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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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자연풍토적 배경과 지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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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기후위기와 노아의 방주 민주·비민주 담론, 극한투쟁 뛰어넘는 생태와 반생태 아니, 삶과 죽음의 담론 성장·개발 담론을 공생·공존 담론으로 뒤집어엎는 선한 에너지가 절실하다 무안군 무안읍 매곡리 도깨비굿 이야기를 다시 소개한다. 무안과 함평 일대의 명산이라는 보평산 아랫마을이다. 보평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봉수대가 있다. 보평산과 감방산 사이에 있는 능성에는 용굴샘이 있어 명산 보평산의 풍수 스토리를 완성해준다. 이 물이 마르거나 마르지 않거나를 가지고 한해의 기후와 운수를 점쳤다. 누군가 몰래 묘를 쓰는 일이 발생하면 이 샘의 물이 말라버린다. 보평산은 명산이고 용굴샘은 그를 보전하는 상징공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 자라도 이 산에 묘를 쓸 수 없다. 하지만 자기 자손들만의 발복을 위해 몰래 묘를 쓰는 자들이 있다. 도장(盜葬) 혹은 암장(暗葬)이라 한다. 그럴만한 능력과 사회적 부를 거머쥔 자들이다. 이런 경우 마을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본 지면에 여러 번 소개했듯이 도깨비굿을 한다. 고을의 여자들이 호미와 낫 등을 들고 보평산을 뒤진다. 결국은 몰래 쓴 묘를 발견하고 파헤친다. 유골들을 흩뿌려 버린다. 그래도 묘지 임자가 되었건 문중이 되었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일종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명산대천은 공동체의 것인데 마을 사람들 몰래 독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뭄이나 기근 특히 역병의 원인을 발복이나 사회적 권력의 독점 때문이라고 진단했음을 알 수 있다. 졸저 (다ᄒᆞᆯ미디어, 2021)에 자세하게 소개하고 분석해두었다. 도깨비굿은 기울어진 운동장, 극단으로 흐른 생태적 위기, 사회적 위기를 전복(顚覆)하는 행동의 은유다. 아니, 불순한 기운을 선한 에너지로 바꾸어 균형을 회복하려는 혁명이다. 기후위기와 문명의 상관글로벌 경제전문가 100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을 기후에너지 캠페이너 정상훈이 소개해두었더라. 일부 내용을 여기 인용해둔다. 설문의 요지는 지금 우리 세계가 당면한 가장 큰 위기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응답자 가운데 가장 많은 93%가 '기후위기'라고 답했다. 빈곤 84%, 물 부족 79%, 전염병 78% 등으로 이어진다. 경제전문가들이 왜 기후위기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을까? 정상훈은 이렇게 분석했다. "지난 2016년 세계은행은 기후변화를 방치하면 2050년까지 158조 달러(18경 5천 729조 원)에 이르는 손실이 발생한다고 전망했다. 이는 지난 2020년 우리나라 GDP(1조 6240억 달러)보다 100배 가까운 수준이다. 세계경제포럼도 2021년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를 통해 극단적인 기상현상이나 기후변화 대응 실패 등 기후 관련 문제가 '인류에게 실존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후위기로 인한 극단적인 기상현상이나 경제 시스템에 영향을 끼쳐 막대한 손실을 유발하고 더 나아가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는 경고다." 그러면서 기후위기 대응 최선책은 재생에너지의 확대라고 진단한다. 경제뿐이겠는가. 문화적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엘스워스 헌팅턴의 (민속원, 2013)에 의하면, 기후와 문명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며 이렇게 말한다. "전 세계 대분의 지역들은 인구가 상당히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불리한 경제적 변동이 발생하면 이는 곧 곤궁과 질병, 그리고 높은 사망률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좀 더 활동적이고 모험심이 많은 사람은 이주를 택하기도 한다. 경제적 곤궁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은 아마도 날씨 혹은 기후 변화(위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흉작을 초래하거나 동물들이 먹고 마실 풀과 물을 부족하게 한다. 이와 같은 경제적 곤궁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소요를 불러오며, 이것은 다시 이주를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경제적으로 부득이하게 이주한 사람들은 열악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이들의 숫자는 계속 감소하여 오직 특별히 우월한 자질을 지닌 소수의 집단만이 선택적으로 살아남는다." 끔찍하지 않은가? 예컨대 조선후기 경신대기근처럼 말이다. 만약 그러할지라도 젖과 꿀이 흐르는 지구별의 어떤 땅이 있어 이주할 수 있단 말인가. 빌게이츠는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매년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 510억 톤을 2050년 선진국부터 '순 제로net zero'로 만들자." 여러 가지 정답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실천하는가이다.가치관의 거대한 전환기, 진보의 끝자락에 서서여성 전유의 문화적 혁명이라는 도깨비굿, 그 문명적 은유를 새삼 반추해본다. 구마 겐고와 미우라 이쓰시는, 대담으로 엮은 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위대함, 고상함, 고층을 지향하는, 즉 '위에서의 기준'을 들이댄 건축을 선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저층, 저자세, 작음, 저탄소, 낮은 가격 등이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속, 높은 마력을 선호하던 시대에서 속도가 느려도, 크기가 작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진보의 끝, 진보의 종말이다. 산업, 기술적인 의미에서 진보의 끝만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형식까지 포함한 진보, 정확히는 진보라고 여겨져 온 모든 것이 막을 내린다는 의미다. 가치관의 근대화가 막다른 곳에 다다른 거대한 전환기다." 명문대학 졸업자, 부유한 집안 출신, 미모가 출중한 자 등을 경외하거나 선호하는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꼴지들의 반란이라고나 할까. 오로지 성장만을 위해 내리달리는 그 가속을 멈춰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했다.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철학가들, 사상가들이 이를 진단하고 주문했다. 예컨대 김지하가 내다봤던 문명사적 전환 같은 것이다. 서양에서 동양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불에서 물로, 율려와 동학의 전망 모색 등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비전의 재구성을 도모할 때가 아닌가 싶다. 비유컨대 개발 지향적이고 성장 우선적인 혹은 남성성으로 비유되는 진보담론의 해체가 답일 수 있다. 민주 비민주의 담론이나 극한투쟁을 뛰어넘는, 생태와 반생태 아니, 삶과 죽음의 담론이자 필사의 투쟁 아니겠는가. 코로나 팬데믹 시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물과 불의 심판에 준비했던 노아의 방주 같은 것 말이다. 분명한 것은 방주를 만들 마지막 위기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른바 도깨비굿이다. 성장과 개발 담론을 공생과 공존담론으로 뒤집어엎는 선한 에너지 말이다.기후위기시대, 노아의 방주목포산돌교회 김경희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할 때 단 한 사람을 남겨뒀다. 그가 바로 '노아'다. 노아란 이름의 뜻은 '멈춤(Stop)'이다. 아크 노아(오직 노아), 이것이 죄악으로 치달았던 세상을 향해 던진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물 심판뿐이겠는가. 불 심판 또한 마찬가지다. 성장과 개발을 진보로 여긴 인류가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기후위기 시대, 더 이상의 성장과 개발은 안 된다고 'No'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노아'란 뜻이다. 거대한 자본과 반생태적 정치권력의 카르텔을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 말이다. 이들이 생각하고 준비하며 실천하는 것들,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방주(方舟)' 아니겠는가. 지금 이 시대, 설령 인류의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될지라도 '아니오'하며 방주를 만드는 이, 이것이 어쩌면 김대중 대통령이 말했던 '행동하는 양심'의 현재적 버전일지 모른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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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구미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 수상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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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가을인가?/박인걸깨진 낮달은 따라오는 태양에 밀려나고 이글거리던 여름도 가을 소식에 짐을 꾸린다. 잠시 머무르다 떠나야 할 때는 말없이 배역을 마친 후 무대 뒤로 사라지는 계절 반백의 이마위로 석양 그림자가 드리우고 젊은 날의 추억은 아득히 멀어져 간다. 억세 꽃잎에 물든 가을 텅 빈 허전한 가슴 풀벌레 처량한 노래 아! 나도 늙어가고 있구나. 추천인:김중현(국립민속국악원장) "문득 올려다 본 맑고 푸른 하늘, 분명 가을 하늘이다. 아직 반백의 나이는 아니지만, 이런 날에는 ‘젊은 날’로 달려간다. ‘아 분명 나도 반백으로 가는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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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8) <br>청자상형용문편(靑磁象形龍文片)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이규진(편고재 주인) 용(龍)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아마도 강력한 왕권(王權)이 아닐까 생각된다. 용이 이처럼 왕권을 상징하다 보니 왕의 얼굴은 용안(龍顔)이요 왕의 평상은 용상(龍床)이요 왕의 옷은 용포(龍袍)로 불리기도 한다. 왕이 즉위하는 것을 용비(龍飛)라고 하는데 <용비어천가>의 제목은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용은 왕권만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용은 민간신앙에서는 비를 가져오는 우사(雨師)이고, 물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수신(水神)이며,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는 벽사(辟邪)의 선한 신으로 인식되어 용신제 및 용왕굿 등이 행해지기도 한다. 용은 또 무소불위의 권능과 천변만화의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상징성을 보이다 보니 그 모습도 다양하다. 중국의 삼정구사설(三停九似說)에 의하면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소의 귀, 뱀의 목, 개구리의 배, 잉어의 비늘, 매의 발톱 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 뿐 아니라 자유자재한 초월적인 존재를 암시하기 위해 구름 속으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운룡문(雲龍文) 형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용은 순수한 우리말로는 미르라고 하며, 용이 되려다 못되고 깊은 물속에서 사는 큰 구렁이를 이무기라고도 한다. 이러한 용은 조선조에서는 백자항아리에 청화로 운룡문이 많이 그려지지만 청자와 분청에서도 보이고 있다. 비색청자나 상감청자의 문양이나 상형청자의 용은 대개 최상급의 품질을 보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물결과 함께 표현된 수룡(水龍), 용두구신(龍頭龜身)의 구룡(龜龍), 용두어신(龍頭魚身)의 어룡(魚龍) 등이 그 것들이다. 조선조 백자청화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운룡문은 청자에서는 후기에 와서야 상감청자에서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라면 특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청자 중 용이 장식된 대표적인 기명은 무엇이 있을까. 그런 청자는 적잖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명품 중의 명품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일본의 야마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靑磁陽刻濤文九龍淨甁)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전라도 어느 고분 석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정병은 고려 12C 것으로 높이가 33.5Cm나 되는 당당한 크기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첨대(尖臺)와 목 그리고 주구{注口)에 아홉 마리의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는데 입을 크게 벌려 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포효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이 정교하고도 정성스럽게 조각을 해 형상화 되어 있다. 몸체 전면에도 용이 휘감기는 모습을 음양각 기법으로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청자를 통 틀어서도 명품중의 명품으로 꼽을만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에서 보이고 있는 아홉 마리의 용이다. 아홉 마리의 용중 목이 보이는 것은 주구와 첨대에 장식된 것뿐이다. 다른 것들은 용머리가 몸체에 바짝 붙어 있다 보니 목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구의 것도 흔적만 보일 뿐 비늘에 덮인 목을 제대로 뽑아 올리고 있는 것은 첨대에 장식된 용뿐이다. 왜 아홉 마리 용중에서도 첨대에 장식된 이 용머리가 내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그 것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청자상형용문편 때문이다. 형태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뽑아 올린 목, 쩍 벌리 입, 뒤로 날리고 있는 갈기, 거기에 눈이며 비늘 등을 음각으로 처리한 점, 비색의 색감 등이 동일한 양식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청자상형용문편이 정말이지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의 첨대에서 보이고 있는 용머리 조각과 같이 청자정병첨대에 붙어 있던 장식이라고 하면 이 얼마나 귀하고도 희한한 자료인가. 하지만 나로서는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추측을 떠나서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고 보면 오로지 신나고 즐겁고 감격스럽기만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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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전체를 사적지로 지정하라!"레고랜드 사업 실패를 인정하고 중도를 시민에게 돌려줘라! 2018년 10월 24일 문화예술인·시민단체 대표 50명이 중도선사유적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한 중도문화연대를 창립하였습니다. 창립과 함께 매월 네 번째 토요일 오전 10시~12시까지 중도 선사유적 파괴현장을 찾아 현대인의 과오를 고백하고 수천년간 중도를 지켜온 선사인, 우리는 이를 중도리안으로 부르며 선사인을 추모하는 문화행사를 진행해 왔습니다. 2019년 8월 중도문화연대와 춘천시민·사회단체 제정당들이 통합된 《혈세낭비레고랜드중단촉구 범시민대책위》로 확대되며 수천억원의 혈세가 낭비되는 현실을 고발하고 전 세계 으뜸인 중도선사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계속된 중도걷기는 2023년 10월 28일. 5년이 되어 횟수로 60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진행되었던 중도걷기 현수막 전시를 통해 8천억원의 혈세를 탕진하고도 아직도 허허벌판인 레고랜드 사업의 실상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아직 희망이 남은 중도 선사유적이 미래세대에게 온전히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을 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중도걷기 5주년 포스터 전시와 제60차 중도걷기를 아래와 같이 진행합니다. 시민들께서 손잡고 함께 해주시길 기대합니다. 일시 : 2023. 10.28 (토) 10:00 전시기간 : 2023년 10월 24일~2023년 10월 31일 장소 : 춘천대교 입구 출발->중도선사유적파괴현장 내용 : 1. 중도걷기 2. 레고랜드 앞 광장 퍼포먼스 3. 선사유적 제의와 문화행사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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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0) <br> 박정욱 명인의 '황해도 철물이굿' 춤사위철물이굿 ‘철물이굿’은 황해도 지역에서 정월이나 시월에 행하던 ‘재수굿’으로 집안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고 조상님께 감사 드리며 신께 제의를 올려 복을 비는 집안 굿으로, 1년 또는 3년에 한번, 2-3일에 걸쳐 행해졌다. ‘철물이 굿’은 총 스물 네거리 또는 열둘거리로 논다. 신을 청하는 소리 청배 만수받이, 신을 즐겁게 놀리는 춤, 늦은 거상, 거상타령. 복을 기원하는 공수, 아흔 아홉 방울의 상쇠소리, 해학적인 면이 많은 말명 거리와 불교 의식이 강한 칠성거리, 잡귀를 몰아내는 장수거리. 돈을 벌어들이는 대감놀이. 조상님들을 대접하는 조상거리 등, 볼거리가 풍성한 ‘재수굿’이다. 이은관의 직계제자인 박정욱 명창(서도소리보존회 이사장)이 2021년 3월28일 서도소리의 본향인 평안남도 ‘평안도 배뱅이굿’ 보유자로 지정받았다. 평안도배뱅이굿은 평안도 고유의 음악과 무가의 성격이 잘 드러나며 무형문화재로서의 예술성과 기술성, 대표성 및 사회문화적 가치 등이 높아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신규 종목으로 지정된다. 박정욱 보유자에 대해서는 전승 능력과 전승 환경, 전수 활동 기여도 등이 뛰어나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평안도배뱅이굿 보유자로 인정된다. 배뱅이굿은 이미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인 ‘서도소리’ 종목에 수심가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박정욱의 ‘철물이굿’은 황해도 출신 만신 이선비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무(武)의식과 놀이이며, 이선비 선생의 신 어머니이신 유씨 만신의 문서이고 ‘소놀음굿’은 장보배만신에게서 내려온 문서이다. '황해도 철물이굿'은 서해안 풍어제와 대비되는 굿으로 무형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한민족 문화유산이다. 박정욱 약력 평안남도무형문화재 제5호 평안도배뱅이굿 보유자 (사)한국서도소리연구보존회 이사장 제57회 서도소리 정기발표회 개최 황해도철물이굿보존회 회장 2000년 국가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수자(김정연/이은관 사사) 2014년 서울시무형문화재 제32호 재담소리 이수자(백영춘/이은주/안비취 사사) 1991년 제8회 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상(대통령상) 수상 명창 이은관선생기념관 '낭월국악당' 관장 한국전통문화관 가례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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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64)태평만사가 농부의 마음이로다. 밭을 깊이 갈고 잡초를 제거하는 것은 공이 이루어지는 것일세. 호미 들어라 호미 들어라 한결같이 앞을 향하여 아로롱 아로롱 감상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공자(孔子)에게 정사(政事)에 대해 묻자 공자가 "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 대답하였다. "임금은 임금 노릇 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 하며, 아비는 아비 노릇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 하는 것.” 이라는 것이다. 각각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하면 나라는 저절로 굴러 간다는 뜻이다. 당연히 농부의 공은 제 때에 밭을 갈고 잡초를 뽑아 농사를 잘 짓는 것으로서만 이루어진다.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지 못할 때 세상은 어지럽고 백성은 정치로 패를 가른다. 요(堯)임금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백성들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는 고사도 있다. 사십 여 년 전 스위스 여행 중에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대학에서 신입생들에게 대통령 이름을 적으라 했더니 20명 중 네 명 만이 답을 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직전대통령을 써 냈다는 얘기를 듣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온 나라가 정치로 시끄러운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글자에도 저마다 직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썼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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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68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前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단장) 지금과 같이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국민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문화로써 국민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정책을 펼치겠다’는 신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메시지는 그래서 가슴에 특별하게 다가온다. 물론, 그 역할을 ‘문화’가 담당해야 한다. 정부 부처 중에서도 문체부가 당연히 그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국민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결과를 도출하기 어렵다는 것 역시 국민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국민들이 요구하는 문화수준을 정치문화 수준에서 소화하기에는 너무 많은 장애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를 대상으로 한 정기국회의 국정감사장에서는 신선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위에서 제기한 정치문화 수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킨 장면들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신임 유인촌 장관의 국감장에서의 답변은 마치 10여 년 동안 깊은 산 속에서 도를 닦고 내려온 도사같이 해박한 문화적 소양을 거침없이 드러내 보였다. 많은 공감대를 불러온 유인촌 장관의 발언은 여당 의원은 물론, 야당의원에게서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 유 장관은 평소의 지론인 "문화가 광범위한 분야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범부처적인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문화의 영향력을 강조함으로써 야당 의원들에게서 많은 공감대를 끌어내었다. 마치, 문화와 문명사적 테두리 안에서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모든 분야를 바라본다는 이어령 선생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고독감과 사회적 고립' 문제에 대해 문체부의 대책을 묻자, 유 장관은 '문화'를 국정과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했다.(뉴시스 기사 참조) 이용호 의원의 질의에 대해 유 장관은 "문체부의 문화 관련 일들이 예전에 제가 장관할 때보다 훨씬 넓어져 있고 문화가 해당 안 되는 분야가 없다"고 밝혔다. 타 부처에서도 문화를 실질적인 정책으로 반영할 수 있다는 취지로 답변한 것이다. 유 장관은 MB정부의 장관 퇴임 이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약 7년 정도 법무부의 소년원에서 청소년들에게 연극을 지도하고, 자전거 여행도 함께 다닌 결과 재범률이 실제로 낮아지는 경험을 하였다. 유장관은 "문화로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국회가 도움을 주시면 이러한 고독감 문제도 범부처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마무리 발언을 하자 야당 의원석에서 박수가 나왔다. '고독감과 사회적 고립' 문제로 인한 서현역 살인 사건이나 지하철 난동 등 은둔형 외톨이 범죄가 증가함으로써 사회적 문제가 심각한 때에 ‘문화’로써 그러한 문제를 정책에 반영하여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유인촌 장관의 언급은 중요한 시사점(示唆點)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관련하여, 2013년도에 필자가 교육부에서 ‘국악학생오케스트라 사업단’을 지정 받아 운영했을 때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국악학생오케스트라의 단원들 대부분은 조손(祖孫) 가정과 결손(缺損) 가정의 아이들 등으로서 불우한 청소년들을 우선 채용하는 규정에 의해 운영되었다. ‘서양오케스트라 사업단’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총괄 지휘했고, ‘국악학생오케스트라 사업단’은 필자가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의 교수로 재직 시 교육부의 지정을 받아 운영하였다. 이 당시의 업적으로 필자는 ‘예술교육 활성화 공로’가 인정되어 교육부 장관 표창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국악학생오케스트라 사업은 교육부가 공교육을 통해 균등한 음악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국악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자신의 음악적 잠재 능력 및 감수성을 계발하고 신장할 수 있도록 전국의 초‧중‧고등학교를 지원하는 문화예술교육 사업이다. 국악학생오케스트라 사업단은 전국에서 국악학생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는 60개(초등학교 32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3개교) 학교를 대상으로 현장 컨설팅, 지도교사 역량강화 연수, 악보뱅크 지원 등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각 학교에서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교육부의 학생오케스트라 사업단 운영 프로그램은, 베네수엘라의 오케스트라 음악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El Sistema)’를 벤치마킹하여 시행한 것이다. ‘엘 시스테마‘는 1975년 총과 마약이 넘쳐나던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경제학자이며 오르가니스트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Jose Antonio Abreu, 1939. ~ 2018,) 박사에 의해 빈곤층을 포함한 불우 청소년들을 구출하기 위한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이다. ‘엘 시스테마’의 프로그램은 1977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국제경연대회에서 입상하면서 국제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베네수엘라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마약과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악기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오케스트라 훈련을 실시해 청소년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인 음악교육의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아브레우는 2009년 스웨덴 왕립음악원으로부터 ‘음악의 노벨상’인 폴라음악상을 받았고, 2010년에는 제10회 서울펑화상을 수상하였다. ‘국악학생오케스트라 사업단’의 프로그램은 ‘국악진흥법’을 통해서 재시행은 물론, 더욱 활성화시키는 정책으로 반영되면 좋겠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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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14장(애국가) 작사 배경으로서의 활동상윤치호는 1898년 이종일·남궁억·사촌 윤치소와 함께 경성신문(京城新問) 창간에 참여했다. 이 후 학무아문참의를 거쳐 1898년 7월 8일 다시 중추원 1등 의관에 임명되었고, 7월 22일 국왕에게 부패 관료들을 축출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황제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획책하려 한다”는 모함을 당했다. 한편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통역을 하면서 기독교 선교를 도와주었다. 또한 부친을 설득하여 적당한 토지를 내어 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 이런 입장임에도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 선교사에게마저 그는 은근히 무시와 모욕을 당하곤 했음에 처음에는 미국인과 영국인,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나중에는 내심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경멸하거나 반감을 품게 되었다. 1899년 1월 외직으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德源府尹) 주임관 1등으로 부임하였다. 중앙 정계에서 윤치호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후 원산감리로 부임한 뒤, 1900년 6월 삼화감리사 겸 삼화부윤, 이듬해 7월에는 다시 함경남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으로, 이어 원산항재판소 판사에 재임명되었다. 처음 덕원 감리라는 외직으로 보낸 것이 조병식 내각이 중앙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임은 독립협회 시대의 정적이던 보부상들을 비밀로 파송하여 동정을 살피게 했다는 사실에서 확인 된다. 주목하는 것은 이 암행 결과인데, 나중에는 암행어사까지 출동시켜 '애민태과 손실정체(愛民太過 損失政體)'라는 죄명으로 봉고파직을 시켰다는 점이다. 이후 1902년 7월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 7월 12일 겸 삼화항재판소판사(三和港裁判所判事)로 발령받았다. 1902년부터는 기독교 남감리회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이 경성부 종로방 고간동에 세운 캐롤라이나 학당의 후견인이 되었다. 1903년(광무 6년) 1월에는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경북도, 간도 일대의 민생을 시찰하였다. 1903년 1월, 함경도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흥에 파견되었고, 7월 천안군수로 부임하였다. 천안군수로 재직 중에는 광산 채굴을 하며 조선인을 함부로 구타하던 백인 사업가를 유창한 영어로 호통을 쳐서 그 횡포를 막아주었다. 1904년(광무 7년) 2월, 전라남도 무안감리(務安監理) 겸 무안군수로 발령받았다가 3월 12일 다시 외무부협판 겸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지방관으로 있는 동안 러·일 양국의 각축을 보면서 인종적 차원에서 일본인들의 '동양평화론'과 일맥상통한 '극동 3국 제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중앙 정계에서 좌절된 민중을 위한 개혁정치의 이상을 지방에서나마 실현시키고자 진력하였다. 그러나 민권사상과 참정권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황제에 대항하려는 역적 집단으로 보는 민중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 3월 내각의 외무부협판에 임명되어 다시 중앙 정계로 불림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보수적인 정치체제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그 이념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유교(성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1904년에는 잠시 군부대신서리를 지내기도 했다. 1904년 3월, 일본의 특파대사 영접단의 단장인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이 되었다. 그해 8월 에는 외무부대신이 공석이 되자 그 서리사무에 겸임되었다. 1904년 김규식, 이상재 등과 함께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해 8월 외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였다. 12월 정부의 관제 개정소 의정관(官制改正所議政官)에 임명되었다. 1905년 2월 재혼한 아내 마수진(馬秀珍, 1871~1905)과 사별하였다. 그해 5월 외무협판에서 외무부대신 박제순의 사퇴로 그 서리를 겸임하였다. 이 시기 서울 전동에 있던 시종무관장 민영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를 환영하는 이색 만찬이 개최되었다. 이 만찬에 큰 기대를 걸고 참석했다. 주빈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이고 배빈이 앨리스양을 수행한 해군대장 트레인과 앨리스 양의 약혼자 커빈 해군 중장이었다. 한국 조정에서는 민영환 등과 미국인으로 항일 필봉을 휘두르고 있던 '코리안 리뷰'사 주간 헐버트(흘법) 여사 등 친미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윤치호는 1905년(광무 8년) 9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할 것을 예상하였다. 그는 " 일본의 괴로운 노예제 하에서 한국인들은 동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며 일본에 의한 압제를 예상했다. 1905년 황성 YMCA 기독교청년회 부회장에 취임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한국의 독립은 오늘 오전 1시 또는 2시경에 조용히 사라졌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러나 정부는 다시 외부대신 서리에 임명했으나 취임을 거부했다. 이완용 내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1월, 일본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2월에는 그는 한성부 저잣거리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다. 그 날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5년 12월, 내내 한성부를 왕래하며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역으로 그가 갑신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과 친밀했던 점을 들어 비난했다. 윤치호가 을사조약 반대를 핑계로 다른 마음을 먹고 공화제를 획책한다는 흑색선전을 한 것이다.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조약을 도로 회수해 없애버릴 방도가 있다면 누가 죽기를 맹세하고 다투어 나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내정과 지금의 외교를 보면 어찌 상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든든히 가다듬고 실심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필경 오늘날의 위태로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의 길은 자강(自強)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윤치호는 YMCA 청년회 활동에 매진하였다. 청년회 활동과 교육, 강연 활동에만 전념한 것이다. 1905년부터 경성부에 설립 예정이던 대한도서관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과 부지 마련에도 참여했다. 발대식부터 각 준비과정에 관여한 인물들을 당시 황성신문 기사에서 찾아보면 윤치호 외 16명이었다. 대한도서관 개관 기념식 축사 낭독에서 "경성은 물론 각 산골과 촌락까지도 도서관이 보급되고 책 읽는 문화가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1906년 3월, 도서관 평의회에 참여하고, 도서관 운영위원 겸 도서관평의회 의원이 되었다. 1906년 1월 윤치호가 외무협판직과 외무대신 사무서리직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으로 재선되었다. 1906년 3월에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운동을 펴다 해산되어 그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6년 5월 대한제국 정부의 일본 유학생 감독(日本留學生監督)에 임명되었다. 10월에는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의 상소로 일본 유학생 감독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했다. 후임자는 그의 사촌인 윤치오(尹致旿)가 되었다. 1906년 5월 이능화와 장지연 등과 함께 승려들이 세운 명진학교(明進學校, 동국대학교의 전신)의 교사로 출강하였다. 1906년 10월 한영서원을 설립하였다. 이때 미국 유학시절에 후원을 받았던 캔들러 박사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문을 구하였다. 캔들러 박사는 학교 건립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주며 기독교 신학 학교, 혹은 기독교 계열 학교 설립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답장에서 "기술과 상업을 가르치는 실업학교의 건립이 먼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노동이 수치(羞恥)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자원이 빈약한 한국의 미래는 기술과 노동에 있다는 점과 기독교는 일을 하고 악습과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상, 종교로서 필요한 것을 주입”시키려 했다. 드디어 1906년 10월, 윤치호는 오랜 꿈이었던 학교설립,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었다. 바로 이 때 첫 해 소규모의 입학생들을 위해 프린트본 ‘찬미가’(초판)를 발행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대한제국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데 기여하였다. 1907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의 '실력배양운동'에 동의하여 신민회의 회장을, 안창호는 부회장을 맡았다.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전덕기·김구 등의 주도하였다. 7월에는 고종 퇴위 압력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한편 고종 양위를 주도한 이완용 등을 성토하였다. 7월 순종이 즉위하면서 그에게 특별히 외무부협판직을 제수하였으나 불민함을 이유로 고사하였다. 1908년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여 한영서원 원장과 겸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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