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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13)김종욱 =연극= [ 국도극장 28일 개관설]: 5월 초순에 연다는 국도극장이 신장한 채 여전 문을 닫고 있는데 개관 피로공연에 조선악극단이 결정되었다든가. 개관 전일 초대할 관계 당국과 문화단체의ㅏ 초대 명부를 작성했다는 등 소문은 동 극장이 전하고 있는 28일 개관설이 이번에는 정말 같기도 한데 =(藝術通信 193호 1946. 5. 22)= =영화 = [‘서울키노’ 영화로 이북 소개 ‘이북뉴스’, ‘토지는 농민에게’]: 영사막을 통하여 38도 이북의 실정을 소개코자 ‘서울키노’에서는 지난 1월 이북에 촬영대를 파견하여 기간 예의 촬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완성됨으로 공개될 날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 한다. 작품은 ‘3. 1’, ‘5. 1 ' 양 기념일의 행사 등이 수록된 뉴스와 ’토지는 농민에게‘하는 문화영화라 한다. =(藝術通信 195호 1946. 5. 24)= = 극장 = 시내 극장을 일괄 공영- 평양극장계 소식- ]: 평양극장계 소식을 하나 전문하는 바에 의하면 해방 후 평양 시내 극장은 전부를 이북에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요즈음 삼일기업사란 극장 공영기관을 조직시키는 동시에 그 운영권을 이관하여 이 기관으로써 평양 전시의 극장을 운영케 하고 있다고 하며 그리고 극장의 명칭을 다음과 같이 일신시켰다고 한다. 앵극장櫻劇場⟶ 조선영화극장, 금천대좌金千代座⟶삼일극장, 평양극장⟶문화극장, 공락극장共樂劇場⟶인민극장 =(藝術通信 195호 1946. 5. 24)= =영화 = [ 영화검열 제3보 ]: 법령 제68호에 의하여 5월 15, 6 양일 군정청 영화과 영화검열에 대한 영화는 다음과 같다. 5월 15일 ‘라라의 비행’ 1권 서울영화 5월 15일 ‘몬티의 급행차’ 2권 서울영화 5월 15일 ‘동물세계’ 1권 합동영화 5월 15일 ‘왕군 만세’ 3권 합동영화 5월 15일 ‘시계의 천사’ 1권 합동영화 5월 15일 ‘빙상화氷上靴’ 1권 합동영화 5월 15일 ‘하우의 호성狐聲’ 2권 합동영화 5월 15일 ‘세계올림픽’ 1권 합동영화 5월 15일 ‘킹, 소로몬’ 8권 김범태 5월 15일 ‘밀림의 왕자’ 5권 김범태=(藝術通信 196호 1946. 5. 25)= =영화 = [모집 중이던 조영관리인 현 사원 대표 이씨에게 발령]: 조선영화사 관리권의 귀추가 주목되던 바 작 27일 도 재산관리처로부터 동사 동인 대표 이재명씨에게 그 관리지배인 신임장이 교부되어 이로써 이 문제는 낙착을 보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회사는 조선 유일의 것으로 해방이래 전 사원의 수호로 유지된 것이었는데 그간 경기도 재산관리처가 일반에게 문화인 공모를 발표하여 적이 조선극장 문화인을 불안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보통 공장과 달라 영화인이 아니면 운영할 수 없는 특수회사라는 것도 있었겠지만 동 사원의 총의總意가 유종미有終美를 걷운 것은 업계에 빛나는 소식이다. (藝術通信 198호 1946. 5. 28) = 무용 = ‘춤’ 특별지도회 개최 ]: 조선율동체육회에서 조선 고유무용인 ‘춤’의 세계적 발전과 일반의 보급을 위하여 오는 6월 2일 오후 2시부터 시내 삼판三坂 국민학교 강당에서 무희 장추화 양을 맞이하여 일반인에 대한 특별지도회를 열기로 하였다 한다. (藝術通信 198호 1946. 5. 28) = 예술일반 = 조선예술을 널리 소개할 터: 미국 ‘예일대학교 극과장의 위촉을 받아 내조한 ’테프로‘ 미 군조軍曹는 입경 이래 2주일 조선예술계의 현상을 조사하고 작 25일 오후에 이경離京하였는데 씨는 조선예술인에게 다음과 같은 인사의 말을 전하였다. " 불과 몇일 안 되는 동안이나 기간 분망하심을 무릅쓰고 여러 가지로 참고의 자료와 기타 일체의 편리를 도와주신 데 대하여 조선의 예술인 제위에게 서면으로나마 만강滿腔의 감사를 표합니다. 기간 조사한 결과는 이미 보고한 바 있으며 이번에 귀국하면 여러분들에게서 받은 사진 50매를 수록하여 조선예술에 관한 책을 하나 발간할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조선의 예술을 미국에서 널리 소개하려고 합니다. (藝術通信 199호 1946. 5. 29) = 연극 = 연극계 총동원으로 7월에 제1회 연극제: 조선연극동맹에서는 7월 20일 경 국도극장에서 연극계를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제1회 조선연극제를 전개하기로 되었는데 작 29일 동 동맹 서기국에서는 동 행사의 진용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 연극= 안영일, 이서향, 나웅, 박춘명朴春明, 김욱, 서항석, 신고송, 박진, 채정근, 안종화 * 작가= 함세덕, 박영호, 송영, 김태진, 이운방, 박승희, 김승구金承久, 조영출, 김춘광 * 장치= 김일영, 김정환, 원우전, 김운선金雲善, 정순모鄭純模, 채남인, 강호 * 조명= 최진崔鎭, 임빈任彬, 이한승李漢勝, 이근남李根南, 박종열朴鍾烈 * 효과= 이강식李康植 * 기획= 윤세중, 박민천, 김득창, 이영부李永浮, 김학봉金鶴峯, 박두포朴斗包 * 음악= 연극동맹 * 연기진(남자부)= 서일성徐一星, 황철, 심영, 박창환朴昌煥, 박제행, 변기종, 한일송, 박고송, 태을민, 박학, 이재현, 양자명, 유현, 김동색金東色, 서성대徐成大, 장진, 이해랑, 김동원, 이동석李東錫, 김승호, 이업동李業東 * 연기진(여자부)= 김양춘, 임효은林孝恩, 남궁연南宮蓮, 유경애兪慶愛, 한동애韓東愛, 한은진, 김선영, 김선초, 진랑, 유계선, 강정애, 최승이, 김볼자=(藝術通信 199호 1946. 5. 29)= = 영화 = ‘자유만세’ 각본 심의회 ]: 고려영화협회에서는 금 30일 오후 3시부터 동 사무실에서 영화인과 문화인들을 초청하여 ‘자유만세’ 각본에 대한 심의회를 개최키로 되었다. (藝術通信 200호 1946. 5. .30) ‘자유만세’ 배역 등 스텝 결정 ]: 오렛동안 제작 준비 중에 있던 고려영화협회 제1회 작품 극영화 ‘자유만세’는 기간 배역문제로 인하여 미진되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타 역 문제를 해결하고 명 6월 1일부터 ‘크랑크’를 개시하기로 되었다 한다. 그리고 결정된 스텝은 다음과 같다. 기획- 김정혁, 제작- 이창용, 연출- 최인규, 전창근(감독), 촬영지도- 이명ㅇ李明ㅇ, 한형모 배역- 남궁 훈=독은기(조영), 박성훈朴成勳=박학朴學(서울 예극), 신미향申美香=유계선(서울 예극) (藝術通信 200호 1946. 5. .30) = 무용 = 무희 최승희 여사 불일 귀경설: 거 29일 화북으로부터 마지막 귀환 동포를 만재한 선편 2척이 인천항에 정박 중이라고 전하는 바 귀환선 중에는 우리 무용계의 명성 최승희 여사도 상륙의 날을 고대하고 있으리라고 미 소식통은 전한다. (藝術通信 201호 1946. 5. .31) = 영화 = ‘자유만세’ 각본 일부 수정 ] : 고려영화협회에서는 지난 번 문학동맹가를 초청하여 ‘자유만세’ 각본에 대한 심사회를 열었던 바 전체적으로는 좀 수정을 요할 점이 있었으므로 약간 이를 수정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 (藝術通信 201호 1946. 5. .31) ‘자유만세’ 제작을 선구영화사先驅映畵社 맹조萌助: 선구영화사는 동사 제1회 작품 ‘멀은 북에’의 제 3차 동만주 현장서 로케 계획이 요즈음의 교통사정으로 인하여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이 영화 제작을 9월까지 일단 중지하기로 하고 여가에 선구 사원 일동은 ‘자유만세’ 제작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한다. (藝術通信 201호 1946.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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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12)김종욱 얼마 전에 책임위원 이재명씨의 명의로 정식 관리 수속까지 마치고 조선영화의 재건을 위하여 활발히 움직이는 듯이 보이던 조영에 2일 오후 군정청 영화과 ‘리어든’ 중위 이하 동 직원이 광희정 촬영소에 나타나 현상공장 설비의 일부 ‘프린터’ 기와 차기置機를 군정청에서 쓰겠다는 이유로 수거하여갔다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두 기계는 영화공장에 있어서의 심장적 역할을 하는 것인 바 이것을 압수당하여 버린 동 촬영소의 기능은 치명적인 타격이라 할 것이다. 특히 백여 종업원이 해방 이래 생활면의 가진 악조건을 극복하면서도 오직 조선영화의 앞날을 위하여 결속 헌신하여 온 것도 유일한 이 촬영소를 사리자는 영화애의 이념 때문이었던 터에 그것의 일부를 잃어버린 사원들은 이제 완전히 거리에 헤매게 되었다. 비단 이것은 동사의 사원들에게 한한 문제가 아니라 전 영화계를 어둡게 하는 사실이라 하여 물의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동사 이재명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일, 영화과에 호출 받아 갔더니 그 기계를 가져가겠다는 교섭을 받았으나 우리에게 여유있는 것이면 긴히 쓰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 같은 요구를 한다는 것은 차라리 명령으로 폐쇄시킨 다음에 모두 가져간다면 모르거니와 우리로서는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몇일 전에 이때까지 공보국의 잠정승인으로 유지하던 것을 속히 정식으로 접수수속을 가지라 하여 일체를 지시해준 것도 영화과인데 불과 몇 일 지난 책임자인 나도 없는 동안 실어갔다는 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藝術通信 1946. 4. 2) <‘옥문이 열리는 날’ 10일부터 수도극장에 등장> 조선영화사에서 키노드라마로 제작을 기획 중이던 한홍규 씨작 ‘옥門이 열리던 날’은 이것을 중지키로 되었는데 이번 이것이 서울 예술극장 손으로 연극이 되어 오는 10일부터 수도극장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연출은 이서향 씨, 장치는 김일영씨가 담당키로 되었다. =(藝術通信 1946. 4. 2)= <극장입찰문제 여화餘話-낙수落穗-> 언간焉間의 극장대여 입찰을 싸고 빚어낸 1幕 희극장소는 시내 모 대 극장 사무실- 무테 안경에 일제 비행장교가 버리고 간 장화의 신사는 씨(?) 내방! ‘이 극장 정원은 몇 명이나 되며 하루 평균 수입은 얼마나 되오?’하고 거의 단판적인 질의를 하였다. 이에 응대된 지배인- 세무서는 물론 경찰서 당국으로도 이 같은 몰상식한 질문을 할 바 아니라 잠간 그 신사 씨를 바라보다가 ‘대체 어디서 왔소?’하고 반문할 밖에...여기에 신사 씨의 대답 ‘내가 이 극장을 입찰하려는데 그래서 묻는 거요.’ 그렇지 않아도 화가 치밀 판인 지배인 주먹을 쥐고 대들었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는데 또한 씨의 다음 말이 걸작! ‘민주주의 세상에 그렇게 서로 털어놓고 상의껏 하는 게 뭐 나쁠 게 있단 말요?’ 심장도 이만큼 하면 대단하지만 요즈음에 와서는 민주주의와 모리배가 사촌보다 가까워진 상 너도 나도 민주주의라니, 개탄 호乎!(퇴휴생退休生) =(藝術通信1946. 4. 3) <영사기협 기동 영사반 강화> 영사기술협회에서는 거반 대회의 결의에 쫓아 회내會內에 이동영사반을 확장 강화하여 오는 14일부터 제2차 지방진출을 실시한다는 바 그 일정과 장소는 다음과 같다. 14, 15, 2일 간 부평극장 16, 17, 2일 간 소사극장 19, 20, 2일 간 안성 애국극장 편성 영화 ‘세계 풍경’ ‘코리아 뉴스’ ‘삼림계획’ 기타 =(藝術通信 1946. 4. 4) <조선영화 제작계 현황 활발> 모든 문화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탄압에 얽매어 그들의 앞잡이노릇을 하여온 조선영화계는 해방 이후 그만큼 가장 활기를 띄고 재건의 길에 나섰으나 모든 자재의 결핍은 이 씩씩한 노정을 항상 지원케 하는데 악조건을 극복하고 대지에 봄싹처럼 일어서는 업계의 무보武步는 자못 믿음성 있다. 이제 그 현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조선영화사 ‘해방뉴스’ 제6보 제작 중 극영화 신작 준비 중 ‘서울키노’ ‘민족전선’ 제작 중 극동영화사 제3보 제작 중 조선산악회, 조선영화사 공동제작 ‘제주도 풍토기’ 제작 중 군정청 뉴스 제7보 제작 중 고려영화협회 극영화 ‘자유만세’ 기획 중=(藝術通信 1946. 4. 4) <영화직무용어 일부 제정> 고려영화협회 제작의 ‘자유만세’ 제작을 계기로 동 작품에 관계하는 감독자 안종화, 최인규, 이규환, 안석주, 윤봉춘, 전창근 씨 등은 금후 지금까지 써오던 ‘연출’을 ‘감독’으로 ‘각본’을 ‘제작’으로 새로 제정하여 사용키로 되었다 한다. =(藝術通信 1946. 4.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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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11)김종욱 <군정청 영화의 뉴스 완성-제공은 코리아영화무역-> 군정청 영화과에선 정기적으로 제작하고 있는 영화뉴스는 4월 1일을 기하여 본격적으로 일반공개키로 되었다는 바 이 배급제공은 코리아영화무역회사를 통하여 실시될 터이라 한다. =(藝術通信 1946. 3. 24)= <영화도서 교환회 개최> 전 조영 계획과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변동성卞東星씨를 중심으로 금번 서울 시내 영락정 ‘신신다방’을 본거로 영화도서(잡지) 교환회를 개최한다. 일반의 많은 이용을 바라고 있다. =(藝術通信 1946. 3. 25)= <시장독점을 기도? 미 영화 수입공개에 대하여-영화특사 ‘존’씨 중대언명-> 미국영화 조선 수입로의 개척을 위하여 화부華府 전쟁국戰爭局 영화관계자 ‘존. 한스’씨 외 1명이 작 26일 공로로 입경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그들은 장구長驅 여행의 피로도 쉴 새 없이 금 27일 오전 중에 벌써 한성극장협회 이사장 홍찬씨를 필두로 조선영화사 책임위원 이재명씨 코리아영화 무역회사장 이한이李漢栮씨 등을 군정청 영화과에 초빙 정식 접견을 하고 금후 미영화 국내공개에 대한 협력을 구한 바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접견석상에서 전기 ‘존. 한스’씨는 미국영화의 조선배급 방법에 대하여는 종래의 배급업자의 체인을 거치지 않고 전혀 자기들 손으로 극장을 상대하여 직접 취인을 할 작정이라고 주목되는 언명을 하였다는 바 이것은 어떻게 보면 생산자로부터 즉시 소비자에게 향유享有된다는 가장 이상적인 상업논리로 표명하는 듯도 하면서 기실 대국大局으로 보는 국가경제 상으로는 적지 않은 간막間幕이 내포되어 있다 하여 업자뿐 아니라 일반 영화계에 막대한 파문을 던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동 접견에 참석하였던 극협 홍찬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극장측으로는 종래의 배급자가 있어도 그 비율엔 하등의 차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제시는 매우 미묘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극장 관계자도 진정한 문화인으로서 조국을 위한다는 끓는 성의를 받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藝術通信 1946. 3. 25)= 연합국의 승리로 조선의 해방을 가져온 오늘날에도 예술가들의 창조의 요람이요 예술의 전당인 극장의 대부분이 종전 일본인의 친근자 모리배의 부정매수, 폭력적 접수 등등으로 되어 그 관리 운영이 착취적인 일제시대의 방침을 그대로 답습하여 극장예술은 위축되고 예술가들의 생활은 빈사상태에 처하여 민족문화 수립에 커다란 지장과 해독이 되어왔습니다. 그런데 금번에 발표된 입찰문제는 그 진의가 나변那邊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극장 예술가들이 심사숙고하여 검토한 끝에 몇 가지 결론을 얻었습니다. 1. 극장을 일반주택과 동일시하여 대여입찰한다는 것은 극장이 민족문화 발전의 핵심체라는 것을 도외시한 감이 없지 않고. 1. 입찰의 기준이 명확치 않으므로 사리사욕에 사이비 문화인과 모리배의 도량跳梁할 기회를 주고 종전의 모든 폐해를 답습 내지 조장시킬 우려가 있고, 1. 만약 이러한 결과가 초래된다면 예술적 기아와 생활 상 빈사상태에 있는 극장예술가와 다대수多大數의 극장 종업원의 전도가 참담할 뿐이고 더구나 우리 민족문화 수립에 지대한 암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이 한갓 우리들의 기우杞憂로 끝이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고도로 발달한 미국문화를 향유享有한 미 군정당국에 대한 조선 문화인의 기대는 크기 때문입니다. 상기한 결론을 시정하기를 원하며 우리들은 몇 가지 우견愚見을 피력하여 드립니다. 1. 극장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세계의 어느 연극사를 들춰보더라도 극장과 극장예술의 이해를 달리 하고는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심심深甚히 양해하여 극장 전부를 극장 예술가에게 일임할 것. 1. 극장 관리에 대하여: 극장 관리는 조선 현황에 비추어보아 문화를 잘 이해하고 그 발전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헌신할 수 있으며 극장 운영에 정진할 수 있는 량심적인 문화인이라야 할 것. 1. 종전 관리인에 결함은: 극장 관리인이 아무런 근거 없이 문화인을 자처하더라도 앞 날 이 진정한 극장 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유해한 존재라 하겠으니 그 이유는 종전에 극장 관리에 경험이 있다는 사람의 다대수는 문화면을 떠나서 부패하고 비속한 모리적 목적과 방법을 습득하였기 때문입니다. 1. 인선에 대한 우리들의 희망은: 이러한 공정한 극장 관리인을 선택하는 데 있어 극장 예술가로 하여금 추천케 하고 심사, 고선에 참여케 하여주기를 바랍니다 - 1946년 3월-(藝術通信 1946.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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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10)김종욱 <영화감독구락부에서 강령과 사업 회원을 발표> 기보한 바와 같이 조선영화감독구락부는 현역과 14 감독자로서 결성되었는데 동회에서는 그 강령과 사업, 그리고 회원을 작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 모인 뜻 = 1. 각자의 사상을 존중하며 상호친목을 위함. 2. 각자의 예술적 역량을 발휘하여 우리 영화의 향상을 도모함. 3. 외국영화와 교류하여 세계적 발전에 노력함. = 사업 = 기관지 발행, 영화도서 출판, 내외영화 감상회 개최, 영화를 통한 계몽사업 연구 발표, 문화 각 부문과의 협의회 개최, 외국영화 감독과의 교환交驩. = 회원 = 안종화, 이규환, 안석주(간사), 윤봉춘, 이구영(간사), 방한준, 박기채, 전창근, 이병일(간사), 안철영, 김영화, 서광제, 윤용규, 최인규 =(藝術通信 1946. 3. 8)= <조선영화사 기획심의회 작일 오후 동사에서 개최> 기보한 바와 같이 영화동맹과 제휴 공동주최의 조선영화사 신작품 기획심의회는 그동안 사정에 의하여 연기되고 있던 바 작일 오후 5시부터 동 본사 회의실에서 김태준, 임화, 이태준, 김남천, 이원조 등 일반 문화계 제씨의 출석을 맞아 개최되었는데 그 결과는 매우 기대된다.=(藝術通信 1946. 3. 9)= <극장협회에서 금일 이사회 소집> 서울극장협회에서 금일 오후 한 시부터 동 회의실에서 이사회를 소집한다는 바 토의 안건은 흥행세 문제와 흥행취체령, 그리고 종업원 동맹 결성 등이라는데 이사 제씨는 빠짐없이 참석해주기를 사무국은 요망하고 있다.=(藝術通信 1946. 3. 9)= <미국 명작영화 ‘바람과 함께 가다’ 돌연 입하! 그러나 공개는 과연 될 수 있는가?> 태평양전쟁 발발 전 전 영화인의 기대 속에 그 공개가 주목되었으나 일제의 야만적 보이코트에 의하여 부득이 입하되지 못하고 말았던 명화 ‘바람과 함께 가다’가 금번 상해에서 귀래한 모 상인의 손으로 조선에 입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총천연색 전 후편 25권으로 그 원작소설로도 미국 독서계의 베스트셀러를 획득하였더니만치 문제의 기대작품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입하한 모씨는 벌써 서울 시내 모처에서 시사회까지 가져 50만원이라는 거금으로제3자인 모씨에게 전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 작품은 전혀 영어판 그대로 이것과 또한 이입경로移入經路가 합법성을 띈 것인지 그리하여 우리 국내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순로順路로 공개될 것인가 자못 의문시되고 있는 바 이에 대하여 배급계의 모씨는 다음과 같은 견해로 말하고 있다. "나는 위선 그것의 이입수속의 법적 근거가 과연 확실성 띈 것인지 그리고 둘째로는 미국 제작 본사가 시초에 상해에 제공할 때 전 극동에 긍한 상영권이 붙어있었던 것이라면 불연이나 상해 혹은 중국에 한정된 것이라면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전 양자가 모두 오케이라고 치더라도 그 귀중한 장편작품을 조선어 스퍼 없이 공개가 가능하고 성공할 수 있는가, 이런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藝術通信 1946. 3. 9 ) <코리아 영화무역 정식 진발進發 미화 ‘태평양의 분격’ 외 2편 불일 공개> 기보한 바와 같이 미국영화의 국내수입 공개를 주목적으로 창설된 코리아 영화무역회사에서는 금번 군정청 공보국의 알선으로 드디어 미국 영화의 국내 공개 권을 작 11일 정식으로 취득하였다. 그런데 그 제1차 제공작품은 태평양전쟁 중에 미국 육군성 정보부에서 제작 완성한 우리 말 해설판 기록영화 ‘태평양의 분격’을 위시하여 ‘방풍림防風林’ ‘날개돋친 재화災禍’ 등 3편이라는데 이것들은 전부 동사의 배포網 지사 혹은 출장소를 통하여 전국 일제히 제공되리라 하는데 목하 미설지구未設地區에 그 조직을 확립코자 널리 희망자를 모집 중이다. =(藝術通信 1946. 3. 10) <영사기술협회 기구 변경> 조선영화기술협회에서는 기보한 바와 같이 거반 각 극장 주임 기사 전원을 소집하고 임시대회를 개최한 바 있었다는 바 회 자체의 건실한 전진을 위한 발본적拔本的 협의를 가져 기구도 다음과 같이 개혁하고 위원을 아래와 같이 선임하였다. 그리고 앞서 종업원동맹에 동 협회를 대표하여 출석하였다고 전하여지는 모는 동회와는 전혀 관계없다고 말하였다. 회장 최정수崔正洙, 부회장 이기환李基煥, 이사 장석삼張錫三, 한우섭韓友燮, 강상봉姜相奉, 신중균申仲均, 김복성金福松, 지창수池昌洙, 조한호趙漢晧, 유인성柳仁成 =(藝術通信 1946. 3. 12)= <국립극장 운영회 규약> 별보 확대위원회의 준비사무국에서 제시된 규약은 그 초안에 정정 요점 개소個所를 첨삭하여 본 전문을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규약 제1조 본 극장은 국립극장이라 칭함. 제2조 본 극장은 국가를 대하여 본 극장 운영위원회가 차를 경영함. 제3조 본 극장은 조선의 극장 예술의 충실 발전을 도圖하여 인간정조의 순화함양醇化涵養에 자資하는 동시에 문화추진의 일익됨을 목적함. 제4조 본 극장은 전조前條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좌기 각항을 영위함. 1. 우수예술단체의 조성. 1. 내외 우수영화의 추장推獎. 1. 국제 우수예술단체의 초빙 1. 예술박물관, 예술도서관, 종합예술학원의 부설. 1. 기타 필요한 사업. 제5조. 본 극장에는 운영위원회를 치置함. 운영위원회는 본 극장의 운영방침에 관한 사항을 심의 결정함. 운영위원회는 차조次條의 5분과위원회에서 각 1인 식 선출된 5인의 위원과 극장장, 부 극장장으로써 구성함. 제6조 본 극장에는 연극, 음악, 영화, 가극, 무용의 5분과위원회를 치함. 분과위원회는 당해當該 부문의 향상 발전을 위한 제안과 당해 부문 단체 급 연극장의 질적 심의에 당當함. 분과위원회는 관계 방면에서 적당 비율로 선출된 양간 명의 권위자로써 구성함. 제7조 본 극장에는 극장 장 1인, 부 극장 장 1인을 치함. 극장 장은 극장 운영의 일체를 통할함. 부 극장장은 극장장을 보좌하고 극장 장이 유고한 시는 그 권한을 대행함. 극장장 및 부극장장의 임기는 3년으로 함. 단 중임도 무방함. 제8조 본 극장에는 사무국을 치하고 그 안에 좌의 부서를 치함. 총무부, 기획부, 무대부, 총무부는 서무, 경리 2과로 기획부는 편성, 선전의 2과로, 무대부는 도구, 조명, 영사의 2과로 각각 분장함.국에는 국장, 부에는 부장, 과에는 주임을 치하여 그 사무를 관장케 함. 제9조 운영위원회는 극장장이, 분과위원회는 극장장, 우는 당 분과위원장이 차를 정기, 우는 수시로 소집함. 운영위원회 우는 분과위원회는 위원 반수 이상의 요구가 있을 시는 극장장이 차를 소집할 의무가 있음. 분과위원 급 운영위원은 연봉 원圓으로 함. 분과위원 급 운영의 임기는 1년으로 함. 단 중임도 무방함. 제10조 극장장과 부 극장장은 운영위원회에서 차를 선거함. 단 피선거권은 일반 유능한 인사에게 있음. 직원의 임면任免은 극장장의 권한에 속함. 제11조 본 극장의 수익은 제4조 각항의 조성금의 필요에 의하여는 일반의 기부로 수납할 수 있음. 제12조 본 극장의 경리는 매년도 말 감사의 승인을 요함. 감사의 요구가 있을 시는 수시 검사 요함. 감사는 2명으로 하되 운영위원회에서 선거함. 단 피선거권은 운영위원회 이외의 인사人士가 있음. 제13조 본 극장의 사업연도는 4월 1일로부터 익년 3월 말일까지로 함. 단 본 극장의 경리는 매년도 말 감사의 숭인을 요함. 제14조 본 규정의 수정 우는 개정은 운영위원회에서 차를 행함. 제15조 본 규정은 1946년 4월 1일부터 차를 시행함 =(藝術通信 1946. 3. 13)= <흥행취체령 제정을 앞두고 연극, 영화 양 동맹에서 건의서를 작성 제출> 기보한 바와 같이 새 흥행 취체령의 제정을 위하여 군정청 경무국 공안과公安課에서는 지난 번 각 무대예술관계자를 초청하여 이에 대한 사전 의견을 청취한 바 있었거니와 그 뒤 영화동맹에서와 연극동맹에서는 이것의 건설적이며 민주적인 입법의 제정을 희망하고 그에 협조하는 의미로 각각 금후 취체에 대한 견해를 성문화成文化하여 건의 제출키로 되어 목하 작성 중에 있다 한다.=(藝術通信 1946.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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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9)김종욱 <38도 이북 영화동맹 위원장엔 오영진 씨> 38도 이北에 영화동맹이 결성된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금일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지난 18일(2월 18일) 영화동맹의 결성식이 평양에서 거행되었다는 바 당日 피선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한다. 위원장 오영진, 부 위원장 이덕훈李德勳, 서기장 김치근金治根=(藝術通信 1946. 2. 23 )= <화신영화관 지배인 경질> 백화점 화신 내 옥상에 있는 화신영화관은 본시 문화영화 전문의 극장이었던 바 해방이래 극영화관으로 전향하여 김철수씨金哲洙氏를 지배인으로 영업 中이던바 금번 동씨는 사임하고 후임으로 동 백화점 영화과장 민영성閔泳星 씨가 승격 취임하였다. 씨는 전 동점 계획과 주임이었던 분이다.=(藝術通信 1946. 2. 23 )= <‘서울키노’ 작품 ‘민족전선’ 로케 대 지방 출장> ‘서울키노’ 창립기념작품 계몽영화 ‘민족전선’은 동인 제씨에 불굴한 노력으로 기구 기타 제반설비가 불비임에도 불구하고 약 2개월 간에 달하여 촬영을 계속 중에 있는데(과반 모지에 촬영완료란 오보) 동사에서는 이번 천안테러 사건에 정보를 접하고 이 진상을 채집彩輯하기 위하여 촬영 최순흥崔順興 씨를 수반으로 21일 향 천안으로 출발, 약 1주일 내 귀경예정이라고.=(藝術通信 1946. 2. 23 )= <대륙극장 명칭 구 단성사로 광복!> 대륙극장 명칭이 구 단성사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과반 각지를 통하여 보도된 바 있었는데 이것은 전연 오보誤報? 대륙극장에서는 오는 삼일운동 기념일을 계기로 하여 당국의 정식인가를 교부하는 동시 대륙극장 현 명칭을 구 단성사로 광복 재출발한다고.=(藝術通信 1946. 2. 23 )= <속속 등장하는 구작 조선영화들 작품의 량심적 선택의 필요!> 해방과 더불어 문화계는 하루같이 잊어버렸던 자주문화에의 복구로 분망한데 영화계에서도 이즈음 그 같은 이념에서의 추구인가 그렇지 않으면 프린트 난의 임시 응변책에선가. 하여간 오랫동안 어두운 창고 속에서 서생원鼠生員과 벗하던 구작 조선영화가 속속 등장되고 있다. 즉 명 24일(2월 24일)부터는 서울극장의 ‘돌쇄’ ‘금붕어’ 장안극장의 ‘철인도’ ‘춘풍’ 등을 갖고 각각 5일간 공개하는 것이 그것인데 업계의 유지는 말하되 ‘프린트의 기근책으로만 그 본의가 있다면 어떠한 강구가 있어야 하리라.’라고 말하고 있다.=(藝術通信 1946. 2. 23 )= <장안극장의 음악영화 ‘미완성 교향악’ 각계 남녀 중학생 단체입장으로 성황> 기보한 바와 같이 장안극장의 ‘未完成 교향악’은 공개이래 각 남녀 중학생 단체입장으로 연일 호평을 이루고 있는데 최종일인 금일은 경기, 상업, 진명고녀 각각 2백명의 단체입장을 보아 조조부터 인기를 정하고 있다. =(藝術通信 1946.2. 23)= <해외문화와의 교류를 위하여 ‘코리아영화무역회사’ 발족, 불일 미화를 다량 입하!> 다사다난한 건국대업 노정에 영화문화가 금일처럼 큰 역할을 하며 또한 시급을 요하는 때는 다시 없을 것이다. 이에 영화를 통한 대외선전과 외국문화와의 교류를 주목적으로 군정 당국의 양해밑에 일작 23일(2월 23일) 실업, 문화. 영화계 중진들로 자본금 5백만원 전액 불입의 ‘코리아영화무역회사’가 서울시 남대문 1정목 5번지에 창립되었다. 동사에서는 위선 미국 저명 8사 작품과 국내에서 소비될 기재 약품의 일수一手 수입을 비롯하여 앞으로는 국내에서 제작될 우수작품의 수출까지 하리라는 바 벌써 미화 다량 수입에 대한 확실한 성안이 서서 불일 본격적 공개에 착수한다 하며 이에 따라 38도 이남 각 주요도시에 출장소와 그 책임자도 모집 중이라고 함에 회사의 창립은 건국문화수립의 혼돈된 이때 매우 기대되며 그 중요간부는 아래와 같다. 사장 이한상李漢相, 중역 이관구李寬求, 송덕삼宋德三, 홍찬 외 수씨 =(藝術通信 1946. 2. 24)= <한라산 학술조사대에 조선뉴스반도 수행> 기보한 바와 같이 제주도 한라산 학술조사대 동계반冬季班의 편성과 함께 그 일행과 함께 수행하여 그 조사보고를 영화를 통하여 기록하는 한 편 그 활약상황을 뉴스로 채집하려고 벌써부터 대기준비 중에 있던 조선영화사에서는 드디어 명 26일(2월 26일) 동대의 출발과 함께 이에 뉴스 영화반을 동원시켜 용약 가담 출발키로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화반의 구성은 촬영기사 이용민씨를 반장으로 임병호林炳鎬 등 정예精銳인데 특히 현실적 문제로 보여 그 귀추는 期待된다. = (藝術通信 1946. 2. 24)= <영화감독구락부 결성회는 28일로 연기 제2차 결성준비회 개최> 기보한 바와 같이 영화감독구락부 결성대회는 일작일 오후 5시부터 계몽구락부에서 개최예정이던 바 강령제정 기타의 준비관계로 동 회의는 제2차 준비회의로 전환시켜 개회되었다. 그리하여 정식대회는 오는 28일(2월 28일) 소집된다고 동일 참석 감독은 현역 12씨였다. = (藝術通信 1946. 2. 25)= <영동 주최 3 1 주간 제2회장 ‘제일극장’은 명일부터 폭소왕 신불출 대인도 출연 개막> 영화동맹 주최 삼일기념연합 명화주간은 일작일 국제극장의 제1회장부터 연일 성황 리에 개막되고 있는데 이어서 제2회장 제일극장은 명 27일(2월 27일) 낮부터 속개된다. 상영영화는 소련 뉴스 우리 말 판 뉴스, ‘日本 항복순간 미조리 함상의 감격’과 영국영화 ‘킹 소로몬’ 그리고 폭소왕 신불출 대인의 만담도 병연倂演된다. 그리고 제3회장의 서울극장, 제4회장의 단성사도 3월 1일부터 열린다. = (藝術通信 1946. 2. 25)= <조선시초의 뉴스映畵와 ‘쌍옥루雙玉淚’ ‘낙화유수落花流水’ 시대(상)- 映畵 연극춘추-> 동경에서 신문배달, 인력거부 등 헤일 수 없는 직업으로 전전하면서도 나는 영화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1924년 스물 세 살 되던 해 나는 서울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로 조선배우학교 영화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여기에 대하여는 그때 학생이던 이금룡씨도 말했지만 지금 창극작가로 활약하는 김아부金亞夫 씨와 그밖에 박제행朴齊行, 양로건梁露健 씨 다 기억도 새로운 학생들이었고 어쨌든 매란국죽梅蘭菊竹 졸업반에 160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이 학교를 세우는데 물적으로 큰 원조를 준 이는 영화변사로 유명하던 김서정金曙汀 씨였던 것도 잊지 못할 일이다. 이 학생들을 동원하여 우리가 ‘심청전’을 제작하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마침 윤백남씨가 계획에 착수하여 드디어 그 제명의 쟁의爭議까지 일으켜 우리가 ‘심청전’을 원제대로 쓰게 되고 윤씨는 ‘전傳’자字를 빼고 ‘심청’이라고만 명명하게 되는 등 진화珍話도 그리운 추억이다. 그러나 우리들 ‘심청전’은 성사 못하고 말았다. 학교도 연극과 영화가 자연 분파로 되어 나는 이필우 씨와 제휴하여 단성사를 자본 백으로 고려영화제작소를 을축년 봄에 세우고 ‘쌍홍루’라는 작품의 연출을 맡게 되었다. 이 을축년과 수해라면 재해 사상에도 특기될 대홍수였지만 완성된 작품도 초일부터 장마 때문에 흥행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나종엔 을축년 홍수년에 ‘누淚’자字를 붙어도 ‘쌍雙’으로 붙은 작품을 만들었으니까 성공 될 이치가 있겠느냐는 에피소드를 지어내었다. 이 작품 제작 중에도 가진 풍파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후일 유명해진 이경설李景雪이가 그때 조수 이명우 씨의 소개로 배우 지원을 온 것을 코가 낮다고 쫓아버린 일도 있었다. <계속> =(藝術通信 1946. 2.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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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8)김종욱 = 국악 = 국악원 창립기념으로 3백여 명 출연의 결정판 ‘대 춘향전’을 공연]: 창설이래 실천내용과 진용을 강화 중에 있던 국악원에서는 금반 그 첫 기념공연으로 아악, 창악, 무용을 겻들인 ‘대 춘향전’을 공연한다. (藝術通信 51호 1945. 11. 29) = 영화 = 고려영화주식회사, 국國을 대표할 대 회사를 목표로 ‘부’식式 공모公募 5천만원, 대증자책을 계획 ! ] : 구 조선문화환등주식회사를 경영하던 최완규崔完奎씨는 9월에 화사를 고려영화주식회사로 명의변경 수속함과 동시에 195,000원의 전액 불입영화회사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는 바 금번 다시 이를 대 확장하여 자본금 5천 만원 전액 불입의 방대한 증자책을 세워 근일 그 주식공모에 착수하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 놀라운 거자巨資의 주식공모에도 매 주식 응모자에게 ‘부레미앙’ 부식附式의 첨단적 방법을 취하여 어디까지든지 대중 주주의 획득을 위주하는 동시에 종래와 같은 소수 출자자의 권리주장으로 예술가들이 착취 당하여 온 구 작폐를 시정할 작정이라고 한다. 이 전래 미문의 놀라운 계획을 발표한 동사 최완규씨는 다음과 같이 그 포부를 말한다. "영화랑 본시 인기의 국가적 예술이며 기업이다. 한 두 사람의 잡음에 얽매어 고통 받을 필요가 없다. 반드시 인기인 그 본질에 의하여 이 방법은 성공되리라고 확신하는데 늦어도 연래로는 주권과 선전물이 완성될 것이므로 신정부터 대대적으로 공모에 붙이는 한 편 가장 이상적이며 가장 완비된 대 촬영소건설에 착수할 것을 기약한다.”(藝術通信 52호 1945. 11. 30) 홍찬 씨 여전 관리인 겸 종업원 대표로 수도극장 작야부터 원만 개장 ]: 26일 돌연이 미군정청 접수 봉인으로 폐문 중이던 수도극장은 그지간 경영자가 변경되는 등 여러가지 소문을 업계에 전파하고 있었던 바 여전히 전 경영자 홍찬씨가 이번에는 관리인이면서 동시에 종업원 대표라는 새 형식으로 정식 공탁금 불입을 완료하고 일단락을 지어 작야부터 원만히 개장 허가령이 내려 흥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藝術通信 52호 1945. 11. 30 영화본부에서 ‘해방뉴스’를 갖고 국군준비대에 위문 ]: 조선영화본부에서는 새나라의 국방군으로 편성된 국군준비대 전원을 위문코자 금일 경춘 연선 가릉佳陵의 전대全隊에 ‘해방뉴스’ 전편 이동영화반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같은 위문으로 중협문학본부 위원 임화, 김남천, 이원조씨등의 강연도 있을 예정이라고. (藝術通信 52호 1945. 11. 30) =음악= 중앙신문사가 음악콩쿨 주최를 계획 ]: 해방이후 서을 구 상공신문사 자리에서 새로 발행된 중앙신문사에서는 조선음악가협회의 협력을 얻어 전국적인 음악 콩쿨을 계확하는 중이라고 하는 바 종목은 두 가지로 첫째는 전국민이 널리 부를 웅대하고 건전한 대 애국가곡의 모집과 둘째로는 신 음악인의 국가적인 등용의 길을 여는 경연으로 보이는 바 실시 시일과 기타 자세한 것에 대하여는 작일까지 음악협회 측과 협의중이었으므로 금명간 동사에서 발표될 모양이다. (藝術通信 52호 1945. 11. 30) = 문학= 전국작가대회를 준비 12월 중순 중앙협의회가 주최 ]: 조선문화의 해방문화 전선戰線의 통일을 목표로 조선 문화단체를 총망라하여 결성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선 오는 12월 중순 전국작가대화를 개최하려고 방금 준비 중이라고 한다. 때마침 혼란된 현 계단의 정국에선 정당만을 위주한 통일로는 돨 수 없다. (藝術通信 52호 1945. 11. 30) = 영화= 조선영화 새 건설엔 완전한 기계의 설비부터 ‘미쎌카메라’ 1대 11만원 야也-최근 내착된 ‘미쎌’사 상보 소개(영화사업경제과)- ] : 해방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의 억압 밑에서 신음하던 조선영화계는 자못 활발한 기세를 올리고 잇다. 그러나 조선영화의 새로운 건설엔 실제에 있어서 허다한 난제가 수두룩하다. 그 중에서도 재래 가장 긴요했으면서도 가장 빈약했던 기계적 설비의 완성은 제일 시급한 문제이다. 한 채의 스테이지, 완벽한 녹음기, 그리고 촬영기와 현상 등 어느 것 하나 조선영화계에는 쓰일만한 것이 없다. 스테이지만하여도 창고였고 촬영기란 동시녹음 한 번 할 수 없는 태고식 고전(?)품이다. 지금 다시 이것들을 울어들고 영화를 건설하려고 하는 영화인은 한 사람도 없으리라. 당연 누가 하던지 새 기계, 공장을 이루어야 한다. 본사는 이런 주장 아래 위선 그 기계설비에 대한 자료수집에 착수하여 왔다. 이제 미군 영화반에 관계하는 모 중위의 호의로 미국 ‘미쎌’ 카메라회사의 상보 1945년 10월 발행판을 입수하였는데 그 내용의 대강과 현 시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말할 것도 없이 영화의 문명국은 미국이며 그 영화이론을 완성한 것은 소련이라고 볼 것인데 다시 영화의 공학적인 면을 완성한 나라는 미국이다. 그 나라에서도 이 회사의 제품이 가장 초고급이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미쎌’은 현재까지 전 세계 시장에 4, 5백 대밖에 반포되지 않은 것이며 조선엔 한 대도 수입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 영화인은 이 기계 한 대만 가지면 걸작 이상의 걸작을 내겠다고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모른다. 그러나 동 회사의 상보는 벌써 '미셸'보담 한 걸음 더 나은 ’사운드모델‘ 이란 것이 제작되어 전미全美는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바 이 기계의 시가는 ’센프란시스코‘ 현품 도渡 가격이 6411.50인데 거기에 선가船價와 세관이 첨가添價될 것이다. 어쨌든 현재의 일본 화폐로 환산하면 약 11만 여원의 정도인데 예기컨대 명춘이면 동아의 전역에도 판매상로가 열리리라고 기록되고 있다.(이하 부속품 내역 가격 별재) (藝術通信 53호.1945.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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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김종욱 일간예술통신 ‘창간사’ <예술통신의 사명> 일본의 제국주의적 압박의 질곡桎梏 하에 있든 조선의 예술문화는 8월 15일의 동안에 이르면서 우리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의 예술문화 위에 찍혔던 제국주의 지배의 흔적은 일조에 소멸消滅되는 것이 아니다. 기인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혹은 국수봉건주의國粹封建主義로써, 혹은 경박輕薄한 취화주의吹化主義로써, 혹은 구하기 어려운 분파주의分派主義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이 흔적은 재출산된다. 예술문화에 있어서도 보다 더 완전한 해방을 위한 투쟁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투쟁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는 인민대중 속 깊이 예술의 기초를 수립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술통신’은 이러한 임무의 일단을 지고 탄생하였다.(藝術通信 1호 1945. 10. 2 )=문학-강사는 다음과 같다. 10월 31일 ‘계몽문학론’ (김남천金南天) ‘민족통일전선과 문화운동’(임화林和) 11월 1일 ‘인민연극의 과제’(안영일安英一) 11월 2일 ‘문학의 지도성’(김기림金起林) 11월 3일 ‘문학과 세계관’ (이원조李源朝)(藝術通信 1호 1945. 10. 2) = 영화-조선연극 영화학교 설립 29일 기성발기인회 개최 일본제국주의의 노예적 문화정책에서 해방된 조선 연극 영화인들은 진실한 조선 문화의 일의적 사명을 완수하는 데는 무엇 보담도 신인양성이 급선무라 하여 벌써부터 연극 영화의 연기자 공동 양성기관을 갖고 준비 중, 지난 29일(9월 29일) 오후 세시에 연극 영화 유지 안영일, 김일영金一影, 송영宋影, 심영沈影. 이강복李康福, 문웅文雄, 박창환朴昌煥, 박영호朴英鎬, 이재명李載明, 윤상열尹相烈, 박기채朴基采, 독은기獨銀麒, 김한金漢, 방한준方漢駿, 이금룡李錦龍, 윤백남尹白南, 양세웅梁世雄, 김성춘金聖春, 이병일李炳逸, 한효韓曉, 김정혁金正革, 차명진車明進 등 제씨가 영화본부회의실에 모여 조선연극영화학교 설립 발기인회를 열었다고 한다. 회의는 김정혁씨 사회 하에 기성방법 토의에 들어가서 양성 기간은 6개월, 교수는 낮[晝]으로 하며 양성인원은 남녀 합하여 70명으로 하되 중등 정도의 졸업자, 그리고 설립기금은 10만원 정도. 개교는 11월 1일로 할 것 등을 토의하여 이런 조건을 부대로서 일체는 준비위원회에 일임키로 하고 동 4시 반에 폐회하였다. 그 준비위원은, 안영일, 송영, 박기채, 윤백남, 한노단韓路壇, 안종화安鍾和, 김한, 독은기, 박영호 제씨가 선정되었으며 임시사무소는 남대문통 영화본부라고 한다.(藝術通信 1호 1945. 10. 2 ) 미국신문기자단 조선영화 ‘심청’을 감상 조선에 진주한 미 종군기자단 일행은 지난 26일(9월 26일) 오후 한 시 조선영화사에 찾아와서 조선영화 ‘심청’의 시사를 감상하였는데 시사가 끝난 다음 동 기자단 대표 ‘리-든’ 대위는 "기술 여하는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이야말로 조선의 참다운 미를 발견하였다. 특히 중요한 테마라고 생각되는 가련한 부모에게의 효도는 감격하고도 남음이 있다.” 라고 찬사를 보내고 동석한 주연 배우 김소영金素英씨에게 사인을 청하는 등 화창한 분위기를 이루었다.(藝術通信 1호 1945. 10. 2) = 해방기록영화 뉴스 제 1-3집 8월 16일 이래 조선영화건설본부가 편집하여 온 뉴스는 벌써 3집까지 완성되어 공개할 시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 역사적 기록이야말로 각 계 각층의 기대가 자못 클 것인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집 1) ‘8월 16일 서울의 감격’ 2) ‘재감在監 사상범 석방’ 3) ‘건국준비위원회 발회 광경’ 4) ‘일본인의 당황상’(藝術通信 1호 1945. 10. 2) 미군 제1차 검열에 과거 상영금지되었던 미공개작품 등 조영朝映 제출 6작품 전부 통과 기보한 바와 같이 미군 씨 아이 씨에서는 조선영화가 재고한 필름을 검열 중이었는데 작 2일(10월 2일)까지 동사가 제1차로 전형 제출한 다음의 6작품은 전부 무사히 검열에 패스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는 그 전 일본 검열이 통과시키지 않았던 이태리 작품 ‘일곱 처녀’도 있어서 이 미봉절 수난의 작품도 드디어 모든 문화의 해방과 함께 어두운 창고 속에서 광명의 빛을 받게 되었다. ‘7처녀(이태리 작품)’ ‘여자만의 도시(이태리 작품)’ ‘몬테질의 상속자(이태리 작품)’ ‘심청(조영)’ ‘대장 부리바 신판(불란서 작품)’ ‘소년 슈바리에 감격(불란서 작품)’(藝術通信 3호 1945.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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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6)김종욱 대조선 개국 오백 오회 기원절 축사를 팔월 십삼밀 오후 세시에 독립관에서 행하는데 국기를 높이 달고 그 아래 화초로 단장하였는데 정부 대소 관인과 여러 학도와 인민이 많이 모였으며 각국 공령사와 신사와 부인들이 각기 예복을 갖추으고 대대이 앉았는지라 그 축사하는 절차를 보니 처음에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축수가를 불러 가로대 오백여 년 우리 왕실 만세 무궁 도으소서 찬송하니 외국 부인이 악기로 율에 맞추어 병창하더라 둘째는 회장 안경수 씨가 개회하는 뜻을 연설하고 셋째는 한성판윤 이채연 씨가 학부대신 이완용씨를 대신하여 국민의 당연히 할 직무를 연설하고 넷째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뮤국화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나라 우리 임금 황천이 도우샤 임금과 백성이 한 가지로 만만세를 즐겨하여 태평 독립하여 보세 하니 외국 부인이 또 악기로 율에 맞추어 병창 하더라 다섯째는 미국 교사 아펜셀러씨가 영어로 조선에 거류하는 외국 사람들을 대하여 각기 당연히 할 직무를 연설하며 여섯째는 의사 제이슨 씨가 조선 관민들을 대하여 진보하는 것을 연설하고 일곱째는 배재학당 학원들이 나라 사랑하는 노래를 부르니 외국 부인이 또 악기로 율에 맞추어 병창 하더라 여덟째는 전 협판 윤치호 씨가 기원절일 문제를 연설한 후에 탁지대신 심상훈 씨가 제이슨 씨와 아펜셀러 씨의 연설한 것을 감사하다고 말하더라. 다음에 다과례를 행하고 날이 저문 고로 다 헤어져 돌아가더라. 무궁화 노래 一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후렴) 二. 애국하는 열심 의기 북악같이 높고 충군하는 일편단심 동해같이 깊어 三 천만인 오직 한 마음 나라 사랑하야 사농공상 귀천 없이 직분만 다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 황제 황천이 도우샤 군민공락 만만세에 태평 독립하세 現代에 無窮花 木槿花라고도 하였으니 목근화를 그 당시 무궁화 비슷이 발음하여오던 모양이랍니다. 이는 지금 일본에서 무궁화 즉 槿花를 ㅇㅇㅇ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 당시 발음이 ‘무궁화’ 비슷이 혹은 와전되어 ‘무궁화’라고 俗鄕에서 불려 내려왔는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槿花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같이 無窮花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젊은 근대의 일이라 합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 오륙년 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게 되어 양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때의 선진이라고 하던 尹致昊씨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國歌가 있어야 된다”고 한편으로 洋樂隊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 때 태어난 "上帝가 우리 皇上 도우사 海屋주를 山같이 쌓으소서 ㅇ이 寶ㅇ에 떨치사 億千萬歲에 永遠無窮하소서" 라는 노래의 부속되어 있었다고 하는(?)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 ”이라는 愛國歌의 후렴인 "無窮花三千里 華麗江山” 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槿花 즉 무궁화를 ‘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한 듯 하답니다. 國歌짓고 國花 그리고 이와 전후하여 島山 安昌浩선생들이 맹렬히 민족운동 國粹運動을 일으킬 때에 조선을 무궁화에 비겨 청산 같은 웅변을 현하같이 토할 때마다 ‘우리 무궁화동산은...’ 하고는 주먹이 깨어질 듯이 책상을 두드리고 연단이 부서질 듯 벌을 굴렸습니다. 아마 이러한 자극과 동기가 근화가 무궁화로 변하여 그때에 국민이라고 하던 사람의 귀에 익어지고 입에 오른 듯합니다. 어쨌든 이때를 전후하여 근화를 무궁화라고 뚜렷이 쓰기 시작하고 또한 이것으로써 조선의 國花를 만든 듯 합니다. 그러나 ‘無窮花’라는 字를 쓴 동기는 순전히 보기 좋고 뜻 깊게 하노라고 쓴 것이지요. 一時는 ‘李花’로 槿花 즉 무궁화가 위에 기록한 바와 같이 그때에 비로소 국화가 되었다 하여 국민의 숭상을 벋았다는 것은 아니외다. 먼저 쓴 바와 같이 이전 오백년 전 옛날부터 조선 나라에는 槿花가 많아 저 중국 사람의 눈에도 "君子之國은 多 木槿之擧”로 보였고 또한 그보다도 좀 늦어서 ‘海東繹史’에 고려시대에 중국에 글을 보낼 때에 고려를 槿花鄕이라고 自稱하였으니 근화가 古來로 개전에 많았던 것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근화에 대한 기록이 조금도 남지를 않았으니 이는 李 太祖가 조선을 얻은 후에 李花를 숭상하는 뜻으로 나라의 자랑거리요 백성이 다 같이 숭상하던 근화를 배척한 듯 하외다. 그래서 그간 근화가 사람의 눈에서 멀어졌던 것이겠지요. *표기, 어법, 표현 등은 김종욱 선생의 기록대로 수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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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5)김종욱 나운규가 직접 각본·각색하고 출연한 첫 번째 연출 작품. 이 작품은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감독·각본을 김창선(金昌善)이라는 한국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쓰모리 히데카츠를 내세웠다(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년, p.104). 첫 장면에 앙숙을 상징하는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고 자막이 사라지면 주인공 영진과 오기호가 서로 노려보며 클로즈업 된다. 영진은 정신이상자로 나온다. 또한 영진의 환상을 통해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네플류도프 백작과 카투사가 이별하는 장면, 사막에서 두 청춘 남녀가 목말라 애타는 장면, 진시황의 죽음에 관한 대사 등을 적용하여 억압받는 조선과 억압하는 일본, 즉 침략자의 패망과 독립에의 열망을 암시하고 있다. 개와 고양이는 일제의 억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컷이며 네플류도프와 카투사, 사막에서 물병의 물을 쏟아버리는 장면 등 몽타주 기법 삽입은 당시로써는 기발한 발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동생 역으로 출연한 신일선은 당시 16세의 어린 소녀로 나운규가 발탁했다. 본명은 신삼순이며 아리랑 출연 때는 신홍련(申紅蓮)이라는 예명을 썼다.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준 이 영화는 우리 전래민요의 가사 내용을 모티브 삼아 일제시대 시달림을 받던 민족의 비애를 비탄의 극치로 이끌고 있다. 영화 상영 중 관객은 단성사 관현악단이 편곡한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이내 가슴에 수심도 많다”라는 아리랑 4절을 합창하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았고 개봉 첫날 단성사 앞은 경찰 기마대까지 동원되는 등 표를 못산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합창하면 기다리던 사람들도 함께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2005년). 당시 관객은 15만 명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만 명 단위 관객 동원이 흥행으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리랑’은 2년 이상 관객을 끌어 모았고 그로써 얻은 수입은 개봉 흥행 때의 몇 배를 능가하는 액수다. 이 영화는 1927년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춘사(春史) 나운규(1902~1937)는 함북 회령 출신으로 중국 간도 명동(明東)중학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 1923년 신극단 예림회(藝林會)의 배우가 되어 북간도 일대를 순회공연했고, 부산 조선키네마에 입사하면서 1925년 ‘운영전’으로 단역 데뷔했다. 그가 출연하거나 각본을 쓰고 감독한 작품은 총 27편, 그중 각본·출연·편집을 겸하면서 연출한 작품은 ‘오몽녀’(1937)까지 16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제작된 ‘아리랑’ 연보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필두로 1930년, 이구영의 ‘아리랑 그 후 이야기’, 1935년, 홍개명의 ‘아리랑 고개(문예봉, 노재신, 문수일, 이춘하, 출연)’, 1936년 발성영화 시대를 맞아 나운규의 ‘아리랑 3편’은 1937년 제 1회 조선일보 영화제에서 최우수작(총 4,947표)으로 선정되었다. 그 외 1954년 이강천의 ‘아리랑(허장강 데뷔)’, 1957년 김소동의 ‘아리랑’, 1968년 유현목의 ‘아리랑(박노식, 남궁원, 홍세미)’, 1974년 임원식의 ‘아리랑(신성일, 박지영, 허장강)’, 1977년 정인엽의 ‘아리랑아’, 1997년 안태근의 ‘아리랑’, 2002년 이두용의 ‘아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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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4)김종욱 나운규가 직접 각본·각색하고 출연한 첫 번째 연출 작품. 이 작품은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감독·각본을 김창선(金昌善)이라는 한국명을 갖고 있던 일본인 쓰모리 히데카츠를 내세웠다(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년, p.104). 첫 장면에 앙숙을 상징하는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고 자막이 사라지면 주인공 영진과 오기호가 서로 노려보며 클로즈업 된다. 영진은 정신이상자로 나온다. 또한 영진의 환상을 통해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네플류도프 백작과 카투사가 이별하는 장면, 사막에서 두 청춘 남녀가 목말라 애타는 장면, 진시황의 죽음에 관한 대사 등을 적용하여 억압받는 조선과 억압하는 일본, 즉 침략자의 패망과 독립에의 열망을 암시하고 있다. 개와 고양이는 일제의 억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컷이며 네플류도프와 카투사, 사막에서 물병의 물을 쏟아버리는 장면 등 몽타주 기법 삽입은 당시로써는 기발한 발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동생 역으로 출연한 신일선은 당시 16세의 어린 소녀로 나운규가 발탁했다. 본명은 신삼순이며 아리랑 출연 때는 신홍련(申紅蓮)이라는 예명을 썼다.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준 이 영화는 우리 전래민요의 가사 내용을 모티브 삼아 일제시대 시달림을 받던 민족의 비애를 비탄의 극치로 이끌고 있다. 영화 상영 중 관객은 단성사 관현악단이 편곡한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이내 가슴에 수심도 많다”라는 아리랑 4절을 합창하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았고 개봉 첫날 단성사 앞은 경찰 기마대까지 동원되는 등 표를 못산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합창하면 기다리던 사람들도 함께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2005년). 당시 관객은 15만 명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만 명 단위 관객 동원이 흥행으로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리랑’은 2년 이상 관객을 끌어 모았고 그로써 얻은 수입은 개봉 흥행 때의 몇 배를 능가하는 액수다. 이 영화는 1927년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춘사(春史) 나운규(1902~1937)는 함북 회령 출신으로 중국 간도 명동(明東)중학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 1923년 신극단 예림회(藝林會)의 배우가 되어 북간도 일대를 순회공연했고, 부산 조선키네마에 입사하면서 1925년 ‘운영전’으로 단역 데뷔했다. 그가 출연하거나 각본을 쓰고 감독한 작품은 총 27편, 그중 각본·출연·편집을 겸하면서 연출한 작품은 ‘오몽녀’(1937)까지 16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제작된 ‘아리랑’ 연보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을 필두로 1930년, 이구영의 ‘아리랑 그 후 이야기’, 1935년, 홍개명의 ‘아리랑 고개(문예봉, 노재신, 문수일, 이춘하, 출연)’, 1936년 발성영화 시대를 맞아 나운규의 ‘아리랑 3편’은 1937년 제 1회 조선일보 영화제에서 최우수작(총 4,947표)으로 선정되었다. 그 외 1954년 이강천의 ‘아리랑(허장강 데뷔)’, 1957년 김소동의 ‘아리랑’, 1968년 유현목의 ‘아리랑(박노식, 남궁원, 홍세미)’, 1974년 임원식의 ‘아리랑(신성일, 박지영, 허장강)’, 1977년 정인엽의 ‘아리랑아’, 1997년 안태근의 ‘아리랑’, 2002년 이두용의 ‘아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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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3)김종욱 近日 新聞紙上에 ‘愛國歌 作詞者 問題를 癸期하여 文敎當局에서 새 國歌를 制定한다’고 報道되었다. 여기에서 먼저 愛國歌 作詞者問題를 論하여 새 國歌制定說에 反對한다. 1. 獨立協會와 愛國歌 나는 16歲 때 愛國歌를 平壤出身 敎師에게 傳聞하였으므로 安昌浩 先生의 作詞로 알아왔다. 그런데.... 1951년 釜山피난 중 "李承晩博士”란 徐 氏 著 傳記에서 愛國歌에 對한 다음과 같은 記事를 보았다. 1898년 지금 57年 前에 徐載弼 博士를 中心한 獨立協會가 조직되었고 얼마 後에 愛國歌이자 獨立協會歌를 尹致昊 氏가 지어 불렀다 하였고 ‘이 박사는 7년간 獄中苦生을 마치고 1904년 지금 51년 전 30세 때에 미국에 건너 갔는데 在美同胞 歡迎會 席上에서 밤새도록 東海물과 白頭山을 高唱하였다’고 記錄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4년 전부터 愛國歌 作者를 調査하였으나 ‘島山 創作’이라고 認定할 수 없는 點에서 誤解를 두려워서 發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 美國學界로부터 ‘貴國 愛國歌의 作者가 누구이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羞恥를 당하고 있으므로 나의 硏究一端을 發表하지 않을 수 없다. 2. 蔡 牧師와 鮮于 氏의 말하는 作者 나는 다시 書面으로 鮮于 燻 長老에게 물어보았다. 선우 장로는 安 先生의 門下人이요 아들같은 侍從者였고 안 선생의 臨終弟子이었으니 그의 말은 가장 有力한 證言이라고 믿는다. 선우 장로가 ‘信仰’誌 主筆에게 答書를 줄 때에 發表할 것을 이미 諒承한 것이요 그 答書는 다음과 같다. "上略 지금 弟 記憶에 略 48년 전 평양에서ㅜ小學校때 愛國志士였던 權美步 선생 指導 하에서 1. ‘聖子神孫 五千年은 우리 皇室이요’하는 노래를 2, 3次 불러본 일이 있습니다. 그 후 5, 6년 만에 大成中學校가 設立되고 尹致昊 씨가 名譽校長이요 島山이 교장으로 있으면서 尹致昊씨가 創作하신 ‘聖子神孫’을 島山이 고쳐서 ‘東海물과 白頭山’으로 하였고 第 末節에 가서 ‘이 기상과 이맘으로 忠誠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임금을 섬기세’(나라 사랑하세) 하는 皇室에 대한 文句를 이었습니다. 이렇게 大成中學校 時代에 愛國歌가 完成이 되어 朝會 時 마다 島山이 親 히 부르던 것이요 前에 각 소학교에서는 ‘슬프도다. 우리 民族아 四千餘年 歷史國으로’ 하는 唱歌를(權美步 作) 늘 불렀던 바를 經驗과 본 것으로 알리어드리오며 ‘그 後 島山이 安州 百祥樓로 가서 李P, 盧伯麟, 李東輝 3인으로 더불어 오래 전부터 河畔에서 淸川江 흐르는 물을 보고 四人이 일어나서 모래를 파내고 乙支公의 碑石을 일으켜 세우자 하는 비장한 말씀을 島山이 하였답니다.” (乙支公 碑石이야기는 島山께 들은 말씀.) 그 이튿날 安州 高等係에서는 島山을 보고 이제 한 말을 强問하였는데 島山 선생은 그 말이 日警에 報告된 까닭을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1953년 8월 13일 敎弟 鮮于 燻 謝上) 以上 鮮于 長老의 答書에 依하면 愛國歌의 原作者가 尹致昊씨요 안 선생이 改訂한 部分이 있다 함이다. 佐翁의 아들 尹永善씨가 가지고 있다는 1907년의 原稿는 이 박사傳의 早期說에 比하여볼 때 그것이 창작 원고는 아닐 것이다. 李정魯 牧師(忠淸道 75세)에게 물어보니 ‘尹致昊 作입니다. 우리 학생시대에 어른들에게 듣고 尹 氏 作으로 알고 불렀소,’ 金在衡 敎師(黃海道 64세)에게 물어본 즉 ‘尹致昊 作입니다. 우리 서울서 학생 때에 윤 씨 작으로 알고 불렀소.’ 尹潽善 국회의원(佐翁의 조카)에게 물어본 즉 ‘우리 叔父님 작입니다.’ 이로써 보면 서울서는 윤 선생 작으로 평양에서는 안 선생 작으로 알려진 모양이다. 東大 文學士 蔡弼近 교사(평양 71세) 曰 "내가 25세 때에 大成學校에서 數學을 가르쳤지요. 그때 내가 島山선생에게 ‘愛國歌는 本校 名譽校長 尹致昊 선생이 作詞하였습니다’란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내가 皇室歌와 太極歌 등 옛 노래들을 평양서 해방 후까지 保存하였는데 皇室歌와 愛國歌는 전혀 다릅니다. 내 기억력에 異狀이 없다면 애국가 작사자는 尹致昊씨입니다.” 4. 歌詞로 본 作者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萬歲 무궁화 三千里 화려江山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保全하세 南山우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 이슬 不變함은 우리 기상일세 가을 하늘 공활한데 맑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마음 一片丹心일세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忠誠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상 가사는 백두산, 南山松, 秋天月 등 順序 整然한 點으로 보아 대체가 一人의 構想이 分明하다.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은 ‘泰山이 如礪(칼 가는 숫돌) 黃河가 如帶토록’이란 漢人 山礪河帶의 誓願을 알고 쓴 것이요 二節에 南山은 周京豐鎬의 終南山을 보고 節彼南山이여 維石岩岩이란 周詩를 聯想한 것이요 三節 ‘秋夜月’은 ‘月白風淸 如是良夜를 何오?’란 蘇東坡의 詩句에 通한 것이니 이는 漢學에 무젖은 南方 調라고 본다. 島山 작 ‘나의 사랑 모란峰’이 平壤 調라면 ‘南山우에 저 소나무’는 서울調다. 如海 如山 如松 如月 등 四重物喩에 修辭麗句를 만들고 實際 肇國精神을 부르지 못한 것은 實質 本位의 北方調라기 보다 文華崇尙의 南方調다. 그리고 杜子美의 界 景 情 事式 私律體를 模倣한 것은 律詩에 익은 솜씨다. 歌詞는 吟味하여 볼수록 高句麗의 尙武氣質이기 보다 百濟의 崇文才華다. 山林 猛虎의 부르짖음 이기보다 月下佳人의 嘉音이다. ‘하나님이 보호하사’는 英國國歌 ‘God save our King'과 通 하고 愛國歌 舊曲은 영국국가 曲調를 引用한 것이니 英國歌 는 영국에 留學한 尹致昊 씨의 作詞라고 본다. 5. 島山 선생 沈黙의 뜻 島山선생에게 ‘愛國歌’는 某年에 내가 창작하였다는 사람은 없다. 島山정신의 代辯者 李光洙 著 ‘島山 安昌浩’ 傳記에도 ‘드렸다.’는 말은 없고 鮮于 장로의 書面에도 ‘直聞하였다.’는 말이 없고 姜齊煥 著 ‘安昌浩雄辯全集’제 143 페이지에 愛國歌 作者問題가 있다. 同著의 내용에 의하면 姜 군 亦 親近弟子인데 그 問答이 다음과 같다. "愛國歌를 안 先生님께서 창작하였습니까? 고 仰問함에 대하여 선생은 아무 대답도 아니 하셨다. 아마도 謙遜의 뜻이라고 생각된다.” 만일 안 선생이 創作하셨다면 直言하셨을 것이다.l 誠一貫의 안 선생이 歷史의 大 文字에 대하여 謙讓의 沈黙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왜 原作者를 밝히지 아니하셨을까? 첫째, 日帝 壓迫 하에서 尹 선생을 愛國歌 作者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身邊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威力 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愛國歌 작자를 밝히면 愛國歌의 運命이 危殆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윤 씨 작이란 기록을 볼 때 節義感에 傷處를 받았으나 歷史는 고칠 수 없다. 愛國歌 作詞者는 不幸失節하였으나 國尊 島山 선생의 품에서 기르고 島山 선생의 목소리로 傳하여 愛國歌로의 大義名分을 잃지 아니하였다. 6. 다른 國歌 制定說에 反對 近日 신문지상에 전하는 새 國歌 制定說이 사실이라면 不謹千萬이다. ‘東海물과 白頭山’ 一節과 後斂이 國歌로 充分하다. 獨立運動의 歷史를 보던지 首節의 가사는 國歌로의 壯重性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하나님이 보호하사’는 天下로도 바꿀 수 없는 最古最大의 民族信仰이 아니냐? 本來 ‘東海물과 白頭山’으로 우리의 誓願이 足한 것이요 南山松, 秋, 天月 등 四重物喩는 衍文인 것 같다. 피로 전하여 오는 愛國歌의 首節은 天作의 國歌로 불려지고 있으니 또 다른 國歌가 있을 수 없다. 所謂 새 國歌란 ‘하나님’을 빼어버린 金日成의 賣國歌를 들어보았거든 새 國歌란 異端을 다시 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萬歲’는 4천년 信仰의 讚頌이요 先烈의 피로 기록한 國歌요, 하나님의 三千萬 民族魂에게 삭여준 民族頌이다.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信仰生活>1955년 3. 4. 5월 합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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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2)김종욱 1. 平南 江西땅 秀麗한 舞鶴山을 등지고 溶溶히 흐르는 大同江을 앞으로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一 寒村 ‘도마메’에서 한 貧農의 아들로 태어난 한 個의 人間으로써의 島山 安昌浩가 나의 論하려는 바 對象이 아니다. 오직 三十餘年의 長久한 歲月을 通하여 朝鮮의 土着 資本家 階級의 歷史的 利害를 終始一貫 숨김이 없이 스스로의 一言一動의 中에로 表現하고 代辯하면서 그와 온갖 歷史的인 變遷과 流動을 같이 하여 오는 한 個의 物質的 勢力으로써의 島山, 또 現在의 歷史的 階級에 있어서는 頹廢되고 無氣力한 이 땅 小市民들의 幽靈俱樂部인 저 興士團 또는 修養同友會의 巨頭로서의 安昌浩가 이제부터 내가 敢히 讀者諸賢의 앞에 그 階級的 本體를 明白히 提示하는 同時에 그의 앞에 남긴 不可避의 歷史的 路線을 科學的으로 規定하여 보이고자 하는 人物的 對象인 것이다. 2. "有産者團의 商品의 低廉한 價格은 可히 如何한 ‘萬里長城’도 粉碎하여써 野蠻人의 頑强한 異人嫌惡를 征服하는 重砲이다.” 그러므로 極東의 無涯한 處女地를 向하여 商品輸出의 廣汎한 窮한 泉原을 獲得할 것을 唯一의 目標로 하여 멀리 山넘고 물 건너 이 땅 三千里의 近海를 威脅하고 있던 當時 隆盛한 發展期의 歐美 資本主義가 깊이 數千年 동안에 長久한 牧歌的 歷史를 通하여 封建的 城廓벌에 窒息的으로 封鎖되어 亞細亞的 沈滯에 잠자고 있던 李朝 末葉 朝 該 社會를 內部的으로 힘차게 衝擊하고 刺戟하였을 때 中國이나 또는 當時 日本社會와 함께 당시 朝鮮도 歷史- 未曾有의 急激性을 띈 社會的 動搖를 經驗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身分的 隸從관계 自作自給的 自然經濟 中世紀的 沈滯狀態 ‘初夜의 權利‘ 孔孟 상투 등 다시 말하면 封建的인 社會體系 全般에 대하여 最後를 告하는 弔鐘이 서울과 平壤을 爲始하여 三千里의 坊坊谷谷에서 우렁차고 勇敢스럽게 울려 들리기 始作한 것이다. 當初부터 崎嶇스럽기 짝이 없었던 우리 朝鮮의 近世史는 勿論 이러한 封建的 社會體系의 崩壞過程이 이 땅 社會內部로부터 自生的으로 또는 獨立的으로 發育成長된 土着 新興資本의 社會的 生産力의 前進에 의하여 遂行되고 促成됨을 頑强히 拒否하였다. 이처럼 當時의 社會的 動搖가 物質的 生産力의 發展에 의하여 基礎되지 못하였었다 할지라도 그러나 他方으로 先秦資本의 重壓的 包圍와 刺戟이 激甚하였던 만큼 政治機構意識 道德關係등 사회의 上部構造로부터의 動搖는 十七 八世紀의 佛蘭西에 比하여도지지 않을 만큼 急激性을 띄고 發展하였다. 同時代 中國의 新興資本階級의 騎士 汪精衛가 四億萬의 民衆을 향하여 ‘盜跖은 一世之賊이지만 ㅇ[미상]丘는 萬世之賊’이라고 喝破하고 있었을 때 이에 呼應하여 朝鮮의 新興市民의 騎士들도 封建的 道德의 鐵鎖와 專制的 政治機構에 대한 斷乎한 反抗을 거듭하는 同時에 그들이 要望하는 市民社會의 建設을 肉彈的으로 促成한 것이다. 南國一帶에서는 東學黨의 反亂이 李朝의 體系를 根抵로부터 震撼케 하였으며 金玉均一派의 ‘쿠데타’가 市民社會의 아름다운 姿樣을 全 民衆의 앞에 宣示하였으며 또 都鄕 各地에서는 舊學에 對抗하여 新學의 設立이 勃發하게 促成되고 있던 그때 他方으론 日滿의 戰雲이 急迫한 形勢로 닥쳐왔으니 때는 正히 歷史上 그 類例가 없는 非常時였다. 이 非常時를 能히 非常時로써 自覺하게 되자 곧 ‘호미자루’를 내던지고 單身 서울로 올라와 둥글둥글한 그러나 날카로운 눈쌀을 四野에 던지면서 힘찬 두 주먹을 흔들면서 성낸 獅子와 같이 民衆의 覺醒을 외치던 한 명의 弱冠 風雲兒가 나타났으니 그가 곧 三十年前 옛날의 島山 安昌浩이다. 그러나 그의 聰明한 눈쌀 그의 힘찬 두 주먹도 事實은 當時 新興資本階級의 覺醒이었음은 그도 또한 理解할 수 없었던 歷史的 事實이다. 3. 그의 ‘이데올로기’가 當時에 朝鮮의 社會的 情勢에 制約되어서 비록 雜多한 封建的인 不純한 要素를 많이 包含하였다고 하더라도 微弱하나마 當時의 新興市民階級의 利益을 代表한 者인 限에서 이 島山의 存在란 그것도 確實히 한 個의 歷史的 事實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沈滯하고 腐敗한 封建朝鮮의 한 個의 커다란 進步的 存在가 아니면 안 된다. 그의 唯一한 救國的 標語는 一도 敎育이요 二도 교육이었다. 그는 關西의 雄都 平壤에 大成學校라는 中學校를 設立하고 그것을 中心으로 各地에 小學校를 設立하기에 努力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靑少年들을 ‘스팔타’ 式으로 敎育訓練한 것이었다. 當時의 朝鮮을 回顧하라. 朝廷에서 밥먹는 수많은 어중이 떠중이 멍텅구리 바보들은 날마다 어찌하였으면 民衆을 더욱 많이 苛斂誅求할 것을 생각하기와 또 朝鮮의 運命과 重大한 관계가 있는 日露의 風雲을 손가락질하고서 누가 이길까 하면서 消日을 하고 있었으며 廣汎한 民衆은 塗炭에 呻吟하면서 祖國이 어느 배에 실리어 어디로 떠내려가는지도 모르고 封建的 惰眠에서 힘없이 하품만 하고 있던 때가 아니었던가. 이때에 있어서 한 個의 나라의 先驅者로써 한 개의 階級의 前衛로써 當面의 適切한 ‘슬로건’이 교육 그것이었던지 아니었던지는 모르겠으나 아니 교육이라는 遠大한 展望을 가진 事業보다도 혹은 焦眉의 救急的인 다른 任務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島山 개인의 좀 더 많이 聰明하지 못한 것으로 그의 功績을 過小評價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明治維新 당시에 있어서 일본의 청년들이 허리에 칼 차고 街巷으로 徘徊하며 全日本의 정치적인 中心地가 物情이 騷然하던 그 당시에 있어서 고요히 三田의 수풀속에 숨어서 靑年子弟에게 所謂 文明的 교육을 賦與하는데 熱中튼 福澤愈吉이란 存在가 近代 일본의 國民史에 있어서 잊어버리지 못할 巨大한 存在가 아니던가. 資本主義 일본의 思想的 啓蒙 아울러 자본주의 일본의 經濟的 建設者의 養成, 이 두 가지의 巨大한 任務를 한 개의 인간이 遂行하였다는 것으로서는 누구나 그의 赫赫한 大功績을 是認치 않을 者 없을 것이다. 絶對的으로 본다면 島山의 그 당시의 功績은 무어라 해도 우리는 永遠히 認定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믿는다. 유명한 獨逸의 天才的 思想家 ‘하이네’가 ‘삼송’이 斷頭斧를 휘두르기 전에 먼저 ‘볼테르’가 辛辣한 哄笑를 깔깔 웃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말한 바와 같이 封建的 專制機構를 무너뜨리자면 먼첨 封建的인 道德과 낡은 意識의 捕縛으로부터 전 민중을 解放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科學的 眞理를 그가 能히 뚜렷하게 認識하였던지 못 하였던지는 우리가 알 바 아니지만 何如間 이 眞理를 實行하지 않으면 안 될 嚴重한 義務를 當時 조선의 新興하는 資本主義的 要素의 發展이 島山에 향하여 黙黙히 命令한 바 있다. 4. 時局이 변해서 韓國이 朝鮮으로 改名하게 되자 島山은 조선 내에 이 以上 머물러있을 수 없게 되었다. 鴨綠江 저 便의 넓다란 曠野는 無限한 魅力을 가지고 이 不運兒를 불러가고야 말았다. 그는 조선의 時局이 요즈음 귀에 익은 말로 ‘超非常時’라던 당시에 있어서 교육사업이라는 遠大한 展望을 가진 일을 할 만큼 또 熱血兒인 安昌浩답지 못하게 悠長한 心氣를 가진 사나이인 만큼 大陸의曠野로 건너가서도 그는 그렇게 世人이 想像하는 急進的 思想家는 되지 못하였다. 아니 그는 悠遠한 曠野에 건너가서는 더 한層 ‘浪漫的’ ‘好好的 ’가 되고 말았다. 조선 내에 머물러있을 時에 있어서도 그가 노력한 교육사업이란 것이 당시의 조선을 改革하기 위한 일정한 理論的 根據위에서 計劃된 科學的 ‘프로그람’이 아니라 오직 조선의 新興資本의 要素의 要求에 응하는 漠然한 無意識的 行動에 不過하였다는 것을 大陸에서의 그의 행동은 如實히 고백하고 말았다. 科學的 ‘코스’에 基準되지 못한 敎育主義, 無 內容한 文化打鈴의 空語는 이제부터의 島山이 머리를 집어 뒤로 이고는 한 개의 怪物이 되고만 것이다. 조선이 잠자고 있을 時에 있어서 교육의 烽火를 든 것은 確實히 進步的 事業이었다 하드라도 民衆이 이미 눈을 깨어 다른 무엇을 要求할만큼 成長하였음에 不拘하고 依然히 더구나 중국까지 가서 敎育萬能主義, 空虛한 文化打鈴을 反覆한다는 것은 確實히 一種의 念佛에 不過한 것이었다.(註 먼저 '안창호론'은 결본이 많아서 전혀 문장 연결이 되지 않아 새롭게 관계자료들을 찾아서 정리한 것입니다. '조선중앙일보' 소장처가 많지 않아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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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1)"한국영화사 제대로 쓰기 위한 자료들 수집에 온갖 고난, 고초를 겪고 있는 영화사 연구가입니다.” 김종욱(金鐘旭, 1938~2019)선생이 운영하던 생전의 블로그에 남긴 문구이다. 선생은 한국영화사 자료 발굴과 그 해석에 권위자다. 본 연재 자료는 선생이 작고 전 한 문화단체의 의뢰로 15년간 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 수집, 정리한 것이다. 한국 근대 문화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자료로 판단되어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자료의 장르, 주제, 연도 순 등은 고려하지 않았다. 김 선생이 애초에 제공한 순으로 게재하기로 한다. 표기 역시 김 선생의 판단으로 작업한 것에 따르기로 하였다. 연재를 허락해 준 문화단체에 감사 드린다.(편집자 주) 김종욱(서지학자/김소월전집 편자) 40여년이란 오랜 역사를 가진 북촌(北村)의 유수한 영화와 연극의 전당(殿堂) 단성사가 드디어 경영곤란으로 명치좌(明治座) 관주(舘主) 석교(石橋씨에게로 넘어가서 지난 7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흘 동안 일반으로부터 단성사의 새 이름을 현상을 내걸고 모집하였던바 드디어 지난 18일 정오에 추첨으로 새 이름을 결정하고 이제부터는 오로지 개관 날짜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다. 전 조선 각지로부터 들어온 투표 총수는 2만 4천여표로서 ‘종로좌(鍾路座)’ 혹은 ‘제이 명치좌第二 明治座)’ 등의 각색각양의 명칭이 많았으나 결국 ‘대륙극장(大陸劇場}’이라 결정하고 경관 입회하에 추첨하여 당선자를 정하였는데 주소와 씨명은 아래와 깉으며 심금은 50원이라 한다. 단성사! 단성사! 이제는 다시 두 번 부를 바이없는 "단성사”는 과연 여직 껏 어떠한 굽이굽이의 고개를 넘어 왔는고? 북촌(北村)의 영화상설관으로 사십여 년이란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내려온 말 없는 "단성사”의 흘러간 과거의 슬프고도 그리운 역사를 "워너‘ 영화배급소 아구영(李龜永)씨에게 듣기로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14년 전 당시의 서울에는 원각사(圓覺社)니 장안사(長安社)니 연흥사(演興社)니 하는 등의 극장이 있었다. 이러한 극장들이 있을 때 역시 지금 자리에 "단성사”기 있었던 것이다. 단성사가 처음 탄생하게 된 것은 역시 그것은 우리들의 손이어서 단 두 사람의 합동 경영이었다. 이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들 최초의 경영자는 극장을 경영하여 나아감에 우선 영리보다도 무엇보다도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급급하였던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단성사”는 오늘과 같은 위풍당당한 집이 아니라 ‘바라크’식의 집이었다. 창립 당시 소위 구파(舊派)라고 하여서 입창(立唱)이며 좌창(坐唱)를 하였고 줄 타고 재주를 넘는 광대(廣大)들을 위하여 무대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단성사가 불이 붙고 또한 고 황금좌(黃金座)의 관주(舘主) 전촌(田村)씨의 손으로 넘어와서 비로소 영화상설관(映畵常設館)으로 면목을 일신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나 된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단성사는 이 (전촌田村)씨의 소유가 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실제 경영을 모르는 전촌 씨는 불붙은 단성사를 단 3천원에 사기는 샀으나 앞으로의 운영방침이 애매하자 그 경영권을 고(故) 박승필(朴承弼)씨에게로 넘긴 것이다. 박승필 씨와 전촌 씨와는 광무대(光武臺)를 중심으로 본시부터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매월 650원씩 집세를 내기로 하고 박승필씨는 흥행권을 맡고 전촌씨는 다만 자본주로써 한 걸음 물러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대정(大正) 7년(1918년) 경이었다. 말하자면 ‘전촌’ ‘박’ 두 사람의 합자(合資)로 단성사는 유지되어 나가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3천원이란 너무나 싼 값으로 전촌씨에게로 넘어와서 비로소 상설관으로 변한 단성사는 다시금 고 박승필씨에게로 넘어가서 비로소 상설관으로서 본격적 활동을 개시한 것이었다. 당시의 영화란 물론 전부 무성(無聲)영화이었고 그 중에서도 단성사가 즐겨 상영한 것은 ‘유니버설’ 회사와 ‘파라마운트’ 회사의 작품이었다. 지금도 우리 기억에 새로운 ‘명금(名金)’은 아마 단성사가 상영한 수입 ‘명금’은 연속 영화 증에서도 너무나 유명한 영화일 것이다. 당시에는 영화가 거의 무성이고 하였으니까 거기에 따라서 유명한 변사(辯士)도 많이 나왔다. 더구나 박승필씨가 단성사를 맡게 되자 그때까지 우미관(優美舘)에 있던 유명한 변사는 모두 이곳으로 쏠리고 말았던 것이다. 즉 이병조(李丙祚), 최병룡(崔炳龍), 김덕경(金悳經), 고 서상호(徐相昊) 등 제씨였다. 그러나 극장의 펜이란 흡사히 유행을 따르는 아가씨의 마음 같아서 그들은 차차로 연속영화 등속에서 싫증을 느끼고 차차로 새로운 무엇을 찾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단성사가 스스로 적지 않은 자본을 던지어 신파극단을 조직한 것은 바야흐로 이 때문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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