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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생’과 ‘척하생’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를 다루는 과정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자료 중에는 책뿐만 아니라 문서나 메모 등도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 원래 보관되어 있던 상태를 결코 흐트러뜨려서는 안 된다. 특히 문서나 간찰(簡札)의 경우, 봉투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봉투와 분리해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또 차례를 뒤섞어서도 안 된다. 차례가 뒤섞여 버리면 나중에 그 순서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간찰의 경우, 글쓴이가 ‘부(父)’ 또는 ‘자(子)’ ‘제(弟)’로 표시된 것이 많은데, 이런 간찰이 달랑 혼자 떨어져 있다면 글쓴이가 누군지를 밝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간찰이나 문서는 한 집안에서 보관되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만약 다른 간찰이나 족보가 함께 있다면 그 아비〔父〕가 누구고 아우〔弟〕가 누군지를 간단하게 밝힐 수 있다. 또 책갈피에 메모지나 문서 같은 것이 끼어 있기도 한데, 이것 역시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두는 것이 자료를 고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도판 18)
1985년 조성호란 노인이 고문서 한 다발을 가지고 왔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는 고서화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고서 중개인이었다. 성품이 바른 데다 고서화를 보는 감식안이 매우 높아 나는 노인과 가까이 지냈다. 그날 노인이 내놓은 자료는 첫눈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간찰과 시문들이었다. 글씨며 종이 됨됨이까지도 아주 빼어났다. 특히 『다산문답(茶山問答)』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서첩은 지금까지도 기억이 또렷하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고운 비단에 당먹으로 쓴 글씨는 지금까지 접해 본 글씨 중에서 최고 명품의 하나로 꼽는 작품이다.
이 서첩은 다산 선생의 강진 유배 시절, 그곳까지 찾아온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 1772-1839)에게 써 준 서첩으로 문산과의 문답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당시 문산은 영광군수로 있는 아들 종영(鍾英)에게 와 있던 중이었다. 문산은 다산보다 열 살 아래였지만 이들은 학문적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도 돈독한 우의를 다진 것 같다. 지금은 다산과 문산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많아졌지만 내가 이 자료들을 접할 때만 해도 문산과 그의 아들 종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조 노인이 가져온 고서 중에는 『다산문답』 이외에도 다산의 장남 학연(學淵)의 간찰 여러 점이 함께 있었다.(*도판 19) 학연의 간찰 중에는 이름 대신 ‘척하생(戚下生)’이라고 표기한 것도 있었다. ‘척하(戚下)’란 성(姓)이 다른 겨레붙이를 상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이처럼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간찰을 학연의 것으로 단정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자료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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