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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첫눈처럼 내가 가겠다/이미나널 품기 전 알지 못했다 내 머문 세상 이토록 찬란한 것을 작은 숨결로 닿은 사람 겁 없이 나를 불러준 사랑 몹시도 좋았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했던 평범한 모든 순간들이 캄캄한 영원 그 오랜 기다림 속으로 햇살처럼 너가 내렸다 널 놓기 전 알지 못했다 내 머문 세상 이토록 쓸쓸한 것을 고운 꽃이 피고 진 이곳 다시는 없을 너라는 계절 욕심이 생겼다 너와 함께 살고 늙어가 주름진 손을 맞잡고 내 삶은 따뜻했었다고 단 한 번 축복 그 짧은 마주침이 지나 빗물처럼 너는 울었다 한 번쯤은 행복하고 싶었던 바람 너까지 울게 만들었을까 모두 잊고 살아가라 내가 널 찾을 테니 니 숨결 다시 나를 부를 때 잊지 않겠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했던 니가 준 모든 순간들을 언젠가 만날 우리 가장 행복할 그날 첫눈처럼 내가 가겠다 너에게 내가 가겠다 추천인:기찬숙(칼럼니스트) "가끔은 애절한 노래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첫눈을 기다리는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영화의 OST인데, 절절하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막연하지만 마지막 절 ‘첫눈처럼 내가 가겠다/ 너에게 내가 가겠다’가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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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전위혼, 청년의 것/무세중청년은 앞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싸우는 세대. 그래서 청년은 전위(前衛)이고 전위대는 곧 청년들이다. 승냥이 떼거리가 몰려오고 무지와 독선이 판을 치는 마당이다. 청년이 할 일은 무엇인가 역사와 사회를 인식(認識)하는 일. 인식은 사태를 파악하는 일이요 의식은 그것에 대처하는 행위이다 전위혼(前衛魂)은 청년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고통의 예술. 추천인:기찬숙(칼럼니스트) "나는 말한다. 우리나라 1세대 전위예술가 무세중! 아직도 뜨거운 ‘전사의 피’를 비장(秘藏)한 청년! 민중문화의 저항정신을 행동예술로 표현하는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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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김대환선생에 대한 회고, 네 장면(下)삼목 #깜작 놀란 오스카 패티포드 ‘아디동 부르스’ 오사카 카페 ‘사브’에서의 김대환 선생이 서예 ‘아리랑’ 작품을 남기게 된 사연은 매우 흥미로웠다. 김경원 선생이 오사카에 거주하며 들어 안 사실이었다. 얘기를 하는 동안 방송 팀은 장비를 테이블 위에 놓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김경원, 김병수 선생과 함께한 테이블에는 주스와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김병수 선생은 오사카에서 태어나 자란 탓에 우리 말 발음이 완전하진 못하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김경원 선생에게서 이야기 바통을 이어 받은 김병수 선생은 일본이 ‘아시아의 재즈 왕국’임을 설파했다. 제시한 근거는 실력 있는아티스트들이 많고, 확고한 재즈 마니아들이 있고, 방대한 음반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J 퓨전’이라 불리는 일본인들만의 퓨전 재즈의 수준은 세계적이라는 데서 그렇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는 재즈의 고향인 미국마저도 극찬을 아끼지 않는 사실에서 입증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일본 재즈계의 상황은 흥미로웠다. 세계 재즈계에 일본의 재즈 뮤직션들이 거의 상위에 올라있었다는 것이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긴 일본은 전 세계에서 배토밴 음악을 제일 좋아하고, ‘심포니 9 합창’은 1만명이 함께 무대(‘1만명의 제9’)를 꾸미는 웅장한 스케일의 공연을 자주 열고, 송년음악회는 거의 이 작품을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배경이 있다. 하나는 182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되고 일본에서 초연된 것이 세계 제1차 대전 독일군 포로들에 의해 1918년이란 역사성을 든다. 동양 최초의 연주였다. 둘은 1943년 12월 학도병출진 음악회에서 이 작품을 연주했고, 이듬 해 12월 돌아오지 못한 학도병을 위한 음악회에서 추모음악으로 이를 연주했다는 사실을 든다. 마지막은 이 작품 코러스 부분의 합창단원을 아마추어들로 출연시켜 이들을 통해 테켓 판매를 유리하게 하기 위한 사실 등을 든다. 어찌 되었든 이런 사실조차도 우리가 보기엔 의외이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얘기 끝에 김병수 선생이 깜짝 놀랄만 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 얘기 역시 일본이 재즈가 세계적인 곳이라는 이야기의 연속에서 나온 것이다. "아리랑 재즈 버전 ‘아디동 부르스’도 이 카페에서 처음 들었어요. 일본에는 세계적인 재즈 음반은 거의 다 있어요. 이 카페는 세계적인 베이스 연주 음반은 엄청나요. 오스카 패티포드가 4, 50년대 베이스 텍크닉 최고 연주자 였잖아요.” 김병수 선생의 말에 귀가 번쩍했다. 아리랑 재즈 버전이라니! 또 아디동 부르스라니! "이 카페 주인 싸브 선생이 일본에서 알려진 베이시스트예요. 그래서 해외 연주여행을 할 때면 개런티를 음반 사는데 다 쓰고 오는 분이래요. 10여년전 미국에 갔었는데, 역시 음반 구입을 했다고 해요. 이 때 일본에서 연주를 한 재즈 뮤직션들의 앨범을 구입해 왔다고 해요. 그 중에 베이시스트 오스카 페티포드(Oscar Pettiford, 1922~1960년)의 앨범 ‘Discovry’가 있었답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카페에서 이 음반에 수록된 ‘AH DEE DONG BLUES’듣는데, 부인이 ‘어 이거 한국의 아리랑인데?”라며 놀랬다는 거예요. 부인이 한국인이라서 아리랑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거지요.” 이 얘길 들은 옆 테이블의 방송 스탭들이 그 음반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김병수씨는 작년에 누군가가 녹음을 한다면 빌려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한 시간 쯤 후 색션들이 오면 ‘아 디 동 부르스’를 연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모두 박수를 쳤다. 아리랑에 매달려 그를 추적하여 오사카 까지 온 상황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미국 제즈 뮤지션의 재즈 아리랑이 있다니. 그것도 ‘아 디 동 부르스’라는 이색적인 이름으로 존재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들은 얘길 대충 정리하면 이렇다. 이 카페에 있는 음반은 1981년 LP 음반 ‘Discovry’에 담긴 것인데, 원래는 1952년 SP 음반 의 'MUSIC OF THE FUTURE'에 수록된 것이 오리지널이다. 이 음반은 재즈 전문 레이블 ‘Royal Roots’사가 발매해서 유명한 음반이다. 여기 참가한 섹션으로 당시 거의 동급인 찰스 밍거스가 참가하여 널리 팔린 싱글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는 한 시간 쯤이 지나 출근한 주인 싸브가 김선생의 통역으로 전해준 이야기이다. "오스카 패티포드는 1051년 한국전 참전 병사들의 위문공연으로 일본 오끼나와 기지에 왔다. 한 달 정도의 공연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공연을 한 다른 연예인들을 태우고 함께 귀국하기 위해서였다. 하루 정도 체류를 했다. 그런데 통역병과 함께 야전 화장실을 가게 되었다. 그 때 밖에서 기다리던 한국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노래를 불렀다. 오스카 페티포드는 일을 보던 중이었는데, 휘파람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문을 열고 물었다. 그 노래가 어떤 노래냐고. 통역병은 ‘아리랑’이라고 답했다. 싸브씨가 의미심장하게 톤을 높이고 제스쳐를 써가며 들려준 부분은 이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오스카 페티포드는 화장실에서 한국 통역병의 휘파람 소리에 영감을 얻어 귀국해서 편곡한 것이 ‘아 디 동 부르스’이고 통역병이 ‘아리랑’이라 했지만 ‘아 디 동’을로 듣고 곡명을 그렇게 단 것이라고 봐요. 나는 오스카는 이미 1959년 비행기 사고로 이듬해 죽었기 때문에 확인할 수가 없었고, 베이스로 연주한 찰스 밍거스에게 들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만날 수가 없었어요. 어떻든 이 곡은 명곡에 명연주입니다.” 싸브씨는 드럼 치는 세선이 아지 오지 않았지만 김병수선생 트펌펟과 자신의 베이스만으로 ‘아 디 동’ 부르스를 연주하자고 혀며 자리를 잡았다. 모두 두 사람의 연주로 향했다. 정식 촬영은 드럼이 참가할 때 하지고 하여 듣기만 하기로 했다. 4분 정도의 연주다. 생음악을 하는 카페치고는 좁았다. 카메라 설치로 좌석을 밖으로 내놓는 등의 소란을 격과 3인조의 ‘아 디 동 부르스’를 촬영했다. 삼목으로서는 그 선율이 머리에서 떠내 보낼 수가 없었다. 어딘지 중국적인 색채가 느껴지고 저음의 베이스가 이끄는 선율이 심장을 두드리는 듯 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오사카 공항에서 미국 케네디 공항으로 향하는 기내에서도, 다시 하와이행으로 갈아타는 시간에도, 언제 어디에서 그 음반을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골몰했다. 당연히 하와이에는 음반샵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이었다. ‘아 디 동 브르스’, 이 특별한 아리랑 재즈곡은 김대환 선생의 이름으로부터 연유되어 알게 되었다. 아리랑의 사연은 곡진하지 않을 수 없다. * 2000년 기찬숙 선생, 미야즈까 도시오 교수, 김도형 선생 등과 ‘아디동 부르스’를 생음악으로 듣기 위해 오사카 사브를 들렸는데, 그 사이 싸브 선생은 작곡한 뒤였다. 너무 아쉬웠다. 주인 없는 베이스만 사진에 담아 왔다. * 삼목은 2009년 1952년 발매된 SP음반을 고가로 구입했다. 1981년 발매된 LP음반과 ‘아 디 동 부르스’를 수록한 촬스 밍거스의 CD 전집을 2010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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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문경새재’도 아리랑?삼목 作 "선생님, 제가 보낸 카톡 사진 보셨어요? 점촌 버스터미널 사거리에 걸린 프랭카드인데요, 내일 강연 안내인데, 아리랑연합회 김** 선생 문경에 온다는 내용만 있어요. 아리랑 강연 내용은 없고요. 점촌 시내 곳곳, 문경읍 면 단위에는 200개나 부쳤다고 합니다. 재밌네요.” 문경시가 주최하는 시민 대상 아리랑 특강 안내 프랭카드. 내용이 아리랑을 강의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아리랑 연합회 김**가 문경에 온다는 식의 표현이라서 어색하고 재미있다고 기찬숙 선생이 알려온 것이다. 이 시기 문경아리랑은 물론 아리랑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부족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20012년 6월이다. 문경새재아리랑이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한 강연이었다. 강연 주제는 아는 이들이라면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내용이다. 70분간의 강연은 다음의 세 문장으로 요약이 된다. "모든 아리랑의 후렴에 나오는 ‘아리랑고개’는 바로 ‘문경새재’입니다. 문경새재가 바로 '아리랑 고개'라는 말입니다. 문경은 아리랑의 고향입니다.” 이 요지의 강연을 계기로 문경지역에서는 소위 ‘문경아리랑 붐’이 일어났다. 당시 송옥자 회장이 문경아리랑을 알려오고 있었지만, 시청과 문화원과 일반인들에게 "문경에도 아리랑이 있다”는 인식이 번지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2020년까지 문경지역에서 아리랑을 주제로 행해진 사업과 행사를 보면 그야말로 획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망하게 이뤄졌다. 정선이나 밀양 또는 진도 지역에서 20여년간 이뤄진 것들이 한 시장의 5년 임기 내에 이뤄진 것이다. 대충 추려도 이럴 정도이다. 첫째는 문경새재아리랑제‘가 대규모, 정례화, 대외 행사로 확대, 개최 둘째는 국립아리랑박물관 건립을 공식화, 국회 정책발표회, 아리랑 가사 서예 작품화 셋째는 문경새재아리랑과 다듬이 소리 브랜드화 행사(광화문 천명 다듬이 행사) 넷째는 문경시 ‘아리랑도시’ 선포 다섯째는 경복궁 중수 후의 아리랑과 문경새재아리랑의 연결고리 학술 담론화 여섯째는 헐버트 채보아리랑과의 연결, 독일 홈볼트 아카이부 독일포로 고려인 유리콜라이 아리랑 음원 전시 및 관련자 초청 행사 일곱째는 최초의 통속아리랑 H. B. 헐버트 채보 아리랑악보비 건립 여덜째는 문경시장 사할린아리랑제 동행 및 해외 연주자 초청 공연 아홉째는 민요학회 주최 문경새재아리랑 주제 학술대회 등 개최 열 번째는 전승단체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와 아리랑문화단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양립 이상의 과정에는 문경시청이라는 관官의 지나친 주도로 전승주체가 소외되는 이율배반적 상황이 10여 년간 점령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 ‘아이디어만 빼 먹는 관’이라는 구태도 구설에 올랐다. 이 중심에 삼목이 있었다. 삼목은 이 아리랑 공사公事에 스스로 "공도 있고 과도 있다.”고 평가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 기간에 드러나게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와 그 위상이 정립 또는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즉, 문헌과 음반 기록으로 그 실체를 밝혀냈다는 사실이다. 1896년 H. B. 헐버트가 기록한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아르랑 얼싸 배 띄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라는 대표사설은 이후 ‘구아리랑’에서부터 1926년 밀양아리랑과 '주제가 아리랑'까지 전승된다는 사실에서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다. 즉, 경복궁 중수(1865~1872)7년 기간에 문경의 새재에서 나는 특산물인 박달나무가 공사장 도구 자루로 다 베어져 나간다는 상실감을 표현한 것이고, 또한 이 새재는 경복궁 중수 기간 삼남의 부역꾼들이 반강제적으로 오가며 넘었던 고개이다. 여기에서 ‘새재’는 ‘고개’로, 고개는 ‘고난’의 상징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곧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삼목은 1985년 헐버트 기록을 발굴, 소개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1905년 오키타 긴조(㳞田錦城)의 ‘한국의 이면韓國 裏面’ 소재 아리랑 기사, 1925년 동아일보의 ‘박달나무 민요’. 1929년 ‘개벽開闢’의 ‘문경요聞慶謠’, 1930년대 이재욱의 ‘영남민요조사자료’의 문경지역 민요자료 등을 발굴하여 존재를 밝혀냈다. 이러한 문헌 전승을 통한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 확인은 거의 삼목의 몫이었다. 한편 이 시기 더불어 거둔 성과가 또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발매된 지역 아리랑 음반의 발굴이다. 즉, 1936년 밀리온 레코드사가 발매한 최계란 소리 ‘대구아리랑(1936년)’이 2008년에 발굴되고, 1937년 오케이레코드사가 발매한 서영신 소리 '동래아리랑(1937년)’이 2009년 발굴 되고, 같은 해 '신밀양아리랑(1936년)' 등이 신나라음반 자료실에서 발굴되었다. 이미 장소성을 부여한 강원도아리랑과 밀양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대구와 부산의 지명 아리랑이 뒤늦게 발굴됨으로써 다른 지역의 지명 아리랑도 발굴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동안 음반 수집가들에 의해 또는 대학 연구소 음원 아카이브가 주목한 장르는 판소리 명창 음반이나 월남 이상재 선생이나 손기정 선수 같은 역사인물의 육성 음반 등이었다. 지역 아리랑에 대한 관심은 그리 두지 않았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특히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전국적인 아리랑 신드롬과 함께 지역 아리랑 음반들에 관심을 보여 발굴되었다. 이에 의해서 ‘경주’, ‘춘천’, ‘문경’ 지명의 아리랑도 음반으로 발매되었으리라는 추정을 하게 되었다. 삼목으로서는 당연한 기대였으며, 국내와 일본 및 해외의 음반 판매사의 싸이트를 주목하고, 1930, 40년대 신문 광고도 살피게 되었다. 2017년 11월 초, 제10회 문경새재아리랑제 개최를 준비하기 위해 문경을 바쁘게 오가던 시기이다. 고속버스가 충주를 거쳐 점촌을 향하는 중에 기 선생 특유의 높은 톤이 들려왔다. 기 선생이 안국동 아리랑연합회 사무국에서 일제시대 신문기사 색인 작업을 통해 ‘아리랑연표’를 작성하다 찾아낸 것이다. "포리돌 음반 광고에 ‘문경새재’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건 분명 문경새재아리랑인 것 같아요. 왜냐면 오태석과 정남희 반주에 조앵무와 임소향이 부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분명 이건 문경아리랑 음반입니다.” 나는 문경문화원 일을 보면서도 건성이었다. 마음 한쪽은 빨리 서울에 들어가서 기록을 보고 싶어서 다. "일제강점기 문경아리랑이 음반으로 나왔다?”는 기대는 했지만, 실제 그 존재가 드러날 줄은 몰랐다. 요 몇 년 동안 추정한 것이 실제 현실로 드러난 것이니 신비하기도 했다. 급한 마음으로 서울에 돌아 온 삼목은 기 선생이 출력해 놓은 조선일보 1939년 1월 19일자 ‘포리도루 조선음반 신보’ 광고를 보았다. 분명하게 2월 신보 광고란에 ‘聞慶새재’가 들어있다. 반주자 두 분과 노래한 두 분도 분명히 나와 있다. 다만 ‘아리랑’이라는 단어가 없을뿐이다. 그러나 삼목은 확신을 했다. 여러 문헌에서 ‘아리랑’이 붙지 않은 ‘문경요’나 ‘박달나무 민요’가 모두 문경아리랑이었기 때문이다. 1949년 성경린과 장사훈이 펴낸 ‘朝鮮의 民謠’에서도 ‘聞慶새재’로 곡명을 달았는데, 그 가사는 문경새재아리랑이다. 그런데 이 광고만으로는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실제 음반이 발매되었다는 기사와는 다르게 광고 게제 일시와는 시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음반은 발매 되지 않고 광고만 나왔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광고만 나오고 발매는 되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70여년이 지나도록 실물이 확인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삼목과 기 선생은 이 두 가지 의문을 염두에 두고 음반을 찾기 시작했고 관련 기록을 수소문 했다.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매일 색인 검색을 하는 김종욱 선생에게 부탁한 결과 의미있는 자료가 왔다. 그것은 매일신보 1938년 7월 17일자와 9월 25일자 경성방송국(JODK) 국악 프로그램에서 ‘문경새재’가 송출되었음을 확인했다. 여기에 따르면 부른 이는 다르지만 같은 반주자에 의해 방송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음반 발매 여부와는 또 다르게 ‘문경새재’가 국악인들에 의해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삼목과 기 선생은 광고자료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음반 존재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발굴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이를 언론에 알리고자 했다. 그러자 기 선생은 "우리가 음반을 찾고 발표해야지 이 자료만 알리면 안된다"라는 의견을 냈다. 이어 "그 음반 찾게 되면 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 기사를 보고 찾았으면서도 마치 자신의 눈이 밝아서 '최초 발굴'이라고 떠들면서 찾았다는 기사를 내는 노략질을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삼목으로서는 누가 찾든 빨리 음원을 확보하여 문경아리랑의 위상을 제고하고, 연구 자료화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드디어 2017년 11월 3일, 문경문화원 고성환 사무국장을 통해 문경매일신문과 대구매일신문에 자료를 공개했다. "문경새재아리랑 전국 확산…방송·음반 발매 기록 발견. 한민족아리랑연합회와 아리랑학회는 2일 문경새재아리랑이 1938년 7월 17일 오후 8시 KBS라디오 전신인 조선방송(JODK)에 방송됐고, 영국의 레코드사가 취입해 음반으로도 내놓았다는 당시 조선일보 기사와 광고를 비롯한 방송자료를 발견해 매일신문에 공개했다.” 기사의 말미는 이렇게 여몄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문경새재아리랑은 헐버트 선교사가 서양 악보로 채보하기 시작한 1890년대부터 1930년대 방송을 타고 임소향이 음반을 낸 이후인 1940년대까지 서울 경기 지역에서 널리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며 "만일 임소향이 월북하지 않았다면 문경새재아리랑은 해방 후에도 전국에서 널리 불렸을 것이다-고 했다.” 이 기사는 ‘문경새재’라는 음반명과 곡명을 아예 ‘문경새재아리랑’으로 특화, 단정하였다. ‘문경새재’는 ‘문경새재아리랑’ 또는 ‘문경아리랑’으로 특정, 검색 키워드로 제시했다는 사실에서 음반이나 기타 문헌에서 문경새재아리랑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했다. 이 기사로 문경과 소장자들에게 전해져 반향이 컸다. 유튜브 ‘정창관의 아리랑’ 운영자 정창관 선생이 공감을 표해왔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회장도 "문경아리랑이 다른 지역 아리랑과 함께 중요한 위치였음을 확인시켜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드디어 기사의 결과가 나왔다. 존재에 대한 기사가 나간지 1년,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면 관장이 소장 자료를 공개했다. 광고 문안과 동일했다. "Polydor X-517-A(10386BF) 南道雜歌 梅花打鈴·聞慶세재 吳太石·丁南希·曺鸚鵡·林素香 伴奏 韓成俊·金德鎭·鄭海時” ‘南道雜歌 聞慶새재’ 불은 라밸의 폴리도루 음반, 너무나 반가운 음반이다. 그리고 2년 후 역시 노재명 관장이 가사지歌詞誌까지 발굴, 공개했다. 획기적인 발굴이다. 이로서 3절의 가사가 분명하게 밝혀졌다. "(중모리)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 구부야 눈물이 난다.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아리랑 장단에 노래허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가세.이 밭을 매고 저 논 갈아 양친 부모님을 봉양허세.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아리랑 장단에 노래허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가세.이 물을 건너고 저 산 넘어 우리 님 계신 곳을 찾어가세.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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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작곡 ‘여민락’ 계통 악곡 연주 무대세종대왕이 남긴 음악 유산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공연이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오른다.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은 정악단(예술감독 이상원)의 올해 정기공연으로 오는 4월 21일(목)부터 22일(금)까지 양일간 저녁 7시 30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세종의 소리 ‘여민동락’을 선보인다. 국립국악원 정악단은 세종대왕이 백성과 함께 음악으로 즐거움을 나누고자 직접 작곡했던 ‘여민락(與民樂)’ 관련 악곡을 연주하는 무대로 이번 정기공연을 마련했다. 공연의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송지원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의 해설이 함께 한다. 세종대왕은 중국에서 들여온 음악을 정비하고, 조선만의 고유한 음악을 만들고자 세종 29년 최초의 한글 노래(악장)인 ‘용비어천가’를 만드는데, 이 중 ‘여민락’은 순한문체의 용비어천가를 노래한 음악이다. 국립국악원 정악단은 궁중음악을 전승하는 유일한 국립 예술단체로 이번 공연을 통해 여민락 계통의 4가지 악곡(여민락만, 여만락령, 여민락, 해령)을 연주한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악보 ‘세종실록악보’에 수록된 ‘여민락’, 생생한 연주로 만나 시대별로 다른 ‘여민락’의 다양한 악곡 통해 음악적 특징 비교 감상하는 무대 여민락은 우리나라 고악보 중 가장 오래된 악보로 꼽히는 ‘세종실록악보’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여민락은 여민락만과 여민락령, 여민락, 해령 등 4가지 악곡으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 중 ‘여민락만(與民樂慢)’과 ‘여민락령(與民樂令)’은 주로 각종 궁중 행사와 임금의 행차, 정재(呈才, 궁중무용)의 반주 음악 등으로 연주된 곡이다. 조선 전기에는 성악곡과 관현악 합주 형태로 연주된 반면, 후기로 접어들며 관악 합주 형태의 기악곡으로 연주 형식이 변화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악보상으로 원형의 여민락과 가장 가까운 것은 현행 여민락만으로, 느리다는 뜻 ‘만(慢)’의 꿋꿋하고 장엄한 기풍을 느낄 수 있다. 여민락령은 훗날 변주곡으로 연행된 ‘해령’과 구별하기 위해 ‘본령(本令)’이라고도 불리며, 여민락만에 비해 완만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선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공연에서 선보이는 ‘여민락’은 16세기 중후반 선비들에 의해 풍류방 음악으로 수용된 기악 합주곡으로 이번 무대에서는 전체 7장으로 구성된 악장 중 장단이 빨라지는 4장부터 5장까지를 연주한다. 가야금, 거문고, 양금, 장구의 편성으로 연주하는 여민락을 통해 평온함과 따뜻한 풍류 음악으로서의 감성을 전할 예정이다. 령(令)을 풀어서(解) 연주한다는 뜻의 마지막 악곡 ‘해령(解令)’은 여민락령에 비해 가락이 복잡하고 화려한 멋을 가진 곡으로 20세기 초 여민락령을 변주해 만든 곡이다. 여민락만과 여민락령이 단조로운 느낌인데 비해 해령은 장단 사이에 음을 삽입하거나 장식음을 붙여 화려한 느낌을 전해 여민락의 다채로운 멋을 느낄 수 있다. 우리만의 고유한 음악으로 나라 음악 세우려했던 세종대왕의 뜻 담긴 ‘여민락’ ‘여민락’에 담겨진 역사성과 애민정신 통해 우리 음악에 대한 자긍심 일깨워지기를 이상원 정악단 예술감독은 "이번 공연이 세종대왕의 음악적 업적과 뜻을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언급하며 "앞으로도 다양한 연주 무대를 통해 선조들의 음악 유산을 올바르게 잇는 활발한 노력을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국립국악원장은 "6백여 년의 시간이 쌓이면서 ‘여민락’은 다양한 모습으로 전승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겨진 애민정신과 자주적인 문화를 세우려고 했던 세종대왕의 의지는 변함없이 살아있다”고 언급하며 "이번 공연을 통해 많은 관객들이 우리 음악 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석 유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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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우리도 ‘아리랑 인간띠 노래혁명’을~기찬숙/ 아리랑학회 연구이사 국경을 맞댄 세 나라가 노래로 독립을 쟁취했고,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인간띠의 노래혁명(The singing revolution of human belt)’ 행사를 축제화한 경우가 있다. 유럽 북쪽에 있는 발트해를 끼고 있는 구 소련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세 나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이다.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민족운동을 벌인 이들 3국은 유사한 역사 과정을 갖고 왔다. 중세 이후 독일, 덴마크,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 같은 5개국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13세기 초에는 덴마크가 에스토니아 북부 지역을 장악했고, 이어 독일 주교단과 기사단이 분활점령하여 16세기 중반까지 지배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스웨덴의 침략으로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1710년 러시아 피오트르(Piotr) 대제가 발트해에 항구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합병시켰다. 이후로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발트 3국은 독립을 했다, 그리고 다시 1939년 독일과 소련의 협정으로 3개 공화국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50년 동안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독립을 위해 투쟁해 왔다. 주변 강대국에 시달려 온 세 나라의 운명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닮은 점이 있다. 이 세 나라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인간띠 노래’ 운동이 일어났다. 독일과 러시아가 비밀협약을 맺었던 날로부터 정확히 50년이 되는 1989년 8월 23일, 노래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남쪽에 있는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에서 시작하여 라트비아 리가를 거쳐 에스토니아 탈린에 이르는 620km의 200여만명이 인간띠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며 독립을 요구하였다.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이에서 나이 많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합창을 하였다. 이를 ‘인간띠 노래 혁명’이라고 한다. 이 저항운동은 다양한 시위로 4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에 전 세계가 이목을 집중했다. 마침내 소련은 이들의 독립 요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으니, 3국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시키게 되었다. 드디어 리투아니아는 1991년 3월 11일, 에스토니아는 8월 20일, 라트비아는 8월 21일 각각 독립을 하였다. 대부분의 혁명은 증오를 기반으로 한다. 증오는 보복을 부른다. 살인과 방화, 그리고 극단으로 치달은 증오는 다시 반혁명을 불러일으켜 급기야 전쟁으로 치닫기도 한다. 그러나 발트 3국은 피 한방울 안 흘리고 희망을 노래하며 평화적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발트 해 지역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으로 손꼽힌다. 특히 에스토니아에서는 유서 깊은 노래 축제를 매년 열어왔다. 이 잔치에는 전국의 에스토니아인은 물론 이웃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참여하고, 해외동포들도 찾아와 1주일간 노래의 향연을 벌였다. 1869년 에스토니아 타르투(Tartu)에서 시작된 축제는 민속의상을 입고 민요와 합창곡을 부르며 국가 화합을 도모하는 행사로 진행된 것이다. 이 축제에서 주로 부른 노래는 에스토니아 알로 마티센(Alo Mattiisen)이라는 음악가가 작곡한 다섯 곡의 애국가이다. 1988년 5월 타르투 민속음악제에서 발표한 곡으로 참가자들은 이 노래를 합창을 했다. 이 노래가 에스토니아는 물론 이웃 발트 국가에 퍼져나간 것이다. 이 ‘발트 3국의 인간띠 노래 혁명’은 우리에게 사사하는 바가 크다. 1910년 일제의 병탄이 있게 되자 이에 저항하여 제일 먼저 시위를 벌인 이들이 기독교인들이다. 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우리도 해외동포들이 아리랑 인간띠로 통일을 염원하는 문화혁명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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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우리 아리랑은?기미양 / 아리랑학회 이사 아리랑은 하나의 노래이며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의 노래이다. 아리랑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아리랑은 옛노래이면서 오늘의 노래이고 오늘의 노래이면서 옛노래이다. 아리랑은 신명풀이이면서 한풀이이고 한풀이이면서 신명의 노래이다. 아리랑은 우리의 노래이며 세계의 노래이고 세계의 노래이면서 우리의 노래이다. 아리랑은 이별·애수 정서인 恨의 수렴체(收斂體)로, 모순에 대한 저항의 발현체(發顯體)로, 좌우 상하 극단의 차단체(遮斷體)로, 고난과 역경에 대한 극복의지의 추동체(推動體)로 기능한 노래이다. 아리랑은 신명풀이를 동력으로 하는 노래문화의 정수이다.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아리랑 등재는 2011년 중국의 아리랑 자국 비물질문화유산 지정에 대한 반감에서 촉발되었다. 그 반감은 아리랑이 한반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역사성과 전국 자발적 전승단체의 현재적 향유와 전승 노력이 무시당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의제기였다. 그리고 이 등재는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아리랑’ 지정으로 이어졌다. 결국 인류문화유산과 국가무형문화재라는 두 가지 아리랑의 위상 확정에는 전국의 자발적 전승단체들의 노력이 전제되었다는 것이 된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심사에서 두 가지 가치가 제시되었다. 하나는 ‘아리랑은 부르는 공동체의 결속을 지속시켜주는데 기여하는 노래’라는 사실, 둘은 ‘아리랑은 한국인의 창조성을 입증시켜 주는 노래’라는 사실이다. 전자는 공동채의 내적 구조가 향유와 전승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하고, 후자는 전승이 답습만이 아닌 의미있는 창조적 계승의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문화재청 누리집 ‘아리랑’ 항목에 대한 해설의 주요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아리랑은 19세기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노래로서, 다양한 곡으로 변화하며 오늘날까지도 활발하게전승되고 있다.” ②"국가무형문화재 아리랑은 향토민요 또는 통속민요로 불리는 모든 아리랑계통 악곡을 지칭한다.” ③"아리랑 또는 그와 유사한 발음의 어휘가 들어 있는 후렴을 규칙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띄엄띄엄 부르는 한 무리의 노래이다.” ④"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여음(餘音)과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으로 발전해 온 두 줄의 가사로 구성되어 있다. ⑤"선율과 가창 방식에서 우리 민족의 보편적 음악성을 바탕으로 지역별 고유한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⑥"무형문화재로서의 역사성, 예술성, 학술성 등의 가치가 탁월하다.” ⑦"세대를 거쳐 재창조 되고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는 아리랑의 모습”을 주목한다. 이 번에는 2000년대 아리랑의 현재적 위상을 정리한 것이다. 관주도 사업이 중심이다. ① 2001년 유네스코, 제31차 총회 제1회 <ARIRANG PRIZE>를 제정, 시행 ② 2002년 북한, <대집단체조 및 예술공연아리랑>(아리랑축전) 개최, 남한, 월드컵 개최 거리 ‘아리랑응원’ ③ 2005년 문화재청, 정책자료집 접수 및 ‘아리랑 종합 전승실태 조사’ 실시 ④ 2006년 문화관광부, ‘100대 민족문화상징’에 아리랑 선정 ⑤ 2006년 강원도/아리랑연합회 공동 <DMZ아리랑훼스티벌> 개최 ⑥ 2008년 <뉴욕 필하모니오케스트라> 평화 주제 평양 아리랑 공연 ⑦ 2009년 문화관광부, ‘아리랑 세계화’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 개최 ⑧ 2012년 중국 국무원, ‘조선족 아리랑’ 자국 비물질유산 지정 ⑨ 2012년 12월 유네스코, 아리랑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⑩ 2012년 문화재청, <아리랑 종합발전 방안> 계획 수립 ⑪ 2014년 북한, 유네스코 아리랑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⑫ 2015년 문화재청, 아리랑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129호’지정 ⑬ 2016년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 ⑭ 2017~2019년 서울아리랑훼스티벌과 ‘경복궁아리랑鼓’ 개최 20여년 동안 전개된 아리랑 상황이다. 이 기록들은 2000년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이다. 그것은 국가기관의 주최 또는 주관으로 제도권에서 행해진 것이란 점이고, 거기에다 세계성을 띤 상황들이란 점이다. 곧 아리랑의 현재적 위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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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추천 휴일의 시 42: 생일날 아침 (구광렬)생일날 아침 구광렬(1956~) 원죄가 따로 없구나 못난 놈 낳으시고 어머니께서 드신 미역 값을 하는지 나만 믿고 졸졸 따르는 병아리 같은 자식놈들께 자신 없고 당신 없으면 못 산다는 속고 사는 아내에게 모두에게 죄 짓고 사니 생일날 아침은 왠지 쑥스럽고 미안하다 입속에 씹히는 미역 한 줄기에도 쑥스럽고 출근길 밟히는 잡풀하나에도 미안하다. 추천인: 기찬숙(벤처아리랑 운영자) "10여 년전 지인에게 받은 생일 선물 시이다. 화자가 남자이라서 그리 좋아하는 시는 아니지만 성찰과 자기 고백이 주제라서 때 되면 한 번씩 곱씹어보는 시이다. 아, 오늘 생일 맞은 사람. 이 시 선물로 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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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강원의병아리랑 춘천콘서트 '역사적 기억의 전승'‘21강원의병아리랑 춘천콘서트’가 19일 강원도 춘천시 의암공원 유인석 의병장 동상앞에서 오후 4시부터 한 시간 반 동안 진행됐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올해 첫 아리랑 공연행사로서 춘천시 공식적 야외공연이다.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기연옥 회장)가 주최했다. 지난 3월 민간 주도로 설립한 첫 아리랑전수관(관장:기연옥)이 많은 관심 속에 춘천 동면 월곡리에 문을 연 이후,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 첫 아리랑 공연이다. 춘천의 메카, 춘천의병아리랑 첫 무대는 춘천의병아리랑과 의병에 대한 의례와 추모를 주제로 했고, 두 번째 무대는 강원지역 토속민요와 다양한 아라리를 실연으로 펼쳤다. 특히 서백노인회로 구성된 서백민요회의 춘천논매는소리의 아라리는 향토민요의 정수를 맛보게 해주어서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향토민요가 갖는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귀한 무대이었다. 춘천처녀장사타령에는 초등학생 최서인과 최가인 두 자매가 출연하여 박수를 많이 받았다. 마지막 무대는 김종희 무용가가 특별출연하여 8명이 화관무를 추고, 강원도아리랑으로 막을 내렸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다양성을 선보였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는 바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이름없이 산화한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이루어진 대가라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강원도 최문순 도지사의 축사를 전하면서 행사 시작을 열었다. 기회장은 "오늘 공연은 매년 이루어지는 강원아리랑콘서트 순회공연인데 춘천 지역을 첫 번째로 정했다. 의암 선생의 의병정신으로 오늘의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싶다. 그리고 코로나19사태로 심신이 힘든 시민들을 위무해드리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해설을 맡은 아리랑학회 기찬숙 연구이사는 "의병아리랑에 담고 있는 저항정신, 즉 백성들이 외세의 억압에 대해 자발적으로 일어나 투쟁하는 의병정신이 현재는 코로나19라는 외적을 이기려는 시민들의 연대정신을 의병정신으로 승화시키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천민에서 왕족까지 전 계층이 봉기하여 나라의 주권과 자유를 위한 투쟁과 애국정신을 본받자”라고 행사의 의의를 부연했다. 이어 일제항쟁기 강원도 가평에서 정미의병을 취재한 영국 메켄지 기자가 남긴 사진 한 장을 소개하고, 이 사진 속에서 영롱한 눈빛을 뿜어내는 어린 의병들이 농기구를 들고 총을 든 일본군에 죽음을 무릎쓰고 맞서면서 "살아서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자유인으로 죽겠다”는 어린 의병들의 굳은 의지를 그는 세계만방에 전했다라고 소리 높여 강조했다. 오늘 공연의 서막은 이러한 의병정신을 소극 ‘함성. 춘천의병아리랑’ 무대에 투영하여 하늘을 향해 호국영령들께 뜨거운 보훈이 담긴 함성을 힘차게 올렸다. 이 무대는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창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경복궁아리랑 고유제 무대에서 선정작으로 뽑힌 작품이다. 관중석 시민들도 뜨거운 함성과 박수로 답해 주었다. 강원의병아리랑 춘천콘서트는 의병정신의 메카 춘천의 호국정신이 담긴 춘천의병아리랑을 소극으로 구성하여 지역민들에게 ‘역사적 기억의 전승’의 의미를 부여했다. 국내외에서 의병활동으로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1860~1935) 의사의 숭고한 의병정신을 기리는 안사람의병가를 아리랑으로 개사하여 지역민들과 공유하고, 이러한 의병정신을 지역민들에세 자긍심을 증진시키고자 한 행사이다 구한말 나라가 외세에 의해 위급에 처해 있을 때 전라도에서는 기우만과 기삼연, 경상도에서는 이강연, 강원도에서는 유인석 의병장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떨쳐 일어나 항일 투쟁을 했고, 특히 강원도 춘천의 여성의병장 윤희순은 안사람의병가를 지어 여자와 청년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현재 문서로 전해지는 의병들이 불렀던 아리랑은 문경과 함께 춘천에 전해지고 있다. 오늘의 공연은 전라도 기우만 의병장의 직손인 기연옥 명창이 중심이 된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의 공연이다. 소극 ‘함성! 춘천의병아리랑’에서 불린 춘천의병아리랑 사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춘천아 봉의산아 너 잘있거라 신연강 뱃머리가 하직일세 싸리재 아흔아홉구비 우리 복병 삼악산아 우리 군대를 보호해다오 의병 가문의 후손 기연옥 명창의 의병아리랑 전승활동 기회장은 기우만, 기삼연, 기산도 의병장의 가맥을 잇는 후손으로서 의병정신을 이어받아 전국 의병 유적지를 찾아서 의병가를 발굴하고. 학계와 시민들. 특히 해외 동포들에게 ‘역사적 기억의 전승, 의병아리랑’ 음반을 무상보급 해오고 있다. 춘천의병아리랑과 안사람의병아리랑. 춘천아라리의 중심인물로서 열연을 펼쳤다. 집안에서 전해지는 춘천의병아리랑을 강원도민에게 전하기 위해 2015년부터 강원도와 전국, 러시아 중국 등지 독립유적지에서 의병아리랑콘서트 순회공연을 펼치고 있다. 기회장은 매년 한겨레아리랑연합회와 사할린주한인협회가 공동개최하는 '한민족공동체실현을 위한 사할린 아리랑제'에서 춘천의병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다. 춘천의 의병정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2013년부터 성균관대학과 서강대학 대학생들을 초청하여 1박 2일동안 춘천의 유적지를 알려왔다. 또한 외국인 유학생들로 구성된 아리랑인스티튜트 서울지부 회원들을 초청하여 강원도 지역 아리랑과 춘천의병아리랑을 배워주고 춘천지역 의병유적지답사를 수행했다. 코로나가 진정되면 국내 거주하고 있는 러시아 및 사할린 청소년 어린이들을 초청하여 춘천 의병유적지답사를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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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은이성지 아리랑노래비를 찾아서(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은 아리랑학회가 주최한 경기지역 '아리랑고개'를 찾아가는 '아리랑답사'를 위해 길을 떠났다. 월간 잡지 ’길벗‘에 실린 ’천주교와 아리랑(기찬숙의 아리랑칼럼)‘을 읽고 나서, 필자에게 용인시 남곡리 아리랑고개에 대한 답사 안내 및 강연요청을 하고 회원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회장은 지난 주 가평아리랑답사에서 의병사에서 마지막 격전지 보납산(법업산)을 찾았다. 보납산은 남으로부터 쫓겨온 의병들이 이승에서 넘었던 마지막 고개, 아리랑고개인 것이다. 이번 주는 용인 지역 아리랑고개를 넘어갔다.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는 ‘은이(隱里) 성지’가 있다. 천주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목한 본당이며 순교 후 유체의 이장 경로이기도 하다. ‘은이’라는 지명은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 숨어 살던 신자들의 교우촌이었다. 은지성지 성지순례길은 총 15. 4km, 5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인데, 여기에는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믿음, 소망, 사랑을 뜻하는 ‘삼덕(三德)의 길’이라는 세개의 고갯길이 있다. 세 개의 덕(德)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하나는 신덕(信德)고개인 ‘별미 고개’, 둘은 망덕(望德)고개인 ‘해실이 고개’, 셋은 애덕(愛德)고개인 ‘거문정 고개’길을 말한다. 오늘에도 인적이 드믄 산길이 포함되어 있는데, ‘120 나무계단 길’과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 때 호랑이도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는 ‘기적의 길’도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신덕고개 ‘별미고개’에는 뜻밖에도 ‘아리랑’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천주교 초기에 아리랑이 신앙공동체에서도 불렸음을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 결속과 포교를 위해 민중의 노래에 신앙심을 얹어 불렀다고 본다. 이 비에 새겨진 가사가 당시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만한 유래를 담보했기에 비로 새겨졌다고 보게 된다. 아리랑노래비의 가사는 김진용 작사의 전체 8절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리랑 주님을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후렴구) 천진암 강악회 진리탐구/반만년 어둠속에 동이 트네 청천 하늘에 잔별도많고/천주교 이백년 박해도 많다 심한박해 모진고충 이겨내고/참된신앙 물려주신 순교자여 금자로 발길재는 천사를 보라/격려하며 순교의길 가신님이여 희광이칼 여덟번째 목숨바치고/천당영복 면류관을 쓰신님이여 순교유해 쌓고쌓여 주춧돌되고/순교선혈 흘러흘러 밑거름됐네 한알의 밀알이 이백년썩어/오백만의 열매가 주님찬미해 제1절에서는 상하 계층 없이 사방팔방의 모두가 알고 있는 아리랑의 대표사설을 통해 곡조를 제시했다. 2절은 광주 퇴촌의 천진암(天眞菴)에서의 강학회(1771년 자산 정약전 3형제와 만천 이승훈 등의 천주교리 연구모임) 사실을 말하여 천주교 역사를 제시했다. 3절은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네 차례의 박해를 통해 천주교의 수난사를 나타냈고, 4, 5절은 성스런 순교사를, 6~8절은 신앙 승리의 역사를 찬양했다. 이 가사 천체를 보면 3절과 8절에 ‘이백년’이 있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으로 작사하여 노래비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고, 천주교 신약성서 자체 번역본을 발행하였으니, 이 아리랑 작사도 그만큼 의미를 두어 비로 세운 것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굳은 신념이 뜨겁게 전해온다. 이회장과 회원들은 아리랑학회가 운영하는 아리랑학교에서 배포한 아리랑 가사를 사전에 받고 가창 연습을 해왔다. 1시간을 걸어서 가쁜 호흡으로 아리랑고개에 오르자. 경건하고 신성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르는 땀을 식혀주었다. 우선 목숨을 걸고 이 고개를 넘어갔던 순교자와 신도들을 위해서 술 한잔씩 부어서 올리고. 일동 묵념을 하였다. 전국에 곳곳에 있는 아리랑고개의 역사성과 은이성지 아리랑고개의 유래에 대한 짦은 해설이 끝나자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아리랑노래비에 새겨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하자 3절에서부터 모두 눈물이 쏟아져서 눈물의 아리랑 공간이 되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자들이 받았던 억압과 고난이 뜨겁게 전해진다. 이회장은 "코로나로 인해 5월 서울과 제주 지역 아리랑 행사가 취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참에 경기 서울지역 아리랑고개와 아리랑역사 유적지를 답사하고자 한다. 실제적 아리랑고개 '문경새재'에 이어서.......찾아와보니, 아리랑은 '고개의 노래'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무대에서 이러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해지도록 노력하겠다. 특히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은 역사의 노래이다. 부르는 이도 왜 아리랑을 불렀는지는 알고 불러야 한다라는 취지로 아리랑학회 아리랑고개답사에 동참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회장은 다음주 안성아리랑보존회가 주관하는 안성의 아리랑고개를 찾아가는 답사에도 함께 할 계획이다. 전국의 아리랑고개의 유래를 살피면 천주교와 관련된 곳은 아직까지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 역사와 아리랑은 어떻게 만났을까? 현재 밝혀진 아리랑 자료로는 1823년(道光 3년) 청석거사(靑石居士) 필사본 ‘佛說明堂아리랑’이란 기록물에서 1839년 천주교 기해박해 전후에 불렸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문헌자료는 민간신앙에서 수용한 일종의 무경(巫經)으로 "제석천황 관제멸 대범천황 오액명/아라리 사라리 아리사리 아리랑” 같은 사설에서 알 수 있듯이 수명과 복록을 기원하며 아리랑 후렴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아리랑의 보편성을 이용하여 무경의 보급을 용이하게 할 방편으로 수용한 것이다. 천주교 교인들도 우리의 전통 시가인 가사체(歌辭體)를 수용하여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교리를 전파했듯이, 민요 아리랑의 형식도 수용했을 것은 분명하다. 천주교인들이 불교 사찰인 천진암을 거점으로 한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통문화를 수용하여 교리전파에 활용하는 것은 포교의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초기 교회사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천주교 초기 인물 이승훈이 아리랑을 수용한 사실에서, 이는 초기 천주교 신앙공동체에서도 아리랑이 포교를 위해 향유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200년 기념으로 새로운 아리랑이 창작되어 비로 세워지게 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정조년간에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은 단순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점차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학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드디어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歸依)해 가게 하였다. 이 때 민중의 노래 아리랑도 향유되었다. 어떤 공동체에게도 아리랑은 결속력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획득하게 하는 노래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나 만날 수밖에 없는 노래인 것이다.(www.arirangs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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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추천 휴일의 시 32: 5월을 드립니다 ( 오광수)5월을 드립니다 오광수(1953~ ) 당신 가슴에 빨간 장미가 만발한 5월을 드립니다 5월엔 당신에게 좋은 일들이 생길 겁니다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자꾸 듭니다 당신에게 좋은 일들이 많이 많이 생겨나서 예쁘고 고른 하얀 이를 드러내며 얼굴 가득히 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당신 모습을 자주 보고 싶습니다 5월엔 당신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좋은 기분이 자꾸 듭니다 당신 가슴에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5월을 가득 드립니다 추천인:기찬숙(벤처아리랑 대표) "의병아리랑 답사차 가평을 오가며 싱그런 5월을 만끽했다. 문득 누군가에게 이 찬란한 오월 풍경을 전하고 싶어졌다. 오래 전 스크랩 해놓은 ‘5월을 드립니다’와 함께. 누군가 받아 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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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br>‘2005’의 아리랑<2><br> 6종의 서울경기아리랑2005년의 문화재청 ‘지역별 아리랑 전승실태 조사보고서’는 제도권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아리랑을 조사한 최초의 보고서다. 6개 권역의 아리랑은 국가적 전승 지원 대상이 된 것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서울경기 지역 아리랑 전승실태 기초조사’이다. 조사자는 김연갑(사단법인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이다. 이 조사는 서울경기 권역에 6가지 아리랑으로 규정을 하였다. 이는 당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들의 이수 대상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에 오늘의 시점으로는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다. 6개 아리랑은 본조아리랑/강원도아리랑/긴아리랑/한오백년/정선아리랑/구아리랑이다. 이 6종 아리랑의 음악적 특징은 경토리가 우세하고 메나리토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6종의 규정에 대한 이견은 첫 째는 ‘강원도아리랑’을 이 권역의 것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다. 다음은 ‘한오백년’의 문제이다. 전자는 소위 ‘잦은아라리’의 통속화 한 것을 전승지역의 아리랑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써, 오늘의 시각으로는 제외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토속 잦은아라리는 강원도 춘천과 강릉이 주전승지역이지만, 이것의 통속화 한 강원도아리랑은 이들 지역에서 전승되지도 않고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현실적 전승활동은 서울경기 지역 민요 전승주체들에 의해서 계승 되고 있다. 결국 문제는 토속 아라리와 이의 통속 아리랑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 보고서의 입장은 전승지역을 중심으로 삼은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후자 한오백년은 1940년대 초 음반화 되어 서울경기 지역 소리꾼들에게 널리 불리는 것으로, 곡조는 토속민요 긴아리랑과 같지만, 곡명에 ‘아리랑’이 없고 또한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이는 아리랑 범주의 특별한 인식으로 서양음악의 보편 시각에서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와 2014년 국가무형문화재 159호 등재를 계기로 곡명과 후렴의 존재 여부로 삼는 관점에 의해서다. 하여튼 이 6종을 범주화 한 것은 근본적으로는 현재적 전승지역과 전승주체를 중심으로 계승이 되는 실상에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계보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조사 대상자는 ‘12잡가’와 경기민요 전승계보, 즉 조기준 박춘경 장계춘 주몽신이란 구한말 명창들의 계보에서 형성된 제 1세대 보유자 안비취 이은주 묵계월의 계보를 중심으로 삼았다. 당시 보유자 이춘희 계보(이춘희 김혜란 이호연), 이은주 계보(김장순), 묵계월 계보(김영임)에서 총 6인을 대상으로 공통된 6개 곡명의 아리랑 현장 녹취와 전수 과정(음반 취입과 교재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이춘희 계보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당시 생존한 1세대 보유자 이은주 선생과 묵계월 선생은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활동이 적어지게 되면서 그 제자 1인을 대상으로 계보가 이어졌다. 이 때 조사된 악보는 서울경기 아리랑의 표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 부분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주목하였다. 첫 째, 전문 소리꾼들에 의해 형성되고 전수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이 결과로 서울 경기지역 향토성보다는 보편적인 세련미를 특장으로 하여 창민요라는 고정적 기능을 중심임을 밝혔다. 둘 째, 1926년 나운규 감독 영화 '아리랑' 주제가에서 출현한 ‘본조아리랑’은 모든 아리랑의 대표로 인식되어 있고, 이미 세계성을 띄고 있어 전승주체를 제한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제시하였다. 셋 째, 소위 ‘김옥심제정선아리랑’ 또는 ‘서울제정선아리랑’은 1940년대 말, 이창배와 김옥심이 작창한 것으로 예술성이 가장 뛰어난 일종의 창작아리랑이다. 이에 본조아리랑과 함께 성격상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조사 보고서는 최초의 실태 조사 결과라는 점과 제도권의 관심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활용성과 함께 아리랑 역사에서 주목을 해야 한다. 또한 이 보고서를 통해 서울경기 아리랑으로 6종을 규정한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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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지역 전통아리랑 전수 활성화 기대민간 주도로 설립한 첫 아리랑전수관이 3일 많은 관심 속에 춘천 동면 월곡리에 문을 열었다. 사단법인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이사장 기연옥)는 이날 동면 월곡리 산52번지에서 의병아리랑 전수관 개관식을 가졌다. 개관식에는 한기호 국회의원,고옥자·김경희·김진호·한중일 시의원, 최돈선 춘천문화재단 이사장, 윤용선 춘천문화원장, 이찬우 춘천시 문화예술과장, 김지숙 시의원, 김연갑 아리랑학교장 , 이종호 광복회 도지부장, 김진선 윤희순기념사업회장, 안중석 굿리더 아카데미 춘천권 총원우회장,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 등이 참석해 새로운 문화공간의 탄생을 축하했다. 강원도민일보 김중석 사장의 축하화환과 40여 기관 단체 지인들의 축하 화분과 화환이 답지했다. 한기호 국회의원의원은 "의병정신을 아리랑으로 승화시킨 공로를 인정받을 만하다”고 했고, 아리랑학교 김연갑 교장은 "기연옥 회장은 명분과 진정성에서 인정받는 명창”이라고 격려했다. 특별행사에서는 국내 최고 명인 소장 대금 증정식이 있었고, 임애심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 총무에게는 공로패 수여식도 있었다. 축하공연으로 대북 공연과 화관무 공연이 꾸며졌다. 기연옥 관장은 이번 전수관은 민간단체가 주도해 세운 첫 아리랑전수관으로 국악 인재 육성과 지역주민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 쓰일 예정이다. 또 이번 전수관 설립을 계기로 강원지역 토속아리랑에 집중적인 전승에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기연옥 이사장은 "의병아리랑전수관을 만드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는데 의병 가문과 많은 분들이 용기를 주시고 도와주셔서 제가 태어나고 자란 춘천 땅 동서남북에 4개 기둥을 박고 의병아리랑전수관 지붕을 올렸습니다. 눈물나도록 고맙고 감사합니다”며 "잊혀져 가는 전통문화예술 분야 발전에 더욱 힘을 기울여 후학들에게 우리의 소리와 아리랑정신를 전수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길로 이끌어 가도록 응원해 달라”고 말했다. 기연옥 관장은 의병장 기우만 직손으로서 춘천의병아리랑과 전국에서 불렸던 의병아리랑을 발굴하여 만든 아리랑음반을 국악계 및 학계와 해외동포사회에 널리 배포하고 알려오고 있다. 2014년부터 매년 국내외에서 강원아리랑 순회공연을 해오고 있다. 한편 기연옥 관장은 2012년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이후, 국내 외국인 유학생 및 성균관대학과 서강대학 대학생들을 초청하여 춘천의병아리랑 유적지를 알리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아리랑학회 기찬숙 연구이사는 "전국 무형문화유산 소리를 중심으로 한 전수관 중 민간주도로 설립된 곳은 처음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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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br>중국, 중국동포, ‘중국 속의 아리랑’기찬숙/아리랑학회 연구이사 아리랑 연표상 어느 해에나 아리랑으로 점철(點綴)되지 않는 해가 있을까마는 2005년의 아리랑은 벽두(劈頭)부터 시작되었다. 1월 19일자 국악신문에는 뜻밖의 아리랑 기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 국회의원의 인터뷰 중 세계적인 통신사 ‘AP통신’ 보도의 인용이란 설명과 함께 아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이 눈에 띄었다. "고유의 전통음악인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1위에 선정되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이 노래를 알 것이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작곡가들로 이루어진 ‘세계 아름다운 곡 선정대회’에서 82%라는 엄청난 지지를 받고 아리랑이 선정된 것이다. 선정과정 중에는 단 한명의 한국인도 없어 심사했던 이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이에 대해 ‘아리랑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나에게 깨우쳐줬다’, ‘듣는 도중 몇 번씩 흥이 났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감동적이다’라는 반응이었다. 이들 모두 처음 듣는 곡이었다고도 했다.” 이 기사는 화제를 낳았다. 이로부터 급기야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오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 순간, 아리랑연합회 김연갑선생의 ‘근거 없다’는 유권해석(有權解釋)으로 ‘가짜 뉴스’로 잠복되었다. 이렇게 필자에게 2005년은 이 가짜 AP통신 기사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정작 2005년의 중요한 아리랑 기억은 4월 중순 연변에서 전해 온 아리랑 소식이었다. 바로 연변 원로 음악가 안계련선생과 민속학자 김봉관선생의 ‘아리랑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찬동서’가 우리에게 전달 된 것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전해진 이 문건은 일견 우리가 이미 추진하는 것에 대해 찬동한다는 뜻이지만, 진의는 이 때 우리는 유네스코 등재를 생각을 하지 않던 것으로 중국이 먼저 등재할 수도 있으니 서두르라는 충고였다. 이 충고는 2012년 중국의 아리랑 국가 비물질문화유산 지정으로 현실화 되어 소동을 버린 바 있어 그 진정성을 확인하게 된 바 이다. 이 두 원로 동포 2세대의 고국 아리랑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은 우리에게 동포들의 세대차를 실감하게 하는 계기였다. 이를 통해 중국과 동포사회를 정확하고 더 깊게 이해해야 함을 절감했다.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탄생했다. 그러나 중국 내의 소수민족정책은 이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공동강령(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共同綱領)’이란 공산당의 발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정책은 다민족 국가는 자치제가 적합한 제도이며 보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였고, 자치제도는 공산당의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정책이며 기본정치제도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는 크게 두 단계로 나뉘는데, 첫 단계인 1922년부터 1935년까지는 소련의 영향을 받아 연방제가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다 1935년 중국공산당이 모택동을 핵심으로 한 영도기구를 설립하고 난 이후, 연방제는 민족정책 고려 대상에서 서서히 배제되었다. 소련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이유로 연방제 대신 민족구역자치제를 택해 1947년 내몽고자치구 건립을 둔 것이 그것이다. 주은래(周恩來)는 중국이 5천년의 역사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서로 교류하여 한 지역에 다민족이 혼거하는 상황을 강조하였다. 한(漢) 왕조 이후 중앙집권 전통이 지배적이었던 점과 20여년에 걸쳐 민족해방전쟁과 내전에서 한족과 소수민족들이 동지적인 혈연적 유대를 갖게 된 점을 들어 소련식 민족 간 자치가 아닌, 보다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민족 간 연합의 형태로 민족자치구를 두고자 했다. 이중에 조선족의 경우, 한족(漢族)을 포함한 기타 민족들과 함께 반제반봉건 투쟁과 국내 해방전쟁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시민권을 부여 받았다. 이로부터 건국 직전 중국 공산당이 조선민족에 부여한 정치적 지위는 중공연변지위(中共延邊地委) 서기 유준수(劉俊秀)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조국이 조선이라는 것을 승인하는 동시에 그들을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이며, 중국공민으로 일체의 권리를 향수할 수 있고 조선이 외적의 침략을 받을 때 조선공민의 신분으로 조선에 나가 전쟁에 뛰어들 수 있다” ‘조국이 조선’이란 북한을 말하는 제한성이 있긴 하지만 한반도를 조국으로 인정하여 이중국적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건설과 중국대륙의 승리가 보이면서, 유준수는 만주의 조선인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것은 조선족과 조교(조선교포)의 구별이다. 연변에 중국공민으로 등록된 자는 ‘조선족’으로 분류되며, 등록을 하지 않았거나, 1945년 이후 적절한 중국 공산당의 허가를 취득하지 않고 입국한 사람은 북한 국적으로 분류하여 ‘조교’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중, 호주(戶主)가 중국에 살고, 가족이 북한에 있는 경우 집이나 토지를 중국에서 소유한 자도 중국 공민권을 취득할 수 있다고 했다. 이후, 북한방문을 원하는 조선족은 중국정부의 허가를 취득해야 했으며, 중국인과 동일한 권리 의무를 행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한국전쟁으로 조선족이 동원(참전)되면서 실제적 시행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한국전쟁 기간과 전후 북한의 복구사업에 많은 조선족이 참여한 사실 등에서도 사실상의 이중국적이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57년에 이르러 중국정부는 지역적 개념을 사용하여, ‘산해관(山海關) 이북의 조선인을 조선족’으로, ‘이남의 조선인과 이후 중국에 들어온 사람을 조교’로 분류하기까지 특수한 상황은 유지되었다. 이에 앞서 1945년 9월 말, 이미 조선족의 국적문제를 주시해온 중공중앙동북국은 역사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조선인 상황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한족과 만찬가지로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한다고 인정하였다. 또한 동북민주연합군사령부 사령 겸 길림성정부 주석 주보중은 "화북지구 항련(抗日聯軍)에 참가한 조선의용군을 제외하고 동북의 조선주민은 일반적으로 중국 경내의 소수민족으로 보는”것으로 조선족의 소수민족 지위를 인정하였다. 이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 정치적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현재 조선족자치구역은 조선족자치주 1개, 자치현 1개, 자치향진(민족연합진을 포함) 43개가 있다. 그 외, 조선족촌이 1000여개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국가보다 공산당이 먼저 창립하고 이를 통해 국가를 건립하였음으로 당을 우선시 한다는 특수 상황에서, 정치체는 이미 공산당 선립기인 1920년대 초로부터 확립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1930년대 화북지구 항련(抗日聯軍)에 참가한 조선의용군과 북한 정권 수립 구성원들과 연관을 갖게 되어 남한과는 다른 긴밀성을 갖게 되는 배경이 된다. 결국 구체적으로는 북한이지만 한반도를 고국으로 인식한 동포사회 구성원은 이 역사를 살아 온 소위 동포 1세대들이다. 바로 이 2세들 중 민족성 내지는 고국의 민속과 음악을 이해하여 그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안계련과 김봉관 선생이다. 1946년 연변에서 개최된 3.1절 행사에 ‘아리랑七景’ 같은 민족정서가 담긴 연극작품을 체험하고 자란 이들이다. 2005년의 ‘아리랑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찬동서’가 아니었다면, 이를 계기로 이 분들과 인식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2012년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도 중국에 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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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이 추천하는 휴일의 시 22: 앵오리 (김춘수)앵오리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잠자리를 앵오리라고 한다. 부채를 부치라고 하고 고추를 고치라고 한다.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통영을 토영이라고 한다. 팔을 폴이라고 하고 팥을 퐅이라고 한다. 코를 케라고 한다.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명게를 우렁싱이라고 하고 똥구멍을 미자발이라고 한다. 우리 외할머니께서 통영을 퇴영이라고 하셨고 동경을 딩경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까치는 까치라 하셨고 깩 깩 운다고 하셨다. 그러나 남망산은 난방산이라고 하셨다. 우리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내 또래 외삼촌이 오매 오매 하고 부른 것을 나는 보았다. 추천인:기찬숙(아리랑학회 이사) "아름다운 통영 사투리 시 ‘앵오리’를 비로소 통영에서 만났다. 그리고 알록달록 이국적인 ‘동쪽 벼랑’ 동피랑 언덕에서 벽서(壁書)도 만났다. 벽서는 사투리여야 통한다나? -기림을 온 베르빡에 기리노이 볼끼 새빘네!-그 밑에 풀이가 있다. -그림을 온통 벽에 그려놓으니 볼 것이 많네!- 봄날, 도다리 쑥국 맛 보다 더 도드라진 맛이 통영 사투리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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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br>다시 읽는 'Song of Ariran'(1)금년은 아리랑에 관한 책으로 매우 의미있는 ‘Song of Arirang’이 간행된지 80년을 맞는 해이다. 아리랑 역사의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아리랑’을 표제로 한 책은 10여종에 이른다. 1945년까지의 상황으로는 1930년대 초 창가집류가 5종으로 ‘映畵名曲아리랑唱歌’(1930), ‘아리랑民謠集’(1930), ‘現代映畵아리랑唱歌集’(1931), ‘아리랑民謠集’(1931), ‘현대유행신아리랑창가(’1932)가 있고, 1935년 이후 일본어 표기 의 ‘朝鮮民謠アリラン’(1935년 김지연)과 소설 ‘ありらん峠’(1938년 김문집)가 있다. 그리고 영어로 쓰여진 ‘Song of Arirang’이 있다. 이중에 마지막의 영어로 쓰여진 것은 1941년 의외의 미국에서, 의외의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스(Nym Wales. 본명:Helen Foster Snow, 1907~1997)가 조선인 김상의 생애를 전기체로 쓴 책이다. 창가책 5종은 (사)아리랑연합회 소장자료로 서지사항이 밝혀졌고, 일본어 표기 중 김지연의 ‘朝鮮民謠アリラン’에 대해서는 필자의 연구논문이 있고, 김문집의 단편집 ‘ありらん峠’ 역시 최근 연구논문(동의대 신용주)이 발표되어있다. 그러나 ‘Song of Arirang’에 대해서는 그 유명세에 비해 서평에 머무르는 듯하다. 필자는 학부 졸업논문으로 ‘Song of Arirang’ 소재 아리랑 연구‘를 제출하면서 이 책을 탐독했다. 2001년 스터디 모임 ‘아리랑아카데미’에서 백선기(소설가 김팔봉의 서랑)선생과 김연갑선생으로부터 님 웨일즈 방문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주인공 김산(1905~1938)의 아들 고영광 선생을 초청, 부친의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식 참석을 도운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그동안 책을 통해 풀지 못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예컨대 저자 님 웨일즈가 노벨상에 두 번(1981~2)이나 노미네이트(nominate)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Song of Arirang'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인지의 여부였다. 결과는 중국 속의 조선인 항일투쟁가들을 기록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했다는 평가로 문학상이 아닌 평화상의 후보지명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님 웨일즈는 김산에 대해 단순한 취재원이었을 뿐인가라는 의문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갖고 있는 의문이었을 것인데, 직접 만난 두 분과 고영광선생의 증언으로는 3개월 간 22회의 ‘밀회 같은 인터뷰’이었을 뿐이고, 고매한 열정의 혁명가를 격려하는 관계였을 뿐, 연인 관계까지 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1938년 10월 19일, 중국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康生)의 명령으로 처형되었을 때, 그 죄목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다. 이는 아들 고영광에 의한 복권(1983년) 신청과 심사 과정에서 밝혀졌는데, ‘반혁명죄와 간첩죄’였다. 즉, 트로츠키(Leon Davidovich Trotsky)파라는 이유와 일본 경찰에서 큰 고초 없이 풀려난 것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간첩죄로 몰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복권 심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공산당 문서에서는 "변명하지 않는 미련한 자”란 기록과 일본 기록에는 "결코 변절하지 않을 놈”이란 기록이 나와 결국 무협의로 복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 일본의 이회성 작가나 중국의 고영광 등에 의해 자료가 발굴되면서 해결되었으나, 정작 ‘아리랑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아리랑 문제’란 김산이란 인물 연구와 Song of Arirang이란 텍스트 연구의 근본 문제인데, 결정적으로 과연 김산은 언제, 어떤 계기에 아리랑을 접하고, 가슴으로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다. 혁명에 대한 신념만큼이나 돋보이는 아리랑에 대한 명징한 표현들은 단순한 이해 정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소운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서평이나 김산을 언급하는 이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에는 "님 웨일스라는 탁월한 기록자가 연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장지락(김산의 본명)은 그의 다른 무수한 동지들처럼 홍진에 묻혀 사라졌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무수한 동지들’ 중에 이토록 아리랑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인물은 오직 김산 한 사람뿐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유난히도 높고 깊은 고개를 넘고 넘은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3.1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3일간 구류 처분을 계기로 도일하였다. 1922년 상해로 가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하고,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6년 ‘혁명동맹’ 편집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했다. 1927년에는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맡으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교사로 생활했다. 1933년 4월 중국 국민당 경찰에 붙잡혀 다음해 탈출하였다. 이후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님웨일즈를 만날 때까지의 이 굴곡진 역정을 김산 말고 산 이가 또 있는가. 분명 이 파란의 과정에서 김산은 아리랑을 접하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계기는 언제, 어디서였을까?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 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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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br> 트로트 열풍과 ‘엄마 아리랑’ 탄생"미스트롯2 최고 시청률 29.9%”, "눈물과 감동 가득 담긴, 크리스마스의 선물!”, "반전과 이변의 대서사시를 썼다”, "TV **원조 트롯 오디션 ‘미스트롯2” 어제 한 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이것만으로도 트로트의 열풍, ‘핵 돌풍급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이에 영향을 받아 더 많은 매체가 유사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시행한다고 전했다. 이미 모방송국은 ‘트로트의 민족’이란 타이틀로, 또 다른 방송국에서는 ‘트로트 파이터’로 정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은 2019년 2월부터 5월까지 TV조선에서 방송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트롯’ 성공에 따른 후속 프로그램인데, 이번 시청율이 지난 회를 능가했음을 상찬한 것이다. 필자는 ‘미스트롯2’를 지켜보면서 오디션 스타 탄생에서도 감동을 받았지만 의외로 많은 것을 생각하는 계기였다. 우리 국악계를 돌아보게 된 것인데, 우선 서바이벌 오디션 방식의 장점을 확인했다. 상대평가로 진출 여부를 판정받는 서바이벌식은 모두를 가슴 조이게 하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식이다. 감동을 더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김연자씨가 18세 때인 1970년대 참가했다며 회고하는 ‘TBS가요경연대회’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또 하나는 품위와 논리를 갖춘 탄탄한 심사위원들의 존재이다. 이들은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여유로움과 인기있는 가수라는 자부심이 가득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가수들은 베테랑의 감각으로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작곡가와 프로듀서 출신들은 음악적 논리로 경연자 하나하나에 맞춤형 평가를 해주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우리 국악경연대회가 이를 벤치마킹(Benchmarking)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국악을 익힌 이들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부의 주장처럼 ‘꺾고 휘감는 창법’이 국악에서 간 것이란 주장을 주목해서가 아니라 우선 듣기에도 경기민요의 묘한 맛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앞으로 이에 대해 국악계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네 번째는 기존의 기라성 같은 트롯 가수들조차도 입을 벌리게 하는 예능감을 지닌 이름 없는 가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악계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만일 이런 이들이 있었다면 국악계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들이 트롯계로 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기 이번에 얻은 큰 수확이 또 하나 따로 있다. 트롯 아리랑인 ‘엄마 아리랑’의 부상이다. 1990년 한돌 작곡의 서유석 노래 ‘홀로아리랑’과 2002년 월드컵대회 기념가 이경애 작사 조용필 작곡의 ‘꿈의 아리랑’ 이후는 그리 뚜렷한 창작 아리랑이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엄마아리랑’의 부상은 주목할만한 하기 때문이다. 18일 있었던 제1회 경연에서 홍지윤이 불렀다. ‘올 하트’를 받아 본선에 진출했다. 서정적인 가사에 넘실거리는 듯한 후렴의 선율과 리듬이 묘한 감흥을 주었다. 특히 후렴에서 "사랑 음~ 사랑 음~”이란 매력적인 부분이 진도아리랑의 후렴 "응~응~응~아라리가 낳네”를 연상시켜 바로 안겨들었다. 지난 4월 ‘2020 풍류 달빛공연’에서 국악신동 김태연이 불러 격찬을 받기도 한 곡인데, 원곡자는 역시 진도 출신 '미스트롯' 1대 진(眞) 송가인(조은심)이다. 엄마아리랑 엄마아리랑 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요 아들딸아 잘되거라 밤낮으로 기도한다 엄마 아리랑 사랑하는 내 아가야 보고싶다 우리 아가 천년만년 지지 않는 꽃이 피는구나 아 리 랑 아 리 랑 사랑 음 사랑 음 엄마 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요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우리 엄마 사랑은 아리랑 엄마 아리랑 엄마아리랑 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요 우리 엄마 무병장수 정성으로 기원하오 엄마 아리랑 사랑하는 내 어머니 보고싶소 울 어머니 서산마루 해가 지고 달이 뜨는구나 아 리 랑 아 리 랑 사랑 음 사랑 음 엄마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요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우리 엄마 사랑은 아리랑 엄마 아리랑 아 리 랑 아 리 랑 사랑 음 사랑 음 엄마 엄마 우리 어머니 아 리 랑 (에야디야 에헤라디야디야 에야디야 에헤라디야디야 에야디야 에헤라디야디야) 엄마 아리랑 지난해 11월 발매된 송가인의 첫 정규 앨범의 타이틀 곡이다. 자주 송가인의 진도아리랑을 듣고 감흥을 받은 윤명선이 작사/작곡을 했고, 박현빈의 ‘샤방샤방’을 쓴 작곡가 김지환과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를 쓴 작사가 이건우 등이 음반 프로듀싱에 참가해 완성시킨 곡이라고 한다. 송가인은 "(그동안) 느리고 슬픈 노래, 절절한 것들을 불렀다. 트로트가 접목된 신나는 곡을 불러보고 싶었다"며 타이틀 곡으로 취입했다고 한다. 국악 리듬의 슬픈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당연히 진도의 육자배기조 신명과 스승 강송대의 힘있는 성음을 닮은 송가인으로서는 구슬픈 보컬의 강점을 적절하게 발휘한 곡이다. 국악과 트로트가 만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요 ‘엄마 아리랑(SONG GA IN - Mom Arirang)’을 탄생시킨 것이다. ‘엄마 아리랑’은 송가인의 강점인 국악 정서를 극대화시킨 개인적 음악성으로 성가를 얻은 곡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배경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된 진도씻김굿 전수교육 조교이자 무속인인 어머니 송순단의 ‘엄마 덕’과 지난해 ‘내일은 미스트롯’이란 방송 오디션 프로그램의 존재와 그에 의한 본인의 성공이다. 그리고 각 시대의 이슈를 수용하는 아리랑의 소재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유네스코가 인정한 아리랑의 가치 "다양한 사회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 되는 노래임을 ‘엄마 아리랑’이 입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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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이 추천하는 휴일의 시 11 : 눈 (윤동주)눈 윤동주(1917~1945) 지난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진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추천인:황정수(세종시 한누리국악원 원장) "그제 어딘가에 첫눈이 왔단다. 아마 그 곳은 추웠나 보다. 이제 내 사는 곳도 추워지겠네. 그러면 나는 포근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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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br>만약에 아리랑~기찬숙/아리랑학회 이사 우리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국책 토목공사는 경복궁 중수 7년(1865~1872) 공사이다. 이 공사에는 조선 최대의 규모만큼이나 최대의 연인원이 강제동원되었다. 조대비(효명세자비)와 대원위(대원군)의 명에 의해 부역민(負役民), 모집된 잡역인, 여러 분야의 공장(工匠)들이 전국에서 올라 왔다. 부역민과 이들을 관리하는 중앙 및 지방의 관리(官吏) 구조는 지배자의 억압에 맞서는 피지배자의 갈등과 저항을 야기했다. 그리고 공사장 인근의 여숙, 식당, 주막에는 전국에서 몰려 온 장사치와 전문예인집단이 모이고 흩어지는 경복궁 중수 공간은 문화가 교류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경복궁 중수기간 7년은 아리랑 연구에서 중요한 국면으로 거론된다. 소위 ‘아리랑 발생설(發生說)’이나 ‘아라리/아리랑 전이설(轉移說)’이나 ‘아리랑 확산설(擴散說)’이 모두 이 공사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발생설은 중수 공사 기간에 아리랑이 형성 또는 발생했다는 주장이고, 변이설은 기존의 토속민요 ‘아라리’가 비로소 후렴구가 붙은 통속민요 ‘아리랑’으로 전이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확산설은 이미 지역에서 불러 온 토속민요 아리랑이 공사장에서 불렸고, 이를 부역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확산시키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어떤 설이든 아리랑 역사에서는 중요한 상황의 국면인 것이 분명하다. 박태원의 단편소설 '太平聖代'(京鄕新聞/1946)에서 경복궁 중수 기간 어느 오후 무렵, 노역이 고된만큼이나 공사장 밖의 저녁은 소리와 춤의 난장판이다. 광화문통 사정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둥! 둥! 둥! 두리 둥둥! 북소리 장고 소리 호적은 니나니 나팔은 뛰- 뛰-....황토마루(黃土峴) 넓으디 넓은 길에 놀이가 사뭇 짱하다. 쫓아가 보니 다른 게 아니라 신시(申時)가 지났으며 오늘 하루 역사가 파하고 지금 부역군들이 떼를 지어 대궐에서 물러 나온 것이었다. 물러 나온 부역군, 모여든 구경꾼으로 넓으디 넓은 황토 마루 큰 길이 송곳 하나 꽂을 틈 없이 빽빽한데 청 황 적 백 흑 오 색채 기(旗)는 바람에 나붓기고 호적과 나팔은 유량히 울이며 무동은 춤추고 여령(女伶)은 소리한다.” 19세기 중반 이런 난장판 7년 상황은 필연적으로 노래가 형성되거나, 전이가 되어 확산될 수 있었다. 장정들이 공사장에서 힘을 썼으니 고됨을 덜기 위해, 고향에 두고온 가족을 그리는 향수를 달래기 위해서 노래는 필연적 조건에서 창출되었을 것이다. 타 지역 부역인이 부르는 노래를 모두가 함께 부르고 향유하는 과정에서 지역적 변이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귀향 부역인들에 의해 다시 전 지역으로 전파 및 확산되었을 것이다. 이 정황에서 세 가지 아리랑 상황(창출-변이-전파)은 영락없이 들어맞는다. 결국 아리랑은 경복궁 중수 공사기간 7년의 시간적/공간적 상황이 만들어 낸 필연적 문화변용(Acculturation)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가설을 할 수 있다. 경복궁 중수 시기가 35년 정도 앞당겨져 1830년 이전에 시작되었다면 아리랑 상황도 그만큼 앞당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기록도 존재할 수 있다는 기대다. 이런 상상은 이 시기 문예군주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의 존재 때문이다. 조선의 제23대 국왕 순조의 하나 뿐인 아들(세자)이자, 제24대 국왕 헌종의 아버지이며, 대한제국 고종 황제 때 1대조인 양아버지로서 묘호가 조(祖)로 격상되어 황제로 추존 된 인물 효명세자는 지난해 6월 고궁박물관에서 ‘문예군주를 꿈 꾼 왕세자 효명세자 특별전’으로 부활했다. 특히 금년 11월 12일 국립국악원에서 192년 전 ‘춘앵전’과 ‘무산향’이란 무용작품 창제자로 현현(顯現)한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代理廳政) 3년을 맞는 1830년에 실권을 잡고 대대적인 경복궁 중건을 계획하였다. 뿐만 아니라 400여제의 시를 지어 열성어제(列聖御製) 최다 작품을 수록했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제작을 주도했고, 칼춤(劒武)용 무용칼을 개발하기도 했다. 특히 26편의 궁중정제(宮中呈才)를 창제하여 무용사의 주목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대리청정 3년 3개월, 짧은 22년의 생애에 남긴 문예(文藝) 업적이다. 이런 효명세자가 경복궁을 중건했다면, 아리랑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아리랑 국면이 35년이나 앞서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당대에 아리랑 상황이 기록되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아리랑을 주제로 한 정제도 창제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오는 12일, 192년 만에 정재무용 ‘아리랑’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에, 효명세자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아리랑 국면은 더욱 역사적이고, 더욱 풍모가 있는 노래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상상으로 12일, ‘철학을 담은 효명세자의 궁중무용’을 보러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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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br> 아리랑문화의 남상(濫觴)기찬숙/아리랑학회 이사 94년 전인 1926년 10월 1일 오후 4시부터 5시 10분까지 서울 종로 3가 극장 단성사에서는 ‘아리랑’이 여섯 번이나 불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영진이 두 명의 순사에 의해 포승줄에 묶여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관객 모두가 일어서서 눈물로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그 순간 단성사 악대의 반주에 의해 아리랑을 부른 가수는 유경이(劉慶伊)이다. 당시 나운규 감독의 영화<아리랑> 개봉 당일의 상황이다. 단성사에서의 개봉상연은 단 3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서울 지역 극장의 재상연을 거듭하여 전국에 확산되었고, 이미 소문에 의해 알려진 주제가 아리랑은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영화<아리랑>을 끌어들이는 자장력(磁場力)을 발휘했다. 1926년 단성사에서 영화<아리랑>의 개봉으로부터 흥행 상황은 1929년을 정점으로 자장력을 형성하고 문화 유전형질 ‘아리랑’밈(Meme)을 확산시켰다. 이 밈은 문학은 물론 연극, 무용 같은 무대공연 부야로 증식 되어갔다. 그동안 ‘아리랑’ 밈의 증식 사례를 1929년 박진 연출 연극<아리랑>으로 꼽았다. 그러나 최근 사료의 발굴로 1927년 11월 발표된 시 <아리랑>이 확인되면서 서열이 뒤집혔다. 개봉 1년후 문학 분야에서 아리랑의 의미를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을 알게 된 것이다. 시 <아리랑>은 1927년 11월 『문우』 제5호에 발표되었다. 이 『문우』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재학 조선인들의 모임인 ‘문우회’에서 발간한 잡지이다. 이 모임의 회칙에 의하면 "本會는 朝鮮文藝의 硏究 及 獎勵를 目的으로하고, 京城帝國大學 豫科 內에 置하고, 目的을 達하기 爲하여 每學期 一回式 朝鮮文藝雜誌를 發刊함”이라고 밝히는 동시에 『문우』를 ‘조선문예잡지’라고 규정했다. 곧 교지나 학습지가 아닌 문학지로 자임한 것이다. 이 문예지의 필자들은 자신의 작품이 조선문예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제국대학의 학생이자 식민지 조선의 선구적 지식인이라는 위치에 있고, 변방인 조선인으로서 갖는 자의식과, ‘제국대학’의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갖는 ‘교양인’, ‘세계인’으로서의 감각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전문 작가와 학생의 위치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기도 하다. 제 5호에 수필, 시, 소설, 논평을 발표한 유기춘-유진오-고유섭-한재경-민태식-정종실-노병운-한용균-이병일-최재서-신남철-이효석-김봉진-조용만-김종무-조규선-원흥균 그리고 근원 같은 이들의 이후 행적에서 확인된다. 다음 근원(槿園)의 시 ‘아리랑’도 이런 성격과 수준의 작품이다. <아리랑> 마을 닭의 첫 소래에 놀래 깨어 아침이슬을 밟으면서 들을 지나 언덕을 넘어 굽은 산길을 올라가는 초부樵夫! 손에 든 작때기로 어깨에 매인 지게를 치며 깊은 산에 울리는 아리랑의 노래 피와 같은 늙은 낙일落日은 넘어가고 회색灰色의 장막帳幕으로 변하여 가는 넓은 들에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초부樵夫! 피곤한 몸을 질질 끌면서 없는 기운을 억지로 내어 허공에 우렁차게 울리는 아리랑의 노래 아침에 노동할 힘을 주고 저녁에 피로를 회복식히는 미묘한 농촌의 고운 노래! 도회의 우울을 멀리 떠나서 한폭의 그림같은 자연미와 함께 아리랑의 노래 3연의 자유시다. 시적 긴장감은 부족하지만 아리랑을 농촌의 초부나 도회 노동자의 우렁찬 노래로 해석한 것은 소중하다. 특히 ‘아리랑’ 이라는 작품 표제가 주목이 된다. 이를 통해 '아리랑 밈'의 자기 복제 1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지식인들에게 아리랑 밈의 복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시가 문학 아리랑, 나아가 오늘의 광대한 아리랑문화의 남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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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br> 영화<아리랑>과 아리랑문화기찬숙/아리랑학회 이사 자기복제로 세대를 이어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생물학적 존재를 DNA이라 한다면, 하나의 완성된 정보(지식/문화)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말과 문자를 매개로 보존, 전파되는 것을 밈(Meme)이라고 한다. 밈은 유전자와 매우 비슷한 성격을 지니는데, 아리랑이란 곡을 예를 들면, 미상의 작자가 만들고, 작자는 같은 동네 친구에게 이 곡을 들려줌으로서 아리랑은 친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복제하였다. 그 친구는 주위 사람들에게 곡을 들려줌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이란 곡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아리랑이란 곡을 만든 작자와 친구가 사망한다고 하더라도 아리랑이란 노래는 사라지지 않는다. 세대를 뛰어 넘어 자기를 보전하는데 성공하였다는 뜻이다. 게다가 밈은 돌연변이(突然變異)도 일으킨다. 이 곡을 들은 밀양에 사는 친척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그 곡을 전하는데 그만 완벽하게 기억을 해내지를 못한다. 스스로 기억나지 않는 부분을 보완해서 밀양아리랑이란 제목으로 자기 동네사람들에게 전파한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이와 같이 밈이란 DNA와 같이 새로운 개념의 문화 자기복제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의 아리랑 밈에 대한 설명은 매우 제한적이다. 즉 민요 또는 노래로서의 아리랑만을 한정한 것이기 때문인데, ‘아리랑문화’의 밈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리랑문화’의 개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노래 아리랑은 1926년 영화<아리랑> 개봉과 그 흥행의 여파로 전 문화예술 장르로 확산되는 계기를 맞았다. 영화<아리랑>의 자장력(磁場力)에 의해 아리랑에 대한 특정한 사고방식이 형성될 수 있었다. 노래 아리랑뿐만 아니라 전 장르의 문화 공유로 형성된 정서(情緖) 통합체 아리랑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화(文化)란 한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독특한 생활양식을 의미하며 사회 구성원들이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공유하고 있는 행동 양식과 사고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은 유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습득하고 전달받아 기층화 되고 누적된 현상이다. 그 결과 '습득된 행동'을 비롯해서 '마음 속의 관념', '논리적인 구성', '통계적으로 만들어진 것', '심리적인 방어기제' 같은 것이 바로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다만 문화는 '구체적인 행동으로부터의 추상이고 그 자체가 행동은 아니다'(레슬리 A. 화이트, 「문화의 개념/The Concept of Culture」, 1973,)라는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우리의 <대한민국 문화기본법> 제3조에서는 문화를 매우 집약적으로 정의하게 되었다. 즉, 문화예술, 생활양식, 공동체적 삶의 방식, 가치 체계, 전통 및 신념 등을 포함하는 사회나 사회 구성원의 고유한 정신적·물질적·지적·감성적 특성의 총체라고 했다. 이런 정의에 기댄 ‘아리랑문화’에 대한 규정은 ‘감성적 특성’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리랑은 민중적 비애와 한(恨)의 정조(情調)를 수렴한다. 동시에 권력에 대한 저항적 민중의지를 발현한다. 그리고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는 미래 의식의 추동체이기도 하다. 이 감성적 특성의 총체가 아리랑문화이다. 이는 노래 아리랑의 정서만으로 축적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전 분야 장르에서의 아리랑 주제화나 소재화로 형성한 정서인 것이다. 예를 들면 1926년 이후 1960년대까지 개봉된 9편의 ‘아리랑’ 표제 영화<아리랑>의 존재이다. 동시에 수많은 장르로 확대되어 정서를 적층시켰다. 1929년 막을 올린 연극<아리랑고개> 이후 10여편, 1927년 시 <아리랑> 이후 문학작품 30여편, 1928년 이후 무용<아리랑> 이후 30여편, 1929년 유행가 <아리랑 우지마라> 같은 유행가 20여편, 1934년 음반 <진도아리랑> 외 창작아리랑 5편 발매, 1931년 카페 <아리랑>과 1939년 <아리랑배> 같은 상호와 상품명이 50여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활문화, 심지어는 해외 동포사회에도 확장, 전승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아리랑문화는 적층을 이루는 문화이면서, 이를 기반으로 다시 자기증식으로 진화하는 문화이다. 이러함에서 아리랑문화의 밈은 단적으로 말하면 ‘아리랑고개’이다. 이 ‘아리랑고개’라는 열쇄말은 앞에서 열거한 전 장르의 작품 표제에 함축된 것이고, 이를 정서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열쇄말은 어디에서 출현하여 ‘감성적 특성’의 문화, 아리랑문화 형질을 촉진시킨 것인가를 묻게 된다. 그런데 이의 해답은 이미 위에서 제시하였다. 돌연변이라는 진화의 단서가 바로 최초의 타 장르화인 1926년 영화<아리랑> 개봉이다. 이 영화<아리랑> 이후의 현상을 "나운규와 영화<아리랑>의 역사적 무게가 노래 장르의 법칙을 압도한 결과”(김연갑, "메아리 원형 가능성 고찰”, 한국민요학회, 1986년)로 표현했듯이 아리랑의 자장력(磁場力)은 공시적 통시적으로 확장되어진다. 이 자장력이 오늘의 메타데이터Meta Date) 아리랑을, 메타인지(Meta Cognition)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아리랑문화는 노래 아리랑의 인지 과정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발견하고 관찰하는 정신 작용을 수반하는 대상인 것이다. 지난 10월 1일은 1926년 영화<아리랑>이 개봉된 역사적 날이다. 동시에 제8회 ‘아리랑의 날’이다. 세계를 멈추게 하는 펜데믹 코로나19에 묻히고, 추석에 밀려 잊고 지냈다. 아리랑의 저항성과 남성성을 부여한 감독 나운규와 전 장르로의 확산을 촉발시킨 영화<아리랑>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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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정보의 메카 국악신문’ 재창간, 인터넷 국악신문새로운 도약, 재창간 인사 안녕하십니까. 국악신문입니다. 그동안 국악신문은 4반세기 국악계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1994년 9월 7일, ‘놀이문화’라는 제호로 창간, 금년 26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에 새로운 도약을 위해 주간 지면신문에서 인터넷 신문으로 전환, 재창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급격한 사회변화와 랜선 시대를 맞아 더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독자분들께 보고 드립니다. ‘전통문화 정보의 메카 국악신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재창간을 기념하여 의미 있는 특집을 다음과 같이 준비하였습니다. 특집기사는 1. ‘국악신문이 걸어 온길(특집부)’ 2. ‘한러수교 30주년 기념, 고려인 30인전’(특집부)입니다. 기획연재는 1. ‘한악(국악)계의 별들’(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명희) 2. 장편소설 ‘난계 박연-흙의 소리’(이동희 작/이무성 화백 작화) 3.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노래 사설’(한국서학회 한얼 이종선) 4. ‘정창관의 새 음반 소개’(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정창관) 5. ‘박대헌의 고서이야기’(완주책박물관 관장 박대헌) 6. 칼럼 ‘아리랑의 세계’(아리랑학회 이사 기찬숙)입니다. 7 국악인이 추천하는 시 뜻 깊은 국악콘텐츠를 전해드리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특별행사는 북한 개별여행 관련 여론조사입니다. ‘금강산타령’이나 ‘몽금포타령’ 같은 국악 작품 소재지 답사를 목적으로 국악인들의 주체적인 남북교류 열망을 실행하기 위한 사전 준비입니다. 추후 진행 될 개별여행은 당국 간의 <신변안전 각서> 교환 하에 30여명 단위의 답사입니다.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당국과의 협의 하에 확정, 본보를 통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재창간을 통한 새로운 도약, 독자 여러분의 호응과 질책을 기대합니다. 온 가족의 건강을 기원드립니다. 2020. 09. 03 국악신문 사장 김지연 외 직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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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그래서, 문경새재아리랑은!그래서, 문경새재아리랑은! 기찬숙 아리랑학회 이사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또한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오늘의 것이면서 옛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리랑은 전형적인 메타문화 (Meta Culture)이다. 아리랑은 중층적 유기체이다. 이미 있었던 것이 새로운 것을 있게 하고, 새로운 것이 이미 있었던 것을 다시 새롭게 한다. 그래서 동시적이고 역동적인 선후 관계의 양상을 띄며 변화와 지속이 이루어지며 계속 재생산 된다. 그래서 아리랑은 ‘자기복제에 의한 증식’ 프렉탈 이론의 실체이다. 아리랑은 모순적 복합성, 표면과 이면의 주제가 다른 양가성을 갖는다. 또한 보편성과 특수성과 통시성까지 내재하고 있다. 나아가 ‘부분의 합은 전체와 동일하다’에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앤섬(andsum)적 사고가 아니라, 트랜섬(transum)적 사고의 대상이다. 아리랑은 순전한 우리의 인문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노래이다. 뚜렷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4계의 풍토적 조건과 산·강·들·바다가 공존하는 지리적 조건이 문화를 받아 들이고, 가두고, 변화시킨다. 이러한 지속과 변용을 통해 아리랑은 구심력과 원심력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아리랑은 지역의 사투리가 투영되고, 노래의 시김새가 흐르는 대로 곳곳에서 형성된 노래이다. 아리랑은 민중적 비애와 한(恨)의 정조(情調)를 수렴하고, 권력에 대한 저항적 민중의지를 발현하고,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는 미래 의식의 추동체이다. 그래서 아리랑은 민요, 노래, 그 이상의 노래이다. 모든 아리랑의 후렴에는 ‘아리랑고개’가 위치한다. ‘고개’는 역사적 수난과 고난을 상징하며 극복의 대상으로서 상정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아리랑에서 반드시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라고 노래한다. ‘아리랑고개’는 아리랑과 고개의 합성어이다. 아리랑의 역사에 등장하는 고개는 ‘문경새재’이다. 새재의 박달나무가 공출되었고 삼남의 부역인들이 새재를 넘나들었다. 그래서 ‘아리랑고개’는 분명 문경새재에서 연유한 시어(詩語)이다. 문경새재는 경북 문경시 소재(所在). 백두대간 소백산맥 주흘산(主屹山)을 넘나든 이들의 고개다. 이들과 함께 고개를 넘나든 노래가 있으니 새재아리랑이다. 그래서 문경의 새재아리랑은 고개를 넘어 기쁜 소식을 듣는 이들의 동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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