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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귀국동포회, '동포 소식 전달' 김경희 KBS PD에 감사장"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이주를 당한 사할린 동포들의 존재는 잊혀진 우리 한민족 역사입니다. 8년째 프로그램을 만들며 사할린 한인사를 더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의미 있는 기획을 하려고 고민해요." 2017년부터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를 이끄는 김경희(59) KBS PD는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회장 권경석)에서 감사장을 받은 소감을 밝혔다. 국내로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 단체인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는 지난 23일 사할린 동포들의 경기 파주 정착 15주년을 기념해 파주평생학습관에서 열린 '파주 아리랑 콘서트'에서 김 PD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당시 권경석 회장은 "사할린 동포들의 이산(離散)과 '이산의 이산'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며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사할린 동포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찾았고,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사할린 동포, 고려인, 중국 동포 등 북방 지역 동포들과 국내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한민족의 문화와 생활정보를 제공해 민족공동체 의식과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한민족방송 대표 프로그램이다. 사할린 동포들이 고국의 가족을 찾고 싶다는 요청에 따라 1972년 4월 '사할린 동포에게'라는 제목으로 처음 방송을 시작했고, 1988년 프로그램 제목을 현재와 같이 변경했다. 2022년에 개설 50주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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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동포회 '송년의 밤'지난달 30일 문산읍 당동리에 정주하고 있는 파주사할린귀국동포회(회장 이화일)가 주관하는 '송년의 밤'이 문산읍 프리마 루체 2층 연회장에서 개최되었다. 40년만에 맞는 대설주의보에도 불구하고 총 100여 명이 참가하여 즐거운 '송년의 밤'을 보냈다.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대한적십자사봉사회 파주지구협의회 연규희 회장, 민족통일 파주시협의회 허애경 회장, 민족통일 파주지구협의회, 파주시 적십자사 봉사회, 박정 국회의원, 파주시의회 이익선 의원,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 등이 참가했다. 전국 26개 지역 서울, 인천, 춘천, 안산, 화성, 김포, 오산, 파주, 남양주, 양주, 원주, 청주, 음성군, 제천, 아산, 천안, 서천군, 부산, 김해, 양산, 고령 등에 3천여 명 사할린 동포 어른들이 살고 계신다. 사할린특별법 조례 확장을 위해 힘쓴 파주시의회 이익선 의원은 "2023년까지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분들만이 법적으로 사할린 1세로 인정을 받아야만 한국에 귀국할 수 있었다. 새해부터는 사할린특별법이 확장되어 귀국할 수 있는 가족의 수가 사할린 1세와 그 배우자에서 다수의 자식들과 그 배우자로 완화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현재 파주시에는 150여 명의 동포가 문산 당동리와 선유리에 살고 있다.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회장인 권경석씨는 고르바초프 방한 시 동시통역을 맡았고, 부회장을 맡은 인무학씨는 모스크바 대학 컴퓨터정보학 석좌교수를 역임한 인재이다. 전 파주시사할린동포회 김영태 회장은 모스크바 체육대학 부총장을 역임하고, 농구감독의 경력을 가졌다. 파주 당동리에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우수상을 3번이나 받은 박승의(전 사할린국립대학 교수)교수와 올해 우수상을 수상한 인무학 박사가 살고 있다.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가 '사할린아리랑'사설을 낭독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내가 왜 왔나 내가 왜 왔나/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사할린이 좋다고 내 여기 왔나/일본놈들무숩어 내 여기왔지 우리 조선은 따뜻한데/그 땅에 못살고 내 여기왔나 우리 영감님은 왜 왔다던가/나만 혼자두고 자기만 갔네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한 많은 남화태(사할린) 징용 왔네 철막 장벽은 높아만 가고/정겨운 고향길 막연하다 정치 개방 후 햇빛은 밝고/우리의 살림엔 경사가 많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이날 국악 공연을 해주기로 한 서울, 용인, 동두천 3팀은 대설주의보로 교통이 두절되어 차량운행을 못해서 도착하지 못했다. 다행히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이 봉산탈춤을 선사했다. 탈춤을 마치고 탈을 벗자 탄성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오늘 처음으로 눈앞에서 탈춤을 본 동포들이 전통 민속예술 탈춤의 신명을 공유한 마당이었다. 의정부시 삼정제빵소에서 사할린동포들과 '평화의 빵'을 나누었다. 권경석 회장과 회원들이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이화일 회장은 "모두 모여서 건강을 빌며 밝아오는 새해를 맞이하는 뜻 깊은 송년의 밤이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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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 사할린 동포 우수상 공동수상KBS한민족방송이 주최하는 '2023 제25회 KBS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사할린 동포 3분이 우수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인무학 씨의 <내가 아는 고려극장 맹동욱>,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박승의 씨의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 러시아 사할린 코르사코프시 발레리 오석만 씨의 <사할린 한인 2세, 오래된 희망>의 체험수기가 영예의 우수상을 수상했다. KBS한민족방송은 중국 동북 3성을 비롯해 CIS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과 사할린 동포들에게 한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우리말과 우리글을 보존하기 위해 지난 1998년부터 매년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을 실시하고 있다. 주최측은 "그동안 책으로만 엮어서 기록으로만 남겼지만 올해부터는 수상된 체험수기는 다큐로 제작되어 방영될 예정입니다. 어떻게 제작이 되고 방영이 될지 가슴이 떨립니다"라고 전했다. 한편 사할린 동포 3분의 수상작은 국악신문에서 연재가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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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2편)가라후토에 맺은 의형제 박득수는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화태에 들어가셔서 산중에 사는 누나 집에서 거의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힘든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기로 결심한다. 누님이 그저 밥은 먹여 주지만 옷도 안 사주고 돈도 안 주고 하니까 더욱 눌러 앉을 수가 없게 된다. 박득수는 누님 집에서 3년 있다가 돌린스크 시내로 내려 왔다. 일본사람의 꼬임에 모집으로 들어온 조선사람들을 만나 같이 잡일을 하게 된다. 어른들과 같이 살면서 숙소도 함께 하면서, 모두 정이 들어서 형님 아우로 의형제를 맺으면서 지내게 되는데 박득수는 가장 막내였다. 5년후 가장 나이 어린 박득수는 글도 아는 정직한 청년이어서 형님들에게 많은 사랑과 희망을 받게 된다. 장가를 갈 나이가 들자 가장 맏형 고 오지상이 당장 장가를 가야한다고 한다. ”수!, 너 여기 있지 말고 한국에 나가 가주고 장개 들라. 여기서는 여자들이 없다 보니께 일본 여자한테 장개 가지 말고 한국 가서 장개 들어 가지고 오라! 우리는 조선에 처도 있고 자슥도 두고 와서 이렇지만은, 너, 다까하라, 너는 이렇게 해서 나이 어린게 안된다. 고향에 가서 장가를 들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어라" 그는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었다. 그래서 조선사람들과 누이 내외가 조선행 배삯을 거둬주어서 박근수는 24살에 고향에 나가게 됐다. 8년 만에 나간 조선에서 집안 어른 중신으로 아내(강순예)와 결혼하게 됐다. 가라후토 강제모집과 이산 박득수는 결혼 후 조선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소박한 희망은 허사가 되어 버렸다. 안성면 사무소에서 모집 영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1936년, 1937년에 흉년이 들었지. 2년 동안에 흉년이 들어서 농민들은 먹고 살기가 매우 바빴어. 마침 그럴 때 일본이 지나사변으로 중국과 싸우다가 젊은이들이 군대에 동원돼 노무자가 부족했어. 흉년이 든 상황에서 일본은 모집을 시작했단다. 어느 탄산이 모집한다는 광고가 여기저기 붙었었지.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생활이 바쁘고 먹고 살기가 바쁜데 모집을 한다니께, "아! 일할 데 있으면 어디든지 가야지!” 라고 하니 일본 놈들이 그저 막 강제오 데려 간거야. 1938년에 네 둘째 박기남 삼춘이 일본 구주(九州, 규슈)로 모집가서 탄산에서 사고를 당하고 불귀가 됐어." 아버지가 나에게 그 당시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 처음에는 모집 광고로 해서 많은 조선인들을 데려갔는데 점점 모집을 광고 없이 하고 다음 지원자가 나오지 않자 강제연행으로 바꿨다. 일본회사가 모집을 하면 조선총독부를 통했는데, 총독부에서 어느 면에서 몇 명을 보내야 한다면 조선 앞잡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영장을 전달했다. 박득수는 이미 가라후토에서 살다 왔으니까 모집영장이 잘못 나왔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토리우치보(헌팅캡)를 쓰고 당꼬바지를 착용한 형사가 새살림을 시작한 신접 살림집으로 들이닥쳤다. ”너, 다까하라, 이리 오라! 너 영장 받았니? 왜 면사무소에 안 왔니?" "나는 벌써 화태에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영장을 내게 잘못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빠가야로! 너는 무조건 가야해! 빨리 준비해서 나와" 이렇게 새신랑 박득수는 강제모집으로 결혼 일년반 만에 가라후토로 끌려가게 됐다. 면사무소에 갔을 때, 거기에는 이미 백 여명의 모집을 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 니무라와 마쪼까 두 친구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로는 동네 경찰서에서 일본 사람과 조선사람 앞잡이들이 와서 "우리는 내선일체다 천황의 명령이다”라고 하면서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지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달았다. 이제 결승전이다 보니까 1년간 가라후토로 가서 일해라”고 윽박지르고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면서 노예 취급을 했다. 25살 새 삶을 시작해야 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운명과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우리가 나가면 집에 일할 사람이 없고 어머니는 굶어 죽는다”고 애원을 하니까 앞잡이들은 ”집에 여자들이 있으니 1년간 살 수 있을거”라고 설득하고 달랬다가 발로 차고 때렸다. 앞잡이는 총독부 명령에 따라서 국민들은 꼭 가야만 한다고 했다. 아니면 니네 가족은 배급을 못 탄다. 아니면 아직 어린 여동생이나 딸을 위안부(정신대)로 내놓으라고 칼을 휘두르며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무주군 안성면에서는 가라후토에서 온 일본인 사무소장과 김수문이라는 함바(飯場, 현장 근처 노동자 숙박소)사장을 맞이했다. 가라후토에 가면 얼마의 돈을 번다든가 어떻게 산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도 없이 그냥 가라는 것이었다. 그 때 안성면에서 모인 사람들이 열둘인가? 열넷인가? 그 정도 모였다. 함바 사장인 김수문은 다른 지역으로 사람을 모우러 나가고, 일본인 사무장은 남아서 징용을 가는 조선인들을 감시했다. 그날 밤은 여관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기차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일본인들은 그 당시 공습 때문에 무서우니 밤에 다녔다. 부산에 도착하니까 소독소로 보내서 모든 일행을 소독하고 목욕도 시켰다. 밤 아홉시 쯤 되어서 부두에서 연락선 공고마루에 승선했다. 한밤중에 배를 타고 부산항에서 출발하여 일본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으로 갔다. 아침 해 뜰 무렵에 도착했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 합쳐져서 열여섯 명이 한 그룹이 되어 함께 다다미(たたみ,타타미)를 배 가장 밑바닥에 있는 하등실 공간에서 모두 다 잠을 잤다. 그 때가 6월, 여름이니까 춥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하관에서 동경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동경에서 또 하루 자고 기차를 갈아타고 아오모리까지 가서 다시 하루 자고 거기서 북해도 하코다테까지 배로 갔다. 북해도 북부에 위치한 와카나이에 가서 사할린 섬 오도마리항까지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부득이한 여행은 8일 이상 걸렸다. 박득수는 가라후토에서 오치아이(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다. 깊은 산 골짜기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베는 일은 힘들었지만 할만했다. 6개월 후 조선에서 아내 강순예가 화태로 왔다. 박득수가 배치된 산판은 오치아이에서 한 630리가 되는데 이미 30명의 모집으로 온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어른들이 새집도 얻어 주고 살림살이도 장만해 주었다. 가족들도 한 여섯, 일곱집이 있어서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데 큰 고생은 안했다. "개인집에서 그 때는 한달에 2원씩 집세 받고 세 놓고 그랬어요. 방 두 칸짜리 이런데서. 그때는 주로 화롯불, 난롯불 놓고 거기서 밥 해 먹고 그렇게 살고 했어요.” 산판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를 못한 분들이어서 강순예가 편지나 문서를 작성해주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인한테서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남편 박득수도 지식인으로서 브리가지르(бригадир,조장, 팀장)로 일했다. 벌목공들은 2년 동안의 계약을 맺고 왔는데. 기한이 지나도 일본 당국은 조국으로 돌려 보내지 않았다. 월급은 다 주지 않고 조금씩 내주었다. 나머지는 조선에 갈 때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끝까지 지켜지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판에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박득수도 역시 시리도리(현 마카로프) 제지공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거기에서 일년 동안 일하고 조선사람들 한 30명을 모아서 니또이 산판에 가서 벌목일을 시작했다. 3년 후 1942년 조선에 살고 있는 친척들한테서 편지가 왔다. 조국에서는 너무나 살기 어려우니까 가라후토로 불러 달라고. 그래서 증명서를 보내 홀로 계신 어머니와 큰 형 식구 5명이 니또이 촌으로 오게 했다. 몇년 후 고모 가족도 우리가 사는 니또이에 이주하여 가까운 곳에서 함께 등 부비고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사람들은 기르던 앵무새와 개까지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조선인들은 영영 귀환하지 못했다. 남의 나라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강제동원 되어 잠시 있다가 돌아가는 줄만 알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4만3천 여명의 이산가족이 해방된 사할린에 나타난 것이다. 언제가 조국과의 상봉을 꿈꾸며 이국 만리에서 낯선 민족들과 뒤섞여 살아야만 했다. 러시아 180여개 민족 중 식민국민이라는 낙인이 찍힌채.......소련은 일본이 버리고 간 탄광과 산판. 펄프공장에 투입할 노동력이 필요했고, 불안정한 조국은 우리를 데려가지 못했다. 남화태에 남겨진 30여 지역 탄광에서 돌아가는 기계는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이 작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양인의 몸 사이즈에 맞춘 탄광 지하 갱도는 서양인의 체구에 전혀 맞지 않았다. 남겨진 조선인을 관리하기 위해서 소련 정부는 큰땅(대륙)에 사는 고려인 지식인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완장을 채우고 우리를 감시하고 체계적 시스템을 조직하여 노동력을 착취해 나갔다. 배급을 받아야 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해져 가고 일본말과 조선말을 못 쓰게 하고 소련 정부에 적응하는 동화정책을 실시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조선말과 조선 이름 대신 러시아 이름으로 바꾸어야 불이익을 안 받게 된다. 사할린 한인 국적도 조선, 일본, 소련, 북한, 러시아 등으로 5번 변경되면서 국적에 따라서 이름도 바뀌게 된다. 그래서 2세부터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젖줄같은 고향땅 논밭전지와 집문서를 맡겨놓고 온 사람, 홀로 남은 늙은 어머니를 친척집에 맡겨놓은 사람, 어여쁜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는 사람 등등 사연도 많고 많다. 조선인들은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미쳐서 죽고 얼어죽어 나갔다. 장가도 못간 청년들은 남편 잃고 여러 명의 아이가 딸린 여자와 살아야 하고, 두고 온 가족을 그리다가 평생 재혼도 하지 않고 홀아비로 살다간 사람, 산판과 탄부에서 죽도록 일하다가 지병을 얻어 일찍 죽거나 나이를 먹어서 죽은 사람들은 결국 고향으로 못가고 가라후토에 뼈를 묻어야만 했다. 특히 정신대로 끌려와서 버려진 어린 여성들을 평생 껴안고 남편으로 아들 딸로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의 노래 고향을 그리던 박득수는 1977년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억울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제1 공동묘지에 영원히 안치했다. 매년 8월 15일 추석날 우리 가족은 모두 아버지의 묘옆에 묵묵히 서 있다. 3명의 아들과 2명의 며느리. 손자들을 데리고 그리운 아버지를 소환해 본다. 오늘은 아버지를 위한 시를 준비했다. 세월을 잘못 만나서 낯선 땅에서 억울하게 살다가신 아버지의 이산과 억류, 미귀환에 대한 아픔을 시로 지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두 손으로 바쳤다. 나는 천천히 낭송을 해 드렸다. <아버지의 노래>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년에 청춘만 늙고 추석밤 청명한 보름달 바라보며 철새따라 가고팠던 아버지의 노래! 일제에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고 할아버지 아버지 형님을 여의고 열여섯 젊은 시절 가장이 되어 일제시대 엄동설한 화태로 들어가서 산판에서 만고풍상 겪으셨고 스물다섯살 고향가서 아내를 얻었지만 꿈같은 신행도 얼마 못가고 강제모집 가라후토로 끌려갔네 산판에서 위험한 벌목장에 목숨을 바치시고 소련시대 위태로운 강에서 유송하시고 토끼같은 사남사녀 팔남매 밝게 키우시고 조선민족 풍습과 예의범절을 가르치시네 육년동안 험한 중풍에 시달리셨으나 자식 앞에서 흉한 모습 보이지 않으시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그리운 고향주소 소리없이 불러보시네 매년 팔월십오일 아버지 묘비명에 서있네 살아생전 아버지의 소원을 못 들어드려서 손자손녀들 사할린에 뿌리를 내리지만 밀양박씨 대대손손 영원하리라 아버지가 불렀던 노래 한 구절은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집 주소였던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는 아버지의 노래이고 영혼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잊지 않으려고 늘 우리들에게 되새겨 주셨던 것이다. 너라도 반드시 찾아가서 밀양박씨 집안 어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갈 수 있었다. 나는 11년전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땅을 찾았지만 우리 집안을 알던 이웃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빚이 되었는데. 2019년 어느 봄날 다시 무주땅을 찾아가서 안성면 이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와 같이 총 14명이 강제징용으로 차출되었는데, 돌아 온 사람은 단 1명만 부상을 당해서 장애자가 되어 돌아왔는데 후에 그 자식들은 이민을 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아버지의 이름이 박힌 호적등본 사본을 안성면사무소에서 신청해서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 석자 박득수와 주소가 찍힌 호적등본과 아버지가 살던 집터의 흙을 고이 담아서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왔다.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를 뵐 낯이 있게 되어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2달후 7월이 되어 사할린에 들어갔다. 사할린 땅에 묻히신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의 묘지를 찾았다. 아버지 혼령 앞에 호적등본을 보여 드리고 고향집 주소를 큰소리로 읽어 드렸다. 이어서 고향집 흙을 뿌려 드리면서 술 한잔을 올리자 나는 아버지가 읊으시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아들에게 손자에게 일러줄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집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 아버지! 이제나마 편안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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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1편)2023년 제25회 한민족 체험수기에서 사할린 동포 3분이 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어 오는 2일 시상식이 예정되어 있다. 공동 우수상을 받은 수기는 박승의 씨의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 러시아 사할린 코르사코프시 발레리 오(오석만) 씨의 '사할린 한인 2세, 오래된 희망',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인무학 씨의 '내가 아는 고려극장 맹동욱'이다. 이 수상 소식을 듣고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우리 사할린에 살고 있는 동포들도 다 읽어볼 수 있게 국악신문에 개재를 요청하게 되어서, 3분의 수상작을 5부로 나누어서 게재를 한다. 다음은 박승의 씨의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는 전라도 무주에 살던 가족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토지 수탈 정책으로 소작인과 농민들이 하루 아침에 생명줄을 이어주던 땅을 뺏기자, 살기 위해 한반도를 떠나게 된다. 평화로운 한 가정이 일제의 강제모집에 속아서 사할린에 끌려가면서 이산과 고난이 시작된다. 3대에 걸친 사할린 가족사이다.(편집자 주) 이 글은 사할인 한인 1세 아버지(박득수, 1915년생)와 어머니(1922년생), 할머니(1883년)에게 전해 들은 밀양박씨 집안과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이가 끌려간 가라후토 전라도 무주에서 살던 나의 아버지 박득수는 16살 어린 나이에 누님 박봉순이 살고 있는 가라후토로 가기로 결심한다.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대대로 부치던 땅을 빼앗기자 아버지는 화병을 얻어 졸지에 아버지를 잃게 되고. 형님마저 큰집으로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피폐해진 조선의 농촌은 먹고 살길이 막연하였다. 박득수는 강제모집에 속아 가라후토에 끌려간 누나가 있는 곳에 가면 무언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생길 것만 같았다. 박득수는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한 방책으로 일본 교장집에 가사도우미로 맡겨 놓고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라후토로 향했다. "어머이! 내 누님한테 갈래! 여기선 할일이 너무 없어서 못 견디겠어. 왜놈들 때문에 우리 조선사람들은 죽을 지경이야!" "니 아직 어린데 혼자 낯선 데서 어떻게 살라고?" "어머이! 가라후토에서 2년만 일하면 돈 많이 벌 수 있대. 또 거기 누님 있잖아. 어머이, 걱정마! 꼭 2년만 갔다 올께” 늦은 가을이었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덮었고 비가 올가 말가 했다. 마치 자연도 박득수의 기분에 동정하는듯 ... 검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기차는 전라북도 무주에서 출발하여 다음 날 새벽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부산 항구는 사늘했다. 때는 1931년 동짓달 그믐이었다. 먼 동해바다에서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은 습기로 말미암아 눅눅해진 얇은 외투를 입은 부산항에 도착한 득수에게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부두에는 몇 백명의 젊은 남자들이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부산항을 출항할 때는 늦은 밤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박득수는 저 멀리에서 반짝이는 항구의 불빛을 바라봤다. 당시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시 한편에 실어본다. <고향> 잘 있거라 나의 조국! 귀여운 삼천리 금수강산! 출렁이는 바다 물결!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버리고 무얼 찾아 이국땅을 향하리까? 나의 어머니(강순예)는 당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다음날 네 아버지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동경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탔다. 동경서 친하게 지내던 양반이 있었대요. 그래 그 집에 가서 구경도 하고 하루 쉬어 가주고 자고 그래 인제 갔지요.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후에 급속도로 근대화를 달성한 도쿄의 모습, 즉 카페나 댄스홀, 영화관, 유곽 등 향락적인 거리의 모습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일제강점기 빈곤에 시달리거나 일본사람에게 멸시당하는 조선사람들의 비애를 체험한 박득수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광경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 동경에서 어디, 그 오래 되어서 인제 잊어부려. 그 북해도 있지. 사할린 가는 배 타는 아오모리까정까지 가주고 거기서 또 인제 화태로 들어가는데. 그래갔고 언젠가 모르겠어…., 하여간 니 아부지가 동짓달 여기 오니께 눈이 막 오고, 배가 좀 출렁거렸대. 오도마리. 지금 콜사코프 (코르사코프)라 하지. 거 가서 내려갔어." 드디어 사할린 오도마리에 도착하니 매형이 보낸 일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라후토는 득수 총각을 땅위에 쌓인 눈과 추위로 맞이했다. 누님이 살고 있는 마누이라는 촌은 오찌아이(현 돌린스크시)에서 한 130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 말이 끄는 발구를 타고 5시간 이상을 매서운 바람이 부는 눈길을 헤치면서 나아갔다. 득수는 이렇게 많은 눈을 처음 봤다. 참 신기했다. 조선에서는 눈이 이렇게 많이 쌓이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발구(말이 끄는 눈썰매)에서 내려 눈길을 걷기도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나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래 누님 집에 가니께 농사를 크게 짓고 그 외딴 집이 있대. 거기서 농사를 짓고 혼자 그렇게 있고 말 두 마린가 그렇게 메기고, 농사라야, 뭐랄까, 말 메기는 거 그런 농사지. 뭐 밀, 기밀 것은 농사 지어 갖고 그래 팔아 먹었데. 인제 일본 사람들 거기서, 산판에서, 이 말 메기는데서 사다가 멕여 (먹이려고 갖고) 가데. 그래 갔고 누님집은 괜찮게 살데. 돌린스크 오찌아이)서 한 130리 들어가는덴데 우리도 갔다 왔어. 아주 산중에 농촌인디 거기 한국에서 조선 사람들 모집해다가, 막 일본사람들이 모집해다가 벌목시켜. 나무 비는 거. 거기는 그 시누 있는데서도 많이 떨어졌어. 누님네 집은 가다 중간이고, 그니까 누님은 그 산판에서 가는 중간에 그 외딴집을 사가주고 남편하고 거기서 농사짓고 살고 있었지. 그래 농사를 지은 걸 저게 벌목하는 데 돌려보내서 이제 돈 벌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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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25회 KBS한민족 체험수기 수상작 발표<2023 제25회 한민족 체험수기> 성인 부문 대상 중국 길림성 연길시 김화선 씨의 <추억의 상봉, 통곡의 한맺힌 이별> * 성인 부문 우수상 중국 길림성 연길시 이경애 씨의 <민족의 향기를 이어가는 길> 대한민국 서울시 관악구 손홍범 씨의 <우리글 지키기 위한 나의 독서 사랑> 대한민국 경기도 안양시 태명숙 씨의 <할머니의 지혜>, 러시아 사할린 코르사코프시 발레리 오(오석만) 씨의 <사할린 한인 2세, 오래된 희망>,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인무학 씨의 <내가 아는 고려극장 맹동욱>,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박승의 씨의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 카자흐스탄 알마티시 남경자 씨의 <음악교사>,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시 김올가 씨의<나에게 한글과 한국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광산구 양 알렉산드라 씨의 <한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우리말 보존을 위한 체험담>, <2023 제25회 한민족 체험수기> 청소년 부문 대상 대한민국 서울시 구로구 구로고등학교 이임정 학생의 <못난이 탕후루의 기적처럼> * 청소년 부문 우수상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시 옐도스교육센터한글학교 김글렙 학생의 <한민족의 정체성 확립>, 중국 길림성 연길시 건공소학교 허세연 학생의 <뜻깊은 조선민족월 활동>, 중국 길림성 안도현 동풍학교 김유연 학생의 <난 조선어를 사랑한다> * 청소년 부문 장려상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진군 안누라 학생의 <세종대왕 잘 하셨다>,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시 옐도스교육센터한글학교 김다리아 학생의 <저는 고려인 5세입니다>, 중국 길림성 안도현 이준송 학생의 <아버지의 사랑>, 중국 흑룡강성 녕안시 녕안고중 김완영 학생의 <그리움>, 중국 길림성 룡정시 북안소학교 김성민 학생의 <안녕히>, 중국 길림연 연길시 건공소학교 리명원 학생의 <효도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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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사의 모든 것…서울역사아카이브에서 본다서울역사박물관은 2020년 서울역사아카이브의 공공저작물 제1유형(자유이용 조건) 개방 후 작년 한 해만 3만6869건을 다운로드하는 등 전문가, 대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아카이브 이용이 늘고 있다고 14일 밝혔다.서울역사아카이브는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서울미래유산기록·서울발굴기록의 박물관 조사연구자료와 근현대서울사진·서울시정사진·서울지도의 박물관 소장자료로 총 6개의 주제로 구성됐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담는 기억 저장소로서 현재 총 2만6131건의 자료가 공개 중이다.서울역사아카이브는 서울역사박물관 누리집 또는 별도의 서울역사아카이브 누리집을 통해 접속할 수 있는데, 박물관 온라인 콘텐츠 중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콘텐츠이기도 하다.서울생활문화 자료조사(1만3165건), 서울 시정사진(3657건), 서울지도(592건), 근현대서울사진(5463건) 등 주제도 다양하다.서울 역사에 관한 폭넓은 자료들을 망라하고 있는 만큼 역사저널 그날(KBS), e지식채널·다큐프라임(EBS), 벌거벗은 한국사·유퀴즈온더블록·알쓸인잡(tvN) 등의 방송 및 영국 V&A 미술관(Hallyu! The Korean Wave 전시), 국립민속박물관 등 국내외 전시 활용으로 서울 역사 콘텐츠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서울역사아카이브의 주 이용자는 개인으로, 직장인 외에도 전업주부, 학생, 자영업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특히 박승의 전 국립사할린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는 "국내외 동포사회에서 가족이 조국방문 서울 답사에는 국립민속박물관과 함께 서울역사박물관은 필수 답사지역으로 권장하고 싶다. 서울은 5백년 도읍지로써, 궁궐이 5개나 있는 도시이고, 근대사에서 서울은 서방 열강의 각축전이었다."라고 전한다. 서울 역사에 대한 개인의 호기심에서부터 과제 수행, 논문 작성, 건축 설계, 유튜브·블로그 제작, 자녀교육 등 이용 목적도 매우 다양하다. 누구나 콘텐츠의 생산자가 되고 소비자가 되는 1인 미디어 크리에이터의 시대에 지식저장고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서울역사아카이브는 앞으로도 서울 역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새롭게 발굴 공개하고, 사회관계망(SNS) 소개를 통해 소통을 더욱 확대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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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 수상 소감사할린으로 이주한 한인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가 KBS한민족방송이 주최한 '제 24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성인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번 수상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2020년에 제 22회 KBS라디오 방송 체험수기 공모에서 나의 『가라우토로 팔려간 우리 이쁜 고모』가 '한민족'상을 수령했습니다. 심사위원님들께 나의 소박한 글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KBS 한민족방송은 지난 24년간 북방동포체험수기 공모를 펼쳐 우수작에 대해 수상을 해왔습니다. 2020년부터 ‘북방동포체험수기 공모전‘을 ‘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고려인과 사할린한인 동포들 대상으로는 정체성 제고를 위해 특별히 ‘한민족상’을 선정해 수여했습니다. 제가 첫번째 수상자로서 영예를 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2020년 11월 21일 토요일에 방영된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연출 김경희, 작가 김경순)은 토요초대석(진행 이소연, 박해상) 프로에 출연하여 수기작품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할린 한인 동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2020년 제22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당선 '낮선 이름 앞에서 당당히' 작품집에서 김이정 소설가는 심사평에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동포들은 "중국 동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응모원고가 적지만 서사의 밀도와 인물들의 생동감은 뒤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사할린 한인 1세대는 혼자 또는 가족과 사할린에 강제로 이주하여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목숨을 담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탄광, 산판과 군사기지 건설장에서 모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건강의 악화와 자녀의 양육 및 교육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모국귀환의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의 지원 대상자들은 영주귀국을 선택하느냐, 사할린에 잔류하느냐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출생한 사할린 한인은 영주귀국 지원 대상에 제외되기 때문에 또 다시 형제자매와 자손들과 헤어져 살아야 합니다. 이산의 이산은 세대를 거치면서 반복됩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라면 주로 남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여성들이 남편을 찾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후토로 가서 모진 고통을 이겨낸 사실을 묘사한 글은 전혀 없습니다. 작은 글이나마 그들의 공적을 공평하게 평가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입니다. 사할린에 가족이 이주하게 된 것은 1929년경 고모가 제일 먼저 사할린 땅을 밟게 되면서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1939년 결혼 후 한달 반만에 강제모집으로 가라후토에 가게됐습니다. 그 당시 오찌아이 (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습니다. 어머니는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나셨고 시부모를 모시고 고향에 거주하기를 원했지만 임신 상태에서하여 일본을 경유해서 가라후토에 들어 오셨습니다. 사할린에서 누이가 태어나고 1942년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전 할머니와 큰 아버지 가족들도 사할린으로 이주해 왔다고 합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끝끝내 타국의 땅에 묻혔습니다. 한국에서 일본 교장선생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할머니가 아버지가 있는 사할린으로 오길 희망해 1945년 해방 직전 큰아버지 가족과 함께 사할린으로 이주해 와서 할머니를 비롯해 부모 형제가 모두 사할린으로 이주해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이야기를 쓴 수기를 통해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할린 한인 여성의 삶을 이야기해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할린에서 여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남자들은 탄광에서 노동을 하고, 여자들은 아이 기르면서 텃밭에서 일하며 시장에 내다 팔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모집꾼에 의해 속아서 사할린으로 이주하게 된 20대 젊은 한인들은 대부분 빈농 출신들입니다. 남자들은 탄광에서 석탄 채취 노동을 하거나 산림에서 벌목공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월급이 많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사할린의 혹독한 기후 조건 속에서 맨손으로 땅을 일구어 텃밭을 만들고 거친 농사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고 가족 뒷바라지를 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강했다고 말합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사할린에서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귀국했지만 조선에서 이주해간 한인들을 무국적 상태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무국적이다 보니 사할린섬을 벗어나 대학을 진학하고 싶어도 못했습니다. 후에 일부는 소련 국적을 부여받아 모스크바에서 대학교육을 받거나 일부는 북한 국적을 부여받고 김일성대학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한이 고향인 사할린한인 대부분 무국적자로 있으며 한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했습니다. 나는 1945년 해방 후 북한 교사가 가르치는 조선학교에서 7년간 조선어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할린국립사범대학에 들어가서는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면서 우리말을 많이 잊게 되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사할린땅에 ‘한국 붐’이 일었습니다. 이후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사할린국립대학에서 19년간 한국어, 한국문화, 한국경제를 가르치는 한국학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1990년대에 사할린의 '새고려신문'에서 '무궁화' 문학콩클을 진행했는데 많은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과 독자들의 작품들이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할린 한인 사회에서도 안타깝게도 한국어가 많이 잊혀져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러시아에 정착해 사는 젊은 층에게서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이 40대에 들어서면서 한인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한국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게 됩니다. 나는 여기에 희망을 두고, 사할린 한인의 우리말 언어문화 복원․재생 사업에 매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사할린 한인 1세대가 조국으로 영주귀국함에 따라 사할린 한인 문학 활동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래도 'K-한류' 붐을 타고 한국문화를 체험하고 한국어를 배우는 어린 세대가 늘어난다고 하니 다음 세대에서도 사할린 한인문학이 꽃 피울 수 있도록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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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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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에서, 'KBS한민족체험수기' 시상식 개최10일 ‘2022 제24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시상식이 카자흐스탄 알마티시에 있는 알마티한국교육원 대강당에서 축하 공연과 함께 진행되었다. 작년에 이어 사할린 동포가 대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경순 (71세)의 이산의 가족사를 담은 '눈물의 섬, 사할린'이다. 한민족방송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한국어와 한글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1998년부터 매년 중국 동북 3성을 비롯해 CIS 지역에 거주하는 러시아 사할린, 또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동포, 고려인, 사할린동포를 대상으로 체험수기를 공모해오고 있다. 올해는 6개 부문 20여 명의 수상자를 냈다. 전체 수상자 20명 중 고려인이 6명을 차지할 정도로 큰 성과를 냈다. 이번 시상식은 처음으로 CIS 지역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특히 한-카자흐스탄 수교 30주년을 맞아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열렸다. 그런데 올해 공모전에서는 대상을 받은 러시아 사할린 동포 김경순씨는 안타깝게 이 자리에 서지 못했다.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 카자흐스탄 동포들이 운영하는 고려일보의 산증인인 한글판 주필 남경자 씨에 대한 공로상 수여와, 한인과 고려인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고려문화원 김상욱 원장에 대한 감사패 전달이 있었다. CIS 지역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리 그리고리 씨의 <자랑스러운 고려인 한국문학 번역작가>, 카자흐스탄 알마티시 박리야 씨의<고려사람 박리야>,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시 박니나 씨의 <차이점에서 공통점으로>, 카자흐스탄 알마티시 차 바실리 씨의<모국어와 뿌리를 찾으면서>가 우수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 박승의(파주시 )교수의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가 우수상을 받았다. 한민족 정체성 확립, 우리말 보전을 위한 체험담, 생활 속 전통문화 계승, 한류와 한글 생각 등을 주제로 글과 영상을 공모한다. 축하 공연으로 알마티시 고려인 동포사회 고려인합창단의 '고려아리랑'이 불려져서 다시 한번 모두 뜨거운 동포애를 나누었다. 시상식에는 박내천 주알마티한국총영사, 김로만 카자흐스탄 전 하원의원, 신유리 고려인협회장, 신안드레이 알마티고려문화중앙회장, 최따찌아나 독립유공자후손회장, 김태환 알마티한국교육원장 등을 비롯해 현지 고려인들과 카자흐스탄인들, 카자흐스탄에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향우회 회원 등 4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신유리 고려인협회장은 "고려인 강제 이주 85주년, 한-카자흐스탄 수교 30주년, 고려극장 90주년을 맞는 의미 있는 해에 KBS가 고려인들을 위해 이런 의미 있는 행사를 열어 감사하다”며 "고국의 이런 관심이 고려인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홍순영 KBS 사회공헌방송부장은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에서 우리 문화와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며 "KBS에서는 앞으로도 고려인들이 한민족으로서의 유대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제24회 한민족 체험수기 수상작 * 성인 부문 대상 러시아 유즈노사할린스크시 김경순 씨의 <눈물의 섬, 사할린> * 성인 부문 우수상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리 그리고리 씨의 <자랑스러운 고려인 한국문학 번역작가> 카자흐스탄 알마티시 박리야 씨의<고려사람 박리야>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시 박니나 씨의 <차이점에서 공통점으로> 카자흐스탄 알마티시 차 바실리 씨의<모국어와 뿌리를 찾으면서>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박승의 씨의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 중국 흑룡강성 최영철 씨의 <큰아버지의 흰옷> 대한민국 서울시 영등포구 전길운 씨의 <나는 누구인가> 중국 길림성 연길시 안연미 씨의 <북(北)> 대한민국 서울시 성북구 엄빅토리아 씨의 <나는 고려인이야> * 청소년 부문 대상 중국 요녕성 최지현 학생의 <우리말과 글의 꿈을 안고> * 청소년 부문 우수상 중국 흑룡강성 황인규 학생의 <꿈> 중국 길림성 김성우 학생의 <아빠가 없는 새학기> 중국 길림성 정현문 학생의 <우리말을 되찾아서 행복하다> * 청소년 부문 장려상 중국 길림성 박문용 학생의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 중국 흑룡강성 주미선 학생의 <간단한 한마디> 중국 길림성 진영표 학생의 <물만두에 담긴 효도> 중국 길림성 최우진 학생의 <사이다를 닮고 싶다> 중국 길림성 박초은 학생의 <사랑의 쟁탈전>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진군 안누라 학생의 <한류> * 지도교원상 중국 흑룡강성 한애경 선생님, 중국 길림성 유춘란 선생님 방송인 이소연과 작곡가 이호섭 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시상식은 현지 고려인들로 구성된 비단길합창단의 ‘한 많은 대동강’을 시작으로 가수 강진과 홍시가 한국 가요를 불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전 고려극장장이자 기타리스트인 김겐나지와 카자흐스탄 공훈 가수 문공자 씨가 사할린과 카자흐스탄 노래를, 전 고려극장 가수인 김세르게이가 한국 가요를 불렀다.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 알마티한인협회가 준비한 고향합창단의 ‘고려아리랑’ 대합창에는 관객으로 참가한 동포들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아리랑을 따라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24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시상식은 KBS 한민족방송(AM 972, 1170KHz)을 통해 오는 12월 24일에 방송될 예정이며, KBS라디오 전용 애플리케이션 Kong(콩)을 통해 전 세계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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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24회 한민족 체험수기" 대상에는 "눈물의 섬, 사할린"2022 제 24회 한민족 체험수기 수상작 20편이 15일 발표되었다. 성인 부문 대상 대상에는 러시아 사할린 주 유즈노사할린스크시 김경순 씨의 '눈물의 섬, 사할린'이 선정되었다. 성인 부문 우수상에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시 박리야 씨의<고려사람 박리야>, 중국 흑룡강성 최영철 씨의 <큰아버지의 흰옷>,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박승의 씨의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시 박니나 씨의 <차이점에서 공통점으로>, 대한민국 서울시 영등포구 전길운 씨의 <나는 누구인가>, 카자흐스탄 알마티시 차 바실리 씨의 <모국어와 뿌리를 찾으면서>, 중국 길림성 연길시 안연미 씨의 <북(北)>,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리 그리고리 씨의 <자랑스러운 고려인 한국문학 번역작가>. 대한민국 서울시 성북구 엄빅토리아 씨의 <나는 고려인이야>. 청소년 부문 대상에는 중국 요녕성 최지현 학생의 <우리말과 글의 꿈을 안고>가 선정되었다. 청소년 부문 우수상에는 중국 흑룡강성 황인규 학생의 <꿈>, 중국 길림성 김성우 학생의 <아빠가 없는 새학기>, 중국 길림성 정현문 학생의 <우리말을 되찾아서 행복하다>가 선정되었다. 청소년 부문 장려상에는 중국 길림성 박문용 학생의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 중국 흑룡강성 주미선 학생의 <간단한 한마디>, 중국 길림성 진영표 학생의 <물만두에 담긴 효도>, 중국 길림성 최우진 학생의 <사이다를 닮고 싶다>, 중국 길림성 박초은 학생의 <사랑의 쟁탈전>,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진군 안누라 학생의 <한류>가 선정되었다. 지도교원상에는 중국 흑룡강성 한애경 선생님, 중국 길림성 유춘란 선생님이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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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빵’ 나눔, ‘나블리베이커리 카페 의정부 지점’에 감사 전달의정부 중앙로 ‘나블리베이커리 카페’, 8월 15일 오전 10시 이 곳에서 뜻 깊은 만남이 있었다.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이 카페 지윤주 이사를 찾은 것. 권 회장이 감사패를 수여하기 위해서였다.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사회에 ‘평화의 빵’으로 자애와 봉사 실천하심에 전 회원의 뜻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나블리베이커리 카페’(대표이사 이춘호) 지윤주 이사에게 권경석 회장(1942년생, 2009년 파주 당동리 정주)이 파주에서 내방하여 수여한 ‘감사문’이다. ‘평화의 빵’, 정성과 봉사 정신이 배인 이름이다. ‘나블리베이커리 카페’는 2년 전인 2020년 1월 의정부시 중앙로 개점 직후부터 매달 인천. 파주, 양주, 김포 지역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와 고려인 청소년과 빵을 나눠왔다. 유기농 밀가루와 천연발효종으로 빚은 바게트 소보로, 단팥빵, 치즈피자빵, 홍쌀빵, 인절미빵 등이다. 이에 대한 회원들의 감사 표시이다.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는 서울을 비롯한 25개 지역 영주 귀국 사할린 동포들의 연합체로 대부분 1940년 전후 출생한 분들로 평균 연령이 80대이다. 경기도 지역에는 2009년부터 영주 귀국하여 8개 지역 인천, 안산, 김포, 파주, 양주, 오산, 남양주, 화성에 정주하고 있다. 올해 6월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가 출판한 '사할린귀국동포 연대기'(2010-2022년,인무학 엮음)에 의하면 2021년 수도권에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 지역별 거주 현황은 인천과 경기도 지역 김포, 양주, 파주, 남양주, 오산. 화성, 시흥 7개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다. 안산(회장:주훈춘) 603명, 김포 3개 지역 통진읍(회장:최정순) 116명, 김포 솔터 2단지(회장:박정자) 93명, 3단지(회장:채신자) 92명이고, 인천 4개 지역에는 논현동 5단지(회장:문정현) 324명. 14단지(회장:김월년) 51명, 가정동(회장:김성만) 44명,삼산동(회장:이영희)29명이고, 파주 2개 지역 당동리(회장:박승의)69명 선유리(회장:이화일) 74명, 양주 (회장:강상용) 84명, 오산(회장:박영신) 73명, 남양주(회장:이수진) 47명,화성(회장:이춘기)74 시흥 4명이 살고 있다. 1998년 사할린 거주 동포 40명의 첫 모국 방문 이후, 영주귀국정책에 의해 1997년 12월 9세대 18명이 귀국하여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입주를 시작으로 3,500명이 영주 귀국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와 배우자만 귀환할 수 있었다. 2021년 12월 조사에는 2,738명이 살고 있다. 이 ‘평와의 빵’ 나눔은 부정기적 동포들의 모임에도 함께 했다. 지난 7월 16일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주관, (사)국제문화공연교류회(이사장 양평수) 주최의 ‘사할린동포위문공연’에 참여하여 행사를 풍성하게 한 바도 있다. 지윤주 이사는 현재 요가 강사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평화의 요가’도 펼치고 싶다”고 밝혔다. 한편 2005년 사할린동포지원사업을 위해 사할린을 방문했던 전 경기북부보훈지청 이강연 지청장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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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공개방송 ‘행복한 동행’KBS한민족방송은 21일 저녁 6시 KBS아트홀에서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기념 특별방송 ‘행복한 동행’을 개최했다. 이 행사는 러시아 사할린·중국 만주3성, 일본 등의 동포를 청취자로 하는 KBS라디오 한민족 방송(사회공헌방송부 박천기 부장)의 간판 프로그램인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개시 50주년을 맞아서 유명 가수와 초청 인사들과 함께 하였다. 참석자 중에는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공모전 역대 수상자 등이 참석하여 뜻을 더했다.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진행자인 이소연과 작곡가이자 가수인 이호섭이 사회를 본 이날 공개방송에는 사할린 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을 비롯해 사할린동포들의 귀환운동을 펼친 박노학 씨 아들인 박창규 씨, 前 사할린 유즈노사하린스크 14번 고등학교 백하득 교장, 前 사할린 한국교육원 김주환 원장, 사할린 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 사할린아리랑축제추진단 단장인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를 비롯해 한국으로 영주귀국해서 안산, 인천, 김포, 파주, 남양주 등에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 동포들, 그리고 아리랑 명창 이혜솔, 김화숙. 중국동포, 고려인, 청취자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특히 동포들과 인연이 깊은 가수 설운도, 김국환, 나태주, 설하윤, 소리꾼 박애리, 남상일 등이 출연해 50주년 축하 무대를 꾸몄다. 사할린에서 위문공연을 펼치기도 한 작곡가이자 가수 이호섭이 ‘사할린’을 부를 때 관객들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징용됐다가 일본 패망 후 귀국길이 막히고 억류되어 남아있던 동포들이 가족 찾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해서 1972년 4월 3일 생긴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사할린 동포에게’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 당시 이 방송은 수많은 사할린 한인들이 고국의 가족과 생사여부를 전하는 동아줄 역할을 하였다. 중국 동포 보낸 26만 여 통 편지 DB로 구축 이후 1974년부터 중국 지린성·랴오닝성·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과 연해주로도 청취 권역을 확대해 중국 동포들의 가족 찾기 사연도 소개했다. 특히 중국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중국 동포들이 편지를 보내와서 가족 재회 1만 4000여 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92년까지 중국동포들이 보낸 편지만 해도 26만 여 통에 이르며. KBS 한민족방송은 이 편지를 DB로 구축했다. 박천기 KBS 한민족방송 부장은 "한중 수교가 되던 1992년까지 중국동포들이 보내온 편지가 26만여 통에 이르고,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가족을 찾아준 사례가 1만 4천여 건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날 공개방송에는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추진 운동의 대부로 꼽히는 고 박노학 씨의 아들 박창규 씨도 참석했다. 박 씨는 "아버님이 KBS에 제안해서 만들어진 방송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니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당시 사할린동포들은 한국으로 직접 편지를 보낼 수가 없어서 일본을 거쳐서 편지를 보냈는데 KBS 한민족방송을 듣기 위해 몰래 숨어서 방송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수진 前 사할린이산가족협회 회장은 "사할린 사람들은 수십 년간 방송을 들으며 고국 땅을 밟게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이렇게 와서 공개방송을 듣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KBS 한민족방송은 사할린 동포들이 잃어버린 수많은 가족을 찾아줬고, 또 책과 달력을 보내주고 노래자랑대회과 위문공연도 실시했다”며 "KBS 한민족방송은 사할린 동포들을 잊지 않고 늘 함께 해왔다. 50주년을 축하한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부터라도 영상 편지를 남기는 작업을 시작하겠다,"는 축사를 전했다. 대한고려인협회 노알렉산드라 회장은 "50년 동안 동포들과 함께 해 오면서 한민족동포들을 연결시켜 주고 있는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앞으로도 한민족 문화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고 밝혔다.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애청자인 재한동포문인협회 김경애 회장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이 방송을 들었는데 중국동포들 중에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를 통해 가족을 찾은 사람들도 많고, KBS 덕분에 한국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동포들이 많다. 또 KBS 한민족방송이 중국동포들이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고려인협회 채예진 부회장은 "50년 동안 동포들과 함께 해 오면서 한민족동포들을 연결시켜 주고 있는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민족 문화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가족 찾기에서 시작된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통일부와 협력해 올해부터 남북이산가족 찾기를 다시 시작해 동포들의 가족 찾기를 이어가고 있다. 첫번째 무대에서는 전 사할린국립대학 박승의 교수와 사할린 전 새고려신문 안춘대 사장이 사할린 동포들의 ‘디아스포라’와 ‘이중징용’에 대한 아픔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회상하고, 2년에 걸쳐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사할린 동포들이 3대에 걸친 가족사 이야기로 대상을 수상한 감동을 전했다. 초대가수의 노래에 눈물 이어서 수차례 사할린 공연에 다녀온 가수 설운도가 첫 막을 올렸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다룬 '잃어버린 30년'을 부른 가수 설운도는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노래로 위안을 줄 수 있어서 그 어떤 무대보다 뜻깊었다"고 말했다. 사할린을 작곡한 이호섭이 부른 '사할린'은 또 한 세대를 넘어가는 '이산의 이산'이 남긴 아픔이 고스란히 가슴과 가슴으로 전해졌다. 두번째 무대에서는 방송 덕분에 가족을 찾았던 이승희·박동찬 중국동포이 무대에 올라 "가족을 찾았다는 소식에 동네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기뻐했고, 방송에서 한국 가족의 편지를 들을 때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만나는 날을 고대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 편지들을 분석한 동덕여자대학교 문형진 교수는 "이 편지에는 동포들이 한반도에서 연해주 지역으로 어떻게 이주를 했는지 동포들의 이주사를 엿볼 수 있고. 생활상과 문화도 알 수 있어 그 자체로 소중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나태주가 '힘내라 대한민국'을 부르면서 태권도 발차기를 하면서 공중회전을 하자 객석에서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으며, 설하윤은 K-뮤직의 아우라와 댄서들의 특급 퍼포먼스로 관객을 휘어잡았다. 세번째 무대에서는 남북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네번째 무대에서는 1세 부모가 가고 2세와 3세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다시 시작된 이산가족찾기'에 대한 문의가 오고간다고 전했다. 이어서 판소리 명창 남상일과 박애리사 ‘춘향가‘로 신명을 높였다. 휘날레에는 관객과 함께 뜨거운 가슴을 담아 아리랑으로 대합창을 했다. 이날 공개방송을 연출한 KBS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프로그램 김경희 피디는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한민족 동포들과 50년을 함께 해 왔듯이 앞으로도 언제나 동포들과 함께 하면서 동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고 말했다. 최연소 방청객으로 온 사할린 4세 신아리나(9세)와 신마이아(14세)는 "한편의 다큐를 보는 것 같다. 사할린 동포와 중국 동포들이 가족찾기 편지를 보내고, 왜 이제야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라고 전했다. 이날 공개방송을 연출한 KBS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김경희 피디는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한민족 동포들과 50년을 함께 해 왔듯이 앞으로도 언제나 동포들과 함께 하면서 동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고 말했다. 공개방송이 끝나고, 2020년 KBS한민족상(체험수기)을 수상한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은 "오늘 50주년 공개방송은 그야말로 사할린의 날이다. 우리 가족 3대가 함께 왔다. 며느리와 손녀들이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 뜻 깊었다.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딸과 사할린에서 친구들이 이 방송을 언제 볼 수 있냐고 전화가 왔다. 국내 영주 귀국한 김포, 양주 친구들이 며칠 전 갑자기 코로나로 못 와서 너무 아쉬웠다. 50주년을 축하하고 최장수 프로그램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주년 특집 공개방송 ‘행복한 동행’은 오는 4월 2~3일 오전 7시~8시 KBS 한민족방송(AM 972Khz)에서 방송된다. KBS 한민족방송 유튜브 채널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행사장을 나오는 한 참석자의 말이 귀에 감돈다. "나 60년 행사 때 초청하면 꼭 올랍니다.” 속으로 답해 드렸다. "예 그러셔야죠. 저도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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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의 시] (75): 3월(오세영)3월 오세영 흐르는 계곡 물에 귀기울이면 3월은 겨울옷을 빨래하는 여인네의 방망이질 소리로 오는 것 같다. 만발한 진달래 꽃숲에 귀기울이면 3월은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으로 오는 것 같다. 새순을 움 틔우는 대지에 귀기울이면 3월은 아가의 젖 빠는 소리로 오는 것 같다. 아아, 눈부신 태양을 향해 연녹색 잎들이 손짓하는 달, 3월은 그날, 아우내 장터에서 외치던 만세 소리로 오는 것 같다. 추천인: 박승의(디아스포아문화원장) "매년 3월이 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태평양전쟁이 끝났지만 사할린에 남겨진 조선인들은 매년 3월 1일이 되면 마음 속에서 누구나 태극기를 들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만세 소리가 들려온다. 3월 내내 그렇게 외친다.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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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시위] <10>박승의, 사도광산 유네스코 아리랑과 함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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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사할린’은 ‘동행’이다아리랑은 민중들의 공시매체이다. 간결한 선율에 두 줄의 사설로 개인적인, 또는 집단적인 심사를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의 기쁨과 슬픔을 자연스럽게 반영하여 노래로 주고받아 소통하는 것이다. 아리랑의 이러한 매체성은 적어도 1930년대 해외 동포들에게는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으로 체화된 문화였다. 그래서 1930년대 말부터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동포들도 아리랑을 통해 참상을 드러냈다. 그 아리랑은 너무나 늦게 우리에게 전해진 ‘사할린아리랑’이다. ‘사할린아리랑’은 ‘동토(凍土)의 눈물’이었다. " 따뜻한 조선을 놔두고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왔나 우리님 따라서 내여기 왔지"(사할린아리랑) 나의 사할린 동포에 대한 이해는 이렇게 아리랑이란 프리즘을 통해서였다. 2010년대 들어 접하게 된 사할린 동포사회가 왜 아리랑을 부르는지를 알게 된다. 아리랑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지 10년이 지나서 였다. 이 부끄러움으로 사할린 동포를 만나고 공부하였다. 결국 ‘사할린아리랑제’라는 이름으로 가서 함께하게 되었다. 남사할린 곳곳의 흔적은 모두 위령제의 대상이었다. 세상에 이런 지역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가서 부른 조국의 아리랑은 장송곡이며 위령가가 되었다. ‘사할린아리랑’에 밴 눈물은 1, 2세대만의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법령이란 또는 제도란 이름의 한계로 눈물을 흘리는 동포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런 사정들을 들으며 10여 년을 오가는 동안 세상을 뜨신 분들도 있다. 그때마다 그분들의 한결같은 마지막 눈길은 조국을 향하였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것은 곧 "조국이여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라는 한스러운 호소였다. 내가 미약하지만 사할린 동포들과의 ‘동행’을 마음으로 약속한 계기는 이런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이 ‘동행’ 약속의 실천은 우선 동포들이 남긴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국내에 알리는 일과 기회가 되는대로 기록을 남길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전자는 수십 편의 문학작품을 남긴 춘계 류시욱 선생 기록을 찾아 문경에 ‘디아스포라문화원’을 설립하게 한 것이고, 후자는 국내 언론에 동포들의 사연들을 보도하게 한 일이다. 특히 후자에 주력을 하고 있다. 이 중 하나가 KBS한민족방송의 뜻깊은 사업에 연계시키는 일이다. 이를 기록들을 통해 후세에게 ‘사할린의 눈물’뿐만 아니라 조국과의 동행 과정을 전해주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나의 이런 작은 동포들과의 ‘동행’ 실천을 이해해 준 KBS 한민족방송으로부터 영예의 공로상을 받았다.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상임을 안다. 지금 사할린 현지와는 코로나19로 거의 단절 상태이다. 대신 SNS통신을 통한 온라인 소통과 국내 영주귀국 동포들을 통해 작은 동행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정도의 단절에도 전전긍긍하는데, 80년 동안 단절은 오죽했겠는가. 이런 생각하면 동행을 통한 소통의 계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알게 된다. 더 많은 이들과 더 많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어제는 양주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사할린에 살고 있는 박영자 단장의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대상 수상을 자축하는 짧은 모임을 가졌다. KBS 한민족 방송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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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민족방송, 중·CIS·러시아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중국 동북 3성을 비롯해 CIS 지역과 러시아 사할린 등에 사는 북방 동포를 대상으로 한민족 체험수기를 공모한다고 1일 밝혔다. 올해로 23회째를 맞는 이번 공모는 생활 속에서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우리 말과 글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체험담, 한류와 한글 생각을 담은 글과 영상이 대상이다. 글은 청소년과 성인 부문으로 나뉘며 영상은 별도로 한민족상으로 구분해 진행된다. 9월 24일까지 수기를 A4 용지 3∼10장 내외로, 영상 콘텐츠를 5∼10분 내외로 만들어 9월 24일까지 제출하면 된다. 청소년 부문에서는 대상 1명·우수상 2명·장려상 3명, 성인 부문에서는 대상 1명·우수상 9명·지도교원상 2명, 한민족상에서 우수상 2명을 시상한다. 한민족의 문화와 우리말 보급에 앞장선 학교·기관에 단체상을 시상한다. 수상작은 10월 9일 발표되며 자세한 사항을 알려면 KBS라디오 홈페이지(radio.kbs.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한민족 체험수기" KBS한민족상에서는 사할린동포가 수상을 했다. 한국에 영주귀국해서 살고 있는 박승의(前 사할린 국립대 교수)씨의 '가라후토로 팔려간 이쁜 고모', 공노원(사할린한국어교원협회 부회장) 씨의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리더'가 받았다. 러시아 사할린 홈스크시 주 코스탸 학생의 '저는 주 코스탸입니다'가 청소년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KBS 사회방송부 황형선 부장은 "지난해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한민족상'을 신설했는데 사할린동포들이 수상해 의미가 있었으며 사할린동포 4세인 주 코스탸 학생이 장려상까지 받아 뜻깊었다. 올해는 더 많은 사할린동포들이 참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출처] 2021년 6월11일( 음력 5월2일) 새고려신문 (사할린 새고려신문) | 작성자 bplu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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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국어 교육자, 박승의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이메일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세 번째 인터뷰는 사할린 한국어 교육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전 사할린국립대학 한국학과 박승의 (1941년 생)교수를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박승의 교수는 한국어교육에 힘쓰고. 사할린 한인 연구에 진작해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가 담긴 3대에 걸친 가족사가 자서전으로 출판되어서 관심을 받고 있다. 며칠을 밤새어서 들어도 끝나지 않는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박승의 교수의 사할린 디아스포라 이야기는 다음 2편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이번 1편에서는 사할린 한국어 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질문을 하고자 한다. 기미양-안녕하세요. 사할린에서 2010년 파주로 영주귀국하신지 올해가 11년이 되시네요.이번에 국외동포 체험수기공모전에 '사할린에 팔려간 이쁜고모'로 첫번째 KBS한민족상 수상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재외동포뉴스와 연합뉴스 및 국악신문 등 사할린 새고려신문에 주요 뉴스로 나갔습니다. 수상소감 부탁드립니다. 박승의-안녕하세요? 심사위원님들께 저의 소박한 글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할린 한인 1세대는 혼자 또는 가족과 사할린에 강제동원, 강제이주하여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목숨을 담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탄광과 산판에서 모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건강의 악화와 자녀의 양육 및 교육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모국귀환의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의 지원 대상자들은 영주귀국을 선택하느냐, 사할린에 잔류하느냐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출생한 사할린 한인은 영주귀국 지원대상에 제외되기 때문에 또다시 형제자매와 자손들과 헤어져 살아야 합니다. 이산의 이산은 세대를 거치면서 반복됩니다. 기존 기록에서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역사적 측면에서 주로 남자들이 강제동원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여성들이 남편을 찾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후토(사할린)로 가서 모진 고통을 이겨낸 사실을 묘사한 글은 전혀 없습니다. 작은 글이나마 여성들의 공적을 공평하게 평가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잊어서는 안되는 뼈아픈 역사를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싶었습니다. 러시아에 살지만 뿌리를 잊지말자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일단 이 수상 소식이 여러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가 주목을 받고 이슈화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KBS방송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Q:박승의 교수님은 사할린2세로서 1945년 이전에 태어나셔서 사할린1세의 자격으로 한국에 영구귀국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서 사할린에 강제동원 되었는지요? 처음에 어느 지역으로 배치되었나요? A; 밀양 박씨 아버지 고향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입니다. 1939년 결혼 후 한달 반만에 강제모집으로 가라후토에 가게 됐습니다. 그 당시 오찌아이 (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습니다. 이후에 어머니는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나셨고 임신 상태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경유해서 가라후토에 오셨습니다. 1945년에 해방되셨으나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끝끝내 타국의 땅에 파묻혔습니다. 한국에 와서 조상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고향에는 2번 방문했습니다. 자세한 가족사는 최근 출판한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에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Q:보내주신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저자: 박승의)는 잘 읽었습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단숨에 읽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메세지는 ’조선인 박승의‘, 다까하라 가쯔요시, 보꾸 다까하라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대한민국 박승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야만 했다는 부분입니다. 구체적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일제강점기 당시 저는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당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일본국적을 지닌 조선인으로 출생을 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이 되었지만 가라후토에 억류된 조선인으로 아버지의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무국적 조선인으로 살다 소련 국적을 받게 되고. 다시 러시아 국적을 받게 되고 러시아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78년을 살면서 6번이나 국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일제시대에 태어나서 3년동안 일본 국민으로, 1945년 해방 후 무국적자로, 1958년에 북한 공민으로, 1970년대 소련 국적자로, 1990년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 국민으로, 그리고 2010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삶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는 일본 아이들과 놀면서 일본말과 더불어 일제 사상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1948년 조선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 받았으며, 2009년부터 대한민국 자본주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제도가 바뀌면서 이름도 변해야 했습니다. 다카하라 가쯔요시에서 박승의로, 박승의에서 박유라로. 의사소통도 세 민족의 언어로 하였습니다. 일본어, 러시아어, 그리고 한국어로. 그래서 나 스스로"나는 누구냐?”란 질문에 답할 때 머리가 터질 지경으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타 지방에서 살면서 우리 민족의식과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 부모들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사할린 영주귀국자들은 대다수 결혼도 같은 동포끼리 했으며 현재 러시아에 남아있는 자녀들도 러시아인과 결혼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강한 학구열을 가지고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이기도 합니다. 평생 러시아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한국 음식을 고집해 먹는가 하면 다른 민족들에게 한국요리 조리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Q: 지난 신문방송에서 ”한글을 알아야 한민족 정신을 지킨다" ‘사할린 한국어 운동가 박승의’ 라는 짧은 다큐를 보았습니다. 사할린에서 한국어 교육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서로 동질감을 느껴 힘을 나누면서 하나로 뭉칩니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조국이 아닌 해외에 살며 한민족 정신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세계화 추세에 맞추어 세계 한민족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합니다.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서로 힘이 되어주고 한민족의 인식을 더욱 강화시켜야 하므로 이 측면에서 한국어 교육 및 민족교육은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많이 발전하며 잘 사는 것이 국외 동포들에게는 무한한 힘이 되고 자부심을 갖게하는것임은두말할나위없습니다.저도 1988서울올림픽 이후 사할린에서 '한국 붐'이 일어 났을 때 한국어 교육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89년에 여러 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으며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협회설립 초기부터 회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1992년에 6개월간 서울 연세대 어학당을 마치고 사할린대학교 한영과에 취직하여 전임 교수로 거의 20년 동안 자라나는 4세대의 교육과 교양에 모든 정성과 힘을 바쳤습니다. Q: 2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할린한국어교사협의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A; 1992년에 사할린주 한국어 교사 협의회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이 협의회(회장으로 이옥자, 공노원, 김순희, 박승의, 코르네예바 이브)에서 한국어 지도에 필요한 교재 구입과 공급 그리고 한국어교사 연수회를 주관하고 일반 학교 학생들의 한국어 경시 대회를 매년 조직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인단체와 연합하여 대한민국 교육부에 건의하여 사할린에 교육원을 설립하도록 힘썼습니다. 한국어 교육 활성화를 교사협회는 사할린한국교육원과도 밀접히 사업하고 있으며, 한국교육원은 한국측에서, 협회는 러시아측에서 사할린에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Q: 사할린 한국어교육을 위해 사할린 동포사회는 어떤 일을 해오고 있나요? A; 사할린 한인 사회의 언어 문제는 역사적 여건에 의해서 이루어진 언어의 간섭과 접촉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특이합니다. 일제때 사용하던 일본어가 한국어와 러시아 어 사이에 끼어들어 있습니다. 한인1세는 모국어인 한국어, 생활어였던 일본어, 그리고 러시아어를 구사합니다. 이들의 한국어 읽기 쓰기 능력은 떨어지며, 러시아어도 정확한 구사는 어려운 듯합니다. 한인 2세 가운데 1935년 이전 출생자는 부모에게서 배우고 들은 한국어를 구사하며, 학창 시절을 일본어로 보냈고, 러시아어를 정식으로 교육받기 시작한 세대입니다. 이들 가운데 대략 1941년 이후 출생자는 공식 언어생활을 러시아어로 한 세대입니다. 가정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쓰기도 하였고 투철한 민족 의식을 갖지 않거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생활하지 않은 사람은 한국어를 잘하지 못합니다. 조선학교가 있었던 1946년부터 1964년 사이에 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국어를 잘합니다. 그러나 1964년부터 25년 간 한국어 공백 기간에 청소년기를 보낸 30, 40대들은 한국어를 잘 구사할 수가 없지만, 능숙해진 사람이 많이 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한인 3세는 공식적인 언어생활을 러시아어로 하여 모든 생활이나 사고 방식이 러시아인과 같습니다. 한국어를 잘 쓰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은 당연히 한국어를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은 외국인(러시아 인)에게 하는 한국어 교육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Q: 사할린에 강제동원으로 끌려온 경북 의성 출신이고, 당시 지식인으로 활동했던 춘계 '류시욱' 선생님이 남기신 한글 일기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셨는데, 어떤 작품인가요? A; 나는 춘계 류시욱의 '산중 반월기 (山中半月記)'를 여러번 읽고 러시아어로 번역했습니다.춘계 류시욱은 1920년 5월 14일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속암동 고실촌 류성룡 선생 집안에서 13대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류시욱은 젊은 시절에 문예 창작과 사상활동을 벌이다가 서대문형무소와 사상범 교화보호소에서 옥중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사상범으로 출옥한 조선인들에게 강요된 징병을 피하기 위해 류시욱은 가라후토(현 사할린)로의 동원을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산업보국대원으로 찍혀 마을 사람 20여명과 함께 사할린으로 끌려가게 되어 가라후토 나이부치 탄광에 도착한 때가 1941년 2월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으나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조선학교의 교사로 류춘계 선생은 돌린스크 구역에서와 돌린스크시에서 교원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조선어 문법” 및 "조선 문학”을 가르치셨습니다. 조선학교 폐교 후 '세월은 흘러가고 과거의 꿈은 사나운 폭풍에 갈가리 찢겨 쓸쓸한 유폐의 암흑' 속에서 류시욱의 시절은 무의미하게 지나갔습니다. 희망도 기대도 없이 그는 인생의 반 이상을 이국 땅의 노동자로 살다가 1962년에 노동 현장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춘계 류시욱이 1957년 9월 1일부터 15일까지 15일간 사할린 "크라스노고르스크 임산 사업소 직속인 임동화(林東樺) 브리가다가 새풀치러 가는 곳에 식모(食母, 밥을 해주는 사람)로 따라가 쓴 일기다”(저자의 자서에서). 저자가 1957년 9월의 보름을 지낸 사할린 크라스노고로스크의 산속은 외부와 100리 고립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단절된 허술한 풍막은 고향과 수천 리 떨어진 사할린 섬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갇힌 삶과 닮아 있었습니다. 목적 없는 삶 속에서 하루살이하는 매일 매일의 끝없는 외로움 때문에 그는 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동료들이 새풀을 치러 나간 후 혼자가 되면 구멍 뚫린 천막 앞으로 나와 소통에 대한 소원을 페이지마다 채워 나갔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토의하며 일제의 강압과 이데올로기의 장벽으로 생이별하게 된 가족과 이른바 내적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던 그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고향의 ‘한오리 신작로’가 뻗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는 정직하게 사할린으로 끌려가 소련 체제에 갇혀버린 평범한 조선인들이 수없이 우물거렸을 속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일기는 개인적 회고를 넘어 자신이 동원되었을 시기를 전후한 시대와 인물들에 대해 날카롭고도 풍부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가치있는 사료가 되었습니다. Q: 춘계 선생 외 사할린의 한인문학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사할린 한인의 문학은 CIS 한인들의 문학과 같이 상당히 오래되고 견고한 전통을 자랑하지는 못합니다. 이는 러시아에서의 거주 기간이 겨우 70년이이고,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도, 그리고 사할린의 초기 한인 이주민들이 일본 당국에 의해 남한의 시골에서 사할린으로 동원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다는 사실로도 설명됩니다. 이것은 특히 전후 첫 시기에 사할린에서의 지식인 집단 형성에서도 나타남을 의미합니다.'사할린의 한인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김증손과 아나톨리 김이 사할린에 거주하며 사할린에 대한 글을 썼던 작가들이지만,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고려인)이었고, 그들의 작품은 CIS의 모든 한인 디아스포라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할린 한인들 중에서 우리는 장윤기와 허로만의 작품을 알고 있으며, 사할린의 문학 전통에 중요한 영향을 주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에서 유명한 일부 다른 저자들(양 세르게이)을 알고 있습니다. Q: 사할린 한인으로서, 교육자로서, 사할린한국문화원과 교육부에 요청을 하고 싶은 것은? A; 사할린의 한국어 교육은 사할린 한인 1세의 영주귀국으로 인한 한인동포수의 감소, 한국어교사 부족 및 고령화 현상 등으로 점차 악화되는 추세입니다. 말을 잊어버리면 다음에는 고유의 문화를 잊게되고 결국에 가서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할린 한국교육원에서는 한인동포 청소년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매년 한국어 교사를 대상으로 교원 연수를 한국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모국연수 기회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에게 한국연수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사관, 교육원, 한인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한민족 전통문화를 동포들과 현지 러시아인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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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동포 박승의 원장, KBS한민족방송 수기공모전에서 ‘한민족상’ 수상.[KBS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토요초대석] 사할린으로 이주한 한인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가라우또로로 팔려간 우리 이쁜 고모』가 KBS한민족방송이 주최한 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에서 ‘한민족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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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한민족방송 <2020 제 22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수상작 발표<2020 제 22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수상작 발표 * <2020 제 22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청소년 부문 대상 " 중국 길림성 용정시 김윤주 학생의 <색 바래져 가는 우리 언어> *청소년 부문 우수상 * 중국 흑룡강성 할빈시 정아형 학생의 <우리말 사랑> 중국 흑룡강성 오상시 이승연 학생의 <자랑스러운 나의 아빠 엄마> * 청소년 부문 장려상 * 중국 길림성 훈춘시 황정룡 학생의 <한복을 빌려주면서>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주승현 학생의 <향기> 러시아 사할린 홈스크시 주 코스탸 학생의 <저는 주 코스탸입니다.> * <2020 제 22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성인 부문 대상 * 중국 길림성 안도현 리련옥 씨의 <내 생애에 제일 잘한 세 가지 일> * <2020 제 22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성인 부문 우수상 * 중국 요녕성 심양시 박동찬 씨의 <46년생 김화진의 고향학개론> 대한민국 제주시 김혜영 씨의 <석양홍> 대한민국 경기도 광명시 박연희 씨의 <낯선 이름 앞에 당당히> 중국 길림성 연길시 최일심 씨의 <인연> 중국 길림성 안도현 전형춘 씨의 <엄마의 손마선> * <2020 제 22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영상 및 오디오콘텐츠 부문 * 영상 부문 - 대한민국 서울시 영등포구 전길운 씨의 <한국생활 정착기> 오디오콘텐츠 부문 - 중국 길림성 연길시 박미령 씨의 <코로나19로 보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 * <2020 제 22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한민족상 *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박승의 씨의 <가라후토로 팔려간 이쁜 고모>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남동구 공노원 씨의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리더> * 지도교원상 *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족중학교 신영애 선생님 중국 길림성 훈춘시 제4소학교 유춘란 선생님 * 단체상 *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족중학교 <2020 제 22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수상하신 모든 분들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http://program.kbs.co.kr/scr/radio/face/pc/board.html?smenu=906dc8&bbs_loc=R2002-0241-03-42958,list,none,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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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KBS ‘한민족상’...사할린동포 박승의, 공노원 수상제22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한민족상’ 수상자와 5개 분야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10월 9일 한글날 오전 7시 KBS 한민족방송(AM 972, 1170KHz/ 라디오전용 애플리케이션 Kong)을 통해 북방 동포사회에 방송되었다. 발표 결과는 이번 신설 지역으로 관심을 집중시킨 ‘한민족상’ 수상자는 전 사할린사범대학 박승의 교수와 사할린한국어교원협회 공노원 부회장이 공동 수상했다. 박교수는 체험수기 <가라후토로 팔려간 이쁜 고모>, 공노원 여사는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리더’로서의 공적이 평가 되었다. 또한 5개 분야 체험 및 공적상은 청소년부문 대상에 용정 김윤주의 <색 바래져 가는 우리 언어>, 성인 부문 대상에 안도현 리련옥 <내 생애에 제일 잘한 세 가지 일>, 영상/오디오콘텐츠 부문에 영등포구 전길운씨와 연길시 박미령씨가 각각 선정되었다.또한 지도교원상에 조선족중학교 신영애 교사와 제4소학교 유춘란 교사가 선정되었고,단체상에는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족중학교가 선정되었다. KBS 한민족방송이주최하는 이상은 북방동포의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은 물론 타민족과 더불어 살아가며 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우리말과 글을 보존하는 이들을 격려, 포상하는 시상제도다. 금년이 21회로 지난 1998년부터 실시해 왔다. 특히 금년은 한러수교 30년 기념으로 러시아 고려인 및 사할린 동포를 대상으로 한 ‘한민족상’을 신설하였다. ‘한민족상’ 첫 수상자인 박승희교수는 사할린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에 영주귀국하여 경기도 파주시에 거주하고 있다. 수상작인 <가라후토로 팔려간 이쁜 고모>는 일제 강제동원과 사할린 이주와 억류, 그리고 미귀환 되면서 사할린에서 3대가 뿌리를 내린 가족사를 그렸다. 공동 수상자인 공로원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은 인천광역시 남동구에 영주귀국하였다. 수상 공적은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리더 활동상이다. 제출한 동영상에 의하면 한국 이름과 무국적으로 살다간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기 위해 현재 한국에서도 고려인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한편 시상식은 11월 23일 KBS홀에서 한민족방송 대표 프로그램인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의 20년 장수MC인 방송인 이소연의 사회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무산되어 수상자들이 아쉬워 했다. 올해에도 300여 편이 응모되었다. 22주년을 맞은 올해는 동포 2세, 4세들이 다수 참여했고 국내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참여가 작년보다 줄었다. 그러나 올해는 러시아 동포들이 처음으로 참여하여 하바롭스크한국교육원과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관계 동포들이 참여했다는 것이 큰 의의가 있다. 기타 수상 관련 정보는 본보 보도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기미양/국악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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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전 사할린국립대학 한국어학과 교수박승의 (朴 勝 義 ) 번역작가 :"산중반월기" 러시아 번역 저서: "박승의 나는 누구인가-사할린 강제징용 가족의 수난과 극복" (구름바다, 2019) 출생: 1942년2월 26일카라후토 (현사할린주) 니토이촌 (현노보예)에서출생. 출신: 유즈노사할린스크 국립사범대학물리수학과 (1967). 최종학력: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수료 (1993). 연혁: 사할린국립종합대학교 경제 및 동양학대학 한영과교수 (1993–2011). 사할린주 한국어교사협의회장 (2006 – 2009). 사할린주 한인협회이사 (2005 – 2011).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협회 감사위원장 (1995 – 2011).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사할린주 한국어경시대회 심사위원장(2003 – 2009). 사할린주 교육부 한국어심사위원 (2003 – 2011).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사할린영주귀국자협회부회장 (2016 – 2017)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사할린영주귀국자협회회장 (2017 –현재) 현 디아스포라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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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 (저자:박승의/전 사할린 국립대학 한국학과 교수)이 책은 일제강점기 사할린 강제징용 가족의 수난과 극복에 대한 박승의 역사에세이이다. 박승의 아버지는 1939년에 일본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어 사할린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여 사할린은 러시아가 차지하였다. 그리워하던 조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일본은 조선인을 버려두고 저희끼리만 떠났다. 사할린에서 오도가도 못한 신세로 50년 넘도록 무국적자로 살다가 그리운 고향 땅으로 갈 날만을 기다리다가 차가운 땅에 묻힌 1세 강제징용자들과 가족의 비극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1990년대에 러시아와 국교가 맺어져서 사할린 한인 1세의 영주귀국이 이루어졌다. 해방 이전에 사할린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강제징용자 1세대에 포함하여 영주귀국을 하였는데 박승의 선생님도 그 때 대한민국 파주시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금은 대한민국 국적을 갖게 되었지만 박승의 선생님은 지금까지 여섯번의 국적을 바꿔야 했다. 박승의 선생님은 사할린대학교 한국어 교수가 되어 사할린 한인의 위하여 한국어 교육에 힘썼다. 현재는 파주에 거주하면서 사할린 강제징용의 역사와 강제징용 가족의 이야기들을 글로 쓰고 널리 알리고 있다. 사할린 강제징용 가족의 수난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목차 - 작가의 말 - 들어가는 시 : 만고풍상 1. 가라후토에서 태어난 일본국적의 조선아이 2. 가라후토에 팔려 온 고모 이야기 3. 부모의 혼례와 강제징용 4.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선 사람들 5. 해방 이후 사할린에 버려진 조선 사람들 6. 어린 시절 불타버린 일본식 목조 집 7. 어린 시절 늦가을의 무서운 기억 8. 나는 조선 학교 학생 9. 러시아 중학교 10년제를 졸업하다 10. 추억에만 남아 있는 내 ‘작은 고향’ 11. 대학에 가고 싶다 - 평양? 모스크바? 12. 나는 유즈노사할린스크 국립 사범대학교 학생 13. 감자 캐는 대학생, 술을 배우다 14. 나는 누구입니까? 15. 사할린 한인의 혼례식과 나의 결혼 16. 내 삶의 제1전환기 : 교직 - 기술직 - 교직 17. 조선과의 첫 상봉: 희망 반, 실망 반 18. 내 삶의 제2전환기 : 한국어 교수 19. 사할린 한인의 생활문화 탐구 20. 사할린 한인의 민족 정체성 21. 사할린 소수민족과 사할린 한인의 의례 22. 나는 사할린 주 교사협의회 회장 23. 나는 영주귀국자! 24. 사할린 한인 귀환운동가 故박노학 씨 기린다 25. 시인 류춘계의 고향을 답사하다 26. 텃밭은 나의 영원한 동반자! 저자 소개 박승의(1942년생) 1942년 사할린 남부 가라후토 출생이다. 사할린대학교 경제 및 동양학대학 교수, 사할린 주 한인 협회 이사, 사할린 주 한국어 교원협회 회장, 고 박노학 회장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현재 사할린 주 한인역사 연구원, 파주시 사할린 영주귀국자 협회 회장, 디아스포라 문화원 원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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