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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7)<brt>다듬지 않아 거칠지만 자유분방한 남도정신덤벙분청'에 대한 변명 이 지역 정치인들은 밖으로만 광주정신과 시대정신을 모방할 뿐 안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표를 보여준 것이 아니다. 다시 역사를 상고해보라. 남도사람들이 어디 단 한번 이라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표를 몰아준 일이 있는가 얼른 생각하기에는 신분도 높고 지혜도 뛰어난 오키의 도공들이 만든 품위 있는 다기가 훨씬 뛰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의 잡기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역시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낳게 한 원인과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오는 패배일 것이다. 즉 밖으로만 모방할 뿐 안으로부터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이다.새삼스럽게 조선인처럼 가난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고 또한 잡기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맛에 사로잡힌 부자유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참된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아직은 조작이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애의 상태에서는 더더구나 거리가 멀다. 조선인의 장점을 이은 선어(禪語)를 빌려 말한다면, 지미(只縻)의 경지에서 만들었다는 점에 있으며, 맛에 매달려 궁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것이 미묘한 갈림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가 '조선과 그 예술'에서 말한 내용 일부다. 졸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다할미디어, 2022)의 한 챕터에서 이를 베껴둔 것은, 우리의 분청사기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 혹은 해명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과감한 생략과 절제, 무욕과 해탈, 여백의 미를 톺아내는 것이 달마도의 회화며 분청의 세계가 어찌 다를 것인가. 작위적인 기교가 없으니 도교적 세계관과 통하는 것이요, 무욕의 심미안을 표상했으니 불교적 맥락과 통하는 것이라 했다.불교의 공(空), 도교 자유의지의 표현 말이다. 이 심미관이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양식으로 분청에 표현되었으니 그 웅숭깊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오래전 내가 야나기무네요시 생가를 꾸며 만든 민예박물관을 찾았을 때 놀란 이유이기도 하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가면 현관 가운데 딱 한 개의 옹기만 놔두었다. 남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질그릇, 그것도 약간 비대칭인 투박한 항아리 말이다. 무안분청(광주,전남을 포괄하는 호명 방식)의 기능을 배태한 무안만(내가 새롭게 구상한 영산강과 인근 바다의 다른 이름) 유역의 흙과 불과 땔감과 무엇보다 이 예술적 미감을 표현해낸 남도 사람들을 상고해보면, 양반예술과 대비되는 서민예술의 그윽함을 추적해볼 수 있다. 이것은 무안만 사람들의 생태적이고 호방한 세계관과 지향 속에서 생성된 것들이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남도 풍류와 남도 미학의 발흥이다. 영암의 도기와 해남의 초기청자, 강진의 자기에서 무안만의 분청까지, 남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옹관까지 거슬러 오르는 장대한 줄기, 그 속에서 발현되는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정신 말이다.덤벙분청의 세계분청사기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학자들이 미시마(三島)라고 부르던 용어를 번역한 것이다. 고유섭(1905~1944)이 잡지 '조광(朝光)' 1941년 10월호에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언급하며 분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분청의 기법은 화장토(clay slip)를 도자기에 바른 후에 장식하는 기법이다. 6세기 중국의 월주요(越州窯)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세종 이후에는 국가에 진상하는 공납용으로 제작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에 자기소 139개, 도기소 185개에서 대부분 분청사기를 생산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에 이해 분청의 기술이 일본에 소개된다. 16세기 이후 야마노우에 소지(山上宗二)가 조선의 분청다완(찻그릇)을 천하제일이라고 평한 것은, 이전 칼럼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분청의 기법은 상감, 인화, 박지, 철화, 조화, 덤벙, 귀얄 등이다. 이중 무안만에서 가장 선호했던 기법이 덤벙과 귀얄문이다. 지면상 고(古)덤벙에 대해서만 간략히 소개해둔다. 더 자세한 얘기는 졸저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덤벙 채식(彩飾)은 도자기 장식에서 백색이나 색깔이 있는 흙물에 도자기를 덤벙 담갔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물에 어떤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다. 텀벙, 덤버덩, 덤벙, 덤벙덤벙, 덤버덩덤버덩, 담방 등의 용례가 있다. 하지만 들뜬 행동으로 아무 일에나 자꾸 함부로 서둘러 뛰어든다는 뉘앙스의 '덤벙'이란 의미로 읽는 것은 단견이다. 담방담방이나 담방은 작고 가벼운 물건이 물에 떨어져 잠기는 소리를 말한다.둥덩둥덩이나 동당동당과 같은 말이다. 남도민요 둥덩애타령이란 호명이 여기서 나왔다. 옹기 옴박지에 물을 절반쯤 채우고 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엎어 손으로 두드리면 동당동당 혹은 둥덩둥덩 하는 타악기 소리가 난다. 이를 '옴박지 장단'이라고 하고 특히 여인네들이 유희놀음을 할 때 이를 악기 삼아 노래했기에 '둥덩애타령'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덤벙은 '연못'의 방언이기도 하다. '웅덩이'를 '둠벙'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둠벙과 덤벙의 어원이 같다. 따라서 덤벙채색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덤벙댄다는 뜻이 아니라, 보다 생태적이고 고풍스런 뉘앙스다. 예컨대 '덤벙주초'는 돌을 다듬지 않고 건물의 기둥 밑에 두는 주춧돌을 말한다. 다듬지 않아서 거칠지만 그 질감이 주는 친자연적인 미감에 의미를 두는 시선이다. 야마다가 무안의 분청을 황실의 국보로 찬양하고 야나기가 조선의 옹기와 도자기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귄대가리의 정체지난 칼럼에서 나는 거시기 연대기를 말하며 귄의 정체를 해명했다. 남도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대선 결과가 다른 것을 변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지역에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땔나무꾼으로서, 적어도 누군가는 이 흐름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일종의 팬덤이었나? 생각 없이 덤벙대는 우둔한 자들이어서인가? 잘못된 행위를 극구 우김질하자는 게 아니다. 역사이래 거시기를 공유해온 사람들의 더불어 울림(共鳴)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지난 수 세기 동안 죽음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남도로 또 남도로 향했는가를, 또한 남도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을 수용하며 슬픔을 삭여냈는가를 말이다. 그래서다. 오늘 분청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역시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낳게 한 원인과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오는 패배감에 대한 것이다. 두렵고 화가 나는 것은, 현 집권당 특히 남도지역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태도와 안이한 처신이다. 남도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당파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표를 준 것이지 당신들의 안위를 위해 표를 준 것이 아니다. 이 지역 정치인들은 밖으로만 광주정신과 시대정신을 모방할 뿐 안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시 역사를 상고해보라. 남도사람들이 어디 단 한 번이라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표를 몰아준 일이 있는가. 일본인들처럼 맛에 매달려 궁색하게 만들지도 않고 헛되이 치장하지도 않는다. 단 한 표 차로 졌어도 진 것은 진 것이다. 이것이 게임의 원칙이다. 나중 호모루덴스 곧 놀이하는 인간을 소개할 예정이지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는 것이 옳다. 요한호이징하는 그래서 종교와 전쟁도 놀이라고 했을 것이다. 경기에서 졌으면 '졌잘싸'로 변명하지 말고 협력하는 것이 정도다. 지금은 그것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 할 일이다. 야나기에 비유컨대 여기가 미묘한 갈림길일까? 남도의 일당 정치인들에게 경고해둔다. 거시기의 연대를 몰상식하게 폄훼하면 나부터라도 가만있지 않겠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나라의 의를 위해 떨쳐 일어나고 시대정신을 견인해 나온 남도사람들의 시대정신과 귄진 감각을.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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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54)<br>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내 모습은 정상일까 이규진(편고재 주인) 가는 실금만 있어도, 작은 알팀만 있어도 타박이 심하다. 고미술계 특히 도자기에 대한 요즘의 시중 풍속도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그런 시중의 풍향계를 무시하고 일을 저질렀다. 새로 구입한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이 그 것이다. 사진을 보면 금간 부분을 땜질만 한 것 같은데 잔편이라니 무슨 이야기인가. 완형같이 보이는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은 사실 손상이 심해 몸체의 1/3정도는 남의 살을 붙인 것이다. 그러니 도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은 도편이라고 해도 귀한 것이다. 귀한 정도가 아니라 도자기를 좀 안다면 탐을 내야할 물건이다. 분청덤벙의 매력은 특이하다. 그것은 다른 기종에 비해 변화의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분청덤벙의 완이나 잔으로 차나 술 등을 마시며 계속 사용할 경우 색깔이 배어들어 경색의 미가 발생한다. 따라서 분청덤벙은 다른 기종처럼 가마에서 완성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온 후 사람과 세월과 더불어 새롭게 만들어 가는 기물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것이다. 일본인들이 덤벙분청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도 그런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경색의 미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귀한 분청덤벙에 간혹 철화가 들어간 것이 있으니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귀물이 아닐 수 없다.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은 입지름이 9~9.5에 굽지름이 4이고 높이가 5Cm 크기다. 술잔으로 사용해도 좋지만 녹차잔으로도 적격이다. 죽절굽에 태토받침이며 입술은 약간 벌어진 형태다. 굽부터 입술까지 몸 전체를 백토로 분장한 분청덤벙이다. 여기에 간략한 초화문을 철화로 그리고 있다. 문제는 몸체의 1/3정도가 없어져 남의 살을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남의 살도 덤벙에 철화가 들어가 있다. 색깔도 비슷한데다 크기도 얼추 맞는 것을 골라내 붙여서 완형잔을 만들어 낸 원 주인의 안목이 대단하다는 느김이다. 땜질은 옷칠을 한 것인데 아직은 세월이 짧은 탓인지 검게 변색을 않고 누르스럼한 빛깔이다. 옷칠이 숙성되어 검게 변하면 철화와 어울려 오히려 맛깔스럽지 않을까도 생각되는 점이다. 분청덤벙 요지로는 보성 도촌리와 고흥 운대리가 알려져 있다.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의 초화문은 가는 형태의 것이 운대리 것과 비슷한 양상의 문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굽이나 약간은 거친 덤벙의 형태를 보면 도촌리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원 소장자도 도촌리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가는 실금만 있어도, 작은 알팀만 있어도 타박이 심한 세상에서 남의 살을 뒤섞은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 앞에서 마냥 즐거워하고 있는 내 모습은 정상일까. 정상이 아니더라도 나는 오히려 즐겁기만 하니 이를 어쩌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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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8)<br> 분청제기보뚜껑편충효동인지 아닌지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편을 지인의 핸드폰에서 사진으로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굽에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문양이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실물을 대하고 보니 굽이 아니라 제기 뚜껑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굽에 문양이 들어갈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속단은 금물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처음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사라졌지만 문양이 아름답고 기형이 특이한 것만은 사실이다. 근래 만난 도편치고는 여간 흥미로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기 중에는 보가 있다. 땅은 네모졌다는 전통적인 우주관을 반영 사각형으로 만들어지며 하늘은 둥글다는 의미를 지닌 둥근 형태의 궤와 짝을 이룬다. 따라서 보는 음의 성격인 반면 궤는 양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제기들은 동으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나 동 대신 도자기로 만든 경우도 더러 있다. 다른 제기들도 마찬가지지만 도자기로 만든 보는 흔치 않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있는 분청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외에는 흔치 않은 기종이라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 그러나 충효동 분청사기요지에서 도편들이 대거 출토되고 호림박물관이 2010년 개최한 '분청사기제기'전에서 무려 12점의 보를 소개함으로서 주목을 끈 바 있다. 제기보는 벼와 기장 등 마른 제수물을 담아 진설하는 용도로 쓰이며 도자기에서도 보이나 원래는 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형은 외면이 네모나고 내면은 둥근 형태다. 뚜껑에는 네모진 산형장식이 있으며 두 곳에 손잡이형 고리가 달려 있는 것이 있다. 동체의 구연부 네 곳에는 괴수형의 머리가 있는 것이 있으며 굽다리는 반원형으로 여러 곳이 파여 있다. 문양은 상감으로 뇌문 파수문 당초문 등이 장식된다. 분청제기보뚜껑편을 처음 본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지인이 보낸 준 문자 메시지 사진에서였다. 처음 본 순간 굽에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문양이 들어갈 수 있을까 .놀라웠다. 그러나 그 것은 지레짐작이었을 뿐 굽에 그런 문양이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실물을 보자 그 것은 바로 판명이 되었다. 분청제기보는 일반적으로 밑짝과 윗짝의 양식이 비슷한 모양이다 보니 윗짝인데도 불구하고 밑짝의 굽처럼 보였던 것이다. 분청제기보뚜껑편의 내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무문이다. 장식과 문양은 외면에서 볼 수 있는데 백상감의 무늬들이 여간 정교한 것이 아니다. 남은 부분을 살펴보면 뚜껑에는 흡사 굽처럼 생긴 사각의 산형이 있고 여기에 연결된 고리 흔적이 있다. 산형 밖으로는 약간 경사져 내려가던 기형이 끝 부분에서 안으로 꺽여 마무리 되고 있다. 문양으로는 사각의 산형 안에는 화문과 원문을 그 밖의 경사진 부분과 꺽여 마무리된 부분은 당초문과 뇌문 등을 장식하고 있다. 특히 사각의 산형 안의 화문과 원문은 상감이 무척 정교하면서도 아름답다. 분청제기보로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의 분청사기덤벙보가 있다. 뚜껑은 없고 몸체만 있는 것이지만 일본인들이 다완과 관련해 좋아하는 덤벙분청이다보니 일찍부터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소개하는 분청제기보뚜껑편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여기서는 논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덤벙보 말고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는 분청제기보뚜껑편과 비슷한 성격의 분청사기선상감뇌문보도 한 점이 있다. 하지만 학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무래도 충효동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뇌문보편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분청사기보편은 우동리에서도 출토된 것도 있지만 이 것은 양식이 달라 아무래도 분청제기보뚜껑편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충효동과 관련이 있지 않나 추측된다. 호림미술관에서 선 보였던 분청사기상감보 12점도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충효동과 더 연관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충효동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제기들이 보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기본이 되는 것은 보와 궤이며 여러 가지 준과 작과 상형제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궤 뚜껑 안에 최상이라는 사기장의 이름이 보이는 것도 있다는 점이다. 분청제기보 정도라면 국가적인 제례 정도가 아니면 일반에서는 사용을 할 수가 없는 기물이다. 그러니 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청제기보뚜껑편 또한 많은 부분이 손상된 도편이라고는 해도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귀하기는 마찬 가지다. 도편에 관심을 가져온 지가 꽤 오래 되었지만 이런 '분청제기보뚜껑편'은 나로서도 처음 만나 본 것이다. 그러니 잠시나마 뚜껑을 몸체의 굽으로 오인한 경우도 생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깨진 부분을 잘 살펴보면 설익어 흙 기운이 많이 남아 있는 부분이 보인다. 그런 정황들로 미루어 보아 이 분청제기보뚜껑편은 도요지에서 나온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그 고향이 충효동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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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23)<br>분청덤벙상준편신기하기만 했던 기억 이규진(편고재 주인) 초식동물의 왕인 코끼리는 우리나라에서 사는 동물이 아니다. 따라서 동물원이 없던 시절 조선에서 코끼리를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본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 것도 서민뿐 아니라 왕까지 본 적이 있다고 하면 이 얼마나 엉뚱한 생각이랴.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이다. 코끼리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 것은 '태종실록'이다. 대마도주가 조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코끼리를 보내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코끼리가 말썽이었다. 우선 엄청난 곡식을 먹어 치워 고민인데다 구경을 나왔던 전 관리가 밟혀 죽는 사건까지 발생한 것이다. 이에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육지로 다시 나오는 등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던 이야기들이 전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조선 시대에도 코끼리를 본 사람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코끼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다. 기원 전 3세기경 코끼리를 이끌고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한다. 막강한 로마를 상대로 16년간이나 전쟁을 하며 괴롭히다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으나 그 용기와 과감성과 결단력 등은 오늘날에도 무인의 대명사로 회자되고는 한다. 코끼리는 불교와도 관련이 깊다. 부처님의 자비를 상징하는 보현보살도 코끼리를 타고 있다. 덕망 있고 존귀한 사람이 타는 가마를 불교에서는 상가(象駕)라고 하는데 코끼리가 경전을 싣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전통 속에서도 코끼리는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제기의 일종인 상준이다. 희준과 더불어 제사를 지낼 때 물이나 술을 담아 놓던 그릇의 일종이다. '세종실록'의 제기도설(祭器圖說)에는 35종의 제기를 정리해 놓고 있다. 소와 관련 있는 희준이나 코끼리와 연관이 있는 상준도 이에 포함이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사기로 된 희준과 상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사발 같이 생긴 그릇의 몸체에 소나 코끼리를 그려 넣은 것과 아예 소나 코끼리의 형상을 본떠 만든 것이 그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속을 비게 만들고 등에 구멍을 뚫어 물이나 술을 담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내게는 전부터 구입해 둔 도자기 상준편이 몇 점 있다. 백자편도 있고 분청편도 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분청덤벙상준편이다. 머리 부분만 남아 있는 것인데 귀도 한쪽은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긴 코는 완전한 편이다. 그런데 분청상준의 경우 대개는 귀얄이고 여기에 더러 음각을 한 것이 보인다. 말하자면 덤벙분청은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귀한 분청덤벙상준편은 어디서 만든 것일까. 덤벙분청을 만든 곳으로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보성이 널리 알려져 왔다. 그후 고흥 운대리가 등장하면서 덤벙분청하면 두 곳이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덤벙분청이 이 두 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서천 신검리에서도 덤벙분청이 발견된 자료가 있고 보면 아직 알려지지가 않아서 그렇지 더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하튼 분청덤벙상준편의 경우 백토 분장이 두터우면서도 거칠어 보이는 것이 고흥 운대리 보다는 보성의 도촌리 쪽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보게 되고는 한다. 내가 코끼리 실물을 처음 본 것은 언제일까.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20대 초에 창경원으로 벚꽃놀이 구경을 갔다가 동물원에서 본 것이 처음일 것이다. 팔뚝만큼이나 큰 코가 달린 코끼리를 보면서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어제 일 같은데 이제는 동물원도 없어지고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제 이름을 다시 찾은 지도 오래 되었다. 큰 코에 큰 귀. 실물은 아니지만 사실적으로 만들어진 분청덤벙상준편을 보고 있노라면 처음 보는 너무도 생경한 코끼리의 이질적인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 졌었을 조선 사람들의 표정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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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7)<br> 철화분청손잡이잔편아득한 세월 저편의 일 이규진(편고재 주인)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전라남도 고흥은 멀고도 멀다. 지금도 멀지만 교통이 불편하던 예전에는 더 멀어 보이든 곳이다. 그런 고흥을 오래 전 몇 차례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이 지역에 있는 운대리 분청도요지 답사를 위해서였다. 운대리 분청도요지를 당일치기로 다녀오려면 일찍 서둘지 않으면 안된다.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첫 버스를 타고 광주로 가 차를 갈아탄 후 고흥 읍에서 택시를 대절해 들어갔다가 되돌아 역순으로 서울로 돌아와 집에를 도착하면 저녁 12시경.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차 안에서 시달리고서도 도요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두어 시간에 불과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아도 열정이 넘치지 않으면 불가능했던 젊은 날의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운대리 분청도요지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청자 도요지가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에, 그리고 백자 도요지가 경기도 광주 일대에 운집해 있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5개의 초기 청자요지와 무려 25개에 달하는 분청 가마터가 산재해 있다. 그 뿐 아니라 이곳에서는 상감 인화 조화 박지 귀얄 덤벙 등 종류를 총망라한 도편들이 출토되고 있어 가히 분청의 보물창고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운대리 분청도요지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덤벙분청이다. 일명 분장분청이라고도 하는 이 기종은 굽은 물론 기물 전체를 백토로 분장한 것이 특징인데 다도와 관련해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종류다. 따라서 한 때는 일본인들이 관광단을 조직 떼로 몰려와 이곳을 헤집고 다녔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특기할만한 것은 운대리 분청도요지에서는 소량이나마 철화분청이 출도 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철화분청하면 계룡산 학봉리가 우선 떠오른다. 여기서는 철화가 들어간 철화분청이 대량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두 지역의 차이를 보면 계룡산 학봉리 것이 귀얄 바탕에 철화의 액센트가 강한데 비해 운대리 것은 덤벙 바탕에 철화를 아껴 쓴 듯 간략하게 무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계룡산 학봉리에서는 철화가 체계화 되고 일상화 된데 비해 운대리에서는 시험 정도에 머문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운대리 분청도요지에 관심이 많아 몇 차례 답사를 통해 덤벙을 비롯해 갖가지 종류의 분청편들을 만나 본 바 있다. 하지만 철화분청편을 보지 못해 늘 아쉬움과 허전함이 남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얼마 전 이 운대리 철화분청편 두 점을 지인으로부터 구했다. 내가 도편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있던 지인이 양도를 해준 것이다. 오래 된 아쉬움을 털어 버릴 수 있도록 도와 준 지인에게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양도를 받은 두 점 중 한 점은 분청사발편이고 이번에 소개하는 한 점은 철화분청손잡이잔편이다. 굽은 완전하고 측면이 동그스럼하게 올라가다 입술은 약간 외반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몸체의 2/3정도가 달아나고 없다. 백토분장을 한 외면에 추상적인 무늬가 철화로 들어 있는데 색감은 짙어지다 못해 먹으로 그린 듯한 검은색이다. 손잡이가 붙었던 흔적도 약간은 남아 있어 이 것이 철화분청손잡이잔편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생각해 보면 운대리 분청도요지를 답사했던 것도 아득한 세월 저편의 일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 곳은 지금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몇 군데는 발굴도 하고 박물관도 들어섰다고 하니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변화가 보고 싶어서라도 한 번쯤은 찾아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막연한 그리움만 앞설 뿐 언제 다시 용기를 내어 그 먼 곳을 찾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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