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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한글서예가전에서 만난 사할린아리랑사할린아리랑 따뜻한 조선땅을 놔 두고 가라후토엔 내 여기 왜 왔나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많은 南樺太 징용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즘한글서예협회 이종선 회장의 초청을 받고 13일 인사동 한국미술관에 도착했다. 개막식을 마치고 30명의 작가가 내놓은 100점이나 되는 한국 전통문화 서예작품들을 감상했다. 이종선 회장님이 축사를 부탁하셔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은 바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끌려가서 해방이 되었지만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70년을 러시아 국민으로 살아야 했지만 우리는 독자적인 한글이 있어서 당당하게 디아스포라와 고난을 넘길 수 있었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래서 러시아 전국에서 사할린에서만 한글판 새고려신문이 존재한다. 전국에서 불리는 아리랑이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서체로 표현 된 아름다운 서예작품이 되어 걸려 있다. 한국 전통문화 '서예'라는 예술분야인데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한글이 예술작품으로 탄생한 전시회이다. 아름다운 서체로 쓰여진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서예로 탄생한 다양한 한글 서체는 꽃이 되고 나비가 되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전통문화를 지키는 이즘협회 작가들에게 존경심을 보낸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계승이 안되는 분야이다. 북한에는 서예전시회 같은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작품들이 국악신문사에 기증이 되어 국내외에서 전시가 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얼 이종선 회장님이 직접 '사할린아리랑' 작품 앞으로 안내를 해주셨다. 그동안 국악신문 수요 연재 한글서예로만 받아 보았던 예술작품을 직접 보니 감동이 밀려왔다. 특히 이 작품은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리더 공노원(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뜨기 5일 전 (2022년 9월 25일자) 수요 연재로 나와서 더욱 스토리를 더하는 작품이다. 당시 9월 28일 양구 두타연에서 개최 되는 PLZ축제에 인천과 양주에 사는 사할린동포들이 초청 되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안에서 이종선 선생의 사할린아리랑 작품을 공노원 선생이 인쇄해서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공선생은 한얼 선생의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 사설' 수요 연재 내용을 자라나는 고려인 학생들에게 한글 수업에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부모들이 사할린에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다. 당시 일하면서 힘들때, 고향이 그리울 때, 결혼식 같은 날에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이 유일하다. 그래서 누구나 모이면 작대기로 장단을 두드리며 아리랑을 흥얼거렸다. 러시아나 유럽 어느 민족에게도 하나의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곡은 없다. 우리 민족은 언제 어디서든 아리랑으로 하나가 된다. 올해는 파주에 정주한 150명 사할린 동포들이 귀국 15주년기념 행사로 오는 23일 '파주아리랑 콘서트'를 개최한다. 그날 휘날레에서 사할린 가수들과 이혜솔 명창이 관객들과 '사할린아리랑'을 함께 부르기로 했다. 2017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사할린아리랑축제를 통해 사할린에는 아리랑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2020년 사할린 정부는 우리에게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앞에 아리랑공원과 아리랑누각을 선사해 주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이 불리는 전국 지역에는 아리랑노래비가 세워져있다. 정선, 진도, 밀양, 문경, 상주, 영천 등. 사할린 아리랑공원에도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담긴 이 사할린아리랑이 새겨진 사할린아리랑노래비가 세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늘 이 아리랑 작품들이 사할린 전시장에서 걸리기만을 고대해 본다. 우리 동포들에게 큰 자긍심이 될 것이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한류 열풍으로 한글학과도 생겨나고 한국어와 한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사할린 동포들을 대표해서 이 행사를 개최한 (사)이즘한글서예협회 이종선 회장과 지원을 해주신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에게 감사를 드린다. 다시 한번 이즘전을 축하한다. 사할린아리랑 무정한세월 야속하다 청춘시절 날 데려와 팔십삼이 먹도록 여기서 다 늙어 영혼이 되네. 아이구 원통하고도 참말루 싫어 누구게다 한을 다 풀까요. 서른다섯에 남편을 잃고 혼저 자탄 애탄하며 팔십 서이를 살어 나와 누구게다 이런 한을 풀겠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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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 칠십 서예전을 기대한다.중진 서예가이며 왕성한 활동으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서예가 중 한 분인 한얼 이종선씨가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서예전을 인사동 입구에 있는 전시공간 코트(Kote)에서 11월 17일부터 연다. 이종선 씨는 국악신문에〔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을 매주 한편 씩 2년이 넘게 발표하면서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과 아취를 널리 확산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시회를 앞두고 이동식 문화대기자가 이종선 씨를 미리 만나보았다. Q. 오랜만입니다. 일년 만이군요. 지난해 이맘 때 [우리음악사설] 전 이후.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란 이름이 다소 생소한데요? A. 네, 쑥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제가 올해 칠순 고희(古稀)입니다. 나이가 요즘 말로 7학년으로 접어들게 되었기에 그동안 제가 어떤 작업을 어떻게 했는가를 저 자신도 돌아보고 또 서예를 좋아하시는 분들과도 함께 보는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칠십이이’라는 표현은 ‘칠십이구나’ 혹은 ‘칠십일뿐이다’ 등으로 풀 수 있는데 다시 말하면 ‘이제 고희, 칠십인데 어느새 칠십이지만 다만 이제 칠십일뿐이네’ 라는 뜻도 들어가 있습니다. Q. 그럼 어떤 작품들이 선보이는가요? A. 전시되는 작품이 150여 점이 되니 조금 많지요? 저로서는 저의 서예세계의 현재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저의 서예 역정과, 그리고 서예의 이상향을 찾아온 그동안의 노력을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앞으로의 갈 길도 다시 생각해보자는 전시입니다. 말하자면 저의 서예작품의 모든 분야, 여기에는 한글작품과 한문작품 국한문 혼서작품 및 사설작품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Q. 이 선생님은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을 구현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세계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A. 제가 625 전쟁이 막 끝나기 전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다 보니 어릴 때 필재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서예를 배우지 못했다가 한창 인생을 시작하던 청년기에 사업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서예를 만나서 시작했으니 조금 많이 늦었지요. 늦게 시작했지만 여러 선생님들, 특히 소헌 정도준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동아미전에서 초대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서예의 본원이랄까 뿌리랄까, 또 한국인으로서의 서예의 뿌리를 생각하다 보니, 한글의 뿌리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글자형, 흔히 판본체라고 합니다만, 거기에 있다는 자각이 들어 한글서예 작업에 매진하게 되어, 2002년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다만 판본체는 각이 진 엄격한 고딕체인데 이런 정형적인 구도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조형, 새로운 장법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물론 이 작업에 대해 좋다고 하신 분도, 나쁘다고 하신 분도 있지만 그쪽으로 저는 끊임없이 천착을 하다 보니 지금 같이 저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되었지요. 저로서는 이것이 저만의 특징적 예술세계라 하고 싶습니다. Q. 최근 쓰신 "뒷동산 도라지꽃"으로 시작되는 '횡성아리랑' 이란 작품을 보니까 맨 위에는 한글 판본체와 광개토대왕체가 섞여 있으면서 마치 도라지꽃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기대어 피어있는 형상의 느낌이 오고, 그 밑의 사설에는 행서로 간 궁체가 받쳐주고 있어서 변화가 있는데 한글서체도 일정하지는 않은 모양이지요? A. 저의 한글서예는 몇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은 궁체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하여 나온 민체흘림이고요, 훈민정음 원래의 정격 고체, 이것을 제가 자유로운 표현으로 다시 쓴 판본류가 있습니다. 궁체는 여성적인 곡선과 우아함이 특징인데, 저는 여기에 꾸미지 않는 강직한 세로획을 첨가하여 강건함을 표현합니다. 근래의 궁체가 부드러운 곡선에 집착하여 획력이 부족해지는 면을 보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민체흘림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한 후에 한글의 자모음이 갖고 있는 특성을 대입시켜 만든 새로운 획과 조형입니다. 저는 한글서예를 하지만 한문서예, 그 중에서도 안진경의 해서와 행서를 좋아해서 이를 저의 한글서예에 녹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진경은 강직한 분으로 그의 일생도 등락을 거듭했는데, 서예가로서 안진경은 그때까지 유행하던 왕희지의 부드럽고 우아한 서체에서 남성적이고 강건한 서체로 흐름을 바꿔놓아 사람들이 그의 서체에는 힘줄이 있다고 할 정도로 남성적이면서 굳건하고 탄탄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요소들을 한글민체에 담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바탕위에 대소, 강약의 변화와 판본류인 한문고체에서 보여주는 자유로운 장법을 적용해 한글흘림의 영역을 확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체라고 부르는 판본체의 글씨 영역이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엄격한 형태를 많이 연습을 했고, 특히 한글고체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호태왕비, 즉 광개토대왕비를 제가 좋아했기에, 그러한 질박미(質朴美)와 호방함을 나름 구현해냈습니다. Q. 한글서예의 표현세계가 엄청 넓어졌다는 말이군요 A. 네, 저는 우리 한글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각합니다. 한자는 네모라는 틀에 맞추어 쓰고 있기에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에 맞춰 쓰고, 그 영향으로 우리 한글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쓰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틀을 부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의미전달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한자(漢字)건 한글이건 한 자 한 자의 크기도 뜻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장에서의 의미전달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나 필법이 꼭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내려 긋는 선도 말하자면 꼭 꼬리를 가늘게 빼는 기법을 벗어나서 편하게 마감하지요. 그렇게 하니 우리 한글서예 작품이, 물론 그 안에 한자를 겸용하기도 하지만, 훨씬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격조 있게 다가오고 있지요. 다만 이러한 서체에의 도전은 획들의 사용으로 인해 장력이 충돌이 생길 수 있는데, 위에서 흔들린 것은 밑에서 잡아주고, 좌에서 넘어진 것은 우에서 받쳐주고 있고, 위에서 커진 것은 아래에서 작아지며 전체를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Q. 한자 한문을 모르는 세대가 많아지면서 한글 서예의 의미가 더 커지고 있군요. 그런 분들도 한글의 조형세계가 넓어진 것을 보면 좋아할 것 같습니다만 A. 최근 우리 사회가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개인의 취미를 살리려는 분위기가 형성된 이후에 서예를 찾는 분들이 많아져서 저희는 기쁩니다. 그런 젊은 분들중에는 굳이 어려운 한자 아니라도 한글 서예로 여러 가지 많은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새로운 조형을 추구하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Q. 한글 서예는 외국인들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가요? A. 그동안 한글서예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2019년에 몽골에서 초대전을 크게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작가 5명, 몽골인 작가 8명도 함께 한글서예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월수(越秀)외국어대학에서 한글날을 맞춰 한극과 서예 강좌를 하였고 한글서예 전시회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한국서학회 주최로 한글 서예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Q. 그래도 한자서예가 모든 서예의 바탕 아닙니까? 또 기본으로도 잘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A. 물론입니다. 사실 서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골문, 고문, 금문, 전서 등은 한문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만큼 표현 세계가 깊고 넓은 만큼 공부하는 맛이 나지요. 특히 서예는 단순히 뜻을 전달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 문장 전체를 통해서 서예를 하는 사람의 인격과 격조와 삶의 자세 같은 것을 느끼게 하니 그만큼 멋진 예술이지요. 한자 서예를 오래 연마하면 글씨와 사람이 하나가 되지요.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면 사람이 꼭 이런 저런 것을 쓴다는 느낌도 넘어서야 진정한 서예가 된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반드시 마음으로 하여금 붓을 잊게 하고, 손으로 하여금 글씨를 잊게 하여,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면 글씨에는 쓸데없는 생각이 없어진다.” Q. 지난 번에도 궁금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컴퓨터로 깨끗하고 정제된 글씨체를 모두 재현함으로써 컴퓨터 키보드가 붓을 대신하는 세상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만? A. 단순히 글자만을 추구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서예는 그것이 아니지요.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나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고 곧게 뻗어 오르는 대나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심산유곡에서 잔잔하고 맑은 향기를 발산하는 난초처럼 서예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선인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예야말로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우리들의 심성(心性)과 덕성(德性)을 개발해 능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초등학교에서부터 서예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고 인격 수양을 하는 중요한 과정인 서예를 가르치지 않으니 최근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저는 생각합니다. Q. 이 선생님의 한자서예 세계도 워낙 다양하고 광대하다는 평이 있어서, 이번 전시회에 어떤 작품이 보여질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A. 네 지난 시간 저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작업해서 이룬 것도 없지는 않지만 서예라는것은 끝이 없는 길이지요. 아직도 해야 할 일, 가야할 길이 많고도 길다는 뜻입니다. 고희라고 하지만 서예는 더 많은 변화와 신 개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다만 칠십일 뿐이다’라는 뜻의 전시회 제목을 사실, ‘이제 겨우 칠십일 뿐이다’ 라는 말로 바꿔서, 더 많은 변화를 추구하는 전환점으로 삼고 싶어서 저의 서예의 역정을 되돌아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Q. 이번 전시회에 동문, 후배들의 작품도 나온다고 하지요? A. 제가 소헌 정도준 선생께 배웠고 저와 같이 동문 수학하면서 동고동락한 친구 겸 후배들이 ‘오거서루(五車書樓)’ 회를 만들어 같이 또는 개별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작품 하고요, 그동안 서로 방문 교류를 해 온 중국 소흥(紹興, 샤오싱)의 난정서법가협회 회원 5명이 축하의 작품을 보내주셨습니다. 어쨌든 고희전인데 마침 이분들도 전시장에 오셔서 고희연을 열어주신다고 하니 저로서야 영광이지요. Q. 이번에 전시하는 곳이 코트라는 곳인데 좀 생소한 장소군요? A. 인사동의 남쪽 입구인데 서울이 재개발로 옛모습을 다 잃어가는 상황에서 여기는 서울 종로의 근대의 역사가 남아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여기 젊은 여사장님이 이런 역사적인 공간을 예술의 메카로 지켜내려고 많이 노력하는 분이고요. 그래서 이곳 넓은 공간을 쓰게 되었습니다. 와 보시면 아니 서울에 이런 공간이 남아있단 말인가 하며 놀라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넓은 공간에서 서예의 역사를 함께 보는 것이지요. 전시는 17일에 시작해서 25일까지입니다. 많이 와 보시길 바랍니다. Q. 다시 긴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시회의 성공을 빌겠습니다. A. 네 감사합니다. 꼭 와서 보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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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 이종선 특별전 (17-25일), 七十而已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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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아리랑보존회 특별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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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를 맞아 서예가 이종선을 만나다시조 시인으로 알려진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 분천으로 내려와 어부가를 시조 형식으로 만들어 퇴계 이황과 그 형 온계 이해를 배 위로 불러서 관객으로 하고는 노래로 불렀다. 아쉽게도 그 노랫가락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노랫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로 고쳐 만들어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부르고 즐겼던 시조나 가곡을 직접 들을 수 없는 현대에 이 노래들을 붓으로 들려주는 서예가가 있다. 한국서학회 이사장을 지낸 중진 서예가 이종선(67) 씨다. 이종선 씨는 국악신문에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 사설’을 2년 이상 발표하며 글씨로 눈으로 우리 선인들의 노래를 들려주어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22일 전시회를 준비하는 이종선 서예가를 이동식 국악신문 대기자가 천도교 수운회관에 있는 서실에서 만났다. Q. 전시회를 하신다고요? A. 네. 지난해부터 음악이 담긴 우리 말, 시조, 한시 등 사설을 한글로 써서 국악신문에 발표해왔는데요, 그동안의 작업을 돌이켜보면서 이런 작품을 오프라인으로 시민들도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12월 9일에 인사동의 서예 전문 화랑인 백악미술관에서 한 열흘 엽니다. Q.그동안 신문에 쭉 올려주시는 서예 작품들은 아주 보기에 편하고 다양하고 또 정말로 노래를 읽어서 듣는 듯한 흥취를 느낍니다. 그런 것들이 한글로 써서 그런 것이겠지요? A. 우리 조상들은 생활에서의 생각, 사상, 감회 이런 것들을 시조나 시로 만들어 발표해왔고 또 노랫말로도 전하고 있는데, 우리말로 된 이런 것은 굳이 한문으로 표현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다 보니 한글서예로 표현하는 게 본래의 언어의 특성과도 맞아서 편하게 느껴지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Q.선생님은 그동안 한글서예 운동을 주도하셨지요? A. 서예의 뿌리는 한자이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고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니 서예도 우리 나름대로 추구해야 할 길이 있는데, 한자서예는 중국인들이 개척한 서예 세계를 자칫 그대로 따라가는데 그칠 우려가 있습니다. 서예라는 것이 그 나라 사람들의 말을 글씨로 담아내는 것이라면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 글인 한글로 쓰는 것이 맞고 그것이 예술로 승화되면 더없이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한글서예는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1425년에 세종 대왕께서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셨지만,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다 한문을 쓰고 궁 안에서나 일상 서민들 생활의 보조 수단으로 한글이 사용되었기에 문자 조형, 곧 서예로서의 한글은 사실 근세 이후에 한글이 전용되면서 개발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역사는 아직 백 년 정도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이를 확대 개발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지요. Q. 그런가요? 한글서예가 한자처럼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A. 그렇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의 한 장르로 대중에 등장한 것이 1920년대 초로, 윤백영이란 여성이 궁녀들이 쓰던 글씨체인 궁체를 처음으로 전시작품으로 출품을 했고, 그 무렵부터 여러분들이 궁체로 한글서예를 태동시켰습니다만 1940년대 초에 이르러 일중 김충현 씨가 지금 우리들이 많이 쓰는 정자체의 한글서예, 거기다가 훈민정음 판본에서 따온 고체까지를 발표함으로써 한글서예의 시대가 본격화되었지요. 그 뒤 남궁억, 장지연, 이철경 등 문인들에 의해 그 세계가 넓어졌는데 다만 그것이 엄격한 틀에 갇혀 있던 편이었다가 최근 20년 이래에 한글서예도 조형미를 새롭게 추구하는 현대 서예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Q. 그런데 서예 작품들을 보면 순수 한글만이 아니라 한문과 혼용해 쓴 경우도 있던데... A. 사실 우리가 한글날을 맞으면 꼭 나오는 것이 한글전용이라는 말인데요, 아시다시피 우리의 말에는 상당히 많은 한자어가 들어가 있고 그것들은 한글로만 표기하면은 뜻이 명확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서예라는 것도 어차피 종이 위에 글자를 쓰는 것이기에 그 뜻을 명확히 해야만 정신과 예술성이 높아지는 것이기에 한글로 쓰지만 필요한 경우엔 한자를 써서 그 뜻을 보다 명확히 하는 작업입니다. Q.한국서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셨지요? 그때 문경에서 아리랑 노랫말을 모아서 한글서예로 표현한 큰일을 하셨는데.... A. 제가 한국서학회 이사장으로 있을 때 마침 문경시가 전국의 우리 아리랑 가락과 사설을 모으자는 운동을 시작해 저희가 문경시와 MOU를 맺고 2년 동안 갖은 애를 써서 아리랑 가사들을 거의 망라해서 서예로 담아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붓으로 부른 아리랑이라고 합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 120여 회원들이 각기 10점에서 30점까지, 1만 수를 자신의 필체와 필법, 철학으로 썼기에 그 아리랑 서예를 통해서 노래로만 있던 아리랑이 유형의 시각예술로 태어났고요, 이 작업으로 우리나라 현대 한글서예의 다양한 표현 세계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집약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더구나 이 작업을 하면서 문경에서 만들어진 전통 한지를 썼는데, 이게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순수 천연재료만으로 만들었기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한지 중에 가장 좋더라고요. 비단은 오백 년이고 종이는 천년을 간다는데, 이번에 한지장 김삼식 씨가 만든 전통 한지들로 쓴 아리랑 작품들은 정말로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문경시에서 한 아리랑 서예 작품화는 아리랑 가사와 사설을 처음 모은 것도 그렇지만, 한글서예의 발전을 위해서도 큰 획을 긋는 작업이었습니다. Q.그런데 한국서학회는 외국에서도 한글 서예전을 열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글서예가 외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비쳤는지가 궁금합니다. A. 저희는 이 한글서예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2019년에 몽골에서 초대전을 크게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작가 5명, 몽골인 작가 8명도 함께 한글서예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한글을 아는 분들이라면 한글서예도 당연히 관심이 있고 또 새로운 예술표현에 대한 탐구심도 있습니다. 전에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월수(越秀)외국어대학에서 한글날을 맞춰 한극과 서예 강좌를 하였고 한글서예 전시회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한국서학회 주최로 한글 서예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Q.그런데 한자가 뜻글자인 데 비해 한글은 소리글자라서 서예의 조형성이나 예술성 측면에서는 비교하기가 어려운 것 아닌가요? A. 서예를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해서 이름이 다르고요, 사실 중국 서예인들이야 한자를 쓰는데. 일본 서예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표음문자인 가나가 있으니 그것으로도 자신들의 글을 많이 쓰지요. 어찌 보면 한자만의 서예를 그들의 상황에 맞게 조형적으로 확대 개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글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자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자는 네모라는 틀에 맞추어 쓰고 있기에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에 맞춰 쓰고, 그 영향으로 우리 한글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쓰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틀을 부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한자(漢字)이건 한글이건 한 자 한 자의 크기도 뜻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장에서의 의미전달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나 필법이 꼭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내려긋는 선도 말하자면 꼭 꼬리를 가늘게 빼는 기법을 벗어나서 편하게 마감하지요. 그렇게 하니 우리 한글서예 작품이, 물론 그 안에 한자를 겸용하기도 하지만, 훨씬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격조 있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Q.한자나 한문을 모르는 세대들이 많아지면서 서예도 큰 전환점을 맞고 있는 것 같은데요? A. 서예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운생동(氣韻生動)’입니다. 예술의 표현대상이 갖고 있는 생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인데, 거기에는 또 글 자체의 인격이랄까 품격에다가 서예가의 인품도 담아내는 예술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 약허(若虛) 곽사(郭思)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지요. "인품이 높으면 기운이 높지 않을 수 없고 기운이 높으면 생동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높은 인품을 담아 한자와 한글이 같이 쓰이면 그 효과가 더 좋아질 것입니다. 더구나 한국인들에게 서예는 한글이 들어감으로써 우리 서예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컴퓨터로 깨끗하고 정제된 글씨체를 모두 재현함으로써 컴퓨터 키보드가 붓을 대신하는 세상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 사실 서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골문, 고문, 금문, 전서 등은 한문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최근 서예 인구는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장년과 노령인구가 많아지고 또 지역사회에서 취미 개발을 위해 각종 강좌가 많아지면서 서예를 배우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서 서예인들로서는 이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나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고 곧게 뻗어 오르는 대나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심산유곡에서 잔잔하고 맑은 향기를 발산하는 난초처럼 서예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선인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기에 서예야말로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우리들의 심성(心性)과 덕성(德性)을 개발해 능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문제는 교육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초등학교에서 서예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고 인격 수양을 하는 중요한 과정인 서예를 가르치지 않으니 최근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도 어려서 서예를 가르치지 않은 때문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서예는 다른 예술 장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신적인 수양 수단이기에 전인교육을 위해서도 초등학교에서 어느 정도는 서예를 배우도록 하는 것을 저희 서예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Q.‘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이 있지요? 글씨가 곧 그 사람이란 말인데, 이 선생님 취월당(醉月堂)이란 호가 재미있어 보입니다. 어떤 연유가 있습니까? A.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가 젊었을 때 술을 자주 했는데, 제 스승인 능허(凌虛) 스님이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라는 글에 나오듯이 술에 취하지 말고 달에 취하라는 뜻으로 호를 주셔서 감사하게 쓰고 있습니다. Q.12월 9일이지요? 그런 작업들이 이번 전시회에 나온다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A. 네. 시간 되시면 인사동에 나오셔서 백악미술관을 찾아주셔서 우리 한글서예가 어떻게 발전했고 어디로 갈 것인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생님,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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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 ‘2020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 문화훈장 18명 수훈문체부 박양우 장관은 "우리나라 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공헌하신 모든 수상자들께 마음으로부터 축하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라며 "문화예술은 사회적 환경이 어려울수록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모든 국민이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는 지금, 문화예술계가 본연의 활동으로 지친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줘 코로나를 극복하고 국민이 화합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양우, 이하 문체부)는 ‘2020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 ‘문화훈장’ 수훈자 18명, ▲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 표창)’수상자 5명, ▲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체부 장관 표창)’ 수상자 8명 및 ▲ ‘예술가의 장한 어버이상(문체부 장관 표창)’ 수상자 5명 등, 총 36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시상식은 10월 19일(월) 오후 2시, 방역 지침을 철저하게 준수한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은관 문화훈장 6명, 보관 문화훈장 5명, 옥관 문화훈장 4명, 화관 문화훈장 3명 수훈 올해는 ▲ 문학 부문 고(故) 김종철, ▲ 미술 부문 고 이돈흥, ▲ 공예·디자인 부문 고 한익환, ▲ 건축 부문 승효상, ▲ 음악 부문 고 백대웅,▲ 연극‧무용 부문 고 김상열 등 6명이 은관 문화훈장을 수훈한다. 고 김종철은 문학비평가이자 사상가로 <녹색평론>을 통해 근대문명에대한 근본적 성찰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고이돈흥은 1975년부터 2019년까지 서예전시회를 43회 개최하고, 1982년부터 38년간 청소년 서예대전을 개최하는 등 일평생 후학 양성과 서예 예술 저변 확대에 공헌했다. 고 한익환은 전승도예가로서 조선 관요 백자 색을 처음으로 재현하는 업적을 이루었고, 승효상은 40여 년간 건축가로 활동하며 2011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2018~2020년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 건축문화 발전에 공헌했다. 고 백대웅은 구전되던 전통음악을 오선악보로 채보하고 이론적으로정립해전통음악의 구조를 체계화했고, 고 김상열은 극작가 겸 연출가로서 33년간 <길>, <애니깽> 등 수많은 희곡을 창작‧연출하고, 뮤지컬,마당놀이, 드라마 등다양한 분야의 개척과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보관 문화훈장은 ▲ 2,400여 점에 이르는 문화재를 기증해 지역문화 창달에 기여한 고 최규진 전 남가람문화재단 이사장, ▲ 1971년 등단 이후 50여 년간 창작 희곡을 발표하며 한국의 오늘을 이야기한 이강백 극작가, ▲ 미술관 설립, 청년미술상 제정 등으로 지역 미술 발전에 기여한유휴열 한국미술협회 고문, ▲ 한국 성악의 선구자로 한국 성악 토대를 구축하고세계 전파에 기여한 황영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국립무용단 지도‧자문위원,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무용 발전에 공헌한김문숙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등5명이 받는다. 옥관 문화훈장은 ▲ 37년간 지역문화 발전 기반 구축과 창달에 기여해 온이수영 경남문화원연합회장, ▲ 전통적 소재와 기법을 통해 현시대를 드러내고, 한국화의 현대화에 기여해 온 박대성 화가, ▲ 2019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을 지내며 세계 디자인을 선도해 온 이길형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장, ▲ 한소리 국악원을 창립하고 아마추어 국악인 7만여 명을 배출한 조성래 한소리국악원장 등 4명이 받는다. 화관 문화훈장은 ▲ 지방문화원 및 시도문화원연합회 발전에 기여한 장상호 한국문화원연합회 국장, ▲ 1988년부터 국악 자료의 발굴 및 수집, 해외 배포를 통해 국악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정창관 정비앤에이(주) 대표, ▲ 국립발레단 후원회장, 국립중앙박물관 이사 등을 역임하며 문화예술 후원 및 발전에 공헌한 허용수 지에스(GS)에너지 대표 등 3명이 받았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5개 부문 5명에게 수여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은 5개 부문에서 5명에게 수여한다. ▲ 문화일반 부문에서는 교육뮤지컬이라는 문화예술교육 영역을 활성화한 박찬수 치악초등학교 교사, ▲ 문학 부문에서는 시, 소설, 평론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작품활동으로 문학담론 형성과 지역 문학진흥에 기여한 김형수 신동엽문학관 관장, ▲ 미술 부문에서는 장애인 주제 작품으로 국제사회에서 미술을 통한 장애인 인권 개선에 기여한 김근태 서남권문화예술협회장, ▲ 음악 부문에서는 가야금의 세계화와 후학 양성에 힘써 국악 발전에 공헌한이지영 서울대학교 국악과 교수, ▲ 연극·무용 부문에서는 치밀하고 현실적인 인물 구현으로 대한민국 대표 연극배우로 자리매김한 남명렬 연기자 등이 대통령 표창과 함께 상금 1천만 원을 받았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8개 부문 8명 선정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은 8개 부문에서 예술가 8명을 선정했다. ▲ 문학 부문에서는 소설가 김금희, ▲ 미술 부문에서는 조형예술 남화연, ▲ 공예·디자인 부문에서는 목공예 강석근, ▲ 건축 부문에서는 건축가 김찬중, ▲ 음악 부문에서는 지휘자 서진, ▲ 전통예술 부문에서는 경기민요 강효주, ▲ 연극 부문에서는 배우 변유정, ▲ 무용 부문에서는 안무가 김보람 등 8명이 문체부 장관 표창과 함께 상금 5백만 원을 받는다. 예술가의 장한 어버이상 5명 선정 올해 30회째를 맞이한 ‘예술가의 장한 어버이상’은 자녀를 훌륭한 예술가로키운 어버이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1991년에 제정된 상이다. 지난해까지 매년 5월에 시상식을 개최했지만 올해부터는 문화예술발전 유공자 시상과 함께 진행한다. ▲ 국악인 이희문 씨의 어머니 고주랑 여사, ▲ 조각가 양혜규 씨의 어머니김미순 여사,▲ 가수 조용진(예명 알리) 씨의 어머니 김미연 여사, ▲ 시인 나희덕 씨의 어머니 김초자 여사, ▲ 연극 연출가 문삼화 씨의 어머니 전수복 여사가 올해 수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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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전 '열암 송정희 선생을 찾아서'열암 송정희 선생을 찾아서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술을 많이 접하고 즐길 줄 아는 마음이 먼저이겠지만 ‘후원'의 이름으로 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 또한 중요하다. 옛날 로마의 재상 마에케나스(Maecenas)의 문화예술에 대한 두터운 보호와 지원의 유래에서 오늘날 기업과 문화를 이어주는 ‘메세나(Mecenat)' 활동이 이어진 것처럼, 현대에는 문화예술과 이를 뒷받침해 주는 후원의 관계가 일차적인 상호관계로서뿐 아니라 우리 문화예술의 토양을 일구고 미래를 건축해 나가는 데에 있어 근간을 이룰 만든 중요한 요소로 발전했다고 할 것이다. 열암 송정희 선생은 오늘날 열암체라는 서체의 일가를 이루기까지 고금의 모든 서체를 익히신 서예가로 정평이 높다. 서체 또한 묵향과 같이 짙고 깊어 고매한 작품세계를 이루고 있으며, 오늘날 대표적인 서예가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연암 송정희 선생을 만나보았다. 기자가 열암 선생께 저희 국악신문 명사를 찾아서라는 지면에 소개하고 초대를 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선생을 '내가 무슨 명사여' 그러나 부득불 찾아 뵙겠다는 기자의 고집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2월 4일 오후 3시로 약속시간 잡고 버스로 광화문 구세군 앞에서 내렸다. 아직 추운 날씨지만 이날은 푸근했다. 구세군 건물 옆길을 따라 골목길을 쭉 올라가니 선생이 계신 축구회관이 보였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문을 여니 묵향과 녹차향이 가득하다. 또한 사무실 곳곳에 선생의 작품과 괴암 괴석이 눈에 드려온다. 찻잔 위로 퍼져 가는 국악방송에서 마침 시조창이 은은하다. 반갑게 열암 선생이 따라 주는 녹차 한 모금하니, 입 안에 푸른 향이 고인다. 기자와 열암 선생과 만남은 10년쯤 되어 보인다. 경기민요 예능보유자인 이춘희 선생님의 소개로 인사를 드렸다. 그때 주셨던 명함을 내보이자 선생은 깜짝 놀라시며 새로 주신다. 선생께 신문을 드리고 이 지면에 초대합니다. 라고 설명하니 그냥 세상사는 애기, 국악계 소식이나 얘기하자고 한다. 열암 선생은 자신이 또한 종이와 먹으로 스스로의 예술 탑을 쌓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주변 문화를 사랑하고 아끼는 예술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들어 온 판소리와 경·서도민요에 대한 선생의 사랑은 남달라 오래전부터 주변 예술인들과 교류해 오면서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담당해 왔다. 기자가 처음 열암 선생을 뵙때도 이춘희 선생과 임이조 선생이 주최하는 청소년국악경연대회 후원 때문이었다. 그때 후원해 오던 대회는 지금까지 올곧은 청소년국악경연대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전남 고흥 출신인 열암 선생은 6살 때 서예에 입문했으며 88년부터 3년간 연속 전국서예대전 특선입상과 한국작가협회 최우수작가상 등을 수상했으며, 93년 대전엑스포 제호와 충무군 이 순신 장군대첩비 등을 제작했다. 또한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동남아서예협회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97년에 한국청소년 건전문화육성 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 청소년 문화전수 사업 등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며, 한·중·일 서예가협회 한국대표와 한국전통문예진흥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2003년 12월 열암 선생은 국립극장 남산이전 30주년을 맞아 국립극장 발전기금 모금에 동참한다. 선생이 45년간 연마한 서화작품을 기증하면서 "한편 기쁘고 한편 부끄럼이 앞선다. 나는 아시(兒時)부터 붓을 잡고 천금(千今) 40여년(餘年)을 이 서(書)의 길을 걸으면서 늘 느껴오던 것은 이 길이야말로 가도 가도 끝이 없고 험한 외길로 가시밭길이란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길을 숙명(宿命)처럼 생각하고 내 목숨같이 사랑해 왔다”는 감회를 밝혔다. 이 무렵 국립극장에서는 2003년 12월 22일, 판소리가 유네스코 선정 ‘인류구전 및 무형 유산걸작'으로 선정된 경사를 기념하고, 우리 전통예술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나의 길 우리소리' 라는 특별공연을 달오름극장에 올리기로 기획했다. 평소 판소리를 비롯해 우리나라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과 조예가 깊은 열암 선생이 국립극장 발전을 위하고 유네스코 선정 ‘인류구전 및 무형 유산걸작'으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당신의 분신(分身)과 같은 귀한 서예 작품을 기꺼이 기증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또한 선생은 이에 앞서 1999년 11월 29일 죖고려대 100년 기념사업' 출범식에 서예작품 5000여점을 고려대 발전에 써달라며 기증하여 화제였다. 시가로 자그마치 200억원 상당에 이르는 서예 작품들이었다. 구한말 고려대 전신인 보성 전문학교 설립에 앞장선 송병헌 선생의 손자인 열암 선생은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라 평소 고려대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이 계기가 됐다.”고 기증 배경을 설명했다. 열암 선생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할아버지가 소리를 좋아한 관계로 사람 방에는 소리 좀 한다는 분들은 항상 계셨다. 그래서 소리만 들리면 몽유병 환자처럼 소리를 찾아다녔다. 이것이 소리에 대한 선생에 연(緣) 이였다. 그래서 선생은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과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고 한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이런 한 정신 기조를 가진 선생은 97년에 (재)한국청소년건전문화육성재단을 설립하고 국악을 전공하는 장학사업과 청소년 문화전수 사업 등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근 10년을 이어온 사업은 국악을 전공하는 200여명의 학생들이 혜택을 받았다. 또한 장학사업 뿐만이 아니다.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서화(書畵)를 무대배경이나 프로그램에도 흔쾌히 내주시기도 하고 장래성 있는 국악인을 초대하여 격려하는 연희도 열어준다. 요즘 선생은 "판소리보다는 경기민요나 서도민요를 즐겨듣고 공부한다고 한다. 한동안 판소리에 빠져 조상현 명창에게 소리도 배웠다는 열암 선생께 앞으로 계획을 질문하자. 여러 국악계 지인들과 약속한 것이 생각난다고 했다. 작지만 죖악·가·무'를 제대로 가르치는 국악대학 설립하겠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국악대학 교육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대학은 큰 가르침의 전당인데 과연 이에 걸맞은 역할을 해왔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열암 선생은 국악을 사랑한다. 그것도 매우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애호가이다. 오전에 서재에 출근하면 바로 국악방송을 틀어놓고 청취한다. 오후 퇴근해야만 이 방송을 끈다. 그 열린 마음과 서예 예술을 통한 사회 환원활동에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열암 송정희 ˚ 캐나다 몬트리올 주립대학 박사과정 수료˚ 모스크바 대학 연수(모스크바)˚ 워싱턴 주립대학 연수(미국)˚ 옥스퍼드 대학 연수(영국)˚ 러시아 우라지보스톡 극동국립기술대학교명예 박사학위 취득˚ 고려대학교 정책, ICP, 언론 대학원 최고위 과정 수료˚ (재) 청소년건전문화육성재단 현 이사장˚ 열암문화재단 설립자˚ 한국전통문예진흥회 현 이사장˚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심사위원)˚ 대한민국 서예대전 특선 연 2회,한국문인화대전 특선 1회˚ 한국작가협회 최우수 작가상수상˚ 서울시 초대작가˚ 동남아 서예협회 심사위원장˚ 대한민국 서화대전 심사위원장˚ 한·중·일 서예가협회 한국대표° 한·일 서예협회 운영위원장° 서울대 강사° 자녀안심하고학교보내기국민재단 자문위원° 한국인권위원회 자문위원° 사랑실은 교통봉사대 특별자문위원° 자유중국 장통충 기념관 초대전° 일본 오사카 민단 초대전° 우라지보스톡 러시아제1회 고려인 문화의 날 행사° 극동 국립기술대학교 부시킨극장 초대전 ▶ 서울시 종루구 신문로 2가 1-131 축구회관 4층 (☎738-7755, FAX:738-6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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