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신문TV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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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960년 전국농악경연대회 여성농악단이 사진에 있는 여성농악단은 1958년 남원국악원이 기존 남성들로만 꾸리던 전문농악단을 20대 전후반 젊은 여성 중심으로 구성해 창설한 최초 여성농악단이다. 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읗 하고 있을까? 최근 이들 중 4명이 생존해서 다시 무대에서 기념 공연을 했다고 한다. 원로 4인방은 최초 남원여성농악단의 상쇠 장홍도(1931년생), 장구 배분순(1944년생), 뒤 이은 춘향여성농악단의 소고 박복례(1945년생), 노영숙(1954년생) 명인이 60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뜻깊은 공연을 펼칠 계획이다. 남원여성농악단이 창단(1959년) 한 시기에는 남녀의 역할에 대한 편견과 남성위주로 짜인 마을농악이 주류를 이뤄 여성들로 구성된 농악단 창단은 당시 큰 파격이었다.그래서 남원여성농악단은 전국 순회공연을 다닐 만큼 큰 인기를 얻었으며, 창단 다음해인 1960년에는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처녀 출전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남원여성농악단의 성공은 전국적으로 다수의 여성농악단이 창단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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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무용가 최승희의 춤 '에헤라 노아라'세계적 무용가 최승희는 남과 북은 물론 근대무용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보적 인물이다. 1920년경 우리나라에 신무용이라는 개념과 무용 장르가 새로이 태동하기 시작한 시기, 최승희는 우리나라 무대 무용의 태동에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일본으로의 유학, 구미 및 미국에서의 활약 등 1920년대~30년대 조선의 무용을 이끌어가는 신여성이다. 1931년에는 문화평론가였던 안막과 결혼을 하는데, 출산 후 육아로 인해 집안에 묶이게 되면서 무용가로서의 공백 기간 슬럼프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힘든 생활을 하다가 재기를 위해 1933년 그는 이시이 바꾸 무용연구소에 다시 입단하게 된다. 그해 그는 일본 여류무용대회에 조선의 전통춤을 근간으로 만든 '에헤라 노아라'라는 작품이 전환점이 되어 대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1944년 최승희와 그의 남편 안막은 중국 북경에 최승희동방무도연구소를 개설하고, 안막이 먼저 북한으로 가자 최승희도 친일행위로 비판을 받게 되자 남편을 따라 1946년 월북을 하였다. 1953년 최승희무용연구소가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개칭되고, 북한에서 호의적인 인정을 받아서 많은 상과 직책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1958년 그에 대한 비판이 생겨나자 무용연구소가 폐쇄되고 국립예술대학 무용학부로 개편이 되었다. 그해 그의 남편의 숙청으로 그의 무용 활동이 중단되었다. 최승희는 중국 대사관 망명 요청으로 인하여 북한에서 감금되었다. 그 이후 최승희의 삶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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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류스타 1호, 피카소도 반한 최승희최승희(崔承喜·1911~1969)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 3년 6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중남미를 순회하며 주요 극장에서 독립적인 무용 리사이틀을 개최한 원조(元祖) 한류스타 1호이었다. 최승희는 "파리에서는 세계적 미술가 피카소, 그밖에 콕트(장 콕토?), 마티스, 데고부라 장고푸드 등 제씨였는데 그분들이 제 무용을 열심히 관람해 주었습니다"라고 밝혔다.(잡지 ‘삼천리’(1941년4월호)인터뷰) 프랑스 파리 샤요극장 공연(1939년6월15일)은 피카소와 마티스 등 파리의 쟁쟁한 예술가도 관람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 신문에도 보도될 정도였다. ‘삼천명이나 들어가는 극장의 객석을 전부 만원시켰을 뿐 아니라 불란서의 극단, 영화계, 화단의 명사들을 일당에 모아놓고 최 여사 독특의 세련된 예술로써 끝까지 미혹시켜 이 불란서예원에 대화제를 제공하고 있다 한다. 그날 밤에 모인 명사들 중에는 피카소, 마티스, 로당상을 필두로 미셸 시몽(영화배우) 등이 있었다 한다. ‘( ‘구주의 인기를 독점한 파리의 최승희씨’, 조선일보 1939년7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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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최승희 제자들 60년만에 한자리에주중한국문화원과 연낙재는 2012년 1월 7일 중국 베이징 주중한국문화원에서 무용가 최승희(1911~1969)를 조명했다. 1950년대 초반 베이징 중앙희극학원 최승희무도연구반 출신 중국·조선족 무용계 원로 등이 최승희의 예술세계와 창작정신을 회고했다. '중국무용 근대화에 끼친 최승희의 영향'을 주제로 한 논문발제와 중국 내 미공개 최승희 영상자료 감상, 최승희 제자들의 회고와 증언 순서로 진행됐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최승희는 50년대 초반 중앙희극학원 최승희무도연구반을 설립함으로써 중국고전무용체계를 정립해 중국무용의 근대화를 견인했다"고 밝혔다. 또 "근대 조선에서 최승희라는 세계적 무용가가 탄생해 전통적 문화종주국으로 인식돼온 중국의 무용근대화를 주도한 사실은 주목할 점"이라며 "아시아적 가치를 모색하고자 한 그의 예술적 업적은 꾸준히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빠이청 전 중국가극무극단 단장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라는 것이 늘 영광이고 자랑이었다"며 "최승희 선생은 창작의 개념을 심어주고 전통무용의 현대화에 대한 고민을 갖게 한 위대한 스승"이라고 전했다. 왕쉬잉 전 중앙희극학원 교수는 "선생이 '영혼이 없는 춤을 왜 추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며 "한 박자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예화 전 중앙민족대학 교수는 "선생은 단순히 몸놀림의 전수가 아닌 영혼이 있는 움직임을 강조했다"며 "춤에 조선민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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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와 매란방춤자료관 연낙재가 한국 근대무용의 여명을 연 무희 최승희(1911~1969)의 공연 모습을 담은 완품 영상을 2111년 12월 5일 일반에 처음 공개했다. 1930년대 후반 미국 뉴욕에서 신무용 '명비곡' '보살춤'과 전통을 소재로 한 '장고춤', '부채춤' 그리고 1940년대 후반 베이징에서 공연해 당시 저우언라이 중국 공산당 총리가 격찬한 '풍랑을 뚫고(노사공)' 등을 추는 최승희의 전체 공연 실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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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생 강연화(姜硏花)누구에게 보내는 미소일까? ‘기생’은 일본이 상업적인 목적에서 쓴 것. 우리는 ‘미인(美人)’으로 표현한다. 이 미인은 무엇이 장기(長技)였을까? 춤, 소리, 기악? 나도 예인에게 미소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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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진에 이름이 없다.사진에 이름이 없다. ‘妓生’이 이름일까? 기생은 ‘창기(娼妓)’ 또는 ‘예기(藝妓)’ 중 하나라고도 한다. 이 사진의 여인은 조화(造花)를 앞에 두고 시선을 깔고 있다. 이 여인은 둘 중 누구일까? '여인'으로 말하기 조차 어려운 애띤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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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수복(王壽福)왕수복(王壽福, 1917~2003)이란 여인. 당당하게 사진에 서명을 했다. 아리랑의 곡조로 노래하는 모델이다. 1934년 "최승희씨가 조선무용을 살린 것처럼 나는 조선의 민요를 많이 노래하고 싶습니다."라고 밝히고 아리랑을 취입했다. 1935년에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선우일선, 이난영, 전옥에 앞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소설가 이효석과 경제학자 김광진의 연인으로도 유명하다. 1942년 이효석이 사망할 때 임종을 지켰고, 이후 시인 노천명의 연인이었던 김광진과 결혼하였다. 김광진이 월북했을 때 함께 평양에 남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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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은 ‘未詳’, 아 , 아쉽다!이름은 ‘미상’ 아니면 ‘미소’? 1920년대 중반 모던하고 순한 미소를 지닌 이 여인은? 이름은 ‘未詳’, 아 , 아쉽다! 찍은 이는 있어도 사진 속의 여인 이름은 잃어버렸다. 찍은 이는 이홍경, 인사동 경성사진관 여성 사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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