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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우리 아리랑은?기미양 / 아리랑학회 이사 아리랑은 하나의 노래이며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의 노래이다. 아리랑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아리랑은 옛노래이면서 오늘의 노래이고 오늘의 노래이면서 옛노래이다. 아리랑은 신명풀이이면서 한풀이이고 한풀이이면서 신명의 노래이다. 아리랑은 우리의 노래이며 세계의 노래이고 세계의 노래이면서 우리의 노래이다. 아리랑은 이별·애수 정서인 恨의 수렴체(收斂體)로, 모순에 대한 저항의 발현체(發顯體)로, 좌우 상하 극단의 차단체(遮斷體)로, 고난과 역경에 대한 극복의지의 추동체(推動體)로 기능한 노래이다. 아리랑은 신명풀이를 동력으로 하는 노래문화의 정수이다.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아리랑 등재는 2011년 중국의 아리랑 자국 비물질문화유산 지정에 대한 반감에서 촉발되었다. 그 반감은 아리랑이 한반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역사성과 전국 자발적 전승단체의 현재적 향유와 전승 노력이 무시당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의제기였다. 그리고 이 등재는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아리랑’ 지정으로 이어졌다. 결국 인류문화유산과 국가무형문화재라는 두 가지 아리랑의 위상 확정에는 전국의 자발적 전승단체들의 노력이 전제되었다는 것이 된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심사에서 두 가지 가치가 제시되었다. 하나는 ‘아리랑은 부르는 공동체의 결속을 지속시켜주는데 기여하는 노래’라는 사실, 둘은 ‘아리랑은 한국인의 창조성을 입증시켜 주는 노래’라는 사실이다. 전자는 공동채의 내적 구조가 향유와 전승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하고, 후자는 전승이 답습만이 아닌 의미있는 창조적 계승의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문화재청 누리집 ‘아리랑’ 항목에 대한 해설의 주요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아리랑은 19세기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노래로서, 다양한 곡으로 변화하며 오늘날까지도 활발하게전승되고 있다.” ②"국가무형문화재 아리랑은 향토민요 또는 통속민요로 불리는 모든 아리랑계통 악곡을 지칭한다.” ③"아리랑 또는 그와 유사한 발음의 어휘가 들어 있는 후렴을 규칙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띄엄띄엄 부르는 한 무리의 노래이다.” ④"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여음(餘音)과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으로 발전해 온 두 줄의 가사로 구성되어 있다. ⑤"선율과 가창 방식에서 우리 민족의 보편적 음악성을 바탕으로 지역별 고유한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⑥"무형문화재로서의 역사성, 예술성, 학술성 등의 가치가 탁월하다.” ⑦"세대를 거쳐 재창조 되고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는 아리랑의 모습”을 주목한다. 이 번에는 2000년대 아리랑의 현재적 위상을 정리한 것이다. 관주도 사업이 중심이다. ① 2001년 유네스코, 제31차 총회 제1회 <ARIRANG PRIZE>를 제정, 시행 ② 2002년 북한, <대집단체조 및 예술공연아리랑>(아리랑축전) 개최, 남한, 월드컵 개최 거리 ‘아리랑응원’ ③ 2005년 문화재청, 정책자료집 접수 및 ‘아리랑 종합 전승실태 조사’ 실시 ④ 2006년 문화관광부, ‘100대 민족문화상징’에 아리랑 선정 ⑤ 2006년 강원도/아리랑연합회 공동 <DMZ아리랑훼스티벌> 개최 ⑥ 2008년 <뉴욕 필하모니오케스트라> 평화 주제 평양 아리랑 공연 ⑦ 2009년 문화관광부, ‘아리랑 세계화’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 개최 ⑧ 2012년 중국 국무원, ‘조선족 아리랑’ 자국 비물질유산 지정 ⑨ 2012년 12월 유네스코, 아리랑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⑩ 2012년 문화재청, <아리랑 종합발전 방안> 계획 수립 ⑪ 2014년 북한, 유네스코 아리랑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⑫ 2015년 문화재청, 아리랑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129호’지정 ⑬ 2016년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 ⑭ 2017~2019년 서울아리랑훼스티벌과 ‘경복궁아리랑鼓’ 개최 20여년 동안 전개된 아리랑 상황이다. 이 기록들은 2000년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이다. 그것은 국가기관의 주최 또는 주관으로 제도권에서 행해진 것이란 점이고, 거기에다 세계성을 띤 상황들이란 점이다. 곧 아리랑의 현재적 위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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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42<BR>아리랑의 어원기미양 / 아리랑학회 이사 2012년 유네스코 아리랑 인류무형문화유산 신청서에 제시한 아리랑의 종류는 ‘50여 종’이다. 이 숫자는 김연갑이 1986년 발행한 ‘민족의 노래 아리랑’에서 제시한 이후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어느 기록에서도 50여 종의 구체적인 곡명을 제시한 바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숫자가 갖는 진의는 누구도 정확히 제시할 수 없음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셀 수 없다(uncountable)’또는 ‘셀 필요가 없다’(Can not cell)는 말이 된다. 시간이 감에 따라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특이성에서 종류도 셀 수 없이 많고 기원설(起源說)이나 어원설(語源說)도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런 배경에는 아리랑만의 독특한 성격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문화재청 아리랑 해설 게시문에 따르면 "후렴에서 ‘아리랑’이나 ‘아리’ 또는 ‘아라리’를 고정적으로 사용하는 노래”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형식의 노래는 전통민요뿐만 아니라 통속민요, 더 나아가 대중가요와 가곡은 물론, 해외 교민들이 작창(作唱)하여 부르거나 외국인들이 창작한 외국어 버전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장르의 아리랑 후렴에는 아리랑, 아리, 아라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밀양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의 후렴에서 그 전형(典型)이 확인된다. 아리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 응- 응-아라리가 났네(진도아리랑 노래비)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밀양아리랑 노래비) 이런 실상에서 ‘아리랑’은 후렴에서 ‘아리’와 ‘아라리’와 함께 나타난다. 이런 사실에서 역사나 어원에 접근할 때는 이들과의 관계를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관계는 어감이 비슷한 것에서 뉘앙스 정도만 다른 것일까? 아니면 속뜻이 같은 것일까? 전자라면 ‘아리랑’만이 대상이나 후자라면 각각의 의미와 변이 관계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아리랑에 대한 학술적 접근이 시작된 것이 1930년대, 연구 성과가 있게 되는 시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데, ‘아-리-랑’ 3음절의 음가(音價)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성과에 머물렀다. 국문학계 양주동이 그랬고, 역사학계 이병도가 그랬고, 민속학계 서정범과 임동권 역시 기존 연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지만, 오늘의 3음보 2행의 후렴 형성은 17세기 들어 이양법(移讓法)의 일반화로 논농사 작업환경의 형성에 따라 선후창(先後唱)의 필요성에서 조흥소(助興素) 강화로 ‘ㅇ’음이 첨가된 결과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리랑’이 고유한 술어나 곡명이 아니라 ‘아리’의 2음절에서 안정적인 3음절 ‘아라리’로의 변이, 다시 조흥 음소 ‘ㅇ’의 첨가로 형성된 것이란 말이다. 이의 증거 사료는 1912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전국 대상 민속조사보고서에서 확인이 된다. 한일합병 후 민정 파악을 위해 실시한 ‘통속적 독물 급 리언 리요 조사에 관한 건’(通俗的 讀物 及 俚諺 俚謠 調査 關件)의 아리랑 관련 자료를 정리하면, 이는 경복궁 중수 공사(1865~1872) 시기 유행한 노래 아리랑을 부역(賦役)꾼으로 참가한 이들이 고향에 돌아와 확산시킨 현상이다. 이 자료에 조사된 아리랑 후렴에는 다음과 같이 20여 종이 도출된다. ①아리랑歌 ②阿朗歌 ③아리랑打令 ④酒色界의 雜歌 ⑤어르렁타령 ⑥아르렁打令 ⑦어르렁타령 ⑧啞而聾打詠 ⑨아리랑타령 ⑩啞聾歌 ⑪阿朗歌 ⑫아르랑타령 ⑬아르릉타령 ⑭啞利聾打令 ⑮아리랑타령 ⑯어르렁打令 ⑰愁心歌 ⑱아르렁타령 ⑲아르랑打令 ⑳아르랑歌 이상과 같이 표기(表記) 상의 곡명은 총 18가지이다. 정리하면 곡명과 후렴에서 오늘의 음가 ‘아리랑’을 쓴 경우는 네 가지(① ③ ⑨ ⑮)다. 이는 비로소 이 시기부터 ‘아리랑’이 중심 술어로 합의를 얻어가고 있는 단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자를 혼용한 것이 13가지, 곡명에 ‘가’(歌)를 쓴 것이 7가지이다. 이는 조사 당시 실제 제보자의 응답이 아니라 이를 기록한 문식 있는 조사자들의 개입 결과일 수가 있다. (실제 기록상의 조사자는 당시 전국 지역 교원들이었다.) 곧 수집과 보고 단계에서 조사자의 수정·가필(加筆)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아리랑의 곡명이 당시 지역마다 다르게 불렸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아리(르)’+’렁’/‘롱’/‘랑)’ 등의 단일화 단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오늘의 음가 ‘아리랑’은 1910년부터 SP 음반으로 발매되어 대중적으로 보급된 1920년대 초에 정착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어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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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은이성지 아리랑노래비를 찾아서(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은 아리랑학회가 주최한 경기지역 '아리랑고개'를 찾아가는 '아리랑답사'를 위해 길을 떠났다. 월간 잡지 ’길벗‘에 실린 ’천주교와 아리랑(기찬숙의 아리랑칼럼)‘을 읽고 나서, 필자에게 용인시 남곡리 아리랑고개에 대한 답사 안내 및 강연요청을 하고 회원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회장은 지난 주 가평아리랑답사에서 의병사에서 마지막 격전지 보납산(법업산)을 찾았다. 보납산은 남으로부터 쫓겨온 의병들이 이승에서 넘었던 마지막 고개, 아리랑고개인 것이다. 이번 주는 용인 지역 아리랑고개를 넘어갔다.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는 ‘은이(隱里) 성지’가 있다. 천주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목한 본당이며 순교 후 유체의 이장 경로이기도 하다. ‘은이’라는 지명은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 숨어 살던 신자들의 교우촌이었다. 은지성지 성지순례길은 총 15. 4km, 5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인데, 여기에는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믿음, 소망, 사랑을 뜻하는 ‘삼덕(三德)의 길’이라는 세개의 고갯길이 있다. 세 개의 덕(德)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하나는 신덕(信德)고개인 ‘별미 고개’, 둘은 망덕(望德)고개인 ‘해실이 고개’, 셋은 애덕(愛德)고개인 ‘거문정 고개’길을 말한다. 오늘에도 인적이 드믄 산길이 포함되어 있는데, ‘120 나무계단 길’과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 때 호랑이도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는 ‘기적의 길’도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신덕고개 ‘별미고개’에는 뜻밖에도 ‘아리랑’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천주교 초기에 아리랑이 신앙공동체에서도 불렸음을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 결속과 포교를 위해 민중의 노래에 신앙심을 얹어 불렀다고 본다. 이 비에 새겨진 가사가 당시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만한 유래를 담보했기에 비로 새겨졌다고 보게 된다. 아리랑노래비의 가사는 김진용 작사의 전체 8절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리랑 주님을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후렴구) 천진암 강악회 진리탐구/반만년 어둠속에 동이 트네 청천 하늘에 잔별도많고/천주교 이백년 박해도 많다 심한박해 모진고충 이겨내고/참된신앙 물려주신 순교자여 금자로 발길재는 천사를 보라/격려하며 순교의길 가신님이여 희광이칼 여덟번째 목숨바치고/천당영복 면류관을 쓰신님이여 순교유해 쌓고쌓여 주춧돌되고/순교선혈 흘러흘러 밑거름됐네 한알의 밀알이 이백년썩어/오백만의 열매가 주님찬미해 제1절에서는 상하 계층 없이 사방팔방의 모두가 알고 있는 아리랑의 대표사설을 통해 곡조를 제시했다. 2절은 광주 퇴촌의 천진암(天眞菴)에서의 강학회(1771년 자산 정약전 3형제와 만천 이승훈 등의 천주교리 연구모임) 사실을 말하여 천주교 역사를 제시했다. 3절은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네 차례의 박해를 통해 천주교의 수난사를 나타냈고, 4, 5절은 성스런 순교사를, 6~8절은 신앙 승리의 역사를 찬양했다. 이 가사 천체를 보면 3절과 8절에 ‘이백년’이 있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으로 작사하여 노래비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고, 천주교 신약성서 자체 번역본을 발행하였으니, 이 아리랑 작사도 그만큼 의미를 두어 비로 세운 것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굳은 신념이 뜨겁게 전해온다. 이회장과 회원들은 아리랑학회가 운영하는 아리랑학교에서 배포한 아리랑 가사를 사전에 받고 가창 연습을 해왔다. 1시간을 걸어서 가쁜 호흡으로 아리랑고개에 오르자. 경건하고 신성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르는 땀을 식혀주었다. 우선 목숨을 걸고 이 고개를 넘어갔던 순교자와 신도들을 위해서 술 한잔씩 부어서 올리고. 일동 묵념을 하였다. 전국에 곳곳에 있는 아리랑고개의 역사성과 은이성지 아리랑고개의 유래에 대한 짦은 해설이 끝나자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아리랑노래비에 새겨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하자 3절에서부터 모두 눈물이 쏟아져서 눈물의 아리랑 공간이 되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자들이 받았던 억압과 고난이 뜨겁게 전해진다. 이회장은 "코로나로 인해 5월 서울과 제주 지역 아리랑 행사가 취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참에 경기 서울지역 아리랑고개와 아리랑역사 유적지를 답사하고자 한다. 실제적 아리랑고개 '문경새재'에 이어서.......찾아와보니, 아리랑은 '고개의 노래'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무대에서 이러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해지도록 노력하겠다. 특히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은 역사의 노래이다. 부르는 이도 왜 아리랑을 불렀는지는 알고 불러야 한다라는 취지로 아리랑학회 아리랑고개답사에 동참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회장은 다음주 안성아리랑보존회가 주관하는 안성의 아리랑고개를 찾아가는 답사에도 함께 할 계획이다. 전국의 아리랑고개의 유래를 살피면 천주교와 관련된 곳은 아직까지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 역사와 아리랑은 어떻게 만났을까? 현재 밝혀진 아리랑 자료로는 1823년(道光 3년) 청석거사(靑石居士) 필사본 ‘佛說明堂아리랑’이란 기록물에서 1839년 천주교 기해박해 전후에 불렸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문헌자료는 민간신앙에서 수용한 일종의 무경(巫經)으로 "제석천황 관제멸 대범천황 오액명/아라리 사라리 아리사리 아리랑” 같은 사설에서 알 수 있듯이 수명과 복록을 기원하며 아리랑 후렴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아리랑의 보편성을 이용하여 무경의 보급을 용이하게 할 방편으로 수용한 것이다. 천주교 교인들도 우리의 전통 시가인 가사체(歌辭體)를 수용하여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교리를 전파했듯이, 민요 아리랑의 형식도 수용했을 것은 분명하다. 천주교인들이 불교 사찰인 천진암을 거점으로 한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통문화를 수용하여 교리전파에 활용하는 것은 포교의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초기 교회사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천주교 초기 인물 이승훈이 아리랑을 수용한 사실에서, 이는 초기 천주교 신앙공동체에서도 아리랑이 포교를 위해 향유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200년 기념으로 새로운 아리랑이 창작되어 비로 세워지게 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정조년간에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은 단순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점차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학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드디어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歸依)해 가게 하였다. 이 때 민중의 노래 아리랑도 향유되었다. 어떤 공동체에게도 아리랑은 결속력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획득하게 하는 노래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나 만날 수밖에 없는 노래인 것이다.(www.arirangs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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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br>‘2005’의 아리랑<2><br> 6종의 서울경기아리랑2005년의 문화재청 ‘지역별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서’는 제도권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아리랑을 조사한 최초의 보고서다. 6개 권역의 아리랑은 국가적 전승 지원 대상이 된 것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서울경기 지역 아리랑 전승실태 기초조사’이다. 조사자는 김연갑(사단법인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이다. 이 조사는 서울경기 권역에 6가지 아리랑으로 규정을 하였다. 이는 당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들의 이수 대상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에 오늘의 시점으로는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다. 6개 아리랑은 본조아리랑/강원도아리랑/긴아리랑/한오백년/정선아리랑/구아리랑이다. 이 6종 아리랑의 음악적 특징은 경토리가 우세하고 메나리토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6종의 규정에 대한 이견은 첫 째는 ‘강원도아리랑’을 이 권역의 것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다. 다음은 ‘한오백년’의 문제이다. 전자는 소위 ‘잦은아라리’의 통속화 한 것을 전승지역의 아리랑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써, 오늘의 시각으로는 제외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토속 잦은아라리는 강원도 춘천과 강릉이 주전승지역이지만, 이것의 통속화 한 강원도아리랑은 이들 지역에서 전승되지도 않고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현실적 전승활동은 서울경기 지역 민요 전승주체들에 의해서 계승 되고 있다. 결국 문제는 토속 아라리와 이의 통속 아리랑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 보고서의 입장은 전승지역을 중심으로 삼은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후자 한오백년은 1940년대 초 음반화 되어 서울경기 지역 소리꾼들에게 널리 불리는 것으로, 곡조는 토속민요 긴아리랑과 같지만, 곡명에 ‘아리랑’이 없고 또한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이는 아리랑 범주의 특별한 인식으로 서양음악의 보편 시각에서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와 2014년 국가무형문화재 159호 등재를 계기로 곡명과 후렴의 존재 여부로 삼는 관점에 의해서다. 하여튼 이 6종을 범주화 한 것은 근본적으로는 현재적 전승지역과 전승주체를 중심으로 계승이 되는 실상에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계보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조사 대상자는 ‘12잡가’와 경기민요 전승계보, 즉 조기준 박춘경 장계춘 주몽신이란 구한말 명창들의 계보에서 형성된 제 1세대 보유자 안비취 이은주 묵계월의 계보를 중심으로 삼았다. 당시 보유자 이춘희 계보(이춘희 김혜란 이호연), 이은주 계보(김장순), 묵계월 계보(김영임)에서 총 6인을 대상으로 공통된 6개 곡명의 아리랑 현장 녹취와 전수 과정(음반 취입과 교재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이춘희 계보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당시 생존한 1세대 보유자 이은주 선생과 묵계월 선생은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활동이 적어지게 되면서 그 제자 1인을 대상으로 계보가 이어졌다. 이 때 조사된 악보는 서울경기 아리랑의 표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 부분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주목하였다. 첫 째, 전문 소리꾼들에 의해 형성되고 전수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이 결과로 서울 경기지역 향토성보다는 보편적인 세련미를 특장으로 하여 창민요라는 고정적 기능을 중심임을 밝혔다. 둘 째, 1926년 나운규 감독 영화 '아리랑' 주제가에서 출현한 ‘본조아리랑’은 모든 아리랑의 대표로 인식되어 있고, 이미 세계성을 띄고 있어 전승주체를 제한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제시하였다. 셋 째, 소위 ‘김옥심제정선아리랑’ 또는 ‘서울제정선아리랑’은 1940년대 말, 이창배와 김옥심이 작창한 것으로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일종의 창작아리랑이다. 이에 본조아리랑과 함께 성격상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조사 보고서는 최초의 실태 조사 결과라는 점과 제도권의 관심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활용성과 함께 아리랑 역사에서 주목을 해야 한다. 또한 이 보고서를 통해 서울경기 아리랑으로 6종을 규정한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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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70주년, 아리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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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rang Column] 70-year history of Arirang's JulyMeeyang Ki/Arirang Society Research Director 70 years ago, the Korean War broke out. In the memory of those 3 year’s rancor is closely interwined with achievements. Not long ago, during the ceremony on the Memorial Day the rancor was being remembered. "Oh, how can we forget this day? The day that enemies intruded our Motherland. Let's stop the enemy with our bare fists and with our blood. Stamp your feet, hit the ground on this day of righteous rage." That is lightly defined. "With a strong anti-communist spirit, let's also live a good life earned with hard work. All those are various means of expressing democracy and popular sovereignity." But there are numbers to be remembered forever. 621,479 casualties, including 137,899 South Korean soldiers, 450,7422 wounded, and 32,838 missing and imprisoned. 151,129 people were killed, including 37,902 UN troops and 103,460 people were injured. The Communist Army's North Korean troops’ damage ranged from 500,000 to 520,000, missing and imprisoned from 98,000 to 120,000, Chinese Communist Army’s damage was 148,600, 798,400 wounded, missing and captive 25,600. In total, 1,778,600 people fell victims of the War, 127,600 went missing and captured. In addition, 1 million civilian South Koreans, 1.5 million North Koreans died, there were 300,000 war widows, 100,000 war orphans, 3.2 million refugees, and 10 million separated families. 10% of the total population of North and South Korea was killed. With all these numbers, Korean War is unforgettable. The aim of that war was to make the whole Korean peninsula communist. Planned by Kim Il Sung, approved by Stalin and implemented by Mao Zedong. The North Korean Communist Army's illegal invasion during the Korean War lasted for three years, causing massive economic and material damage along with millions of victims. The Korean War, which caused enormous human damage, was not only an inhumane war that destroyed the human life on large scale, but also an anti-ethnic tragedy that threatened the survival of the Korean people and destroyed the normal course of life. Thus, any endeavors of justification of the was based on the etiology or nature of the Korean War are unacceptable. This is the conclusion obtained after studying and researching for 70 years. However, there were already confirmed sentiments when personality theories were altered in the name of majority theory. Let’s look at the "Arirang History" written in the memory of that July. "Arirang July” was the time of a ceasefire talks from 1951 to 1953. The ceasefire negotiations began on July 10, 1951. An agreement on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and the demilitarized zone was reached, giving hope for an earlier truce. However, the talks were rescheduled and resumed due to differences in arguments and interests. The armistice negotiations lasted for two years as the United Nations’ position on the principle of repatriation by the free will of prisoners of war and the communist's position on forced repatriation were in conflict. And so, Arirang got involved. Due to the termination of the ceasefire, both sides occupied favorable positions on highlands and mobilized all kinds of weapons and strategies. Among those, the propaganda and phycological warfare were at the forefront. In the middle of the night, the sound of Arirang fired as an acoustic bomb. "-The sound of the adversary broadcasting of Arirang at Highland 854 of Jungbu Electric Wire - On the Middle Eastern Front overlooking Mt. Geumgang, the sound broadcasted by our troop information and education officer crossed the hills under the bright moonlight of the mid-autumn harvest moon and crossed the valley going straight into enemy’s territory. The realism of the sentimental "Arirang Taeryeong”, broadcasted as a first sound bomb, stirred the soul, breaking the silence of the front line. We are crying over people/ We are crying over the people of war Arirang Arirang Arariyo/ Passing the Arirang path crying The broadcasting of the Arirang encouraged defection from the enemy’s side. On average, Arirang was bringing back more than a dozen soldiers a day. In response, North Korea fired an acoustic grenade toward the south as well. It was a batte of Arirangs. This time it was ‘Paljisan Arirang’. "When you look at Namchosun, it hurts your heart. The people of North Korea are happy. The flag of the Republic of Baekdusan is waving / There are guerrilla camps Halla Mountain in Jeju Island. Look at me lady, look at me precisely/ Love me like a blooming flower in winter Ari-arirang seuri-seuri-rang Arari is here / Passing the Arirang path” It was the "Arirang bomb" during the war, Arirang's burst in anticipation of upcoming truce. It is a history written by Arirang and Arirang spirit of resistance. The two sides were enemies, but this battle of songs only became possible, because it was the same nation. Even though they were enemies, that example showed that they were all "Arirang People". Finally, on July 27, 1953, U.N. Commander Lieutenant general Mark W. Clark,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Peng Dehuai and Chosun People’s Supreme Commander Kim Il-sung signed the Armistice Agreement. The signing of the ‘Agreement on the Military Armistice of Korea’ stopped the gunshots and gunfire. At the same time, it declared that a full and complete end-of-war agreement would be signed by the two Koreas. It was an Arirang performance marking a ceasefire. It was an international meeting, but there was no applause or handshake. There was not a single smile. However, the moment the UN forces went to the east gate and the North and Chinese troops to the west gate, they all played Arirang. What does it mean that both sides played Arirang at the same time? Although it was an unfinished ceasefire talk, the main subject was "Arirang People”, and the aim was to let the world know about this subject. The history of the Korean War 70 years ago and the two-year truce talk between July 10, 1951 and July 27, 1953 is written by Arirang. And the future, that will be based on that history, should be written in a spirit of coexistence and mutual prosperity of "Arirang People”. So I repeat the words, "Write history with Arirang, and write the future of Arirang with that history." English translation by Dinara Shosaidova [아리랑칼럼} 70주년, 7월의 아리랑 역사 기미양/아리랑학회 연구이사 70년 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3년의 기억에는 원한과 성취가 얽혀 있다. 얼마전 현충일 기념식은 원한을 기억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怨讐)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그리고 또 가볍게도 정의했다. "그것은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우리도 잘살아 보자는 근면함으로, 국민주권과 민주주의 정신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라고~. 그러나 영원히 기억해야 할 숫자가 있다. 국군 전사 137,899명, 부상 450,7422명, 실종 및 포로 32,838명 등 621,479명의 피해. 참전 UN군 전사 37,902명, 부상 103,460 명 등 151,129명의 피해. 공산군측 북한군 전사 50만~52만, 실종 및 포로 9만8천여 명~12만여 명, 중공군 전사 148,600명, 부상 798,400명, 실종 및 포로 25,600명, 실종 및 포로 127,600명 등 1,778,600명이 피해. 더해서 민간인 남한 주민 100만 명, 북한 주민 150만 명 사망, 30만 명 전쟁미망인, 10만 명 전쟁고아, 320만 명 피난민이 발생,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초래되었다. 민간인 남북한 전체인구의 10%가 피해를 당했다. 이런 기록적 숫자로 하여 6·25는 살아 숨쉰다. 이 전쟁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하였다. 김일성이 계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한 것을 모택동이 지원했다. 북한 공산군의 불법적 남침으로 발발하여 3년 동안 지속된 6·25전쟁은 피아에게 수백만 명의 인적피해와 함께 엄청난 경제적·물적 피해를 입혔다. 엄청난 인적 피해를 야기한 6·25전쟁은 인간의 원초적인 삶을 대량으로 파괴한 비인간적인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삶의 공동체를 파괴한 반민족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곧 6·25전쟁에 대한 평가를 원인론이나 성격론에 기초하여 정당화하려는 그 어떠한 주장도 설득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70년간 살피고 연구되어 얻어진 결론이다. 그러나 많은 원인론이나 성격론이 다수설과 정론이란 이름으로 번복과 수정이 되풀이될 때 이미 확정된 정서가 있었다. 바로 7월의 기억으로 쓰여진 ‘아리랑 역사’이다. ‘아리랑의 7월’은 1951년에서 1953년 까지 휴전회담의 시간이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조기 정전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회담은 양측의 주장과 이해가 달라 중단과 재개를 되풀이 했다. 전쟁포로의 송환문제와 관련하여 포로의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을 주장하는 유엔군측 입장과 전원 강제송환을 주장하는 공산군측의 입장이 대립하는 바람에 휴전협상은 2년을 끌게 되었다. 그래서 아리랑도 참전하게 되었다. 휴전이나 종전이 되었을 경우 서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해야 하기 때문에 온갖 무기와 전략이 동원되었다. 그 중에 심리전으로 맞선 선전선동 전략도 선봉에 섰다. 심야의 정적 속에 아리랑이 ‘음탄(音彈)으로 발사되었다.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은 아리랑- 금강산이 내려다 보이는 중동부전선 八五四 고지에서 우리 정훈장교가 방송하는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은 중추명월(仲秋明月) 교교한 달빛 아래 언덕을 넘고 골짜기를 넘어 적진으로 뛰어 간다. 전선의 적막을 깨트리고 먼저 발사되는 음탄은 센치멘탈한 <아리랑타령>의 리얼리즘이 가슴을 저며든다. 우리나 님은요 날그려 울고/전쟁판 요내들 임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울며넘네 노래가 흐르다가는 간곡히 귀순을 권하는 방송이 계속되는데 이러한 아리랑타령과 권고에 끌려서 귀순하여 온 적병은 七一六九 부대에 매일 평균 십여 명이 넘는다고 하며 한때는 四십명이 한 번에 건너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북도 남을 향해 음탄을 발사했다. 아리랑의 공방이다. ‘빨지산아리랑’이다. "남조선 바라보니 가슴아프나/북조선 백성은 행복하다네 백두산 공화국 깃발날리고/제주도 한라산 유격대가 섰네 아가씨 날좀보소 자세히 보소/겨울에 핀꽃같이 사랑해주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 고개로 넘어간다" 전쟁 속의 ‘음탄 아리랑’, 7월의 휴전 공방 속에 오고 간 것, 아리랑의 파열(破裂), 아리랑이 쓴 역사이다. 아리랑의 저항(抵抗)정신이다. 이는 적과 적간의 공방이었으나 같은 민족이었으니 가능했던 것이다. 적과 적이었지만 하나의 ‘아리랑민족’임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총사령관 마크 W. 클라크 미 육군대장, 중화인민지원군 사령원 팽덕회,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이 서명했다.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체결로 총성과 포성을 멈추게 했다. 동시에 완전하고 온전한 종전 협정은 남북만의 의사로 체결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아리랑 연주로 정전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국제적 회담이지만 박수도, 악수도 없었다. 더욱이 웃음도 없었다. 그러나 유엔군측이 동쪽문으로, 북과 중국군이 서쪽문으로 나가는 순간 모두 아리랑을 연주했다. 양측의 의전팀이 동시에 아리랑을 연주한 것은 어떤 의미인가? 비록 미완의 휴전회담이지만 완전한 종전체결의 주체는 ‘아리랑민족’이고, 결과는 그 주체의 것임을 전세계에 알린 것이다. 70년전의 한국전쟁,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 2년 간의 휴전회담 역사는 아리랑으로 쓴 역사이다. 그리고 그 역사로 쓰여질 미래는 바로 ‘아리랑민족’의 대동정신과 상생정신의 발현에 의해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리랑으로 역사를 쓰고, 그 역사로 아리랑의 미래를 쓴다”는 말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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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그래서, 문경새재아리랑은!그래서, 문경새재아리랑은! 기찬숙 아리랑학회 이사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또한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오늘의 것이면서 옛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리랑은 전형적인 메타문화 (Meta Culture)이다. 아리랑은 중층적 유기체이다. 이미 있었던 것이 새로운 것을 있게 하고, 새로운 것이 이미 있었던 것을 다시 새롭게 한다. 그래서 동시적이고 역동적인 선후 관계의 양상을 띄며 변화와 지속이 이루어지며 계속 재생산 된다. 그래서 아리랑은 ‘자기복제에 의한 증식’ 프렉탈 이론의 실체이다. 아리랑은 모순적 복합성, 표면과 이면의 주제가 다른 양가성을 갖는다. 또한 보편성과 특수성과 통시성까지 내재하고 있다. 나아가 ‘부분의 합은 전체와 동일하다’에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앤섬(andsum)적 사고가 아니라, 트랜섬(transum)적 사고의 대상이다. 아리랑은 순전한 우리의 인문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노래이다. 뚜렷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4계의 풍토적 조건과 산·강·들·바다가 공존하는 지리적 조건이 문화를 받아 들이고, 가두고, 변화시킨다. 이러한 지속과 변용을 통해 아리랑은 구심력과 원심력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아리랑은 지역의 사투리가 투영되고, 노래의 시김새가 흐르는 대로 곳곳에서 형성된 노래이다. 아리랑은 민중적 비애와 한(恨)의 정조(情調)를 수렴하고, 권력에 대한 저항적 민중의지를 발현하고,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는 미래 의식의 추동체이다. 그래서 아리랑은 민요, 노래, 그 이상의 노래이다. 모든 아리랑의 후렴에는 ‘아리랑고개’가 위치한다. ‘고개’는 역사적 수난과 고난을 상징하며 극복의 대상으로서 상정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아리랑에서 반드시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라고 노래한다. ‘아리랑고개’는 아리랑과 고개의 합성어이다. 아리랑의 역사에 등장하는 고개는 ‘문경새재’이다. 새재의 박달나무가 공출되었고 삼남의 부역인들이 새재를 넘나들었다. 그래서 ‘아리랑고개’는 분명 문경새재에서 연유한 시어(詩語)이다. 문경새재는 경북 문경시 소재(所在). 백두대간 소백산맥 주흘산(主屹山)을 넘나든 이들의 고개다. 이들과 함께 고개를 넘나든 노래가 있으니 새재아리랑이다. 그래서 문경의 새재아리랑은 고개를 넘어 기쁜 소식을 듣는 이들의 동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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