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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최초 국악기 백화점, 양지국악사 조남양 사장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종로 3가 네거리 까지는 예전에 대궐길이라고 불리었던 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관혼상 제용 각종 도구와 북, 장구, 꽹과리 등을 빌려주던 세물전이 있었고 노래하는 가인, 춤추던 명인들이 인근에 많이 살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과 더불어 창덕궁 앞에 새로 새긴 국립국악원, 국악학교을 중심으로 명인 명창들도 주변에 많이 기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 거리는 명실공히 국악 의 거리로 칭하게 됐다. 이후 이 거리는 국악로라고도 불러지는데 거리변에는 10여개의 국악기 상가, 국악학원 그리고 한복집들이 몰려있다. 국내 최초 국악기 백화점을 지향하는 양지국악기도 이 거리에 있다. 10여전 양지국악사을 설립하고 문을 열때도 다른 국악사에 비해서 매장의 크기와 다 양한 상품,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학생들과 국악학원에서 찾았다. 특히 지리적으로도 좋은 가게 위치로 익히 국악계에 알려져 졌다. 그런 양지국악사 가 바로 옆에 있던 미스타리 의상실이 이사 가면서 빈 가게터를 인수하여 확장 오픈했다. 새로 단장하여 오픈된 매장은 국악기 전시장으로 사용된다. 그동안 양지국악사는 내외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했다. 여기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남양 사장의 장인정신과 부지런함, 그리고 저렴한 가격이 지금의 양지국악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조남양 사장은 국악사를 개원하기 전에는 무대소품 일을 했다고 한다. 주로 국립극장에 소품을 납품했고,한국무용, 고전, 역사 드라마. 영화 등 쪽을 전문적으로 일했다. 소품에 중요도는 작품에 가치성을 좌우 할 수 있는 중요한 일로 매일 밤샘을 하기가 예사였다. 특히 역사물이 많은 것은 고증을 들어야 되고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일에 진행이 안되는 날에는 고증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서 낮에 소품에 대해 조언을 듣고 밤에 직접적으로 소품제작을 했다. 그렇게 하나 하나 정성을 들여 납품을 하고 작품이 무대에 올라가서 성공하면 그 기쁨은 그동안 고생하면서 소품을 제작했던 아픔을 잊는다고 한다. 조남양 사장이 악기사를 만들게 된 동기도 단순했다. 소품을 하는 동안 여러 단체 선생들에게 심부름처럼 악기를 조달하게 되고 여러 가지의 소품이나 악기 중에 반품을 받는 것이 나오면 그 물품을 고스란히 집에 보관해야 하는입장이었다. 조남양 사장은 소품작업장만 가지고 제작하면서 당시 문공부 산하에 관납을 병행했기에 물품을 반품받으면 보관이 곤란한 상태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서 쌓인 국악기로 인해 곤란했고, 국악기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소품제작으로 쌓인 기술을 바탕으로 무엇이듯지 만들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종로 3가 국악로에 국악사를 개업 할 수 있었다. 조남양 사장은 개업 후 우리의 옛 악기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그 악기에 대한 옛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우리의 전통 악기들은 대부분이 일상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들로 만들어졌으며, 가능한 인위적 가공을 배제한체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악기는 한국인이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문화매체이자 상징이며, 고유한 심미의식의 결정체로 우리의 악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문화의 특질을 파악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들은 실천에 옮겨고, 고가였던 우리 악기들을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도 가질 수 있고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악기가격을 낮춰서 판매을 하게 됐다. 이러한 가격은 금새 소문이 나 업계에 퍼졌고, 같은 업계에서는 가격 인하 관계로 많은 지탄을 했다. 그러나 악기를 현실적으로 많이 필요로 하는 국악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고객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내 주위에서는 가격 인하로 물건이 하품이다는 악소문이 돌았다. 조남양 사장은 이러수록 악기에 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면 2001년에 하남시에 종합적인 국악기 생산을 위한 공장을 설립하게 됐고, 악기제작에 필요한 연구와 실험을 통하여 오랜 기간 사용하더라도 습기나 온도 등 외부환경에 그 형태가 변형되지 않고 음색이 변색되는 것을 방지하고, 원래의 풍부한 음색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우수한 국악기를 제작하게 됐다. 이렇게 생산된 각종 개량악기와 북 종류의 대형악기들은 이번에 개장된 매장에 전시하여 누구나 보여 줄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조남양 사장에게 그 동안 악기를 생산판매하면서 느끼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질문을 하자. "우선 양지국악사를 사랑해 주시고 늘 관심을 가져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모든 분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수 없어서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인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양지국악사에서 제작한 악기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국악기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한편으로는 양악과 어울릴 수 있는 악기들을 다양하게 연구 개발하고 있습니다. 국악에 대한 자부심으로 악기를 제작하고, 국악의 대중화, 더 나아가서는 국악의 세계화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양지국악사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항상 저렴한 가격, 좋은 품질,차별화된 악기로 고객분들을 찾아 뵙겠습니다.” 한편으로 조남양 사장은 악기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하고 가격만 낮추기를 바라고 있는 점이 아쉽다고한다. 특히 우리국민 모두가 우리 악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사용했으면 하는 바램을 전했다. 성악이든 기악이든 악기가 없으면 존재할수 없다. 악기는 음악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판소리에도 ‘1고수 2명창’이란 말이 있듯 북의 역할이 중요하고, 민요에는 장구가 필요하고, 풍물굿에선 사물악기가 바탕이 되기도 한다. 대담/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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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규 - 우리의 오랜 친구, 개1, 민중의 심리에 잠재된 개의 의미 개는 우리 민족에게 오랜 세월 동안 사랑을 받아왔던 동물이다. 그의 위치는 집을 지키는 수호신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죽어서 인간을 보신시켜 주는 희생양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의 속성을 바탕으로 하여 개의 의미는 여러 가지 상징을 부여받아 왔다. 개가 출현한 꿈의 경우는 법관쪾경찰관쪾경비원쪾신문기자쪾탐정가 등의 사건해결사로, 충복, 머슴 등의 경우는 개의 충성스러움을 뜻하기도 한다. 동시에 전염병이나 방해물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개띠의 사주로는 天藝星(천예성)이라고 하여, 기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많고 마음이 착하고 유순하다. 부지런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재물 운이 좋아 성공이 빠르며, 청렴하고 정직한 편이다. 남자는 색욕이 강한 편이고 호언장담을 잘하여 가정에 소홀 하는 경향이 많다. 구비문학을 통해서 살펴 본 개의 존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개가 전형적인 忠(충)의 실천적인 동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가 개관련담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주로 속담에 나타나는 것으로 비천한 개의 본성을 통해 인간의 그릇된 성질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설화를 중심으로 할 때 개는 미물이기는 하지만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상징적인 존재물로 부각되어 있다. 개가 그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개무덤형 전설>의 유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와 유사한 형태의 이야기까지도 형성하면서 전승을 이루었다. 이러한 이야기의 형성은 개의 속성이 사람을 잘 따른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개는 악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관적인 위치에 놓여진 이야기도 있는데, 이 역시도 개가 후각을 통해 물건을 잘 찾아내는 본성과 관련되어 형성된 것이다. 민요의 경우는 낱말의 유희요와 같이 개의 반복을 통한 개타령도 있으나, 대개는 정요(情謠) 형태의 내용을 취하고 있다. 즉 여자가 임을 기다리는 심정을 바탕으로 개가 이것을 방해한다는 일종의 심리적인 미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의 역할은 임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밤중에 집으로 접근하는 일반인을 경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의 상징은 절대적인 미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리적인 상황을 노출하는 의미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평가된다. 속담에서도 개의 본성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비유는 원초적으로 사악하거나 멍청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나쁘게 말할 때 사용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개의 본성, 예컨대 똥을 먹는다거나 흙구덩이에서 노는 습성들이 속담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개의 존재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이며 인간에게 매우 친근한 동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세계에 오래 전부터 소속되어 왔기 때문에 개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그 만큼 높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현재 인간들의 생활공간이 변화되면서 개의 육체를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작태를 벌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파트의 공간에서 개를 못 키우게 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개의 성대를 잘라 버리는 수술이 유행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2, 우리의 일상생활 중 개와 관련된 말들 중에는 좋은 말보다 나쁜의미로 사용되는 말이 많다. '말도 안되는 무슨 개 같은 말’이냐고, 또 ‘개 같은 짓’을 한다며 비상식적인 일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형편없이 나쁜 상황을 개 같은 일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개떡이란 말도 있다. 심하게는 욕을 할때도 개 같은 ××란 말로 남을 비하하기도 한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자’ 라는 말에서도 개같이 번다는 뜻의 의미는 별로 좋은 뜻은 아니다. 이처럼 개와 관련된 말을 하면서 고상해지는 경우는 없다. 3, 우리의 일상생활 중 개는 사람들을 위해 충복의 역할을 한다. 먹을 것도 사람이 먹다 남은 것을 먹는다.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주인 없는 집을 지키고 노인분들에게는 친구가 되어주는가 하면 맹인이 길을 걸을 때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사냥할 때는 사냥감을 찾아 주기도 한다. 마약탐색도 해 주고 범죄 수사시 많은 활약을 한다. 최근에는 사람들의 취미생활을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즐거움을 주고 있다. 심지어 배가 고프거나 영양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살신성인의 역할로 잡아 먹히기까지 한다. 죽어가는 주인을 위해 수건에 물을 적셔와 회생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개는 인간을 위해 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로 고마운 일을 많이 한다. 사람들이 개를 넣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면 개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개들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개자를 넣는지’하고 억울해할 것이다. 4, 개는 꼭 필요한 일을 위해 짖는다. 생각해 보면 동물이 소리를 낼 때 운다고 하고, 노래한다고 표현한다. 새가 울고 꾀꼬리가 노래하고, 여우도 운다고 하지 짖는다고 하지 않는다. 새도 여우도 닭도 짖는다고 하지 않는다. 개는 노래한다고, 운다고 하지 않는다. 짖는다는 표현은 개에게 붙이는 대표적인 수식어다. 개가 짖는다고 한다. 왜 개는 짖는다고 할까. 사전을 찾아보면 ‘짖는다’는 지껄이다를 농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일상 말하는 것을 농으로 표현하면 짖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용될 때는 그런 의미로 상용되지는 않고 있다. 개는 세가지 경우에 짖는다. 도둑이 들어왔을 때 짖어 겁을 먹게 하고, 도둑이 들어 왔음을 주인에게 알린다. 또 주인이 왔을 때 반가워서 짖는다. 그 어느 경우가 헛소리로 해석될 것인가. 개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할 때 짖는다. 도둑을 물리치거나 마약탐색을 하는 개들의 행위는 매우 의미있고 보람있는 일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인도하는 것은 약자를 위한 숭고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그 같은 일을 어느 누가 개같은 짓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올해는 개의 해다.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지 말자. 개는 다산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태어난 자기 자식도 열심히 키운다. 우리 개의 해에 다같이 개같이 잘 살자. 무엇인가 열심히 자기 몫을 다하는 개처럼 뛰자. 개는 꼭 필요한 일을 위해 짖는다. 우리사회가 지향하는 평등하고 누구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꼭 필요하고 보람된 일을 위해 개처럼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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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살풀이 춤 최 선 명무"혼(魂)이 담겨있고 정신이 스며있는 춤을 춰야한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텅 빈 동작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고. 선생의 한평생 무용철학이기도 한 이 말은 곧 ‘춤의 기본과 본질을 알고 창작과 전통의 구분을 명확히 하면서 인간성과 도덕성이 바탕이 된 바른 춤, 바른 동작을 깊은 내면에서 이끌어 올려야 한다’는 춤의 대한 정신을 말한다. 전북 춤계에서 영원한 뿌리로 평가받는 호남 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최 선 선생 ! 「이제 나는 한 사람의 춤꾼으로서 개인의 영욕에만 사로잡힐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나의 춤은 곧 나의 희망이요. 겨레의 희망이기를 소망하고 기원할 따름입니다.」고 고뇌 하면서 최 선 선생은 춤과 같이 지나쳐 버린 60년이란 긴 세월을 돌이켜 본다. 「최 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춤꾼! 이렇게 부른다. 그것은 무대에서 삶이 잠잔 시간 보다 훨씬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생을 잘 모르더라도 무용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선생의 몸에는 「춤끼」가 자르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는 일제의 식민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5년 11월 7일 전북 임실에서 유교집안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명의 형님들은 일본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였고 부친은 유학에 밝은 시골 선비여서 최 선 선생도 당연히 그런 가풍을 따라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기질은 일반적인 학문을 공부 하는 쪽보다는 예능쪽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러한 자기 기질을 발견했고, 수많은 질타와 역경을 고집 하나로 이겨내며 일생을 춤꾼으로 살아오고 있다. "춤은 무당이나 하는 것이거늘 어찌 남자인 네가 춤군이 되어 집안 망신을 시키려느냐”며 무섭게 질타하는 부친의 노여움, 집안 식구들의 눈치, 동네 사람들의 비아냥이 열 살도 채않된 그에게는 너무 벅찬 부담이 됐을텐데도 그런 모든 아픔을 당차게 이겨낸 것을 보면 아마도 선생은 춤을 위해 태어난 일것이다. 오지추운 겨울 밤에도 어머니의 옷가지를 몰래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 달빛을 조명삼아 혼을 불사르다가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지고 오한에 떨던 꼬마,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예회 때면 인기를 독차지하던 꼬마 최 선이 오늘 한국 무용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이룬 것은 완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월북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미화 선생과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무용 강습을 하고 있던 김미화 선생이 한눈에 춤 꾼으로 뛰어난 재질이 있음을 알아보고 체계적인 무용을 가르치면서부터 선생의 춤은 탄탄한 바탕과 독창적인 예술성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나이 불과 열 두어살 때였다. 이때부터 선생의 춤 인생은 한번도 쉴틈없이 이어진다. 동족 상잔의 비극인 6. 25 사변중에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었고, 하반영 선생 등을 따라 전주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연극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엔 마침 전주에 국악원이 개설되고 주위에서 전주국악원에 계신 추월이라는 할머니 선생이 판소리도 잘하지만 춤을 잘 추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갔다. 그 분은 항상 단아한 모습으로 국악원의 넓은 대청마루에 계셨으며, 방이 여러곳이 있는데도 거기서 판소리도 하고 춤을 추셨다. "그 때 당시에 봤을때 돗자리를 깔고 춤을 추시더라구요. 당시만 해도 수건춤이라 것만 알았지 살풀이 라는 것은 처음 알았지요. 또한 그때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무 장단이나 장구, 북, 꽹과리 등 구음으로만 춤을 했지요. 추월 선생이 직접 장구도 치시고, 돗자리 위에서 수건춤을 가르쳤던것을 기억한다는 선생은 지금 선생이 일궈낸 호남살풀이춤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소위 "수건 춤”을 배우게 되는데, 한량들이 흥에 겨워 기교도 없이 추던 그런 춤, 다시 말하면 춤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왠만한 사람들에겐 그 수건 춤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 망정 선생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춤, 가장 전라도 같은 춤으로 인식됐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에 사로 잡혀 밤낮으로 춤다운 춤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 수건춤이 바로 선생을 오늘의 한국무용계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남자 초립동이 춘다는 의미로 "동초(童草) 수건춤” 또는 "호남살풀이 춤”으로 불리우는 이 춤으로 최 선 선생은 지난 84년 11월 개천 예술제 특장부문에서 「호남살풀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으며, 96년 3월 전라북도 지정무형문화재 15호가 인정됐다. 그래서 이기반 시인은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 막혔던 강물이 흐른다. / 천만년 억겁에 / 쌓인 세월의 갈등도 / 원한에 사무친 시름이랑 / 철 철 철 녹아내린다. 」중략 이렇게 「살풀이춤에서」시로 찬양해 줬다. 어쨌든 최 선이 그 수건 춤에 매달리는 사이 어느 덧 그도 스무살 청년으로 성장했고, 춤 실력도 인정 받는 등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자신감에 전주에서 처음으로 "최 선 무용연구소”를 차려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6. 25 직후 무용가가 거의 없어 애로사항이 많았서요 아마 황무지인 전주에 한국 춤을 개척한것은 저 밖에 없을겁니다”라고 선생은 전한다. 전쟁도 끝나고, 공비 소탕도 대충 마무리돼 사회질서가 잡혀가던 1954년 전주도립극장에서 「논개」「승무」 「장고춤」 등으로 첫 개인발표회를 가져 전북 무용계에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전주도립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앞 에서 자신의 춤을 마음껏 펼치고 난 그날 밤, 그는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밤새껏 울었다. 너무나 거칠었던 세파를 헤쳐온 지난 날들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그의 가슴에 퍼져왔기 때문이었다. 이 첫 무용 발표후 그는 당시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얻고 있던 정인방 선생을 만나 정식으로 사사를 받는 영광을 안는다. 이때 서울 무대 입성과 전통 무용의 맥을 잇는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어진 계기가 바로 정인방 선생과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인정 받면가면서 한국무용 최고로 꼽히는 선생은 개인발표나 후진양성면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승무 살풀이 무당춤 등 한국 전통무용 뿐아니라 창작무용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은 197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가잿골의 전설」로 대상이 없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정신없는 국내외 공연과 발표회 등이 선생의 춤 진수를 과시하기도 했다. 80년엔 한길무용회 특별회원으로 일본 자유중국 미국등지를, 그리고 85년엔 대통령상 수상 혜택으로 미국 동남아공연을 가졌고 그 밖에도 미국 일본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70년대부터 무용협회 전북지부 지부장직을 맡아 오랫동안 일해온 선생은 그동안 전라예술제를 비롯, 각종무용제를 주최, 전북에 무용의 뿌리를 내리고 맥을 잇는 활동을 지금까지 펼쳐왔다.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어야지, 우리 전통춤을 좀 더 멀리 또많이 전수, 보급하는 일이 남은 삶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하는 선생의 춤은 현재 전북대 무용학과의 장인숙 교수, 이해인 교수, 김원(현대무용), 원광대 이길주 교수, 충남대 정은혜 교수, 서울 고선아 선생, 광주 허순선 교수, 그리고 선생의 딸 최지원 씨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끝으로 선생은 제자들과 딸 지원 씨에게 부탁한다. 호남살풀이 춤이 영원히 살아 전승 보존되고, 꽃을 피었으면 한다고. 특히 딸이 아버지의 염원과 꿈, 그리고 다 추지 못하것을 열심히 하여 아버지 보다 나은 춤을 추었으면 한다.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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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 유영건 회장 인터뷰일주일간의 한국방문을 마치고 떠난 故 안익태 선생의 부인 롤리타 안 여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애국가가 바로 한국이고, 애국가를 들을 때 남편과 한국인들의 순수한 감정을 마음속으로부터 느낍니다. 그 애국가를 한국에 돌려드리고 가서 정말 행복합니다.” 뭉클하다. 앞서 16일 문화관광부를 찾아 애국가 저작권을 무상으로 양도했던 그다. 애국가 저작권을 둘러싼 구구한 논란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듯하다. 애국가 저작권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말 가수·연주자에게도 전송권을 부여한 개정 저작권법이 발효되면서부터다. 그런데 저작권법이 강화된 데 불만을 품은 일부 네티즌이 "애국가까지 돈 내고 들어야 하나”라며 새삼 시비를 걸면서 여론이 부정적으로 흘렀다. 차제에 애국가를 바꾸자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왔다. 애국가에 대해서는 다소 오해가 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애국가는 정부가 법령으로 공식 제정한 적은 없다. 1948년 정부수립 때 국가로 채택됐고, 그것이 교과서 등에 실리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로 인정돼왔다. 서울〓수도, 태극기〓국기, 한국어〓국어이듯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국가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운 ‘관습헌법'일 것이다. 한국의 저작권사업과 콘텐츠 산업은 최근 아시아를 강타한 한류 열풍에 힘입어 차세대 한국의 성장 동력을 각광받고 있는 분야다. 시장 규모만도 지난해 생산 기준으로 6조원 대에 이르렀으며, 유통 시장을 포함하면 더 큰 시장을 형성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산업의 최대 걸림돌은 불법복제로, 많은 저작권 및 콘텐츠 산업이 복제로 인해 산업 기반이 뿌리 채 흔들렸고, 최근엔 인터넷은 물론 지적재산권에까지 불법복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이에 국악신문사는 (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 유영건 회장을 만나 지난 2개월여 동안 논란 돼온 `저작권법 개정에 대한 문제와 저작권협회의 의견과 음원을 관리하고 있는 유영건 회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올해 1월부터 저작권 및 콘텐츠 불법복제에 대한 논쟁이 인터넷과 언론지면을 통해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까지 언론과 업계의 이슈가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문제는 새로운 이슈인가요 아니면 누적된 문제로 볼 수 있나요. -새로운 문제로 볼 수는 없지만 저작권과 문화콘텐츠 산업 규모가 커지기 전에는 우리 모두 이 같은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에도 저작권과 콘텐츠 불법복제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음반은 한때 4000억 원에 달하는 시장 규모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1300억 원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최근 들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불법복제가 이뤄지고 있으면서도 사용자 스스로 `도둑'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음반 시장은 고사 위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음반 외에도 게임과 영화가 출시되기도 전에 복제되고 있는게 최근의 현실입니다.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한 언론과 관련 협ㆍ단체들이 이슈를 제기해 왔으며, 이 같은 활동이 최근 저작권법 개정과 맞물리면서 사회 전체의 이슈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저작권법상 저작권에는 저작재산권과 저작인격권이라는 양대 권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작재산권이란 저작권자가 저작물을 배타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로, 저작권법상 인정되고 있는 저작재산권으로는 복제권(제16조), 공연권(제17조), 방송권(제18조), 전송권 (제18조의2), 전시권(제19조), 배포권(제20조), 2차적 저작물등의 작성권(제21조) 및 대여권(제65조의 2)등의 지분권(bundles of right)이 있습니다. 여기서 타인의 음악 저작물을 이용하고자 하는 자가 각 저작권자로부터 허락받아야할 권리는 복제권 및 저작물을 공중에 제공할 권리입니다. 또한 저작재산권에 내포된 복제권, 공연권, 방송권, 전송권 등 개별적인 권리는 각기 별개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별도의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므로, 그 중 어느 하나에 대한 합법적인 이용권자리고 하여 당연히 그와 다른 권리까지 가지게 된다고 볼 수는 없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허락받지 아니한 권리는 이를 이용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제라도 음원과 콘텐츠 불법복제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봅니다.- 처음에 음악을 선택하게 된 동기와 어떤 장르의 음악을 했는지요. -저는 작곡가입니다. 장르는 순수 음악과 대중 음악을 주로 해 왔습니다. 제가 알기로 집안에서 음악을 좋하했습니다. 아버님(유동현)은 시조(정악)를 즐겨 부르시고 시조대회에 나가 수상도 하시고 퉁소도 잘불었다고 합니다. 어머님(정명숙)은 초등학교 교사로 계셨는데 음감이 뛰어나신분 이였지요, 그러나 전문적인 집안은 아니었구요. 아버님이 제 나이 일곱에 돌아 가셨는데 故 김월하 선생님과 인연이 많았다고 합니다. 김월하 선생이 부산에 피난 오셔서 고생하실때 돈독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김월하 선생이 서울에서 활동 하던 중 방송에 아버지를 소개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작곡자의 소질은 부산 금정초등 3학년 때 기악부 활동을 했는데 그때부터인것 같습니다. 4학년부터 작곡에 재능이 보였고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희 집안은 6남 3녀이며, 음악은 모두 좋아하셨고 위로 형님 한분이 고교시절부터 교회성가대 지휘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과 지금까지 음악과 지냈지만, 사실은 늦깍이 입니다. 작곡학위는 마흔세살에 연세대 음악교육원에 들어가 받았습니다. 여기서 올 4.0 만점을 받았고 졸업때 학생대표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협회에 저희 국악 관련 회원은 몇분이고, 협회에서 국악에 대한 배려와 회장님은 국악을 알고 있는지요. -저희는 정회원과 일반회원으로 구분되어지고 있으며 현재 이사로 박해일 선생님, 황용주 선생님이 계시고, 박범훈(중앙대 총장) 등 20여분이 활동하고 계십니다. 준회원은 분야별로 구분되지 않았지만 약 40여명 됩니다. 전통음악부문에 배려는 사실상 별로 없습니다. 저희 협회는 일종의 징수 기관입니다. 음원을 관리하고 그 것을 나눠주는 역활입니다. 다른 파트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음악의 기둥인 국악을 배려하여 창작요건를 고취시키겠습니다. 국악은 가야금을 8년 정도 배웠습니다. 김성연(이화여대 국악전공) 선생에게 성금련 류 가야금 산조를 다 배웠습니다. 그리고 황병기 선생님의 침향무 등도 배웠습니다. 앞으로 정신적 여유와 시간이 있으면 선율 음악인 아쟁도 하고 싶고, 강태홍 류 가야금 산조를 더 배우고 싶습니다. 그 후에 가야금산조와 아쟁과 관련된 전통음악(20-30분)곡을 쓰고 싶습니다. 서양의 소나타처럼 산조를 활용하여 대곡을 쓰고 싶습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제 인생의 목표가 그러합니다.- 협회 회원 자격 조건이 있다면는요. -제가 알기론 대한민국 국악계 등 국악게에서도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것으로 압니다. 굳이 자격이 있다면 고정된 매체를 기준으로 발표된 음원이나 발표회 프로그램, 출판물에 게시된 자료을 협회에 제출하며 준회원으로 가입됩니다. 또한 경력은 상관없습니다.-유영건 회장은 지난 10월 18일 2004 CLSAC 세계총회를 1984년 일본에서 첫 회가 열린 이후 두번째로 개최하는 역량을 보였다. 특히 총회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음악 저작권 네트워크를 만들고 지적재산인 창작과 소유 그리고 경제, 사회 및 문화적 측면에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하겠다고 한다. 대담/김호규 기자(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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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전 '열암 송정희 선생을 찾아서'열암 송정희 선생을 찾아서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술을 많이 접하고 즐길 줄 아는 마음이 먼저이겠지만 ‘후원'의 이름으로 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 또한 중요하다. 옛날 로마의 재상 마에케나스(Maecenas)의 문화예술에 대한 두터운 보호와 지원의 유래에서 오늘날 기업과 문화를 이어주는 ‘메세나(Mecenat)' 활동이 이어진 것처럼, 현대에는 문화예술과 이를 뒷받침해 주는 후원의 관계가 일차적인 상호관계로서뿐 아니라 우리 문화예술의 토양을 일구고 미래를 건축해 나가는 데에 있어 근간을 이룰 만든 중요한 요소로 발전했다고 할 것이다. 열암 송정희 선생은 오늘날 열암체라는 서체의 일가를 이루기까지 고금의 모든 서체를 익히신 서예가로 정평이 높다. 서체 또한 묵향과 같이 짙고 깊어 고매한 작품세계를 이루고 있으며, 오늘날 대표적인 서예가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연암 송정희 선생을 만나보았다. 기자가 열암 선생께 저희 국악신문 명사를 찾아서라는 지면에 소개하고 초대를 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선생을 '내가 무슨 명사여' 그러나 부득불 찾아 뵙겠다는 기자의 고집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2월 4일 오후 3시로 약속시간 잡고 버스로 광화문 구세군 앞에서 내렸다. 아직 추운 날씨지만 이날은 푸근했다. 구세군 건물 옆길을 따라 골목길을 쭉 올라가니 선생이 계신 축구회관이 보였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문을 여니 묵향과 녹차향이 가득하다. 또한 사무실 곳곳에 선생의 작품과 괴암 괴석이 눈에 드려온다. 찻잔 위로 퍼져 가는 국악방송에서 마침 시조창이 은은하다. 반갑게 열암 선생이 따라 주는 녹차 한 모금하니, 입 안에 푸른 향이 고인다. 기자와 열암 선생과 만남은 10년쯤 되어 보인다. 경기민요 예능보유자인 이춘희 선생님의 소개로 인사를 드렸다. 그때 주셨던 명함을 내보이자 선생은 깜짝 놀라시며 새로 주신다. 선생께 신문을 드리고 이 지면에 초대합니다. 라고 설명하니 그냥 세상사는 애기, 국악계 소식이나 얘기하자고 한다. 열암 선생은 자신이 또한 종이와 먹으로 스스로의 예술 탑을 쌓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주변 문화를 사랑하고 아끼는 예술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들어 온 판소리와 경·서도민요에 대한 선생의 사랑은 남달라 오래전부터 주변 예술인들과 교류해 오면서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담당해 왔다. 기자가 처음 열암 선생을 뵙때도 이춘희 선생과 임이조 선생이 주최하는 청소년국악경연대회 후원 때문이었다. 그때 후원해 오던 대회는 지금까지 올곧은 청소년국악경연대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전남 고흥 출신인 열암 선생은 6살 때 서예에 입문했으며 88년부터 3년간 연속 전국서예대전 특선입상과 한국작가협회 최우수작가상 등을 수상했으며, 93년 대전엑스포 제호와 충무군 이 순신 장군대첩비 등을 제작했다. 또한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동남아서예협회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97년에 한국청소년 건전문화육성 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 청소년 문화전수 사업 등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며, 한·중·일 서예가협회 한국대표와 한국전통문예진흥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2003년 12월 열암 선생은 국립극장 남산이전 30주년을 맞아 국립극장 발전기금 모금에 동참한다. 선생이 45년간 연마한 서화작품을 기증하면서 "한편 기쁘고 한편 부끄럼이 앞선다. 나는 아시(兒時)부터 붓을 잡고 천금(千今) 40여년(餘年)을 이 서(書)의 길을 걸으면서 늘 느껴오던 것은 이 길이야말로 가도 가도 끝이 없고 험한 외길로 가시밭길이란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길을 숙명(宿命)처럼 생각하고 내 목숨같이 사랑해 왔다”는 감회를 밝혔다. 이 무렵 국립극장에서는 2003년 12월 22일, 판소리가 유네스코 선정 ‘인류구전 및 무형 유산걸작'으로 선정된 경사를 기념하고, 우리 전통예술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나의 길 우리소리' 라는 특별공연을 달오름극장에 올리기로 기획했다. 평소 판소리를 비롯해 우리나라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과 조예가 깊은 열암 선생이 국립극장 발전을 위하고 유네스코 선정 ‘인류구전 및 무형 유산걸작'으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당신의 분신(分身)과 같은 귀한 서예 작품을 기꺼이 기증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또한 선생은 이에 앞서 1999년 11월 29일 죖고려대 100년 기념사업' 출범식에 서예작품 5000여점을 고려대 발전에 써달라며 기증하여 화제였다. 시가로 자그마치 200억원 상당에 이르는 서예 작품들이었다. 구한말 고려대 전신인 보성 전문학교 설립에 앞장선 송병헌 선생의 손자인 열암 선생은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라 평소 고려대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이 계기가 됐다.”고 기증 배경을 설명했다. 열암 선생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할아버지가 소리를 좋아한 관계로 사람 방에는 소리 좀 한다는 분들은 항상 계셨다. 그래서 소리만 들리면 몽유병 환자처럼 소리를 찾아다녔다. 이것이 소리에 대한 선생에 연(緣) 이였다. 그래서 선생은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과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고 한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이런 한 정신 기조를 가진 선생은 97년에 (재)한국청소년건전문화육성재단을 설립하고 국악을 전공하는 장학사업과 청소년 문화전수 사업 등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근 10년을 이어온 사업은 국악을 전공하는 200여명의 학생들이 혜택을 받았다. 또한 장학사업 뿐만이 아니다.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서화(書畵)를 무대배경이나 프로그램에도 흔쾌히 내주시기도 하고 장래성 있는 국악인을 초대하여 격려하는 연희도 열어준다. 요즘 선생은 "판소리보다는 경기민요나 서도민요를 즐겨듣고 공부한다고 한다. 한동안 판소리에 빠져 조상현 명창에게 소리도 배웠다는 열암 선생께 앞으로 계획을 질문하자. 여러 국악계 지인들과 약속한 것이 생각난다고 했다. 작지만 죖악·가·무'를 제대로 가르치는 국악대학 설립하겠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국악대학 교육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대학은 큰 가르침의 전당인데 과연 이에 걸맞은 역할을 해왔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열암 선생은 국악을 사랑한다. 그것도 매우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애호가이다. 오전에 서재에 출근하면 바로 국악방송을 틀어놓고 청취한다. 오후 퇴근해야만 이 방송을 끈다. 그 열린 마음과 서예 예술을 통한 사회 환원활동에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열암 송정희 ˚ 캐나다 몬트리올 주립대학 박사과정 수료˚ 모스크바 대학 연수(모스크바)˚ 워싱턴 주립대학 연수(미국)˚ 옥스퍼드 대학 연수(영국)˚ 러시아 우라지보스톡 극동국립기술대학교명예 박사학위 취득˚ 고려대학교 정책, ICP, 언론 대학원 최고위 과정 수료˚ (재) 청소년건전문화육성재단 현 이사장˚ 열암문화재단 설립자˚ 한국전통문예진흥회 현 이사장˚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심사위원)˚ 대한민국 서예대전 특선 연 2회,한국문인화대전 특선 1회˚ 한국작가협회 최우수 작가상수상˚ 서울시 초대작가˚ 동남아 서예협회 심사위원장˚ 대한민국 서화대전 심사위원장˚ 한·중·일 서예가협회 한국대표° 한·일 서예협회 운영위원장° 서울대 강사° 자녀안심하고학교보내기국민재단 자문위원° 한국인권위원회 자문위원° 사랑실은 교통봉사대 특별자문위원° 자유중국 장통충 기념관 초대전° 일본 오사카 민단 초대전° 우라지보스톡 러시아제1회 고려인 문화의 날 행사° 극동 국립기술대학교 부시킨극장 초대전 ▶ 서울시 종루구 신문로 2가 1-131 축구회관 4층 (☎738-7755, FAX:738-6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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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2회 전국무용예술제제 42회 전국무용예술제 - 참가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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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파주전국국악경연대회 참가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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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통일국악대전 참가 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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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양산전국국악경연대회 참가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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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문학산 전국 12잡가 국악 경연대회 참가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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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대한민국 여성전통예술경연대회 참 가 신 청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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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전국민요경창대회 참가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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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김오채국악제 참가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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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영암전국국악대전 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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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대구 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 참가 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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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회 전국 고법 판소리 국악경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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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 이명희 명창기념 제12회 상주국악제 참가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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