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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제14장 작사 배경, 한영서원 입학생을 위해국가(國歌) 애국가는 동·서·남해의 바다와 백두대간을 ‘무궁화 삼천리 우리나라’로 규정하고 충성을 다하자는 기원으로 시작한다. 가을하늘 밝은 달과 같은 불변의 기상으로 충성을 다 하자자고 맹세한다. 어떤 애국가보다 참신한 가사로 애국심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1907년 작사이니 116년간이나 ‘찬미가’ 10장 등과 길항(拮抗)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과연 이 역사적인 전승을 가능케 한 이 노래의 작사 배경은 무엇일까? 제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제2절 남산 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제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제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 애국가의 원본(原本)은 1908년 출판사 광학서포에서 발행한 1908년 윤치호 역술 재판 ‘찬미가’에 수록된 가사이다. ‘Patriotic Hymn’(애국적 찬미가) 전 4절은 다음과 같다. Patriotic Hymn 뎨十四 Auld Lang Syne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 마 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그런데 이 가사가 실제 작사된 것은 ‘찬미가’에 발표에 앞선 1907년 작사했다는 문건이 존재한다. 이를 주목한 사실이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 1919~1985/1949년 월북)의 1948년 10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이다. "故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박은용의 이 주장 근거는 바로 1945년 9월 윤치호가 작고 직전에 가족의 요청으로 남긴 ‘자필 가사지(自筆 歌詞紙)’의 확인이다. 이에 따르면 4절 가사와 그 끝에 "一九0七年 尹致昊 作”이라고 기록하였다.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룬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을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야 괴로우나 질거우나 나라사랑 하세 윤치호의 막내 딸 문희가 "개성 부친을 방문하여 기념으로 ‘찬미가’를 옆에 높고 달라진 부분은 고쳐 직접 쓴 것”이다. 1945년에 썼지만 작사 년대는 1907년임으로 ‘作’이라 하였다. 서법상 "一九0七年 尹致昊 書”로 썼다면 위작이지만 옳은 표기이다. 이로서 ‘찬미가’에는 번역 찬송가 12편과 자신이 작사한 3편을 포함하여 일부 譯(번역)과 일부 述(지음)이란 의미로 ‘譯述’이라 했지만, 이 가사지에서는 제14장의 가사 4절만을 기록하여 ‘作’(작사)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또한 가사지의 철자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미 1908년 재판 ‘찬미가’에도 동일하게 썼음으로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윤치호는 이미 한글 철자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즉, 1896년 1월호 「Korean Repository」에 필명 T. H. Y로 ‘점 찍기’와 ‘띄어쓰기’를 주장했고, 최근 필자가 확인 한 독립신문 1897년 5월 27일자는 ‘아래 아자’ 폐지를 주장한 기록에 확인이 되기도 했다. 이상에서 확인하였듯이 찬미가 제14장 현 애국가는 윤치호가 작사하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제 윤치호가 어떤 배경에서 작사했는지를 살피기로 한다. 앞서 제시한 1907년 전후의 윤치호 상황을 전제로 정리하기로 한다. "내가 모은 돈 200달러를 당신께 보내오니 이 돈을 기초로 삼아서 조선에도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내가 받은 교육과 같은 교육을 우리 동포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만일 내가 상해로 가서 속히 조선으로 들어가면 내가 학교를 세우도록 할 것이요. 만일 나보다 먼저 조선에 가는 이가 있거든 그에게 부탁하여 학교를 세우게 하여 주되 5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하게 되거든 이 돈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습니다.” 이 간절한 요청은 윤치호가 1893년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을 졸업하고 상해 모교 ‘중서서원’ 교수로 떠나면서 캔들러 교수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이미 이 시기에 학교설립을 계획했음을 알게 하는데, 어려운 유학 여건에서 모은 200달러를 학교 설립 기금으로 내고 캔들러 학장의 협조를 청한 것이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교육을 위한 이 계획이 당신의 뜻이라면 오! 하나님이시여. 어떤 것도 이 계획이 성공을 방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응답으로부터 13년만인 1906년 초, 캔들러 학장은 남부 감리교 감독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이 때 윤치호와의 약속을 실천하게 되었다. 결국 윤치호의 염원이 미국 남부 감리교 계열 미션 스쿨의 지원으로 ‘한영서원’(韓英書院, Anglo-Korean School)의 개교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당연히 초대교장은 윤치호가 맡게 되고, 첫 해 14명의 학생을 맞아 개교하였다. 미국 밴더빌트 대학 교가(校歌) 곡조에 윤치호가 작사한 "하나님을 공경하고 동포사랑은···”로 시작하는 교가를 준비하고, 이상춘과 김동성(金東成) 등의 교사와 함께 개교 하였다. 개성 송악산 산지현에 초가지붕을 얹은 뜸집(띠나 따위로 지붕을 이어 간단하게 지은 집)의 학교 개교식은 10월 3일 개최했다. 한영서원 학칙에 의하면, 한영서원은 인문교육 및 실업교육을 하는 곳으로 학과는 소학과 4년, 영어전수과 2년, 고등과 3년, 반공과(半工科) 3년 등의 과정이 있었다. 소학과에서는 수신, 국어, 한문, 역사, 일어, 산술, 이과, 도화, 창가, 체조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고, 고등과에서는 도덕, 국어, 한문, 역사, 일어, 수학, 영어, 음악, 체조, 지리, 도화, 작문, 과학을 가르쳤다. 반공과는 고등과에다 실업과목을 더해서 가르쳤고, 일주 27시간의 수업을 하였다. 학생은 15세 이상의 남자로 신체건강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보통 국한문에 통달한 자로 하였다. 이 학교는 특이하게도 지원, 즉 분교도 운영하였다. ‘한영지서원(韓英支書院)’인데, 경기도 포천에 두고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본교와 같이 실업 교육 중시, 근로정신 고취, 노동 천시 폐습 타파 등을 통해 청년들의 경제적 자립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설립 목적이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하였음으로, 포천 지역의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사용 금지령을 내렸던 ‘초등본국역사’를 교육하는 한편 ‘영웅의 모범’이라는 애국창가집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런 교육목표와 실제 수업은 1910년 이후 총독부의 감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개교식 당시는 입학생이 14명이었으나, 1908년에는 225명으로 확대되었다. 이 해에 9월에는 대지 120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웅장한 현대식 석조 건물로 교사를 신축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런 학교의 확대를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1911년 초대교장 윤치호를 105인 사건으로 투옥시키고 교장을 교체시켰다. 1913년 2월 10일 크램(W.G. Cram)으로, 3대 교장으로 1914년 9월 1일 왓슨(A.W. Wasson)을 취임시켰다. 윤치호의 활동상을 최대한 압박한 것이다. "윤치호는 고(故) 남작 윤웅렬(尹雄烈)의 장남으로 어려서 도쿄(東京)에 유학가고, 그 후 상해에 가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에 도항(渡航)하여 그곳에서 유학한 지 5년 후 귀국하여 의정부참의(議政府參議),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고 그 다음 외부협판(外部協辦)으로 전임하여 제1차 한일협약(1904) 성립의 결과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개성 한영서원(韓英書院),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등에서 원장 및 교장을 맡고 있으면서, 위의 협약(한일협약, 1904) 체결에 대해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11년 ‘신민회 105인 사건’의 윤치호 판결문의 일부이다. 윤치호의 주요 이력 중에 한영서원 원장과 대성학교 교장 엮임을 주목하였음이 확인 된다. 이런 처지에서 한영서원은 이후에도 일제의 감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로 ‘애국창가 사건’도 적발되었다. "당시 이경중 목사가 동간도에서 수집, 보관하고 있던 창가를 한영서원 교사 신영순, 이상춘이 제공받은 다음,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를 포함하여 2권의 창가집으로 발간했다고 한다. 제1권은 1914년 8월 25일 40부를 인쇄하여 한영서원 및 호수돈여학교 생도에게 발매·반포했고, 이어 제2권은 1915년 9월 90책을 인쇄·반포 하였다.” 1916년에 발생한 ‘애국창가집사건’에 대한 경기도 경무부 보고 ‘불온자 발견처분 건’ 보고서의 일부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개성경찰서 순사가 한영 서원에서 불온창가를 출판, 반포한다는 정보를 입수, 조사한 결과, 1915년 8월 15일 해당 출판물의 일부가 발견되면서 비롯되었다. 국가 흥망성쇠의 열쇠가 곧 국민정신에 있다고 인식하고, 국민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조국을 생각하는 노래, 독립군가, 애국가를 모아 창가집을 만들었다. 내용에는 ‘영웅의 모범’, ‘선죽교’, ‘구주전란’ 등 다양하였으나 그 중에는 일본의 황제나 황가에게 모욕적인 내용을 담은 곡이나 역대 영웅적인 인물의 반일사상을 표현한 곡들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사인 외 6명은 창가의 편찬에 관여한 혐의, 전 교사 유봉은 그 재료를 제공한 혐의, 음악교사와 생도들은 창가를 연주한 행위, 신공량은 타인에게 창가집을 증여하고, 오립아·오연거는 창가집을 호수돈여학교 생도에게 발매·배포한 혐의를 받았다. 신영순·백남혁은 징역 1년 6개월, 정사인·오진세·이경중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한영서원 교사·교직원·졸업생·재학생 등 23명이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애국창가집사건’으로 탄압 받은 첫 사례이다. 그런데 이 중에 핵심 애국창가는 바로 애국가였다. 조서에 언급되었듯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로부터 ‘애국 창가’를 모아 노래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윤치호’, ‘한영서원’, ‘애국가’, ‘창가사건’은 결국 윤치호의 애국가로부터 발단 된 것임을 알게 한다. 이상에서 살핀 바에 의하면 관직을 떠나 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 1905년으로부터 1911년까지의 5년은 결국 한영서원을 설립하고, 대성학교 교장직을 겸하는 과정이 가장 큰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 1907년에 애국가를 작사한 것은 바로 학생들, 구체적으로는 1906년 10월 입학한 한영서원 학생들을 위해 새로운 애국적 찬미가 14장을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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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14장(애국가) 작사 배경으로서의 활동상윤치호는 1898년 이종일·남궁억·사촌 윤치소와 함께 경성신문(京城新問) 창간에 참여했다. 이 후 학무아문참의를 거쳐 1898년 7월 8일 다시 중추원 1등 의관에 임명되었고, 7월 22일 국왕에게 부패 관료들을 축출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황제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획책하려 한다”는 모함을 당했다. 한편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통역을 하면서 기독교 선교를 도와주었다. 또한 부친을 설득하여 적당한 토지를 내어 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 이런 입장임에도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 선교사에게마저 그는 은근히 무시와 모욕을 당하곤 했음에 처음에는 미국인과 영국인,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나중에는 내심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경멸하거나 반감을 품게 되었다. 1899년 1월 외직으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德源府尹) 주임관 1등으로 부임하였다. 중앙 정계에서 윤치호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후 원산감리로 부임한 뒤, 1900년 6월 삼화감리사 겸 삼화부윤, 이듬해 7월에는 다시 함경남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으로, 이어 원산항재판소 판사에 재임명되었다. 처음 덕원 감리라는 외직으로 보낸 것이 조병식 내각이 중앙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임은 독립협회 시대의 정적이던 보부상들을 비밀로 파송하여 동정을 살피게 했다는 사실에서 확인 된다. 주목하는 것은 이 암행 결과인데, 나중에는 암행어사까지 출동시켜 '애민태과 손실정체(愛民太過 損失政體)'라는 죄명으로 봉고파직을 시켰다는 점이다. 이후 1902년 7월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 7월 12일 겸 삼화항재판소판사(三和港裁判所判事)로 발령받았다. 1902년부터는 기독교 남감리회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이 경성부 종로방 고간동에 세운 캐롤라이나 학당의 후견인이 되었다. 1903년(광무 6년) 1월에는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경북도, 간도 일대의 민생을 시찰하였다. 1903년 1월, 함경도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흥에 파견되었고, 7월 천안군수로 부임하였다. 천안군수로 재직 중에는 광산 채굴을 하며 조선인을 함부로 구타하던 백인 사업가를 유창한 영어로 호통을 쳐서 그 횡포를 막아주었다. 1904년(광무 7년) 2월, 전라남도 무안감리(務安監理) 겸 무안군수로 발령받았다가 3월 12일 다시 외무부협판 겸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지방관으로 있는 동안 러·일 양국의 각축을 보면서 인종적 차원에서 일본인들의 '동양평화론'과 일맥상통한 '극동 3국 제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중앙 정계에서 좌절된 민중을 위한 개혁정치의 이상을 지방에서나마 실현시키고자 진력하였다. 그러나 민권사상과 참정권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황제에 대항하려는 역적 집단으로 보는 민중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 3월 내각의 외무부협판에 임명되어 다시 중앙 정계로 불림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보수적인 정치체제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그 이념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유교(성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1904년에는 잠시 군부대신서리를 지내기도 했다. 1904년 3월, 일본의 특파대사 영접단의 단장인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이 되었다. 그해 8월 에는 외무부대신이 공석이 되자 그 서리사무에 겸임되었다. 1904년 김규식, 이상재 등과 함께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해 8월 외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였다. 12월 정부의 관제 개정소 의정관(官制改正所議政官)에 임명되었다. 1905년 2월 재혼한 아내 마수진(馬秀珍, 1871~1905)과 사별하였다. 그해 5월 외무협판에서 외무부대신 박제순의 사퇴로 그 서리를 겸임하였다. 이 시기 서울 전동에 있던 시종무관장 민영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를 환영하는 이색 만찬이 개최되었다. 이 만찬에 큰 기대를 걸고 참석했다. 주빈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이고 배빈이 앨리스양을 수행한 해군대장 트레인과 앨리스 양의 약혼자 커빈 해군 중장이었다. 한국 조정에서는 민영환 등과 미국인으로 항일 필봉을 휘두르고 있던 '코리안 리뷰'사 주간 헐버트(흘법) 여사 등 친미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윤치호는 1905년(광무 8년) 9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할 것을 예상하였다. 그는 " 일본의 괴로운 노예제 하에서 한국인들은 동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며 일본에 의한 압제를 예상했다. 1905년 황성 YMCA 기독교청년회 부회장에 취임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한국의 독립은 오늘 오전 1시 또는 2시경에 조용히 사라졌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러나 정부는 다시 외부대신 서리에 임명했으나 취임을 거부했다. 이완용 내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1월, 일본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2월에는 그는 한성부 저잣거리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다. 그 날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5년 12월, 내내 한성부를 왕래하며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역으로 그가 갑신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과 친밀했던 점을 들어 비난했다. 윤치호가 을사조약 반대를 핑계로 다른 마음을 먹고 공화제를 획책한다는 흑색선전을 한 것이다.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조약을 도로 회수해 없애버릴 방도가 있다면 누가 죽기를 맹세하고 다투어 나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내정과 지금의 외교를 보면 어찌 상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든든히 가다듬고 실심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필경 오늘날의 위태로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의 길은 자강(自強)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윤치호는 YMCA 청년회 활동에 매진하였다. 청년회 활동과 교육, 강연 활동에만 전념한 것이다. 1905년부터 경성부에 설립 예정이던 대한도서관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과 부지 마련에도 참여했다. 발대식부터 각 준비과정에 관여한 인물들을 당시 황성신문 기사에서 찾아보면 윤치호 외 16명이었다. 대한도서관 개관 기념식 축사 낭독에서 "경성은 물론 각 산골과 촌락까지도 도서관이 보급되고 책 읽는 문화가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1906년 3월, 도서관 평의회에 참여하고, 도서관 운영위원 겸 도서관평의회 의원이 되었다. 1906년 1월 윤치호가 외무협판직과 외무대신 사무서리직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으로 재선되었다. 1906년 3월에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운동을 펴다 해산되어 그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6년 5월 대한제국 정부의 일본 유학생 감독(日本留學生監督)에 임명되었다. 10월에는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의 상소로 일본 유학생 감독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했다. 후임자는 그의 사촌인 윤치오(尹致旿)가 되었다. 1906년 5월 이능화와 장지연 등과 함께 승려들이 세운 명진학교(明進學校, 동국대학교의 전신)의 교사로 출강하였다. 1906년 10월 한영서원을 설립하였다. 이때 미국 유학시절에 후원을 받았던 캔들러 박사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문을 구하였다. 캔들러 박사는 학교 건립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주며 기독교 신학 학교, 혹은 기독교 계열 학교 설립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답장에서 "기술과 상업을 가르치는 실업학교의 건립이 먼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노동이 수치(羞恥)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자원이 빈약한 한국의 미래는 기술과 노동에 있다는 점과 기독교는 일을 하고 악습과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상, 종교로서 필요한 것을 주입”시키려 했다. 드디어 1906년 10월, 윤치호는 오랜 꿈이었던 학교설립,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었다. 바로 이 때 첫 해 소규모의 입학생들을 위해 프린트본 ‘찬미가’(초판)를 발행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대한제국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데 기여하였다. 1907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의 '실력배양운동'에 동의하여 신민회의 회장을, 안창호는 부회장을 맡았다.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전덕기·김구 등의 주도하였다. 7월에는 고종 퇴위 압력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한편 고종 양위를 주도한 이완용 등을 성토하였다. 7월 순종이 즉위하면서 그에게 특별히 외무부협판직을 제수하였으나 불민함을 이유로 고사하였다. 1908년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여 한영서원 원장과 겸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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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Ⅳ 찬미가 ‘Patriotic Hymn’의 전승 과정현 애국가의 출현은 1908년 6월에 발행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에 수록됨으로서 이다. 제15쪽 ‘Patriotic Hymn(Auld Lang Syne) 뎨十四’이다. 그런데 이 책이 재판(再版)임으로 초판 발행은 한영서원을 개교한 1906년 10월 전후로 본다. 그런데 윤치호가 1945년 작고 직전 자필로 남기 가사지에 ‘1907년 작’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이 초판에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작사 시점도 1907년부터 1908년 6월 어간이라고 보게 된다. 이렇게 출현한 ‘찬미가’ 제14장 현 애국가는 또 하나의 애국가에서 대표적인 애국가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1)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 마 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애국가 가사 4절의 면모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나 일반인들에게도 국가 안녕과 독립에 대한 기도문으로 통하여 자연스럽게 연계, 수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궁화 노래’와 일정 기간 까지는 길항(拮抗) 관계로 불리다가 3.1운동기를 계기로 대표적인 애국가가 되었다. 2) 1910년 9월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 一. 동물과 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ᄂᆞ님이 보호ᄒᆞ샤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ᄅᆞᆷ 대한으로 길히 보전ᄒᆞ세 二. 남산우헤 뎌 소나무 철갑을 둘은 듯 /바ᄅᆞᆷ이슬 불변ᄒᆞᆷ은 우리 긔샹일세 三. 가을하ᄂᆞᆯ 공활ᄒᆞᆫ데 구름업시 놉고 /발근 달은 우리 가ᄉᆞᆷ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샹과 이 맘으로 민족을 모흐며 /괴로오나 즐거우나 나라사ᄅᆞᆼ하세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기관지 ‘신한민보’ 제1면에 ‘국민가’라는 곡명으로 게재된 전4절 가사다. 주목되는 것은 ‘윤티호 작가’라고 밝혔다는 사실이다. 이는 애국가 자료를 게재한 매체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작품 자체를 소개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제1면에 가사 전4절과 함께 작사자를 밝힌 것이다. 매우 의미 있는 전승기록이다. 찬미가 제14장과 다른 점은 ‘아래 아’ 표기를 했다는 점과 4절 ‘님군을 섬기며’가 ‘민족을 모흐며’로 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14장을 텍스트로 하지 않고, 구술에 의한 것으로 보게 한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곡명이 ‘국민가’로 변이 된 점이다. 이는 ‘국민회의 회가(會歌)’로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고쳤다고 보게 된다. 더불어 제4절 ‘님군을 섬기며’도 국권 상실로 임금이 없음으로 ‘민족을 모으며’로 수정한 것으로 보게 된다. 3) 1912년 간도 용정촌 애국가 간도 용정촌 국자가(龍井村 局子街) 한인의 소지품을 일본총영사관이 압수, 보고한 자료에 들어있는 애국가이다. 이 창가집에는 소년보국가·운동가·한반도가·대한혼가·부모은덕가·학도가·혈성대가·영웅모범가·조국생각과 함께 애국가가 들어있다. 일본어로 번역하여 보고한 애국가는 후렴구 1절 마지막 구절이 ‘우리민족 만세’로, 마지막 구절이 ‘길이 광복하세’로 되어 있다. 후렴구 일부를 변이시킨 것은 의외이다. 4) 1914년 「태평양잡지」 애국가 이승만(1875~1965)이 1913년 9월 하와이에서 창간한 월간 「태평양잡지」 1914년 4월호에 ‘애국가와 찬미가’라는 기사에 수록된 자료이다. 2000년대 들어 국내에 입수되어 확인 되었다.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라고 밝힌 자료이다. 「찬미가」를 언급하면서 "무궁화 곡조에 다른 말로 만든 것”이 애국가라고 하였다. 특히 애국가의 탄압 실상을 밝히고 있는데, "찬미가는 본국에서 압수하고 매매를 금지한 책인데 한 권을 우리가 얻었기로 대강 뽑아서 등재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차 노래를 애국제도로 모본하여서” 국내에서 찬미가를 압수하고, 애국가를 금지했음을 전했다. 이 시기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투옥(1913~1915)돼 있었다. 국내에서는 이를 기사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불온서적으로 낙인찍어 소유자들이 스스로 폐기, 희귀해졌다는 사정도 알려 주었다. 5) 1915년 간도 광성중학 교재 수록 애국가 중국 간도 소영자(小營子)의 광성중학교(光成中學校)에서 1914년 간행한 「최신창가집」을 일제가 입수하여 보고하였다. 이 책 첫 작품이 ‘國歌’라는 제목으로 애국가 가사를 싣고 있다. 신한민보의 ‘국민가’와 유사하다. 다른 점은 제1절 ‘하나님이 보호하사’가 ‘한아님이 보우하사’로,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업시 놉고’를 ‘놉고 구름업시’로 변이시켰다. 그런데 "찬미가" 4절의 ‘님군을 섬기며’를 신한민보 ‘국민가’와 같이 ‘민족을 모으며’로 하였다. 이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신한민보 ‘국민가’가 소영자에서 불린 것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소영자에서 국민가를 수용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1916년 하와이 발행된 「애국창가집」 애국가 표지에는 ‘愛國歌’로 등사되어 있고, 목차 다음에 <애국창가집 서문>이 실려 있다. 판권의 간행일자는 1916년 5월 13일로 되어 있어 1915년 국내 한영서원에서 간행된 "창가집"을 바탕으로 편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사 1절은 ‘하ᄂᆞ님이 보우ᄒᆞ샤’, ‘우리나라 만셰’로, 3절은 ‘구름업시 높고’로, 4절은 ‘님금을 섬기며’로 되어있다. 7) 1919년 "신한청년" 창간호 소재 애국가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전하세 2. 남산 우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이슬 不變함은 우리 기상일세 3. 가을하늘 空闊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 4. 이 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김규식 중심의 조직인 상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 "신한청년" 창간호 속표지에 수록된 전 4절 가사이다. 각 절의 변이 상이 확인 된다. 이 가사는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계승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기록이다. 이 잡지의 편집자는 주필 이광수이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안창호의 자문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본다. 제14장의 전승에 대해서는 이 기록을 주목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신한청년’에 게재된 애국가 가사의 변이는 2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부 자구가 바뀌었다. 1절의 ‘보호’가 ‘保祐’로, ‘우리 대한 만세’가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없이 놉고’가 ‘놉고 구름없이’로, 4절의 ‘님군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것이다. 오늘의 애국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변이상 중에 ‘충성을 다하야’라고 바뀐 부분은 예사로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점에서 그런데, 하나는 이 부분을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가 수정하였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 수정이 이미 1910년에 이뤄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임정시절 안창호와 가장 가까웠던 주요한이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 선생이 수정하였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미 1910년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에서 ‘충성을 다하야’로 수정되어 나온 다는 사실에서 상호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결국 시기와 지역이 거짓이 되는 것이고, 이 혼란의 주체가 안창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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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Ⅲ 찬미가 ‘Patriotic Hymn(뎨十) 작사 배경찬미가’ 소재 애국가류 3편 중 제10장은 주목되는 노래이다. 작사 배경이 문헌으로 입증이 되고, 이 때문에 제1장과 제14장의 작사자가 동일인 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하고, 작사자 문제에 대한 20여년 간의 논란을 종식 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번 회에서는 제10장의 작사 배경과 작사자를 확정하고자 한다. 1897년 8월 17일자 독립신문 잡보란 ‘대조선 개국 오백오회 기원절 축사’ 기사이다. 이는 4일전 서대문 독립관에서 개최한 조선국 개국 505회 기원절의 기념행사를 다룬 기사이다. 행사장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연설자와 그 주제 그리고 기념식 노래 3편을 언급하였다. "대죠션 국 오백 오회 긔원졀 츅사를 팔월 십삼일 오후 셰시에 독립관에셔 국긔를 놉히 달고 그 아래 화쵸로 단쟝 하엿서 졍부 대쇼 관인과 여러 학도와 인민이 만히 모혓시며 각국 공령사와 신사와 부인들이 각기 례복을 가쵸 입고 뎨뎨히 안졋는지라. 그 츅수가 일졀를 보니 쳐음에 학당 학원들이 츅슈가를 불너 오천 여년 우리 왕실 만셰 무궁 도으쇼셔 찬송 하니 외국부인이 악긔로 률에 쫒아 병챵하더라. 둘 째 회쟝 안경슈씨가 연셜 하고 셋 째 한셩 판윤 리채연씨가 학부 대신 리완용씨를 대신 하야 국민의 당연히 할 직무를 연셜 하고, 넷 째 배재학당 학원들이 무궁화노래를 불으니, 우리 나라 우리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셩이 한 가지로 만만셰를 길거야 태평 독립하여 보셰 하니 외국 부인이 악긔로 률에 병챵 하더라다. 다섯 째 미국 교사 아편셜라씨가 영어로 죠션에 거류 외국 인사들을 대하 야 각기 당연히 할 직무를 연셜 하며, 여셧 째 졔손씨가 죠션 관민들을 대하야 진보 할 것을 연셜 하고, 일곱 째 배재학당 학원들이 ‘나라 사랑하는 노래’를 불으니 외국 부인이 악긔로 률에 쫒아 병챵 하더라. 여섯 째 젼 협판 윤치호씨가 긔원졀일 문졔를 연셜 한 후에 탁지 대신 심샹훈씨가 졔손씨와 외국 교사 아편셜라씨의 연셜 한 것을 감샤 하다고 말 하더라. 그 다음에 다과례를 하고 이 날이 져믄고로 다 헤여져 도라 가더라." 전체적으로 기원절(紀元節) 행사의 전반을 다뤘다. 축사와 연설자가 확인 된다. 주목되는 인물은 윤치호이다. 마지막 연설자로 ‘기원절 문제’를 연설했다. 또한 당시 피아노 반주를 담당한 아펜젤라 부인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념가 세 곡이 제시 되었다. ‘축수가’, ‘무궁화 노래’ 그리고 ‘나라 사랑하는 노래’이다. 이 중 ‘무궁화 노래’에 대해서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무궁화노래를 불으니, 우리나라 우리 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셩이 한 가지로 만만셰를 길거야 태평 독립 하여 보셰”라고 가사 일절을 적시하였다. 이 가사를 배제학당이 부른 ‘무궁화노래’라고 하였는데, 이후 확인되는 전 가사 중 제4절이다. 다만 후렴이 제시되지 않았지만, 곡명을 ‘무궁화노래’라고 함으로써 그 후렴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사/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기사는 안창호 작사설이나 공동작사설을 주장하는 측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혼란을 야기 시킨 바가 있다. 필자가 지적하여 지금은 바로잡힌 문제의 대목인데, 바로 "배재학당 학원들이 무궁화노래를 불으니~”를 "배재학당 학원들이 무궁화 노래를 지어 부르니~”로 ‘지어’를 넣어 사실이다. 분명히 불렀을 뿐이지 지었다는 표기는 없는 것이다. 이상의 행사를 부연하기 위해 윤치호의 일기를 확인 해 보았다. 다행히 행사 당일 13일자 일기에 영문으로 기념식 식순을 기록하였음을 확인했다. <13th. Friday. Cloudy> 1. Song Praise By the students of Pachai. 2. Address By President, An Kyongsu. 3. Address Duties as Citizens of the Commonwealth.By Yi Chai Yon. 4. Song National Flower-Paichai Students. 5. Address Obligations of Foreign Residents By Reverend Appenzeller. 6. Address Korean Advancement By Dr. Jaisohn. 7. Song Korea By Paichai Students. 8. Address The Day We Celebrate by T.H.Y. 9. Refreshments. 앞에서 살핀 독립신문 잡보란 기사 내용과 순서가 일치한다. 또한 세 가지 노래가 영문으로 표기되어 구체적으로 파악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즉, 노래의 영문 표기는 Song ‘Praise’, Song ‘National Flower’, Song ‘Korea’이다.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무궁화’에 대한 표기인데, ‘音譯’이나 ‘意譯’을 하지 않고 ‘나라 꽃’, 즉 ‘국화’로 썼다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히 당시 작사자는 국가상징에 대한 이해가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한편 위의 두 자료에는 작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문제가 풀렸다. 필자가 아펜젤러 추모문집 ‘THE APPENZELLERS: WHO THEY PREACHED’ 제1권에서 서재필이 영문판 독립신문(The Independent) 8월 17일자 편집자주(Editorial Notes) 기사에서다. 이 기사에서 의미 있는 두 가지를 확인하게 되었다. 하나는 윤치호의 연설 내용으로 ‘우리가 기념하는 날’(The Day We Celebratr)이란 제목의 연설이다. "그의 연설은 애국심에 차 있었고, 그의 설명은 매우 학자적이었다. 그는 한국이 민족주의에 대한 교육을 경시한 것에 대하여 후회했다. 사람들이 자기 나라보다 외국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배우려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자기 나라 역사에 대한 자랑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정서가 진정한 애국심과 부푼 동기로 바뀌는 날이 멀지 않아 온다고 했다.” 서재필이 윤치호 연설 내용을 제시한 부분이다. 청국의 역사는 잘 알면서 우리 역사는 모르는 것이 현실이며, 중국의 역사를 공부하고 과거(科擧)에 응시하는 제도를 비판하고,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한 것이다. 당시의 독립이 일본이나 러시아로 부터가 아니라 청국임을 알게 한다. 다음은 ‘무궁화 노래’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시한 것이다.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가’를 불렀다.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시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 여사가 오르간으로 연주한 ‘올드 랭 사인’ 곡에 맞춰 불렀다. (The Paichai boys sang a song ‘National Flower’ which was composed by the poet lauriate of Korea, Mr. T. H. Yun, for the occasion. They sang it to the tune of ‘Auld Lang Syne’ accompanied by Mrs. M.F. Scranton on the organ) ‘National Flower’(무궁화 노래)를 계관시인(桂冠詩人·poet lauriate of Korea) 윤치호(Mr. T. H. Yun)가 행사를 위해 작사했다고 밝혔다. 이를 기록한 서재필(Dr. Jaisohn)은 독립협회 회장으로 강연자로 "죠션 관민들을 대하야 진보 할 것”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리고 독립신문 발행인으로서 ‘편집자 노트’란에 기사를 썼다. 이 기사는 획기적이다. 무궁화 노래의 작사자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작사자를 윤치호로, 작사 배경을 개국 505주년을 기념하여, 윤치호를 계관시인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동안 이 ‘무궁화 노래’의 작사자가 밝혀져야 동일 후렴의 제14장인 현 애국가의 작사자도 규명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이 노래는 문제작이었다. 그런데 당대의 서재필 기록에 의해 작사자가 밝혀진 것이다. "무궁화 노래(찬미가 제 10장)는 1897년 8월 13일 대조선 개국 505회 기념식을 위해 윤치호가 작사한 것이다. 이 사실은 1907년 현 애국가인 찬미가 제 14장에도 연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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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Ⅱ ‘찬미가’ Patriotic Hymn 뎨10의 전승 과정1908년 6월 25일 광학서포 발행 윤치호 역술 재판 ‘찬미가’는 문제적 출판물이다. 이 같은 서지사항 외에 한글 활자로 인쇄된 출판물이란 점에서 주목이 된다. 이 시기 한글 문헌 자료는 중층적으로 융합되어있는 여러 문화적 요소의 분석방법인 문화중층론(文化中層論)에 의한다면 민중을 독자로 하였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애국가집이며 기독교 찬송가집이며, 근대사를 반영한 교육용 출판물이라는 사실에서다. 이 책에 수록된 한글 표기 15편 중 제10장은 14장과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 확인 된다. 1907년 작사된 제14장은 이 제10장의 후렴과 곡조를 전승하였다. 그리고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 애국가로 확산되고, 3.1운동 기간 민중들에 의해 대표적인 애국가로 위상을 획득함으로서 오늘의 현 애국가가 되었다. 이런 사실에서 두 작품은 초기 애국계몽가라는 문화 자원으로서의 중요성은 물론 다양한 측면의 분석 대상이기도 하다. 우선 제10장 가사의 전승 실상, 즉 시대적 변이 과정을 살피고, 작사 배경 등을 검토하기로 한다. ‘찬미가’의 제10장 곡명은 ‘Patriotic Hymn’(애국적 찬미가)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처음 불려진 1897년 7월 13일 조선개국 505주년 기념식에서 발표될 당시는 ‘무궁화 노래’(National Flower)였다. 이후 한자식 ‘무궁화가’로 바뀌는데, ‘노래’는 독립신문이 한글 쓰기를 의식한 표기로서 본 서에서는 시기별 고유 곡명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1) 1897년 8월 13일자 독립신문 ‘무궁화’(National Flower) 우리 나라 우리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셩이 한가지로 만만셰를 길거야 태평 독립 하여 보셰 1897년 8월 13일 독립관에서 개최한 ‘대조선개국 505회기원절 경축식’을 보도한 기사에 수록된 일부 가사이다. 이는 이후 기록에서 확인 되는 ‘무궁화가’나 ‘찬미가 제10장의 제4절이다. 의미상으로는 같지만 자구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다. 기사화 하는 과정에서 "군민공락(君民同樂)”을 "님군과 백셩이 한가지로”라고 풀이한 듯하다. 찬미가 제10장 제4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천이 도으사 군민공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 2) 1898년 1월 필사 추정 ‘協成會 無窮花’ 필사 자료이지만 1898년 1월쯤에 부른 노래로 추정하는 ‘協成會 無窮花’이다. 협성회 제3대 회장을 역임한 이익채(李益菜·1873~1937)가 러시아 공사관 시절의 기행가사 작품인 수덕가(樹德歌) 등 영문 기록과 함께 남긴 자료에 수록되었다. 한문투의 전 4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協成會 無窮花 一 聖子神孫五百年은 우리 皇室이요 山高水麗 東半島는 우리 本國일세 後斂 無窮花三千里 華麗江山 大韓사람 大韓으로 길히 保全하세 二 忠君하는 一片丹心 北岳가치 놉고 愛國하는 熱心意氣 東海가치깁헤 三 千萬人 오직 한마음 나라사랑하야 士農工商 歸賤업시 職分만 다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 皇帝 上天이 도으사 君民共樂 萬歲에 太平富强하세(회원 일동 偶吟) 3) 1899년 6월 29일자 배재학당 방학예식 기사 ‘무궁화노’ 다음은 ‘독립신문’ 1899년 6월 29일자 배재학당 방학예식을 보도한 ‘독립신문’ 잡보란 기사에 수록된 가사이다. "모든 學員이 무궁화노를 할 것”으로 제시 한 전 4절 가사이다. 무궁화노 一 셩ᄌᆞ신손 오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슈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 대한으로 길히 보젼셰 二. 국렬 심의긔 북악치 놉고 츙군 일편단심 동 치 깁허 三. 쳔만인 오직 나라 랑야 롱공샹 귀쳔업시 직분 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 황뎨 황텬이 도으샤 군민공락 만만셰에 태평독립셰 4) 1905~1907년 추정 ‘도산소장 창가집’ 수록 ‘십ᄉᆞ편 무궁화가’ 다음은 1905~1907년 발행된 것으로 추정하는 가칭 ‘도산소장 창가집’에 수록된 ‘십ᄉᆞ편 무궁화가’ 전 4절이다. 십ᄉᆞ편 무궁화가 一 셩ᄌᆞ신손 五百년은 우리 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아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 대한으로 길이 보죤셰 二. 국 열심의긔 북악갓치 놉고 츙군 일편단심 동치 깁헤 三. 쳔만인오직 ᄆᆞᆷ 나라랑야 롱공상 귀쳔업시 직분만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황뎨 황텬이 도으샤 군민공락 만만셰에 태평독립셰 5) 1908년 3월 11일자 ‘공립신보’ 수록 ‘애국가’ 1908년 3월 11일자 순종 탄신을 기리는 ‘공립신보’ 건원절(建元節) 경축 기사에 수록된 애국가 4절 가사다. 이 신문은 1905년 창간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한 민족운동단체 공립협회(共立協會)의 기관지이다. 애국가 一 셩자신손 오년은 우리 황실이오 산고슈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 三千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젼셰 二. 튱군 열셩의긔 북악갓치 놉고 애국 일편단심 동갓치 깁허 三. 쳔만인의 오직 맘 나라사랑야 사롱공샹 귀쳔업시 직분만 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황실 황텬이 도으샤 만민동락 만만셰에 태평독립셰 가사 일부 어사가 바뀌고 변이가 되었다. ‘츙군 일편단심’→ ‘튱군 열셩의긔’로, ‘국 열심의긔’→ ‘애국 일편단심’으로 바뀌었고, 4절 ‘국민동락’이 ‘만민동락’으로 변이 되었다. 해외에서의 전이 현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변이 폭이라고 보게 된다. 6) 1908년 5월 26일자 「해조신문」 수록 ‘애국가’ 다음은 러시아 우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해조신문」 1908년 5월 26일자에 수록된 ‘애국가’란 곡명의 4절 가사이다. 一 셩ᄌᆞ신숀 오년은 우리 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 대한으로 길이 보젼셰 二. 츙군 열셩의긔 북악치 놉고 국 일편단심 동치 깁허 三. 쳔만인의 오직 ᄆᆞᆷ 나라랑야 농공샹귀쳔업시 직분만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황실 황텬이 도으샤 만민공락 만만셰에 태평독립셰 7) 1908년 6월 25일 재판 ‘찬미가’ 수록 ‘Patriotic Hymn’ ‘무궁화 노래’가 1897년 8월에 기록화 된지 11년 후 1908년 발행된 단행본 ‘찬미가’ 에 수록된 제10장 ‘Patriotic Hymn’이다. 곡명 밑에 ‘No[1]’이란 표기를 했고, 곡조를 ‘AULD LANG SIGN’으로 지시했다. 특히 이 책에서부터 가사가 현대 철자법으로 수록되었다. Patriotic Hymn No[1] 뎨十 TUNE: AULD LANG SIGN 一 승장신손 천만년은 우리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난 우리 본국일세 (후렴)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충군하는 일편단심 북악같이 높고 애국하는 열심의기 동해같이 깊어 三 이천만인 오직한마음 나라 사랑하여 사농공상 귀천없이 직분만 다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 이상을 통해 1897년 8월에 ‘무궁화’로 기록이 된지 11년 후, 1908년 6월 발행된 단행본 「찬미가」 에 수록된 제10장 ‘Patriotic Hymn’ 까지의 가사 변화 과정을 제시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 네 가지로 요약이 된다. 첫째, 출현은 1897년 8월 조선개국 505주년 독립관에서의 기념식에서 처음 불려, 독립신문에 가사 일전이 ‘무궁화’로 수록되면서 부터이다. 1908년 광학서포에서 윤치호 역술로 발행 된 ‘찬미가’에 수록되기까지는 11년 후이다. 이로서 곡명과 가사의 변이가 있었다. 둘째, 곡명의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97년 8월 13일자 독립신문-‘무궁화’(National Flower) 1898년 1월 필사 추정-‘協成會 無窮花’ 1899년 6월 29일자 배재학당 방학예식 기사-‘무궁화노’ 1905~1907년 추정 ‘도산소장 창가집’ 수록-‘십ᄉᆞ편 무궁화가’ 1908년 3월 11일자 ‘공립신보’ 수록-‘애국가’ 1908년 5월 26일자 「해조신문」 수록-‘국가’ 1908년 6월 25일 재판 ‘찬미가’ 수록-‘Patriotic Hymn’ 이런 변화 추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1907년에 와서야 ‘애국가’라는 곡명이 나타난다. 이는 ‘Patriotic Hymn’의 번역어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찬미가’ 초판이 영향을 미친 결과로 보게 된다. 셋째, 현 애국가가 후렴을 전승하고 있어 모자관계에 있어 중요하다. 역사성과 이념에서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전승은 국내와 미주지역에서 주로 신문 매체를 통해서 기록, 전파되었다. 국내에서는 주로 기독교계어서, 미주와 러시아에서는 민족운동단체에서 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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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찬미가’ 제1장 작사 배경윤치호 역술 ‘찬미가’에는 서양 찬송가 번역 12편과 애국가류 3편이 수록되어있다. 이 중 애국가 3편은 제1장, 제10장, 제14장에 배치하였다. 이 같은 배치 이유와 각 편의 작사 배경은 주목이 된다. 이 3편은 윤치호의 기독교적 신앙심과 애국심을 배경으로 문학성 발휘와 찬미가의 형식을 빌려 시대정신을 반영한 작품이다. 그럼으로 작품 배경으로서의 작사자 윤치호 생애를 살피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먼저 제1편 ‘KOREA’의 가사를 살펴 작사 계기와 년도를 살피기로 한다. 이를 통해 제14장 현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명확히 할 수 있는 것이다. KOREA Tune America 664 6664 제1 一 우리 황상폐하 텬지일월 같이 만수무강 산 높고 물 맑은 우리 대한뎨국 하나님 도으샤 독립부강 二 길고 긴 왕업은 룡흥강 프른 물 쉬지 안듯 금강 쳔만봉에 날빗 찬란함은 태극기 영광이 비취는 듯 三 비단 같은 강산 봄꽃 가을 달도 곱거니와 오곡 풍등하고 금옥구비하니 아셰아 락토가 이 안인가 四 이천만동포난 한 만 한 뜻으로 직분만다하세 사욕은 버리고 츙의만 압세워 님군과 나라를 보답하세 당시로서는 매우 세련된 노랫말이지 않을 수 없다. 1절과 4절은 당시 찬미가나 애국시가의 내용이지만 2절과 3절은 시적인 표현과 짜임새가 돋보이는 가사이다. 제1절은 황제(황상)와 대한제국의 독립부강을 하나님께 빌었다. 이는 당시 영국 국가의 1절과도 통한다. 제2절은 태극기 영광이 긴 왕업과 같이 하리라는 염원을 표현했다. 국가상징을 통해 국민적 통합의 애국심 고취 의지가 담긴 가사다. 제3절은 대한제국이 금수강산의 아시아의 낙토(樂土)임을 자랑하였다. 국토예찬 역시 상징 조작의 한 방편이다. 제4절은 이천만 동포가 직분을 다하자고 다짐하였다. 대한제국으로의 독립을 기리고 국토를 예찬하는 주제가 명료한 기도문이며 애국가인 것이다. 곡명은 ‘대한제국’(KOREA)이다. 초기에는 대한제국을 ‘Empire of Dai Han’으로 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KOREA’(프랑스어 Corée/러시아어 Корея)로 정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곡조는 ‘Tune America’, 즉 미국 국가 곡조로 부르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 국가를 영국 국가(God save the Queen) 곡조로 하고, 이를 ‘America’로 표기하고 있었다. 윤치호의 지식과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려한 표기이다. 윤치호는 유길준과 유정수와 함께 1881년 16세에 어윤중(魚允中) 수행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몇 개월 후 일본의 계몽사상가이자 기독교도인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세운 학교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이 때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물과 일본 개화 선구자 후쿠자와(福澤諭吉)·나카무라(中村正直) 등과 교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의 충고로 주일본 영사관원들로부터 일본어는 물론 영어를 공부했다. 이 덕에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Foote. L. H.)의 통역관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다른 두 사람 보다 1년여를 더 유학하여 1883년 4월까지 머물렀다. 그리고 1884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가 되어 고종과 푸트와 개화당 간의 교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고종의 총애를 받는 반면 청국에 대한 조선의 자주권 확립과 조정의 개혁이란 포부를 갖게 되었다. 1885년 1월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했다. 윤치호는 직접 관여는 않았지만 주역들과의 연류 여지로 신변이 위협을 느꼈다. 이 때 고종의 허락과 푸트 공사의 추천서를 지니고 상해로 피신하게 되었다. 여기서 감리교계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체계적인 근대학문을 배웠다. 상해에서 3년 반의 수학을 마치고 중서서원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을 하게 되었다. 1888년 9월 상해를 출발, 일본을 거쳐 박영효와 김옥균을 만나고 11월 미국 내슈빌에 도착했다. 밴더빌트(Vanderbilt)대학에 입학, 신학을 전공했다. 이어 1891년 에모리(Emory)대학에서 2년간 인문사회과학을 수료했다. 이 기간 미국사회에 대한 경험을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와 선교활동을 했다. 에모리 대학을 수료하는 1993년까지 두 대학의 대표적인 스승인 조직신학자로 저명한 틸레트 교수와 총창 캔들러(W. A Candler) 교수로부터 정치사회적 의식은 물론 품격 있는 기독교적 인격형성에 영향을 큰 받았다. 특히 캔들러 교수와는 귀국 후의 조선 선교에 대한 약속을 주구 받기도 하였다. 7년여의 미국유학을 마치고 상해에 도착, 잠시 모교의 교수직을 거쳐 1895년 귀국하였다. 즉시 외무협판과 학부협판을 맡았다. 그리고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조선인 축하사절단 대표 민영환의 수행원이 되었다. 이 때 중추원 1등 의관 칙임관 3등에 특별 임명되었다. 대관식 사절 업무를 마치고 홀로 세계여행을 하고 귀국하였다. 1897년 7월 성립된 민중계몽단체 독립협회(1897. 7~1898. 12)에 참가, 서재필, 이상재, 유길준 등과 협회운동에 참여했다. 이 시기 고종은 1897년 2월 연호를 광무라 바꾸고 10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였다. 10대 말로부터 40대 초까지의 윤치호 생애는 일본, 중국, 미국 유학 기간으로 귀중한 시기였다. 10대말 3년의 일본 유학 기간에는 명치유신의 근대화 과정과 자유민권운동을 체험하고, 20대 초 4년여의 중국 유학 기간에는 중국과 조선의 낙후된 전통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고, 기독교에 입교하여 세례 교인이 된 시기이다. 그리고 미국 유학 기간에는 민주주의와 과학문명에 기초한 성숙한 근대 사회를 체험하였다. 특히 1888년과 1892년 두 번의 대통령 민선 광경을 목격하고, 감옥 수인(囚人)과 흑인지역 선교를 통해 인종 차별을 체감하여 미국의 양면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조국을 전통 사회로부터 근대 사회로 전환시키려는 강력한 근대 변혁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 결과로 그는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신념으로 삼게 되었고, 문명개화 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윤치호는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애국 찬미가 1편을 작사하여 미국 국가 곡조로 부르자고 하여 그 대한제국 국가로 그 위상을 확정하였다. 그 결과 전체 15편 중 첫 자리 제1장에 위치시킨 것이다. 물론 이는 윤치호 개인의 신앙심과 애국심에 의한 발로로 의미상 위상이지 외부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윤치호는 ‘국가’라거나 ‘애국가’라고 쓴 바가 없고, 찬송가적 표현으로 표기했을 뿐이다. 윤치호로서는 미국을 비롯한 수교국들의 공식 승인을 받아 청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선포하고 독립적 국가 운영 의지를 밝힌 대한제국 수립을 찬동하고, 황제의 안녕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앞서 개최한 7월의 505회 조선국 개국기원 독립관 경축행사 강연에서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애국적 찬미가를 작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 윤치호 만큼 국민통합을 위한 상징 조작(symbol manipulation의 효용성을 인식하고 실천한 이는 달리 없었다. 이런 시대 배경과 윤치호 전반기 생애는 찬미가 제1장 'KOREA' 작사의 배경이 되었고, 이는 당대 선지 지식인의 책무를 다 한 것이었다. 이제 제1장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 ‘KOREA’는 윤치호가 1897년 10월 고종황제의 대한제국 선포식을 기념하여 작사했다. 애국가 3편 중 작사 순서로는 두 번째이지만 그 위상이 다른 두 찬미가에 비해 의미를 두어 제1장에 위치시켰다. 신앙고백적 내용이나 당시 위치 등으로 보아 윤치호 작사임이 분명하다. 당시 윤치호로서는 국기 태극기와 국화 무궁화는 있지만 국가는 없다는 것을 고려하여 국가(國歌) 위상의 찬미가를 작사했다. 이후 이 제1장 가사는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1902년 공식 국가인 ‘대한제국애국가’ 가사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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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안창호 가족들은 알고 있다”1980년대 들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간행물들이 영인출판으로 공개되었다. ‘아세아문화사’를 선두로 많은 출판사가 잡지와 신문 등을 복각(復刻)하였다. 이를 통해 국학분야는 근대에 대한 연구의 진척을 볼 수 있었다. 애국가 분야 같은 특수 분야도 마찬가지다. 특히 ‘독립신문’의 복각 출판으로 구한말의 애국가 운동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5년만의 준비로 1987년 독립기념관의 개관을 계기로 해외 산출 자료의 대량 수집, 공개로 독립운동사 분야는 물론 인접 부야도 큰 혜택을 보는 계기였다. 애국가 분야로서는 임시정부와 안창호와 안익태 자료의 전모를 통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특히 미주 ‘신한민보’ 완질(完帙) 입수를 통해 안익태의 애국가 작곡 시기와 악보와 음반 발행 시기를 알게 되었고, 안창호의 유품을 통해 가족들의 인식 여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애국가 분야에는 두 가지 현상이 있게 되었다. 하나는 안창호에 대한 자료가 집대성 되어 그의 애국시가(愛國詩歌) 전모가 드러난 것이고, 또 하나나는 안창호 연구가 활성화 되어 애국가 작사설이 다시 대두하게 된 점이다. 이 결과로 안창호의 애국시가 중에 잡지와 신문 소재 "애국가” 곡명의 두 작품을 확인하여 안창호가 작사한 ‘애국가’가 따로 있었음을 밝혀냈다. 바로 안창호는 다른 애국가 작사 사실 때문에 현 애국가의 작사자로 오해를 받게 되었고,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를 드러내지 않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이번 회에서는 이 사례와 유사한 안창호 가족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검토하기로 한다.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1884~1969) 여사가 1962년 정부 초청으로 건국공로훈장 수훈차 귀국을 했다. 이 때 흥사단 기관지 ‘기러기’는 이혜련 여사와의 인터뷰를 수록했다. 이를 통해 가족관계는 물론, 흥사단 창립과 3·1운동, 서재필과의 교류, 이갑(李甲)선생의 엄지손가락 마비 사실 같은 것도 기술했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또한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한 큰아들 필립이 1960~70년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여러 잡지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거국가’만 언급을 했을 뿐이고, 애국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가족들이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런데 큰딸 수산의 경우는 조금은 다르다. 2003년 펴낸 책 ‘버드나무 그늘 아래- 도산 안창호의 딸 안수산 이야기-’에는 21개 에피소드를 담고 의외로 참고문헌을 첨부했다. 그리고 ‘도산 선생’ 외 3개 항목에 아버지와 가족 이야기를 기술했다. 여기에서 ‘거국가’ 4절 가사 제시했고 애국가도 두 번이나 언급을 했다. 첫 대목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직후 부친이 평양 대성학교에서 체포되어 용산 감옥에 수감된 후의 상황에서다. 밤이면 감옥 근체에 대성학교 학생들이 와서 부친이 듣도록 ‘올드랭 사인 애국가’를 불렀다고 하였다. 이 기술은 이미 다른 증언에서 알려진 에피소드로 단순한 애국가를 부른 정황을 전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이미 개교 당시부터 교장인 윤치호가 작사한 현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음은 ‘감옥 속의 아버지’라는 항목에서 1926년 2월 장리욱이 자택으로 찾아온 날을 회상한 열한 살적 기억이다. "월슨 꼭대기에서 아버지는 조용히 있지 않았다. 그와 장리욱은 건너편 산골짜기 아래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우뚝 서서는 목청껏 애국가를 불렀다. 장난치던 아이들도 나무줄기를 향해 돌을 던지던 놀이를 멈추고선 친숙한 올드랭 사인의 멜로디에 조선말 가사를 붙인 노래를 듣기 위해 조용히 서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아버지가 울고 있어, 다 울고 있어··· 아버지가 왜 우는 거지? 아이들은 서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도산의 인격과 생애’의 저자 장리욱과 안창호의 친밀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위 두 대목에서 애국가 작사자 여부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족들도 작사자가 부친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이런 진술은 나름 진정성이 있는 상황임으로 의미가 크다. 그러므로 애국가 작사자 문제가 격렬하게 전개된 2000년대의 기록은 학습된 정보로 보게 된다. 애국가 작사자 문제로 방문한 이들로부터 주입된 정보로 사료적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보여 주는 자료가 있다. 그것은 1915년 아들 필선에게 보낸 서신의 일절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차남 필선에게 보낸 엽서이다. 가족의 안부를 묻고 차남 필선을 격려하는 내용이다. "필션아 네가 이져음에도 마취(march)를 잘하며 동해물과 백두산도 잘 부르느냐 나는 잘 잇노라” 어린 아들에게 행진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씩씩하게 자라라고 격려했다. 이런 정도인데도 애국가를 자신이 작사했음을 숨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후 가족 누구도 6, 70년대 귀국하여 애국가 작사자가 부친이라고 말 한 바가 없다. 이는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작사자에 대해 말 하지 않은 결과이다. 결론은 이렇다. "안창호는 가족들에게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창호는 애국가(국가)의 기능을 알고 있기에 아들에게까지 부를 것을 독려하였다. 안창호는 지극한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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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2의 ‘안창호 애국가’나라 사랑을 권면(勸勉)하는 노래 즉, 애국가를 짓고 부르기를 권장하고 지속화 할 것을 독려하는 것을 ‘애국가 운동’이라고 한다. 독립신문이 1896년 9월 22일자 기사를 통해 외국의 예를 제시하고 조선에서도 그렇게 하자고 제안 것이 그것이고, 지속적으로 애국가 가사를 투고 받아 게재한 것이다. "~조선정부 학교에서들 국기를 학교 마당 앞에 하나씩 세워 매일 학도들이 그 국기 앞에 모여 경례하고 애국가 하나를 지어 각 학교에서 이 노래를 아침마다 다른 공부하기 전에 여럿이 부르게 하고~” 국기에 대해 경례하고 애국가를 부르게 함으로서 나라 사랑하는 자세를 갖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국기(國旗)’에 조응하는 것을 ‘국가(國歌)’라 하지 않고 ‘애국가’로 했다는 점이다. 이는 두 가지에서 의미가 있다. 하나는 독립신문이 창간으로부터 5개월 후쯤이라는 시점에서 국기 ‘태극기’는 있지만 국가는 없음으로 그 대안으로 ‘애국가’를 지어 부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둘은 이미 국가 대신으로 부르는 ‘애국가’가 있으니, 이 전통을 따라 ‘애국가’라는 이름의 노래를 지어 부를 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창호가 귀국하여 활동하는 1907년 3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國旗禮拜’에서는 이와 유사한 해석을 하게 한다. "國旗에 禮拜하고 愛國歌를 唱”한다고 했기 때문인데, 인용하면 이렇다. "~美國 留學生 안창호씨가 生徒에게 對하여 勸勉한 內開에 美國 各種 學校에서는 愛國思想으로 每日 上學 前에 國旗에 禮拜하고 愛國歌를 唱함을 見한 즉~” 서울 서대문 근처 의무균명학교에서 행한 강연회에 대한 보도의 문면(文面)대로라면 안창호도 미국의 국기에 조응하는 국가를 ‘국가’가 아니라 ‘애국가’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애국가’는 국가가 아님으로 각자 지어 부를 수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지난 회에 살핀 ‘찬애국가’이고, 이번 회에서 살피려는 또 하나의 안창호 작사 애국가의 존재이다. 안창호는 입국하여 이미 국가로 부르는 ‘애국가’가 있음으로, 같은 명칭이지만 각자의 또 다른 애국가를 지어 부르자고 한 것이다. ‘제2의 안창호 애국가’는 신한민보 1910년 10월 12일자 ‘대한혼’에 포함된 ‘애국가’이다. 먼저 ‘대한혼’ 대목을 전재하고 ‘애국가를 살피기로 한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大韓魂 지금 아목따에 있난 어뜬 동지의 긔함을 본즉 년 전에 평양 어뜬 지사가 애국가 일편을 지어 각 학교에셔 학도에게 가라치더니 학도들이 날마다 이 노래로 나라사랑하난 마음과 나라회복할 생각이 바다에 됴수 밀듯하난 고로 원슈들이 교과서 까지 압슈 하얏슬 뿐 아니라 즉금은 입으로 외오지도 못하게 하난 고로 이와 같이 보배스러운 노래(곧 대한혼)가 세상에 널리 전치 못할까 근심하야 글로써 보내니 속히 기재하야 우리 우리동포에게 널리 젼하라 하얏더라. 이 노래난 의기를 자아내고 마암을 모와서 원동력을 생기게 하난 재로 우리동포들은 이 노래 하야 후일을 예비할지어라.” "평양 어뜬 지사”는 안창호이고, 그가 "애국가 일편”을 지어 부르게 하였다고 했다. 이 기사 자체가 웅변투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 안창호의 구술을 기사화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대한혼’을 담은 세 가지 노래 중 ‘애국가’ 일편을 수록했다. 전 10절의 긴 노래이다. <애국가> 1 슬프도다 우리민족아/ 사천여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하더니/ 오늘날 이지경 웬일인가 열사주사로 결박한 줄을/ 우리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독립만세 우리 소리에/ 바다가 끓고 산이 동켔네(후렴) 2 일간두옥도 내 것 아니요/ 수묘전토도 내 것 못되네 무리한 수욕을 대답 못하고/ 공연한 구타도 거져 밧노라 3 남산초목도 눈이 있으면/ 비창한 눈물이 가득하겠고 동해에 별도 마음이 있으면/ 우리와 같이 슬퍼하리라 4 한치 벌레도 만일 밟으면/ 죽기전 한번 움직거리고 조그만 벌도 남이 다치면/ 저를 반드시 쏘고 죽는다 5 눈을 들어 살펴보니/ 삼천리 강산에 사무친 것은 우리 부모의 한숨 소리요/ 우리 동포의 눈물이로세 6 금수강산이 빛을 잃고/ 광명한 일월이 아득하도다 이것이 뉘 죄냐 생각하여라/ 네 죄와 내 죄 까닭이로다 7 사랑하는 우리 청년아/ 자든지 깨든지 우리 마음에 나태한 악습과 의뢰 사상을/ 모두다 한 칼로 끊어버리고 8 사랑하는 우리 동포야/ 죽든지 살든지 우리 마음에 와신상담을 잊지 말아서/ 우리의 국가를 회복합세다 9 애국정신과 단체 힘으로/ 육단혈류를 무릅쓰면서 원수가 비록 산과 같하되/ 우리 앞을 막지 못하리 10 독립기 달고 자유종 칠 때에/ 부모의 한숨은 웃음이 되고 동포의 눈물은 기쁨 되리니/ 중흥영웅이 우리 아닌가 위에서 확인하였듯이 안창호는 애국가 운동에 앞장 선 인물이다. 그 실증이 강연에서 애국가의 필요성과 학교에서 실천하도록 독려한 것이고, 실제 지은 애국가를 통해 알 수가 있다. 결국 안창호는 이 <애국가> 작사 때문에 1907년 윤치호 작사 ‘애국적 찬미가 제14장’ 즉, 현 애국가의 작사자로 오인 받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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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안창호 작사 애국가, “따로 있다”안창호의 글과 구술 자료는 ‘도산안창호전집’ 도산안창호전집, 총 14권, (사)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발행, 2000에 수록되었다. 이 중에 안창호의 세 가지 필명이 확인된다. 하나는 ‘산옹(山翁)’, 둘은 ‘섬뫼’, 마지막은 ‘애국생(愛國生)’이다. ‘산옹’은 주요한이 창간한 잡지 ‘동광(東光)’ 16호에 발표된 ‘合同과 分離’라는 글로부터 14회를 이은 글에 쓴 필명이다. 구술을 이광수가 윤문하여 발표한 것인데, 일제의 눈을 피해 내용 일부를 빼며("事勢不得이 빼 먹은 곳이 많습니다. 그리 알고 보아 주십시오”) 발표한 것이다. 이 잡지 1926년 11월호에 ‘山翁을 그리면서’라는 글을 통해 분명히 안창호의 필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섬뫼’는 ‘島山’의 우리말 표현이다. 이 쓰임은 역시 ‘동광’ 1926년 6월호 외 세 편의 글에서 쓰인 것이다. 스스로가 썼다고 볼 수도 있고, 편집자가 발표자의 신변 보호를 하기 위해 쓴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 ‘애국생’은 두 가지 자료에서 확인 된다. 1908년 ‘태극학보(太極學報)’ 3월호(제18호) 소재 ‘讚愛國歌’의 필자로 쓴 것으로, 이것이 안창호의 필명이란 사실은 ‘신한민보 新韓民報’ 1943년 11월 5일자 ‘애국지사의 노래’에서 확인이 되었다. 이 중 살피려는 것은 ‘애국생’이란 필명으로 안창호가 발표한 ‘讚애국가’이다. 그런데 이는 의미상 이미 존재하는 어떤 애국가를 기리는 뜻으로 지은 또 하나의 애국가인 셈이다. 이 작품을 수록한 ‘태극학보’는 1905년 일본 도쿄에 설립된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인 태극학회가 1906년 10월 창간호를 발행한 잡지이다. 처음에는 후배 유학생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선후배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 기관지로 발전하여 국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윤주(李潤柱), 문일평(文一平) 등의 의연금을 기본자산으로 하고, 회원의 의연금과 학보 판매금, 유지의 찬성금(贊成金)으로 발행하였다. 1907년 7월에는 175명의 인사들이 한꺼번에 의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편집에는 김낙영·김홍량(金鴻亮)·김지간 등이 관여했다. 배포 지역이 넓었다. 일본, 서울 및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사(共立申報社)를 통해 미주에도 배포되었다. 학보는 대개 논단·강단·학원(學園)·문예·잡보·기서(寄書)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논단에는 국내 현실과 애국적인 논설을, 강단과 학원에는 계몽적인 학문의 소개를, 문예에는 문학작품을, 잡보에는 유학생의 활동과 국내외의 정세를 실었다.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 만큼 계몽적인 학술내용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논설류도 많았다. 특히 제10호에 이원익(李源益)의 ‘愛國歌’ 등을 수록하여 발행 목적을 실현하였다. 또한 안창호에 대한 활동상을 수록하고 작품을 게재하기도 했다. 바로 ‘찬애국가’가 그 하나이다. 그렇다면 안창호가 이 ‘찬애국가’를 발표하게 한 원래의 애국가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윤치호의 ‘애국적 찬미가 제14장’, 즉 현 애국가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07년 초 귀국하면서 관심을 보인 것이 국가상징의 하나인 국가(애국가)였다. 그런데 이미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 전파된 애국가가 있었던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함께 교육사업을 하고자 하는 윤치호 작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찬하며 자신의 애국하는 노래를 지은 것이다. 찬愛國歌(찬성시 하나님 가히로 同調) 愛國生 이상의 안창호(애국생) 작사 ‘찬애국가’는 두 가지 점에서 의의가 큰 작품이다. 하나는 1908년 2월 이전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 등에서 부르고 있는 윤치호 작사 현 애국가의 존재를 안창호가 인정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은 안창호 역시 독립신문이 주도한 ‘애국가 지어 부르기 운동’에 늦게나마 참여하여 새로운 애국가를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결과는 의외로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오인하게 한 것이 된다. 이를 정리하면 이렇다.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설의 원천은 1908년 3월 태극학보에 발표한 또 하나의 애국가인 ‘찬애국가’의 존재를 오인한 결과이다. 안창호 작사 애국가는 별개이다. 그러므로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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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대성학교,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지난 회에서 ‘한영서원’과 애국가와 관련 사항을 살펴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밝혔다. 이번에는 역시 같은 시기 민족교육 학교인 안창호 설립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애국가 상황을 통해 작사자 문제를 짚어 보기로 한다. 대성학교는 1908년 9월 26일 개교하여 1912년 일제에 의해 폐교된 평양에 세워진 학교이다. 설립자는 안창호(安昌浩)이다. 평양의 김진후(金鎭厚), 선천의 오치은(吳致殷), 철산의 오희원(吳熙源) 등의 재정적 원조로 가능했다. 교육 방침은 ① 건전한 인격의 함양 ②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③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④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첫 입학생은 90여 명이었다. 이후 민족사학으로 알려져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있었다. 교장에 윤치호, 대변교장에 안창호, 교무 책임에 장응진(張應震), 교사에 차이석(車利錫)·김두화(金斗和)·나일봉(羅一鳳)·장기영(張基永)·문일평(文一平)·황의돈(黃義敦)·최예항(崔叡恒)·유기열(柳祈烈)·김현식(金鉉式)·유진영(劉鎭永)·김진초(金鎭初)·이상재(李相在), 체조교사에 정인목(鄭仁穆)·이승설(李昇卨) 등이 근무하였다. 1910년부터는 장응진을 소장으로 한 하기 사범강습소를 부설하여 교사들의 재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09년 이 학교를 중심으로 여러 사립학교들이 일본 국기 불게운동(不揭運動)을 전개한 것이 사건이 되어 폐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안창호는 이 사건과 105인 사건 등으로 곤란한 처지가 오게 되자 1910년 4월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망명하였다. 학교는 1912년 봄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하고 폐교를 맞았다. 이 학교는 윤치호가 초대 교장으로 안창호가 대변 교장이란 사실이 주목된다. 이 사실은 이광수의 기록에서도 확인 된다. 1927년 대중잡지‘東光’ 제10호에 쓴 ‘規模의 人-尹致昊 氏’라는 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윤치호가 105인 사건에 피체된 것은 안창호씨와 지기상통(志氣相通)하여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 위원장이 되고 평양 대성학교 교장이 되었었다. 청년학우회는 조선 최초의 조직적인 정치적 결사라고 할 만한 신민회(新民會)의 별동대(別動隊)였고 평양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3대 사업(정치적 결사, 산업진흥, 교육진흥)의 하나인 교육사업의 제1기 사업이요 아울러 본거(本據)였다. 이러한 사업에 수뇌(首腦)로 추대된 것이 이유가 되어 사내 총독 암살 음모사건에 수모자(首謨者)로 걸리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지기상통하여 대성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신민회의 대표로 활동하여 사내 총독 암살 음모사건의 주모자로 형을 살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결국 작사자 논란의 두 주역 윤치호와 안창호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는 지기상통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안창호는 학교 운영상 명성이 높은 윤치호를 교장으로 모셔 학생 모집과 학교 운영상의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해외 활동에 대비한 것이다. 개교식에 윤치호는 개교 환영사를 했고, 3여년을 재직하였다. 그런데 이 대성학교와 애국가의 관계도 주목이 된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계기로 드러난 사항이다. 먼저 1910년 대성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재직했던 채필근(蔡弼近/1885~1973) 목사의 증언을 살펴보기로 한다. 장로교 목사이며 신학자이다. 보기 드문 동경제대 출신의 엘리트 목회자로, ‘120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채필근은 평안남도 중화(中和)출신으로 1905년 숭실학교를 마치고 191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인 1910년부터 대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 기간에 안창호로부터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1955, 4월 기독교 전문지 ‘신앙생활’에 발표한 글이다. "내가 25세 때에 대성학교(안창호 운영)에서 수학을 가르쳤지요. 그때 내가 도산 선생에게 ‘애국가는 본교 명예교장 윤치호 선생이 작사했습니다.’란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내가 황실가(皇室歌)와 태극가(太極歌) 등 옛 노래들을 평양서 해방 후까지 보존했는데 황실가와 애국가는 전혀 다릅니다. 내 기억력에 이상이 없다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씨 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김인서 목사가 한국전쟁 중 들었던 것을 자신이 발행하는 종교전문지에 소개하여 알려진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규명작업을 벌여 대척 관계가 된 당사자인 ‘안창호는 윤치호가 작사했다고 밝혔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윤치호의 1906~1907년 작사→1910년 국민회의 ‘국민가’ 채택→국민회의 애국가로 사용→1940년 임시정부, 국민회 안익태 애국가 신곡보 사용 허가→1945년 9월의 자필<가사지> 존재라는 맥락적인 흐름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다음은 안창호의 생애와 흥사단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증언이다. 주요한은 '흥사단 맨'이다. 1920년 5월 14일 흥사단 입단식에서 이광수는 입단 번호 104번, 주요한은 105번을 받았다. 그리고 원동지역 회원으로 이광수가 1호, 주요한이 2호로 입단하였다. 임시정부 초기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함께 했고, 해방 후에 흥사단을 재건하고 방대한 안창호에 대한 전기를 저술했다. 1963년 발행된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대성학교 시절의 일부이다. "대성학교 대리 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되는 애국가에서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했다. 이에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대성학교 개교 후 안창호가 짓고,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였다는 주장이다. 허술한 짜임새의 주장인데다 명의를 바꾸었다는 것은 오늘이나 당시나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대성학교 설립과 '역술 찬미가' 발행 시점에서 오류임이 드러난다. 즉, 흥사단이 밝힌 대성학교 개교는 1908년 9월이다. 그러나 애국가인 ‘애국적 찬미가 14장’을 수록한 ‘찬미가’가 발행된 1908년 6월 25일이다. 더욱이 애국가가 1907년에 작사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러함에서 위의 '도산전서' 기록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의외인 것은 주요한이 정 반대의 주장을 한 바가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주장을 하기 8년 전인 1955년 4월 19일자 경향신문 기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주장한 것이다.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이런 주요한의 입장 변화는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후세인들이 어느 하나만 보고 편견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이 문제다. 결과적으로 첫 주장은 순수한 개인적 소신 표명일 것이나 후에 흥사단 업무를 맡으면서 압력에 의해 번복을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의 증언을 통해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가 윤치호 작사라는 말을 하였다”라고 확인하였다. 그리고 애국가가 수록된 ‘찬미가’가 6월에 발행되었는데, 그 2개월 후 대성학교에서 "안창호가 짓고 윤치호의 명의로 발표하였다”는 주장은 주요한의 왜곡이다. 결론은 "대성학교에서도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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