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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1)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왜 남도트로트인가 이제 트로트나 발라드가 아니라 새 장르의 음악을 직조할 것이고 시대를 공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저마다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 그것이다 한국공연문화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손재오 극단갯돌 예술감독이 몇 가지 질의한 게 있어 답한다. 논문 한 편당 독자가 세 명뿐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논문의 심사를 대개 세 명이 맡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심사자 아니면 아예 읽는 이가 없다는 슬픈 고백이라고나 할까. 이를 총괄하는 학술재단의 무능력을 조롱하는 시선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으되 내 전공 혹은 인접 분야들의 경우, 철 지난 강령과 이념에 사로잡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의 차원에서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니 어떤 족쇄들을 만들어 전통이니 문화재니 따위의 항목에 채워두고, 자연스레 일어날 창발을 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어디 세 명만 읽는다는 논문의 문제뿐이며 철 지난 강령에 머물러 있는 학술단체의 일뿐이겠는가. 장차 문화재청을 문화창의청(文化創意廳)으로 바꾸고 기왕의 문화재들을 문화유산이라는 맥락으로 톺아내며 그간의 전통이니 콘텐츠니 하는 담론들을 미래지향적으로 발현시킬 필요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전통(傳統)과 인습(因習)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미스트롯에서 풍류대장, 조선판스타까지남도트로트는 수년 전 내가 만들어 쓴 용어다. 이유가 있다. 이즈음 화두가 되었던 미스트롯이니 풍류대장이니 조선판스타니 하는 노래시합 프로그램을 보면 이 행간을 읽을 수 있다. 미스트롯의 송가인을 필두로 김태연이나 이날치밴드가 승승장구한 이유 말이다. 여기에 풍류대장과 조선판스타라는 프로그램이 또 다른 팬덤을 형성하는 중이다. 모두 국악 혹은 판소리라는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하거나 적어도 매개물로 삼고 있는 현상들이다. 나는 이를 '송가인의 시김새, 남도트로트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본 지면에 소개한 바 있다. 송가인 신드롬의 출처를 베이비부머세대의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분석한 바도 있다. 묻지마라 갑자생에서 오팔년 개띠, 베이비부머세대의 은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회사적 맥락을 송가인이라는 창을 통해 추적해본 것이다. 풍류대장에서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민요, 정가 등 다양한 국악 장르 전공자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것을 국악 전반의 부상이나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따위의 감상으로 접근하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이것은 '시경'의 「풍요」로부터 계승되는 노래(詩)의 본원, 남도의 흥그레타령과 육자배기를 거쳐 국악풍 발라드 김정호와 남도트로트 송가인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읽을 수 있다. 판소리 창법을 가지고 가요계에 진출했던 이들은 한농선, 안향련 등이다. 김정호나 송가인이 가요계에서 판소리를 응용한 사례라면 판소리꾼이 가요계로 뛰어든 1세대라고나 할까. 지금의 풍류대장과 조선판스타에 선행하는 국악계 스타들이다. 하지만 거듭 상고해보면 트로트의 시조라고도 하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조차 본래는 민요가수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보인다. 미세한 분석을 시도해보면 훨씬 다양한 층위의 장르교섭과 창발을 읽어낼 수 있다. 내가 '민요라는 이데올로기'라고 비평한 것도, 엔카와 트로트논쟁 북한민요의 정체라는 이름으로 쓴 글도 이런 일환이다.왜 남도트로트이고 남도발라드인가김정호의 노래 전반이 그렇지만 예컨대 '님'이라는 곡을 들어보면 완전4도 아래로 하강해 떠는 남도선율 특유의 창법이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노래 자체가 사실은 육자배기 선율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 것이다. 김정호의 노래를 범박하게 평할 때 남도 삼음(三音)을 토대로 만든 노래라고들 한다. 나주시립국악단 윤종호 감독은 이것이 남도선율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늘 주장한다. 나는 이 육자배기의 선율을 남도 전통의 흥그레타령으로 끌어올렸고 「향가」의 맥락으로, 다시 '시경'의 「풍요」까지 끌어올렸다. 노래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손재오 감독은 '남도트로트'를 계속해서 추적하고 분석하며 체계화시킬 특별한 방법론이 무엇인가를 질문했다. 내가 다 알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남도라는 로컬을 주목하는 시선과 트로트 창법을 분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보다 디테일한 방법론은 후학들이 승계해나가지 않겠는가. 기본적인 내 시각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가 행하는 예술과 연행의 틀 속에서 이전과 지금 나아가 미래를 찾는 방식이다. 판소리나 민요가 어떻게 승계되고 발화되었는지보다 예컨대 지금의 트로트나 랩 속에 전통적인 것들이 어떻게 스며들어있는지를 추적하는 셈이랄까. 주지하듯이 판소리는 동편제니 중고제니 따위의 전국적인 지평 속에서 남도의 선율 및 어법으로 정착되었다. 시대사적 수요와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나라 잃고 가족 잃고 죽을 지경에 이른 백성들의 심중을 힐링시켜준 처방전이었다고나 할까. 그것이 계면조(界面調)라고 하는 즉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었다고 나는 읽었다. 시대는 변한다. 시대정신도 변한다. 베이비부머 세대까지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면 새로운 세대가 또 주인으로 등장한다. 이제 트로트나 발라드가 아니라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직조할 것이고 그 음악이 시대를 공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저마다의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 그것이다. 이름이 바뀌고 장르가 바뀌어도 흉중의 경계를 넘나드는 계면(界面) 울림의 방식은 영원하다. 나는 남도트로트와 남도발라드라는 이름으로 접근했지만, 미래의 팬덤은 누군가 또 다른 이름으로 작명하지 않겠는가.로컬(Local)로의 전회(轉回)남도트로트는 '남도'로 지칭되는 로컬 미의식을 담아낸 명칭이다. 왜 로컬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들이 있으니 참고 바란다. 지방, 지역, 골목 등의 공간적 범주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문제는 지방분권의 시대, 문화분권의 시대로 호명되는 이 시대를 어떻게 정의하고 대응하느냐는 것이다. 분권자치와는 거꾸로 가는 서울 중심 정책이나 수도권 집중 현상들을 호도하기 위한 레토릭일 뿐인가? 지방이 죽어가고 마을이 없어져 간다고 징징대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온갖 기회요인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데 말이다. 근본적인 변화는 생각의 혁신에서 온다. 내가 로컬로의 전회를 주장하는 이유다. 여기서 말하는 로컬은 중앙 혹은 수도권에 대응하거나 복속되는 개념이 아니다. 중심 심장과 변방 모세혈관이 대등하게 대칭하는 글로뮈론을 주창해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를 낱개의 사례로 풀어 이라 명명하고 본 지면에 연재해왔다. 그 일부를 모아 '남도를 품은 이야기'(다할미디어, 2022)를 펴냈다. 향후 남도트로트에 대해서도 갈무리작업을 할 예정이다. 오랜 세월 행간과 여백에 내뱉은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가신 이들의 푸념이 펄펄 살아 시가 되고 소설이고, 문학이 되고 철학이 되어 사람들에 의해 불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다시 송가인과 김태연의 절절한 수리성, 남도트로트를 듣는다. 미래세대로 올 또 다른 주인공들 그리고 또 다른 장르를 상상한다. 그곳에는 변함없이 배와 가슴 사이를 교섭하며 발끝에서 두성까지 온몸을 전율시키는 공명의 방식이 있다.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인간과 비인간, 서울과 지방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가 필요한 시대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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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문화도시 목포, 목포음악축제 명칭전남 목포시가 오는 9월 열리는 목포음악축제(가칭) 명칭을 오는 25일까지 공모한다고 15일 밝혔다.축제 명칭은 국문, 영문, 기호 등 제한이 없으며, 목포시민이면 누구나 제안할 수 있다.참여방법은 시 홈페이지 공고에서 공모 신청서를 내려받아 작성한 후 방문, 우편, 이메일(bsh100@korea.kr)로 제출하면 된다.시는 역사성과 상징성, 창의성, 적합성 등을 평가해 1등(100만원), 2등(30만원), 3등(20만원)에게 총 150만원의 시상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선정된 명칭은 3월부터 공식 사용된다.시가 올해 처음으로 선보일 목포음악축제(가칭)는 오는 9월 30일부터 10월 3일까지 4일 동안 갓바위 문화타운에서 개최된다.목포는 이난영 여사, 김씨스터즈, 작곡가 손석우, 남진 등 우리나라 가요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대중음악인들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시는 이러한 음악적 자산을 바탕으로 음악축제를 개최해 '음악의 도시'로 나아가겠다는 포부다.목포음악축제(가칭)는 전 국민 누구나 참여하는 전국규모 경연대회를 비롯해 공연, 전시, 체험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될 예정이다.경연대회는 예선, 준결승, 결승으로 구분해 진행되는데 예선은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온ㆍ오프라인으로, 준결승과 결승은 축제장에서 각각 진행된다.최종 상위 5명은 음악감독, 가수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들과 현장의 관람객들의 합산 평가로 선정되며, 시상식은 축제 마지막 날 파이널 공연과 함께 개최된다.이 밖에 재즈공연 무대, 시립예술단체 공연, 목포음악사 전시, 신나는 음악과 산책하듯 즐기는 워킹마라톤(FUN RUN), 음악요가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펼쳐질 예정이다.목포음악축제(가칭)를 짝수해에 격년제로 개최함에 따라 홀수해에 열리는 문학박람회와 연계해 목포에서는 매년 대규모 문화예술행사가 열리게 된다.시 관계자는 15일 "지난해에는 국내 최초로 문학을 주제로 문학박람회를 개최해 '문학의 도시'라는 도시브랜드를 구축했다면 올해는 음악을 주제로 축제를 펼쳐 '음악의 도시'라는 도시브랜드를 확보하겠다"면서 "문학과 음악을 문화예술상품으로 구성해 관광과 산업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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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2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이구동성 송가인의 노래는 특별하다고 한다. 트로트의 특징 중 꺾는 테크닉 이른바 '꺾기'의 명인이라는 것. 우리나라 트로트의 시작이라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 꺾는 테크닉이 많이 나온다. 음악으로만 보면, 목포사람 이난영이 토대하고 있던 것도 남도소리라는 뜻이다. 꺾기는 무엇인가? 판소리를 포함한 남도소리 이른바 3음계 음악에서는 이를 '꺾는음'이라 호명해왔다. 나는 일찍이 이를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반음계(크로마티크)에 빗대어 설명해오곤 했다. 브라질 인디언이 무지개에 고통과 죽음을 연계시키는 것처럼 서구인들 역시 반음계 장르는 슬픔과 고뇌를 표현하기에 훌륭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강화된 반음계가 고조되면 영혼을 할퀸다. 저하되더라도 힘이 없어지는 것 아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비탄의 소리를 듣는다. 미분화음을 떠는 방식으로 조율하는 기법을 통해서 장식하는 남도소리의 기술들이 있다. 윗음은 꺾고 가운데 음은 평으로 흘려내며 아랫음은 심하게 떤다. 특히 윗음을 꺾는 다양한 방식을 '다루친다' 혹은 '타루친다'고 한다. 이를 반복해서 꺾는 기교를 '거드렁제'라고 한다. 일반적인 바이브레이션과는 결이 다르다. 진도무악 명인 박병천의 구음이나 송가인의 첫 스승 강송대의 민요 및 트로트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이 모두 이 기교다. 이를 거듭 반복해 발성하거나 연주하는 프렉탈 구조가 황해로부터 남도에 이르는 황해문화권 혹은 한반도 전반을 관통해온 시김새 곧 삭임의 방식이다. 시김새가 삭힘에서 왔다는 정보는 여러 차례 이 지면을 통해 말해두었으므로 지난 내 글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판소리나 남도민요를 전공한 이들이 '꺾기'를 특징 삼는 트로트에 강할 수밖에 없다. 감성을 가장 잘 전달해주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더군다나 송가인은 수리성 창법까지 곁들였다. 목청이 곰삭아서 조금 쉰듯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 판소리에서도 제일로 치는 소리목 말이다. 그래서다. 트로트의 근원에 엔카보다는 사실 남도소리가 있다는 점, 다시 분석해볼 수는 없을까? 장유정이 말했든 트로트의 정서가 우리의 민요와 시적 정서를 계승하고 담보하고 있다는 점 불문가지다. 그렇다면 이난영으로부터 온 국민이 사랑했던 국민가수 이미자를 거쳐 송가인에 이른 트로트의 제 몫을 어떻게 찾아주어야 할까? 그 대답으로 나는 '남도트로트'를 제안한다. 판소리와 남도민요를 통칭하는 남도소리의 '남도'와 그 음양의 세례를 받아 지속된 '트로트'를 통칭하는 방법이다. 송가인이 새삼스럽게 그 문을 열어주었다. 내 주장에 동의한다면, 이 땅의 베이비부머세대가 열광하는 트로트의 세계가 선대로부터 이어진 남도소리의 토대로부터 계승된 것이라는 점 인정한다면, 이후 오랫동안 남도트로트의 시대가 지속될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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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수복(王壽福)왕수복(王壽福, 1917~2003)이란 여인. 당당하게 사진에 서명을 했다. 아리랑의 곡조로 노래하는 모델이다. 1934년 "최승희씨가 조선무용을 살린 것처럼 나는 조선의 민요를 많이 노래하고 싶습니다."라고 밝히고 아리랑을 취입했다. 1935년에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선우일선, 이난영, 전옥에 앞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소설가 이효석과 경제학자 김광진의 연인으로도 유명하다. 1942년 이효석이 사망할 때 임종을 지켰고, 이후 시인 노천명의 연인이었던 김광진과 결혼하였다. 김광진이 월북했을 때 함께 평양에 남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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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4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한국은 일본과 음악적으로 교류하기 이전인, 1870년경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01년부터 1916년까지는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1852~1916)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이왕직군악대장으로 복무하며 양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1800년대 후반에 설립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1911년에 재발족 된 ‘조선정악전습소’에서는 음악학교들이 설립되어 서양식의 성악과 기악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시카고 음악학교’ 등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오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창작가요를 작곡할 소양과 외국음악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바탕으로 1932년에는 전수린을 기폭제로 한국 작곡가의 절정시대가 개막된다. 1926년부터 1936년 사이에 데뷔한 작곡가들을 살펴보자. 1927년 경성방송 개국을 계기로 홍난파와 관현악단을 창설한 김교성은 <찔레꽃>, <직녀성>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남겼고, 1932년에 빅타레코드에 전속되었다. 천재 작곡가 김용환은 김정구의 친형으로 배우이자 가수, 작곡가를 겸했고 1932년 폴리돌에 전속되었다. <홍도야 울지마라>, <처녀총각> 등을 남긴 김준영은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한국 서양음악의 선구자이자 피아니스트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바이올리니스트 문호월은 <노들강변> 이난영의 <봄맞이> 남인수의 <천리타향>을 남겼고, 일본 음악학교를 졸업한 손목인은 고복수의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등 주옥같은 선율을 남겼다. 한국 최고의 작곡가 ‘박시춘’도 이 시기에 데뷔했는데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신라의 달밤>, <삼다도 소식>,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는 이재호는 일본의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오케레코드에 전속되어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 불후의 명작을 쏟아낸다. 홍난파도 이 시기에 데뷔하는데 안옥경의 <여인의 호소> 이규남의 <유랑의 나그네> 등을 발표했다. 특히 가곡 분야에 두각을 보여 <성불사의 밤>, <봉선화> 등의 주옥같은 음악을 남겼다. (이호섭 글 참조) 위에 언급된 곡들은 거의 100년 동안 우리 국민 속에서 애환과 희비를 담아 불려온 명곡이라 할 수 있겠다. 명곡의 사전적 의미는 매우 잘 만들어진 이름난 악곡을 말하는데, 이 시절 트로트 음악은 100년 동안 불려지고 연주되는 소위 명곡에 해당하는 음악이다. 유행에 관계없이 대중이 늘 즐겨 듣거나 부르는 노래와 악곡으로서 ‘대중명곡’인 것이다. 이러한 곡들은 우리말을 빼앗기고, 전통문화가 말살된 마음의 상처에 아픔을 도려내고 새살이 돋게 하듯이 작곡 되어졌다. 비록 서양음악의 낯선 틀 속에서 작곡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위에 전통음악인 민요와 판소리의 요소를 담아 대중음악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서양음악의 틀에 숨결을 불어넣어 우리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대중음악인 트로트를 탄생시킨 것이다. 서양음악의 음 구성을 보통 7음 음계, 5음 음계, 3음 음계라고 한다. 우리 전통음계도 7음 음계, 5음 음계, 3음 음계 등으로 구성되어 작곡을 할 때 활용되고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인 트로트를 작곡할 때 7음 음계와 5음 음계가 활용되고 있는데, 일본의 엔카도 이와 같은 음계를 활용하고 있다. 슬픈 음악일 때 미, 파, 시, 도가 쓰이는 것은 일본의 엔카나 한국의 트로트, 그리고 서양음악도 똑같다. 한국은 슬픈 음악에서 일본의 엔카보다 미, 파, 시, 도를 더 강하게 표현할 뿐 아니라 꺾기까지 첨가해 슬픔을 극도로 표현한다. 음계에 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다음 회에서는 엔카 장르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트로트와 엔카의 유래를 소개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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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 뮤지컬 난영 4070일 시 : 2005년 11월 30일 ~ 12월 1일 오후 6시 30분 장 소 : 목포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ㅁ공연 소개 20세기 민족의 비운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 1935년 이후로 해방과 분단이라는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같이하였고 오늘날까지 개인과 사회, 민족의 현실 앞에 숨쉬고 있다. 이난영의 삶 또한 그녀의 노래만큼이나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가난한 유년기 가수로서의 생애, 일제 탄압기에는 ‘목포의 눈물' 노래가사가 민족의 의식을 부채질한다하여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그녀의 노래 ‘목포의눈물기, 분단의 비극을 가족과 함께 겪어야만 했던 억척스런 어머니로서의 한(限) 많은 고통 그리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보내야 했던 절망적인 여인 이난영, 결국 49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그녀는 노래는 남았지만...... 민중들과 함께한 대중문화의 미의식 읽기. 민족의 한을 노래로 달랜 ‘목포의 눈물'은 지금까지 아픔과 절망을 딛고 희망을 부르는 장수 가요로 불려지고 있다. 이 작품은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가수 이난영의 삶 속으로 질곡의 역사와 함께 깊이 들어가 보고자 한다. 파란만장했던 여인 이난영의 삶을 통해 민족의 처한 운명 속에서 뼈아픈 근대사의 강을 건너야했던 대중스타의 내면과 제2의 ‘목포의 눈물'을 잇게 한 대중들의 희노애락을 찾고자 한다. 또한 혹독한 일제탄압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통해 현 단계 올바른 대중문화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화려한 무대, 현란한 춤, 추억의 노래선곡 등 40여명의 출연자들이 빚은 완벽한 조화 40여명에 이르는 출연진, 관객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전문악단의 라이브 연주실력, 쇼무대를 연상시키는 안무솜씨와 현란한 댄스, 당시 시대를 연상케 하는 창법과 빼어난 노래실력, 시대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영상 등 다양한 장르들이 결합된 뮤지컬이다.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울어라 문풍지' 등 이난영이 부른 대표곡과 함께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오빠는 풍각쟁이', ‘연락선은 떠난다' 등과 ‘눈물 젖은 두만강', ‘홍도야 우지마라', ‘황성옛터', ‘단장의 미아리고개', ‘번지 없는 주막' 등 시대상을 반영한 20여곡의 주옥같은 그 시절 노래들이 선보인다. 목포출신 가수 이난영의 생애를 목포사람들이 뮤지컬로 만든 작품. 25년의 역사를 이뤄가고 있는 문화예술운동의 전사 「극단갯돌」 단원들과 목포의 토박이 예술가들이 모두 한데 힘을 모아 창작에서부터 연출, 배우, 스텝 등 모든 제작과정을 정성을 다해 함께했다.『난영』은 목포사람들이 만든 목포 최초 창작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목포연극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4년 방송콘텐츠 사업 선정 작품 이 작품은 다매체 영상시대에 예술 장르와 결합된 방송콘텐츠화의 시도와 노력의 일환으로 2004년 문예진흥원의 방송콘텐츠 사업에 선정된 작품이다. 공연예술의 장르를 뛰어넘는 방송영상과 공연과의 완벽한 결합, 방송과 예술의 모범적 대중화를 통해 해방과 분단이라는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함께 한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기를 공연 녹화하여 시청자들의 인기를 검증 받았던 작품이다. 이난영 타계 40주년, ‘목포의 눈물' 탄생 70주년으로 부활한 뮤지컬 난영 4070 2005년은 가수 이난영 타계 40주년(1965년 작고), ‘목포의 눈물' 탄생 70주년(1935년 발표)이 되는 해이다. 1935년에 발표된 ‘목포의 눈물'은 일제시대, 한국전쟁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아픈 질곡을 건너온 세대들에게 희망의 노래로 불려졌다. 이난영 타계 이후 4.19, 5.16군사쿠테타, 5.18광주민중항쟁, 6.10항쟁을 거쳐야 했던 세대들에게도 역시 희망의 노래로 불려졌다. 「타계 40주년, ‘목포의 눈물' 탄생 70주년」. 이 시대적 의미를 함축해 4070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들 4070세대는 현대한국사회를 끌어온 중심축으로써 20세기를 이끌어온 사람들이다. 4070세대들을 위한 희망의 노래 『난영』은 단순한 노래 찾기에 머물지 않고 지난 시대를 반추하며 날로 어려워지는 나라 안팎의 현실 속에서 작은 희망의 등불이 되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담겨있다. ㅁ프로그램 1장. 살아오다. 현재의 목포의 눈물 노래에 현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여 춤과 노래로 무대서막을 장식한다. 가수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은 1935년 발표되어 70년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우리들 가슴속에 숨쉬고 있다. 2장. 해송 술에 취해 기생들과 어울리는 김해송. 천재작곡가 김해송의 음악적 고뇌가 담긴 장면. 3장. 순정월야 오케이레코드사의 연습실. 곡을 받은 지휘자 김해송은 이난영에게 혹독한 연습을 시키고 그의 음악적 가치관에 대해 설명한다. 이난영과 김해송의 운명적 만남은 음악적 사랑으로 둘을 묶어 놓는다. 목포의 눈물 탄생기를 보이는 장면. 4장. 끝없는 유랑 악극단 단원들의 끝없는 유랑생활과 함께 목포공연 소식이 이난영에게로 알려지자 이난영은 고향목포에 대한 기대와 감회가 젖게 되고, 어릴적 목포에서의 가난한 생활이 연상된다. 6장. 목포 시장사람들의 입을 통해 일제시대 당시 목포의 문화를 보여주는 장면, 목포의 명물 옥단이, 또선이 등 다양한 민중군상들이 등장하여 목포의 시대상을 연출한다. 7장. 목포는 항구 15년만에 다시 고향목포를 찾은 이난영. 성공한 가수가 되어 고향무대에 서게 되는 기쁨을 관객들과 함께 나눈다. 8장. 난초그림자 만삭임에도 불구하고 무대에서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로 들어온 이난영. 남편 김해송이 몰래 아편을 하게 된 사실을 이미 알아챈 난영은 아편을 하고 있는 김해송을 찾아가 김해송의 아편을 목숨을 걸고 만류를 한다. 9장. 난입 일제말기 극심한 탄압의 시기. 일제는 우리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가요의 일본말화를 시도한다. 극기야 공연장에서 일본경찰이 난입하여 목포의 눈물 노래를 탄압하게 되고 거기에 맞서 대항하는 김해송이 경찰서로 끌려간다. 독약소동으로 아이가 유산이 된 난영은 병원을 뛰쳐나와 일본경찰서에 남편면회를 신청하지만 오히려 이난영을 불온한 일본에 협조하지 않는 가수라고 엄포를 놓는다. 11장. 창살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해 국민총동원령이 발포되고, 일제는 전쟁에 혈안이 되어 갖은 탄압으로 우리민족을 억압시키는 내용을 노래와 춤으로 형상화 한다. 12장. 감격시대 일본천황 항복방송영상비추면 감격시대 노래와 함께 해방이 되었음을 알린다. 해방을 기쁘게 맞는 단원들과 김해송. 김해송은 새로운 시대가 돌아 온 만큼 새로운 예술을 해야한다며 뮤지컬 카르멘을 만들어 공연하자고 제안한다. 13장. 단장의 미아리 해방의 기쁨도 가시기 전 난영의 집, 전쟁을 알리는 폭격소리 터져 나오고, 피난을 가자고 설득하지만 김해송의 새로운 예술의 도전에 대한 집착은 계속된다. 한국전쟁영상 비추면 ‘미아리 고개'노래와 더불어 피난민들 아수라장이 된다. 남편과 헤어진 이난영은 7남매의 자식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옮겨온다. 14장. 소식 피난촌의 난영, 꿀꿀이죽 한그릇으로 피난민들과 싸우는 난영. 전쟁의 포화속에서 아이를 억척스럽게 가르치는 어머니 이난영의 모습이 비춘다. 이때 악극단에서 같이 활동을 하였던 단원이 난영을 찾아와 김해송의 납북소식을 전한다. 15장. 달라진 세상, 절대고독 끝 전쟁이 끝이 나고 달라진 세상과 더욱 화려해진 가요계의 모습이 비추어진다. 일제시대 무대에서 영애를 누렸던 가수들은 점점 연애계에서 밀려난다. 이난영은 자식들을 미국으로 보내 인기스타가 되게했고, 그러나 정작 본인은 홀로 남아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절대고독속으로 빠져들다 끝내 이승과 결단하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