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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갑사 대웅전」&「의성 대곡사 범종루」&「순천 팔마비」 보물로 지정

편집부
기사입력 2021.03.2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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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면 캡처 2021-03-26 164545.jpg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공주 갑사 대웅전(公州 甲寺 大雄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의성 대곡사 범종루(義城 大谷寺 梵鍾樓)」,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순천 팔마비(順天 八馬碑)」 등 3건의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였다. 또한, 국보인『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명칭을 원래 명칭인 『영천 거조사 영산전』으로 변경하였다.


      공주 갑사 대웅전은 정유재란 이후 갑사에서 가장 먼저 재건된 건축물 중 하나로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면서 대체로 원형을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웅전 내부의 ‘갑사소조삼세불(보물)’이 1617년에 만들어졌고, 1659년에 「갑사사적비」가 세워지는 과정을 고려하면, 갑사 대웅전의 건립연대는 17세기 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건축으로서 갑사 대웅전은 전환기 건축의 특징을 지닌다. 정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집 구성인데, 정면이 5칸이면서 맞배지붕을 한 사례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정면과 배면 공포의 형식이 같고, 기둥 간격이 정면 중앙 3칸이 12척, 옆면과 나머지 주칸은 8척으로 나타나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목구조에서 휘어진 재료를 최소한으로 가공하여 사용한 것은 경제적 상황과도 연관되어 이 시대에 새로 등장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갑사 대웅전은 17세기에 지어진 다포계 맞배집의 전형적인 형식을 공유하면서 조선 후기의 건축적 경향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연혁과 유래를 알 수 있는 각종 기록과 유물이 잘 남아 있고, 평면구성과 공포의 구성수법, 상부 가구와 닫집 등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등 17세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의성 대곡사 범종루는〈대곡사 창건 전후 사적기>의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병화로 전소되어 17세기 중·후반인 1644년에서 1683년 사이에 중창되었다고 전해진다. 범종루는 정면 3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 건물이다.
    현존하는 누각 건축 중 17세기 전반의 것은 대부분 3칸 평면을 가지고 있고, 이후 누각 평면이 3칸에서 5칸, 7칸으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경향을 살펴볼 때 범종루는 기존에 남아 있는 누각 건축 중에서도 이른 시기인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공포의 첨차와 살미의 형태, 창방을 비롯한 다수 부재의 의장적 요소 등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적 특징이 잘 남아 있다. 특히, 중앙칸에 주간포를 생략하고 화반을 대체한 절충식 양식이 주목된다. 범종루는 의성지역의 불교사찰이 부흥하기 시작한 17세기의 양식적 변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누각 건축의 변천과정을 살필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순천 팔마비」는 1281년(충렬왕 7) 이후에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승평부(지금의 순천)에 건립한 비석이다.

      최석의 행적과 승평부의 읍민들이 팔마비를 건립한 사실은 ?고려사?의 열전(列傳)에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되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최석은 승평부에서 기증한 말을 타고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떠난 후 자신이 기증받은 말과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돌려보냈다. 이후로 승평부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말을 기증하는 폐단이 사라졌고,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하였다.
     

      비석은 고려말 처음 건립된 이후 1300년대 초반 쓰러졌으나 다시 세워졌고, 이후 정유년(1597년, 선조 30)의 병란으로 완전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1616년 부사로 부임해 온 이수광에 의해서 1617년 다시 건립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해졌다.


      이수광이 중건한 팔마비의 ‘팔마비(八馬碑)’ 세 글자는 진사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고, 뒷면에 기록된 음기(陰記)는 이수광이 짓고 동지사(同知事)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다.
      * 음기(陰記):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비석은 상면이 둥글게 처리된 비갈형(碑碣形)이다. 비석의 높이는 약 160cm, 폭은 약 76cm, 두께는 약 16.5cm 이다. 전면에는 액을 만들어 글씨를 새겼는데, 액의 상부는 귀접이 형태로 하였다. 액의 크기는 높이 약 140cm, 폭은 약 63cm로서 그 내부에 ‘八馬碑(팔마비)’ 석 자를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글자 한 자의 지름은 약 48cm로 상당히 크다. 비좌(碑座)의 크기는 가로 140cm, 세로 76cm, 높이는 33.5cm이며, 비를 세우기 위해 파 넣은 홈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18cm이다. 비좌의 상면에는 비신을 받치기 위한 호형(弧形)의 2단 받침을 마련하였는데 높이는 각각 약 2.5cm 정도이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를 덮는 돌), 비신(碑身,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대좌(臺座, 불상을 놓는 대)를 갖춘 비와는 달리 비신 위에 옥개석이 없고, 대좌에는 불교유물에서 볼 수 있는 연화문(蓮華文)이 새겨져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순천 팔마비는 건립된 이후 중건시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순천 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유물로서의 위상과 13세기에 처음 건립되었다는 역사적 유래가 있고, 1617년에 순천부사 이수광이 중건한 비의 실물이 현전하여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팔마비의 주인공인 최석을 청렴한 지방관의 표상으로 삼아 현재까지 이어온다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 역사, 예술, 학술 가치가 충분하다.


      한편, 그동안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으로 불리던 것을 『영천 거조사 영산전』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거조암’ 이란 명칭은 1912년 은해사(銀海寺)의 말사가 되면서 바뀐 이름으로 원래 명칭은 거조사(居祖寺)였다. 1478년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등 각종 문헌에 거조사로 명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2007년 조계종에 거조사로 사명을 인정받았고, 발굴조사(2003~2005)를 통해서도 상당히 넓은 사역에 불전과 탑 등이 확인되는 등 사찰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동안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문화재 명칭은 ‘거조사’의 본래의 이름을 되찾아 『영천 거조사 영산전』으로 변경하였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공주 갑사 대웅전」, 「의성 대곡사 범종루」, 「순천 팔마비」을 체계적으로 보존·활용하도록 해당 지방자치단체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명칭 변경된 『영천 거조사 영산전』은 안내문 개선과 홍보 등을  해당 지방자치단체 및 소유자와 협의하여 개선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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