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리뷰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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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계 브라질 작가 댄 리가 재해석한 한국의 삼년상인도네시아계 브라질 작가 댄 리(36)는 흙이나 꽃, 버섯종자 같은 자연의 재료를 이용해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작업을 한다. 시드는 꽃이나 버섯이 자라는 종자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재료를 사용하는 만큼 그의 작품도 수개월 전시 기간 중 계속 조금씩 변화하는 특성을 지닌다. 작가는 재료의 변화를 보며 자신이 '비인간적인 주체'와 작업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변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패와 발효는 작가에게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전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16일 시작하는 댄 리의 한국 첫 개인전 '상실의 서른 여섯 달' 역시 변화하는 재료들을 사용해 만든 작품들로 채워진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한국 전통문화, 특히 삼년상에서 영감을 얻은 신작을 선보인다.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에 머물며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하고 짚풀공예 장인,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정관 스님, 국립민속박물관 관계자 등을 만나 발효와 도예, 죽음과 전통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은 작가는 특히 삼년상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올해가 작가의 아버지가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지 3년째 되는 해라는 개인적인 경험이 더해지면서 그는 재료의 발효와 부패, 소멸 과정을 통해 애도를 끝마치는 여정으로 이번 전시를 구성했다. 울금으로 노랗게 염색한 직물들이 전시장을 둘러싼 가운데 곳곳에 놓인 흙더미에서는 새싹과 버섯 종자가 심어졌고 장례에 쓰이는 국화와 삼베, 면포로 만든 구조물이 천장에 매달렸다. 군데군데 놓인 옹기에는 쌀과 누룩이 들어있다. 그의 다른 작업처럼 이번 전시에서 사용된 소재들도 모두 변화하는 것이다. 국화는 전시 기간 교체되지 않고 서서히 시들어 가고, 새싹과 버섯포자에선 싹이 날 수도 있다. 노랗게 염색한 직물은 전시 기간 햇볕을 받아 탈색되고 옹기 속 쌀과 누룩은 발효돼 막걸리가 되어간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작업은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다시 만들어질 수 없는 유일한 작업"이다. 전시 개막에 앞서 14일 만난 작가는 "삼베 수의를 태우는 과정을 통해 애도가 종결된다고 한다"면서 "다양한 물질의 변화를 이용해 작업해 온 나로서는 불을 쓰지 않고 내 방식으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간 죽음에 대해 연구해 왔지만 특히 이번 작업 과정에서 (애도를) 종결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변화하는 전시 작품들은 5월12일까지 볼 수 있다. 3월7일까지 무료로 볼 수 있고 이후는 유료 관람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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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예술협회 창립전 기념식 성황 이뤄, 150점 작품전(사)한국서예술협회(회장 이종선)가 20일 오후 4시 창립기념 회원전 기념식을 열었다. 이 전시는 중국의 난정서회와 국내에서 국악신문, 월간길벗, 월간서예, 월간서예문인화 등이 후원했다. 20일부터 26일까지 1주일간 한국미술관(인사동 대일빌딩 2층) 전관에서 창립 회원전을 개최한다. 국한문 전 서체에 걸쳐 한국서예의 전모를 볼 수 있는 150여 점의 작품이 다양하게 전시가 되어 서예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7월 10일 서울시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은 한국서예술협회의 목적사업의 일환으로 열리는 첫 번째 행사이다. 한얼 이종선 회장은 인사말에서 "한국서예술협회는 우리서예의 전통계승과 서예 발전을 통해 국민문화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고자 창립하였다. 서예의 본연을 지켜 전통을 계승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서예의 발전을 선도해 나가고자 한다. 본 협회는 이를 위해 서예인재의 발굴과 회원들의 창작활동을 돕는 실질적인 방법을 모색해 나갈 것이다. 기존 서예단체와는 다른 선명한 길을 가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서예술협회는 오거서루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하였다. 서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전기가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아 결성되었다. 회원들도 이들의 문하로 구성되어 있다. 협회 측은 "오늘 창립전을 첫 걸음으로 앞으로 뜻을 같이 하는 역량이 있는 서예가들의 참여를 기대하며, 회원의 구성도 폭을 넓혀 나가고, 참신하고 진취적인 협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특히 회원의 권익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사)국제서예가협회 회장 정도준 회장은 축사에서 "12월의 끝자락, '한국서예술협회'가 서예 법인단체 창립을 공식 선언하는 창립전을 연다는 소식에 서예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벗을 만난 듯 기쁩니다. 한국 서단은 광복 이후 혼란과 정체기, 성장과 다양화를 거치며 수많은 협회와 학회가 생겨나고 또 사라졌다."며"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서단발전과 인재육성에 기여하지 못하여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때에 '한국서예술협회'의 창립은 차세대 한국서예를 이끌 대안으로서 기대가 크다. 창립 주체의 면면을 볼 때 기존의 단체와는 다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특히 정회장은 "노자에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라 하여 아름드리 큰 나무도 아주 작은 씨앗에서 싹이 트고, 9층의 누각도 한 무더기 흙을 쌓는 데에서 시작하며, 천 리의 길도 발밑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는 축사에서 "특히 ㈜국악신문에 '우리 노래 사설(辭說)의 서예화'로 국악계에 큰 자극을 주시더니, 금년부터는 아리랑 사설을 소재로 하여 국악인들의 자긍심을 돋궈 주시는 한얼 이종선님이 앞장 서신다니 더욱 기대가 큽니다. 국악신문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를 통해 서체의 다양함에서 맛보는 미학적 감동은 물론이고, 그 탁월한 사설의 인문학적 풀이에서 큰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며 "우리 국악신문 독자들은 이번 창립전 출품작품에서 서예의 세계와 아름다움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함께하겠습니다"라고 전했다. 한국서예술협회 강은영 회원은 "붓을 잡은지 햇수로 5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수업을 제대로 다 채우고 나가지 못했다. 이번 창립전을 위해 뜨거운 여름날부터 열심히 작품을 완수했다."며 "선생님께서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 당일 수업에서 한시나 한글 시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국문학적 내용과 감상에 대해 충분히 강의를 해주신 다음에서야 붓을 잡게 하신다." 며 "그런데 그 많은 시 작품을 줄줄 외우신다. 얼마나 읽고 숙지를 하셨는지 놀랍다. 한얼 선생님 서체는 그래서 운율이 살아서 움직인다. 한참 바라보면 제 각각의 서체가 소리를 내면서 나에게 말을 건낸다. 서체는 시가 되고, 이어 노래가 되어 들리기 시작한다."라고 전했다. 가족과 함께 온 회원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서예작품을 설명하면서 자랑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 요새 사라져가는 학교앞 서예학원 실태에 대해 아쉬워했다. "손주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데, 요즈음 애들에게는 인기가 그리 많지는 않다"라고 아쉬워했다. 한 관람객은 "한국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사동에 오면 한번 들려야 할 코스로 소개하고 싶다. 한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서예를 배우고 싶다"라고 전했다. 이번 회원전은 서예를 시작한지 5년 정도 되는 회원들로부터 원로 작가까지 함께한 전국 단위 회원전으로 서예계에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작가의 시각과 해석에 따라 표현되는 다양한 한글의 조형미에 대한 인기는 해외 한국문화 홍보원(한국문화원) 서예교실 프로그램 운영에서 입증이 되고 있다. 유럽 국가에 주재하고 있는 몇몇 한국문화원에서 한류 프로그램 인기와 함께 서예교실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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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군홍, 80여 년 걸려 우리에게 온 화가그림 한 점이 시선을 붙잡았다. 젊은 어머니가 아들을 품에 안은 모습이었다. 남편은 이 그림이 마지막이 될 줄 모르고 북으로 가버렸다는 설명이 있었다. 그렇게 임군홍(1912~1979) 화백과 첫 대면을 했다. 1950년 작품이다. 화가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그해 화가는 북으로 넘어가면서 가족과 영영 이별했다. 기자는 그림 속 두 살배기 아이에게서 슬픔을 느꼈다. 7월 27일부터 두 달간 열리는 ‘임군홍 전’을 준비 중인 압구정동 예화랑에서 74세의 장년이 된 그를 만났다. 아들은 그림의 전후 사정을 어머니와 7살 위 형에게서 들어 "그랬구나”라고 느낄 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이나 서러움 같은 건 달리 내비치지 않았다. 들은 이야기와 사진, 그림들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줄곧 그려온 까닭이었을 것이다. 백부로부터 아버지의 소년 시절을, 어머니로부터는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백부는 동경 유학까지 갔던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집안의 결혼 강요 탓에 의기를 꺾었던 사연을 안고 있어 더욱 화가 동생의 불행을 가슴 아파했다. 임군홍은 김환기, 이인성, 이중섭, 박수근 등 20세기 초반의 대가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으나 조명을 받지 못했다. 박수근처럼 그도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했다. 주교공립보통학교 시절 미술교사였던 김종태1906~35와 윤희순1902~?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에 눈 떴고, 졸업 후 치과병원에서 기공사로 일하면서 경성양화연구소에서 약간의 수업을 받은 게 미술 공부의 전부였다. 김종태는 야수파 화풍을 보이며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자화상’으로 입선한 후 이듬해 ‘포오즈’로 특선을 차지하여 연이어 여섯 차례에 걸쳐 특선을 차지한 스타 화가였고, 윤희순 역시 평론가로도 활동한 유명 미술인이어서 임군홍의 기초를 탄탄하게 잡아주었다. 특히 몇 번의 붓질로 대상의 아웃 라인을 잡는 건 스승 김종태의 기법과 꼭 닮았다. 일본에서 들여온 미술잡지들을 통해 인상파와 야수파, 표현파들의 그림을 살피는 것도 공부였다. 임군홍은 1931년 선전에 유화 ‘봄 스케치’로 입선한 후 1936년 ‘여인 좌상’으로 다시 입선하고 이듬해에 ‘소녀상’으로 또 입선한다. 이후부터 1941년까지는 풍경화로 해마다 입선을 거듭한다. ‘소녀상’은 사귄 지 1년 된 결혼 전 아내를 모델로 삼아 그렸다. 연이은 입선 후 그는 아내에게 비취반지를 선물한 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아내는 반지를 낀 손을 곧게 펴 자랑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행복한 시기였다. 간호사이던 아내 홍우순(1915~1982)과는 치과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홍우순은 현재 가수이면서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솔비의 이모할머니이다. 1938년까지 3회의 동인전과 한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이즈음 본명인 수룡(水龍)을 버리고 군홍(群鴻)으로 활동한다. 나머지 두 아들도 이름을 득용(得龍), 점용(點龍)으로 지었을 만큼 유가의 집안임을 자부했던 부친의 뜻을 저버린 셈이었다. 자신이 집착한 용을 마다하고 기러기를 택한 아들의 결정을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듯싶다. 혹시 ‘군계일홍(群鷄一鴻)’의 뜻이었다면 수긍해 주셨을까. 임군홍은 1939년 돌연 중국행을 택한다. 결혼을 앞두고 돈을 벌 생각으로 광고디자인 사업을 병행하던 중이었다. 넓고 큰 중국 시장에서 빠른 승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만주와 북경을 거쳐 호북성 무한에 터를 잡았다. 최고 번화가인 화루가(花樓街)에 회사를 차려 사진 인화, 광고, 인테리어 사업을 전개했다. 조선인 서화가들이 중국에 남긴 작품들을 찾아서 파는 일도 했다. 간송 전형필(1906~1962)도 수집 차 여러 번 그의 가게를 찾아오곤 했다. ‘꽃으로 단장한 거리’라는 매력적인 이름의 거리는 미감을 중시하는 화가와 잘 맞았을 것이다. 실제 임군홍은 이 거리의 풍경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루가 골목의 풍경을 담은 그림에 등장하는 간판의 ‘照相放大’가 ‘사진 인화 확대’라는 뜻이라고 일러주자 임 선생의 차남 임덕진(1948~ )씨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덕분에 그 가게가 아버지 회사였음을 알게 됐다”라는 것이다. 임 화백은 그렇게 주변 풍경들에 마음을 주며 하나씩 그려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재래시장의 정육점을 담은 풍경화는 1941년 선전에 입선했다. 1946년 귀국할 때까지 사업과 그림을 병행했다. 이 시기 사업으로 바쁜 와중에서도 그린 그림들 가운데 기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금성 연작이었다. 묘하게도 그는 기자가 북경특파원으로 주재하던 시절 자주 찾았던 장소에서 자금성을 그렸다. 다름 아닌 자금성 뒤 경산(景山)이었다. 궁궐 옆에 북해 호수를 만드느라 퍼올린 흙으로 조성한 인공산으로서 우리 창덕궁 후원처럼 명 황제 일가의 휴식처였다. 명明 말기 대기근과 관리들의 수탈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이 자금성으로 진격해 오자 겁을 집어 먹은 숭정제는 뒷산으로 달아난다. 한참 자금성을 부감으로 내려다보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마침내 나무에 목을 매단다. 황제로서는 처절한 최후였다. 이 경산에서 바라보는 자금성 풍경이 압권이다. 2km에 달하는 궁궐 전각들의 황금색 기와들이 일제히 햇빛을 반사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왜 산 이름에 ‘경치 경景’ 자를 붙였는지 절로 이해가 되는 곳이다. 기자도 수시로 이곳에 올라 고궁을 내려다보면서도 단 한 번도 싫증을 낸 적이 없었다. 임 화백의 고궁 그림을 보면서 그는 왜 이곳을 그렇게 여러 번 올랐을까, 의문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경에 살고 있던 게 아니라 1,250km 떨어진 무한에 살면서 수시로 이곳을 찾기란 보통의 꽂힘이 아니고선 힘들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북경의 아이콘이기도 하지만, 숭정제의 비극이 깃든 역사가 서린 곳인 데다, 자금성의 미감을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포인트라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겠나, 짐작한다. 임 화백은 자금성 네 귀퉁이에 3층 높이로 서 있는 누각들에도 시선을 주었다. 공사 설계자가 디자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누군가의 "여치 조롱에서 힌트를 얻어 그대로 지었다”라는 후일담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건축물이다. 역시 조형미 덕에 세련된 미감이 감지되는 건축물이다. 임 화백은 천자天子의 상징인 천단天壇도 여러 번을 찾아 다양한 이미지를 화폭에 옮겼다. 이 시기 베이징을 자주 찾던 그는 저명한 일본인 화가들인 야자키 치요지(矢崎千代仁, 1872~1947),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 1888~1986)와 교분을 쌓는다. 각각 제국미술회 회원과 동경미술대학 교수를 지낸 이들이다. 그들 역시 자금성과 천단을 그린 점으로 미루어 현장에서 함께 작업하다 서로 사귀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야자키는 파스텔화로, 우메하라와 임군홍은 유화로 대상들을 묘사했다. 야자키는 임군홍의 초상화를 그려주었을 정도로 친했다. 1946년 서울로 돌아온 임 화백은 ‘고려광고사’라는 광고·디자인·인쇄 회사를 차려 사업을 계속했다. 서울의 첫 디자인 회사였다. 사업은 원만했으나 좌우 충돌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1947년 그는 용공분자로 몰린다. 좌익계 남편 안막과 동반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를 운수부(국토교통부)에서 주문받은 신년 달력에 올린 탓이었다. 별생각 없이 최승희의 지명도만을 생각했던 그는 자신에게 찍힌 ‘용공’ 낙인에 좌절한다. 1948년 옥에서 풀려났지만 혼탁한 해방공간에서 더 이상 남한에 있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일단 피신해야겠다는 생각에 택한 북한행이 가족과의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는지 임 화백은 갓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 지극한 애정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인 ‘가족’에도 두 살배기 아들은 엄마 팔에 안겨 잠들어 있다. 7살 많은 형은 뛰어노느라 빠졌고, 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긴 두 살 터울의 누나는 한 곁에서 뾰로통한 표정이다. 탁자 위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물품들이 늘려 있다. 임 화백이 좋아했던 독일제 맥주 컵은 꽃을 꽂아 정물화에 여러 번 등장하고, 램프와 도자기, 항아리 등도 애용하던 소품들이었다. 그가 떠난 후 생활고를 겪던 모친이 시장에 내다 팔면서 모두 사라졌다. 둘째의 초상화 앞에서 기자는 먹먹해졌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낡은 액자를 뜯고 그림을 끄집어 내려하자 또 한 장의 그림이 뒤에 붙어 있었는데 고양이 그림이었다는 설명 때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살배기를 두고 가면서 아버지는 아들의 초상화 뒤에 수호신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을 지켜본다”라는 원모심려(遠謀深慮)의 마음을 길 떠나는 아버지는 비장의 그림으로 대신했다. 꽁꽁 묶여 보관돼 오던 임군홍 화백의 그림 120여 점이 그린 지 80여 년만에 우리에게 제대로 공개된다. 전시를 기획한 김방은 예화랑 대표는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그의 천재성이 조명되고, 일반이 접하기 쉽도록 기념관이 건립됐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을 말한다. 73년 전 아버지가 숨겨둔 수호신 덕에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수가 있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임덕진 씨는 "아버지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늘 아버지의 숨결을 느껴왔다”라고 말한다. ‘고양이 수호신’은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지극한 보살핌’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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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한글서예가회 ‘이즘’, 제3회 전시회 폐막지난 2일 전통에 기반 한, 한글서예의 새로운 발 전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창립된 한글서예가회 ‘이즘’이 세 번째 전시회를 인사동 KOTE에서 마첬다. 31명의 회원들의 참여로 한글서예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기획전이었다. 참여 작가는 50대 8명, 60대 12명, 70대 11명이다. 이는 현재 한글서예계의 중추라고 할 수 있다. 구자송 김광희 김두경 김문희 김선숙 김진태 류시혁 문제명 문영희 박경희 박병옥 박정숙 서복희 서혜경 신명숙 유혜선 은성옥 이병도 이성숙 이정옥 이종선 장용남 정복동 정영필 조주연 조현판 최미연 최민열 최재연 한소윤 홍영숙 이종선 회장은 27일 개막식 인사말에서 "한글서예는 문자 구조상의 조형적 한계를 지니고 있고, 서예로서의 역사도 길지 않지만, 변화의 여지를 갖고 다양한 형태의 변모가 시도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변화의 시도에 앞서 전통에 대한 천착”을 강조하기도 했다. 개막식에는 서예계, 전각계, 언론계 원로들이 참가하여 자리를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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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 칠십 서예전을 기대한다.중진 서예가이며 왕성한 활동으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서예가 중 한 분인 한얼 이종선씨가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서예전을 인사동 입구에 있는 전시공간 코트(Kote)에서 11월 17일부터 연다. 이종선 씨는 국악신문에〔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을 매주 한편 씩 2년이 넘게 발표하면서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과 아취를 널리 확산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시회를 앞두고 이동식 문화대기자가 이종선 씨를 미리 만나보았다. Q. 오랜만입니다. 일년 만이군요. 지난해 이맘 때 [우리음악사설] 전 이후.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란 이름이 다소 생소한데요? A. 네, 쑥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제가 올해 칠순 고희(古稀)입니다. 나이가 요즘 말로 7학년으로 접어들게 되었기에 그동안 제가 어떤 작업을 어떻게 했는가를 저 자신도 돌아보고 또 서예를 좋아하시는 분들과도 함께 보는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칠십이이’라는 표현은 ‘칠십이구나’ 혹은 ‘칠십일뿐이다’ 등으로 풀 수 있는데 다시 말하면 ‘이제 고희, 칠십인데 어느새 칠십이지만 다만 이제 칠십일뿐이네’ 라는 뜻도 들어가 있습니다. Q. 그럼 어떤 작품들이 선보이는가요? A. 전시되는 작품이 150여 점이 되니 조금 많지요? 저로서는 저의 서예세계의 현재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저의 서예 역정과, 그리고 서예의 이상향을 찾아온 그동안의 노력을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앞으로의 갈 길도 다시 생각해보자는 전시입니다. 말하자면 저의 서예작품의 모든 분야, 여기에는 한글작품과 한문작품 국한문 혼서작품 및 사설작품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Q. 이 선생님은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을 구현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세계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A. 제가 625 전쟁이 막 끝나기 전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다 보니 어릴 때 필재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서예를 배우지 못했다가 한창 인생을 시작하던 청년기에 사업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서예를 만나서 시작했으니 조금 많이 늦었지요. 늦게 시작했지만 여러 선생님들, 특히 소헌 정도준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동아미전에서 초대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서예의 본원이랄까 뿌리랄까, 또 한국인으로서의 서예의 뿌리를 생각하다 보니, 한글의 뿌리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글자형, 흔히 판본체라고 합니다만, 거기에 있다는 자각이 들어 한글서예 작업에 매진하게 되어, 2002년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다만 판본체는 각이 진 엄격한 고딕체인데 이런 정형적인 구도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조형, 새로운 장법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물론 이 작업에 대해 좋다고 하신 분도, 나쁘다고 하신 분도 있지만 그쪽으로 저는 끊임없이 천착을 하다 보니 지금 같이 저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되었지요. 저로서는 이것이 저만의 특징적 예술세계라 하고 싶습니다. Q. 최근 쓰신 "뒷동산 도라지꽃"으로 시작되는 '횡성아리랑' 이란 작품을 보니까 맨 위에는 한글 판본체와 광개토대왕체가 섞여 있으면서 마치 도라지꽃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기대어 피어있는 형상의 느낌이 오고, 그 밑의 사설에는 행서로 간 궁체가 받쳐주고 있어서 변화가 있는데 한글서체도 일정하지는 않은 모양이지요? A. 저의 한글서예는 몇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은 궁체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하여 나온 민체흘림이고요, 훈민정음 원래의 정격 고체, 이것을 제가 자유로운 표현으로 다시 쓴 판본류가 있습니다. 궁체는 여성적인 곡선과 우아함이 특징인데, 저는 여기에 꾸미지 않는 강직한 세로획을 첨가하여 강건함을 표현합니다. 근래의 궁체가 부드러운 곡선에 집착하여 획력이 부족해지는 면을 보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민체흘림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한 후에 한글의 자모음이 갖고 있는 특성을 대입시켜 만든 새로운 획과 조형입니다. 저는 한글서예를 하지만 한문서예, 그 중에서도 안진경의 해서와 행서를 좋아해서 이를 저의 한글서예에 녹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진경은 강직한 분으로 그의 일생도 등락을 거듭했는데, 서예가로서 안진경은 그때까지 유행하던 왕희지의 부드럽고 우아한 서체에서 남성적이고 강건한 서체로 흐름을 바꿔놓아 사람들이 그의 서체에는 힘줄이 있다고 할 정도로 남성적이면서 굳건하고 탄탄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요소들을 한글민체에 담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바탕위에 대소, 강약의 변화와 판본류인 한문고체에서 보여주는 자유로운 장법을 적용해 한글흘림의 영역을 확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체라고 부르는 판본체의 글씨 영역이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엄격한 형태를 많이 연습을 했고, 특히 한글고체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호태왕비, 즉 광개토대왕비를 제가 좋아했기에, 그러한 질박미(質朴美)와 호방함을 나름 구현해냈습니다. Q. 한글서예의 표현세계가 엄청 넓어졌다는 말이군요 A. 네, 저는 우리 한글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각합니다. 한자는 네모라는 틀에 맞추어 쓰고 있기에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에 맞춰 쓰고, 그 영향으로 우리 한글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쓰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틀을 부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의미전달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한자(漢字)건 한글이건 한 자 한 자의 크기도 뜻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장에서의 의미전달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나 필법이 꼭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내려 긋는 선도 말하자면 꼭 꼬리를 가늘게 빼는 기법을 벗어나서 편하게 마감하지요. 그렇게 하니 우리 한글서예 작품이, 물론 그 안에 한자를 겸용하기도 하지만, 훨씬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격조 있게 다가오고 있지요. 다만 이러한 서체에의 도전은 획들의 사용으로 인해 장력이 충돌이 생길 수 있는데, 위에서 흔들린 것은 밑에서 잡아주고, 좌에서 넘어진 것은 우에서 받쳐주고 있고, 위에서 커진 것은 아래에서 작아지며 전체를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Q. 한자 한문을 모르는 세대가 많아지면서 한글 서예의 의미가 더 커지고 있군요. 그런 분들도 한글의 조형세계가 넓어진 것을 보면 좋아할 것 같습니다만 A. 최근 우리 사회가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개인의 취미를 살리려는 분위기가 형성된 이후에 서예를 찾는 분들이 많아져서 저희는 기쁩니다. 그런 젊은 분들중에는 굳이 어려운 한자 아니라도 한글 서예로 여러 가지 많은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새로운 조형을 추구하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Q. 한글 서예는 외국인들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가요? A. 그동안 한글서예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2019년에 몽골에서 초대전을 크게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작가 5명, 몽골인 작가 8명도 함께 한글서예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월수(越秀)외국어대학에서 한글날을 맞춰 한극과 서예 강좌를 하였고 한글서예 전시회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한국서학회 주최로 한글 서예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Q. 그래도 한자서예가 모든 서예의 바탕 아닙니까? 또 기본으로도 잘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A. 물론입니다. 사실 서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골문, 고문, 금문, 전서 등은 한문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만큼 표현 세계가 깊고 넓은 만큼 공부하는 맛이 나지요. 특히 서예는 단순히 뜻을 전달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 문장 전체를 통해서 서예를 하는 사람의 인격과 격조와 삶의 자세 같은 것을 느끼게 하니 그만큼 멋진 예술이지요. 한자 서예를 오래 연마하면 글씨와 사람이 하나가 되지요.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면 사람이 꼭 이런 저런 것을 쓴다는 느낌도 넘어서야 진정한 서예가 된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반드시 마음으로 하여금 붓을 잊게 하고, 손으로 하여금 글씨를 잊게 하여,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면 글씨에는 쓸데없는 생각이 없어진다.” Q. 지난 번에도 궁금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컴퓨터로 깨끗하고 정제된 글씨체를 모두 재현함으로써 컴퓨터 키보드가 붓을 대신하는 세상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만? A. 단순히 글자만을 추구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서예는 그것이 아니지요.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나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고 곧게 뻗어 오르는 대나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심산유곡에서 잔잔하고 맑은 향기를 발산하는 난초처럼 서예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선인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예야말로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우리들의 심성(心性)과 덕성(德性)을 개발해 능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초등학교에서부터 서예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고 인격 수양을 하는 중요한 과정인 서예를 가르치지 않으니 최근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저는 생각합니다. Q. 이 선생님의 한자서예 세계도 워낙 다양하고 광대하다는 평이 있어서, 이번 전시회에 어떤 작품이 보여질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A. 네 지난 시간 저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작업해서 이룬 것도 없지는 않지만 서예라는것은 끝이 없는 길이지요. 아직도 해야 할 일, 가야할 길이 많고도 길다는 뜻입니다. 고희라고 하지만 서예는 더 많은 변화와 신 개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다만 칠십일 뿐이다’라는 뜻의 전시회 제목을 사실, ‘이제 겨우 칠십일 뿐이다’ 라는 말로 바꿔서, 더 많은 변화를 추구하는 전환점으로 삼고 싶어서 저의 서예의 역정을 되돌아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Q. 이번 전시회에 동문, 후배들의 작품도 나온다고 하지요? A. 제가 소헌 정도준 선생께 배웠고 저와 같이 동문 수학하면서 동고동락한 친구 겸 후배들이 ‘오거서루(五車書樓)’ 회를 만들어 같이 또는 개별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작품 하고요, 그동안 서로 방문 교류를 해 온 중국 소흥(紹興, 샤오싱)의 난정서법가협회 회원 5명이 축하의 작품을 보내주셨습니다. 어쨌든 고희전인데 마침 이분들도 전시장에 오셔서 고희연을 열어주신다고 하니 저로서야 영광이지요. Q. 이번에 전시하는 곳이 코트라는 곳인데 좀 생소한 장소군요? A. 인사동의 남쪽 입구인데 서울이 재개발로 옛모습을 다 잃어가는 상황에서 여기는 서울 종로의 근대의 역사가 남아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여기 젊은 여사장님이 이런 역사적인 공간을 예술의 메카로 지켜내려고 많이 노력하는 분이고요. 그래서 이곳 넓은 공간을 쓰게 되었습니다. 와 보시면 아니 서울에 이런 공간이 남아있단 말인가 하며 놀라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넓은 공간에서 서예의 역사를 함께 보는 것이지요. 전시는 17일에 시작해서 25일까지입니다. 많이 와 보시길 바랍니다. Q. 다시 긴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시회의 성공을 빌겠습니다. A. 네 감사합니다. 꼭 와서 보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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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聖 난계 박연 생애, 육필과 삽화 特別展지난 25일 충북 영동문화원 전시관에서 특별한 전시회가 오픈되었다. 영동 출신 조선시대 악성 난계 박연의 생애를 주제로 한 장편 연재소설 ‘흙의 소리’ 육필 원고와 수록 삽화 원화(原畵)가 한 자리 전시된 특별한 자리였다. 전시 소재 장편 연재소설 ‘흙의 소리’는 영동군 출신 농민문학 작가 이동희 선생과 이웃 옥천군 출신 화가 이무성 선생의 합작이다. 2020년 9월부터 2년 동안 본보 국악신문에 주간 연재 작으로 악성 난계 박연 선생의 생몰 등 여러 기록들을 찾아 구성한 장편소설이다. 박연 선생은 신라의 우륵과 고구려 왕산악에 이은 조선시대 대표 음악가로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분이다. 이번 특별전에는 소설 중 30여 주요 장면의 육필 원고와 해당 삽화의 원화가 전시되었는데, 박연 선생의 영정을 비롯한 ‘세종대왕 알현’ 장면, ‘시묘 후의 부인과 합환주’ 장면, ‘악기 석경(石磬)의 완성’ 장면 등 30여 편이 전시되었다. 정영청 군수는 해외 출장 전 미리 보낸 축사에서 "난계 박연의 삶과 꿈을 표현한 글과 그림을 접할 수 있고, 호흡을 같이 할 수 있음에 영동 문화예술의 긍지를 느낍니다.”라 하였다. 이승주 의회 의장도 "사료를 재해석하고 새로 발굴한 자료로 구성한 난계 박연 선생의 이야기는 영동의 새 역사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날 전시 오픈식에는 50여명의 군내 문화계 인사들이 함께했다. 테이프 컷팅 후 주최 측인 농민문학기념관 관장이며 ‘흙의 소리’ 작가로 전시 육필(肉筆)의 주인공 이동희 선생은 큰 보람을 느낀다고 인사를 하였다. "악성 난계 선생의 고장에 살며 한 선비의 삶과 일과 꿈을 111회, 111주 동안 생각했습니다. 기존 자료의 재해석과 새롭게 발굴한 자료를 통해 생몰(生沒)을 복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나름의 문학적 성취는 영동에서 태어난 덕이라 생각합니다. 고단했지만 보람을 느낍니다.” 이어진 축사에서는 안병찬 前 한국예총 영동지회장이 "작가가 만년에 고향에 돌아오는 경우가 드문데, 농민문학관까지 지어서 영동을 농민문학의 메카로 만들고, 난계 선생의 생애를 작품으로 복원해 냈다. 이동희 작가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규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역사물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라 철처하게 준비하는 것을 보고 놀랬다”고 평가했다. 후원사인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는 "조선시대 악성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 취지에 맞고, 박연 선생의 고향 출신 작가와 이웃인 옥천 출신 화가라는 조합도 좋았습니다. 두 분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작가의 육필 원고와 삽화의 원화가 동시에 전시되는 특별한 전시회인 것에 감명을 받았다”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원화 작가인 이무성 화백은 "매주 작품화 하는데 고생을 했지만, 보람 있는 작업이었다. 2년 반 시간 동안 작업하면서 박연 선생도 휼륭하지만 역사적인 악성의 업적을 사실적이고 세련된 필치로 알려준 작가 이동희 선생도 훌륭한 분”이라고 하였다. 이번 전시는 지난 18일부터 24일까지 농민문학기념관 1차 전시에 이은 것으로, 28일까지 문화원 전시관에서 전시된다. 이어 29일부터 30일까지는 ‘난계국악박물관’에서 제3차 전시로 이어진다. 한편 작가 이동희 선생은 연재를 마치면 금년 말쯤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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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호랑이 나라’ 특별전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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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악 사설 한얼 이종선 특별전', 책으로 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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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 이종선 특별展, "코로나 터널 속 서예계 성과"한글의 상형성을 완성하는 작업으로 나름의 작품세계를 갖고 있는 한얼 이종선의 개인전이 큰 관심 속에서 열렸다. 3년만의 개인전에다 코로나 터널 속에서 이루어진 작품들이란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국악신문 인기 연재 ‘한얼 이종선의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전은 2020년 09월 20일자 제1회 작품 ‘가곡원류’ 소재 시조 ‘梅影이~’로부터 2021년 11월 24일자 제64회 안민영의 ‘어리고 성긴 가지~’ 까지 64편 중 52편을 선보였다. 오후 4시 개최된 백악미술관 3층 전시실 개전식에 함께한 관객들은 다양한 서체, 다양한 작품 형태, 특히 한자와 한글의 조화미에 격찬을 하였다. 개전식에는 서예계 어르신들이 많이 참석하여 축하하였다. 테이프 커팅에는 소헌 정도준, 규당 조종숙, 우전 맹관영, 이영철 동방대학원대학교 총장이 이종선 작가와 함께했다. 국악계에서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회장 정은하, 기연수 명예교수, 이무성 화백이 함께했다. 그리고 주최 측인 국악신문사에서는 기미양 대표이사와 김지연 상임이사가 함께 했다. 이종선 작가는 인사말에서 "국악신문 1년 반 동안의 작업은 행운의 기회였다”면서 고통에서 이루어 낸 나름의 성과를 만족해 하였다. 축사는 스승인 소현 정도준 회장, 원로 규당 조종숙 서예가에 이어 우전 맹관영 회장이 성과와 평을 했다. 맹관영 회장은 1980년 방송통폐합 때, TBC동양방송이 깃발을 내리는 순간 ‘뉴스 기상도’ 마지막 뉴스를 울먹이는 목소리로 송출하여 한국방송역사에 획을 그은 주인공이다. 이날은 중학교 때 이경배 작가로부터 서예를 시작한 서예가로, 한국서예문인화원로 총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축사에서 "한얼 이종선 아우의 작품은 보면 볼 수록 끌리는 감칠맛이 특징인데, 이번 작품들에서도 이 맛이 두드러져 감동을 받았다”라고 했다. 주최측 주식회사 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는 "우리 신문 주간 연재의 품격을 높여주신 것에 감사를 드린다”라고 하고, 코로나가 아니라면 전국 순회전시와 해외 동포사회 전시를 하고 싶은 작품들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전시는 일주일간 15일까지 열린다. 작품은 1백만원에서 300만원 정도로 판매된다. 첫날 이미 10여 편이 관객의 품으로 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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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노래를 붓으로 부르다’ 한얼 이종선 書藝展"한글은 상형성象形性에 취약하기 때문에 독자미獨自美의 표출이 어렵다. 당연히 글자와 글자 행과 행의 조화기 필요하다. 글자와 행과 여백의 소통을 통해 전체를 하나로 이끄는 것이 내 작업의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글자의 가독성可讀性을 확보하며, 글감의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조형과 획에서 구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구체화시킨다.” 우리나라 한글 서예계의 중진인 한얼 이종선의 대표 작품 ‘훈민정음 서문’의 자평 일부이다. 한글서예의 특징과 속성을 명료하게 제시한 대목이다. ‘한글서예’의 성립 자체가 한글이 전용되면서 부터이니 그 역사는 아직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만큼 작가적인 운용 여지가 많은 분야이다. 이 분야의 주역 중 일인이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했던가. 2년 남짓한 연재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64편에는 작가만의 작품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주요 서체인 궁체, 민체, 고체와 한문 행초서체와 예서, 호태왕비체의 필의筆意를 더해 자, 행간을 자유롭게 운용하며 균형을 이루는 질량분활법을 잘 드러냈다. 이는 한글에 한자가 섞인 우리 노래 시조·가곡·잡가의 다양한 변격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우직하고 질박한 우리 노래의 속성을 고저장단은 물론 시김새 까지도 표현한 듯하니, 이동식 대기자가 표현했듯 "글씨로 눈으로 우리 선인들의 노래를 들려준~”(본지 11월 28일자) 것이다. 국악신문 2020년 09월 20일자 제1회 작품 ‘가곡원류’ 소재 시조 ‘梅影이~’로부터 2021년 11월 24일자 제64회 안민영의 ‘어리고 성긴 가지~’ 까지 64편 중 52편이 선별, 전시하게 되었다. 서예 전문 화랑인 백악미술관 3층 전시실에서 일주일간 열린다. 작품은 노래로 또는 율창律唱으로 가까이 할 수 있는 대가 열성(列聖)에서 명공석사(名公碩士)는 물론 기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가의 명작이다. 물론 잡가 ‘처세가’ 같은 뛰어난 무명씨의 작품도 있다. 글감은 대체적으로 잘 알려진 가집인 청구영언·가곡원류·남훈태평가·해동가요·교주가곡집 소재 선정작이다. 전시작의 형태도 다양하다. 우연욕서偶然欲書로 좋은 글귀를 만나 불현듯 글씨가 쓰고 싶어 붓을 들었는데 마땅한 종이가 없어 옛 서책의 남는 종이에 쓴 잔지여묵殘紙餘墨도 있어 손바닥 크기에서 2메타 남짓한 크기도 있다. 바탕지도 다양하다. 장지는 물론, 최고급 냉금지, 다양한 문양지, 시전지, 중국산 선면 문양지까지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1953년 경기도 용인 출생이다. 노장적 삶을 살고 있는 성정대로 ‘한얼’과 ‘醉月堂’을 호로 쓰고 있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으로 유농서회惟農書會를 주재하고 있다. 불교방송개국기념비, 고려대학교 100주년기념관비 등의 금석문을 남겼고,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성균관대학교, 한글학회, 김대중기념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언제부터 인지도 모르게 늘 그 모습으로 있어 왔던 자연스러움에 나는 더 애착을 느낀다. 이것이 전통에 바탕을 둔 서예 미학을 기본 조건으로 하여 나의 작품이 진행되는 이유이다.” 작가의 서예에 대한 서론緖論이며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서론書論이다. 이에 기반한 작가의 한글궁체와 흘림, 한문 전서와 예서, 국한문 혼서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감상하는 귀한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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