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
(28) 우봉 이매방의 삶과 예술춤생애와 무용사적 의의 1. 들어가는 말 "하늘이 내린 춤꾼’,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전통춤꾼’이라 칭송되는 이매방(李梅芳)이기에 더더욱 이 시대의 국무로 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2015년 8월 7일 88세로 영면하였다. 필자가 볼 때 한국 전통춤을 오늘날처럼 곱게 다듬고 정립한 전통무용가는 한국무용사에서도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명창 중에서도 뛰어난 명창을 ‘국창’이라고 하는 만큼, 명무 중에서도 빼어난 명무를 ‘국무(國舞)’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이매방을 국무로 칭하고 인정하게 될 만큼 춤꾼으로 만든 요인들이 무엇이었을까 살펴보기로 한다. 이매방은 1927년 5월 5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7세 되던 해에 목포 권번(券番)의 권번장 함국향의 눈에 들어 춤 학습을 받았고, 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검무 그리고 고법을 가르쳤던 이대조(李大組) 명인으로부터 춤과 북놀이 사습을 8년 동안 받았으며, 주로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권번에서도 유일하게 남자 학습생으로 들어가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전수받았다. 오늘날 이매방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것도 그의 외길 춤인생에서 갈고 닦아진 예술적 가치와 전통적 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2. 이매방의 춤생애 1) 입문기(入門期, 1930년대)-목포권번과 만주대련의 소년시절 이매방은 1927년 음력 3월 7일(호적상 1927년 5월5일)에 전라남도 목포시 대성동 186번지에서 부친 이경식(李敬植)과 모친 조병림(曺炳林) 사이에서 3남2녀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이매방은 태몽과 관련 독특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모친 조씨는 이매방을 낳기 전 태몽에서 모친이 밭에서 호미질을 하는데 동그란 불덩이가 굴러와 치마폭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 명무로서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예고한 것이었다.이매방은 세 살적부터 끼가 발산된 천생의 춤꾼이다. 어려서부터 계집애들 같이 누님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매만지며 경대 앞에서 춤추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매방은 여자 같은 행동을 보고 부모형제들은 미쳤다고 야단법석이면서도 그가 철이 안 들어 그런 것일 거라고 지나치곤 하였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 전인 7세(1934년)가 되던 해 옆집에 세 들어 살던 조도 출신 목포권번의 권번장 함국향(咸菊香)씨가 그의 춤추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춤 학습을 권유하였다. 한편 이매방의 할아버지벌격인 이대조(李大祚, 김금옥에게서 춤사사)씨는 호남일대에서 명성이 높았던 춤의 명인으로써 승무와 북놀이에 탁월한 예인이었다. 이매방의 할아버지이면서 스승이었던 이대조 명인은 목포 권번(卷番)에서 승무와 북놀이, 검무 그리고 고법(鼓法)을 가르쳤던 권번 선생이었다. 당시 목포에는 포배당이라는 절마당 앞에 드럼통을 이삼십개 깔고 판자를 올려 가설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하였다. 이때 이대조(1870년초~1950년대, 북반주)와 한성준(1874~1941, 장구반주)이 서로 잘 아는 친구사이로 공연에서 이동백, 이화중선 등의 반주를 맡았다. 절에서의 공연은 조선시대 굿중패, 절걸립패, 사당패들의 근거지이며, 공연장이 절이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러한 연희문화 현상은 지속된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매방은 함국향씨가 소개한 목포권번에 입문하게 된다. 이매방이 목포 권번에 입문하여 춤뿐만 아니라 판소리 학습도 함께 시작하였으나 판소리는 그의 목청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청이 터지질 않아서 곧바로 그만두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매방의 춤과 북놀이 학습은 8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권번에서 유일하게 남자 학습 생이 들어가자 주위 선배들과 동기들은 귀염과 사랑을 듬뿍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호남 권번에서 다양한 춤을 익힌 이매방은 유년시절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중국 대련에서 운수회사를 운영하던 큰 형님에게 가서 약 5년간을 지내게 되면서 대련 정포소학교(1935~1939)를 다니면서 그는 매란방, 배구자 등을 만난다. 그리고 12세 무렵 대련에서 우연한 기회에 신무용의 대가인 배구자 무용공연에 출연하게 된다. 또 북경에 있던 큰 누나의 연결로 당대 최고의 경극 배우 매란방(梅蘭芳)과 조우한다. 매란방의 공연을 접하고 이국적인 향취에 매료되어 그에게 <장검무>, <등불춤>, <꿩털춤> 등을 배운다. 공연 때마다 무대에 오르는 이매방의 장검무는 그때 매란방에게 배운 장검무의 기법을 토대로 창작된 춤이다. 6. 25 이후에는 본명 이규태를 버리고 매방(梅芳)이라는 예명을 지어 사용하게 되는데, 매란방에게서 배우고 느낀 예술혼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대련정포소학교 5학년 때(1939년) 말도 잘 안통하고 해서 고향 목포북교소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춤에 정진하게 된다. 2) 학습기(學習期, 1940년대)-역경 속에서 다져진 승무로 데뷔무대목포소학교를 졸업 후 이매방은 뜻에 없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마음에 없는 목포공립공업학교를 입학(1940년)하였다. 공업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항시 그의 마음에는 춤사위와 북놀이가 떠나질 않았었다. 원래 손재주가 있어 자신과 제자들이 입을 의상은 물론 공연에 필요한 무구(舞具) 소품들을 직접 바느질하거나 제작하였다. 성격이 섬세하고 꼼꼼하여서 바느질 솜씨가 일품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결벽성과 치밀한 성격으로 아무리 소소하고 간단한 것이라도 매사가 완벽하게 갖춰야 하는 성품이므로 그의 바느질 솜씨는 전문적인 한복 제작자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 1942년(16세) 목포역전에다 쇠가래를 세워 그 위에 막을 치고 드럼통을 깔아 만든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밤낮 춤과 소리로 명인명창대회를 열고 공연을 했었다. 그런데 승무를 담당한 박봉선이 사정이 생겨 춤을 출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목포 사는 신두옥도 놀음을 나가 없었고, 성산호주 역시 결혼을 하여 무대에 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임방울은 승무를 추어야할 사람이 갑자기 참석치 못하게 되자 함국향에게 승무를 대신해서 출 사람을 수소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함국향선생은 마침 이매방의 춤이 무르익은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곧바로 이매방을 불러 임방울선생에게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김연수의 장삼을 빌려 입고 무대에 나섰다. 피리에는 임세균, 거문고에는 한갑득, 설장고에는 전사업, 전이섭, 김오채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과 함께 한 무대였다. 이때 이매방은 승무를 춤추어 관객의 열렬한 호응 속에서 첫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해방 후로는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 1948년 임춘앵의 여성국극단에 삼고무를 가르쳐 여성국악인들의 공연을 도와주었으며, 그해 승무로 첫 데뷔했던 목포 역전에서 다시 임방울이 이끄는 명인명창발표회에 승무로 출연하였다.이처럼 1940년대는 본격적인 춤과 가락을 익히는 학습기였다. 그동안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는 방학 때 귀국하여 간간히 춤을 익혔지만 목포로 전학한 후로는 당내에 명성을 날렸던 박영구(화순 능주출신)선생에게 학습하기 위해 주말마다 광주를 오가면서 광주권번을 다녔다. 당시 박영구선생은 광주권번에서 승무와 북놀이를 가르치고 있던 권번선생이었다. 광주권번에서 박영구선생과 함께 춤선생으로 있던 이창조(장성출신)선생에게는 검무를 학습하였다.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며 박영구, 이창조, 그리고 이대조(무안출신) 선생에게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을 배웠다. 특히 이대조에게서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배웠으며 이대조의 북가락은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아 ‘천수북’이란 말이 전해졌다. 오늘날까지 이매방 북가락이 일품이라고 하는 것은 이대조로부터 전수받은 가락이다. 3) 방랑기(放浪期, 1950년대)-6.25사변 군예대 활동-대구, 군산, 부산, 광주, 서울해방 후 진지하고 평화롭게 예인의 길에 정진하던 것도 잠시뿐 1950년 6.25사변이 터졌다. 북한군의 뒤를 따라 예술동맹 공연단들이 내려와 목포에서 인민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최승희의 딸 안성희와 전황(본명 전두황, 전옥의 동생, 전미례의 부친), 최옥산, 임종옥, 한계만, 유선도, 이경팔, 박정호 등이 내려와 공연한 것을 이매방은 보게 되었다. 이때 전황은 <처녀총각>, 안성희는 <장검무> 등을 추었다. 그리고 이매방을 강제로 무용동맹에 가입시켜 무용활동을 시켰다. 당시 무용동행위원장에 차범석, 국악동맹위원장에 장월중선 등이었다. 무용동맹에서 춤을 가르치거나 공연을 하였고 또 국악동맹에 가서 안무도 해주며 지냈다. 안성희가 "규태동무 북조선으로 갑시다”하는 바람에 피신해 있었지만 수복 후 국군이 들어와 무용동맹에 강제로 가입했던 것에 곤욕을 치루었다. 가까스로 해명하고 국군 군예대(KAS)에 가입하여 1951년 대구 역전 태평로에 본부를 두어 활동했다. 그 때 군예대에는 황해(전영록 부친), 허장강(허준호 부친), 그리고 무용가 김진걸, 황무봉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군예대(종군연예인공연단) 일원(1951년)으로 활동하면서 지방순회공연을 다녔다. 또 광주에서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공작단을 맡아 단장으로 호남 일대를 돌며 순회공연을 한다. 이렇게 지방순회공연을 하던 중 군산에서 연구소를 개설해주겠다는 유지들이 나타나 이매방이 24세(1951년)에는 잠시 군산으로 옮겨 군산시 영화동에다 이매방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2,3년간 활동을 하였다. 그때부터 이 매방은 그가 직접 운영하는 연구소를 통하여 그의 춤과 북놀이를 전수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할 때 춤을 배웠던 제자들로서는 박문자, 김옥순, 양향옥, 그리고 채영옥 등이 배웠다. 1953년에 문하생들을 데리고 광주에서 첫 발표회를 가진다. 그 후 1953년 부산으로 내려가 장홍심이 운영하는 영도에 함께 연구소를 했지만 결별하였다. 부산에서의 제자는 김진홍, 성승민, 이도근 등이 있었다. 1954년 광주로 옮겨 남동 양조장 옆에 국악원을 개설하여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를 조교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쇼무대나 악극단 등 순수 무용활동 이외의 출연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하생들과 함께 광주에서 다시 이매방의 무용발표회(1955년, 광주극장)를 가졌다. 한편 서울에서는 올라와 창신동 신익희의 딸 신영균의 집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여성창극단, 삼성여성국악단(박옥진, 박보아, 조양금 3인)등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1955년 부산으로 내려가 초량동에 자리잡았다. 그동안 부산에서 초량동, 범이동, 대신동 등지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56년 대통령 입후보했던 신익희의 사망으로 인하여 서울연구소를 청산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에서 첫 발표회를 대영극장(1957년)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때에도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의 역할이 켰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1959년 원각사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이매방의 공연작품으로 역시 <승무>와 <쌍검무>로 전통무용의 진수로 보여주며 춤기법이 매우 빼어났음을 표현하면서 전통에만 매달리지 말고 현대적인 무대예술로 승화되면 좋겠다는 평을 하였다. 당시의 이매방의 춤활동은 전국적으로 목포, 대구, 부산, 광주, 서울이었지만 주근거지는 사실상 부산이었다.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많은 예술인들이 체류하였었고 일부는 잔류하면서 예술의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이매방도 1950년대 중후반까지 부산에 중심을 두어 고전무용의 중심인물이었고 부산무용가협회 정회원이었으며, 1957년과 58년에 부산공연을 올렸으며 1960년대 말까지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 4) 정립기(定立期, 1960년대)-다양한 춤 레퍼토리1960년대는 1950년대를 이어 많은 무대를 누비면서 점차 춤 레퍼토리를 확대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이매방은 그의 선생에게서 배운 북놀이를 그가 혼자 활동하던 1948년 북3개를 놓고 추는 삼고무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창작하였지만 그 후 북5개를 놓고 치는 5고무, 7개를 놓고 치는 7고무 그리고 9고무와 11고무로 확대하였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연희되고 있는 삼고무의 원조는 이매방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초립동>, <화랑무>, <검무>, <장검무>, <박쥐춤>, <흥춤>, <무당춤>, <장고춤>, <학춤> 등을 정립하였고, 늘 추어온<승무>, <입춤>, <검무> 등과 함께 추었다. 그러한 이매방의 춤예술 정립은 그의 탁월한 예능적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까지도 이매방의 주 활동무대는 부산이었으나 점차 활동무대를 서울로 넓혀나간다. 그리하여 1967년 10월에는 서울 명동국립극장에서 창작무용 <꽃신 짚신>발표회를 가졌고, 1968년 8월에 일본 대판(大阪) 상은 창립 15주년기념제전(대판후생회관)에 초청되어 <승무>로 출연하였고, 이어서 제23회 광복절기념공연(일본동경 거류민단 본부 주최)에 <승무>를 추어 갈채를 받았다. 5) 비상기(飛翔期, 1970년대)-전통춤의 예술성과 가치 인정1970년대 초까지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으나 이매방의 승무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연구소를 서울로 옮겨 현재까지 서울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서울에서 한 때 1956년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선생 집에 신세지며 서울 창신동에다 연구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6.25직후에 주 활동무대였던 부산에서의 활동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매방은 <보렴승무>, <삼현승무>, <살풀이춤>, <검무>, <입춤>, <한량무>, <태평무>, <흥춤>, <장검무> 그리고 <장고춤> 등도 <승무>와 함께 끊임없이 연마하여 왔다. 1970년대 초부터 이미 국악계에서는 이매방의 춤의 가치를 파악하고 많은 국악제전에 초청하여 출연하게 된다. 1970년부터 매년 부산에서 3.1절 기념 국악대제전에 <승무>공연, 1973년 4월 동래야류발표회에 <승무>초청공연, 그해 12월 전통예술감상회에는 <초립동>을 공연하였다. 1974년 5월 인간문화재 초청공연에 <승무>로 초청이 되었고 12월에 무용대공연에는 <화랑도>(전주삼남극장)로 출연하였다. 1975년 5월 강백천 대금산조발표회에 <승무>출연(부산민속예술관)하였고, 8월에는 이선옥 초청 신적무용발표회에 <사랑과 이별>을 안무하여 이선옥과 2인무로 출연(국립극장 소극장)하였다. 이선옥과의 콤비를 맞추게 되면서 그동안 함께해온 한순서는 자연히 독자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6년 1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무용공연 <신검(바리공주)>를 부산시민회관에서 가졌다. 이리하여 이매방 선생이 서울무용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앙대 명예교수인 무용학자 정병호에 의해 1977년 7월30일 서울 YMCA에서 한국전통무용발표회에서 승무를 추면서부터이다. 전통무용연구회(회장 정병호)가 주최한 <이매방 승무 발표회>에서 삼현승무와 보렴승무를 추었고, 찬조로 김소희 국창의 판소리(고수 김득수)와 이선옥의 살풀이춤이 올려졌고, 악사에 지갑성, 전태용, 이생강, 김순봉, 오주환, 서용석, 김한국 등이 반주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병호 교수가 최초로 ‘승무의 미학’를 발제하였으며 안내장에는 김천흥의 축사가 기록되었다. 또한 이날 이매방 춤을 감상하고 조선일보 기사에 발표한 홍종인은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겼다."등골이 으쓱 들었다가 놓는 그 순간 그 깊은 한숨소리는 들은 바 없었으나 그 순간의 한숨은 하늘이 꺼지는 듯 깊은 느낌이었다..... 이씨의 춤이 각별하다는 점은 악곡이 지닌 장단과 가락 속에 섬세하고 대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온몸에 매듭과 힘줄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부분에 작동하고 있다는 그 기교를 훨씬 넘어서 그의 전신에 넘쳐 흐르는 예술적, 창조적 그리고 또 즉흥적인 감흥이 압도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할 것이다”(홍종인, "이매방씨의 승무를 보고”, 『조선일보』(1977년 8월 3일자).홍종인의 평문은 사실상 이매방의 전통춤이 우리 무용계에 새로운 별이 등극했음을 시사는 글이다. 감상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춤, 전율을 느끼게 하는 춤, 심장박동을 자극하는 북가락, 섬세하고 고운 춤사위에 모두 감동을 받은 공연이었음을 암시해준다. 아울러 그때까지 한성준류의 한영숙 승무에 매료되었던 이들에게 새로운 유파의 승무가 있음을 지상을 통해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대에서의 성공은 이듬해 1978년 3월 세계민속예술제 한국대표로 프랑스 렌느시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6) 만개기(滿開期, 1980년대)-<북소리> 시리즈와 승무 예능보유자 인정평생 춤의 길을 걸으면서 외길로만 살아온 이매방은 지난날의 춤생활을 돌이켜 보면 한과 정으로 가슴이 벅차다고 말한다. 이매방은 평생 동안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광대, 굿쟁이, 기생, 당골소리 등 별의별 말을 다 들으며 살아왔다. 거기에다 이매방의 성격이 직설적이고 입바른 소리를 잘 할 뿐 아니라 수틀리면 욕잘 하기로 유명한 그는 호랑이, 사자이빨, 따발총, 직사포, 욕보, 욕대장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한 면일 뿐이다. 이매방의 내면에는 그간 겪어온 진솔한 삶의 모습과 예술혼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래서 당시 이매방 춤의 진수를 처음 제대로 알아본 이는 당시 전통무용연구회장이던 중앙대 정병호 교수였다."이매방씨가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승무의 명무자라는 것과 오늘의 북틀춤을 탄생케 한 창조자로서의 장본인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씨의 승무에서 돋보이는 것은 하나는 그가 치는 북놀이이다. 그는 북놀이를 할 때 마치 한(恨)을 풀 듯이 신명나게 치고, 감정을 한곳으로 몰입시켜 주술경에 도달한 정도이다....이매방의 승무는 비단 춤사위의 멋 만이 아니라 북놀이에도 그 정수를 느낄 수가 있다. 그의 북놀이는 궁편과 각을 조화있게 타주(打柱)하는 가운데 많은 가락을 만들뿐만 아니라 그 기교는 무아경(無我境)에 이르는 신비스런 율동이다”.(정병호, "이매방의 승무”, 『전통문화』,1984년 5월호)이매방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무대공연을 주선하는 등 그가 문화재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민속학자 정병호는 그의 춤 중에서 승무를 으뜸으로 꼽는다. 승무에 있어 북틀의 창시자라는 점과 감정이입에 입각한 승무의 춤사위를 주술적 무아경에 이르게 하는 신비한 묘술로 풀어내면서 이매방을 최고의 춤꾼으로 극찬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도록 조사에 착수하여 이매방 승무의 가치와 미학을 연구하였다. 당시 정병호교수의 제자로 연구에 참여했던 필자도 함께 YMCA 이매방 승무발표회(1977년), 이매방전통무용의 밤(명동유네스코회관, 1981년)을 동참하였고, 이매방춤 마포연구소에 찾아가 면담하면서 특히 당시에 이미 승무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던 고 한영숙 승무와의 차별성과 승무의 미학과 지역적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 연구하였다. 이매방 춤판 최고의 결정판 <북소리> 씨리즈의 시작이었다. 1984년 6월 이매방 무용인생 50주년 기념공연 <북소리>(문예회관 대극장)에 이어 1985년 6월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 Ⅱ>였다. 또한 전통예술의 보급과 선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결과로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1984)과 성옥문화상 문예부문 대상(1995)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중요무형문화재 인정에서 보류된 이매방의 승무에 대해 사생활과 예술세계는 별개라는 당시 정병호 문화재위원의 일관되고 끈질긴 노력과 더 열정적으로 이매방 승무를 알리기 위해 1981년 유네스코 회관 공연을 주선하여 문화재위원들을 초청하여 이매방 승무의 예술적 가치와 지역성과 전통성을 알리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 1987년 7월1일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명무의 대열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1989년 일본무용예술제 참가와 국악대공연에 참가 등의 더욱 왕성한 공연활동을 펼치게 된다. 7) 결실기(結實期)(1990년대)-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인정과 이매방 춤인생 60년1990년대의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에 이어 1990년 10월10일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전통춤의 최고 명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수많은 한국무용가들이 이매방류 춤을 전수받기 위해 구름같이 모이게 된다. 서울에 정착한 후 이매방은 창신동, 돈암동, 대현동, 운니동, 삼성동, 그리고 마포를 거쳐 지금의 양재동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을 옮겨가며 무용연구소를 운영했었다. 그후 지금까지 무용연구소를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데, 한국무용계를 대표하는 무용가들 대부분이 그의 춤을 전수받은 제자들이다. 하지만 춤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제자로 들이지 않는다. 새로 입문할 사람이 재능이 없어 보이거나 꾸준히 학습에 임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 승무와 살풀이춤의 보유자로 인정되자 그의 많은 옛 제자들이 다시 찾아들기 시작하였고 새로이 입문한 문하생들이 그의 춤과 북놀이를 배우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90년의 활동은 ’90 북경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참가와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Ⅲ>(호암아트홀)를 가진 후, 1991년 미국순회공연, 1992년 유럽순회공연을 마치고 1994년에 춤인생 60년을 정리하는 <북소리 Ⅳ>를 가진다. 이어서 1995년 광복50주년 민속종합예술제 출연과 1996년 인생70 고희기념공연, 1997년과 98년 일본공연을 가졌고,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1999년에 우봉 이매방 춤인생 65주년 기념 대공연을 가지면서 1990년대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였다. 8) 국무기(國舞期, 2000년대)-외길인생 우봉 이매방 춤 70년격변기를 살아온 우리의 춤선구자 대부분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왔듯이 명무 이매방의 삶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몇 년 전 이매방은 또 한 번의 고비를 맞았다. 2001년 갑작스럽게 발병한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야했다. 주위의 걱정과 안타까움 속에 위 대부분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 몸무게가 15kg 빠지는 등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어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매방은 작년 ‘우봉이매방팔순기념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직접 살풀이춤과 입춤을 추는 저력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오직 춤만을 생각하는 열정이 아니라면 감히 이루어 내지 못할 일이다 ‘우봉 이매방 춤 전수관’은 2005년 7월 목포문화예술회관 1층에 마련된 이매방의 살풀이와 승무를 전승하는 공간으로 이매방의 이수자들이 승무와 살풀이춤, 입춤, 삼고무 등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06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우봉이매방춤경연대회’는 이매방의 예술혼을 예향 목포 이미지로 연결시키기 위해 창립된 행사이다. 전통춤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이매방의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3. 우봉 이매방 춤의 무용예술적 가치 이매방의 춤에서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호남제 시나위 춤사위로 짜여져 있다. 그중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의 곱고 아름다운 사위와 자태를 자아내고 한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정중동의 몸놀림이 배어나온다. 결국 이매방춤은 호남 지방의 권번에서 추어왔던 춤사위 기법이지만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본인 스스로의 속멋에서 우러나온 춤으로 발전된 것이기에 단순한 전수춤이 아니라 스승들의 춤을 뛰어넘어 본인의 혼을 담은 전통춤이었기에 아무도 넘겨볼 수 없는 국무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이제 우봉 이매방이 왜 국무의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는 남자이면서도 여성보다도 더 곱고 섬세한 기방계통의 ‘춤바디’와 여성적 ‘춤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전승되는 한국 전통춤의 기법과 미학적 표현법을 볼 때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현하는 전통무용가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한국 전통춤의 역사상에서도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가하는 무용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왜 이처럼 아름다운 춤사위기법을 가지게 되었을까? 몇 가지 추론되는 점이 있다. 하나는 어릴 적 처음 춤입문에서 고운춤만을 추는 기방에서 춤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당시 목포권번 함국향이라는 권번장이 이웃에 살아 그 집을 드나들면서 기방춤을 처음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여자처럼 예쁜춤의 기본이 몸에 배여있어 이매방춤에는 기방예술의 전형적 아름다움을 담겨 있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여성들보다도 더 여성적인 기방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전통소리꾼들에게는 유파별로 또는 계통별로 ‘소리바디’가 있듯이 이매방의 춤맵시에는 이미 기방계통춤의 고운 ‘춤바디’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가 아무리 아름답게 춘다고 해도 여성만큼 섬세하고 아름답게 추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한계성을 극복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매방은 성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여성적 감수성이 정신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아무리 춤바디가 기방계적 표현력을 지녔다 해도 대개의 남자춤꾼들은 남성의 ‘춤속’이라는 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의 춤사위와 표현법에는 여자보다 더 여성화된 ‘춤속’을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성정체성이 뒤바뀐 남성춤꾼이라 해도 모두 춤속이 여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뒤섞인 혼성춤속이거나 어설픈 여성춤속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은 완벽한 기방계 ‘춤바디’에다 가장 섬세한 내면적 정서의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춤속’을 지닌 특별한 춤꾼이다. 둘째, 호남지역의 명무들로부터 뼈대있는 전통춤을 다양하게 전수받아 호남춤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목포권번에서 호남기생에게 처음 춤을 사사한 이매방은 그후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전통무용가로 성장한다. 맨 처음 정식으로 춤을 가르친 이는 이대조는 무안 출신으로 목포권번 사범으로 춤과 음악에 능통한 전통예인이며, 이매방에게 승무, 검무, 장고춤을 가르쳤다. 또한 옥과 출신인 신방초에게 육자배기, 화초사거리, 가곡, 검무, 승무 등을 익혔고, 10대 중반에는 광주권번에서 화순 출신 박영구 문하에서 승무와 북을 배웠고, 장성 출신 이창조에게 검무를 사사하기도 했으며, 춤과 기악에 능통한 이장선의 문하생이 되어 다양한 예능을 접하게 되었다. 스승 모두가 호남일대와 경향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궁중 어전 출입도 잦았던 당대 최고의 전통예인들이었다. 이처럼 이매방은 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면서 권범사범들인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의 제일가는 명무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과 다양한 춤가락을 익혀 호남춤의 특성과 미학을 정립한 전통성과 정체성을 보유한 명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간에 호남춤의 대를 이은 한진옥을 비롯한 몇몇의 호남춤의 명인들이 있었으나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고향에서만 활동하다 잊혀져 갔다. 그러나 이매방은 고향 목포에 머무르지 않고 부산, 군산, 광주 등지를 거쳐 한국예술의 중앙무대인 서울로 진출하여 호남춤의 예술성을 범한국춤으로 위상을 높였다. 이매방 춤에서 전승되는 보석같이 소중한 호남제 춤사위는 실로 다양하다. 춤사위 용어상에 나타난 대표적인 춤사위 명칭은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이다. 이매방이 춤을 가르칠 때 매번 강조하는 대삼소삼은 장단의 강약을 따라 춤사위도 강약으로 표현하는 춤기법으로 강과 약으로 반복하면서 조율하여 추는 방식으로 춤의 섬세한 리듬성과 변화성을 보여준다. 또한 움직임의 기법 중 정중동 또는 음양의 조화를 표현하는 양우선도 중요한 춤 특징으로 손짓과 발짓의 모든 동작은 양우선의 원리를 따른다. 가령 발은 뒤꿈치부터 앞꿈치로 옮겨지고, 팔은 엎으면 반드시 뒤집고, 뿌리가 내려오면 끝이 올라간다거나 끝이 쳐지면 뿌리가 올려지는 등의 자연스러운 기교와 원리가 연출된다. 또한 보법에서 비정비팔(比丁比八)이라는 발디딤은 호남춤에서 내려오는 오랜 춤기법 중의 하나로, 발 딛는 자세가 한자의 정(丁)자 혹은 팔(八)자의 모양으로 딛는 독특한 형태의 보법이다. 오른발에 이어 왼발 끝으로 딛어 오른발 옆에 옮겨 딛고 제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고 펴는 형태의 섬세하고 정교한 발디딤은 이매방 춤의 몸가짐과 돋음새, 오금새, 디딤새로 이어지는 걸음걸이의 진수이다. 셋째,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과 재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춤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이매방의 첫 스승 이대조는 그의 집안 할아버지벌이 된다. 즉 이매방의 집안은 스승이자 할아버지인 이대조 대(代)까지 대대로 무업(巫業)을 해온 무계의 혈통을 이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세습되면서 천부적인 예능성을 이어받아 오게 된다. 대개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경우는 도중에 도태되지만 선천적 예능성을 지닌 유전인자를 지닌 예인들은 대를 이을수록 더 유명해진다. 이매방의 천재성은 이미 어린 나이인 15세 때 증명되었다. 목포역전에서 임방울이 가설무대에서 명인명차대회를 열었는데 승무를 추기로 한 박봉선이 불참하여 대타자로 승무를 추었으나 관중들의 찬사가 뜨거웠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매방은 이 모든 스승들의 춤기량을 뛰어넘는 춤기법과 춤사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이다. 그래서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전승된 전국의 모든 류파와 계통의 전통춤 전승자와 명무들을 볼 때 이매방만큼 춤을 곱고 아름답게 구사하는 명무는 없었다.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현재의 한국전통춤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고 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이매방을 명무 중에서 명무인 국무로 호칭하는 것이다. 넷째, 현대교육개념으로 볼 때 어린나이부터 춤의 조기영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매방은 예닐곱 살부터 목포권번에서 예기들의 춤을 접하고 춤 배우기를 권유받아 이대조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만주 대련 정포소학교를 다니면서 방학 때면 북경 매란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거나 목포로 돌아와 춤을 배웠다. 이처럼 이매방은 어린 10대에 호남의 이름난 명인들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악가무를 두루 섭렵하였다.
-
(27)해외춤기행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역사문화와 동아프리카 부족춤마사이족에 밀려 산속 땅굴에 사는 차가족 마을과 킬리만자로 동아프리카 여행 6일째(1월10일) 6시 기상하여 조식하고 7시 반에 중형버스로 짐은 지붕 위에 싣고 케냐를 떠나 탄자니아로 가는 대장정에 올랐다. 12시에 탄자니아 국경에 도착하여 비자 발급(50불)을 마치는데 2시간이나 걸려 2시에 출발하였다. 4시간 만에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MT.Kilimanjaro, 5896m) 등정을 준비하는 거점도시 모시(Moahi)의 YMCA호텔에 도착하였다. 장장 11시간이나 걸린 장시간 버스여행이라 모두들 지쳤다. 1월 11일 7일째 아침 6시 반에 호텔조식으로 가볍게 해결하고 킬리만자로 등정팀(140달라)과 수영 및 휴식팀, 씨티투어팀(50달라)에서 선택하는데 나는 씨티투어팀, 4명이 합류하였다. 킬리만자로 등정 입구인 마랑구(marangu, 1970m) 게이트에 가까이 올라가니 바나나나무숲을 이루고 있는 밀림지대가 나타났다. 협곡에 폭포가 있어 절벽 같은 흙 계단을 한참동안 꼬불꼬불 내려가니 폭포가 보였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협곡밀림 속의 진풍경이었다. 다시 올라오는 길에 차가족들이 가내농업으로 바나나와 커피를 경작하는 곳을 들러 잠깐 살피고 차가족(Chagga족-농업, 커피, 사이잘삼(麻), 사탕, 옥수수, 바나나) 동굴 속 생활을 볼 수 있었다. 200년 전 마사이족들이 쳐들어와 소와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가기 때문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살게 되었는데, 방과 부엌, 곡식 창고와 외양간 등과 죽은 가족들을 조상신으로 모시고 목각 모습으로 세워 놓고 영원히 함께 사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 그 길이가 몇 km씩 연결되어 있고 중간 중간에 지상으로 통풍구를 뚫어 공기와 햇빛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또한 지상에는 차가 하우스라는 삼각형 움집에 나무에 바나나잎과 풀잎을 얹어놓고 살고 있었다. 이어서 킬리만자로(아프리카 대륙에서 최고 높이, 세계 다섯 번째 높이. 뜻은 ‘빛나는 산’ 혹은 ‘하얀 산’) 등정의 관문인 1800m 위치에 있는 마랑구 게이트에 다다라 소풍처럼 도시락을 먹고 기념촬영을 하고 오후 4시경에 숙소로 돌아왔다.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에서 환상의 잔지바르섬으로 1월 12일(8일째) 7시30분 모시(Moahi) YMCA호텔에서 탄자니아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평화의 땅. 현 수도: 도도마Dodoma)으로 12시간을 버스로 달려왔다. 터미널 공용버스임에도 비용을 더 주니 다른 아프리카 승객이 있음에도 호텔까지 와서 짐까지 실어주었고 다르에스살람 터미널에서도 승객을 내려주고 팁의 위력으로 우리의 숙소 이코놀로지(Econolodge)호텔까지 데려다주고 갔다. 리무진 장거리 대형버스로 아래층 짐칸이 커서 승객들은 2층 버스를 탄 기분이었고 아프리카에 와서 처음 에어컨 혜택을 맛보았고 승차감도 좋았다. 그런데 이코놀로지호텔은 우리 예전 여인숙 수준으로 5층은 옥상층이라 밤12시가 되어도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열대야가 심했다. 하는 수 없이 일층 로비로 내려오니 모두들 쇼파에 앉아 카톡을 하고 있었다. 1월13일(9일째) 7시30분에 식사하고 짐정리를 다시 하면서 배낭여행은 배낭은 큰 것으로 하고 여행가방은 대형 아닌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갈 때도 첫날 나이로비 썬라이즈(Sunrise) 호텔에 큰 가방은 맡기고 배낭에 3일 동안 외출분을 나눠 들고 가야해서 공간이 부족했는데 역시 다르에스살람에서도 큰 가방 맡기고 작은 배낭으로는 한계가 있어 먹거리와 옷 종류를 별도로 비닐 백에 담아 물 끓일 포트까지 담아들고 나섰다. 페리호를 타고 잔지바르(Zanzibar: 검은 해안)로 떠나기 전에 환전하는데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육수가 줄줄 흘렀다. 페리호 승선 11시30분까지 1시간이 남아 일행 몇몇이 해변 씨푸드 시장으로 택시타고 나가 오징어를 사서 데쳐 아주 맛있게 먹고 승선했다. 엄청 더워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생전에 이렇게 맛있는 데친 오징어 별미가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윽고 잔지바르에 도착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에 햇볕에 나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숙소배정을 마치자 바닷가로 나갔다. 여기저기에 씨푸드 노점상들이 눈에 띄었다. 문어, 갑오징어, 소라, 게 등을 즉석에서 구워 팔고 있어 문어를 주문하고 사탕수수를 즉석에서 수동기계로 짜내는 주스를 사먹었다. 그리고 즉석에서 구워 만든 문어피자를 먹으니 고소한 버터 맛에 한 끼 밥이 되었다. 잔지바르 노예무역전시장과 잔지바르 전통춤 공연 1월14일 10일째를 맞았다. 오늘은 잔지바르의 식민지시절 노예감옥소와 노예로 팔려나가던 슬픈 역사를 간직한 프리즌섬(Prison island)에 배를 타고 나갔다. 인도양의 쪽빛바다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석양에 해떨어질 때까지 시원함과 씨푸드를 만끽했지만 오늘도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다 속을 쳐다보며 일행은 작은 섬 모래사장에 내렸다. 먼저 바다거북과 공작새가 서식하는 곳에 가니 백오십년 이상 된 대거북(Giant Tortoise)부터 어린 거북까지 수많은 거북이들을 사육하고 있었다. 짝짓기를 하면서 내는 소리가 공룡소리 같았다. 노예감옥소와 쇠사슬 고문장과 경매장, 곧바로 바닷가로 승선시켜 팔려나가던 부둣가가 슬픈 아프리카인들의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잔지바르로 배를 타고 돌아와 바오밥나무 그늘아래 식당이 사람들이 많아 찾아와 먹는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식후 프리즌 박물관에 가서 노예의 역사와 생활, 문화 등 사진과 그림을 곁들인 전시관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생존하며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온 내력이 전시되어 아이러니한 그들만의 자존감마저 느꼈다. 다시 스톤타운(Stone Town)이라는 미로의 집들과 상점들을 둘러보다가 예전 성곽 안에서 공연이 있다하여 5 달러를 내고 공연을 관람하였다. 〈zanzibar school of acrobatic sports〉단의 주최로 잔지바르 음악과 전통춤, 그리고 아크로바틱 조립체조와 텀블링, 무술대련체조 등이었다. 1월15일(11일째) 조식 후 9시 셔틀버스로 능귀(Nunggui)로 출발하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1시간 30분 달려온 능귀는 유명한 휴양지로 에메랄드빛 바다와 백사장과 별장들이 즐비하였다. 드디어 일행들은 수영복차림으로 백사장에서 돛배를 타고 처음엔 엔진으로 출발했다. 한참 해안선 따라 절경을 감상하고 물안경, 구명조끼, 오리발을 착용하고 바다 속으로 풍덩풍덩 빠져 물고기들을 관찰하며 수영을 즐겼다. 돌아오는 길에는 돛을 내려 낙조에 낭만이 깃들어 모두 숙연해지고 있었다. 올드 팀들만 모여 유명한 씨푸드 맛집을 찾아나서 랍스타와 킹피쉬 등과 맥주와 와인을 곁들여 늦은 저녁을 즐겼다. 오늘은 아프리카 여행 중 가장 여유있고 낭만적인 하루를 즐겼다. 탄자니아 국립박물관과 부락박물관의 부족춤 1월16일(12일째) 10시에 다시 잔지바르로 셔틀버스를 타고 떠나 중간쯤에 스파이스 농장에 들러 여름과일, 향신료 재배농장 견학과 향내체험을 하고 과일시식에 이어 식사에서도 다양한 과일을 나눠줘 먹고 식사도 맛있게 먹었다. 다시 출발하여 2시 잔지바르 선착장에 도착하여 고속페리 티켓을 받아 입국사증을 받고 기다렸다가 승선하였다. 같은 국내에서 입국사증을 받는 것은 현재의 탄자니아로 탄생하게 된 1964년 이전에 탕가니카(수도 다르에스살람)와 잔지바르가 각기 독립국가에서 통합한 역사의 잔재로 남아있는 것이다.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하자마자 몇 명만이 탄자니아 국립 박물관으로 향했다. 역시 탄자니아 동물화석과 인류진화를 밝혀주는 인류화석, 그리고 수많은 암각화와 노예매매로 끌려가고 핍박받던 시기의 자료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1월17일(13일째) 30도가 넘어 찌는 듯한 여름 날씨는 일행들의 행동반경을 위축시켜 휴식이나 가볍게 재래시장을 다녀오는 정도로 오전 일정을 마치고 시내근처에 부족춤도 보여주는 부락박물관이 있다하여 주소를 가지고 몇몇이 택시를 타고 나섰다. 하지만 주소지에는 부락박물관(Village museum)이 없어진지 오래고 외곽 멀리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되돌아왔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동아프리카 마지막 여정을 그냥 끝낼 수 없는 아쉬움이 뇌리 속에 맴돌고 있어 다시 용기를 내어 혼자서 새로 찾은 주소를 가지고 입장료보다 열배나 많은 택시비를 지불하면서 부락박물관을 찾아갔다. 허름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박물관이지만 별도공연비까지 지불했다. 박물관 내부와 소수부족 가옥을 민속촌처럼 전시한 마당 한구석에는 가족팀 같은 공연자들이 반주악기를 설치하고 이동식 플라스틱 간이의자를 원으로 배치한 가운데 앉았다. 관객은 나 혼자지만 캠코더와 사진촬영 준비를 마치니 드럼과 실로폰 반주에 맞춰 광란의 요동춤을 추기 시작한다. 한참을 보고 있을 때 서양인 관객들이 10여명이 입장하여 함께 감상을 하였다. 한 가족들이 다양한 춤을 선보이기는 하는 것 같지만 여러 부족의 특성을 찾아볼 수 없는 춤들이어서 아쉬웠다. 1월18일 23명중 30일간 여행팀 18명은 기차로 서아프리카와 빅토리아폭포와 남아공 희망봉을 거쳐 귀국하는데 중간 귀국자 5명은 다르에스살람 공항에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국제공항에서 환승하여 19일(15일째) 저녁7시25분에 인천공항으로 귀국하였다. 동아프리카 춤의 특성 동아프리카 춤은 다른 지역 춤보다 동작이 폭발적이고 격렬함이 특징이다. 그들의 외향적 문화기질을 잘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남성들의 뜀뛰기춤, 발차기춤, 여성들의 전신요동춤, 엉덩이춤 등이 동아프리카의 춤 패턴에 속한다. 또한 동아프리카춤의 반주악기는 아주 다양하지만 그중 타악기 종류가 가장 많으며 복잡한 리듬과 2박자와 3박자의 중복되는 리듬도 많아 아프리카 춤의 리듬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아프리카 춤의 일반적인 특징은 빠른 비트의 타악반주와 광란에 가까운 몸짓으로 흥미진진하며 원초적인 무형식으로 표현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춤의 근원적 특성도 활력과 삶을 고양시키는 수단과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는 부족 간의 적대적인 환경과 맹수와 수렵의 위험 속에서 삶을 보호하고 삶을 증대시키는데 주로 관여한 부족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원래 춤이란 사회적 문화적 연관뿐만 아니라 신앙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춤은 한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동시에 그 집단의 사회구조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연결고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프리카 춤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축제에는 사냥, 수확, 출생, 성인식, 결혼, 질병과 치유, 죽음 등이 포함된다. 중요한 축제나 의식 때 아프리카 부족들의 춤에는 트랜스(trance) 또는 심할 경우 엑스터시(ecstasy) 지경의 열광적인 주술적 샤머니즘적 춤에서부터 장례식 때의 차분한 춤까지 다양하다. 그리하여 중앙아프리카 수도 방기지방의 반다족 가자(gaza)춤은 소녀들의 성인식 때 한데 어울려 격렬한 동작으로 트랜스에 이르기까지 장시간 계속 춘다. 또한 베냉 솜바(somba)족의 풍년제 ‘쿠브워티(kubwoti)’는 마을의 청년들이 농사와 관련한 여러 가지 형태의 상징물을 머리와 등에 걸치고 나무껍질에 붉은 칠한 옷으로 치장하여 흥겹게 춤을 춘다. 또한 다산, 성공적인 사냥, 비, 풍작 등 희망적인 춤들은 기우제의 레인 댄스(rain dance)에서처럼 일반적으로 상징적 주제와 부합되는 모방적인 춤 패턴을 포함하고 있다. 춤들의 일부 혹은 전부에 나오는 기본적 패턴(pattern)은 추상적(abstract)이거나 모방적(mimetic)인 것이다. 많은 춤들은 단순히 사회적 표현 충동과 움직이고 리드미컬하게 운동하고 스스로 즐겁게 하려는 집단적인 욕구로부터 기인한다. 그래서 저녁에 중부 아프리카의 음부티(Mbuti) 피그미족은 북을 치고 동시에 한발 한발 뛰며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밤새껏 춤을 춘다. 동아프리카 마사이족 문화와 춤 마사이족이란 좁게는 케냐와 탄자니아에 걸쳐 있는 그레이트 리프트밸리 지역에 사는 유목 마사이족을 말하나, 넓게는 케냐의 삼부루족, 탄자니아에서 반유목생활을 하는 아루샤족과 바라구유족도 포함해서 나타내기도 한다. 이들은 남자 중심의 사회이며 모든 씨족은 남자들이 우선권, 결정권을 가지고 움직인다. 또한 일부다처제로서 씨족외혼이 이루어지며 같은 연령집단에 속한 남자들끼리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Swapping)이 있다.마사이족과 가축과의 관계는 탄생신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은가이(Ngai, Enkai)와 킨동오이(Kindongoi)라는 신이 하늘나라에서 마사이족을 지상으로 내려 보낼 때 소와 양, 염소를 같이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소를 중시하는 마사이 전사는 소를 약탈하고 다른 종족으로부터 이를 지키는 것이 임무로 긴 창으로 상대를 위험하며 용맹함을 과시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마사이족은 타고난 전사로서 호전적이고 용맹해서 노예상인들에 끝까지 저항하여 죽거나 죽이거나 하자 마사이족 노예사냥을 포기했기 때문에 마사이족이 노예로 끌려간 경우도 거의 없었다. 보통 마사이족의 남자들은 열두 살에 이르면 할례와 성인식을 치른다. 그리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병사촌에 들어가 일정 기간 창과 칼로 야생동물을 잡는 방법, 소를 기르는 방법 등을 배우며 부족을 지키는 전사로 태어난다. 오늘날 마사이족이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남자의 성인식이나 여성의 할례, 다른 부족의 가축 약탈 등의 전통은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 마사이족의 전사들을 '모란(Moran)'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에게는 가사를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지만, 마을에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즉시 모여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도 나가야 한다.케냐나 탄자니아 마사이족 남성들은 막대기를 들고 차례로 돌아가며 하늘 높이 뛰면서 춤을 추고, 여자들은 무릎만 살짝 구부린 채 춤과 노래를 부른다. 남자들이 껑충껑충 하늘로 뛰는 춤을 추는 데에는 용맹을 과시하면서 하늘과 가까워지려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남성미를 과시하여 여자를 유혹하기 위한 몸짓이라고도 한다. 젊은 전사들의 점핑춤(adumu, 또는 aigus)은 일렬로 투스텝으로 전진하며 원무로 돌다가 멈추고 한두 명이 점프를 시작하기 위해 중앙으로 들어가 점핑춤을 추는데 발뒤꿈치가 땅바닥에 닿지 않게 춘다.은노토(Eunoto)는 10살 또는 그 이상에서 전사의 성인식에서 행하는 노래와 의식춤이다. 이때는 젊은 여자들도 가장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함께 추며, 전사(moran)의 어머니들도 아들의 용기와 대담성을 찬양하며 노래하고 춤을 춘다. 젊은 남녀들의 집단춤은 서로 줄을 서서 부드러운 저음으로 "하 우아"라고 내뱉으며 하체를 밀어냈다 당긴다. 여자들은 남자들 앞에서 서서 골반을 튀게 하고, 남자들과 대등하게 "오이 요요”라고 화음으로 맞춘다. 노래를 부르며 숨을 내쉴 때 머리를 앞으로 기울였다 들이쉴 때 뒤로 살짝 젖히며 가벼운 목춤을 춘다. 동아프리카 춤기행 후기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내내 인류역사 700만년의 여정을 겪으면서 생사의 갈림길을 넘고 넘어 포식자인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요람의 땅이었는데 오늘날 궁핍한 원시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인지 아프리카의 춤과 음악은 원시시대처럼 생존의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사냥 나가기 전에 사냥성공을 기원하면서 절실하게 수렵춤을 추었고, 사냥성공 후에는 배고픔을 해결한 기쁨의 춤을 추고 노래 부른 것도 알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미래는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광활한 대자연과 자연 그대로의 동물들, 원시춤과 음악,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젊은 대륙 같은 긍정적인 요소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해주었던 마력의 힘을 지닌 그들만의 다양한 춤과 음악이 있었기에 아프리카에 대한 동경과 친근함을 느꼈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인 미지의 세계는 한층 더 새롭게 다가왔으며 기회만 된다면 또다시 문화탐사를 가고 싶어졌다.
-
(26) 해외춤기행 스리랑카의 불교문화와 전통춤(2)불치(佛齒) 수호의 문화유산과 캔디안 댄스 스리랑카가 우리나라에서 가깝지 않고 외모도 사뭇 다른데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양국이 고대부터 불교문화를 꽃피웠다는 공통점 때문인 것 같다. 스리랑카는 기원전 6세기쯤 북인도의 신할리족(Sinhalese)이 이주해 처음으로 왕조를 세운 나라로서 일찍이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곳곳에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사원 담불라(Golden Temple of Dambulla, 黃金寺院) 중세시대의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Polonnaruwa) 기행을 오전에 마친 일행들은 전용버스로 3시간을 이동하여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사원과 황금사원이 있는 담불라로 갔다. ‘담불라(Dambulla)’는 ‘바위(Damba)’와 ‘샘(Ulla)’이 합쳐진 말로 기원전 1세기에 180m 높이의 바위산 중턱의 자연동굴에 승려들이 기거하며 조금씩 다듬어 만든 사원이다. 바위를 파낸 5개의 석굴 안에는 불상과 신상(神像) 157개가 안치되어 있고, 천장과 벽에는 화려한 빛깔의 벽화가 빽빽이 그려져 있다. 석굴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제2굴인 마하라자 비하라(위대한 왕의 사원)이다. 제1굴에는 열반에 드는 불타, 제3굴에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제4굴에는 2,000년 전에 보석을 넣었다는 불탑이 보관되어 있고 제5굴에는 조각상과 20세기 초에 그린 벽화가 있다. 1991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시기리아(Sigiriya) 바위산 궁전에 얽힌 왕위 계승에 관한 전설과 압사라 댄스 시기리아(Sigiriya) 고대 도시는 카사파 1세(Kassapa I, 477~495)의 치세 동안 실론(Ceylon) 문명을 보여 주는 유일한 유적이다. 특히 바위산 정상에 건설한 시기리아(Sigiriya) 궁전은 현지어로 Sigiri(Lion사자)와 Ya(Rock 바위)라는 두 낱말이 합해진 ‘사자 바위(Lion's Rock)’란 뜻이다. 이 유적은 가파른 경사면과 사방을 에워싼 정글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높이 370m의 화강암 봉우리 정상에 있는 왕궁터에 요새화된 궁전, 폐허가 된 건물들, 저수조들, 암각 조각들이 있다. BC 5세기에 요새왕궁으로 건축된 이 성채는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보물이지만 명성만큼이나 슬픈 사랑과 사연을 품고 있다.5세기 스리랑카의 다투세나 왕(Dhatusena King)은 왕위를 계승하기 전 한 여인을 사랑했다. 그 여인은 왕족이 아닌 천민이었기에 슬픈 사랑의 얘기는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서부터다. 그러나 다투세나왕은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족은 천민과의 결혼이 용납되지 않는 나라의 율법 때문에 다른 왕족의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다투세나왕에겐 천민 여인이 낳은 맏아들 카샤파 왕자와 왕족출신의 왕비가 낳은 둘째 아들 목갈라나(Moggallana)왕자가 있었는데 천민출신 큰아들이 후일 카샤파 1세 왕자가 된다. 그러나 천민출신 성분 때문에 왕족 혈통인 이복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봐 늘 우려 하다가 절대권력자인 왕이 되기를 결심하고 아버지인 다투세나 왕을 감옥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했다. 이에 분노한 동생 목갈라나는 형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몇 명의 신하들과 함께 인도로 망명한다. 왕좌에 오른 카샤파 왕은 이들 후환이 두려워 부하를 시켜 아버지 부왕까지 살해하고 만다. 카샤파 왕은 아버지를 살해한 죄의식과 인도로 망명한 동생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난공불락인 시기리아 정상인 해발 370m 바위산 꼭대기에 7년의 긴 세월을 들여 철통같은 요새 시기리아 궁전을 지었다. 그러나 망명 11년 후 복수를 위해 세력을 키워 돌아 온 이복동생 목갈라나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카샤파 왕은 쓸쓸하고 비참한 자결을 택한다. 이 궁전을 짓는데 걸린 기간이 7년, 입궁하여 꾸미는데 4년, 도합 11년의 긴 세월을 공들였으나 그가 완성된 궁전에서 기거했던 기간은 고작 반년이었다.결국은 비극으로 끝난 한 왕가의 운명적인 몰락의 역사가 서려있는 시기리야 바위산 왕궁 폐허를 답사하고 내려오면서 신분, 권력, 사랑, 영화에 대한 애달프고 인생무상한 이야기는 인도 무굴 제국의 황제였던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끔찍이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추모하여 만든 타지마할 역사 이야기보다 더 서글프고 안타까워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내려오는 서쪽 암벽 중간쯤에 알려지지 않은 18명의 여인들 모습이 그려진 ‘시기리아의 여인(Sigiriya Lady)’, ‘천상의 여인들(Maidens of the Clouds)’ 또는 ‘천상의 무희(Apsara)’로 불리는 바위그림이 있었다. 아잔타(Ajanta)의 가장 아름다운 벽화와 비교할 만한 이 바위그림으로 인해 시기리야 고대 도시는 세계 고고학 미술계에 찬사를 받게 되었다. 본래는 시기리아 바위산에 500명의 여인 벽화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18명의 벽화만 겨우 남아있다. 여기서 귀가 쫑긋해지는 이야기는 정상 왕궁터 대리석 옥좌(Throne)에 카샤파왕이 앉아서 무희(Apsara)들의 춤을 감상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옥좌 등받이 뒤로 물이 흘러가도록 만든 수로를 두어 왕의 더위를 식혀주었다고 한다. 압사라(舞姬, 妖精, 飛天, 仙女, 天使)의 범아시아적 특징 시기리야 벽화 속의 수많은 여인들의 체형은 건강하게 살이 오른 풍만한 관능미를 가진 예사롭지 않은 미인들이다. 그리고 허리 아래가 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한 모습과 상반신을 벗은 채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은 힌두교와 불교의 천상세계의 여인, 즉 압사라(천상의 요정)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압사라는 일단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벽화의 춤추는 요정을 떠올리는 크메르족의 전통춤을 뜻한다. 그러나 인도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왕실무희들이며 힌두의례와 관련한 천상의 요정이다. 역시 불교국가에서도 이를 비천(飛天, 樂天 : apsara)이라 하여 항상 음악을 연주하고 꽃을 뿌리며 하늘을 떠도는 천인(天人)으로 1세기 전후부터 널리 조형화하고 있다. 인도 전래의 한국불교 사찰 벽화나 범종 부조에 나타난 비천상(飛天像, 주악비천, 공양비천, 무용비천) 역시 압사라의 맥을 같이하고 있다. 상의를 벗고 있는 모습은 열대지방의 보편적인 고대사회의 풍습이다. 이러한 탈의(脫衣) 모습은 한중일 등 온대지방마저도 불상이나 비천상의 대부분이 상체는 벗거나 가사를 걸친 정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시기리야 압사라 벽화에는 대체로 꽃을 받치는 형상은 불교 비천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또한 압사라들은 팔과 손과 손가락의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불상마다 손과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불교 수인법(佛敎 手印法)과 같은 모습들이라고 볼 수 있다. 힌두교 창세신화 〈우유바다 휘젓기〉와 압사라 탄생과 춤 압사라(Apsara)는 원래 인도의 탄생 신화에 나오는 요정으로, 그 어원은 '물 위(apsu)에서 태어났다(sara)'는 뜻이다. 이는 힌두교의 천지창조신화 ‘우유의 바다 휘젓기(Sagara Manthan, The churning of the sea of milk)’에서 비롯한 것으로 신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항상 힘이 약한 데바(Devas, 善神)들은 아수라(asuras, 惡神)들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여 모두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에 데바들은 우주와 질서의 신 비슈누(Visnu)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비슈누는 우유의 바다 깊은 곳에 암리타(Amrita, 영생의 약)를 먹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조언한다. 그러나 데바들의 힘만으로 우유의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암리타를 꺼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비슈뉴가 꾀를 내어 아수라들에게 암리타를 나누어 줄 테니 함께 우유의 바다를 휘젓자고 제안한다. 아수라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마침내 선신과 악신들이 우유의 바다를 천 년 동안 함께 휘젓는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조각과 그림들은 세상의 중심인 만다라산(Mount Mandarachala)을 중심으로 비슈누가 가운데 있으며 양쪽으로 데바와 아수라들이 나누어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거대한 뱀의 왕(Vasuki)의 몸통을 함께 휘젓는 모습이다. 이렇게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 과정에서 발생한 거품 속에서 약 6억 명의 압사라(apsara, 선녀)가 탄생하였다.특히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제3회랑 동쪽 벽의 거대한 천지창조 장면에는 우유바다를 휘젓는 물결 속에서 수많은 압사라가 태어나 하늘을 나는 신비로운 장관을 볼 수 있다. 크메르 정권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한 압사라 댄스(Apsara dance)는 우리의 궁중춤처럼 정적이며 지루하다 할 정도로 움직임이 느리고 행동반경도 제한적이며 절도가 있고 엄숙한 춤이다. 우아한 전통음악에 맞추어 진행되는 유연하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다양한 손가락춤과 손목춤이나 발목 꺾음과 뒤로 들기 같은 말초부위 춤사위는 남방춤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부처의 진신 치아를 모신 불치사(佛齒寺) 1월 8일 아침 두 번째 수도 담불라 답사를 마친 일행들은 다시 세 번째 수도 캔디로 출발하였다. 이번 춤기행에서의 핵심이 캔디안 댄스를 관람하고 스리랑카 전통춤의 종류와 춤사위를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었기에 가장 기대가 컸다. 캔디에서 부처의 진신 치아 사리(佛齒)를 모신 ‘불치사(佛齒寺, Temple of the Tooth. Dalada Malgawa)’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관광요지이다. 치아 사리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석가모니 다비식(화장)때 입수한 것으로 서기 362년 인도 남부의 작은 나라 칼링가(Kalinga)왕국의 왕자가 머리카락 속에 숨겨온 사리를 스리랑카 왕에게 바쳤고, 이후 불치는 독실한 불교국가이기에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개방되는 불치사 참배는 자유롭지만 치아사리가 있는 방이 열리는 것은 하루 세 번(오전 6시, 11시 30분, 오후 6시 30분) 공양을 올리는 푸자(Puja)의식 때이다. 이때 참배객들은 꽃을 들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불치사 참배는 스리랑카인들의 평생소원으로 스리랑카 사람 마음속에 불치사가 간직되어 있다. 캔디 불치사를 중심으로 펼치는 에살라 페라헤라 축제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규모인 캔디의 에살라 페라헤라(Esala Perahera)는 불치사에 있는 성스러운 불치사리를 옮기는 의식을 재현하는 축제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에살라’는 ‘음력 7월’을 뜻하며 그래서 이 축제는 음력 7월 중에 약 11일간 매일 밤 열린다. 이 축제는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스리랑카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그 당시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이다. 캔디안 댄스 극장에서 선보인 전통춤들 불치사 근처에 있는 캔디안 댄스극장(Oak-Ray Kandynn Dance)은 빌딩 공간을 개조한 간이 소극장으로 옹색하였고 이미 외국인들로 만원이었다. 할 수 없이 가운데 통로 맨 앞자리에 허락과 양해를 구하며 의자를 옮겨 자리 잡았다.마굴 베라(Magul Bera, Ceremonial Drums): 시작을 알리는 나각(螺角, 소라나팔)을 불면 격렬한 드럼(BERA)연주 의식을 하는데 이는 고대 토지의 수호신에 알리는 의례 관습에서 비롯되었고 전통적인 환영 연주이다.푸자의식춤(Puja Naturna, Pooja Dance): 오일 램프를 들고 있는 여인들이 부처에게 제물로 바치며 기도하는 의식을 표현하며 우아한 춤을 춘다. 락샤춤(Raksha Natuma, Devil Dance): 락샤(Raksha)는 축귀(逐鬼), 치유(治癒), 악령(惡靈), 악마(惡魔) 등을 뜻하며, 18개의 남쪽 스리랑카 가면을 쓴 춤은 악한 기운을 물러가게 하고 환자들을 치유할 목적으로 춘다. 이 춤은 귀신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사용되며 여전히 스리랑카에서 효과적인 정신과 치료로 여겨지고 있다. 뱀춤(Naga Raksha, Cobra Snake)은 잡신의 위협과 퇴치의 뜻이며, 새춤(Gurulu Raksha, Mythical Bird Dance)은 신화 속의 독수리로 이를 상징하는 탈을 쓰고 공연하는 춤이다.판테루 나투마(Pantheru Natuma, 出征舞): 판테루는 탬버린과 유사한 악기를 들고 드럼반주에 맞춰 흔들며 활발한 곡예기술(공중돌기, 회전무)과 손재주를 보이며 춤을 춘다. 이 춤은 전장에 나가는 전사들을 표현한 것으로 출정무(出征舞)라 할 수 있으며, 캔디안 댄스 중에서 가장 박력 있는 남성춤이다. 마유라 나투마(Mayura Natuma, Peacock Dance): 화려한 공작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유라 나투마는 신화에 따르면 스리랑카 전쟁의 신으로 불교와 힌두교가 경배하는 ‘스칸다(Skanda)’를 운반하는 공작새로 고맙게 묘사하는 여성춤이다. 또한 공작새는 보편적으로 평화와 조화를 가져 오는 상징성으로 밝은 흰색과 파란색 의상을 입는다.라반 나투마(Raban Naturma): 라반춤은 손북(Ath-Rabana, Hand Tambourine)을 들고 추기도 하고, 한국의 버나(남사당 접시돌리기)처럼 손가락이나 막대를 받쳐 회전시키는 다양한 곡예무로 발전한 전통 민속춤이다. 살루 팔리야(Salu paliya): 살루 팔리야(Salu Paliya)는 악령에 사로잡힌 환자에게 여신(Pattini)의 축복과 치유를 가져다주기 위에 흰목도리를 걸치고 등장한다. 여신 파티니(Pattini)는 스리랑카의 힌두교와 불교 공동체 모두에게 경배를 받는 신이다. ‘살루 팔리야(Salu Paliya)’가 광대처럼 행동하여 환자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두려움을 없애주는 제 2단계의 치유의식으로 우스꽝스런 가면춤을 춘다.베스 나투마(Ves Natuma): 베스춤(ves Natuma)은 캔디안 댄스 형식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춤이다. 이 춤의 기원은 고대 퇴마의식춤인 ‘코호모 칸카리야(Kohomba Yakuma, Kohomba Kankariya)’에서 유래 된 것으로 가장 인기가 있는 춤이다. 춤은 저주의 악령을 달래는 의식으로 남성에 의해서만 수행되었다. 〈전설 내용은 1편 캔디안 댄스 참고〉 이들은 태양의 광선을 상징하는 반짝이는 60개의 장식품으로 된 전통적인 베스(ves)복장을 입고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헤드기어(head gear)모자를 쓰고 게타베라야(Getanderaya,Kandyan Drum)라는 북소리에 맞춰 역동적이고 정교한 춤을 춘다. 이 춤의 댄서가 되려면 몇 년간의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인정받고 춤을 출 수 있다. 특이한 춤사위로 한국농악의 채상모놀이처럼 헤드기어의 긴 띠를 휘돌리기, 점핑춤, 공중돌기, 치맛자락 잡고 춤추기, 한국 강신무처럼 왼쪽으로 빠르게 돌기 등이 있었다. 쿨루브 나투마(Kulub Natuma, Harvest Dance): 쿨루브춤(Kulub Natuma, Harvest Dance)은 농부들이 곡식이나 실론 차잎을 수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부녀자들이 행한 민속춤으로 키춤, 차잎 뜯기춤(Tea Plucking Dance) 등이 있다. 반주는 가벼운 드럼 비트와 플루트 연주이다.드럼 오케스트라(The Drum Orchestra): 드럼은 캔디안 댄스에 ‘게타 베라(Geta Bera)’, 저지대춤에 ‘야크 베라(Yak Bera), 사바라가무와춤에 ’다불라(Davula)‘ 반주로 춤을 춘다. 드럼 오케스트라(The Drum Orchestra)에서는 주로 게타 베라야(Geta Beraya), 야크 베라야(yak Beraya), 탐마타마(Thammattama)로 리듬 연주했으며 그밖에 시작할 때 소라연주가 있었고, 연주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밖에 스리랑카 악기에는 우데키야(Udakkiya), 타빌(tavil), 플루트(floot), 라바나(rabana) 등이 있다. 지니 시칠라 불춤(Gini Sisila, Fire Dance): 지니 시칠라(Gini Sisila, Fire Dance)는 불을 뛰어 넘는 마력과 인간에 해를 끼칠 수 있는 27개의 악령과 불에 대항하는 신성한 퇴마의 힘을 보여주는 남부지방 불춤이다. 불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으로 화염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며, 이 댄스에는 불을 먹는 아찔한 묘기춤(Fire Eating Dance)도 춘다.불판걷기(Fire walking): 맨발로 불판걷기의 근원은 라마(Rama) & 시따(Seetha)의 서사적인 사랑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론의 왕 라와나(Rawana)는 인도의 공주인 시따(Seetha)를 인도에서 납치했다. 시따는 자신의 순결을 입증키 위해 화장의례에 사용되는 장작을 쌓아 불을 붙이고 불속에 들어가자 불의 신 아그니(Agni)신이 나타나 시따를 들어 올려 라마에게 시따의 순결을 입증해주었다. 그 후 라마는 왕이 되어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에서 불판걷기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마지막 여정들(핀나왈라, 콜롬보, 갈레포트) 1월 9일 아침 핀나왈라 코끼리 고아원(Pinnawala Elephant's Orphanage)을 방문했다. 이곳은 정글에서 부모를 잃어버렸거나 또는 다치거나 병든 코끼리들을 보호하는 시설로 건강을 회복한 코끼리들은 사찰이나 코끼리 사육사(조련사)들에게 넘겨진다고 한다. 코끼리들을 아침 10시와 오후 2시에 반씩 나누어서 목욕을 시키기 위하여 40-50마리를 데리고 강으로 나온다. 1월 10일 드디어 스리랑카 여정의 마지막 날이 왔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오전 호텔에서 전통 혼례식을 볼 수 있었다. 캔디안 댄스에서 봤던 베스댄스를 혼례 의식춤으로 축하를 하며 전통 결혼식을 오전부터 오후까지 진행하였다. 그리고 스리랑카의 옛 수도 콜롬보(Colombo)에 도착하여 해양박물관과 갈레포트(Galle Fort)와 전통낚시(stilt fishing)을 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치고 콜롬보의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Bandaranaike International Airport)으로 향하여 밤 비행기로 귀국하였다. 스리랑카를 떠나면서 스리랑카 왕조 유적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부처의 진신(眞身) 치아(齒牙)를 모셔온 1800년 동안은 불치 수호의 역사였으며, 불치(佛齒)는 왕조의 존재 가치를 담을 만큼 소중한 왕권의 상징인 ‘국새(國璽)’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아시아 지배계층에서 불교를 널리 받아들인 것은 ‘왕즉불(王卽佛) 사상’, ‘호국불교’를 이용한 것이긴 해도 스리랑카 국민들(70%)이나 왕들은 지나치리만큼 지극한 불심(佛心)으로 현재까지 살아온 것 같았다. 또한 스리랑카의 전통춤은 3개 문화권으로 전승되고 있었으며, 그중 캔디지역이 가장 대표적인 춤문화권이며 세부적으로 여러 종목의 춤들이 전승되고 있었다. 그중에서 스리랑카의 고전춤이라고 할 수 있는 베스댄스(ves Natuma)는 여러 타악반주와 채상돌리기, 땅재주 등 다양한 기법이 한국의 농악과 유사성이 많았고, 오랜 동안 불치를 지켜온 페라헤라축제는 스리랑카의 전통문화의 전승의 요람이었고 민족의 자존심이었다. 이병옥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8. 02.
-
(26) 해외춤기행. 스리랑카의 불교문화와 전통춤(1)의식적이며 가면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 2018년 1월3일 9시35분. 스라랑카의 불교문화유산을 탐사하고 대표적인 캔디안댄스(Kandyan Dance)와 전통춤들을 살피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이번 배낭여행도 만만치 않아 하루를 넘기는 여정으로 6시간 만에 도착한 태국 방콕에서 환승하기 위해 9시간을 더 지체했다. 다시 스리랑카 콜롬보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Bandaranaike International Airport)에 3시간 후 한 밤중(00:10, 한국시간 03:40)에 도착하여 1박을 하고 다음날 전용버스로 6시간에 걸쳐 아누라다푸라에 도착(19:30)하였다. 스리랑카의 첫 왕국, 아누라다푸라의 이수루무니아 사원 불교유적과 춤유산 1월5일 아침 일정대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불교유적답사에 나섰다. 신성도시(神聖, Sacred City)인 아누라다푸라는 BC 5세기~AD 8세기 신할리족(Sinhalese族, 인도 아리안계) 왕국의 수도로 ‘깨달음의 나무(tree of enlightenment)’인 보리수(Sri Ma Bodhi) 주변에 건설되었다. 1,300년 간 실론(Ceylon, 지금의 스리랑카)의 정치적·종교적 수도였으나, 933년경에 인도로부터 타밀족(Tamil族, 인도 드라비다계)이 침입함으로써 황폐해졌다. 그 후 많은 탑(Dagoba, stupa, 파고다, 塔婆)과 사원(寺院)터, 석조 연못 등 유적들은 한동안 정글 숲에 묻혀 있었으나 19세기에 복구되어 1982년 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의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첫 탐방 유적은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 이수루무니아 바위사원(Isurumuniya rock temple)이었다. 연못 뒤의 바위 앞뒤에 건립한 사원과 코끼리와 불상의 부조상과 보기 드문 와불(臥佛)과 스님상들이 있다. 와불상(臥佛像)과 열반상(涅槃像)의 차이는 발가락을 모은 모습으로 구분하는데 오른쪽 발가락이 약간 위로 올라간 것은 열반상이고 나란히 된 것은 와불상이다. 이곳 이수루무니아 박물관(Isurumuniya museum)사원박물관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강암 조각 솜씨가 뛰어난 ‘연인상(Lovers)'이다. ‘춤추는 난쟁이’ 바마나(Vamana) 신화와 스리랑카 부조상의 특징 항상 춤추는 조각상이나 벽화가 있는지를 눈여겨 찾던 중 반갑게도 ‘춤추는 난장이(Dancing Dwarfs)’ 조각상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으로 봐서는 파괴 또는 폐허화된 힌두사원의 잔해인 것 같았다. 비록 난장이 모습으로 보이지만 힌두신 비슈누(Vishnu)의 다섯 번째 화신(avata)이었다. 무릎을 굽힌 스리랑카의 전통춤 자세에다 양팔을 들고 어깨를 치켜든 기본춤사위와 눈을 크게 뜬 모습까지도 캔디안댄스(Kandyan Dance)와 유사하다. 또한 압사라(Apsara)는 ’춤추는 여신‘ 또는 ’천상의 무희‘라는 뜻으로,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회랑 벽면에 새겨진 군상인데 스리랑카에서도 엿보인다. 다만 탑면의 높이 제한에 따라 한쪽으로 쪼그려 앉은 조각상이자만 상하체를 편 자세로 살펴보면 압사라의 춤사위를 알 수 있다. 춤추는 난장이 남녀상은 하반신이 동물하체처럼도 생겨 반인반수상과 같기도 하다. 난쟁이 바마나(Vamana)에 대한 힌두경 리랑카전 바마나 푸라나(Purana)의 기록에 의하면 비슈누(Vishnu)의 다섯 번째 아바타(avata)로 최초로 인간으로 육화(肉化)한 화신(化身)이라 한다. 그리고 난쟁이 바라마는 늘 나무 우산을 들고 다니는데, 자비로운 발리 왕의 궁전을 찾아가 세 걸음만큼의 땅을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마하발리는 왕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낙한다. 그러자 곧바로 바라마는 자신의 본 모습(비슈누)을 내보이며 거대한 발걸음으로 첫 걸음으로 천상 세계에서 지상 세계까지 건너고, 두 번째 걸음으로 지상 세계에서 지하 세계를 성큼 넘어섰다. 그러자 약속을 거둘 수 없게 된 마하발리는 세 번째 걸음 자리에 자신의 머리를 내밀었다. 바마라는 마하발리에게 겸손함에 대한 대가로 영생불사의 권능을 주었으며 해마다 마하발리가 왕국을 찾아오는 걸 허락하였다고 한다. 다음 그림들과 조각상은 난쟁이 바마나(Vamana) 힌두신화의 내용이다. 그림들은 대체로 마하발리왕에게 세 걸음 땅을 요청하는 형상, 수락 후 비슈누 신으로 현신(現身)하여 천상에서 지상과 지하세계로 한걸음 하는 형상과 발리 왕이 머리 조아리는 형상 등으로 나타난다. 도상무용학적으로 볼 때 동양춤에서는 볼 수 없는 발레나 현대무용의 쳐든 특이한 발춤사위로 보인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불교사찰에서 보이는 난쟁이들은 사원이나 탑의 기단석(基壇石) 등에 주로 보이는데, 본체를 받쳐주는 역할이거나 억눌린 모습이나 귀여운 난쟁이들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악마들로 가둬놓거나 짓누른 모습(Kelaniya 사원, 콜롬보)으로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인도의 힌두교와 신화가 스리랑카에 전래되었다가 불교문화가 정착하여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힌두신의 존재는 미약해지고 악마신이나 단순한 난쟁이로 변화되어 춤추는 난쟁이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천상의 무희’ 압사라춤의 의미와 지역 특징 박물관에 전시된 부조상 압사라(apsara)는 ‘천상의 무희’라는 뜻으로 인도신화에는 젊고 우아한 초자연적인 여성으로 특히 춤 예술이 뛰어나 신들의 궁전에서 간다바스(Gandharvas)가 만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신들과 남자들을 즐겁게 하는 천사로 알려져 있다. 압사라춤으로 꽃을 피운 나라는 캄보디아이다. 사원에는 수많은 압사라 부조상이 있으며 황실 발레라고도 하며 천상의 춤을 추는 신성한 사람들로 여겨져 왕궁에서 살았다고 한다. 압사라 춤은 손동작이 다양하고 화려하여 습득하기 어려운 춤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스리랑카의 압사라는 힌두문화의 쇠락과 함께 미미할 수밖에 없었고 불교문화에 융해되어 버렸다. 따라서 스리랑카의 압사라 유물 역시 아누라다푸라의 이수루무니아 박물관(Isurumuniya museum)의 전시품에서나 겨우 흔적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반인반수(半人半獸)춤 킨나라(kinnaras)의 의미 춤과 관련한 또 하나의 부조상 유물은 킨나라(kinnaras)로 불교 신화와 힌두교 신화에는 전형적인 연인, 천상의 음악가, 반인반마(半人半馬)이며, 동남아시아(특히 태국)에서 자비로운 반인반조(半人半鳥)로 인간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특히 여성은 춤, 노래 및 시로 유명하며 여성의 아름다움, 은혜 및 성취를 상징한다. 하지만 힌두문화의 전래보다 불교문화가 꽃피운 스리랑카에서의 힌두신화와 종교적 색채는 엷어지고 미약한 흔적만이 박물관에 소장된 모습이었다. 아누라다푸라의 다양한 사원(Temple, Vihara)과 탑(Dagoba)들 이어서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새하얀 루반벨리사야 다고바(Ruvanvelisaya Dagoba)였다. 눈부시고 거대한 '위대한 탑(Great Stupa)'이라 일컫는 탑으로 높이가 무려 91m에 달하는 이 탑은 반원 모양의 탑신 위에 우리 석탑의 상륜에 해당하는 부분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탑 주변은 불교에서 평화와 정의를 상징하는 코끼리 1900마리를 조각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세 번째로 아바야기리 비하라(Abhayagiri Vihara) 및 다고바(Dagoba)를 찾았다. 아누라다푸라에서 가장 큰 사원이고 대규모 사원으로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사원이다. 승원의 교육기관으로 한때는 5천 명 이상이 거주했다고 한다. 비하라(vihara)란 승려들의 수련을 하는 참선공간으로 돌침대와 대중들에게 설법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뜻한다. 스리랑카 국민 70%가 불교를 믿는데 사원이나 불탑이나 보리수에는 흰옷 입은 이들이 꽃을 올리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처럼 보였다. 끝으로 찾아간 곳은 제타바나 다고바(Jetavana Dagoba)였다. 마하비라하(Maha vihara)의 명에 따라 120m 높이로 건축되어졌다. 그 규모는 그 당시 세계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 2개 다음으로 높은 건축물이었으나 지금은 83m 정도로 낮아졌다.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Polonnaruwa)의 불교문화유산 첫 번째 수도 불교사원 답사를 마친 일행들은 전용차량으로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Polonnaruwa)로 이동하였다. 스리랑카 싱할라 왕조는 기원전 377년부터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서 약 1,400년간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9세기에 인도 타밀에 촐라 왕조(Chola Dynasty)가 들어서면서부터 힌두세력의 침략이 잦아지고 11세기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약 80km 떨어진 폴론나루와(Polonnaruwa,1153~1186)로 두 번째 수도를 옮겨 180년간을 유지했다. 12세기에 파라크라마바후(Parakramabahu) 1세가 만든 전원도시(garden-city)의 놀라운 고대도시는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는 3중벽으로 된 성곽 안에 굉장한 전원도시를 건설하여 궁전과 성지들을 그의 치세 기간에 만들었다. 스리랑카의 전통춤 유형 스리랑카의 전통춤(Natum)을 개괄적으로 분류해보면 오랜 세월 왕실에서 춤과 음악으로 사랑을 받으며 전승해온 고전춤(classic dance), 민간에서 수확과 생활을 표현하는 민속춤(folk dance), 주로 가면을 쓰고 치병의식으로 추어왔던 의식춤(ritual dance)으로 장르를 구별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고전춤은 크게 3가지 주요 지역 스타일이 있다. ① 캔디안 댄스(Kandyan dance, Uda Rata Natum), ② 파하타 라타 댄스(Pahatha Rata Natum, Low Country Dance), ③ 사바라가무와 댄스(Sabaragamuwa Natum)가 전승되고 있다. ① 캔디안 댄스(Kandyan dance, Uda Rata Natum)캔디안 댄스가 스리랑카춤의 대표적인 춤으로 알려진 것은 세 번째 왕국이었던 캔디지방에서 오랜 동안 왕실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오롯이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리랑카의 중부 고원지대(hill Country)인 캔디지역에 고유하고 다양한 춤 형식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까지 널리 전파되어 있기도 하다. 캔디안 댄스의 기원은 캔디안 지역에서 여전히 행해지는 스리랑카 ‘악마의 춤(Devil Dance, Kohomba-kankariya)’라고 불리는 의식춤 형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악귀의 저주병(Divi Dosa, 표범의 저주)에 괴로워 병약해진 판두바사디바(Panduvasadeva) 왕을 치료하기 위해 샨크라(Śakra, 帝釋天) 신의 요청으로 세 명의 샤먼이 인도에서 스리랑카 섬에 왔다. 왕이 악귀가 몸에 실려 매일같이 악몽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말하자, 샤먼들이 코홈바 카나리야(Kohomba kankariya)를 연행하자 악령이 사라졌다. 그 후 많은 원주민들이 이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의식춤 형식의 세련미를 갖추고 체계화되어 나중에 ‘우다라타 나툼(Udarata natum)’ 즉 Kandyan dance’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나 주로 남성들만이 참여하였다. 오늘날 Kandyan dance는 종교적인 화려한 행렬과 사원의식 및 모든 축제 행사에서 연행되고 있다. ② 파하타 라타 댄스(Pahatha Rata Natum, Low Country Dance, Ruhunu Natum)파하타 라타 댄스(Pahatha Rata Natum)은 지역을 구별하는 명칭으로 신할리족(Sinhalese)의 남부 평원의 저지대(Low Country)춤이다. 이는 ‘악마의 춤(devol madu, devil dance)’이라고도 불리며 악마나 신비한 존재의 퇴마의식(exorcism ritual)과 관련이 깊다. 춤의 내용은 조류, 악마, 파충류 등 다양한 18개의 가면을 착용하고 인체에서 여러 질병을 쫓아내기 위해 연행하기에 ‘다하 아타 사니야(Daha Ata Sanniya) 또는 ’사니 야쿠마(Sanni yakuma, 질병 퇴치, 영적 구제의 뜻)’로 부른다. 이 의식은 환자에게 질병을 옮길 것으로 생각되는 악마를 부르며, 인간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악귀를 몰아내는 내용으로 밤새도록 연행하는 것으로 마을에서 가장 즐거운 행사 중 하나이다. 흔들리는 손놀림, 넓고 각진 발놀림, 독특한 드럼 리듬과 의상은 루후누(Ruhunu) 댄스의 특징 중 일부이다. ③ 사바라가무와 댄스(Sabaragamuwa Natum)사바라가무와(Sabaragamuwa)춤은 라트나푸라(Ratnapura)와 켈라리(Kegalle)지역에서 전승되며, 초기에는 초기에 캔디안 왕국에 속한 지방이었다. 캔디안 댄스 형식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저지대(Low Country)춤 양식도 흡수하게 되어 캔디안 댄스와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사바라가무와 전통에는 현지 사람들이 존경하는 샤먼(Saman)신의 숭배와 관련이 있으며, 독특한 의상, 노래, 드럼 비트 및 드럼 스타일이 있다. 춤사위도 손이 머리 위로 결코 들어올려지지 않지만 대신 팔이 몸에 비스듬히 뒤로 젖혀지는 특징이 있다. 또한 반주악기인 다우라(daula)도 양쪽에서 같은 소리를 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전통춤은 대체로 무릎이 반쯤 구부러져 바깥쪽으로 벌려진 포즈이며, 팔은 가슴과 나란히 팔꿈치에서 구부러진 모양으로 매우 의식적이며 가면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다.
-
(25) 몽골의 전통가무악<2>떠돌이 유목생활에서도 빛나는 몽골의 춤문화유산 몽골 울란바토르대학 초청공연을 마친 일행들은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셋째 날(9월19일)을 맞이했다. 하지만 오후에 앵콜공연을 요청받은 상태여서 조금은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점심 후 체육공원에서 중등학생들과 일반인들을 위한 탈춤 한마당을 보이기 위해 탈과 의상 등 공연채비를 하고나서 몽골 역사박물관 한 곳만 들르기로 하였다. 몽골 역사박물관의 춤관련 자료 몽골역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Mongolian History)은 몽골역사와 음악, 종교 자료와 문화재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전시물이 상당수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몽골역사에서 빼놓은 수 없는 칭기즈칸의 발자취와 유목민족의 민속문화를 재음미하는 시간이었다. 송파산대놀이 2차 시연과 유적지 관람 점심을 마치고 체육공원으로 갔을 때 기온은 그리 높지 않으나 가을햇살이 따가웠다. 공원에는 중등학생들이 집단체육활동을 하고 있다가 원으로 둘러앉았다. 송파산대놀이 중 상좌 옴중마당과 취발이 마당을 공연하고 아쉽지만 다음일정들이 기다리고 있어 마쳤다. 공연을 마친 일행은 시내에서 그리 멀지않은 변두리 언덕에 자리 잡은 자이승 전승기념탑에 올랐다. 자이승 승전탑(Зайсан, Zaisan Memorial)은 몽골의 러시아와 연합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고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에 세워졌다. 자이승 승전기념탑은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울란바토르 시내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도 하고 있다. 이어서 자이승 승전탑에서 내려다보이는 근처의 이태준열사(1883~1921) 기념관에 들렀다. 대암(大岩) 이태준 선생은 몽골의 슈바이처이자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11년 세브란스병원(제중원) 의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를 졸업하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4년 몽골로 활동 무대를 옮긴 후 의사로 활동하며 몽골의 마지막 황제 보그드 한(Богд хаан) 8세의 어의가 되어 ‘에르데닌 오치르’(당시 몽골 최고 등급의 훈장)라는 높은 등급의 훈장을 받았다. 울란바토르가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교통의 요지인 탓에 그의 숙소는 독립운동가들의 은둔지였다. 몽골 정부는 2000여 평의 기념공원을 세워 독립운동가이자 의학인으로서 그의 공적을 기렸다. 뜻하지 않게 몽골에서 찾아본 이태준지사의 기념공원과 기념관을 둘러보고 의사이며 애국지사로서의 특별한 삶에 대해 민족의 자긍심을 느끼게 하였다. 이제 몽골대초원 체험을 위해 시내를 뒤로하고 벌판을 한없이 달렸다. 시내를 벗어나도 집들과 게르(ger)가 드문드문 눈에 띠었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 소, 말들로 지루한 줄은 몰랐다. 저 멀리 엄청나게 큰 말 탄 장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번쩍이는 스텐리스 철재 동상은 말 탄 칭기즈칸 동상이었으며 드넓은 대륙을 향해 진군하는 아우라를 느끼게 하였다. 가까이 가보니 내부에 몽골문화와 칭기즈칸기념관이었고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올라간 외부 전망대는 놀랍게도 유라시아대륙을 호령하던 칭기즈칸이 타고 있는 말의 갈기 부분이었고 대평원을 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 전통민속극장의 전통예술 공연 일행들이 탄 버스는 부지런히 달려 다시 울란바토로로 되돌아왔다. 마지막 일정인 몽골민속공연장을 찾았다. 몽골기행 둘째 날 관람은 국립대극장이었지만 마지막 날 관람은 작은 홀 무대였다. 작은 극장이지만 관객은 초만원으로 통로까지 꽉 차게 외국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겨우 비집고 맨 뒤 벽면에 맞닿은 좁은 공간에 캠코더를 설치하여 공연촬영을 하였다. 공연내용은 대극장에서 본 것과 대동소이하고 무대천장도 낮고 무대와 객석의 구분도 불분명하고 환풍도 잘 안되어 답답했지만 바로 눈앞에서 생동감을 느끼며 감상한 걸로 위안을 삼았다. 15년 전에 봤던 극장과 별반 다른 점이 없는 홀(hall)공연이었고 몽골시립예술단의 몽골전통춤과 음악 역시 목록도 거의 일치하는 목록이었다. 몽골의 전통 민속춤 비옐게(biyelgee) 몽골의 전통 민속춤 비옐게(biyelgee)는 몽골의 전통적인 이동주택 겔(Ger)과 유목민의 생활 방식으로부터 유래했다. 특히 몽골의 서부지역 여러 부족민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비옐게는 몽골의 민족춤의 원형으로 유목민의 생활 방식에서 유래하여 그 생활을 표현한 민간예술이다. 비옐게는 보통 게르(ger, 이동식 천막집) 안의 난로 앞에서 다소 제한된 공간에서 추기 때문에 발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주로 몸의 위쪽 부분만 사용하여 반쯤 앉거나 책상다리를 한 채 춤을 춘다. 손춤과 어깨춤이 주로 움직이며 가사 노동, 풍습, 전통, 여러 부족 집단과 관련 있는 신앙의 특징 등 다양한 몽골의 생활방식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비옐게의 춤꾼은 각 부족과 지역사회의 특징적인 색상으로 아름다운 무늬와 자수, 뜨개질, 퀼트, 가죽 공예 등으로 장식한 의상과 장신구, 금은보석으로 치장한다. 이 춤은 잔치·축하행사·결혼식·단체노동 등과 같은 가정 및 부족사회의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부족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가족의 단결과 몽골의 다양한 부족 사이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켜왔다.비옐게는 몇몇 자발적인 예술가들의 노력으로 춤맥을 잇고 있어 2009년 긴급 보호가 필요한 UNESCO의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몽골의 라마불교의식춤 ‘참(Tsam)’ ‘참(Tsam)’은 종교적인 예식과 풍습을 표현하는 종합예술로 인도에서 발생하여 ‘티벳 참’으로 발전하여 거쳐 8세기에 처음으로 몽골로 전해졌고 몽골의 불교와 무속 신앙적인 것이 합쳐져서 전통예술로 승화된 것이 ‘몽골 참’이다. ‘참’은 티베트 언어로 ‘춤’, 혹은 ‘움직임’이라는 뜻으로 원래 사원에서 선택받은 어린 승려가 구경꾼 없이 비밀리에 추는 춤을 말한다. 한국어 ‘춤(dance)’과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점이다. 몽골의 참(Tsam)은 악마의 영혼을 몰아내기 위한 춤으로 전통적인 유목생활과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참은 지방의 특징, 풍습, 생활양식이 반영되어 사원마다 특별 제작된 춤을 추며 복장양식, 색깔, 장식 등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가면은 신체에 비해 크고 악마와 동물 및 인간 등 다양한 모습을 띠고 2백여 종이었다고 한다. 조류·동물류(動物類)· 노인류(老人類)· 불상류(佛像類)· 마왕류(魔王類)· 티베트인류 등 여섯 종류로 나뉜다. 조류가면은 매나 기러기와 같은 것이고, 동물가면은 사자 ·호랑이 ·말 ·소·사슴(암컷과 수컷) 등이다. 노인가면은 백노인과 검은 노인의 두 가지가 있고, 불상가면은 황금색이고. 마왕가면은 빨간 마왕과 검은 마왕 두 가지가 있다.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는 배역은 티베트인의 흑모자춤이다. 또한 가면은 노인과 티베트인역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가면에 이마의 눈까지 세 개가 달려있다. 이마에 달린 눈은 사람의 마음을 내다본다는 것이고. 두 눈은 세상을 내다본다는 것이다. 울란바토르에서 본 참의 춤은 백노인춤, 불상과 마왕춤, 사슴과 소춤, 티베트인의 흑모자(黑帽)춤으로 토지의 악령을 진혼시키는 춤으로 주역에 해당된다. 의상은 선명한 빨강, 노랑, 흰색, 푸른색 등의 원색과 수를 놓은 갖은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다. 참 가면의 특징과 역할을 살펴보면, 백노인(라이항 첼엥, Laikhan Tseren)은 신선으로 인간과 동물에게 삶의 지혜와 방법을 가르쳐 주며 웃는 표정은 행복과 행운을, 화난 표정은 불운과 불행을 나타낸다. 담딩처이저(牛神, Damdinchoijoo)는 인간의 인과응보를 주관하며 열 가지 선과 열 가지 죄를 구별하는 염라대왕으로 손에는 해골과 단검을 들고 있다. 잠스랑(Jamsran)은 불과 전쟁신으로 신을 보호하고 가정과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는 신이다. 남스래(Namsrai)는 가정과 국가의 부를 가져오는 천신으로 노란색 옷을 입고, 손에는 쥐를 갖고 있다. 샤낙(Shanaga)는 검은 옷과 모자를 착용하며 21가지로 변모하며 나쁜 방향의 악마를 막아준다. 마히는 인도 전설속의 천신으로 소머리에 느린 동작을 가진 파란색 신이다. 샤와는 인도 전설속의 천신으로 사슴머리에 빠른 동작을 가진 신이다. 마히와 샤와는 좋은 쪽의 하늘신이다. 호히모이(Хохимой Hohimoy)는 해골탈춤이다. 나담축제와 씨름춤 나담(naadam)은 해마다 7월 11일~7월 13일까지 몽골 전역에 걸쳐 즐기는 전국적인 축제로, 씨름(부흐, Bukh)· 말타기(모리니 우랄단, Morinii Uraldaan)· 활쏘기(소르 하르와, Sur Harvaa) 등 3가지의 전통 경기가 주를 이룬다. 몽골의 나담은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초원에서 오랫동안 유목 생활을 해온 몽골의 유목 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나담 축제 기간에는 구비문학·공연 예술·민족 음식·공예, 그리고 우르틴 두(長歌), 후미(Khöömei, ‘회메이’라고도 함) 창법, 비-비옐게(bie biyelgee)춤, 현악기 모린후르(morin khuur, 馬頭琴) 연주 등 여러 가지 문화 형식이 모두 선보인다.씨름춤은 나담축제에서 씨름할 때 흔히 추는 데 씨름꾼들에게 무사적인 정신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의식적 성격으로 양팔을 벌려들고 추는 춤이다. 이 춤은 씨름꾼이 씨름을 시작하기 전에 집단적으로 추면서 승리를 장담하며 독수리처럼 용맹함을 보여주며 씨름에서 이긴 자는 양팔을 들고 독수리 날개춤을 추며 승리의 기쁨으로 춘다. 기타 여러 가지 민속춤 몽골 브리야트족이 주로 추는 요허르춤(Yookhor)은 한국의 강강술래와 같이 손을 잡고 원을 돌아가며 춘다. 또한 하얀 천이나 파란 천에 우유 은잔은 중요한 손님맞이의 접대풍습이 있어 술잔과 접시춤이 연행되고 있으며 하얀 또는 파란 천춤도 춤공연 처음에 환영의식으로 춘다. 그밖에도 무릎 꿇고 누워 추는 허텅 비옐게(Khoton bielgee)나 서있는 사람의 몸통을 두 다리로 감싸고 뒤로 젖혀 추는 아츠 비엘게(Ats bielgee) 2인무와 마상곡예춤도 기마민족다운 특색있는 민속춤이다. 몽골춤기행을 마치면서 『몽골비사』의 기록을 보면 ‘몽골인들의 행복은 춤이다’라고 할 만큼 몽골인들은 전통악기와 노래를 들으면 남녀노소 모두 춤을 춘다. 이는 2천 년 전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서 고구려 동맹, 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 마한의 소도제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는 한국인 조상들의 춤문화적 속성과 전통이 맞닿아 있다. 몽골 민속춤의 주된 동작은 다리, 앉은 자세, 팔과 어깨와 머리, 가슴과 견갑골까지 다양한 부위까지 연결해서 춤을 추기 때문에 모든 신체부위를 활용하는 춤이라고 말한다. 춤사위법은 민족이나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전승지역이 워낙 넓고 이동생활이어서 대체로 서몽골, 중앙부, 동몽골 지역춤으로 분류한다. 물론 중동부지역 민속춤에 지금까지 밝힌 대부분의 민속춤들이 해당되지만 서몽골은 카자흐족 민속춤과 관련성이 있으며, 북부 브리야트족의 원무 요허르춤(Yookhor), 게르 집안에서 추는 민속춤인 비-비엘게춤 등이 발달되었다. 이상의 몽골민속춤의 생성배경이 되는 중요한 요인은 전통가옥 게르(ger)와 목축의 삶이다. 게르의 삶속에서 세대를 거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장 널리 추어온 비-비엘게(bie biyelgee)는 대표 몽골민족춤이며 공동체춤으로 세부적으로 많은 춤사위가 있다. 끝없는 하늘을 상징하는 파란 천과 거룩한 의미의 우유 잔을 함께 들어 손님맞이하는 것은 정성을 다하는 몽골인들의 환영인사를 뜻하며 우유를 받아 마시는 손님은 몽골인의 정성어린 마음을 받아주는 의미이다.
-
(24) 몽골의 전통 가무악<1>대초원 호령하던 몽골 기마민족의 전통문화와 춤 2017년 9월 16일 몽골 국제울란바토르대학 초청으로 한국어 전공학생들을 위한 전통문화 특강과 공연차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몽골 여행은 이번이 두 번째로 2002년 용인대 재직시절 대학원생들과 문화탐사를 다녀온 지 15년이 흘렀기에 자못 궁금한 것이 많았었다. 과거 공항에 도착했을 때 초라한 몽골수도의 현주소를 보고 놀랐다. 세계사에서 가장 넓은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고 동서양 교류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칭기즈칸의 제국을 생각할 때 총인구도 200만 남짓(현재는 300만명)하였고 울란바토르 도시 규모도 60만 정도(현재는150만)로 기억되는데다가 몽골의 전통가옥 게르가 도시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고층빌딩은 별로 구경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발전과 변모된 모습이 궁금하였다. 그런데 밤늦게 공항에 도착하여 시내로 가는 길목의 조명들이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국제 울란바토르대학교 초청 ‘한국의 탈춤’ 특강 및 시연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는 빌딩도 많아졌고 시내 도로도 정비가 잘 되어있었다. 맨 먼저 찾아간 곳은 칭기즈칸(과거에는 수흐바타르 광장, Sukhbtaar)광장이었다. 담딘 수흐바타르(Дамдины Сүхбаатар)는 몽골에 세운 러시아 백군의 괴뢰정부를 1921년에 격파하고 조국을 해방시킨 개국공신으로 독립영웅으로 받들고 있어 울란바토르 중심 광장에 수흐바타르의 동상이 서 있다. 점심을 한식당에서 마친 후에 국제울란바토르대학교로 찾아갔다. 대외협력처장이 일행을 맞이하여 총장접견실에서 총장이 음료와 다과대접을 해주었다.한국인이 설립한 국제울란바토르대학교는 1995년에 한국인이 몽골에 세운 대학으로 350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한국어과인 단과대학으로 시작되어 지금은 사립 대학교 중 상위권을 유지하며 몽골의 명문대학교로 칭해지고 있다. 학교가 발전한 배경에는 많은 이유가 존재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몽골의 다른 대학교에서 시작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선진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점이라 들었다. 그 중 하나가 한국의 대학에서는 흔한 ‘동아리’ 시스템인데 동아리 활동은 학생들 간의 협동, 학문 이외의 분야에서의 발전을 도우며 오늘날 국제 울란바토르대학교가 명문대학이 된 배경에 기여했다고 한다. 5층 강당으로 올라가니 한국어과 학생 100여명이 일행을 맞이하였다. 대외협력처장의 간단한 소개에 이어 ppt를 준비하여 ‘탈과 탈춤’ 특강을 하였는데 몽골인 교직원이 통역을 아주 잘 해주어서 막힘없이 강의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이어서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 탈춤시연으로 취발이마당을 필자가 취발이 배역을 하였고, 샌님 미얄 포두부장마당을 보여주었다. 탈춤 워크샵으로 기본춤 따라 배우기를 한 다음 기념촬영으로 끝맺음을 하였다. 몽골 국립 아카데미 드라마극장에서 펼치는 몽골 전통가무악 한마당 공식일정인 특강과 시연을 마친 송파산대놀이보존회 회원들의 다음 일정은 몽골 민속공연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식 건물 기둥마다 현수막이 걸려 있는 멋진 분홍색과 흰색으로 채색한 아담한 건물이 국립 아카데미 드라마 극장(National Academic Drama Theatre)임을 알 수 있었다. 촬영 허가를 받는데 미화 50달러를 요구하여 잠시 망설이다가 아쉽지만 지불하고 입장하니 앞자리는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2층 앞 가운데에 비디오 촬영기를 설치하였다. 2002년에 몽골을 방문을 했을 때는 통로까지 꽉 차 숨 막히던 열악한 소극장무대였지만 몽골 전통춤과 음악 공연이 끝난 다음 우리 일행들이 예술단장과 단원들에게 저녁식사까지 대접해주며 격려했던 일이 생각나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기대에 부풀었다. '황제 황후의 궁중춤' 군무 막이 올라가고 첫 무대는 세계를 제패한 칭기즈칸의 후예들로 장군복을 입은 장수들과 황후귀족들만이 쓰는 높은 모자 복타크(boqtaq)와 긴 치마복색을 한 귀족여인들의 합동군무로 장엄한 춤판을 열었다. 하수 쪽에서 장군들이 열을 지어 등장하고 상수 쪽에서 귀족여인들이 점잖게 등장하여 시종 느리고 위엄 있는 궁중춤으로 서막을 장식했는데 몽골 여러 부족이 힘을 합쳐 통일된 몽골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두금(Morin Khuur)과 후미(Khoomi) 연주 이어서 전통악기 ‘마두금(馬頭琴, 모린 후르, Morin Khuur)’과 피리 연주에 여성 2인조 ‘허미(Khoomi)’소리로 청량하면서도 대초원의 해맑은 바람소리 같은 몽골전통성악을 들려주었다. 마두금과 연주는 유네스코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세계무형유산)'으로 2008년 선정되어 전승하고 있다. 몽골 사람들의 일상에서 친숙하게 찾아볼 수 있고, 애잔하면서도 서정적이고 때로는 웅장하기까지 한 음색은 몽골 고유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듣는 이에 따라 몽골의 초원에서 부는 바람 소리, 야생마가 우는 소리, 말발굽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여 '초원의 바이올린'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2008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후미(Khoomi)는 배에서 나오는 소리와 두성에서 나오는 소리를 한꺼번에 한 사람이 내는 몽골전통 창법이다. 광활한 자연이 들어있는 노래로 바람소리, 동물소리, 강물 흐르는 소리가 들어있으며, 한 음으로 들리지 않고 두 개 이상의 음이 배와 목을 통해 동시에 발성되는 것이 특징이다. 몽골청년들의 춤 마두금 반주음악에 젊은 몽골남자들의 일상생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창작춤이었다. 핀 조명이 들어오자 가운데 몽골주택 게르(ger, 중국은 파오(包), 중앙아시아는 yurt) 형상처럼 뭉쳐있는 남자들의 모습을 비추었다가 점점 조명이 퍼지며 한사람씩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하루일과를 준비하는 장정들의 삶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점점 음악이 빨라지면 움직임도 빨라지며 말을 타고 평원을 누비는 몽골남자들이 강인한 투지와 적응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몸집 좋은 젊은 남자 무용수들로 구성된 장정들의 활기찬 전통춤은 대단히 빠르고 역동적인 발놀림은 힘이 가득 찬 기마민족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어깨의 율동을 많이 이용하는 몽골 남자들의 춤사위가 우리나라의 어깨춤의 발상지임을 증명하듯이 비슷한 점도 발견하였다. 전통악기 합주와 후미(Khoomi) 이어서 8명이 연주하는 전통악기들의 합주와 남녀 혼성 후미(Khoomi)를 들려주었다. 몽골과 부랴트족의 전통악기인 모린후르(마두금, Morin khuur), 가야금과 비슷한 야트가(yatga), 해금과 같은 2현의 후치르(khuuchir), 월금(月琴)과 같은 3현의 샨즈(shanz, Chanza), 양금과 비슷한 여친(yoochin), 호른(horn)같은 에버부레(ever buree)와 플루트 등의 악기 연주와 반주로 진행하였다. 특히 마두금은 흉노 시대에 한 남자가 자기를 구해준 말을 그리워하면서 처음 만든 악기로 당시 나무로 말머리를 만들고 말 꼬리털로 두 줄을 만들어 연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마두금 반주로 전통 복장의 몽골 여자 가수가 부르는 민요는 몽골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었다. 마두금이 연주되고 몽골의 여인들이 몽골 초원의 노래를 부르는데 마치 몽골의 한 초원 안으로 초대받은 듯한 신비감을 느꼈다. 몽골의 서쪽, 알타이(Altay) 지방에서 시작된 이 몽골 특유의 후미의 소리는 초원에서 불어오는 맑고 청아한 바람소리처럼 시원하게 오다가도 갑자기 사람들을 초집중하게 하는 찢어질 듯한 고음으로 공연장을 채웠다. 대지를 울리는 듯한 저음과 푸른 하늘에 닿을 듯한 맑은 고음이 동시에 발성되는 '후미'는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마치 악기 소리처럼 들리는 고음과 저음의 소리를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하거나 또는 동시에 발성법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독특한 발성법으로 인해 모린후르(마두금, Morin khuur)와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에까지 등록되었다. 사발춤(Ayagatai bujig) 여성무용수들이 여러 개의 마유주잔이나 사발을 포개어 들고 천천히 양옆에서 등장하여 무대 앞에 잔을 내려놓고 몽골 전통춤사위를 보여주고 다시 각자의 술잔을 들어 객석을 행해 환영과 행운을 비는 덕담소리를 하였다. 마치 한국에서 궁중정재를 추다가 멈추어 창사(唱詞)로 왕업을 칭송하는 소리를 하는 것과 같이 환영소리를 한 다음 술잔을 머리에 얹고 묘기춤처럼 추었다. 불교의례춤 참(Tsam) 참(Tsam)은 모든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과 인간의 소원을 부처님께 기원하는 뜻으로 추는 의식무용이다. 먼저 백노인이 산신령처럼 하얀 수염에 대머리 큰 가면을 쓰고 하수 앞쪽에서 지팡이와 염주를 들고 등장하여 무대 중앙에서 이리저리 살피며 느리게 걷다가 무릎들기를 하며 반복적으로 돌다가 상수 뒤쪽으로 가서 뒷막을 지팡이로 건드리자 뒷막이 올랐다. 여러 마왕과 동물탈을 쓴 참 배역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곡예춤 몽골의 곡예는 특히 마상곡예와 인체곡예가 유명하지만 극장이어서 마상곡예는 한계가 있어 공연을 할 수 없었고, 연체동물처럼 유연성을 극대화한 2인 곡예춤을 보여주었다. 몽골의 동쪽지역에 사는 부족의 어린 소녀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곡예로 인체관절의 가동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묘기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관현악과 후미의 대합주 마지막 공연으로 몽골 전통악기로 이루어진 전통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대합주가 시작되었다. 대합주에는 지휘자가 등장하여 서양식 오케스트라 연주방식으로 칭기즈칸이 출전 당시에 연주하게 했던 대마두금과 서양타악기까지 등장하여 후미를 부르며 몽골인들의 삶의 애환과 행복을 전하는 연주를 하였다. 13세기에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전래된 우리나라 가야금인 야트가(yatga)도 대합주에서 대표 악기로 연주되고 있었다. 현재는 몽골악기 야트가로 연주하고 있지만 2002년 몽골에 왔을 때는 우리의 가야금을 그대로 수입하여 연주하고 있어서 우리일행 중의 가야금 연주자가 뒤풀이에서 한국가야금 연주법대로 연주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이 몽골 민속 관현악단은 주로 독주곡을 연주하는 많은 현악기가 모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어렵다고 하나 각 현악기들이 특색 있게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관현악단 수준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었다. 몽골국립 아카데미 드라마 극장과 예술단은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극장 각 분야 예술단이 연합한 전통예술공연에 해당하는 것으로 웅장한 대극장 규모는 아니지만 깔끔한 중극장 무대였고 몽골예술의 현주소를 한눈에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예술무대였다. 90분 동안 몽골의 다양한 전통문화를 무대예술로 승화시켜 악가무희(樂歌舞戱) 일체감을 형성한 점도 뛰어났다. 다만 전통문화를 예술로 재탄생시킨 점은 뛰어났지만 외국인들을 위한 관광형식의 무대로서는 전통성을 살리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을 창작적으로 너무 꾸민 점과 마지막 관현악 협주가 30분을 넘게 차지하는 비중으로 관중들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한 점이 아쉬움이었다. 그래도 매일 저녁 6시 공연으로 외국 관광객들에게 몽골의 공연예술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 점과 객석을 가득 채운 극장분위기도 한 몫을 하면서 품격있는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
(23)자연풍토적 배경과 지역춤
-
(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
(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
(20) 최선의 산수(傘壽)기념 창작춤 〈맥의 터〉전통과 창작 아우른 노장의 춤 한마당 7월 5일 밤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문화예술인들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원로들과 젊은이들까지 한여름 밤의 객석은 만원을 이루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최선 예능보유자의 산수(傘壽, 80세)를 기념하기 위해 제자들이 마련한 춤판은 전통춤판이 아니라 뜻밖의 창작춤 무대였다. 더구나 호남살풀이춤보존회(회장 장인숙) 회원들이 주최·주관한 공연이어서 당연히 제자들이 모든 스태프로 참여하는 스승에게 바치는 봉무(奉舞)무대 임에도 대본, 안무, 구성, 총감독이 80세를 넘긴 최선이어서, 처음엔 당사자의 욕심인가하고 의아 했었다. 작품내용은 어린 시절 춤에 입문하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평생 춤만 추며 살아온 소재를 모티브로 만든 최선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러다 보니 대본과 안무, 총감독까지 하면서 ‘전북 춤맥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맥의 터’라는 제목까지 본인이 붙인 배경을 납득할 수 있었다. 최선은 3막으로 구성된 작품에 무려 6번에 걸쳐 출연하면서 전통춤과 창작춤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주역 무용수로서의 역할을 소화해냈다. 몸놀림이 젊은이들 못지않았고 감정표현력, 연기력과 무대 장악력까지 뛰어나 관객을 압도하면서 마지막 장에서는 객석 여기저기서 손수건을 적시며 흐느끼는 소리마저 간간이 들려왔다. 막이 오르고 최선의 춤인생 영상에 이어 첫 등장은 의외로 어린 아이(김찬우)가 한복 입은 어머니(김정자) 손에 이끌려 천천히 걸어 나와 무대 앞을 가로질러 허튼춤으로 한 바퀴 돌아 인계하듯이 인사하고 퇴장하는 장면이었다. 1943년 8살 때 춤추고 멋내기를 좋아하던 아들(최선)을 데리고 전라북도 전주에 최초로 현대무용과 발레를 도입한 무용가 김미화(일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와 최승희 제자)의 연구소를 찾아가는 최선 어머니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예견하는 극적인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어 호남살풀이춤과 함께 지정된 동초수건춤을 최지원과 이수자들이 군무로 선보였다. 이 춤은 해방 후 전동성당 옆에서 전동권번에서 이추월로 부터 전수받은 전통춤이다. 이추월의 조선춤들이 오늘날 전북 특히 전주지역에 최선과 뒤를 이어 기방계 전통춤의 춤맥을 잇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장으로 구성된 2막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싹 티우고 꽃피워 열매 맺어 뿌리내린 민족의 한과 혼의 결정체인 전통춤의 정립과 전승과정을 그렸다. 1장은 ‘연가(戀歌)’와 부채입춤, 2장은 어린 시절의 아동춤과 엿장수의 가위춤, 3장은 대감놀이 무당춤과 무당군무, 4장은 특별한 창작무대로 깃발춤, 장대춤, 가면춤의 8인 군무에 이어 남성 4인의 한국창작춤과 최선의 합동춤이었다. 1장 연가는 최선이 1960년 초 개인발표회에서 처음 무대에 올렸던 작품으로 성춘향과 이도령의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춤으로 당시 소녀 김광숙과 이길주와 함께 추던 춤이었다. 이번 무대에서는 최선과 장인숙의 듀엣으로 연가를 추었는데 최선의 노익장(老益壯)이 아닌 젊은 청춘남녀의 애틋한 분위기를 여전히 느끼게 하였다. 2장은 천진난만한 아동 유희와 엿장수와의 합동춤으로 최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게 하였다. 3장 대감놀이 무당춤도 최선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다. 홍철릭(紅天翼)에 홍빗갓을 쓰고 오방기를 든 주무당 최선의 청신무 이어 조무들의 방울·부채춤 2인무와 최선의 재등장으로 3인무로 펼쳐진 도약과 회전의 접신무는 강렬한 강신의식을 보는 듯했다. 4장은 6.25 한국전쟁의 영상으로 전쟁과 폐허, 피난과 굶주림으로 처참했던 당시에도 불굴의 정신으로 최선이 춤으로 살아남는 강인한 예술세계를 보여주었다. 남성들만 출연하는 이스트기네스 비보이단의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깃발, 장대, 가면을 이용한 역동적인 몸짓으로 당시 남북의 이념 갈등구조 속에서 극대극의 사회상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최선은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직 춤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군무 속에서 독무로 오버랩(overlap)하며 고뇌에 찬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남성무용단이 펼치는 4인 창작군무 다음에 최선의 독무가 이어졌다. 중년기의 애환과 한을 극복하고 외길 춤 인생의 여정을 표현하는, 대각선 외줄 조명을 따라 긴 천을 즈려밟고 지나갔다 다시 나와 몸부림치다 등지고 뒷막을 향해 한손을 쳐들고 비척거리면서도 한걸음 또 한걸음 나아가는 장면은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제3막은 1장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한 영상아래 꽃길 따라 긴 수건춤, 어둠 속의 쌍등춤과 외등춤, 2장에 무대중앙에 높은 사각단 위의 백발노인(최선)의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춤, 단아래의 수건춤 3인무, 남성4인무, 수건 든 비보잉(B-boying) 군무에 이어 다시 등단한 백발노인과 단아래 제자들과 함께 호남살풀이춤 군무로 마무리하였다. 하얀 수염과 상투머리, 도포를 입은 노인이 호리병을 들고 앉아서 술을 마시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고뇌에 찬 신로심불로춤은 80세를 넘긴 회한의 춤이지만, 수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조선춤의 숨결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가는 신선(神仙)의 춤을 표현한 것이다. 이어 8명의 비보이들이 개량한복에 수건을 들고 추는 군무가 선보였다. 처음에 서서 추는 톱록(toprock), 바닥에서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주로 발을 움직이는 다운록(downrock)과 다리를 벌린 채 어깨와 등을 이용해 회전하는 윈드밀(windmill), 짧은 시간차를 두고 상체와 하체를 번갈아 가며 움직이는 스와이프(swipe)와 몸을 잠시 정지하는 프리즈(freezes) 등으로 색다른 볼거리를 선사했다. 마지막으로 사각현의 단 위에 오른 백발노인 최선(崔善)은 그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보유자이기에 이수자들과 함께 호남살풀이춤을 보여주면서 무선(舞仙)같은 면모를 한껏 발휘했다. <곰삭고 가라앉히는 전통춤과 확산하고 뜨는 창작춤과는 성격이 달라 병행하기 쉽지 않는데 이번 공연은 창작춤의 면모와 감정표현과 연기력도 발휘하여 전통춤만 추는 편견을 불식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80이 넘은 나이에도 무대를 주름잡고 6번씩이나 출연하여 주역 무용수로서 청년 같은 정신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무대였다. 옥에 티라면 두 가지 등춤이 유사하여 어둠 속에 신비감도 주었지만 10분 남짓 길게 추다 보니 지루했고, 창작무대라 하지만 순수 창작품이라기보다는 전통과 창작의 퓨전으로 전통춤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산수기념 무대는 몇 가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단순히 개인무대라기보다 전북 전통춤계의 면면을 보여주는 자리였고, 그가 전북 무형문화재춤의 대가임을 확인시켜주는 무대였으며, 가장 오랜 세월 전북춤을 지켜온 지킴이임을 증명하는 공연이었다. 최선의 업적이라면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고(원광대 이길주, 광주대 허순선, 충남대 정은혜, 영남대 김희숙 등)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인간문화재를 배출시킨 점이다. 현재 전북에서 김광숙(예기무), 이길주(호남산조춤), 문정근(전라삼현승무), 서울에서 고선아(한량무), 이북오도에서 김나현(화관무) 등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그의 제자들이다. 이매방류 승무의 명인 채상묵도 어린 시절부터 춤이 바탕을 지도받은 수제자이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국악진흥법', 어떻게 시행되나?’(1)
- 2전인평의 ‘새로 보는 한국음악사’
- 3경성 모던걸들의 춤판 '모던정동'…"자유 갈망하는 모습 담아"
- 4도자의 여로 (143) <BR> 백자철화편병편과 수물(受物)편
- 5'스물다섯살 청춘이 되다' 음성품바축제 22∼26일
- 6'2024 젊은안무자창작공연' 최우수상에 박세진
- 7국립국악원 창작악단 기획공연, '긴 산조 협주곡'
- 8국립국악원 제38회 창작국악동요공모전<br> 대상에 작곡가 김여진씨의 ‘엇엇엇! 엇모리!’
- 9비는 오지만 신나는 '어린이날'
- 10로마에서, ‘2024-2025 상호문화교류의 해’ MOU. 국악 등 K컬처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