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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88)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얼씨구 노다노다 가세 아지까리 동백아 네 열지마라 누구를 괴자고 네 열렸나 열라는 콩팥은 왜 아니 열고 아사리 동백은 왜 여는가 감상 동백은 생강나무의 강원도 사투리다. 김유정 소설 ‘동백꽃’에서의 ‘동백’이 그렇고, 강원도 아리랑과 정선 아리랑에 등장하는 ‘동백’도 선운사 ‘동백’과는 다른 생강나무를 말한다. 생강나무는 3~4월에 노란 꽃을 피우며 상처를 내면 생강냄새가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주까리의 씨앗은 한약명으로 피마자(蓖麻子)이다. 모두 열매를 이용해 기름을 짠다.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발라 치장한들 예쁘게 봐줄 대상이 없으니 아주까리 동백은 결국 무용지물인 셈이다. 아주까리 동백보다 양식으로 쓸 콩팥이 훨씬 절실한데 쓸 데 없는 아주까리 동백만 열리니 볼이 메일 밖에. 그러나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누구를) 괴자고 : (누구를) 사랑하자고 *아지까리, 아사리: ‘아주까리’가 소리가 흐르면서 음이 변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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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40)<br>분청조화문대발편'무도회의 추억' 속 여주인공처럼 이규진(편고재 주인)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절창 시편 중의 하나인 <선운사 동구> 전문이다.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동백꽃으로 유명한 절 이름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시인의 고향인 질마재가 있어 연관성이 주목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은 이 자리에서 서시인의 시세계나 그의 행적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선운사를 가려면 서북류하여 줄포만으로 흐르는 인천강을 우측으로 끼고 가다 이를 버리고 좌측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곳의 인천강은 일명 풍천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해 맛이 좋기로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저 풍천장어의 고향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일대는 풍천장어를 파는 음식점들이 줄을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좌측의 선운사 가는 길을 버리고 반대편 우측으로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연기마을이 된다. 이곳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로 알려진 가마터가 있어 전라북도 최초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용산리 분청사기 가마터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만해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곳이다. 연기 저수지 제방공사 중 가마 일부가 파손되면서 유구가 드러나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후 호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가마 4기가 발견되었는데 한 기는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으나 3기는 양호한 상태로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15세기 후반 분청사기의 특징을 대표하는 유물들로 특히 조화기법으로 제작된 모란과 물고기 문양의 병 편병 대호 접시 등에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흑유와 백자도 출토되고 있어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와 흑유 및 백자와의 관련성도 주목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분청조화문대발편은 안팎에 귀얄로 분장을 하고 있고 그 위에 조화로 문양을 넣고 있다. 굽도 입술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도편을 항아리 같은 것으로 보지 않고 대발로 보는 것은 안팎으로 귀얄과 조화문이 들어 있는데다 손잡이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발행한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 도록을 보면 손잡이가 달린 도편이 한 점 보이는데 분청사기 물고기무늬 큰 사발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어 분청조화문대발편의 기종을 증명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손잡이 까지 달린 이 대발은 온전했더라면 얼마나 큰 기형이었을까. 일반적인 사발이라고 보기 보다는 자박이 같은 큰 기물의 일종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은 아닐까. 선운사도 서정주의 질마재도 또한 같은 고창군 관내의 용계리 청자나 분청사기 가마터 모두 내게는 세월의 저편 너머 추억이 얽힌 그리운 이름들이다.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 가마터 또한 두어 번의 발걸음이 있었던 곳이고 보면 추억의 앨범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곳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옛 애인들과의 그리운 추억을 찾아 나섰던 영화 <무도회의 수첩> 속 여주인공처럼 나 또한 다시 추억의 책장을 들척이며 선운사로 서정주의 질마재로 용계리로 용산리로 내 발걸음을 재촉해 볼 날이 있을 것인지. 그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분청조화문대발편의 조화문이나 귀얄자국이나 손잡이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마음으로 자주 눈길이 가 머무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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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 2세가 부르는 서러운 아리랑사할린한국교육원장 3년간 업무를 마치고 귀임한지 1년이 지났지만, 사할린 동포들의 서러운 처지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코로나 시절 함께 불렀던 아리랑 선율에 따라서 부른 개사한 노래를 불러본다. 교육일지와 사진 속에 있는 사할린 동포 2세들의 얼굴들을 떠 올려본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간절한 소망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을 함께하면서 이분들의 간절한 소망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동포들의 뼈져린 한은 영주귀국으로 조국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만나는 것이다. 한국으로 가신지 30년이 지나고 이미 영주귀국 후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2세대 자녀 한명과 그 배우자를 영주귀국 대상으로 확대되었다.(2021년) 그 이전까지는 풀릴 기미가 없이 가슴 아프게 지속되었다. 1세대 부모가 사망한 2세대 자녀들에 대해서는 현재 법적으로 영주귀국이나 귀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국적 취득에 관한 속지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한국어를 말하고 쓰고 배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이 술김에 흥얼거리는 아리랑이나 민요 가락을 들으며 자랐고, 한국의 전통 풍습과 명절을 쇠었으며, 조선에서 가져 오거나 사할린에서 만들어 쓴 조선의 생활물품을 늘 보고 쓰며 아버지, 어머니 따라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어린시절, 청소년 시절, 냉전의 시기를 살아 왔다. 해방 후 냉전 시기에 사할린 한인들은 억류되어 감시 당하며 사회주의 소련땅 사할린의 노동력을 보충하는 신분이었다. 이동과 취업, 인간으로서의 권리적 측면에서 차별과 멸시는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과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대한민국의 발전상이 보도되면서 급격히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었지만, 어린 시절 당했던 차별과 수모에 대해서는 늘 대화의 끝에 "정말 숱하게 멸시를 받았어." 하시며 푸념하듯 말씀하시곤 했다. 오죽했으면 한인 2세대인 사할린태권도협회 안수학 회장은, 어린 시절 차별과 수모에 반대하여 싸움을 자주 했고, 김치 냄새난다고 놀리는 러시아 아이들 혼내주고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가라테를 배웠으며, 한러수교 후 태권도를 다시 익혀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국적을 러시아로 바꾸지 않고 평생 무국적으로 살다가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대하고 있었고 2세대 자녀들은 귀환을 믿으며 굳건히 당당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냉전과 사회주의 시절을 살다가, 한국의 발전상이 사할린에 알려지고 사할린 한인의 존재와 귀환의 문제가 공영방송을 타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사실 한-러 수교 이전에도 KBS사회교육방송(현재 한민족방송)에서는 사할린 한인동포들이 고국의 친지에 전하는 사연들이, 일본으로 이중징용 되어 재일동포가 된 지인을 통해 전달되어 방송이 되곤 했다. 그러나 첨예한 냉전 시기에 관심도 지원도 교류도 불가능한 시기였다. 1990년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고국방문이 이루어질 때 한국에 다녀오신 1세대 부모들이 많았다. 그러나 영주귀국 희망 신청이 이루지던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기 전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 시기에 생존해 계신 1세대분들은 영주귀국을 희망하고 신청하여 고국에 오셨지만, 사망하신 1세대분들은 영영 통한의 그리움 안고 타국 땅에서 숨을 거두고 그 섬에 묻히셨다. 사할린에 징용되었다가 일본으로 다시 이중 징용된 1세대 부모를 둔 2세대 자녀들은, 알음알음 정보를 얻어 일본의 한 공동묘지에서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기도 하였다. 이 얽히고 설킨 일제 강제징용과 식민시대의 압제와 희생, 그리고 조국으로부터 외면 당한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이분들에겐 실로 삶 전체가 버겁고 서러운 현실이다. 나는 어떤 영향력을 가진 위치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영주귀국 확정 전에 부모를 잃은 2세대 분들의 원한을 내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보고 가슴에 간직하게 되었다.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에 "사망 등 다양한 사유로 영주귀국 신청을 하지 못한 1세대 동포들의 자녀들에게도 희망에 따라 영주귀국의 기회와 모국인 대한민국의 국적 취득이나 경제적 지원의 혜택을 드릴 수 있는 방안" 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범위의 2세대 분들 중에는 현 러시아 정부의 연금을 수령하는 분도 있고, 홀로 사업을 일으킨 분도 있으며, 이미 사할린 사회에 인정을 받은 문화 예술 공로자도 많다.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한다면 자녀들과의 이별을 두려워하는 분들도 많다. 따라서 그런 범위의 모든 2세대 분들이 영주귀국을 희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국이 풀어주지 못한 부모의 원한을 보며 겪으며 성장하고 기억하는 자녀들의 소망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조국에서 살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고통과 설움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사할린한국교육원과 유치원에서 25년간 한국어를 가르치시다가 2021년 영주귀국 신청으로 한국에 오신 2세 전영희 선생님은, 어머니가 2004년 병환 중에 영주귀국을 하셨지만 대한민국 국적이 나오기 전에 병원에서 사망하셔서 한국 국적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니 전영희 선생님은 영주귀국 대상이 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영주귀국 하시는 1세분과 재혼을 하여 배우자 자격으로 2021년 11월에 영주귀국을 하셨다. 그러나 배우자께서 역시 국적 취득 전에 별세하셔서 국적이 나오지 않아 애태우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화가 난다. 영주귀국 하신 분이 돌아가시면 사후에라도 국적을 드려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래야 자녀에게도 법적으로 고국에서 살아 볼 기회가 생길 것 아닌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에 오셨는데 남편이 국적을 받기 전에 별세하여 배우자의 국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내는 다시 돌아가라는 것인가. 너무나 법 적용이 허술하고 냉혹하다. 유독 사할린 한인, 사할린 동포들에게 더 냉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1세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영주귀국 허용된 2세 분들 중에는 한국어에 서툰 분들이 많고 일상 생활, 행정적 처리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 고국 정착 과정에 난제와 장벽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래서 사할린한국교육원의 한국어 교재를 다시 가져와 드린 적이 있다. 정착 지원 체계가 아직 자리 잡히지 않아 각자도생 해야한다는 말이 나왔다. KBS한민족방송이 주관하는 한민족체험수기대회에서, 2021년(사할린아리랑무용단 박영자 단장), 2022년(유즈노사할린스크 김경순) 성인 부문 대상을 모두 사할린 2세대 한인 어르신이 수상하셨다. 2021년 수상자 박영자님은,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다시 이중징용 되셨다가 끝내 일본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인사드리던 기막힌 디아스포라가 담긴 가족사를 글로 남겼다. 수상 인터뷰에서 "KBS가 주는 이 대상은 우리 가문의 영광이기 전에 사할린 한인 전체에 주는 상"이라며 "사할린에서 다시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으로 끌려가서 타국에 묻히신 외할아버지께 이 상을 바친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하셨다. 2022년 수상자인 김경순님은 아버지에 대한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90년대 중반 병든 노부모가 한달 간의 모국방문에서, 50년 만에 아들과 상봉 후 다시 이별하여 사할린에 돌아와 몇 개월 만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끝내 영주귀국 신청을 해보지 못한 서러움에 관한 처절한 가족사의 이야기를 쓰셨다. 특히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시간에 배운 가수 조용필의 노래(그 겨울의 찻집)와 주병선의 노래(칠갑산) 가사를 바꿔 부모에 대한 기억, 조국 귀환에 대한 부모의 열망, 부모님과 10살 아들(김경순님의 오빠)과의 이별 장면 등을 가사에 담아 내게 보내셨다. 그 노래를 노래방 반주에 맞추어 불러 보았는데, 부르다가 여러 번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터져 한참 후에나 완전히 부를 수 있었다. 그 노래 영상들을 김경순님께 내가 보냈고 김경순님은 한국의 조카들(큰 오빠의 자녀)에게 보내 드렸다고 한다. 그러면 조카들로부터 아버지 어린 시절을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고 한다. 박영자님의 외할아버지 이야기와 김경순님의 부모님과 오빠에 대한 사연은, ㈜국악신문과 새고려신문과 ‘우리말방송’에도 게재되고 방영되었다. 김경순님 사연은 KBS한민족방송에서도 사할린과 전화로 연결하여 소개되기도 하였다. 나도 방송에 출연하여 사연과 노래 가사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소개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사할린 동포, 사할린 한인 1992년부터 시작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의 영주귀국 사업으로 현재까지 4,700여 분이 홀로 또는 배우자와 함께, 그리고 2021년부터는 '이미 한국에 사시는 부모님'의 2세대 자녀 1인과 배우자가 한국에 영주귀국하여 사신다.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으로 강제징용되었거나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들을 ‘사할린동포’라고 정의한다. 이분들이 영주귀국이 허용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이다. 따라서 사할린에서 한 집안이나 동네에서 자란 언니, 동생, 친구라도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영주귀국 지원 혹은 희망과 신청 대상이 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영주귀국 사업 개시 당시 생존하는 1세대 한인에 한하여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신청 및 허용 대상이 되었다. 이 글은 영주귀국 사업과 신청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망하거나 기타 사정으로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었던 부모를 둔, 2세대 사할린 한인 자녀들의 간절한 소망에 관한 것이다. 이분들은 2024년 현재 연령상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에 이르신 분들이다. 조국 귀환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불쌍한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통절한 한을 품은 채 살고 계시다. 어떻게든, 그렇게도 부모가 돌아가고 싶던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계시다. 영주귀국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하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절차가 너무나 어렵다고 한다. 이런 점을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020년에서 부터 3년간 한국문화교류가 단절되는 시기 필자는 임시 탈춤강습과 탈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국립사할린대학 한국어과 학생들과 사할린아리랑무용단 단원들에게 탈춤 기본 춤사위를 지도했다. 우리 민족은 어디를 가나 노래방이 있듯이 러시아는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사교댄스나 스포츠댄스 모임이 많다. 아마도 죽을 때가지 춤을 추다가 간다고나할까. 동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버댄스 동아리에 들어가서 함께 춤을 배우기도 했다. 그들에게 탈춤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렇게 동포들과 가까이 만나게 되면서 사할린 한인들의 이산에 대해 4대 가족사를 접하게 되었다. 특히 댄스 클럽에서 만난 오석만씨가 KBS한민족방송에서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2023년 우수상을 수상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한국어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들의 가족사는 바로 잊혀진 한국사이고 동아시아 전쟁사라는 나의 설득에 용기를 내서 슬픈 가족사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책으로 묶여 나와서 보내드리게 되었다.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한국어 수업이나 한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인들이 과제물로 내 놓은 체험수기 중 우수한 작품이 KBS한민족체험수기에서 매년 대상과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그 겨울의 찻집’ 노래를 배우신 후 ‘눈물의 섬, 사할린’으로 가사를 정셨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가사 중에 특히 "사무친 한을 풀어 주세요."는 대한민국에 외치는 절규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서러운 아리랑 사할린으로 끌려 왔어요. 조선 땅에서 그 옛날 일본 놈들의 시달림 받고, 늘 괴로움에 떨었죠 가고픈 고향 한국 땅으로, 부모형제 사는 마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 한숨만 저절로 나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리워라 내 고향 사모친 한을 풀어 주세요, 하루 속히 날아 가고파 그늘진 세월, 고향 그리며, 철천지 한이 되었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꿈에서 본 내 고향 그리고 ‘칠갑산’ 노래의 곡조를 생각하면서 부모와 이별하는 어린 10살의 오빠의 심정을 감정이입하여 지은 ‘’ 가사는 이러하다. 이별의 부두 부모 잃은 어린 마음을, 그 누가 알아 주리요 외로웁고 서럽던 아픔, 누구에게 원망 주리요 어머니는 내게 같이 떠나자, 애닯게 속삭였지만 할아버지 무서워 끝내, 따라간다는 말을 못했소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난 날, 배 떠난 부두에 나가 하염없이 목 놓아 울었다오.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또 김경순님은 아리랑민족의 후예로서, 부모님과 큰오빠의 오십년 이별과 한번의 만남, 또 이별과 사별의 한, 전체 사할린 한인동포들의 고통의 역사를 담아 아리랑 가사로 쓰셔서 내게 보내셨다. 적절한 아리랑 곡을 찾아 보았는데, BTS의 아리랑이 긴 가사를 모두 담을 수 있었기에 노래로 불러서 보내 드렸다. 도중에 여러 번 목이 메었다. '한맺힌 사할린 아리랑'을 정리한 가사는 이러하다. 한맺힌 사할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일제에 끌려 사할린 왔소. 모질던 징용살이 누가 아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간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믿음에 살아 낸 세월 [랩 버젼] 한달만 있다가 돌아간단 그말, 어찌나 기다렸는지. 밤이면 라디오 틀어 놓고서 혹시나 우리를 찾을까 봐. 애타게 기다린 자식 형제들 오십년 넘어서 만나보네. 수십년 세월을 참아 왔는데 언제 또 고향 땅을 밟아보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 넘어간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이 가사의 핵심은 부모와 어린 오빠가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친 것, 그런 가엾은 부모를 보는 자식들 모두 차마 맨 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가엾다는 점이다. 영주귀국의 기회가 오기 전에 돌아가신 불쌍한 부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진다. 부모님의 나라에 더 가까이 가고 싶은데 도무지 소식도 없고 희망을 찾을 수도 없다. 이 아리랑의 마지막 가사들은, 그렇게 부모를 잃고 조국과 단절된 채 희망을 잃은 사할린 한인 2세대 자녀들의 심정을 그대로 외치는 절규다. "(조국 귀환을)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2023년 9월에는 ㈜국악신문사(대표이사 기미양)를 통하여, 아리랑 무용단장 박영자님(갈리나 박)의 아리랑 가사를 받았다. 박 단장님 역시 일찍 부모를 잃고 영주귀국의 희망이 사라진 심정과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마음 속의 조국에 대한 이미지와 당신의 현실에 대하여 "사할린 2세 아리랑"라는 재목을 달고 가사를 지으셨다. 아리랑 반주를 확장하여 가사를 붙여 서울의 사무실에서 불러 보았다. 사할린 2세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는 사할린 2세 한인 할머니, 하지만 부모 조국은 한국이라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 어릴 때 저 산 너머엔, 내 조국 있다고 믿었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팔십 년 세월 부모 잃고 서럽구나, 나도 이제 주름진 할머니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말문 터진 손주들 자주 묻는 말, 할머니와 조국에서 살 수는 없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발전되어 잘 사는 우리 조국 한국, 우리에겐 자랑스런 마음만 크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언젠가 이 생명 끝나기 전에, 조국 품이 우리 2세들 안아 줄까 한인 2세, 우리는 누구인가요 어릴 적부터 조국의 존재를 믿고 한국어, 한국문화로 정체성을 지켜 왔지만, 영주귀국 신청 시기 이전에 부모를 빨리 여의신 사할린 한인 2세 어르신들의 심정은 한결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한국을 조국으로 선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당신들께도 주어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설령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사할린 사회에 뿌리박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문제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자녀들과의 이산, 다른 친지, 친구들과의 이산을 의미하며 기존의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의 상실과 영주귀국 후 생활보호대상자 신분으로서의 생활 등 수많은 심적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국이 부모의 한을 풀어 준다는 기본적인 정책의 도리와 그로부터 받는 부수적 혜택이면 충분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들의 국적 취득이나 자녀의 유학이나 체류 등에 있어서 유연함 같은 혜택일 수 있다. 엄연히 식민지 시기 타국으로 강제동원된 국민들의 자손이 아닌가 말이다. 2021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 정권에 항복하여 붕괴되던 시기, 그간 한국 정부에 기여한 아프가니스탄 국민과 가족들을 우리 특수부대를 투입하여 목숨을 걸고 안전하게 데려온 미라클(기적)의 작전이 있었다. 그러한 쾌거는 우리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한국 정부의 도덕성과 형제애 및 인류애를 상기시킨다. 그런 인류애와 형제애를 지닌, 정의로운 나라가, 강제로 희생된 일제침략기의 혈육과 자손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또한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의 적용으로 인해, 명백한 국적 회복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 상황(영주귀국 후 국적 취득 전 사망하신 경우)에서 비인륜적으로 국적을 부여하지 않아 그 자녀들의 기회가 방기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법의 취지를 저버리는 일이다. 법의 사각지대는 극단적으로 냉혹하게 2세대분들의 가슴을 갈라 놓는다. 법이 어째 그리 촘촘하지 못하여 법 구실을 다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본 정부나 러시아 정부와 얽힌 외교적, 법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런 문제 해결의 전제없이도 우리 정부의 결단이면 어느 정도 가능한 일 아닐까 생각한다. 하물며 인구도 수십년 간 하염없이 감소하고 있어 국가 소멸의 길로 가는 절체절명의 시기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가 묻고 싶다. 나는 2세분들의 사무치고 뼈저린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한다. "왜 한국은 그렇게 발전했으면서 우리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죠? 옛날엔 가난했다, 전쟁으로 힘들었다, 다 이해해요. 그런데 지금은요?" "부모들은 우리에게 한국어와 한자를 가르쳤어요. 조국에 돌아갈 때까지 잊으면 안된다고. 저 산 넘어가면, 바다 건너가면 조국 조선땅이 있다고 했어요. 고향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소련 시절에, 영주귀국 전에, 병으로, 이중징용으로 다 돌아 가셔서 우리들은 갈 기회가 없어졌어요. 우린 뭐에요?" "부모가 끝내 돌아가지 못한 고향에, 왜 사할린에서 태어난 2세들은 못 살아 보는 거죠? 한국말도 말하고 생활방식도 한국식으로 잊지 않고 지켜왔는데?" 한국 교육부에서 파견 나온 교육공무원은 이에 대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만 ‘제가 그런 것을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칠 만한 능력이 없어서 죄송해요.’ 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의 애환을 담은 가사에 노래를 불렀고, 교실과 공원에서 한국의 인기 가요를 불렀으며 탈춤을 소개하고 민속춤을 같이 추었으며 한국문화 수업을 했다. 그리고 ‘한국어말하기대회’에서 발표하실 내용을 컴퓨터로 옮겨 드리고 약간 교정하는 역할만을 했다. 나는 한국에 복귀 이후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의 행사에는 가능한 참여하고 있다. 지난 3월 23일 파주사할린동포회 영주귀국 15주년 행사에서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을 비롯한 사할린동포들과 함께 사할린아리랑이 대합창으로 불려졌다. 사할린이라는 말만 나와도 눈믈을 흘리신다. 우리는 그분들이 흘리신 디아스포라의 눈물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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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br>주요한의 기록, 그 진실은?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에는 대부분의 필자들이 ‘친일파 지식인’이란 규정하에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을 나열하고, 이어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다고 하였다. 이 중에 주요한朱耀翰)은 ‘安島山全書’라는 방대한 저술에서 ‘애국가’ 항목을 두고 세 번에 걸쳐 작사자에 대해 거론한 인물이다. 그런민큼 누구보다도 주요한의 작사자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게 된다. 이를 짚어 보기로 한다. 안창호의 생애를 다룬 대표적인 전기(傳記)는 이광수의 ‘도산안창호’와 주요한의 ‘安島山傳記’이다. 전자는 안창호를 "도덕주의자의 거울”로, 후자는 "민주적 지도자의 전형”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자료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도 평가를 받는다. 이 두 저자는 안창호가 임시정부 조직 초기부터 이광수가 귀국하는 1921년 2월 사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으로 함께 활동한 이들이다. ‘도산안창호’는 "작사자 문제 발화”로, ‘안도산전서’는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저술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 즉,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安島山全書’의 평가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평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주요한은 외견상으로는 몰라도 내심은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보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이유를 주요한의 발언을 순차화 하여 밝혀 보기로 한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주요한의 첫 발언은 네 가지 점에서 주목을 하게 된다. 하나는 작사자 문제가 발발한 후 첫 번째의 반응이란 점이다. 미국의 한 백과사전 출판사가 애국가 작사자의 연혁을 문의해 온 바, 공보처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통보하려 한다는 기사(서울신문)를 낸 것이 1955년 4월 4일 자이다. 그리고 주요한이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것이 4월 19일이기 때문이다. 둘은 안창호설에 대한 반론으로 대표적이란 점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반증하는 것임으로 쉽지 않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셋은 안창호의 최측근 중 한 명이란 점이다. 임시정부 시기와 흥사단 활동에서 이광수와 주요한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했던 인물인데, 한 사람은 작사자로, 또 한 사람은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다. 넷은 주요한은 애국가 작사자를 판단할 전문소양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장 시절 ‘적십자의 노래’ 등을 작사하고 ‘불놀이’를 발표한 시인이란 점이다. 주요한의 첫 발언은 이렇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라는 기고문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한 것이다.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신화적인 설’이란 표현은 곧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주장은 듣도보지도 못했다.”는 강경한 부인이다. 이 결과는 가장 가까이에서 살며 안창호가 직접 "내가 작사했다”라는 말을 한 바도 없다고도 했다. 이는 "내가 작사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라는 억지를 배척한다. 특히 안창호가 직접 자신이 작사자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까지 하였다. 이는 이후 1963년 발간한 ‘안도산전서’에서도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로 기술하여 이를 견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지적 표현은 주요한의 깊은 내심에서 나온 확신임으로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발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시기에 발표한 글에서다. 1955년 12월 조사위원회 일원으로서, 자신이 주관한 월간잡지 ‘새벽’에 발표한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란 글이다. 여기서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는 대목의 행간을 읽어보기로 한다. "文敎部에서 愛國歌作詞者調査委員會를 委囑하여 그 사무를 추진할 때에 筆者도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었다.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 調査途中에 딴 所得이 있기로 여기 披瀝하고자 하는 바이다.(중략) 그때 開城에 있는 韓英書院에서 찍어 내서 몰래 사용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거기는 약 2백餘篇의 唱歌가 수집되어 있는데, 推算年代로 보아서 물론 秘密出版이다. 이 唱歌集 속에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 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로 되어 있다. 曲調는 두 가지가 같다고 하였고, 曲譜를 보면 스코틀랜드 民謠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그것이었다. 그 밖에 韓末에 유행되던 여러 가지 노래가 수집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筆者는 ‘靑年學友會歌’라는 것을 발견했다.(중략) 다음에 유명한 ‘去國歌’도 이 두 책에 揭載되어 있다. 이 歌詞는 春園선생이 저술한 ‘島山安昌浩’에 收錄되었으나 그 歌詞의 行數가 節을 따라 맞지 않는 점이 있어 一部 漏落된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敍上의 兩 唱歌集에 收錄된 것으로서 완전한 歌詞가 발견되었다고 생각한다.”(월간 <새벽>,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 1955, 12) 다소 길게 인용한 글은 주요한이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비로 ‘한영서원 발행 창가집’도 조사자로서 살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발언 "신화적인 설”이라는 단언은 적어도 이광수의 ‘도산안창호’ 기록을 분명하게 부정한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 두 번째 발언의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고 한 소이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이미 작사자조사위원회에서 적어도 안창호가 작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또한 한영서원에서 발행한 창가집의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라고 구분하여 인용한 대목에서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영서원의 창가집에는 두 애국가의 작사자로 윤치호라고 밝혀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작사자조사위원회가 결론을 윤치호로 내리게 한 근거 중 하나라는 것과 1916년 ‘경무부 보고 애국창가집 사건’ 기록에 ‘윤치호 舊作 애국가’라고 하였다는 사실에서다.(이후 1920년대 김종만 소장(所藏) 노래책에 애국가 작사자로 ‘윤선생 치호’로 표기되고, 가장 방대한 자료집인 1931년 한석원이 펴낸 ‘세계명작가곡집 무궁화’에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 작사’ 밝힌 사실에서 재확인이 된다.) 이를 주요한은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주요한은 이 두 번째 발언의 행간에 "안창호는 작사자가 아니다”를 담은 것이다. 만일 작사자조사위원회의 결론이나 자신의 견해가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면 굳이 이상과 같은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그 委員會의 결론에 작사자는 안창호라고 했는데~”라고 했어야 마땅한 것이다. 결국 두 번째 발언에서도 주요한은 내심으로는 입장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주요한의 저술 ‘安島山全書’에서 별도의 ‘愛國歌’라는 소항목을 두어 안창호 작사설을 확대, 재생산한 두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살피는 것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의 에피소드이다. 이의 진앙지는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이다. 즉,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이다. 주목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단순히 "대답이 없었다”인데 주요한은 다음과 같이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부연하였다.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라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시점과 장소는 주요한이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 등으로 안창호와 이광수와 함께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사정이다. 이런 점에서 주요한의 부연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즉,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하여 소위 ‘소이부답(笑而不答)’이란 에피소드로 만들었다. 이 사자성어는 굳이 말로 알려주지 않고 웃음으로 대신한다는 뜻이나 일반적으로는 직접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하는 모습이나 대응할 가치가 없는 질문에 예의상 대처하는 태도를 말하기도 한다. 이에 적용하면 결국 안창호가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지만, 정작 안창호에게 작사했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했다”인 것이다. 이 사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안창호와 함께 있었지만 들은 바가 없는 얘기이다.”라는 뜻을 피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실상은 안창호 스스로가 작사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과 같지 않느냐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은 애국가를 대성학교 개교 후 안창호가 작사하고, 이를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확산시켰다. 다소 감동적인 이야기다.(이를 장리욱은 1983년 발행한 <偉大한 韓國人 安昌浩>(중앙서관, 118~119쪽)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확산시켜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살핀다면 흔한 말로 ‘카더라 통신’ 수준인데, 에피소드의 시점 등을 눈여겨 읽지 않으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시점은 대성학교 개교 이후라는 점과 오늘날에는 쓰지 않는 ‘대리교장’ 같은 용어의 이해이다. 대성학교의 개교 시점은 1908년 9월이고, 대리교장 또는 대변교장은 저명 인사를 내세워 학생모집 효과를 얻기 위한 방편이고, 개교 후에는 윤치호가 서울에 거주하기 때문에 평양의 안창호가 교장직의 대리를 맡아 쓰게 된 말이다. "대성학교 대리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하는 애국가에서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했다. 이에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였다. 장소는 평양 대성학교 안창호 대리교장 사무실, 때는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 이후 어느 날, 등장인물은 서울에서 온 교장 윤치호와 평양의 대리교장 안창호, 개요는 안창호가 지어 두었던 "동해물과 백두산이~”하는 애국가를 서랍에서 꺼내 보이자 윤치호는 이를 좋다고 하자 안창호가 이를 윤치호가 지었다고 양보하여 발표하자고 하며 확산시켰다. 여기에 굳이 작품 이름을 추론한다면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 정도일 것이다. 매우 드라마틱하다. 안창호가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명의(名義)를 넘겨주었다니 오늘이나 당시나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은 설정될 수 없는 것이어서 재미는 있으나 사실은 아니다. 결정적으로는 현 애국가가 ‘찬미가 14장’이란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 1908년 6월인데도, 두 달이나 지난 뒤에 개교한 대성학교에서 가사를 두고 잘되었다고 하며 안창호가 작사한 것을 윤치호의 작사로 하여 발표하기로 하였다니 그렇다. 이런 이유로 주요한의 첫 발언에서 ‘신화적인 설’이라고 했다고 보는데, 이 극의 배경을 살피면 이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것이다. 우선 작사자 문제의 발화점인 ‘도산 안창호’의 본질적 문제이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이 책 여러 곳의 탈맥락적인 안창호 작사 언급 대목은 편집과정에서 원 저자인 이광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박현환(‘도산 안창호’의 저자가 이광수가 아닌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이다. 박현환은 안창호가 귀국하자 1922년 7월 귀국하여 이광수 주변에서 흥사단 활동을 도운 인물이고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복구 시기까지 국내 흥산단 업무를 관장한 인물이다.) 같은 인물이 가필한 결과라는 것이 문제다. 대표적인 대목이 ‘상해시대편’의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는 탈맥락적인 부분이다. 이에 따른 결론은 "전기소설에 근거한 안창호설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이 극의 대본이 ‘전문(傳聞)을 다시 전문’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요한은 위의 인용문 앞에 이렇게 전재하여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안태국의 사위인 홍재형(洪在衡)이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한 기술이라고 했다. 첫 발언자는 안태국, 이를 전한 이는 홍재형, 이를 듣고 주요한이 기록을 하였다. 첫 발화자 안태국(安泰國, 1877~1920)은 평양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대한제국시대 잠시 하급관리를 지냈다. 그리고 독립협회 평양지부에서 이강, 차리석, 최광옥, 이갑 등과 함께 활동하며 안창호와 연을 맺었다. 한일합방 후에는 계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1916년에 만기 출감하였다. 3.1민족운동 이후에는 평양을 떠나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비서관직을 맡았다. 그리고 1920년 3월 병사했다. 이를 감안(勘案)한다면 이미 1920년 이전에 작사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 시기 이전에 사위 홍재형한테 전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1940년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 정도로만 알려진 홍재형이 어떻게 장인에게 듣고 다시 이를 주요한에게 전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1920년 이전 왜 이런 사실이 안태국만이 알고 있었느냐도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언에 전언’을 통해 펼쳐진 대성학교를 무대로 한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은 제목 그대로 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용, 살피려는 것은 임정시절 가사 일부를 수정하였다는 대목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11쪽에서 최남선이 언급한 부분이다.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주요한이 아닌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주요한의 나이가 당시 20세라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역시 ‘안도산전서’의 ‘애국가’ 항목(93~97쪽)에서 4절의 일부를 수정했다는 것과 2, 3절에 대한 언급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1919년부터 상해에서 ‘임군을 섬기며’ 대신에 ‘충성을 다하여’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도산이 고친 것이었다. 둘째 절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든지, 셋째 절 ‘가을하늘 공활한데’와 같은 웅장한 구상은 도산의 머리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주요한, ‘안도산전서’, 1971년, 93~97쪽) 앞의 문장은 ‘찬미가 제14장’의 4절 중 ‘임군을 섬기며’를 현재의 ‘애국가’와 같이 ‘충성을 다하여’로 고친 것은 안창호라고 하였다. 이는 1919년 12월 1일 발행된 신한청년당 기관지 ‘新韓靑年’ 창간호 속 표지에 수록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임시정부 시기 수정된 것으로 볼 때 가능성이 높다. 이는 주요한이 작사자에 대한 유일한 단정적 표현에서 그렇게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의 해석 문제는 주요한의 표현대로 추정 정도일 뿐인 것이다. 이상에서 작사자 문제를 확산시킨 ‘안도산전서’의 세 대목을 그 발화점인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와 대비하여 살폈다. 이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도산 안창호’의 원천적 문제 제기이다. 이 책은 이광수가 쓴 원고에다 당시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 박현환(나정 박현환(蘿井 朴賢煥)은 1892년 평안북도 철산(鐵山) 출신으로 평안북도 정주 오산 학교의 이광수의 후배이면서 제자로 일본 유학 후 오산 학교 교사로 일했다. 3. 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과 흥사단 원동 단우로 ‘신한청년’과 ‘독립신문’ 편집 업무를 함께 하였다. 해방 직후에 흥사단 국내 위원부 재건에 앞장섰고, 흥사단의 해외 조직과 국내 조직 재건에 기여한 인물이다.) 이 ‘태극기와 애국가’ 항목을 삭제하고, 대신에 곳곳에서 덧붙여 가필(加筆)을 하였다. 그 결과 감동적인 기술과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사실로 오해하게 하였다. 소설가적 성향을 발휘한 것인데, 박현환은 이광수를 따른 작가로 1920년대 초반 톨스토이 소설 부활을 ‘해당화’라는 제명으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또한 해방 후에는 흥사단의 국내 재건을 도맡은 인물이다. 이로서 이광수에게 전기소설 집필을 의뢰하고, 이의 편집과 출판을 주관한 인물이다. 그 결과 탈맥락적이고 산발적으로 작사자가 안창호라고 왜곡시켰다. 사실(fact)이 아니라 감동으로 가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음은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자의 첫 발언, 1955년 12월호 월간 ‘새벽’ 기고문, 그리고 1971년 주요한이 편찬한 ‘안도산전서’ 에서 제시한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평가이다. 정리하면 주요한은 첫 발언 ‘신화적인 설’을 번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안도산전서’는 흥사단의 입장을 고려하여 부정하지는 않고, 인용하는 방식으로 단순 서술을 한 것 뿐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주요한이 안창호설을 지지한 것으로 오독 할 수가 있다. 이는 위에서 살핀 바대로 주요한은 첫 발언 이후 이를 부인하거나 번복한 바가 없다. 결론적으로 주요한은 안창호가 작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단지 일부 사설을 수정한 바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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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86)<br> 김병섭 명인의 '설장고' 춤사위설장고 장구잽이가 혼자서 장구를 메고 노는 놀이를 설장고라고 하고, 장구잽이 2명이 노는 놀이는 쌍장고(雙杖鼓)이고, 세 사람의 경우는 삼장고(三杖鼓)라고 하며, 여러 명이 노는 경우에 장고놀이라고 한다. 설장고에서 많이 연주되는 장단은 덩덕궁이·다드라기(호두락가락)·구정놀이·굿거리이다. 본래 상쇠와 둘이서 놀이판 가운데 나와 서로의 가락을 주고받으며 놀던 것이었으나, 전라북도 정읍의 유명한 장구잽이 김홍집(金弘集)에 의하여 오늘날과 같이 혼자 하는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무용수들에 의하여 장구춤으로 안무되기도 한다.설장구는 전라도 우도농악권 지역에서 크게 발달하였으며, 김병섭은 이를 바탕으로 개인 설장구를 만들어 현재까지 설장구 유파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해지고 있다.김병섭 선생은 장고 하나로 한국농악판에서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았던 명인이다. 김병섭(金炳燮)1921~1987년1921년 정읍시 북면 출생1930년 김학순에게 장구 사사1935년 싱카포르 함락 기년 축제 참가1937년 징용으로 아오지 탄광으로 징용1956년 전국농악경연대회 개인상 수상1964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인상 수상1975년 한양대, 서울예고, 선화예고 출강1986년 서울국립극장 명무전 출연 1987년 9월 11일 향년 75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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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79<BR>국악의 날 지정을 위한 제언(6)-정간보와 오음악보국악의 전통 악보에 대한 내용이 어렵다고 하여, 지난 회에서는 ‘정간보’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하였다. 이후 국악을 전공하시는 여러분의 선생님께서 댓글을 보내주셨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어렵게 느껴졌던 내용들이 좀 더 설명이 쉬어지고 보완되었다고 생각하셨는지 격려의 댓글을 보내주신 것으로 보인다. 그 댓글의 내용 중 두 분의 것만 간단히 소개하겠다. 먼저, 단국대학교 국악과 명예교수이신 이상용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댓글을 소개하겠다. "박교수, 좋은 글 잘 읽고 공부도 많이 하고 있어, 박교수가 자랑스러워, 고마워요”라고 보내주셨다. 또 한분은, 전통가곡 분야의 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이신 조순자 선생님이 보내주신 댓글이다. "(전략) ~~ 아마도 훈민정음 이해하기처럼 정간보도 지극히 간결하고 쉬운 우리 음악 표기 방법임을 먼저 기초부터 알려야 할 듯합니다. 힘내셔요.”라고 역사적 사실까지 언급하시면서 자세한 말씀을 해주셨다. 이상용 선생님은 필자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재학 중 전공악기인 대금 지도교수님이셨다. 국립국악고등학교의 교사를 거쳐서 단국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셨다. 학문적으로나 인품 또한 외유내강 형으로 모든 제자들이 흠모의 대상으로 삼으며 존경하는 국악계의 큰 어른이시다. 가곡 전수관 관장이신 조순자 선생님은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예능보유자이다. 우리 국악계에서 이와 같은 명칭을 갖게 되면 통상 ‘명인(名人)’이라는 존칭을 사용한다. ‘조순자 명인’이라고 부른다. 평생 전통가곡(歌曲)만 60여 년을 부르며 지켜온 조순자 명인은 화관문화훈장과 각종 상을 많이 받았고, 80세에 가까운 요즘에는 가곡 반주악보인 관현악 총보를 마무리하여 곧 세상에 발표할 것이라는 포부를 들려주셨다. 두 분 선생님의 지적과 격려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더욱 자상하고 겸손한 집필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참고로, 전통가곡은 2010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다. 한편, 전통가곡과 시조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왜냐하면 가곡과 시조는 노래스타일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일반인들은 그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면 가곡과 시조의 차이는 무엇일까? 잠깐 살펴보겠다. 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형식으로서 장고반주만으로 노래한다.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대중음악이다. 그러나 가곡은 5장 형식으로서 [대여음, 1장, 2장, 3장, 중여음, 4장, 5장, 대여음]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쉽게 표현하면, [전주, 1장, 2장, 3장, 간주, 4장, 5장, 후주]의 5장 형식으로 연주한다. 그리고 가곡은 피리, 대금, 가야금, 거문고, 해금 등의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노래한다. 여기서 중여음과 대여음을 연주할 때는 노래는 쉬고 반주만 연주한다. 그리고 대여음은 5장 다음의 후주로 연주하지만 노래 시작하기 전에 전주로도 사용한다. 노래가사는 가곡과 시조 모두 동일한 노랫말을 사용하지만, 노래 선율은 가곡이 한층 예술성이 높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가곡은 전문가들의 음악이라고 한다. 한편, 현재 불려지는 전통가곡은 학설에 의하면 고려가요인 ‘정과정’이라는 곡이 효시라고 한다. ‘정과정’은 향가 계열의 고려가요로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계승된 대표적인 노래이다. 원래 평민들에 의해 불려졌던 ‘정과정’과 같은 고려가요는 한글이 창제되고 악학궤범이 만들어지면서 궁중음악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러면서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의 악보에 고려가요들이 실리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왕실 주관으로 악보를 만들게 된다. 여기에서, 정간보인 『시용향악보』와 ‘오음악보’와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하겠다. (「한국음악의 구기보법(舊記譜法)」 장사훈 논문 참조)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는 동양최초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이다. 즉 서양악보인 오선보의 기능과 같이 ‘정간보’는 정(井)자 모양의 칸 안에 음이름을 적어 기보 하는데, 칸은 음의 길이, 음이름은 음의 높이를 나타내도록 창안하였다. 그리고, 정간보라는 악보 형식에 음의 높이와 음의 길이를 표기한 악보를 "오음약보(五音略譜)‘라고 부른다. ‘오음약보’는 주로 5음음계의 음악을 표기할 때 사용되었다. 기본음(으뜸음)을 중심으로 위 쪽의 음 높이는 上一, 上二, 上三, 上四, 上五, 아래쪽의 음높이는 下一, 下二, 下三, 下四, 下五의 방식으로 음의 높낮이를 표시했다. 그리고 그 음 옆에 가사를 적어 넣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악보가 바로 『시용향악보』인 것이다. 그런데, "시용향악보”는 ’오음악보‘로써 고려가요를 수록한 악보이지만, 성종 때(이동복 석사 논문, 참조) 만들어진 악보여서인지 세종 때보다는 좀 더 진화된 악보 표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음의 높이뿐만 아니라, 上一, 上二, 上三 ~ ~, 등의 음 옆에 ’음길이‘와 ’리듬‘도 가끔 보이고 ’가사‘도 씌어 있다. 그리고 장고 반주 악보까지 보인다. "시용향악보”의 고려가요 악보를 자세히 보면, 上一, 上二 등의 음정 옆에 장고반주인 고(鼓), 요(搖), 편(鞭), 쌍(雙)의 글씨가 세로로 보이고, 박(拍)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다음 회에 이 용어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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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0)<br>장단은 리듬의 패턴… 시간 흐름 따라 직조된 씨줄장단(長短)이란 무엇인가 '긴 것'과 '긴 것'이나 '짧은 것' '짧은 것'의 반복은 장단이 아니다 음'과 '양'이요 '남자'와 '여자'요 대삼'과 '소삼'이어야 장단이다 판소리도 장단과 더불어 재구성 장르 이를 허투루 여기거나 귀찮아하거나 혹은 업신여겨 말살하는 것은 뿌리와 근본을 버리자는 말과 같다 일군의 농악대가 한 집에 이르렀다. 집주인은 안쪽에서 맞이하고 농악대는 바깥쪽에서 연주한다. 4/3박자 리듬이다. 구음보(口音譜)로 적어보니 '깽매 깽매 구갱깽/ 구갱매 깽매 구갱깽'이다.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농악대원들 모두 합창하여 부르는 소리를 들으니 '쥔 쥔 문여소/ 어서어서 문여소'라 한다. 주인장에게 문을 열어달라는 요청임을 알 수 있다. 꽹과리와 더불어 울리는 악기의 리듬 패턴이 이 요청의 말과 합일하여 공명(共鳴)한다. 이를 '문굿'이라 한다. 마당에 들어선 농악대가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은 샘이다. 문굿 보다는 더 느린 템포로 연주한다. 구음보로 적어보니 '깽매 깽매 구갱깽/ 구갱매 깽매 구갱깽'이다. 마찬가지로 합창하여 노래한다. '어따 그샘물 잘난다/ 얼떡벌떡 잡수쇼/ 아들낳고 딸낳고/ 미역국에 밥한술!'. 샘물 잘 나라는 기원의 말을 꽹과리며 장구며 북 등의 악기로 리듬을 맞추는 것이다. 리듬 패턴의 첫머리에는 징을 쳐서 단위를 구분한다. 징 치는 개수를 따져 일채, 이채, 삼채, 오채 등으로 부른다. '채'는 한자말 '차(次)'에서 온 말이다. 일정한 순서(차례)라는 함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리듬 패턴들이 모두 사람의 말이나 노래에 따라 규율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문의 말과 몸짓과 절차와 혹은 오랜 역사 동안 체화되어 온 생래적 리듬이며 강박적 이데올로기들이 다층적으로 생성되거나 소멸되고 재구성된 결과들이다. 통칭하여 장단(長短)이라 한다.장단과 선율, 씨줄과 날줄의 직조농악에만 장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은 모두 이 장단이라는 리듬 단위로 설명할 수 있다. 궁중음악에서부터 무속음악, 춤음악은 물론 노래와 몸짓 혹은 호흡과 절차의 층위들이 포괄된다. 지역별, 기능별, 형태별, 소요 악기별 등 천차만별의 구분법이 있다. 이 단위들을 분리하거나 중첩시켜 생성하는 것이 음악이다. 선율과 장단이 그 중심이다. 선율은 소리의 높낮이를 말하고 장단은 리듬의 패턴을 말한다. 선율은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서 위로 직조된 날줄이고 장단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직조된 씨줄이다. 의문이 든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일정한 리듬 패턴을 장단(長短)이라는 이름으로 의미화시키는 이유 말이다. 우리의 전통음악에서 리듬적 특징을 지시하는 용어 중 장단만큼 중요한 게 없다. 하지만 개념 정의나 형식의 분석이 명료하지 않다. 수백명의 학자 혹은 활동가들이 장단에 대해 연구했고 수천개의 결과물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학자들이 쓸데없는 연구를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만큼 장단 생성과 파생의 경로가 다양하다는 뜻이다. 아쉬운 것은 각양의 음악 장단 연구 중 어의적 의미를 톺아본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선율적 특성의 연구에 비하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럴까? 우리 음악의 특성이 장단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장단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 혹은 철학적 의미망에 대해 천착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우리 전통음악의 장단체계를 비교적 내밀하게 분석했던 이보형은, 리듬 문제가 선율의 문제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선입견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는 장단 자체의 난삽하고 애매한 특성에 기인한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기원의 말과 노래와 몸짓과 혹은 그 어떤 음악적 행위들을 일정한 리듬 패턴으로 묶는 것이 선율의 문제란 말인가? 왜 일정한 리듬 패턴을 장단(長短)이라는 이름으로 범주화시켰을까? 남도무속음악의 대가였던 박병천은 굿거리 장단을 설명할 때 늘 '애기어깨걸이'를 강조한다. 구음보로 말하면, '덩기덕 궁 더러러/ 기덕덕기덕 궁 더러러'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것을 '장단이 물린다'고 한다. 장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앞의 4/3박자는 강하게 뒤의 4/3박자는 약하게 구성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 남도굿거리 장단의 기본이다. 이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 리듬을 '애기어깨걸이'라 한다. 음양(陰陽)이니 대삼소삼(大三小三)이니 혹은 고저장단(高低長短)이니 쌍편고요(雙鞭鼓搖)니 하는 따위가 다 같은 말들이다. 이것을 확장해 말하면 판소리의 어단성장(語短聲長)으로 연결된다. 말은 짧게 하고 소리(노래)는 길게 하라는 뜻이다. 일종의 개념 정의다. 판소리가 아니리(창을 하는 중간중간에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이 엮어나가는 사설)와 소리(唱)라는 기본 구성을 갖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모든 리듬 패턴의 중심에 장단(長短)이라는 어의(語義)가 있다. 본래의 말뜻은 '길고 짧다'는 것이다. '긴 것'과 '짧은 것'이라는 함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긴 것'과 '긴 것'이나 '짧은 것'과 '짧은 것'의 반복은 장단이 아니다. '음'과 '양'이요 '남자'와 '여자'요 '대삼'과 '소삼'이어야 장단이다. 서로 다른 것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가장 적절한 예가 '엇모리 장단'이다. 서양음악의 어법으로 말하면 2박과 3박을 뒤섞어 10박을 만드는 리듬 패턴이다. 2박과 3박은 분명히 길이가 다른데 동일한 음가(音價)로 받아들인다. 궁중음악뿐 아니라 농악과 정악의 수많은 혼소박 장단들이 이런 구성을 취한다. 그래서 이보형이 정리한 바에 따라 우리 음악의 특성을 분박(음을 쪼개는 방식)이 아니라 소박(음을 쌓아올리는 방식)이라고들 한다. 왜 다른 것을 같다고 이해하는 것일까?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장단에 남은 이데올로기의 결과들은 소멸의 경로를 밟을 것이다. 주역에서는 대대성이라 하고 인류학에서는 대칭성이라 한다. 이를 율려의 철학으로 풀이했던 이가 근자에 명을 달리한 시인 김지하다. 율려(律呂)는 전통음악의 육률(六律)과 육려(六呂)에서 차용한 개념이긴 하지만, 판소리의 '흰그늘론' 등으로 확장한 의미망이기도 하다. 선율도 중요하지만 우리 음악의 큰 장점은 장단(長短)에 있다. 판소리도 장단의 발전과 더불어 재구성된 장르다. 이를 허투루 여기거나 귀찮아하거나 혹은 업신여겨 말살하는 것은 뿌리와 근본을 버리자는 말과 같다.교과서에서 국악을 없앤다는 소문에 대하여지게장단이란 말이 있다. 지겟작대기로 지게 동발을 치면서 맞추는 장단이다. 쪼빡장단이란 말이 있다. 옹기(물동이)에 물을 절반쯤 채운 후 바가지를 엎어놓고 리듬을 맞추는 것이다. 물허벅장단이라 한다. 너무 지역적이고 촌스러운 이름이어서 부끄럽게 여겨지는가? 여기에서 남도소리의 뿌리 중 하나인 '둥당애타령'이 나왔는데도 말이다. 남도의 흥그레타령에서 여섯박자 육자배기 장단이 나왔고 판소리의 진양조 장단으로 발전했다. 무수한 장단의 이름들이 있다. 서로 다르니 불규칙적이라 한다. 너무 많으니 혼란스럽다 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서로 다른 것을 같다고 여기는 철학적 함의 말이다. 궁중음악이 그렇고 농악이 그러하며 세계적으로 지평을 넓힌 사물놀이가 그렇다. 우리 음악의 힘은 이 다종다양한 생성의 경로와 파생의 길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우리 고유의 장단이나 국악을 어떤 규칙 예컨대 국제표준이나 서양음악에 맞춰 통일시키려 하는 발상은 큰 문제가 있다. 이용식의 주장처럼 연주자의 내관적(emic)인식과 학자들의 외관적(etic) 인식의 구별짓기를 해체할 필요는 있지만, 장단을 비롯한 국악을 통째로 무시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이름으로 고향말 없애고 표준말만 쓰거나, 한국말 없애고 영어를 사용하자는 주장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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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적 기대에 부응한 신앙의 산물, '부적(符籍)'부적(符籍)은 이 땅의 고유 신앙과 함께 계승 발전되어 온 신부(神符)로부터 시작된 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도부(道符)와 불부(佛符) 그리고 신흥종교 태을부(太乙符)가 개입되면서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기능과 형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불운에 대한 방어 목적은 물론이고 행운을 불러들이는 영물(靈物)로서 그리고 신물(神物)과 귀물(鬼物)로서 인식되는 부적은 오늘날 현대인의 삶 속에 보편적 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하여 불안 심리에 대한 극복과 삶의 희망적 기대에 부응한 신앙적 산물로 역할 하게 된 것이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핵가족화로 접어든 삶의 구조 속에서 더해지는 개개인의 불안감과 소외감의 심리에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이 부적이다. 좋지 못한 해로운 액을 미리 막고 이미 침범하였다면 물리치는 제액(除厄)과 이로운 복을 불러들이는 초복(招福) 기능을 갖는 부적은 주술품으로서 방지책과 실용책 기능이 함께 겹쳐 있다. 이른바 불운과 재앙에서 벗어나고 야망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길복 추구 그 자체가 부적이 지닌 가치이다. 이것이 바로 부적이 오랫동안 삶 속에 이어져 온 까닭이다. 불안에 대한 극복 그리고 희망적 기대에 부응한 신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본 책은 부적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더듬어 보고 부적과 설문해자(說文解字)와의 관계성 그리고 도식 및 그에 관한 상징성 및 명령어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이를 위해, 부적의 형태와 재질에 대해 고찰하고, 부적의 실용 형태를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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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39)<br>분청귀얄잔편정겨운 대화라도 나누어 보고만 싶어지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 용어 중 킨츠기란 것이 있다. 일본말이다. 금이 가거나 깨지거나 파손된 부분을 옻으로 붙이고 수리된 곳을 금색 은색 붉은색 등으로 장식하는 수리 기법을 말한다. 요비츠기란 말도 있다. 이 것은 깨지거나 훼손된 부분을 아예 다른 도자기 파편을 붙여 수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남쪽 일부에서 킨츠기란 용어를 쓰고 있고 실물도 더러 볼 수 있다. 훼손된 부분을 같은 종류의 도편을 이용해 접합해 수리한 것들인데, 진해 두동리 다완이나 분청덤벙에서 그런 예를 더러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킨츠기보다는 요비츠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요비츠기의 경우 백자에 청자를 대입시킨다던가 해서 전혀 색다른 이질감 속의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여기 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여하튼 킨츠기건 요비츠기건 손상된 기물을 천대시 하지 않고 새로운 미감을 찾아내려는 노력이야말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근래 구입한 분청귀얄잔편은 킨츠기일까 요비츠기일까. 같은 종류의 분청으로 수리를 했으니 킨츠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기물을 붙인 것이니 요비츠기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듯 싶다. 분청귀얄잔편은 고흥 운대리 산이다. 굽은 5Cm고 입지름은 넓은 쪽이 13.5에 좁은 쪽이 11Cm로 깔때기 같은 일그러진 모습이다. 굽은 내화토빚음받침에 주변은 암갈색이다. 분은 일차적으로 엷게 칠한 후 그 위 입술 부위에 다시 두터운 귀얄을 한 듯 백토가 흘러내린 부분도 보인다. 안쪽도 같은 구조다. 암갈색의 내저에는 내화토빚음받침의 흔적이 보이며 귀얄을 엷게 칠한 부분과 짙게 칠한 부분이 겹쳐 보인다. 손상을 입은 입술 부위는 다른 분청편을 붙여 옻으로 수리를 해놓고 있다. 분청귀얄잔편은 앞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일그러진 모습이다. 따라서 흡사 음료를 따르기 위해 일부러 한 쪽을 찌그러지게 만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암갈색의 바탕과 귀얄이 엷은 곳과 짙은 부분이 어울려 경색이 뛰어나다. 따라서 향기로운 차라도 한 잔 이곳에다 마시다 보면 그야말로 맛과 멋과 향기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찻자리가 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불량품에 불과한 손상 입은 기명에 다른 기물을 붙여 정성스럽게 수리를 한 것도 그런 찻잔으로서의 역할과 쓰임을 염두에 두고 배려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청자든 분청이든 백자든 완전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딘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 것은 그 것대로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많은 세월에 걸쳐 부대끼다 보면 다소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것들조차도 보듬어 안고 아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조금만 손상이 있어도 기피 현상이 너무도 심한 것이 오늘의 추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도 이제 킨츠기나 요지츠기에 대한 관심을 가져 보아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분청귀얄잔편을 다시 한 번 선입감 없이 바라보자.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분청귀얄잔편은 너무도 경색이 아름답지 않은가. 이 잔에 향내 나는 차라도 한 잔 따라 마시며 그 누군가와 정겨운 대화라도 나누어 보고만 싶어지는 그런 아쉽고 그리운 시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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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87)춘천아 봉의산아 너 잘 있거라 신연강 뱃머리가 하직일세 싸리재 아흔 아홉구비 우리 복병 삼악산아 우리 군대를 보호해다오 동녘에 비친 달아 우리 군대 명랑하게 비추어 다오 잊지 말라 명예도 지위도 버리고 이 강산 굳게 지켜 싸워다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춘천의병아리랑을 쓰니 때는 갑진춘사월이라 한얼이종선 감상 의병(義兵)이란 나라가 외세의 침입으로 위험에 처하고 관군이 무력할 때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적과 싸운 민병(民兵)을 말한다. 당연히 국가의 군대가 강건하면 의병은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있었지만, 특히 조선조 말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수많은 외침을 겪으며 의병이 일어났다. 농사를 짓던 백성들이 의병에 참여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눈물 나는 역사는 국가가 얼마나 허술하게 운영되었느냐는 반증이기도 하다. 남이 나를 칠 때는 그만한 빌미를 스스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만만하니까 쳐들어 온 것 아닌가. ‘맹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人必自侮然後 人侮之 (인필자모연후 인모지) 家必自毁以後 人毁之 (가필자훼이후 인훼지) 國必自伐以後 人伐之 (국필자벌이후 인벌지)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 남이 그를 업신여기고 집안도 스스로 헐뜯은 뒤에 남이 그 집을 훼손하며 나라는 안에서 무너진 후에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치는 것이다. 국가의 허술한 경영이 백성들의 부질없는 피와 눈물을 부른다. 개인이나 국가나 자강불식(自强不息)할 일이다. 의병 나가는 자식의 안전을 삼악산과 밝은 달에 하염없이 빈다. 끝내 나라를 지켜내고 부디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어미의 간절한 심정을 처연한 마음으로 옮겼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