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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 <4>
박연의 상언은 계속되었다. 종묘 사직에 관한 너무도 간곡한 청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천신에게 제사하는 제례가 있어서 원단의 의식을 세우고 여려 해 동안 제사를 거행하다가 제후국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까닭으로 그만두고 시행하지 아니한 지 이미 여러 해이다. 오직 이 풍운뇌우의 단만은 왕(성상聖上)이 천신을 공경하여 제사하는 곳이므로 더욱 급급하게 개정하고 시일이 지나기를 기다리지 말 것이다. 왕년에 신이 이런 폐단을 고치기를 청하였으나 정부의 의논이 합치되지 아니하여서 윤가允可를 얻지 못한 지 이미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마음이 상하고 분함이 쌓여서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다가 이제 영선하는 것이 조금 뜨음하고 또 연사年事도 풍년이 들었으니 제단을 개정하기에 알맞은 때인 것 같다. 하물며 신의 몸이 제단 일을 맡고 있어 뜻이 조두俎豆 사이에 있으므로 끝내 침묵하고 있으면 두 번째 천총天聰을 모독하는 것이다.
구구 절절 호소하는 요구 청원의 심도가 높아갔다. 깊어졌다고 할까.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상하고 분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뜻을 이루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의 표현이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상언을 끊어 나누어서 평어체로 옮겨 번거로움을 피한다. 앞에서도 그랬다.
조두는 제사 때 음식을 담는 제기의 하나이다. 천총은 무엇인가. 글자대로라면 天聰은 중국의 한 때(1626∼1636) 연호인데, 임금의 사랑 天寵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풍사 우사의 단을 세우는 곳은 옛 사람이 왕도王都에서 성수星宿의 방위로 정하였으나 이제 만약 험하고 막히어서 단을 세울 수 없다고 하면 원단을 세웠던 고을이 수목이 우거지고 사람 사는 곳과 떨어졌으며 고을 안이 넓고 깊어 단을 세우기에 마땅한 장소가 한 두 군데가 아니다. 하늘에 제사하던 곳에 그대로 천신의 단을 세우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같이 한다면 세 단壇이 제기 두는 곳으로서 한 창고를 같이 세우게 되며 단지기〔壇直〕와 마지기〔奴子〕들이 합력해서 제사를 받드는 것이 편하고 합당하다고 본다. 그 단소壇所를 바르게 하고 각각 전奠 드리기를 전담하게 한다면 도성都城 한 모퉁이를 점령하고 단을 설치하여 신神이 그 제사를 흠향하게 하는 것에 비할 수가 없다. 예전에 제사 지내던 곳은 그대로 수축하여 산천의 단으로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원하옵건대 성상께서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시고 여러 사람의 의논에 자문諮問하지 마시고 한 시대의 제도를 모두 일신一新하게 하시어 만세 후대에 남겨 주신다면 큰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연의 상언은 대단히 간곡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단호하였다. 소신이 있고 아집도 대단하였다.
신충은 임금의 마음이다. 소신인지 과욕인지, 여러 사람과 의논하지 말고 임금의 뜻대로 하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의 상언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 임금은 예조로 하여금 정부와 같이 의논하게 하였다. 결과는 또 어떻게 되었는가.
나이가 많고 병이 깊다고 하며 병조판서의 직사職事를 면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던 중추원사中樞院事 이견기李堅基는, 풍운뇌우를 역대 사전祀典에 의하면 각기 방위를 두고 제사하였다고 하니 상언한 것에 의하여 시행하고 단유도 역시 고문古文에 의하여 축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상언은 물론 박연의 의견이었다.
다른 여러 중신重臣 들도 의견을 말하였다.
집현전 대제학 안숭선安崇善 예문관 대제학 신인손辛引孫도 같은 의견이었다. 홍무예제의 같은 단에서 치제致祭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준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경솔하게 고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며 문헌통고文獻通考 지정조격至正條格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등 문헌의 제례를 들어 아뢰었다.
"역대로 다 그러하였으니 상언한 것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그리고도 많은 논의를 하였다. 신개申槪 민의생閔義生 정인지鄭麟趾 심도원沈道源 최사강崔士康 그리고 황보인皇甫仁 하연河演 허조許稠 등 각기 의견들을 내놓았다. 특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의견들을 보태었다. 다 소개하지는 않는다.
정인지는, 풍운뇌우는 예전대로 홍무예제에 의거하여 산천단에 합제하게 하고 단유壇壝와 위판位版의 법제만은 다시 상고하여 엄정하게 수식修飾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영의정 황희黃喜도 여러 가지 얘기를 하였지만 홍무예제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예조는 의논을 마치고 황희 등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박연의 상언에 격조를 갖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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