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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금강산(金剛山)」 시문
「금강산」 시문의 경우, 난고문학관의 설명문에는 "1850년(1851년의 잘못─저자) 화순 동복에서 금강산 시회(詩會)의 일부를 써 놓은 친필”이라고 씌어 있다. 시문의 말미에는 "道光三十一年金炳淵書于於也同福”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金炳淵書于於也同福”은 "김병연이 동복에서 쓰다”라는 뜻으로 쓴 문구로, 어법상 맞지 않는다. 여기서 ‘於也’ 두 자가 빠져야 제대로 된 문장이 되는데, 과연 김병연이 이런 실수를 범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강원대학교 남윤수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다음으로, 이 글은 도광 31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도광 연호는 30년(1850)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도광 31년’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사용되지도 않았다. 혹시 김병연이 실수나 착각으로 ‘도광 31년’이라 썼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난고문학관 설명문에 ‘도광 31년’을 ‘도광 30년’에 해당하는 ‘1850년’이라고 표기한 것은 혹시 이를 염두에 둔 궁색한 변명인지도 모르겠다.
「금강산」 시문은 김병연의 시 「금강산」의 일부로, 노승(老僧)의 시에 답한다는 「답승금강산시(答僧金剛山詩)」의 대구시(對句詩)이다. 시인 정공채(鄭孔采)의 『오늘은 어찌하랴—김삿갓 시의 인생』에는 이 화답시가 모두 열네 번 오갔는데, 난고문학관의 「금강산」에는 다섯 번의 화답이 실려 있다. 알려진 대구시와 비교하면 순서가 뒤바뀌고 많은 부분 생략되었으며, 특히 셋째 연에서는 노승과 김병연의 화답이 서로 바뀌었다. 주인과 객이 뒤바뀐 꼴이 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시문이 난고문학관의 설명처럼 모두 김병연의 친필이라면, 우선 이 두 글씨가 같은 사람의 필체임을 판명해야 한다. 필체를 대조하는 데는 예리한 감식안도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객관적인 여건도 갖추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십대에 쓴 글씨와 오륙십 대에 쓴 글씨를 대조해 보면 같은 사람의 글씨라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또 해서(楷書)로 쓴 글씨와 초서(草書)로 쓴 글씨는 대조가 거의 불가능하다. 다행히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시문은 1850년과 1851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어 시차가 거의 없고, 서체도 행서(行書)에 가까워 대조하기가 용이한 편이다.
글씨를 대조하기 위해서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시문에서 같은 글자를 찾아보았다. 「선생부지하」의 끝에서 두번째 행과, 「금강산」의 첫 행과 마지막 행의 ‘金’자를 보자. 첫 획과 두번째 획을 보면, 「선생부지하」에서는 첫 획이 두번째 획 위에 있고 「금강산」에서는 두 자 모두 첫 획이 두번째 획 아래에 있다.
다음으로 「선생부지하」의 끝에서 두번째 행과 「금강산」 끝 행의 ‘書’자를 보자. 「선생부지하」에서는 정자(正字)인 반면에 「금강산」에서는 약자(略字)로 되어 있다.
이처럼 ‘金’자와 ‘書’자를 비교해 보면 「선생부지하」와 「금강산」이 서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道光’ ‘三十’ ‘年’ ‘炳淵’ ‘同福’ ‘山’ 등의 겹치는 글자를 살펴보면 「선생부지하」의 글씨는 전체적으로 왼쪽으로 쏠리는 경향을 보이고, 「금강산」의 글씨는 오른쪽으로 쏠리고 있다.(*사진 70)
이렇게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글씨를 비교하여 검토해 본 결과 이를 같은 사람의 글씨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