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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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영화] 소리꾼(2020년)노래 인당수 (Indangsu) 아티스트 이봉근, 김하연 (Kim Hayeon), 윤석기 (Yun Seokgi), 공명 (Gongmyoung) 앨범 소리꾼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The Singer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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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영화] 서편제(1993년)영화 서편제 중 진도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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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열정을 가진 당신이 대한민국 인재입니다”교육부(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유은혜)와 한국과학창의재단(이사장 직무대행 조향숙)은 꿈과 열정을 갖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대한민국 미래를 주도할 「2020 대한민국 인재상」 선발을 위해 7월 31일(금)부터 8월 31일(월)까지 한 달간 온라인 접수를 시작한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 인재상」은, 지난 20년간 다양한 분야에서 잠재력과 전인적 소양을 갖춘 우수 인재를 발굴하여 우리 사회 바람직한 인재상을 정립하여 왔다.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진 역대 수상자에는 <국민 여동생> 문근영(06년 수상), <행복한 스케이터> 김연아(08년 수상), <악동뮤지션> 이찬혁(14년 수상) 등이 있으며,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삶의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대다수 수상자들은 아직 학생 신분으로 자신의 삶의 대한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으며, 사회로 진출한 수상자들은 학교선생님·직장인·전문직·1인창업가·사업가·사회활동가 등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빛나는 인재로 성장하고 있다. 아울러, 「대한민국 인재상」 수상 이후에도 청년 인재들은 아름다운 도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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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의 노래 연평도 편, '살라라' (이소라)살라라 살라라 나알 살라라 황영익이네 누나야 정관석이만 살라라 1988년 7월에 연평도를 방문하였을 때, 연평도 토민인 63세의 정관석 씨가 장가를 갔을 적, 발바닥을 위로 향해 달아 매였고 동네 청년들이 발바닥을 때려, 장모님께 "날 좀 도와주시오” 하면서 불렀다고 들려주셨다. 연평도에서는 새신랑이 살려달라는 이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신부집 식구들이 신랑을 안으로 들여주지 않았었단다. 연평도의 동부리에서 출생하여 남부리로 시집간 1940년생 이길자 씨는 일찍 사별한 남편 박종운이 장가들러 남부리로 왔을 때를 추억하며, 살라라하 살라라 나할 살라라 이재건네 길자야 박종운만 살라라 이재건은 이길자씨의 오래비다. 박종운은 이재건과 친구지간이었으리라. 또한, 황영익은 신부의 남동생이고, 새신랑 정관석과 잘 아는 사이임을 노래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연평도 사람들은 자진난봉가를 즐겨 부른다. '살라라'도 자진난봉가 곡에 얹었다. 신부집으로 길갈 때도 연습 겸 부르지만, 새신랑의 '살라라'노래가 받아들여져 신부집에서 음식을 내오고 분위기가 고조되면, 모인 사람들과 함께 '살라라'노래가 이어진다. 에 헤 – o 어허야 어허 어어어 어 – 야아아 어야 어야, 디야 라아 내 사 랑 아 모닥불 옆구리, 통치마 자리는 언제나 자라서, 내 품안에 드 나 에 헤 – o 어허야 어허 어어어 어 – 야아아 어야 어야, 디야 라아 내 사 랑 아 잘 놀다 갑시다, 잘 놀다 가요 이 밤이 새도록 노홀 다나 가 세 노래를 통해, 하객들과 어울려 밤이 새도록 먹고 마시며 떠들썩했던 새신랑다루기 풍속을 엿볼 수 있다. 새신랑을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북어나 몽둥이로 때리는 풍속은 과히 통민속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살라라'와 같은 신랑다루기 노래를 수집한 것은 연평도에서일 뿐이다. 징, 꽹과리, 북과 장구까지 동원하여 떠들썩하게 노래하며 놀던 그들이 몇 분이나 생존해 계실까 ? 가장 연소자였던 이길자 씨도 이제 70객이니 ... 2000년대에 들어 연평해전과 기습 민간인 포격까지... 와중에도 '살라라' 풍속노래가 연평도 출신의 신부집에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최신 예식장에서까지 지혜롭게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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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國樂)국악이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우리 민족 고유의 노래와 연주와 춤의 총칭이다. 국악은 현재 한국전통음악(韓國傳統音樂)과 한민족음악 등 다양한 용어로도 통용되고 있는데, 그 용어들은 범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전통음악은 전통적으로 전승된 한국음악이며, 한민족음악은 우리민족의 생활 속에서 계승 발전된 음악을 가리킨다.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을 근간으로 계승된 음악을 통칭한다.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을 전통음악이라고 부르는데,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즉 1910년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가리킨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부터 약 50년 전, 즉 30년대 이전부터 있었던 음악을 전통음악이라 부르기도 한다(문화재보호법 참조). 국악은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 곧 향악(鄕樂)을 모두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전통음악과 최근의 한국적 창작음악까지를 포함하는 우리나라 음악이다. 이 밖에 한국적인 아이디어에 의하여 작곡된 현대의 음악도 한국음악의 범주에 속한다. 한국음악이란 한국에서 연주되는 모든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 또는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연주되는 모든 음악 속에는 서양음악도 많기 때문에 이것을 한국음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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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무형문화재 '시조창' 이영준 보유자서울시 무형문화재 된 이영준 명창을 지난 주말에 찾았다.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값지게 가꾸는 사람이야말로 그의 생애가 뭇 사람으로부터 흠모와 칭송을 받는다. 우리는 오늘날 걸출한 예술가요. 희대의 풍류객인 한 사람을 주목한다. 이영준 문학박사가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47호 시조창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영준 보유자는 지난 2006년 12월 3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고희기념 우리소리음악회(시조, 가사, 가곡)을 마련하여 그동안 갈고 닦아온 시조창을 선보였다. 또한 그는 뛰어난 작품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고 단체전에서도 다수 참가하는 등 예술활동을 벌여왔다. 일찍이 시조창과 삼절(三絶)사상에 투철, 시·서·화에 빼어난 문인화의 대가로서 도인다운 기품을 지녔다. 일세의 경지를 이룬 그의 예술혼, 드높은 이상과 고귀한 투혼으로 자신을 준엄하게 담금질하여 마침내 사계의 권위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청죽(靑竹)같은 지조, 고아(高雅)한 아취(雅趣), 매운 향기로 불굴의 기개를 지녔다. 이영준 보유자의 생애는 실로 드라마틱하다. 특히 예술세계에 심취하게 된 동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30여년 전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큰 병에 걸렸었다. 대학병원에서 큰 수술을 두 번씩이나 받는 등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수술 후 운동을 해야 하는데 장이 제 기능을 하도록 장운동을 꾸준히 하라는 의사의 권유 때문에 단전호흡을 하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일간신문에서 시조를 통해 건강을 회복했다는 김월하 선생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김월하 선생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였고, 이영준 씨은 이때 자신도 시조를 배워야겠다는 마음에 그날부터 시조를 가르치는 곳을 수소문하였고, 시조명인 김규식 선생에게 가서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시조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이영준 씨은 마음도 안정되고 건강도 차츰 좋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인 그의 성격은 굳건했다. 무슨 일이던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이제 막잠에서 깨어난 예술적인 흥미까지 겹쳐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경 야독하며 시조를 읊어도 신명은 날로 더해갔다. 그의 후암동 사무실에는 시조를 읊기 위한 악보며 장구, 음향기기가 질서 정연하게 갖춰져 있다. 시조 생활을 하며 심혈을 기울인 결과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고 다른 예술분야인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꾸준히 쓰고 있다. 특히 그는 현대미술협회장직을 추대 받아 10여 년간 신진작가들의 등용문인 현대미술대전을 주관하여 국내외 화단에 이름이 나도록 공헌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을 손수 제작, 출품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건강 때문에 배운 시조창은 우리나라는 대표하는 시조인들의 모임인 대한시조협회 중앙본부가 주최하는 전국시조가사가곡경창대회에서 문화부 장관상, 시조인에게 주는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리고 전주대사습놀이 시조부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사)대한시조협회 이사장직을 추대 받아 60여개 지부 지회를 115개로 확장시켜 우리나라 시조인의 대부분을 망라하는 큰 조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그는 전통음악을 시조창을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넣게 함으로써 시조사에 빛나는 업적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정신적인 풍요와 건강한 육체를 시조를 통해 얻었다고 자부하는 이영준 보유자는 앞으로 우리 문화의 진수인 시조문화를 더욱 발전시켜 국민 모두가 1~2수의 시조창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읊을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기를 열망하고 있다. 건강 때문에 입문한 시조창이 그에게 명창이란 명예와 시조창계의 전설인 석암 정경태선생의 뒤를 이어받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7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김호규 기자 hg14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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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설장고 명인 김병섭김병섭 선생은 장고 하나로 한국농악판에서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았던 명인이다. 1921년 정읍시 북면에서 태어나 김학순에게 설장고를 배워 우리나라 최고의 설장고 명인으로 올라섰던 김병섭은 어려운 형편 때문에 운명적으로 농악과 만나게 됐다. 김병섭은 자신의 나이 열 한 살 때 자신의 형이 수리조합에서 돈을 빌어서 농악기를 장만하면서 농악을 접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김학순을 스승으로 사흘 만에 기본가락을 배울 만큼 김병섭은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김병섭은 사흘 만에 기본가락을 웬만큼 터득할 만큼 배우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김학순 씨도 김병섭의 타고난 재주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나흘 만에 작파(作破)할 수밖에 없었다. 손자가 장고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의 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김병섭은 몰래 숨어서 사흘 동안 배운 가락을 혼자서 연습을 해야만 했다. 대동아 전쟁 때 일본인에 의해 싱가포르 함락 기념축제에서 장고잽이로 나서기도 했던 김병섭은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징용에 끌려 나가 아오지 탄광에서 스물다섯 살 때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마을마다 농악을 다시 쳤고 서울에서는 농악경연대회도 열렸다. 특히 일본군은 당시 정읍농악단의 명성을 알고 기념축제를 하라고 악기를 내주기까지 했으며 정읍마을 농악대회를 불러모아 굿을 하라고 해서 장고를 신나게 쳤다는 기록도 보여 당시 정읍농악의 인기가 우수성이 얼마나 높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이승만 정권시절 그는 새로운 삶을 맞는다. 이승만 정권은 농악을 장려, 해마다 농악경연대회를 열었고 재주 있는 잽이 들은 이곳 저곳에 불려 다니면서 솜씨를 뽐냈다고 한다. 당굿이며, 풍장이며, 걸궁이 쉼 없이 이어졌고 잽이 대접도 푸짐해졌는데 이 때 그의 솜씨는 최고의 주가를 올리게 된다. 이 시기에 정읍을 중심으로 전북 일원에서 그의 가락은 가장 높은 경지의 수준을 보여주게 된다. 이렇게 한창 장고잽이로서 유명해졌을 때, 남원국악원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여성들로만 구성된 여성농악대를 만들었다. 이 여성농악대가 순회공연을 하면서 성공을 거둑자, 흥행만을 목적으로 한 여성농악대들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결국 남자들은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남자들은 농악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김병섭은 그러한 여성농악대만을 지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여성농악대는 처음부터 농악의 원형과는 관계없이 흥행만을 노렸기 때문에 변질된 농악이 되어버렸고 그나마 여성농악대가 자취를 감추자 전통농악은 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 후 전국민속경연대회가 생겨나서 자유당 때 하던 농악경연대회를 그곳에 합류시켰다고 한다. 1956년 전국농악대회에서 정읍농악으로 개인상을 수상하며 중앙무대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 김병섭은 1963년과 1964년에 개최된 제4회와 제5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정읍우도농악이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며, 1956년에 이어 1964년 서울에서 열린 제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설장고로 개인상을 수상해 명인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 전국민속경연대회는 원형보존보다는 우선 눈에 잘 띄게 하는 것이 관심을 더 쏟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그나마 부분적으로 남아있던 여러 지방의 특색 적인 농악의 원형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생전에 몹시 애석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김병섭은 정읍을 벗어나서 1968년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김병섭을 서울로 불러들인 사림이 바로 한국인이 아닌 평화봉사단원로 활약했던 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미국인은 김병섭의 장고솜씨를 보고 그에게 매달려 서울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때 김병섭은 식구들을 고향에 둔 채로 올라와 서울 안국동에서 미국인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미국인과 동료들에게 장고를 가르쳤다. 서울로 올라온 후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김병섭은 그의 명성에 걸맞게 한양대와 서울예고, 선호예고 등에 나가 후학들을 지도하며 동암동에 있던 김병섭 농악연습소에서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그의 가락은 전라우도 농악 즉 정읍농악의 진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명인으로 추앙 받을 만큼 튼튼했다. 혼자서 할 때는 설장고와 둘이 할 때는 쌍장고라 하는데, 그의 장고잽이놀이는 느린굿거리, 활발한 동살풀이, 구성진 구정놀이, 흥겨운 덩덕궁이, 격렬한 다르래기로 가락을 달고 맺고 풀면서 몰아간다. 김병섭은 한국 농악사에서 장고잽이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은 전통문화유산에 밑거름이 된다. 특히 그의 장기였던 고깔 설장고는 우도농악의 최고로 꼽히는 김도삼의 제자 김학순, 백남길에게서 배운 정확한 계보를 갖고 있어서, 설장고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온 명인 김병섭, 당시 젊은 세 사람 이정범, 전사섭,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향토적인 가락을 발전 시켰으나 그 내용과 형식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김병섭은 자신만의 독특한 가락을 근저로 정읍농악우도농악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산파(産婆)역할을 했다. 김학순으로 이어졌던 설장고를 이정범이 이어받았고, 또다시 김병섭이 이정범의 전통을 이어냄으로써 정읍우도농악 설장고의 전승구조를 이어내는 가교 역할을 하게 한 인물이 설장고 명인 김병섭이다. 특히 김병섭은 설장고를 체계화하는데 큰 힘을 경주 한 것으로 확인된다. 김병섭의 장고가락을 악보로 만들기 위해 음악을 전공한 외국인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그의 음악세계가 이해가 된다. 그것을 계기로 김병섭은 점차 학구적인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되어 농악을 정립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돈암동, 동대문, 종로5가 등 여러 곳으로 농악연구소를 이전하면서 장고교습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병섭 선생은 1987년 9월 11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폐암이라는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제 김병섭은 떠났지만, 김병섭의 고깔 설장고는 우도농악의 최고로 꼽는 김도삼 제자 김학순, 백남길에게서 배운 뚜렷한 계보를 갖고서, 설장고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 온 명인으로서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고 있다. 정읍에서 배운 정읍우도 설장고를 중앙무대에 수놓고 세계적 인물들에게 가르쳤던 선구자적 예술인생은 이제 전국 각지로 펴져 나간 후학들로 꽃을 피우고 있어 김병섭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농악사 속에서 예혼(藝魂)을 불태우고 있다. 김병섭은 자신의 설장고가 앞장서기만 하면 대낮의 장도 파해버릴 정도로 기량면에서 최고를 구가했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천하의 김병섭”만이 쳐낼 수 있는 가락과 사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전에 이순을 넘겨서도 일단 설장고만 잡으면 신명을 몰아오고 놀음판은 그의 독무대가 되어 버리고 만다. 판굿놀이의 변화가 다양하고 흥겨워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전설적인 김병섭의 설장고가 그립다. (김병섭류 설장구보존회 정기공연, 김병섭선생 25주기 추모공연에서, 2013-07-26(금) 우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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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2012년 신년호부터 국악신문 편집위원으로 하응백 선생이 국악신문 편집에 필진으로 참여한다. 또 <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를 연재하기로 했다. 하응백(河應柏)은 대구에서 태어나 대건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1985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1993년에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청원고등학교, 경희여중 교사를 거쳐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민대학교 문창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신춘문예, 여성동아 장편소설상, 세계일보문학상 등 문단의 비중 있는 문학상의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옥봉의 몽혼』등 15권의 편저서가 있으며 2002년 <휴먼앤북스>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국악에 심취하여『 창악집성』(2011)이라는 국악사설을 총망라한 대작을 펴내기도 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대표이자, 사단법인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이다.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을 부탁드린다.(편집자 주) 은근하면서 아름다운 황진이 시조 시조창으로 자주 부르는 황진이의 시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동짓날 밤이 얼마나 긴가. 그 동짓날 밤 시간을 뚝 잘라다가 이불 아래 넣어두었다가, 어룬님 오신날 밤, 잘라놓은 밤을 다시 펴겠다는 내용이다. 동짓날 밤을 잘라다가 어룬님 오신 날 같이 보내면 밤이 더욱 길어질 것이 아닌가. 이 시조는 독수공방하는 여인네가 임과 함께 긴 밤을 보내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어룬님’은 무슨 뜻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얼운 사람,’ 즉 성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신라의 향가 <서동요>에, 선화공주님은 맛둥바을 남 그스지 얼어두고 라는 대목이 있다. 해석을 하면" (신라의) 선화공주님은 맛둥방(훗날의 백제 무왕)을 남 몰래 얼어두고”라는 뜻이 되는데, 이때도‘ 얼어’는 성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요샛말로 하면" 선화공주님은 맛둥방과 남 몰래 통정(通情)을 하고” 정도가 된다. ‘ 얼우다‘’, 어루다’가 동사형이며 여기에 명사형 접미사‘ 이’가 붙으면‘ 어룬이’가 되고 이것이 변해 ‘어른’이 되는 것이다. 즉‘ 어른’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성관계를 가진 사람이란 속뜻이 숨어 있다. 황진이와 어룬님이면서 그토록 애타게 황진이를 기다리게 했던 그 복많은 사나이는 누구였을까? 황진이의 시조는 은근하면서도 점잖고 아름답지만, 다음의 가곡 계면조 언편의 시조 한 수는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백발(白髮)에 환양 노던 년이 젊은 서방을 맞초아 두고 센 머리에 먹칠하고 태산준령(泰山峻嶺)으로 허위허위 넘어가다가 과그른 소나기에 흰 동정 검어지고 검던 머리 희였고나 그를사 늙은이 소망(所望)이라 일락배락하더라 ‘환양 노던 년’이란 ‘서방질하는 년’이라는 뜻이다. 머리가 흰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와 약속을 해놓고 흰 머리에 염색을 하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마침 소나기를 만났다. 요즘처럼 염색약이 좋았으면 다행이련만, 먹으로 염색을 한 탓에 물이 빠져 저고리의 흰 동정은 검게 변하고 염색했던 검은 머리는 도로 백발로 변했다. 그래서 늙은 여자 소망이 좋았다 나빴다 했다는 것이다. 여자 입장에서 보면 낭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시조는 늙은 여자의 성욕을 비난하면서 풍자하는 내용이지만 그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쩐지 좀 슬프다. 유전적으로 좀 일찍 머리가 세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체질적으로 성욕이 강한 여자도 있게 마련인데, 그런 것이 조선시대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남자의 경우는 아주 뻔뻔하다. 남자의 수작과 여자의 유혹 옥 같은 임을 잃고 임과 같은 자네를 보니 자네 긘지 긔 자네런지 아무긘 줄 내 몰라라 자네 긔나 긔 자네나 중(中)에 자고나 갈까 하노라 가곡 계면조 편수대엽 중의 한 수인데, 좀 상상력을 보태 설명을 하면 이런 내용이다. 한 남자가 아내 혹은 자신이 좋아하던 기생(첩)을 잃었다. 죽었는지 다른 곳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옥 같은 임을 잃고 기생집으로 갔다. 그런데 새로 만난 기생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 기생에게 자네는 전번 그 여인과 너무 닮았다고, 그 여자가 환생한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며 수작을 건다. " 자네가 그 사람인지, 그 사람이 자네인지 누가 누구인지 나는 모르겠다”고 뻔한 수작을 건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네이거나 그 사람이거나 누구이든지 간에, 자신은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 것이다. 바람둥이 남자가 여자를 꼬실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 중의 하나이다. 여자가 넘어갔을까? 가곡 우조 소용에는 더 재미있는 내용의 시조가 있다. 어흠아 그 뉘 오신고 건너 불당(佛堂)에 동령(動令)중이 내 올러니 홀거사(居士) 홀로 자시는 방안에 무스것하러 와 계신고 홀거사(居士) 노감탁이 벗어 거는 말 곁에 내 고깔 벗어 걸러 왔음네 이 시조의 상황을 재구성 해보자. 깊은 산 조용한 절간에 밤이 왔다. 요사체에는 남자 거사가 혼자 머물고 있다. 건너 불당에는 동냥을 다니는 여승이 혼자 있다. 밤이 깊어지고, 싱숭생숭해진 여승이 거사의 방 앞에 와서,'어흠’하고 기척을 한다. 거사가 묻는다. " 누구신가? ” " 저예요, 건너 방에.” " 남자 혼자 있는데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오셨는가?” " 거사님 탕건 거는 곳에 내 고깔도 벗어 걸려구요.” 여기에 다른 말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들은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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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 4-2또 하나 미스터리한 가사가 있다. 육구함도(六衢咸道) 대사중로 얼씨구나 절씨구나 (경기놀량,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 육구함도 대삼월이라 얼씨구나 절씨구나 (서도놀량, 김정연의 『서도소리대전집』 '육구함도’는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창배는 여기에 " 옛날 진(秦)의 서울 함양(咸陽)의 거리가 넓어서 여섯 갈래가 된다는 말. 넓은 길을 말함.”이라는 주석을 달아놓았다(김정연의 책에는 주석이 없다). 황용주의 『한국경서도창악대계』에는 가사는 이창배의 『 한국가창대계』와 동일하나 해설 부분에서‘ 대사중로’가 갑자기‘ 대사옹구리’로 변해 있다. 황용주의 ‘ 육구함도’에 대한 해석은 이창배와 동일하다. 황용주의 책에도‘ 대사중로’, 혹은‘ 대사옹구리’에 대한 주석은 없다. 1910년대부터 간행된 잡가집에는 이 부분이 어떻게 표기되어 있을까. 즉‘ 육부암도’ 계열과‘ 육구암사(六九庵寺)’ 계열로 나눌 수 있는데 과연 어느 것이 원래의 뜻일까? <놀량>은 원래 사당패들이 불렀던 노래의 하나이다. 사당패는 조선시대에는 천대받은 예인집단이다. 조선말인 1867년 진주목사를 지낸 정현석(鄭顯奭)의 저서『 교방가요』에 보면" 雜(잡요) 山打令(산타령) 遊令(유령) 놀량”을 분류하고 이어 "이것들은 걸사나 사당이 부르는 것이다. 모두 노랫말이 음란하고 비루하다. 지금 거리의 아이들과 종 녀석들까지도 이 노래 를 잘 따라 부를 줄 안다”(성무경 역주, 『교방가요』)고 하고 있다. 즉 <놀량>은 당시의 기록에‘ 노랫말이음란하고 비루하다’고 했고 그 담당층이 걸사나 사당인데, 이창배의 해석대로‘ 육구함도’와 같은 어려운 한문을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 육구함도’가 아니라『 조선잡가집』 계열의 가사‘ 육구암사(六九庵寺)’가 원본이라면 전체적으로 해석이 자연스러워진다. 즉 육구암사는 절 이름이고 대사는 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 뭉구리’는 스님(중)을 놀림조 로 부르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앞뒤가 맞아 떨어진다. 서도놀량 가사에서" 어린 낭자 고운 태도 눈에 암암하고 귀에 쟁쟁, 비나이다 비나이다 님 생겨 달라고 비나이다, 삼월이라 육구암사 대사뭉구리 얼씨구나 절씨구나”로 읽으면 연결이 자연스럽다". 육구암사 대사뭉구리 얼씨구나 절씨구나”는‘ 대사’와‘ 뭉구리’의 결합과‘ 얼씨구나 절씨구나’가 가지는 (성행위까지 암시하는) 남녀의 어울림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으로 인해 해학과 풍자의 구절이 된다. 때문에 이 구절 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실제 공연될 때는 청중 쪽에서 웃음이 한바탕 터지는 바로 그러한 대목인 것이다. 때문에 점잖은 사대부였던 정현석이 『교방가요』에서 <산타령>을‘ 음란하고 비루하다’고 했을 가능성이 많다. 현행가사의‘ 육구함도’는 원래 육구암 혹은 육부암을 나타내는 절 이름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렇다면‘ 육구암’‘, 육부암‘’, 육구암사’가 왜‘ 육구함도’로 변했을까? 1.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사 법당뒤 칠성단에 2.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유점사 법당뒤 칠성단을 1과 2 중에서 원래의 가사는 2다. 그런데 1로도 많이 부른다‘. 팔만구암자’ 즉 금강산에 암자가 많다는 뜻이‘ 팔만구암사’라는 얼토당토않게 절 이름으로 변한 것이다. 경기 놀량의‘ 육구함도 대사중로’도 이런 식으로 와음이 진행되어 전혀 엉뚱한 말이 된 것인데 여기에 진지하게 六衢咸道(육구함도)라는 한자음을 집어넣고"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풀이하였고(이창 배의 『한국가창대계』), 그의 제자인 황용주도 『한국경서도창악대계』에서 그대로 답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필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들의 해석을 그대로 믿어왔던 것이다. 이것이 미스터리가 아니고 무엇일까. (문학평론가) - 하응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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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응백의 재미있는 국악사설 이야기 4-1'산타령’은 산천경계를 노래하는 입창이다. 서서 부르기 때문에 입창(立唱)이라 한다. 이‘ 산타령’에는 경기산타령과 서도산타령이 있다(서도산타령은 원래 ‘ 놀량 사거리’라고 하는데 편의상 여기서는 산타령이라 통일했다). 경기산타령은 현재는 놀량, 앞산타령,뒷산타령, 자진산타령 이렇게 부르고 여기에 개구리타령을 덧붙이기도 하지만 원래는 판염불, 앞산타령,뒷산타령, 자진산타령 이렇게 불렀던 노래이다. 서도산타령은 놀량, 사거리, 중거리, 경발림으로 이루어지기에 산타령이라 하지 않고‘ 놀량 사거리’라 불렀던 것이다. 경기산타령에서 놀량의 원조격인 판염불 가사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진군명산만장봉에 청천삭출금부용 음도로 음도로 시법이라나무어살바에 동내라 안산이라 주산이라좌우라도 졍용 나무살바 마무라도살바 나무살바충청도라 내포산에 두루두루 한량님이 와 계신데막걸니 여닷동이 걸넛으니 자시거나 말거나나무라도살바 나무살바 일세 동방에 졀도령이세남방에 득청룡 삼세서방에 부정토사세북방에 영안강 도령청정에 무활예삼보철영에 강차지 아금지송에 묘진언 나무라셔살바 나무살바산천초목이 셩님어 나에 구경가기에 좃쿠나 에에헤띄여 네로구나나에에에헤야 에혜띄여 네헤에야 어어 듸이이 이이얼 네로구나말은 네에야 어 이놈 말 들어봐라녹양 버든 길로 평양감영 쑥 드러간다 에에에헤이어네로구나아모려도 네로구나낙낙장송 늘어진 가지 다떠러져 줄거리만 나머지와자 조홀시구 어 이놈 말 들어봐라청산귀영에 올아 황운을 검쳐잡고 에에 이얼네로구나어린 양자 고운 소래 눈에 암암 귀에 쟁쟁비나이다 하나님전에 님생겨 달나지이다고 비내이다락락장송 늘어진 가지 한 마리는 남게 앉고 또 한 마리 들에 앉어체어다보니 울음을 울고 내리 구버보며 우름을 운다해당화 그늘 속에 비만 맞은 제비 새끼 졸졸 흐늘거려 거드려거려노는 사랑 어화둥둥 내사랑이야 어화둥둥 내 간간이로구나(『신구시행잡가』, 1914) 현재의 경기 놀량은 이 판염불에서 불교적이며 무속적인 앞부분을 과감히 버리고‘ 산천초목’부터의 뒷부분만 남겨놓은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가사와 판염불의 가사, 또 서도 놀량의 가사를 비교해 보면 경기 놀량은 판염불의 가사 일부분과 서도 놀량의 가사 일부분을 차용해서 새롭게 짜깁기한 흔적이 확연히 눈에 띈다. 즉 구음부분을 제외한다 해도‘ 육구함도 대사중로’ 부분과‘ 사랑초’ 부분은 서도 놀량에서 차용한 흔적이다. 그런데 경기 놀량의 가사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종일 가도 안성은 청룡이로구나 몽림 일월이 송사리나 삼월이며 도대체 무슨 뜻일까". 종일 가도 안성은 청룡이로구나”는‘ 놀량’이 원래 사당패가 노래한 것이니 이해가 간다. 종일 걸어가 안성 청룡사에 도착했다 혹은 못했다라는 뜻일 것이다. 사당패들의 힘든 삶을 표현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 "몽림 일월이 송사리나 삼월이며”는 무슨 뜻일까? 도무지 알 수 없다. 황용주의 『한국경서도창악대계』에도 이 부분의 뜻은 풀이하지 않고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몽림(夢林) 일월(日月)이 송사리나 삼월이며”라고 한자음을 달고 그 뜻을 "꿈속의 수풀에서 노는 것이 기껏해야 애숭이나 심부름하는 아이의 뜻일 듯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 해석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앞뒤의 의미 연결이 부자연스러워 전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이러한 해석의 문헌적 어학적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즉 이 가사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인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여러 잡가집을 보아도 이러한 가사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구조(舅調) 경기산타령에서 놀량 부분에 해당하는‘ 판염불’에도 이러한 가사는 없다. 현행 경기산타령에서" 종일 가도 안성은 청룡이라 / 몽림 일월이 송사리나 삼월이며”부 분은 이창배의 경기산타령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신종 가사인 것으로 판단된다. (문학평론가) - 하응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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