽고 서정적임과 동시에 강인함과 구성짐이 느껴지는 남도민요를 대표하는 곡이다. 소리에는 황승옥, 이경진, 김유빈, 고혜수, 최현희, 이다은, 연주에는 해금 임관하, 아쟁 황승주,대금 손한별, 피리 위재영,거문고 위은영,가야금 정선옥, 고수 김태영. 예술감독을 맡은 황승옥(광주광역시 무형문화유산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이사장은 "예향의 고장 광주에서 남도민요, 판소리, 진도북춤 등 남도지역에서 향유하고 있는 대표적 민속예술을 선정하여 이번 무대에 올린다. 마치 오랜만에 그리운 고향길을 가는 것처럼 남도민의 정서를 담아내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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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문화연구소 한국전통춤 재현, '한국예인열전-기록편' 23일풀뿌리문화연구소(대표/강신구)가 오는 23일 오후 7시 한국문화의집에서 '한국예인열전-기록편' 공연을 개최한다. 대한무용협회, 한국전통춤협회가 후원한다. 주최측은 "잊혀지거나 사라져 가는 우리 민속예술의 뿌리를 재현하는 이번 공연은 우리 선현들께서 지녀 온 우리의 소리와 춤, 풍류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우고자 마련하는 무대"라고 전했다. -제1장 / 여민동락- 태평무(강선영류)/ 김향숙(국가무형문화재92호이수자, 아리랑국악연구소장) 살풀이춤(이매방류)/ 박금희(파란천사예술단장, 재일무용가, ‘무희’대표) 연지도가무(한량무)/ 홍병철(경기도무형문화 재8호 승무, 살풀이 이수자) 열반환상 / 박국자(국가무형문화재27호 승무 이수자, 한마음병원이사장) 살풀이춤/ 오미자(국가무형문화재27호승무,97호 살풀이춤 이수자,대통령상 수상) -제2장 / 상생동락- 풍월도/ 정선자(한국국악협회영등포지부 이사, 농화국악경연대회 대상) 가사호접 / 정현숙-(마하무용단장, 경기도무형문화 재8호 승무, 살풀이 이수자) 도살풀이춤/ 김현주(국가무형문화재97호 도살풀이 전수생,부안농악,설장구 사사) 평강검무/ 오미자(한밭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무형문화재27,97호 이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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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80)<br> 최희선 명무의 '달구벌입춤'입춤 입춤은 춤의 일가를 세운 명무名舞들이 처음 춤을 접하는 초보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춤이다. 입춤은 명무들이 추구하는 예술세계를 근거로 구성하였기에 각기 다른 다양한 양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와 같이 입춤은 춤의 입문하는 과정에서 학습하는 기본춤이다. 입춤은 한자어에 따라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입춤[立舞]은 춤을 바로 세운다, 입춤[入舞]은 처음 춤의 길로 들어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입춤은 춤의 토대를 만드는 중요한 춤이다. 즉, 궁중정재에서 춘앵전을 잘 추면 다른 정재도 잘 출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입춤은 장단·의상·춤의 순서가 체계적으로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러운 호흡의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감정을 표출한다. 입춤은 장단에 따라 맺고 푸는데, 이때 매 박자마다 악센트가 들어가는 강약과 함께 그 안에서 엇박의 리듬을 만들어 엇박춤을 추는 것이 독특하다. 최희선 최희선(1929~2010)은 대구 태생으로 대구 무용예술 발전에 중추적 역활을 한 대구를 대표하는 명무이다. 10세 후반 대학교를 다니며 대구 약전 골목을 오가며 보았던 기생들의 춤과 소리에 끌린 최희선은 춤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웠고,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웠다. 한영숙에게 전통춤을 사사받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다시 배워 달구벌 입춤 명무로 유명하였다. 일제강점기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에서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다. 1940년 전후로 설립된 대동권번에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58년에는 제1회 민속예술제전에서 박지홍을 도와 발굴한 하회별신굿으로 대통령상을 탔다. 그는 전통춤을 지켜오면서 창작활동도 부지런히 했다. 조용자와 장추화를 스승으로 한 신무용은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을 거쳐 최희선이 창단한 한길무용단에서 최희선 브랜드의 창작춤으로 피어났다. 1957년 문화극장에서 발표공연을 가지며 전통춤과 창작품을 몰두했다. 1958년에는 제1회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스승 박지홍과 함께 하회별신굿탈놀이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 외에도 경상북도 문화상 수상, 대한민국국민훈장 목련장, 아시아드 문화예술축전 안무상, 연기상, 대한민국무용제 대상 등을 수상했다. 또한 1970년 서울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해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꾸준한 창작활동을 하며 후학 양성과 대구 전통예술 발전이 앞장 서 왔다. 현재는 최희선의 큰제자 윤미라가 달구벌입춤보존회 회장을 맡으며 '달구벌 입춤'을 전승하고 있다. 옛 대구의 멋스런 정서가 녹아 있는 박지홍제 최희선류의 달구벌 입춤이라는 계보를 계승하고 있다. 최희선 약력 1929년 경북 대구 출생 최희선달구벌입춤보존회장, 한국무용협회 고문, 한길무용회 대표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 1950년 대구에서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활동 1957년 문화극장(구 국립극장)에서 첫 무용발표회 1958년 제1회 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박지홍과 함께 하회별신굿 탈놀이 복원) 1959년 서울 원각사에서 전통춤과 창작춤 발표회 1970년 서울에서 무용연구소 개소 1973~82년 국립극장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1974~84년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이사 1984년 한길무용단 창단. 창작무용 ‘춤의 내력’ ‘어느 자서전’ ‘물꽃’ ‘바람꽃’ ‘물이랑 삶이랑’ 발표 1986년 아시아드 문화예술축전에서 ‘물꽃’으로 안무상·연기상,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바람꽃’으로 대상 수상. 1988년 달구벌 전통무용연구회 조직. 박지홍류 전통춤 정리 및 전수 1995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보집 ‘최희선 달구벌 입춤 무보’ 수록 1998년 최희선 춤50년 기념공연(국립국악원 예악당) 2005년 국립민속박물관 초청공연 수상 제1회 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1958년) 제6회 경상북도 문화상(61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73년) 아시아드문화예술축전 안무상·연기상(86년) 한국예총 예술문화대상(93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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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2024년도 주요 공연 사업계획 발표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새로운 전략과 비전을 바탕으로 한 2024 주요 공연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주요 사업 내용은 ▲창극 및 민속음악 특성화를 통한 기관 경쟁력 제고, ▲일상에서, 누구나 누리는 국악 환경조성 및 저변 확대, ▲민속악 진흥을 위한 연구 기반 조성, ▲관객 개발및 공연 서비스 품질 개선 등이다. 창극과 민속음악의 특성화를 통해 기관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대표 창극 작품을 제작하고, 공모를 통해 선발된 단체에 창극 공연의 기회를 제공해 민속악의 거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예정이다. 2023년 대표작품 '산전수전 토별가'를 부산원과 남도원에서 각각 2월과 3월에 공연할 예정이며, 어린이 대상 창의력 증진 작품을 11월에 예원당에서 선보이고, 공모를 통해 선발된 단체에게는 5월부터 6월까지 예원당과 예음헌에서 창극 공연 기회를 제공한다. 어린이 명인 및 명창을 위한 '꿈나무무대'를 예음헌에서 2월에 4회 개최하고, 민속악 관련 예술인과 단체를 초청하는 '민속악 축제'를 예원당에서 9월에 2회 개최하며, 전통 민속춤을 선보이는 '무용단 정기공연'을 예원당에서 6월에 1회 개최한다. 공모를 통해 선발된 소리꾼들에게 판소리 완창 기회를 제공하는 '소리 판'을 예음헌에서 연중 5회 진행하고,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과 사설집을 제작한다. 일상에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국악 환경을 조성하고 저변을 확대하고자 다양한 상설 및 기획 공연을 추진한다. 더불어 K-문화관광 거점을 강화하기 위해 해외 및 국내 유관기관과의 교류 및 협력을 추진하며, 모든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국악치유 체험프로그램과 어린이 및 청소년을 위한 국악 체험교실을 운영한다. 기획 공연으로는 '고택, 고백Go Back', '달리는 국악무대', '토요국악나들이','어린이날 기념공연', '국악콘서트 다담' 등이 있고, 상설 공연으로는 '광한루원 음악회'가 있으며, 명절과 송년을 기념하는 공연으로는 '새해맞이 설공연', '추석 공연', '송년 공연'이 있다. 또한 취약계층을 위한 '무장애극 제작 및 공연'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덩덕쿵 국악놀이터'도 열린다. K-문화관광 거점 강화를 위해 해외 및 국내 유관기관과의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며, 이를 통해 전라권 지역 순회 공연, 지역축제와의 협력을 통한 지역사회 상생을 위한 전통예술 공연, 국제 교류 공연(일본, 프랑스, 호주, 필리핀,몽골 등), 그리고 소속원 간 대표작품 순회공연을 진행한다. 국악을 널리 퍼뜨리고 국악 향유층을 확대하기 위해 수요자 중심의 국악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으로는 국악치유 체험프로그램 '국악 명상', 어린이를 위한 '틴틴창극' 교실, 청소년을 위한 '국악세상'과 '즐 거운 국악산책', 그리고 중장년층을 위한 '청출어람' 국악실기 강좌가 제공된다. 민속악 진흥을 위한 연구 기반 조성을 위해 전북지역의 민속예술을 조사하고 구술채록을 진행한다. 또한, 시조 명인 정경태의 저술 '국악보' 발간을 준비하고, 전시 해설을 통해 국악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고자 한다. 지역 민속예술 연구와 관련하여 전북지역 민속예술 조사와 민속음악학술자료집 발간을 통해 기초 연구자료를 제작하고 있다. 전북무형문화재 전통공연예술종목(27건)에 대한 작고 보유자 및 보존회 소장자료를 수집하고, 민속음악 학술자료집으로는 시조 명인 정경태의 저서 '국악보'를 발간 준비 중이다. 국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교양을 심화하는데 기여하기 위해 무장애 전시를 위한 해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관람객이 국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는 전시 해설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또한 관람객의 편의를 제공하고 국악 체험을 위한 공간을 조성하여 교육 및 체험 사업과 연계하여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전시 해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공연 품질을 제고하기 위한 평가위원회와 모니터링단 운영하고, 공연 관람 서비스 품질 개선을 위해 발권시스템과 티켓부스 환경을 개선하며, 안내원 운영을 통한 관람객 서비스를 강화할 계획이다. 국악 공연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공연평가위원회와 민간 공연평가 모니터링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속단체의 예술역량을 향상시키고 다양한 관람객의 의견을 수렴하여 공연 만족도를 평가하고 개선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기관 및 사업 홍보를 강화하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뉴미디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다양한 온라인 게시처와 공식 SNS 계정을 활용하여 공연 홍보를 다양화하고 새로운 관객을 유치하며, 오프라인에서는 지역 신문사 및 유관기관과 협조하여 보도자료를 제작하고 홍보물을 배포하고 있으며, 또한 기관, 국악연주단, 상설공연 등 사업을 홍보하기 위한 영상을 제작한다. 김중현 원장은 "2024년에도 국립민속국악원은 다양한 공연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국악의 저변을 확대하고 국악의 가치를 더욱 널리 알리는 데 주력할 것"이라며 "이러한 노력은 전통의 계승과 혁신적인 접근을 통해 국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더 넓은 관객층에게 국악의 매력을 전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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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동포회 '송년의 밤'지난달 30일 문산읍 당동리에 정주하고 있는 파주사할린귀국동포회(회장 이화일)가 주관하는 '송년의 밤'이 문산읍 프리마 루체 2층 연회장에서 개최되었다. 40년만에 맞는 대설주의보에도 불구하고 총 100여 명이 참가하여 즐거운 '송년의 밤'을 보냈다.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대한적십자사봉사회 파주지구협의회 연규희 회장, 민족통일 파주시협의회 허애경 회장, 민족통일 파주지구협의회, 파주시 적십자사 봉사회, 박정 국회의원, 파주시의회 이익선 의원,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 등이 참가했다. 전국 26개 지역 서울, 인천, 춘천, 안산, 화성, 김포, 오산, 파주, 남양주, 양주, 원주, 청주, 음성군, 제천, 아산, 천안, 서천군, 부산, 김해, 양산, 고령 등에 3천여 명 사할린 동포 어른들이 살고 계신다. 사할린특별법 조례 확장을 위해 힘쓴 파주시의회 이익선 의원은 "2023년까지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분들만이 법적으로 사할린 1세로 인정을 받아야만 한국에 귀국할 수 있었다. 새해부터는 사할린특별법이 확장되어 귀국할 수 있는 가족의 수가 사할린 1세와 그 배우자에서 다수의 자식들과 그 배우자로 완화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현재 파주시에는 150여 명의 동포가 문산 당동리와 선유리에 살고 있다.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회장인 권경석씨는 고르바초프 방한 시 동시통역을 맡았고, 부회장을 맡은 인무학씨는 모스크바 대학 컴퓨터정보학 석좌교수를 역임한 인재이다. 전 파주시사할린동포회 김영태 회장은 모스크바 체육대학 부총장을 역임하고, 농구감독의 경력을 가졌다. 파주 당동리에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우수상을 3번이나 받은 박승의(전 사할린국립대학 교수)교수와 올해 우수상을 수상한 인무학 박사가 살고 있다.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가 '사할린아리랑'사설을 낭독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내가 왜 왔나 내가 왜 왔나/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사할린이 좋다고 내 여기 왔나/일본놈들무숩어 내 여기왔지 우리 조선은 따뜻한데/그 땅에 못살고 내 여기왔나 우리 영감님은 왜 왔다던가/나만 혼자두고 자기만 갔네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한 많은 남화태(사할린) 징용 왔네 철막 장벽은 높아만 가고/정겨운 고향길 막연하다 정치 개방 후 햇빛은 밝고/우리의 살림엔 경사가 많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이날 국악 공연을 해주기로 한 서울, 용인, 동두천 3팀은 대설주의보로 교통이 두절되어 차량운행을 못해서 도착하지 못했다. 다행히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이 봉산탈춤을 선사했다. 탈춤을 마치고 탈을 벗자 탄성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오늘 처음으로 눈앞에서 탈춤을 본 동포들이 전통 민속예술 탈춤의 신명을 공유한 마당이었다. 의정부시 삼정제빵소에서 사할린동포들과 '평화의 빵'을 나누었다. 권경석 회장과 회원들이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이화일 회장은 "모두 모여서 건강을 빌며 밝아오는 새해를 맞이하는 뜻 깊은 송년의 밤이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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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동포와 함께한 '향두계놀이', 그리고 유지숙과 박애리 명창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주최하고 향두계놀이보존회(이사장 오현승)가 주관하는 서도소리극 '향두계놀이'가 2일 경기도 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향두계놀이’는 북한 평안도에서 전해지는 두레정신을 담긴 마을공동체 결속을 다지는 전통놀이 연희극으로 서도소리와 평안도 지역 고유한 대동놀이를 대표하는 민속놀이다. 1966년 전국민속놀이대회에 나가면서 민속예술성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이날은 향두계놀이보존회는 경기도 양주시와 파주시에 정주하고 있는 사할린동포 100여 명을 초대한 특별한 공연이었다. 갑자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주 율정마을 시민들이 1층 객석이 꽉 채웠다. 마을의 안녕과 풍작을 기원하는 마을제 길놀이, 북청사자놀음, 고유제 무대가 오르기 전 농악대가 객석 뒤에서부터 좌우로 갈라져서 '지신밟기'를 펼치는 길놀이를 보여주었다. 이 나라 이 땅을 지키는 동서남북 신에게 공연의 시작을 알리고 안전과 태평을 기원드리는 마당굿을 올렸다. 꽹가리, 징, 장구, 북소리가 높이높이 메아리쳤다. 이어서 눈처럼 하연 사자탈을 쓴 연희자들이 나타나서 북청사자놀음이 시작되면서, 곧이어 꼭두쇠의 익살과 재담으로 '향두계놀이'의 시작을 알렸다. 400여 명의 청중은 꼭두쇠가 가르쳐 준 추임새 학습을 받고 '잘한다' 하며 맛깔스런 재담에 우뢰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본 무대가 시작되었다. 무대와 객석의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잠시후 무대 왼쪽에 조명이 차차 밝아졌다. 유지숙 보유자가 나타나서 무릎을 꿇고 마을을 지키는 당목 아래에서 정화수를 바친다.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우고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고축(고유제)를 올렸다. 무녀로 분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강과 풍작 및 가정의 다복을 축원하는 신앙적 의례를 재현했다. "일년은 열두달 삼백은 예순날/ 황도 길일 좋은날 잡아서/ 오늘 열손 모아 비나이다" 서도소리의 백미, 수심가, 긴아리, 자진아리 서도소리는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서도 지방)에서 전승되던 노래를 말한다. 민요·선소리·잡가 등을 포함한다. 널리 알려진 민요로는 평안도의 ‘수심가’ ‘긴아리’ ‘자진아리’, 황해도의 ‘자진염불’ ‘긴난봉가’ ‘자진난봉가’ ‘몽금포타령’ 등이 있다. 얇게 떠는 목을 구사하면서 콧소리가 특징이다. 긴아리는 빠른 한배의 '자진아리'와 짝으로 불린다. 현재 서도소리 보유자로 지정된 김광숙과 이춘목 명인, 전승교육사 유지숙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수심가'는 남도민요의 대표적 '육자배기' 와 쌍벽을 이루는 민요이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아리랑만큼 사랑하고 애창하던 구전민요이다. 그래서 서도소리의 백미라고 불린다. 유지숙 명창의 수심가는 한번 들으면 다시 한번 더 듣고 싶어진다. 애절함이 극치에 달하면서 치유가 되는 '노래의 힘'이 느껴진다. 공연이 끝나고 나가면서 사할린 동포들이 이 곡의 제목을 물어보았다. 명곡은 시대를 넘나들고 공간을 초월한다. 일제감점기 음반과 방송을 통해 전국 랭킹 1위 유행가가 바로 수심가이다. 1926년 영화주제가 '아리랑'이 나오기 전까지 민중이 애창한 민요이었다. 인생 일장춘몽(一場春夢)이요/ 세상 공명(功名) 꿈밖이로구나 생각을 하니, 세월이 가는 것/동달아 나 어이 할거나(수심가) 향두계놀이보존회의 각 지역 지부장과 경·서도소리로 활동하는 이들이 모여 서도소리극을 올렸다. 풍물 반주는 꽹과리(1)·징(1)·장구(2)·북(1)으로 구성된다. 향두계놀이 전 과장은 마당 준비과정, 입장, 도리깨질소리. 모심기 준비 과정, 모찌기 및 모심기, 논두렁 밟기, 초벌 논매기, 새참 가래질 소리 및 연기 피우기, 만벌(세벌) 논매기,풍년 기원 두레놀이 12과장이다. 제1장 '씨앗 뿌리기'과장에서 '긴아리'에 이어 '자진아리'가 불려진다. 야 조개는 잡아서 저절 절이구/ 가는 님 잡아서 정들이잔다(긴아리) 아이고 아이고 성화로구나(후렴) 요놈의 종자야 네 올 줄 알고 썩은/ 새끼로 문 걸고 잤구나 일하든 오금에 잠이나 자갔디 /재넘어 털털 뭘하래 왔음나 울넘어 밖에서 꼴베는 총각아/ 눈치나 있거든 이떡을 받아라(자진아리) 제4장 모내기하는 일꾼들이 새참과 막걸리로 지친 몸을 쉬면서 향두계놀이를 시작한다. 서도소리 ‘청춘가, 개성난봉가, 양산도, 개타령 등이 불린다. 박연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 든다 에 에헤야 에헹에루화 좋구 좋다/ 어럼마 디여라 내 사랑아(후렴) 월백설백 천지백하니 산심/ 야심이 객수심이로다(개성난봉가) 전 회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서도소리가 담긴 '향두계놀이'를 신명과 흥으로 표출시켰다. 특히나 어린 학생들이 신명나는 춤사위와 함께 빠르게 내지르는 청아하고 맑은 서도소리는 잠시나마 궂은 세상살이를 잊게했다. 국악인 박애리의 빛나는 진행 국악인이면서 방송인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박애리 명창의 맛깔스런 평안도 사투리로 진행하는 역활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공연이었다. 아직 전 국민 대상으로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한 국악은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제한적 접근성이 문제인데, 박애리는 이러한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국악 장르는 갈래가 복잡하고 곡명이나 작품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는 쉽지않다. 해설하는 내용이 명확해야 전달력이 높아진다. 빛나는 진행 솜씨로 향두계놀이 공연을 매끄럽게 마무리했다. 정확한 발음과 발성으로 청중을 집중시켜서 다음 나오는 작품의 진가를 높여주었다. 타고난 말솜씨가 재담가 수준이어서, 시원시원한 평안도 사투리 실력은 관중들의 집중력을 배로 증가시켰다. 즉흥적 대응과 교감이 느껴졌다. 그만큼 철저한 준비를 해 온 성의가 빛을 발했다. 맨 뒷자석 관중들은 아예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국악인이면서 문화매개자의 역활을 톡톡히 보여 주었다. 특히 무대에서 내려와서 한바퀴를 돌면서 가슴을 울리는 목소리로 "오늘 아주 특별한 손님을 모셨습네다. 객석 불을 밝혀주시라우요. 안녕하십니가요. 사할린에서 오신 동포 어르신들 어디에 계시나요. 손을 들어보시라우요. 우리 어마니 아바지." 하고 사할린 동포들을 찾아가서 눈을 마추치고 악수를 하고, 머리를 맞대고 인사를 드려서 폭풍 박수를 받았다. 방송인 박애리 명창은 이미 사할린 동포들에게도 트롯트 가수들(?)의 인기를 넘나드는 스타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어느 무대에서도 소통이 가능한 전무후무한 국악전문 진행자이면서 차세대 국악을 보증하는 스타이다. 오늘 무대는 성공적이다. 이미 꽉찬 관중석의 뜨거운 박수와 무대에 꽂쳐버린 눈길이 말해준다. 오늘 박애리 명창이 역시 기대 이상으로 단단히 한 몫을 하고도 남았다. Q.유지숙 회장님 '향두계놀이' 전국 순회공연을 하시면서, 지금은 북한에서 잊혀진 북녁의 '서도소리'를 극으로 만들어서 알리고 계시는데, 많은 보람이 있으시죠. A.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라는 무대라고 생각하고 우리 모두 열심히 불렀습니다. 특히 오늘은 더욱 뜻깊은 공연이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이 70년 만에 귀국해서 한국에서 사신지가 15년이나 된다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북쪽에 본관을 두신 실향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순회공연 하는 지역과 연계해서 사할린 동포들을 모시고 싶습니다. 다음 강화도 공연에는 인천에 사시는 동포들을 모시고 싶어요. 유지숙 명인은 2018년 광복절 사할린강제징용 80주년 남·북·러 합동공연을 위해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연희자와 함께 남한 국악인을 대표해서 사할린 무대에 섰다. 당시 필자도 사할린주한인협회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는데. 공연을 시작하기도 전, 무대 뒤에서 유지숙 명인을 만나서 "오늘 아리랑을 부르시나요" 하고 물으니, 첫 곡 선정 변경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아리랑메들리에서 북한지역 민요 '서도소리'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음악은 빠른데 서도소리 중 무슨 곡을 불러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당시 2시간 동안 진행된 공연을 통해 러시아 동포들이 좋아하는 장르의 노래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오늘 공연의 진객, 사할린동포들은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성장해서 차이코프스키 음악과 발레를 보고 자란 세대이다. 주말이 되어 공연을 보러가는 날에는 넥타이를 메고 붉은 장미꽃 한송이를 들고 가는 것이 일상이다. 주로 1941년에서 1945년 사이 출생한 사할린1세(법적)이다. 빠른 음악과 스텝에 익숙한 청중으로 살아오다가 15년 전에 한국에 귀국한 사람들이다. 전통국악보다는 트롯트에 익숙한 청중이다. 그래서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Q.권경석 회장님, 오늘 북녁 사람들이 애창했던 서도소리극 '향두계놀이'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A. 태어나서 서도소리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청아하고 맑은 소리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예술성이 너무나 뛰어난 민족입니다. 이렇게 작은 땅에 살면서 북쪽과 남쪽의 소리가 이렇게 다르다니, 전 세계를 매혹시키는 한국 가수들의 뿌리는 바로 전통의 소리에서 나왔다는 게 실감납니다. 유지숙 명인이 부르는 서도소리는 북녁 사람들의 심장 소리라고 하면 표현이 될까요. 누가 들어도 유지숙 명창의 소리는 하늘이 낸 소리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전통민요라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잊혀져가는 전통의 소리를 남한에서 보존하고 계승하고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오늘 품격 높은 공연을 선사한 향두계놀이보존회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오늘 박애리 명창이 사할린 동포들을 무대에서 소개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잊지못할 공연이 될 것 같습니다. 권회장은 사할린에 태어나서 북한에 유학을 가서 3년간 공부를 하고 모스크바에서 살다가 한국에 영주귀국했다. 대부분 사할린 동포들은 러시아에서 평생 유럽음악을 접하고 온 분들이다. 아마도 우리 전통민요는 다소 생소한 장르이지만 오늘 무대에서 'K-한류'의 원천을 맛보고 가셨으리라고 본다. 공연장을 나오면서 내내 오늘 공연을 통해 우리 전통 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라고 한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오늘 공연이 사하린1세 가슴에 잠재되어있는 한민족 밑바닥에 깔린 심성을 건드렸나보다. 우리 민족의 높은 예술성을 실감하고 가슴에 담아갔다고 본다. 전날 전 출연자가 하루종일 리허설을 하면서 이 무대 동선을 익히고 조명 및 음향이 맞아 떨어져서 공연의 완결성을 이끌었다고 본다. Q. 최나타샤(사할린아리랑합창단장) 회장님, 오늘 공연에서 어떤 노래가 가장 가슴에 남나요. A. 작곡가인 남편하고 같이 못와서 아깝네요. '수심가'라는 노래가 가슴을 울립니다. 슬프고도 아름답다고 할까요. 집에 돌아가서 유지숙 명창의 서도소리 공연 동영상을 찾아서 남편과 같이 보고 나니 "우리나라 젊은이들 노래 잘하는 세계적 스타가 앞으로 계속 나오고 있다. 재주있는 민족이다라"고 합디다. 그리고 아침방송에 나오는 박애리 명창이 평안도 사투리 말도 또박또박 잘하고 설명을 잘해주어서 우리가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노래도 잘하고, 역시 최고입니다. 박애리!! 만나고 싶은 스타이었는데, 다음에는 꼭 사진 한장 남기고 싶어요. 우리 부모님은 북한땅에서 살다가 사할린에 이주하여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북한 노래를 들으니 평생 고향에도 못가보고 사할린에 묻히신 부모님과의 추억도 떠오릅니다. 늘 흥얼흥얼거리며 부른 노래가 바로 북한 전통민요였다는 것도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내년에도 우리는 이 공연을 기다리겠습니다. 유지숙 회장님. 귀한 공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나타샤 단장은 러시아 극동 최고 도시 하바롭스크한인협회에서 부회장을 30년 하다가 14년 전에 양주시에 영주귀국하여 부회장을 계속 맡고 있다. 남편은 사할린 동포 중 유일한 작곡가이다. 현재 사할린아리랑보존회장을 맡고 있다. 하바롭스크와 한국과의 문화행사에서 동시통역을 맡고 있다. Q.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님, 오늘도 주말에 먼길 시간내서, 늘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해주시네요. A. 사할린 동포들 이제는 연로하시고 많이 힘드십니다. 어제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얼굴이나마 뵈려고요. 영주귀국하신지 15년이 넘네요. 재임기간 3년을 마치고 올해 초 귀국해서 경기도 지역 행사는 거의 다 좇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올해 에트노스학교가 국립남도국악원 재외동포 연수교육에서 '진도북춤'을 한달동안 수업을 받을 때 잠깐 만났습니다. 그렇게나마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조금씩 동포들의 삶과 애환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 공연을 사할린 청소년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올해에도 연수교육을 받게되어 진도에 오게되면....... 저도 오늘 서도소리는 처음 들어봅니다. 감동입니다. 이 공연에 대해서 소개할 때, 사할린 동포들이 소리극이란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쉽게 설명하면 서양의 오페라 같은 거라고 답을 했다. 어떤 주인공이 나오고 주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데 제대로 답을 못했다. 서도소리극 장르는 소리극으로써, 토속민요인 서도소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극이다. 오늘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극적인 요소가 미약하다는 점이다. 각 과정마다 극 중 인물이 구현하려는 곡명과 사설의 내용 전달과 함께 등장인물들의 대화 형식이 이루어져야 한다. 주고 받는 대사(또는 노래)가 들어가야 한다. 특히 극의 주요 요소인 등장인물의 갈등구조 없이 대단원으로 막이 내려졌다. 즉 스토리텔링 작업이 잡히지 못해서 아쉬웠다. 일제강점기라는 모티브를 넣는다면 당시 최고 유행가 '수심가'도 강조할 수 있고, 당시 유성기 음반 출연과 방송을 통해 유행된 신민요나 유행가를 아코디언이나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한 두곡 곁들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은 트롯트와 댄스곡만 보여주었지만, 극적 전환일때는 의상도 바꿔입어야 한다. 2부에서 극의 흐름을 이끄는 주인공 역활을 하는 향두어른이 나와서 트롯트를 부르는 대목에서는, 장날 마누라 몰래 넥타이를 메고 양복을 걸치고 읍에 나가서 유행가를 불렀으면 극의 흐름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2부 첫막에서 향두어른이 1부에서 입었던 의상과 상투를 틀고 나와서 독창으로 트롯트를 불러서 적지않게 당황했다. 이 노래를 왜 부르는지 주고 받는 대사 또는 해설자의 명확한 설명이 있었으면 기대 이상의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변사가 나와서 설명을 해주어도 극의 흐름이 생생하게 살았을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누구나 보는 내내 욕심을 내게 마련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성공요인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일단 일반적인 다른 문화재 전승 구성원보다 인적 구성이 아주 젊은 국악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10살 전후부터 시작한 많은 제자들이 이제 40대 전후가 되어간다. 특히 본부가 젊은 유동인구가 많은 강남에 있고 전국에 있는 각 지부에서 재능있는 인적 동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로지 작품의 컬리티를 위한 공연연습 외 업무는 단단한 기획사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 더 부치면 무형문화유산의 학술적 국면과 공연 작품은 이원화 해야한다. 관객을 위해서 만든 작품은 진화해햐 한다. 시대의 코드에 맞게,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는 MZ시대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생산자가 있으면 수용자가 있어야 지속적 계승이 이루어진다. 행사를 마치고 로비에서 권경석 회장과 유지숙 회장이 만나서 인사를 나누면서 앞으로 전국 순회공연에 전국 사할린 동포 어른들을 초청해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권경석 회장은 이번 행사에 전석 초대와 함께 파주와 양주에 이동할 수 있는 버스도 보내주셔서 추운 날씨에 편하게 올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최나타샤 사할린아리랑합창단장은 유지숙 회장과 박애리 명창에게 러시아 초코렛을 선물로 전했다. 지난해부터 사할린 동포 위문공연에 앞장 서고 있는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과 회원들도 사할린 동포들과 인사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갔다. 이어 유지숙 회장과 전 회원들이 동포들을 위해 준비한 따끈한 떡과 귤 상자 선물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실어 보냈다.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동포들과 뜨거운 포옹을 하고 배웅을 했다. 오랜만에 양주와 파주에 사는 동포들이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아쉬움을 남기고 버스는 파주를 향해 떠났다. 조금 이른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고,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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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탈놀이 딴소리판', 탈놀이와 판소리 만남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은 오는 23일 오후 7시 30분 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 공연장에서 기획공연 '광대탈놀이 딴소리 판'을 개최한다. '광대탈놀이 딴소리 판'은 누구나 다 아는 뻔한 판소리 이야기로 뛰어들어 세상 별것 아니라는 주제를 드러내며 익살스러운 탈놀이와 딴소리 허다한 판소리로 채운 신명 나는 무대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판소리 다섯마당(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홍보가) 속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의 편협함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바라보는 광대들의 '딴소리'로 판을 깨고 비틀며 엉뚱한 상상과 재치 가득한 무대로 펼쳐진다. 또한, 광대들의 탈춤, 풍물진법, 재담 등으로 흥을 주고받으며 연희자와 관객이 구분 없이 서로 어울려 노는 흥겨운 무대와 익살스럽지만 역동적이고, 풍자와 해학이 있지만 여백이 있는 광대들의 춤사위를 통해 우리의 삶을 해학적이고 유쾌한 탈놀음으로 위로한다. 공연단체인 연희집단 The광대(대표 안대천)는 풍물, 탈춤, 남사당놀이 등 한국의 민속예술을 전공한 예인들로 구성된 예술단체로 국내외에 우리 연희의 신명과 멋을 널리 알리고 있다. 아울러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옛날 광대들의 예술과 삶의 자취를 기억하며 개인이 명인으로 성장하는 동시에 시대와 함께 가는 예술가로 새로운 광대의 모습을 정립해나가고자 한다. 이번 공연은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와 강릉시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며 "2023년 문예회관과 함께하는 방방곡곡문화공감사업"을 통해 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 연희집단The광대가 주관해 개최한다. 허동욱 문화유산과장은 "강릉단오제의 관노가면극과 함께 202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인 탈춤이 탈놀음과 판소리가 만나 재치있게 재해석된 이번 공연으로 종합예술인 우리 한국 탈춤의 또 다른 면모를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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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음악 탐색, 온라인 국악사전에서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은 지난 해 국악의 상세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개발한 온라인 ‘국립국악원 국악사전’(이하 ‘국악사전’)에 <민속 편>을 추가해 오는 2023년 10월 18일(수) 공개한다. 제1차년 <궁중·풍류 편>에 이은 <민속 편>에 총 614건의 표제어를 탑재함으로써 도합 1,033건 표제어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특히 이번에 재편된 국악사전 누리집(www.gugak.go.kr/ency)에서는 이용자들의 흥미와 이용 편의를 위해 개발된 국악 ‘챗봇’도 만나볼 수 있다. 사전 재개편을 기념해 온라인 국악사전을 쉽게 이용하고 국악을 즐길 수 있도록 홍보·체험 전시를 열어 대중들과 소통할 기회도 마련한다. 한국 전통 악(樂)·가(歌)·무(舞) 분야 지식창고 구축을 목표로 2021년에 제작 착수한 국악사전은,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음원·도판·영상 등을 적극 활용한 사전이다. 국악사전 제작의 첫 번 결실이었던 <궁중․풍류 편>은 2022년 12월 1일에 공개했다. 50여 명의 집필자가 궁중음악, 궁중춤, 그리고 민간의 풍류음악에 관한 총 419건 표제어를 해설하고, 약 2,400여 건 복합매체 자료를 수록하였다. 올해 제2차로 공개하는 <민속 편>에는 128명의 필자가 집필에 참여한 가운데 총 614개 표제어 및 약 3,000여 건 복합매체 자료를 탑재한다. <민속 편>을 구성하는 세부 분야는 ‘악기/기악/성악(판소리,향토민요,통속민요,잡가 등)/춤/악·가·무 복합(농악,연희,불교음악,무속음악)/복식/교육용어’로, <궁중․풍류 편>에 비해 그 범위가 넓다. 이로써 국악사전에서는 도합 1,033개의 표제어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5,000여 건의 복합매체 자료를 열람할 수 있게 된다. 한편 <민속 편> 공개 이후 약 3개월 간, 독자 모니터링 및 오류 신고를 받아 내용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국악사전 공개용으로 선별되었으나 저작권 또는 실연권을 모두 확보하지 못해 현 시점에 공개할 수 없는 복합매체 자료들 역시 탑재 조건을 완비해 공개할 계획이다. 이번 <민속 편>의 사전에는 표제어 탐색을 안내하고 흥미를 고취하기 위해 주제별로 제작한 한 기획 콘텐츠를 제공한다. 계절의 정취를 담은 성악곡을 모은 ‘사계절 우리음악’, 노래 가사 속 동물을 찾아보는 게임 콘텐츠 ‘민속동물원’, 제주 향토 민요를 알아보는 ‘너영나영 제주로’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매달 주제를 정해 소개하는 ‘이달의 표제어’를 통해 주제별 검색이 가능하도록 구성했고, 특정 표제어 해설에 등장하는 다른 표제어를 연결해 보다 쉽게 해설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 탐색 기능도 확장시켰다. 한편, 찾고자 하는 정보가 어떤 표제어와 관련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 해당 정보를 문답 식으로 검색해 살펴볼 수 있는 ‘챗봇’ 서비스도 이번 민속편 공개 시점에 맞추어 등장한다. 이번 ‘챗봇’ 서비스는 국악사전에 탑재된 다양한 형태의 문서와 복합매체 정보를 학습해 전문성과 정확도가 높은 것이 장점이다. 아울러 이번 ‘챗봇’ 서비스는 국립국악원 누리집 내 지난 10년간의 ‘묻고 답하기’ 코너의 내용을 학습해 국악원 운영 및 이용에 대한 다양한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이 가능하다. 덧붙여 국악사전은 이용자들의 의견도 적극 수렴할 계획이다. 다수의 실연자들이 등장하는 자료의 특성상 저작권·실연권 등에 관해 국립국악원에 알릴 사항이 있을 경우 누리집 우측 상단의 ‘의견제시’란을 통해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 국악사전을 오프라인 공간에서 이용객들과 만나 소통과 교감을 나누는 장도 마련된다. 10월 18일(수) 오후 3시에는 한강 노들섬에 위치한 노들갤러리 제1관에서 국악사전 민속편 공개 기념행사를 갖고, 10월 29일(일)까지 약 2주간 체험·전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체험·전시에는 크게 다섯 가지 즐길 거리가 준비된다. 국악사전 <민속 편> 표제어들을 네온사인으로 만들어 꾸민 ‘좋다 좋아 지화자 눈호강 둘레길’에서 멋진 사진을 찍고, ‘덩실덩실 더덩실 풍류공방’에 설치한 키오스크에서는 국악사전을 직접 열람하며 사용해 볼 수 있다. 사용자가 선택한 악기로 소리를 만들어 내고, 그 악기의 구음이 글자로 나타나 화면을 채우는 상호 작용형 체험물도 놓칠 수 없다. ‘어절씨구 유유자적 한량특집’ 풍류 카페에서는 ‘늴리리야’, ‘한잔 부어라’ 같은 특별한 이름의 차도 맛볼 수 있다. 10월 21~22일(토~일) 및 28~29일(토~일) 오후 두 시에는 ‘늴리리야 니나노 국악잔치’와 ‘쿵짝쿵짝 심쿵짝 국악수다방’가 열린다. 다양한 민속예술 공연이 펼쳐지고, 공연 후에는 문제 풀기 행사와 이야기 쇼가 이어진다. 국악사전 <민속 편> 공개 기념 체험·전시에 관한 더 자세한 사항은 국립국악원 누리집(www.gugak.go.kr)과 국악사전 누리집(www.gugak.go.kr/ency) 및 노들섬 누리집(www.nodeul.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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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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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군 장뜰두레놀이보존회, 제27회 충북민속예술축제 ‘대상’ 수상증평군 장뜰두레놀이보존회가 제27회 충북민속예술축제에서 단체 및 개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 12일 옥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제27회 충북민속예술축제에 증평군 대표로 참가한 장뜰두레놀이보존회는 전년도 우승으로 참가하지 못하는 청주시를 제외한 일반부 9팀과 실력을 겨뤘다. 증평 장뜰두레놀이는 논농사를 삶의 근간으로 삼고 대를 이어 살았던 현 증평읍 사곡리 질벌마을의 농사짓는 모습과 영천에서 행해지던 정주제를 다양한 고증을 통해 발굴 및 재현하여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았다. 개인부문에서는 선소리꾼 지명현씨가 대상을 수상하여 증평군이 단체 및 개인부문 모두 대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대상을 수상한 장뜰두레놀이보존회는 내년도 제65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충청북도 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증평 장뜰 두레놀이는 증평군 일대에 전하는 민속놀이로 증평군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평지역에 전승되던 두레굿을 복원한 것으로 '장뜰'은 증평을 가리키는 옛 이름이다. 2002년 발굴하여 2003년 충북 민속예술경연대회와 한국민속예술축제를 통해 알려졌다. 논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던 농요에 농악가락을 합주하는 방식이며 놀이는 논농사의 단계에 따라 진행되는데, 모두 메기고 받는 형식이다. 고리질소리, 모찌기소리, 모심기소리, 초듭매기소리, 이듭매기소리, 방아찧기소리, 세듭매기소리 등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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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오성중,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 참가괴산오성중(교장 김흥수) 아우꿈 풍물단이 지난 22일 전남 영광군 영광스포티움에서 열린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경연에 참여했다. 이번 행사는 전국 각 지역의 민속예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팀들이 경연에서 실력을 겨룬 행사로, 괴산오성중 아우꿈 풍물단은 충북 대표로 참여했다.'한국민속예술제'는 지역별 민속예술의 보존, 전승, 활용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행사로 청소년부에는 7팀이 경연에 참여했다.분당아람고의 '성남오리뜰농악'으로 시작된 이번 행사에서 괴산오성중은 7번째로 참여해 '목도 백중 놀이'를 선보였다.'아우꿈 풍물단'은 상쇠 유선애(괴산오성중 3년), 단장 김용원(괴산오성중 3년)의 지휘 하에 47명의 풍물단이 '목도 백중 놀이'를 펼쳤다. '목도 백중 놀이'는 120여 년의 전통 민속 세시풍속으로 바쁜 농번기를 보내고 가을 추수를 앞두고 백중날(음력 7월 15일)을 맞아 천신의례와 잔치를 벌여 농사일에 지친 고단함을 달래고 다양한 음식을 나눠 먹는 전통 민속 풍습으로 판 열기, 교사 소리, 호리 씻기, 농사 풀이, 음식 나눠 먹기, 황포 돚배, 신명 풀이의 순으로 장면이 구성된다.김흥수 괴산오성중 교장은 "그동안 방과후학교 시간에 풍물반 학생들이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대견하다"며 "이번 예술제 참여를 통해 우리 전통 예술의 우수성과 지역 예술의 다양성을 느껴 보고 아울러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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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 성료전국 민속예술단체가 모여 신명나는 겨루기 한판을 벌이는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가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영광군 영광소포티움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한국민속예술제는 195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주년을 기리기 위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라는 명칭으로 시작돼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지난 64년 동안 마을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각 지역의 민속예술을 발굴하고 민족 고유의 삶이 닮긴 민속예술을 다음 세대에 전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그동안 한국민속예술제를 통해 약 700여개 민속예술 종목이 발굴됐다. 이 중 국가무형문화재 44개, 시·도 무형문화재 135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12종목 등재 성과를 거뒀다.문화체육관광부, 전남도, 영광군이 공동 주최하고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 추진위원회가 주관한 이번 예술제는 25개 단체, 1천300여명의 참가자가 모여 민속예술을 겨루는 풍성하고 화려한 축제의 장으로 구성됐다.22일 청소년부 경연을 시작으로 24일까지 일반부 경연이 진행됐다. 각 지역 경선을 통해 올라온 일반부 18개 단체, 청소년부 7개 단체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민속예술 경연뿐 아니라 전야제와 사물놀이 배우기 등 체험행사, 전년도 대통령상 수상단체인 (사)전라우수영들소리, 유희스카와 신승태, 연희점추리, 다대포후리소리 초청공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도 진행됐다.전야제는 22일 오후 7시부터 영광군 법성포구에서 행복과 풍어를 비는 용왕제, 벽사안민 띠뱃놀이, 불꽃놀이 등을 펼치며 관객들에게 잊지 못할 가을밤을 선사했다. 박우육 전남도 문화융성국장은 "한국민속예술제는 고유의 민속예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앞장서고 가치를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며 "중심에서 민속예술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예술인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이어 박 국장은 "예술인들이 마음껏 창작, 공연 활동을 이어가 민속예술의 저변이 확대되도록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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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에서 K-전통문화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전국 17개 시도 및 이북5도의 민속예술이 한자리에 모여 펼치는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가 전남 영광스포티움에서 22일 막이 올랐다.그동안 민속예술의 발굴과 전승을 위해 1958년에 시작된 한국민속예술제는 지금까지 1,200여 종목의 민속예술을 발굴, 재현하며 국가무형문화재 44종목, 시도무형문화재 148종목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12종목 등이 지정되는 성과를 거두었다.이번 행사는 사회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국민들이 삶을 편안하게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뜻으로 벽사안민(辟邪安民)을 주제로 일반부 및 청소년부 25개 종목이 경연을 펼친다. 강종만 영광군수는 인사말에서 '매년 2,000여 명의 민속예술인들이 참여해 전통문화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리는 국내의 대표적인 축제가 전남 영광에서 열려 정말 기쁘다' 라며 '영광군의 법성포단오제처럼 각 고장을 지키고 있는 많은 민속예술이 발굴되어 전승하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22일 진행된 청소년부 7개팀 경연에서는 충남의 서산여자고등학교가 공연한 '서산박첨지놀이'가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다. 서산박첨지놀이는 고려 시대부터 양반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며 서민층에서 인기있던 민속극 이다. 일제 강점기에 탄압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추석 때면 마을 사랑방이나 공터에서 인형극이 열렸다.한편 전남 영광군 법성포구에서는 행복과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가 펼쳐져 많은 관람객들이 함께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보균), 전라남도(도지사 김영록), 영광군(군수 강종만)이 주최하고 전통예술진흥재단(이사장 김삼진), 한국민속예술제 추진위원회(위원장 강등학)가 주관하는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는 오는 9월24일까지 개최된다.‘한국민속예술제’는 195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주년을 기리기 위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행사다. 마을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각 지역의 대표 민속예술경연을 통해 700여개의 민속예술 종목이 발굴됐고, 그중 국가무형문화재 44개, 시·도 무형문화재 135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12종목이 등재됐다.올해 ‘한국민속예술제’는 일반부 18개, 청소년부 7개 단체가 각 지역 경선을 통해 올라와 대통령상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25개 단체, 1300여명의 참가자가 한자리에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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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민속예술 겨루기 한판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보균), 전라남도(도지사 김영록), 영광군(군수 강종만)이 주최하고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사장 김삼진), 한국민속예술제 추진위원회(위원장 강등학)가 주관하는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가 9월 22일(금)부터 24일(일)까지 3일간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스포티움에서 개최된다.올해 64회를 맞이한 한국민속예술제는 195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주년을 기리기 위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라는 명칭으로 시작돼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마을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각 지역의 대표 민속예술경연을 통해 700여개의 민속예술 종목이 발굴됐고, 그중 국가무형문화재 44개, 시·도 무형문화재 135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12종목이 등재됐다. 또한 청소년 부문 경연이 진행돼 우리 민족 고유의 삶이 담긴 민속예술을 다음 세대에 전승하고 있다.이번 ‘제64회 한국민속예술제’는 일반부 18개, 청소년부 7개 단체가 각 지역 경선을 통해 올라와 대통령상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25개 단체, 1300여명의 참가자가 한자리에 모여 민속예술을 겨루는 풍성하고 화려한 축제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민속예술경연뿐 아니라 전야제와 체험행사, 전년도 대통령상 수상단체인 전라우수영들소리를 비롯해 유희스카와 신승태, 연희점추리가 펼치는 초청공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경연장을 찾은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전야제는 9월 22일(금) 저녁 7시부터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구에서 행복과 풍어를 비는 용왕제, 벽사안민 띠뱃놀이, 불꽃놀이 등이 펼쳐져 관객들에게 잊지 못할 가을밤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민속예술체험, 한복 입기 체험, 사물놀이 배우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도 마련돼 있다.문화체육관광부 정책 담당자는 한국민속예술제가 우리 전통예술의 우수성과 지역예술의 다양성을 많은 국민이 함께 즐기는 장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김삼진 이사장은 "60년 이상 우리 민속예술을 이어온 의미 있는 한국민속예술제가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로 더욱 풍성하고 화려한 축제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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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대한민국-인도네시아 '천년의 소리 천년의 몸짓' 교류공연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되는 2023 아세안 정상회의와 대한민국-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전통예술 교류 공연을 펼친다. 이번 공연은 2023년 9월 5일(화) 오후 7시(현지시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시퓨트라 아트프레뉴어(Ciputra Artpreneur)공연홀에서 민속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기악합주, 부채춤, 태평무, 판소리, 사물놀이 등 60분간 선보일 예정이며, 인도네시아 발리의 전통공연팀 사라스와티(Saraswati)와 합동공연도 펼칠 예정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주인도네시아 대한민국대사관이 주최하고, 주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과 국립민속국악원이 주관하고 있는 이번 공연은 대한민국의 민속예술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인도네시아 발리의 전통춤인 케착(Kecak)과 한국의 민속무용이 교감하며 함께 펼치는 무대도 준비되어 있다. 이번 교류공연을 계기로 한국-인도네시아 간 전통예술콘텐츠 향유를 통해 문화공감 증진 및 교류 기회가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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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국립대 ‘민속무용학과’, ‘민속예술무용학과’로 명칭 변경경상국립대 인문대학 민속무용학과가 ‘민속예술무용학과’로 학과 명칭을 변경했다고 6일 밝혔다. 경상국립대 민속무용학과는 국가거점 국립대학의 위상에 걸맞게 예술의 폭을 넓혀 ‘민속예술무용학과’로 명칭을 변경하고 모집 분야를 무용과 민속예술로 확장했다.민속예술무용학과 관계자는 "학생들에게 무형문화재 전승교육을 통해 이수자 심사자격을 부여해 자격증을 취득할 기회가 주어지며, 나아가 문화예술 전문성과 실기 능력의 향상을 통해 취업 기회가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민속예술무용학과 졸업생은 졸업과 동시에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문화체육관광부 국가자격증)을 취득해 국·공립 문화예술단체와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각 지역 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교육사로 활동할 수 있다.졸업 후에는 국·공립 예술단에서 공연 활동을 통해 예술작품을 만들고 예술 강사로 예술교육의 현장에서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다. 한편, 민속예술무용학과는 다음달 11일부터 15일까지 2024학년도 수시모집 특기자전형으로 무용과 민속예술 분야의 창의적 혁신 인재로 성장할 18명의 신입생을 모집한다. 또한 민속예술무용학과는 오는 12월 시행할 정시모집(나군)에서는 실기고사 없이 일반전형으로 진행 할 예정이며 외국인 특별전형도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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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문화연구소,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세계민속축제 참가풀뿌리문화연구소(대표 강신구)가 한국 민속예술 단체들을 인솔해 지난 7월16일부터 7월 20일까지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서 열린 세계민속축제 참가했다. 이 행사에는 김포농악보존회, 서초구늘춤무용단, 송경숙무용단, 김기숙, 김경초 민요팀 등 총 24명의 예술팀과 총 30명의 공연단을 꾸려서 한국팀으로 참여했다. 세계 각국의 민속예술단이 참가해 경연을 벌이는 이 축제에는 올해 인도·스리랑카·필리핀·우즈베키스탄·그리스 등 16개국이 참가했다. 인도네시아 수라바야는 자카르타 동남쪽 650km 거리에 있는 도시로 인구 350만명이 거주하는 대도시다. 김포농악보존회(회장:장미화)는 농악과 잡색(악기 없이 흥으로 판을 휘어잡는 놀이꾼)문화, 태평무·진도북춤·흥춤 등을 선보였다. 개최 도시인 수라바야시는 참가국 중 유일하게 김포농악보존회에만 감사패를 수여했다. 김포농악보존회는 필리핀·말레이시아 등으로부터 축제에 참가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올해 연말 인도네시아 한인회 축제에도 초청받았다고 전한다. 강신구 대표는 "한국 참가단이 수라바야 한인회(회장 이경윤)와도 교류했으며, 현지에서 한국의 전통예술 가무악을 소개하고 지난 7월 23일 귀국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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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교방굿거리춤’ 명인 김수악"그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 "그 앞에만 갔다 오면 춤이 달라진다" 춘당(春堂) 김수악은 전설적인 영남 제일의 춤꾼이다. 김수악은 1926년 함양군 안의읍에서 만석꾼 집안 장남의 5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순녀. ‘수악’은 집에 들른 스님이 명이 길어지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큰 언니 김취란은 가야금의 명인이며 황병기의 스승으로 유명한 예인이다. 7살에 진주로 이사한 순녀는 9살부터 진주권번에서 본격적으로 춤, 소리, 악기를 배웠다. 판소리는 유성준·정정렬·이선유·김준섭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에게 다섯 바탕을 사사했다. 구음은 전두영에게 배웠고, 강태홍·김종기·박상근 등에게 가야금과 아쟁도 배웠다. 춤은 김옥민을 시작으로 한성준의 ‘검무’, 최완자의 ‘굿거리춤’ ‘검무’ ‘입춤’을 물려받았다. 26세에 어머니가 되었지만 춤이 더 귀했다. 결혼과 육아로 춤을 접었는데. 1946년 의기 논개의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공연 ‘대춘향전’ 출연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1949년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예술제 ‘개천예술제’에서 춤과 소리, 연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1960년대 초반 남편 사별후 시골 아낙네로 살던 중 국가의 권유로 '진주 검무' 예능보유자가 된다. 1969년부터 목포 유달국악원, 1971년 광주 호남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고 1973년 진주 민속예술원을 설립했다. ‘강산 제일무’라는 별칭은 1980년대 후반 서울에서 ‘교방굿거리춤’을 추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최완자의 ‘굿거리춤’에 김녹주류의 ‘소고춤’을 이어붙여 만든 김수악만의 브랜드 ‘진주교방굿거리춤’. 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고 김수악은 예능보유자가 됐다. "굿거리춤은 발디딤과 손놀림 등 모든 춤의 원동력이라 그것부터 배워야 해요. 교방이라는 이름 때문에 기생춤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마당에서 추는 군무와 달리 실내에 서서 추는 입춤이어서 동작이 아담하고 기교가 뛰어나죠.” S라인의 손목사위도 김수악 굿거리춤의 특징이다. "60년대부터 춤을 가르치는데, 녹음한 곡은 다양하지도 않고 듣기도 민망할 만큼 시원치않았어요. 그렇다고 악사를 쉽게 구할 수도 없고. 호남에는 소리꾼과 악사들이 많은데 영남은 사정이 달랐어요. 결국 제가 장구치고 입으로 소리 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요.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내려니 악기 특성별로 소리도 달리 내야 했어요. 어릴 때 판소리 다섯바탕을 남선생에게 배우면서 호방한 동편제를 익혔기 때문인지, 장조와 단조의 구음을 자유롭게 구사했지요.” 전국에서 공연되는 굿거리춤에는 녹음된 김수악의 구음이 단연 최고다. 병상에서 제자들에게 강조한다. "무겁게 추되 발디딤을 살랑살랑하면서 속은 깊으게. 몸에 알뜰한 멋이 들어야만 알뜰한 예술이 나와!” 김수악 약력 1926년 5자매 중 둘째로 출생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2호 진주검무 기능보유자 지정1969년 목포 유달국악원 지도교수1971년 광주호남국악원 지도교수1973년 김수악민속예술학원장1975년 경성대 기악강사1977년 진주시립국악원 전임지도교수1983년 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 진주시 지부장1986년 진주시립국악학교 지도교수19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기능보유자 지정 수상 경상남도문화상, 경남진주시문화상, 대한민국사회교육문화상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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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속리산 신화여행축제' 9일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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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민속기록학회 상반기 학술대회, "민속예술과 기록"2023 민속기록학회 상반기 학술대회가 '민속예술과 기록'이라는 주제로 오는 10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샤머니즘박물관에서 개최된다. 각 주제 발표는 아리랑, 판소리, 세시풍속, 민속활용을 중심으로 발표된다. 양종승 학회장은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2012년 등재), '판소리'(2003년 등재)는 민속예술 분야인데 무형문화재와 관련된 '기록전승'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민속예술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체계적인 기록과 기록자료 수집 및 고증 등은 이 분야 연구의 토대가 됩니다. 또한 이러한 자료에 대한 연구 및 활용도 중요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민속기록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계기가 되는 학술대회가 되고자 한다"고 전했다. *제1주제 발표:기미양(아리랑학회) "<본조아리랑>에 대한 재검토" (토론: 김연갑/아리랑연합회) *제2주제 발표:유수영(전남대) "무속예인의 생애와 지역문화콘텐츠"(토론:변지선/호서대) *제3주제 발표:김덕묵(한국외대) "한·중·일 정월 세시의례의 종교적 성격과 구조"(토론:이병용/중앙대) *제4주제 발표:김지혜(한국외대) "한국어 교육에서 민속의 활용방법 모색' (토론: 심일종/서울대) 오늘날 국내외 외국인들이 'K-한류'의 열풍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외국인들에게 민속을 활용한 교육도 중요하다. 언어와 문화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민속예술과 기록'의 발굴과 연구는 중요하다. 본 학술대회에서는 동아시아 세시풍속의 비교 및 한국어교육에서 민속의 활용 방안도 발표된다. 한국 민속뿐만 아니라 인접국인 동아시아 비교는 우리 문화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초가 된다. 일 시 발 표 및 내 용 13:30 ~13:40 개회사: 양종승 회장 제1부: 민속예술과 기록 사회자: 반혜성(단국대) 13:40 ~14:05 발표주제: <본조아리랑>에 대한 재검토 발 표 자: 기미양(아리랑학회) 토론자: 김연갑(아리랑연합회) 14:05 ~14:30 발표주제: 무속예인 후손의 판소리 활동과 지역문화콘텐츠 -함평 국창 정창업 예인의 후학활동을 통해- 발 표 자: 유수영(우리문화콘텐츠연구소) 토론자: 변지선(호서대) 14:30 ~14:45 중간휴식 제2부: 자유주제 사회자: 노무라 미치오(장안대) 14:45 ~15:10 발표주제: 한·중·일 정월 세시의례의 종교적 성격과 구조 발 표 자: 김덕묵(한국외대) 토론자: 이병용(중앙대) 15:10 ~15:35 발표주제: 한국어 교육에서 민속의 활용방법 모색 발 표 자: 김지혜(한국외대) 토론자: 심일종(서울대) 15:35 ~15:50 중간 휴식 종합토론 사회자: 반혜성(단국대) 15:50 ~17:00 발표자, 토론자 및 참가자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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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재인청의 맥을 이은 조선의 마지막 춤꾼, 이동안 명인운학(雲鶴) 이동안(1906~1995)은 경기도 화성이 낳은 재인청의 춤꾼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인이다.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고 전통문화의 기틀을 세우는데 기여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화성 재인청의 최고 자리인 도대방에 올랐던 그는 광무대(光武薹)에서 공연 생활을 하게 되면서 경기재인청 출신인 춤과 장단의 명인 김인호, 줄타기의 명인 김관보, 발탈과 재담의 명인 박춘재, 남도소리의 명인 조진영, 대금 피리 해금의 명인 장점보, 태평소의 명인 방태진 등으로부터 각종 기예를 익혔다. 당대 최고의 명인들로부터 배운 기예는 이후 이동안이 경기재인청 춤의 전승자로, 줄타기 명인, 발탈 보유자로서 탁월한 예능인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화성재인청이 1922년 폐지되면서 이동안 선생은 마지막 도대방으로 기록된다. 이동안의 가계는 대대로 무업(巫業)을 주업으로 하던 경기재인청의 재인(才人)들이었다. 이동안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 137번지에서 아버지 이재학과 어머니 해주 오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해금 전문가, 조부 이하실은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다. 작은 할아버지 이창실은 줄타기 명인으로, 친가와 외가 모두 최고의 재인들이라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재인의 피를 물려받고 민속예술의 환경에서 자라났다. 재인청춤전승보존회 정주미 회장은 "한성준이 승무의 한영숙과 태평무의 강선영이라는 인간문화재 제자를 배출하면서 문화예술계의 주목과 인정을 받는 반면, 전통춤의 원형을 간직한 재인청 춤의 대가인 이동안은 무형문화재 중심으로 춤이 주목받고 평가되는 세태 속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춤이 아닌 발탈로 보유자가 된 이동안이 "내가 안하면 끊긴다고 해서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지만 사실 나는 춤꾼이지 발탈 재주꾼은 아니다”라고 한탄했다. 이동안에 대한 올바른 재평가는 그가 태어난 화성시에서부터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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