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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

김창선(金昌善/津守秀一) 쓰모리 히데카츠

특집부
기사입력 2021.09.0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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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욱  

     

    나운규가 직접 각본·각색하고 출연한 첫 번째 연출 작품. 이 작품은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감독·각본을 김창선(金昌善)이라는 한국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쓰모리 히데카츠를 내세웠다(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 p.104).

     

    첫 장면에 앙숙을 상징하는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고 자막이 사라지면 주인공 영진과 오기호가 서로 노려보며 클로즈업 된다. 영진은 정신이상자로 나온다. 또한 영진의 환상을 통해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네플류도프 백작과 카투사가 이별하는 장면, 사막에서 두 청춘 남녀가 목말라 애타는 장면, 진시황의 죽음에 관한 대사 등을 적용하여 억압받는 조선과 억압하는 일본, 즉 침략자의 패망과 독립에의 열망을 암시하고 있다. 개와 고양이는 일제의 억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컷이며 네플류도프와 카투사, 사막에서 물병의 물을 쏟아버리는 장면 등 몽타주 기법 삽입은 당시로써는 기발한 발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동생 역으로 출연한 신일선은 당시 16세의 어린 소녀로 나운규가 발탁했다. 본명은 신삼순이며 아리랑 출연 때는 신홍련(申紅蓮)이라는 예명을 썼다.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준 이 영화는 우리 전래민요의 가사 내용을 모티브 삼아 일제시대 시달림을 받던 민족의 비애를 비탄의 극치로 이끌고 있다. 영화 상영 중 관객은 단성사 관현악단이 편곡한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이내 가슴에 수심도 많다라는 아리랑 4절을 합창하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았고 개봉 첫날 단성사 앞은 경찰 기마대까지 동원되는 등 표를 못산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합창하면 기다리던 사람들도 함께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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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신문] 영화 ‘아리랑’에서 남매로 출연한 나운규 감독과 배우 신일선

     

    당시 관객은 15만 명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만 명 단위 관객 동원이 흥행으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리랑2년 이상 관객을 끌어 모았고 그로써 얻은 수입은 개봉 흥행 때의 몇 배를 능가하는 액수다. 이 영화는 1927년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춘사(春史) 나운규(1902~1937)는 함북 회령 출신으로 중국 간도 명동(明東)중학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 1923년 신극단 예림회(藝林會)의 배우가 되어 북간도 일대를 순회공연했고, 부산 조선키네마에 입사하면서 1925운영전으로 단역 데뷔했다. 그가 출연하거나 각본을 쓰고 감독한 작품은 총 27, 그중 각본·출연·편집을 겸하면서 연출한 작품은 오몽녀’(1937)까지 16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제작된 아리랑연보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필두로 1930, 이구영의 아리랑 그 후 이야기’, 1935, 홍개명의 아리랑 고개(문예봉, 노재신, 문수일, 이춘하, 출연)’, 1936년 발성영화 시대를 맞아 나운규의 아리랑 31937년 제 1회 조선일보 영화제에서 최우수작(4,947)으로 선정되었다. 그 외 1954년 이강천의 아리랑(허장강 데뷔)’, 1957년 김소동의 아리랑’, 1968년 유현목의 아리랑(박노식, 남궁원, 홍세미)’, 1974년 임원식의 아리랑(신성일, 박지영, 허장강)’, 1977년 정인엽의 아리랑아’, 1997년 안태근의 아리랑’, 2002년 이두용의 아리랑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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