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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기철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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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기철 명창, 20년 만에 ‘흥보가-박록주제’ 완창맑고 힘 좋은 소리’로 잘 알려진 왕기철 명창이 동편제 계열의 박록주제 ‘흥보가’로 2022년 국립극장 완창판소리의 포문을 연다. 왕기철은 16세에 소리 인생을 시작했다. 박귀희 명창으로부터 가야금 병창과 소리를 배운 이후, 정권진(심청가)·김소희(춘향가)·조상현(춘향가,심청가)·한농선(흥보가)·김경숙(적벽가)·왕기창(흥보가) 등 당대 명창들로부터 여러 소리를 두루 사사했다. 끝없는 수련을 거쳐 2001년 제27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부문 장원(대통령상)과 이듬해 KBS국악대상 판소리 부문 대상을 받으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1999년 국립창극단 입단 후 14년간 창극 ‘춘향전’의 이몽룡, ‘심청전’의 심봉사, ‘흥보전’의 흥보, ‘수궁가’의 별주부, 창작 창극 ‘제비’의 이경식,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의 도창, ‘서편제’의 유봉 등 수많은 작품에서 주역으로 활약을 펼쳤다. 2012년 대통령상을 수상한 명창들이 자웅을 겨룬 전주 MBC 판소리 서바이벌 ‘광대전’에서 우승했으며,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판소리의 매력을 알리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앞장서왔다. 판소리 발성법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이론적 탐구에도 관심이 남달랐던 그는 지난 2017년부터는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이자 교육자로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왕기철은 박록주 명창에 이어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던 한농선 명창의 마지막 제자로, 한 명창에게서 ‘흥보가’를 배웠다. 2002년 6월 소리꾼 생애 처음으로 ‘흥보가’ 완창 공연을 발표했지만 같은 해 4월 작고한 스승은 미처 이 무대를 보지 못했다. 왕기철은 "개인적으로 각별했던 ‘흥보가’를 국립극장에서 20년 만에 다시 선보이려니 감회가 새롭다”라며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몸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감과 책임감이 크지만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 1월 광주시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김규형, 국립창극단에서 희극 연기로 사랑받았던 김학용이 고수로 함께하며, 유영대 국악방송 사장이 해설과 사회를 맡는다.국립극장은 완창판소리 ‘왕기철의 흥보가’는 오는 3월 12일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하며, 방역 당국의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객석 띄어 앉기’를 실시한다. 전석 2만 원. 예매·문의 국립극장 홈페이지(www.ntok.go.kr) 또는 전화 02-228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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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2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본래 농악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가 아니다. 상모를 돌리고 오방색 유니폼을 입으며 사물악기들을 울리는 방식은 근대기에 재구성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차후에 설명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민간의 풍속을 다양하게 포착했던 단원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 왜 현재 형태의 농악이 단 한 번도 그려지지 않았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농악은 정읍의 신흥종교 보천교를 겪으면서 급속하게 연예장르화 되었고 근대기에 접어들어 발빠르게 연예농악으로 성장하였다. 양옥경은 우도지역 농악의 전문 연예화 과정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근대의 출발로부터 해방 직전까지는 우도지역 농악역사에서 연예농악 형태의 농악 공연문화 형성 시기다. 군악성격을 강조한 내용과 공연 논리로 구성한 공연이 주를 이루었다. 둘째,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직전까지의 시대는 농악사에서 연예농악의 양식화 및 정형화의 출발 시기다. 가장 상징적인 문화 사건은 농악경연대회의 출현이다. 셋째, 1960~ 1980년의 시간대는 초기 문화산업형 농악 공연양식의 출현과 이와 관련된 향유문화가 형성된 시기다. 여성농악단의 흥망성쇠, 남성농악단의 쇠락, 산업근대화의 침투로 인한 전반적인 민속예술양식의 추락이 있었다. 넷째,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대 직전까지의 시대는 무형문화재 제도와 지역 중심주의에 영향 받아 지자체 기준으로 범주화 및 고착화되는 경향을 낳았다.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우도농악이라는 포괄적 이름으로 불렸던 농악이 문화재제도의 직접적 영향권에 들면서 김제농악, 정읍농악 등 지자체 행정단위를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그 주요 원인의 하나가 무형문화재제도다. 판소리의 동편제 서편제의 구분법도 그렇지만 좌도농악 우도농악 등으로 나누는 구분법도 조만간 다시 정리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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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영어방송, '조선 팝 3.0' 방송문화진흥회 지원작 선정GFN광주영어방송이 응모한 '조선 팝 3.0시대'(기획·연출 최항PD) 다큐멘터리가 2021년 방송문화진흥회 방송진흥사업에 선정됐다.이 다큐멘터리는 국악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국악 그 자체를 고스란히 사용하는 방식을 취한 K-팝화된 '조선 팝3.0'이라는 주제로 총 2부작으로 제작돼 오는 19일 오후 4시 방송될 예정이다.범 한 마리로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이날치밴드를 집중 조명했다.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고 광주에서 활동한 이날치는 서편제 명창이자 광대 출신 소리꾼으로 이를 오마주해 탄생했다.우리 것의 세계화를 내걸고 퓨전, 크로스오버하는 것이 아니라 '날것', '생짜' 그대로의 국악을 전면에 내세운, '얼터너티브 팝' 장르를 통해 k-팝화된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조선팝 3.0' 시대를 열었고, 제작진은 이를 다큐로 승화시켰다. 과거의 서편제 명창 이날치와 그 정신을 이어 전 세계를 매료시킨 현재의 이날치의 모습을 담아보고 그를 다시 대중 앞으로 부활시키려한 시도다.재조명된 이날치의 고향인 담양과 광주가 기존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를 단순 패러디 한 것으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주체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는 게 제작진의 입장이다.광주영어방송 관계자는 17일 "다큐멘터리에 K-팝화된 국악이 해외에서 신선한 한류문화로 열광받고 있는 모습과 소리를 알알이 담아보고, 더 나아가 전문가들의 의견을 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GFN광주영어방송(98.7FM광주/ 93.7FM여수)은 영어, 베트남어, 중국어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호남 유일의 다국어 라디오 방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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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무대 변사 ‘광대 김명곤’김명곤 씨는 독일어 교사, 잡지사 기자, 연극배우, 영화배우, 극단 대표, 시나리오 작가, 성악가, 소리꾼, 국립극장장, 문화부 장관 등의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노는 ‘광대’로 불리는 걸 좋아한다. 예인 김명곤을 관통하는 것은 전통의 가치이다. 그 자신도 "전통은 모든 예술의 고향”이라고 여긴다. 국악도 그를 형상화하는 주요한 키워드이다. 국악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국악이 그의 삶과 창작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국악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는 어떤 게 있을 것인지 등을 주제로 대담을 했다. 지난 10월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굿모닝 가곡’은 관객 반응이 뜨거웠다. 가곡만 들려주는 게 아니라 노래에 얽힌 스토리를 극과 영상자료 그리고 해설을 통해 전달했다. 특히 변사의 역할이 화제를 모았다. 변사는 특유의 목소리로 다소 코믹하게 노래에 얽힌 사연을 풀어주는 기능을 함으로써 음성 더빙이 안 되던 20세기 초 무성영화 시절, 극의 전개와 출연자의 대사를 읊어주던 역할을 하였다. 이 변사를 김명곤 씨가 맡아 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모든 무대 요소를 가곡 공연이라는 드라마 속으로 이끌었다. 성공적인 반응에 힘입어 ‘예술의 전당’ 측은 12월 1일부터 이틀간 세 차례 앙코르 공연을 개최한다. Q. 가곡 무대에 변사가 등장하는 건 획기적 발상이군요. A. 네. 관객들의 호응이 컸습니다. ‘변사 쪼(조)’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예요. Q 변사를 맡으시면서 참고한 모델이 있었나요? A. 옛날 연극할 때도 신파극에서 변사를 맡아 했었어요. 전설적인 변사 고설봉 선생이나 최후의 변사 신출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기법을 배우기도 했죠. 저한테는 굉장히 친숙하고 익숙한 역할입니다. Q. 변사가 해설을 해주면 관객들의 곡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죠. A. 맞아요. 그냥 해설이 아니라 드라마틱하게 언변을 구사해서 사람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효과를 내죠. 노래의 배경이나 시대적 분위기 그리고 작곡 작사에 얽힌 뒷얘기를 하니까 펑펑 우는 분들도 있더군요. Q. 감정이입이 되는 거죠. 젊은 세대들에게는 변사의 존재가 생소할 텐데 먹혔군요. A. 코미디언들이 과장되게 구사하던 것과 달리 저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애썼죠. 홍난파의 ‘울 밑에 선 봉선화’를 소개하며 "일제시대 때 우리 민족은 새장에 갇힌 새였다. 앵무새였다.” 이런 시대 상황을 코믹하게만 하지 않고 시 낭송하듯 들려주었죠. ‘동심초’ 같은 서정적인 노래는 그 시가 탄생한 중국 당나라 시대 여류 시인 설도의 시를 들려주고 이것을 김한석이 어떻게 아름다운 노랫말로 옮겼는지를 알려주었죠. 이렇게 하니 관객이 편하게 교감을 하더군요. Q 가곡뿐만 아니라 판소리 가운데서도 몇몇 대목을 변사의 해설에 이어 창을 들려주면 청중 호응이 크지 않을까 싶군요. 오페라로 치면 아리아들만 선곡해서 들려주는 갈라(Gala) 형식이 되는 거죠. A. 재미있을 것 같군요. 시도해봄 직합니다. 보통은 소리꾼들이 몇 마디 해설을 하고선 소리를 하는데 클래식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나 금난새 같은 지휘자가 곡을 소개하고 연주를 들려주면서 이해를 돕듯이, 판소리도 변사가 그 해설 기능을 맡아 할 수 있는 거죠. 관객들은 해설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Q. 가곡에 이어 판소리 변사로도 나서 보시죠.(웃음) A. 저는 할 수 있죠. 서양 음악, 우리 소리 모두 공부를 했으니까요. 모르는 분야 같으면 나서기 어렵겠지만, 동서양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고 또 제가 노래 부르는 걸 즐겨해서 재미나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Q. 네. 가곡과 판소리 장르의 ‘송해 선생’이 되시면 좋을 것 같군요.(웃음) 90살이 넘도록 하시면서 우리 음악에 대한 대중성도 높여주시고요. A. 네. 저도 그러면 좋겠습니다.(웃음) Q. 국악과 인연을 맺은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대학 2학년 때 고향 전주에서 가까운 김제에 놀러 갔다가 소리 배우는 단발머리 소녀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으셨다고요? A. 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서양음악에 매료돼 있었죠. 클래식, 오페라 아리아, 팝송 따위만 듣고 불렀는데 판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죠. 이렇게 좋은 우리 소리가 있었구나, 그런데 왜 몰랐을까....하고요. 그때 단발머리 소녀들 가운데 하나가 방송작가 김병준 씨 부인인 소리꾼 남궁정애 여사입니다. 그날을 계기로 저의 판소리 사랑이 시작된 거죠. LP판을 사서 듣기 시작한 겁니다. Q. 어떤 곡들이었나요? A. 임방울, 김현수, 박록주 명인들의 단가였어요. 알고 산 게 아니라 그 당시 인기 있던 레코드들을 사서 듣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어요. 가장 좋아했던 곡이 김현수 선생의 ‘사철가’였죠. 20대 초반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늙은 노래가 가슴에 와닿던지... 아마 폐병을 앓았고, 힘들게 객지 생활을 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힐링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Q. 그런 판소리들이 인생 전반에 어떻게 투영되었나요? A. 임권택 감독이 저한테 시나리오를 맡긴 1993년 영화 '서편제'에 제가 그 ‘사철가’를 삽입해 불렀죠. '개벽'에는 동학 혁명의 ‘녹두장군’ 전봉준 역을 맡아 칼춤 추며 부르는 노래를 제가 직접 불렀고요. 영화나 연극의 대본을 쓰면서 소리꾼 명인들의 말과 어투를 많이 차용했죠. 예를 들면, 서편제에서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좋은 것이 이 소리 속 판이여, 이놈아!”라고 아들에게 일갈한 대사나, 연극 '격정만리'에서 격동기 연극인의 입을 통해 "황금도 사랑도 명예도 다 싫소. 오로지 나의 소망은 조선 냄새나는 위대한 예술을 하고 싶은 것이외다.”라고 읊조린 대사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Q. 명창 박초월 선생에게 사사했다는 얘길 듣고 많이 놀란 적이 있습니다. A. 대학 4학년 때 종로 단성사 앞을 지나다 ‘박초월 국악전습소’라는 한자 간판을 발견하고선 무턱대고 4층으로 올라갔죠. 그 자리에 박초월 명인과 조상현 선생이 함께 계셨어요. 알고 보니 두 분이 판소리 보존회의 회장과 사무국장을 맡아 하셨더군요. 조 선생이 북을 당기더니 노래를 해보라고 해서 불렀는데 웃음거리가 됐죠. 판소리 곡을 이태리 벨칸토 창법으로 불렀으니 두 분이 보기에 얼마나 웃겼겠어요. 학생들도 웃고. 그렇게 입문을 했는데 그때 제1 조교가 김수연 명창이었고, 제2 조교가 김경숙 명창이었어요. 저는 박초월 선생님이 직접 가르쳐주셨어요. 타향에서 어렵게 산다는 걸 아시고선 거기서 숙식하며 지내라고 배려해주셨죠. 아침에는 밥도 갖다주시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총무 비슷하게 됐어요.(웃음) 그러다 박 선생님이 당신 아이들 가정교사를 맡기셔서 그 댁에 입주하게 되었죠. 불광동이었는데 새벽마다 불광산에 올라 목을 풀고 소리를 지르는 훈련을 했죠. 그렇게 10여 년을 배웠습니다. 박 선생님 덕에 국악계의 명인들을 두루 만나는 행운도 누렸죠. 그분들 인터뷰 기사를 써서 월간 신동아에 연재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 인터뷰를 묶어서 '광대의 꿈'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도 했죠. 그분들을 만난 게 제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김명곤 씨는 이 대목을 이렇게 표현한다. "판소리와의 인연은 마치 누가 미리 연출해놓은 것처럼 내 인생에 파고들었다.” Q. 레퍼토리 가운데 가장 애창하는 곡이 어떤 건가요? A. 홍보가, 수궁가를 배웠는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고고천변’입니다. 거북이가 뭍으로 나와 처음 맞이한 세상 풍경을 노래하는 대목이죠. 박 선생님은 남자들에겐 민요는 안 가르치셨어요. 대체로 민요는 여자 장르의 곡으로 취급했어요. 단가인 ‘사철가’도 제가 즐기는 곡인데, 서편제를 하면서 제가 따로 배운 노래입니다. 김수철 씨가 작곡한 서편제 중 삽입곡 ‘소리길’도 멜로디가 너무 좋아서 제가 가사를 붙여 부르곤 합니다. 김명곤 대표는 "전통은 모든 예술의 고향”이라는 모토를 갖고 있다. 그가 우리 음악에 천착하는 이유이다. Q.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도 한국음악을 살리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죠? A. 네. 뒤돌아보면 우리 음악과 그 음악을 하는 광대를 조선조는 5백 년간 무시하고 홀대했어요. 그래서 국립극장장일 때는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노무현 후보에게 전통예술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문화부 장관이 되면서 국악진흥과를 신설해 독립부서로 두고 한국음악 지원에 나서기도 했죠. 이 국악진흥과는 제가 떠나면서 같이 없어져 버렸어요. 문화재청이나 국립국악원이나 다른 기구들이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긴 듯합니다. 저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죠. 그걸로 한류의 세계화를 도모했으니까요. 우리 전통예술 분야는 정치지도자가 의지를 갖고 육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Q. 요즘 국악 하는 젊은이들이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빼어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걸 자주 봅니다. 소리 내는 기본이 탄탄하니 노래를 잘할 수밖에 없죠. 확실히 우리의 자산이라 할 수 있겠죠? A. 네. 동감입니다. 일각에서는 전통이 허물어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있지만, 서양도 클래식과 팝이 서로 퓨전 하며 대중의 취향에 맞추고 있죠. 물론 전통도 지켜가면서요. 어느 게 옳은 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죠.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시도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초석이 된다는 겁니다. 교류하고 소통하며 필요하면 통합도 가능하죠. 서양음악 하는 사람들도 판소리 창법을 연구하고, 한국음악 하는 사람들도 퓨전을 시도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거죠. 음악 장르 전체가 동반 발전하는 겁니다. 경계를 두지 말고 두 음악 세계가 서로 통합하고 융합하도록 협업을 계속 시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서로서로 좀 더 들여다보고 이해해보라고 권하고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올드보이로서 저의 남은 인생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오늘 바쁘신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악의 저변을 넓히는 창의적 예술가로 활동하시는 모습 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명곤 대표는 내년 초 ‘예술의 전당’이 기획하는 획기적 가곡 공연 프로그램을 의논해야 한다며 회의실로 향했다. 어떤 형식일지가 궁금했다. 창의적 열정의 소유자인 그가 지휘하는 만큼 기대가 크다. ‘꽃을 밟고 지나간 말의 발굽에서 향기가 날(踏花歸路馬體香)’때 그는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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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류 아쟁산조·동초제 판소리 심청가' 광주 토요상설공연'박종선류 아쟁산조'와 '동초제 판소리 심청가'가 토요일에 광주 관객을 만난다.광주문화재단은 6일 오후 3시 전통문화관 서석당에서 토요상설공연으로 김선제의 '박종선류 아쟁산조'와 송혜원의 '동초제 판소리 심청가'를 선보인다고 3일 밝혔다.김선제의 '박종선류 아쟁산조' 무대는 25분동안 이어진다.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장단 구성으로 아쟁 특유의 애절함과 힘 있는 소리가 어우러져 산조 본연의 맛을 한껏 살린다.연주자 김선제는 제17회 명창박녹주국악대제전 일반부 종합 최우수상 수상과 다수의 발표회를 개최했다. 현재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9호 박종선류 아쟁산조 이수자와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수석상임단원으로 재직 중이다.다음 무대는 송혜원의 '동초제 심청가' 중 '심봉사 황성 올라가는 대목'이 연주된다. 도망간 뺑덕이네를 원망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무릉태수 만나는 대목' '방아타령'까지 선보일 예정이다.소리꾼 송혜원은 제15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일반부 대상을 수상했으며 광주시 무형문화재 제16호 동초제 춘향가 이수자, 국악중심 연의 공연예술단 상임단원으로 활동 중이다.이번 공연은 선착순 20명으로 관람이 제한되며 광주문화재단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생중계된다.한편 2021 광주전통문화관 토요상설공연은 오는 13일 국악그룹 늘솜의 '강남제비박씨' 무대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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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서편제 제작한 이태원씨 별세1926년 나운규 감독 영화<아리랑>의 극장 단성사, 이후 1993년 다시 단성사를 대표 극장으로 인식시킨 영화<서편제>. 이 영화를 제작한 한국 영화계의 거목 이태원 전 태흥영화사 대표가 24일 별세했다. 83세. 고인은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가족과 떨어진 이후 어려움을 겪으며 성장했다. 1973년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극장을 운영하면서 영화계와 다시 인연을 맺었다. ‘춘향뎐’ 등 임권택 감독의 작품을 꾸준히 제작했다. 이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영면했다. 이 대표는 지난해 5월 낙상사고를 당해 약 1년 7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은 26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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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신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신청은 전국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기재인청의 존재는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昌才都廳案)'과 '경기재인청선생안'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건륭 사십구년에 작성되었으므로 1784년이다. 남도지역에서는 나주장악청, 장흥신청, 여수 악공청, 진도장악청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내가 참여해 이경엽 교수와 함께 연구 출판했던 '여수 영당 풍어굿, 악공청'(민속원, 2007)을 참고해보면 여수악공청의 중건은 1939년이다. 신청의 선생들 내력을 기록한 선생안(先生案)이 1928년에 작성되었으므로 여수 또한 역사를 조선시대로 올려 잡을 수 있다. '선생안'은 각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 직명, 생년월일, 본적 따위를 기록한 책을 말한다. 이경엽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장흥신청은 1832년(순조 32)에 '신청완문(神廳完文)'이 작성되는 것으로 보아 그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1894년 해체되었다가 1919년 중건되었고 1921년에는 외청 세 칸을 더 지어 신청 기능을 복원하게 되었다. 뜻있는 지역 유지들이 갹출하여 음악전수를 할 수 있게 된 내력을 적은 장악청중건기가 전한다. 악공청, 장악청, 신청 등의 용어가 병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6년 동아일보 기사는 진도 장악청 정보를 전해준다. 당시로부터 약 300여 년 전부터 진도읍 성내리 장악청(?樂廳) 속칭 신청(神廳)이 있어 일반 광대들에게 조선음악을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한자표기는 달라도 속칭 신청이라 했다는 언술이나 기타 내용들은 모두 신청(神廳) 관련 정보들이다. 이 언급을 적용해보면 신청의 존재가 1630년대로 소급된다. 광해군 일기 10년(1618) 10월 16일 기사도 참고가 된다. 재인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산주재인(山主才人), 도산주(都山主)라는 호칭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호명은 재인 집단의 존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재인청, 신청, 광대청 등 전문음악인들의 집단과 생활을 추정해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정보들을 보면 신청이 전국적으로 존재했으나 전라도지역이 가장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신청의 역사를 고려말 진도 장악청으로 올려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추적이 필요해보이지만, 이른바 무계들의 집단이자 공사의 음악업무를 담당했던 신청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뿌리, 나주신청의 복원 지난 5월 25일, 나주에서 뜻 깊은 자리가 마련되었다. 나주신청문화관의 개관 행사였다. 이경엽교수와 윤종호 나주시립국악단 예술감독의 발표를 통해 그간 묻혀있던 보물 같은 자료들이 소개되었다. 나는 토론을 통해 그 의미와 역사를 짚어봤다. 이경엽은 1937년 발간된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 공저 <조선무속연구>를 통해 나주신청에 보관되어 있던 여섯 종류의 문서를 설명해주었다. 선생안(1800년)과 절목(1882년), 대동보안(1899년) 등이 그것이다. 이 자료들은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서울대박물관에서 유리건판 사진으로 보관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선생안에 수록되어 있는 정원길(1834~1903)과 정원실(1838~?)이다. 정원길은 정재근의 아버지다. 정재근은 박유전을 시조삼고 있는 서편제를 보급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아들 정응민 대에 이르러 판소리의 중흥기라고나 할까, 이른바 보성소리라는 유파로 불리는 서편제의 큰 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 선생안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판소리 후기 5명창 중 한사람인 김창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종 40주년 칭경식의 대표를 맡아 행한 업적들이 다대하기 때문이다.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협률사가 설립되었는데 전국의 판소리 명창, 가기(歌妓), 무동(舞童) 등 170여명을 모아 전속단체를 만들고 공연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때 합류하거나 소속되었던 예인들의 창발이 오늘날 전통음악을 재구성하는 큰 흐름이었다는 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협률사와 이후 연계되는 원각사의 명암들이 짙은데, 무안사람 강용안과 더불어 만든 창극이며 삼현육각 등 관련한 자료와 인물연대기는 따로 후술하겠다. 어쨌든 정원길의 대를 이은 정재근이 정응민과 정권진으로 다시 안채봉,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으로 이어지고 또 한 사람의 획기적인 인물 정창업의 예술을 정학진과 김창환이 이어받아 김봉이, 김봉학으로 다시 오수암, 정광수, 임방울 등으로 이었다는 점 괄목할 만한 풍경이다. 가히 서편제의 맥을 나주신청에서 총괄하고 확산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 뿐인가,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김창조를 잇는 안기옥과 정남희 등은 월북하여 북한 전통음악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이 음악들이 오늘날의 트로트나 가요로 확산된 맥락도 흥미롭다. 천년도읍지라는 점을 떠나서도 나주신청의 개관이 갖는 현대적 의미가 막중하다.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맥을 좇아 전남도립국안단은 물론, 진도, 여수, 무안 등지의 예술단과의 네트워크, 미래전략으로서의 연구와 공연 확장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 나주신청문화관의 개관을 누구보다 축하한다. 남도의 음악을 넘어 우리나라 나아가 아시아의 음악을 총괄하고 확산하는 센터로 기능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나 뿐 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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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판소리·고수경연대회 (10월 1~3일)■ 대회목적 :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인 판소리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경연대회를 통한 인재발굴 및 육성 ■ 대회일정 : 2021년 10월 1일(금) ~ 2021년 10월 3일(일) 일 자 시 간 내 용 장 소 경연순서 추첨시간 추모행사 10. 1.(금) 13:30 ~ 추모행사 보성 판소리 성지 - 예선 10. 2.(토) 10:00 ~ 판소리 신인부(단심제) 보성군청소년문화의집 08:30 ~ 10:00 ~ 판소리 대학‧일반부 보성군문화예술회관 2층 연습실 08:30 ~ 10:00 ~ 판소리 명창부 보성군문화예술회관 1층 공연장 08:30 ~ 10:00 ~ 고수 학생부 보성문화원 08:30 ~ 13:00 ~ 판소리 학생부 보성군청소년문화의집 10:00 ~ 13:00 ~ 고수 신인부(단심제), 대학‧일반부, 명고부 보성문화원 10:00 ~ 13:00 ~ (명고부) 본선 10. 3.(일) 09:30 ~ 판소리 학생부 보성군청소년문화의집 08:30 ~ 09:30 ~ 판소리 대학‧일반부 보성군문화예술회관 2층 연습실 08:30 ~ 10:00 ~ 고수 학생부, 대학‧일반부, 명고부 보성문화원 08:30 ~ 13:00 ~ 학생부 종합 보성문화원 12:00 ~ 14:00 ~ 판소리 명창부 보성군문화예술회관 1층 공연장 13:00 ~ ※ 위 일정 및 장소(예선‧본선)는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취소 또는 변경될 수 있음. ※ 학생부 종합 : 판소리 고등부 대상수상자와 고수 학생부 대상수상자가 경연 ■ 참가자격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 18세(2003. 9. 30. 이전 출생자) 이상의 남녀 및 학생(초·중·고등학생) 1. 판소리 명창부는 만 28세(1993. 9. 30. 이전 출생자) 이상 가. 판소리 5바탕 중 한바탕 완창자 또는 2시간 이상 발표회를 가진 자 나. 증빙자료 제출 : 완창 발표회 음원(CD) 또는 공연 리플렛 2. 기존 수상자 참가 제한(본대회 및 다른 대회 모두 포함) - 동일종목·분야에서 최고훈격을 수상한 자는 최고훈격이 동일한 종목‧분야 참가 제한 - 단, 최고훈격이 상이한 경우 동일종목‧분야 참가 가능하며, 이 경우에도 훈격의 하향신청은 불가 ■ 참가신청 1. 제출서류 : 참가신청서 1부(소정양식, 반명함판 사진부착), 신분증 지참 가. 판소리 명창부 : 완창 발표회 음원(CD) 또는 리플렛 등 증빙자료 제출 ⇒ 명창부 증빙서류 9. 28.(화) 18:00 도착분까지 인정 나. 경연자・동반자 : 코로나19 PCR검사결과 음성확인증(경연일 기준 48시간 이내 유효) ⇒ 경연장 방문시 확인 2. 신청서 교부 및 접수 ◦ 접수기간 : 2021. 8. 16.(월) ~ 9. 24.(금) 18:00까지 도착분 ◦ 참 가 비 : 없음 ◦ 접수방법 : 방문·우편·e-mail·FAX ※ 본인 및 대리신청 가능 ◦ 접 수 처 :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회(보성문화원) - e-mail : bs2629@hanmail.net - F A X : (061)853-2629 - 우 편 : (59453)전남 보성군 보성읍 송재로 281-11 보성문화원 ※ 접수 후 반드시 전화 확인하기 바람 ◦ 접수안내 : (061)850-5892 / 852-2621, 서편제보성소리축제홈페이지 (http://www.boseong.go.kr/tour/festivity/sopyonje) ※ 참가자 및 동반1인 : 코로나19 PCR검사결과 음성확인증 제출(경연일 기준 48시간 이내) - 음성 결과제출이 없을 경우 경연장 입장 불가 ■ 대회부문 부 문 경연시간(예선/본선) 비 고 판 소 리 명창부 30분 이상 / 20분 이상 - 예선 경연대목 : 추첨 - 본선 경연대목 : 자유 선택 (단, 경연대목이 중복될 때에는 추첨에 의함) 대학 및 일반부 15분 내외 / 15분 내외 - 예선과 본선의 소리대목 중복 불가 신인부 10분 내외 / 10분 내외 학생부 - 고등부 10분 내외 / 10분 내외 학생부 - 중등부 7분 내외 / 7분 내외 학생부 - 초등부 5분 내외 / 5분 내외 고 수 명고부 10분 내외 / 10분 내외 대학 및 일반부 7분 내외 / 7분 내외 신인부 5분 내외 / 5분 내외 학생부 5분 내외 / 5분 내외 ※ 경연시간은 대회의 효율적 진행을 위해 조정할 수 있음. ※ 고수는 집행부 지정고수로 하며, 필요시 경연자 대동 가능 ※ 판소리 대학 및 일반부 : 후 창자는 바로 앞 창자의 소리대목을 다시 할 수 없음. ※ 다만 바로 앞 창자 소리대목 전체의 ⅕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전반부 또는 후반부에서 소리를 이끌어 나가거나 마무리를 위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함 ■ 시상내용 (단위 : 천원) 부문 \ 등위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판소리 명창부 대통령상 문화재청장상 전라남도지사상 40,000 10,000 5,000 대학 및 일반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화재청장상 전라남도지사상 4,000 3,000 2,000 신인부 전라남도의회의장상 보성군수상 보성군의회의장상 1,500 1,200 1,000 학생부 고등부 전라남도지사상 전라남도교육감상 보성군수상 1,200 800 600 학생부 중등부 전라남도교육감상 보성군수상 보성교육장상 1,000 700 500 학생부 초등부 전남도교육감상 보성교육장상 보성문화원장상 700 500 300 고 수 명고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전라남도지사상 보성군수상 10,000 3,000 2,000 대학 및 일반부 전라남도지사상 전라남도의회의장상 보성군수상 2,000 1,500 1,000 신인부 보성군수상 보성군의회의장상 보성군의회의장상 1,000 700 500 학생부 전라남도교육감상 보성교육장상 보성문화원장상 1,200 800 600 학생부 종합 교육부장관상 문화재청장상 - 1,500 1,200 - ※ 별도의 시상식은 개최하지 않고 상장은 우편으로 발송 예정(단, 판소리 명창부는 현장 시상) ※ 명창부 대상 특전 : 수상자는 보성소리 발전연구 결과로 6개월 이내에 보성군 내에서 공연발표를 하게 되며, 이때 보성군은 1회에 한하여 공연 무대, 홍보, 음향 등을 무상 지원 ※ 시상금은 소득세법에 의거 원천징수 8.8% 공제 후 무통장 입금 ※ 학생부 종합부문 수상자에 대해서는 부분별(판소리, 고수) 시상금은 지급되지 않음. ※ 본 행사 훈격 및 시상계획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심사항목 판소리 공력(30%) 박자(30%) 가사(15%) 발림(15%) 성음(10%) 고 수 한배(30%) 공력(20%) 강약(20%) 기교(20%) 자세(10%) ※ 심사위원의 점수를 합산하여 고득점순으로 등위를 정한다. ※ 단, 판소리 명창부 본선은 심사위원들의 합산점수(최저, 최고점 제외한 총점)와 청중평가단 평균점수를 합산한 점수를 최종 점수로 한다. ■ 심사규정 1. 심사회피로 인한 경연자의 점수는 채점한 심사위원 점수 중 최고점과 최하점을 제외하고 나머지 심사위원 점수의 평균점을 회피한 심사위원 점수로 부여하여 합계점수를 산출한다. 2. 판소리 명창부 본선 심사에서는 청중평가단 점수가 반영됨에 따라 합산점수가 소수점이 발생할 경우 소수점 이하 세 번째에서 절사한다. 3. 본 대회는 직접스승 및 8촌 이내 친인척의 심사회피제도를 적용하므로 참가자는 해당 심사위원의 심사회피를 경연전에 신청해야 한다. 만약 심사회피를 신청하지 않아 수상을 한 후 회피신청 사유가 있음이 발견될 경우에는 수상 취소를 결정할 수 있고, 수상자는 상장, 상패, 상금을 반환하여야 한다. ※ 판소리 명창부에 한해 경연참가자의 이해관계가 있는 심사위원은 기피 신청 여부와 관계없이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회 심사위원 선정위원회 직권으로 심사위원에서 배제한다.(예선과 본선 모두 적용) ■ 심사결과 발표방법 심사위원별 점수를 경연 직후 또는 후창자 경연 중에 스크린(전광판)으로 공개 ■ 수상자 결정방법 수상자는 심사결과에 따라 순위별로 결정한다. 같은 부문에 동점자가 있는 경우에는 연장자를 선순위로 한다. ■ 코로나19 방역수칙 준수사항 코로나19바이러스 확산방지를 위해 방역수칙을 준수해 주시고, 방역과 관련한 진행요원의 요구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대회 기간은 무관중 진행이 원칙이나 참가자 가족 1인에 한해 방역수칙 확인 후 최소 인원만 입장 가능함 2. 모든 참가자와 동반가족 1인은 코로나19 PCR검사결과 음성확인증(48시간이내 유효) 반드시 지참 (없을시 입장 및 경연 불가) 3. 마스크 미착용시 입장 불가, 발열 37.5°이상 또는 호흡기 등 기타 바이러스 유증상자 입장 불가함 4. 개최일 14일 이내에 해외 방문 사항이 있을 시 출입 불가함 5. 밀접 접촉방지를 위해 음식 제공 등은 하지 않으며, 해당 경연 부문 참가자 외 대기실 입실 불가 6. 공연장 내 참가자 및 모든 인원 간 1~2m 거리 유지함. ■ 세부 프로그램 일정표 구 분 보성군문화 예술회관 보성군청소년 문화의집 보성문화원 보성 판소리성지 1층 공연장 2층 연습실 10. 1. (금) 13:30 ~15:30 ◦서편제 보성소리 명창 추모행사 및 추모공연 10. 2. (토) 09:00 ~10:00 ◦기념식 및 기념공연 10:00 ~11:00 ◦전국판소리 경연대회 -명창부(예선) ※추첨: 08:30 ◦전국판소리 경연대회 -대학 및 일반부 (예선) ※추첨: 08:30 ◦전국판소리 경연대회 -신인부 ※추첨: 08:30 ◦전국고수 경연대회 -학생부(예선) ※추첨: 08:30 11:00 ~12:00 12:00 ~13:00 13:00 ~ ◦전국판소리 경연대회 -학생부(예선) ※추첨: 10:00 ◦전국고수 경연대회 -신인부, 대학·일반부, 명고부(예선) ※추첨: 10:00 (신인부,대학·일반부) 13:00 명고부 10. 3. (일) 09:30 ~10:00 ◦전국판소리 경연대회 -대학 및 일반부(본선) ※추첨: 08:30 ◦전국판소리 경연대회 -학생부(본선) ※추첨: 08:30 10:00 ~11:00 ◦KBS국악 프로그램 리허설 ◦전국고수 경연대회 -학생부ㆍ대학·일반부 ㆍ명고부(본선) ※추첨: 08:30 11:00 ~13:00 13:00 ~14:00 ◦학생부종합대상 경연대회 (본선) -판소리 및 고수 ※추첨: 12:00 14:00 ~15:00 ◦전국판소리 경연대회 -명창부(본선) ※추첨: 13:00 ◦시상식 15:00 ~16:00 ◦KBS국악 프로그램 녹화 16:00 ~16:30 ◦역대 대통령상 수상자 축하공연 ※ 위 일정은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취소 또는 변경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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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문화 기행(5)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판소리가 유네스코 지정 인류 구전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된 것은 2003년 11월 7일이다. 2001년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이 지정되고 나서 두 번째 맞이한 경사였다. 이에 앞서 1964년 다섯 번째로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그만큼 판소리가 갖는 국내외적 위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지정 판소리의 영문명은 'Pansori epic chant'이다. 에픽은 장편서사시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고 찬트는 구송(口誦)이라는 점을 강조한 번역이다. 춘향전 심청전 등 예로부터 전해져 온 장편 이야기를 노래로 꾸민 장르임을 분명하게 해두었다. 또 챈트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비롯해 불교의 독경이나 범패 등 성가 혹은 송가를 말하는 것이어서 반복적인 곡조로 부르는 노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 또는 그 장면을 말한다. 처지, 판국, 형편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마당'이라고도 하고 '장(場)'이라고도 한다. 판소리가 마당에서 비롯된 예술 양식임을짐작하게 해준다. 따라서 판소리는 어떤 마당에서 옛이야기를 지어 부르는 노래 양식의 하나라고 정의할 수 있고, 여러 과정과 변모를 거듭해 오늘날 독립된 음악 양식으로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의 음악적 기원을 전라도 무가로 여기는 연구자들의 주장이 '무가 기원설'이다. 하지만 고전소설이라고 하는 거대 서사가 있고, 판소리꾼으로 불리는 광대들의 활동 내력이있다. 문학적 지형과 음악적 재구성을 두루 살펴야 실체에 더 접근할 수 있다. 두부 자르듯 이것이다 저것이다 일방적인 규정을 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전라도의 억양과 말하기 방식, 노래하고 의사소통하는 방식 등이 주요하게 채택된 장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거창하게 판소리 미학까지 따질 필요도 없이 소리 자체가 그렇다. 예컨대 '니 광한루 댕개왔노!'라고 아니리를 하면 어색한 것과 같은 이치다. 고창의 바닷가에서 나들이를 시작한다.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는 김소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판소리를 정리한 신재효의 고을이기도 하다.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후포는 지금도 줄포, 우포, 사포 등 포구 혹은 옛 포구들에 쌓여 줄포만을 형성하는 지류 중 하나다. 김소희 생가는 마을로부터 포구 쪽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금은 바닷물 길이 끊겨버렸지만 고대로 거슬러 오를수록 서남해 물길과 맞닿는 공간이다. 후포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동학혁명의 주요 인물인 전봉준이 나고 자랐던 고을에 이르고 판소리를 정리하고 가르쳤던 신재효의 고을 고창읍에 이른다. 법성포와 변산반도를 눈앞에 두고 줄포만을 나온 배들은 서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을 거쳐 영산강에 닿고 나주에 닿는다. 김소희는 나중에 박석기가 마련한 담양 지실마을 초당에서 박동실로부터 판소리를 연마하게 되지만 광주가 영산강의 상류라는 점에서 그 문화적 맥락은 서남해 바닷길과 무관하지 않다. 서편제와 여성 판소리꾼의 탄생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흥선 대원군과 신재효의 드라마틱한 삶도 어쩌면 이 물길들을 통해서 탄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재효의 아버지가 수도 한양에건정(말린 물고기) 물류사업을 하며 큰돈을 벌었다는 점, 신재효 땅을 밟지 않고는 고창 땅을 지날 수 없었다는 항간의 이야기도 조선 후기 판소리 후원자들의 지형을 설명해주는 풍경들이다. 고창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 영광, 함평, 무안, 목포를 거쳐 나주 영산포에 이른다. 서편제의 확산이 사실상 나주사람 정재근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인정한다면 이 물길을 더욱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서편의 판소리는 광주를 비롯해 여러 바닷길을돌며 한 지형을 형성했다.근대기 진도와 목포에서 형성한 판소리의 맥락도 눈여겨봐야할 대목이다.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목포의 장월중선과 안향련, 진도의 신치선과 이병기를 기억해둘 일이다. 다시 뱃머리를 돌려 해남, 완도, 강진, 장흥, 고흥으로 향하면 우리나라 판소리의 거대 지류와 형성사를 만나게 된다. 우리 판소리를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누고 그 하위 분류로 보성소리와 동초소리로 나눈다. 동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동초제는 고흥 거금도 사람 김연수가 재구성한 양식이다. 그의 호를 따서 동초제라고 한다. 동초제를 평생의 업으로 보듬고 살았던 오정숙은 그녀의 소원대로 일면식도 없는 땅 거금도 스승의 곁에 묻혔다. 서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보성소리는 나주사람 정재근의 법통을 이은 정응민이 지금의 보성에서 재구성한 양식이다. 순창사람 박유전을 서편제의 시조로 삼긴 하지만 나주와 보성을 빼면 그 맥락을 제대로 좇기 어렵다. 내륙지역으로 들어가면 구례의 송흥록으로부터 남원, 전주의 소릿길로 이어진다. 하지만 바닷길만 통해서도 우리 판소리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전라도의 해안을 나들이하며 철썩이는 파도와 탁한 뻘물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섬들을 마주한다. 판소리를 품은 움직이는 그림, 아니 이 풍경은 어쩌면 판소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남도의 판소리 마실을 가려면 바닷길을 따라 둘러보기를 권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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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문화재청의 잡음, 보유자 지정 문제, 이번엔 고법(鼓法)지난 7월 29일 한 방송사의 문제 제기로 국악계에 파문이 일고 있다. 현재 두 명 뿐인 판소리 고법 보유자에 대해 문화재청이 K씨 한 명을 추가 지정하겠다고 예고를 했다. 그런데 300여통의 반대 청원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소식을 접한 국악계는 "언제 문화재청의 지정 예고에 반발 없이 신뢰하는 날이 올 것인가”라는 한탄의 소리가 높다. 문화재청 공고 제2021-237호가 공시되었다.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제17조 및 같은 법 시행령 제16조에 의거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 사항을 무형문화재위원회의심의에 앞서 다음과 같이 예고하오니 이에 대하여 의견이 있으신 분은 문화재청으로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문은 "K는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고법) 종목의 전승능력, 전승환경, 전수활동기여도 등이 탁월하여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보유자로 인정 예고함.”이다. 이 예고 기간의 만료로 관련 보도가 나온 것이다. 이에 의하면 심사 결과 자료에 "윤리의식이 높다”고 평가가 있고, 완주 회수가 3, 40회 정도의 경륜을 갖는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K씨는 최근 10년 사이 단 1회 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수상 경력도 최고상인 대통령상이 없고 장려상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최종 심사 단계까지 함께 올라간 다른 두 후보의 경우는 국무총리상과 대통령상 수상 경력이 있음은 물론 완주 경력도 각각 51번과 33번이란 것이다. 전 문화재위원 유영대 교려대 교수는 이런 차이에 대해 한 마디로 "기량이 기준인데, 이해 할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당사자인 K씨는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변했다. "문화재라는 것은 경연대회가 아니에요. 지방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완주 물량(횟수)이 좀 적을 수는 있죠. 대회를 나간 적이 없으니까, 저에게는 대회가 무용해요." 그런데 이번 사태를 잘 아는 국악계 원로 J씨는 다른 의견을 냈다. 기량이 아닌 다른 점을 강조한 듯한데, 여운이 있는 반론이다. "한 사람은 계보가 애매합니다. 또 한사람은 고법이 전공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고에 오른 후보는 전수조교로 한 길을 걸어 왔습니다. 기량과 고법을 지키려는 의지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심사 기록에 ‘윤리’를 언급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봅니다. 이제까지 드러내지 않은 기준이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청원서가 3백 장 넘게 빗발쳤다는 것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 국악계 반응이다. 한편 이 문제를 다른 측면에서 보는 입장도 있다. Y단체장은 법제의 이해 때문에 당분간은 이런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새로운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의 전형주의는 기존의 원형주의와 다릅니다. ”현대에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한 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의해 계보나 원형유지 여부가 약화되고, 현재적 위상이나 기량이 주목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문제는 앞으로 12잡가로 경기민요 종목을 지정하는 것과 계보냐 기량이냐로 대치하는 대금 종목 지정도, 동일종목 중복 지정 등에서 혼란을 격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분석은 문화재청(문화재위원)과 학계의 세심함을 요구한 것인데, 자기들끼리만 소통하는 연구계의 구조를 지적한 것으로 본다. 사실 국악계, 특히 일부 민속음악계는 기존의 원형중심에서 전형중심으로의 무형문화유산 관점 이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문화재청 예고 기간은 끝났다. 이제 다음 달 최종 심의만 통과하면 K씨는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된다. 이런 300통의 청원 대 ‘정당한 심사’라는 주장 간의 간격을 문화재청이 어떻게 처리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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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현장성과 직설적인 화법의 통쾌한 남도인문학자 목포대 이윤선 선생의 칼럼이 연재된다. 새롭게 마련된 금요 고정칼럼 ‘이윤선의 현장성 있는 남도인문학’에서 남도 풍류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편집자 주) 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우리 창극인들이나 고수 할 것 없이 제일 호사스러운 때가 언젤꼬? 그야 물론 원각사 시절이겠지요. 이동백이 묻고 한성준이 답하는 장면이다. 이동백이 말을 잇는다. 나도 그러이. 이전까지는 천시를 받아온 우리였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대우를 받았고, 그때는 소리하고 춤도 출 만하였지. 순종을 한 대청에 모시고 놀기까지 했으니까,,. 한성준이 받는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군요.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잘못하여 바로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을 때, 큰 벌이나 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순종께서 도리어 기쁘게 웃으시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형님은 순종의 귀여움을 상당히 받았을 거요. 원각사에서 형님이 소리를 할 때면 순종께서 전화통 수화기를 귀에 대시고 듣기까지 하셨으니까요. 이동백이 다시 받는다. 그랬었지. 그때 창극조로 춘향전을 했지만, 그 규모가 지금보다는 훨씬 컸고, 또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좀 많지 않았소. 그러니 무대에 오르는 사람도 절로 흥이 날 수밖에 없었지. 1941년 잡지 춘추 3월호에 실린 이동백과 한성준의 대담이다.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연극 '이(爾)'에서 출발한 영화 왕의 남자, 장생과 공길이 연산군 앞에서 극을 펼치는 장면? 이벽화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청데이(장국영 분)와 단샬로(장풍의 분)가 경극을 펼치는 장면? 아마도 연극 이의 지은이 김태웅 씨는 연산군일기는 물론 창극의 일면들을 공부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위 대담에서 '창극조'라고 말하는 것이 이른바 판소리 창극이다. 창극은 언제 누가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최초의 극장 원각사와 창극조 판소리 어사와 초동이라는 초기 창극이 있다. 1909년 8월 이응일의 투자로 완공한 광주 북문 앞의 극장에서 9월 7일부터 공연되었다. 월북 명인 박동실의 광주 양명사 회고에 의하면 창극 춘향전 공연에서 가장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레퍼토리였던 것 같다. 백두산의 연구에 의하면 이는 1908년 봄 원각사에서 공연하였던 창극 춘향가를 모체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각사(圓覺社)는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 야조개)에 세워졌던 개화기 사설극장이다. 1902년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극장은 1906년 문을 닫는다. 1908년 7월 박정동, 김상천, 이인직 등이 원각사라는 극장으로 리모델링한다. 이때 소속된 명기 명창이 백칠십여 명(박황의 증언)이었다. 판소리, 민속무용 등을 공연하다가 판소리를 분창하는 형태인 이른바 창극이 시도된다. 1909년 5월에는 전속 창부(唱夫), 공인(工人)들이 일본연극(아마도 가부끼일 것이다)을 널리 알리는 연습을 했다. 이보다 앞선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된다. 이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화용도 등이 공연된다. 신연극과 구연극, 판소리와 창극을 버무리는 그야말로 고금 합작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창극을 만든 사람, 무안의 강용환 춘향가를 분창 형태의 '소리극'으로 꾸민 어사와 초동은 누가 구상한 것일까? 이 초기 창극에 대한 관심은 100여 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 협률사와 포장극단 시대를 거쳐 국립창극단은 물론 진도 다시래기 예능 보유자 강준섭이 즐겨하는 레퍼토리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박황은 창극사 연구에서 강용환을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강용환은 1900년에 상경하여 서울 동대문에 자리한 광무대 협률사에 참가하고 그가 전공한 옥중가 한 바탕으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다. 그 당시 서울에는 지금의 청계천 2가에 수표교가 있었고 그 다리 건너에 청나라 사람들의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창극관'이 있었으며 이 창극관에서 날마다 '창우'가 창극(경극을 말함)을 연희하였다. 강용환은 틈만 있으면 이 청국인의 '창극관'에 살다시피 하였는데 청국의 창희를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를 창극으로 발전시켰다." 원각사 시절 강용환이 중국의 경극을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와 심청가를 창극화하였고 무대 예술로서 첫발을 내딛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비교적 명료하게 밝힌 연구는 최근 출간된 '창극의 전통과 새로운 방향'(지우출판, 2021)에 실린 백두산 교수의 '무안 출신 명창 강용환의 생애와 예술 활동 기록의 검토'다. 나도 토론을 맡아 몇 마디 보태긴 했지만 연구의 탁월함을 응원한 정도니 언급할 가치는 없다. 강용환의 사망 시기와 관련된 것들을 조목조목 규명한 대목이 눈에 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하자면 호적이나 족보 등의 자료에 나타나는 강용환 사망 시기 이후의 창극 활동들을 규명했다는 점이다. 즉 1902년 사망설 이후 활동들이 광범위하게 포착되기 때문에 1903년에서 1907년까지의 서울 공연 활동이나 1908년 원각사의 춘향전, 은세계, 심청전 등의 공연에서의 강용환 활동을 증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구성작가-연출가 면모의 자생적 창극 개량 과정이 시도되었다. 동·서편제는 물론 고제 판소리 중에서 인기 대목을 취사선택하고 재담과 잡가 등을 섞어 희극적 장면을 고안하며 '연출'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김창환이나 이동백, 이인직 등에 비해 강용환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학술적으로 규명된 것은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이사장 서장식)가 18년여 동안 집중적으로 추적한 성과이기도 하다. 창극은 명실상부한 근대극이다. 어찌 보면 자생 근대극의 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시기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창극이 이제는 뮤지컬 오페라, 악극, 소리극 등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라는 뜻일까? 무안의 강용환을 매개 삼아 창극이 발아하고 발전했듯이 이제 또 다른 관점의 음악극이 시도되어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법고창신의 지혜로 고금 합작을 꾀하는 예술가들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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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창작 뮤지컬 <금악:禁樂>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예술감독:원일)의 창작 뮤지컬 <금악:禁樂>이 오는 8월 18일부터 8월 29일까지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한국 초연된다. 뮤지컬 <금악:禁樂>은 통일신라로부터 비밀스럽게 전해져 온 금지된 악보인 <금악>을 둘러싸고, 조선 순조 재위 말기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장악원(掌樂院)에서 펼쳐지는 기묘한 사건을 담은 판타지 사극 뮤지컬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인 장악원을 배경으로 한 흥미로운 스토리에 음악적으로는 한국 음악의 창법을 적용하여 형식과 내용면에서 우리의 색채를 품고 있는 한국 뮤지컬로, 현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형태의 음악적 시도를 담은 새로운 형태의 창작 뮤지컬이다. 최근 대중문화의 트렌드로 서양음악 장르에서 우리의 고유 전통 음악과 접목하는 시도와 함께 ‘한국’이라는 키워드가 주목받고 있으며, 음악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에서 전통을 소비하는 관객의 스펙트럼 또한 넓어지고 있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는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형태와 장르의 창의적인 음악적 시도를 펼쳐 보일 수 있는 예술 단체로서의 전문성을 극대화하여, 대중문화의 흐름에 맞춰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창작 뮤지컬 제작에 나선다. 2020년 경기도립국악단에서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로 명칭을 변경, ‘시나위’의 정신을 표방한 새로운 한국적인 오케스트라를 선언하며, 고정관념을 탈피한 대담하고 혁신적인 시도를 거듭하고 있는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는 경기도를 대표하는 예술단체로, 우리의 전통음악이자 고유한 창작 음악을 동시대의 다양한 예술장르와의 융합하는 창의적인 시도를 통해 국악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선도하고 있다 예술감독∙연출 원일, 극작 김정민, 작곡 성찬경 손다혜 한웅원 원일, 안무 조인호 등 국내 최고의 뮤지컬 전문 창작진과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만남!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뮤지컬 <금악:禁樂>은 예술적 상상력을 과감하게 실현하는 예술감독 원일을 위시하여,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와 국내 최고의 뮤지컬 창작진의 만남으로도 이목을 끈다. 대종상 영화음악상 4회 수상,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 음악감독, 제100회 전국체육대회-서울-개‧폐막식 총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역임하며 한국음악계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려 온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 원일이 이번 뮤지컬 <금악:禁樂>의 예술감독이자 연출을 맡아 작품을 진두지휘한다. 극작은 뮤지컬 <니진스키>의 신예 김정민 작가가 맡아 탄탄하면서도 극적인 스토리를 구성한다. 특별히 <금악: 禁樂>만의 특성을 뚜렷이 보여주는 작곡은 각 분야의 4명의 창작자가 함께 하는데, 뮤지컬 <니진스키>의 작곡가 성찬경과 창극과 경극의 만남으로 큰 이슈를 모은 창극 <패왕별희 Farewell My Concubine, 覇王別姬)>의 작곡가 손다혜, 국악과 재즈 등 전방위로 음악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음악감독 한웅원, 그리고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은 한국음악의 트렌드 리더 원일이 공동 작곡으로 함께 함으로써 다양한 음악 장르의 융합의 정점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안무는 <크리틱스초이스 댄스 페스티벌 Critic's Choice Dance Festival>에서 우수 안무가로 선정된 조인호 안무가가 맡아, 한국적인 몸짓, 소리, 창법을 현대적으로 구현할 예정이다. 이러한 각 분야 유수의 창작진들의 협업을 통해 소리가 보이고 몸짓이 들리는 감각적인 방식으로 한국적인 창작뮤지컬을 새롭게 선보이고자 한다. 또한, 뮤지컬 <영웅>, <서편제>의 무대디자이너 박동우를 비롯하여 뮤지컬 <그날들>, <신과 함께> 예그린어워드 디자이너상을 수상한 에피타프 대표 정재진 영상디자이너,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랭보>의 조명디자이너 백시원, 제23회 무용예술상 무대예술상(의상부문)을 수상한 의상디자이너 최인숙 등 최고의 창작진이 대거 참여하여 <금악:禁樂>의 배경이 된 19세기 초 조선 왕권이 가장 약해졌던 순조시대를 단순한 재현이 아닌, 시대의 상징성이 담긴 무대, 의상, 영상, 조명으로 조선의 양식을 모던하게 표현할 예정이다. 실력파 배우들과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의 절묘한 조합! 30여명의 앙상블과 33인조 오케스트라가 펼치는 압도적인 무대! 뮤지컬 <금악 禁樂>의 캐스팅은 실력파 뮤지컬 배우와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의 절묘한 조합으로 신선함을 불러일으킨다. 들려오는 모든 소리의 비밀을 풀어내는 천부적 재능을 가진 ‘성율’역에는 뮤지컬 <위키드 Wicked>에서 ‘글린다’역을 맡아 사랑스러운 연기와 뛰어난 가창력을 선보이며 흥행배우로 자리매김한 나하나가 캐스팅되었다. 예악의 완성으로 조선의 태평성대를 꿈꾸는 왕세자 ‘이영(효명세자)’역에는 서울예술단 출신으로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 <레드북> 등에서 깊이 있는 연기로 많은 사랑을 받은 실력파 배우 조풍래와, JTBC <팬텀싱어3>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라비던스>의 황건하가 더블캐스팅 되었다. 특히, 다양한 음역대를 소화하는 놀라운 가창력을 선보이며 차세대 뮤지컬 스타로 기대를 모았던 황건하는 이번 뮤지컬 <금악:禁樂>을 데뷔 작품으로 선택하여 눈길을 끌고 있다. 사람들의 욕망을 먹고 자라나는 ‘갈’역에는 <추다혜차지스>의 만능 뮤지션 추다혜와, 330여명의 치열한 공개오디션에서 최종 선택을 받은 뮤지컬계의 숨은 실력파 윤진웅이 캐스팅 되어 서로 다른 매력을 기대하게 한다. 시대의 소용돌이에서 예악을 지키려는 장인정신의 예술인 관현맹인 ‘홍석해’ 역에는 한국 뮤지컬을 대표하는 아이콘 남경주가, 세도정치의 핵심 권력자 ‘김조순’ 역에는 경기도극단 소속의 정통 연극배우 한범희가 캐스팅되어 탄탄한 연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장단과 추임새가 뛰어나며 ‘성율’을 짝사랑하는 죽마고우 ‘임새’ 역으로 낙점 받은 신예 소리꾼 ‘조수황’을 비롯하여 연극배우 민정기, 경기민요 소리꾼 함영선, 뮤지컬배우 김의환, 무용수 심재훈 등 기존의 뮤지컬 무대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한 캐스팅의 조합으로 작품의 풍미와 깊이를 더할 전망이다. 더불어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성악앙상블 소리봄, 연희앙상블 궁궁>, 경기도무용단과 배우들로 구성된 30여명의 앙상블이 펼치는 압도적인 음악과 퍼포먼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한 33인조 오케스트라가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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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자의 객석에서] 장문희 보유종목 '심청가', 남원의 5월 수놓다# "장문희의 동초제 심청가 5월 8일(토) 오후 3시 국립민속국악원 예음헌, 국립민속국악원 주변에 붙은 광고문은 5월 8일 3시에 바뀐다.” # "2021년 남원의 5월은 44살 5월 장문희이다, 청신한 연록의 장문희는 5시간 20여분 후인 8시 20분 지금, 진록으로 변한다." 서울행 KTX 시간에 쫒기며 남긴 내 취재노트 메모이다. 이제 장문희를 다시 만난다. 고참 기자의 동행 강권으로 남원행을 단행, 광한루를 거쳐 공연장에 도착한다. 만석이라 부득이 발표자를 팔아 좌석을 받아 입장한다. 취재 목적이지만 발표자를 만나지 않는다. 완창 발표의 부담감을 걱정해서다. 공연장은 ‘거리 두기’로 60명이 만석, 나긋한 아니리조 해설이 부동자세를 풀어준다. 유영대 고려대 교수, 2004년 전설의 ‘대사습놀이 역사 상 심사위원 7인 전원 만점’ 그 주인공과 심사위원 한 분의 조합이니 취재기자로서는 분명 행운이다. 발표자 장문희, 여린 화장기에 다소곳한 너름새로 등장한다. ‘장문희에 최적화’ 한 고수 두 분 조용수/조용복과 함께. 객석의 박수에 물려 나직한 아니리로 시작한다. "송나라 원풍 만년에~ ”, 분명 첫마디는 촉촉하다. 눈시울에도 번진다. 그래서 아니리를 지나 자진모리 ‘곽씨부인 어진행실’ 시작까지 만감을 담아낸다. 당연하지 않은가. 오늘이 어느 날인가. 제도적 공식 지위 ‘심청가 보유자’ 지정 받은 이튼 날이요, 그 종목 완창 발표를 하는 날이니. 또 무슨 날인가. 강원도 인제와 전라북도 전주라는 거리만큼의 그리움으로 사셨던 어머니, 연로하여 쇠잔하여 모시지 못한 소리의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이 겹쳐지는 어버이날이니. 여기에 자기세계로의 출발 순간이니 그렇지 않겠는가. 이 뿐인가. 첫 심청가 완창회 때 초등학교 친구들의 눈빛. 제10회 동아콩쿠르 학생부 판소리 금상수상으로부터 제1회 공주전국명창·명고대회 판소리 명창부 대상 수상까지 친지들의 노심초사. 13회, 24회, 30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의 국악계 격찬,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 그랜드 마스터 선정과 ‘명창대첩 광대전’의 우승에 이어진 대중들의 호응. 완창 음반 ‘장문희 심청가 동초’와 싱글 앨범 ‘이화우 흩뿌릴 제’의 발매 성가. 이는 성취요 자긍심인 동시에 부담이니 말이다. 아, 스승의 단호한 당부도 들려온다. "겉목은 쓰지마라. 야무지게 뒤집어 봐” 만감의 순간이다. 자진모리 곽씨 부인 삯바느질 대목이 간결한 고수의 추임새로 시작된다. 발표자의 소리길이 터지는 순간이다. 아니리는 단출하다. 이런 저런 소리꾼들은 아니리를 쉴 참으로 삼는지라 너스레를 더해 맥락을 흐트리지만 발표자는 단 두 번만 자신의 이름을 대고 고수 팔 걱정한다. 발림 절제, 정돈된 아니리, 설음으로 짜간다.‘어린 심청’, ‘효녀심청’, ‘황후 환생 심청’ 서사를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장단 치며 짜간다. 곽씨부인 유언 대목 시작해서 부친과 하직하고 임당수에 투신한다. 또 한 번의 절창 ‘범피중류’로 눈물지으며 용궁으로 간다. 달고 맺고 풀어낸다. 세 시간의 연창, 발표자는 고수 팔 허리 걱정한 듯 윤기 오른 목을 잠시 내려놓는다. 귀 명창 객석은 박수에 추임새로 화답한다. 잠시의 휴식 지나 다시 새 고수 등장한다. 중모리 진양 잔잔히 물결 타고 두 시간여를 내 달린다. 용궁에 당도한다. 승상부인 세 번 등장, 그립고 안타까워 망사대 올라 화상 보며 시를 짓는다. 드디어 절절한 사연 쌓아 모친상봉 하고나서 왕후가 되는 대목을 지난다. 그리고 절절하게 도화동 부친 눈떴을까 헤아리며 "추월은 만정허여~” 기러기에게 간절한 안부를 전차한다. 절절하고 매혹적이다. 5시간 20여분 동안, "도화동 백성들은 세역을 없앴으니 천천만세를 부르더라~”로 여민다. 너름새 정교하고 부침새 다양하다. 사설 명료하게 전달하니 무겁고도 깊어 진지하다. 동초제 심청가 장문희는 감동이다. 동초 김연수(東超 金演洙), 운초 오정숙(雲草 吳貞淑), 난석 이일주(蘭石 李一珠). 동초제(東超制) 문파는 사백 장문희(詞伯 張文姬)가 잇는다. 가계로는 서편제 대가 이날치의 후손으로, 그 아래 손자인 명창 이기중이 있었으니, 그 딸이 명창 이일주다. 그 제자가 장문희니 소리 맥을 갖는다. 장문희는 사승 계보나 가계보로나 분명한 내력을 갖는 전통 판소리 명문 후예이다. 심청가만이 아니다. 이렇게 ‘5월 남원을 심청가로 수놓은 장문희’를 정리하며 두 분에게 전화를 한다. 해설을 맡았던 유영대 교수와 고참 기자에게. -세속적인 질문입니다. 2004년 심사 때 ‘99점’ 만점을 주셨는데, 이 번 발표는 몇 점을 주실 수 있는지요? 유교수-"100점은 신의 영역이니, 99.999 만점이요!” -선배님은 어떻게 봤어요? 선배-"많은 판소리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할 장황후 탄생을 봤지!” 망설임 없는 두 대답, 5월의 화창함보다 더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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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한악계의 별들" (양장)이 책은 가곡 [비목]의 작시자로 널리 알려진 한명희 선생이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보석 같은 인연들의 이야기를 역사라는 시간의 대리석에 새겨놓은 것이다.작가가 유려한 문체로 새겨놓은 주인공들은 우리 한악(국악)계의 터를 다듬고 보듬어 온 명인 명창들과 한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이다.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된 아리랑과 한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흥, 멋, 운치)에 대한 해박한 고찰은 한국의 전통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나와 TBC(동양방송) PD 시절부터 국악에 남다른 애정과 사명감을 갖고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우리 국악계를 이끌어 온 분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어 온 저자 또한 우리 음악을 계승 발전시켜 온 산증인이다.대학교수와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내면서 『하늘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리가락 우리문화』 『한국음악, 한국인의 마음』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학 떠난 빈터에는』 등의 저서는 우리 음악계의 소중한 문헌들이다.004서문인연 한 자락1부010가야고 병창으로 그린 비천상 _ 강정숙 명창012사물놀이로 세계를 제패한 선구자 _ 김덕수 명인016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_ 김소희 명창022회심곡의 프리마돈나 _ 김영임 명창026월하의 음악 세계가 그립다 _ 김월하 가객028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_ 김천흥 선생034둥둥 북을 울리면 신명이 솟는다 _ 김청만 명인036경기민요의 외연을 넓혀 가는 열정 _ 김혜란 명창038경기민요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인공 _ 묵계월 명창041국악교육에 헌신한 선견지명 _ 박귀희 명창044끈기와 집념의 화신 _ 박동진 명창048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_ 박범훈 교수053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_ 박병천 명인, 김영태 시인059청초한 유덕遺德은 한악계의 등불 _ 성경린 선생061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_ 송방송 교수063소리꾼의 판소리 사설 정립 _ 송순섭 명창065장인 정신의 사표가 될 판소리 여왕 _ 안숙선 명창076서도지방의 맛과 멋을 이어 준 고마운 은인 _ 오복녀 명창078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_ 오정숙 명창081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_ 원장현 명인085실사구시의 학문을 궁행한 성실한 학자 _ 이보형 선생088고소한 해학이 일품인 경중예인鏡中藝人 _ 이상규 교수090대금산조의 달인 _ 이생강 달인093노래로 그려 낸 한 시대의 풍속사 _ 이은주 명창096가야고 음악의 경중미인 _ 이재숙 교수099소중한 문화지킴이 한국정가단 _ 이준아 가객101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_ 이춘희 명창103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음악학의 태두 _ 이혜구 박사107심금을 퉁겨서 노래하는 국민가객 _ 장사익 가걸歌傑110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 _ 정광수 명창113피리로 세상을 보듬어 온 외곬 인생 _ 정재국 명인116영년퇴은이 유발하는 무정세월 _ 조운조 교수119놀이마당문화의 파수꾼 _ 지운하 명인122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_ 최경만 명인125정악 가야고의 법통을 잇는 금객琴客 _ 최충웅 명인130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_ 황병기 교수133내 삶의 인드라망을 수놓은 한악계 별들 _ 김연수, 이창배 외2부144전통음악을 사랑하는 고마운 기업인 _ 초해 윤영달 선생148초야에 묻힌 국악계의 보옥 _ 서암 권승관 선생153어느 인연이 그린 삶의 무늬 _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158기인처럼 살다 간 풍류객 _ 연정 임윤수 선생161정녕 가시나이까 _ 화정 김병관 선생165유어예의 귀명창 _ 호암 이병철 선생175한악계의 은인 _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179문화가 된 노래 아리랑185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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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Pansori epic chant) 의 역사 ( Video :English subtitles)판소리의 발생 판소리의 발생에 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다. 다만 무가기원설, 육자백이토리설, 판놀음기원설, 광대소리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들이 쏟아져 나와있다.어진 화랑제도에서 판소리의 뿌리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화랑제도가 과거제도로 바뀌면서 예능에 능통한 일부 화랑들은 남사당을 조직하여 유랑하기도 하였고, ‘광대’란 말 역시 화랑의 방언이기에, 판소리의 근원을 신라의 화랑에 두는 게 옳다는 주장이다. 한편, 전라도 무속을 배경으로 한 무가에서 판소리가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문화적 풍신이 전라도 무속과 유사하고, 초기 소리 광대들의 출신이 거의 무당이었으며, 무당들 중에는 전라도 지방출신이 많았다는 점 등에서 판소리의 기원을 전라도 지방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판소리는 본래, 18세기 일반 서민들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뒷받침 되어 독립하고 발전한 예술 장르였다. 그러나 이후, 점차 양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양반들의 기호에 맞는 내용으로 변화하였다. 양반들은 사설의 윤색과 개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19세기 후반, 고창의 신재효(1812∼1884)는 구전(口傳)으로 전수되던 판소리 사설 가운데 여섯 바탕을 직접 문자로 정리하는 업적을 세웠다. 또 중인으로서 아전 출신이었던 그는,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판소리 제자를 배출하고 후원하기도 했다. 판소리를 생성시킨 주도 세력 또한 한강 이남의 시나위권,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격(巫覡)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에도 시나위권의 단골(丹骨)들이 부르는 서사무가(敍事巫歌)의 연행 형태, 장단, 음조 등에서 판소리와 유사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혼돈과 격변의 시간을 거쳐 급격히 확대된 평민층의 현실적인 불만과 욕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하층의 천민으로서 신분 변화를 꿈꾸던 무격(巫覡)들의 이상이 결합하여, 판소리라는 새로운 민속 예술이 탄생했다. 전승 정보 지금까지 발견된 판소리 사설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영조 30년(1754년), 만화(晩華) 유진한(柳振漢)이 지은 <만화집(晩華集)> 의 <춘향가> 한시(漢詩) 사설 200구(句)이다. 또 문헌 자료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늦어도 정·순조 때에 12종의 판소리 바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와 재인(才人)들을 불러 3일유가(三日遊街)하고 홍패고사(紅牌告祀)를 지내던 풍습이 있었는데, 정조 때의 가난한 선비였던 송만재(宋晩載)는 잔치를 베풀 수 없었다. 그래서 <관우희(觀優戱)> 라는 글로 이를 대신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판소리 12 마당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주목받고 있다. 관우희(觀優戱)에는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 <왈자타령>(↔무숙이타령), <강릉매화전>, <가짜신선타령>(→숙영낭자전) 등 12바탕 판소리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어, 당대에 성행했던 판소리의 규모와 내용 등을 익히 짐작하게 한다. 예능보유자 숙종 말 이후 영,정조 때에는 우춘대, 하은담, 최선달과 같은 명창이 있었다. 또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김제철, 주덕기, 황해천, 박유전, 송광록 등의 명창이 있었는데, 이 중 여덟을 골라 '전기 8명창(前期 八名唱)'이라 한다. 이때는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 수준이 크게 향상되어, 권삼득의 설렁제, 모흥갑의 강산제(→東강산제), 염계달·고수관의 경드름과 추천목, 김제철·신만엽의 석화제 등 독특한 음악적 더늠이 나온 시기다. 그 밖에 동편제의 시조(始祖)인 남원 운봉의 송흥록, 중고제의 시조(始祖)인 경기도 여주 염계달의 활약도 두드러지며, 순창에서 태어나 보성 강산에서 살았던 서편제의 시조(始祖) 박유전 역시 판소리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가왕(歌王)으로 불리던 송흥록은 진양 장단을 완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철종 무렵에는 박만순, 이날치, 송우룡, 김세종, 장자백, 정창업, 정춘풍, 김찬업, 그리고 김정근, 한송학 등이 활약하였는데, 그 중 여덟을 골라 '후기 팔명창(後期 八名唱)'이라 한다. 전기 팔명창 시대가 판소리를 제각기 다른 스타일의 동편, 서편, 중고제 등의 유파로 분화시켰던 시기였다면, 후기 팔명창 시대는 이러한 유파적 특성과 음악적 특색이 정착되고 더욱 심화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후기 팔명창 중에서 박만순·송우룡·장자백·김찬업은 동편제를 이었고, 이날치·정창업은 서편제를, 김정근·한송학은 중고제를 각각 계승하여 널리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후 고종 후기에서 일제하 1930년대까지는 '오명창 시대(五名唱 時代)'라 일컬어진다. 이 때 활약했던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박기홍, 유성준, 김채만, 전도성 등의 명창 중 다섯을 골라 '오명창(五名唱)'이라 부르곤 하는데, 대개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꼽는 게 일반적이다. 판소리 명창은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영조 말기 정조 초기에 하한담·최선달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황해천·송흥록·송광록·모흥갑·염계달·김제철·신만엽·방만춘 등의 명창이 활동했다. 또 고종 초까지는 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송우룡·정창업·정춘풍·장자백 등의 명창이 활동했다. 20세기 초까지는 박기홍·전도성·김창환·이동백·김창룡·김채만·정정렬 등이 활동했다. 판소리는 점차 무대화되다가 여성국극단에 의해 여성창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오늘날 판소리 예능보유자로는 춘향가에 김여란·김연수·김소희(본명 김순옥(金順玉)), 심청가에 정권진, 흥보가에 박녹주·강도근, 수궁가에 정광수(본명 정용훈(丁榕薰))·박초월, 적벽가에 박동진·박봉술·한승호(본명 한갑주(韓甲珠))가 인정되었으며 이후 춘향가에 오정숙, 심청가에 성창순·조상현이 인정되었다. 또한 춘향가에 성우향(본명 판례), 흥보가에 박송희(본명 정자), 적벽가에 송순섭이 새로 인정되었다.(2006년 상황) 현대로 넘어온 1940년 이후에는 김정문, 정응민, 공창식, 장판개, 조몽실, 임방울, 김연수, 박동실, 정광수, 성원목 등의 남자 명창과 이화중선, 박녹주,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등의 여류 명창이 나타나, 각기 판소리의 일가를 이루며 널리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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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박녹주의 예술과 비운의 사랑박녹주의 本名은 命伊, 雅號는 春眉, 藝名은 錄珠이다. 흔히 판소리하면 호남을 떠올리게 된다. 판소리가 거기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는 그 사정이 달랐다. 1920년대부터 40년대에 이르기까지 영남은 그야말로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박녹주는 영남 출신의 선배 김추월(金秋月:1896∼1933), 김녹주(金綠珠:1897∼1932), 이화중선(李花中仙:1898∼1943), 김초향(金楚香:1900∼1983), 권금주(權錦珠:1903∼1971) 그리고 후배였던 이소향(李素 香:1905∼1989), 신금홍(申錦紅:1906∼1942), 신숙(愼淑:1916∼1982), 오비취(吳 翡翠:1918∼1982), 임소향(林素香), 박귀희(朴貴嬉:1921∼1993), 박초향(朴楚香:1 923∼1964) 등과 함께 달구벌을 판소리 고장으로 만든 주역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박녹주의 은퇴공연이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있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이날 무대에서 박녹주는 "여러분들을 이 자리서 보고 언제 다시 뵐지 이제 기약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저의 무대생활은 마지막입니다. 소리가 잘못되더라도 허물없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략한 인사말과 함께 단가 <백발가>와 흥보가 중 <박타령>을 불렀다. 박녹주는 울먹이며 간신히 <백발가>를 마쳤다. 객석도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은퇴 공연은 부산, 대구, 대전으로 이어졌다. 박녹주는 1905년 경북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박중근, 모친은 권순이이며 박녹주 밑으로 남동생 태술, 만호, 만술이 있었다. 박록주의 어릴 적 이름은 모친의 이자를 딴 命伊였다. 박녹주의 부친은 한량으로 집안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노름과 술로 세월을 보냈고, 그리하여 박녹주는 10살 때부터 모친을 도와 농사짓고 소를 몰며 물레도 돌리며 억세게 자라났다.박녹주는 그녀의 아버지가 박수무당으로 소리선생도 겸했던 터라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접하면서 자랐는데 1916년 그녀가 12세 때, 그녀가 살던 선산에 협률사 공연이 있었다. 협률사는 소리, 춤, 줄타기, 등의 갖가지 재주를 보여주는 순회 공연단체인데, 박녹주의 부친이 이 공연의 판소리를 보고 크게 감동하여 평소 목소리가 우렁찬 박녹주를 명창으로 길러내 그녀가 벌어들인 돈을 자신의 노름과 술값으로 쓰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부친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박기홍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 그녀의 부친은 딸에게 명창이 되라며 命伊라는 이름 대신 錄珠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박녹주는 하루 24시간 가운데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약 20시간 동안 꼬박 소리를 질러가며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웠다. 그러나 소리할 때의 자세가 매우 엄했고 사설은 거의 한문 투로 되어 있어서 외우기가 무척 어려웠다. 음식은 참기름만 먹었고 고된 연습으로 목에선 피가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지옥훈련 같았던 박기홍의 가르침으로 판소리의 기틀을 확고하게 갖춘 그녀는 그때부터 경상도 곳곳에 초청되어 다니며 소리를 하기 시작했으나 사례비가 생기는 족족 그의 부친이 술값으로 써버렸다. 그러던 그녀의 나이 14세가 되던 해 그녀는 김창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김창환은 좀처럼 소리를 가르쳐 주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듣고 그저 따라하도록 지시할 뿐이었다. 박녹주는 김창환이 무대에서 부르는 <제비노정기>를 유심히 듣고 모르는 것을 물어보며 한 구절씩 익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덕택에 김창환의 <제비노정기>가 지금까지 전승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박녹주의 세 번째 스승인 강창호는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실력이 대단했고, <심청가>에 장기가 있었다. 그녀는 수궁가 중 <고고천변>을 두 달 동안 배웠다. 강창호에게 소리를 배운 뒤 그녀는 다시 부친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가서 억지로 기생 수업을 받게 된다. 그녀의 부친은 박녹주를 당시 달성권번의 행수기생이던 鸚鵡에게 3년동안 양딸로 맡기는 대신 2백원을 받았고 박녹주는 행수기생의 소유가 되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겨우 14세였다. 앵무는 너그러운 품격의 소유자였고, 재주가 뛰어난 박녹주를 아꼈다. 박녹주는 앵무를 통해 기생수업을 받으면서 춤, 시조, 소리 등을 연습했으며 예의바른 행동거지를 배워나갔다. 그러던 중 그녀 나이 15세 때 李某라는 한량이 박녹주의 딱한 처지를 듣고 2백원의 빚을 대신 갚아 주는 일이 생기게 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박녹주였지만 그녀는 또다시 아버지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갔다. 역시 기생수업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때 그녀는 김점룡, 임준옥, 조진영에게 남도민요 <육자백이>와 <화초 사거리>를 배우게 된다. 당시 그녀는 김초향 다음 가는 소녀 명창으로 이름이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하룻밤 초청되어 가면 10원을 받았다고 한다. 쌀 한 가마니가 50전 할 때의 일이니 그 명성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무렵 충청도의 갑부 변씨가 그녀에게 화초머리를 얹어주고 세간을 사주었다.1922년, 박녹주는 서울로 가서 송만갑에게 단가 <진국명산>과 춘향가 중 <사랑가>부터 <십장가>까지를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1923년 그녀는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게 되면서부터 눈부신 활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전성기를 보내던 1928년 봄 그녀는 조선 극장에서 열린 8도 명창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공연이 끝난 후 두 사람이 그녀를 찾아가는 데 한 명은 전 부통령 김성수의 부친 김경중 영감이었고 다른 한 명은 김유정이었다.김유정의 박녹주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은 그녀가 평생 사랑의 고달픈 행로를 걸어야 했던 전주곡의 시작과도 같았다. 원래 김유정의 집안은 천석지기의 지주였고, 고향은 강원도 산골이었지만 서울에도 백여 칸 되는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그러나,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로 집안을 관리하던 큰형의 방탕한 생활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린나이에 부모 모두를 잃고 외롭게 성장기를 보냈던 그는 늘 어머니 사진을 품고 다니며 연상의 여성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을 품게 되었는데 그것이 비극의 시초였다.박녹주에게 첫눈에 반한 유정은 그날 이후 심한 가슴앓이를 하게 되었다. 유정을 매일 밤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연모의 마음을 글로 옮겨 보냈다. 편지를 받고 무척이나 당황했던 녹주는 편지를 다시 하숙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이번엔 레코드판에서 뜯어낸 자신의 사진 밑에 ‘당신을 연모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옵소서’ 라고 적힌 편지가 전해져 왔다. 하루가 멀다 오는 편지를 보며 근심하게 된 녹주는 행랑어멈을 시켜 유정을 오게 한 뒤 학생은 오로지 공부에 전념해야지 딴 생각을 하면 아니 된다하고 자신은 기생의 신분임을 내세워 조용히 타일러 보았지만 이미 유정은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다. 편지를 아무리 보내도 답장이 없자 유정은 녹주의 집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게 되고, 이를 보다 못한 녹주의 동생 태술이 유정을 달래어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날로 태술과 친해진 유정은 친구 태술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녹주의 집을 찾아갔고, 태술을 통해 편지를 직접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녹주의 마음은 요지부동으로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협박과 공갈 등으로 그녀를 괴롭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다음은 박녹주가 「한국일보」에 38회 연재(1974. 1. 5~ 2. 28)된 「나의 이력서」에 고백한 내용이다. 우리는 그 자료를 통해 유정이 박녹주에게 한 말의 내용과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살펴 볼 수 있게 되고 유정의 슬픈 집착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척 하는 거요. 보료 위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김유정이 나한테 죽이겠다고 협박편지를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김유정이 나를 부른 칭호도 금새 달라져 갔다. 처음에 "선생”이라고 하더니 "당신”이라고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이 불렀다. 하루는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데 검은 그림자가 인력거를 향해 돌진해왔다. 직감적으로 김유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력거꾼에게 정거하지 말고 빨리 앞으로 달려가라고 소리쳤다. 김유정은 번쩍이는 뭔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칼이다’ 하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인력거꾼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갔으나 김유정이 더 빨랐다. 그는 인력거채를 움켜잡고 나에게 소리쳤다. "녹주, 오늘 밤은 너를 죽이지 않으마. 안심하고 내려라.” 그가 들고 있던 것은 하얀 몽둥이였다. 그는 자기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들이대더니 불뿜는듯한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물었다. "너는 혹 내가 돈이 없는 학생이기 때문에 나를 피하는 거지?” 나로서는 너무나 의외의 질문이었다. 잘못 대답하면 내가 돈에 의해 좌우되는 천한 여자가 될 것만 같았다....."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이 정도의 협박편지가 들어온 것은 그해 즉 1928년 겨울쯤이다.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를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편지는 잉크로 쓴 게 아니라 혈서였다.이렇듯 유정의 감정은 병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박녹주는 직업상 사람들과의 만남이 잦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일상은 활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늘 어디론가 가서 소리를 하는 그녀를 문 밖에서 기다리며 나올 시간만 기다렸지만 끝내 나오지 않으면 온갖 상상을 일삼으며 그녀를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것이었다.박녹주는 유정이 구애하는 동안 매년 그를 피해 피서를 가는데 1928년에 한 달, 그리고 1929년에는 두 달동안 원산에 있는 삼방 저수지에 머물며 창 공부를 한다. 그녀가 종적을 감춘 동안 매일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며 초조해하던 유정은 감정이 한층 더 격해진다. 후에는 그의 감정이 연모의 감정인지 혹은 복수의 감정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가 된다. 이 때 그의 음주량은 그의 몸 상태에 비해 과도했으며, 늑막염을 앓고 있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한 상태였다. 혈서를 쓰고, 협박을 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등의 행동은 그녀가 그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오히려 역효과만을 낳을 뿐이었다. 박녹주가 자신은 소리하는 사람이므로 학생과 연애할 수 없다고 하자, 유정은 학생과 소리하는 사람이 사랑해서 안된다는 규정이 어디에 있냐고 대들며 사랑이란 국경이 없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그러나 이미 남의 소실이었던 박녹주는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는데, 부친 문제 등으로 인생을 비관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던 박녹주가 일주일여만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바로 유정이었다. 그는 "당신 장례를 치루려고 기다렸다” 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것을 보면, 유정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아주 서툴거나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정은 박녹주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음에 큰 상처를 입어 학교도 그만두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내려간 1930년 여름부터 그가 타계하는 1937년 봄까지 약 7년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30여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쓰지만 유정의 가슴앓이는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이어져 결국 나이 서른에 눈을 감는다. 이때의 작품 중 「생의 반려」와 「두꺼비」는 그와 박녹주의 관계에 대한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룰 수없는 사랑에 대한 유정의 恨은 그렇게 작품 속으로 용해되고 승화되어 갔던 것이다.김유정과 같은 시기에 알게 되었던 김경중은 박녹주의 소리일생에 지대한 영향과 주게 된다. 김경중은 8도 명창대회에서 박녹주의 모습에 반하여 그녀에게 집을 한 채 선사하는 등 아낌없이 그녀에게 베품을 주었다. 그 뒤에도 김경중은 박녹주를 귀애하며 그녀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당시는 일제의 수탈이 가혹해 먹고사는 것이 힘든 사정이었고, 박녹주는 한량인 아버지에 의해 착취당하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경제력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생수업을 받고 2백원에 팔려 다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또 그런 와중에 몇 차례의 사랑에 빠지기도 했는데 15세 때는 임준옥과 사랑에 빠졌다가 부친의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고, 17세 되던 1921년에 열린 원산 명창대회에서 남백우와 만나 이내 혼인하였으나, 그녀는 첩이었고, 그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수많은 역경을 통해 그녀는 이미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경험했었고, 누구보다 뛰어난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으므로 낭만적이고 현실감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김유정과의 사랑을 받아드리기에는 그녀의 굴곡많은 삶이 허락하지 않았을 터이다. 김경중은 1929년에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에게 박녹주가 소리를 배우도록 주선해 주어 21일동안 김정문에게 흥보가 중 초입부터 <제비 후리러 나가는 데>까지를 배우게 된다. 이 때 배운 소리 가운데 <박타령>과 <비단 나오는 데>는 흥보가 중에서 박녹주가 가장 즐겨 불렀던 대목이다. 박녹주는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우고 집으로 돌아온 1929년 3월, 부친에 대한 원망과 복잡한 가정사를 비관하여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을 기도하게 되는데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다.자살 소동 이후 몸을 회복하게 된 박녹주는 1930년, 다시 김경중의 권유에 따라 김정문에게 <심청가>를 배우기 위해 남원으로 가서 열흘 동안 심청가 전 바탕을 익히게 된다. 김정문은 송만갑이 "제자가 무섭다.”고 할 정도로 극찬한 명창이었다. 김경중의 후원이 없었다면 김정문의 <심청가>의 전승이 끊어질 뻔했는데, 다행이 박녹주를 통해 전승되어 온 것이다. 남백우의 첩으로 사는 데 회의를 느낀 박녹주는 이별을 결심하고 申某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여 함께 살다가 1931년에 김종익과 재혼하게 된다. 김종익은 박녹주와 송만갑을 위해 조선성악연구회의 사무실로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159번지에 있던 9천 5백원짜리 건물을 사주었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양반 등 상류계층이 몰락하게 되자 전통음악인들은 돈 많은 한량과 서민을 상대로 공연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그런 장소에 음악인들을 공급하는 구실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박녹주는 생활을 했고, 송만갑에게 틈틈이 소리를 배웠다. 박녹주는 김여란, 이기권과 함께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숙영낭자전>을 배웠는데, <숙영낭자전>은 전승이 끊어진 판소리로서 정정렬이 창작해서 불렀고 그것을 박녹주가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유성준에게서 <수궁가>를 익혔다.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창극을 춘향전을 공연했는데, 이 때 박녹주가 춘향 역할을 하였다. 공연이 끝난 후 춘향을 직접 보려는 관중으로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40년 박녹주의 부친이 타계했다. 박녹주는 한평생 부친을 원망하며 살았으나, 막상 그가 타계하자 며칠 동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박녹주에게 있어 예술과 사랑의 길 모두가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 훗날 그녀는 아편흡입과 아편소지 매매 등의 죄명으로 공판에 회부되고 철창에서 탄식하는 절망의 날들을 맞기도 했으니 말이다.박녹주는 여류명창이면서도 매우 남성적인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데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가 투박하고 꿋꿋한 소리제를 구사했던 것은 그가 남자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웠던 데 가장 큰 이유가 있겠고, 또 그가 타고난 성음 자체가 강한 인상을 주며 그의 고난에 찬 인생살이가 그를 강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박녹주의 제자인 이옥천은 박녹주의 소리를 가리켜서 "통이 크고 박력이 있으며, 부드럽기 보다는 꿋꿋하며, 맺고 끊음이 무섭다.”고 평했다. 박녹주는 대체로 전바탕 공연보다는 토막소리 위주로 공연을 하였기 때문에 아니리는 극히 짧으며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멋이 있다. 판소리 명창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전라도 지역이라서 전라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산에서 태어난 박녹주는 경상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기 때문에 매우 특이하다. 남성을 능가할 정도의 통성을 위주로 해서 소리를 끌고 나가며 소리 맺음에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고 분명하다. 이런 박녹주소리의 특징이 「?조선 창극사」?에는 모지락스럽게 맺고 끊는다고 적혀 있다. 성음은 엄성이 많이 쓰이고 정대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각 대목마다 상황에 맞게 성음, 장단, 선율에 변화를 주어 이면을 살려내는 기량이 출중하다. 또 서편제의 더늠을 부르더라도 동편제의 특성을 가미해서 소리가 매우 진중하다. 이러한 박녹주의 소리는 별로 힘 안들이고 쉽게 부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엄청난 공력을 내보인다. 또한 박녹주는 발림이 요란하지 않았다. 발림보다는 성음과 선율에 변화를 주어 목소리만으로 각 대목의 상황을 적절히 묘사해냈던 것이다.1940년대 후반에 박녹주는 국악계가 남자들 편의 위주로 운영되는 것에 불만을 갖고 김소희, 박귀희 등을 이끌며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면 안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판소리계에서 유독 경상도 사투리를 고집한 박 녹주가 남긴 음반은 명물로 꼽히며, 40년대에 김소희.박귀희 등과 함께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는 남성 전유물처럼 인식되던 판소리계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6. 25 발발 후에는 월북을 강요당하기도 했으며 전쟁통에 한쪽 눈을 실명하여 그 뒤로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 6. 25때 그녀는 오태석, 김세준, 박춘홍, 조농옥, 이용배등 30여명과 함께 방위대에 입대하여 군인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다니기도 하였다.이러한 박녹주는 5명창이 타계한 후 여류 국창으로 군림하였고 인간문화재로 소리판을 지켜냈다. 박녹주의 콜럼비아에서 나온 음반이 인기를 끌자 여러 음반회사에서 앞다투어 그녀의 음반을 제작했다. 박녹주는 음반 취입, 무대 공연, 잔칫집 초청 공연 등으로 돈을 벌어 월수입이 무려 5-6백원이나 되어 자가용차를 전세내어 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저축하는 성품이 아니어서 돈이 생기면 모두 써버리곤 하여 말년의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박녹주는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서 50대 전반기였던 1955년~1960년에 가장 좋은 소리가 나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국가 경제가 극도로 악화되어 대다수의 국민이 음악을 즐길 여유가 없었기에 음반 제작이 활발하지 못했다. 그녀 또한 6. 25 이후부터는 유랑극단 생활을 통해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녀는 1960년 초에 급성 폐렴을 얻어 경찰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 때 그녀의 유랑생활은 끝이 났다. 그녀는 젊을 때 벌어놓은 돈을 저축해 놓지 않아, 6. 25 이후에는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어렵게 삶을 꾸려나가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1965년 박녹주는 김여란, 김연수, 김소희, 정광수, 박초월과 함께 <춘향가>로 중요 무형 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다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대상이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확대되면서 그녀는 <흥보가>의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박녹주의 은퇴공연을 하고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1970년대에 집에서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운영했다. 김소희, 한애순, 박귀희, 성우향, 조상현, 박초선, 성창순, 이옥천, 한농선, 박송희, 정성숙, 조순애, 정의진 등이 그녀에게서 소리를 배웠다.1978년 박녹주는 고향인 선산에서 공연을 했다. 이 무대에서 그녀는 <백발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소리를 하면 할수록 폐가 붓는 지경으로 몸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녀가 74세의 병든 몸을 이끌고 고별무대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생각하면 징그럽도록 사연도 많고 한도 많았던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단가 <백발가>를 목놓아 부르자 객석은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변해버렸다. 그러던 1979년 5월26일 오후 1시, 시대의 명창 박녹주는 셋방을 전전하다가 면목동의 단칸방에서 혈육한 점 없이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그에게는 오직 양아들로 맞아들인 조상현이 있을 뿐이었다.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마을회관 앞 놀이터. 화강석 장구와 북을 깔고 앉은 ‘인간문화재 제5호 박녹주(朴綠珠:1905∼79)여사 기념비’가 외롭게 서 있다. 1981년 세워진 이 비석의 주인공 박녹주는 젊어서는 대구 달성권번, 서울 한남권번의 名妓로 이름을 날렸고, 늙어서는 동편제의 거목으로 판소리<춘향가>, <흥보가> 분야 인간문화재로 예우를 받았지만, 삶 자체는 판소리 서편제처럼 너무나도 서글펐다. 조상현, 박송희, 신영희 등 그의 뜻을 기리려는 후학 들은 매년 그녀가 타계한 5월26일, 비석 앞에서 판소리 한마당으로 기제사를 올린다. 지금은 구미문화연구회 등이 주축이 되어 추모사업회가 구성되었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한 전국국악대회도 2001년부터 매년 10월 열리고 있다.(출처:한국컨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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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란 무엇인가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이다.문제는 ‘판’의 의미이다. 우리말에서 ‘판’의 일반적 의미는 ‘상황·장면’과 ‘여러 사람이 모인 곳’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취할 경우 판소리라는 이름은 ‘다수의 청중들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소리는 노래의 다른 말로, 목소리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판소리는 여러 시청자들을 상대로 하여 판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통칭할 수 있다. 그러나 가곡, 별곡, 영산(단가) 등과 같이 옛날 놀이판에서 불리던 소리는 판소리라고 하지 않고, 판소리에 대비되는 말로서 '토막소리'라고 한다. 판소리는 이런 '판의 노래'를 범칭하지 않는다. 창자가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서사적이고 극적인 긴 이야기를 판을 짜서 부르는 특정한 공연만을 판소리라고 한다. 판소리는 선생에서 제자에게로, 가창식 전수에서 가창식 습득으로 전승, 발전되었다. 즉, 사제전승(師第傳承) 및 구비전승(口碑傳承)에 의존해왔다. 한 작품을 익히는 데도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창자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로 엮어 발림을 곁들이며 구연하는 고유의 민속악. 구비서사시이다. 판소리는 전통적으로 광대라고 불려진 하층계급의 예능인들에 의하여 가창·전승되어 왔다. 그들은 때로는 농촌이나 장터에서 노래했고, 때로는 양반·부호들의 내정(內庭)에서 연희하기도 하였다. 판소리의 유파 동편제 동편제는 운봉·구례·순창·흥덕 등지의 이쪽 즉, 전라도 동북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를 순조 때의 명창 송흥록(宋興祿)의 소리제에서 송광록(宋光祿)·박만순(朴萬順)·송우룡(宋雨龍)·송만갑(宋萬甲)·유성준(劉聖俊)으로 전해지는 소리제를 주축으로 한다. 그 밖에 김세종(金世宗)·장자백(張子伯), 정춘풍(鄭春風)·박기홍(朴基洪)으로 전해지는 소리제 또한 동편제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동편제 소리는 비교적 우조(羽調)를 많이 쓰고 발성을 무겁게 하고 소리의 꼬리를 짧게 끊고 굵고 웅장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서편제 서편제는 보성·광주·나주 저쪽, 즉 전라도 서남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로 철종 때의 명창 박유전(朴裕全)의 소리제에서 이날치(李捺致)·김채만(金采萬)으로 전해지는 소리제를 주축으로 하고, 그 밖에 정창업(丁昌業)·김창환(金昌煥)·김봉학(金奉鶴)으로 전해지는 소리제로 큰 줄기를 이루었다. 서편제 소리는 비교적 계면조(界面調)를 많이 쓰고 발성을 가볍게 하며, 소리의 꼬리를 길게 늘이고 정교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중고제 중고제는 경기도·충청도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로 순조 때의 명창 김성옥(金成玉)·김정근(金定根)·황호통(黃浩通)·김창룡(金昌龍)으로 전하여지는 소리제와 또한, 순조 때의 명창 염계달(廉季達)·고수관(高壽寬)·한송학(韓松鶴)·김석창(金碩昌)으로 전하여지는 소리제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중고제 소리는 동편제 소리에 가까우며 고박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강산제 강산제는 서편제의 수령 박유전이 말년에 전남 보성군 강산리에서 여생을 보내며 창시한 유파이다. 박유전은 젊었을 때 뛰어난 기량과 목소리로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그의 사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곳에 묵고 있는 많은 유생들과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다. 유생 중에는 판소리에 대한 높은 견식과 일가견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피력한 조언을 바탕으로 창시한 것이 바로 강산제이다. 강산제는 서편제가 가지는 애절한 느낌을 지양하고 될 수 있으면 점잖은 가풍(歌風)을 조성하도록 하는 게 특징이었는데, 유학의 영향을 받아 삼강오륜에 어긋나는 대목은 삭제, 또는 수정하는 게 보통이었다. 강산제의 대표적 판소리는 '심청가'이며, 이 계통의 명창으로는 박유전, 정재근, 정응민, 박춘성, 성창순, 성우향, 조상현 등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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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한악계의 별들 (저자:한명희)이 책은 가곡 '비목'의 작시자로 널리 알려진 한명희 선생이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보석 같은 인연들의 이야기를 역사라는 시간의 대리석에 새겨놓은 것이다. 작가가 유려한 문체로 새겨놓은 주인공들은 우리 한악(국악)계의 터를 다듬고 보듬어 온 명인 명창들과 한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된 아리랑과 한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흥, 멋, 운치)에 대한 해박한 고찰은 한국의 전통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나와 TBC(동양방송) PD 시절부터 국악에 남다른 애정과 사명감을 갖고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우리 국악계를 이끌어 온 분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어 온 저자 또한 우리 음악을 계승 발전시켜 온 산증인이다. 대학교수와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내면서 《하늘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리가락 우리문화》 《한국음악, 한국인의 마음》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학 떠난 빈터에는》 등의 저서는 우리 음악계의 소중한 문헌들이다. 차례 004서문 인연 한 자락 1부010가야고 병창으로 그린 비천상 _ 강정숙 명창012사물놀이로 세계를 제패한 선구자 _ 김덕수 명인016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_ 김소희 명창022회심곡의 프리마돈나 _ 김영임 명창026월하의 음악 세계가 그립다 _ 김월하 가객028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_ 김천흥 선생034둥둥 북을 울리면 신명이 솟는다 _ 김청만 명인036경기민요의 외연을 넓혀 가는 열정 _ 김혜란 명창038경기민요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인공 _ 묵계월 명창041국악교육에 헌신한 선견지명 _ 박귀희 명창044끈기와 집념의 화신 _ 박동진 명창048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_ 박범훈 교수053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_ 박병천 명인, 김영태 시인059청초한 유덕遺德은 한악계의 등불 _ 성경린 선생061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_ 송방송 교수063소리꾼의 판소리 사설 정립 _ 송순섭 명창065장인 정신의 사표가 될 판소리 여왕 _ 안숙선 명창076서도지방의 맛과 멋을 이어 준 고마운 은인 _ 오복녀 명창078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_ 오정숙 명창081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_ 원장현 명인085실사구시의 학문을 궁행한 성실한 학자 _ 이보형 선생088고소한 해학이 일품인 경중예인鏡中藝人 _ 이상규 교수090대금산조의 달인 _ 이생강 달인093노래로 그려 낸 한 시대의 풍속사 _ 이은주 명창096가야고 음악의 경중미인 _ 이재숙 교수099소중한 문화지킴이 한국정가단 _ 이준아 가객101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_ 이춘희 명창103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음악학의 태두 _ 이혜구 박사107심금을 퉁겨서 노래하는 국민가객 _ 장사익 가걸歌傑110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 _ 정광수 명창113피리로 세상을 보듬어 온 외곬 인생 _ 정재국 명인 116영년퇴은이 유발하는 무정세월 _ 조운조 교수119놀이마당문화의 파수꾼 _ 지운하 명인122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_ 최경만 명인125정악 가야고의 법통을 잇는 금객琴客 _ 최충웅 명인130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_ 황병기 교수133내 삶의 인드라망을 수놓은 한악계 별들 _ 김연수, 이창배 외 2부144전통음악을 사랑하는 고마운 기업인 _ 초해 윤영달 선생148초야에 묻힌 국악계의 보옥 _ 서암 권승관 선생153어느 인연이 그린 삶의 무늬 _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158기인처럼 살다 간 풍류객 _ 연정 임윤수 선생161정녕 가시나이까 _ 화정 김병관 선생165유어예의 귀명창 _ 호암 이병철 선생175한악계의 은인 _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179문화가 된 노래 아리랑185한국 전통예술을 이해하는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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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한국을 사로잡은 명창 박녹주소설가 김유정이 연모한 여인 단아한 체격으로 명품 동편제를 뽑아내던 박녹주朴綠珠(1905.2.15~1979.5. 26)는 「봄봄」, 「동백꽃」을 쓴 소설가 김유정이 꿈에도 잊지 못하며 석달 간 연서를 보낸 주인공이다. 연희전문에 다니던 4살 연하의 강원도 실레마을 출신 엘리트 소설가의 연모가 이미 소리명창의 영예를 얻고 있던 당대 스타 박녹주의 삶에 파고들지는 못했다. 경북 선산(현재 구미) 고아에서 1905년 2월 15일(음력 1월 25일)에 태어난 박 녹주의 본명은 명이命伊, 호는 춘미春眉이고, 녹주는 예명이다. 박녹주는 호 적상 박재보朴在普와 박순이의 자녀로 태어난 걸로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박중근과 권순이의 3녀로 태어났다. 다소 강한 억척같은 성격에 쟁쟁한 목소리를 내던 박녹주는 12살 되던 해(1916년)에 나라 제일의 명창으로 만들고 싶다는 아버지 손에 끌려 선산 도리사 사하촌에 머물고 있던 가신歌神 박기홍朴基洪 앞에 섰다. 동편제 「적벽가」에 능한 박기홍은 박녹주에게 하루 24시간 중 20시간 이상 소리를 배우도록 했다. 소리하는 자세부터 엄하게 한 박기홍은 무릎을 세우고,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운 자세로 쉼없이 소리를 하 라고 가르쳤다. 점심 때를 제하고는 새벽녘 개밥바라기별이 뜰 때까지 「춘 향가」를 가르쳤다. 박녹주는 불과 두 달만에 「춘향가」전 바탕과 「심청 가」일부를 익혔다. 이때 예명을 녹주로 지었다. 어린 박녹주는 권력으로 위협해도 목숨걸고 이도령과의 순수한 사랑을 이뤄내는 「춘향가」중 옥중가와 몽중가가 맘에 들었다. 천지 삼켜 사랑나고, 사람생겨 글내일제 뜻정자 이별별자를 어이허여 내였든고. 뜻정자를 내였거 든 이별별자를 내지를 말거나 이 두 글자 내던 사람은 날로두고 지였던가. 도 련님이 떠나실 적에 지어주고 가신 가사 한창허니 가성열은 동창의 슬픔이요, 수다에 몽불성은 정부사의 설움이라... 어려운 가사를 외다가 잘못 외면 박기홍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회초리 로 때렸다. 목에서는 피가 났다. 도리사 부근에 머물던 박기홍은 「춘향가」 외에 「심청가」를 조금 더 가르친 뒤 선산을 떠나갔다. 소리를 다 배우기도 전에 박기홍 명창은 떠나고, 박녹주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녹주가 소리를 한다는 소문이 벌써 꽤 났다. 선산은 물론 김천, 왜관, 상주 등지 에서도 초청이 왔다. 이때 벌써 과연 소리는 녹주야 라는 평가를 들었다. 앳된 박녹주가 우렁찬 소리로 「춘향가」 일절을 부르면, 좌중이 다 놀랐다. 14살 되던 해(1918년)에는 노대가 김창환金昌煥을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흥보가」중 제비노정기 를 전수받았다. 제비노정기는 박녹주가 가장 애창하던 대목이다. 어린 소녀가 설움을 받아가며 김창환의 소리를 전수받은 덕에 대부분 소리꾼들이 박녹주의 제비노정기를 이어받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박녹주의 세 번째 선생은 대구 강창호였다. 앞산 절에 머물던 강창호는 예순이 다 된 노인이었으나 소리가 쩡쩡했다. 별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리를 퍽 잘하는 편이었다. 강창호에게 박녹주는 초입부터 심청이 인당수에 빠 지는데까지, 「수궁가」중 고고천변을 두 달동안 배웠다. 강창호에게「심청가」를 배우고 집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권번 에서 기생수업을 받게 했다. 소리를 배우는 것조차 꺼려하던 어머니와는 달리 박녹주의 아버지는 3년간 딸을 맡기고 돈 2백원을 받아갔다. 대구 달성공 원 앞 달성권번이었다. 달성권번에서 행수기생 앵모의 양딸이 되었다. 당시 행수기생 앵모라면 우리나라 한량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수백명의 기생을 거느리고 있었고, 젊었을 때는 미녀 기생으로 명성을 날렸다. 박녹주가 15 살 되던 해에 행수기생 앵모는 환갑을 맞이했는데 이때 서울 한성권번과 조선 권번 기생을 필두로 부산, 동래, 광주, 원산 강경 기생들이 몰려왔다. 1천여명이 넘는 기생들은 대구 방천 옆에 2개의 가설극장을 세우고 앵모 환갑기념공연을 가질 정도였다. 앵모 밑에서 소리 춤 시조를 배우던 박녹주는 단박에 두각을 드러냈다. 앵모는 녹주, 너는 장래 크게 될 거다 면서 격려를 해주었지만 어린 나이에 기생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 지가 받은 돈 2백원을 갚은 박녹주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는 1919년으로 한 창 기미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시기였다. 1919년 4 월 서울로 갔다가 소득없이 다시 고향 선산으로 내려와서 여름을 고향에서 보내고, 박녹주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왔다. 아버지 친구집에 머물면서 권번에 드나들었다. 이미 대구에서 김초향 다음가는 소녀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열다섯살 박녹주는 달성권번에서 알려진 김점룡, 음준옥, 조진영 등으로 부터 육자배기를 배웠다. 육자배기는 판소리와 똑같은 소리이나 명창들은 천 박하다고 부르기를 꺼려했다. 조진영에게 배운「화초사거리」는 민요 중에 서도 가장 어려운 것으로 박녹주의 마음에 쏙 들었다. 1920년, 16살이 된 박녹주는 키도 훌쑥 자라 156cm가 되었다. 하룻밤 초청되 어가면 그때 돈 10원을 받던 박녹주는 아직 머리를 얹지 않은 동기童妓였다. 당시 풍습으로는 기생이라면 화초머리를 얹어야 더 인기를 끌었다. 화초머리 란 낭군을 맞지는 않고, 그저 머리만 얹는 풍습이다. 머리를 얹어주는 사람은 명사이거나 부자양반이었다. 서로 바라는 것 없이 동기가 커서 유명해지면 그때 가서 보답을 하는 식이었다. 박녹주에게 화초머리를 얹은 사람은 변씨라는 충청도 부자였다. 박녹주가 16살 되던 가을에 댕기를 가져간 변씨는 그때 풍습대로 세간 등 모든 것을 그저 사주었다. 변덕스럽던 박녹주의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초머리를 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변씨로부터 얻은 세간을 모두 팔아서 딸을 고향으로 데려갔다. 설을 쇠고, 다시 대구로 딸을 데리고 나간 박녹주의 아버지는 이번에는 강릉 에서 대구 부자 박참봉의 돈으로 권번을 차리자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까지 걸어가며 마을마다 명창대회를 열어 많은 돈을 벌었다. 국창이 될 사람 국창이 될 사람 원산 명창대회는 박녹주의 창에 반한 앙콜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명창대회 라고 해서 지금의 명창 대회같은 공인받은 것은 아니고, 조금 규모가 큰 감상 회 정도였다. 공연 다음날, 박녹주는 원산 부자인 남백우로부터 초청을 받고 소리를 했다. 여기에서 22살 연상 남백우를 만났다. 보성전문을 졸업한 남백 우는 한창 때라 풍채도 좋고 인자한 편이었다. 남백우는 반세기를 소리로 물 들일 명창을 대번에 알아봤다. 녹주, 자네는 우리나라 국창이 될 사람이야. 내가 소홀히 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을 원하는가? 고 물었다. 박녹주는 늘 고생하던 어머니가 이곳 선산에 살지 말고, 멀리 이사가서 사는 게 내 소원이야 하던 말을 떠올렸다. 어머니를 원산에 모셔다가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 박녹주의 바램대로 남백우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원산 중리의 큰 기와집을 세 얻어주고 이사비용을 댔다. 남백우는 박녹주의 첫 남편이다. 18살 되던 1922년에는 서울에서 송만갑宋萬甲(1865~1939)을 만났다. 송만갑은 우미관優美館 명창대회에 출연하고 있었다. 송만갑은 단가 「진국명산」 을 불렀다. 앞이마와 뒷머리가 툭 튀어나와 재주가 넘쳐 흐르는 송만갑은 천생 예술가였다. 몸집이 작아서 성량은 크지 않았으나 높고 강한 철성鐵聲이어서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소리였다. 당시 한성권번에 선생으로 다니던 송만갑을 따라 한성권번에 가서 1923년부터 「진국명산」과 「춘향가」를 배웠다. 헌종 때 가왕으로 불렸던 국창 송흥록이 큰할아버지인 송만갑은 이미 10살에 명창의 칭호를 들었다. 박녹주는 송만갑으로부터 「춘향가」 중 사랑가로부터 십장가까지 배웠다. 24살 되던 1928년에는 조선극장에서 팔도명창대회가 열렸다. 지금 종로세무서 위편에 있던 조선극장은 단성사 우미관과 함께 3대 극장으로 손꼽혔다. 전국 명창들이 모두 출연하다시피한 이 공연에서 재창 삼창 앙콜을 받은 박녹주에게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 사람은 고려대 설립자이자 전 부통령인 인촌 김성수의 부친 김경중, 또 한 사람은 당시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대학생 김유정金裕貞이었다. 김경중은 일국의 명창이 관철동 전셋집이 웬말이냐며 수운동에 3천원 짜리 집을 사주었다. 뿐만 아니라 박녹주가 1929년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 金正文에게 소리를 배우도록 주선해주고, 매달 1백원이나 되는 비용도 대주었다. 소리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었다. 박녹주가 김정문으로부터 「흥보가」의 제비 후리러 나가는데까지 배웠기에 오늘날까지 동편제 「흥보가」가 온전히 전승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박타령과 비단 나오는데 는 박녹주가 즐겨 부른 대목이고, 심청가 전 바탕도 김정문으로부터 전수받았다. 박녹주의 홍보가는 김소희를 통해 소리판의 맥을 잇고 있다. 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는 「수궁가」일부를 배웠다. 「봄봄」, 「동백꽃」 의 작가 김유정金裕貞은 뛰어난 예술성의 박녹주에게서 어릴 때 여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만 짝사랑에 빠져버렸다. 나는 조선극장서 선생이 소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기를 끄는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나는 당신을 연모합니다. 나는 22살의 연전 학생이오.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오. 그로부터 김유정은 석달 동안 매일 편지를 보냈다. 정말 밤에 본 당신은 아름답더이다. , 나는 그 길가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연상의 남편 있는 명창 박녹주를 사랑하는 김유 정의 연모는 때로는 협박으로 때로는 혈서로 때로는 납치극으로 변했다. 한번 만이라도 사랑을 받아달라고 애원하던 김유정은 피묻은 편지도 보냈다. 애끓는 마음을 혈서에 담아보냈지만, 박녹주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김유정의 사랑고백은 온 천지로 퍼져나가 원산의 남편 남백우나 김경중까지 다 알게 되었다. 때로는 박녹주에게 너무 매정하다는 비난이 되돌아오기도 했다. 1929년 김유정은 「소낙비」란 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 로 중앙일보에 동시에 당선됐다. 김유정이 박녹주에게 보낸 연애편지들은 지 금도 강원도 실레마을에 있는 김유정문학관의 유품으로 남아있다. 결국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제어하기 힘든 일방적인 사랑으로 박녹주 바보가 되어버린 김유정은 1937년 늑막염에 폐결핵이 더해져서 유명을 달리했다. 소설가로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으나 30살, 젊음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타계한 것이다. 과한 연모가 엘리트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김유정의 생명까지 앗아간 것일까? 너무 짧고 그래서 더 애틋한 김유정의 삶은 서른 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때 박녹주는 33살이었다. 김유정은 바로 네가 죽였지!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된 박녹주가 연희전문 학생 신분이던 젊은 소설가의 열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김유정의 죽음을 그렇게 안타까워했다. 12살부터 소리길을 닦아온 박녹주는 20대에 벌써 대명창들과 교제하였고, 여류명창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928년에는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심청가」를 취입했고, 연이어 빅터 태평양 레코드에서 판소리 네 바탕을 모두 출반하여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누렸다. 1930년에는 관훈동 '성악연구회'에 자주 나가며 평탄하게 지나갔다. 이 성악연구회란 당시 우리나라의 명창인 송 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이 주동이 된 국악인 모임이었다. 1931년 봄, 박녹주는 두 번째 남편 우석友石 김종익金鐘翊을 만났다. 김종익은 박녹주와 송만 갑을 위해 익선동에 성악연구회 사무실로 9천 5백원짜리 집을 사줬다. 그럴듯한 집을 가진 성악연구회는 정식 총회를 갖고 이동백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했다. 마음이 넓은 둘째 남편 김종익은 늘 너의 몸은 네 것이지만 소리는 세상 사람들 것이니 그들에게 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방송에 나가는 것, 레코드 취입하는 것, 성악연구회에서 창극하는 것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소리는 세상사람들에게 돌려줘야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 결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박녹주는 1935년 동양극 장에서 처음 공연을 가진 「춘향가」(조선성악연구회 주최, 정정렬 연출)에 서 춘향역을 맡았다. 인물이 곱거나 연극을 잘해서가 아니라 소리 하나만으로 춘향역을 맡은 것이다. 그해 봄 동양극장을 1주일간 인파로 가득 메운 「춘향 가」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장장 5시간에 걸친 긴 창극으로 명사 치고 이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국창은 모두 출연했던 이 공연은 아침 10시에서 오후 3시, 오후 7 시에서 자정까지 두 차례 열렸다. 서로 떠밀고 들어오느라 유리창이 깨지고, 출입문이 부서지는 대소동 가운데도 「춘향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 도령 역은 정남희(6·25때 납북), 방자 역은 오태석, 변사또 역은 5대 명창으로 손꼽히는 김창룡, 곡성 원님 역은 송만갑, 임실 현감 역은 정정렬이 했다. 당대 60대 대명창이 조연을 맡을 정도였으니 「춘향가」는 공전의 히트를 쳤 다. 명창들은 요샛말로 애드립도 잘했다. 대사에 없는 말로 관중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한 예로 잔치 도중 운봉역을 맡은 이동백이 송만갑을 보고 여보게 곡성영감. 당신은 어디가서 못 크고 그렇게 작은가 하곤 농을 거는 게 대표적이다. 원래 키가 작은 송만갑을 놀린 것이다. 그러면 송만갑은 운 봉영감은 뭘 먹고 그리 컸소. 좀 알려주소 하고 응수를 했다. 박녹주는 성악 연구회의 창극에서 늘 주연을 했는데 34세부터 춘향역을 내놓았다. 그러나 몸 이 작고 제격이라고 해서 심청역은 39세까지 했다. 성악연구회에서의 창극생 활은 39세까지 계속됐다. 1938년 가을에는 「숙영낭자전」을 동양극장서 초연初演했다. 전통적인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같이 깊고 해학이 짙은 맛은 없었지만 젊은 남녀의 러브스토리이기 때문에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 박녹주는 숙영낭 자역도 맡았다. 「숙영낭자전」은 현진이란 백白진사의 외동아들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녀 숙영낭 자와 사랑 끝에 결혼한다는 줄거리이다. 숙영낭자역을 맡은 박녹 주는 극 중 남편 백현진의 어머니 역을 맡은 임소향林小香에게 절을 해야했다. 임소향은 박녹주보다 열 살 넘게 어렸다. 큰언니로 모시던 박녹주의 절을 받는 게 미안해서 임소향은 어쩔줄 몰라했 다. 그러면 박녹주는 작은 소리로 때려 죽일 년, 절 받아라 하면서 절을 했다고 전한다. 대부분 창극에서 주역을 했으나 37세가 된 1941년에 공연한 「수궁가水宮歌」에서는 단역인 자라 어머니 역을 맡았다. 그런데 창극중에서는 이 「수궁가」가 가장 히트를 했다. 그러나 소도구가 하도 많아 지방공연을 갖지 못했다. 「수궁가」의 주역인 자라 는 임방울이, 토끼는 김연수가 맡았고 수궁용왕은 조상선이 분했다. 천생의 뛰어난 목소리를 가진 임방울은 허풍좋고 우직한 자라역을 잘도 해냈는데, 사실 임방울과 어머니역을 맡은 박녹주는 고생을 엄청했다. 딱딱한 자라옷을 등에 쓰고 엉금엉금 기어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공연한 때가 여름이면 땀이 온 몸을 적셨다. 둘째 남편인 김종익이 1941년 봄, 이질로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타계하기 전, 박녹주는 이화중선李花中仙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김종익은 이달에 벌면 다음달에 저축을 하라고 했으나 한귀로 흘렸다. 만년에 생활고를 겪으면서 박녹주는 남편 김종익의 충고를 고깝게 여기고 이재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해방을 맞고 처음 한 일이 여성국악동호회 결성이다. 그때 까지 국극사 조선 창극단 등 남자들이 이끄는 예술단체가 있었지만 모든게 남성 위주였다. 여성들은 푸대접을 받았다. 1945년 봄 박귀희, 김소희, 임춘앵, 정유색, 임유앵, 김경희 등 30여 명의 여성으로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본격적인 여성국 악운동의 시작을 예고한 것이다. 한국전쟁시 정남희 등이 월북을 강요했으나 잘 모면했으며 명창 30여명과 함께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에 편입되어 1952년까지 군을 돌며 「열녀화」를 공연하였다. 1952년 눈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였고, 대구에서 국극사國劇社를 결성하였다. 1960년부터 박귀희에게 「흥보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964년 12 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박귀희는 송만갑, 김창환,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 등 5명창이 타계한 후 여류 국창으로 군림하다 남자 명창들의 맥이 거의 끊어져버린 인간문화재 시대에 김여란과 함께 쇠퇴하는 소리판을 굳건히 지켜낸 국악계의 어머니이다. 대구의 국악인 박기환씨는 박녹주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국악인이었다며 국립국악원을 만들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들려주었다. 1971년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활약 하였고, 그의 소리는 조상현, 박초선, 성창순, 성우향 등이 이어받았다. 늑대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여성국악인으로서 다소 거칠다 싶은 목소리를 지녀 단단한 무게감을 느끼게 한 명창 박녹주는 대구·경북보다 중앙무대에서 더 큰 활동을 펼쳤다. 타계 일년전인 1978년 고향 선산에서 열린 제자들과 마지막 고별공연에서 백발가를 불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박녹주는 동편제 창법의 국보적 존재로「흥보가」명창이 자 판소리계에 우먼파워를 심은 인간 문화재이다. 평생을 소리로 보낸 박녹주에게 이 이상의 영광은 없을 것이다. 박녹주에게 소리를 배운 사람은 상당히 많다. 박녹주는 박귀희에게 송만갑제가 그대로 살아 있는 「흥보가」를, 정의진에게 박녹주제 「흥보가」를 전수했다. 판소리 기본인 다섯마당 말고도 정정렬이 유일하게 부른 「숙영낭자전」 을 배웠다. 「숙영낭자전」은 김여란과 이기권이 같이 배웠으나 이기권은 일찍 죽고 김여란은 많이 잊어버려 유일하게 박녹주만 알던 것을 박초선, 한농선, 조상현, 조순애, 박송 희 등에게 전수했다. 서편제가 호남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동편제는 영남을 중심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고 그 중심에 박녹주가 있다. 1979년 5월 26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명창 박녹주 노래비는 경북 구미 노상동에 세워져 있다 [경북여성 인물사] 소리로 한국을 사로잡은 명창 박녹주 (저자:최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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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판소리(수궁가&적벽가)’보유자 인정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수궁가)’ 보유자로 김수연(金秀姸, 여, 1948년생) 씨를, ‘판소리(적벽가)’ 보유자로 김일구(金一球, 남, 1940년생), 윤진철(尹珍哲, 남, 1965년생) 씨를 인정하였다. 김수연(수궁가), 김일구·윤진철(이상 적벽가) 씨는 판소리의 전승능력과 전승환경, 전수활동 기여도가 탁월한 점을 인정받아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판소리(수궁가) 보유자로 인정된 김수연 씨는 고(故) 김재경 명창, 고(故) 박초월 보유자(1917~1983), 고(故) 성우향 보유자(1935~2014)에게 판소리 수궁가, 심청가, 춘향가 등을 배웠으며, 2007년에는 판소리(춘향가) 전수교육조교가 되어 전승활동에 힘써 왔다. 판소리(적벽가) 보유자로 인정된 김일구 씨는 부친인 고(故) 김동문 명창, 고(故) 공대일 명창, 고(故) 박봉술 보유자(1922~1989)에게 소리를 배웠으며, 1992년에 판소리(적벽가) 전수교육조교가 되어 현재까지 왕성한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김일구 씨는 지난 9월 판소리 심청가로 보유자가 된 김영자 씨의 남편이다. 또 다른 판소리(적벽가) 보유자인 윤진철 씨는 고(故) 김홍남 선생, 고(故) 김소희 보유자(1917~1995), 고(故) 정권진 보유자(1927~1986)에게 적벽가, 심청가, 흥보가 등을 배웠으며, 보성소리 적벽가를 계승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해왔다. '보성소리'란 정응민 명창이 여러 스승으로부터 배운 서편제, 동편제 소리를 집대성하여 이룬 판소리 유파로, 전남 보성을 근거지로 전승되어 붙인 이름이다. 이번 ‘판소리(수궁가·적벽가)’ 보유자 인정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오랫동안 판소리의 계승에 전념해 온 전승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승 현장에 활력을 불어 넣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판소리 고법과 춘향가 바탕에서도 보유자를 충원하여 판소리 종목의 전승 토대를 더욱 굳건히 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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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온 길 13국악신문 특집부 신문사의 사시는 창간이념이다. 신문사 사주의 경영철학이나 경영 이념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신문사의 경영방침이나 사원들의 행동지침으로 구체화된 것이기도 하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언론사임으로 대개는 진실, 공정, 정의 등 언론의 역할과 관련된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일반 회사 사훈(社訓)과는 다르다. 예컨대 인화(人和)라든지 단결, 사랑 등의 키워드로 이익창출을 독려한다. 신문사 사시는 대개 단문형(슬로건형)과 문장형으로 이뤄진다. 전자는 1면 제호 위나 밑에 매일 싣고 있으나 설명체 사시는 특별히 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시는 대부분 창간 때 제정된다. 창간사와 함께 창간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그래서 창간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통일이라는 단어는 옛 신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88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창간된 일부 신문은 사시로 채택한 예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종교재단과 관련된 신문의 경우에는 당연히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기도 한다. 문제는 자신들이 내세운 사시가 실제 보도에 있어 얼마나 충실히 지켜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사시가 종사자들의 개인적 가치관과 합치되고 신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날 때 의미를 갖는다. 사시를 통해 그 신문의 어제와 오늘을 가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소위 10대 일간지(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한겨레신문·문화일보·한국일보·경향신문·서울신문·국민일보·세계일보)라고 하는 메이져(major)급 신문사의 사시는 독자에게 신뢰를 얻고, 소속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기능도 하기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단문형과 문장형 사시를 갖고 있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살펴본다. 조선일보는 "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1883~1950) 선생과 방응모(方應謨/1883~1950) 선생이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이 사시는 지난 세월 동안 조선일보의 흔들림 없는 이념과 지향점이 되었습니다.” 제정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정의옹호(正義擁護) 문화건설(文化建設) 산업발전(産業發展) 불편부당(不偏不黨) 자신들을 ‘민족지’로 내세우고 정의를 통해 문화를 새롭게 세우겠다는 의지와 산업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어디에 치우침이 없겠다는 네 가지 슬로건을 사시로 하였다. 이는 1920년 창간 단시 제정한 사시를 100년간 유지하고 있다. 다음 중앙일보 사시다. 사주 이병철(1910~1987)에 의해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하자는 뜻으로 제정했다고 한다. 1. 사회정의에 입각하여 진실을 과감 신속하게 보도하고 당파를 초월한 정론을 환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밝은 내일에의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고취한다. 2. 사회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경제후생의 신장을 적극 촉구하고 온갖 불의와 퇴영을배격함으로써 자유언론의 대경대도를 구축한다. 3. 사회공기로서의 언론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이성과 실용을 겸비한 건전하고 품위있는 민족의 목탁이 될 것을 자기한다. 이 중앙일보 사시는 설명형 사시의 전형이다. 1965년 창간 당시로부터 현재까지 유지되는 사시다. 진실을 통해 밝은 미래를 이끌고, 경제후생으로 복지사회를 견인하며, 품위있는 민족의 목탁역할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물론 살핀 두 신문의 창간이념대로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는 독자의 평가일 뿐이다. 국악신문의 사시는 창간호에서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이란 단문형이 제시되었고, 산발적으로 유사한 메시지가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창간사와 발행인의 발언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시는 창간 당시의 시대상에 그 배경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1993년의 판소리 소재 영화<서편제>의 흥행 여파, 1994년 ‘국악의 해’와 ‘국악의 거리’로 제정, 첫 ‘한국방문의 해’ 제정이 그것이다. 국악의 재발견, 국악의 가치 발현, 그리고 국악의 세계화를 이슈화 한 시대였다. 이런 배경에서 창간함으로서 사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삶의 풍요를 인도하는 정보를 담아 공동체 결속에 기여한다. 2. 놀이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악을 중흥시킨다. 3. 민속음악의 생활화에 기여한다. 4. 국악인 공동체를 지원한다. 이 사시는 제호와 창간사 내용과 발행인의 발언, 그리고 산발적으로 제시한 캐치프래이즈를 통해 정리한 것이다. ‘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6’에서도 언급했듯이 ‘전통놀이=민속음악=국악’이란 개념과 국악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를 국악 전승 공동체로 이해한 기조에 기인 한다. 결국 국악신문 사시는 민속음악을 국악의 중심에 두고, 교육과 생활화에 기여하며, 국악 공동체 지원 실천을 표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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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아리랑 서편제 中 - 김명곤(Kim myung gon)진도아리랑 서편제 中 - 김명곤(Kim myung 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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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가(이산저산) 서편제中 - 김명곤(kim myung gon)사철가(이산저산) - 김명곤(kim myung gon) 1993년 영화 서편제中 #판소리 #서편제 #단가 #사철가 #이산저산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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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1: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 정광수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내 뇌리에 각인된 명창 정광수의 이미지는 서너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판소리의 양대 산맥인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이라는 점이다. 정 명창은 김창환으로부터 춘향가와 흥부가를 익혔다. 서편제의 법통을 깨우친 것이다. 그리고 유성준으로부터는 수궁가와 적벽가를 전수했다. 동편제의 소리맥을 이어받은 것이다. 물론 웬만한 명창이라면 동과 서를 넘나들며 소리를 익히는 게 상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 명창의 경우는 일상적인 예와는 유와 격이 다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학 연한으로 보나 사사한 스승들의 면면으로 보나 가히 정통 중의 정통이랄 양수겸장의 명창으로 사료되기 때문이다. 정광수 명창은 어려서부터 서당 공부를 해 한학에도 깊다. 옛날로 치면 비가비 명창인 셈이다. 판소리 사설에는 고사성구가 많고 한문에서 유래하는 낱말들이 부지기수다. 따라서 한학에 깊지 않고는 판소리 사설의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실제로 명창들의 소리를 들어보면, 한문 투의 가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노래하기 때문에 실감 있는 맛을 내지 못함은 물론, 때로는 엉뚱하게 왜곡된 발음을 해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할 때 정 명창의 한학 수학은 분명 남다른 장점임에 틀림없고, 그만큼 자신의 판소리 음악의 완성도에도 크게 작용했음이 사실이라고 하겠다. 음악 외적 얘기가 될는지 모르지만, 정광수 선생이 걸어온 생활 반경 또한 개성적인 면이 많다. 정 선생은 광주 지역에서 주로 활동해 온 명창이다. 얼핏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나는 그것을 높이 평가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해득실을 따라서 부화뇌동하는 세태에 보기 드문 예술가적 소신을 만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 후반의 우리 사회 풍조가 그랬듯이, 국악계의 명인 명창들도 너나없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중앙집권적인 문화구도나 산업사회의 도회적 매커니즘으로 볼 때 어쩌면 당연한 추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광수 명창만은 세태를 추종하지 않았다. 소위 출세에도 명성에도 불리하기 마련인 지방을 고집하며 소신 있는 음악 활동을 솔선해 온 것이다. 세속을 한 수 밑으로 보는 인상적인 예인의 개성이요 소신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정 명창의 소리 세계는 중용과 조화의 예술정신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소중한 미적 정서와 판소리 음악의 덕목을 직조해 가는 독보적인 위치임에 분명하다고 하겠다. 중앙 중심의 인력권에서 벗어나 문화의 지방화를 실천했으니 시대적 균형감각을 선각했다고 하겠고, 결코 쉽지 않은 한학과 소리 공부를 겸비했으니 금상첨화의 예술적 조화를 꾀한 셈이라고 하겠으며, 전문분야인 판소리의 양대 계보를 두루 섭렵했으니 가히 음악적 중용과 조화와 균형을 구존했다고 하겠다. 정 명창의 음악적 격조와 예술적 개성이 유난히 돋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다고 하겠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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