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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17) 진남교반 병풍바위에 새겨진 일본 헌병 순직 마애비(磨崖碑)
이만유의 문경사랑 17
- 당시 일본 침략사 규명, 중요 사료로 연구 활용되길 -
이만유/문경구곡원림보존회 초대 회장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경북 팔경 중 제1경인 진남교반(鎭南橋畔) 병풍바위에 구한말 일제가 새긴 것으로 보이는 마애비(磨崖碑, 석벽에 글자나 그림 불상 따위를 새긴 비)가 있다.
비문은 "故陸軍憲兵二等軍曹大山辨藏君之碑(고육군헌병이등군조대산변장군지비)”이고 그 옆에 "電線監視歸途溺死(전선감시귀도익사) 明治三十一年七月三十日(명치삼십일년칠월삼십일)”이라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 중 " 二等軍曹(이등군조)”, 明治三十一年(명치삼십일년), 大山辨藏(대산변장) 등의 기록이 생소하여 알아본 결과 二等軍曹(이등군조)는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의 계급체계 중 하나로 군조(軍曹)가 있고 그 위에 二等軍曹(이등군조), 一等軍曹(일등군조)가 있다. 이것을 현 한국 육군 계급체계에 적용하면 정확한 대응은 아니지만 모두 부사관으로서 중사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음은 明治三十一年七月三十日(명치삼십일년칠월삼십일)인데 明治(명치)는 일본 메이지 천황 시대의 연호(1868~1912)로서 明治三十一年은 1898년에 해당 하고 大山辨藏(대산변장)은 おおやまへんぞう(오오야마헨조우)로 표기해야 할 것 같다.
이 마애비 내용을 살피면, "고 육군 헌병 이등군조(중사) 대산변장(오오야마헨조우-말할 땐 오를 장음으로 한 오야마) 군의 비이며 전선 감시활동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익사했다. 이를 기려 명치 31년(1898년) 7월 30일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 마애비 출현의 역사적 배경에서, 당시 국제 열강관계 및 한일 정치 상황과 경술국치(1910년)가 있기 전인데도 일제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알아야 하고, 전선 관리의 주체, 어떤 전력을 왜 일본군 헌병이, 그리고 어느 군대 소속이 관리, 감시 감독했느냐는 것은 규명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1898년은 고종 때에 사용한 대한제국의 첫 번째 연호인 광무(光武) 2년이고 갑오개혁(1894), 을미사변(1895)이 있었고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이 끝난 후 3년이 지난 시점이며, 이후 을사늑약(1905년), 러일전쟁(1904∼1905)이 있었다.
마애비 설치 전후의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일본 육군 헌병이 문경에 주둔, 임무를 수행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조사, 연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일본 육군 헌병의 활동에 대해서 알아본 결과에서, 일제는 1881년 조례를 제정하고 헌병을 설치하였고 육군 헌병은 행정, 사법 경찰을 맡은 병과였고 민간인에게도 일반경찰 업무를 실시하여 검문, 체포, 구금, 수사 등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와 대만총독부가 헌병제도를 앞세워 억압적인 식민 통치를 하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한반도 주둔 헌병 제도는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에 따라 구한말의 경찰권은 일본에 위임되었고 독립운동을 억압하고 항일봉기에 대비하는 데 필요한 조직이었다.
그리고 전선의 감시활동을 했다는 전기는 무엇인가? 혹시 경북 문경은 한반도 석탄 생산에서 강원도 다음으로 제2 탄전지대이어서 일제가 지질조사를 끝내고 침략 시 석탄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사전 전력을 공급한 시설이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이 들었다.
그러나 남한 최초의 광산인 문경탄광(대성탄좌)이 1926년 개광되었고 1938년 일제가 수립한 은성광업소가 개광됐다. 이 지역에 전기공급을 위해 1941년에 조선전업(주)에서 설치한 강원도 영월화력발전소에서 고압 철주를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월발전소 건설 43년 전인 1898년에 전선 감시라고 하니 그 당시의 전선이 뭔지 알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아 이 또한 조사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비문에 있는 전선은 꼭 송전 시설의 전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조사를 했다. 일제는 1884년에는 일본-부산 간 해저전선을 설치하였고, 청일전쟁 이후 서울-인천 간 서로전선을 불법적으로 접수하고 이어 서울-부산 간 군용선도 불법적으로 가설하는 등 통신선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찾게 되었다.
일제는 청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헌병에게 각 전선을 지키도록 하였고, 1896년 이후 일반 전신업무를 취급했는데, 임시 육군전신대와 임시 헌병대를 두어 이를 운영하도록 했다는 자료가 있음을 보면 이는 전기가 아닌 통신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비 내용의 주인공도 그런 역할을 했던 헌병이 분명하다.
경북 팔경 중 제1경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진남교반에 있는 기암괴석이 길게 이어진 병풍바위에 인공적으로 새겨진 일제의 식민정책 흔적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
이 마애비는 2015년 발견, 2016년 7월 보도한 것이나 본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더 세상에 알리는 것은 이 자료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관심 있는 분들과 함께 추가 자료를 수집하고, 학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근대사를 정립하는 역사 사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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