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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완창판소리, 4월에 '주운숙의 흥보가-동초제'국립극장(극장장 박인건)은 <완창판소리-주운숙의 흥보가>를 4월 8일(토) 하늘극장에서 공연한다.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주운숙이 타고난 목구성과 탄탄한 소리 내공을 바탕으로 동초제 ‘흥보가’를 들려준다. 주운숙은 안숙선 명창의 첫 스승이었던 주광덕 명인의 딸로, 전라북도 남원의 ‘판소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예술가의 삶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주운숙은 소리꾼의 길을 택하지 않고 스무 살 무렵 경상북도 대구에 정착했다. 하지만 서른세 살에 취미로 민요를 시작하며 이명희 명창을 만나게 되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 덕분에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이일주 명창에게 동초제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를, 신영희 명창에게 만정제 ‘춘향가’를 사사했고, 2대에 걸쳐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뒤늦게 소리를 시작했지만, 열정이 남달랐던 주운숙은 온종일 득음을 위한 소리 연습에만 매진했다. 그 결과, 소리를 시작한 지 11년 만인 1996년 제22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거머쥐었으며, 2017년에는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1992년 자신의 이름을 딴 ‘주운숙 판소리연구소’를 열고 후학을 양성하는 등 지역 판소리의 전승과 발전에도 힘써왔다. 주운숙 명창이 들려줄 판소리 ‘흥보가’는 권선징악과 형제간 우애라는 주제를 담아 다섯 바탕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아왔다. 사설이 우화적이고 익살스러운 대목과 아니리(일상적인 어조로 말하듯이 표현하는 것)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동초제는 동초(東超) 김연수 명창이 여러 바디(창자 개인이나 유파에 따라 짜임이 다른 판소리 한바탕)의 장점을 모아 새롭게 정립한 판소리 유파로, 가사와 문학성을 중시해 사설이 정확하고 너름새(몸동작)가 정교하며, 부침새(장단)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국립창극단 초대 단장이었던 김연수 명창이 재구성한 소리인 만큼, 사설 그대로를 창극 대본으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극적인 짜임새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착하고 부지런한 흥보와 욕심 많고 게으른 놀보의 대조적인 면을 강조해 선이 악을 이기는 과정을 부각했다. 더불어 흥보네 가난의 비극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골계미를 추구하면서도 한시문구로 사설의 격을 높여 대중의 취향을 고려하는 동시에 소리꾼의 품격을 보여주도록 구성했다. 주운숙 명창은 통성(배 속에서 바로 위로 뽑아내는 목소리)위주의 성음을 깊이 있게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보가’ 특유의 해학적인 대목을 기품 있는 발림(몸동작)과 표정 연기로 소화해내며 동초제 ‘흥보가’의 진수를 선보일 예정이다. 주 명창은 "이번 <완창판소리> 무대를 통해 동초제 ‘흥보가’를 알리게 되어 뜻깊다”라며 "동초제 소리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상임단원인 조용복이 고수로 호흡을 맞추며, 해설과 사회는 유영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맡는다. 국립극장 <완창판소리>는 판소리 한 바탕 전체를 감상하며 그 가치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국립극장 대표 상설공연이다. 1984년 시작한 이래, 39년째를 맞는 국립극장 <완창판소리>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를 포함해 당대 내로라하는 소리꾼들이 출연했다. 2023년에도 전통에 대한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키며 득음을 위한 소리 내공을 쌓고 있는 명창들이 판소리 가치를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귀명창들과 만날 예정이다. 상반기에는 5월 전인삼의 ‘춘향가’, 6월 염경애의 ‘심청가’가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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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봄내(春川)아리랑’!"소양강 맑은 물 춘경(春景)좋기로 봄내(春川)로구나 아리랑고개가 왠고개 쓰리랑고개 왠고개 곰실곰실 넘어간다” 강원도 춘천의 풍광, 특히 봄의 풍경을 그린 아리랑이 탄생했다. ‘봄내아리랑’이다. ‘봄내’는 ‘春川’의 우리말이다. 이 아름다운 지명은 태조 왕건이 봄 풍경이 빼어나 ‘춘주春州’라 한데서 유래한다. ‘봄내아리랑’의 탄생, 1929년 파인 김동환의 ‘아리랑고개’로부터 시작된 창작아리랑은 60여 편에 이른다. 이에 의하면 이 ‘봄내아리랑’은 막내 창작아리랑이 된다. 이 봄내아리랑은 15일 아리랑 등재10주년 기념비 건립 백일 기념공연에서 발표된다. 발표하는 국악인은 오현승씨, 국악계에서 아는 이들은 다 아는 중진그룹으로, ‘진정한 국악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사패산 원각사 사무장(법명 眞德)이라는 신앙인, 서도소리와 향두계놀이 30여년의 활동, 사찰 사무장과 국악단체 사무국장이란 봉사자라는 평가에서 주목할 만하다. 봄내(춘천)아리랑 작사 작곡/이상균 소리/오현승 아리아리 아리랑 쓰리쓰리 쓰리랑 아리랑고개가 왠 고개 곰실곰실 넘어간다 오근내 조근내 날아드는 봉황 소양강 맑은물 춘경좋기로 봄내로군아 반짝이는 별빛 대룡산 눈꽃 의암호 물결 넘실넘실 웃어있네 골골흐르는 곰내천 물길 공지천 따라서 의암호에 노니는구나 신용연 백로주 의암품에 숨고 봉의산성 푯말뿐이로구나 금병산 산마루 무성한 억새 광풍 불어도 꺽일 수야 있겠나 명봉 순정마루 흐드러진 들꽃 이름 없이 향기뿐이로구나 봄내 둘러친 구곡평풍 날아드는 백화 부르나니 함포고복 수새 곧은 은행나무 소박한 산까치 두루 펼친 의암호 산수좋은 우리봄내 후렴과 총 8절의 사설이다. 춘천의 지명 유래, 의암호에 의한 ‘호반의 도시’ 성격‘, 진산 봉의산의 위상, ’둔갑이 고개‘의 유래, 특히 대룡산과 의암호의 위용을 통해 춘천을 에워싼 풍광을 노래했다. 후렴은 "아리아리 아리랑 쓰리쓰리 쓰리랑//아리랑고개가 왠 고개 곰실곰실 넘어간다”이다. ’아리‘나 ’아리랑‘을 포함하는 2행 3음보라는 형질을 유지하고 있다. 작사, 작곡, 편곡자는 이상균선생이다. 이상균의 창작 아리랑 작업에는 이미 레거시(legacy)가 형성되었다고 볼 정도이다. 나름의 규정을 필요로 할만큼의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014년 서도소리 유지숙 명인의 음반 ‘우리 아리랑’ 14곡을 통해 주목을 받았다. 제주아리랑에서부터 강동아리랑까지 14편의 아리랑 발표인 데, 굳이 규정하자면 ‘지명 아리랑 완창’으로 볼만하다. 이후 이상균의 작업은 두물머리아리랑, 숯고개아리랑, 양주아리랑, 포천아리랑, 김해아리랑에 이어 봄내아리랑을 발표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성가를 전통 시가 입장에서 더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영사(詠史)아리랑’ 또는 ‘아리랑악부(樂府)’으로의 규정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 사적을 계기로 삼아 작가 자신의 문제의식을 빗대어 표현하거나 당대의 현실을 풍자 또는 경계하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시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강원무형문화재 1호,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란 3겹의 위상을 갖고 있다. 이를 창조적으로 계승한다는 다짐을 석비에 새운 것이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비이다.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이란 자발적 전승 활동으로 형질을 유지하고, 생활밀착형 활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활동은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현승의 봄내아리랑, 춘천 시민들에게 공감을 받아 보편적인 아리랑으로 불리기를 기원한다. 미음계의 자진타령장단. 후렴 6장단에 본절 6장단이다. 아리랑의 위상에 더해지고, 창조적 전승에 기여하길 바란다. 오현승의 봄내(춘천)아리랑 탄생!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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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심청이 빠져 죽은 인당수 "한 곳을 당도하니 이는 곧 인당수라. 대천바다 한 가운데 바람 불어 물결 쳐, 안개 뒤섞여 젖어진 날, 갈 길은 천리만리나 남고, 사면이 검어 어둑 정그러져 천지적막한데, 까치뉘 떠들어와 뱃전머리 탕탕, 물결은 와그르르 출렁 출렁 도사공 영좌(領坐)이하 황황급급(遑遑急急)하여 고사지제를 차릴제, 섬 쌀로 밥 짓고 온 소 잡고 동우술 오색탕수 삼색실과를 방위차려 갈라 궤고 산돗 잡아 큰칼 꽂아 기는 듯이 바쳐놓고 도사공 거동 봐라 의관을 정제하고 북채를 양손에 쥐고 북을 두리둥 두리둥 둥 둥~(하략)" 판소리 심청가 중,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이다. 엇모리장단으로 긴박하게 노래하다가 느린 자진모리로 한자성어 투의 긴 사설을 읊어낸다. 급기야 휘모리장단으로 물에 빠지는데, 북소리를 뒤로 하며 마지막 사설이 이어진다. "심청이 거동 봐라 샛별 같은 눈을 감고 치맛자락 무릅쓰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뱃전으로 우루루루 만경창파 갈매기 격으로 떴다 물에가 풍~"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을 포함하여 인당수 빠지는 대목이 심청가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이랄 수 있다. 큰 소 잡고 술항아리 가득 맑은 술 담그고 오방색으로 구비된 탕을 끓여내며 삼색의 과일들을 차려놓은 풍경을 자세하게 그려낸다. 산 돼지를 잡아 큰 칼을 꼽아놓으니 돼지가 기어가는 듯하다. 무속의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도사공(都沙工)은 우두머리 선장이다. 제사 복식을 갖추고 북채를 들었다. 큰 북을 울리며 지내는 제사였던 모양이다. 제사 풍경도 그러하려니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도대체 인당수가 어딜까 하는 것이다. 전제가 되는 것은 심청전이라는 고소설, 심청가라는 판소리다. 백령도를 비롯하여 전남 곡성, 충남 예산, 전북 부안 등 심청의 고장이라고 주장하는 곳들이 많다. 단적으로 말하면 설화를 이야기나 소설로 보지 않고 역사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들이다. 이야기의 지극한 은유를 애써 외면하는 발상이라고나 할까. 소설 심청전은 연대나 작가 미상일뿐더러 주요 줄거리는 거타지 설화와 작제건 설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관련하여 장성의 홍길동과 곡성의 심청을 주제로 한 졸고 '설화기반 축제 캐릭터의 스토리텔링과 노스탤지어 담론(남도민속연구, 2007)'이 있으니 참고 가능하다. 소설이나 판소리에서 묘사하는 인당수(印塘水)의 본래적 의미는 깊은 물이다.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배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알려진 장소다. 전국 여러 지역의 제방 축조 설화에서도 유사한 구성들을 볼 수 있다. 인신공희(人身供犧)로 주로 처녀가 언급되는 것은 생식(生殖)과 관련된 고대로부터의 관념에서 비롯된다. 거타지(居陀知)와 작제건(作帝建)의 항해 삼국유사 권2 기이편의 내용이다. 진성여왕 막내아들 아찬 양패(良貝)가 당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었던 모양이다. 함께 가는 무리 중 거타지라는 인물이 궁사로 뽑혀 따라가게 되었다. 도중에 곡도(鵠島)라는 섬 인근에서 풍랑을 만난다. 양패가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다. "섬 안에 신령한 연못이 있다. 여기에 제사를 지내야 풍랑이 멎는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 못에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더니 못물이 높이 치솟는 게 아닌가. 그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활을 잘 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에 놔두고 가면 순풍을 얻을 것이다"고 했다. 섬에 남겨둘 자를 고르기 위해 제비를 뽑기로 했다. 각자의 이름을 적은 50쪽의 목간(木簡, 종이가 나오기 전 글을 쓰던 나무막대기)을 물에 넣었더니 거타지라고 쓴 목간만 물에 잠겼다. 모두 당나라로 떠나고 거타지만 섬에 홀로 남았다.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홀연히 나와 말했다. "나는 서해의 신(西海若)이다. 매일 해 뜰 때마다 하늘에서 한 중이 내려와 진언(眞言)을 외며 못을 세 바퀴 돌기만 하면 가족들이 모두 물 위에 뜨게 되고 그 때마다 그 중이 자손들의 간을 하나씩 빼어먹었다. 지금은 아내와 딸만 남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나타나면 활로 쏴 달라." 이튿날 아침 중이 간을 빼먹으려고 내려왔다. 거타지가 활을 쏘았더니 여우가 떨어져 죽었다. 노인이 보답으로 자기 딸을 아내로 삼아 달라 했다.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 품속에 넣어주었다. 또한 두 마리 용에게 명하여 앞서간 사신 일행들에게 데려다주었다. 신라의 배를 두 마리 용이 받들고 있는 것을 보고 당나라에서 성대히 대접을 하였다. 고국 신라에 돌아와 행복하게 잘 살았다.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라는 작제건 설화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항해 도중 풍랑이 사나워져 점을 쳤다. 고려 사람이 배에서 내려야 한다는 점괘가 나온다. 작제건이 섬에 내렸다. 홀연히 서해용왕이 나타나 부처의 모습을 한 자를 퇴치해달라고 요청한다. 작제건이 활로 쏘았는데 부처는 늙은 여우였다. 이후 용왕의 딸과 결혼하여 잘 살았다. 꽃으로 변하여 거타지 가슴 속에 들어가는 처녀나 작제건의 아내가 되는 용녀 모두 심청이 인신공희물이 되었다가 연꽃 속에서 환생하여 황후가 되는 스토리와 닮아있다. 괴물 퇴치의 맥락도 있지만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서해의 물길이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오고갔을 물길 중 가장 파도가 험한 장소 혹은 풍랑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심청전으로 확대된 이 이야기의 모티프를 어느 한 곳을 특정하여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장강(양쯔강) 이북 서해(황해)의 어딘가 물길을 사례 삼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유사한 이야기들이 설화로만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화랑세기나 고려도경을 통해서도 맥락을 추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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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중의 뒤를 따라 간다. 이 모롱 지내고 저 고개를 넘어서서 고봉정상 두루봉에 저 중이 가다가 접붓 서며 이 명당을 알으시오. 천하지제일강산 악양루 같은 명당이니 이 명당에다 님좌병향오문으로 대강 성주를 하였으면 명년 팔월 십오일에는 억십만금 장자가 되고 삼대 진사 오대 급제 병감사가 날 명당이니 그리 알고 명심하오." 박봉술 바디 흥보가 중 집터잡이 대목이다. 신재효가 정리한 사설로 재구성된 예들은 더 풍부하다. "감계룡 간좌곤향 탐낭득 거문파 반월형 일자안에 문필봉 창고산이 좌우에 높았으니~" 풍수적으로 재물과 벼슬을 잉태하는 명당터를 한자어 투성이로 장황하게 읊어나간다. 심청가의 화주승이 심봉사를 물에서 살려내고 종국에는 눈을 뜨는 대목의 복선으로 기능하는 캐릭터임에 반해 흥보가의 중은 도승으로 출현하여 명당을 점지해주는 캐릭터로 기능한다. 훨씬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이라고 할까. 하지만 무속의례에 나타나는 중은 명당터를 비롯하여 대궐 같은 집을 지어주고 벼슬도 하게 해주며 온갖 이승의 복락을 만들어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 중이 제석천(帝釋天)이고 이 신격이 등장하는 거리가 제석굿이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제석신앙이 불교적인 신으로 출발하여 민속신앙으로 수용되고 가신신앙과 접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흥보가의 도승이나 심청가의 화주승을 제석에 비유하는 이유는 이런 확장된 제석의 서사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석이 도도하고 고고한 위치에 좌정한 것만은 아니다. 저자거리에 나오게 되면 구겨지고 비틀어져 희화화된다. 불교가 배척되었던 시대 탓도 있겠지만 판소리와 무속의례, 가신신앙까지 두루 포획하고 있는 불교적 제석이 내동댕이쳐진다. 당금애기를 매개 삼는 민요 중타령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금애기가 동쪽으로 오신 까닭 아들 아홉에 딸이 없던 한 가정에서 딸 낳기를 기도하던 중 얻은 딸 이름을 '당금애기'라 짓는다. 당금애기가 자라 소녀가 되었을 때 마침 부모와 오라비 등이 출타하게 되어 집에 혼자 남게 된다. 그때 서역에서 불도를 닦은 스님이 당금애기를 찾아와 시주를 청하였는데, 이러저러한 에피소드를 거쳐 소녀가 잉태를 하게 된다. 서역에서 오신 스님이라니. 혹시 달마가 동쪽으로 오신 까닭과 관계된 것일까? 영화로도 만들어져 유명해진 조주스님의 문답 중 하나가 연상된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동쪽 당나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한다. 선문선답이니 이해하기 힘들다. 어쨌든 집에 돌아온 가족들은 당금애기가 스님의 씨를 잉태한 사실을 알고 지함(地陷, 큰 구덩이) 속에 가두거나 쫓아낸다. 열달 후 당금애기는 세 쌍둥이를 출산하게 된다. 이후 아비 없는 자식으로 놀림 받던 삼형제는 일곱 살이 되자 당금애기와 함께 서천국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서천국은 표면상으로는 인도라는 나라를 말하지만 서쪽하늘이라는 불교적 혹은 토착신앙적 세계관으로 풀이해야 한다. 어떤 절에 다다르니 한 스님이 친자 확인 시험을 한다. 종이옷 입고 청수에서 헤엄치기, 모래성 쌓고 넘나들기, 짚북과 짚닭 울리기 등이 그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고 스님과 세 아들의 피가 합쳐지는 것을 통해 친자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후 아들들에게 신(神)의 직분을 부여하여 제석신이 되었고 스님과 당금애기는 승천하였다. 오늘날 전국에 분포하는 무속의례 제석굿의 전거가 여기에 있다. 다시 주목할 것은 당금애기의 서사를 신화코드로 읽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맏딸애기가 중의 씨를 받아 잉태했다는 가십(gossip)거리가 아니라, 당금애기가 낳은 삼중제석이 성주오가리, 성주단지 등 조상신의 자격으로 좌정하게 된 행간까지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환인(桓因)으로 인식하기도 했던 제석천보다 그 컨텍스트를 장식하는 당금애기 서사에 귀를 기울일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욕망의 배후에는 드라마로 영화로 그리고 각종 SNS에 범람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당금애기 이야기 또한 수많은 의례와 문학과 예술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있다. 이야기는 늘 당대의 욕망 혹은 소망을 숨겨둔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은밀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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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심청가의 올라가는 중 흥보가의 내려가는 중 "중 올라간다. 중 하나 올라간다. 다른 중은 내려오는디 이 중은 올라간다. 저 중이 어디 중인고, 몽은사 화주승이라. 절의 중창 하랴하고, 시주집 내려왔다. (중략) 죽장을 들어 메고 이리끼웃 저리끼웃 끼웃거리고 올라갈제 한 곳을 살펴보니 어떤 사람이 개천 물에 풍덩 빠져 거의 죽게 되었구나." 익히 알려진 판소리 심청가의 '중 올라가는 대목'이다. 판본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강의 서사는 비슷하다. 가사 중의 개천물에 빠져 죽게 된 어떤 사람은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다. 심청을 기다리던 중 더듬더듬 문밖으로 나갔다가 개천물에 빠져버린 상황이다. 심청전이라는 거대 서사는 곽씨부인의 죽음과 심청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봉사가 물에 빠지는 장면, 중이 올라와 구하는 장면 등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수상한 복선(伏線)은 반복된다. 판소리라는 노래로 변환된 이후에도 리듬이나 선율의 변별을 통해 암시는 확장된다. 신격이나 기이한 캐릭터의 등장에 사용한다는 엇모리장단이 그 중 하나다. 흥보가에도 중이 나와 집터를 잡아주는 광경이 묘사되는데 엇모리장단을 사용한다. 다른 점은 흥보가의 중은 내려오고 심청가의 중은 올라간다는 점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흥보가의 흥보는 지상의 어떤 존재로, 심청가의 심청은 천상의 어떤 존재를 암시한다고나 할까. 판소리의 중요한 패트런(후원자)이었던 조선후기 양반들의 기호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해한 한문 투의 사설, 중국 고사의 원용 등 우리 같은 서민들은 이해하기 힘든 용어들이 즐비하다. 그나마 장단과 선율에 얹어 이면을 그려주니 다행이랄까. 심청가 중타령에 나타난 암시와 복선(伏線) 몇 가지만 짚어본다. 몽은사(夢恩寺)라는 사찰 이름부터 심상찮다. 문자 그대로라면 꿈속의 은혜, 꿈속의 사찰이다. 통상 은혜를 입은 절이라고 풀이한다. 화주승(化主僧)이야 걸식을 토대 삼은 비구(比丘, 남자승려) 탁발승의 일원이니 특별한 해석이 필요치 않겠지만 사찰의 중창(重創)이라는 코드도 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암시다. 어떤 사건이나 건물을 헐기도 하고 고쳐서 새롭게 짓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마외역(馬嵬驛)은 중국 섬서성의 지명이다. 당나라 현종이 안녹산의 난을 맞아 피난을 가면서 어쩔 수 없이 양귀비 곧 양태진(楊太眞)을 죽인 곳이다. 고사를 인용한 심학규의 상황 설정, 이 또한 암시로 읽어야 한다. 주목할 것은 화주승의 행색이다. 벼슬한 중이 쓰는 굴갓을 썼다거나 도가 높은 스님이 짚고 다니는 육환장(六環杖)을 들었기 때문이다. 비범한 도사 혹은 천계의 인물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심청의 인당수 희생과 연꽃 환생에 이르기까지 암시와 복선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심청가에서 화주승으로 묘사된 이 캐릭터는 어디에서 비롯된 인물일까? 흥보가의 도승(道僧)에서 무속의례 제석(帝釋)까지 "중의 뒤를 따라 간다. 이 모롱 지내고 저 고개를 넘어서서 고봉정상 두루봉에 저 중이 가다가 접붓 서며 이 명당을 알으시오. 천하지제일강산 악양루 같은 명당이니 이 명당에다 님좌병향오문으로 대강 성주를 하였으면 명년 팔월 십오일에는 억십만금 장자가 되고 삼대 진사 오대 급제 병감사가 날 명당이니 그리 알고 명심하오." 박봉술 바디 흥보가 중 집터잡이 대목이다. 신재효가 정리한 사설로 재구성된 예들은 더 풍부하다. "감계룡 간좌곤향 탐낭득 거문파 반월형 일자안에 문필봉 창고산이 좌우에 높았으니~" 풍수적으로 재물과 벼슬을 잉태하는 명당터를 한자어 투성이로 장황하게 읊어나간다. 심청가의 화주승이 심봉사를 물에서 살려내고 종국에는 눈을 뜨는 대목의 복선으로 기능하는 캐릭터임에 반해 흥보가의 중은 도승으로 출현하여 명당을 점지해주는 캐릭터로 기능한다. 훨씬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이라고 할까. 하지만 무속의례에 나타나는 중은 명당터를 비롯하여 대궐 같은 집을 지어주고 벼슬도 하게 해주며 온갖 이승의 복락을 만들어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 중이 제석천(帝釋天)이고 이 신격이 등장하는 거리가 제석굿이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제석신앙이 불교적인 신으로 출발하여 민속신앙으로 수용되고 가신신앙과 접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흥보가의 도승이나 심청가의 화주승을 제석에 비유하는 이유는 이런 확장된 제석의 서사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석이 도도하고 고고한 위치에 좌정한 것만은 아니다. 저자거리에 나오게 되면 구겨지고 비틀어져 희화화된다. 불교가 배척되었던 시대 탓도 있겠지만 판소리와 무속의례, 가신신앙까지 두루 포획하고 있는 불교적 제석이 내동댕이쳐진다. 당금애기를 매개 삼는 민요 중타령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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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1/694쪽’의 아리랑(하)묘한 여운을 간직한 채, 접어둔 이 책은 책장 속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2년 여가 지난 어느날, 삼목은 아세안게임행사시 많은 문화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삼목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행사의 한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곡 발표회’라는 프로그램의 첫 순서 ‘선구자’, 그 옆에 "윤해영 시, 조두남 작곡”으로 되어있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설 부분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1963년 12 30 시민회관, 조두남(1984년 작곡) 작곡 발표회에서 바리톤 김학근 불러 유명해진 곡. 이후 7년간 기독교방송의 ‘정든 우리 가곡’ 시그널뮤직으로 우리에게 친근해진 가곡이다. 작시는 작곡가와 함께 중국에서 활동한 시인 윤해영의 작품이다.” 그리고 선구자 3절이 병기되어 있었다. ‘제2의 애국가’로도 표현되는 가사이다. 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분명 애국적인 가사의 노래이다. 그러나 삼목은 곧 출판 할 아리랑 사설집 편집 최종 교정을 보면서도 미심쩍어 한 ‘滿洲 아리랑’과는 상반된 시상詩想이에서 일종의 불안감마저 들었다. 분명 만주 아리랑‘은 ’오족五族‘이란 어휘에서 친일시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짖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목은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이 제공해준 정보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 제16號’로만 출전을 밝히고, 윤해영 작품임은 명기하지 않은 채 수록했다.(‘민족의 숨결, 그리고 발자국 소리 아리랑’ 현대문예사, 1986. 214쪽)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났다. 삼목은 당시 국립극장 허규 극장장, 기획자 이광수, 회원 원재식씨 등과 ‘아리랑축제’를 추진하는 등 동분서주할 때다. 그 와중에 몇 년 만에 다시 윤해영을 되살려 내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으로부터다. "예상했던 대로 만선일보에 안수길, 윤해영 같은 이들의 자료가 많이 나왔어요. 아세아문화사에서 만선일보 영인본을 냈어요. 그런데 김형이 우려했듯이 윤해영은 문제가 있어요. 아리랑만주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확실해요. 그 가요 ‘아리랑 만주’와는 또 다른 작품이요. 윤해영은 결국 아리랑을 세 편 쓴 것이 되는데. 저녁에 만납시다. ‘滿洲 아리랑’ 복사했으니까.” 1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늘 새 땅이 이 아닌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 2 말발굽 소-리 끊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 드네 3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 ‘아리랑 만주’ 보다는 간결한 작품이다. 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 1941년 1월 1일자에는 신춘문예 민요부에 당선된 작품이다. ‘아리랑 滿洲’ 제1절의 "사천만 오족의 새로운 낙토”와 이 작품의 3절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는 같은 맥락이다. 만주국의 이념인 ‘五族協和’의 표현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삼목은 강원대 박민일 교수에게 윤해영의 작품 사본을 송부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아리랑을 친일 도구로 쓴 것인가!” 삼목은 차마 윤해영의 아리랑 작품들을 언급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리랑의 변절, 이런 막다른 표현이 겁이났기 때문이다. 얼마 후 박민일 교수로부터 ‘친일아리랑’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받았다. 읽지 않고 뒤처 놓았다. 그럼에도 ‘친일 아리랑’이란 표현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여운으로 따라왔다. 1995년 중반은 국학연구 붐이 절정에 이른 시기다. 이는 국내외에서 발간된 각종 간행물들이 국가기관이나 연구단체 등에서 수집하여 각 도서관에 비치됨으로서 가능했다. 만주지역에서 간행 된 출판물과 정기간행물도 이 시기 전후 영인 되어 연구 자료화가 가능했다. 만선일보(1936~1948)나 흥아협회 기관지 ‘재만조선인통신’,‘중국조선족문학사’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결과로 만주지역 조선인 문학에 대한 학계의 조명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윤해영이란 시인에 대한 작품도 조명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995년 중반 이 시를 비롯한 윤해영의 시가 총 9편이 있음이 드러났다. 인천대 오양호 교수가 논문 ‘윤해영 시의 율격과 시대의식 고찰’에서 밝힌 것이다. 9편은 다음과 같다. 용정의 노래, 만주 아리랑, 오랑캐고개, 해란강, 아리랑 만주, 발해고지, 사계, 척토기, 낙토만주 이 논문의 결론은 "9편의 시에 나오는 선구자는 조두남 작곡의 가곡 ‘선구자’와는 정반대다. 결국 윤해영이 선구자 작시 이후 변절한 증표이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대비는 이미 가곡 ‘선구자’가 받고 있는 평가 때문이다. 예컨대 1990년 연변인민출판사가 간행한 ‘중국조선족문학사’의 이런 평가이다. "선구자는 1930년대 초기에 창작된 후(조두남 작곡) 널리 보급되어 크낙한 영향력을 산생한 노래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현대의 령마루에 서서 흘러간 민족의 력사를 돌이켜 보면서 외래의 강포에 대항하고,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연히 떨쳐나 슬기와 용맹, 절개와 위훈으로 자랑을 떨친 우리 조상들 특히 선구자들을 절절하게 추모하면서 민족의 비운을 찬몸에 지니고 나라와 미녹을 건져 낼 선구자들의 출현을 그 같이 고대하고 있다.이 노래는 그 시적 정서가 비장하고 겨레의 넋이 세차게 사품치고, 민족의 념원과 정서를 대변함으로 하여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아주 널리 전승 되여 불리우고 있다.” 이것이 1990년대 중반의 윤해영의 시에 대한 평가였다. 이로부터 윤해영은 ‘선구자’ 외의 작품은 친일 시로서 혐의嫌疑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의외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1984년 조두남선생이 작고할 때 까지도 문제가 없던 것으로, 1982년 세광출판사 발행 조두남 수필집 ‘그리움’에서 기술한 짧은 진술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1932년 목단강의 허름한 여관에 묶고 있었을 때 한 젊은이가 내게 ‘용정의 노래’를 주며 작곡해 달라고 사라졌다. 아마도 이 젊은이는 독립군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 젊은이를 만나지 못하고 해방이 되어 돌아와 선구자로 곡명을 바꾸어 발표했다.” 조두남은 이 책을 낸 2년 후 작고했다. 그런데 해방 전 까지 조두남과 함께 음악활동을 한 재 중국 음악인들이 한국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이 진술이 거짓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조두남이 ‘징병령 만세’ 같은 친일 작품을 작곡한 과거를 숨기기 위해 그랬으며, 윤해영도 해방이 될 때까지 함께 음악활동을 했음은 물론, 친일 시를 썼다는 사실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급기야 한국에 유학을 온 연변 음악가 류연산씨가 2004년 ‘일송정 푸른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라는 책에서 다양한 증언과 자료를 통해 조두남과 윤해영의 친일 음악활동상을 밝혀 조국에 알린 것이다. 이런 결과로 조두남과 윤해영은 친일 음악가로 규정되었다. ‘선구자’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세 편의 아리랑 시를 슨 윤해영은 아리랑을 친일의 도구로, 민족 정서를 팔아먹은 반역의 시인이 되었다. 아리랑의 역사에서나 한국문학사에서나 세 편의 아리랑 시를 쓴 이는 윤해영이 유일함에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04년까지 조두남이 윤해영의 시 ‘용정의 노래’를 ‘선각자’로 바꾸고 시도 일부 개작하였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윤해영의 ‘용정의 노래’는 애초부터 친일 시였다는 것이다. 삼목으로서는 자료적인 관심 외에는 어떤 해석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책장 속에 넣은 ‘半島史話와 樂土滿洲’를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2005년 11월 3일자 삼목의 일기장에는 여러 메모 한 모퉁이에 이렇게 쓰여 있다. "어제 산 김연수의 ‘몽상의 시인 윤해영’을 대충 읽었다. 논의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에서 "친일시인이 아니라 진솔한 민족시인"이란 규정 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적 해석 영역에서 이런 구절은 논의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다섯 문장을 인용하여 놓았다. 저자 김연수의 주장이다. *"낙토만주는 고구려와 발해의 환유로 민족의 꿈이고 기도이며 또 기도가 소원하는 파노라 마의 내용이다.” *"만주국을 찬양하는 시가 아니라 만주가 사실은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으니 의당 지금도 우리의 땅이라는 저의가 담긴 시이다.” *"오색기(五色旗)도 만주국의 국기인 오색기가 아니라 고구려의 오색기다.”*"낙토, 오색기, 오족 등 그의 어용적 자세를 추정하게 하는 낱말들을 쓴 것은 실은 저의를 감추고 검열 등에 선수를 치기 위한 (검열관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시를 외향적 의미로 단정 짓는 무지한 현상이 안타깝다. 윤해영이야 말로 일제 강점기 재 만 시인 가운데서 가장 특출한 방식으로 저항정신을 구현하면서 저항의 길을 걸어간 한 사람의 저항시인이다. 그것은 민족의 꿈을 이렇게 아리랑 정서에 담아 검열과 감시의 장애물을 넘어 민족을 향해 읊은 진솔한 시인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011년, 삼목은 ‘한국의 아리랑문화’(국제문화재단 편)를 공동 집필했다. 그 중에 ‘훼절의 아리랑, 악극 아리랑’ 항목에서 1940년대 일제 국민총동원 체제 악극 상황을 파악했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나니오부시 아리랑’ 같은 작품이 그 하나인데, 유독 아리랑을 표제로 내세운 작품들이 악극화 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연예단을 동원하여 군수공장 같은 곳의 위문공연용이었다. 이 현상에 대해 삼목은 이런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소수민족이나 식민지 상황에서 외세에 대한 최후적인 대항에서는 가장 민족적인 정서로 대응한다. 저항력과 결속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아전쟁의 말기적 상황에서 아리랑을 내세워 저항한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닐까?” 삼목은 오랜만에 윤해영의 아리랑 시를 떠 올렸다. 그리고 나름의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윤해영도 당시 만주국의 군사적 팽창의 위협 하에서 아리랑이라는 민족적인 정서를 내 세워 최후적인 저항을 한 것은 아닐까라는 해석이다. 삼목의 청춘시절 ‘1/694쪽’의 아리랑, 30여 년을 앓고 있다. 아리랑의 해석은 간단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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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本調가 뭐야?”(상)삼목 作 "朝鮮에도 民謠가 있다. 四千年의 오랜 歲月을 두고 이 겨레의 착한 性情이 純一하게 發露한 게 곧 우리의 民謠이다.” "朝鮮民謠 중에서 가장 널리 普及된 것으로 적어도 朝鮮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이면 이 노래(아리랑)를 모르지 않는다.” 겨레의 착한 성정으로 부르는 것이 민요이고, 그 민요 중에 모두가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이라고 하였다. 이는 1949년 발행된 ‘朝鮮의 民謠’ 공편자共編者인 성경린成慶麟과 장사훈張師勳의 인식이다. 전자는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를 수료한 거문고 연주자로 이미 ‘조선의 아악’(1947), ‘조선음악독본’(1947)을 지은이요, 후자 역시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수료한 거문고 연주자이다. 그리고 함께 현 KBS의 전신인 경성방송국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이력으로서 당시로서는 민요나 아리랑뿐만 아니라 국악 전반에 대한 해석권解釋權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 그런데 최근 한 학회에서 ‘‘朝鮮의 民謠’를 들어 기존의 아리랑 명칭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논란을 촉발시킨 바가 있다. 이로서 삼목의 ‘한국의 아리랑문화’ 외에서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던 이 책의 아리랑 언급이 오랜만에 소환되기에 이르렀다.(문제를 제기한 이도 삼목의 책을 보고 반론으로 제기한듯하다.) 2022년 10월 초, 기奇(찬숙) 선생의 통화음이 다급했다. "혹시 학술회의 소식 들으셨어요? 방금 끝났는데요. K교수가 논평하면서 '본조아리랑'은 주제가 아리랑이 아니라, 1894년 헐버트 채보 아리랑이고, 주제가 아리랑은 '서울아리랑'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 근거가 제가 듣기로는 성경린과 장사훈 공편 ‘조선의 민요’를 거론한 것 같아요. 그런데요~?” 기 선생이 다급한 어투와는 다르게 조금은 미심쩍은 투로 말끝은 흐렸다. "그런데라니요? 그게 뭐요? 또 뭐가 있었나요?” 기선생이 이 본조아리랑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한국민속박물관이 펴낸 ‘한국민속문학사전’ 표제어 ‘본조아리랑’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당시 삼목과 함께 ‘아리랑 스터디그룹’에서 많은 논의를 한 주제로, 다양한 전거典據를 들어 스터디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그 사전 편찬의 책임자 중 한 분이 뒤늦게 자신이 참가한 사전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해당 항목의 본문 일부는 이렇다. "본조(本調)아리랑은 주제가‘아리랑’으로 출발하여 ‘신민요 아리랑’, ‘유행가 아리랑’으로 불리다가 ‘신아리랑’ 또는 수식 없이 ‘아리랑’으로 부르게 된 것을 말한다. 본조아리랑은 성경린·장사훈이 최초의 민요 개론서 ‘조선의 민요’에서 처음 사용된 명칭이다. ‘본조’는 1940년대 말 국악계에서 사용한 용어로, 음악적 원류(源流)나 본류(本流)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랑의 확산 장르에서 본(本)·원(元)·중심(中心)이라는 의미로 불리는 용어이다. ‘각 장르 아리랑 표제 작품에서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아리랑’이라는 의미에서 다른 아리랑과의 변별을 위해 1960년대에 일반화된 것이다.”(기미양, 본조아리랑,한국민속문학사전) 분명히 본조아리랑은 1926년 개봉된 나운규 감독 영화‘아리랑’의 주제가를 지칭함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그 ‘본조’의 의미는 음악적 본류의 의미가 아니라 ‘각 장르 아리랑 표제 작품에서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아리랑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는 지금까지의 학술상에서나 공연분야에서 일반화된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틀렸다고 한 것이다. 삼목은 기 선생이 말끝을 흐린 것이 마음이 쓰여서 다시 되물었다. "아니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어요? K교수가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서울시의 지원을 받는 학술대회에서 서울아리랑으로 하자는 주장은 있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주장한 바가 있는 거 아녜요? "예 그렇긴 한데요. 이번에는 좀 감정이 실렸어요. 100% 정확한 워딩은 아닌데, M학회가 있는 한 이는 바로잡아야 한다는 거예요. 논리나 팩트에 의한 학술적 성과가 아니라 마치 M학회가 유권해석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요. 그리고~” "또 뭐가 있어요? 하필 내가 전화를 받느라 컴퓨터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있어서 듣지 못했는데. 참. 뭐예요?” "예, 그에 대해서 논평자로 참가한 Y교수도 동의를 했어요. 두 전직 학회장이 이런 식의 발언을 한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히 그렇다. 우선 감정적인 부분은 두고, 팩트를 다시 체크하기로 했다. 삼목은 다시 서고에 들어가 해방 후에 간행된 국악개론서들에서 아리랑 언급 부분들을 체크했다. 특히 ‘본조아리랑’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성경린·장사훈의 민요 사설집 ‘朝鮮의 民謠’를 찾았다. 이 책의 일러두기에는 참고한 서명이 나오는데, 속가집·조선민요선·가곡보감·가요집성·가요집 등에서 사설을 간추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민요집이 사설 중심의 것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음악적 창을 주안主眼으로 본 가사, 후렴, 구호 등 확연하게 구별하여” 수록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분명히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기 선생의 집필에서 분명히 한 것이 이 가사집에서 ‘본조아리랑’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 것이지, 이 책의 ‘본조아리랑’ 기록(해석과 사설)이 반드시 본조아리랑임을 밝힌 최초의 기록이란 뜻은 아니다. 주관처에서 원고 내용을 줄여달라는 요청에 의해 그 부분은 삭제 된 것이라고 한다. 이제 실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자. 이 책의 첫 아리랑은 경기도편의 本調아리랑·新아리랑·아리랑세상·別調아리랑·긴아리랑, 5편이다. 이어 강원도편의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 평안도편 긴아리·경상도편의 밀양아리랑, 전라도편의 진도아리랑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 그리고 긴아리랑이다. 우선 문제의 세 편의 사설과 해설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本調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이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①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민씨의 팔촌이 되려므나 ②남산 밑에다 장충단을 짓고/ 군악대 장단에 받들어 총만 한다 ③아리랑고개다 정거장 짓고/ 전기차 오기만 기다린다 ④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쪽박의 신세가 웬말이냐 ⑤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차장되네 ⑥말 깨나 허는 놈 재판소 가고/ 일 깨나 허는 놈 공동산 가네 ⑦아 깨나 낳을 년 갈보질 가고/ 목도 깨나 메는 놈 부역을 간다 ⑧신장로 가장자리 아카낢은/ 자동차 바람에 춤을 춘다 ⑨먼동이 트네 먼동이 트네/ 미친님 꿈에서 깨여나네 ⑩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⑪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 新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①산천에 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간다 ②성황당 까마귀 깎깍짖고/ 정든님 병환은 날로깊어 ③무산자 누구냐 탄식마라/ 부귀와 빈천은 돌고돈다 ④감발을 하고서 주먹을 쥐고/ 용감하게도 넘어간다 ⑤밭 잃고 집잃은 동무들아/ 어데로 가야만 좋을가보냐 ⑥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 ⑦아버지 어머니 어서 오소/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⑧쓰라린 가심을 움켜잡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⑨감발을 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 벌판을 헤메인다 ⑩원수로다 원수 로다/ 총가진 포수가 원수로다 ⑪일간 두옥의 우리 부모/생각할수록 눈물이 난다 ⑫아리랑고개는 얼마나 멀게/ 한번 넘어가면 영 못오나 ⑬우리의 성립 군아/ 뜻과 같이 성공을 하세 긴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로 구료/ 아리랑 고개로 나를넘겨주소 ①만경창파 거기 둥둥 뜬배/ 게 잠깐 닻주어라 말 물어보자 ②기차는 가자고 왠 고동을 트는데/ 님은야 팔을 잡고 낙루만 한다 ③우연히 저 달이 구름 밖에 나더니/ 공연한 심회를 더욱 산란케한다 ④달도 밝고 별도 총총한데/ 임은 날 버리고 왜 아니 찾노 ⑤물속에 뜬 달과 낭군의 맘은/ 잡힐 듯 하고도 내 못 잡아 ⑥누구를 보고자 이 단장했나/ 임가신 나루에 눈물비 운다 이상 세 편에서 해설이 있는 것은 두 편이다. 그런데 이 중 유의미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본조아리랑-"서울의 것을 본조아리랑 그 밖에 밀양아리랑~ ” 긴아리랑-"아리랑에서 가장 일쯕이 생긴 거라고 하지만~ ” 이상과 같이 매우 소략하다. 여기에서 ‘본조아리랑’의 정체성을 발견하기란 부족하다. 그 이유를 짚어 보자. 첫째는 본조아리랑의 해설에서 단지 서울에서 불리는 아리랑이란 정도일뿐이라고 했고, 긴아리랑 해설에서는 헐버트 채보 아리랑 즉 구아리랑 또는 京卵卵打令(서울아리랑타령)의 존재를 무시하고 가장 오랜 긴아리랑이 가장 오랜 것이라고 했다. 정리하면 전자는 지역적 분류 정도이고, 후자는 분명한 오류인 것이다. 둘째는 제시된 本調아리랑과 新아리랑의 사설에서도 '구아리랑'인지 '본조아리랑'인지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구분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奇선생이 본조아리랑 사설로 제시한 것을 대비하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본⑩-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본⑪-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 신①-산천에 초목은 젊어나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가네 본④-문전에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동냥의 쪽박이 왠말인가 이상에서 대비한 바와 같이 ‘긴아리랑’을 빼고는 사설만으로는 독자성을 갖지 못함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의 첫 자료 ‘본조아리랑’은 명칭만 본조아리랑이지 실제는 구아리랑과 또 다른 아리랑 사설들의 모음일 뿐이다. 물론 후렴과 일부 사설들이 ‘구아리랑’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온전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 명칭들은 특별한 인식 없이 편의적으로 부여한 것일 수밖에 없다. 즉, ‘신’이나 ‘긴’에 대해 변별로서의 ‘본조’를 부여한 것일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K교수가 이 책을 보고 ‘구아리랑’(헐버트 채보 아리랑)을 ‘본조’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주제가‘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그 곡명을 ‘서울아리랑’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살폈듯이 이 책이 명명한 본조아리랑은 그 정체성이 불분명한 것임으로 타당성이 없다. 또한 음반 역사에서는 이미 ‘구아리랑’을 ‘서울아리랑’(‘京卵卵打令’/1913년 N6170/1928년 V49047)으로 명명하였음으로 주제가‘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 아닌 서울아리랑으로 명명해야 한다는 것도 부당한 주장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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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最古 아리랑(?), ‘만천유고 아로롱’삼목 作 청계천 8가 ‘수蒐’ 다방 계단을 오르는 삼목의 발걸음은 기대에 차서 유쾌하기까지 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소위 ‘나까마’(무허가 중간 매개자)로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는 김연창 선생으로 부터 1년간이나 벼르던 자료를 전달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외부인 연람을 규제한 데다 이미 등록 당시부터 ‘특수 귀중자료’로 지정한 것을 복사한 것이다. 김연창 선생은 ‘연박사’로도 불린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써 오세요”라는 낭랑한 유마담의 인사와 함께 특유의 검은색 가방을 멘 김선생 미소를 띠며 들어왔다. 앉기도 전에 X자로 맨 가방을 벗으며 생색을 냈다. "에이 세상에 도둑질하기보다 더 어려우니, 원 참. 매산梅山(김양선) 목사님만 계섰어도 이렇게 고생을 안해도 됐을 텐데, 그래도 김형이 끈질기게 매달려서 1년 만에 복사를 했우다. 자~” 제목 ‘農夫詞농부사’와 중간중간에 ‘啞魯聾아로롱’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A4 용지 3쪽 분량. 가는 붓글씨로 달필임이 느껴진다. 말로만 듣던 ‘최고의 아리랑 (아로롱) 기록’이다. 삼목에게는 많은 생각들이 밀려왔다. 우선 낼 아리랑 사설집에 수록할 수 있다는 충족감은 물론, 이의 해석이 곱씹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연박사는 삼목을 어지럽히는 얘기를 이어갔다. "김형이야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선수들이 보기에는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이상한 점도 있어. 뭐냐 하면 다산 정약용이 이승훈이란 천주교사 개척 인물의 저작을 정리한 ‘만천유고蔓川遺稿’ 같은 깜짝 놀랠 자료 12종을 왜 40여 년이 지나서야 늦게 공개했고, 또 왜 전문공개를 꺼리느냐는 의문이야. 1967년 가톨릭신문인가 하는 신문에 공개했을 때 본 이들이 알음알음으로 전한 내용이거든. 아리랑이 있다는 것도 그렇게 알려진 거 일 뿐야.” 삼목에게는 김 선생의 이어지는 얘기가 잘 들리지 않았다. 김양선 목사에게 좋은 자료를 많이 양도했다는 등등의 얘기가 이어졌지만. 그러나 삼목의 머리속에서는 우선 ‘경자춘庚子春’이란 간지干支를 계산하여 만천 이승훈蔓川 李昇薰(1756~1801)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기 4년 전부터 지은 시를 연대순으로 배열한 것이고, 25세이던 1780년에서 27세인 1782년까지 3년간 지은 것이란 해석. ‘아로롱啞魯聾’이란 어휘가 후렴으로 있는 이 시편으로 가치가 엄청나다는 생각이 휩쓸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아리랑 역사에 어떻게 자리매김시킬지. 이런저런 생각뿐이었다. 필사본이긴 하지만 분명 아리랑 기록 중 최고最古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 ‘농부사’는 2년여의 탈초 작업과 번역을 거처 1986년 발간한 ‘민족의 숨결, 그리고 발자국 소리 아리랑’(현대문예사 간)에 수록했다. 책머리의 첫 사진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그리고 번역문은 261~262쪽에 수록했다. 삼목이 가장 힘들게, 그러면서도 가장 뜻깊은 자료로 수록한 것 중의 하나다. 이 책은 고은, 박재삼, 나운영, 김연길 같은 아리랑 이해가 깊은 이들과의 간담회도 수록하는 등 성의 있는 편집을 한 아리랑 사설을 조사, 수집한 단행본으로는 첫 책이다. 원문의 일부를 사진판으로 수록하고 번역 전문을 게재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곡명에 대한주註는 ‘庚戌年里農請書農旗故作경술년이농청서농기고작’이라고 병기하여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와 경술년(1790년) 평택현감 재직 시 농부들의 농사 현장에 감화를 받아 지은 작품임을 밝혔다. 원문 대조를 하고 시인 박재삼 선생 등에게 자문을 받아 완성하여 수록한 번역문은 이렇다. 농부사農夫詞-아로롱 아로롱 어히야啞魯聾 啞魯聾 於戲也 신농후직(神農后稷)이 처음 밭을 갈고 김을 매니 민생(民生)을 그 근본으로 삼았네 징과 북을 울여라 징과 북을 울여라 잠깐 말하노니 우리의 모든 짝을 부르세 啞魯籠 啞魯籠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생을 힘써 길러 수고로워도 개탄하지 않을세 이윤같은 성인도 유신 땅에서 밭을 갈았고 도연명같은 처사도 전원으로 돌아 갔다네 旗들어라 旗들어라 북과 징소리가 행하는 마을 동문으로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태평만사가 농부의 마음이로다 밭을 갈고 풀을 뽑는 것은 공이 이루어지는 것일세 호미 드러라 호미 드러라 한결같이 앞을 향하여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아침에 윗 뜰에서 김을 매고 저녁에 들에서 떠나 온다 들북과 삿갓이 하늘에 가득하니 비바람도 홀로 근심이 없도다 징과 북을 울여라 징과 북을 울여라 슬픈 노래를 그대는 하지 마소 어히야 세상 일이 어느 곳을 연유하였던가 한낮이 되니 안주인은 밥을 가져오는도다 아 아 농사를 권하는 벼슬아치는 언제 돌아왔을까 旗세워라 旗세워라 그대에게 돌아와 술 삼배를 드리노라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배를 두드리며 흥겹게 노래 불러 즐겨보세 녹두잎 바람에 날리니 일기는 상쾌하고 벼꽃이 물에 젖으니 들녘이 풍요롭다 호미 씻어라 호미 씻어라 옥같은 산이 스스로 조수에 비치어 붉도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옛 곡조로 새로운 소리 섞어 부를 때 곡식 낱알 하나하나 천신만고 끝에 얻으니 가색의 어려움을 아는 사람 적을세 징과 북을 울려라 징과 북을 울려라 들밭 긴 이랑 날은 더디고 더디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이해가 다하도록 경영함이 이 한때로다 농사짓기 어려운 땅이라도 때때로 이용하여 내 직분을 다하고 비탈밭 밭갈이는 천옹의 책임이라 旗 내려라 旗 내려라 가을의 결실이 나의 가색과 동일하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군자를 크게 기른 것은 누구의 공인고 소떼와 풀꽃에 청산이 저물고 오리와 따오기 있는 모래밭에 이슬이 차구나 호미 너어라 호미 너어라 황혼에 달빛이 깃대에 가득하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석양에 농사 이야기 술 싣고 돌아오네 악기를 치며 김을 매는 두레풍장 모습이다. 기세배나 호미씻이 같은 농사 유풍이 그려졌다. 유학자적 입장에서 권농勸農 의식이 지배적이며 농사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렸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가 각련 끝에 반복 배치된 것으로 보아 후렴구임이 분명하다. ‘아리랑 아리랑 얼싸’의 음차音借인 것으로 尹善道의 ‘漁父四時詞’에 쓰인 ‘至菊棇 至菊棇 於思臥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같은 형태다. 이 작품이 1790년 작임을 전제한다면, 유명인사의 ‘아리랑’ 관련 한시 最古작이며, ‘아로롱’에서 ‘아리랑’까지의 어휘 음전音傳 현상을 보여주는 중요 자료이다. 경기도 평택일대의 농요에서 아리랑계 노래가 불렸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후 이 기록은 삼목의 다른 저서에서는 물론, 여러 글에서 재인용되었고, 다른 연구자들의 글에서 재해석되기도 했다. 이런 탓인지 2010년대 들어 경기도 천주교 성지에는 ‘아리랑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천주교와 아리랑 관계, 토착화 과정의 사례로도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대종교와 아리랑과 같은 관계이다. 그런데 2014년 여름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삼목으로서는 너무나 뜻밖의 소식이었다. "선생님 저서에 이승훈의 만천유고 소재 아리랑 자료가 가짜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참고하세요. 제 학위 논문도 수정을 할 수밖에 없네요. 참 어이가 없네요.” "예? 가짜라니요? 만천유고가요? 농부사 아리랑도요?” "예, 농부사도 그렇다는 거지요. 가짜인지 위작인지 아직은 분명하지 않으나 어떻든 문제가 제기 됐네요. 저도 좋은 자료라고 생각하여 전문을 분석하여 논문에 반영했는데, 삭제해야 할 형편이네요.” 청천벽력이었다. 전화를 한 분이 누군지도 묻지도 못하고 끊었다. 낙담했다. 그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급한 김에 두 정거장을 걸어가 가판대에서 주요 일간지를 샀다. 그런데 산 신문에서는 관련 기사가 없었다. 궁금증은 여전했다. 그래서 교계 학술부분에 도움을 받는 기독교문사 이덕주 교수에게 문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또 의외의 말을 들었다. "예, 어제인가요? 아니면 며칠 전에 윤민구 신부 그분이 발표한다고 한 것이 있어요. 이승훈의 ‘성교요지’는 사기다 뭐 이런 것이지요. 그러니 김 선생이 끔찍이 애지중지하던 그 아리랑 기록도 문제가 되지요. 하긴 이 뿐입니까? 박사학위 논문이 6편이나 나왔잖아요. 그게 더 심각하지요. 정확한 일자는 다시 확인하고 알려드릴게요. 그런데 김선생이 아직 모르고 있었을 텐데 사실은요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어요. 2003년에 이미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김양선 목사가 1930년대 수집해서 보관하고 있는 관련 자료는 모두 위작이란 판정을 내렸던 거예요. 다만 공론화하지는 않았을 뿐이지요.” 삼목으로서는 자괴감이 들었다. 나름으로는 학계 모임에 그래도 쌀쌀 거리고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10여년 전에 가짜 판정이 났다는 사실을 이제야 듣다니. 이튿날 이덕주 목사의 주선으로 윤민구 신부가 발간한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 쟁점 연구’를 받았다. 부리나케 해당 부분을 읽었다. 기가 막혔다. 요지는 ‘사학징의邪學懲義’(1801년 천주교 박해에 관한 정부 측 기록을 수집하여 정리한 천주교서)에 ‘만천유고’가 없다는 문제제기 정도가 아니라 이승훈의 저작으로 알려진 자료들이 모두 타인의 작이며, 교묘하게 관련 인물들과 지명 등을 바꿔 넣어 꾸민 것들로 특히, 가장 중요한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이렇게 단정하고 있었다. "성교 요지는 중국에서 활동한 미국 개신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이 1897년에 쓴 ‘쌍천자문(雙千字文)’의 일부를 베낀 위작이다. 문건의 전체 용어 등으로 보아 1930년대 전후 시점에서 위작한 것이다.” 아!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만찬유고의 발문을 정양용이 쓴 것으로 믿고 인용한 이런 구절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강과 산은 옛 그대로이고 푸른 하늘과 흰 구름도 그림자 하나 변하지 않았으나 옛 선현과 벗은 어디로 갔는고. 나무와 돌의 신세가 되어 세상에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흘러 다니던 중, 슬프다! 모두 뜻밖에 세상을 떠났구료! 만천공(蔓川公)의 행적과 아름다운 글이 결코 적지 않으나, 불행히도 불에 타 버리어 한 편의 글도 얻어 보기가 어렵더니 천만 뜻밖에도 시고(詩稿)와 잡록(雜錄)과 몇 조각의 글이 남아 있기에 내 비록 졸렬하게나마 초(抄)하여 기록하고 만천유고(蔓川遺稿)라 이름하였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쓴 발문이란 믿음이 깨진 것은 엄청난 충격이다. 그러나 이 충격은 이어졌다. 한양대 정민 교수도 이에 확대된 논지를 내놓았다. 한시 70수가 수록된 ‘만천유고’를 양헌수梁憲洙 장군의 문집 ‘하거집(荷居集)’에서 베낀 "악마의 편집”이라고 한 것이다. 이어 서강대 서종태 교수도 또 다른 시편은 홍석기洪錫箕의 ‘만주유집(晩洲遺集)’ 등에서 옮긴 시들이라고 밝혀냈다. 연구자들은 이를 위작한 이는 단순히 이승훈과 정양용이란 이름을 팔아 돈을 벌려고 지난한 작업을 할리가 없었다고 보았다. 그 배경은 1930년대 유난히 기승을 부렸던 유사종교 집단과 무관치 않다고 보았다. 토착 신앙뿐 아니라 메시아니즘의 치장을 두른 ‘정감록鄭鑑錄’ 계통 신앙 전파 세력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으리라고 분석했다. 그 사례로 1930년대 대종교 계통의 ‘규원사화(葵園史話)’와 ‘환단고기(桓檀古記)’, 유교 쪽의 ‘화해사전(華海師傳)’같은 위서들의 출현을 든 것이다. 이들은 이제껏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있어 심각성을 경고하였다. 당연히 ‘농부사 아로롱’도 이승훈의 소작일 수가 없고, 그 해악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입론과 논거가 타당한 연구결과이니. 그렇다면 ‘농부사 아로롱’에 대한 해석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삼목은 오랜 시간 이 자료의 처리를 놓고 고심해야 했다. 그리고 새로 발행할 ‘우리 아리랑 문화’에 새로운 해석으로 정리를 하기로 했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작품의 작자를 이승훈이 아닌 ‘미상未詳’으로, 시기를 경술년 1790년이 아닌 20세기 초로 한다. 둘째, 작품성을 인정하여 두레풍장 유습이 연행되던 20세기 초 농부와 농사를 그린 작품으로 본다. 셋째, ‘아로롱’이란 어휘는 ‘아리랑’의 음차가 아니라 ‘아리랑’이란 어휘로 정리되는 한 과정의 하나로 본다. 아리랑에 심취하여 고은선생, 박희준 형 등과 ‘아리랑기행단’을 꾸려 전국을 답사하고, 직원 4명과 함께 ‘한국방송출판정보센타’의 문을 열고 문헌 수집과 조사에 매달렸던 시기, 삼목의 열정의 일부는 ‘만천유고’ 수록 ‘농부사 아로롱’에 닿아있다. 의외의 사연과 충격을 담고.... 그런데 세월이 지나 수다방 유마담의 얼굴도 흐릿하고, 최고의 나까마로 위세를 부리던 김연창 선생도 위작 자료를 거래하다 전과자로 생을 마쳐 거론하기를 꺼리는 지금, 불현듯 복사본을 넘겨주던 때 한 말이 다시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40여 년이 지나서야 늦게 공개를 하고, 전문 공개를 꺼리는 이유가 뭐요.” 혹시, 김연창 선생은 이미 이 자료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 말로 내게 암시를 준 것은 아닐까? "가짜를 판별하는 능력은 가짜를 만드는 능력을 동반한다”는 말처럼, 김 선생이 선수이기 때문에 이미 알만했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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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춤 평론가상 특별상, '김나영 아리예술단장' 수상한국춤평론가회에서 2022 한국춤평론상 특별상에 김나영 아리예술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선정했다. 한국춤 평론가상은 매년 작품상과 춤연기상 특별상을 선정하는데 작품상에는 서연수 한양대 무용학과 교수의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를 선정했다. 춤연기상은 안무가 안은미와 박호빈 제로포인인트모션 대표에게 돌아갔다. 특별상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세계민족무용 연구소 창설에 혁혁한 역할을 한 허영일 전 세계민족무용연구소 소장과 경북 안동에서 한국 전통춤을 근간으로 한 창작 춤극의 씨앗을 심고 가꿔온 김나영 아리예술단 단장겸 예술감독이 선정되었다. 김나영 아리예술단장은 2016년부터 경북 안동에서 원이엄마 실화를 소재로 춤극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종천지애>을 제작하여 30여회의 공연을 올린바 있다. 2020년도에는 안동 지역의 제비원 석미륵과 연이낭자 설화를 소재로 한 춤극<연이>를 제작하여 2022년까지 매년 무대에 올렸다. 춤극 <연이>는 ‘전형성의 밀도 있는 춤극 형식으로 안동지역의 난감한 춤 여건을 극복해 이만한 작품을 만들어가는 아리예술단은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또한 김단장은 2022년 사단법인 한국전통춤협회 안동시 지부를 창립하여 안동지역민들의 전통춤 향유권과 전통춤계의 발전을 위해서 열정을 다하고 있다. 시상식은 14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월간 ‘춤’ 사무실에서 열렸다. 기미양 객원기자가 김나영 수상자를 11일 찾았다. Q. 한국춤 평론가회가 주는 이 상의 위상과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요. A. 1982년에 발족한 한국춤 평론가회는 춤 리뷰뿐만 아니라 춤계 동향에 대해 우리나라 춤 발전에 기여해 왔다. 매년 한국의 무용계에서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는 무용가들 중에서 작품상과 춤 연기상 특별상을 제정하는데 특별상은 서울에서 한 명과 지역의 무용계에서 한 명을 선정합니다. 전체적으로는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이들의 가치’가 선정 이유였다. 내가 받은 특별상은 ‘무용계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경북 안동에서 한국전통춤을 근간으로 한 창작춤의 씨앗을 심고 가꾸고자 노력해온 기여가 인정되었다.’는 것이 선정이유라고 들었습니다. Q. 심사위원 8분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심사에는 김경애 ,유인화, 심정민, 박민경, 조은경, 정기헌, 권경하, 윤대성 평론가회원이 맡았다. 모두 국내 정상급의 평론가 분들이십니다. Q. 서울에서 활동하시다가 어떻게 유교 사상의 질서가 뚜렷이 남아있는 무용계 불모지라는 경북 안동에서 활동을 하시게 되셨나요. A. 고향 안동에서 <왕의 나라> 등 뮤지컬 공연이 인구 16만의 도시에 비해서 활발하게 펼쳐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립무용단 활동 등으로 무용수뿐만 아니라 국립무용단 중견단원 발표회와 국립창극단, 국립극단 공연의 안무,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첫 개인발표회 등 다양하게 안무자의 역할을 했었지요. 국립무용단 퇴임 후에도 재단법인 서울예술단에서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가무악 공연 <네가 마음을 보느냐> 등의 작품 활동과 서울 강동아트센터와 대구 수성아트피아 등 큰 무대에서도 끊임없이 전통춤 공연과 창작춤 작업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동안 연마해온 역량으로 상대적으로 한국춤문화 활동이 저조한 고향 안동에 춤예술 문화를 꽃피우고 싶었습니다. Q. 처음에 안동에서 첫 공연 기획서를 냈을때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특히 2016년부터 경북 안동에서 원이엄마 실화를 소재로 춤극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종천지애’ 첫 공연은 많은 관심을 가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A. 첫 기획안을 내었을 때는 싸늘한 냉대를 받았다는 기억이 선명합니다. 일단 무용공연은 예술인들만 알지 일반 관객은 도무지 뭘 하는지 모른다는 선입견을 보일 정도로 춤의 가치가 평가절하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춤극이라는 형식 자체도 안동에서는 처음 보여지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원이 엄마 내용을 소재로 한 다른 장르의 공연이 있는데 왜 같은 것을 공연하느냐는 것이었고..... 동일 소재로도 전혀 다른 공연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춤 작품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공연은 대단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역 문화예술계에서 ‘차원이 다르다’ 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행 전통예술지역브랜드 사업에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되어 상설공연 10회 동안 10회 모두 관람한 관객분들이 다수였습니다 Q. 조선조에 살다 간 '원이엄마'라는 실화를 다룬 '종천지애' 작품 구성과 주제는? A. 1장 신들의 게임, 2장 달빛 아래 월영교의 사랑, 3장 혼례, 4장 초야, 5장 어느 봄날, 6장 상중, 7장 이별의 선물 :미투리와 편지, 8장 천도무, 9장 유혹의 회오리, 10장 생명의 빛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주제는 인간이라는사랑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은 세월 속에 묻혀 있던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부활시켜서 창의적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한 한국전통창작춤극이죠. "물질주의와 기계주의와 이기주의와 무도덕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에게 짓밟힌 무력한 현대인들의 감성과 영혼에 울림을 주는 보편적 진리, 즉 사랑의 숭고함을 심미적으로 보여주고자 합니다."(작품 기획 노트에서) "죽음의 신과 생명의 신이 쌍둥이로서 원래는 하나라는 동양철학의 일원론에 바탕을 두면서 인간의 사랑과 생명에 대한 신념이 두 신을 화해시킨다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표현했다 ” (예술총감독 김사라의 인사말 중에서) Q. 설화를 다룬 연이의 구성과 주제는? A. 장면에 따라 전통 판소리가 중심이 되면서 사설과 전통 춤사위로 구성했습니다. 작품을 크게 본다면 주인공 연이가 바라보는 세상, 연이를 바라보는 세상으로 나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연이는 내면의 빛을 바라보고 연이가 보는 세상에는 자기중심의 사람들이 세상을 누비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탐욕의 대상으로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비친 연이는 자기중심 인간 중심을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본다면 춤극 총 4막으로 구성되어..... 프롤로그-삶의 수레 바퀴 안에서, 1장 이승의 어느 봄날, 2장 떠나가는 길, 3장 저승, 4장 다시 이승, 에필로그- 또 다른 세계로 구성되었습니다. Q. '종천지애'는 남녀의 사랑을 다룬 춤극이고 연이는 생명을 다룬 내용으로 소개되었는데. 작가가 추구하는 특별한 철학이라면 동시대적 키워드와 연결된다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신가요? A. 내가 만들어 내는 작품은 근원적인 공통점을 지닙니다. 자기 성찰을 통해서 이 세상을 좀 더 평화롭고 아름다운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종천지애>는 신들도 감동시키는 인간의 사랑, 제비원 석미륵과 연이 낭자 설화를 소재로 한 <연이>는 인간 중심의 삶을 초월한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 집착이 불러오는 파멸을 함께 보여 줍니다. 2023년도에 올려질 하회탈 이야기를 소재로 한 신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기 성찰이 없는 인간의 무지함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모든 생명이 존중받는 아름다운 삶, 평화로운 세상을 화두로 하고 있지만 각 작품마다 조금씩 집중하는 포인트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생명의 가치가 인정받고 서로 어우러지는 평화와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작품이 난해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불필요하다. 매 작품마다 재미와 감동이 함께하는 구성을 염두에 두고 기획 및 제작을 합니다. Q. 무용수들이 안무를 받으면서 작품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설득을 하시나요. 어떤 부분을 강조하시나요. 눈빛, 배역의 역활, 배역의 내면, 관객의 시선. 등등 A. 우선 작품 전체의 흐름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각 장면에 따라서 사랑. 미움, 연민, 증오 등의 내적 에너지의 흐름의 변화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 그에 따른 움직임(율동)의 성질도 달라지도록 유도합니다. 물론 관객의 시선도 의식해야 한다. 주역들에겐 더욱 다양하고 섬세한 표현을 요구합니다. 말로 설명함에도 의태어 의성어 여러 가지 비유외에도 몸짓과 표정까지 총 동원해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나올 때까지 소통하고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다양한 변화처럼 각각의 장마다 배역과 역할, 개성에 대해 그 특징들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물론 관객의 시선도 의식해야 하죠. 주역들에겐 더욱 다양하고 섬세한 표현을 요구하죠. 말로 설명함에도 의태어 의성어 여러가지 비유 등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해서 작품속으로 끌여들입니다. 장면마다 저마다의 특성을 무시한다면 춤극으로서의 특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설정된 역할과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서 움직임의 성질과 호흡, 고개짓 하나와 한순간의 눈빛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일일이 원하는 것이 표현될 때까지 요구하는 편입니다. 무용수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안무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가 주역 무용수에게서 ‘디테일의 여왕’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고합니다. 예술은 디테일로 완성된다. 더구나 군무로 이루어지는 춤극에서는...... Q. 올해 발표하는 작품과 기획의도는? A. 2023년도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2022년 4월에 대본을 완성했다 .하지만 좀 더 다듬어서 작곡자에게 전달하려고 작업 중이다.대사나 가사 등 스토리 이외에 세부적인 영역까지 명확하게 기술한다. 나는 안무와 연출자의 입장에서 대본을 만들기 때문에 마치 눈 앞에 공연을 보는 듯이 대본을 쓰려는 습관이 있다. 내용은 하회탈의 제작에 얽힌 허도령의 이야기라고들 하는 설화를 소재로 한다. 마을에 재앙이 들었는데 그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허도령이 신령한 탈을 완성시켜야 한다. 그 탈을 완성시킬 때까지 아무도 그 작업과정을 들여다보면 안되는 상황에서 , 사랑하는 여인이 그리움을 견딜 수 없어서 작업 공간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허도령이 피를 토하고 죽는다는 내용의 설화를 소재로 한다.이전의 작품들도 그래왔듯이 소재만 가져올 뿐 나 자신만의 주제의식으로 작품을 구성할 것이다.이전 작품들 보다는 다양하게 판타지적 요소를 이용해서 높은 의식의 내용을 신명하는 판으로 짜보고자 한다. Q. 왜 안동 소재의 안무작에 집중하는가? A. 물론 안동지역의 제재만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안동이 고향이고 또 안동에는 다양한 작품 제재가 정말 많기 때문이다. 전설 설화에서부터 역사적 인물들....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같은 대학자나 임청각으로 많이 알려진 석주 이상룡 외에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지역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육사도 안동 출생이다.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소재가 많다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들을 교과서적인 접근을 뛰어 넘어서 큰 울림의 감동이 있게 작품화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인가를 하기 시작하면 그 것에 집중하지만 항상 열린 마음으로 깨어있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30여 년 전부터 김단장의 춤사위와 작품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라는 말이 떠오른다. 막이 오르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관객은 촘촘한 구성에서부터 사이 사이 숨겨진 디테일에 끌려가기 시작한다. 이어서 무용수들은 이제 막 물이 오른 푸릇푸릇한 버드나무처럼....흥청 늘어지다가 어느새 종달새처럼 하늘 높이 튀어오른다. 사랑과 생명을 잉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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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야학, 아리랑 가르쳐주다 징역을”삼목 作 영덕군 관할 보훈지청에 문의한 지 사흘 만에야 전화가 왔다. 삼목이 문의를 겸해서 의뢰를 한 것은 권도순權道順이란 인물의 공적에 관한 것이었다. 답변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에 ‘아리랑’을 검색하면 김상순金尙順이란 인물이 검색된다. 1931년 대구지방법원이 보안법위반이란 죄명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4년(주문)을 언도한 인물이다. 26세로, 사는 곳이 경상북도 영덕군 오보면 대부동 220 번지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의 ‘사건개요’란에 뜻 밖에도 이런 내용이 담겼다. "야학교 흑판에 아리랑고개에 폭탄을 두고 자본주의를 항복시키자는 내용의 시를 쓰고 생도 11명과 노래하였다.”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19,167건 중 유일한 ‘아리랑’이란 키워드로 검색이 잡히는 자료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바로 이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23세 권도순에 대해 문의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삼목이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자신의 저서 ‘한국의 아리랑문화’란 책에 소개한 인물이 권도순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청년 권도순(權道順) 군은 동리에 노동 아동을 모아서 야학을 하여 오던 바”라고 주어로 취급한 신문 기사를 따랐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의 다른 인물에 대한 문의이면서 항일 공적을 들어 수훈을 할 수 있겠느냐는 건의가 목적이었다. 분명하게 국가기록원 사이트에는 이런 문구를 전재됐기 때문이다. "독립운동 역사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열들을 찾아 그 공적을 널리 알리고, 당사자 및 후손들이 정당한 예우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을 예우하는 것은 국가의 정통성과 존엄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일 만에 온 통화로 삼목은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확인한 결과 권도순은 보훈대상자가 우리 청에서는 더 이상의 정보가 없습니다. 그러니 상세한 것은 국가기록원으로 해 보세요. 그리고 말씀하신 아리랑 부르다 사건이 되었다는 얘기는 무슨 말씀인지 몰라서 윗분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건 문화부 소관 아닌가요?” "전화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리랑을 부른 것이 경찰에 잡혔던 사건이라고 내가 당시 조선일보 기사까지 읽어줬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구요? 그리고 문화부 소관이라고요? 참 허탈하네요.” 삼목의 실망스러운 답변에 다시 이어진 공직자의 응답이 더 가관이다. "선생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는 그 민요 아리랑을 불렀다고 사건이 되었다는 얘기잖아요? 아리랑, 그냥 민요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부른 게 사건이 됐고, 뭐 항일운동 같은 것을 했다는 얘기잖아요? 그 얘기를 윗분에게 어떻게 보고하나요?” 20대 말 정도의 여성 공직자의 답변이 아리랑과 항일운동과 무슨 관련이냐는 투다. 40여분 정도의 통화에서 충분히 취지와 성격을 전했는데, 물론 이런 사항이 상식常識이지는 않지만 항일독립운동가 추서 같은 보훈업무를 담당하는 공직자가 이런 정도의 이해력을 갖지 못한 것이라 안타까웠다. 아리랑을 ‘민요 아리랑’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이 닫힌 인식, 이 분이 겪은 교육과정에서 아리랑이 1910년 일제의 한국병탄 조약 직전 시위대가 아리랑을 부르며 일제를 규탄했다는 역사적 사실 같은 것은 배우지도 않았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리랑은 더 이상 민요 아리랑만이 아닌, 그 이상의 노래다. 모든 사료는 그 고유 성질만이 아니라 상품성이란 쓰임새까지 있어야 한다. ‘알면 들을(볼) 수 있다’가 아니라, ‘들으면 알아야(보아야) 한다’.” 이런 인식은 삼목의 ‘아리랑관’이다. 곧 1930년대 신문 기사 속의 ‘아리랑 고개’가 민요 아리랑만이 아닌, ‘야학과 아리랑’, ‘항일운동과 아리랑’, ‘창작 아리랑’, ‘창조적 계승론’ 등으로 의미확대를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보훈처에 연락을 했던 것이다. 사실 삼목의 기대는 순진하게도 이러했다. "선생님, 윗분께서 자료를 빨리 보고 싶으시다며, 언제 우리 청에 오실 수 있는지 확인하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이런 예상은 고사하고 아예 "아리랑이라서~” 없었던 일로 하자니! 삼목은 공직자들에게서 수 없이 겪어 왔던 허탈감을 또 맛보게 되었다. 해당 기사를 다 읽어 주었는데도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이니. 삼목은 전화에서 신뢰를 주기 위해 구투舊套의 기사체 문장을 그대로, 그리고 자신의 책에 재인용한 것이지만 조선일보 1931년 기사라고 하여 읽어준 것이다. "영덕군에 있는 청년 권도순(權道順) 군은 동리에 노동 아동을 모아서 야학을 하여 오던 바 어떤 날 밤 담임한 선생이 오지를 아니하여 방을 빌려준 김상룡(金尙龍)은 아이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음을 민망히 여겨 복습을 시키다가 ‘아리랑’이란 노래를 가르쳤다는데 그것이 불온(不穩)하다는 이유로써 영덕경찰서를 거쳐 대구지방법원 1심공판에 10개월 징역에 4개년 집행유예의 언도를 받고 지난 4월 3일에 집에 돌아왔고 아리랑고개(以下 6行 畧)라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하여 지난 4월 9일에 김상순 군을 구금하고 또 3일 후에 그의 동무 박재술(朴在述)을 구금한 이래 월여를 두고 취조를 하던 중 돌연히 지난 2일에 대구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는 바···” 기사 내용에서 ‘야학’과 ‘아리랑 노래’와 ‘아리랑고개 6행’이 주목된다. 특히 삼목은 생략 된 6행의 기사 중의 아리랑 사설을 영화‘아리랑’에서 불러 탄압을 받은 사설일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영화‘아리랑’ 여주인공 신일선여사의 증언이나 ‘조선가요선’이란 책에서 삭제된 ‘아리랑’ 사설 등을 통해 추정한 것이다. "문전에 옥답은 다 어딜가고/ 쪽박의 신세가 원말이냐 사우다 싸우다 아니되면/ 이 세상에다가 불지를란다” 또 아니면 만주지역에서 조사된 이런 아리랑 사설이다. "XX(독립)당의 出沒이 자즈니/ 領事舘 오도빠이 달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런 사설까지도 불러주기도 하며 "아시겠습니까?”와 "이해되시죠?”를 중간중간에 넣어 나름 설득을 하려고 노력을 한 바이다. 그리고 요지를 다시 이렇게 정리해 주기도 했었다. "소인이 제시한 것처럼, 신문에는 권도순을 중심인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김상순은 주문에 아리랑 관련 내용이 적시되어있는데, 권도순은 ‘범죄혐의 업음’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보완해 줄 것을 바랍니다. 그리고 기사에서 생략한 6행의 ‘아리랑’은 요청하면 언제든 소인이 연구한 결과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런 정도의 공적이면 보훈 대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를 꼭 윗분한테 고려해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이런 삼목의 통화에 상대의 답변 말미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삼목으로서는 기대할만했다. 사실 영화감독 나운규선생 외에 또 한 사람의 아리랑 관련 수훈자가 있게 된다면 아리랑의 또 다른 성격과 위상을 일반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영덕 대부동(현 영덕읍 대부리) 야학 터를 찾아 표식을 하는 계획도 갖고 있는 터였다. 당연히 마음먹고 전화를 한 것이다. "예, 그동안 사실 기록이 보완되어 수훈이 추서 된 경우는 많습니다. 윗분께 전하겠습니다.” 첫 통화 당시의 끝말이었다. 기대할만했다. 그런데 3일 만에 온 답변은 실망스러운 것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랑과 항일운동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가라는 뒤늦은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삼목으로서는 화를 누르고 이를 진전시킬 방안을 또 궁구해야 했다. 삼목으로서는 1930년대 전후 야학夜學에서 항일노래로서의 애국가愛國歌 사건을 검토한 바가 있었다. 야학과 노래운동의 연관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고, 그 야학에서 아리랑도 불렸을 것이란 추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단순히 돈 없는 아이들이 비정규로 수학하는 사설교육 시설(물론 관립도 있었다)이란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아동들이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어 문맹자들의 계몽에 성과를 올렸으며 여성교육에 크게 기여하여 지위향상과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민족실력양성에 공헌하여 당시 민족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를 민중이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실천적 행동이었기 때문에 민족사적 의의는 매우 막중했던 것이다. 삼목은 설 연휴를 보내고 영덕을 가기로 했다. 수첩에 이렇게 썼다. 1. 야학 터 주소지 특정 표식 2. 장소성 부여 3. 아리랑과 야학, 아리랑과 항일운동 상황 보편화 4. 지역문화 콘텐츠화 5. 영덕군지편찬위원회와 함께 조사 6. 영덕군청, 김상순, 궈도순 독립유공자 추서, 보훈처 의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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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장, 정은하 명창 별세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회장인 정은하 명창(대구아리랑 전승자)이 5일 오후 3시 15분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상주는 정석만, 정선옥. 영안실은 영남대학 장례식장 303호(053-620-4243), 발인은 7일(토) 오후 3시. 장지는 충북 단양 방곡사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정명창은 1976년부터 이창배(1916∼1983) 선생에게 민요와 잡가, 안비취(1926∼1997) 선생에게 경기민요를 배웠다. 30대 초반에 스승이 "경상도 태생이니 경상도 민요를 연구하는 게 맞다"는 권유를 받고 1985년 무렵부터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영남민요현장조사와 무대화로 영남민요를 자신의 리파토리로 체화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대구에서 터를 잡고 정착후, 영남 지역 민요를 전공하는 대학 교수들과 함께 영남 지역을 다니며 예천 통명농요(중요무형문화재 84호), 예천 공처농요(경북도 무형문화재 10호), 안동 저전농요(경북도 무형문화재 2호), 구미 발갱이들소리(경북도 무형문화재 27호), 달성 하빈들소리(대구시 무형문화재 16호) 등을 찾아내어 기록하고,무대에서 재현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음반으로는 영천아리랑, 대구아리랑, 영남아리랑의 재발견 3장의 음반에서. 팔도 아리랑과 여러 음악장르를 넘나드는 아리랑 음반을 발표했다. 또한 영남아리랑보존회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아리랑 지부(25개 지부)를 가진 단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실적에서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등재 되는데 숨은 공로를 인정 받아서 2013년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장'으로 추대를 받았다. 이러한 고인의 전승활동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이 우리나라 아리랑 전승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아리랑 전승활동을 살피면, 1983년 올케 친정집에 놀러왔다가 동구 불로동에서 전해지는 '대구아리랑'을 채록하고 전승해 왔다. 2000년 '615공동선언기념아리랑음악회' 공동주최측인 (사)아리랑연합회에서, 당시 남한에서 유일하게 '영천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국악인으로 대구에서 활동하는 정은하 선생를 모셨다. 고향이 영천인 그는 영천아리랑을 경상도조로 당차게 불러주어서 청중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이후 영남아리랑보존회를 창립하고, 2011년까지 영천에서 '영천아리랑'을 주제로 ‘영남아리랑축제’를 전국아리랑경창대회와 함께 개최해 오다가, 제자인 영천 출신 전은석(현 (사)영천아리랑연구보존회 이사장)에게 전해 주었다.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를 계기로 지역의 지명`사투리를 곁들여 현대적으로 만든 ‘대구아리랑’을 발표 후, 이를 계기로 대구아리랑 음반을 시작으로 매년 8월 15일 ‘대구아리랑제’와 대구아리랑전국경창대회도 함께 개최해왔다. 제자인 곽동현 한양대 국악과 겸임교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께 민요를 배웠다"며 "결혼도 안 하신 채 늘 '나는 아리랑과 결혼했다'고 하셨을만큼 아리랑과 제자밖에 모르셨던 분이다. 너무나 일찍 가셔서 전국아리랑전승단체들이 애통함을 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리랑학회 기미양 이사는 "정은하 명창은 영남민요와 영남아리랑을 전승하고 있는 전승자로서 현장조사시 음악적 분석에 대해서 탁월한 안내를 해주었다. 그만큼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언제나 전화만 해도 궁금해하는 지역 아리랑은 물론 경기민요에서부터 서도민요, 영남민요 지역의 토리대로 척척 불러주었다. 특히 잘 들리지 않는 일제강점기 SP음반 사설을 줄줄 풀어주었다. 영남지역 구비문화조사시 채록해서 들려주면 서울사람 귀에는 전혀 채록이 안되는 발음과 사투리 뜻까지 해결해 주었다. 이렇게 빚을 많이 지었다."라고 전했다. 이어서 "특히 아리랑 리더로서 전국 아리랑공동체 결속에 기여해 왔다."며 "17세 되는 1970년대 중반부터 평생 함께해 온 국악계 명사와 소리꾼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전해 주었다. 국악계와 국악인을 이해하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라고 전했다. 정은하 명창 약력 소속: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이사장)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회장 전국아리랑공연예술연합회장 1956년 (경상북도 영천 출생) 1976년 이창배`안비취 선생을 사사, 국가무형문화재 57호 '경기민요' 이수자 1982년 KBS 민요백일장 장원 1985년 한라문화제 최우수상 수상 MBC 전주대사습놀이대회 우수상 1986년 한국국악협회대구지부 민요분과장 겸 이사 1991년 제1회정은하 민요발표회/대구문화예술회관 대극장 1998년~2010년 대구교원연수원 강사, 대구교대`영남대`대구예술대`경북예고 2000년 영천아리랑 음반 발매 2002년 '제4회 상주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통령상' 수상 2003년 대구아리랑 음반 발매/제1회대구아리랑제 주관 2004년 팔도아리랑,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장 수상 제6회 영남의 소리 발표회/ 대구시민회관 대극장 2005년 (사)영남아리랑보존회 이사장 취임 2007년 영남아리랑의 재발견 음반발매 제1회 영남아리랑대축제 (영천야외특설무대)주최주관 제1회 전국아리랑경창대회 (영천시민회관)주최주관 2008년 제1회 상주아리랑축제 주최주관 2012년 아리랑상 수상(공로상) ((사)아리랑연합회 주최/아리랑학회 주관) 2013년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회장 취임. 2014년 제 8회 영남아리랑대축제 및 전국아리랑경창대회 (영천시민회관) 2016년 제1회사할린아리랑제 예술감독 2022년 제20회대구아리랑제 주최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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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대통령상 수상자를 만났다”국악인이라면 누구나 명인·명창을 꿈꾼다. 올해 최고의 영예를 얻으며, 그 시작에 발을 내딛은 젊은 주인공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 그들은 어떤 노력을 해왔으며, 어떤 국악인을 꿈꾸고 있을까? 바로 국악방송 송년특집 ‘2022 대통령상 수상자를 만나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회자의 질문과 대답이 출연자별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질문과 질문 사이에 출연자들의 저마다의 매력을 발산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과연 대통령상 수상자답게 빼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대부분의 소리에는 고정훈 명고가 함께 했다. 수상 당시의 어떤 마음이었을까? 최잔디 명창은 "아버님께서 말기 신장병으로 많이 편찮으신데, 조금 더 건강하실 때 상이 선물이 되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뜻 깊은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박현영 명창은 "명창은 상을 받았다고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대명창들이 인정해야 진정한 명창이라고 생각하고요, 상을 받으니까 부담이 더 크죠.”라고 말했다. 최잔디 명창은 스승 故성창순 선생이 젊은 시절 가장 많이 불렀으며, 자신의 대상 수상곡인 ‘심청가 중 눈 뜨는 대목’을 선보였다. 명창의 애절한 소리는 심봉사의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딸 앞에서 눈을 뜨는 감격스러운 극적인 순간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며, 편찮으신 명창의 아버님을 떠올리면, 그 애절함은 더욱 진정성을 담는다. 그들은 수상의 영예에 이르기까지 도전에 대한 이야기도 전했다. 출연자들은 각 대회에서 대상을 자치했지만, 한 대회를 여러 번 도전하거나, 여러 대회를 골고루 도전했기에 서로 같은 대회에서 등수가 나뉘기도 했다. 박가빈 명창의 경우, "9번을 도전했는데, 5번을 떨어졌어요. 중간에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 많이 울기도 했어요. 그 때 스승님께서 ‘밥도 다 되는 시간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밥이 아직 설었다.’ 라고 말씀 하셨는데요, 그것이 아프면서도 맞는 말씀이더라고요. ‘밥이 다 될 때까지 나아가자. 견뎌야 된다.’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어요.” 라는 경험을 전했다. 신정혜 명창은 ‘6년 정도 도전했으며, 실패하고 준비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자신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허정승 명창의 경우, 자신보다 낮은 연령대의 장원자들을 보며 "지금은 국악교육도 많이 발전해서 실력들이 좋아지고, 수상자 연령대도 낮아진 것 같아요. 저는 3년 전에 도전했고 6수만에 됐는데요, 저도 어렸을 때 나가고 싶은 생각은 이었지만, 제 스스로 준비가 안됐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실력’의 기준은 40대였거든요. 그래서 40세부터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자신만의 소신을 밝혔다. 박현영 명창의 경우, 조금 다른 경우를 보였다. "저는 한 대회만 3년을 준비했는데요, 제가 전주에서 자랐고, 학창시절, 직장을 전주에서 다녔어요. 그래서 ‘전주대사습놀이’가 제게 의미가 컸던 것 같아요. 학창시절에는 ‘저 곳에서 노래할 수 있을까?’, 시간이 좀 더 지나서 ‘상을 받을 수 있을까?’ 상을 받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던 것 같아요.” 이렇게 자신의 소리의 뿌리가 확고한 그는 상금 일부를 모교에 장학금을 전달한 일도 전했다. 이어서 작년에 가사 실수로 차하(2등)를 했지만, 재도전하여 장원을 차지한 ‘적벽가 중 조자룡 활쏘는 대목’을 선보였다. 그는 출연자 중, 가장 낮은 연령이지만, 힘 있고 풍부한 성량과 탁월한 완급조절로 곡 특유의 역동적인 분위기를 구현하며 리듬을 타는 듯 소리했다. 두 번의 도전을 한 곡이니 수백 수천번을 불렀을 것이며 곡 자체가 자신일 것이다. 고정훈 명고와의 뛰어난 호흡 또한 곡의 분위기를 도왔다. 곡이 끝난 후, 사회자는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말했다. 출연자들은 스승과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도 전했다. 허정승 명창은 "스승님(안숙선 명창)께서 표현을 잘 안하세요. 수상 후에, 나중에 아드님께서 따로 연락을 주셨는데요, ‘요새 웃을 일이 없는데, 너 때문에 웃어다.’고 전해주셔서 감사했어요.”라고 전했다. 박현영 명창은 "생각 해보니까 그 동안 어머님께 감사 말씀을 한 번도 못했더라고요. 사실 어머님께서 국악을 잘 모르세요. 다른 분들은 국악에 대한 조언이나 격려를 해주시지만, 어머님께서는 아들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해주셨거든요.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지도해주신 김일구, 김영자 선생님께 늘 감사한 마음이에요.”라고 전했다. 최잔디 명창은 "제가 20대 초반에 그만 두고, 8년 쉬고 선생님(故 성창순 명창)께 전화를 드렸는데, ‘아가, 밥은 먹니?’라는 말씀에 (마음이 감동하여) 무너졌어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어요.”라고 회고 했다. 박가빈 명창은 2년 전 가슴 아픈 이별에 위로가 되어 준 ‘춘향가 중 이별가’를 선보였다. 명창의 소리는 힘이 있으면서도 감정을 누르듯 애절했으며, 춘향의 애통함, 이몽룡의 애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다시 만날 간절함을 모두 담았다. 고수의 추임새 역시 소리와 하나가 되어 이별의 슬픔을 더했다. 명창의 반열에 오른 이들의 솔직한 마음가짐도 들을 수 있었다. 박가빈 명창은 "너무 무서워요. 무대가. 사람을 볼 때 기대치가 생기잖아요. 이제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기대치가 있을 것인데, 거기에 못 미치면 질책을 많이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이름에 걸맞게 기대치를 충족해야 하기 때문에 무섭고, 긴장되기도 해요,” 최잔디 명창은 "살얼음판 걷듯이 조심조심 생각하고 무대 오를 것. 마음을 힘들게 하는 하나하나에 연연하지 않고 빨리 잊어버릴 것. 소리꾼 과정을 걷고 있으니까, 지금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해질 것. 더 평안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신정혜 명창은 "책임감과 무게감이 확실히 생겨요. 음악으로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격에 맞는 행동과 처신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말이나 행동을 더 신중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허정승 명창은 "저도 무대가 무섭고 그런데. 선생님(안숙선 명창)께서 ‘그럴수록 다시 소리를 처음부터 한다고 생각해봐라.’ 저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요, 하면할수록 심오하더라고요. 하면할수록 새롭고. 나아가는 과정인가보다 생각하고 있어요.” 라고 전했다. 신정혜 명창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며 부를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난다는 ‘심청가 중 곽씨부인 유언’ 대목을 선보였다. 그녀의 대상 수상곡이기도 하다. 크고 깊은 성량과 애절한 감성은 어린 자식을 놓고 가는 어미의 비통함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마디마디에 심은 절절함은 자식을 두고 떠나는 어미의 마음 그 자체였다. 내년에 도전하게 될 후배들에게 독려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최잔디 명창은 "정해진 시간에 무대를 운영하고, 큰 선생님들 앞에서 실력이 늘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같이 동지가 되어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박가빈 명창은 "9번 도전해서 5번 떨어지기도 하고, 3등 ,2등, 1등 다 해봤는데요, ‘상이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상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데, 준비하다보면 목적이 바뀌거든요. 소리 길로 가는 과정인데, 상이 목적이 되니까 괴롭고 힘들어지더라고요. 계속 떨어지더라도 어떤 것도 마이너스는 없다. 떨어져도 거기서 배우고, 잃는 것 있으면 얻는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그러니 도전해야 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성장하더라고요. 실패도 실패가 아니구나. 필요한 과정이구나, 성숙해지는 과정. 넘어져도 일어난다는 마음으로 도전하시기를 바랍니다.” 허정승 명창은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듯이, 소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대회마다 다르고,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본인이 준비되지 않으면 상을 탈 수 없는 것이거든요. 꾸준히 노력 하다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정혜 명창은 "처음 도전하시는 분도 도전해야 그 과정을 겪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니까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그 과정 중에 나아가면서 자신이 무너지거나 힘들 때, 자기 확신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자기 객관화와 자기 확신의 시간을 가지고 소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거든요. 6년이라는 시간이 값진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힘들겠지만 끝이 있고, 그 끝에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그 시작을 즐기기를 바랍니다.” 박현영 명창은 "저는 출전자격 나이가 되자마자 도전했어요. 용기가 많이 필요했죠. 부족해서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어떤 분이 ‘평가는 네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심사위원이 하는 것’ 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꼭 도전해서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라고 전했다. 내년을 위해 야심차게 계획한 것들도 들을 수 있었다. 허정승 명창은 ‘판소리 완창발표와 박사과정 논문완성’, 신정혜 명창은 ‘다양한 소리공부와 완창 발표회’, 최잔디 명창은 ‘춘향가 완창, 스승(故성창순 명창)의 철현금 연주 발표’, 박가빈 명창은 ‘춘향가 완창, 소리 사설집 수궁가, 적벽가 준비’, 박현영 명창은 ‘창극, 뮤지컬 등 다양한 무대경험 도전’ 등을 전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소리꾼을 꿈꾸고 있을까? 박현영 명창은 ‘겸손한 소리꾼, 소리를 맛있게 하는 소리꾼’, 박가빈 명창은 ‘따뜻한 온기를 줄 수 있는 소리꾼’, 최잔디 명창은 ‘제자들에게 예술세계를 확장해 줄 수 있는 스승이자 소리꾼’, 신정혜 명창은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소리꾼’, 허정승 명창은 ‘소리나 삶에 있어서 누가 봐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소리꾼’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허정승 명창은 자신의 대상 수상곡인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으로 각박한 세상에 소리로 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전했다. 역시 명인은 시원한 성량과 명쾌한 발음, 뛰어난 기교로 단연 연장자임을 느끼게 했다. 때로는 흥보의 소박하지만 간절한 소망을, 때로는 경쾌한 리듬을 타고 흥보의 행운을 신명나게 표현했다. "잘난 사람도 못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해학적인 가사는 절로 흥이 나고, 재물을 나누고자 하는 바다같이 넓은 흥부 마음은 듣는 이도 흐뭇하게 한다. 출연자들은 올해 최고의 영예를 얻었지만, 그것은 수년간의 실패와 기다림, 그리고 반복되는 자기 성찰과 부단한 노력 끝에 얻은 결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수상의 영광보다는 '대상'이라는 무게를 더욱 크게 느끼며 겸손하고 정진하고 있으며, 대중에게 한 걸음 다가가고자 했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이들의 꿈과 노력이 국악계에 어떠한 결실로 이어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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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희 명창 전승발표회 ‘동초의 길을 잇닿다’동초제 심청가 장문희판소리연구소가 주최하는 전승발표 ‘사백연가 섣달그믐’이 31일 그믐날 오후 2시 우진문화공간에서 열린다. 매년 제자들의 전승 활동과 그 성취를 다독이는 취지의 발표회 겸 완창 무대로 주목을 받는 무대이다. 8명의 제자들과 함께 5시간에 걸친 동초제 완창무대이다. 동초제 심청가는 동초(東超) 김연수 명창이 1930년대 초 당시 5명창인 송만갑 유성준 정정렬 등에게 배운 소리를 기반으로 오랜 창극 활동을 통해 자신의 판소리 이념에 맞게 완성한 것. 기존의 더늠을 활용하면서도 여러 바디의 사설을 차용하고 연극적 요소를 첨가하는 과정에서 37개의 독자적 소리를 가지고 있어, 현재 전승되는 심청가 창본 중 가장 확장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계보는 오정숙-이일주-장문희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극적인 면모를 살린 심청의 탄생, 성장, 죽음, 환생, 재회 대목으로 9명이 분창으로 전개한다. 박수현(어허 둥둥 내딸), 구동희(아버지 듣조시요!), 왕시연(닭아 닭아 우지 마라), 김유정(범피중류 둥덩 떠나간다), 박성희(추월은 만정허여), 모세진(아가 청아 네가 나를 모르리라), 조혜진(삣죽허면 뺏죽허고 힐끗허면 핼끗허고), 김나영(얼씨구나 절씨구 절씨구나 좋을씨고), 마지막 대목은 장문희 명창이 "어질더질”로 여민다. 고수에는 박종호, 박추우 두 명고가 함께한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장문희 명창은 제13회 전주대사습놀이학생전국대회 장원, 제24회 전주대사습놀이 일반부 장원, 제30회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부 장원을 한 기록 소유자이며, 2009 국립국악원 주최 동초제 심청가 완창(이일주/장문희) 시작으로 금년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장문희의 동초제 심청가’ 초정 발표회까지 10여 차례 가졌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동초제 ‘심청가’ 보유자로 국내외,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섣달 그믐날 임인년의 마지막 오늘! "섣달 그믐날" 어려운 듯하지만 정감 있고, 낯 설은 듯하지만 깊이 있는. 마치 우리 소리의 이면과도 같은 다정함에 2022년 사백연가의 주제를 "섣달그믐날”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아니고, 귀에 들리는 것만이 다가 아니듯 보이고 들리는 그 너머의 소리를 찾아 걷고 또 걸으며 넘어지면 받는 것이 상처라지만, 아프지 않고 어찌 성장할까요. 한 해의 마지막을 잘 다독여, 기묘년 새해를 꼭 사랑하리라 약속하려 합니다. 사랑해서 지키고, 사랑해서 아프고, 사랑해서 희생하고, 사랑해서 감동받고, 사랑하기에... 눈물 흘리는 특권을 누리는 우리는 잘 견디어 왔으니!.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아픔도. 잘 가시오 임인년. 환영하오 계묘년. 사백 장문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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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최고의 공연, '임인진연' 알고보기15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프레스 리허설에서 '임인진연' 모습이 120년 만에 드러났다. 코로나19와 홍수 피해로 두 번이나 연기되었다. 그래서 연말 특집공연으로 더욱 기대가 컸다. 15시에 시작되어 100여 분에 걸친 완벽한 시연이 있었다. 고종 황제 당시 진연(進宴, 궁중잔치)은 공식적 행사를 올린 ‘외진연’과 ‘내진연’으로 나뉘어 행해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예술성이 강한 ‘내진연’을 축소하여 무대 공연으로 재구성했다. 1902년 내진연을 재현하는 것은 이번이 최초다. 막이 내린 후에는 김영운 원장과 박동우 총연출과 기자들의 질의 시간도 있었다. 이번 공연은 재현에 따른 학술적 접근이나 무대의 정밀함이나 출연자들의 전문성에서 국립국악원만이 해낼 수 있는 공연이란 점에서 최고의 공연으로 평가 받을만하다. 시연과 질의를 통해 드러난 이해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 몇 가지가 있다. Q. 왜 오늘날 '임인진연' 행사를 공연무대로 재현했나? A. 대한제국의 1902년은 120년 전 ‘임인년’이다. 120년이란 정주년을 맞은 것에 주목하여 재현의 당위성에 무게를 실었다. 500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를 포함한 마지막 궁중의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궁중잔치'라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나 국악사나 공연사 측면에서 재현(Representation)의 의미가 있다. Q.1902년 임인년 당시 내세운 주제의식 또는 목적은 무엇이었나? A. 황태자의 다섯 차례에 걸친 간청은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과 나이 60을 바라보는 망륙(望六)인 51세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제1명분이다. 제2명분은 급변하는 개화기에 국제적으로 황실의 위엄을 세우고 내부적으로는 군신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확립하려는 목적의 대외적 과시이다. 무대 중앙에는 대한제국 태극기가 게시된 점이 이를 시사한다. Q. 당시 어좌(御座)에 앉아서 임인진연을 바라보는 고종황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A.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일본에 박탈당한 '을사늑약'을 3년 앞둔 시점이었다. 고종은 나라를 지키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전신·전화·전등·전차 4대 근대시설을 일본보다 3년 먼저 도입했다. 아시아에서는 첫번째로 4대 근대시설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리고 해외열강 11개국을 초청, 즉위 40주년 기념칭경예식'을 준비했다. 자주국가 대한제국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콜레라 유행, 행사 개최장소인 중화전 완공 지연으로 잔치가 2차례 연기됐다. 그 여파로 국제행사는 치르지 못하고, 국내 행사인 '진연'만 행해졌다. 망국의 시기가 엄습하는 가운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절치부심에 고심한 고종황제의 절절함이 느껴진다. Q. 당시의 실제 궁중잔치와 이번 재창조 된 무대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A. 당시의 진연은 크게 남성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행사를 올린 ‘외진연’과 황태자와 황태자비, 군부인, 좌․우명부, 종친 등과 함께한 ‘내진연’으로 나뉘어 행해졌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예술적인 측면이 강한 ‘내진연’을 무대 공연으로 재구성하였다. 주목되는 변화는 황제의 어좌로 설정해 관객이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마주할 수 있도록 시야를 설정, 진행한다는 점이다. Q. 임인진연은 어떤 사료를 근거로 삼아 재현했나? A.당시 국가를 상징하는 황실의 진연이 기록된 ‘진연의궤’와 ‘임인진연도병’(圖屏, 덕수궁 관명전 그린 병풍)’ 등 당대의 기록 유산에 근거해 전통 방식으로 되살렸다. 박연출은 "공연을 준비하면서 놀란 점은 당시의 기록이다. '임인진연의궤'행사 준비에 필요한 모든 내용들이 글과 그림으로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어떠한 공연팀도 이 정도로 완벽한 기록을 남기지는 못한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화 ‘임인진연도병’에는 당시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고 전했다. Q.당시 야외 행사인 덕수궁 광면전을 어떻게 무대화 했나? A.주렴(朱簾, 붉은 대나무발)과 사방으로 둘러쳐진 황색 휘장막 등을 활용한 무대장치는 황제의 공간과 무용, 음악의 공간을 구분하여 실제 진연의 사실감과 생생함을 높였다. Q. 당시 임인진연 의례에서 연희되었던 음악과 무용에 대해서는? 몇명의 악공이 어떤 악기로 연주했나? 연주의 규모는? A. 첫곡 강락지곡에서 마지막 곡 '태평춘지곡'까지 총 65곡이 연주되고 불려졌다. 악공(악사)는 총 113명이고, 악기는 편종,편경 등 30종이다. 277명의 무용수가 20개 종목 무용을 선보였다. 봉래의, 헌선도, 몽금척, 연백복지무, 수연장, 제수창, 무고, 가인전목단,경풍도, 사선무, 춘앵전, 학무, 연화대무, 향령무, 육화대, 만수무, 장생보연지무, 포구락, 선유락, 검기무이다. 아침부터 해가 질때까지 음식을 올렸던 절차까지 합하면 9시간 이상 연희가 이어졌을 것이다. Q. 재현의 중심, 공연화한 순서와 구체적 공연 상황은 무엇인가? A. 중심적인 의례는 예법대로 황제에게 일곱 차례 술잔을 올린다. 이 과정에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이 궁중무용 29종목 중 5개 종목 봉래의, 헌선도, 몽금척, 향령무, 선유락이 선보이고, 궁중음악으로는 보허자, 낙양춘, 해령, 본령,수제천, 헌천수 등을 감상할 수 있다. 황제의 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무대를 꾸민다. Q. 당시 행사에서 이번에 전적으로 생략된 부분은? A. 김영운 원장은 "당시 실제 행사는 오전 9시 쯤 시작하여 일몰까지였다. 또한 잔치임으로 음식을 올리는 절차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연 예술로 접할 수 있는 작품성에 주목하여 재현을 목적으로 과감하게 생략하였다."라고 말했다. 박 연출은 "이번 공연은 1902년 의례와 비교했을 때 규모를 6분지 1로 축소했다.당시 상차림 음식을 담은 총 그릇수는 18,132개다. 음식을 올리는 절차를 생략했고, 등장하는 춤은 29개 종목에서 5종목을 선정해서 선보였다. 공연 시간은 100분이 소요된다. 진연의궤와 임인진연도병 등 당대 기록유산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재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당시 행사 진행요원이 493명, 무용수가 277명이나 됐던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최대한 그때 분위기와 정서를 살리려고 했다"고 답했다. Q. 특히 이번 무대와 객석의 시선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객석을 황제의 어좌로 설정해서 관객이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본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에 대한 연출가의 의도는? A. 박동우 연출은 "대한제국이 황제의 국가였다면 대한민국은 국민의 국가다. 그래서 관객의 시선이 황제의 자리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고 말했다. 객석을 황제가 앉는 ‘어좌’로 설정한 것이다.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무대를 꾸몄다. Q. 마지작 휘날레를 장식한 정재 '선유락'은 어떤 작품인가? A. 채선(彩船)을 설치하고 여령들이 나눠 서서 화려하게 장식한 배를 띄우라는 영이 들리면 어부의 심정을 담은 어부사를 노래하며 밧줄을 끌며 배를 둘러서서 춤을 춘다. 신라의 뱃놀이에 기원한 조선시대 정재이다. 지방 교방의 춤이 정조대에 궁중예술로 유입된 것으로, 궁중 큰잔치에 빠질 수 없는 레파토리로 군무의 화려한 춤사위가 원을 그리며 돈다. 도입부분에서 취타대가 나와서 시작을 알린다. 반주음악은 취타이며 악기는 징·북·호적·자바라·나발로 편성되고 어부사 사설은 다음과 같다. 머리 센 어부가 갯가에 살면서 물가에 사는 게 산에 사는 것보다 낫다 하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아침에 빠진 물이 저녁 되니 밀려오네 Q.기자 간담회,답변의 결론은? A.김영운 원장은 "120년 전 자주국가를 염원했던 대한제국의 찬란한 궁중의례의 진면목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문화유산의 가치와 문화를 통한 화합의 정신이 널리 전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박동우 연출은 "대한제국이라는 시대적 정서와 궁중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통 방식으로 무대에 재현하고자 했다.”고 밝히며 "황제의 시선으로 구성한 이번 공연을 통해 많은 관객들이 궁중예술의 멋을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춤과 노래, 의례가 삼위일체 되는 공연이다라"고 밝혔다. Q. 이번 공연 티켓은 거의 매진된 상태이다. 국립국악원에서나 할 수 있는 있는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나? A. 김영운 원장은 "가능한 한 내년에도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려서 더 많은 관객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덧붙인다면 임인진연 무대에서 궁중의례과 함께 연희자들의 화려한 한복 의상의 선과 색깔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잠시 정지되어 있는 그 모습도 찬란한 빛이 발했다. 오늘 우리는 자랑스런 '위대한 유산'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내년에도 다시 한번 만나기를 고대한다. 국립국악원 송년공연 ‘임인진연’은 8세 이상 관람 가능하며,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12월 16일(금)부터 21일(수)까지 주중에는 오후 7시 30분, 주말에는 오후 3시에 진행한다. 공연 예매는 국립국악원 홈페이지(www.gugak.go.kr)와 전화(02-580-3300)로 가능하다. R석 5만원, S석 3만원, A석 2만원, B석 1만원 (문의 02-580-3300, 19일(월)은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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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기념비,....왜 세우고, 왜 정선에 세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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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연정국악원 민혜성 명창의 흥보가 공연대전시립연정국악원이 TJB대전방송과 공동으로 24일 오후 7시 30분 국악원 작은마당에서 '2022 전통시리즈-대한민국 대표 소리제 초청 '판소리 다섯 마당, 오색 유파 전' 마지막 무대로 민혜성 명창의 흥보가를 공연한다.2021년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예술인 장관상을 수상한 민혜성 명창은 판소리의 우수성을 통해 'K-국악'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는 소리꾼이다. 이번에 무대로 올리는 흥보가, '박타령'은 민담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민적인 사설과 재담소리가 많다. 조선후기 신흥 부자와 몰락 양반을 상징하고 있는 놀보와 흥보의 '돈'에 대한 자세를 다루면서 변화하는 사회상을 보여준다.흥보가에서 눈대목은 '중타령', '집터 잡는데', '제비노정기', '박타령', '비단타령', '화초장', '제비 후리러 나가는데'를 들 수 있다.소을(素乙) 민혜성 명창은 성우향 선생에 춘향가, 심청가를 시작으로 박송희 선생에 흥보가, 적벽가, 숙영낭자가를 사사하고 김수연 선생에 수궁가까지 6바탕을 사사했다. 민혜성 명창이 이수받은 흥보가는 송만갑-김정문-박록주-박송희로 이어온 정통 동편제 판소리로 올곧게 전수받아 다수의 완창과 음반을 제작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이수자이자 전국고수대회 대명고부 대통령상 수상자인 박근영 명고수가 함께 호흡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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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115)조개는 잡아서 젓 저리구 가는 님 잡아서 정 들이자 바람새 좋다고 돛 달지 마 몽금이 개암포 들러만 가소. 그리든 우리 님 꿈에서 보고 꿈 깨어 섭섭해 나 못살겠네. 알상에 좋은 건 풍악인데 절굿대 춤으로 놀아 볼까. 식전 아침에 가시는 각시는 이슬 지워 어찌 나가노. 네 오려무나 네 오려무나 날 볼랴거든 내 오려무나. 작품감상 이별한 임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내용을 시대상에 담아내고, 처연하고 처절한 느낌을 주는 선율은 길게 불러져서 긴아리랑이다. 첫 사설이 댓구로 이루어져서 더욱 애처롭게 각인된다. 꿈에서나 만나는 님, 보고 싶어 못살겠네 내마음 나도 몰라 춤이라도 추어보지만 날이 갈수록 죽으면 죽었지 죽어도 못잊겠네 어서 그대가 오시게나 오시게나 날 보러 어서 내게로 오시게나 아리랑 중에서 가장 길고 느리게, 낮은음에서 최고음으로 불리고, '중모리장단'으로 길고 느리게 내뻗는 유장함이 특징이다. 비장미가 뛰어난 곡태로 '이별가'와 함께 전문 소리꾼들에 의해 다듬어진 음악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 십이잡가를 이수한 경·서도 전문 소리꾼들에 의해 제한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사설과 선율이 아리랑 중에 가장 비장미가 높은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긴아리랑은 전문예인들만의 레파토리로 계승되고 있다. 여섯 수의 긴아리랑을 서체에 변화를 주어 섞어 썼다. 내용의 다름을 글씨에 담아 가락을 실어 보려 한 것이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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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 칠십 서예전을 기대한다.중진 서예가이며 왕성한 활동으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서예가 중 한 분인 한얼 이종선씨가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서예전을 인사동 입구에 있는 전시공간 코트(Kote)에서 11월 17일부터 연다. 이종선 씨는 국악신문에〔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을 매주 한편 씩 2년이 넘게 발표하면서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과 아취를 널리 확산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시회를 앞두고 이동식 문화대기자가 이종선 씨를 미리 만나보았다. Q. 오랜만입니다. 일년 만이군요. 지난해 이맘 때 [우리음악사설] 전 이후.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란 이름이 다소 생소한데요? A. 네, 쑥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제가 올해 칠순 고희(古稀)입니다. 나이가 요즘 말로 7학년으로 접어들게 되었기에 그동안 제가 어떤 작업을 어떻게 했는가를 저 자신도 돌아보고 또 서예를 좋아하시는 분들과도 함께 보는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칠십이이’라는 표현은 ‘칠십이구나’ 혹은 ‘칠십일뿐이다’ 등으로 풀 수 있는데 다시 말하면 ‘이제 고희, 칠십인데 어느새 칠십이지만 다만 이제 칠십일뿐이네’ 라는 뜻도 들어가 있습니다. Q. 그럼 어떤 작품들이 선보이는가요? A. 전시되는 작품이 150여 점이 되니 조금 많지요? 저로서는 저의 서예세계의 현재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저의 서예 역정과, 그리고 서예의 이상향을 찾아온 그동안의 노력을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앞으로의 갈 길도 다시 생각해보자는 전시입니다. 말하자면 저의 서예작품의 모든 분야, 여기에는 한글작품과 한문작품 국한문 혼서작품 및 사설작품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Q. 이 선생님은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을 구현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세계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A. 제가 625 전쟁이 막 끝나기 전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다 보니 어릴 때 필재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서예를 배우지 못했다가 한창 인생을 시작하던 청년기에 사업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서예를 만나서 시작했으니 조금 많이 늦었지요. 늦게 시작했지만 여러 선생님들, 특히 소헌 정도준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동아미전에서 초대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서예의 본원이랄까 뿌리랄까, 또 한국인으로서의 서예의 뿌리를 생각하다 보니, 한글의 뿌리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글자형, 흔히 판본체라고 합니다만, 거기에 있다는 자각이 들어 한글서예 작업에 매진하게 되어, 2002년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다만 판본체는 각이 진 엄격한 고딕체인데 이런 정형적인 구도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조형, 새로운 장법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물론 이 작업에 대해 좋다고 하신 분도, 나쁘다고 하신 분도 있지만 그쪽으로 저는 끊임없이 천착을 하다 보니 지금 같이 저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되었지요. 저로서는 이것이 저만의 특징적 예술세계라 하고 싶습니다. Q. 최근 쓰신 "뒷동산 도라지꽃"으로 시작되는 '횡성아리랑' 이란 작품을 보니까 맨 위에는 한글 판본체와 광개토대왕체가 섞여 있으면서 마치 도라지꽃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기대어 피어있는 형상의 느낌이 오고, 그 밑의 사설에는 행서로 간 궁체가 받쳐주고 있어서 변화가 있는데 한글서체도 일정하지는 않은 모양이지요? A. 저의 한글서예는 몇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은 궁체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하여 나온 민체흘림이고요, 훈민정음 원래의 정격 고체, 이것을 제가 자유로운 표현으로 다시 쓴 판본류가 있습니다. 궁체는 여성적인 곡선과 우아함이 특징인데, 저는 여기에 꾸미지 않는 강직한 세로획을 첨가하여 강건함을 표현합니다. 근래의 궁체가 부드러운 곡선에 집착하여 획력이 부족해지는 면을 보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민체흘림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한 후에 한글의 자모음이 갖고 있는 특성을 대입시켜 만든 새로운 획과 조형입니다. 저는 한글서예를 하지만 한문서예, 그 중에서도 안진경의 해서와 행서를 좋아해서 이를 저의 한글서예에 녹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진경은 강직한 분으로 그의 일생도 등락을 거듭했는데, 서예가로서 안진경은 그때까지 유행하던 왕희지의 부드럽고 우아한 서체에서 남성적이고 강건한 서체로 흐름을 바꿔놓아 사람들이 그의 서체에는 힘줄이 있다고 할 정도로 남성적이면서 굳건하고 탄탄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요소들을 한글민체에 담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바탕위에 대소, 강약의 변화와 판본류인 한문고체에서 보여주는 자유로운 장법을 적용해 한글흘림의 영역을 확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체라고 부르는 판본체의 글씨 영역이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엄격한 형태를 많이 연습을 했고, 특히 한글고체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호태왕비, 즉 광개토대왕비를 제가 좋아했기에, 그러한 질박미(質朴美)와 호방함을 나름 구현해냈습니다. Q. 한글서예의 표현세계가 엄청 넓어졌다는 말이군요 A. 네, 저는 우리 한글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각합니다. 한자는 네모라는 틀에 맞추어 쓰고 있기에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에 맞춰 쓰고, 그 영향으로 우리 한글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쓰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틀을 부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의미전달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한자(漢字)건 한글이건 한 자 한 자의 크기도 뜻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장에서의 의미전달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나 필법이 꼭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내려 긋는 선도 말하자면 꼭 꼬리를 가늘게 빼는 기법을 벗어나서 편하게 마감하지요. 그렇게 하니 우리 한글서예 작품이, 물론 그 안에 한자를 겸용하기도 하지만, 훨씬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격조 있게 다가오고 있지요. 다만 이러한 서체에의 도전은 획들의 사용으로 인해 장력이 충돌이 생길 수 있는데, 위에서 흔들린 것은 밑에서 잡아주고, 좌에서 넘어진 것은 우에서 받쳐주고 있고, 위에서 커진 것은 아래에서 작아지며 전체를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Q. 한자 한문을 모르는 세대가 많아지면서 한글 서예의 의미가 더 커지고 있군요. 그런 분들도 한글의 조형세계가 넓어진 것을 보면 좋아할 것 같습니다만 A. 최근 우리 사회가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개인의 취미를 살리려는 분위기가 형성된 이후에 서예를 찾는 분들이 많아져서 저희는 기쁩니다. 그런 젊은 분들중에는 굳이 어려운 한자 아니라도 한글 서예로 여러 가지 많은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새로운 조형을 추구하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Q. 한글 서예는 외국인들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가요? A. 그동안 한글서예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2019년에 몽골에서 초대전을 크게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작가 5명, 몽골인 작가 8명도 함께 한글서예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월수(越秀)외국어대학에서 한글날을 맞춰 한극과 서예 강좌를 하였고 한글서예 전시회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한국서학회 주최로 한글 서예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Q. 그래도 한자서예가 모든 서예의 바탕 아닙니까? 또 기본으로도 잘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A. 물론입니다. 사실 서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골문, 고문, 금문, 전서 등은 한문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만큼 표현 세계가 깊고 넓은 만큼 공부하는 맛이 나지요. 특히 서예는 단순히 뜻을 전달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 문장 전체를 통해서 서예를 하는 사람의 인격과 격조와 삶의 자세 같은 것을 느끼게 하니 그만큼 멋진 예술이지요. 한자 서예를 오래 연마하면 글씨와 사람이 하나가 되지요.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면 사람이 꼭 이런 저런 것을 쓴다는 느낌도 넘어서야 진정한 서예가 된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반드시 마음으로 하여금 붓을 잊게 하고, 손으로 하여금 글씨를 잊게 하여,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면 글씨에는 쓸데없는 생각이 없어진다.” Q. 지난 번에도 궁금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컴퓨터로 깨끗하고 정제된 글씨체를 모두 재현함으로써 컴퓨터 키보드가 붓을 대신하는 세상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만? A. 단순히 글자만을 추구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서예는 그것이 아니지요.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나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고 곧게 뻗어 오르는 대나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심산유곡에서 잔잔하고 맑은 향기를 발산하는 난초처럼 서예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선인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예야말로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우리들의 심성(心性)과 덕성(德性)을 개발해 능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초등학교에서부터 서예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고 인격 수양을 하는 중요한 과정인 서예를 가르치지 않으니 최근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저는 생각합니다. Q. 이 선생님의 한자서예 세계도 워낙 다양하고 광대하다는 평이 있어서, 이번 전시회에 어떤 작품이 보여질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A. 네 지난 시간 저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작업해서 이룬 것도 없지는 않지만 서예라는것은 끝이 없는 길이지요. 아직도 해야 할 일, 가야할 길이 많고도 길다는 뜻입니다. 고희라고 하지만 서예는 더 많은 변화와 신 개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다만 칠십일 뿐이다’라는 뜻의 전시회 제목을 사실, ‘이제 겨우 칠십일 뿐이다’ 라는 말로 바꿔서, 더 많은 변화를 추구하는 전환점으로 삼고 싶어서 저의 서예의 역정을 되돌아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Q. 이번 전시회에 동문, 후배들의 작품도 나온다고 하지요? A. 제가 소헌 정도준 선생께 배웠고 저와 같이 동문 수학하면서 동고동락한 친구 겸 후배들이 ‘오거서루(五車書樓)’ 회를 만들어 같이 또는 개별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작품 하고요, 그동안 서로 방문 교류를 해 온 중국 소흥(紹興, 샤오싱)의 난정서법가협회 회원 5명이 축하의 작품을 보내주셨습니다. 어쨌든 고희전인데 마침 이분들도 전시장에 오셔서 고희연을 열어주신다고 하니 저로서야 영광이지요. Q. 이번에 전시하는 곳이 코트라는 곳인데 좀 생소한 장소군요? A. 인사동의 남쪽 입구인데 서울이 재개발로 옛모습을 다 잃어가는 상황에서 여기는 서울 종로의 근대의 역사가 남아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여기 젊은 여사장님이 이런 역사적인 공간을 예술의 메카로 지켜내려고 많이 노력하는 분이고요. 그래서 이곳 넓은 공간을 쓰게 되었습니다. 와 보시면 아니 서울에 이런 공간이 남아있단 말인가 하며 놀라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넓은 공간에서 서예의 역사를 함께 보는 것이지요. 전시는 17일에 시작해서 25일까지입니다. 많이 와 보시길 바랍니다. Q. 다시 긴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시회의 성공을 빌겠습니다. A. 네 감사합니다. 꼭 와서 보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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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3색, 장원 수상자들..... 오늘과 내일을 말하다전국 단위 경연대회에서 '장원’이라는 타이틀은 국악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이다. 아무나 도달할 수는 없지만, 해마다 새롭게 누군가는 이 자리를 차지한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온, 올해 최고의 영예를 얻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명인·명창의 오늘과 내일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2개 지역의 주요 전국대회와 1개의 차세대 국악경연대회 총 3개 대회를 선정하여, 그 장원자들을 인터뷰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각각 다른 연령대를 보이고 있어, 각각 다른 세대의 예인으로서 가지는 고민과 꿈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허정승 명창(제49회 대한민국춘향국악대전 명인부(판소리) 대상), 박현영 명창(제48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명인부(판소리) 장원), 소리꾼 이성현씨(제32회 KBS국악대경연 종합대상)와 각각 인터뷰를 진행했다. 스승 안숙선 국창의 올곧은 길 따르고파 허정승 명창(만41세) 국립남도국악원 성악단 악장 한양대 음악대학 국악과 겸임교수 *어머니 권유로 12세 판소리 입문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졸업(예술사, 판소리 전공) *안숙선, 안애란, 김순자, 조주선 명창 사사 *김소희제 흥보가 완창(2010) *국립국악원 국악경연대회(현. 온나라 국악경연대회) 성악부 금상 *제29회 임방울국악제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준우수상(2021) *제49회 대한민국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 대상(2022,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 Q. ‘춘향국악대전 대상’ 수상은 어떤 의미였나요? A.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소리를 시작했는데요, 이번에 이렇게 큰 상을 받고 나서는 그 동안 걸어왔던 길에서 새로운 출발점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상을 타고 나니 제 이름 뒤에 붙는 ‘명창’이라는 무게가 엄청난 부담감으로 오더라고요. 예전에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소리를 했다면, 이제는 ‘명창’에 걸맞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크게 다가오죠.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마음가짐으로 소리를 대하고 있습니다. Q. 대상으로 이미 실력을 인정받으셨는데, 어떤 부족함을 느끼시는 건가요? A. 제 스승이신 국창 안숙선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소리가 어렵다.”고요. 이 상을 타고 나서 그 말씀이 점점 실감이 나는 것이, 예전에 했던 대목을 지금 다시 하면, 그 안에 내재된 의미나 정확한 목의 꾸밈음 같은 것이 새롭게 다가오면서, 예전에 몰랐던 것을, 할 때마다 새롭게 느끼게 되요. 각 대목마다 의미를 부여해서 불러야만 관객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어렵고요. 결국 연습밖에 없죠. 혼자 연습하지만, 그래도 스승의 그늘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뭔가 막히면, 늘 스승님께(안숙선 국창) 여쭤 봐요. 그러면, 선생님께서 웃으세요. 당신께서도 경험하셨던 거죠. "너도 느낄 때가 됐구나.” 말씀하시면서, 자세히 알려주세요. 배경 지식이나, 목의 쓰임이나, 필요한 부분들. 예전에 몰랐던 것들을 좀 더 세밀하게 알게 되죠. 어려울 때는 정말 어려운데, 소리하고 있을 때는 행복하고, 즐겁고, 가사나 배경 생각하면 슬프고, 기쁠 때도 있고요. 소리를 하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느끼는 것 같아요. Q. 춘향국악대전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A. 안숙선 선생님께서 이 대회 13회 대통령상 수상자세요. 저는 늘 ‘선생님의 길을 따라서 상을 타겠다.’는 막연한 꿈을 늘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10년 이상 직장생활(국립남도국악원 성악단 악장) 하면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일상에 젖어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또 다른 제 꿈이 대학에서 소리를 가르치는 것이었거든요. 아내도 제게 ‘꿈을 향해 좀 더 적극적으로 준비했으면 좋겠다.’라고 지지해줬고요. 그래서 ‘다시 시작해야겠다.’ 라는 결심이 섰죠. 근처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음악교육과에 진학해서 2018년도에 졸업했어요. 꿈을 향해 달려가야겠다는 생각도 더 들기 시작했어요. 이곳 국립남도국악원 주요 기능 중의 하나가 교원직무연수, 공무원연수 등을 담당하는데, 제가 이론이나 여러 가지로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해서 양질의 교육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양대 박사과정으로 입학했어요.(2019) 그 때 조주선 교수님을 만났는데, 교수님께서 제 소리에 대한 장단점을 잘 파악해주시고, 지도해주셔서 소리꾼으로서 제게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그리고 국악경연대회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죠. 직장생활 하면서 준비하는 것이라, 연습은 일과 후에, 국악원 내에 있는 타악기 전공하는 단원에게 부탁해서 그 단원과 함께 매일 한바탕씩, 최소 2시간 정도씩은 했어요. 전주대사습, 임방울, 춘향제 3대 대회를 2020년부터 지원했어요. 2020년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본선 3등 했고요. 한 해에는 예선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고요.(2021 임방울국악제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준우수상) Q. 경연대회 과정(춘향국악대전)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A. 예선 끝나고 본선을 위한 번호표를 뽑는 순서를 정하는데, 제가 마지막 순서가 됐어요. 순서가 뒤로 갈수록 곡에 대한 선택권이 줄어들거든요. 그 때, ‘어떤 대목이든 내가 잘하면 된다. 최선을 다해서 무대를 불사르자.’는 마음으로 임했죠. 제 자신에게 더 집중하려고 마음을 다진 것 같아요. Q. 대상 수상 이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A.국악원에서도 많이 기뻐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제가 악장(국립남도국악원 성악단)이라서 국악원 상설공연, 특별공연 기획·공연하고, 단원 개인 성향도 파악하고, 대학에서 수업도(한양대 국악과 겸임교수) 하고요. 여러 가지로 정신없이 바쁩니다. Q. 대상 수상 이후, 국악인으로서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A. 명창, 대통령상 이라는 타이틀이 생겨서 부담감, 책임감도 상당히 크지만, 다른 공연에서도 불러주시고, 심사 기회도 많이 생겨서 황송하고 감사하죠. 최근에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남원의 ‘국악의 성지’에서 열린 ‘대한민국 국악대제’(2022)에 참가했어요. 다른 장원자 분들과 함께, 국창·명창 선생님들 앞에서 민요를 불렀는데, 그 동안 많은 공연을 해왔지만, 너무 큰 어르신들 앞이라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그러면서도, 국악의 역사가 살아 있는 곳에 제가 함께 했다는 것이 너무 영광스러웠어요. 국악인으로서 자부심도 더 커지고요. Q. 내년에 출전할 잠재적 지원자들에 전하는 참가자의 가장 큰 덕목(대상 수상 비결)은 무엇인가요? A.저 같은 경우는, 날마다 한바탕씩 꾸준히 하려고 했어요. 선곡은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결정되기 때문에, 결국 꾸준한 연습밖에 없는 것 같아요.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A.이제는 발표에 집중하려고 해요. 내년부터는 국립국악원 등 단체에서 주최하는 공모사업에 지원해서 더 많은 분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또 저의 선생님(안숙선 국창)께서 이번에 문화재 되셨잖아요(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2022). 전수가 시작되어서, 장기적으로는 선생님께 춘향가 이수 받는 것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 지도자로서의 꿈도 계속해서 준비 중입니다. 특히 조주선 교수님을 만나게 되어서 소리꾼으로서의 제 인생에 너무나 감사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거든요. 작년에 한양대 국악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겸임교수로 수업도 시작했어요. 조교수님처럼 제자에게 진정 필요한 조언을 해주면서, 인간적으로도 살가운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안숙선 선생님이시죠. 제가 16세부터 안선생님께 지도를 받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국창 반열에 오르시고 유명하시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엄청난 노력을 하셨고, 한 눈 팔지 않으신, 외길 인생을 옆에서 다 봤거든요. 저도 그렇게 올곧게 가고 싶어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그 자리에 계셔서 후배들에게 굳건하게 버팀목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Q. 국창 안숙선 선생님 지도를 받으시면서 기억에 남는 말씀은 어떤 것인가요? A.제가 진도(전남)에 있다 보니 굿, 민요를 많이 하는데, 판소리와 민요 창법이 다르거든요. 어렸을 때(약 10년 전)는 구분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질문을 드렸어요. "선생님, 판소리랑 민요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라고 여쭤봤는데, 선생님 말씀하시기를 "판소리는 씹어서 하고, 민요는 밀어서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때, ‘아!’하고 뒤통수가 얻어맞는 것 같은 감동을 받은 기억이 있어요. 명쾌하면서도 깊은 뜻이 그 안에 다 있더라고요. 그리고 이제 제 생각을 덧붙이면, ‘굿은 눌러서’ 하고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선생님은 제 소리꾼 인생의 스승이자 목표에요. 소리는 나 자신과의 싸움, 늘 겸손한 소리꾼 될 것 박현영 명창(만34세)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원 *중1 때(14세) 아버지 권유로 판소리 시작.(사람들, 노래 부르는 것 좋아해서) *전북대 한국음악학과 졸업 *스승 : 김일구, 김영자 명창 사사 *정광수제‘수궁가’ 완창(2009) *제17회 완산국악대제전 판소리 일반부 대상(2012) *제39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 차상(2013) *제46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부 명창부 차상(2등, 2020) *제48회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부 판소리 부문 장원(2022, ‘적벽가 중 조자룡 활 쏘는 대목’) Q.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명창부 장원’은 어떤 의미인가요? A.대통령상을 받으면, 학교로 치면 졸업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했는데요, 막상 타고 보니, 졸업이 아니라, 제대로 소리 길에 입문한 듯한, 처음 시작한 느낌이더라고요. 상의 무게감, 책임감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공연하면, 관객 분들께 제가 좋아하는 소리를 했는데, 상을 타고 나니, ‘나만 만족하는 공연이 아니라, 관객 분들도 만족시키는, 제대로 된 소리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상을 탈 때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어서, 벅찬 감정들도 올라오고, 이른 나이에 탄 것 같아서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고요. 그 때 소감으로 ‘겸손한 소리꾼이 되겠다.’고 말했는데, 그것만큼은 제 소리꾼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이에요. Q. 올해 출전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A. 3번째 도전이었어요. 첫 번째는 2등 차상(2020), 두 번째는 가사 실수를 해서 3등(2021)을 했어요. 이른 나이에 도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막연한 생각에, 이런 큰 대회를 준비하면, 더 연습하게 되고, 그 기회에 공부하고자 해서 도전했어요. 빨리 경험 쌓아서 경력을 만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도전하게 됐어요. 김영자, 김일구 선생님 지도도 받았고요. 두 번째 대회 때, 가사 실수하는 바람에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와서, 연습 부족이라 판단하고, 대회 끝나고 마음 추스르고 바로 도전했어요. 다른 대회 준비 안하고요. Q. 중간에 힘들 때는 없으셨나요? A.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제 자신과의 싸움이었던 것 같아요.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일상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날씨 좋을 때, 꽃놀이 못가고, 여름에 물놀이 못가고, 직장(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퇴근 후에, 연습하고, 저녁 먹고 집에서 가사 생각하면서 연습하고, 연습시간은 하루 평균 3-4시간 정도였던 것 같아요. Q. 대회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A. 코로나 격리 1주일 후에 예선을 치렀어요. 목 상태가 말이 아니었죠. 후유증이 남아 있더라고요. 본선 때도 작년 보다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그래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임한 것 같아요. Q. 모교 한국전통문화고(전주)에 장학금을 기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A. 의미 있게 상금을 쓰고 싶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가장 생각난 것이 고등학교 때, 한창 놀 시기인데, 그 때 선생님들께서 저를 잡아주시지 않았다면, 소리 안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저도 학창시절 어렵게 소리 공부를 해서, 재능을 가진 후배들에게 경제적으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서 결정하게 됐습니다. Q. 대회 장원에 오르신 이후, 어떤 점들이 달라졌나요? A. 수상 당시에 국악단 단원 분들, 좋으신 선배님들, 주위 분들께서 많이 축하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전주세계소리축제, 전주독서대전개막공연 등에서도 공연하고, 전주MBC 인터뷰도 했지만, 제 일상이 특별하게 달라진 것은 없어요. 단원으로 다시 돌아와서 작품 활동 꾸준히 했죠. 저는 판소리 보다는 창극 같은 작품으로 주로 공연했어요. 극단 상설공연도 있고, 1년1회 정기공연, 기획공연 등에 참여하거든요. 전주는 소리의 고장이라 다른 지역에 비해 공연도 많아요. Q. 국악인으로서 느꼈던 보람은 무엇이었나요? A. 국악원에서 파키스탄으로 해외 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국악 관현악단과 함께 공연하는데, 현지 관객 분들이 너무나 크게 환호하고, 격하다 싶을 정도로 즐기시는 거예요. 상당히 놀랍고 신기했는데, 그 때, ‘국악이 진부하고 그런 느낌의 음악만은 아니구나. 민족을 초월해서 공감할 수 있는 뭔가가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어요. Q. 국악의 맛은 무엇이고, 소리꾼으로서 그 맛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A. 국악의 맛이요... 단기간에 알기는 쉽지 않지만, 판소리 사설에 있는 말의 맛을 알게 되면, 굉장히 재미있거든요. 한자로 되어있는 사설들이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해석하거나 풀이해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요소가 있어요. 대부분이 그런데, ‘춘향가’ 한 대목 사설 중에, ‘금강산 상상봉이 평지가 되거든 오시랴오.’라는 구절이 있어요. 춘향이가 이별 할 때, 바닥을 긁으면서 오열하는 장면인데요, 금강산 가장 높은 봉우리가 평지가 되는 것은 현실에서 도저히 불가능하잖아요. 결국 다시 만날 수 없는 애통함을 담은 거예요. 춘향이의 간절함과 애통함이 그대로 표현되는 구절이죠. 그런 사설들의 말맛에서 느껴지는 재미가 있어요. 대중 분들이 바로 소화하기에는 힘들 수 있지만, 그것을 돕는 것이 소리꾼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보통 ‘이면에 맞게 소리를 한다.’고 하잖아요. 그 내면의 뜻을 잘 살려서 소리를 전달하려고 늘 노력해요. Q. 내년에 출전할 잠재적 지원자들에 전하는 참가자의 가장 큰 덕목(대상 수상 비결)은 무엇인가요? A. 우선은 제 나이 또래보다는 후배에게 말하고 싶어요. "무서워하면 안 된다.” 도전조차 못하게 되니까요. 주위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경험을 먼저 해보라. 그래야 실패도 하고, 그 실패가 쌓여서 밑거름이 된다.”고 말해요. 결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공부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으면 좋겠어요.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A. 소리꾼의 길을 걷게 됐으니까,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완창무대(수궁가를 우선) 많이 갖고, 많은 분들 찾아뵙고 싶어요. 11월 13일 전주대사습놀이 주최로 ‘전주대사습뎐’ 공연이 국립극장에서 있어요. 다른 분야 장원자 분들과 함께 무대에 서게 되는데, 저는 입체창에 참여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제가 있는 창극단 송년 음악회도 준비 중이에요. 내년에는 음반도 내고 싶고, 다른 분야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도전하고도 싶어요. 밥 먹듯 숨 쉬듯, 소리는 나의 삶 이성현 소리꾼(만 27세) 남원시립국악단 창악부 단원 *어린이집 민요수업 후, 판소리 시작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연희예술전공 졸업, 동대학원 석사수료. *스승 : 조상현, 유미리, 한승석, 한계명 명창 사사 *흥보가(2002), 춘향가(2013), 수궁가(2017), 심청가(2020) 완창 *제35회 온나라국악경연대회 판소리부문 금상(2015) *제30,31회 KBS국악대경연 성악 차상(2015, 2016) *제21회 공주박동진판소리명창명고대회 명창부 최우수상(2021) *제32회 KBS국악대경연 대상(성악부문, ‘춘향가 중 박석치 대목’)(2022년) Q. KBS국악대경연 차상만 2회 수상 후에, 올해 대상을 수상하신 소회가 어떠신가요? A. 대상 수상은 진짜로 풀리지 않던 숙제가 풀린 느낌이랄까요. 계속 도전하던 관문을 통화한 느낌이에요. 국악인으로서 의미도 크고요. KBS국악대경연은 큰 대회이고, 어릴 때부터 더 욕심이 났던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제가 판소리 하는데, 가장 큰 지원자이시기 때문에, 늘 감사한데, 무대에서 대상 타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효도한 것 같아서 기쁘기도 해요. Q. 경연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A. 5번째 도전이었어요. 2015년도에 첫 번째 도전에서 운 좋게 2등, 그 다음해도 2등. 이후 2번 더 지원했는데, 예선에서 탈락했어요. 이후에는 마음을 내려놓고 도전했죠. 특별히 더 열심히 한 것 없이, 평소 하던 대로 연습했고, 컨디션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한달 전부터 술 전혀 안 먹고, 목도 무리해서 연습하지 않도록. 하루 1-2시간 정도 연습하고, 결선 당일에도 간단하게 1시간 정도 목을 풀고, 잘 나올 수 있는 컨디션으로 실전에 임했어요. Q. 대상 수상 이후 달라진 점은 어떤 것인가요? A. 크게 일상의 변화는 없고요. 주위에서 축하 많이 해주세요. 조상현 선생님께서 가장 먼저 축하한다고 전해주셨어요. 제게 거시는 기대가 남다르셨는데, 배운 것을 수상으로 보답해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수상 당시 수상 소감에 미처 말씀 드리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는데, 스승님께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해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11월 14일 국악방송 ‘바투의 상사디야’에 출연할 예정입니다. Q. 상금을 모교(중앙대 전통예술학부)에 전액 기탁하기로 결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 상금을 의미 있게 쓰고 싶었어요. 저도 국악 하면서 학교 다니는 것이, 상황이 집안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거든요. 국악 공부하는, 집안사정 어려운 친구나 후배들이 공연 하거나 배우거나 준비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지도교수님께 뜻을 전해드렸고요, 조만간에 절차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Q. 수상 이후 어떻게 지나셨나요? A. 현재 남원시립국악단 단원으로 근무 중이거든요. 단원으로서 충실히 활동 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완창무대도 준비하고 있어요. 내년에 국악단 통해서 창극 무대로도 찾아뵐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여기 악장님(임현빈 명창)께서 이번 경연 때, 북을 쳐주셨어요. 제가 먼저 부탁드렸는데, 흔쾌히 응해주셨어요. 결선 선곡도 악장님께서 도와주셨고요. 여러 가지로 큰 도움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커요. 전부터 존경하고, 소리꾼으로서 보고 배우고 싶은 분이라서 이곳(남원시립국악단)에 온 이유도 있어요. Q. 국악인으로서 느끼는 보람은 무엇인가요? A. 무대에서 제가 소리했을 때, 관객 분들 좋아하실 때, 가장 큰 보람 느끼고 ‘소리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 들죠. 초등학생 때, 재능기부로 병원이나 노인정 같은 곳에 공연을 종종 갔어요. 특히 병원 환자분들은 크게 웃을 일이 없으시잖아요. 그런데, 제 소리 들으시고 울기도 하시고, 웃기도 하시는 것 보면서, 저도 큰 감동 받고,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어요. Q. 어린 나이(7세, 18세)에 판소리 완창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요? A.소리를 하면서, ‘완창’이라는 것이 큰 도전이랄까?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완창을 준비하면서 실력도 늘고, 해내면, ‘해냈다’라는 생각으로 한계를 극복하면서, 도전의 의미가 컸어요. 소리를 배우면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Q. 어릴 때 소리를 시작하셔서, 힘들 때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A.힘들 때, 이겨 냈다기 보다는 그냥 밥 먹듯이, 숨 쉬듯이 소리를 했던 것 같아요. 힘들다고 느낄 때는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밥 먹듯이, 숨 쉬듯이 하는 일이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죠. Q. 내년에 출전할 잠재적 지원자들에 전하는 참가자의 가장 큰 덕목(대상 수상 비결)은 무엇인가요? A.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컨디션 관리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예선은 짧게 들으니까, 시간 계산을 정확히 해서, 그 시간 안에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거죠. 고음, 저음 등 모두 보여드려야 하니까요. 주어진 시간이 조금 긴 본선의 경우에는, 소리의 이면이나 깊이를 보여주면서, 정해진 시간 안에 자신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A. 단기적으로는 완창을 준비하는 것이에요. 적벽가를 제외하고 완창 하기는 했지만, 춘향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다시 준비 중입니다. 장기적으로는 꾸준히 소리 공부하고, 나중에, 전국 명창 대회에서 대통령상 받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리꾼이 됐으면 좋겠어요. 판소리 외에 다른 장르도 좋아하지만, 주어진 것만 차근차근 해나가는 편이라서 일단 준비한 무대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려고 합니다. 허정승 명창은 학창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목포와 진도를 지켜오며, 묵묵히 우리 소리의 맥을 지켜왔다. 또한 교육자로서, 악단의 수장으로서 국악 교육과 대중화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며 자신만의 전통문화에 대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었다. 스승 안숙선 국창에 대한 평생에 걸친 존경은 그의 소리꾼으로서의 겸양과 열정의 반증이기도 하다. 박현영 명창은 ‘소리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과정’이라고 했다. 그의 소리의 연마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을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른 나이에 명창에 올라 그 실력을 증명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명창의 무게감을 더 크게 여기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은, 그가 이미 겸손한 소리꾼임을 말해준다. 소리꾼 이성현씨는 어린 나이에 소리를 시작하고, 천재성을 발휘하면서도 꾸준히 한 길을 걸어온 젊은 소리꾼이다. 그의 천재성은 이제는 부단한 노력과 더해져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숨 쉬듯, 밥 먹듯이’ 소리해왔다는 그의 말에서 그가 얼마나 소리와 자신을 하나로 여기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은 40, 30, 20대 예인으로서 각자의 고민과 꿈을 가지고 왔지만, 자신의 목표를 위해 부단히 달려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제 또 다른 시작 앞에서 앞으로의 활동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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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운, 미주 최초 판소리 '심청가' 완창22일 미주 최초 판소리 심청가' 완창발표회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할리우드에 위치한 반스달 극장(Barnsdall Theater, 4800 Hollywood Boulevard, Los Angeles, California 90027)에서 성황리에 성료되었다. 공연은 총 3부로 나누어져 제1부는 곽씨부인 어진행실-부친하직, 제2부는 범피중류-추월만정, 제3부는 탄식-눈뜨는 대목으로 구성되었다. 각 막에서 특별공연으로 제2부에서 김향란의 가야금 연주 '수성반주', 제3부 특별공연으로 춤꾼 이지호의 '살풀이' 망사대 무대가 선사되었다. 고수는 국립창극단 기악부 조용수 악장이 맡았다. 소리꾼 서연운(1972년생, 전주)은 10살부터 판소리 공부를 시작하였고 전북 무형문화재 ‘심청가’ 명예보유자 이일주 명창으로부터 심청가와 춘향가를 사사받고 최근에는 장문희 명창으로부터 심청가를 사사받아 이 자리에 섰다. 소리와 인연을 맺은지 40년이나 흘렀지만 오늘까지 미국 동포사회에서 판소리를 계속 공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소리 인생을 살아야하는 운명을 짊어진 그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장문희 스승을 모시고 이번 완창발표회를 준비했다. 이일주 명인은 "2000년 초 미국 유학을 떠난 제자가 오늘날 미주에서 판소리를 알리고 있다. 동초제에서 인정받는 전공자가 보유자 입석하에 진행되는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정식 완창 발표라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며 "이번 발표회가 미국에서 완창의 신호탄이길 간절히 바라고 이번 공연이 우리 판소리를 더욱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라고 강조했다. 미주 동포사회에서 국악을 향유하는 관계자는 "이번 공연은 전통 판소리의 뿌리를 계승하는 서연운의 첫 번째 완창발표회로, 동초제 판소리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귀한 무대로 기억된다"고 전했다.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서연운 소리꾼은 "특히 이번 발표회 준비를 위해서 멀리 서울에서 장문희 선생이 와 주셨습니다. 어린시절 이일주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심청가 전바탕을 오랜 시간 동안 미국이라는 곳에서 가르침 받을 스승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저에게 다시 한번 동초제 심청가를 올바르게 다듬어 주고 잡아주신 장문희 명창, 언제나 소리 북장단으로 제 소리에 힘을 실어주시는 국내 최고의 조용수 명고수, 그리고 누구보다도 동초제 판소리 거목 이일주 선생님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의 말씀드린다."라고 전했다. 미주예술원 '다루' 박창규 이사장은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판소리 심청가 완창 발표회 축하드립니다. 진정한 판소리를 감상하고자 하시는 분들께 오늘이 바로, 심청가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날임을 자부합니다. 2003년, 미국에 건너와 현재까지 미주에 판소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서연운 선생님의 노력과 헌신으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고 큰 성과를 이루었으며 오늘 드디어 개인의 완창발표회를 하게 되어서 진심으로 기쁜 날입니다."라고 전했다.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장문희 선생은 "문화가 다른 미주에서 우리 소리를 널리 알리고자 힘쓰시는 많은 국악 동호인과 관계자 분들의 노고에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오늘 미주 최초 판소리 완창무대를 준비하는....소리, 성음, 너름새 그 자체 만으로 소리꾼의 예술적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줘야 하는 이 무대... 용감하게 도전한 그녀의 땀과 눈물이 얼마나 많이 녹아있을지 또한 귀추가 주목될 대목입니다. 오늘 이 무대는 동초제 판소리를 통해 우리 전통음악의 예술성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라고 조심스럽게 전했다. '동초제'는 동초(東超) 김연수(1907~1974)명창이 1930년 초 당시 5명창 송만갑, 유성준, 정정렬 선생 등에게 배운 소리를 다시 이면에 맞게 사설과 소리를 재구성하여 '동초'라는 자신의 호를 붙임으로서 ‘동초제’라는 새로운 소릿제가 탄생한 것이다. 전승력이 강한 판소리로 자리매김한 동초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예능보유자 고 김연수 선생이 창시한 유파이다. 특히 동초제 예술적 특성은 동편제의 우람함과 서편제의 아련함을 조화한 소리에 있다. 가사와 문학성을 중시하여 사설과 가사 전달이 정확하고 너름새(발림)가 정교하여, 부침새(장단)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동초 김연수는 판소리 노랫말 정리에도 힘써 ‘창극 판소리’라는 창법으로 판소리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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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아도위 창립 1주년 기념, 학술토론회를 뒤돌아보며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도시마다 역사, 문화, 특색, 성향, 위치, 경험, 기억 등에 의해 그 도시만의 색깔과 이미지가 있다. 이러한 공간에서 수백 년, 수천 년의 삶을 영위해 온 사람들이 유무형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지역이나 도시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2012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2015년 12월 경북 문경시가 ‘문경,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아리랑도시 문경’을 선포하였다. 이에 발맞춰 2017년 6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순수 민간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이하 아도위)를 창립하여 아리랑의 연구, 발굴, 보존, 전승, 홍보, 교육, 공연을 통해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며 아리랑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지금까지 활동해 왔다. 아도위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면서 지난 2018년 7월 30일 ‘문경새재아리랑 정체성과 위상 정립’이란 주제로 ‘아도위 창립 1주년 기념, 제1회 학술토론회’를 개최한 바가 있다. 그 이후 4년여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문경새재아리랑 부르기 운동',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기준악보 제정’ 참여, ‘팔도 및 디아스포라 아리랑제’에 주도적 참여, ‘서울아리랑페스티벌’참가 ‘전국 아리랑전승지역답사 탐방’,‘코로나아리랑 창작 및 발표회 개최’ 등 의미 있는성과도 있었지만, 대내외적 요인으로 아직은 미흡하고 할 일도 많다. 그래서 문경새재아리랑이 5천만 모든 국민이 알고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꿈꾸며 4년 전 처음으로 개최하였던 학술토론회 때 가졌던 꿈과 희망이 퇴색되지 않게 분발하고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래 기술하는 2018년 학술발표회 때 필자가 한 인사말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던 대로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헌신적인 42명의 아도위 위원님들과 함께 초심을 유지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문경새재아리랑의 새역사를 쓰겠다는 각오를 다져 본다 . 인사말 이번 아도위 창립 1주년을 맞아 지난 일 년을 뒤돌아보며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찾던 중 ‘아리랑도시 문경’이 올해 ‘세계아리랑제’를 계획하고 있음에 즈음하여 ‘문경새재아리랑 정체성과 위상 정립’이란 주제로 ‘제1회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의미 있는 날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함께 자리해주신 내외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발표하고 토론할 세부 주제는 ‘문경새재아리랑 정체성과 위상의 재발견’과 ‘축제를 통한 문경새재아리랑의 정체성과 위상 정립’입니다. 주제발표자, 지정토론자, 질의응답에 참여하시는 시민들께서는 아리랑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과 적극적인 참여로 토론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번 학술토론회에서 전문가가 발표하고 토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리랑의 주인이신 시민 여러분께서 발언하시는 자유토론을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생활 속에서 보고 느낀 바를 특히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고 아리랑제에 대한 실현 가능한 의견과 조언을 아끼지 마시고 제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저는 이번 기회에 문경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성공한 축제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옛길이 많아 ‘길의 고장 문경’이 될 수도 있고 근대 아리랑의 뿌리로 ‘아리랑도시 문경’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축제는 당연히 축제마다 특성과 목적이 있고 축제의 성공을 위해서는 보편성과 특이성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리랑도시 문경’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문경새재아리랑제’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이라는 보편성과 ‘근대 아리랑의 시원’으로서 문경새재아리랑이 부각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토속민요인 ‘문경새재소리’의 존재와 그 소리가 경복궁 중수 시 한양으로 올라가 경기권에 유행하여 1896년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H.B. Hulbert)박사가 영문 잡지 코리안 레포지토리 (‘Korean Repository’)에 실은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 나간다.’라는 사설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리랑 채보 기록과 아리랑을 서양에 알리게 된 역사적인 사실에 이어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 영화 주제곡인 본조아리랑으로 이어지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65년부터 7년간 경복궁 중수 시 한양 간 토속민요 ‘문경새재소리’가 문경으로 다시 돌아와 향토민요 아리랑으로 분류되는 ‘문경새재소리 아리랑’이 되고, 다시 통속 민요라고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으로 된 변천 과정을 겪는 것과 1930년 대구 출신 국문학자 이재욱이 쓴 ‘영남전래민요집’ 의한 ‘경북아리랑’으로 지칭한 ‘문경아리랑’의 존재와 진도아리랑에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라는 사설이 있는 것 등으로 인해 근대아리랑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이 문경이라는 지역성을 넘어 확장성을 보인 것은 주목해야 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아리랑고개'는 아리랑과 고개의 합성명사이고 위에 기술한 영남전래민요집은 물론이고 1896년 발표된 헐버트아리랑과 1911∼1912년 일제강점기 총독부 조사 자료에 근거해서 아리랑 고개는 바로 문경새재이다. 라는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의 문경새재아리랑의 정체성에 관한 "아리랑고개론"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문경만이 가진 특이성을 가지고 차별화된 프로그램으로 문경아리랑의 정체성과 위상을 확립할 수 있는 축제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문경새재아리랑제는 아리랑의 전승과 보급, 전통문화의 계승과 지역문화로서의 정착, 지역민들의 상생, 대동의 장이 되고 아리랑을 통한 문화적 시민 통합으로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등 다기능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문경새재아리랑제’가 소수 아리랑에 관심 있는 주민이나 관광객의 축제로 머무르지 않도록 하고 지역이라는 경계를 넘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축제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자면 팔도 아리랑의 만남과 세계 각국의 교포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이 참여하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 시대에 맞고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하고 단계적 발전과 변화를 통해 모든 것을 수용하고 시행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금년도 추진하려는 ‘세계아리랑제’는 시기상조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의욕만 넘치고 앞서간다는 느낌이 들며 문경시민도 문경새재아리랑을 잘 모르고 대다수 국민도 문경새재아리랑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과 부족한 예산, 추진 주체의 불안정 등의 여건에서 세계아리랑제 개최는 관 주도 전시행정의 표출이라는 비난과 우려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수준까지 전승(무형문화재 지정 등), 보급과 다양한 콘텐츠를 확보 등 나름대로 기반을 조성 후에 추진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면 명실상부한 세계아리랑제는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치고 필요 예산을 확보하여 지금부터 한 3∼5년쯤 후에나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준비할 시간도 짧습니다. 국제 행사를 치를 예산도 부족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시점에서 2018년 제11회 문경새재 아리랑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담긴 제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문경에서 천리나 떨어진 먼 곳 진도, 그 진도 사람들이 부르는 진도아리랑 첫 사설에 왜 문경, 새재, 물박달이란 낱말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요? ‘문경아 새재야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는 이 사설이 전국의 많은 아리랑에서 불리고. 심지어 북한, 해외 아리랑에서까지 불리는 이유는 뭘까요? 이걸 알면 우리 문경새재아리랑의 중요성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아리랑도시'가 아리랑도시답게 되는 그날을 위해 그때그때 유명 인사 몇몇 모셔와 소수 몇 사람들이 여론 수렴 없이 관 주도적이며 비합리적으로 아리랑 정책을 입안 추진함이 아니라 저항·대동·상생이라는 아리랑 3대 정신을 기본으로 아리랑의 주인인 시민들의 목소리를 소중히 생각하고 함께 가는 아리랑도시 문경이 되길 소원하며 오늘 학술토론회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바라본 오늘, ‘아리랑도시 문경’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리랑은 어느 특정인의 것이 아니다. 긴 세월 뿌리를 내린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아리랑을 포함하여 그 지역 정체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더구나 많은 권한을 가진 지방자치단체장이라 하더라도 임기 동안 잠시 그 지역을 대표하고 시정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 뿐, 지역이나 도시의 근본이 되는 문화와 역사의 총체인 정체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수백 년 이 땅의 주인인 민초들이 그들의 삶을 노래한 것이고 그 안에 그들의 혼이 깃들어 있고 문경 지역의 문화로 고체화되어 있다. 그래서 당연히 아리랑은 문경 정체성의 핵심의 한 요소이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문경의 역사이고 문화이고 뿌리라는 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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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완창판소리,유영애의 흥보가-동편제국립극장은 '완창판소리-유영애의 흥보가'를 11월 12일(토)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한다. 고희를 넘긴 관록의 유영애 명창이 동편제 ‘흥보가’를 묵직한 소리로 들려준다. 유영애 명창은 1948년 전라남도 장흥 출생으로, 어린 시절 여성국극단 공연에 감명 받아 소리세계로 뛰어들었다. 목포의 김상용 명창을 찾아 ‘심청가’를 배우며 판소리에 입문했고, 한농선 명창에게 ‘흥보가’를, 성우향․조상현 명창에게는 ‘춘향가’와 ‘심청가’를 각각 배웠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명창을 두루 사사한 유영애 명창은 목이 실하고 소리가 구성지며 중하성에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1970년 호남예술제와 1986년 경주 신라문화제 판소리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데 이어 1988년 남원 춘향제 전국판소리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유 명창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심청가’ 예능보유자로서,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심청가’와 ‘흥보가’ 등 50여 회가 넘는 완창 무대를 펼쳐왔다. 이 외에도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창극단 지도위원․악장․예술감독과 광주시립창극단 예술감독을 4년간 지냈으며, 자신의 이름을 내건 판소리 전수관을 통해 제자 양성에도 힘쓰고 있는 인물이다. 유영애 명창이 들려줄 판소리 ‘흥보가’는 가난하고 착한 흥부와 욕심 많은 놀부의 대비를 통해 권선징악의 교훈을 담아내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큰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운봉·구례·남원·곡성 등 섬진강 동쪽 지역에서 발달한 동편제 ‘흥보가’는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소리 자체를 통성으로 힘 있게 내지르며, 말끝을 분명하고 강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송흥록에게서 송광록-송우룡-송만갑-김정문으로 전승되어온 소리를 박록주 명창이 새로 다듬으며 계승됐다. 사설을 간결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장단의 변화를 통해 골계적 대목의 재미를 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 명창은 박록주 명창의 대표적인 제자이자 국가무형문화재 ‘흥보가’ 예능보유자였던 한농선 명창에게 5년간 ‘흥보가’를 배웠다. 소리에 있어 정확함을 추구했던 한농선 명창은 제자들이 원하는 소리를 구사할 때까지 몇 달에 걸쳐 한두 대목만 가르칠 정도로 엄격하게 연습을 시켰다. 유 명창 역시 꼼꼼한 스승 아래서 치열하게 소리를 익힌 결과, 정확한 성음을 구사하고 우조와 계면조의 구분이 분명해 ‘판소리의 교과서’로 불리고 있다. 유영애 명창은 "판소리의 이면을 제대로 전달하고 다양한 캐릭터를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서는 가장 높은 소리부터 낮은 소리까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일곱 번의 성대 결절을 겪으면서도 계속해서 소리를 연마해왔다”라며 "이번 무대에서는 대마디대장단으로 툭툭 소리를 던지는 듯한 동편제 특유의 무심함 속에서도 ‘흥보 매 맞는 대목’ 등은 애절하게 표현해 차별을 두려 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번 공연은 서울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유 명창의 소리를 접할 귀한 기회다. 고수로는 박근영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며 유영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해설․사회를 맡는다. 국립극장 '완창판소리'는 1984년 시작된 이래, 판소리 한바탕 전체를 감상하며 그 가치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최장수 완창 무대다. 2022년 하반기에도 전통에 대한 정체성을 지키며 소리 내공을 쌓고 있는 최고의 소리꾼이 매달 이 무대를 통해 귀명창과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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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립국악단 "토요 가무악희 '그린국악-시즌3'전남도립국악단이 오는 22일부터 토요 가무악희 ‘그린국악’ 시즌3를 시작한다. 전남도립국악단은 올해부터 공연명과 시간을 바꾸고 '시즌제'를 도입하는 등 실험적 작품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환경 위기라는 전 인류적 화두인 ‘이면(裏面)’을 가무악희(歌舞樂戱·노래,춤,연주,연희)로 그려내기 위해 이번 ‘그린국악’ 시즌3는 보다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 중 ‘이면가락 판소리’ 시리즈는 현대적 감각을 더해 선보인다. 심청가, 수궁가 등 판소리 사설에 소리꾼의 상상과 극적인 음향 연출을 더해 판소리 이면을 그린 작품으로, 이번 '시즌3'에서는 수궁가 ‘좌우나졸 대목’과 심청가 ‘심봉사 눈뜨는 대목’ 등이 공개된다. 전라도 무속음악에서 유래한 민속 기악 합주곡인 전통 '시나위'를 재해석한 ‘이면가락 시나위 합주’ 등 보다 현대적이고 세련미 넘치는 공연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전남도립국악단 류형선 예술감독(총연출)은 "지구 온난화 위기는 문명에 대한 뿌리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고, 자연스럽게 주어진 21세기 존재 방식과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거쳐 ‘새롭게 다시 살기’란 명제에 다다랐다”면서 "도립국악단이 이러한 명제를 품고 그동안 개발해온 새로운 레퍼토리들을 이번 시즌3부터 조금씩 공개할 예정이니 도민 여러분의 많은 관람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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誕生! 남도창 단가 ‘옥주8경가’87세 老歌客 박병훈 선생이 남도창 단가 ‘옥주8경가’로 늦깍기 데뷔(?)를 하여 화제다. 12일 오후 2시 진도향토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개최된 ‘진도아리랑 꽃을 피우다’ 세 번째 무대에서 단가 ‘옥주8경가’를 고수 장필식 선생과 함께 발표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이 ‘옥주8경가’는 유명한 신재효본(本) ‘호남가’ 이후 호남지역 지명과 풍광을 엮어 남도창으로 발표 한 단가로는 첫 작품이다. 또한 전국적으로 한시체로 된 8경가는 허다하지만 현대적인 표현으로 작사, 작창 하여 직접 남도창으로 발표한 것은 이 ‘옥주8경가’가 처음이다. 박병훈 작사 8경은 전체적으로는 진도대교·명량 울돌목·금골기암·용장성·영등신비길·조도 해상공원·관매도 세방낙조남·도석성·쌍계사 등의 진도의 대표 절경을 아홉 대목으로 엮었다. 특히 아리랑연구 권위자답게 마지막 구에서 "옥주8경 구경하고/ 삼보삼락 즐겨 가면서/ 아리랑 속에서 놀다를 가세”라고 하여 흥을 더해준다. 호남가류에서 "어떠한 방역객이 놀고 가기를 즐겨하랴”라거나 "성왕을 뫼시옵고 동복(同福) 낙안(樂安)하러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어서 현실감있는 작사 솜씨를 보였다. 박병훈 작사, 작창 ‘옥주8경가’ 사설은 다음과 같다. 옥주8경 찾어가자/ 진도라 하는 땅은/ 한양 천리길 남국이라 해남에 이르르면 진도대교 다가서니/ 충혼의 넋 파고 되어/ 정유년 명앙대첩 이충무공 호령소리에/ 술래터가 저 있구나 명량천둥 뒤로하고/ 금골기암 들어서니/ 해원사 오층석탑 상굴암 마애불은/ 백제 흔적이 분명하구나 백조래지 바라보며/ 용장성을 올라서니/ 고려왕성 숲이 되어 /소리 없이 잠을 자네 골골마다 노랫소리/ 아리랑을 들어가며 / 명승지 영등축제/ 신비길이 열렸구나 남해절경 바라보며 / 해상공원 찾아가서/ 관매절경을 둘러보고/ 병풍도 백야도에 하늘다리 건너보고 세방낙조 바라보며 남도석성 찾아드니/ 망월대 홍교쌍교 성밖에 결려있으나/ 만호장 호령소리/ 서망백파에 간 곳 없네 운림동에 들어서니 / 상록수림 꿈을 꾸고/ 쌍계사 요라소리/ 학정백운 바라보니/ 남화태지가 여기로구나 옥주8경 구경하고/ 삼보삼락 즐겨 가면서 / 아리랑 속에서 놀다를 가세 발표를 마친 박병훈 선생은 만족감을 들어냈다. "호남가에 진도가 빠진 것이 늘 안타까웠지요. 그래서 명색이 진도문화원장을 지낸 내가 그냥 있을 수 없어 1992년에 이 옥주팔경가를 지었어요. 진도아리랑 부르며 진도 곳곳 구경을 하시라고요. 외지 손님들한테 불러 주기는 했지만, 무대에서 고수 반주로 부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참 나이 들어 발표를 하자니 숨이 차내요.” 만면에 웃음이 기득했다. 아마도 진도아리랑 전승단체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조직하고, 개인적인 아리랑 사설 채록집을 처음으로 발간한 자부심이 배경일 것이다. 한편 축하객으로 참가한 (사)아리랑연합회 한 관계자는 "내년 미수를 맞으시는데, 인류문화유산 아리랑 최고령 전승자로서 예우 차원의 무대를 준비 중입니다. 특히 ‘아리랑인물 씨리즈’ 1호로 나오게 될 ‘인간 진도아리랑박물관 박병훈’의 출판 기념행사도 겸하게 될 것 같습니다.”라고 밝혀 아리랑 전승단체 차원의 미수(米壽)행사가 준비되고 있음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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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형문화유산 제64호, 진도아리랑, 꽃을 피우다전남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진도아리랑보존회가 주관하는 '진도아리랑꽃을 피우다'라는 주제의 행사가 개최된다.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10주년과 전남 무형문화유산 제64호' 진도아리랑'을 진도군민이 자축하는 행사이다. 프로그햄은 1부는 삶의 소리, 2부는 사랑의 소리, 3부는 해탈의 소리, 4부는 흥의 울림으로 구성된다. 천여수가 넘는 진도아리랑의 주제를 4개로 분류해서 가장 많이 애창하는 사설이 소개가 된다. 진도아리랑보존회는 1985년부터 진도아리랑 가사 750여 수를 찾아 '진도아리랑 타령가사집'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였으며(1985년 제1집, 1991년 제2증보판, 1997년 제3증보판 발간), 1995년 8월 15일 ‘진도아리랑비’가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첨철산 남쪽 기슭에 세워질 당시에 앞장서서 추진위원회를 맡고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다. 또한 진도아리랑보존회는 정선, 밀양, 서울, 일본 등 200여 회의 각종 대내외 활동으로 진도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전승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현재 진도아리랑보존회의 회원은 모두 39명으로, 정회원 25명과 준회원 1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진도 민속예술을 실질적으로 대표하여 활동하여 왔으나 1993년 진도군립민속예술단이 창단된 이후부터 활동범위가 점차 축소되고 있는 실태이다. 그러나 이번 전남 무형문화유산 제64호' 진도아리랑'지정을 계기로 진도리랑이 다시 한번 꽃을 피우게 되리라고 본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진도아리랑보존회 박병훈 회장은 "그동안 진도에서 진도아리랑 전승활동과 민속예술활동을 한 선후배들이 진도아리랑 한마당을 준비했다. 신명과 흥으로 진도아리랑을 즐기는 시간을 만들었다"라고 전했다. 진도군 김희수 군수는 "아리랑에는 우리 민족의 삶에 대한 애환이 담겨 있다. 진도아리랑은 자랑스런 남도의 문화유산이며,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이번 공연을 통해 진도아리랑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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