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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문화대학교-코스맥스(주) 발전기금 기탁식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대학교는 코스맥스와 함께 2월 21일 오후 3시 30분 본교 유현당(충청남도 부여군)에서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새롭게 발전시켜갈 인재 양성을 지원하기 위한 발전기금 기탁식을 개최한다.이번 행사는 코스맥스가 한국전통문화대학교발전기금에 3,000만 원의 발전기금을 기탁하는 것으로, 양측이 지난 2020년 9월 ‘전통화장품과 화장문화 콘텐츠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이후, 다양한 전통화장품을 같이 연구하고 개발해오며 맺은 인연을 바탕으로 성사되었다.특히,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산학협력단과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LAB 및 디자인연구소의 연구진들은 기밀하게 협력하여 ▲ 화협옹주 고운 손크림과 입술연지(‘21.2월), ▲ 연고 형태의 얼굴 보습제인 미안고와 얼굴 마사지 도구(괄사)인 미안자기(‘22.12월) 등 ‘화협옹주묘’에서 출토된 화장품과 화장품 용기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전통화장품과 관련 제품을 개발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외에도 청화백자 화장품 용기에 대한 2건의 디자인 특허를 공동출원하는 등 공고한 협력관계를 구축한 바 있다. 화협옹주(1733∼1752)는 조선시대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 친누이로, 11세인 1743년 훗날 영의정을 지낸 신만의 아들 신광후와 혼인했고, 20세에 홍역으로 사망. 화협옹주묘에서는 생전에 사용한 화장품 용기(9건-갈색고체 5건, 액체류 2건, 백분 1건, 적분 1건)를 포함한 총 47건 93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연구 성과는 2019년 국제학술대회와 특별전시를 통해 공개되었다.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대학교는 이번 발전기금 기탁을 계기로 전통문화 계승·발전의 첨단주자로서 전통화장품과 관련한 더욱 새롭고 참신한 생각을 발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이를 신성장의 동력으로 삼아 전통문화 기반의 ‘K-뷰티’ 문화를 선도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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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국악대경연 대상 이성현씨, 모교 중앙대에 상금 1천만 원 전액 전달본보 10월 23일자에 보도된 제32회 KBS국악대경연 대상 수상자인 이성현씨가 모교인 중앙대학교(총장 박상규)에 상금 1천만 원 전액을 전달했다. 학교 측에 따르면, 지난 12월 5일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동문 이성현씨는 ‘동문 발전기금’ 1천만 원을 전달했으며, 학교 측은 이씨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기금은 이후, 학부의 발전기금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발전기금 전달식에는 중앙대학교 박상규 총장, 백준기 교학부총장, 주재범 연구부총장, 이산호 행정부총장, 이형환 안성부총장, 김승일 예술대학 학장, 이무열 대외협력처장 등이 참석하여 이씨에게 격려와 감사를 전했다. 학교 측은 이씨에게 감사를 전하며, "이성현 동문은 자신의 분야에서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것으로 학교에서도 기대가 큽니다. 이후에도 재능을 더욱 발휘하여 대한민국 전통문화 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대외협력팀 권영욱 차장은 "이성현 동문이 과거부터 학교 밖에서도 재능기부 등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기부와 선행이 모교에까지 이어지게 되어 학교 측에서도 매우 뜻 깊게 생각하고 있고, 재학생들에게도 큰 힘과 귀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씨는 8세(2003년) 때, 친척 병문안 차, 병원 방문을 계기로 판소리 재능기부를 시작했으며, 이후 고등학생 때까지 병원·복지관 등에서 20여 차례 재능기부를 이어왔다고 했다. 국악고등학교 재학 3학년(2013년) 때에는, 동아국악콩쿠르 학생부 금상 수상 상금 전액을 이른둥이(미숙아)를 위한 치료비로 기부하기도 했다. 이씨는 이번 발전기금 전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저도 국악 배우는 동안, 어릴 때부터 경제적으로 녹록지 않은 과정을 겪었고, 같은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 역시 비슷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부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또 저도 학교 다닐 때, 장학금도 받고, 선배님들로부터 여러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어서 그것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합니다. 내리사랑 같은 것이죠. 이렇게 뜻 깊은 기부라는 좋은 일을 하게 돼서 보람 있고요, 후배들이 국악 공부에 매진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하고 활동 많이 해서, 좋은 영향력 미치는 소리꾼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씨는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연희예술전공 학사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남원시립국악단 창악부 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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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부다가야에 첫 한국 전통사찰, 분황사 준공부처님 깨달음 성지 인도 '부다가야'에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분황사가 문을 열었다. 조계종이 종단 차원에서 인도 부다가야에 건립한 첫 사찰이자 2019년 4월 36대 총무원 집행부가 백만원력결집 불사를 발원한 이후 3년 만의 결실이다. 조계종은 5월 21일 오전 인도 부다가야 분황사 창건 및 대웅보전 준공법회를 봉행했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이날 분황사 대웅보전 앞마당에서 낙성식을 열고 첫 한국 전통사찰의 공식 개소를 축하했다. 이 자리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을 비롯한 종단 스님들과 불자 등 150명, 장재복 주인도 한국대사, 인도 연방 및 비하르주(州) 정부 관계자, 현지 수행 승려 부다가야 지역 사찰 스님, 장재복 주인도 한국대사, 공사관계자 등 500여명이대거 참석해 낙성의 기쁨을 나눴다. 분황사 건립은 2019년 4월 부처님 깨달음 성지인 인도 부다가야에 한국사찰을 건립하겠다는 원력에서 비롯됐다. ‘한국불교의 위상을 새롭게 세우는 데 보탬이 되겠다’고 발원한 설매·연취 보살이 50억원을 희사하고, 통도사와 청하문도회가 인도 부다가야 토지 6600㎡(2000여평)을 기증한 데 이어 백천문화재단을 비롯해 스님과 불자들의 십시일반 보시금이 답지하면서 본격 추진됐다. 원행 스님은 치사를 통해 "분황은 푼다리카, 최고의 연꽃인 백련을 의미하는 것으로 처염상정의 표상인 하얀 연꽃이 이곳 부다가야에 만개했다”며 "분황사는 순례자를 위한 안식처이자 참배와 신행의 공간, 지역민들과 소통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도량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준공한 분황사 대웅보전은 433.84㎡(131평)의 대지에 262.26㎡(80평) 규모로 건축됐다. 부지 위에 한국 전통 양식으로 지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전 세계 수행·순례자를 위한 수행관, 도서관과 식당이 있는 다목적 건물, 지역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보건소를 갖추고 있다. 지붕의 복사열을 줄이기 위해 이중지붕 구조로 설계됐으며 내부공간이 햇볕에 장기간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법당 처마를 길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부처님은 병자를 돌보는 것 자체가 마치 부처님을 간병하는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하셨다”며 "전국비구니회는 비구니스님들을 대상으로 생애 한번은 이곳 분황사에서 안거하면서 보건소에서 봉사하고 후원하자는 운동을 펼칠 계획”이라며 "이 분황사 보건소가 병든이의 안식처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분황사 준공법회에서 구룡사 회주 정우 스님과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이 분황사 발전기금으로 각각 10만 달러, 조계종 중앙종회 종책모임 금강회가 2만 달러, 적석사 주지 제민 스님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각각 1만 달러를 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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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성 인물사] 국악발전의 어머니 박귀희국악발전에 모든 것 희사 2011년 11월 3일 인구 11만의 경북 칠곡에 우리나라 국악인들이 총출동하다시피 다 모여들었다. 2011 향사香史 박귀희朴貴姬(1921.2.6~1993.7.14) 명창 기념공연 「국모」에 출연하기 위해 선생의 후배, 제자, 국립전통예술학교 재학생, 동국대 관현악단 등이 천리길을 마다 하지않고 내려온 것이다. 20세기 국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국악의 어머니를 기리는데 두 마음은 없었다. 국악계의 은인을 위해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한 창설자를 위해서, 바쁜 시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두들 기꺼이 내려온 것이다. 향사 박귀희는 어떠한 남자들도 해내지 못했던 문화예술계의 크고 다양한 일들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양악에 밀리는 국악의 발전을 위하여 또 소외된 여성국악의 활성화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부한 여장부다. 가히 국악 발전의 어머니 역할을 다한 국모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적통이 아닌 서얼 출신에 무당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국악학교 설립이라는 소망을 세웠고, 그 원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희사한 참인간이다. 박귀희는 한국의 혼이 담긴 국악을 사랑하고 키운 우리나라 국악사의 빛나는 스승이다. 여성이지만 국악인으로서의 민족음악의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한 전무후무한 경북여성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공간과 6·25를 지나오면서도 민족정신을 되살릴 새로운 시작은 국악뿐이라는 것을 박귀희 명창은 이미 알았던 것일까? 박귀희 명창은 이화중선의 소리를 들으면서 넋을 잃었고, 그 가락을 잡으려고 소리판에 들어섰다.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는 선택이었고, 한 사람의 뛰어난 선택이 우리 국악계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라났다.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안달이 났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해방이 되어도 국악인들에 대한 냉대와 멸시는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 신탁통치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양악은 선풍적으로 확산되었고 국악은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양악이 우리 민족과 함께 반만년을 흘러 온 국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낼 듯 확산되어도 국악인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저 속만 태울 뿐이었다. 당시 국악인들은 해방 나흘만인 1945년 8월 19 일에 대동단결하여, 민속음악을 올바른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국악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해방을 맞이하여 국악인들은 희망에 부풀어 국악중흥운동을 펼쳤으나 냉대받고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한 창랑 장택상은 달랐다. 장택상은 박귀희의 친아버지 장병관과 한 집안으로 국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국악인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것으로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 교장 기산 박헌봉은 『국악운동 반생기國樂運動 半生記』에 적고 있다. 여러 해 외국생활을 했던 장택상은 구수한 된장찌개나 깍두기만큼 맛있는 음식은 먹어보지 못했고, 우리 국악같이 흥겨운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국악을 사랑했다. 창랑의 도움으로 박귀희는 국악 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감상회를 열었다. 이때 박귀희, 김소희 명창의 판소리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하루 저녁 감 상회를 계기로 국악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되었고, 본격적인 학교설립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대 내각도 외면하고, 6·25도 터지면서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러갔다 국립전통예술학교를 세우다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이사장 박귀희는 1955년 김소희와 함께 서울 돈암동 적산 가옥 7백평을 불하받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다. 무용과 기악, 창 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한국민속예술학원이 사립 국악예술학교의 전신이다. 3 년동안 약 380명의 학생이 모여들자 국악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를 세워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전남방직 김용주 회장, 삼양 사 김연수, 경성방직 김용완 사장,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윤병호 서울은행장,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 등 각계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건평 5백평 규모의 신축 관훈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60년 3월 5일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개교한 사립 국악예술학교는 5천 년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악예술학교로 그 중요성을 지닌다. 1964년 4월 15일 윤태일 당시 서울시장의 호의로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는 남산으로 이전하였 다.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사무실로 쓰던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치나 규모가 한결 나았고, 주변 민원의 소지도 줄었다. 그해 7월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 악관현악단을 창설하였다. 1968년에는 돈화문 앞으로 옮겼다가 1970년 9월 30일 서울 석관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84년 12월 17일에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2년 10월 29일에는 석관동에서 서울시 금천구 시흥3동 산 24-17번 지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2002년 3월 2일에는 서울특별시교육청지정 자율 학교가 되었다. 전통예술학교는 박범훈, 김성녀, 김영임, 오정해 등 걸출한 졸 업생들을 배출한데다 국악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08년 3 월 1일 사립에서 국립으로 전환되었다. 국악예술학교가 1970년에 서울 석관동으로 이사한 후 박귀희는 운동장이 없 는게 마음에 걸려 1989년 서울 운니동에 있던 자신 소유의 운당여관을 국악예 술고등학교 이전 비용으로 내놓았다. 석관동 교사 판매 대금 20억원에다 박귀 희 명창이 살던 사저 운당여관 그리고 명창의 대전 과수원까지 판 전 재산 38 억원으로 전통국악예술학교는 1992년 금천구 시흥2동의 넓은 땅으로 이주하 게 된 것이다. 전통예술학교가 넓은 교사로 옮긴 것은 더없이 축하할 일이나 서울의 전통 숙박시설 명소로 사랑받던 운당여관이 헐린 것은 너무 아쉬운 일 이다. 박귀희 명창의 고택이 된 운당은 척박하던 195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보금자리이자 국수전이 열리던 바둑 대국장이었다. 운 당이 박귀희 명창의 소유가 된 것은 1951년이다. 원래는 조선 순조 때 궁중 내 관이 왕으로부터 목재를 하사받아 지은 양반 가옥이었다. 여기에 구한말 세 도가였던 한상억이 한옥을 사들여 1958년부터 구름집을 뜻하는 운당雲堂으 로 이름지었다. 서울 경기지방 정통 사대부 가옥을 보여주는 운당은 종로의 명소로 알려져있고, 박귀희는 이 집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운당여 관은 문화예술인들의 놀이터이자, 한국가옥의 곡선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 다. 1989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국악예술학교에 기증된 후 헐렸던 운당여관은 1994년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서울종합촬영소 내에 복원되었다. 국모 박귀희 명창이 기산 박헌봉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보듬고 민족음악을 보존하기 위해 뿌린 씨앗은 이제 개교 반세기를 넘어 반만년 민족정서를 싣고 있는 우리 음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첫 국악교육기관으로서 뚜렷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국립전통예술고에서는 향사 박귀희의 예술관이 실천되고 있다. 박귀희는 예 술을 공부하려면 먼저 인성을 닦고 예능을 공부해야하며, 예술인은 기예 뿐 아니라 학식도 겸비해야한다고 강조하였고 몸소 실천하였다. 박귀희 명창의 국악살리기는 완전히 자유의지로 시작되었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국악에 는 없던 가야금 병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낸 자유의지의 발로이자 전 인미답의 신개척지를 찾아나선 것이다. 소리로 풀어내야 할 출생스토리 박귀희 명창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하판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영심으로 친아버지는 장병관, 인동 장씨 집안이다. 장병관은 기골이 장대하고 말도 잘하며 돈도 많았다고 한다. 알아주던 대농이었던 칠곡 갑부 장병관이 경영하던 술 도가는 6·25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다. 장병관은 아들을 얻지 못하자 아랫 마을 속칭 탑고개에 살던 큰 무당 박금영(박귀희의 친어머니)과 동거했다. 장병관은 박금영이 딸을 낳자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딸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당으로 사는 삶의 지난함을 알고 있는 박금영은 처음에는 어린 박귀희 즉 장영심을 자신의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장병관은 혼인 외 딸이라고 해서 외면하는 바람에 박귀희는 인동 장씨 호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후 친모 박금영이 오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하자 오씨 호적에 오계화라고 올렸으나 박귀희는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오씨 성을 따를 수 없다면서 어머니 성을 따랐다. 상당히 앞서서 주체적인 생각을 보인 셈이다. 이후 장영심 즉 오계화는 국악에 입문하면서 지은 귀희라는 예명에 어머니 박씨 성을 붙여서 박귀희가 되었다. 한국 국악계의 대들보 역할을 한 명창 박귀희의 이름 세 글자에 출생에 서린 애환과 신분 차별의 굴레 그리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인간승리의 의지가 서려있다.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는 가야금과 무관하지 않은 배경을 안고 태어났다. 박귀희는 능력있는 아버지를 두었으나, 축복받는 출생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혼외 자식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태어난 박귀희의 인생 고민과 고뇌는 일찍 싹텄을 것이며, 그것이 깊은 예술적인 공명으로 승화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어찌보면 박귀희와 국악과의 인연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닐곱살쯤 철이 들만하자 어머니는 박귀희를 대구 봉산동 외가로 보냈다. 대구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무성영화를 처음 접하였다. 이때부터 예술세계에 대한 동경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향토음악사를 정리한 손태룡은 박귀희가 대구에서 달성권번과 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1931년 11세때 대구극장에서 열렸던 조선성악연구회 공연을 보면서 예술적 자질이 움트기 시작했다. 박귀희는 권번 담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은 것을 따라하다가 손재광 앞에서 단가를 부르게 되었다. 손재광은 그래 쓰겄다. 너 소리 배워라고 한마디를 던졌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 셈이다. 손재광이 어린 박귀희에게서 소질을 캐냈다면, 첫 스승은 박지홍이다. 박지홍으로부터 판소리와 「화초사거리」 등을 사사받았다. 박지홍은 나주 출신으로 명창 박기홍과 종형제간이었다. 이화중선의 소리에 홀린 듯 빠져들다 박귀희가 데뷔를 한 것은 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14세 때 달성권번 손광 재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이화중선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화중선 (1898~1943)은 김초향과 더불어 그 시절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열일곱살 때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홈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였으나 협률사 공연을 보 고 홀리듯 집을 나가 장득주에게 판소리를 배운 이화중선은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을 지닌 여류명창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화중선은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지방 순회공연에 이어서 일본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1943년 재일동포 위문 공연 도중 별세하였다.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이 대구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손광재가 박 귀희를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다. 박귀희의 소리를 들어본 이화중선은 바로 입단을 허락하였다. 박귀희가 대동가극단에 입단한 것은 1934년이었다. 대구극장에서 「소상팔경가」로 공식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대동가극단과 일년여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은 쌓았지만 오태석의 가야금 병창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생겼다. 토막 판소리에 만족하지 말고 명창이 되려면 제대로 소리를 배워야한다고 결심하고 대구로 내려온 박 귀희는 한국 소리계의 대부들을 찾아서 가르침을 받았다. 박지홍에게 「춘향 가」와「화초사거리」,「보렴」,「편락」을 배웠다. 15세이던 1935년에는 강태홍에게 가야금과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고, 승무, 박전무, 검무, 살풀이 등을 김남수에게 일년간 배웠다. 16세 되던 1936년 여름에는 대구 화원 용연사에서 박기홍의 의발衣鉢을 받은 조학진에게 백일 공부를 하면서 「춘향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백일공부는 불가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듯이 암자나 절에 스승을 모시고 들어가 성음의 경지를 터득하는 것을 말한다. 국악인들은 이렇게 절에 들어가서 소리공부 하는 것을 흔히 도야陶冶라고 하고 소리공부는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과 똑 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세 차례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 11시에 잠드는 시간까지 마치 좌선하듯이 소리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박귀희 명인의 가장 큰 특징은 국악에는 없던 가야금 병창의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는 사실이다. 한때 불이익 가야금 병창 광범위한 사랑받아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야금 병창대회에 나가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가야금을 뜯으면서 노래를 하는 새로운 연주 방식인 가야금 병창에 대해서 기존 국악계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최 근에는 이런 일들이 사라져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지만, 한 동안은 가야금 병창은 금지된 예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야금 병창은 대중의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창을 하며 가야금을 뜯는 병창은 마치 서양 아티스트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처럼 대중속으로 스며들었다. 박귀희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제 가야금 병창은 국악계의 대표적인 장르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18세에는 전남 담양에서 박동실 선생을 모시고 두 번째 백일공부에 들어가 「흥보가」,「심청가」를 배웠다. 박동실과 공부를 마친 다음해인 1939년 19 세 때는 유성준을 모시고 경북 하동군 쌍계사에서 세 번째 백일공부를 하면서 「수궁가」한바탕을 배웠다.3) 공부를 마친 박귀희는 대동가극단으로 다시 들 어가려 했으나 대동가극단이 일본 공연을 떠난 터라 종합예술단체인 한양창 극단에 입단하였다. 이때가 17세인 1937년이었다. 스승인 오태석과의 만남은 한양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시작되었고, 공부 장소는 봉익동 대각사 근처 익선 동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년을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다. 오태석은 목청이 좋고, 판소리 한바탕을 가야금 병창으로 노래할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후 박귀희는 한양창극단을 거쳐 임방울, 박초월 등과 함께 1943년 동일창 극단을 재창단하여 동일창극단 단장을 맡았다. 동일창극단은 창작창극 「일목장군」 등을 공연하였다. 창작창극은 신파조에 창을 혼합한 형식으로 아직 창극다운 창극을 접해보지 못했던 시민들은 새로운 형식의 창극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동일창극단의 성공작인 「일목장군」에서 박귀희는 남자주인공을, 박초월은 여자주인공을 맡았다. 미모에 연기력까지 뛰어났던 박귀희가 남자 역으로 분장한 선화공주는 대히트를 쳤다. 창극에서 여자가 남자역으로 출연한 것은 박귀희가 시초이다. 동일창극단은 서울 공연이 끝나면 계속 지방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였으나 광복되던 1945년 부산에서 해산되었다. 박귀희는 가야금 병창 무형문화재였지만 여창남역 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0대에 국악학교 설립의 뜻을 품다 1945년에는 여성국극단의 효시인 여성국악동호회를 창설하고 상무이사로 피임되어 활동하였다. 창립공연으로 「옥중화」 이후 1949년 2월에 공연된 햇님과 달님의 성공으로 여성국극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단 하나의 작품으로 단 1년만에 전국을 뒤흔들어놓고 뚜렷한 대중예술장르로 자리를 굳힌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드물다. 적어도 1950년대는 여성 국극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국극의 대유행으로 종래의 창극단들은 거의 사라졌다. 여성국극단이 초기의 음악극으로서 공연적인 성취보다 남녀간의 사랑 등을 확대하며 인기를 좇아 변질되자 박귀희는 여성국극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다. 여성국극단은 1960년을 전후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5·16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기존 국립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무용단 외에 국립국극단을 더 두게 되었다. 박귀희는 국립국극단 창 단을 앞두고 자격있는 국극인을 양성하는 국극요원양성소 개설을 거론할 정도로 국극단 창단에 음양으로 기여를 하였다. 국립국극단은 1973년부터 국립 창극단으로 바뀌는데, 이때 박귀희는 단장(1980~1982)을 맡았다. 1960년대 들어 문화의 소용돌이가 거세지자 박귀희는 일본 교포 위문공연 으로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일본에서 고생하며 살던 교포들에게 우리 음악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풀어내기에 안성마춤이었고 이런 심리적인 현 상을 박귀희는 잘 알아차렸다. 1961년 일본 거류민단장 박수정의 제의에 따라 동경에 무악원을 세웠다. 강사는 박귀희를 비롯하여 민요에 안비취, 가야금에 문경옥, 장고춤에 강문자, 민속무용에 이춘자 등 5명이었고 박귀희는 운영 대 표 겸 판소리를 가르쳤다. 동경 무악원은 무려 17년간이나 운영된 뒤 1979년에 문을 닫았다. 공연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서독, 베네수엘라 등 세계 각 국으로 확대시켰다. 국내에서도 가야금 병창활동을 62회나 펼쳤다. 전통예술에 대한 국가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박귀희는 제23호 가야금 병창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1968년의 일이다. 어릴때부터 명민하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박귀희는 시대 변화에 대 한 이해도 빨라 민족음악의 새 장을 여는 흐름에 항상 같이하고 있다. 1972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효녀 심청」에 박귀희는 영화음악으로 참여하 여 「심청가」일부 대목을 불렀다. 향년 72세를 일기로 타계 할 때까지, 호남세가 주류인 국악계에서 드물게 영남맥을 이어내었다. 평생 소리를 하면서 번 돈을 국악계의 앞날을 위해 선뜻 내놓았던 박귀희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교육과 민요수집 작곡 악보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는 도이다 박귀희의 소리는 1950년대에 취입한 유성기 음반부터 1993년 작고 직전에 녹음한 콤팩트 디스크까지 다양하게 남아있다. 박귀희의 자서전 『순풍에 돛 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에 따르면 60년대말부터 민요 채집을 구상했고, 이를 국악예술학교 교장이던 박헌봉에게 알렸다. 두 사람이 먼저 뜻을 맞추고, 아시아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모은 전승민요를 문화재관리 국에 기증하였고, 박귀희는 1979년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을 출판하게 되 었다. 50여곡이 실린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은 지금까지도 가야금 병창을 배우는 이들에게 유용한 교본이다. 종전까지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구전심수口傳心授 방식에서 벗어나서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혼자서도 마음만 먹으면 따라할 수 있는 교본으로 만든 것이다. 흔히 민요가 수들이 부르는 「꽃타령」,「뽕따러 가세」,「옹헤야」 등은 박귀희에 의해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예藝에 산다는것은 험난하다. 예를 도道로 닦기에는 더 힘이 든다. 그런 예 도의 길을 박귀희는 걸어왔고 역사 속에 살아남았다. 소리꾼으로서는 동편제 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성준의 제자로서 동편제에 속한다 할 수 있으며, 가야 금 병창으로는 고종 때 가야금 명인인 박팔괘의 정통 가야금 병창의 맥을 이 어온 오태석의 제자로서 법통을 이어받았다. 또한 판소리와 창극 그리고 여성국극 발전에도 큰 자취를 남긴 박귀희 명창은 평생을 국악살리기에 투신했 다.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향사 박귀희 추모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김덕수는 사람이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다수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걸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통해 확인했다. 나는 박귀희 선생님을 통해 전통을 어떻게 후대에 전승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과 가능성을 보고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박귀희 명인의 고향인 경북 칠곡군은 2021년 향사 박귀희 명창 뮤지컬(연희 창극)을 제작·발표하고, 전국가야금병창대회도 열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칠곡군에서 호국평화공원과 연계하여 향사 박귀희 명창 기념관을 건립하여 국립전통예술고 유품전시관으로부터 유품을 확보하여 전시할 계획이다. 평생을 국악발전에만 쏟은 국모 박귀희가 있었기에 우리 국악은 체계를 잡고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국악을 통해 우리 문화의 초석을 다진 향사 박귀희의 숭고한 예술정신은 날이 갈수록 그 향기가 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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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가벼운 몸살기를 느끼며 느지막이 일어나 창밖을 본다. 연무가 자욱하고 만추의 소슬한 가을비가 실낱같이 내린다. 기류가 흐르는지 마당가 은행나무 잎들이 노란 나비들의 군무같이 흩날린다. 가속도로 늙어가는 나이 탓인지 하나둘씩 내 곁을 떠나는 지인들의 혼백 같다는 생각도 든다. 통유리 창가의 내 익숙한 의자에 화석처럼 앉아 씁쓸 달짝지근한 조락의 우수에 잠기다가, 하루 일과의 관성처럼 조간신문을 집어들었다. ‘양치기 백석(白石/1912~1995)’이라는 칼럼이 대뜸 눈에 띄었다.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날 나는 대학에서 지기처럼 지내던 몇몇 교수들과 환담하며 우연히 백석과 자야(子夜/1916~1999) 얘기로 꽃을 피우지 않았던가. 백석 시인의 애인이었던 자야 여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지난 80년대 말엽쯤의 일이 아닌가 한다. 당시 서울음대 김정자 교수가 자야 여사를 모시고 남양주 덕소의 내 우거(寓居)를 방문했다. 김정자 교수는 가야고 전공이지만 자야 여사에게 우리 전통가곡을 따로 배우고 있었다. 자야 여사, 그러니까 김진향(金眞香/김영한)은 전통가곡의 맥을 잇고 중흥시킨 금하 하규일(琴下 河圭一) 스승을 사사했다. 말하자면 전통가곡의 정맥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자야 여사가 멀리 덕소까지 내방한 뜻은 음악 얘기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녀는 시정의 아낙들과는 달리 확실히 걸출한 안목이 있었던 듯싶다. 전통음악이나 전통문화를 꽃피우려면 당장 목전의 음악적 기량에만 매달리면 안 되고, 멀리 보고 좋은 인재를 키워야 된다며 자기 지론을 폈다. 그리고 돈은 자기가 댈 터이니 내가 인재학교를 세워서 키워 달라는 제의였다. 물각유주(物各有主)라고 했던가. 세상에 인연이 닿지 않으면 복이 굴러와도 눈치마저 채지 못하는 모양이다. 물론 나는 전공이 따로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사양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말의 후회가 없지도 않다. 알량한 지식만으로 무장한 재승박덕형 인사들이 하도 요란을 떠는 저간의 세태를 겪다 보니 참다운 인성 교육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뒤늦게 절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당시 천억대가 넘는다던 성북동의 대원각은 영재교육의 종잣돈이 될 인연을 살짝 비켜서 법정 스님에게 넘겨졌고, 그 후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야 여사는 웬만한 범부들이 부끄러울 만큼 선공후사의 국가관과 역사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아마도 법도 있는 권번 생활을 하면서 당대 숱한 우국지사형 대장부들과의 교유에서 받은 영향이 아닐까 한다. 국립국악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한 번은 대원각 기부 사실을 떠올리며 여사에게 국악원 발전기금을 넌지시 부탁했다. 그분의 소유로 대원각 외에 서초동에 큰 빌딩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사는 왠지 국약계를 위해 쓰자는 말에는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자야 여사의 선행이 또 언론에 보도되었다. 시가 백억여 원이 넘는 서초동 빌딩을 과학영재를 키워 달라며 과기처에 희사했다는 기사였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살아오며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경계를 일찌감치 간파했는지, 여사는 아무런 미련 없이 세상살이 공수래공수거의 삶을 깔끔히 솔선수범했다. 자야 여사는 나를 만날 때마다 힘주어 말한 얘기가 있다. 당신 살아 생전에 스승 하규일 선생을 기리고, 백석을 국문학계에 현창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부끄럽게도 당시 나는 백석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고, 따라서 자야 여사의 그 같은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해, 아마도 90년대 초반이지 싶다. 여사가 여느 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서울시립대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쓴 원고 뭉치를 내게 건넸다. 자신과 백석 시인 사이의 사랑 얘기를 쓴 일종의 자전적 소설인데, 한번 읽어 보고 잘 다듬어 달라는 청이었다. 예상대로 여사의 글은 어법이 서툴고 문투가 시대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장의 구성 또한 진부했다. 조금 손 좀 봐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여사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국문학 전공 박사과정 정도의 학생을 소개해 드릴 테니 아예 처음부터 환골탈태해야 되겠다고…. 그 후 얼마마한 시간이 흘렀는지는 기억이 없다. 자야 여사가 내게 책 한 권을 보내왔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내 사랑 백석’이라는 제호의 책이었다. 속지에는 ‘한명희 선생깨 6월 22일 1995년 김진향’이라고 친필 서명이 돼 있었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지만 원고의 문투처럼 ‘선생께’라야 할 철자를 ‘선생깨’로 표기한 사실도 역시 그녀다운 어법이다 싶어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졌다. 자야 여사를 알고 지낸 기간은 십여 년 남짓. 한강교 옆 외딴 고층 아파트 댁에 초대를 받기도 했고, 어느 때는 덕소 내 집 마당 단풍나무 밑 평상에 앉아 하규일제 전통가곡을 시범 삼아 부르기도 했다. 간혹 외국을 다녀올 때면 내가 약골이라고 건강식품을 챙겨 주기도 했고, 특이한 술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야 여사와 나는 자별한 사이도 아니었고 소원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서로 믿고 지내는 지인 한 분 계시는 정도의 친교 거리였지 싶다. 한 세기가 저물어 가던 1998년도의 일이다. 자야 여사에게서 저녁식사를 하자는 전화가 왔다. 약속한 서초동의 어느 일식집으로 나갔다. 그때의 만남에서 얻은 잔상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여사의 옷차림이었다. 나는 그동안 여사가 그토록 대담하게 튀는 정장을 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래위를 모두 순백의 양장으로 갖춰 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치장돼 있었다. 깔끔하고 정갈한 그분의 성품이 촌치의 착오도 없이 의상으로 표출된 분위기였다. 그날 만남의 요지는 당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가곡 한바탕을 국악원에서 녹음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하규일 전승의 가곡은 국악원 악사들의 반주로 간간이 녹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사의 건강은 점점 쇠약해 갔고, 긴 호흡으로 노래할 기력마저 소진돼 갔다. 결국 이듬해 자야 여사는 이승의 마지막 소망을 미완으로 남긴 채 삶을 영별하고 말았다. 나와의 느슨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인연도 이렇게 과거지사로 뜬구름같이 흩어져 갔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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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전 '열암 송정희 선생을 찾아서'열암 송정희 선생을 찾아서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술을 많이 접하고 즐길 줄 아는 마음이 먼저이겠지만 ‘후원'의 이름으로 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 또한 중요하다. 옛날 로마의 재상 마에케나스(Maecenas)의 문화예술에 대한 두터운 보호와 지원의 유래에서 오늘날 기업과 문화를 이어주는 ‘메세나(Mecenat)' 활동이 이어진 것처럼, 현대에는 문화예술과 이를 뒷받침해 주는 후원의 관계가 일차적인 상호관계로서뿐 아니라 우리 문화예술의 토양을 일구고 미래를 건축해 나가는 데에 있어 근간을 이룰 만든 중요한 요소로 발전했다고 할 것이다. 열암 송정희 선생은 오늘날 열암체라는 서체의 일가를 이루기까지 고금의 모든 서체를 익히신 서예가로 정평이 높다. 서체 또한 묵향과 같이 짙고 깊어 고매한 작품세계를 이루고 있으며, 오늘날 대표적인 서예가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연암 송정희 선생을 만나보았다. 기자가 열암 선생께 저희 국악신문 명사를 찾아서라는 지면에 소개하고 초대를 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선생을 '내가 무슨 명사여' 그러나 부득불 찾아 뵙겠다는 기자의 고집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2월 4일 오후 3시로 약속시간 잡고 버스로 광화문 구세군 앞에서 내렸다. 아직 추운 날씨지만 이날은 푸근했다. 구세군 건물 옆길을 따라 골목길을 쭉 올라가니 선생이 계신 축구회관이 보였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문을 여니 묵향과 녹차향이 가득하다. 또한 사무실 곳곳에 선생의 작품과 괴암 괴석이 눈에 드려온다. 찻잔 위로 퍼져 가는 국악방송에서 마침 시조창이 은은하다. 반갑게 열암 선생이 따라 주는 녹차 한 모금하니, 입 안에 푸른 향이 고인다. 기자와 열암 선생과 만남은 10년쯤 되어 보인다. 경기민요 예능보유자인 이춘희 선생님의 소개로 인사를 드렸다. 그때 주셨던 명함을 내보이자 선생은 깜짝 놀라시며 새로 주신다. 선생께 신문을 드리고 이 지면에 초대합니다. 라고 설명하니 그냥 세상사는 애기, 국악계 소식이나 얘기하자고 한다. 열암 선생은 자신이 또한 종이와 먹으로 스스로의 예술 탑을 쌓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주변 문화를 사랑하고 아끼는 예술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들어 온 판소리와 경·서도민요에 대한 선생의 사랑은 남달라 오래전부터 주변 예술인들과 교류해 오면서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담당해 왔다. 기자가 처음 열암 선생을 뵙때도 이춘희 선생과 임이조 선생이 주최하는 청소년국악경연대회 후원 때문이었다. 그때 후원해 오던 대회는 지금까지 올곧은 청소년국악경연대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전남 고흥 출신인 열암 선생은 6살 때 서예에 입문했으며 88년부터 3년간 연속 전국서예대전 특선입상과 한국작가협회 최우수작가상 등을 수상했으며, 93년 대전엑스포 제호와 충무군 이 순신 장군대첩비 등을 제작했다. 또한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동남아서예협회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97년에 한국청소년 건전문화육성 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 청소년 문화전수 사업 등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며, 한·중·일 서예가협회 한국대표와 한국전통문예진흥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2003년 12월 열암 선생은 국립극장 남산이전 30주년을 맞아 국립극장 발전기금 모금에 동참한다. 선생이 45년간 연마한 서화작품을 기증하면서 "한편 기쁘고 한편 부끄럼이 앞선다. 나는 아시(兒時)부터 붓을 잡고 천금(千今) 40여년(餘年)을 이 서(書)의 길을 걸으면서 늘 느껴오던 것은 이 길이야말로 가도 가도 끝이 없고 험한 외길로 가시밭길이란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길을 숙명(宿命)처럼 생각하고 내 목숨같이 사랑해 왔다”는 감회를 밝혔다. 이 무렵 국립극장에서는 2003년 12월 22일, 판소리가 유네스코 선정 ‘인류구전 및 무형 유산걸작'으로 선정된 경사를 기념하고, 우리 전통예술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나의 길 우리소리' 라는 특별공연을 달오름극장에 올리기로 기획했다. 평소 판소리를 비롯해 우리나라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과 조예가 깊은 열암 선생이 국립극장 발전을 위하고 유네스코 선정 ‘인류구전 및 무형 유산걸작'으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당신의 분신(分身)과 같은 귀한 서예 작품을 기꺼이 기증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또한 선생은 이에 앞서 1999년 11월 29일 죖고려대 100년 기념사업' 출범식에 서예작품 5000여점을 고려대 발전에 써달라며 기증하여 화제였다. 시가로 자그마치 200억원 상당에 이르는 서예 작품들이었다. 구한말 고려대 전신인 보성 전문학교 설립에 앞장선 송병헌 선생의 손자인 열암 선생은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라 평소 고려대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이 계기가 됐다.”고 기증 배경을 설명했다. 열암 선생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할아버지가 소리를 좋아한 관계로 사람 방에는 소리 좀 한다는 분들은 항상 계셨다. 그래서 소리만 들리면 몽유병 환자처럼 소리를 찾아다녔다. 이것이 소리에 대한 선생에 연(緣) 이였다. 그래서 선생은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과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고 한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이런 한 정신 기조를 가진 선생은 97년에 (재)한국청소년건전문화육성재단을 설립하고 국악을 전공하는 장학사업과 청소년 문화전수 사업 등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근 10년을 이어온 사업은 국악을 전공하는 200여명의 학생들이 혜택을 받았다. 또한 장학사업 뿐만이 아니다.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서화(書畵)를 무대배경이나 프로그램에도 흔쾌히 내주시기도 하고 장래성 있는 국악인을 초대하여 격려하는 연희도 열어준다. 요즘 선생은 "판소리보다는 경기민요나 서도민요를 즐겨듣고 공부한다고 한다. 한동안 판소리에 빠져 조상현 명창에게 소리도 배웠다는 열암 선생께 앞으로 계획을 질문하자. 여러 국악계 지인들과 약속한 것이 생각난다고 했다. 작지만 죖악·가·무'를 제대로 가르치는 국악대학 설립하겠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국악대학 교육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대학은 큰 가르침의 전당인데 과연 이에 걸맞은 역할을 해왔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열암 선생은 국악을 사랑한다. 그것도 매우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애호가이다. 오전에 서재에 출근하면 바로 국악방송을 틀어놓고 청취한다. 오후 퇴근해야만 이 방송을 끈다. 그 열린 마음과 서예 예술을 통한 사회 환원활동에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열암 송정희 ˚ 캐나다 몬트리올 주립대학 박사과정 수료˚ 모스크바 대학 연수(모스크바)˚ 워싱턴 주립대학 연수(미국)˚ 옥스퍼드 대학 연수(영국)˚ 러시아 우라지보스톡 극동국립기술대학교명예 박사학위 취득˚ 고려대학교 정책, ICP, 언론 대학원 최고위 과정 수료˚ (재) 청소년건전문화육성재단 현 이사장˚ 열암문화재단 설립자˚ 한국전통문예진흥회 현 이사장˚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심사위원)˚ 대한민국 서예대전 특선 연 2회,한국문인화대전 특선 1회˚ 한국작가협회 최우수 작가상수상˚ 서울시 초대작가˚ 동남아 서예협회 심사위원장˚ 대한민국 서화대전 심사위원장˚ 한·중·일 서예가협회 한국대표° 한·일 서예협회 운영위원장° 서울대 강사° 자녀안심하고학교보내기국민재단 자문위원° 한국인권위원회 자문위원° 사랑실은 교통봉사대 특별자문위원° 자유중국 장통충 기념관 초대전° 일본 오사카 민단 초대전° 우라지보스톡 러시아제1회 고려인 문화의 날 행사° 극동 국립기술대학교 부시킨극장 초대전 ▶ 서울시 종루구 신문로 2가 1-131 축구회관 4층 (☎738-7755, FAX:738-6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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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기념 "이영준"명인 예술세계지난 12월 3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이영준 명인의 고희 기념 우리소리 음악회가 있었다. 건강을 위하여 시조창 입문 30년에 건강과 예술인생을 반석에 올러놓은 이 명인은 이번 음반 수입 전액을 시조발전 기금과 시조명인협회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이 글은 채치성 국악방송본부장이 그동안 존경하던 음악선배을 위해 기고하여 CD에 담은 글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로는 불운이 행운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위기가 기회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경우를 직접 체험하거나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들 볼 수 있다. 우주를 섭리하는 위대한 힘 하나님은 우리를 모두에게 모든 것을 꼭 같은 질량으로 베풀지는 않지만 어떤 형식으로든지 공평하게 내리고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건강을 주기도 하고 富를 주기도 하며 명예와 직위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예술적인 재능이나 뛰어난 지적능력을 부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영준 명창의 시조 인생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절망적인 시기,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가 이렇게 숙명론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단순한 목적, 실로 작은 동기에서 시작된 시조 인생이 그를 크게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30년 전 어쩌면 생명을 잃을 지도 모르는 큰 병에 걸렸었다. 한 대학 병원에서 큰 수술을 두 번씩이나 받는 등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고통의 사간을 보냈다. 수술 후 운동을 해야 하는데 단전호흡이 효과적이라고 해서 시조창을 하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이던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에 이제 막잠에서 깨어난 예술적인 흥미까지 겹쳐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밤낮 가리지 않고 주경야독하며 시조를 읊어도 신명은 더해 갔다. 그의 사무실에는 시조를 읊기 위한 악보며 장구, 음행기기 등을 갖추어 놓았다. 작은 틈도 시조를 읊는데 활용하기 위해서다. 시조 생활을 하며 수십년간 열심히 심혈을 쏟은 결과, 완전히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고 다른 예술분야인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꾸준히 쓰고 있다. 이제는 예술분야인 현대 미술협회장을 추대받고 10여년간 「현대미술대전」을 주관하여 신진 작가들의 등용문으로서 국제 화단에 이름을 나타나게 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그는 많은 작품을 내놓아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미술과 시조가 그를 예술 인생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조인들의 모임인 대한시조협회중앙본부가 주최하는 전국시조가사가곡 경창대회에서 장관상, 시조인에게 주는 최고의 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리고 전주대사습 시조부의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예술은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더불어 하면 흥이 나고 경쟁을 통한 자극으로 발전은 배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시조 동호인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사)대한시조협회 이사장직 추대받고 60여개 지부지회를 115개로 확장하여 우리나라 시조인의 대부분을 회원으로 망라하는 큰 조직으로 발전시켰으며 그가 전통음악인 시조창을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넣게 한 것 또한 시조사에 기록 될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조를 읊고 보급하고 발전시키는데 최선을 다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의 인생의 긴 여정 중 가장 힘들었던 시절, 시조와 인연을 맺은 후 시조를 통해 얻는 정신적인 풍요와 튼튼한 몸을, 우리 문화의 진수인 시조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서 국민 모두가 1~2수의 시조창을,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도 읊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무수한 별들이 강물처럼 흐르는 여름 밤, 시조창 한가락에 모든 시름을 날려보내고, 그림과 글씨를 통해 자연과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와 한가로움이 있는 삶, 그런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는 이영준 명인, 이제 그는 그동안 쌓아온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시조 곡목 중 대표곡을 CD에 담았다. 그의 혼이 담긴 이 CD가 시조 문화 중흥에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글 / 국악방송본부장 채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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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 예술문화 발전기금 지원부천시는 지역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시내 예술단체와 예술인으로부터 오는 24일까지 내년도 문화예술발전기금 신청을 받는다. 문학·미술·음악·무용·연극·국악·사진 등의 분야에서 창작·연구·공연·전시활동에 종사하며 부천지역의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힘쓰는 개인 또는 단체가 신청할 수 있다. 지원여부는 부천시 문화예술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내년 2월 중 지원여부가 결정된다. 총기금 1억3000만원 중 단체는 최대 500만원, 동아리나 개인은 300만원 한도내에서 활동 경비의 50%를 지원받는다. 그러나 이 기금을 3년 연속 지원받았거나 국고·지방비·경기문화재단 등으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개인 또는 단체는 지원대상에서 제외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과 각종 지원을 받는 연례예술행사 등도 기금 지원이 제한된다. 문의 : 032) 325-1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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