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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8

특집부
기사입력 2021.12.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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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의 소리

     

     

    이 동 희

     

     

    흙의 소리 <4>

    그리고 전적典籍을 뒤지고 고래의 예악서禮樂書에 근거하여 철저한 고증과 고제古制 고사古事에 의거하여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무수히 올린 상언上言이 그랬고 쉴새 없이 입안을 하고 실천하는 방법이 그랬다.

    향악을 정리하고 구악을 이정하는 일에 몸을 바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와 악 전반에 걸친 쟁점爭點을 제기하고 그에 매달려 생각을 하고 글로 썼다. 맞지 않고 잘 못 된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성정이 그렇기도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내려진 왕명이라고 할 때 잠시도 해찰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대단히 신중히 하였다. 상주上奏 상언上言 말이다.

    "무일舞佾의 위치가 맞지 않습니다. 옛 현인의 도설圖說을 상고하여 보니 종묘宗廟의 가운데에 있고 악현樂懸의 북쪽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조선에서 악현의 북쪽 섬돌의 남쪽에 벌여놓는 것은 옛 제도에 어긋납니다. 또 땅이 좁고 위치가 좁아서 나아가고 물러서며 변화를 지을 도리가 없으니 진실로 온당하지 못합니다.”

    박연의 지적은 너무도 분명하고 단호하였다.

    악무樂舞 진퇴의 법을 자세히 상고하여 보면 선유先儒가 말하기를(언제나 전제하는 어투이며 방법이었다) 일무를 추는 데는 사표四表를 세우고 춤추는 사람이 남표南表에서부터 이표二表에 이르는 것을 일성一成이라고 하고 이표에서 삼표三表에 이르면 이성二成이라고 하며 삼표로부터 북표北表에 이르면 삼성三成이라고 하고 다시 남쪽을 전향轉向하여 북표로부터 이표에 이르면 사성四成이라고 하며 이표로부터 삼표에 이르면 오성五成, 삼표로부터 남표에 이르면 육성六成이라고 하였다. 풍악도 또한 여섯 번 변화한다. 그리하여 천신天神이 다 강림降臨하는 것이다. 이것은 천신을 제사하는 환종궁圜鍾宮 육변六變의 춤이다. 또 남표로부터 이표에 이르면 칠성七成이 되고 이표로부터 삼표에 이르면 팔성八成이 되는 것이다. 풍악도 또한 여덟 번 변화한다.

    사표는 나라 사방의 바깥이라는 뜻으로 온 세상을 이르는 말이다. 일성은 춤출 때 곁들이는 음악의 단위로 한 장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12의 기본 음인 황종黃鍾에서 시작하여 육율六律과 육려六呂를 거쳐 다시 황종으로 오는 것으로 넉자를 한 박으로 여섯 박 곧 24자가 일성이 된다. 남표 북표는 사전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백과사전 음악사전(세광음악출판사 음악대사전)에도 없었다. 요즘 사전을 대신하는 인터넷도 뒤져보았다. 이표 삼표 이성 삼성 사성 오성 육성 칠성 팔성 그리고 뒤의 구성九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옛 음악, 국악 용어의 뜻을 직역直譯으로라도 설명하지 못하나 고명한 독자들은 여러 경로로 알기를 바라고 필자처럼 짐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춤사위와 율동 가락 울림의 변화무변종묘 선농先農 선잠先蠶 우사雩祀 등 제사에 여러 사람이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춤을 추는 일무佾舞.

    그리하여 땅의 귀신이 다 나와 응감應感하는 것이다. 이것은 땅의 신을 제사하는 함종궁函鍾宮 팔변八變의 춤이다. 또 삼표로부터 북표에 이르면 구성이 되고 풍악 또한 아홉 번 변화한다. 그리하여 사람 귀신도 제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사람 귀신을 제향하는 황종궁黃鍾宮 구변九變의 춤이라고 하였다.

    상언은 계속되었다.

     

    난계-흙의소리68회2차작업.JPG

    [국악신문]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68

     

    "상고하여 보건대 이 사표 진퇴의 절차는 무무武舞의 법입니다. 문무文舞에는 명백한 설이 없습니다. 선유 가공언賈公彦이 말하기를 무무에 사표가 있으니 문무에도 응당 사표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상도陳常道예서禮書에 말하기를 가공언의 말이 사리에 맞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에서도 지난 을해년乙亥年(세종 23, 1431) 겨울 대제大祭를 친행親行할 때에 정도전鄭道傳 민제閔霽 권근權近 제조提調 등이 찬수撰修한 의궤儀軌 속에 문 무 두 가지의 춤을 각각 사표로 하고 서로의 거리를 사보四步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일을 악현 북쪽 섬돌 사이에 두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는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옛 제도에 의거하여 무일을 전정殿庭의 가운데에 벌여 육변 팔변 구변의 의식을 다 하게 하십사고 하였습니다.”

    박연은 그렇게 전적과 사례를 가지고 논리를 펴며 아뢰었다.

    무일의 위치에 대해서 거리에 대해서며칠을 다듬은 논리였다. 어쩌면 참으로 하찮은 대단히 미미한 문제였지만 너무도 중요하게 철저하게 지적을 하고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본조本朝에서 의례상정소와 같이 살펴보오니 위에서 말한 묘정廟庭에 헌현軒懸을 설치할 곳은 실로 비좁습니다. 청하옵건대 남쪽 섬돌에서부터 구보九步를 더 넓게 하소서

    종지從之, 박연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

    세종 14143234일 세종실록 55권에 있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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