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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생 60여년, 한상일 대구시립국악단 예술감독한상일(1955~) 대구시립국악단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는 국악에 입문한 지 올해로 60여 년을 맞는다. 때 맞춰 지난 1월 25일 서울문화투데이 신문에서 선정하는 제15회 문화대상에서 국악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국립창극단을 대형화하고,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했으며, 우리 민요 아리랑의 보급에 큰 기여를 해왔으니 만큼 수상은 당연해 보인다. 한 감독을 3월 30일 오전 창덕궁 근처에서 만났다. 창덕궁의 건너편에 있었던 옛 국악학교 터와 창극 연출가 허규(1934~2000) 선생이 운영하던 북촌창우극장에 대한 추억이 아련한 곳이다. 한 감독이 배우고 공연했던 시간들이 켜켜이 밴 공간들이었다. 한감독의 음악 인생은 아버지 한범수(1911~1984) 선생에게서 비롯됐다. 해금과 대금 연주에서 ‘한범수류’를 만든 장인이셨다. Q. ‘한범수류’는 어떤 특색을 가졌나요? A. "진양은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가락을 짰고, 중모리에는 바리에이션을 넣었어요. 대개 산조는 판소리 어법을 많이 차용하는데 선친은 판소리 어법을 배제한 채 기악을 판소리의 아류가 아닌 개성을 갖춘 독자적 영역으로 만들었죠. 독립곡 형태의 양식을 갖는 잘 짜인 산조였어요.” 한 감독은 출생지인 충남 부여에서 옮겨와 서울서 살던 9살 무렵부터 선친에게서 악기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적(소금)에 입술을 갖다 대고 ‘빈 병 불 듯이’ 소리를 내는 법부터 배웠다. 맨 처음 부른 곡은 아리랑이었다. 유일하게 알던 곡이었던 까닭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들어보시더니 ‘재능이 있다’ 느끼셨는지 ‘한번 해보자’고 하시더군요” 본격적인 교육은 배문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전문 과정이니 만큼 선친은 곡의 음악적 성격과 그에 합당한 표현법에 관한 이론을 먼저 설명하신 후에 연주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이론 먼저 기능 나중’식 교육법이었다. 산조곡은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12주기와 24주기 식 기승전결법을 배웠다. 기자는 연주가 스토리를 가진 채 청중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아버지의 도제식 교육으로 소금과 대금을 사사한 후에 서울국악예고와 추계예술대학에 진학해 피리를 전공했다. 왼손잡이여서 대금 연주는 접었다. 다른 연주자들과 대금 잡는 방향이 거꾸로여서 합주에 지장을 준 때문이었다. 이후 한상일은 작곡의 길에 들어서 중앙대 대학원 작곡 과정 석사를 거쳐 1987년 국립창극단 기악부 초대 지휘자로 임명되면서 창극에 전주곡을 비롯, 간주곡과 엔딩곡 등을 작곡해 기악 연주를 가세한다. 소리꾼과 고수 2인의 무대인 판소리와 달리 창극에는 출연자가 많이 등장하고 다양한 연기가 표출되는 만큼 기악 연주의 역할이 절대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 획기적 시도로 창극의 사이즈를 대형화시키는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여기서 그는 국악관현악단 창단의 필요성에 몰입한다. 서구의 오페라나 발레처럼 노래와 춤에 걸맞은 관현악단의 기악 연주가 더해짐으로써 창극 공연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싶었다. 기왕에는 연주자들이 재량껏 즉흥연주로 채우던 부분을 악보에 근거한 연주로 체계화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95년 1월 1일 마침내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됐다. 이 공로로 그는 2000년 국무총리 표창과 200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후 모교인 서울국악예술고(현 국립전통예술고)에서 5년간 교사 생활을 했고, 동국대학교에서 20여 년 간 한국음악을 가르치면서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동국대에서 1년 정도 재직했을 때인 1999년 문화부에서 연락이 왔다. 초대 박범훈 단장에 이어 제2대 국립국악관현악단장으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관을 창설시킨 주역이었으니 만큼 자연스러운 주문이었다. 동국대 강의가 걸림돌이 됐으나 ‘강의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겠다’는 한 교수의 다짐과 설득에 당시 송석구 동국대 총장이 흔쾌히 응해주면서 그는 겸직을 할 수 있었다. 한 단장 재임 시절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그의 창의력 넘치는 작곡과 연주 지휘에 힘입어 창극, 무용 등의 장르와 동반 성장하며 "한국음악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맥’과 ‘강강술래’, ‘대(代)’ 등이 그의 분신들이다. 그는 특히 강강술래의 매력을 잊지 못한다. 진도 아낙들이 힘든 시집살이의 슬픔과 고된 노동의 괴로움을 노랫말과 군무로 씻어내는 놀이문화여서 전국화시켜 국민놀이로 승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애와 한을 해학과 긍정으로 바꾸는 지혜와 의지가 표출되는 놀이인 까닭이다. 강강술래의 다양한 버전을 작사작곡해 각계각층에 전파하고 싶어 한다. 기자 역시 대립과 갈등이 있는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강강술래 놀이가 확산되면 모순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강강술래의 아리랑화(化)’일 터이다. 한상일 감독의 이력 가운데 특이한 부분은 박사 코스였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 때문이었다. Q. 왜 갑자기 동양철학을 공부하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A."원래는 예악학(禮樂學)을 공부하고 싶어서였어요. 전통음악을 하다 보니 예악의 뿌리와 이론적 배경을 알고 싶었죠” 그러나 기대와 달리 유학대학원에서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 해석만 배웠지 예악에 관해서는 공부할 길이 없었다. 책도 교수진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는 결국 판소리가 어떻게 체계화됐는지의 과정을 연구해 그걸로 학위를 취득했다. 억지춘양으로 배운 것들이었지만, 경전 공부가 한국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고 깊게 만들어준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소리에 대해 인식을 새로이 하면서 세계인이 좋아할 만한 소리를 개발하기 위해 전통악기를 개량하는 시도에 힘을 보탰던 것도 그런 영향이었다. 국악의 보전과 계승, 창작 지원 그리고 해외 진출을 돕는 ‘국악진흥법’이 지난해 6월 국회를 통과해 올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국악인들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현역의 한상일 감독도 환영을 표한다. Q. ‘국악진흥법’은 국악인들의 오랜 숙원이지요. A.-"네, 국악인들이 오랫동안 바라던 거여서 기대가 큽니다. 우리 국악사에 선을 긋는 전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 ‘국악의 날’을 제정해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길이 간직해 나갔으면, 하는 희망도 피력한다. 일반의 관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능할 것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Q.국악이 국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A."국민들로 하여금 국악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여건 조성이 중요합니다. 일본이 학교 졸업식 같은 행사에 반드시 ‘사미센’ 연주를 동반하고 영화나 드라마, 만화 등에도 일본 음악을 삽입하는 걸 볼 때마다 부러움을 갖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어요” 한 감독은 대중매체가 좀 더 국악 프로그램 편성에 시간을 할애하는 게 큰 힘이 되는 만큼 정책 차원에서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도 피력한다. 아울러 교육 과정에도 국악 악기 연주 코스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한때 베네수엘라의 불우 청소년 계도 프로그램이던 ‘엘 시스테마(El Systema)’를 도입해 청소년 국악기악단을 운영하던 중 지도 교수의 운영비 횡령 사건으로 중단 돼버린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 프로그램의 부활을 기다린다. 기자는 국악진흥책 시행을 계기로 세계로 뻗는 K-pop의 흐름에 K-국악도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우리 가요가 한국음악 전공자들의 가세로 탄력을 받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 까닭이다. 세계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소리와 노래, 춤을 바탕으로 하는 킬러 콘텐츠가 나올 수 있도록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한상일 감독의 아리랑에 대한 관심도 깊다. 생애 첫 피리 연주곡이 아리랑이기도 했지만, 아리랑이 국악의 대중화와 보급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데다 무엇보다 한민족의 정신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Q.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A."우리 민족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아리랑에 의지해 살아왔습니다. 아리랑을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선교사이던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의 표현처럼 ‘한민족에게 쌀과 같은 필수불가결한 존재’ 혹은 고난 극복의 수단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한상일 감독은 1989년 무렵 (사)아리랑연합회 창립에 일조하며 임원을 맡으면서 아리랑의 보급과 대중화에 이바지해 왔다. 특히 발굴과 보존 및 아리랑의 가치 구현에 관심이 크다. 19세기부터 중앙아시아와 사할린 등지로 내몰린 동포들이 한국을 이루는 요소들 즉, 겨레의 글 한글과 겨레의 민요 아리랑에 의지해 고난의 세월을 견뎌 왔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들은 낯선 환경에서도 그곳 풍경을 담은 아리랑 노랫말을 우리말로 지어 불렀다. 그들에게 한글과 아리랑은 등대의 불빛처럼 어둠 속에서 앞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범민족 차원에서 북한에 존재하는 아리랑도 수집해 보존할 생각도 펴고 싶어 한다. 한 감독은 아리랑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과정에서 음원을 제작하는 공헌을 했다. 대표 아리랑을 모아 일류 장인들과 연주했다. 올 6월 대규모의 아리랑축제를 상정해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행사가 성사 된다면 수 천 명의 전국 생활국악인들이 대규모 인간띠를 만들어 대합창을 이뤄내는 순간 대한민국은 용트림을 하며 에너지를 뿜어댈 것이다. 우리 속의 편협과 미움을 떨쳐내는 벅찬 경험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하자 한상일 감독이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라고 말한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가 여생의 계획으로 ‘아리랑 정신의 구현’을 버킷 리스트의 맨 윗부분에 올려놓고 있는 까닭이다. 한 감독은 자기에게도 그 기회가 닿기를 갈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일본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아리랑을 가져가 30여곡의 ‘일본판 아리랑’을 작곡했다.”라는 일본 매체의 보도를 접하면서 문화는 창조의 힘만큼이나 보존능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게 된다. 단단히 움켜잡지 않으면 놓치게 마련이다. 한상일 감독의 아리랑 보존과 전승 노력에 절로 박수를 치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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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군홍, 80여 년 걸려 우리에게 온 화가그림 한 점이 시선을 붙잡았다. 젊은 어머니가 아들을 품에 안은 모습이었다. 남편은 이 그림이 마지막이 될 줄 모르고 북으로 가버렸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렇게 임군홍(1912~1979) 화백과 첫 대면을 했다. 1950년 작품이다. 화가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그해 화가는 북으로 넘어가면서 가족과 영영 이별했다. 기자는 그림 속 두 살배기 아이에게서 슬픔을 느꼈다. 7월 27일부터 두 달간 열리는 ‘임군홍 전’을 준비 중인 압구정동 예화랑에서 74세의 장년이 된 그를 만났다. 아들은 그림의 전후 사정을 어머니와 7살 위 형에게서 들어 "그랬구나”라고 느낄 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이나 서러움 같은 건 달리 내비치지 않았다. 들은 이야기와 사진, 그림들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줄곧 그려온 까닭이었을 것이다. 백부로부터 아버지의 소년 시절을, 어머니로부터는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백부는 동경 유학까지 갔던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집안의 결혼 강요 탓에 의기를 꺾었던 사연을 안고 있어 더욱 화가 동생의 불행을 가슴 아파했다. 임군홍은 김환기, 이인성, 이중섭, 박수근 등 20세기 초반의 대가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으나 조명을 받지 못했다. 박수근처럼 그도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했다. 주교공립보통학교 시절 미술교사였던 김종태1906~35와 윤희순1902~?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에 눈 떴고, 졸업 후 치과병원에서 기공사로 일하면서 경성양화연구소에서 약간의 수업을 받은 게 미술 공부의 전부였다. 김종태는 야수파 화풍을 보이며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자화상’으로 입선한 후 이듬해 ‘포오즈’로 특선을 차지하여 연이어 여섯 차례에 걸쳐 특선을 차지한 스타 화가였고, 윤희순 역시 평론가로도 활동한 유명 미술인이어서 임군홍의 기초를 탄탄하게 잡아주었다. 특히 몇 번의 붓질로 대상의 아웃 라인을 잡는 건 스승 김종태의 기법과 꼭 닮았다. 일본에서 들여온 미술잡지들을 통해 인상파와 야수파, 표현파들의 그림을 살피는 것도 공부였다. 임군홍은 1931년 선전에 유화 ‘봄 스케치’로 입선한 후 1936년 ‘여인 좌상’으로 다시 입선하고 이듬해에 ‘소녀상’으로 또 입선한다. 이후부터 1941년까지는 풍경화로 해마다 입선을 거듭한다. ‘소녀상’은 사귄 지 1년 된 결혼 전 아내를 모델로 삼아 그렸다. 연이은 입선 후 그는 아내에게 비취반지를 선물한 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아내는 반지를 낀 손을 곧게 펴 자랑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행복한 시기였다. 간호사이던 아내 홍우순(1915~1982)과는 치과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홍우순은 현재 가수이면서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솔비의 이모할머니이다. 1938년까지 3회의 동인전과 한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이즈음 본명인 수룡(水龍)을 버리고 군홍(群鴻)으로 활동한다. 나머지 두 아들도 이름을 득용(得龍), 점용(點龍)으로 지었을 만큼 유가의 집안임을 자부했던 부친의 뜻을 저버린 셈이었다. 자신이 집착한 용을 마다하고 기러기를 택한 아들의 결정을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듯싶다. 혹시 ‘군계일홍(群鷄一鴻)’의 뜻이었다면 수긍해 주셨을까. 임군홍은 1939년 돌연 중국행을 택한다. 결혼을 앞두고 돈을 벌 생각으로 광고디자인 사업을 병행하던 중이었다. 넓고 큰 중국 시장에서 빠른 승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만주와 북경을 거쳐 호북성 무한에 터를 잡았다. 최고 번화가인 화루가(花樓街)에 회사를 차려 사진 인화, 광고, 인테리어 사업을 전개했다. 조선인 서화가들이 중국에 남긴 작품들을 찾아서 파는 일도 했다. 간송 전형필(1906~1962)도 수집 차 여러 번 그의 가게를 찾아오곤 했다. ‘꽃으로 단장한 거리’라는 매력적인 이름의 거리는 미감을 중시하는 화가와 잘 맞았을 것이다. 실제 임군홍은 이 거리의 풍경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루가 골목의 풍경을 담은 그림에 등장하는 간판의 ‘照相放大’가 ‘사진 인화 확대’라는 뜻이라고 일러주자 임 선생의 차남 임덕진(1948~ )씨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덕분에 그 가게가 아버지 회사였음을 알게 됐다”라는 것이다. 임 화백은 그렇게 주변 풍경들에 마음을 주며 하나씩 그려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재래시장의 정육점을 담은 풍경화는 1941년 선전에 입선했다. 1946년 귀국할 때까지 사업과 그림을 병행했다. 이 시기 사업으로 바쁜 와중에서도 그린 그림들 가운데 기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금성 연작이었다. 묘하게도 그는 기자가 북경특파원으로 주재하던 시절 자주 찾았던 장소에서 자금성을 그렸다. 다름 아닌 자금성 뒤 경산(景山)이었다. 궁궐 옆에 북해 호수를 만드느라 퍼올린 흙으로 조성한 인공산으로서 우리 창덕궁 후원처럼 명 황제 일가의 휴식처였다. 명明 말기 대기근과 관리들의 수탈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이 자금성으로 진격해 오자 겁을 집어 먹은 숭정제는 뒷산으로 달아난다. 한참 자금성을 부감으로 내려다보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마침내 나무에 목을 매단다. 황제로서는 처절한 최후였다. 이 경산에서 바라보는 자금성 풍경이 압권이다. 2km에 달하는 궁궐 전각들의 황금색 기와들이 일제히 햇빛을 반사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왜 산 이름에 ‘경치 경景’ 자를 붙였는지 절로 이해가 되는 곳이다. 기자도 수시로 이곳에 올라 고궁을 내려다보면서도 단 한 번도 싫증을 낸 적이 없었다. 임 화백의 고궁 그림을 보면서 그는 왜 이곳을 그렇게 여러 번 올랐을까, 의문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경에 살고 있던 게 아니라 1,250km 떨어진 무한에 살면서 수시로 이곳을 찾기란 보통의 꽂힘이 아니고선 힘들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북경의 아이콘이기도 하지만, 숭정제의 비극이 깃든 역사가 서린 곳인 데다, 자금성의 미감을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포인트라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겠나, 짐작한다. 임 화백은 자금성 네 귀퉁이에 3층 높이로 서 있는 누각들에도 시선을 주었다. 공사 설계자가 디자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누군가의 "여치 조롱에서 힌트를 얻어 그대로 지었다”라는 후일담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건축물이다. 역시 조형미 덕에 세련된 미감이 감지되는 건축물이다. 임 화백은 천자天子의 상징인 천단天壇도 여러 번을 찾아 다양한 이미지를 화폭에 옮겼다. 이 시기 베이징을 자주 찾던 그는 저명한 일본인 화가들인 야자키 치요지(矢崎千代仁, 1872~1947),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 1888~1986)와 교분을 쌓는다. 각각 제국미술회 회원과 동경미술대학 교수를 지낸 이들이다. 그들 역시 자금성과 천단을 그린 점으로 미루어 현장에서 함께 작업하다 서로 사귀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야자키는 파스텔화로, 우메하라와 임군홍은 유화로 대상들을 묘사했다. 야자키는 임군홍의 초상화를 그려주었을 정도로 친했다. 1946년 서울로 돌아온 임 화백은 ‘고려광고사’라는 광고·디자인·인쇄 회사를 차려 사업을 계속했다. 서울의 첫 디자인 회사였다. 사업은 원만했으나 좌우 충돌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1947년 그는 용공분자로 몰린다. 좌익계 남편 안막과 동반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를 운수부(국토교통부)에서 주문받은 신년 달력에 올린 탓이었다. 별생각 없이 최승희의 지명도만을 생각했던 그는 자신에게 찍힌 ‘용공’ 낙인에 좌절한다. 1948년 옥에서 풀려났지만 혼탁한 해방공간에서 더 이상 남한에 있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일단 피신해야겠다는 생각에 택한 북한행이 가족과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는지 임 화백은 갓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 지극한 애정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인 ‘가족’에도 두 살배기 아들은 엄마 팔에 안겨 잠들어 있다. 7살 많은 형은 뛰어노느라 빠졌고, 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긴 두 살 터울의 누나는 한 곁에서 뾰로통한 표정이다. 탁자 위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물품들이 늘려 있다. 임 화백이 좋아했던 독일제 맥주 컵은 꽃을 꽂아 정물화에 여러 번 등장하고, 램프와 도자기, 항아리 등도 애용하던 소품들이었다. 그가 떠난 후 생활고를 겪던 모친이 시장에 내다 팔면서 모두 사라졌다. 둘째의 초상화 앞에서 기자는 먹먹해졌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낡은 액자를 뜯고 그림을 끄집어 내려하자 또 한 장의 그림이 뒤에 붙어 있었는데 고양이 그림이었다는 설명 때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살배기를 두고 가면서 아버지는 아들의 초상화 뒤에 수호신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을 지켜본다”라는 원모심려(遠謀深慮)의 마음을 길 떠나는 아버지는 비장의 그림으로 대신했다. 꽁꽁 묶여 보관돼 오던 임군홍 화백의 그림 120여 점이 그린 지 80여 년만에 우리에게 제대로 공개된다. 전시를 기획한 김방은 예화랑 대표는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그의 천재성이 조명되고, 일반이 접하기 쉽도록 기념관이 건립됐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을 말한다. 73년 전 아버지가 숨겨둔 수호신 덕에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수가 있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임덕진 씨는 "아버지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늘 아버지의 숨결을 느껴왔다”라고 말한다. ‘고양이 수호신’은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지극한 보살핌’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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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를 기록한 통역관이자 서화가, 청운 강진희청운菁雲 강진희姜璡熙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1851년에서 1919년까지 살다 가셨으니 일면식이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와 조우하게 된 것은 2022년 5월 29일 서울 강남의 가로수길에 위치한 예화랑에서였다. ‘연緣, 이어지다’라는 제목으로 사후 백여 년만에 처음 열린 기념전이었다. 예화랑 김방은 대표가 청운 선생의 피를 이어받은 혈연관계이고, 이혜신 큐레이터가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으며,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대표이사가 소장하고 있던 청운의 저서 '악부합영樂府合英'을 전시회에 내놓은 연유로 ‘인연’이 강조됐다. 예화랑 측은 한자로 쓰여진 악부합영을 고전번역원에 맡겨 번역해 소개하고, 관직에 있으면서 서화와 판소리 분야에서도 활동했던 강진희 선생의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그를 조명했다. 청운은 제대로 부각된 적이 없지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어학 실력도 뛰어나 한문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어사전을 펴냈으며,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일어와 영어를 구사해 1886년 일본공사접응관차를 거쳐, 1887년 통역원으로 박정양1841~1904 주미공사의 미국 수행을 맡았다. 주로 일어로 미국측과 소통했고, 그 내용을 우리측에 통역했다. 어떤 생김새였을까? 궁금해하던 기자에게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1888년 4월 26일 조지 워싱턴1732~99의 생가 버지니아 주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박정양 공사, 이종하 무관, 이하영 서기관과 나란히 섰는데, 그들보다 훨씬 큰 체격이다. 머리 하나는 차이가 날 정도로 키 차이를 보인다. 서화에 능했던 통역관은 처음 마주하는 서구의 문명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카메라가 없던 나라의 주재원이었던 까닭이다. 당시 서구의 과학문명은 당시 조선인들에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박정양보다 5년 앞서 미국을 방문했던 조선보빙사가 겪은 일화는 웃음짓게 만든다. 1년 뒤 갑신정변의 주범으로 멸문지화를 당하는 홍영식을 단장으로 민영익, 서광범, 유길준 등 20대의 조선 엘리트들이었다. 서구 문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춘 인물들이었음에도 그들이 받은 문화 충격은 컸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기는 이해불가였고, X-RAY는 "귀신의 소행”이었으며, 엘리베이터는 경악 그 자체였다. 사절단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만나자 넙죽 큰 절을 해 미국 신문에 그 모습이 실리기도 했다. 식탁에 흉기인 포크와 나이프가 오르는 건 "상스럽다”고 느꼈고, Y-shirts에 대해서는 "편리하겠다‘며 호감을 표했다. 청운은 큰 문화 간극 속에서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목격한 풍경을 머릿속에 각인했다가 조선에 돌아와 화선지에 붓으로 옮겨 소개했다. '미사묵연-화초청운잡화합벽'이다. 청운은 1911년부터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 등과 서화미술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청운은 금석학에 밝아 위창 오세창1864~1953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위창은 전서와 예서를 익혀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청운의 인물됨과 생애에 대해서는 남겨진 자료가 많지 않다. 이혜신 큐레이터가 찾은 김영욱의 2017년 논문 '청운 강진희의 생애와 서화 연구'에 서화가로서의 청운이 소개돼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청운의 저서 악부합영은 판소리 애호가로서의 청운의 면모를 보여준다. 두 자료를 근거로 그를 형상화해본다. 강진희는 35세에 관직에 진출해 60세까지 법부와 학부의 요직에서 관원으로 일했다.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와 교육부에 근무한 셈이다. 61세부터는 서화에 전념해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진주 강씨姜氏인 그의 가문은 누대로 의관醫官 집안이었다. 모친 역시 의관 집안이었다. 조모는 역관 집안 출신이었다. 청운은 의관 대신 역관을 선택했다. 조모인 천녕 현씨玄氏 가문의 영향이 컸다. 왜학倭學을 전공해 잡과에 합격해 사역원 종 9품직인 참봉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현재의 일어 통역관이었다. 당시 주미 공사관에는 참찬관 이완용1858~1926, 서기관 이상재1850~1927, 번역관 이채연1861~1900 등 10인이 근무했다. 이 당시 청운은 이미 전서에 조예가 있었던 모양이다. 강민기의 논문 '근대 전환기 한국 화가의 일본화 유입과 수용'에 한 일화가 소개된다. 청운이 미국행 배를 타기 위해 요코하마에 들렀을 때 일본 화가 야스다 베이사이安田米齌1845~88를 만나 '추경산수도' 1점을 선물 받고 자신의 전서 글씨를 선물한 까닭이다. 주제에 대한 접근의식도 집요했던 모양이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배에 19일간 동승했던 훗날의 주한미국대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목격담에 따르면, 청운은 가벼운 옷 차림으로 여객선의 홀에 나가 누구에게나 말을 걸고 다녔다. 알렌은 그런 청운을 "the snoop”으로 표현했다. 꼬치꼬치 캐묻고 다니며 탐색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청운은 그만큼 호기심이 많았으며 알고자하는 열망이 컸던 인물로 이해된다. 청운은 미국 체재 시절 박정양을 수행해 28개 공사관을 방문하며 외교 활동을 벌였고, 이상재, 이채연 등과 볼티모어 등 여러 지역을 유람하며 서양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1889년 귀국해 1910년 한성고등여학교 서기에서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법부와 학부에서 활동했다.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국한회어國韓會語' 편찬을 돕고, 역사와 지리 서적 간행에도 관여했다. 61세이던 해부터 1919년 타계하기까지 9년간은 서화가의 길을 걸었다. 앞서 워싱턴 주재 시절에도 장승업 풍의 '묵매도墨梅圖', '괴석국란도怪石菊蘭圖' 등의 수묵화를 그렸다. 1888년에는 훗날 순종이 되는 동궁 이척1874~1926의 15번째 탄강일을 축원하는 '승일반송도昇日蟠松圖'도 그렸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강진희는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잘 썼고, 그림은 매화를 잘 했다”고 평했다. 강진희의 생애를 연구한 김영욱은 "강진희 30대의 회화는 화면의 구성과 소재에서는 19세기 화단의 경향을 수용하고, 맑은 담묵을 즐겨 사용해 담담한 느낌의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했다. 제작 목적에 맞는 소재를 포착하고 간략한 필치로 묘사하여 그림의 이야기를 잘 전달했다. 또한 전각의 인장을 회화와 연계시켜 시·서·화·인 ‘四全’을 지향한 작화 방식은 서화가 시기까지 지속되었다.”라고 평했다. 귀국한 후 머리 속의 풍경들을 화첩으로 남겼다.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종남귀래도終南歸來圖' 등이다. 이 화첩은 1983년 ‘최초의 미국견문화美國見聞畵’라는 제하로 동아일보에 보도됨으로써 처음 알려졌다. 화차분별도는 워싱턴 공관에서 멀리 두 열차가 오고 가는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이다. 조선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가는 여정 중에 함선과 기차를 경험했으나 두 열차가 교행하는 모습은 겁이 날 정도로 신기했던 모양이다. 제목 옆에 ‘웃음이 나왔다’라는 뜻의 ‘부지일소付之一笑’를 날인했다. 철도와 기차를 중심으로 많은 배경은 생략하고 간략한 필치로 스케치했다. 이국적 풍경의 핵심만 포착하여 묘사함으로써 그림의 주제를 뚜렷하게 전달했다. 청운 강진희는 서화가 외에 판소리 연구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 부분이 의외이다. 당시 선비들이 남종화의 영향을 받아 그림 속에 시를 쓰던 ‘화중유시畵中有詩’의 인문화人文畵에 몰두하는 게 트렌드였던 만큼, 서書와 화畵에 관심과 재능을 보인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지만, 판소리에 관심을 가진 건 매우 이례적인 경우인 까닭이다. 그냥 즐기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전문 서적을 펴냈을 정도였으니 놀랄만 하다. 입으로만 전해져 오던 속요들의 가사를 채록하고 수록한 악부합영樂府合英이 그 업적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대목이다. ‘악부’는 노래가사를 한시 형태로 옮긴 것이다. 고려 때 이제현李齊賢1287~1367 이래로 몇몇 학자들이 이 작업을 해왔다. 한시漢詩의 기본 형식은 한 구句당 5자나 7자로 이루어지지만, 악부 한 편이 몇 구로 구성되는지, 한 구는 몇 자로 이루어지는지 등에 대해 정형定型은 없었다. 노래가사의 길고 짧음에 따라 시가형태도 들쭉날쭉이었다. 청운의 악부합영은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다. 각 부마다 자신의 필명인 일소헌一笑軒의 이름으로 제사題詞를 지었다. 신헌申櫶과 신위申緯가 채집한 곡들을 정리하며 ‘푸른 갈대 수풀을 배로 헤치고 다니며 소악부小樂府를 읊조리다碧蘆吟舫小樂府’라고 표현하고, 자기가 기록한 곡들에는 ‘푸른 갈대서리를 배를 타고 다니며 소악부를 읊고 후기를 짓다題碧蘆吟舫小樂府後’라고 썼다. 벼슬아치로서 판소리를 연구했던 송만재1788~1851가 광대놀이를 보고 지은 시, 관우시觀優詩를 옮기며 감상평을 덧붙이고,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세상에 떠도는 유행가 아홉 수九歌’는 스스로 채록했다. ‘합영合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여러 영걸들의 합작품‘이라는 점을 나타낸 것이라 풀이된다. 청운은 악부합영의 서문에서 "일소헌一笑軒이 소악부小樂府를 모방하다.”라고 스스로 소악부의 형식을 따랐음을 밝히고 있다. 소악부는 한시의 절구체絶句體를 고수하는 악부이다. 즉, 시처럼 절구 형태를 따른 작은 시小詩의 형식이다. 악부합영은 구전으로 전해오던 우리 노래를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당시 소리하던 사람들이 한자를 몰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청운의 작업은 의미가 크다. 선대인 신위, 신헌과 후대로서 천재 소리를 듣던 육당 최남선1890~1957 등도 같은 작업을 한 바 있다. 청운은 그들이 빠트려 국문가사만 전해져오던 곡들의 가사를 한자로 옮겨 기록했다. 그의 한문 실력이 작용했다. 일소헌一笑軒이 기록한 속요 46수에 벽로운방소악부碧蘆韻舫小樂府 40수 그리고 여산노초(礪山老樵, 송만재)의 관우시觀優詩 50수를 묶었다. 청운은 기록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선생이 소요(小謠 : 우리나라 민요)를 채집하여 <벽로운방 소악부>라 명명한 칠언절구 40 수는 가사가 오묘하고 가락이 뛰어났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졌다.”라고 선대의 업적을 칭송하고, 자신이 기록한 속요 46수는"무더위에 비까지 와서 후텁지근한 날, 풍등風燈을 앞에 두고 우연히 남악주인(南岳主人, 최남선, 1890~1957)이 찬정撰証한(골라서 정한) 가곡(歌曲, 원 제목은 歌曲選)을 읽고, 그 가운데서 무명씨無名氏가 지은 것만을 찾아내어 국문(한글)은 버리고 한자로 문장을 짓고 압운(押韻, 시가에 규칙적으로 운을 다는 일)까지 해서 뜻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하였다.” 청운은비록 칠언절구의 형식을 빌려서 쓰기는 했지만, 노래의 원 맛을 제대로 낼 수 있을 것인지, 걱정하고 있다. 다만 ‘변변치 않은布鼓雷門’ 작품이지만, "꽃그늘 아래 술동이를 앞에 두고 혹시라도 지음자知音者가 한번 목청껏 뽑아주기를 기다리노라.”라며 겸손을 보였다. 서언의 말미에는 중국 강소성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가 수계修契한 지 26번째 계축년(1913)에 고송유수관 주인古松流水館 主人이 홍두紅荳 꽃 아래서 글제를 쓰다.”라며 한껏 고양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악부합영의 모두에 밝힌 서언緖言에도 그런 감정이 드러난다. "음악은 울적함을 풀어주고 노래는 마음을 드러내는데, 모두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시詩에 읊고 감흥하는 것에 의한 비유가 있다면음音에는 고음과 저음 및 맑은 소리와 탁한 소리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시대에 따라 기풍氣風이 변하는데, 예로부터 변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성운聲韻이다. 광대가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상말로 대사를 하고 거리에서 노래하는 것은, 자기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입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광대가 소리를 길게 빼서 노래하고 악기를 두드려서 연주하여 권선징악을 표현하는 데서 비분悲憤한 감정을 일으키니, 즐거운 데서 즐거워하고 슬픈 데서 슬퍼하게 된다.그러므로 음악을 듣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니, 어찌 음악을 얕잡아 볼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음악은 국문이 아니면 가락을 만들 수 없어서 곡조를 맞추기 어려우니, 시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번에 국문을 버리고 압운押韻한 것은 비속함에서 벗어나서 우아함을 얻으려는 것이다. 시경詩經의 작자가 민요를 채집했던 이유도 어찌 이와 비슷하지 않았겠는가. 구전되던 노랫말을 한문으로 기록한 것은 "비속함에서 벗어나 우아함을 얻으려는” 취지라고 언급했다. 문자가 권력이던 시절의 인식이다. 이제 청운의 작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자. '임의 자취 사라진 꿈夢無跡'은 어쩐지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라는 가곡을 연상시킨다. 夢爲我請遠方君 꿈이 날 위하여 먼 데 임을 데려왔건만 不勝欣起影無存 기쁨에 겨워 일어나니 그 모습 사라졌네 君或怒而飄然去 임이 혹시 노해서 홀연히 가셨는가 如何覺來不見痕 잠에서 깨니 자취가 보이지 않네. '문밖에 나와서 기다리다出門望'는 친구를 그리며 기다리는 정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夜雨花開酒初熟 밤비에 꽃은 피고 빚은 술도 막 익었네 琴朋留約帶月回 벗이 거문고 가지고 달이 뜰 때 온다 하니 分付兒童仔細看 아희야, 자세히 보아라 茅檐月與故人來 초가집 처마에 달이 뜰 때 벗도 함께 오는지 '당신이 직접 오세요宜身至前'는 당시 여인으로서는 당찬 모습을 담았다. 莫倩他人尺素馳 남에게 편지 전하지 마시고 當身曷若自來宜 당신이 직접 오시면 좋겠어요 縱眞原是憑傳札 아무리 진심을 편지로 전해도 成否從遠未可知 참인지 아닌지 알 수 없거든요 '백마는 울고 아가씨는 옷을 잡고白馬靑娥'는 "백마는 가자 울고 해는 기울어”라는 유행가 가사를 떠올리게 한다. 欲去長嘶郎馬白 낭군의 백마는 가자고 길게 울고 挽衫惜別小娥靑 어여쁜 아가씨는 옷을 잡고 이별을 아쉬워하네 夕陽冉冉銜西嶺 석양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고 去路長亭復短亭 갈 길은 멀고도 머네 '나비야 청산 가자胡蝶靑山去'는 노랫말이 일품이다 白胡蝶汝靑山去 흰 나비야 너도 청산 가자 黑蝶團飛共入山 호랑나비야 떼지어 함께 청산으로 날아가자. 行行日暮花堪宿 가다가 날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花薄情時葉宿還 꽃이 푸대접하면 잎에서라도 자고 가자 황진이의 '벽계수碧溪水'는 청운 덕에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진 가사이다. 마지막 연만 "명월明月이 만건곤滿乾坤하니 쉬어감이 어떠하리”로 바뀌었다. 대중성을 의식한 소이일 것이다. 靑山影裏碧溪水 청산 그림자 속의 벽계수야 容易東去爾莫誇 동쪽으로 쉬이 흘러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難復回 푸른 바다로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데 滿空明月古今是 온산 가득 밝은 달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네 '동짓달 긴긴 밤冬至永夜'은 황진이黃眞伊가 지은 애절한 연시戀詩이다. 국문으로 전해져오던 가사를 청운이 한자로 옮겨 적었다. 截取冬之夜半强 동짓달 기나긴 밤 절반을 애써 잘라서 春風被裏屈蟠藏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말아 두었다가 燈明酒煖郞來夕 등 밝히고 술 데워 놓고 임이 오신 날 저녁에 曲曲鋪成折折長 굽이굽이 길게 펴리라 청운은 채록곡마다 직접 제목을 지어 붙이고 작사가의 이름을 명기했다. 없는 경우에는 ‘무명씨’로 표기했다. 신위 등 선대 기록자들에게는 헌사의 의미로 직접 절구를 지어 올렸다. 청운은 악부합영의 의미를 ‘기록’과 ‘전승’으로 보았다. "문장의 인연”을 살리려는 또 다른 예술의 장르가 아닐 수 없다. "인간 세상의 백년은 천상의 하루에 불과할 뿐인데, 더구나 그 하루 동안의 영고성쇠와 희로애락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민요를 노래로 전할 경우에도 흥망성쇠에 따라 존속되거나 사라지는 안타까움이 있다.시구詩句는 오랜 시일을 세상에 남아 있으니, 사람에게 문장의 인연은 참으로 귀중하지 않겠는가.” 송만재가 광대놀이를 보고 쓴 '관우희오십수觀優戱五十首'는 광대패의 소리와 재담, 재주를 보고 느낀 저자의 감상문 형식이다. 줄여서 '觀優詩'라고 부르는 그 글에는 영산(靈山, 혹은 단가短歌)에 대한 디테일한 평이 들어있어 후대의 판소리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영산은 놀이판에서 목을 풀 때의례적으로 하는 몇몇 재담과 타령打令을 포함하는 여러 곡의 혼칭混稱이다.요령要令은 광대가 재주를 부릴 때 하는 재담과 발림이다. 觀優詩는 광대패의 놀이를 눈 앞에서 직접 보듯 하게끔 묘사했다. "거문고 타고 피리불며 촛불 밝히고 밤새 노는데, 서늘한 정자와 높은 누대에 바람에 꽃이 떨어진다. 정신은 북과 함께 움직이고소리는 몸동작과 함께 표현한다. 방자한 웃음에서 해학이 물결처럼 나오고 입에서 말이 샘솟듯이 흘러나온다.” 청운은 송만재의 '관우시' 뒤에 서둘러 기록으로 남겨야 했던 사정을 밝혔다. "우리나라의 정악正樂은 모두 여항(閭巷, 시중)에서 전습된 것과 장악원梨院의 고악古樂과는 차이가 있다.최근에 창을 부르는 기생이 요모조모 뒤섞어서 두서가 없어지니 억지로 기억하기는 어렵다.” 청운이 언급한 정악들은 조선 시대 중기에 널리 불리던 12가곡으로, <백구사白鷗詞>, <죽지사竹枝詞>, <어부사漁父詞>, <행군악行軍樂>, <황계사黃鷄詞>, <처사가處士歌>, <춘면곡春眠曲>, <상사별곡相思別曲>, <권주가勸酒歌>, <양양가襄陽歌>, <매화타령梅花打令>, <수양산가首陽山歌> 등이다. 고려시대 시조작가 이현보李賢輔의 <어부사漁夫詞>만 빼고는 모두 작자가 미상이다. 12가곡은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가사歌辭보단 길이가 짧지만 풍류적인 서정을 담고 있다. 바뀌고 사라지는 추세여서 회자되는 노래들을 기록해 소개하며 당부했다. "널리 한 번쯤 전해주시라.” 광한루 위로 아른거리는 봄빛, 오작교가의 긴 그넷줄. 염문설(艶說)을 뿌리는 이는 지금 이 어사(李御使)라 아름다운 인연으로 옥중에서 향기를 쌓네. (서춘향(徐春香)과 이몽룡(李夢龍) 누가 알았으랴, 심청이 천상(天上) 선녀의 몸으로 잘못을 저질러 맹인 집안에 떨어질 줄을 해신(海神)의 아내가 되려고 공양미 300석과 몸을 바꾸었는데 궁궐 잔치에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했구나. (심청(沈淸) 낭자) 화(禍)는 악행으로 인해서 쌓이고 복(福)은 인덕(仁德)으로 말미암는다. 부귀는 쓰디쓴 가난에서 나온다. (연흥보(延興甫)) 가소로운 인간이여, 어리석고 한심한 자여, 이제 제비가를 부르며 서로 친하게 지내려무나. (연자가(燕子歌)) 도시락과 표주박, 대지팡이와 짚신으로 천리강산에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네. (유산가(游山歌)) 세상엔 갖가지 즐거운 일이 많으니, 사람들이 이별가를 부르게 하지 마라. (이별가(離別歌)) 시중에 떠돌아 다니던 작자 미상의 노래 아홉 곡을 채록해 한자로 옮겨 적으며 청운이 밝힌 후기에는 노래에 반영된 인간의 어리석음을 적시하고 있다. "하루는 친구의 책상에서 고시古詩를 보고 빌려서 소맷자락 속에 넣고 와서구가九歌만 베끼고 돌려주었다. 그리고 향을 피우고 등불을 켜고 저녁에그 맛을 세밀하게 완미하였다. 아! 인생은 꿈이니 좋은 꿈도 있고 나쁜 꿈도 있다. 하지만 깨어나면 조만간에 또다시 즐거움을 좋아하여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리는데, 사람의 마음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어떤 사람은 악몽을 만나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왜 그러한가.대체로 어진 사람은 꿈을 꾸지 않으니, 꿈조차 사람의 선악을 따르는 것인가.항심恒心이 있는 사람은 망상妄想을 하지 않고항심이 없는 사람은대부분 이치에 어긋나게 행동한다.잠꼬대 역시 정상적인 꿈과 배치되는 것이다.깨어나는 것에도 도가 있으니,배우지 않으면 깨어나기 어렵다. 하물며 꿈은 흔적이 없으므로 먼저 마음에서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푸른 하늘에 항상 뜬구름이 있어서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으니, 그 구름을 쓸어내고 하늘을 본다면 어찌 상쾌하지 않겠는가. 구름이 항상 무심하게 굴에서 나와서 하늘을 가리는 것은 이 시끄러운 세상의 업장業障과 같아서,올 때에는 빠르게 오지만 갈 때는 아주 더디게 간다. 그러므로 한 구절을 베낀 것이다.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상심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어찌 크게 탄식하지 않으리오.아, 부질없는 인생이 꿈인 줄 알지만 깨어나기도 어렵고 또 이해하기도 어렵다. 청운은 게송 '성미가醒迷歌'를 좋아했다. 이런 노랫말을 담고 있다. 그의 삶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라 할 만하다. 미혹을 벗어난 사람은 담백함을 즐기니 초가집에 살며 베옷을 입어도 마음이 편하다 영예를 구하지 않으니 치욕이 가까이 오지 않고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분수대로 살면서 시속을 따르네 사물은 언제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면 만사에 만족하고 수행을 하면 자신의 복록을 만들게 되네 참고문헌: 김영욱,"청운 강진희의 생애와 서화 연구, 미술사 연구," 2017 강진희, '악부합영',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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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영 ‘코트’ 대표, ‘시간의 마음’을 읽고 ‘땅의 지문’을 지키는 문화 독립 전사종로 2가에서 인사동으로 진입하는 초입 왼편에 복합 문화공간이 숨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정작 이 장소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기자도 서울 시내를 거의 꿰듯이 돌아다니는 편이지만, 이 공간은 생소했다. 60년 묵은 5층 건물 해봉빌딩을 ‘ㄱ’ 자 모양의 본관과 별관이 병풍처럼 두른 형상이다. 500평 부지에 건물 연면적 1000평의 규모이다. 이 공간 안에 카페, 전시실, 창작 랩, 서재, 커피숍, 숙박시설, 와인바 등이 들어있다. 다음달에는 음식점도 들어선다. 아티스트들과 창작인 수십 명이 이 공간을 쓰고 있다. 공간의 이름은 ‘코트'(KOTE)이다. ‘꽃’과 ‘뜰’이라는 의미를 담은 작명이다. 멀쩡해 보이는 이 공간은 겉모습과는 달리 치열한 전투를 겪고 있다. 서울시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에 따라 이미 뜯겨나간 피맛골에 이어 철거 위기를 맞고 있는 까닭이다. 이 공간을 리모델링해서 ‘땅의 지문’에 맞게 문화 전진기지로 만들려는 ‘코트’ 대표 안주영(1968~ )씨를 만나 현황과 포부를 들어봤다. 안 대표는 남다른 세계관을 가진 문화 전사이다. 2022년 3월 19일 오전 10시 인사동 ‘코트 랩’에서. Q. 여기서 구체적으로 무얼 시도하시는 건가요? A. "‘공정 무역’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Q. 공정 무역? A."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예술의 자유를 구현하게끔 도우려는 거지요. 아티스트들이 돈 걱정 않고 창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들에게 창작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주려는 겁니다.” 인터뷰 현장인 ‘코트 랩’은 본관 건물 2층에 위치해 있다. 아티스트마다 넓찍한 책상 두 개가 있는 공간을 사용한다. 자기 사무실을 가질 여력이 안 되는 아티스트들에게는 안성맞춤일 것 같다. 임대료는 월 30만 원으로 싼 편이다. Q.어떤 아티스트들이 입주해 있나요? A."다양합니다. 사진작가, 현대 무용가, 패브릭 디자이너, 연극영화 연출가, 광고 기획자, 잡지 편집자, 다큐멘터리스트, 작곡가, 메타버스 개발자, 셰프 등이에요. 모두가 사막에서 샘을 찾듯이 오신 분들이죠.” 2백 평 넓이의 ‘코트 랩’에는 여러 분야의 창작인들이 열정을 쏟아 작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서로가 소통하며 영감을 주고받기도 한다. Q.가난한 창작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군요. 이런 생각을 그전부터 가졌던 건가요? A."제가 2013년에 ‘명동성당 지하 신자 공간 만들기 1898’ 운동 기획에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명동성당을 1898년 축성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 주안점을 둔 프로젝트였죠. 화장품과 중국인의 공간이 되어버린 명동에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으려는 도심 재생 운동과 지향점을 맞췄어요. 2014년에 완공됐는데, 천 평의 지하 공간에는 신자 지원시설을 집중 배치했어요. 지하의 중앙에 광장을 두고 사방으로 꽃집, 서점, 화랑, 커피숍,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전시장, 간이 공연장, 수도원 물품 직판장 등을 마련했죠. 이 과정을 진행하면서 저는 이런 인식을 터득하게 됐어요. ‘공간은 마땅히 사용자가 그 주인공이어야 한다’.” 그녀의 이력이 궁금해졌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북 안동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을 마치고 한글판 ‘타임 연구’지 편집장을 시작으로 영어 통역사, 사모 펀드, 투자자문, 자산운용, 뉴욕호텔 인수 프로젝트, 도심 재생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등의 업무를 거쳤다.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그나마 지금의 일과 관련성이 있을 뿐, 그전의 일들은 지금 작업과 전혀 연결 고리가 없어 보인다. Q.어떤 계기로 이 공간과 인연을 맺으셨는지요? A."제가 명동 프로젝트를 마친 직후에 이곳을 방문했다가 골목 안쪽에 서 있는 오동나무를 보았는데 그 오동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야기 즉슨 이랬다. 그녀는 2016년 ‘승동교회와 피맛골이 교차하는 지점’인 이곳 뒷마당에서 늙은 오동나무를 발견하고선 부둥켜안고 울었다. 유서 깊은 두 문화공간 가운데서 백여 년을 버텨온 나무였다. 그녀는 오동이 "건물에 포위당한 채 죽어가고 있다”라고 느꼈다. 피맛골 자리는 깡그리 헐리고 있었고, ‘코트’ 구역도 개발 국면에 처해 있었다. 그 가운데 선 오동은 머리 부분이 이미 잘려나간 채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주영 씨는 나무의 영혼을 감지하며 ‘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나?’ 안타까워했다. ‘예전 자기 집 마당에 서 있던 오동이 생각이 나서였다’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생면부지의 나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건 여간 섬세한 감성이 아니다. 일반이 표현하기는 어려운 감정선이다. 필자는 그녀가 오동에게서 ‘시간의 마음’을 읽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오규원 시인의 언급처럼 "시간에게도 다양한 감정이 있는” 까닭이다. 이 오동과의 첫 대면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서 그녀는 결심했다. ‘이 오동나무를 살려야겠다’ Q.계기치고는 대단히 특별하군요. 그 정도면 ‘운명적’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A."확실히 그렇습니다. 다들 ‘죽었다’며 베려 하는데 저만 살려야겠다고 달려들었으니까요. ‘미친 여자’ 소리도 들었습니다. 저는 이 오동을 개발과 보존의 경계에 선 존재로 여기죠. 그야말로 ‘경계에 핀 꽃’인 거죠. 살릴 결심을 한 뒤 이 주변을 공부를 해보니 대단히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죠. 삼일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을 한 호해여관과 1920년대 최초로 연극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활동사진을 틀었던 조선극장이 바로 이 터에 있었더군요. 이웃에는 학생들이 삼일 만세운동을 도모했던 승동교회와 탑골공원이 있고요.” 오동나무와 조우하면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그녀는 ‘공간을 통한 나눔’의 실현을 소명으로 삼았다. 이 공간이 예사 터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에 맞섰다. ‘땅의 지문’을 읽은 것이다. 오랜 시간 이 터에 뿌리내려 깊이 박힌 ‘땅의 지문’을 이어가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남다르고 당찬 모습이다. 그녀의 우직함을 읽게 하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조선극장 터를 표시한 표지석이 다른 지번에 세워져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관계기관을 찾아가 자료를 제시하며 정정할 것을 요청해 공무원을 당황하게 만든 해프닝이다. 안 대표는 ‘코트’ 터에 조선극장의 문화 지문을 잇기 위해서는 오동부터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물의 지붕을 뚫고 서 있던 오동나무를 보던 날 ‘오동나무를 중심으로 정원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잘릴 위기에 처한 오동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기를 들어야 했다. 오동나무를 지켜 중정을 만드는 방안으로 공간 재배치에 나섰다.오동 주변의 작은 건물들을 허물고 주 건물 3개 동은 남겨 리모델링을 거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2021년불법철거로 일부가 부서진 별관은, ‘코트’ 사태를 자신의 일처럼 함께 견디어 준 코트 커뮤니티와 예술가들 덕분에 지킬 수 있었고 보수공사를 통해 재탄생하고 있다. 여러 아티스트들이 온몸으로 막아 부서진 돌 틈에서 마침내 꽃으로 피어나, ‘코트’ 사태를 다룬 전시의 한 제목처럼, ‘깨어진 틈 사이로 피는 꽃’이 구현되고 있다. Q. 이제 오동나무를 베려 들지는 않는 것 같군요. 이 나무로 ‘코트’의 상징으로 삼으실 건가요? A."네. 이제는 살았어요.(웃음) 별관 뒤편 오동이 자리 잡은 마당을 유럽식 중정(中庭) 모양의 공간으로 살리려고 해요. 그러면 이태리나 스페인의 도시들을 걷다가 골목 속에서 반갑게 만나게 되는 중정이 인사동에도 들어서게 되는 거죠. 휴식과 소통, 축제의 공간이 될 수 있어요. 벌써 그럴 가능성을 보였어요. 2021년 6월에는 국내에 거주하는 프렌치 커뮤니티들이 이 중정 공간에서 프랑스의 음악축제를 열어 즐겼고, 10월에는 벨기에 대사관이 주관하는 벨기에 페스티벌이 열렸어요. 지난 3월 18일에는 매 학기마다 나라를 옮겨가며 유목민처럼 수업하는 미국 미네르바(Minerva) 대학 학생들이 이번 학기를 서울에서 지내면서 이곳에서 축제를 즐겼죠. 모두가 서울 속에서 익숙한 풍경을 찾아낸 겁니다. 저는 이 공간으로 끌리듯 들어선 모든 이들을 "이 공간이 초대한 사람”이라고 여겨요.(웃음) 그 사람들한테서 정말 동지애 같은 에너지를 얻곤 합니다.” 안 대표의 유일한 난제는 동업자와의 관계이다. 서머셋 몸(Somerset Maugham)의 소설 ‘달과 6 펜스’에서 ‘달’은 꿈을, ‘6펜스’는 현실을 상징한다. 안 대표가 ‘달’을 꿈꾼다면, 동업자는 ‘6펜스’를 쫓는다. 철학이 다르다 보니 동업자는 공격적이다. 개발지상주의자답게 처음에는 오동을 베어버리려 한 데 이어 호시탐탐 별관을 철거하려 하고,주차 공간을 만들 생각을 한다. ‘땡처리’ 업체들을 유치해 더 많은 임대료를 받고 싶어 한다. 개발이익을 최대화하려 함이다. 그동안 오동나무 앞 별관 건물을 파괴하려 포클레인을 동원하고, 고압수를 대포처럼 쏘고, 수시로 ‘용역’을 동원해 영업을 못 하게 막고, 공간을 돌아다니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안 대표는 건물 파괴에 저항하다 물 대포를 맞아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고, ‘용역’들의 갖은 횡포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해 왔다. 그렇게 맞서다 보니 그녀는 갑자기 문화 지킴이이자 전사가 돼버렸다. 그렇지만 늘 마음이 편치 않다. 같은 배를 탄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공동운명체 사이라 공존을 바라는데 쉽지 않은 탓이다. A."2016년 말 지분 20%로 참여했어요. 그러다 ‘디자인 하우스’라는 유명 잡지사를 유치해 사업이 안정되자 동업자가 저를 ‘아웃’시켜버리더군요. 그랬는데 2019년 말에 동업자가 급하게 연락을 해와서는 ‘사기를 당해 20억 적자를 지고 임대료도 6개월 연체돼 명도 당할 상황에 처해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어요. 이 공간에 대한 미련 때문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죠. 동업자가 진 적자를 10억으로 해 떠안고 지분을 50:50으로 나누고 제가 건물의 관리 운영권에 대한 최종 의사 결정권을 갖는 조건으로 다시 계약을 체결했어요. 그런데 그뿐이었어요. 명도는 모면했지만, 동업자는 저와의 계약을 이행할 의사가 없었던 거죠. 특히 본관 1층 전면 90평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제가 전차 계약을 체결한 공간인데도 막무가내입니다.” 별관에는 한때 ‘독립 뇨리점’을 입점시켜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분위기와 메뉴를 앞세워 명소로 만들려 시도했으나, 더 높은 임대료를 받으려는 동업자의 훼방으로 무산됐다. 자신이 직접 임차한 해봉빌딩에 입점시키려는 시도도 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당시 해봉빌딩은 5층 전체에 쓰레기가 가득했고, 지하에는 물이 찬 상태였는데 거금을 들여 쓰레기를 치우고 물을 빼내고 고치면서까지 유치하고 싶어 했다. 창의적이면서 터의 지문과도 잘 맞아 무릎을 쳤던 까닭이다. 별다른 관광자원이 없는 인사동에 꽤 괜찮은 관광 콘텐츠가 하나 등장할 뻔했다. 올 3월 초에는 루이비통 트렁크전시회를 개최하기로 기획했다가 또다시 방해를 받았다. 고민 끝에 동업자 요구를 받아들여 ‘땡처리’ 전시장 개장을 수락했다. 공격을 받으면 몸통을 지키기 위해 꼬리를 잘라주고 달아나는 도마뱀처럼 그도 창작의 산실인 ‘코트 랩’을 지키기 위해 전시공간을 양보한 것이다. 공존을 원치 않는 그들의 훼방이 있을 때마다 공허함을 느끼는 안 대표에게 친구들은 큰 힘이 된다. 특히 이곳에서 축제를 가졌던 프랑스 커뮤니티와 외국인 아티스트들 그리고 소식을 접한 미네르바 대학생 수십 명이 이 공간에 머무르며 ‘코트’를 지원했다. 그들은 지금도 저항 문구를 만들고, 인터넷에 실상을 올리고, 사진전을 열어 대중에 알리고, 노숙을 하며 ‘용역’의 침입에 맞서고, 피케팅을 하며 시위에 동참한다. 꽃을 꽃으로 존재하게끔 도우려는 마음들의 결집이다. 안 대표는 그들에게 감사하며, 토니 쉐이 ‘자포스Zappos’ 신발 CEO의 신념이 옳았음을 확인하곤 한다. 토니 쉐이는 라스베이거스에 창작 공간을 만들면서 "여러 예술혼들이 모이면 기적이 발생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기적은 창작뿐 아니라 예술 환경을 지키려는 마음에도 적용될 터이다. Q.‘공정 무역’ 실현을 위해서는 열정과 사명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켜 줄 돈 만들기, 그 셋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텐데 수익 창출 방안은 어떤 게 있는지요? A."네. 여러 계획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창작자들을 위한 공유공간 임대, 전시 대관, 이벤트 공연, 음악연주회, 파티, 출판기념회, 전시 오프닝과 클로징 행사, 광고나 드라마 촬영, 브랜드 팝업과 론칭 행사, 세미나와 콘퍼런스 유치, 파티 유치, 스몰웨딩 장소 제공, 마켓 유치, 이색 음식점 입점 등 문화 관련 사업들을 수익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코트’의 전망은 밝아지고 있다. 여러 조짐들이 보인다. 광고회사들이 레트로 감성을 좇아 이 공간에서 CF를 촬영한 사례가 안 대표에게 예상 못한 힘을 실어주었다. 갤럭시와 아이폰 두 경쟁 휴대폰 회사가 차례로 이곳에서 촬영을 한 일은 이 공간의 가능성을 대변한다. 스포츠용품 업체가 BTS를 홍보모델로 삼아 진행한 사은 행사는 직원 실수로문제가 생겼었으나 결과적으로 BTS 팬클럽‘아미’와 인연을 맺어주고, 그들이 ‘코트랩’의 첫 번째 입주자가 되는 전화위복의 행운을 제공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귀국한 젊은 아티스트들이 이 공간에 속속 둥지를 틀고 있다. 디지털 로봇비서RPA 기반의 업무자동화기업, 스마트 로봇을 활용하는 주얼리 공작소, 편집숍들이 들어오고 있다. 안 대표는 코트의 취지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아티스트들로 구성한 예술인 연대 성격의 ‘예술 학교’ 프로그램도 모색하고 있다. ‘코트 랩’이 이들로 채워지면, 천군만마의 동지들이 생기게 될 터이다. 모두가 문화로서 문화를 지키고 살리려는 계획이다. ‘땅의 지문’을 매개로 경계를 허물고 사람을 이어 예술혼을 살리려는 안 대표의 뜻을 ‘시간의 마음’이 따뜻하게 품을 것이라 예상한다. Q.마음 고생이 심할 텐데 후회가 든 적은 없었는지요? A."오동과의 인연으로 우연히 이 공간이 제게 왔어요. 평생 모은 돈을 이곳에 쏟아부었죠. 건물주가 나가라면 언제든 나가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다 해도 후회는 없어요. 운명처럼 제게 온 이 소중한 공간을 어떻게든 이 공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려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세상의 소리가 아닌 제 마음의 소리에 따라 하루를 살아도 영원히 사는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는 욕망이 자기 삶을 어떻게 삼키고, 욕심이 공동체를 어떻게 망가트리는지 모르는 부류들에게 순수와 환희로 피어나는 꽃의 의지를 보여주려 한다. A."참 신기하게도 지금은 오동이 저를 지켜줘요. 지칠 때 오동나무를 안으면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저를 가만히 감싸주는 느낌을 받거든요.” 기자는 안주영 대표의 오동이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1921~86)의 떡갈나무처럼 전설이 되기를 바란다. 전위 예술가인 보이스는 1982년 독일 중부 카셀(Kassel) 시에 7천 점의 비석을 세우고 그 끝에 떡갈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선 하나씩 하나씩 비석을 치우고 그 자리에 떡갈나무를 심어나가 마침내 5년 후 7천 그루가 들어선 녹색공간을 만들었다. "주차 공간도 비좁은데 쓸데없는 짓을 한다.”라고 비난하던 목소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문화운동가 한 사람의 통찰력만으로도 세상이 얼마나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요제프 보이스가 떡갈나무로 시의 면모를 푸르게 바꾸었듯이, 안주영의 오동도 이 땅의 지문을 살리고 시간의 마음을 담는 인식 전환의 모티브로 역할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람 탓에 빗나간 것처럼 보이는 화살들마저도 모두가 과녁을 향했다는 사실을 알아 안 대표가 자부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면, 웃으며 옛이야기를 할 날이 반드시 올 터이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도 앞으로 틈날 때마다 인사동 ‘코트’ 2층의 ‘내면의 서재’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뒤져보거나 ‘조선 살롱’에서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하고 싶어졌다. 꽃이 피는 터인 ‘코트’에서 영혼이 아름다운 아티스트들과 더불어 꽃인 양 행세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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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미네르바 대학의 노마드 수업은 한국!오늘 오후 7시 종로 2가 인사동 초입에 숨어있는 문화복합공간 '코트'(대표 안주영)에서 한국을 방문한 외국 젊은이들이 모여 페스티벌를 열고 있다. 미국 실리콘 밸리에 본교를 둔 미네르바대학 학생들이다. 매 학기마다 나라를 바꿔가며 기숙생활을 한다. 방문하는 그 나라의 문화를 몸으로 체험하고 배우고 사람들(PEOPLE)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수업은 온라인 오프라인을 병행하며 7개국을 다니며 노마드 수업을 진행하는데. 대한민국이 그 속에 포함되어서 자랑스럽다. 오프닝으로 아르헨티나 학생의 기타 반주와 독일 학생의 피아노 연주로 시작한 축제는 인도 학생의 시 낭송과 사진 동영상 프리젠테이션을 거쳐 밤 늦게까지 이어진다. 코로나로 인해 술은 없다. 축제를 마치면 모두 해방촌의 기숙사로 돌아간다. 그들의 건강한 축제를 창 너머 백년 나이가 되는 오동나무가 지켜보고 있다. 합격율 1.7%라는 미네르바대학은 4%대의 하버드대학보다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대학의 구성원 답게 자부심과 품격, 그리고 재능이 엿보인다. 앞으로 미래의 대학은 이런 형태로 변모할 것 같다. 4월 15일에는 이 공간에서 미네르바 대학 주관으로 학술심포지움도 갖는다. 한 학생은 "우리 미네르바 대학은 방문하는 나라가 바뀔 때마다 오프라인 수업과 행사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느라 애를 먹는데, 서울에서는 다행히 도심의 200평 공간(코트)을 확보했다."라고 환하게 웃었다. 한편, 인사동의 '코트' 공간은 삼일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을 한 호해여관과 1920년대 연극 공연과 영화 상영을 했던 조선극장 터에 자리잡고 있어서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큰 공간이다. 그런데 이 장소는 서울시 개발논리 탓에 헐릴 뻔 했으나 미네르바 대학생들이 인터넷에서 소식을 접하고 찾아와서, 바로 이 공간에서 합숙울 하며 피케팅을 하는 등 온몸으로 철거를 막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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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무대 변사 ‘광대 김명곤’김명곤 씨는 독일어 교사, 잡지사 기자, 연극배우, 영화배우, 극단 대표, 시나리오 작가, 성악가, 소리꾼, 국립극장장, 문화부 장관 등의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노는 ‘광대’로 불리는 걸 좋아한다. 예인 김명곤을 관통하는 것은 전통의 가치이다. 그 자신도 "전통은 모든 예술의 고향”이라고 여긴다. 국악도 그를 형상화하는 주요한 키워드이다. 국악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국악이 그의 삶과 창작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국악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는 어떤 게 있을 것인지 등을 주제로 대담을 했다. 지난 10월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굿모닝 가곡’은 관객 반응이 뜨거웠다. 가곡만 들려주는 게 아니라 노래에 얽힌 스토리를 극과 영상자료 그리고 해설을 통해 전달했다. 특히 변사의 역할이 화제를 모았다. 변사는 특유의 목소리로 다소 코믹하게 노래에 얽힌 사연을 풀어주는 기능을 함으로써 음성 더빙이 안 되던 20세기 초 무성영화 시절, 극의 전개와 출연자의 대사를 읊어주던 역할을 하였다. 이 변사를 김명곤 씨가 맡아 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모든 무대 요소를 가곡 공연이라는 드라마 속으로 이끌었다. 성공적인 반응에 힘입어 ‘예술의 전당’ 측은 12월 1일부터 이틀간 세 차례 앙코르 공연을 개최한다. Q. 가곡 무대에 변사가 등장하는 건 획기적 발상이군요. A. 네. 관객들의 호응이 컸습니다. ‘변사 쪼(조)’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예요. Q 변사를 맡으시면서 참고한 모델이 있었나요? A. 옛날 연극할 때도 신파극에서 변사를 맡아 했었어요. 전설적인 변사 고설봉 선생이나 최후의 변사 신출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기법을 배우기도 했죠. 저한테는 굉장히 친숙하고 익숙한 역할입니다. Q. 변사가 해설을 해주면 관객들의 곡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죠. A. 맞아요. 그냥 해설이 아니라 드라마틱하게 언변을 구사해서 사람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효과를 내죠. 노래의 배경이나 시대적 분위기 그리고 작곡 작사에 얽힌 뒷얘기를 하니까 펑펑 우는 분들도 있더군요. Q. 감정이입이 되는 거죠. 젊은 세대들에게는 변사의 존재가 생소할 텐데 먹혔군요. A. 코미디언들이 과장되게 구사하던 것과 달리 저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애썼죠. 홍난파의 ‘울 밑에 선 봉선화’를 소개하며 "일제시대 때 우리 민족은 새장에 갇힌 새였다. 앵무새였다.” 이런 시대 상황을 코믹하게만 하지 않고 시 낭송하듯 들려주었죠. ‘동심초’ 같은 서정적인 노래는 그 시가 탄생한 중국 당나라 시대 여류 시인 설도의 시를 들려주고 이것을 김한석이 어떻게 아름다운 노랫말로 옮겼는지를 알려주었죠. 이렇게 하니 관객이 편하게 교감을 하더군요. Q 가곡뿐만 아니라 판소리 가운데서도 몇몇 대목을 변사의 해설에 이어 창을 들려주면 청중 호응이 크지 않을까 싶군요. 오페라로 치면 아리아들만 선곡해서 들려주는 갈라(Gala) 형식이 되는 거죠. A. 재미있을 것 같군요. 시도해봄 직합니다. 보통은 소리꾼들이 몇 마디 해설을 하고선 소리를 하는데 클래식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나 금난새 같은 지휘자가 곡을 소개하고 연주를 들려주면서 이해를 돕듯이, 판소리도 변사가 그 해설 기능을 맡아 할 수 있는 거죠. 관객들은 해설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Q. 가곡에 이어 판소리 변사로도 나서 보시죠.(웃음) A. 저는 할 수 있죠. 서양 음악, 우리 소리 모두 공부를 했으니까요. 모르는 분야 같으면 나서기 어렵겠지만, 동서양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고 또 제가 노래 부르는 걸 즐겨해서 재미나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Q. 네. 가곡과 판소리 장르의 ‘송해 선생’이 되시면 좋을 것 같군요.(웃음) 90살이 넘도록 하시면서 우리 음악에 대한 대중성도 높여주시고요. A. 네. 저도 그러면 좋겠습니다.(웃음) Q. 국악과 인연을 맺은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대학 2학년 때 고향 전주에서 가까운 김제에 놀러 갔다가 소리 배우는 단발머리 소녀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으셨다고요? A. 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서양음악에 매료돼 있었죠. 클래식, 오페라 아리아, 팝송 따위만 듣고 불렀는데 판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죠. 이렇게 좋은 우리 소리가 있었구나, 그런데 왜 몰랐을까....하고요. 그때 단발머리 소녀들 가운데 하나가 방송작가 김병준 씨 부인인 소리꾼 남궁정애 여사입니다. 그날을 계기로 저의 판소리 사랑이 시작된 거죠. LP판을 사서 듣기 시작한 겁니다. Q. 어떤 곡들이었나요? A. 임방울, 김현수, 박록주 명인들의 단가였어요. 알고 산 게 아니라 그 당시 인기 있던 레코드들을 사서 듣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어요. 가장 좋아했던 곡이 김현수 선생의 ‘사철가’였죠. 20대 초반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늙은 노래가 가슴에 와닿던지... 아마 폐병을 앓았고, 힘들게 객지 생활을 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힐링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Q. 그런 판소리들이 인생 전반에 어떻게 투영되었나요? A. 임권택 감독이 저한테 시나리오를 맡긴 1993년 영화 '서편제'에 제가 그 ‘사철가’를 삽입해 불렀죠. '개벽'에는 동학 혁명의 ‘녹두장군’ 전봉준 역을 맡아 칼춤 추며 부르는 노래를 제가 직접 불렀고요. 영화나 연극의 대본을 쓰면서 소리꾼 명인들의 말과 어투를 많이 차용했죠. 예를 들면, 서편제에서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좋은 것이 이 소리 속 판이여, 이놈아!”라고 아들에게 일갈한 대사나, 연극 '격정만리'에서 격동기 연극인의 입을 통해 "황금도 사랑도 명예도 다 싫소. 오로지 나의 소망은 조선 냄새나는 위대한 예술을 하고 싶은 것이외다.”라고 읊조린 대사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Q. 명창 박초월 선생에게 사사했다는 얘길 듣고 많이 놀란 적이 있습니다. A. 대학 4학년 때 종로 단성사 앞을 지나다 ‘박초월 국악전습소’라는 한자 간판을 발견하고선 무턱대고 4층으로 올라갔죠. 그 자리에 박초월 명인과 조상현 선생이 함께 계셨어요. 알고 보니 두 분이 판소리 보존회의 회장과 사무국장을 맡아 하셨더군요. 조 선생이 북을 당기더니 노래를 해보라고 해서 불렀는데 웃음거리가 됐죠. 판소리 곡을 이태리 벨칸토 창법으로 불렀으니 두 분이 보기에 얼마나 웃겼겠어요. 학생들도 웃고. 그렇게 입문을 했는데 그때 제1 조교가 김수연 명창이었고, 제2 조교가 김경숙 명창이었어요. 저는 박초월 선생님이 직접 가르쳐주셨어요. 타향에서 어렵게 산다는 걸 아시고선 거기서 숙식하며 지내라고 배려해주셨죠. 아침에는 밥도 갖다주시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총무 비슷하게 됐어요.(웃음) 그러다 박 선생님이 당신 아이들 가정교사를 맡기셔서 그 댁에 입주하게 되었죠. 불광동이었는데 새벽마다 불광산에 올라 목을 풀고 소리를 지르는 훈련을 했죠. 그렇게 10여 년을 배웠습니다. 박 선생님 덕에 국악계의 명인들을 두루 만나는 행운도 누렸죠. 그분들 인터뷰 기사를 써서 월간 신동아에 연재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 인터뷰를 묶어서 '광대의 꿈'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도 했죠. 그분들을 만난 게 제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김명곤 씨는 이 대목을 이렇게 표현한다. "판소리와의 인연은 마치 누가 미리 연출해놓은 것처럼 내 인생에 파고들었다.” Q. 레퍼토리 가운데 가장 애창하는 곡이 어떤 건가요? A. 홍보가, 수궁가를 배웠는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고고천변’입니다. 거북이가 뭍으로 나와 처음 맞이한 세상 풍경을 노래하는 대목이죠. 박 선생님은 남자들에겐 민요는 안 가르치셨어요. 대체로 민요는 여자 장르의 곡으로 취급했어요. 단가인 ‘사철가’도 제가 즐기는 곡인데, 서편제를 하면서 제가 따로 배운 노래입니다. 김수철 씨가 작곡한 서편제 중 삽입곡 ‘소리길’도 멜로디가 너무 좋아서 제가 가사를 붙여 부르곤 합니다. 김명곤 대표는 "전통은 모든 예술의 고향”이라는 모토를 갖고 있다. 그가 우리 음악에 천착하는 이유이다. Q.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도 한국음악을 살리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죠? A. 네. 뒤돌아보면 우리 음악과 그 음악을 하는 광대를 조선조는 5백 년간 무시하고 홀대했어요. 그래서 국립극장장일 때는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노무현 후보에게 전통예술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문화부 장관이 되면서 국악진흥과를 신설해 독립부서로 두고 한국음악 지원에 나서기도 했죠. 이 국악진흥과는 제가 떠나면서 같이 없어져 버렸어요. 문화재청이나 국립국악원이나 다른 기구들이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긴 듯합니다. 저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죠. 그걸로 한류의 세계화를 도모했으니까요. 우리 전통예술 분야는 정치지도자가 의지를 갖고 육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Q. 요즘 국악 하는 젊은이들이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빼어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걸 자주 봅니다. 소리 내는 기본이 탄탄하니 노래를 잘할 수밖에 없죠. 확실히 우리의 자산이라 할 수 있겠죠? A. 네. 동감입니다. 일각에서는 전통이 허물어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있지만, 서양도 클래식과 팝이 서로 퓨전 하며 대중의 취향에 맞추고 있죠. 물론 전통도 지켜가면서요. 어느 게 옳은 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죠.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시도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초석이 된다는 겁니다. 교류하고 소통하며 필요하면 통합도 가능하죠. 서양음악 하는 사람들도 판소리 창법을 연구하고, 한국음악 하는 사람들도 퓨전을 시도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거죠. 음악 장르 전체가 동반 발전하는 겁니다. 경계를 두지 말고 두 음악 세계가 서로 통합하고 융합하도록 협업을 계속 시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서로서로 좀 더 들여다보고 이해해보라고 권하고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올드보이로서 저의 남은 인생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오늘 바쁘신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악의 저변을 넓히는 창의적 예술가로 활동하시는 모습 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명곤 대표는 내년 초 ‘예술의 전당’이 기획하는 획기적 가곡 공연 프로그램을 의논해야 한다며 회의실로 향했다. 어떤 형식일지가 궁금했다. 창의적 열정의 소유자인 그가 지휘하는 만큼 기대가 크다. ‘꽃을 밟고 지나간 말의 발굽에서 향기가 날(踏花歸路馬體香)’때 그는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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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명사 초대, 특집 방송 ‘문화살롱’국악방송은 2021 하반기 문화가 있는 날을 맞이해, ‘맛있는 라디오(18:00~20:00)’에서 문화계 명사를 초대해 음악과 이야기를 한데 듣는 특집 방송 ‘문화살롱_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를 마련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문화계 축제와 공연 전반이 위축된 요즘, 문화생활을 자유로이 즐기지 못한 청취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국악방송 퇴근길 음악 전문 방송 ‘맛있는 라디오’는 다채로운 음악과 이야기를 전하는 ‘토크 콘서트’를 마련해 이번 달과 오는 11월 총 2회에 걸쳐서 특집을 진행한다. 오는 26일 화요일에는 ‘가수 양희은’이 출연해 그녀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전한다. 30대 초반 암 투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기도 했던 그녀는 여러 곡절을 넘겨온 순간들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대중에게 알려진 당찬 이미지 뒤에 숨겨진 그녀의 또 다른 면을 방송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이 날은 그녀의 대표 곡이기도 한 ‘가을아침’을 비롯한 4곡을 모두 라이브로 만나볼 수 있다. 다음 달인 11월 24일 수요일에는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가 출연해 ‘현대인의 우울, 분노 그리고 행복’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코로나 확산 지속으로 우울감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하우를 강연으로 전할 예정이다. 이 날은 ‘퓨전국악밴드 예결밴드’가 찬조 출연해, 하루빨리 일상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국악 및 가요를 연주하며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어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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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국악그룹 <비단> ‘하늬 아리랑’ 발표디지털 싱글 ‘하늬 아리랑’ 한국의 보물을 노래하는 퓨전국악그룹 <비단>(김수민/보컬, 김지원/타악, 김가윤/대금, 신서영/가야금, 서재원/해금)이 한복을 주제로 만든 신곡 ‘하늬 아리랑’을 발표한다. 최근 들어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 작업을 통해 한국의 김치를 파오차이로, 한복을 한푸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장하며 한국의 역사를 중국의 것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지속하는 가운데, 이러한 역사 왜곡 시도를 바로잡기 위해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전통 한복의 아름다움을 외국인들에게 익숙한 한민족의 대표 민요인 아리랑에 담아냈다. ‘하늬 아리랑’ 뮤직비디오 특히 ‘하늬 아리랑’ 뮤직비디오에는 은은한 하늬바람에 날리는 전통한복의 아름다움이 자연의 재료로 제작된 가야금·해금·대금 등의 국악기 연주와 함께 서정적인 영상미로 표현되어, 영상을 감상한 네티즌들로부터 ‘맑은 자연의 감성 덕분에 마음이 느긋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늬 아리랑‘ 뮤직클립 또한 코로나19 사태로 대면활동이 불가능 한 상황에서 훈민정음, 한옥, 한식 등의 전통 문화유산을 주제로 만들어진 비단의 콘텐츠가 온라인에서 더욱 각광받고 있으며, 이번 한복 콘텐츠 역시 9개 언어별로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통해 전 세계인들에게 한복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퓨전국악그룹 비단 최근 ‘오징어게임’, ‘D.P.’ 등의 드라마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넷플릭스와 ‘전통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음원 사용계약을 체결하는 등, 콘텐츠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는 비단은 지난 8년간 총 20여 종의 문화유산 주제가와 함께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9개 언어별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전 세계인에게 한국의 역사를 전파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조국의 해방을 열망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저항 의식을 담은 ‘영웅의 제국’을 발표하는 등 문화 주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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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헌 한국한복협회 회장미국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면서 세계적으로 한국을 알리고 있는 보이 그룹 BTS가 도포를 입고 춤을 추는 사진을 보고선 미소를 지은 적이 있다. 속으로 "그래 이거야!”라고 외쳤던 기억이다. 긴 도포의 선이 BTS의 춤 선과 잘 어우러지면서 한복의 매력을 물씬 풍겼던 까닭이었다. 기자의 생각에 사물은 선이 고와야 예쁜 법이다. 옷과 춤이 서로의 곡선미를 위해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었다. 한복과 젊은 세대 간의 접점을 발견한 것 같아 흥분됐다.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에 이런 차림의 젊은이가 나타난다면 단박에 그 세대들 사이에서 인기몰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됐다. 작금의 한복은 우리 전통문화의 한 축임이 분명한데도 갈수록 존재감이 떨어지고 있다. 단순한 옷 차원을 넘어 우리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한복의 의미를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한국음악과 한복은 어떻게 상생할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갖고 2005년부터 한국한복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백설헌 선생을 만났다. (2021년 10월 12일 오후 2시 청담동 설헌 빌딩) Q. 16년 동안 한복협회 회장을 맡아 하시면서 한복의 발전을 위해 공을 많이 들이셨죠? A. 380여 회원들 간에 소통 기회를 마련한 것이 가장 큰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한복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최고라는 자부심 때문에 다른 집에도 안 가고 자기 집에 초대하지도 않았어요. 서로 상대의 작품을 보도록 기회를 만든 거죠. 서울과 지방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와 기능인들에게 교차 방문의 시간을 마련해줌으로써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거죠. 한복의 소재, 색감, 문양, 디자인, 트렌드 그리고 마케팅 등에 관한 지식을 공유한 거죠. 그 덕에 식견이 다들 넓어졌어요. 색상도 파스텔 톤의 높낮이 조정과 원색의 임팩트(impact)화를, 염색 방면도 쪽이라는 식물을 발효시켜서 황산구리를 섞으면 진한 색을 얻을 수 있듯이 매염제에 따라 여러 색을 낼 수 있다는 지식도 알려주고, 롤 플레이(role play)도 했어요. 디자이너와 고객으로 나눠 역할 분담을 시킨 거죠. 그렇게 해서 상담차 들른 손님들에게 다양한 소재들로 상하와 고름, 깃, 노리개 등을 종류별, 색상별로 구성해 보여주면서 매력을 느끼도록 끌어내는 노하우를 가르쳤지요. 얼굴에 맞는 디자인, 겉감과 안감의 배색, 목 길이에 따른 동정의 폭 조정, 눈동자나 피부색에 맞는 색상 조정에 대한 감각 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Q. 한복 보급률도 낮고 인식도 낮은 게 우리 한복 문화 현실인 것 같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A. 네 확실히 한복이 복식 문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한복을 제대로 입을 줄 모르죠. 속치마를 앞에 입어야 하는데 뒤로 원피스처럼 입기도 하죠. 불편해하구요. 학교에서 교양 수업으로 한복 제대로 입는 법을 가르치면 좋겠어요. 생활 속에 파고들지도 못하고 있어요. 인생의 어떤 기념할 만한 날에는 한복을 입는 게 당연한 불문율처럼 조성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학교 교육서부터 방송에 이르기까지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죠. 돌이나 입학식, 졸업식, 성인식, 결혼식, 결혼기념식, 잔치, 은퇴 기념식 등등의 날에 한복을 입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좋겠어요. 결혼식 때도 혼주나 신랑 신부 외에 가까운 하객들도 축하의 마음을 담아 우아하고 품격 있는 복식으로 성의를 보이는 그런 문화가 있으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일본 여성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만 해도 5벌의 기모노를 맞춰 입는다고 하지 않아요? 부모들이 애들 잘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러 갈 때도 반드시 전통 의상을 입혀서 데리고 간다잖아요. 전통문화가 스며 있는 옷을 입는다는 형식 절차가 인생의 한 매듭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진지한 각오를 다지도록 역할하는 거죠. 우리는 성인식 때도 안 입죠. 우리도 한복에 대한 이해나 애정이 그 정도 되면 좋겠어요. 한옥 마을에, 한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보여주는 학습관을 세우면, 한복에 대한 인식 함양이나 홍보에 얼마나 효과가 커지겠어요? 그런 노력이 범국민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Q. 사업상 파티나 동호인 모임, 손님 초대 때 드레스 코드(dress code)를 한복으로 삼는 것도 좋겠군요. A. 너무 좋죠. 한복 드레스 코드가 어려운 게 아니라 흔한 회색 계열에 하얀 스카프 하나 두른 홈웨어(home-wear) 같은 한복도 얼마든지 멋있을 수 있거든요. 입기 편하면서 멋을 낼 수 있도록 얼마든지 ‘디자인 한복’이 가능해요. Q. 한복의 디자인은 진화를 거듭해왔는데 어떤 메커니즘을 거쳤는지요? A. 궁중 의궤나 출토 복식 등에서 영감을 얻는 식이지요. 그런데 옛 복식은 굉장히 단순해요. 색상도 청, 홍, 녹, 황 등 몇 가지 안되고요. 거기에 바리에이션(variation)을 줘야죠. 원형에서 영감을 받아 그 위에 디자이너의 창의력이 가미되는 메커니즘을 거쳐 작품이 탄생합니다. Q 20세기 초 개화기 복식이 오랫동안 지배하다 현대에 들어 조선 초기나 중기의 스타일이 발굴됐죠? A. 네. 그래서 대학의 연구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잘 몰라요. 궁중에서 입은 당의(唐衣)에는 짧은 저고리가 없어요. 남자들도 바지저고리 위에 꼭 두루마기를 걸쳤죠. 상복에 관한 논문을 쓰며 궁중에서 입던 흰색의 무명 상복과 하얀 족두리 등의 당의가 일반에서는 혼례식 때 쓰인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죠. 계층별로도 복식이 다 달랐어요. 상민, 사대부, 기녀, 궁중 나인, 상궁, 왕족, 임금이 입던 복식이 다 따로 있었어요. 계절마다도 달라지고요. 기녀들이 디자이너 노릇을 하며 패션을 선도하기도 했죠. 가슴을 졸라매고 허리띠를 하고 치마를 풍성하게 만들었어요. 대학의 연구가 없으면 복식 문화가 뒤죽박죽이 돼버릴 겁니다. 이런 걸 알고 나서 디자인을 해야 제대로죠. 당의에 바탕하면 파티복 아니라 골프복도 만들 수 있어요. 꽃도 장식하고. Q. 대학의 관련 학과가 그런 점에서 큰 역할을 해왔군요. 그런데 연구나 발굴과 달리 디자인은 또 다른 영역인데 대학에서 한복의 디자인을 창의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A. 네. 한복의 디자인은 거의 도제 형식으로 전승되는 게 바람직하죠. 실제로도 그럴 수밖에 없고요. 그런데 저도 많이 받아봤지만,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 못 견디고 떠나버려요. 그들은 바느질을 배우고 싶어 할 뿐, 디자인에는 관심이 없어요. Q. 예술을 배우려는 게 아니라 기능을 배우려는 거군요. A. 네. 저희도 바느질을 배워서 직접 하지만, 중요한 것은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창의력인데 문화를 계승하는 정신보다 손 기능을 더 배우고 싶어 하는 게 현실입니다. Q 오늘날 한복집들의 현주소겠군요? A. 네. 한때 동대문에 그런 한복 만드는 사람들이 4천여 명이 있을 정도였어요. 한복을 착용하면 궁궐 입장에 무료 혜택을 주는 게 그런 장사 마인드에서 비롯된 거죠. 그 결과 청바지 위에 한복을 덧입는 현상을 보이면서 한복의 우아한 멋이 실추됐다고 봅니다. Q 한복을 우리 정신문화의 한 축이라고 볼 때, 복식 디자인 능력을 함양하는 게 절실하겠군요? A. 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가죽 제품 제작을 가르치는 학교, ‘Leather School’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어요. 그곳에서는 구두서부터 옷까지 가죽으로 만드는 법을 교육하고 있더군요. 어떻게 착용해야 멋을 내는지도 가르치고. 우리도 옷을 짓고 입는 법을 가르치는 한복 학교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Q. 직접 학교를 세워서 후진을 양성하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A. 한복 제작의 선배로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은 꼭 필요하고 가슴 설레는 일이죠. 앞으로의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Q. 한복 디자이너 브랜드는 몇 개나 되는지요? A. 글쎄요. 열 개나 될까요? Q 나머지는 모두 상인들 수준이군요. A.네. 그렇죠. Q 한복 디자이너들은 ‘한복장(韓服匠)’ 같은 명예 수여가 없나요? A. 바느질 분야에 바느질장은 있지만, 디자인에는 없어요. Q. 기능장들에게만 주는군요. A. 네. 한복의 복식이 전승되는 게 정신문화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의미가 크지만, 디자이너들을 위한 명예는 마련이 안 돼 있어요. Q. 유기장, 한지장(韓紙匠) 등은 있잖아요? ‘한복 장인’이 없으라는 법은 없어 보이는데요? A. 그러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 정책은 그런 이상적 상황을 추구하지 못하지요. 안타까움이 드는 대목입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동대문 시장이라는 터전이 없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4만 명의 종사자들이 한복에 기대 밥을 먹고 있는 현실이 있어서 정책화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일 거예요. Q. 기능인들이 만드는 게 상품이라면, 디자이너들이 만드는 건 작품 아닌가요? 일반인들을 위한 한복은 기능인들에게 맡기고, 디자이너들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만들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국내외의 영향력 높은 유명 인사들에게 한복을 입혀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하는 역할을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맡을 수 있도록 거시적 관점에서 정부가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A. 네. 정말 최고의 생각입니다. (웃음) 왕년의 오드리 헵번이나 그레이스 켈리, 알랭 들롱, 요즈음의 안젤리나 졸리나 이자벨 아자니, 브래드 피트가 디자이너 브랜드의 한복을 입었다면, 전 세계에 보도되면서 한복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을 거라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시각 효과는 힘이 세다. 언젠가 일본 아키타에서 수양벚꽃이 핑크색을 발하며 늘어져 있고, 검은색 담장이 쭉 이어진 길을 붉은 기모노에 빨간 양산을 받쳐 든 일본 여인이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서울에서도 봄날에 키 작은 매화를 배경으로 퓨전 한복을 입고 선 모델 한혜진 씨의 사진이 한복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한껏 풍기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런 효과를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작품으로 창출해줘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정부가 복식 장인으로 대접해줘야 하지 않을까. Q.공급 측면에서 우리 한복업계에 절실하게 개선이 요구되는 분야가 있을까요? A. 네. 저는 소재 면에서 개혁이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복 하면 실크죠. 합섬 실크나 물 실크 모두 실크 계열 일색이에요. 겨울에는 양단을 쓰죠. 여름에는 모시나 삼베가 있는데 이 소재들 모두가 다 손질이 어려워요. 그런 소재서 탈피해 면(綿)을 써보자는 거죠. 만들기도 쉽고, 입기에도 편하고, 세탁하기에도 좋아서 생활 한복을 정착시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되거든요. 외국 면들 가운데는 꽃무늬도 들어 있고 누비는 퀼트(quilt)도 있어요. 익숙한 소재라서 외국인들에게도 호응을 얻어낼 수 있을 거구요. 면에 프린트가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적 문양도 넣을 수 있고, 디자인하기에도 좋고, 서양식 옷들과 매칭 하기에도 좋고, 장점이 많을 걸로 판단됩니다. 대기업들이 장삿속으로 마구 대량 생산해내던 개량 한복이 아닌 디자인 한복을 만드는 거죠. 수요만 확보되면 정말 만들고 싶어요. 생뚱맞다고들얘기할 수도 있지만, 생뚱맞다는 자체가 창작이잖아요? 혁신이 될 수 있는 거죠. 면 업체들도 성장할 수 있고요. Q. 네. 좋은 시도가 될 것 같군요. 젊은이들에게도 어필할 것 같아요. 한복이 젊은 세대들에게도 받아들여지려면 불편하다는 느낌을 탈피해야 하고, 디자인 면에서도 서구 것과 퓨전이 가능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상하의를 다른 문화로 입거나, 한복에 바카라나 스와로브스키 같은 크리스털을 장신구 엘리먼트로 달 수도 있겠죠. 퓨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 BTS가 바지 위에 도포를 걸쳐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선 2000년을 전후해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한복 사이의 접점을 찾은 듯해서 기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청담동에 그런 차림의 젊은이가 상체를 노출하고 도포를 걸친 채이거나, 양복을 입은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나타나도 눈길을 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A. 네. 동감입니다. 퓨전과 크로스오버가 한복의 트렌드 요소가 돼야 한다는 데 공감합니다. 그런 접점을 찾는 데 필요한 부분이 ‘한복의 면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면으로 만든 한복이 그런 트렌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Q. 대학에서 한복 디자인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나 도제식 한복 제작을 이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참가자로 삼아서 한복 제작 콘테스트를 가져보면 어떨까요? A. 몇몇 대학에서 실시한 바 있고, KOEX에서도 콘테스트를 연 적이 있습니다. Q. 아니, 제 말씀은 기존의 한복 제작 방식을 답습하라는 것이 아니고, 트렌디한 주제를 던져주자는 거죠. 예를 들어 ‘2021년 가을 청담동을 걷는 젊은이가 선보여서 주의를 환기하고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널리 전파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들어보라’는 구체적인 주문을 하는 거죠. 그 과정을 국악 TV나 국악신문이 방송하고 보도하면서 분위기를 띄우면, 한복에 대한 젊은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A.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큰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저희 한복협회가 주관해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국악신문과 국악방송이 좀 힘써주시면 좋겠네요. (웃음) Q.한국음악과 한복은 어떻게 상생을 도모할 수 있을까요? A.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돼 있습니다. 한국음악을 양복을 입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한국음악 공연자들 덕에 한복이 수요를 지탱하고 있죠. 요즈음 한국음악 오디션도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던데 참가자들의 공연 점수 외에 한복 맵시도 가산점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공연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복식도 공연 문화의 일부가 돼야 한다고 보거든요. 기자는 어느 해 가을에 북촌의 고색창연한 조선집에서 고운 한복을 입은 여성이 부르는 정가(正歌)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청아한 목소리만큼이나 그 여성의 치마저고리 역시 전통음악을 대변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확실히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때도 있는 듯싶었다. 한국음악은 소리로 시작해 복식으로 완성되는 형식미를 가질 법하다는 생각을 했다. Q. 교육대학을 나와 10년간 교직에 있다가 늦은 나이에 한복 디자이너의 길을 밟으셨어요. 성대 한복학과에서 공부해서 한복 디자인 정규 교육을 받은 1호 디자이너가 되셨죠? 사명감이 남다를 거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의 계획도 남다를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A. 오늘 숙제가 많이 생겼어요. (웃음) 역시 사명감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의 정신문화를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는 겁니다. 한복이 저조해지면서 대학이나 대학원의 관련 학과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어요. 앞서 얘기한 이탈리아의 가죽 학교 같은 한복 학교를 세워 교육에 종사하는 게 선배로서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의 후반부를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도와주세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원하겠습니다. 1959년을 배경으로 한 소설 <회색인>에서 작가 최인훈은 주인공 독고준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다. "성춘향과 이몽룡이 줄리엣과 로미오를 대신할 날이 올까?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거야.” 최인훈의 비관적 전망은 2021년 BTS가 얻고 있는 세계적 인기 앞에서 허물어지는 느낌이다. 외국인 팬들이 한글로 된 가사를 외워 따라 부른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어로 피케팅을 하고 댓글을 단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는 BTS의 춤 선에 매료당한다. 우리의 옷, 한복은 그 사건을 계기로 도약의 모멘텀(momentum)을 가져야 마땅하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 일선에 한복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이 잘 닦은 창검처럼 빛을 번뜩이고 있다. 그 창검을 잘 쓸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고 힘을 보태야 한다. "면으로 한복을 만들자”라는 백설헌 씨의 획기적 제안은 소구력(訴求力)이 커 보인다. ‘밀레니얼 세대를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한복 도약의 관건이다. 정부는 일선의 의견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한복 장인 제도도 만들어 한복 디자이너들을 대우하고 지원해야 한다. 상품이 아닌 작품으로서의 디자이너 한복이 세계인의 마음을 뺏을 수도 있다. 단순히 옷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온전히 지키고 널리 알리려는 앞선 세대의 공통된 사명감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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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방송 20주년 기념 공개음악회 함께!안숙선X남상일,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함께 부르는 노래’ 등 다양한 무대, 큰 잔치가 벌어진다. 국악방송 창립 20주년 공개음악회다. 재단법인 국악방송(사장 유영대)은 창립 20주년을 맞아 국악방송 20주년 기념 공개음악회 <함께>를 개최한다. 공개음악회 <함께>는 오는 10월 27일 수요일 저녁 7시 30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진행된다. 국악방송은 2001년 3월 2일 라디오 방송 개국 후 다양한 전통문화 전문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청취자들에게 국악을 전달해왔다. 2019년에는 국악방송TV까지 개국하며 전통문화 전문 매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악방송 신임 유영대 사장은 "좁은 의미의 국악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음악’이라는 큰 범주, K-MUSIC의 범주로 확장하여 세계화의 물결, 한류의 물결에 대응하겠다.”라며 새로운 20년을 맞이할 계획을 밝혔다. 이번 공연은 20년 동안 국악방송과 함께 한 시청자와 국악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지난 2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20년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의미의 음악회이다. 국악방송과 함께 시청자들의 행복을 책임졌던 국악계 만능 엔터테이너 소리꾼 남상일과 매일 저녁 6시 <맛있는 라디오>로 청취자들과 만나고 있는 국악방송 라디오의 대표 DJ 김필원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되며, 다양한 세대의 명인·중견·신진 국악인이 모여 선물 같은 무대를 선사할 예정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두 소리꾼, 안숙선과 남상일의 판소리 흥보가 중 ‘박 타는 대목’으로 축하의 무대를 열고, 명인 정재국, 정농악회의 연주로 정악의 아름다움을, 민속악을 대표하는 명인 이태백, 지순자, 원장현 등이 모여 무대로 민속악의 멋을 선사하며, 국악방송이 주관하는 21c한국음악프로젝트 출신 박고은, 국악 브라스밴드 시도의 무대로 국악의 미래를 조명할 예정이다. 공연의 마지막은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메트 오페라 합창단, 경기민요 강효주, 판소리 정윤형, 테너 신상근, 소프라노 신은혜가 보여주는 화합의 무대, 아리랑 4악장 ‘함께 부르는 노래’로 꾸며질 예정이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올해 6월 열린 2021 창작악단 정기공연 <아리랑, 끝나지 않은 노래>에서 선보여 국악관현악과 합창, 국악 성악과 서양 성악의 조화를 선보였던 곡이다. 다채로운 국악을 즐길 수 있는 공개음악회 <함께>는 전석 초대(무료)로 진행되며,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좌석 띄어 앉기를 시행한다. 티켓은 국악방송 홈페이지(https://www.igbf.kr/)에서 신청할 수 있으며, 국악방송 라디오와 youtube 채널(https://www.youtube.com/gugaktv)을 통해서도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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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대 국악방송 사장 취임 기념 인터뷰국악방송 신임 사장으로 유영대 전(前) 고려대학 교수가 취임, 의욕적인 사업 추진을 계획하고 있다. 예산확보로 국악TV 활성화 등의 현안 타개와 개국 20주년을 맞아 기획 프로그램을 통한 활로를 모색하는 상황이다. 이에 본지는 사장 취임을 기념하고, 다양한 경륜과 실적으로 전개해 갈 국악방송의 내일을 전망하고자 특별 인터뷰를 마련했다. 대담은 안상윤 대기자, 사진 김동국 기자. 14일 오후 4시 사장실에서 40분간 진행되었다. 취임 2주, 첫 인터뷰 Q. 취임을 축하합니다. 취임하신지 며칠되셨죠? A. 9월 1일부터니까 2주일 됐습니다. Q. 아직 업무 파악을 다 못 하셨겠어요? A.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파악은 했습니다. 전국에 본사 포함, 지국과 지소들이 모두 14개소가 있어 시간이 좀 걸리는군요. Q. 고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를 올해 초 정년퇴직하셨죠? 그 후에 김영운 전임 사장이 국립국악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잔여 임기 1년을 맡으셨는데, 그 전부터 국악방송과는 인연이 좀 있으셨지요? A. 네 제가 전주 지국의 자체 프로그램에도 참여한 적 있고, 여기 본사 프로그램 제작과 진행을 맡아 했습니다. 1998년에 전주 지국의 프로그램은 방송협회에서 주는 ‘올해의 PD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국립극장 창극단 예술감독 때인 2010년에는 ‘청’을 무대에 올려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Q.‘청’은 대단했죠. 노래는 물론이고 통찰력이 묻어난 대사와 배경 장면, 회전식 무대 등이 몰입도를 높여 ‘코리아 브랜드’라는 별칭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술감독 외에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과 판소리학회장도 하셨죠? A.네, 교수와 예술감독 그리고 방송인 이렇게 1인 3역을 하며 살았습니다.” Q.국악방송 시청자위원회 일도 하셨죠? A.네 시청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악방송의 발전에 나름 기여했습니다. 국악TV 개국도 그때 당시 저희 시청자위원회가 적극 지원했죠. 그런데 지금 국악TV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Q. 문광부가 인사 보도자료에서 "최근 K-POP을 통해 국악의 세계화, 산업화를 향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국악계에서 쌓아온 전문성을 바탕으로 국악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국악방송의 역할을 더욱 확대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평가해 큰 기대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전문가가 아닌 경영인으로서 국악TV를 살려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어떤 활성화 방안을 갖고 계신지요? A. 저는 줄곧 KㅡMUSIC을 지향해왔습니다. 국내 소수의 애호가들만이 즐기는 음악에서 세대를 초월하고 나아가 세계인이 다 좋아할 만한 장르로 외연을 넓히자는 것입니다.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게 좋은 예가 되겠죠. Q. 그렇지만 외국인들에게 국악은 멜로디도 낯설고, 가사 전달도 힘들고 해서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A. 그래서 제가 처음 시도했던 게 번역 자막 제공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어렵지 않게 창극의 내용을 이해하고 우리 소리를 좋아하더군요. 외국인 청중들이 ‘Evaluation(평가)’를 해주었는데 큰 감동을 받았어요. Q. 평가 내용이 어떤 것들이었나요? A. "눈물이 나도록 아름답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스토리도 노래도. 특히 심청의 효성과 부친 심학규의 딸에 대한 그리움 같은 내용이 지극히 동양적 가치를 표방하면서도 인간중심적인 모습을 담고 있어서 뭉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심청의 희생이 그들의 마음을 울렸던 거죠. Q. 우리 소재 가운데도 찾아보면 외국인들에게 먹힐 꺼리들이 많겠어요. A. 그렇습니다. 잘 알려진 ‘심청전’이나 ‘춘향가’ 외에도 제가 ‘몽유도원도’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서 무대에 올렸는데, 이 역시 반응이 좋았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안평대군이 꾼 꿈 이야기를 화가 안견이 화폭에 재현한 것이 ‘몽유도원도’인데, 그 두 사람 외에 기록에는 없는 지고지순한 여성을 한 명 등장시켜 정치적 암살을 당하는 안평대군과의 슬픈 러브스토리를 만들었죠. Q. 네. 인문학적 소양과 호방함을 갖췄던 안평대군이 인왕산 자락에 비해당(匪懈堂)을 짓고 살면서 많은 일화를 낳았으니 러브스토리도 있을 법 했겠어요. 형 수양에게 유배지에서 대역죄로 사약을 받는 순간까지 두고 온 집 비해당과 인왕산 자락을 사무치게 그리워했겠다 싶었는데, 연인이 있었다면 그 슬픔은 배가되겠죠. 물론 음악이 장엄하게 뒷받침을 해주었을 테고요. 그런 스토리를 드라마타이즈해서 국악과 접목시키면 좋은 콘텐츠의 프로그램이 나오겠어요. A.신기하게도 외국인들을 포함한 청중들이 스토리 전개보다 그 내용을 축약한 노래들에서 더 감동을 받곤 하더군요. 우리 음악이 먹힌다는 확신이 들던 순간이었습니다. 비단 우리 소재만이 아니라 외국의 소재도 우리 것으로 변주하는 시도도 했었죠. 대표적인 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국악 버전입니다. 카플렛가와 몬태규가의 갈등을 경상도와 전라도 가문의 갈등으로 대체하는 식이었죠. 스토리와 창(唱), 노랫말은 직접 우리 식으로 재가공했습니다. 물론 쉐익스피어의 화려한 대사의 맛도 살리구요. 원로 명창 무대, 씨리이즈 기획 Q. 참신한 발상이군요. 그런 식이면 ‘햄릿’이나 ‘오딧세이’, ‘오이디푸스’, ‘돈키호테’ 같은 스토리들도 우리 식으로 창극화할 수 있겠어요. A. 얼마든지 가능하죠. 퓨젼(Fusion)과 크로스오버(Cross over)를 과감하게 시도해야 세계화에 다가 설 수 있습니다. Q. EBS 교육방송도 2004년에 박인환, 김수영 등 50,60년 대 예술가들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창작의 고통 등의 스토리를 담은 ‘명동백작’이라는 드라마를 기획방송해서 인지도를 높인 사례가 있지요. 국악 TV도 그런 소재들을 활용해 국악과 접목시키는 시도가 있으면 좋겠군요. A. 저희는 예산이 부족해 드라마는 언감생심이지만, 창극으로는 기획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해 볼 생각입니다. Q.편성표를 보니 24시간 방송이긴 해도 아직은 재방, 삼방 비율이 높더군요. 콘텐츠 개발이 시급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금년이 개국 20주년 되는 해인데 특집이나 사업으로 기획한 게 있나요? A.그래서 저희가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로미와 줄리엣’을 고화질 영상으로 방송할 계획을 하고 있어요. 또한 곧 천수(天壽)를 다하시게 되는 명창들을 위한 무대를 시리즈로 방송할 생각입니다. Q.국악 오디션 프로그램은 기획하지 않으시나요? 편성하면 환영을 받을 것 같은데요. A.사실 다른 방송사와 함께 기획을 했는데 "공동제작”이라는 자막만 하나 넣고는 방송은 못 하게 해서 파기해 버렸습니다. 국악방송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매우 상했죠. 국악으로 탄탄하게 기반을 닦은 가수들이 트로트 장르에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추세이므로 저희 방송 자체만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곧 기획할 것입니다. 그 부분은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Q.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예산이 발목을 잡는군요? 예산 확보를 위한 복안은 있으신지요? A.열심히 정치인들을 만나 국악방송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예산을 늘려달라고 호소할 생각입니다. 2019년 12월에 국악TV가 개국했는데도 저희 방송사의 예산이 오르기는커녕 해마다 삭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삼년 연속으로 5%씩 줄어들었어요. 국악방송의 위상이 아직 그 정도밖에 취급을 못 받는 거죠. 예산 줄이는 데 우선적으로 지목받는 게 국악방송이라는 얘기죠. 슬픈 현실입니다. 문화부, 기재부 등 관련 부서들도 찾아다니며 호소할 예정입니다. 사실 좋은 창극을 원활하게 중계방송 하려면 당장 중계차도 한 대 더 늘려야 하는데 그 비용이 적어도 40억 원이 소요되는 실정입니다. 관계 부서들은 이해가 약하고... 한숨이 나죠. Q.사장님의 개인적인 역량이 풀 가동돼야겠군요? A.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예산은 부족하고... 그래서 ‘메세나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기업의 후원 없이는 재원 마련이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입니다. 크라운해태 제과 윤영달 회장님 같은 국악 애호 기업인들이 한 열 분 계세요. 우선 그 분들의 이해와 지지를 이끌어내서 시작해보려 합니다. 직원들이 예산 삭감을 염두에 두고 기획을 줄이려드는 걸 보고 제가 그러지 말고 계속 추진하라고 독려했어요. 어떻게든 해봐야죠. Q.혼자서 힘들게 뛰어다니실 게 아니라 예산 확보를 전담하는 직제를 하나 둬야 하지 않을까요? 전담 본부장을 신설할 거라는 이야기도 들리더군요. A.저희 본부장은 방송 담당이라 힘은 들겠지만 아무래도 당분간 제가 뛰어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KT, 곧 SKT에도... Q. 노출도 좀 원활하게끔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국악TV를 접하기가 어려워요. A. 네, 동감입니다. 현재는 KT만 태우고 있는데 곧 SKT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그러면 보다 많은 시청자들이 저희 방송을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망만 늘려도 국악방송 사장 일 절반은 한 게 될 거”라구요.(웃음) Q. 유 사장님의 목표를 보면 누군가가 펼쳐놓는 무대를 TV로 옮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기획 단계서부터 대본, 공연, 방송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국악방송이 소매 걷고 관여해야 할 것 같군요? A. 네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새로운 제작 시스템을 구축해야겠죠. 그럴려면 저희에게 운영 예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산이 절대 필요합니다. 어떻든 국악방송 운영을 맡아 참신한 프로그램 생산과 직원 복지 향상 그리고 K-MUSIC을 포함하는 ‘K-CULTURE 구축’이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해나갈 것입니다. Q. 응원합니다. 저희 국악신문과의 협업도 한번 생각해보시죠? 사업도 함께 기획하고. 저희 신문에 신규 편성에 대한 홍보도 하면 좋을 것 같군요. 홍보 소개글은 작가나 PD가 쓰면 될 테구요. A. 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Q. 그러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듯 싶군요. 이 정도로 취임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오늘 만나 청사진을 들어보니 국악방송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집니다. ‘먼 데 사람 보기 좋고 가까운 사람 듣기 좋은 우리 시대의 방송국으로’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빛을 발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A. 네, 또 기회를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상윤 대기자 1954년 경남 밀양 출생. KBS/SBS 32년간 재직. 다큐 PD, ‘뉴스 추적’ 앵커, 홍콩·베이징 특파원, 스포츠 국장, 논설위원,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위원 등 역임. 현재 국악신문 문화정책/생활문화 대기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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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의 힘으로 ‘코로나’ 고개를 넘다아리랑의 힘으로 ‘코로나’ 고개를 넘다 안상윤 /편집위원 문경새재는 조선시대에 ‘과거 길’로 부르던 곳이었다. 영남의 수재들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길목이었다. 새재(鳥嶺)를 넘어 충청북도를 거쳐 경기도 이천으로 들어갔다. 당시 사람들은 삼삼오오 패를 이뤄 하루에 30km 정도 걸었다고 전한다. 부지런히 걸으면 한양까지는 대략 경남에서 20일, 경북에서는 보름 정도 걸렸을 것으로 계산된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희소식은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소문이 먼저 전해졌다. 그래서 지명이 ‘경사를 듣는다’는 의미로 ‘문경(聞慶)’이라 정해졌다. ‘문경새재’는 기쁨 외에 슬픔과 고난의 의미도 지닌다. 민요 ‘아리랑’에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아리랑의 노랫말,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고난을 극복한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고개를 넘어가는 힘든 과정이 고생을 견디며 마침내 이겨내는 모습과 닮은 까닭일 것이다. 아리랑 민요에서 ‘고개’는 수난을 상징하고 그것은 어김없이 극복의 대상이 된다. 그런 연유로 모든 아리랑 노래의 후렴에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가 붙는다. 아리랑은 노래 그 이상의 역할을 해 왔음을 알게 한다. 실제로 1930년 대에 천연두가 온 나라를 덮쳤을 때, 민중은 아리랑 가사에 "종두(種痘)를 맞고 천연두를 이겨내자.”는 내용을 담아 전파한 선례가 있다. ‘아리랑 고개’는 문경새재를 일컫는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할미성 꼭대기 진을 치고/ 왜병졍 오기를 기다린다.” 등의 기록에서 보듯, 아리랑의 역사를 다룬 문헌에 문경새재가 언급되면서 문경새재가 아리랑의 실지(實地)임을 확인한다. 아리랑의 시초는 경복궁과 관련이 있다. 1865년 고종의 생부(生父)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98)이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등 세도가문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상징적 조치로 경복궁 중건에 나선다. 국가 재정이 어렵던 시절 대원군은 7,225칸 규모의 왕궁을 지으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땡전(當錢) 한 푼 없다.”는 유행어를 야기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해 실질가치보다 백 배나 높은 명목가치를 지니게 만들어 그 차액으로 부족한 재원을 확보하려는 계산에서였다. 이 시기 문경 새재의 박달나무들이 있는대로 베어져 경복궁으로 공출된다. 공사장 각종 도구의 자루로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반강제적으로 부역인들도 동원되었다. 이들이 모두 1017m 높이의 조령산(鳥嶺山)과 1106m 높이의 주흘산(主屹山) 사이에 난 새재를 넘어갔다. 조령산은 ‘새도 쉬어갈’ 정도로 높고, 주흘산은 ‘중악(中嶽)’이라는 별칭답게 나라의 기둥이 되는 산'이다. 이 새재를 넘어 충청북도와 경기도를 거쳐 한양으로 향하면서 ‘문경아리랑’이 만들어졌다. 경복궁 공사에 동원된 삼남 출신들이 고단함을 덜기 위해 부른 이 노동요 성격의 ‘문경아리랑’이 일꾼들 사이에 퍼지면서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아리랑고개’는 경복궁 중건을 매개로 문경새재에서 연유한 시어(詩語)인 것이다. 1896년 고종의 외무 특사이던 H. B.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 박사는 서양 악보에 가사를 채록해 알파벳으로 남겼다. "문경새재 물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라는 노랫말이었다. 이후 새로운 아리랑들이 생겨나 나라 전체로 파급시켰다. 정든 조국땅을 떠나 이역만리를 헤매야 했던 디아스포라(Diaspora)들도 ‘광복군 아리랑’, ‘북간도 아리랑’, ‘치르치크 아리랑’ 등 자신들의 처지에 맞게 노랫말을 지어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은 민족으로 하여금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게 해준 힘이었다.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경시가 수집한 국내외 아리랑 노랫말은 10,068 수에 이른다. 최근 문경시는 단산에 아리랑기념관을 지어 아리랑의 모든 역사를 보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마다 아리랑 축제가 전국 곳곳에서 개최된다. ‘문경새재아리랑제’도 2008년부터 열리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 상황임을 감안해 아리랑의 힘으로 역병을 이겨내자는 취지로 6월 13일에 축제 행사를 가짐으로써 다른 축제들과 차별화를 보였다. 새재도립공원에 마련한 야외공연장에서 고구려 부여 동예 등이 하늘에 지내던 ‘동맹영고무천(東盟迎鼓舞天)’ 유습(遺習)을 빌려 쑥을 피운 채 춤추고 노래하고 땅을 밟으며 힘을 구하는 의식이었다. 2020년을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19’ 고난을 다시 아리랑 정신에 기대 이겨내자는 몸부림이었다. 한민족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집단 정서를 가동해 상생의 기운을 얻어온 저력의 중심에는 늘 아리랑이 있었음을 반영한 기획이었다. 지금 추세로라면 조만간 90년 전 ‘종두선전(種痘宣傳) 아리랑’의 경우처럼 ‘코로나 극복 아리랑’이 등장할 수도 있어 보인다. 아리랑은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상황에 맞게 자기 복제를 계속하는 프랙탈Practal 이론의 전형에 속한다. 앞이 뒤를 끌어주고 뒤가 앞을 밀어주는 모양새다. 아리랑은 노래 그 이상이다. 한국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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