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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3)
백자소문주전자편
도자의 여로 113 / 백자소문주전자편
이 정도의 술 주전자였다면
이규진(편고재 주인)
18세기 후반과 19세기는 백자에서 청화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5세기부터 백자에 시문되던 청화는 임란 후 도자 산업의 위축과 더불어 거의 명맥이 끊긴 듯싶다가 18세기 전반 금사리 시기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다시 되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렇든 것이 18세기 후반을 거쳐 19세기 그 것도 분원리 말기 쪽으로 가면 청화의 남발로 인해 문양이 오히려 혼탁해 지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는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저 초기의 순백과 저 중기의 설백을 통해 순수함을 뽐내던 사대부 취향의 문기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그런 아쉬움 속에 아직도 순수한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고 외치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몸매를 한껏 뽐내며 나타난 것이 바로 백자소문주전자편이다.
백자소문주전자편에서는 청화도 철화도 동화도 볼 수가 없다. 문양 자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색감만으로 승부를 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청백의 빛깔이 그야말로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럽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사대부 취향의 미감을 되 살려 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청화로 문양을 나타낸 이 시기의 다른 백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손잡이 전체가 없어지고 주구 일부도 손상을 입은 데다 몸체에는 다른 기물의 조각이 붙어 있는 등 흠결이 있다. 그러나 그런 아쉽고 부족한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극도의 순수한 순백의 아름다움이 이처럼 그 형태와 빛깔에서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고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고려청자에서 더러 보이던 주전자는 조선조에 오면 오히려 줄어든 느낌이다. 조선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금속기를 모방한 다양한 주전자들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백자소문주전자편은 백자항아리에 손잡이와 주구 등을 접목시킨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각이 진 주구와 손잡이 연결부에 덧댄 연주문 장식의 마감판 등 고풍스러우면서도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정선된 태토에 엷은 담청색의 투명유를 입혔으며 굽 접지면에는 모래받침을 하고 있다. 손상을 입어 다소의 아쉬움은 있지만 현 상태만으로도 단아한 가운데 엄격한 풍모를 느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이 백자소문주전자편은 온전했더라면 어디에 사용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술이다. 술을 담았던 술 주전자로서 선비들이 모여 앉은 담론의 현장에서 그 매개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정도의 술 주전자였다면 여기에 사용된 술잔 또한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순백의 백자잔이었으리라. 백자주전자와 백자잔, 그리고 모여 앉은 선비들의 기백과 형형한 눈빛이 한데 어울려 풍기는 분위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백자소문주전자편은 19세기 분원리 산이다. 이 시기만 해도 조선 왕조는 세도 정치에 의해 서서히 석양의 노을이 짙어져 가던 시절이다. 해일처럼 밀려들던 외세에 아무런 대응책도 없던 시대의 아픔을 선비들은 어떻게 느끼고 감당하고 있었을까. 울분이었을까 좌절감이었을까. 그 속 쓰림을 한 잔의 술에다 실어 보내며 마음을 달래지는 않았을까.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한 점의 백자소문주전자편 앞에서 뜬금없이 그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의 마음가짐이 궁금해지는 것은 알면서도 실천의 길이 안 보이는 좌절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한 일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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